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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석동 한강변 언덕 위에 한강신사가 건립된 까닭은? – 서울 지역 곳곳에 포진한 일제 침략신사들의 흔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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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석동 한강변 언덕 위에 한강신사가 건립된 까닭은? – 서울 지역 곳곳에 포진한 일제 침략신사들의 흔적

익명 (미확인) | 월, 2018/07/02- 17:18

식민지비망록 37

흑석동 한강변 언덕 위에 한강신사가 건립된 까닭은?
– 서울 지역 곳곳에 포진한 일제 침략신사들의 흔적

 

이순우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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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한강신사 터를 활용하여 지난 1994년에 재건된 ‘효사정’의 모습.

 

한강대교를 남쪽으로 건너 서울현충원 방향으로 500미터 남짓 걷다보면, 지하철 9호선 흑석역(중앙대입구)에 조금 못 미쳐 한강변 쪽으로 약간 솟아오른 작은 봉우리 하나를 만나게 된다. 1955년 6월 25일에 건립된 학도의용병현충비(學徒義勇兵顯忠碑) 앞을 지나 돌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효사정(孝思亭)이라는 이름의 정자가 나타난다.
효사정은 원래 세종 때 우의정을 지낸 공숙공(恭肅公) 노한(盧閈, 1376~1443)의 별서(別墅)였다고 전해지는 유적이다. 그는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시묘살이를 했던 곳에다 정자를 짓고 때때로 이곳에 올라 모친을 그리워했고, 멀리 개성 땅에 묘지를 쓴 부친을 추모했다고 하여 ‘효사정’이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경기금천현(衿川縣)‘누정(樓亭)’조에“노량나루터 남쪽 언덕에 있는 정자”라는 정도의 간략한 내용이 남아 있긴 하나 사실상 이것만으로는 더 이상의 정확한 원위치 고증이 어려운 상태이다.
하지만 지난 1994년에 서울 정도 600년을 맞이하여 이를 기리는 사업의 하나로 한강주변의 유적지를 복원 정비하는 계획이 추진되었고 이때 편의상 부득의하게 지금의 자리를 선정하여 정자를 재건하기에 이르렀다. 이곳이 진짜 효사정 자리인지에 대한 논란을 차치하고라도 이 정자에 오르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강 쪽 전망이 참으로 빼어나다는 점에 공감하게 된다.
그런데 이 장소는 일제강점기를 거치는 내내 ‘한강신사(漢江神社)’라는 시설물이 터를 잡고 있었던 곳이라는 사실도 꼭 함께 기억할 필요가 있다. 후지이 가메와카(藤井龜若)가 펴낸 <경성의광화(京城の光華)>(조선사정조사회,1926)를 보면, 이한강신사의 건립유래가 다음과 같이 정리되어 있다.

 

한강신사는 인도교(人道橋)를 건너 동쪽의 작은 언덕에 숲속에 한줄기 끈과 같은 가느다란 길이 산꼭대기까지 걸쳐 있는데 그 산부리의 약간 높은 상두산령(象頭山嶺)의 영지(靈地)에서 제사를 지낸다. 제신(祭神)은 미야지대사(宮地大社), 코토히라대신(金刀羅大神), 스가와라대신(菅原大神)의 삼신(三神)으로 인도교 가교 청부인(請負人)이던 시키 노부타로(志岐信太郞) 씨가 대정 원년(1912년) 금상폐하(今上陛下, 대정천황을 말함)의 즉위를 기념하고 아울러 고국을 멀리 떠나온 재선민(在鮮民: 조선 거주 일본인)을 비롯하여 동포선인(同胞鮮人)에게 경신숭조(敬神崇祖)의 미풍을 가르치려는 돈독한 뜻에 따라 이곳 산자수명한 정지(淨地)를 택해 사재 십수 만 원을 들여 한강수호의 신으로 삼아 헌립(獻立)한 것이며, 매년 봄가을(5월 4일, 10월 4일)에 행해지는 대제례일에는 내선인의 참배자가 원근에서 운집하여 번잡함이 흡사 대공원의 모습을 보여준다.
섭사(攝社)에는 이나리신사(稻荷神社), 시키신사(志岐神社), 야신신사(矢心神社)를 모시며, 이 지역은 예로부터 영산(靈山)으로서 조선인들이 숭배하던 곳이다. 경내의 바위 사이에는 기이한 한 그루의 소나무가 있다. 와룡송(臥龍松)이라 부르는 유명한 나무로 수령이 수백 년이 넘는 신목(神木)이다.

 

여기에 나오는 시키 노부타로는 1869년생으로 일본 후쿠오카현(福岡縣) 출신이며, 자신의 토목건축회사인 시키구미(志岐組)를 통해 경부철도 속성공사를 비롯한 철도관련 청부업에 주력하여 부를 축적한 인물이었다. 그는 특히 1921년에 조선의 특산물이라고 일컬어지던 천연빙(天然氷), 즉 겨울철 한강 얼음을 채취하여 저장 판매하기 위해 조선천연빙주식회사 및 조선천연빙창고주식회사를 설립하였고, 1936년에 이들 회사와 여타 제빙회사가 조선제빙주식회사(朝鮮製氷株式會社)로 통합 전환한 이후에도 사장의 자리를 지킨 바 있다. 따라서 그는 이래저래 한강과는 많은 인연을 지닌 사람이었던 것으로 풀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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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일보>1934년 12월 2일자에 수록된 토끼사냥 야유대회관련 명수대 주변 약도에는 ‘한강신사’의 위치가 또렷이 표시되어 있다. 오른쪽 아래에 ‘화장사’라고 표시된 사찰은 오늘날 서울현충원 구내에 있는 ‘호국지장사’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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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신사가 자리한 흑석동 한강변의 풍경. (<일본지리대계(조선편)>, 신광사, 1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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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1년 기노시타 사카에가 개발을 주도한 명수대 주택지(현 흑석동)의 전경. 왼쪽으로 보이는 한강변 봉우리 위의 건물이 한강신사이다. (경성전기주식회사, <뻗어가는경성전기>, 1935)

 

이곳 한강신사의 제신으로 언급된 ‘미야지대사’는 일본 후쿠오카 소재 ‘미야지다케신사(宮地嶽神社)’를 말하는데, 시키의 고향에 있는 신사 그 자체가 숭배의 대상이었던 듯하다. 또한 ‘스가와라대신’은 일본 헤이안시대의 정치가 스가와라노 미치자네(菅原道眞)를 말하며, 대개 ‘학문의 신’으로 추앙되는 인물이기도 하다. 그리고 ‘코토히라대신’은 불교에서 일컫는 약사십이신장(藥師十二神將)의 하나이며 원래 인도 갠지즈강에 살았다는 쿰비라(Kumbhira, 蛟龍)에서 유래된 것으로, 일본에서는 바다를 수호하는 신으로 인지되어 일반적으로 선박 안전을 비는 대상으로 자리매김되어 있다. 한강신사가 자리한 봉우리를 일컬어 상두산(象頭山)이라고 한 것은 일본 가가와현(香川縣)에 있는 곤피라산(金刀比羅宮: 신사명)의 소재지에서 그대로 따온 이름으로 받아들여진다.
오카 료스케(岡良助)가 쓴 <경성번창기>(박문사,1915)라는책에는이곳이웅진강신사(熊津江神社)라는 이름으로 소개되어 있는데, 한강신사는 그 이후의 시점에서 고쳐진 명칭인 듯하다. 아무튼 이곳은 일본인의 입장에서 한강 수호의 신으로 삼아 설립된 것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1912년에 그네들의 천황이 등극한 것을 기념하는 뜻에서 이러한 신사가 탄생하게 되었다는 점에도 깊이 유념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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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총독부관보>1934년 5월 14일자에는 한강신사가 ‘신메이신사’라는 이름으로 새로 설립허가를 받은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그런데 일제패망기에 대륙신도연맹(大陸神道聯盟)에서 엮어낸 <대륙신사대관(大陸神社大觀)>(1941)을 보면, 여기에는 한강신사의 명칭이 ‘神社’가 아닌 ‘神祠’로, 이곳의 제신(祭神)이 ‘천조대신(天照大神, 아마테라스 오미카미) 외 11신’으로, 창립일도 1912년이 아닌 ‘1934년 5월 9일’로 각각 변경 표기되어 있는 것이 확인된다. 이 점에 착안하여 <조선총독부관보>를뒤져보았더니1934년 6월 14일자에 수록된 “경기도 시흥군 북면 흑석리에 신메이신사(神明神祠) 설립의 건이 기노시타 사카에(木下榮) 외 72명으로부터 원출(願出)된 것에 대해 5월 9일부로 이를 허가함”이라는 기록이 눈에 띈다.
여기에 나오는 기노시타는 한강신사의 설립자인 시키의 고향 후배이면서 ‘시키구미’와 ‘조선천연빙주식회사’에 오랫동안 근무하면서 경력을 쌓았고, 1931년에는 지금의 흑석동 일대에 명수대토지경영사무소(明水臺土地經營事務所)를 꾸려 자신만의 이상향(理想鄕)으로 가꾸는 일에 주력했던 사람이었다. 1917년 3월 22일에 제정된 총독부령 제21호 「신사(神祠)에 관한 건」에 따르면 “신사(神祠)라고 칭함은 신사(神社)가 아니면서 공중(公衆)에 참배를 시키기 위해 신기(神祇)를 봉사하는 곳을 말한다”고 규정하고, 이를 설립하려는 때는 조선총독의 허가를 받도록 되어 있었다. 따라서 기노시타가 신사의 설립을 새로 청원한 것은 이에 따른 절차인 듯이 보인다. 또한 신메이는 아마테라스 오미카미의 별칭이므로, ‘신메이신사’는 이를테면 이세신궁(伊勢神宮)을 총본산으로 삼아 아마테라스 오미카미를 주된 제신으로 모시는 가장 보편적인 형태의 신사(神祠, 격이 낮은 소규모 신사)인 셈이다. 이런 사실에 비춰보면 1930년대 전시체제기로 접어들면서 이러한 시대의 변화에 맞물려 한강신사 자체의 기능과 성격에 있어서 제도적인 환골탈태가 진행된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일제강점기 서울지역에 설치되어 있던 일제의 신사들을 얘기하면, 남산 왜성대에 자리한 경성신사(京城神社)와 남산 중턱 옛 한양공원 터에 들어선 조선신궁(朝鮮神宮, 1925년 10월 준공) 정도를 언급하는 것이 보통이다. 원래 경성신사는 1898년에 남산대신궁(南山大神宮)으로 설립되었다가 1913년에 경성신사로 개칭되었으며, 이 안에 천만궁(天滿宮, 1902년 창립), 남산도하신사(南山稻荷神社, 1931년 창립), 팔번궁(八幡宮, 1931년 창립)을 섭사로 거느리고 있었다.
이밖에 경성신사의 뒤쪽에 자리하고 있는 노기신사(乃木神社, 1934년 창립)와 용산 일본군병영지의 후면 남산 기슭에 조성된 경성호국신사(京城護國神社, 1943년 창립) 등의 존재도 곧잘 언급되고 있다. 하지만 이것들 말고도 태평로 쪽에 에비스신사(惠比須神社, 1913년 창립)를 비롯하여 원효로 인근 영정(榮町, 지금의 신계동 1번지 위치)에 있는 문평산(文平山)에는 가토신사(加藤神社, 1914년 창립)라는 것이 있었고, 신메이신사는 영등포동, 용두동, 신길동, 이태원동 등지에도 두루 포진하고 있었던 사실이 확인된다.
<매일신보>1943년5월18일자에는「신사(神祠)의신마(神馬)도출정(出征),금일한강신사(漢江神祠)에서 장행회(壯行會) 거행」 제하의 기사가 수록되어 있는데, 이것이 한강신사에 관해 현재까지 드러난 막바지 기록이다.

 

미영격멸에 신마(神馬)도 출정 ― 부내 한강신사 앞에 모셔 논 구리로 만든 신마가 출정하기로 되어 17일 오전 10시 동 신사에서 장행회를 거행하였다. 여기에는 군 애국부의 히라이 대위(平井大尉)와 기노시타(木下) 흑석정 총대 이하 정민(町民) 다수가 참열한 아래 성대히 거행하였는데 이 신마는 대정 10년도(1921년도)에 건립하여 지금까지 23년 동안 동 신사 앞에서 있던 것으로 이번에 육군에 헌납키로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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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신보> 1943년 5월 18일자에 수록된 한강신사 신마 출정 장행회 관련 보도사진.

 

여기에 흑석정 총대로 언급된 기노시타는 바로 명수대토지경영사무소 사장과 동일인이다. 겉으로는 한강 수호의 성지인 듯이 말하지만 결국에는 출정황군의 무운장구를 빌거나 전쟁동원을 위한 총력체제의 결집장소로 활용되고 마는 것이 바로 일제가 만든 이들 침략신사의 본질이 아닌가 싶다.

시민들의 의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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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

야스쿠니반대촛불행동 2020 행사, 일본 타이완 서울에서 화상회의로 동시 진행

 

 

8월 8일 도쿄의 재일본한국 YMCA에서는 ‘2020 평화의 촛불을! 야스쿠니의 어둠에’ 야스쿠니반대촛불행동이 열렸다. 이 행사는 침략신사 야스쿠니를 반대하고 평화를 염원하는 동아시아 시민들이 2006년부터 “야스쿠니 반대! 합사 철회!”를 외치며 평화의 촛불을 들어 온 이래 올해 15주년을 맞았다. 연구소는 야스쿠니반대공동행동한국위원회의 사무국을 맡아 야스쿠니합사철폐 소송을 비롯하여 야스쿠니반대운동을 주도적으로 이끌어왔다.
올해 행사는 코로나19로 인해 화상회의 형식으로 일본, 타이완, 서울에서 동시에 진행되었다. 야스쿠니반대공동행동의 서승 공동대표,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의 이희자 대표를 비롯한 유족들과 심포지엄의 발표를 맡은 성공회대 김동춘 교수 등 한국 참가자 20여 명은 연구소 5층 강의실에서 온라인으로 참가했다.
‘코로나, 올림픽과 야스쿠니’를 주제로 진행된 심포지엄에서는 기조발제를 맡은 다카하시 테쓰야(高橋哲哉) 도쿄대학 교수를 비롯하여 후쿠시마(무토 루이코 武藤類子), 오키나와(고메스 기요사네 米須清真)를 주제로 한 발표가 있었고, 우롱유엔(呉栄元) 타이완 노동당 주석은 ‘백색테러와 일본의 식민지지배’를 주제로, 김동춘 교수가 ‘일제 식민통치와 한국전쟁’을 주제로 발표했다.
재일조선인 가수 이정미 씨의 콘서트, 서승 공동대표의 폐회사에 이어 화상으로 진행된 촛불시위 순서에서는 한국 유족들을 비롯한 일본, 타이완 참가자들이 아침이슬을 함께 부르며 ‘NO 야스쿠니! NO 아베!’의 결의를 한 목소리로 외쳤다. 코로나19 사태로 비록 한 자리에서 만나지는 못하지만 평화를 염원하는 동아시아 시민들의 연대의 함성은 그 어느 때보다 크게 울려 퍼졌다. • 김영환 대외협력실장

수, 2020/08/26- 0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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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

“지금, 언론개혁을 말한다” 특강 열려

 

기획전 개막과 더불어 언론개혁을 촉구하는 특강도 함께 열렸다. 적폐언론의 대명사가 된 두 신문이 지난과오에 대해 침묵하고 이제는 최소한의 언론윤리마저 저버리고 극우수구세력의 대변지 역할에 앞장서고 있다. 민족문제연구소는 이들의 진면목을 널리 알리기 위해 일제강점기 조선‧동아의 100년을 돌아보고 한국 언론의 문제점과 개혁 방향을 진단해 보는 특강을 마련했다.
과거 유신독재에 맞서 자유언론실천운동을 펼친 원로 언론인 김종철 전 동아투위 위원장부터, 조선‧동아 100년의 역사를 추적해온 역사학자 장신 교수와 적폐언론의 개혁 방향을 제시할 언론학자 박용규‧정준희 교수, 현재 적폐 언론과 치열하게 싸우고 있는 언론감시 활동가 민주언론시민연합 신미희 사무처장과 안진걸 민생경제연구소장을 모시고 한국 언론의 과거와 현재, 언론개혁의 미래를 살펴보았다.
코로나 19로 8월 20일부터 현장참가는 제한하고 모두 온라인으로만 진행하고 있다. 8월 11일부터 8월 27일까지 6회에 걸친 특강은 유튜브 민족문제연구소 채널(https://www.youtube.com/user/MinjokMovie)에서 보실 수 있다.

• 김승은 학예실장

수, 2020/08/26- 0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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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원마당]

민족문제연구소 군산·김제 답사기

김영희 서울 광진 회원

<반일 종족주의>라는, 직함은 허위이고 폭력이 일상화된 대표저자와 그들의 시대착오적인 배설물로 인해 지난여름부터 심기가 불편했다. 무슨 짓을 했길래 이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었는가. 그것도 아베의 경제 도발로 일본상품 불매운동이 탄력을 받는 이 시기에. 무시가 상책이지 하고 모른척했지만 불편함은 그대로 남아있었다. 조모씨가 ‘구역질나는 책’이라 하든, 홍모씨가 ‘보수 우파의 상식과 어긋나는 책’이라 하든, 그런 표현은 이 책에는 과분하게 고상했다.
자기정체성을 깨닫지 못한 채 정확하지 않은 통계수치에 수상한 목적성을 가지고 접근하는 저 곡학아세파에 대해 나는 그저 한 가지가 궁금할 따름이었다. 지금의 이 독립된 나라에서조차 자발적으로 습득한 식민사관이 저다지도 투철한 저들은, ‘일제강점기에 태어났었다면 과연 어떤 지경까지 친일을 했을까?’
가을 초입 그들의 오류를 바로잡아 주는데 힘써 오신 허수열 교수님이 인솔하는 군산·김제 답사가 있다는 소식을 문자로 받았을 때, 기회를 놓칠세라 당장 신청했다. 살아가면서 교통사고처럼 일상공간에서 돌발적으로 만나는 사람들이 가진 태극기부대스러운 사고들. 이에 대처할 무기가 절실했는데 그들의 논리적 오류를 학문적으로 따져볼 기회를 꼭 잡아야겠다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답사대상자로 선택받아 안내 문자가 왔을 때는 감격과 함께 뒤늦게 걱정이 시작되었다. 왜 혼자 신청했을까. 좋은 것은 혼자 보는 게 아니라고 그래서 여행만큼은 절대 혼자는 안 가던 나는 버스에 올라타기까지 용기를 내야 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여행은 시쳇말로 ‘취저’(취향저격)였다. 죄다 모르는 사람들이었지만 모두 진지하게 학습하는 분위기여서 혼자인 것이 오히려 조용히 설명에 집중할 수 있었고 버스이동시간에 어색함을 깨기 위한 그 흔한 자기소개도 안 시켜서 숫기 없는 나로서는 매우 감사했다. 연구소에서 정성껏 준비한 간식 봉투, 물과 커피음료, 수첩과 필기구, 맛깔난 전라도 상차림의 점심과 저녁식사, 전북 민문연 회원들께서 준비해주신 김제농협 신동진쌀까지 선물로 그득히 받았다. 참가비도 없었으므로 어느 것 하나도 받기가 송구스러웠지만 20여 년 민문연 회비를 내었으니 오늘은 되받는다는 생각으로 감사히 받겠습니다 하고 합리화해봐도 참으로 많이 챙겨주셨다. 받은 것 중에 가장 큰 것은 역시 허수열 교수님으로부터 받은 지식의 세례였다. 이날 들은 지식들은 식민지근대화든 조국근대화든 경제대통령이든 근대화시켜준다 잘 살게 해준다는 경제적 논리를 내세워 자기욕망을 채우려는 세력과 그에 부화뇌동하는 이들을
맞닥뜨릴 때마다 매우 유용하게 조용하면서 강한 위력을 발휘할 것들이었다.

10월 5일 토요일. 날씨는 맑았다. 사실 군산 답사라길래 군산 시내 곳곳의 적산가옥이나 항만시설을 둘러보는 것인가 하고 떠났는데, 자료집을 여는 순간 온통 논과 강줄기와 방조제만이 표시된 지도들을 보면서 깨달았다. 도심으로 들어갈 일이 없을 답사라는 것을. 이동하는 중에 펼쳐지는 호남의 너른 들 자체가 오늘 답사지의 처음이고 끝이었다. 그래서 우리가 가는 곳마다 사람 구경 할 일도 전혀 없었다. 마지막 답사지인 김제 죽산리 일본인 하시모토의 농장 사무실과 원평천 해창갑문을 제외하고는 구경온 사람들이라고는 단 한 명도 없었다. 황량하여 별스럽고 그래서 더 전문적인 연구자들 같아 보이기도 하는 우리는 참으로 특이한 답사단원들이었다.
이 답사를 원경으로 묘사하면 밀레의 자연주의 화풍의 평화로운 그림, 근경으로 묘사하면 수확기가 되어도 내 배 채울 곡식 없는 그림의 떡과 같은 황금들판 액자틀 같았다고 할 수 있었다. 내 고향이 경상도여서 서울에서 내려갈 때마다 좌우로 산으로 턱턱 막힌 도로만 보다가 난생처음 호남고속도로를 달릴 때 너무나 경이로웠던 기억은 지금도 선명하다. 우리나라에도 이렇게 탁 트인 지역이 있구나 산이 없는 땅이 있구나… 이렇게 광대한 들에서 허리 휘어지게 일하고 수확했는데 모조리 수탈당한다면 동학 농민 봉기뿐 아니라 더한 것도 일어날 만 했겠구나 라고 한방에 이해되던 순간이었다. 그 평야 중에서도 가장 너른 들인 김제·만경 평야는 한반도에서 지평선이 보이는 유일한 땅이라고 교수님께서 해설해주셨다. 차를 타고 늘 스쳐지나갔던 평야 중에서도 가장 너른 들 속으로 들어가 한 점이 된 하루였다. 자료집 구글 어스 사진으로 보아도 실제 내 눈으로 보아도, 넓은 만큼 물도 많이 필요했겠는데 물은 드물어 보였고 그래서 수리시설 보급이 그 어느 곳보다 절실했던 지역이었나 보다. 교수님 설명이 이 지역은 하천의 길이가 짧아서 남쪽 섬진강 수계에게 유역변경방식으로 물을 끌어오기도 했다고 하였다.
그래서 답사 경로는 동진강의 상류인 낙양취수장 낙양취입수문부터 하구쪽으로 내려가면서 동진강 하구언, 정읍천 합류지점인 만석보를 들렀다가, 벽골제 둑길을 따라 수문까지 걷고, 방조제인 하구 갑문까지 가는 코스였고 중간중간 일본인 지주들의 곡식창고와 관리소를 들렀다. 만경현이라는 이곳 지명이 붙여진 것은 신라 경덕왕 때였고 ‘경’이 중국 주나라 때부터의 면적 단위이므로 그 오래전부터도 경지면적이 아주 넓다는 뜻을 담은 지명을 붙인 것이라고 하였다.
삼국시대 아마도 벼농사를 시작했을 시기부터 있었던 벽골제와 고려, 조선 시대의 수리시설 보강 위에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현재까지 점차 근대적 토목공사로 현대화되어왔을 수리시설은 현재 수문이나 농업용수 공급이 과연 제 기능을 하고 있는 것인지 의아스럽게 가는 곳곳 물이 하천 바닥에만 겨우 수맥을 이을 정도로 말라 있었다. 그래서인지, 풍요로워야 할 이 가장 넓은 들이 아이러니하게도 더 빈곤해보였고, 산업화시기를 거치며 농촌은 더 망가졌고, 일제 수탈의 시기나 그 전 전근대 왕조시대 수탈을 생각해보아도 이 광활한 평야의 경작자들이 그 어느 시절 언제 한번 풍요로운 적이 있었을까 싶어서 종일 들판을 걸으면서 이 좋은 가을날씨와 평화로움을 마냥 만끽하기에는 계속해서 처연한 기분이 함께 찾아왔다. 
역사시간에 강조점을 찍으며 배운 만석보는 기대하고 갔으나 터에 기념비 하나 남겨놓은 것 빼고는 흔적도 영역도 안내문도 보이지 않아서 아쉬움이 컸다. 관광자원개발까지는 아니라도 안내문이라도 상세히, 혹은 고부봉기를 자세히 학습할 수 있는 박물관이 세워지면 이곳이 더 의미있게 기억되고 일제에 의해 잔혹하게 진압되어 사라져간 동학과 민중의 역사에 대해서 길이 기억될텐데. 친일파의 흔적들은 역겹게도 하시모토 농장 사무실 뒤 등 곳곳의 비석에 남았는데 정작 이름 없이 사라진 중요한 민중들의 역사야말로 우리 손으로 더 영광스럽게 남겨주어야겠다고 다짐하였다.
이 답사에서 가장 기대했던 것은 식민지근대화론 반박이었고 교수님은 그들의 허술한 근저를 보여주셨다. 1990년대 초 일본군 ‘위안부’의 대두로 고노 담화, 무라야마 담화 등 일본 내의 반성의 목소리에 당황한 일본 극우는 후쇼사의 교과서를 채택시켰고 세력을 강화하여 지금의 아베 정부까지 이어오고 있다. 그런 일본 우파의 목소리를 국내에서 메아리로 화답하던 뉴라이트도 이들과 함께 1990년대와 2000년대 들어서 목소리를 높이고 일본보다 10년 늦게 교학사교과서 선정과 국정교과서 제정을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일본과 달리 우리나라의 우파 교학사교과서는 전국 채택률 제로 신화를 이룩해냈으며 국정교과서 제작 지시를 내린 자를 축출하는 신화를 만들어낸 주체는 바로 자랑스러운 이 나라 국민들이다. 모든 시도가 실패하고 남은 저들의 마지막 보루가 낙성대경제연구소이며 그 마지막 토사물이 ????반일 종족주의????인 것으로 보인다. 자기 민족인데 자기 민족을 종족이라고 부족 수준으로 폄하하는 이 국적 불명의 연구자 집단이 왜 한국을 터전으로 하여 사는지가 가장 이해 안 되는 지점이다. 터전을 아예 일본으로 옮겨서 활약하면 더 각광받을 텐데.
답사 자료집을 설명해주시면서 교수님은 1910년대 큰 수치로 성장하던 경제성장률을 저들이 우량품종의 보급 덕분이라고 주장하며 1917년 지도를 예로 들어 설명했다고 하였다. 그러나 교수님이 밝힌 바에 의하면 그것은 1910년대도 아닌 1921년의 지도였고 산미증식계획을 추진하던 시기의 성장률은 오히려 둔화되었던 것으로 설명해주셨다. 이 지역은 그들이 얘기하듯 일본 덕에 옥토로 바뀐 것이 아니라 오랜 세월 수리시설 보강으로 이 시기에 이미 옥토였고, 오히려 수탈에 의해 황폐해진 그 아픈 현장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며 설명을 들었다. 특히 발굴해서 복원해놓은 내륙 깊숙한 벽골제의 수문 위치를 보니 이영훈이 말하는 대로라면 벽골제가 방조제였고 그래서 이곳까지 바닷물이 드나들었으므로 일제에 의해 개발되기 전 황량한 갯논이었다는 주장이 말할 필요도 없는 엉터리임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저들이 이 들에 단 한번이라도 와봤다면 도저히 꺼낼 수 없는 주장이었다. 이날 답사는 식민지근대화론의 거짓을 눈으로 명확하게 보게 해주었다.
김제군이나 옥구군, 익산군처럼 일본인 소유지 중 면적이 넓은 곳만 하천을 개발하고 있었던 것도 교수님의 자료들로 확인할 수 있었다. 그들의 개발은 애초부터 우리를 위한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강탈해간 토지로 부와 명예를 누린 것은 일본 상인과 재벌들이었다. 구마모토 리헤이의 여름 별장은 백두산에서 운반해온 낙엽송으로 외벽을 두르고 마루는 일본에서 수입한 삼나무를 깔고 지붕은 자연석 청판석을 덮은 호사스런 건축물로 공사비가 조선총독부 관저와 비슷했다고 하였다. 그의 농장에서 수확한 쌀을 보관하는 창고는 지금도 그 자리에 그 규모로 신축되어-지역에서 무슨 용도로 최근에 왜 신축하였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안은 텅 비어 있었다- 2층 높이로 우람하게 서있는데 그 높은 건물을 가득 채웠을 쌀이 모두 일본으로 반출되어 나갔다. 이들 일본인 지주들은 그 부를 가지고 또다시 조선의 문화재들까지 수집하고 반출하는데 썼다고 하니 이중으로 울화통이 터질 일이다.
무엇보다 그들의 통계는 위험하다. 통계는 특히 과거의 통계는 정확하지도 않을 뿐더러 작성자의 의도를 담고 있다. 그리고 이 위험한 통계는 해석하는 사람의 의도에 따라 한 번 더 왜곡된다. 교수님은 1910~1918년 토지조사사업 완료 전까지는 조선의 토지와 생산량에 대해 정확한 파악이 어려웠고 토지조사사업이 완료된 후에도 과거의 통계를 일제 스스로 두 번이나 전면 수정하는 등 총독부 스스로도 못 믿을 통계이었음을 확인시켜주었다고 했다. 저 친일학자들은 그 엉터리 통계에 기반하여 모래탑을 쌓아올린다. 식민지근대화 논리는 이 위험한 숫자가 아니라 상식으로 풀어야 한다. 일본이 우리 국민 잘 살게 해주려고 개발을 시작했는가? 수치 몇 개로 제국주의 통치를 합리화할 수 없다. 키플링이 백인의 짐이라고 하며 지배했던 아프리카에 영국인들이 과연 흑인을 잘 살게 해주려고 들어갔던가, 그리고 그들은 이후로 실제로 잘 살게 되었는가에 Yes라고 대답할 수 있을 때 친일학자의 식민지근대화론도 같은 맥락에서 지지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총독부는 진정 조선인들을 위해 개발을 시작했는가? 그 개발로 조선인들은 모두 얼마나 잘 먹고 잘 살게 되었는가?
우리의 보물인 조정래 선생의 <아리랑>과 허수열 교수의 저서 <개발 없는 개발>을 찾아 읽는 것으로 이날의 끝도 없이 넓은 광야 답사를 마무리 짓는다.

금, 2019/11/29- 0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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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원마당]

반역을 중단하라
서정주 문학제 철폐 촉구

 

동학농민 민중해방혁명 125년
기미3·1독립혁명 100년
8·15민족해방 광복 74년이
지났는데, 아직도
못난 짓 하고 잘난 체하던 배신자를
찬양하고 기리는 나라
이것은 시대의 반역이다
부끄럽다!
강도에게 강탈당한 나라
나라잃은 백성 자유를 빼앗기고
미래를 뺏겼으니 희망도 빼앗기고
강제로 끌려가 목숨까지 빼앗겼다
힘없어 못 끌려간 노약자들
뼛골 빠지게 지은 농사
소출은 빼앗기고 주리를 틀렸다
2천만 민중은 죄다 노예되고

3천리 강토는 통째로 감옥통
아-아! 어찌 잊으랴 압박과 설움
피울음 우는 동포 냉정하게 외면하고
개처럼 기어가며 일신은 영달했다
인도를 배신했던 이기의 달인 서정주
광복은 됐지만 일제부역 사죄않고
양심도 없었는지 반성도 없었다
침략자 앞잡이 반민족 대역죄인
처벌은 못할망정 찬양이 웬말이냐
아직도 끝나지 않은 반역 중단하라
서정주 문학제 지금 당장 철폐하라

2019.11.2.
여럿이 함께 손잡고 ‘평화의 길’ 김판수

토, 2019/12/21- 0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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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

연구소, ‘친일 문제’에 관한 시민 인식 조사 실시

연구소는 <친일인명사전> 발간 10주년을 맞아, 그간 친일청산운동의 성과를 점검하고 좀 더 미래지향적・공익적 차원의 과거사 청산 방향을 모색한다는 취지로 여론조사 전문기관인 한국리서치에 의뢰해 친일문제 전반에 관한 여론조사를 실시했다. 친일문제에 관해서는 과거 몇몇 언론들이 부분적으로 여론조사를 실시한 적이 있지만, 구체적이고 광범하게 조사가 이루어진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번 조사는 친일문제뿐 아니라 과거사 문제 전반에 걸쳐 폭넓게 진행됐다. 조사는 11월 1일부터 4일까지 실시됐으며, 지역별・성별・연령별・학력별・직업별・이념성향별 비례할당으로 추출한 전국의 만19세 이상의 성인 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했다. 조사는 웹조사(휴대전화 문자와 이메일을 통해 url 발송) 방식이며, 표본 오차는 95% 신뢰수준에 ±3.1%포인트다.
조사 내용과 결과는 <민족사랑> 신년호 특집으로 실릴 예정 이번 조사에서 대다수 시민들은 아직도 친일청산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으며, 특히 사회지도층의 친일행위에 대해서는 엄중하게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시민 10명 중 8명 이상이 해방 이후 지금까지 친일파 처벌은 물론이고 친일행위에 대한 진상규명조차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고 답했으며, 사회지도층의 친일 행위가 일제의 강압에 못 이긴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기보다는(18.1%) 개인의 안위를 위한 적극적인 친일(72.2%)로 보았다. 이에 따라 사회지도층의 친일행위는 더 엄격히 따져야 하며(82.7%), 이들
에 대한 기념사업 중단(81.3%), 국립묘지에 안장된 인물 이장(74.4%), 서훈을 취소(65.6%) 해야 한다는 의견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또한 박정희・김성수・방응모 등 저명인사가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된 데 대해서도 적절하다고 응답한 사람이 지나치다고 답한 사람에 비해 2배 이상 많았다.
이번 설문조사 항목은 친일문제뿐 아니라 일반시민들의 뉴라이트 인식, 과거사 청산 방향, 연구소에 대한 인지도 등 총 40여 문항에 달한다. 자세한 조사 내용과 결과는 <민족사랑> 2020년 신년호 특집으로 실릴 예정이다.

 

금, 2019/12/20- 2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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