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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석동 한강변 언덕 위에 한강신사가 건립된 까닭은? – 서울 지역 곳곳에 포진한 일제 침략신사들의 흔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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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석동 한강변 언덕 위에 한강신사가 건립된 까닭은? – 서울 지역 곳곳에 포진한 일제 침략신사들의 흔적

익명 (미확인) | 월, 2018/07/02- 17:18

식민지비망록 37

흑석동 한강변 언덕 위에 한강신사가 건립된 까닭은?
– 서울 지역 곳곳에 포진한 일제 침략신사들의 흔적

 

이순우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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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한강신사 터를 활용하여 지난 1994년에 재건된 ‘효사정’의 모습.

 

한강대교를 남쪽으로 건너 서울현충원 방향으로 500미터 남짓 걷다보면, 지하철 9호선 흑석역(중앙대입구)에 조금 못 미쳐 한강변 쪽으로 약간 솟아오른 작은 봉우리 하나를 만나게 된다. 1955년 6월 25일에 건립된 학도의용병현충비(學徒義勇兵顯忠碑) 앞을 지나 돌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효사정(孝思亭)이라는 이름의 정자가 나타난다.
효사정은 원래 세종 때 우의정을 지낸 공숙공(恭肅公) 노한(盧閈, 1376~1443)의 별서(別墅)였다고 전해지는 유적이다. 그는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시묘살이를 했던 곳에다 정자를 짓고 때때로 이곳에 올라 모친을 그리워했고, 멀리 개성 땅에 묘지를 쓴 부친을 추모했다고 하여 ‘효사정’이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경기금천현(衿川縣)‘누정(樓亭)’조에“노량나루터 남쪽 언덕에 있는 정자”라는 정도의 간략한 내용이 남아 있긴 하나 사실상 이것만으로는 더 이상의 정확한 원위치 고증이 어려운 상태이다.
하지만 지난 1994년에 서울 정도 600년을 맞이하여 이를 기리는 사업의 하나로 한강주변의 유적지를 복원 정비하는 계획이 추진되었고 이때 편의상 부득의하게 지금의 자리를 선정하여 정자를 재건하기에 이르렀다. 이곳이 진짜 효사정 자리인지에 대한 논란을 차치하고라도 이 정자에 오르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강 쪽 전망이 참으로 빼어나다는 점에 공감하게 된다.
그런데 이 장소는 일제강점기를 거치는 내내 ‘한강신사(漢江神社)’라는 시설물이 터를 잡고 있었던 곳이라는 사실도 꼭 함께 기억할 필요가 있다. 후지이 가메와카(藤井龜若)가 펴낸 <경성의광화(京城の光華)>(조선사정조사회,1926)를 보면, 이한강신사의 건립유래가 다음과 같이 정리되어 있다.

 

한강신사는 인도교(人道橋)를 건너 동쪽의 작은 언덕에 숲속에 한줄기 끈과 같은 가느다란 길이 산꼭대기까지 걸쳐 있는데 그 산부리의 약간 높은 상두산령(象頭山嶺)의 영지(靈地)에서 제사를 지낸다. 제신(祭神)은 미야지대사(宮地大社), 코토히라대신(金刀羅大神), 스가와라대신(菅原大神)의 삼신(三神)으로 인도교 가교 청부인(請負人)이던 시키 노부타로(志岐信太郞) 씨가 대정 원년(1912년) 금상폐하(今上陛下, 대정천황을 말함)의 즉위를 기념하고 아울러 고국을 멀리 떠나온 재선민(在鮮民: 조선 거주 일본인)을 비롯하여 동포선인(同胞鮮人)에게 경신숭조(敬神崇祖)의 미풍을 가르치려는 돈독한 뜻에 따라 이곳 산자수명한 정지(淨地)를 택해 사재 십수 만 원을 들여 한강수호의 신으로 삼아 헌립(獻立)한 것이며, 매년 봄가을(5월 4일, 10월 4일)에 행해지는 대제례일에는 내선인의 참배자가 원근에서 운집하여 번잡함이 흡사 대공원의 모습을 보여준다.
섭사(攝社)에는 이나리신사(稻荷神社), 시키신사(志岐神社), 야신신사(矢心神社)를 모시며, 이 지역은 예로부터 영산(靈山)으로서 조선인들이 숭배하던 곳이다. 경내의 바위 사이에는 기이한 한 그루의 소나무가 있다. 와룡송(臥龍松)이라 부르는 유명한 나무로 수령이 수백 년이 넘는 신목(神木)이다.

 

여기에 나오는 시키 노부타로는 1869년생으로 일본 후쿠오카현(福岡縣) 출신이며, 자신의 토목건축회사인 시키구미(志岐組)를 통해 경부철도 속성공사를 비롯한 철도관련 청부업에 주력하여 부를 축적한 인물이었다. 그는 특히 1921년에 조선의 특산물이라고 일컬어지던 천연빙(天然氷), 즉 겨울철 한강 얼음을 채취하여 저장 판매하기 위해 조선천연빙주식회사 및 조선천연빙창고주식회사를 설립하였고, 1936년에 이들 회사와 여타 제빙회사가 조선제빙주식회사(朝鮮製氷株式會社)로 통합 전환한 이후에도 사장의 자리를 지킨 바 있다. 따라서 그는 이래저래 한강과는 많은 인연을 지닌 사람이었던 것으로 풀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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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일보>1934년 12월 2일자에 수록된 토끼사냥 야유대회관련 명수대 주변 약도에는 ‘한강신사’의 위치가 또렷이 표시되어 있다. 오른쪽 아래에 ‘화장사’라고 표시된 사찰은 오늘날 서울현충원 구내에 있는 ‘호국지장사’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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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신사가 자리한 흑석동 한강변의 풍경. (<일본지리대계(조선편)>, 신광사, 1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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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1년 기노시타 사카에가 개발을 주도한 명수대 주택지(현 흑석동)의 전경. 왼쪽으로 보이는 한강변 봉우리 위의 건물이 한강신사이다. (경성전기주식회사, <뻗어가는경성전기>, 1935)

 

이곳 한강신사의 제신으로 언급된 ‘미야지대사’는 일본 후쿠오카 소재 ‘미야지다케신사(宮地嶽神社)’를 말하는데, 시키의 고향에 있는 신사 그 자체가 숭배의 대상이었던 듯하다. 또한 ‘스가와라대신’은 일본 헤이안시대의 정치가 스가와라노 미치자네(菅原道眞)를 말하며, 대개 ‘학문의 신’으로 추앙되는 인물이기도 하다. 그리고 ‘코토히라대신’은 불교에서 일컫는 약사십이신장(藥師十二神將)의 하나이며 원래 인도 갠지즈강에 살았다는 쿰비라(Kumbhira, 蛟龍)에서 유래된 것으로, 일본에서는 바다를 수호하는 신으로 인지되어 일반적으로 선박 안전을 비는 대상으로 자리매김되어 있다. 한강신사가 자리한 봉우리를 일컬어 상두산(象頭山)이라고 한 것은 일본 가가와현(香川縣)에 있는 곤피라산(金刀比羅宮: 신사명)의 소재지에서 그대로 따온 이름으로 받아들여진다.
오카 료스케(岡良助)가 쓴 <경성번창기>(박문사,1915)라는책에는이곳이웅진강신사(熊津江神社)라는 이름으로 소개되어 있는데, 한강신사는 그 이후의 시점에서 고쳐진 명칭인 듯하다. 아무튼 이곳은 일본인의 입장에서 한강 수호의 신으로 삼아 설립된 것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1912년에 그네들의 천황이 등극한 것을 기념하는 뜻에서 이러한 신사가 탄생하게 되었다는 점에도 깊이 유념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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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총독부관보>1934년 5월 14일자에는 한강신사가 ‘신메이신사’라는 이름으로 새로 설립허가를 받은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그런데 일제패망기에 대륙신도연맹(大陸神道聯盟)에서 엮어낸 <대륙신사대관(大陸神社大觀)>(1941)을 보면, 여기에는 한강신사의 명칭이 ‘神社’가 아닌 ‘神祠’로, 이곳의 제신(祭神)이 ‘천조대신(天照大神, 아마테라스 오미카미) 외 11신’으로, 창립일도 1912년이 아닌 ‘1934년 5월 9일’로 각각 변경 표기되어 있는 것이 확인된다. 이 점에 착안하여 <조선총독부관보>를뒤져보았더니1934년 6월 14일자에 수록된 “경기도 시흥군 북면 흑석리에 신메이신사(神明神祠) 설립의 건이 기노시타 사카에(木下榮) 외 72명으로부터 원출(願出)된 것에 대해 5월 9일부로 이를 허가함”이라는 기록이 눈에 띈다.
여기에 나오는 기노시타는 한강신사의 설립자인 시키의 고향 후배이면서 ‘시키구미’와 ‘조선천연빙주식회사’에 오랫동안 근무하면서 경력을 쌓았고, 1931년에는 지금의 흑석동 일대에 명수대토지경영사무소(明水臺土地經營事務所)를 꾸려 자신만의 이상향(理想鄕)으로 가꾸는 일에 주력했던 사람이었다. 1917년 3월 22일에 제정된 총독부령 제21호 「신사(神祠)에 관한 건」에 따르면 “신사(神祠)라고 칭함은 신사(神社)가 아니면서 공중(公衆)에 참배를 시키기 위해 신기(神祇)를 봉사하는 곳을 말한다”고 규정하고, 이를 설립하려는 때는 조선총독의 허가를 받도록 되어 있었다. 따라서 기노시타가 신사의 설립을 새로 청원한 것은 이에 따른 절차인 듯이 보인다. 또한 신메이는 아마테라스 오미카미의 별칭이므로, ‘신메이신사’는 이를테면 이세신궁(伊勢神宮)을 총본산으로 삼아 아마테라스 오미카미를 주된 제신으로 모시는 가장 보편적인 형태의 신사(神祠, 격이 낮은 소규모 신사)인 셈이다. 이런 사실에 비춰보면 1930년대 전시체제기로 접어들면서 이러한 시대의 변화에 맞물려 한강신사 자체의 기능과 성격에 있어서 제도적인 환골탈태가 진행된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일제강점기 서울지역에 설치되어 있던 일제의 신사들을 얘기하면, 남산 왜성대에 자리한 경성신사(京城神社)와 남산 중턱 옛 한양공원 터에 들어선 조선신궁(朝鮮神宮, 1925년 10월 준공) 정도를 언급하는 것이 보통이다. 원래 경성신사는 1898년에 남산대신궁(南山大神宮)으로 설립되었다가 1913년에 경성신사로 개칭되었으며, 이 안에 천만궁(天滿宮, 1902년 창립), 남산도하신사(南山稻荷神社, 1931년 창립), 팔번궁(八幡宮, 1931년 창립)을 섭사로 거느리고 있었다.
이밖에 경성신사의 뒤쪽에 자리하고 있는 노기신사(乃木神社, 1934년 창립)와 용산 일본군병영지의 후면 남산 기슭에 조성된 경성호국신사(京城護國神社, 1943년 창립) 등의 존재도 곧잘 언급되고 있다. 하지만 이것들 말고도 태평로 쪽에 에비스신사(惠比須神社, 1913년 창립)를 비롯하여 원효로 인근 영정(榮町, 지금의 신계동 1번지 위치)에 있는 문평산(文平山)에는 가토신사(加藤神社, 1914년 창립)라는 것이 있었고, 신메이신사는 영등포동, 용두동, 신길동, 이태원동 등지에도 두루 포진하고 있었던 사실이 확인된다.
<매일신보>1943년5월18일자에는「신사(神祠)의신마(神馬)도출정(出征),금일한강신사(漢江神祠)에서 장행회(壯行會) 거행」 제하의 기사가 수록되어 있는데, 이것이 한강신사에 관해 현재까지 드러난 막바지 기록이다.

 

미영격멸에 신마(神馬)도 출정 ― 부내 한강신사 앞에 모셔 논 구리로 만든 신마가 출정하기로 되어 17일 오전 10시 동 신사에서 장행회를 거행하였다. 여기에는 군 애국부의 히라이 대위(平井大尉)와 기노시타(木下) 흑석정 총대 이하 정민(町民) 다수가 참열한 아래 성대히 거행하였는데 이 신마는 대정 10년도(1921년도)에 건립하여 지금까지 23년 동안 동 신사 앞에서 있던 것으로 이번에 육군에 헌납키로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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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신보> 1943년 5월 18일자에 수록된 한강신사 신마 출정 장행회 관련 보도사진.

 

여기에 흑석정 총대로 언급된 기노시타는 바로 명수대토지경영사무소 사장과 동일인이다. 겉으로는 한강 수호의 성지인 듯이 말하지만 결국에는 출정황군의 무운장구를 빌거나 전쟁동원을 위한 총력체제의 결집장소로 활용되고 마는 것이 바로 일제가 만든 이들 침략신사의 본질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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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아리 랑 로 드 ’에 선 사람들 – 중국 광동지부를 가다

 

김해규 후원회원(평택한광중 교사)

 

김산의 아리랑로드 답사에 함께 한 필자 김해규 회원, 박호균 사무국장, 주동욱 회원(왼쪽부터)

 

 

독립운동과 민주화운동의 공통점은 ‘희생’과 ‘헌신’이 밑바탕이 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희생과 헌신의 기저에는 명료한 역사의식이 요구된다. 2019년 5월 중국지역에서는 처음으로 민족문제연구소 중국 광
동지부(지부장 김유)가 창립되었다. 그리고 2020년 1월 광동지부는 민족문제연구소와 함께 ‘아리랑로드를 가다’라는 광동지역 독립투쟁 유적답사를 주관했다. 이글은 광동지부와 회원들에 관한 이야기다. 지난 2년 광동지부가 걸어온 투쟁의 서사다.

 

독립투쟁의 성지에 광동지부가 창립되다

민족문제연구소 중국 광동지부는 2019년 5월 창립했다. 광동(廣東)지역은 만주, 상하이와 함께 독립투쟁의 성지(聖地)이며, 중국역사에서도 태평천국을 일으킨 홍수전, 근대사상가 캉유웨이, 중국혁명의
선구자 쑨원을 배출한 역사적 고장이지만 중요성에 비해 덜 주목받았고 덜 연구되었다. 이것을 안타깝게 여겼던 김유가 광동지부의 창립을 고민했고 박호균이 이에 호응했다.
광저우 한인사회는 중국의 개혁개방 이후 형성되었다. 대부분 회사 주재원이거나 사업 때문에 정착한 사람들이 많다. 교민들은 민주평통자문위원회를 비롯해서 다양한 모임을 갖고 있었지만 진보적 역사의식을 공유한 단체는 없었다. 민족문제연구소 중국 광동지부 결성에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광동지역 등산모임과 2018년에 창립한 ‘광동포럼’이다. 이들은 함께 모여 등산하며 친목을 나누었고 서로의 생각을 교류했다.
광저우에서는 산악회장이 당연직으로 민주평통자문회의 부회장을 맡으며 영향력을 과시했고 정부(총영사관) 주도의 각종 사업에 동원되기도 했다. 하지만 2018년 민주평통자문회의 광동지부가 주최한 통일강연회는 그동안 유지되었던 밀월관계에 균열이 가게 했다. 몇몇 인사들은 교민들의 교양강화를 위해 ‘광동포럼’을 결성했고 독립운동과 민족의식 함양을 목적으로 ‘민족문제연구소 지부 창립’을 도모했다.

김유 지부장과 ‘아리랑로드 답사’

 


광동포럼은 최철호 씨가 주도했다. 박호균 사무국장은 민족문제연구소 광동지부가 깊이를 추구하는 단체라면 광동포럼은 역사문제뿐 아니라 주민들의 생업이나 생활과 관련된 폭넓은 주제를 다루는 대중조직이라고 정의했다. 광동포럼은 창립 직후 이준식 독립기념관장을 초청하여 한국독립운동사 강연을 개최했다. 또 개성공단지원협력관리위원장을 지낸 김진향 박사를 초청하여 개성공단의 불편한 진실과 통일문제, 남북경협에 관한 두 차례의 강연도 열었다.
KBS스페셜 ‘헤로니모를 찾아서’의 판권을 구입하여 교민 대상으로 무료상영도 했다.
하지만 광동 일대에 뿌려진 전사들의 피땀 어린 독립투쟁사를 발굴하여 교민사회에 친일잔재청산의 당위성과 역사의식을 불어넣고 싶었던 김유와 박호균은 ‘광동포럼’에만 만족할 수 없었다. 민족문제연구소 중국 광동지부 창립은 그렇게 만들어졌다. 등산모임과 각종 단체 활동을 통해 교류했던 김유, 박호균이 중심을 이뤘고 신광용, 최철호, 배상철이 적극 가담했다.
박호균 사무국장은 “어떻게 회원 중에는 등산모임 멤버들이 많은가?”라는 질문에, “등산과정에서 서로의 성향과 생각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광동지부는 김유가 초대 지부장, 박호균이 사무국장을 맡았다. 광동지역 교포들과 학생들을 대상으로 분기에 한 번씩 독립운동유적 답사도 실시한다. 이번 ‘아리랑로드를 가다’를 위해서는 김유, 박호균뿐 아니라 신광용, 배상철 회원의 역할이 컸다. 수차례의 학습모임과 무려 5차례의 현장답사도 실시했다. 이번 답사에 활용된 유적들 가운데 상당수는 님 웨일즈의 <아리랑>과 <김산평전>을 읽고 현장조사를 통해 새롭게 발굴한 성과물이다.

투쟁정신으로 녹록치 않은 상황을 극복해

광동지부장 김유(1955년생)는 사업가다. 고려대학교를 졸업하고 ㈜선경에 입사하여 해외근무를 많이 했다. 1995년 회사를 그만두고 중국 광동성 동관으로 건너와 사업을 시작했다.
사업은 무척 잘 되었다. 민족문제연구소와는 1992년에 인연을 맺었다. 당시만 해도 연구소의 명칭은 반민족문제연구소였다. 김유 지부장이 독립운동사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고려대 학교에 입학해서다. 당시 학장이 역사학자 김준엽 교수였는데 “학생은 왜 고대에 입학했나?” 라는 질문에 “선생님 뵙고 싶어 입학했습니다”라고 대답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대학 내내 역사학에 관심을 두었고 졸업할 때는 아세아문제연구소 연구원으로 근무하라는 제안도 받았지만 그에게는 돈이 필요했다.

 

박호균 사무국장

신광용 씨

 

생업 때문에 미뤄뒀던 독립운동사에 대한 갈증은 광동지역 동관에 정착하면서 다시 발현되었다. 사업이 순탄하고 생활이 안정되자 2000년 초부터 광동일대 독립운동 사적지 답사를 시작했다. 김유 지부장은 한국인으로 광동지역 독립운동유적이 정비되기 전에 답사한 것은 본인이 유일할 것이라고 말했다. 개인적 관심에만 머물렀던 독립운동사를 사회적으로 확대시켜야겠다는 생각을 2018년경 갖게 되었다.
2019년 초 사업에서 은퇴하면서부터는 본격적으로 활동할 것을 다짐하고 평소 교분을 나눴던 박호균 사무국장에게 손을 내밀었다. 광동지역 교민사회에서 영향력이 큰 신광용, 최철호 씨도 함께 했다. 이번 독립운동가 김산의 ‘아리랑로드를 가다’ 답사도 김유 지부장이 제안했다. 광동지역과 관련 있는 인물 가운데 김산(본명 장지락)은 중국과 한국, 북한에서 모두 인정받는 독립운동가이기 때문이다. 김유 지부장은 올해 경희대학교 문예창작과에 입학했다. 지금껏 발품을 팔며 조사하고 연구한 것을 신문과 잡지에 싣고 기록으로 남겨 후세들에게 알리고 싶기 때문이다.
열혈남 박호균(1964년생)은 광동지부 사무국장이다. 부산에서 은행원으로 일하던 그가 광저우로 이주한 것은 2009년이다. 지인이 운영하던 나이키 협력업체의 현지 주재원이었다. 4년반을 근무한 뒤 개인사업을 시작했다. 김유 지부장과는 동관등산회를 통해 만났다. 몇 년 동 안 광동지역 명산을 누비며 새로운 등산코스를 개발하고 많은 사람들과 어울렸다. 박호균은 등산모임을 통해 함께 했던 사람들의 생각과 뜻을 읽었다고 말했다. 2018년 후반 김유 지부장이 광동지부를 결성하자고 제안했다.
등산모임에서 뜻이 맞았던 사람들에게 회원가입을 권유했다. 그렇게 광동지부가 탄생했다.
현재까지 가입한 회원은 19명이다. 초기에는 월 1회 모임을 추진했지만 거리가 너무 멀어서 근래에는 모임을 적게 하고 인터넷이나 위쳇으로 소통한다. 박호균 씨에게 물었다.
“당신은 무엇 때문에 김산과 광동지역독립운동에 관심 갖게 됐나요?” 필자의 우문에 박호균 씨는 ‘미안
함’ 때문이라고 답했다.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미안함, 친일잔재청산에 동참하지 못했던 부채의식이 독립운동에 대한 관심과 열정의 근원이란다.
광동지부에는 김유, 박호균 외에도 17명의 회원이 있다. 그들 가운데는 답사준비에 동참한 회원도 있고 형편에 따라 잠시 짬을 내서 참가한 회원도 있다.
신광용(1958년생) 씨는 노동자 출신이다. 10대 어린나이에 청계천 평화시장에 취업하여 청계피복노조에서 활동하며 여러 사건에 연루되어 수형생활도 했다. 섬유사업을 시작했다가 국내 여건이 나빠지면서 몽골을 거쳐 광저우에 정착했다. 광저우에서는 산악회를 비롯해서 여러 사회단체에서 활동했다. 신씨가 민족문제연구소 광동지부에 참가한 것은 2018년에 개최된 민주평동자문회의 강연회가 계기가 되었다. 광동지부 창립 후에는 박호균 사무국장과 함께 독립운동유적 발굴 및 각종 활동에 앞장섰다. 이번 ‘아리랑로드를 가다’ 답사 준비와 모든일정에도 그의 애정과 열정이 담겼다.
장두인 씨는 재일교포 3세로 ㈜혼다의 광저우 주재원으로 광동지부 회원이 되었다. 민족문제, 통일문제는 자신과 상관없는 일이라고 생각했지만 지난 1년 동안의 활동으로 민족문제에 새로이 눈떴다. 일본에 돌아가서도 회원활동을 할 생각이다. 이은교(여, 1966년생) 씨는 광저우의 모 대학에서 한국어교수로 일한다. 6년 전 취업 때문에 광저우로 이주했다. 등산모임에서 만난 박호균 씨가 ‘역사와 관련해서 독서하고 답사하는 모임’이라고 해서 회원으로 가입했다. 평균 10여 명의 회원이 참가하는 독서모임과 답사는 항상 즐겁고 화기애애하다.
이혜정(여, 1970년생) 씨는 10여 년 전 광저우로 왔다. 근무했던 회사가 광저우로 이전할때 6개월 동안 출장 왔던 것이 계기다. 그에게 민족문제연구소는 친일인명사전을 만드는 단체쯤으로 인식되었다. 그러다가 등산모임에서 박호균 사무국장을 만나 광복절행사에 참가하면서 인연을 맺었다. 이씨는 아직 정식회원으로 가입하지 않았지만 각종 모임에는 뜻을 같이한다. 하루뿐이었지만 이번 ‘아리랑 로드를 가다’ 답사에도 동참했다. 이민우(1960년생)씨도 회원가입을 하지 않았지만 지부활동을 돕는 특급 도우미다. 이번 ‘아리랑로드를 가다’ 답사에도 마지막 1박 2일을 동행하며 사진촬영을 도맡았다.

뒤편에 장두인, 이은교 씨(왼쪽)

사진촬영을 담당한 이민우 씨

민족문제연구소 중국 광동지부는 아직 젊다. 앞으로 할 일도, 하고 싶은 일도 많다. 김유지부장은 향후 일정기간은 회원확대보다 내실을 다질 생각이라고 말했다. 박호균 사무국장도 본업에 충실하며 미완성의 아리랑로드를 착실히 보완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또 중국 쪽 인사들과 학문적, 인적교류도 확대할 것이며, 김산 선생의 후손을 초청하여 연대하고자 한다고 말했다. 김유 지부장은 양세봉 장군 유적답사에도 관심이 많다. 박호균 사무국장은 국내 회원들을 대상으로 1년에 2회 정도 ‘아리랑로드’ 답사를 개최할 계획도 갖고 있다. 백범김구기념관의 ‘청년백범’ 담당자에게 자료를 제공하여 향후 답사를 주도해달라고 요청했다고 한다.
아리랑로드 답사를 무사히 마치고 귀국길에 오르기 직전, 필자는 김유 지부장과 박호균 사무국장에게 부디 ‘건강하시라’고 당부했다. 건강한 몸으로 오래토록 민족정신을 되살리고 친일잔재청산에 노력해달라는 당부였다.

화, 2020/01/21- 0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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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

“지금, 언론개혁을 말한다” 특강 열려

 

기획전 개막과 더불어 언론개혁을 촉구하는 특강도 함께 열렸다. 적폐언론의 대명사가 된 두 신문이 지난과오에 대해 침묵하고 이제는 최소한의 언론윤리마저 저버리고 극우수구세력의 대변지 역할에 앞장서고 있다. 민족문제연구소는 이들의 진면목을 널리 알리기 위해 일제강점기 조선‧동아의 100년을 돌아보고 한국 언론의 문제점과 개혁 방향을 진단해 보는 특강을 마련했다.
과거 유신독재에 맞서 자유언론실천운동을 펼친 원로 언론인 김종철 전 동아투위 위원장부터, 조선‧동아 100년의 역사를 추적해온 역사학자 장신 교수와 적폐언론의 개혁 방향을 제시할 언론학자 박용규‧정준희 교수, 현재 적폐 언론과 치열하게 싸우고 있는 언론감시 활동가 민주언론시민연합 신미희 사무처장과 안진걸 민생경제연구소장을 모시고 한국 언론의 과거와 현재, 언론개혁의 미래를 살펴보았다.
코로나 19로 8월 20일부터 현장참가는 제한하고 모두 온라인으로만 진행하고 있다. 8월 11일부터 8월 27일까지 6회에 걸친 특강은 유튜브 민족문제연구소 채널(https://www.youtube.com/user/MinjokMovie)에서 보실 수 있다.

• 김승은 학예실장

수, 2020/08/26- 0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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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원회원 마당]

3·1독립선언서 세계기록문화유산 등재를 제안합니다

김판수 전북 후원회원

 

‘3·1독립선언서’는 1919년 3월 1일 조선민족대표가 “조선이 독립국”임을 온세계에 분명하게 선포한 조선독립선언입니다.

지금으로부터 백년 전 선포한 ‘3·1독립선언서’는 침략자 일본의 잔인무도한 폭압 아래 칠흑 같은 어둠 절망에 빠져있던 이천만 겨레에게 한줄기 광명의 빛, 구원의 복음, 민족자주독립 희망의 등대였습니다.
그 무서운 총칼 앞에 태극기만 들고도 당당히 외쳤습니다.
만세! 만세! 조선독립만세!

남자도 여자도 어른도 아이도 힘있는 사람 힘없는 사람
부자도 가난뱅이도 귀한 사람 천한 사람 잘난 사람 못난 사람
주인도 머슴도 집없는 거지도 조선사람이면 조선팔도 어디서나
서울사람 시골사람 산골에서 갯가에서 빠짐없이 전부 모두 함께
목소리도 하나 만세 하나로 삼천리강토가 온통 하나가 되어 만세파도로 덮여버렸어요.
간도 연해주 일본 하와이 타향살이 이민 유민 피난민 정신 번쩍 깨어 벌떼처럼 일어났지요.
만세! 만세! 총칼 앞에서 만세!
질질 끌려가며 조선독립만세!
매맞으며 만세! 감옥이 터져라 만세!
아 ~~~ 목숨까지 던지며 조선독립만세!
맨손으로 나서서 분풀이 안 하고 비폭력으로 맞서 보복은 없었지요.
기미 3·1만세는 유순하고 평화롭고 위대하고 숭고하였더라.

십년 동안 나라없이 살던 겨레가 이천만이 모두 주인되어 민주를 심었지요.
자발적으로 능동적으로 적극적으로 똘똘 뭉쳐서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세웠습니다.
우리나라 대한민국이 3·1만세로 섰습니다.
‘3·1독립선언서’는 이 나라 민주의 뿌리, 대한민국의 든든한 뿌리입니다.
백년 지난 지금도 삼천리 반도는 강대국이 탐내는 먹잇감

백년 전이나 지금이나 백년 후 그 다음 백년 후에도 우리 겨레의 땅

우리 강토 지켜내려면 자력 자립 자강 자주독립정신만이 생명선입니다.
‘3·1독립선언서’는 이땅 우리 겨레의 영원한 보물 나침판입니다.
지구촌 곳곳에서 강대국 횡포에 시달리는 피압박 약소민족에게 희망과 용기를 줍시다.

[3·1독립선언서]를 세계기록문화유산으로 등재하여 지구촌 전인류 문화유산으로 보존하자고 제안합니다.

2020. 2. 1. 여럿이함께손잡고 ‘평화의길’ 김판수 두손모음

금, 2020/02/21- 0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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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역사박물관 소식]

 

신갈고등학교 역사인권동아리 ‘사인’ 기부증서 수여식

 

지난 11월, 박물관으로 한 통의 전화가 왔다. 신갈고등학교 역사인권동아리에서 독립운동가 배지를 제작하여 판매하였고, 수익금을 박물관에 후원하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감사한 마음을 담아 기부증서를 수여하고자 방학을 맞이한 1월, 학생들을 박물관으로 초대하였다.


역사의 ‘사(史)’와 인권의 ‘인(人)’을 따서 만든 신갈고등학교 내 역사인권동아리 ‘사인’은 역사와 인권 문제에 관심이 있는 학생들이 모여 만든 동아리로 올해 10년이 되었다.

2019년 교내 축제에서 ‘태극기를 그려라’라는 행사를 통해 전교생이 태극기의 의미를 되새기는 기회를 제공하는 한편, 학생들이 흥미를 가질 수 있도록 일제시대 헌병경찰 복장을 대여하여 당시 상황을 재연하면서 학생들이 일제강점기를 잠시나마 고민해보는 시간을 가지도록 기획하였다고 한다. 더불어 3・1운동 및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기념하여 독립운동가의 모습을 형상화한 배지를 제작하여 판매하였다.

1월 7일, 담당교사 송지호(후원회원)님의 인솔 하에 18명의 동아리 학생이 식민지역사박물관에 방문하였다. 동아리 및 기부프로젝트에 대한 소개를 듣고 모든 학생에게 기부증서와 기념 선물을 증정하였다. 이후 상설전시관을 관람하며 일제시기와 해방 이후 역사에 대해 공부하는 시간을 가졌다. 기억과 성찰의 역사행동에 함께해준 소은지, 오혜빈, 유지나, 이서연, 정윤서, 안형민, 이유찬, 허정인, 김성욱, 배승연, 서화진, 장우혁, 김정호, 황서연, 황석우, 김민성, 한솔비, 김가연 님께 다시 한 번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

금, 2020/02/21- 0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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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역사박물관 소식]

 

오다 치요코 평화자료관 쿠사노이에 이사, 박물관 후원금과 감상문 보내와

 

작년 3월에 식민지역사박물관을 방문했던 평화자료관·쿠사노이에(草の家) 이사 오다 치요코(織田千代子) 님이 최근 사고로 동생을 잃었다. 동생에게 받은 유산 중 일부인 100만 원을 작년 12월 식민지역사박물관 후원금으로 보내주셨다. 그리고 올해, 식민지역사박물관 관람 소감을 바다 건너 편지로 보내오셨다. 그 전문을 아래 소개하고자 한다. • 김슬기 학예실 연구원 정리


저는 2019년 2월 28일부터 3월 3일까지 3박 4일 일정으로 쿠사노이에 창립 30주년 기념사업의 하나
로 회원 12명과 함께 ‘한국 평화기행’을 다녀왔습니다. 쿠사노이에에서 활동했던 김영환 씨가 있는 식민
지역사박물관을 김영환 씨의 안내로 둘러보았습니다.
이 박물관은 많은 사람들의 기부로 세워졌는데, 훌륭한 5층 건물의 모습에 놀랐습니다. 식민지역사박
물관은 일제가 한국을 식민 지배했을 때의 자료를 수집, 전시, 소개하여, 동아시아의 진정한 평화를 실
현하기 위한 연구와 실천을 목적으로 설립되었다고 합니다.
전시되어있는 유물을 보고 놀라기만 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들은 과거의 역사에 대해 제대로 배우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과거에 일본이 한국을 식민 지배했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지만, 이 박물관에 전시
되어있는 내용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했던 사실들뿐이었습니다. 일본 제국주의 군대가 ‘한국병합’의
이름으로 침략하여 한국 사람들에게 고통을 주었다는 사실을 잘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특히 관심을 끈 것은 ‘친일파’라고 불린 사람들의 존재였습니다. 지금까지 ‘친일파’라는 말은 들어본 적
은 있었지만, 특별히 관심도 없었고 자세히는 몰랐습니다. 비로소 ‘친일파’에 대해 그들이 독립 후 한
국의 입법, 사법, 산업, 교육, 문화, 예술 등 모든 분야에서 영향을 끼쳤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박물관을 견학한 감상은 일본이 한국인들에게 저지른 여러 사실을 알았을 때, 일본인으로서 한국과 일
본의 올바른 과거의 역사에 대해 너무나 알려져 있지 않다는 것이었습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저 자신
이 부끄러웠고, 가슴이 아파 우울해졌습니다.
작년에 처음으로 식민지역사박물관을 찾아 과거에 일본이 한국을 침략한 역사적 사실을 알게 되어 정
말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우리 일본인이 올바른 역사교육을 받지 못한 것에 대해 분노가 치밀었고 슬펐습니다. 앞으로 조금이라도 과거의 역사를 공부해서 알고 싶습니다.


 

금, 2020/02/21- 0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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