[식민지역사박물관 개관 릴레이 응원영상] – 13. 심정섭 선생
식민지역사박물관 개관 릴레이 13번째! 심정섭 선생님의 응원영상
‘친일인명사전’ 발간의 기적을 이어 2018년 8월 29일,
다시 시민들의 힘으로 ‘식민지역사박물관’이 문을 엽니다.
[식민지역사박물관 개관 릴레이 응원영상]
☞응원영상 – 4. 박주민 의원과 김광진·정청래 전 의원
식민지역사박물관 개관 릴레이 13번째! 심정섭 선생님의 응원영상
‘친일인명사전’ 발간의 기적을 이어 2018년 8월 29일,
다시 시민들의 힘으로 ‘식민지역사박물관’이 문을 엽니다.
[식민지역사박물관 개관 릴레이 응원영상]
☞응원영상 – 4. 박주민 의원과 김광진·정청래 전 의원
[신용카드, CMS (월분납 포함)]
(주)미궁365 10만원 강정인 2만원 김광훈 1만원 김도윤 1만원 김봉천 1만원 김영화 1만원 김영훈 1만원 김용범 3만원 김원석 1만원 김윤철 1만원 김인규 1만원 김점구 1만원 류사영 1만원 박기석 1만원 박동진 5만원 박정우 1만원 박중열 1만원 방선희 2만원 부선정 1만원 서정숙 10만원 서하람 2만원 설광호 2만원 성명희 1만원 신국현 2만원 심경주 1만원 양경희 1만원 양창민 1만원 여양구 10만원 오혜림 1만원 우기동 1만원 원종형 2만원 유정완 1만원 윤현지 1만원 이경민 3만원 이성연 1만원 이은경 1만원 이종민 1만원 이진호 3만원 이창용 1만원 이태영 1만원 이효진 1만원 임승현 10만원 장혜주 1만원 정기용 1만원 정승윤 1만원 정윤숙 1만원 조규봉 5천원 조성민 3만원 조재광 2만원 조현곤 10만원 조현혁 2만원 조형래 1만원 채주병 1만원 최인주 1만원 최환영 5만원 현상진 1만원 홍현정 3만원
[온라인, 계좌이체 등]
강진우 10만원 김기호 10만원 김동호 10만원 김동훈 1만원 김면 10만원 김문식 8만원 김서형 2만5천원 김수정 10만원 김영태 10만원 김용 5만원 김이진 10만원 김재갑 50만원 김태운 2만원 김해란 10만원 남양강 50만원 남영주 20만원 노수영 300만원 노재원 30만원 도순환 10만원 동정남 10만원 박남순 20만원 박영순 5만원 박장성 2만원 박진부 10만원 벌꿀모음 9만8천원 송연옥 10만원 송차선 50만원 시민역사관 5만원 신명옥 30만원 신제균 10만원 양재규 5만원 오기택 10만원 오영숙 10만원 오키나와한의비모임 102만1천원 유연정 20만1천706원 유정열 10만원 유태성 1만원 윤옥중 100만원 윤정옥 3만원 이금수 30만원 이동은 10만원 이동철 10만원 이명구 10만원 이미숙 10만원 이범영 5만원 이봉돈 1만원 이선미 3만원 이선영 10만원 이성순 10만원 이영기 50만원 이영희 10만원 이윤기 10만원 이주행+이건일+이건우 30만원 이창신 10만원 이춘자 30만원 이혜경 10만원 이혜정 5만원 이홍석 5만원 임승미 2만원 임창완 10만원 전진성 10만원 정수연 10만원 정숙희 10만원 정윤현 10만원 정혜영 10만원 조시현 10만원 차기호 10만원 최낙훈 50만원 최두용 10만원 최상남 10만원 최인재 50만원 하수영 10만원 한광수 5만원 한상기 10만원 한지훈 20만원 함형준 10만원 허장수 10만원 홍정미 10만원 홍지훈 10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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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호에 소개할 자료는 1907년 4월 20일 고종이 헤이그 특사에게 준 위임장이라고 알려진 문서이다.
1905년 11월 17일, 대한제국은 일제의 강압으로 체결된 ‘을사조약’으로 실질적인 주권을 잃게 되었다. ‘을사조약’ 체결 소식이 전해지자 전국에서는 의병들이 들불처럼 일어났으며, 나라의 자주 독립을 호소하며 자결하거나 친일 매국노의 처단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거세졌다.
고종은 1907년 6월 15일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제2차 만국평화회의가 개최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국권회복의 염원을 국제사회에 호소하고자 회의 참가를 요청하였다. 또한 프랑스・벨기에 주재공사 민영찬에게 이 문제를 협의하라는 훈령을 내렸고, 러일전쟁 이후 불어학교 교사로 활동하던 마르텔을 비밀리에 베이징에 파견하여 베이징 주재 러시아 공사를 만나 만국평화회의에 대한제국 대표를 초청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결국 네덜란드로부터 초청장을 받은 대한제국은 12번째 초청국으로 만국평화회의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일본은 만국평화회의에 외교권을 상실한 국가가 회의에 참가한 전례가 없다는 이유로 한국 참가를 반대했다. 러시아는 러일전쟁 이후에도 한국 독립에 대한 국제사회의 승인을 얻어내 한국에 대한 영향력을 유지하고자 대한제국을 만국평화회의에 초청하려고 하였으나 결국 일본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한다는 방침을 정하고 대한제국을 초청하는 것을 포기했다.
한편 1905년 9월 고종의 밀사인 이용익이 러시아로 건너가 국내와 비밀접촉을 하면서 만국평화회의를 준비하고 있었다. 국내에서는 상동청년회와 연결되어 이동녕, 이시영, 안창호, 김구 등이 이준과 이상설을 특사로 보내기로 의견을 모아 고종에게 특사 파견을 요청하였다. 이를 받아들여 고종은 이상설, 이준, 이위종 세 명의 특사를 헤이그 평화회의에 파견하였다.
이때 고종이 특사에게 위임장을 전해준 것으로 알려졌는데, 미국 뉴욕에서 발행된 <The Independent> 1907년 8월 22일자(주간, 제3064호), 「A Plea for Korea(By Prince Ye We
Chong)」에 이위종이 쓴 호소문과 그가 소지하고 있던 신임장의 사본 및 번역문이 게재되어 있다. 여기에는 “1907년 4월 20일 한양 경성 경운궁에서 친히 서명하고 옥새를 찍노라”고 적혀 있다. 연구소가 소장한 ‘위임장’은 ????The Independent????에 소개된 것을 해방 이후 복제한 것으로 추정된다.
1907년 6월 25일 헤이그에 도착한 세 특사는 6월 27일자로 서명된 각국 대표에게 보내는 탄원서를 지니고 활동을 개시했다. 이들은 중재재판을 취급하는 만국평화회의 제1분과위원회를 찾아가 한국문제를 다루어 줄 것을 요청하고, 일본을 제외한 40여 개 참가국에게 탄원서를 배포하였으며 영국·미국·프랑스·독일의 대표위원을 만나 한국 독립을 지원해 줄 것을 강력히 호소하였다.
그러나 당시는 일본이 제국주의 열강으로부터 한국에 대한 지배권을 승인 받은 상태였기 때문에 어느 나라도 일본의 반대를 무릅쓰고 한국의 독립을 지원하려 하지 않았다. 일본의 집요한 방해공작과 열강의 냉담한 반응으로 한국독립을 위한 외교활동은 당시 국제관계를 볼 때 성공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결국 특사의 희망과는 달리 만국평화회의는 한국을 철저히 외면했다.
일본은 헤이그특사 파견을 ‘을사조약’ 위반행위로 몰아 7월 22일 고종을 강제 퇴위시켰다. 이준 특사는 현지에서 순국하고 이상설·이위종 두 특사는 망명했다. 그들은 끝내 고국에 돌아오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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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특파위원 전 의정부 참찬 이상설, 전 평리원 검사 이준, 대황제가 칙서를 내리는바 우리나라의 자주독립은 세계 여러 나라가 공인한 것으로 짐이 지난번 여러 나라와 조약을 맺고자 하여 서로 우방으로서 긴밀함을 갖은즉, 이제 세계 여러 나라가 평화를 위하여 한 자리에 모이기에 응당 참석함이 마땅한 것인데 1905년 11월 18일 일본이 우리나라에 대하여 국가 간의 법을 어기고 도리에 어긋난 협박으로 우리의 외교권을 빼앗아 우방과의 외교를 단절케 하였다. 또한 일본의 모욕적인 침략은 이르지 않은 곳이 없을 뿐더러 그 침략의 의도는 인도자의 도리에도 어긋나는 것이다. 짐의 생각이 이에 미치니 참으로 가슴 아픔을 느끼는 바이다. 이에 여기 종2품 전 의정부 참찬 이상설, 전 평리원 검사 이준, 전 주러시아공사관 참서관 이위종을 특파하여 네덜란드 헤이그 평화회의에 가서 본국의 모든 실정을 온 세계에 알리고 우리의 외교권을 다시 찾아 여러 우방과의 외교관계를 원만하게 하도록 바라노라. 짐이 생각건대 특사들의 성품이 충실하고 강직하여 이번 일을 수행하는 데 가장 적임자인 줄 안다. 대황제 수결 황제어새 |
∷ 강동민 자료팀장
[식민지역사박물관 개관 기념 답사 동행기] 이방인이 아니면 들어갈 수 없는 땅, 용산
용산은 오랜 시간 ‘남의 땅’이었다. 1882년 임오군란 당시 청나라 군대가 주둔한 것을 시작으로 여러 번 주인이 바뀌었다. 일제강점기에는 일본군이, 일본이 물러간 뒤에는 미군이 주둔했다. 그리고 지난 6월, ‘전 주인’이었던 주한미군사령부가 경기도 평택으로 이전하면서 비로소 용산은 대한민국의 품으로 돌아왔다.
주한미군사령부의 이전과 함께 용산의 역사적 가치를 되살리기 위한 움직임도 일고 있다. 최근 국가보훈처는 백범 김구 선생을 비롯한 독립운동가들의 묘역이 자리 잡고 있는 효창공원을 독립기념공원으로 만들자는 방안을 밝혔다. 지난 8월 29일에는 숙명여대를 사이에 두고 효창공원 건너편에 ‘식민지역사박물관’이 문을 열었다.

▲ 일제 식민통치의 흔적이 남겨진 용산에 세워진 “식민지역사박물관” ⓒ 김경준
지난 1일, 식민지역사박물관은 개관 후 첫 행보로 용산에 얽힌 일제 침략의 역사를 시민들과 함께 짚어보는 ‘특별답사’를 진행했다. 답사에는 30명이 넘는 시민들이 참여했다. 뜻 깊은 이번 답사에 기자도 동행했다.

▲ 식민지역사박물관 개관 기념 특별답사에 참여한 시민들의 모습 ⓒ 김경준
일제에 의해 ‘군사기지’가 된 용산
일제강점기 당시 용산은 ‘군사기지’였다. 용산의 군사기지화는 1904년 일제가 러일전쟁을 준비하면서 시작됐다. 당시 일제는 이곳을 군용철도인 경의선의 분기점으로 설정한 뒤, 각종 군용시설물을 설치했다.
용산에는 제20사단 제39여단 보병 제78연대·기병 제28연대·야포병 제26연대·제40여단 보병 제79연대 등 일본군 4개 연대가 주둔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조선에 주둔하고 있는 이들을 지휘하기 위해 1908년 10월에는 ‘조선주차군사령부’가 설치됐다.

▲ 용산 연병장에서 관병식을 벌이는 일본군대의 모습 ⓒ 민족문제연구소 제공
이후 상주군 편제로 바뀌면서 1918년 6월부터는 ‘조선군사령부’로 개칭됐다. 조선군 사령관은 한반도 전역에 배치된 일본군을 지휘하는 총사령관으로 조선총독에 버금가는 권세를 누렸다. 조선군 사령관 출신으로 조선총독에 부임한 사례도 적지 않았다. 2대 조선총독이었던 하세가와 요시미치, 7대 조선총독 미나미 지로, 9대 조선총독 고이소 구니아키 등이 대표적이다.
지금의 용산우체국 옆으로 200미터가량 곧게 뻗은 도로의 끝에 조선군사령부 청사가 있었다. 해방 후에는 미군기지가 조성되면서 자연스레 청사가 멸실됐다고 한다. 청사는 없어졌어도 당시의 흔적을 증명하는 콘크리트 벙커 건물은 여전히 남아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아직까지는 미군이 완전히 철수하지 않은 상태라 단단한 출입문으로 막혀 안을 들여다볼 수조차 없었다.

▲ 용산에 있던 조선군사령부 청사의 모습 ⓒ 민족문제연구소 제공

▲ 과거 조선군사령부 청사가 있었던 자리엔 미군기지가 들어서 있다. 지난 6월, 주한미군사령부가 경기 평택으로 이전했지만 아직 이곳의 출입구는 굳게 닫혀있다. ⓒ 김경준
코앞에 그 흔적이 있지만, 보지도 못하고 돌아서야 하는 발걸음은 무거웠다. 현장해설을 맡은 이순우 민족문제연구소 책임연구원은 실망하는 답사단원들에게 “그래도 과거에는 사진도 못 찍게 하고, 이 근처도 못 오게 했었다”라면서 위로의 말을 건넸다.
조선군사령부 건너편에는 조선총독관저도 있었다. 일반적으로 총독 관저하면 남산 왜성대 부근에 있었던 통감 관저나 조선총독부 뒤편 경무대를 떠올리기 쉽다. 그러나 용산에도 또 다른 총독 관저가 있었다.
하지만 이곳은 역대 조선총독 그 누구도 집무 혹은 거주공간으로 사용하지 않았다고 한다. 유지관리비용이 지나치게 많이 들고, 시내와 멀리 떨어져 업무상 불편이 크다는 게 이유였다. 대신 연회를 위한 공간 혹은 일본 황족 및 서양 귀빈을 위한 숙소로 드문드문 활용됐다고 전해진다. 총독 관저는 한국전쟁 당시 반파되면서 철거됐다. 총독 관저가 있던 터 역시 미군기지 안에 있어 그 흔적을 확인할 수는 없었다.
쇼핑객·여행객으로 분주한 용산역 광장… 그 속에 숨은 사연
답사단이 용산역 광장에 도착했을 때, 광장은 주말을 맞아 쇼핑객과 관광객 그리고 먼 길 떠나는 열차 승객들로 북적였다. 지금은 평화롭기 짝이 없는 공간이지만, 이곳 역시 알고 보면 한 많고 사연 많은 공간이다. 침략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전장으로 떠나는 일본군 병력들이 모두 이곳에서 출정식을 거행했기 때문이다.
징용·징병으로 끌려간 강제동원 피해자들 역시 이곳에서 그리운 고국 땅, 가족과 눈물의 작별을 해야만 했다. 최소 100만 명이 넘는 조선인이 용산역 광장에 모여 열차를 타고 군함도, 사할린, 쿠릴열도, 남양군도로 끌려갔다.
가슴 아픈 역사를 잊지 않기 위한 시민단체들의 노력으로 지난해 8월에는 용산역 광장 한 켠에 ‘강제징용 노동자상’이 세워졌다. 답사단 일행이 노동자상을 둘러싸고 광장에 얽힌 구슬픈 사연을 듣는 동안, 지나가는 시민들도 관심 갖고 노동자상 옆의 안내 문구를 읽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 2017년 8월에 용산역 광장에 세워진 “강제징용 노동자상”. 일제강점기 당시 용산역 광장은 강제동원 피해자들이 전장으로 끌려가기 위해 집결했던 장소였다. ⓒ 김경준

▲ 강제징용 노동자상 앞에서 설명을 듣고 있는 답사단원들의 모습 ⓒ 김경준
철도노동 순직자들을 위한 위령제의 진실
철도 건설과 함께 용산을 철도 행정의 거점으로 삼고자 했던 일제는 용산역을 중심으로 철도관리국, 철도병원, 철도구락부, 철도원양성소 등 철도 관련 시설을 대거 조성했다.
용산역 맞은 편에 있는 낡은 건물은 1928년에 지어진 ‘용산 철도병원’이다. 철도공사 도중 다친 노동자들을 치료할 목적으로 지어진 이 병원은 해방 후 중앙대학교에서 위탁 경영하다가 중앙대병원이 흑석동으로 이전하면서 빈 건물로 남게 됐다. 답사에 참여한 한 시민의 입에서 “만날 지나다니면서 도대체 무슨 건물일까 궁금했었는데…” 하는 읊조림이 나지막하게 들려왔다.

▲ 1928년에 세워진 “용산철도병원”. 해방 후 중앙대에서 위탁 경영하다가 현재는 주인 없는 빈 건물로 방치되고 있다. ⓒ 김경준
이순우 연구원은 “이 건물은 2008년에 등록문화재로 등재됐으니 철거하지는 않을 것”이라면서 “계속 빈 건물로 방치할 수는 없을 테고, 옛 서울역사 건물처럼 시민들을 위한 문화공간으로 활용해야 할 것”이라고 정부 당국의 관심을 촉구했다.
용산역에서 이촌역으로 향하는 길 중간에는 철도선형과 서빙고로 도로가 만들어낸 원뿔 모양의 지형이 나타난다. 과거 이곳엔 ‘용산철도공원’이 있었다. 일제는 1915년 철도공원 안에 철도순직자조혼비(鐵道殉職者弔魂碑)를 세우고 매년 순직한 철도노동자들을 위한 조혼제(위령제)를 지냈다.
현재 이 비석은 존재하지 않지만, 위령제의 전통은 지금까지도 이어져오고 있다. 이 연구원은 “유족들 입장에서야 가족에 대한 위령제를 지내는 게 당연한 일”이라면서도 “위령제를 지내는 전통이 일제 때부터 시작돼 이어져 왔다는 사실은 기억할 필요가 있다”라고 말했다.

▲ 과거 철도공원이 있었던 자리 ⓒ 김경준

▲ 용산철도공원이 있던 자리에서 “철도순직자조혼비” 사진을 소개하는 이순우 민족문제연구소 책임연구원 ⓒ 김경준
개성에 있던 비석은 왜 용산으로 왔을까
용산역 뒤편에 있는 철도회관 입구에는 존재조차 잘 알려지지 않은 작은 비석이 있다. ‘연복사탑중창비'(演福寺塔重創碑)다. 조선 태조 이성계의 공덕으로 건립된 연복사 오층불탑의 건립 내력을 담은 비석이다.
본래 이 비석의 소재지는 경기도 개성이었다. 그런데 어떤 이유에선지 일제에 의해 용산의 철도구락부 구역으로 옮겨졌다. 이후 이 비석은 한동안 학계에서 소재불명으로 알려졌었다. 그러나 2012년 우연히 길을 가다 이 비석을 발견한 한 시민이 블로그에 포스팅하면서 그 존재가 세상에 드러났다.

▲ 용산역사 뒷편 철도회관 입구에 자리잡고 있는 “연복사탑중창비” ⓒ 김경준
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서울 한복판에 자리 잡고 있던 비석이 긴 세월 동안 소재불명이었다는 사실도 우습지만, 자신이 있던 자리에서 강제로 쫓겨나 엉뚱한 곳에서 방치돼야만 했던 비석의 신세도 처량하기만 했다. 일제에 의한 우리 문화재 수난사의 한 대목을 보여주는 증거라 하겠다.
생태공원보다는 역사공원이 더 어울리지 않을까
올해 광복절 경축식이 열린 용산 국립중앙박물관은 과거 조선에 주둔한 일본군이 연병장으로 사용하던 공간이었다. 당시 문재인 대통령은 “오늘 광복절을 기념하기 위해 우리가 함께 하고 있는 이곳은 114년 만에 국민의 품으로 돌아와 비로소 온전히 우리 땅이 된 서울의 심장부, 용산”이라며 경축식을 용산에서 거행하는 까닭을 밝혔다. 그리고 미군이 떠나간 자리에 “미국 뉴욕의 센트럴 파크와 같은 자연생태공원을 조성하겠다”라고 천명했다.
미군기지 자리에 도심 속 생태공원을 조성하겠다는 구상에 이견을 제시하고픈 생각은 없다. 그러나 용산을 식민지 침략의 역사를 기념하는 공간으로 활용하겠다는 메시지가 없었던 점은 못내 아쉽기만 하다.

▲ KT 용산지사 뒷편에 위치한 서울교 원불교당. 일제강점기 당시 이 자리엔 용광서(龍光寺)라는 절이 있었는데, 침략전쟁을 수행하다 죽은 전몰장병의 유골을 안치했던 사찰이었다. ⓒ 김경준

▲ 남영삼거리 앞에 위치한 구 경룡관(京龍館) 터. 1921년에 세워진 경룡관은 일본인 전용극장이었다. 일제 말기에 성남극장으로 이름을 바꾸었는데, 해방 이후까지도 같은 이름으로 운영되다가 2003년에 폐관했다. ⓒ 김경준
용산은 일제 식민통치의 상징과도 같은 지역이다. 생태공원 조성에 앞서 용산에 깃든 치욕의 역사를 기념하는 역사공원 조성이 우선돼야 한다. 아픈 과거를 기억하면서도 미래를 향해 나아가자고 다짐하는 뜻에서 미군이 떠나간 바로 그 자리에 진실과 화해를 위한 기념공원을 조성하는 건 어떨까. 식민통치의 본산이나 다름 없던 용산에 식민지역사박물관을 세운 이유가 그렇듯이 말이다.
<2018-09-03> 오마이뉴스
☞기사원문: 붐비는 용산역 광장, 그 속에 숨은 한맺힌 사실
정세훈 민예총 이사장 권한대행

이제, 친일을 청산하자. 독재와 억압, 불의와 부정의 토대인 친일을 청산하자. 그리하여 이 땅에 70년 넘게 채워진 질곡의 사슬을 풀고 민주와 정의, 화합과 평등이 넘치는 새로운 역사적 전환을 만들자.
미국을 등에 업은 이승만의 친미독재, 박정희와 전두환의 무자비한 군사독재, 그리고 이들의 반민족, 반민주 독재권력을 이어받고자 했던 이명박과 박근혜의 국민분열, 친일반역, 국정농단 정권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해방 이후 친일세력들의 비열한 통치와 압제 속에서 살았다. 이러한 체제가 반복되어 온 것은 일제 식민지 지배세력들의 인적, 제도적 잔재를 제대로 청산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일제 식민지와 친일, 그 뿌리 깊은 잔재는 오늘날 정치, 사회, 학문, 자본, 언론, 예술 등 모든 곳곳, 요소요소에 악의 고리로 남아있다.
1919년 3·1독립운동뿐만이 아니라 1960년 4·19혁명, 1980년 5·18민주화운동, 1987년 6·10민주항쟁은 모두 ‘친일세력의 근원을 타도하기 위한 민중들의 항쟁’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바로 그 최후의 정점에 이승만을 몰아낸 민주혁명의 힘이 박근혜를 권력에서 끌어내린 촛불혁명으로 타올랐다.
일제 강점기 당시, 조선의 국권을 빼앗은 일제보다 일제에 빌붙어 수족행위를 하고 나팔수 노릇을 한 친일파가 더욱 악랄했다는 사실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다. 친일파들은 민중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재산을 탈취하고, 항일투사들을 잡아들이고 살해하는 일에 앞장섰다. 또한 학도병, 강제징병, 강제징용, 위안부 모집의 선동대가 되는 온갖 악행을 도맡아 저질렀다.
1948년, 이들을 처벌하기 위해 ‘반민족행위처벌법’이 제정되고 반민특위가 만들어졌다. 반민특위는 구체적인 죄목으로 친일파들에 대한 단죄에 나섰다. 한일합방에 적극 협력하거나 한국의 주권을 침해하는 조항에 조인하거나 모의한 자, 독립운동자나 그 가족을 살상 박해하거나 지휘한 자, 일본 정부로부터 작위를 받거나 제국의회 의원이 된 자, 습작(襲爵)한 자, 중추원 간부, 칙임관 이상 관리, 밀정, 독립운동 방해단체 간부, 군경찰 간부, 군수공업 경영자, 관리 중 악질적 죄질이 현저한 자, 도(道)나 부(府)의 자문기관 또는 의결기관 의원 중 현저한 반민족 행위자, 종교 사회 문화 경제 등 각 부문에서 반민족적 행위자, 일제에 아부하여 민족에 위해(危害)를 가한 자, 고등관 3등급 이상, 훈 5등급 이상 관공리, 헌병, 경찰, 헌병보, 고등경찰 등이 처벌 대상이었다. 그러나 이승만의 방해로 인하여 반민특위는 해산되고 친일파는 단 한 명도 단죄되지 않았다.
이렇게 버젓이 살아남은 친일파는 이승만 정권하에서 더욱 승승장구하였다. 군사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박정희 치하에서도 그들은 기득권을 계속 유지했다. 나라의 권력은 오로지 친일파의 것이 되고 말았다. 그들의 후광을 입은 그들의 후손들도 역시 정치, 경제, 사회, 학술 등 모든 분야에서 현재까지 권력을 누리고 있다.
문단을 예로 들어보자. ????친일인명사전????(2009)에 오른 친일문인은 곽종원, 김기진, 김동인, 김동환, 김문집, 김사영, 김성민, 김억, 김영일, 김용제, 김종한, 노천명, 모윤숙, 박영희, 방인근, 백철, 서정주, 오용순, 유진오, 윤두헌, 윤해영, 이광수, 이무영, 이석훈, 이원수, 이윤기, 이찬, 임학수, 장덕조, 장혁주, 정비석, 정인섭, 정인택, 조연현, 조용만, 조우식, 주요한, 채만식, 최재서, 최정희 등 무려 40인에 이른다.
이 중에서도 미당 서정주는 가장 대표적인 친일, 친독재 문인이다. 서정주야말로 친일에서부터 친독재까지 철저한 권력의 시녀였고, 죽을 때까지 단 한 마디의 반성도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는 한국문단의 거대한 권력이 되었다. 해방 이후에도 ‘살아남은’ 그는 대학강단에서, 문단에서, 관계에서, 수없이 많은 제자들을 키우고 또 그 제자들은 그를 스승으로 우러러 받들었다. 시인으로서 무소불위의 절대 권력자였던 서정주는 죽어서도 그 권력을 문단의 후학들에게 그대로 넘겼다.
반민족적, 반문학적 친일의 과오가 명백한 그를 기리는 미당문학상이 만들어지고, 바로 그 문학상이 대한민국 최고의 권위와 명예를 누리고 있는 현상이 그것을 증거한다. 이런 기이함은 미당 서정주를 ‘국민시인’, ‘민족시인’으로 칭송한다. 심지어는 올해 여름에 발간한 미당전집 편집위원 중의 한 사람은 미당을 ‘민중시인’이라고까지 말했다. 북한의 3대 세습 정권에서도 있을 수 없는 망언이었다.
미당은 1942년 7월 ‘다츠시로 시즈오’라는 창씨 개명한 이름으로 평론 ‘시의 이야기’를 ????매일신보????에 발표하면서 친일문학 작품을 썼다. 이미 여러 경로로 밝혀진 바와 같이 친일어용문학지인 ????국민시가????와 ????국민문학????의 편집 일을 하면서 본격적으로 친일작품들을 양산했다. 이를 통해 태평양전쟁을 성전(聖戰)으로 미화하고 징병의 신성화와 정당화는 물론 학병지원을 권유했으며 일제의 군국주의 파시즘에 적극 동조했다.
미당이 남긴 작품들이 정말 문학적으로 긍정할 수 있을 만큼 뛰어난 작품인지 그 평가는 차치하고, 그는 민족의 범죄자에 지나지 않는 인물이었음은 분명하다. 이 한 가지 이유만으로도 그를 문학상 등으로 기리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그가 지어낸 천여 편의 시들도 ‘겨레의 말’이 아니라 일종의 기가 막힌 언어도단일 뿐이다.
인간에게는 누구나 인류의 도덕적 보편성과 정의를 따르고자 하는 인간만이 지닐 수 있는 가치관이 있다. 그런데 미당은, 인간만이 지닐 수 있는 그러한 가장 기본적인 가치관마저 결여되어 있다. 한 마디로 인간 본연의 품성이 그릇된 자였다. 그릇됨을 덮고 가치관마저 전도시키는 그의 문학은 우리 모두를 치욕스럽게 만드는 것이다.
원숭이가 손목이 잘려도 바나나를 놓지 않듯, 권력도 움켜쥔 힘을 쉽사리 놓으려고 하지 않는다. 자기 반성과 성찰을 바라기도 하지만 스스로는 절대로 바뀌지 않는다. 정치권력과 자본권력, 사회권력과 관료권력, 종교권력과 문화권력 등이 그러하듯이 문학권력도 예외는 아니다. 권력은 물러났어도 추종하는 세력들에게 승계되고 이어가고 있다. 지배권력은 다른 피지배세력이 그들의 권력을 쟁취하기 전까지 유구한 것이다.
미당이 생전에 지닌 문단권력은 현재 그의 추종세력들에게 전이되었다. 추종자들에게는 미당의 매국적인 친일문학 행위도, 군부독재를 찬양한 행위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런 점을 가리고 숨기기 위해 미당문학상으로 미화하고 있다. 미당 서정주, 그의 행적을 문인이 아니고 정치인에 대입시켜보면 참으로 소름끼치는 존재다. 그럼에도 미당을 추종하고 옹호하는 무리들이 미당을 기리는 것은 미당이 건재해야만 자신들도 건재하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미당문학상에 대한 비판 또는 폐지의 주장은 고사하고 그 상을 심사하고 수상하는 사람들이 우선 자기 검열을 철저히 해야 할 것이다. 사고할 수 있는 인간으로서 옳고 그름을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은 그들에게도 있을 터이다.
동서고금의 예술을 살펴보면, 정치권력과 결합한 예술은 차후에 거의 모든 평가가 허구였음이 드러난다. 대다수 예술에 대한 평가는 당대가 아니라 후대에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다. 우리의 정치와 사회, 문화예술 등은 일제치하에서 해방된 지 반세기를 넘겨 한 세기를 바라보고 있지만, 아직도 친일세력들의 영향력과 권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렇게 된 이유는 우리가 일제로부터 주권을 되찾는 독립은 했으나 아직도 정신적 독립은 온전하게 하지 못한 결과다.
완전한 독립, 그리고 온전한 민주주의를 위해서 이제, 친일을 청산하자. 친일파와 그들의 후손들이 득실거리는 시대, 누군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불의의 역사를 모른 체 하면 대대손손 청사에 물려줄 정의의 역사는 사라진다.
편집자주 시인 정세훈은 1955년 충남 홍성 출생으로 1989년 ????노동해방문학????에 작품을 발표하며 등단했다. 작품에는 시집 〈그 옛날 별들이 생각났다〉 〈나는 죽어 저 하늘에 뿌려지지 말아라〉 〈부평 4공단 여공〉 〈몸의 중심〉과 장편동화집 〈세상 밖으로 나온 꼬마송사리 큰눈이〉 등이 있고 현재 리얼리스트100 상임위원, 한국작가회의 이사, 한국민예총 이사장 권한대행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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