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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석동 한강변 언덕 위에 한강신사가 건립된 까닭은? – 서울 지역 곳곳에 포진한 일제 침략신사들의 흔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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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석동 한강변 언덕 위에 한강신사가 건립된 까닭은? – 서울 지역 곳곳에 포진한 일제 침략신사들의 흔적

익명 (미확인) | 월, 2018/07/02- 17:18

식민지비망록 37

흑석동 한강변 언덕 위에 한강신사가 건립된 까닭은?
– 서울 지역 곳곳에 포진한 일제 침략신사들의 흔적

 

이순우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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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한강신사 터를 활용하여 지난 1994년에 재건된 ‘효사정’의 모습.

 

한강대교를 남쪽으로 건너 서울현충원 방향으로 500미터 남짓 걷다보면, 지하철 9호선 흑석역(중앙대입구)에 조금 못 미쳐 한강변 쪽으로 약간 솟아오른 작은 봉우리 하나를 만나게 된다. 1955년 6월 25일에 건립된 학도의용병현충비(學徒義勇兵顯忠碑) 앞을 지나 돌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효사정(孝思亭)이라는 이름의 정자가 나타난다.
효사정은 원래 세종 때 우의정을 지낸 공숙공(恭肅公) 노한(盧閈, 1376~1443)의 별서(別墅)였다고 전해지는 유적이다. 그는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시묘살이를 했던 곳에다 정자를 짓고 때때로 이곳에 올라 모친을 그리워했고, 멀리 개성 땅에 묘지를 쓴 부친을 추모했다고 하여 ‘효사정’이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경기금천현(衿川縣)‘누정(樓亭)’조에“노량나루터 남쪽 언덕에 있는 정자”라는 정도의 간략한 내용이 남아 있긴 하나 사실상 이것만으로는 더 이상의 정확한 원위치 고증이 어려운 상태이다.
하지만 지난 1994년에 서울 정도 600년을 맞이하여 이를 기리는 사업의 하나로 한강주변의 유적지를 복원 정비하는 계획이 추진되었고 이때 편의상 부득의하게 지금의 자리를 선정하여 정자를 재건하기에 이르렀다. 이곳이 진짜 효사정 자리인지에 대한 논란을 차치하고라도 이 정자에 오르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강 쪽 전망이 참으로 빼어나다는 점에 공감하게 된다.
그런데 이 장소는 일제강점기를 거치는 내내 ‘한강신사(漢江神社)’라는 시설물이 터를 잡고 있었던 곳이라는 사실도 꼭 함께 기억할 필요가 있다. 후지이 가메와카(藤井龜若)가 펴낸 <경성의광화(京城の光華)>(조선사정조사회,1926)를 보면, 이한강신사의 건립유래가 다음과 같이 정리되어 있다.

 

한강신사는 인도교(人道橋)를 건너 동쪽의 작은 언덕에 숲속에 한줄기 끈과 같은 가느다란 길이 산꼭대기까지 걸쳐 있는데 그 산부리의 약간 높은 상두산령(象頭山嶺)의 영지(靈地)에서 제사를 지낸다. 제신(祭神)은 미야지대사(宮地大社), 코토히라대신(金刀羅大神), 스가와라대신(菅原大神)의 삼신(三神)으로 인도교 가교 청부인(請負人)이던 시키 노부타로(志岐信太郞) 씨가 대정 원년(1912년) 금상폐하(今上陛下, 대정천황을 말함)의 즉위를 기념하고 아울러 고국을 멀리 떠나온 재선민(在鮮民: 조선 거주 일본인)을 비롯하여 동포선인(同胞鮮人)에게 경신숭조(敬神崇祖)의 미풍을 가르치려는 돈독한 뜻에 따라 이곳 산자수명한 정지(淨地)를 택해 사재 십수 만 원을 들여 한강수호의 신으로 삼아 헌립(獻立)한 것이며, 매년 봄가을(5월 4일, 10월 4일)에 행해지는 대제례일에는 내선인의 참배자가 원근에서 운집하여 번잡함이 흡사 대공원의 모습을 보여준다.
섭사(攝社)에는 이나리신사(稻荷神社), 시키신사(志岐神社), 야신신사(矢心神社)를 모시며, 이 지역은 예로부터 영산(靈山)으로서 조선인들이 숭배하던 곳이다. 경내의 바위 사이에는 기이한 한 그루의 소나무가 있다. 와룡송(臥龍松)이라 부르는 유명한 나무로 수령이 수백 년이 넘는 신목(神木)이다.

 

여기에 나오는 시키 노부타로는 1869년생으로 일본 후쿠오카현(福岡縣) 출신이며, 자신의 토목건축회사인 시키구미(志岐組)를 통해 경부철도 속성공사를 비롯한 철도관련 청부업에 주력하여 부를 축적한 인물이었다. 그는 특히 1921년에 조선의 특산물이라고 일컬어지던 천연빙(天然氷), 즉 겨울철 한강 얼음을 채취하여 저장 판매하기 위해 조선천연빙주식회사 및 조선천연빙창고주식회사를 설립하였고, 1936년에 이들 회사와 여타 제빙회사가 조선제빙주식회사(朝鮮製氷株式會社)로 통합 전환한 이후에도 사장의 자리를 지킨 바 있다. 따라서 그는 이래저래 한강과는 많은 인연을 지닌 사람이었던 것으로 풀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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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일보>1934년 12월 2일자에 수록된 토끼사냥 야유대회관련 명수대 주변 약도에는 ‘한강신사’의 위치가 또렷이 표시되어 있다. 오른쪽 아래에 ‘화장사’라고 표시된 사찰은 오늘날 서울현충원 구내에 있는 ‘호국지장사’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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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신사가 자리한 흑석동 한강변의 풍경. (<일본지리대계(조선편)>, 신광사, 1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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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1년 기노시타 사카에가 개발을 주도한 명수대 주택지(현 흑석동)의 전경. 왼쪽으로 보이는 한강변 봉우리 위의 건물이 한강신사이다. (경성전기주식회사, <뻗어가는경성전기>, 1935)

 

이곳 한강신사의 제신으로 언급된 ‘미야지대사’는 일본 후쿠오카 소재 ‘미야지다케신사(宮地嶽神社)’를 말하는데, 시키의 고향에 있는 신사 그 자체가 숭배의 대상이었던 듯하다. 또한 ‘스가와라대신’은 일본 헤이안시대의 정치가 스가와라노 미치자네(菅原道眞)를 말하며, 대개 ‘학문의 신’으로 추앙되는 인물이기도 하다. 그리고 ‘코토히라대신’은 불교에서 일컫는 약사십이신장(藥師十二神將)의 하나이며 원래 인도 갠지즈강에 살았다는 쿰비라(Kumbhira, 蛟龍)에서 유래된 것으로, 일본에서는 바다를 수호하는 신으로 인지되어 일반적으로 선박 안전을 비는 대상으로 자리매김되어 있다. 한강신사가 자리한 봉우리를 일컬어 상두산(象頭山)이라고 한 것은 일본 가가와현(香川縣)에 있는 곤피라산(金刀比羅宮: 신사명)의 소재지에서 그대로 따온 이름으로 받아들여진다.
오카 료스케(岡良助)가 쓴 <경성번창기>(박문사,1915)라는책에는이곳이웅진강신사(熊津江神社)라는 이름으로 소개되어 있는데, 한강신사는 그 이후의 시점에서 고쳐진 명칭인 듯하다. 아무튼 이곳은 일본인의 입장에서 한강 수호의 신으로 삼아 설립된 것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1912년에 그네들의 천황이 등극한 것을 기념하는 뜻에서 이러한 신사가 탄생하게 되었다는 점에도 깊이 유념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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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총독부관보>1934년 5월 14일자에는 한강신사가 ‘신메이신사’라는 이름으로 새로 설립허가를 받은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그런데 일제패망기에 대륙신도연맹(大陸神道聯盟)에서 엮어낸 <대륙신사대관(大陸神社大觀)>(1941)을 보면, 여기에는 한강신사의 명칭이 ‘神社’가 아닌 ‘神祠’로, 이곳의 제신(祭神)이 ‘천조대신(天照大神, 아마테라스 오미카미) 외 11신’으로, 창립일도 1912년이 아닌 ‘1934년 5월 9일’로 각각 변경 표기되어 있는 것이 확인된다. 이 점에 착안하여 <조선총독부관보>를뒤져보았더니1934년 6월 14일자에 수록된 “경기도 시흥군 북면 흑석리에 신메이신사(神明神祠) 설립의 건이 기노시타 사카에(木下榮) 외 72명으로부터 원출(願出)된 것에 대해 5월 9일부로 이를 허가함”이라는 기록이 눈에 띈다.
여기에 나오는 기노시타는 한강신사의 설립자인 시키의 고향 후배이면서 ‘시키구미’와 ‘조선천연빙주식회사’에 오랫동안 근무하면서 경력을 쌓았고, 1931년에는 지금의 흑석동 일대에 명수대토지경영사무소(明水臺土地經營事務所)를 꾸려 자신만의 이상향(理想鄕)으로 가꾸는 일에 주력했던 사람이었다. 1917년 3월 22일에 제정된 총독부령 제21호 「신사(神祠)에 관한 건」에 따르면 “신사(神祠)라고 칭함은 신사(神社)가 아니면서 공중(公衆)에 참배를 시키기 위해 신기(神祇)를 봉사하는 곳을 말한다”고 규정하고, 이를 설립하려는 때는 조선총독의 허가를 받도록 되어 있었다. 따라서 기노시타가 신사의 설립을 새로 청원한 것은 이에 따른 절차인 듯이 보인다. 또한 신메이는 아마테라스 오미카미의 별칭이므로, ‘신메이신사’는 이를테면 이세신궁(伊勢神宮)을 총본산으로 삼아 아마테라스 오미카미를 주된 제신으로 모시는 가장 보편적인 형태의 신사(神祠, 격이 낮은 소규모 신사)인 셈이다. 이런 사실에 비춰보면 1930년대 전시체제기로 접어들면서 이러한 시대의 변화에 맞물려 한강신사 자체의 기능과 성격에 있어서 제도적인 환골탈태가 진행된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일제강점기 서울지역에 설치되어 있던 일제의 신사들을 얘기하면, 남산 왜성대에 자리한 경성신사(京城神社)와 남산 중턱 옛 한양공원 터에 들어선 조선신궁(朝鮮神宮, 1925년 10월 준공) 정도를 언급하는 것이 보통이다. 원래 경성신사는 1898년에 남산대신궁(南山大神宮)으로 설립되었다가 1913년에 경성신사로 개칭되었으며, 이 안에 천만궁(天滿宮, 1902년 창립), 남산도하신사(南山稻荷神社, 1931년 창립), 팔번궁(八幡宮, 1931년 창립)을 섭사로 거느리고 있었다.
이밖에 경성신사의 뒤쪽에 자리하고 있는 노기신사(乃木神社, 1934년 창립)와 용산 일본군병영지의 후면 남산 기슭에 조성된 경성호국신사(京城護國神社, 1943년 창립) 등의 존재도 곧잘 언급되고 있다. 하지만 이것들 말고도 태평로 쪽에 에비스신사(惠比須神社, 1913년 창립)를 비롯하여 원효로 인근 영정(榮町, 지금의 신계동 1번지 위치)에 있는 문평산(文平山)에는 가토신사(加藤神社, 1914년 창립)라는 것이 있었고, 신메이신사는 영등포동, 용두동, 신길동, 이태원동 등지에도 두루 포진하고 있었던 사실이 확인된다.
<매일신보>1943년5월18일자에는「신사(神祠)의신마(神馬)도출정(出征),금일한강신사(漢江神祠)에서 장행회(壯行會) 거행」 제하의 기사가 수록되어 있는데, 이것이 한강신사에 관해 현재까지 드러난 막바지 기록이다.

 

미영격멸에 신마(神馬)도 출정 ― 부내 한강신사 앞에 모셔 논 구리로 만든 신마가 출정하기로 되어 17일 오전 10시 동 신사에서 장행회를 거행하였다. 여기에는 군 애국부의 히라이 대위(平井大尉)와 기노시타(木下) 흑석정 총대 이하 정민(町民) 다수가 참열한 아래 성대히 거행하였는데 이 신마는 대정 10년도(1921년도)에 건립하여 지금까지 23년 동안 동 신사 앞에서 있던 것으로 이번에 육군에 헌납키로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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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신보> 1943년 5월 18일자에 수록된 한강신사 신마 출정 장행회 관련 보도사진.

 

여기에 흑석정 총대로 언급된 기노시타는 바로 명수대토지경영사무소 사장과 동일인이다. 겉으로는 한강 수호의 성지인 듯이 말하지만 결국에는 출정황군의 무운장구를 빌거나 전쟁동원을 위한 총력체제의 결집장소로 활용되고 마는 것이 바로 일제가 만든 이들 침략신사의 본질이 아닌가 싶다.

시민들의 의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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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미리 보는 식민지역사박물관 기획전시 │ 조선 동아 적폐언론 100년을 다시 본다(2)

조선·동아 전쟁범죄의 민낯

최우현 학예실 주임연구원

 

민족문제연구소와 식민지역사박물관은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창간 100년을 맞아 기획전을 마련했다. 영광과 오욕의 100년 가운데 ‘오욕’이 사라진 100년을 비판하기 위해 기획됐다. 원래 두 신문의 창간일에 맞춰 3월에 개막하고자 했으나 코로나 19 감염병 확산으로 박물관을 잠정 휴관함에 따라 전시를 8월로 연기했다. 민족사랑에 3회에 걸쳐 미리 전시회의 주요 내용과 자료를 소개한다.

 

언론은 ‘표현의 자유’를 기본 정신으로 성장한다. 자유는 언론이 성장하기 위한 토양이다. 여기서 말하는 ‘표현의 자유’는 권력의 억압적 성격에 저항하는 언론의 속성으로 상당한 순기능을 우리 사회에 가져다준다. 그러나 반대로, 권력의 위치에 선 언론이 행하는 ‘표현의 자유’는 국가의 이름하에 약자들의 희생을 강요하는 장치로 변질된다. 여기에 심각하게 경도된 언론들은 특히 전쟁이나 사변 같은 사태에 민중을 선동하면서 중대한 인권범죄를 합리화하거나 폭력과 증오의 ‘표현의 자유’를 외치기도 한다.
국제인권규약은 전쟁선동, 선전 등에 대한 언론의 자유에 분명한 한계를 설정하고 있다.
<시민적·정치적 권리에 관한 규약> 제20조에 따르면 전쟁을 위한 어떠한 선전도 법률에 의하여 금지되며, 차별이나 적의 또는 폭력의 선동이 될 만한 증오의 고취 또한 금지된다. 물론 이는 2차 세계대전 이후에 발생한 국제적 선언으로 그보다 이전의 사례에 일방적으로 적용하긴 어려운 측면이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 같은 규약은 존재 자체로 언론의 전쟁부역 행위가 얼마만큼 심각한 폐해를 끼쳤는지를 반증하고 있다. 이재승 교수는 규약 제20조가 “특정한 유형의 표현들이 갖는 파괴적인 성격을 인정하고 있”는 것이라는 평가를 내리기도 했다.
언론이 앞장서 민중을 전쟁의 참상 속으로 이끈 사례는 우리 역사에도 적지 않다. 특히 여기서는 1937년 중일전쟁 이후 이어진 일제의 침략전쟁 시기에 조선일보와 동아일보가 보인 ‘전범언론’으로서의 면모들을 조명해보기로 한다. 이는 한글신문 100년 역사를 자화자찬하기에 앞서 스스로 성찰하고 반성해야 할 분명한 ‘상흔’이고 어둠이다. 물론 이들이 전쟁부역언론으로 존재한 1937년부터 1940년까지는 3년 남짓한 짧은 시기에 불과하지만, 그 보도들은 전쟁이라는 극도의 사회적 불안에 떨었을 조선 민중을 달래고 전쟁의 양상을 투명하게 보도하는데 실패했다. 오히려 앞장서 전쟁을 선전하고 전쟁의 정당성을 뒷받침했다.

 

일본국민들의 입장에서 게재하라
두 신문은 과연 어떤 입장에서 전쟁보도를 시작했을까? 조선일보는 올해 100주년을 맞이하여 발간한 〈간추린 조선일보 100년사 – 민족과 함께 한 세기〉에서 중일전쟁과 그 이후의 보도경향을 “강요당한 친일지면”으로 정리했다. 말하자면, 총독부가 자신들의 보도태도를 ‘친일적’ 으로 바꾸려 압박했고 그에 따른 <언문신문지면개선사항>, <언문신문지면쇄신요항> 과 같은 “총독부의 모진 탄압”이 더해져 “획일화된 지면을 만들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조선총독부가 한층 강화된 언론통제책을 써서 언로(言路)를 막으려 한 것은 사실이기도 하다. 총독부는 1936년 8월 발생한 손기정 선수의 ‘일장기 말소사건’을 계기로 언론통제를 강화하게 된다. 〈조선중앙일보〉, 〈동아일보〉를 무기한 정간조치 했고, 이듬해 1937년 일본 황실기사 취급방침과 총독부 시정방침에 대한 보도 강화 등을 지시하는 <언문신문지면쇄신요항> 18개항이 하달되었다.
그러나 조선일보는 이와 같은 총독부의 압박이 본격적으로 가해지기도 전에 ‘스스로’ 굴종을 자처하고 나섰다. 연구소가 찾아낸 경성종로경찰서 비밀문서 4466호, <조선일보의 비국민적 행위에 관한 건>은 이 사실을 확인시켜 준다. 조선일보 사장 방응모, 주필 서춘, 편집국장 김형원, 영업국장 김광수 등은 조선총독부의 언론사 대표자 소집, 협조요청이 있기 전인 1937년 7월 11일, 이미 긴급회의를 개최하고 ‘친일적’ 편집방침을 확고히 결정했다.

 

<조선일보의 비국민적 행위에 관한 건>(1938.5.24, 국사편찬위원회 소장). 이 문건에는 조선일보 간부진의 회의 내용 등이 기록되어 있다. 조선일보 사장 방응모는 7월 11일 회의를 통해 기사를 일본국민의 입장에서 게재하도록 결정했다.

 

당시 회의에서는 중일전쟁이 막 시작되던 시류를 일본적 입장에서 반영하여, “일본군, 중국 장개석 씨” 등의 용어를 “아군·황군, 지나 장개석” 등으로 고치고 논설은 “일본국민으로서의 입장에서 게재”할 것에 대해 논의했다. 특히 사장 방응모는 회의에 참석한 이들에게 “동아일보는 일장기 마크 1개 문제로 수십 만 엔의 손해를 입지 않았는가. 또 민중을 1919년처럼 지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결론을 내려 편집방향에 반대하던 김형원·김광수를 굴복시켰다. 이에 제2회차 호외부터 “일본국민의 태도”로써 편집하기로 했다.
동아일보의 실상도 크게 다르지 않다. 동아일보는 ‘일장기 말소사건’을 계기로 일제에 복종을 다짐하는 청원서와 서약서를 제출하고 ‘사고(社告)’까지 특필함으로써 본격적인 부역의 길에 들어섰다. 당시 조선총독부 미츠하시(三橋孝一郞) 경무국장은 동아일보 정간 해지 담화에서 동아일보가 “총독정치에 익찬(翼贊)할 것을 선서”하였고 “일본제국의 신문지로서 진(眞)사명에 매진할 것을 서약”하였다고 평가했다.(「동아일보 발행 정지 처분의 해제에 이른 경과」, 1937)

 

전쟁선전의 서막 ‘무력철퇴를 가해야’
1937년 7월 7일 ‘노구교사건’ 발생 이후 전선이 상해로 확대되어 감에 따라 두 신문도 본격적인 전쟁 선전의 구호를 지면에 담아내기 시작했다. 전쟁 초기 이들의 보도는 일제가 도발한 중일전쟁의 정당성을 강조하고 일본군을 “아군(我軍)” 또는 “황군(皇軍)”으로 내면화시키고 있었다.
1937년 7월 16일 동아일보는 조선신궁에서 거행된 기원제 보도에서 “황군”이라는 표현을 처음 사용하며 전쟁선전의 막을 올렸다. 이어 8월 20일 사설을 통해 “황군은 드디어 화평해결의 희망을 방기하고 전단을 개시했다”며 스스로의 입장을 사설에 담기 시작했다.
바로 3일 뒤인 8월 23일에는 조선일보가 “지나응징”의 구호를 사설에 게재하며 선전 경쟁에 뛰어들었다. 이는 당시 일본 육군에서 슬로건처럼 유행했던 “폭려지나응징(暴戾支那膺懲)1”과 상응하는 어투의 사설이기도 했다. 더불어 조선일보는 중국정부에 “자진하야 전비(前非)를 깨닫는 날까지 무력철퇴를 가하는 것이 즉, 응징의 유일한 목적”이라며 호전적 논조로 일제의 입장을 대변했다.
일본군이 침략의 전선을 확대하는 동안 수시로 날아온 ‘일본동맹통신발’ 전황보도를 두 신문은 별다른 수정이나 검토 없이 지면을 할애해 실었다. 조선, 동아는 일본 동맹통신사의 분신이나 다름없었다. 일제의 전쟁선전에 일본 통신사들이 적극 활용되었다는 점에 주목해본다면 조선, 동아의 ‘받아쓰기’는 침략전쟁을 널리 퍼트리는 ‘확성기’나 다름없었다.
두 신문의 전쟁보도 경쟁이 극에 달한 것은 1937년 12월 중순, 난징침략 때였다. 이 12월을 기점으로 조선일보가 보도한 난징 관련 기사는 무려 161건, 동아일보는 109건에 이른다. 전쟁 사진 또한 ‘남경함락화보’, ‘사변화보’ 등의 제목으로 수시로 보도되었다. 특히 난징 ‘함락’ 하루 전인 12월 12일자 조선일보 석간에는 ‘남경함락축하행사’를 주제로 한 기사가 특필되기도 했다. 나아가 조선일보는 이날 사설에서 일본군의 승리가 “충용한 황군장병의 우월”을 통해 이루어졌음을 내세우면서 이 전쟁이 중국 국민의 “배일환상(排日幻想)”이 만주사변과 중일전쟁을 일으켰다는 등의 논리로 일본 정부의 침략의도를 완전히 대변했다.
한편, 동아일보는 12월 12일 사설에 일장기까지 함께 게재했다. 통상 게재되지 않았던 일장기 이미지를 ‘난징함락’을 기념하며 조간 2면 1단에 특별 삽입한 것이다. 사설은 일본 정부가 “군사행동의 목적을 달성하기까지는 장기전을 불사”해야 한다고 적으면서 난징 내에서 진행되고 있던 시가전에 대해 “숙청(肅淸)공작도 시간문제”라며 전투적 논조를 사용했다.


1 인도(人道)에서 벗어난 모질고 사나운 중국을 혼낸다는 뜻

 

조선일보 1937년 12월 12일 석간 2면
해당 기사는 “오직 앞으로 남은 문제는 아직도 성중에 머물러 있어 완강한 저항을 계속하고 있는 시내잔적의 소탕이 있을 뿐이다”라는 평가와 함께 난징함락이 “전국적으로 국민환호의 대상”이 되어 축제가 전 조선적으로 진행됨을 자축하는 내용으로 채워져 있다.

 

난징 침략 후 참혹한 시가전이 일어났던 시기에 보도된 기사들은 더욱 자극적이었다. 12월14일 동아일보는 동맹통신의 기사를 인용, “격렬한 백주시가전 혈(血), 시(屍), 규환(叫喚)에 충만”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게재했다. 기사는 “적병 최후의 절규가 들”린다는 표현과 함께 “대일장기(大日章旗)는 욱광(旭光)을 받으면서 번양하고 있”는 풍경을 지극히 ‘일본적’ 입장에서 표현해내고 있었다. 참고로 이 보도는 난징대학살이 일어났던 시기(12월 13일~15일)에 게재됐다. 난징 대학살과 이 보도의 직접적인 연관성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미증유의 대학살이 일어났던 시기에 ‘피와 시체, 규환’으로 넘쳐나던 전장을 그 어떠한 문제의식과 인도적 양심 없이 보도했다는 것에서 분명한 비판점이 있어 보인다.

 

전쟁, 그리고 ‘만들어 낸 영웅’
두 신문의 전쟁부역은 단순히 전황보도에만 그치지 않았다. 1938년 일제가 육군특별지원병령을 공포하고 조선인의 병력 동원에 나서자 조선, 동아일보는 지원병제도를 선전하는 기획기사, 사설, 사진보도를 연이어 작성했다. 각 지역별 지원병 실적을 경쟁적으로 발굴, 보도했다. 신문 1면의 대부분이 지원병 특집 기사로 구성된 경우도 있었다.

특히 이들은 조선청년의 ‘지원열’을 선전하기 위해 각종 미담사례를 발굴해 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1939년 ‘이인석 상등병 영웅화 보도’라고 할 수 있다. 일제의 육군특별지원병 제1기생으로 동원된 이인석은 1939년 6월 중국 산서전선에서 전사했다. 조선인 지원병으로는 최초의 전사자였다. 조선일보는 이러한 이인석의 전사소식이 전해진 즉시 “영예의 전사”라는 수식어를 달며 미화했다. 이에 질세라 동아일보는 바로 이튿날 이인석의 가정방문 기사를 실었다. 남편의 사망소식을 듣고 슬픔에 잠겨있을, 부인의 소감을 어떻게라도 싣겠다며 고인의 자택을 찾아가는 ‘위문’을 감행한 것이다.
나아가 두 신문은 이인석 상등병의 고별식, 위령제 등이 행해지는 현장을 찾아가 이인석 상등병의 유가족들을 상대로 ‘셔터’를 눌렀다. 유가족들의 “애수”와 전사의 명예로움을 더해주는 기사를 쓰기 위함이었다. 특히 조선일보는 1939년 10월 석간 2면 기사 “색연필”을 통해 이인석 상등병의 죽음이 “조선 사람에게 몇 갑절의 열매를 맺게 할” “고마운 주검”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는데 이러한 점에서 보더라도 두 신문이 동원된 조선청년에 대한 추모보다는 일제를 위한 전사자의 현창(顯彰)에 초점을 두었음을 알 수 있다.

 

동아일보 1939년 7월 9일 조간 2면. 동아일보 대전지국이 故 이인석 상등병의 가정을 방문, 미망인을 만난 내용을 담은 기사

 

조선일보 1939년 10월 1일 석간 2면. 위령제 관련 기사에서 보도된 이인석 상등병의 양친과 부인(가운데)

 

두 신문의 이인석 영웅화 보도는 조선, 동아 폐간 직전인 1940년까지 이어졌다. 지원병 제도의 성과를 올리고 지원을 부추기는데 이인석 상등병의 전사를 인용한 것은 물론, 이인석 상등병을 소재로 한 음악극(나니와부시)까지 만들어진 당시 상황에 편승해 적극적인 홍보기사까지 신문에 싣기도 했다.

 

100년 세월에도 부재한 ‘반성’
일제의 침략전쟁에 부역했던 이 시기들은 조선, 동아일보 입장에서도 분명 지우고 싶은 과거일 것이다. 조선일보는 올해 100주년을 기념한 사설에서 중일전쟁 이후 자신들의 과오를 그저 “100년 비바람을 버텨온 나무에 남은 크고 작은 상흔”이라며 뜬구름 잡는 논평을 남겼다. 또 “일제강압과 신문발행 사이에서 고뇌했던 흔적이 오점으로 남아 있다”고도 평가했다. 그나마 동아일보가 이번 100주년을 맞이해, 일제 침략시기의 언론부역에 대한 ‘사과’를 표명한 것은 나름의 진전 같아 보인다. 물론 그조차 “조선총독부의 집요한 압박으로 저들의 요구가 반영된 지면이 제작”되었다고 에둘러 변명하였기에 그 진정성이 완전하다고 하긴 어렵다.

일제강압과 신문발행 사이에서 고뇌했던 흔적이 대체 왜 그 같이 현란한 전쟁부역으로 나타났는지는 도무지 알 길이 없다. 하지만 이 같은 논평이 과거사에 대한 반성과 성찰이 아님은 분명해 보인다. 일제강점기가 조선일보에 있어 ‘크고 작은 상흔’이었다면 조선일보의 전쟁선전에 상처 입은 민중들의 아픔은 대체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그래서 우리는 이 두 신문을 반성과 성찰의 시험대에 올리는 것이다.

 

▪ 참고문헌
최상원 외, 「1937년 일본군의 중국 난징 점령 관련 한국언론의 보도태도」. <지역과커뮤니케이션> 14, 2010.2
박용규, 「일제의 지배정책에 대한 신문들의 논조 변화」, <한국언론정보학보> 2005.5
장신, 「1930년대 언론의 상업화와 조선동아일보의 선택」, 역사비평, 2005.2
조선일보사, <간추린 조선일보 100년사 – 민족과 함께 한 세기>, 2020
이재승, 「증오적 표현과 역사의 부정」, 국회 토론회 <올바른 기억확립을 위한 법률 제정을 위한 토론회>, 2007.5.16.

화, 2020/06/23- 1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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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아리 랑 로 드 ’에 선 사람들 – 중국 광동지부를 가다

 

김해규 후원회원(평택한광중 교사)

 

김산의 아리랑로드 답사에 함께 한 필자 김해규 회원, 박호균 사무국장, 주동욱 회원(왼쪽부터)

 

 

독립운동과 민주화운동의 공통점은 ‘희생’과 ‘헌신’이 밑바탕이 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희생과 헌신의 기저에는 명료한 역사의식이 요구된다. 2019년 5월 중국지역에서는 처음으로 민족문제연구소 중국 광
동지부(지부장 김유)가 창립되었다. 그리고 2020년 1월 광동지부는 민족문제연구소와 함께 ‘아리랑로드를 가다’라는 광동지역 독립투쟁 유적답사를 주관했다. 이글은 광동지부와 회원들에 관한 이야기다. 지난 2년 광동지부가 걸어온 투쟁의 서사다.

 

독립투쟁의 성지에 광동지부가 창립되다

민족문제연구소 중국 광동지부는 2019년 5월 창립했다. 광동(廣東)지역은 만주, 상하이와 함께 독립투쟁의 성지(聖地)이며, 중국역사에서도 태평천국을 일으킨 홍수전, 근대사상가 캉유웨이, 중국혁명의
선구자 쑨원을 배출한 역사적 고장이지만 중요성에 비해 덜 주목받았고 덜 연구되었다. 이것을 안타깝게 여겼던 김유가 광동지부의 창립을 고민했고 박호균이 이에 호응했다.
광저우 한인사회는 중국의 개혁개방 이후 형성되었다. 대부분 회사 주재원이거나 사업 때문에 정착한 사람들이 많다. 교민들은 민주평통자문위원회를 비롯해서 다양한 모임을 갖고 있었지만 진보적 역사의식을 공유한 단체는 없었다. 민족문제연구소 중국 광동지부 결성에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광동지역 등산모임과 2018년에 창립한 ‘광동포럼’이다. 이들은 함께 모여 등산하며 친목을 나누었고 서로의 생각을 교류했다.
광저우에서는 산악회장이 당연직으로 민주평통자문회의 부회장을 맡으며 영향력을 과시했고 정부(총영사관) 주도의 각종 사업에 동원되기도 했다. 하지만 2018년 민주평통자문회의 광동지부가 주최한 통일강연회는 그동안 유지되었던 밀월관계에 균열이 가게 했다. 몇몇 인사들은 교민들의 교양강화를 위해 ‘광동포럼’을 결성했고 독립운동과 민족의식 함양을 목적으로 ‘민족문제연구소 지부 창립’을 도모했다.

김유 지부장과 ‘아리랑로드 답사’

 


광동포럼은 최철호 씨가 주도했다. 박호균 사무국장은 민족문제연구소 광동지부가 깊이를 추구하는 단체라면 광동포럼은 역사문제뿐 아니라 주민들의 생업이나 생활과 관련된 폭넓은 주제를 다루는 대중조직이라고 정의했다. 광동포럼은 창립 직후 이준식 독립기념관장을 초청하여 한국독립운동사 강연을 개최했다. 또 개성공단지원협력관리위원장을 지낸 김진향 박사를 초청하여 개성공단의 불편한 진실과 통일문제, 남북경협에 관한 두 차례의 강연도 열었다.
KBS스페셜 ‘헤로니모를 찾아서’의 판권을 구입하여 교민 대상으로 무료상영도 했다.
하지만 광동 일대에 뿌려진 전사들의 피땀 어린 독립투쟁사를 발굴하여 교민사회에 친일잔재청산의 당위성과 역사의식을 불어넣고 싶었던 김유와 박호균은 ‘광동포럼’에만 만족할 수 없었다. 민족문제연구소 중국 광동지부 창립은 그렇게 만들어졌다. 등산모임과 각종 단체 활동을 통해 교류했던 김유, 박호균이 중심을 이뤘고 신광용, 최철호, 배상철이 적극 가담했다.
박호균 사무국장은 “어떻게 회원 중에는 등산모임 멤버들이 많은가?”라는 질문에, “등산과정에서 서로의 성향과 생각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광동지부는 김유가 초대 지부장, 박호균이 사무국장을 맡았다. 광동지역 교포들과 학생들을 대상으로 분기에 한 번씩 독립운동유적 답사도 실시한다. 이번 ‘아리랑로드를 가다’를 위해서는 김유, 박호균뿐 아니라 신광용, 배상철 회원의 역할이 컸다. 수차례의 학습모임과 무려 5차례의 현장답사도 실시했다. 이번 답사에 활용된 유적들 가운데 상당수는 님 웨일즈의 <아리랑>과 <김산평전>을 읽고 현장조사를 통해 새롭게 발굴한 성과물이다.

투쟁정신으로 녹록치 않은 상황을 극복해

광동지부장 김유(1955년생)는 사업가다. 고려대학교를 졸업하고 ㈜선경에 입사하여 해외근무를 많이 했다. 1995년 회사를 그만두고 중국 광동성 동관으로 건너와 사업을 시작했다.
사업은 무척 잘 되었다. 민족문제연구소와는 1992년에 인연을 맺었다. 당시만 해도 연구소의 명칭은 반민족문제연구소였다. 김유 지부장이 독립운동사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고려대 학교에 입학해서다. 당시 학장이 역사학자 김준엽 교수였는데 “학생은 왜 고대에 입학했나?” 라는 질문에 “선생님 뵙고 싶어 입학했습니다”라고 대답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대학 내내 역사학에 관심을 두었고 졸업할 때는 아세아문제연구소 연구원으로 근무하라는 제안도 받았지만 그에게는 돈이 필요했다.

 

박호균 사무국장

신광용 씨

 

생업 때문에 미뤄뒀던 독립운동사에 대한 갈증은 광동지역 동관에 정착하면서 다시 발현되었다. 사업이 순탄하고 생활이 안정되자 2000년 초부터 광동일대 독립운동 사적지 답사를 시작했다. 김유 지부장은 한국인으로 광동지역 독립운동유적이 정비되기 전에 답사한 것은 본인이 유일할 것이라고 말했다. 개인적 관심에만 머물렀던 독립운동사를 사회적으로 확대시켜야겠다는 생각을 2018년경 갖게 되었다.
2019년 초 사업에서 은퇴하면서부터는 본격적으로 활동할 것을 다짐하고 평소 교분을 나눴던 박호균 사무국장에게 손을 내밀었다. 광동지역 교민사회에서 영향력이 큰 신광용, 최철호 씨도 함께 했다. 이번 독립운동가 김산의 ‘아리랑로드를 가다’ 답사도 김유 지부장이 제안했다. 광동지역과 관련 있는 인물 가운데 김산(본명 장지락)은 중국과 한국, 북한에서 모두 인정받는 독립운동가이기 때문이다. 김유 지부장은 올해 경희대학교 문예창작과에 입학했다. 지금껏 발품을 팔며 조사하고 연구한 것을 신문과 잡지에 싣고 기록으로 남겨 후세들에게 알리고 싶기 때문이다.
열혈남 박호균(1964년생)은 광동지부 사무국장이다. 부산에서 은행원으로 일하던 그가 광저우로 이주한 것은 2009년이다. 지인이 운영하던 나이키 협력업체의 현지 주재원이었다. 4년반을 근무한 뒤 개인사업을 시작했다. 김유 지부장과는 동관등산회를 통해 만났다. 몇 년 동 안 광동지역 명산을 누비며 새로운 등산코스를 개발하고 많은 사람들과 어울렸다. 박호균은 등산모임을 통해 함께 했던 사람들의 생각과 뜻을 읽었다고 말했다. 2018년 후반 김유 지부장이 광동지부를 결성하자고 제안했다.
등산모임에서 뜻이 맞았던 사람들에게 회원가입을 권유했다. 그렇게 광동지부가 탄생했다.
현재까지 가입한 회원은 19명이다. 초기에는 월 1회 모임을 추진했지만 거리가 너무 멀어서 근래에는 모임을 적게 하고 인터넷이나 위쳇으로 소통한다. 박호균 씨에게 물었다.
“당신은 무엇 때문에 김산과 광동지역독립운동에 관심 갖게 됐나요?” 필자의 우문에 박호균 씨는 ‘미안
함’ 때문이라고 답했다.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미안함, 친일잔재청산에 동참하지 못했던 부채의식이 독립운동에 대한 관심과 열정의 근원이란다.
광동지부에는 김유, 박호균 외에도 17명의 회원이 있다. 그들 가운데는 답사준비에 동참한 회원도 있고 형편에 따라 잠시 짬을 내서 참가한 회원도 있다.
신광용(1958년생) 씨는 노동자 출신이다. 10대 어린나이에 청계천 평화시장에 취업하여 청계피복노조에서 활동하며 여러 사건에 연루되어 수형생활도 했다. 섬유사업을 시작했다가 국내 여건이 나빠지면서 몽골을 거쳐 광저우에 정착했다. 광저우에서는 산악회를 비롯해서 여러 사회단체에서 활동했다. 신씨가 민족문제연구소 광동지부에 참가한 것은 2018년에 개최된 민주평동자문회의 강연회가 계기가 되었다. 광동지부 창립 후에는 박호균 사무국장과 함께 독립운동유적 발굴 및 각종 활동에 앞장섰다. 이번 ‘아리랑로드를 가다’ 답사 준비와 모든일정에도 그의 애정과 열정이 담겼다.
장두인 씨는 재일교포 3세로 ㈜혼다의 광저우 주재원으로 광동지부 회원이 되었다. 민족문제, 통일문제는 자신과 상관없는 일이라고 생각했지만 지난 1년 동안의 활동으로 민족문제에 새로이 눈떴다. 일본에 돌아가서도 회원활동을 할 생각이다. 이은교(여, 1966년생) 씨는 광저우의 모 대학에서 한국어교수로 일한다. 6년 전 취업 때문에 광저우로 이주했다. 등산모임에서 만난 박호균 씨가 ‘역사와 관련해서 독서하고 답사하는 모임’이라고 해서 회원으로 가입했다. 평균 10여 명의 회원이 참가하는 독서모임과 답사는 항상 즐겁고 화기애애하다.
이혜정(여, 1970년생) 씨는 10여 년 전 광저우로 왔다. 근무했던 회사가 광저우로 이전할때 6개월 동안 출장 왔던 것이 계기다. 그에게 민족문제연구소는 친일인명사전을 만드는 단체쯤으로 인식되었다. 그러다가 등산모임에서 박호균 사무국장을 만나 광복절행사에 참가하면서 인연을 맺었다. 이씨는 아직 정식회원으로 가입하지 않았지만 각종 모임에는 뜻을 같이한다. 하루뿐이었지만 이번 ‘아리랑 로드를 가다’ 답사에도 동참했다. 이민우(1960년생)씨도 회원가입을 하지 않았지만 지부활동을 돕는 특급 도우미다. 이번 ‘아리랑로드를 가다’ 답사에도 마지막 1박 2일을 동행하며 사진촬영을 도맡았다.

뒤편에 장두인, 이은교 씨(왼쪽)

사진촬영을 담당한 이민우 씨

민족문제연구소 중국 광동지부는 아직 젊다. 앞으로 할 일도, 하고 싶은 일도 많다. 김유지부장은 향후 일정기간은 회원확대보다 내실을 다질 생각이라고 말했다. 박호균 사무국장도 본업에 충실하며 미완성의 아리랑로드를 착실히 보완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또 중국 쪽 인사들과 학문적, 인적교류도 확대할 것이며, 김산 선생의 후손을 초청하여 연대하고자 한다고 말했다. 김유 지부장은 양세봉 장군 유적답사에도 관심이 많다. 박호균 사무국장은 국내 회원들을 대상으로 1년에 2회 정도 ‘아리랑로드’ 답사를 개최할 계획도 갖고 있다. 백범김구기념관의 ‘청년백범’ 담당자에게 자료를 제공하여 향후 답사를 주도해달라고 요청했다고 한다.
아리랑로드 답사를 무사히 마치고 귀국길에 오르기 직전, 필자는 김유 지부장과 박호균 사무국장에게 부디 ‘건강하시라’고 당부했다. 건강한 몸으로 오래토록 민족정신을 되살리고 친일잔재청산에 노력해달라는 당부였다.

화, 2020/01/21- 0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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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

광복회, 반민특위 습격일에 경찰청장 사과 요구

광복회(회장 김원웅)는 6월 6일 오후 3시, 1949년 6월 6일 당시 친일경찰이 자행한 반민특 위 습격 사건을 잊지 않겠다는 의미로 반민특위 유족과 광복회원, 일반시민 70여명이 참여한
가운데, 서울 중부경찰서를 에워싸는 인간띠잇기 행사를 가졌다. 또한 당시 습격의 책임을 지
고 현 민갑룡 경찰청장의 공식사과를 요구했다. 민갑룡 경찰청장은 지난해 4월 3일 서울 광화
문광장에서 열린 제71주년 4‧3 광화문 추념식에 참석, 경찰총수로서는 처음으로 “무고하게 희
생된 분들께 사죄드린다”는 뜻을 밝혔으며 올해 5월 12일에도 제주4.3평화공원을 찾아 “경찰
의 지난날을 반성 한다”고 방명록에 적었다.

 


이날 행사는 중부경찰서 앞 가로수에 리본달기를 시작으로 김원웅 광복회장의 대회사, 송영길 의원의 인사말, 임헌영 소장 등 시민사회단체 대표들의 연대사, 구호제창 순으로 마무리됐다. 김원웅 회장은 “71년 전 오늘은 친일경찰이 반민특위를 습격한 ‘폭란의 날’로써 가슴 아프고 슬픈 날이었다.
이 날로부터 이 나라는 ‘친일파의, 친일파에 의한, 친일파를 위한’ 나라가 되었다”며, “광복회는 올해부터 이 날을 ‘민족정기가 짓밟힌 날’로 정하고, 매년 이 날을 애상(哀傷)의 날로 기억하고 결코 잊지 않겠다”고 밝혔다. 임헌영 소장은 “한국 현대정치사의 모든 부패와 부정의 뿌리는 반민법을 무력화시킨 데서 비롯됐다. 물론, 그 명령자는 이승만이지만 친일경찰들이 대세를 이루어 반민특위를 무장 습격한 경찰의 수치스런 과거를 그냥 넘겨서는 안 된다”며, “아직도 과연 경찰이 과거의 미망에서 깨어났는지 각성하는 계기를 삼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화, 2020/06/23- 1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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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원회원 마당]

3·1독립선언서 세계기록문화유산 등재를 제안합니다

김판수 전북 후원회원

 

‘3·1독립선언서’는 1919년 3월 1일 조선민족대표가 “조선이 독립국”임을 온세계에 분명하게 선포한 조선독립선언입니다.

지금으로부터 백년 전 선포한 ‘3·1독립선언서’는 침략자 일본의 잔인무도한 폭압 아래 칠흑 같은 어둠 절망에 빠져있던 이천만 겨레에게 한줄기 광명의 빛, 구원의 복음, 민족자주독립 희망의 등대였습니다.
그 무서운 총칼 앞에 태극기만 들고도 당당히 외쳤습니다.
만세! 만세! 조선독립만세!

남자도 여자도 어른도 아이도 힘있는 사람 힘없는 사람
부자도 가난뱅이도 귀한 사람 천한 사람 잘난 사람 못난 사람
주인도 머슴도 집없는 거지도 조선사람이면 조선팔도 어디서나
서울사람 시골사람 산골에서 갯가에서 빠짐없이 전부 모두 함께
목소리도 하나 만세 하나로 삼천리강토가 온통 하나가 되어 만세파도로 덮여버렸어요.
간도 연해주 일본 하와이 타향살이 이민 유민 피난민 정신 번쩍 깨어 벌떼처럼 일어났지요.
만세! 만세! 총칼 앞에서 만세!
질질 끌려가며 조선독립만세!
매맞으며 만세! 감옥이 터져라 만세!
아 ~~~ 목숨까지 던지며 조선독립만세!
맨손으로 나서서 분풀이 안 하고 비폭력으로 맞서 보복은 없었지요.
기미 3·1만세는 유순하고 평화롭고 위대하고 숭고하였더라.

십년 동안 나라없이 살던 겨레가 이천만이 모두 주인되어 민주를 심었지요.
자발적으로 능동적으로 적극적으로 똘똘 뭉쳐서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세웠습니다.
우리나라 대한민국이 3·1만세로 섰습니다.
‘3·1독립선언서’는 이 나라 민주의 뿌리, 대한민국의 든든한 뿌리입니다.
백년 지난 지금도 삼천리 반도는 강대국이 탐내는 먹잇감

백년 전이나 지금이나 백년 후 그 다음 백년 후에도 우리 겨레의 땅

우리 강토 지켜내려면 자력 자립 자강 자주독립정신만이 생명선입니다.
‘3·1독립선언서’는 이땅 우리 겨레의 영원한 보물 나침판입니다.
지구촌 곳곳에서 강대국 횡포에 시달리는 피압박 약소민족에게 희망과 용기를 줍시다.

[3·1독립선언서]를 세계기록문화유산으로 등재하여 지구촌 전인류 문화유산으로 보존하자고 제안합니다.

2020. 2. 1. 여럿이함께손잡고 ‘평화의길’ 김판수 두손모음

금, 2020/02/21- 0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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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역사박물관 소식]

 

신갈고등학교 역사인권동아리 ‘사인’ 기부증서 수여식

 

지난 11월, 박물관으로 한 통의 전화가 왔다. 신갈고등학교 역사인권동아리에서 독립운동가 배지를 제작하여 판매하였고, 수익금을 박물관에 후원하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감사한 마음을 담아 기부증서를 수여하고자 방학을 맞이한 1월, 학생들을 박물관으로 초대하였다.


역사의 ‘사(史)’와 인권의 ‘인(人)’을 따서 만든 신갈고등학교 내 역사인권동아리 ‘사인’은 역사와 인권 문제에 관심이 있는 학생들이 모여 만든 동아리로 올해 10년이 되었다.

2019년 교내 축제에서 ‘태극기를 그려라’라는 행사를 통해 전교생이 태극기의 의미를 되새기는 기회를 제공하는 한편, 학생들이 흥미를 가질 수 있도록 일제시대 헌병경찰 복장을 대여하여 당시 상황을 재연하면서 학생들이 일제강점기를 잠시나마 고민해보는 시간을 가지도록 기획하였다고 한다. 더불어 3・1운동 및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기념하여 독립운동가의 모습을 형상화한 배지를 제작하여 판매하였다.

1월 7일, 담당교사 송지호(후원회원)님의 인솔 하에 18명의 동아리 학생이 식민지역사박물관에 방문하였다. 동아리 및 기부프로젝트에 대한 소개를 듣고 모든 학생에게 기부증서와 기념 선물을 증정하였다. 이후 상설전시관을 관람하며 일제시기와 해방 이후 역사에 대해 공부하는 시간을 가졌다. 기억과 성찰의 역사행동에 함께해준 소은지, 오혜빈, 유지나, 이서연, 정윤서, 안형민, 이유찬, 허정인, 김성욱, 배승연, 서화진, 장우혁, 김정호, 황서연, 황석우, 김민성, 한솔비, 김가연 님께 다시 한 번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

금, 2020/02/21- 0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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