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 콘텐츠로 건너뛰기

흑석동 한강변 언덕 위에 한강신사가 건립된 까닭은? – 서울 지역 곳곳에 포진한 일제 침략신사들의 흔적

지역

흑석동 한강변 언덕 위에 한강신사가 건립된 까닭은? – 서울 지역 곳곳에 포진한 일제 침략신사들의 흔적

익명 (미확인) | 월, 2018/07/02- 17:18

식민지비망록 37

흑석동 한강변 언덕 위에 한강신사가 건립된 까닭은?
– 서울 지역 곳곳에 포진한 일제 침략신사들의 흔적

 

이순우 책임연구원

21

옛 한강신사 터를 활용하여 지난 1994년에 재건된 ‘효사정’의 모습.

 

한강대교를 남쪽으로 건너 서울현충원 방향으로 500미터 남짓 걷다보면, 지하철 9호선 흑석역(중앙대입구)에 조금 못 미쳐 한강변 쪽으로 약간 솟아오른 작은 봉우리 하나를 만나게 된다. 1955년 6월 25일에 건립된 학도의용병현충비(學徒義勇兵顯忠碑) 앞을 지나 돌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효사정(孝思亭)이라는 이름의 정자가 나타난다.
효사정은 원래 세종 때 우의정을 지낸 공숙공(恭肅公) 노한(盧閈, 1376~1443)의 별서(別墅)였다고 전해지는 유적이다. 그는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시묘살이를 했던 곳에다 정자를 짓고 때때로 이곳에 올라 모친을 그리워했고, 멀리 개성 땅에 묘지를 쓴 부친을 추모했다고 하여 ‘효사정’이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경기금천현(衿川縣)‘누정(樓亭)’조에“노량나루터 남쪽 언덕에 있는 정자”라는 정도의 간략한 내용이 남아 있긴 하나 사실상 이것만으로는 더 이상의 정확한 원위치 고증이 어려운 상태이다.
하지만 지난 1994년에 서울 정도 600년을 맞이하여 이를 기리는 사업의 하나로 한강주변의 유적지를 복원 정비하는 계획이 추진되었고 이때 편의상 부득의하게 지금의 자리를 선정하여 정자를 재건하기에 이르렀다. 이곳이 진짜 효사정 자리인지에 대한 논란을 차치하고라도 이 정자에 오르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강 쪽 전망이 참으로 빼어나다는 점에 공감하게 된다.
그런데 이 장소는 일제강점기를 거치는 내내 ‘한강신사(漢江神社)’라는 시설물이 터를 잡고 있었던 곳이라는 사실도 꼭 함께 기억할 필요가 있다. 후지이 가메와카(藤井龜若)가 펴낸 <경성의광화(京城の光華)>(조선사정조사회,1926)를 보면, 이한강신사의 건립유래가 다음과 같이 정리되어 있다.

 

한강신사는 인도교(人道橋)를 건너 동쪽의 작은 언덕에 숲속에 한줄기 끈과 같은 가느다란 길이 산꼭대기까지 걸쳐 있는데 그 산부리의 약간 높은 상두산령(象頭山嶺)의 영지(靈地)에서 제사를 지낸다. 제신(祭神)은 미야지대사(宮地大社), 코토히라대신(金刀羅大神), 스가와라대신(菅原大神)의 삼신(三神)으로 인도교 가교 청부인(請負人)이던 시키 노부타로(志岐信太郞) 씨가 대정 원년(1912년) 금상폐하(今上陛下, 대정천황을 말함)의 즉위를 기념하고 아울러 고국을 멀리 떠나온 재선민(在鮮民: 조선 거주 일본인)을 비롯하여 동포선인(同胞鮮人)에게 경신숭조(敬神崇祖)의 미풍을 가르치려는 돈독한 뜻에 따라 이곳 산자수명한 정지(淨地)를 택해 사재 십수 만 원을 들여 한강수호의 신으로 삼아 헌립(獻立)한 것이며, 매년 봄가을(5월 4일, 10월 4일)에 행해지는 대제례일에는 내선인의 참배자가 원근에서 운집하여 번잡함이 흡사 대공원의 모습을 보여준다.
섭사(攝社)에는 이나리신사(稻荷神社), 시키신사(志岐神社), 야신신사(矢心神社)를 모시며, 이 지역은 예로부터 영산(靈山)으로서 조선인들이 숭배하던 곳이다. 경내의 바위 사이에는 기이한 한 그루의 소나무가 있다. 와룡송(臥龍松)이라 부르는 유명한 나무로 수령이 수백 년이 넘는 신목(神木)이다.

 

여기에 나오는 시키 노부타로는 1869년생으로 일본 후쿠오카현(福岡縣) 출신이며, 자신의 토목건축회사인 시키구미(志岐組)를 통해 경부철도 속성공사를 비롯한 철도관련 청부업에 주력하여 부를 축적한 인물이었다. 그는 특히 1921년에 조선의 특산물이라고 일컬어지던 천연빙(天然氷), 즉 겨울철 한강 얼음을 채취하여 저장 판매하기 위해 조선천연빙주식회사 및 조선천연빙창고주식회사를 설립하였고, 1936년에 이들 회사와 여타 제빙회사가 조선제빙주식회사(朝鮮製氷株式會社)로 통합 전환한 이후에도 사장의 자리를 지킨 바 있다. 따라서 그는 이래저래 한강과는 많은 인연을 지닌 사람이었던 것으로 풀이된다.

 

22

<경성일보>1934년 12월 2일자에 수록된 토끼사냥 야유대회관련 명수대 주변 약도에는 ‘한강신사’의 위치가 또렷이 표시되어 있다. 오른쪽 아래에 ‘화장사’라고 표시된 사찰은 오늘날 서울현충원 구내에 있는 ‘호국지장사’를 말한다.

 

23

한강신사가 자리한 흑석동 한강변의 풍경. (<일본지리대계(조선편)>, 신광사, 1930)

 

24

1931년 기노시타 사카에가 개발을 주도한 명수대 주택지(현 흑석동)의 전경. 왼쪽으로 보이는 한강변 봉우리 위의 건물이 한강신사이다. (경성전기주식회사, <뻗어가는경성전기>, 1935)

 

이곳 한강신사의 제신으로 언급된 ‘미야지대사’는 일본 후쿠오카 소재 ‘미야지다케신사(宮地嶽神社)’를 말하는데, 시키의 고향에 있는 신사 그 자체가 숭배의 대상이었던 듯하다. 또한 ‘스가와라대신’은 일본 헤이안시대의 정치가 스가와라노 미치자네(菅原道眞)를 말하며, 대개 ‘학문의 신’으로 추앙되는 인물이기도 하다. 그리고 ‘코토히라대신’은 불교에서 일컫는 약사십이신장(藥師十二神將)의 하나이며 원래 인도 갠지즈강에 살았다는 쿰비라(Kumbhira, 蛟龍)에서 유래된 것으로, 일본에서는 바다를 수호하는 신으로 인지되어 일반적으로 선박 안전을 비는 대상으로 자리매김되어 있다. 한강신사가 자리한 봉우리를 일컬어 상두산(象頭山)이라고 한 것은 일본 가가와현(香川縣)에 있는 곤피라산(金刀比羅宮: 신사명)의 소재지에서 그대로 따온 이름으로 받아들여진다.
오카 료스케(岡良助)가 쓴 <경성번창기>(박문사,1915)라는책에는이곳이웅진강신사(熊津江神社)라는 이름으로 소개되어 있는데, 한강신사는 그 이후의 시점에서 고쳐진 명칭인 듯하다. 아무튼 이곳은 일본인의 입장에서 한강 수호의 신으로 삼아 설립된 것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1912년에 그네들의 천황이 등극한 것을 기념하는 뜻에서 이러한 신사가 탄생하게 되었다는 점에도 깊이 유념해야 할 것이다.

 

25

<조선총독부관보>1934년 5월 14일자에는 한강신사가 ‘신메이신사’라는 이름으로 새로 설립허가를 받은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그런데 일제패망기에 대륙신도연맹(大陸神道聯盟)에서 엮어낸 <대륙신사대관(大陸神社大觀)>(1941)을 보면, 여기에는 한강신사의 명칭이 ‘神社’가 아닌 ‘神祠’로, 이곳의 제신(祭神)이 ‘천조대신(天照大神, 아마테라스 오미카미) 외 11신’으로, 창립일도 1912년이 아닌 ‘1934년 5월 9일’로 각각 변경 표기되어 있는 것이 확인된다. 이 점에 착안하여 <조선총독부관보>를뒤져보았더니1934년 6월 14일자에 수록된 “경기도 시흥군 북면 흑석리에 신메이신사(神明神祠) 설립의 건이 기노시타 사카에(木下榮) 외 72명으로부터 원출(願出)된 것에 대해 5월 9일부로 이를 허가함”이라는 기록이 눈에 띈다.
여기에 나오는 기노시타는 한강신사의 설립자인 시키의 고향 후배이면서 ‘시키구미’와 ‘조선천연빙주식회사’에 오랫동안 근무하면서 경력을 쌓았고, 1931년에는 지금의 흑석동 일대에 명수대토지경영사무소(明水臺土地經營事務所)를 꾸려 자신만의 이상향(理想鄕)으로 가꾸는 일에 주력했던 사람이었다. 1917년 3월 22일에 제정된 총독부령 제21호 「신사(神祠)에 관한 건」에 따르면 “신사(神祠)라고 칭함은 신사(神社)가 아니면서 공중(公衆)에 참배를 시키기 위해 신기(神祇)를 봉사하는 곳을 말한다”고 규정하고, 이를 설립하려는 때는 조선총독의 허가를 받도록 되어 있었다. 따라서 기노시타가 신사의 설립을 새로 청원한 것은 이에 따른 절차인 듯이 보인다. 또한 신메이는 아마테라스 오미카미의 별칭이므로, ‘신메이신사’는 이를테면 이세신궁(伊勢神宮)을 총본산으로 삼아 아마테라스 오미카미를 주된 제신으로 모시는 가장 보편적인 형태의 신사(神祠, 격이 낮은 소규모 신사)인 셈이다. 이런 사실에 비춰보면 1930년대 전시체제기로 접어들면서 이러한 시대의 변화에 맞물려 한강신사 자체의 기능과 성격에 있어서 제도적인 환골탈태가 진행된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일제강점기 서울지역에 설치되어 있던 일제의 신사들을 얘기하면, 남산 왜성대에 자리한 경성신사(京城神社)와 남산 중턱 옛 한양공원 터에 들어선 조선신궁(朝鮮神宮, 1925년 10월 준공) 정도를 언급하는 것이 보통이다. 원래 경성신사는 1898년에 남산대신궁(南山大神宮)으로 설립되었다가 1913년에 경성신사로 개칭되었으며, 이 안에 천만궁(天滿宮, 1902년 창립), 남산도하신사(南山稻荷神社, 1931년 창립), 팔번궁(八幡宮, 1931년 창립)을 섭사로 거느리고 있었다.
이밖에 경성신사의 뒤쪽에 자리하고 있는 노기신사(乃木神社, 1934년 창립)와 용산 일본군병영지의 후면 남산 기슭에 조성된 경성호국신사(京城護國神社, 1943년 창립) 등의 존재도 곧잘 언급되고 있다. 하지만 이것들 말고도 태평로 쪽에 에비스신사(惠比須神社, 1913년 창립)를 비롯하여 원효로 인근 영정(榮町, 지금의 신계동 1번지 위치)에 있는 문평산(文平山)에는 가토신사(加藤神社, 1914년 창립)라는 것이 있었고, 신메이신사는 영등포동, 용두동, 신길동, 이태원동 등지에도 두루 포진하고 있었던 사실이 확인된다.
<매일신보>1943년5월18일자에는「신사(神祠)의신마(神馬)도출정(出征),금일한강신사(漢江神祠)에서 장행회(壯行會) 거행」 제하의 기사가 수록되어 있는데, 이것이 한강신사에 관해 현재까지 드러난 막바지 기록이다.

 

미영격멸에 신마(神馬)도 출정 ― 부내 한강신사 앞에 모셔 논 구리로 만든 신마가 출정하기로 되어 17일 오전 10시 동 신사에서 장행회를 거행하였다. 여기에는 군 애국부의 히라이 대위(平井大尉)와 기노시타(木下) 흑석정 총대 이하 정민(町民) 다수가 참열한 아래 성대히 거행하였는데 이 신마는 대정 10년도(1921년도)에 건립하여 지금까지 23년 동안 동 신사 앞에서 있던 것으로 이번에 육군에 헌납키로 된 것이다.

 

26

<매일신보> 1943년 5월 18일자에 수록된 한강신사 신마 출정 장행회 관련 보도사진.

 

여기에 흑석정 총대로 언급된 기노시타는 바로 명수대토지경영사무소 사장과 동일인이다. 겉으로는 한강 수호의 성지인 듯이 말하지만 결국에는 출정황군의 무운장구를 빌거나 전쟁동원을 위한 총력체제의 결집장소로 활용되고 마는 것이 바로 일제가 만든 이들 침략신사의 본질이 아닌가 싶다.

시민들의 의견

댓글 달기

Plain text

  • 웹 페이지 주소 및 이메일 주소는 자동으로 링크로 전환됩니다.
  • 줄과 단락은 자동으로 분리됩니다.
  • 사용할 수 있는 HTML 태그: <a href hreflang> <em> <strong> <cite> <blockquote cite> <code> <ul type> <ol start type> <li> <dl> <dt> <dd>
이미지
무제한 수의 파일을 이 필드에 업로드할 수 있습니다.
50 MB 한계입니다.
허용된 유형: png gif jpg jpeg.
Enter the YouTube URL. Valid URL formats include: http://www.youtube.com/watch?v=1SqBdS0XkV4 and http://youtu.be/1SqBdS0XkV4.
CAPTCHA
스펨 사용자 차단 질문

김수한 기자

3월 12일 오후 5시, 연구소 3층 회의실에서 헤럴드경제 기자인 김수한 후원회원을 인터뷰했다. 대학 재학 중이던 2001년부터 20년 가까이 연구소를 후원해 온 김수한 회원이 작년 8월 동국대학교 북한학 박사학위를 받았는데 연구 주제가 이례적으로 김정일·김정은 정권하의 북한 언론 현황에 관련된 것이었다.몇 년 전부터 ‘기레기’라는 말이 회자될 정도로 언론 개혁과 기자들의 자질 문제가 사회적 이슈가 되고 있는 요즘, 현직 기자로서 여전히 금단의 영역이면서 조심스러운 북한문제, 그것도 우리에게는 생소한 북한언론 이야기를 들어 보았다.

문 : 연구소는 언제 후원회원으로 가입했나요?

답 : 제가 95학번(고려대 노어노문학과)인데 2001년 2월 군대를 제대하고 복학을 앞둔 상태에서 방학진 당시 사무국장 권유로 가입했던 걸로 기억합니다. 복학 후에 연구소에서 주최하는 강좌나 소모임에 가끔 나갔었고, 2002년 봄 서대문형무소역사관에서 열린 ‘친일 예술인과 그들의 작품전’ 전시회 때 자원봉사도 했었죠. 그 무렵 누군가 고대 인촌(김성수) 동상에 페인트를 뿌린 사건이 발생했는데, 고려대 영자신문사 기자 출신으로서 ‘큰 사건’이라는 직감이 들어 방 국장께 전화해 사건을 알리기도 했었어요. 그때 방 국장이 전화통화 직후 즉시 고대로 와서 함께 현장을 둘러보기도 했었죠.ㅠ

문 : 1997년 창단된 한국축구 국가대표 서포터즈인 ‘붉은악마’로 활동했다고 들었는데 그와 관련한 에피소드도 말씀해 주세요.

제가 1997년 8월 고려대 영자신문사 편집국장 임기를 마치고 퇴임했어요. 그때가 3학년 1학기를 마친 상태인데, 막상 평범한 학생으로 돌아오니 ‘은퇴’라는 것이 어떤 건지 체감이 좀 됐었어요. 신입생이던 1학년 1학기에 신문사 수습기자로 입사해 꼬박 2년 반의 기간을 기자로서 바쁘게 활동하며 학업도 병행한 셈인데 영어로 기사를 쓰랴, 전공 공부하랴 정말 바빴거든요.

근데 막상 ‘퇴임’하고 보니 별로 할 게 없는 거에요. 그동안 신문사 활동하면서 구멍 난 학점을 메꾼다거나, 자격증을 준비한다거나 이런 목표 의식이 있어야 하는데 요즘 표현으로 하면 ‘번아웃’(어떤 일에 과도하게 몰두하다가 에너지가 방전된 것처럼 갑자기 무기력해지는 현상)이 왔는지, 아니면 군 입대를 앞두고 있어서인지 암튼 좀 쉬고 싶었어요. 제가 일하던 신문사 편집국은 퇴임 후에도 여전히 집처럼 느껴졌는데 ‘이제는 좀 벗어나야겠다’는 생각도 들었어요. 그래서 그 무렵부터 학교 수업이 끝나면 혼자서 축구를 보러 경기장에 다녔어요.

제가 경북 포항 출신인데 당시 K-리그의 포항스틸러스를 응원하러 다닌 거죠. 그때 우리 프로축구계에는 ‘서포터’라는 개념의 유럽식 축구 응원 문화가 서서히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자기가 응원하는 팀의 유니폼을 입고 그 경기가 열리는 스타디움에서 12번째 선수로서 응원에 참여하는 거죠. 서울과 포항을 오가며 경기를 쫓아다니다보니 포항스틸러스 서포터들끼리 많이 돈독해졌어요. 우연히도 당시 포항스틸러스 서포터 회장이 고등학교 후배이자 이동국 선수(당시 포항스틸러스 소속)의 중학교 동창이었고, 그밖에도 포항공대에 다니던 축구 매니아 형님, 대구에서 포항팀 응원하러 포항 경기 때마다 포항으로 오시던 형님, 포항스틸러스 구단 프론트에서 일하던 박대리님 등과 팀웍이 잘 맞아서 정말 즐겁게 축구를 보러 다녔어요. 그런데 그때까지 지금은 ‘붉은악마’라고 불리는 대한민국 축구대표팀 서포터가 만들어질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어요.

당시 각 프로팀 서포터는 하이텔, 천리안, 나우누리 같은 PC통신 동호회에서 공지사항과 각종 의견을 주고받았는데요. 그때가 97년 8월 15일이었어요. 그날 나이키 초청 한국 : 브라질 친선경기가 잠실경기장에서 열렸는데, 그 경기를 앞두고 각 프로축구팀의 서포터들이 붉은 색의 국가대표팀 유니폼을 맞춰 입고 힘을모아 대표팀을 응원하자는 쪽으로 생각이 모아졌어요. 그리고 그 생각이 정말 실행으로 옮겨져서 각자 유니폼 비용을 계좌이체로 납부하고, 당일 경기장에 가서 물결 무늬의 붉은 색 국가대표팀 유니폼을 배부받았어요. 저도 그 중 한 명이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K-리그 각 팀 서포터들이 사상 처음으로 대표팀 유니폼을 입고 한 곳에 모여서 응원하는 역사적인 이벤트가 펼쳐진 것입니다. 그때 기분은 그냥 뭐랄까, 정말 뭔가 엄청난 잠재력과 에너지가 느껴졌다고 해야 할까요. 암튼 너무 뿌듯했고, 기뻤고, 떨리고 그런 기분이었어요. 그날 경기 내용도 너무나 훌륭했습니다. 지금도 잊을 수가 없어요. 한국이 세계 최강 브라질을 맞아 전반전에 1대0으로 앞서 가다가 후반전에 2골을 먹고 2대1로 지긴 했지만, 정말 잘 싸웠어요.

그날의 흥분과 감동이 오늘날 붉은악마가 태동한 배경이라고 지금도 생각합니다. 그로부터 한 달여 뒤인 97년 9월 28일 우리가 흔히 부르는 ‘도쿄대첩’이 터집니다. 붉은악마 50여 명이 당시에 일본 도쿄 요요기 국립경기장으로 가서 응원전을 펼쳤는데, 저도 그 50여명 중 한 명으로 참가했습니다. 일본에게 1대0으로 지고 있다가 후반전 들어 서정원, 이민성이 동점골, 역전골을 넣어서 한국에서는 9시 뉴스에 ‘후지산이 무너졌다’, ‘도쿄대첩’ 등으로 난리가 났었지요.

1998년 새해를 맞아 고민 끝에 1학기를 휴학하기로 했어요. 그때도 고심했지만 지금 지나고나서 되돌아봐도 나름 인생의 큰 결단이었습니다. 1998년 6월에 프랑스 월드컵 본선이 열리는데, 제 어릴 때 꿈이 ‘1998년 월드컵 경기장에 가는 것’이었으니까 마음의 준비를 한 것이죠. 실제로 프랑스에 가든 안 가든 일단 월드컵이 열리니 오롯이 월드컵을 만끽하자, 이런 생각이었습니다. 학교에 다닌다면 학점이 엉망일 것이고, 등록금을 낭비하게 될 것이고, 복학해서 학점을 올릴 기회도 없어지게 될 테니 나름의 합리적인 결정이기도 했습니다.

월드컵이 열리는 6월이 다가오면서 붉은악마 사무국에서 원정응원 명단을 짜기 시작했는데, 실제로 프랑스에 간다는 게 쉽지는 않았습니다. 붉은악마는 예선 3경기를 다 보는 1진(14박 15일), 예선 2경기를 보는 2진(9박 10일), 예선 1경기를 보는 3진(4박 5일) 등 3개의 일정으로 준비를 했습니다. 저는 2진으로 갈려고 했는데 제가 군 미필자에 휴학생이라 해외여행허가가 안 난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았어요. 게다가 2진 참가자가 내야 하는 경비가 200만원을 상회했는데 유럽 여행용 경비로서는 저렴한 편이었지만, 학생으로서 뾰족한 수도 없었어요.

저는 거의 반포기 상태가 되어 포항집에 내려가 있었어요. 그냥 ‘이제 좋은 추억으로 묻어야겠다’는 생각까지 했어요. 그런데 그러던 어느 날 붉은악마 회장(신인철씨)으로부터 연락이 와서 ‘너 꼭 갈거냐’고 묻길래 “꼭 가고 싶다”고 했더니 광화문으로 오라는 거에요. 그래서 서울로 다시 갔습니다. 가보니 군 미필자이면서 휴학생인데 프랑스 월드컵 본선 응원을 가겠다는 저 같은 동년배들이 6~7명 있었어요. 이들이 다 함께 모여 당시 광화문에 있던 문화체육관광부로 가서 공문서를 1장 받게 됩니다. 붉은악마 회장이 미리 요청해 장관 결제가 이뤄진 문서였습니다.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명의의 이 공문서에는 ‘이들이 프랑스로 월드컵 응원을 가고자하니 병무청장은 이들의 해외여행을 허락해주길 바란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습니다. 그때 문서를 받으러 정부청사를 방문한 우리들에게 ‘건강하게 잘 다녀오시라’며 환하게 웃던 공무원의 얼굴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어요.

문 : 어떻게 헤럴드경제에 입사했나요?

답 : 포항제철고등학교에 다닐 때 교지 ‘월계수’의 편집부장으로 활동했고, 대학교에 들어가서는 고려대 영자신문사 The Granite Tower에서 기자생활을 했어요. 1학년 때 수습기자를 거쳐 2학년 때 기자, 부장을 거쳤고 3학년 때는 편집국장을 했습니다. 고려대 졸업과 동시에 경기도 남양주 광릉수목원 자락에 위치한 경희대 광릉캠퍼스 평화복지대학원에 전액장학생으로 입학했는데 여기서는 영문 학술지 ‘피스포럼’의 편집장으로 활동했어요. 입학생 중 싱가포르, 벨기에, 필리핀 등 외국인 학생들이 있어 강의와 졸업논문을 영어로 써야 하는 특수한 환경이어서 영어 훈련에 도움이 많이 된 거 같아요.

대학원 졸업을 앞둔 2004년 말 언론사 시험을 보다가 막연히 유학을 준비하면서 영자신문 코리아헤럴드 사설을 매일매일 읽었거든요. 그런데 어느 날 사설을 프린트하던 중 코리아헤럴드 수습기자 채용 공고를 보고 ‘혹시?’ 하는 생각에 지원을 했습니다. 대학교 영자신문사 기자로 활동했고, 영문 학술지 편집장도 했고, 영문 논문도 쓰고, 유학 준비를 하고 있었기에 필기시험을 통과한 거 같아요. 영자신문 기자로 입사한 지 3년여 뒤에 같은 회사의 국문 경제지인 헤럴드경제로 옮겨왔습니다.

국문 경제지로 옮겨온 이유라면, 일단 영자신문 기자로서 평생 커리어를 쌓는 것에 대해 고민하게 되었고요. 이런 고민을 지금은 작고하신 민영빈 YBM 회장님을 찾아가 털어놨더니 의외로 쉽게 ‘국문 매체로 가라’고 조언해 주셨어요. 그분의 조언이 결정적 계기가 되었습니다. 고려대 영문과를 졸업한 민 회장님은 재학 당시 고려대 영자신문을 창간한 장본인이셨고, 졸업 후 첫 직장이 코리아헤럴드였거든요. 사회생활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제가 당시 회장 비서실에 문의하니 의외로 ‘몇날 몇시에 회장실로 오라’고 연락을 주셔서 2시간이 넘게 그분의 인생이야기를 듣고 제 인생에 대해서도 논의할 수 있는 값진 기회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사회 초년병의 SOS 요청에 흔쾌히 시간을 내어주신 그분께 항상 빚을 지고 있는 기분입니다. 회장실에 찾아갔더니 당시 건강이 좋지 않은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정장을 말끔히 차려입으시고 저를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저에게 첫 일성이 “너는 내 학교 후배에, 학교 신문사 후배에, 직장 후배이기도 하니 그냥 편하게 얘기하자”였습니다. 그날 주신 여러 조언에 대해 두고두고 감사하고 또 후배들에게 그분처럼 베풀고자 합니다.

헤럴드경제에서는 사회부, 연예부, 부동산팀 등을 거쳐 현재 정치부 외교안보팀 차장을 맡고 있습니다.

문 : 기자생활을 하면서 보람을 느꼈던 때는 언제였나요?

김수한 기자가 싸이월드에 올려놓은 ‘오세훈 불출마에 감춰진 불편한 진실’ 기사를 캡쳐한 것

답 : 독자들로부터 좋은 기사를 썼다는 칭찬과 격려를 들을 때 가장 보람을 느낍니다. 지금 돌아보니 특히 기억에 남는 기사로는 서울시장의 무상급식 찬반 논란 관련 기사, 윤봉길의사의 사진 진위 논란 기사, 아파트 실명을 노출해 독자의 항의를 받은 부동산 기사가 떠오릅니다.

2010년 8월께 곽노현 서울시 교육감의 무상급식안에 대해 오세훈 서울시장이 반발하면서 무상급식 여부를 주민투표에 부치는 일이 발생합니다. 이 과정에서 대선 불출마를 선언한 오 시장은 주민투표 결과에 자신의 시장직 사퇴까지 결부시켰고, 결국 시장직을 사퇴하게 됩니다.

당시 이 사안의 전후 사정을 담담히 써내려 간 ‘오세훈 불출마에 감춰진 불편한 진실’ 제하기사에 독자들의 폭발적인 성원이 답지했습니다. 비록 그 기사는 당시 서울시장 측의 문제 제기로 삭제됐지만, 그때 독자들이 보내주신 댓글은 지금도 잘 간직하고 가끔 읽어보고 있습니다.

윤봉길 의사의 사진 진위 논란 기사도 의미 있는 기사입니다. 국가보훈처는 2008년 10월 8일 홍커우 공원에서 폭탄을 던진 뒤 체포된 윤봉길 의사가 연행되는 사진에 대해 “진짜”라는 의견을 냅니다. 교과서에도 실린 윤봉길 의사의 연행 장면을 찍은 사진이 진짜라니, ‘그동안 가짜였나?’ 하는 의문이 들어 취재를 시작했습니다.

진위 논란이 일고 있는 윤봉길 의사 체포 당시 사진

그러다가 연구소의 방 국장으로부터 윤봉길 의사 사진 진위 논란을 처음 제기한 강효백 경희대 교수 이야기를 들었고, 강 교수로부터 윤 의사의 연행 사진은 가짜라는 의견을 다시 확인해 ‘사진 속 인물 윤봉길 아니다-강효백 교수 반론’이란 제목의 기사를 썼습니다. 정부 기관은 ‘진짜’라고 했는데 논란을 제기한 주인공은 ‘가짜’라는 의견을 굽히지 않고 여전히 대립하는 이상한 사안이었습니다.

과거 상해 영사관에서 외교관으로 근무한 강 교수가 당시 사건 기록과 신문기사 등으로 재구성한 연행 정황은 사진과 많이 달랐습니다. 사진 속 남성은 일본 경찰로부터 신사적으로 연행되는 것처럼 보였으나, 실제 윤봉길 의사는 실신할 정도로 심하게 구타를 당해 달구지에 시체처럼 내동댕이쳐져 옮겨졌다고 합니다. 이런 정황이 당시 신문기사 등에 생생히 남아 있었고, 강 교수는 이를 바탕으로 기존 연행 사진이 가짜라고 주장한 것입니다.

이에 당시 김학준 ‘윤봉길 기념사업회’ 회장이 호응하고 성형외과 등 전문가 그룹이 윤봉길의사 사진과 연행 장면 사진을 비교해 연행 장면의 남성은 윤봉길 의사가 아니라는 결론을 내립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명박 정부 출범 얼마 후 국가보훈처가 그 사진에 대해 다시 “진짜”라는 의견을 내 논란이 된 것입니다.

이후 이 논란은 SBS 저녁 8시 뉴스와 SBS 스페셜 다큐멘터리 등으로 다뤄져 새로운 국면을 맞습니다. 2011년 3월 1일 SBS 저녁 8시 뉴스에서는 “윤봉길 의사 아니다..연행사진 조작가능성 커” 제목의 기사가 보도되었습니다.

이 기사는 “거사 직전 찍은 윤 의사의 사진을 3차원 영상으로 복원해 문제의 사진과 비교한 결과에서도 두 인물은 달랐다는 결론을 얻어냈다”며 “무참히 폭행당한 윤 의사의 모습이 공개될 경우 식민지 한국과 침략 중이던 중국 국민들을 크게 자극할 것을 우려해 일본군이 사진을 조작했을 것”이라는 전문가의 의견을 전했습니다.

또한 같은 날 3·1절 특집다큐 ‘일본이 찍은 체포사진 속 인물, 그는 윤봉길인가’에서 해당의혹이 보다 심도 있게 다뤄졌습니다. 강 교수는 요즘도 가끔 저에게 “윤봉길 의사의 한을 풀어드릴 수 있게 도와줘서 고맙다”는 인사를 종종 전하십니다.

다른 하나는 제가 작성한 아파트 가격 하락 기사입니다. 당시 아파트 가격이 폭락한 상황을 기사화하면서 아파트 실명을 기사에 그대로 썼는데, 이 기사가 포털에서 큰 반향을 일으킨 것입니다. 급기야 그날 오후 해당 아파트에 거주한다는 한 독자의 전화를 받았습니다.

그 독자님은 “자신이 거주하고 있는 아파트 실명을 써서 너무 큰 충격을 받았다”며 전화기 너머로 큰 소리로 흐느끼셨습니다. 경험이 적었던 기자 초년병 시절의 한 해프닝이었습니다. 저는 ‘본의 아니게 일부 주민들게 큰 피해를 초래한 게 아닌가’ 하는 반성과 함께 해당 아파트의 실명을 이니셜로 처리하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전화를 주신 독자분께 사과의 말씀도 전했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 독자분께서 저에게 하신 말씀이 기자 생활을 하는 내내 종종 불현듯 떠오를 때가 많습니다. 그분은 “기자님, 독자의 항의를 받았다고 해서 바로 소신을 꺾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습니다”라면서 본인도 자식을 키우는 부모 입장에서 항상 자녀에게 “‘소신 있게살라’고 조언한다”고 하셨습니다. 언론인으로서 개인의 이익과 공공의 이익에 대해 보다 진지한 자세에서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접근해달라는 주문으로 받아들였습니다.

문 : 북한문제에 대해 언제부터 관심을 갖게 되었나요?

답 : 제가 대학교에 입학한 1995년은 학생운동이 점차 사그러드는 시기였습니다.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다니며 막연히 가졌던 대학생활에 대한 환상은 현실과 많이 달랐고, 학생운동은 점차 갈 길을 잃고 있었습니다. 입학 후 내내 머릿속에 ‘도대체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화두가 떠나지 않았습니다. 어영부영 신입생 환영회 등의 통과의례를 모두 치르고, 온갖 술자리에 끼며 미래를 탐색하던 시절, 우연히 학교 신문사 수습기자 채용공고를 보고 신문사 입사시험을 치르게 됩니다. 다행히도 합격을 하였고, 대학생 기자로서 학내 문제와 국내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제반 이슈와 국제 이슈를 보다 진지하게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학생운동의 종언은 우리 세대가 맞이한 큰 사회적 흐름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앞으로 이 사회를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 일제 강점기의 시대정신이 ‘독립’, 군사독재 시절 시대정신이 ‘민주화’였다면, 90년대 중반에 대학에 들어온 이른바 X세대들의 시대정신은 ‘통일’이 아니겠느냐는 생각을 점차 갖게 되었습니다. 그 이후로 ‘어쩌면 사치스러운 바람이겠지만, 상황이 허락된다면 이 땅의 통일을 위해 인생을 바치고 싶다’고 기도하게 되었습니다.

경희대 평화복지대학원에서 2006년 2월 석사 논문으로 한국과 미국의 탈북자 정책을 비교하는 내용을 주제로 삼았고, 2011년 동국대 북한학과 박사과정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2019년 마무리한 박사 논문에서는 김정은 집권 이후 북한 로동신문이 어떻게 변했는지를 주제로 했습니다. 석사논문 제목은 「The R.O.K. and U.S. Policies on North Korean Refugees(북한 탈북자에 대한 한국과 미국의 정책 연구)」(영문)이고, 박사논문은 ‘김정은 권력승계시기 로동신문의 변화 연구:편집국 인적 구성과 기사내용 특징을 중심으로’입니다.

문 : 박사학위논문에서 로동신문사의 편집국 인적 구성과 기사내용 특징을 주요 연구대상으로 삼았습니다. 북한 자료를 구하는 데 어려움이 많았을 것 같은데요.

답 : 자료를 구하는 건 어렵지 않았습니다. 연구자들이 정해진 신분인증 절차에 따라 자료에 접근할 수 있습니다만, 논문을 쓰기 위해 실제로 어려운 건 자료 분석입니다. 로동신문 수년 치 자료를 모아서 이를 다양한 분석 기법을 활용해 여러 면에서 분석 결과를 도출해야 하는데 그게 어려웠습니다. 저는 자료 분석에만 1년이 넘는 시간이 걸렸습니다. 논문을 쓰기 위한 자료분석에 기나긴 시간을 할애하다보니 때로는 제가 하고 있는 일에 아무런 진전이 없는 것 같고, 아무 것도 안하면서 의미 없는 시간을 보내는 것 같아서 정말 힘들었습니다. 박사논문을 쓰기 전에 방법적으로 서툴러서 시행착오도 많이 겪었습니다. 박사 논문을 시작하기 전에 로동신문을 주제로 한 소논문을 쓰기 위해 약 3개월치의 로동신문 자료를 수집하고 분석한 적이 있었는데요. 서초동에 있는 국립중앙도서관에서 로동신문을 복사해 자료를 모으다 보니 약 3개월치 신문 자료 확보에 2달여를 허비하기도 했습니다.

문 : 논문에서 다루고 있는 시기가 김정일 사망부터 김정은의 권력 공고화 시기까지인데 이 기간에 로동신문의 변화 양상을 간략하게 설명해 주세요.

답 : 제 박사 논문의 결론을 단순화하면 딱 2가지로 요약됩니다.

첫째로 김정일 시대에서 김정은 시대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로동신문 편집국의 규모가 축소됩니다. 대략적으로 말씀드리면 김정일 시대 로동신문 편집국에는 278명의 기자가 소속돼 있었는데, 김정은 시대로 접어들면서 기자 수가 189명으로 급감합니다.

둘째 결론은 김정일 시대에서 김정은 시대로 넘어가면서 로동신문의 내용이 크게 달라집니다. 김정일 시대에는 정치나 사상과 같은 주제가 신문의 메인 주제였다면 김정은 시대에 가장 중요시되는 주제는 ‘경제 발전’이나 ‘과학기술 강조’ 등입니다.

이 결론을 내리기 위해 김정일 시대에서 김정은 시대로 이어지는 기간을 중대한 정치적 사건을 기점으로 총 5개 시기로 구분하여 2008년부터 2016년까지 로동신문 기명 기사 1만3252개를 분석 대상으로 하였고, 5개 각각의 시기별로 약 3000여개의 기명 기사를 전부 수작업으로 분류하였습니다. 이 자료를 기자별 기사 리스트로 재가공해보니 기자별 10~20개의 기사 목록이 만들어졌는데 여기서 기자마다 자신이 담당하고 있는 분야의 기사를 꾸준히 작성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습니다. 이를 통해 기자별 소속 부서를 유추할 수 있었고, 분석 기간 중 로동신문에 이름을 올린 기자의 소속 부서를 모두 분류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 방식으로 결국 5개 시기별 로동신문 편집국 조직도를 추정적으로 도출할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5개 시기별 로동신문 편집국 조직도가 도출됨에 따라 5개 시기별 로동신문 기자들의 부서 이동 현황도 추적할 수 있었습니다. 예상 밖으로 로동신문 기자들의 부서 이동은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다만, 대남 및 대미 메시지를 내는 조국통일부와 국제부 소속 기자들의 부서 이동은 상당히 제한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렇다면 시기별 분석의 기간을 얼마만큼으로 잡았는지 궁금하실 겁니다. 사실 일간지 기자의 면면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1주일치 기사만 분석해도 부족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공산주의 언론인 로동신문의 특성을 고려해 처음에는 5개 시기별 1개월치 기명 기사를 전수 분석하였는데, 왜냐하면 일간지 기자로서 1개월동안 기사를 1건도 쓰지 않는 경우는 드물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연구과정에서 공산주의 언론의 특성을 고려하여 이 기간을 처음에는 2개월치로, 3개월치로 계속 늘려보다가 최종적으로 시기별로 6개월치의 기명 기사를 전수 분석하였습니다. 처음에는 1주일치에서 1개월치, 2개월치로 늘렸다가 결국 6개월 동안 1건의 기사도 쓰지 않는 기자까지 잡아낼 수 있도록 연구 범위를 확대한 것입니다.

이렇게 편집국 조직도가 구체적으로 파악된 후에는 신문의 내용 변화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서구 신문방송학계에서 사용하는 내용 분석 기법을 차용하여 5개 시기별 로동신문 내용을 분석한 결과 김정일 시대와 김정은 시대 초기까지 로동신문에서 가장 빈도수가 많았던 기사주제는 ‘사회주의 혁명사상 고취’였으나, 김정은의 후계 체제가 공고화된 5번째 시기부터 ‘경제발전’을 주제로 한 기사들이 가장 빈도수가 많은 기사로 올라서는 변화가 포착되었습니다. 또한 1~4 시기에 주로 중하위권에 있었던 ‘과학기술 강조’ 관련 기사가 빈도수 3위로 올라섭니다.

이러한 논문의 결론은 김정은이 집권하면서 방만한 구조의 로동신문 편집국 구조를 효율화하는 문제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을 가능성을 한편에서 제기하며, 또 한편으로 김정은 집권 후 실시된 세 차례의 남북정상회담에서 북한이 주장한 비핵화 수용 및 경제 발전 추구 기조가 하루아침에 나타난 정책적 기조가 아니라 김정은 집권 후 서서히 꾸준한 과정을 통해 ‘빌드업’된 기조일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문 : 북한언론 연구에 있어서 참으로 의미 있는 성과를 내셨네요. 축하드립니다. 끝으로 연구소와 후원회원들한테 당부하고 싶은 게 있으면 말씀해 주시지요.

답 : 제가 대학생 때부터 지금까지 지켜본 연구소는 이미 상당한 성과를 내었고, 앞으로도 계속 큰 성과를 내실 거라는 기대가 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업적으로는 역시 친일인명사전 편찬을 들 수 있습니다. 연구소가 방대한 친일인명사전 편찬을 완료함에 따라 우리 사회에서 더 이상 친일반민족 인사 여부에 대한 논란이 불거지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 자체가 큰 성과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현재까지 계속되고 있는 일부 친일 인사들에 대한 논란 자체도 더 이상논의가 무의미할 정도로 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이 ‘논란 종결자’의 역할을 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2012년에 국방부에서 백선엽 장군에 대한 뮤지컬을 만든다고 발표한 적이 있습니다. 당시 언론 브리핑에서 그 분은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분인데 굳이 뮤지컬까지 만들어야 하느냐는 기자의 질의가 있었는데, 그러고 나서 얼마 뒤 뮤지컬 제작 계획 자체가 취소되었습니다. 그 취소의 배경에 친일인명사전의 역할이 분명히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 어떤 인사를 검증할 때 이런 식의 ‘친일인명사전에 따르면~’이라는 검증요소가 자연스럽게 생겨난 것입니다. 그만큼 연구소가 사회에 확고한 기준을 제공하는 기여를 한 것입니다. 그러나 연구소의 이런 긍정적인 측면도 물론 중요하지만, 일부 정치세력들이 연구소를 특정 정치이념에 편향된 집단으로 매도하고 비판하는 경우 또한 없지 않습니다. 이른바 ‘좌파’ 단체로 규정하고 연구소의 목소리에 색깔론을 씌우고 비판하는 것이죠.

저는 앞으로 연구소가 이러한 편견을 깨고 한 발 더 도약하길 간절히 바랍니다. 어떠한 정치이념에 편향됐다는 비판에 휘말리지 않고, 민족의 정기를 바로세우기 위해 절실하게 필요한 연구를 하는 기관으로 자리매김하길 바라는 것입니다.

앞으로 남북이 진심으로 통일에 대해 논의하고, 이 문제에 대해 보다 진지하게 접근하는 시대가 곧 다가올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때에 대비하여 우리 사회에서 향후 우리 사회 안의 친일문제에 대해 보다 더 활발한 논의가 진행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통일을 앞두고 나라를 한 번 고쳐 세우기 위해서는 그 무엇보다도 이러한 논의를 위한 성숙된 이론적 기반과 자료 연구 및 조사가 밑받침이 되어야 합니다. 남북통일을 더욱 당당히 맞이하기 위해 앞으로 연구소의 어깨가 더욱 무거워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수, 2020/04/22- 01:56
2
0

[초점]

팟캐스트 <내일을 여는 역사> 시즌6 시작

 

한국근현대사를 전문으로 다루는 국내 유일의 팟캐스트 <내일을 여는 역사>가 벌써 시즌 6을 맞이했다. 이번 시즌은 연구소 30주년 특집으로 연구소의 과거-현재-미래를 테마로 제작한다.
과거편은 연구소 30년 활동사를 소개하는 코너로 창립 초기 이야기부터 주요 활동과 잘알려지지 않은 뒷이야기를 흥미롭게 소개할 예정이다. 현재편은 연구소의 현재 모습을 소개하기 위해 지부 후원회원을 초대해 그들의 활동 이야기를 듣고 더불어 상근활동가를 통해 연구소의 생생한 현장 이야기를 전달하려
고 한다. 미래편은 시민사회단체와 연대를 모색하는 의미로 외부 전문가와 활동가를 초대해 역사, 평화, 민주주의 등 다양한 주제로 이야기를 나눌 예정이다.
1편에서는 ‘행동하는 미얀마청년연대’ 공동대표들을 초대해 미얀마 민주화 투쟁을 위한 연대의 방송을 하였고 2편에서는 다큐멘터리<김군>의 강상우 감독을 초대해 5.18를 기억하는 다양한 방식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향후 30주년을 맞이한 1991년 5월 투쟁, 광주지부 활동이야기, 대중적 역사글쓰기로 유명한 김형민 PD의 새책이야기, 김진향 개성공단 이사장의 개성공단과 종전선언, 정욱식 평화네
트워크 대표의 한반도 평화 새로운 시작의 조건, 국가보안법, 강제동원과 유네스코 산업유산 이야기 등이 준비되어 있다. 연구소 30년사이야기는 하반기 백서 발간에 맞춰 방송할 예정이다.
자체 스튜디오를 마련한 만큼 연구소 고유의 콘텐츠를 지속적으로 제작하고 있다. 회원과 시민들의 많은 시청과 아낌없는 성원을 부탁드린다.

수, 2021/06/02- 23:13
2
0

[초점]

시민방송에 내린 방송통신위원회의 제재는 위법, 대법원 판결

2019년 11월 21일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역사다큐 <백년전쟁>을 방영한 시민방송(RTV)에 대해 방송통신위원회가 내린 제재가 위법하다고 판결했다. 시민방송(RTV)은 2013년 1~3월 <백년전쟁>을 방송하여 방송통신위원회로부터 ‘관계자 징계 및 경고, 이 사실에 대한 고지방송’의 제재를 받았다. 이유는 객관성과 공정성, 그리고 사자 명예존중에 관한 의무를 위반했다는 것이다. <백년전쟁>이 공개된 후 벌어진 박근혜 정권에 의한 일련의 정치 공세의 유탄을 맞은 것이다. 시민방송은 방통위의 제재에 불복, 행정소송을 시작했다.
2014년 1심, 2015년 2심에서 시민방송은 패소했다. 행정소송을 다루는 판사가 다큐 내용의 명예훼손 여부까지 판단했고, 게다가 공식 문서인 판결문에 5.16 군사쿠데타를 ‘5.16 혁명’이라고 적기까지 했다. 판사의 정치적 입장, 역사의식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고, 그런 점이 재판에 영향을 미쳤음이 분명했다. 시민방송은 대법원에 상고했다. 대법원의 판단은 오래 걸렸다. 몇 해를 그냥 넘기다가 2019년 1월에야 전원합의체에서 판단하겠다고 나서더니 이번에 결론을 내렸다. 대법원은 원심 판결이 잘못이라고 결정했다.
대법원은 방송통신위원회는 방송 매체, 채널, 프로그램별 특성을 고려하여 심의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시민방송을 KBS나 MBC와 같은 대형 미디어와 같은 기준으로 심의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시민방송은 퍼블릭액세스(Public Access) 채널이다. 시민이 만든 프로그램을 방송하여, 시민이 수동적인 미디어 소비자가 아닌 적극적이고 창조적인 주체로서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는 것을 추구한다. 대법원은 시청자가 제작한 방송프로그램의 객관성, 공정성, 균형성을 심사할 때는 대형 미디어가 제작한 프로그램에 비해 심사기준을 완화해야 한다고 보았다. 점차 독점화하고 상업화해 가는 매스미디어 환경에서 퍼블릭액세스 채널이 가진 지향점, 가치를 충분히 이해하고 내린 판단이란 점에서 주목된다. 또한 대법원은 <백년전쟁>이 명확한 자료에 근거해 제작했으며, 전체 다큐영화의 내용이 객관적 사실과 어긋나지 않다고 보았다. 따라서 시민방송의 <백년전쟁> 방송이 객관성, 공정성, 균형성 유지 의무와 사자명예존중 의무를 위반했다고 볼 수 없다고 판단했다. 앞서 이승만 사자명예훼손 소송에서 나온 ‘무죄’ 결정과 같은 결과였다.
대법원이 ‘파기환송’ 했으므로 다시 고등법원의 판결을 기다려야 하지만, 대법원의 판단을 존중하여 상식에 부합한 결정을 할 것으로 기대한다.

• 권시용 선임연구원

금, 2019/12/20- 23:14
2
0

[초점]

대전지부, 독립운동가 조문기 선생 추모식과 백선엽 안내문 철거

 

대전지부(지부장 박해룡)는 2월 5일 독립운동가 조문기(연구소 2대 이사장) 선생의 13주기 추모식을 대전현충원 애국지사 3묘역에서 진행했다. 이날 추모식에는 대전지부 후원회원을 비롯해 광복회 대전지부(지부장 윤석경) 회원 등 30여 명이 참석했다. 추모식은 헌화, 묵념, 약력보고, 추모사 순으로 진행됐다. 조문기 선생은 유만수, 강윤국과 더불어 1945년 7월 24일 ‘부민관 폭파의거’의 주역이다. 이 의거는 경성부 부민관에서 대표적인 친일반민족행위자 박춘금이 주최한 아세아민족분격대회장에 사제 시한폭탄 두 개를 설치해 폭발시켜 대회를 무산시킨 사건이다. 조문기 선생은 2001년 이돈명 변호사에 이어 연구소 2대 이사장에 취임한 이후 <친일인명사전>을 발간에 확고한 토대를 마련했으나 사전 발간 1년 전인 2008년 별세하였다. 정부는 2008년 고인에게 국민훈장 모란장을 추서했으며, 2014년에는 모교인 화성매송초등학교 교정에 회원과 시민들이 성금을 모아 동상(제작 : 김서경 김운성)을 세
우기도 했다. 동상과 묘비에는 평소 선생의 어록이 다음과 같이 새겨져 있다. “이 땅의 독립운동가에게는 세 가지 죄가 있다. 통일을 위해 목숨을 걸지 못한 것이 첫 번째요, 친일청산을 하지 못한 것이 두 번째요, 그런데도 대접을 받고 있는 것이 세 번째다.” 이날 추모식을 마친 참가자들은 당초 작년 7월 장군2묘역에 안장된 친일반민족행위자 백선엽 묘와 바로 맞은편 독립유공자 4묘역에 안장된 광복군 출신 김준엽 선생(전 고려대 총장) 묘를 둘러보며 국립묘지법 개정의 필요성을 다시금 인식하고자 했다. 그러나 참가자들은 백선엽 묘를 찾기 쉽도록 안내하는 개별 안내문이 여러 개 설치되어 있는 데다 현충원 직원 수십 명이 백선엽 묘지를 호위하듯 지켜서 있는 모습에 대해 강하게 항의하였다. 결국 현충원 측은 하루 만에 백선엽 묘지 안내문을 철거했지만, 조선일보와 중앙일보 등 수구 언론은 여러 차례 연구소를 비난하는 기사를 냈고 대한민국상이군경회·전몰군경유족회·전몰군 경미망인회 등은 2월 9일 ‘호국 영령들의 영원한 안식처 훼손 행위를 엄단하라’는 공동 입장문을 냈다.

 

토, 2021/02/27- 00:36
2
0

[회원마당]

민족문제연구소 군산·김제 답사기

김영희 서울 광진 회원

<반일 종족주의>라는, 직함은 허위이고 폭력이 일상화된 대표저자와 그들의 시대착오적인 배설물로 인해 지난여름부터 심기가 불편했다. 무슨 짓을 했길래 이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었는가. 그것도 아베의 경제 도발로 일본상품 불매운동이 탄력을 받는 이 시기에. 무시가 상책이지 하고 모른척했지만 불편함은 그대로 남아있었다. 조모씨가 ‘구역질나는 책’이라 하든, 홍모씨가 ‘보수 우파의 상식과 어긋나는 책’이라 하든, 그런 표현은 이 책에는 과분하게 고상했다.
자기정체성을 깨닫지 못한 채 정확하지 않은 통계수치에 수상한 목적성을 가지고 접근하는 저 곡학아세파에 대해 나는 그저 한 가지가 궁금할 따름이었다. 지금의 이 독립된 나라에서조차 자발적으로 습득한 식민사관이 저다지도 투철한 저들은, ‘일제강점기에 태어났었다면 과연 어떤 지경까지 친일을 했을까?’
가을 초입 그들의 오류를 바로잡아 주는데 힘써 오신 허수열 교수님이 인솔하는 군산·김제 답사가 있다는 소식을 문자로 받았을 때, 기회를 놓칠세라 당장 신청했다. 살아가면서 교통사고처럼 일상공간에서 돌발적으로 만나는 사람들이 가진 태극기부대스러운 사고들. 이에 대처할 무기가 절실했는데 그들의 논리적 오류를 학문적으로 따져볼 기회를 꼭 잡아야겠다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답사대상자로 선택받아 안내 문자가 왔을 때는 감격과 함께 뒤늦게 걱정이 시작되었다. 왜 혼자 신청했을까. 좋은 것은 혼자 보는 게 아니라고 그래서 여행만큼은 절대 혼자는 안 가던 나는 버스에 올라타기까지 용기를 내야 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여행은 시쳇말로 ‘취저’(취향저격)였다. 죄다 모르는 사람들이었지만 모두 진지하게 학습하는 분위기여서 혼자인 것이 오히려 조용히 설명에 집중할 수 있었고 버스이동시간에 어색함을 깨기 위한 그 흔한 자기소개도 안 시켜서 숫기 없는 나로서는 매우 감사했다. 연구소에서 정성껏 준비한 간식 봉투, 물과 커피음료, 수첩과 필기구, 맛깔난 전라도 상차림의 점심과 저녁식사, 전북 민문연 회원들께서 준비해주신 김제농협 신동진쌀까지 선물로 그득히 받았다. 참가비도 없었으므로 어느 것 하나도 받기가 송구스러웠지만 20여 년 민문연 회비를 내었으니 오늘은 되받는다는 생각으로 감사히 받겠습니다 하고 합리화해봐도 참으로 많이 챙겨주셨다. 받은 것 중에 가장 큰 것은 역시 허수열 교수님으로부터 받은 지식의 세례였다. 이날 들은 지식들은 식민지근대화든 조국근대화든 경제대통령이든 근대화시켜준다 잘 살게 해준다는 경제적 논리를 내세워 자기욕망을 채우려는 세력과 그에 부화뇌동하는 이들을
맞닥뜨릴 때마다 매우 유용하게 조용하면서 강한 위력을 발휘할 것들이었다.

10월 5일 토요일. 날씨는 맑았다. 사실 군산 답사라길래 군산 시내 곳곳의 적산가옥이나 항만시설을 둘러보는 것인가 하고 떠났는데, 자료집을 여는 순간 온통 논과 강줄기와 방조제만이 표시된 지도들을 보면서 깨달았다. 도심으로 들어갈 일이 없을 답사라는 것을. 이동하는 중에 펼쳐지는 호남의 너른 들 자체가 오늘 답사지의 처음이고 끝이었다. 그래서 우리가 가는 곳마다 사람 구경 할 일도 전혀 없었다. 마지막 답사지인 김제 죽산리 일본인 하시모토의 농장 사무실과 원평천 해창갑문을 제외하고는 구경온 사람들이라고는 단 한 명도 없었다. 황량하여 별스럽고 그래서 더 전문적인 연구자들 같아 보이기도 하는 우리는 참으로 특이한 답사단원들이었다.
이 답사를 원경으로 묘사하면 밀레의 자연주의 화풍의 평화로운 그림, 근경으로 묘사하면 수확기가 되어도 내 배 채울 곡식 없는 그림의 떡과 같은 황금들판 액자틀 같았다고 할 수 있었다. 내 고향이 경상도여서 서울에서 내려갈 때마다 좌우로 산으로 턱턱 막힌 도로만 보다가 난생처음 호남고속도로를 달릴 때 너무나 경이로웠던 기억은 지금도 선명하다. 우리나라에도 이렇게 탁 트인 지역이 있구나 산이 없는 땅이 있구나… 이렇게 광대한 들에서 허리 휘어지게 일하고 수확했는데 모조리 수탈당한다면 동학 농민 봉기뿐 아니라 더한 것도 일어날 만 했겠구나 라고 한방에 이해되던 순간이었다. 그 평야 중에서도 가장 너른 들인 김제·만경 평야는 한반도에서 지평선이 보이는 유일한 땅이라고 교수님께서 해설해주셨다. 차를 타고 늘 스쳐지나갔던 평야 중에서도 가장 너른 들 속으로 들어가 한 점이 된 하루였다. 자료집 구글 어스 사진으로 보아도 실제 내 눈으로 보아도, 넓은 만큼 물도 많이 필요했겠는데 물은 드물어 보였고 그래서 수리시설 보급이 그 어느 곳보다 절실했던 지역이었나 보다. 교수님 설명이 이 지역은 하천의 길이가 짧아서 남쪽 섬진강 수계에게 유역변경방식으로 물을 끌어오기도 했다고 하였다.
그래서 답사 경로는 동진강의 상류인 낙양취수장 낙양취입수문부터 하구쪽으로 내려가면서 동진강 하구언, 정읍천 합류지점인 만석보를 들렀다가, 벽골제 둑길을 따라 수문까지 걷고, 방조제인 하구 갑문까지 가는 코스였고 중간중간 일본인 지주들의 곡식창고와 관리소를 들렀다. 만경현이라는 이곳 지명이 붙여진 것은 신라 경덕왕 때였고 ‘경’이 중국 주나라 때부터의 면적 단위이므로 그 오래전부터도 경지면적이 아주 넓다는 뜻을 담은 지명을 붙인 것이라고 하였다.
삼국시대 아마도 벼농사를 시작했을 시기부터 있었던 벽골제와 고려, 조선 시대의 수리시설 보강 위에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현재까지 점차 근대적 토목공사로 현대화되어왔을 수리시설은 현재 수문이나 농업용수 공급이 과연 제 기능을 하고 있는 것인지 의아스럽게 가는 곳곳 물이 하천 바닥에만 겨우 수맥을 이을 정도로 말라 있었다. 그래서인지, 풍요로워야 할 이 가장 넓은 들이 아이러니하게도 더 빈곤해보였고, 산업화시기를 거치며 농촌은 더 망가졌고, 일제 수탈의 시기나 그 전 전근대 왕조시대 수탈을 생각해보아도 이 광활한 평야의 경작자들이 그 어느 시절 언제 한번 풍요로운 적이 있었을까 싶어서 종일 들판을 걸으면서 이 좋은 가을날씨와 평화로움을 마냥 만끽하기에는 계속해서 처연한 기분이 함께 찾아왔다. 
역사시간에 강조점을 찍으며 배운 만석보는 기대하고 갔으나 터에 기념비 하나 남겨놓은 것 빼고는 흔적도 영역도 안내문도 보이지 않아서 아쉬움이 컸다. 관광자원개발까지는 아니라도 안내문이라도 상세히, 혹은 고부봉기를 자세히 학습할 수 있는 박물관이 세워지면 이곳이 더 의미있게 기억되고 일제에 의해 잔혹하게 진압되어 사라져간 동학과 민중의 역사에 대해서 길이 기억될텐데. 친일파의 흔적들은 역겹게도 하시모토 농장 사무실 뒤 등 곳곳의 비석에 남았는데 정작 이름 없이 사라진 중요한 민중들의 역사야말로 우리 손으로 더 영광스럽게 남겨주어야겠다고 다짐하였다.
이 답사에서 가장 기대했던 것은 식민지근대화론 반박이었고 교수님은 그들의 허술한 근저를 보여주셨다. 1990년대 초 일본군 ‘위안부’의 대두로 고노 담화, 무라야마 담화 등 일본 내의 반성의 목소리에 당황한 일본 극우는 후쇼사의 교과서를 채택시켰고 세력을 강화하여 지금의 아베 정부까지 이어오고 있다. 그런 일본 우파의 목소리를 국내에서 메아리로 화답하던 뉴라이트도 이들과 함께 1990년대와 2000년대 들어서 목소리를 높이고 일본보다 10년 늦게 교학사교과서 선정과 국정교과서 제정을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일본과 달리 우리나라의 우파 교학사교과서는 전국 채택률 제로 신화를 이룩해냈으며 국정교과서 제작 지시를 내린 자를 축출하는 신화를 만들어낸 주체는 바로 자랑스러운 이 나라 국민들이다. 모든 시도가 실패하고 남은 저들의 마지막 보루가 낙성대경제연구소이며 그 마지막 토사물이 ????반일 종족주의????인 것으로 보인다. 자기 민족인데 자기 민족을 종족이라고 부족 수준으로 폄하하는 이 국적 불명의 연구자 집단이 왜 한국을 터전으로 하여 사는지가 가장 이해 안 되는 지점이다. 터전을 아예 일본으로 옮겨서 활약하면 더 각광받을 텐데.
답사 자료집을 설명해주시면서 교수님은 1910년대 큰 수치로 성장하던 경제성장률을 저들이 우량품종의 보급 덕분이라고 주장하며 1917년 지도를 예로 들어 설명했다고 하였다. 그러나 교수님이 밝힌 바에 의하면 그것은 1910년대도 아닌 1921년의 지도였고 산미증식계획을 추진하던 시기의 성장률은 오히려 둔화되었던 것으로 설명해주셨다. 이 지역은 그들이 얘기하듯 일본 덕에 옥토로 바뀐 것이 아니라 오랜 세월 수리시설 보강으로 이 시기에 이미 옥토였고, 오히려 수탈에 의해 황폐해진 그 아픈 현장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며 설명을 들었다. 특히 발굴해서 복원해놓은 내륙 깊숙한 벽골제의 수문 위치를 보니 이영훈이 말하는 대로라면 벽골제가 방조제였고 그래서 이곳까지 바닷물이 드나들었으므로 일제에 의해 개발되기 전 황량한 갯논이었다는 주장이 말할 필요도 없는 엉터리임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저들이 이 들에 단 한번이라도 와봤다면 도저히 꺼낼 수 없는 주장이었다. 이날 답사는 식민지근대화론의 거짓을 눈으로 명확하게 보게 해주었다.
김제군이나 옥구군, 익산군처럼 일본인 소유지 중 면적이 넓은 곳만 하천을 개발하고 있었던 것도 교수님의 자료들로 확인할 수 있었다. 그들의 개발은 애초부터 우리를 위한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강탈해간 토지로 부와 명예를 누린 것은 일본 상인과 재벌들이었다. 구마모토 리헤이의 여름 별장은 백두산에서 운반해온 낙엽송으로 외벽을 두르고 마루는 일본에서 수입한 삼나무를 깔고 지붕은 자연석 청판석을 덮은 호사스런 건축물로 공사비가 조선총독부 관저와 비슷했다고 하였다. 그의 농장에서 수확한 쌀을 보관하는 창고는 지금도 그 자리에 그 규모로 신축되어-지역에서 무슨 용도로 최근에 왜 신축하였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안은 텅 비어 있었다- 2층 높이로 우람하게 서있는데 그 높은 건물을 가득 채웠을 쌀이 모두 일본으로 반출되어 나갔다. 이들 일본인 지주들은 그 부를 가지고 또다시 조선의 문화재들까지 수집하고 반출하는데 썼다고 하니 이중으로 울화통이 터질 일이다.
무엇보다 그들의 통계는 위험하다. 통계는 특히 과거의 통계는 정확하지도 않을 뿐더러 작성자의 의도를 담고 있다. 그리고 이 위험한 통계는 해석하는 사람의 의도에 따라 한 번 더 왜곡된다. 교수님은 1910~1918년 토지조사사업 완료 전까지는 조선의 토지와 생산량에 대해 정확한 파악이 어려웠고 토지조사사업이 완료된 후에도 과거의 통계를 일제 스스로 두 번이나 전면 수정하는 등 총독부 스스로도 못 믿을 통계이었음을 확인시켜주었다고 했다. 저 친일학자들은 그 엉터리 통계에 기반하여 모래탑을 쌓아올린다. 식민지근대화 논리는 이 위험한 숫자가 아니라 상식으로 풀어야 한다. 일본이 우리 국민 잘 살게 해주려고 개발을 시작했는가? 수치 몇 개로 제국주의 통치를 합리화할 수 없다. 키플링이 백인의 짐이라고 하며 지배했던 아프리카에 영국인들이 과연 흑인을 잘 살게 해주려고 들어갔던가, 그리고 그들은 이후로 실제로 잘 살게 되었는가에 Yes라고 대답할 수 있을 때 친일학자의 식민지근대화론도 같은 맥락에서 지지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총독부는 진정 조선인들을 위해 개발을 시작했는가? 그 개발로 조선인들은 모두 얼마나 잘 먹고 잘 살게 되었는가?
우리의 보물인 조정래 선생의 <아리랑>과 허수열 교수의 저서 <개발 없는 개발>을 찾아 읽는 것으로 이날의 끝도 없이 넓은 광야 답사를 마무리 짓는다.

금, 2019/11/29- 03:14
1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