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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석동 한강변 언덕 위에 한강신사가 건립된 까닭은? – 서울 지역 곳곳에 포진한 일제 침략신사들의 흔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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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석동 한강변 언덕 위에 한강신사가 건립된 까닭은? – 서울 지역 곳곳에 포진한 일제 침략신사들의 흔적

익명 (미확인) | 월, 2018/07/02- 17:18

식민지비망록 37

흑석동 한강변 언덕 위에 한강신사가 건립된 까닭은?
– 서울 지역 곳곳에 포진한 일제 침략신사들의 흔적

 

이순우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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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한강신사 터를 활용하여 지난 1994년에 재건된 ‘효사정’의 모습.

 

한강대교를 남쪽으로 건너 서울현충원 방향으로 500미터 남짓 걷다보면, 지하철 9호선 흑석역(중앙대입구)에 조금 못 미쳐 한강변 쪽으로 약간 솟아오른 작은 봉우리 하나를 만나게 된다. 1955년 6월 25일에 건립된 학도의용병현충비(學徒義勇兵顯忠碑) 앞을 지나 돌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효사정(孝思亭)이라는 이름의 정자가 나타난다.
효사정은 원래 세종 때 우의정을 지낸 공숙공(恭肅公) 노한(盧閈, 1376~1443)의 별서(別墅)였다고 전해지는 유적이다. 그는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시묘살이를 했던 곳에다 정자를 짓고 때때로 이곳에 올라 모친을 그리워했고, 멀리 개성 땅에 묘지를 쓴 부친을 추모했다고 하여 ‘효사정’이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경기금천현(衿川縣)‘누정(樓亭)’조에“노량나루터 남쪽 언덕에 있는 정자”라는 정도의 간략한 내용이 남아 있긴 하나 사실상 이것만으로는 더 이상의 정확한 원위치 고증이 어려운 상태이다.
하지만 지난 1994년에 서울 정도 600년을 맞이하여 이를 기리는 사업의 하나로 한강주변의 유적지를 복원 정비하는 계획이 추진되었고 이때 편의상 부득의하게 지금의 자리를 선정하여 정자를 재건하기에 이르렀다. 이곳이 진짜 효사정 자리인지에 대한 논란을 차치하고라도 이 정자에 오르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강 쪽 전망이 참으로 빼어나다는 점에 공감하게 된다.
그런데 이 장소는 일제강점기를 거치는 내내 ‘한강신사(漢江神社)’라는 시설물이 터를 잡고 있었던 곳이라는 사실도 꼭 함께 기억할 필요가 있다. 후지이 가메와카(藤井龜若)가 펴낸 <경성의광화(京城の光華)>(조선사정조사회,1926)를 보면, 이한강신사의 건립유래가 다음과 같이 정리되어 있다.

 

한강신사는 인도교(人道橋)를 건너 동쪽의 작은 언덕에 숲속에 한줄기 끈과 같은 가느다란 길이 산꼭대기까지 걸쳐 있는데 그 산부리의 약간 높은 상두산령(象頭山嶺)의 영지(靈地)에서 제사를 지낸다. 제신(祭神)은 미야지대사(宮地大社), 코토히라대신(金刀羅大神), 스가와라대신(菅原大神)의 삼신(三神)으로 인도교 가교 청부인(請負人)이던 시키 노부타로(志岐信太郞) 씨가 대정 원년(1912년) 금상폐하(今上陛下, 대정천황을 말함)의 즉위를 기념하고 아울러 고국을 멀리 떠나온 재선민(在鮮民: 조선 거주 일본인)을 비롯하여 동포선인(同胞鮮人)에게 경신숭조(敬神崇祖)의 미풍을 가르치려는 돈독한 뜻에 따라 이곳 산자수명한 정지(淨地)를 택해 사재 십수 만 원을 들여 한강수호의 신으로 삼아 헌립(獻立)한 것이며, 매년 봄가을(5월 4일, 10월 4일)에 행해지는 대제례일에는 내선인의 참배자가 원근에서 운집하여 번잡함이 흡사 대공원의 모습을 보여준다.
섭사(攝社)에는 이나리신사(稻荷神社), 시키신사(志岐神社), 야신신사(矢心神社)를 모시며, 이 지역은 예로부터 영산(靈山)으로서 조선인들이 숭배하던 곳이다. 경내의 바위 사이에는 기이한 한 그루의 소나무가 있다. 와룡송(臥龍松)이라 부르는 유명한 나무로 수령이 수백 년이 넘는 신목(神木)이다.

 

여기에 나오는 시키 노부타로는 1869년생으로 일본 후쿠오카현(福岡縣) 출신이며, 자신의 토목건축회사인 시키구미(志岐組)를 통해 경부철도 속성공사를 비롯한 철도관련 청부업에 주력하여 부를 축적한 인물이었다. 그는 특히 1921년에 조선의 특산물이라고 일컬어지던 천연빙(天然氷), 즉 겨울철 한강 얼음을 채취하여 저장 판매하기 위해 조선천연빙주식회사 및 조선천연빙창고주식회사를 설립하였고, 1936년에 이들 회사와 여타 제빙회사가 조선제빙주식회사(朝鮮製氷株式會社)로 통합 전환한 이후에도 사장의 자리를 지킨 바 있다. 따라서 그는 이래저래 한강과는 많은 인연을 지닌 사람이었던 것으로 풀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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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일보>1934년 12월 2일자에 수록된 토끼사냥 야유대회관련 명수대 주변 약도에는 ‘한강신사’의 위치가 또렷이 표시되어 있다. 오른쪽 아래에 ‘화장사’라고 표시된 사찰은 오늘날 서울현충원 구내에 있는 ‘호국지장사’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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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신사가 자리한 흑석동 한강변의 풍경. (<일본지리대계(조선편)>, 신광사, 1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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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1년 기노시타 사카에가 개발을 주도한 명수대 주택지(현 흑석동)의 전경. 왼쪽으로 보이는 한강변 봉우리 위의 건물이 한강신사이다. (경성전기주식회사, <뻗어가는경성전기>, 1935)

 

이곳 한강신사의 제신으로 언급된 ‘미야지대사’는 일본 후쿠오카 소재 ‘미야지다케신사(宮地嶽神社)’를 말하는데, 시키의 고향에 있는 신사 그 자체가 숭배의 대상이었던 듯하다. 또한 ‘스가와라대신’은 일본 헤이안시대의 정치가 스가와라노 미치자네(菅原道眞)를 말하며, 대개 ‘학문의 신’으로 추앙되는 인물이기도 하다. 그리고 ‘코토히라대신’은 불교에서 일컫는 약사십이신장(藥師十二神將)의 하나이며 원래 인도 갠지즈강에 살았다는 쿰비라(Kumbhira, 蛟龍)에서 유래된 것으로, 일본에서는 바다를 수호하는 신으로 인지되어 일반적으로 선박 안전을 비는 대상으로 자리매김되어 있다. 한강신사가 자리한 봉우리를 일컬어 상두산(象頭山)이라고 한 것은 일본 가가와현(香川縣)에 있는 곤피라산(金刀比羅宮: 신사명)의 소재지에서 그대로 따온 이름으로 받아들여진다.
오카 료스케(岡良助)가 쓴 <경성번창기>(박문사,1915)라는책에는이곳이웅진강신사(熊津江神社)라는 이름으로 소개되어 있는데, 한강신사는 그 이후의 시점에서 고쳐진 명칭인 듯하다. 아무튼 이곳은 일본인의 입장에서 한강 수호의 신으로 삼아 설립된 것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1912년에 그네들의 천황이 등극한 것을 기념하는 뜻에서 이러한 신사가 탄생하게 되었다는 점에도 깊이 유념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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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총독부관보>1934년 5월 14일자에는 한강신사가 ‘신메이신사’라는 이름으로 새로 설립허가를 받은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그런데 일제패망기에 대륙신도연맹(大陸神道聯盟)에서 엮어낸 <대륙신사대관(大陸神社大觀)>(1941)을 보면, 여기에는 한강신사의 명칭이 ‘神社’가 아닌 ‘神祠’로, 이곳의 제신(祭神)이 ‘천조대신(天照大神, 아마테라스 오미카미) 외 11신’으로, 창립일도 1912년이 아닌 ‘1934년 5월 9일’로 각각 변경 표기되어 있는 것이 확인된다. 이 점에 착안하여 <조선총독부관보>를뒤져보았더니1934년 6월 14일자에 수록된 “경기도 시흥군 북면 흑석리에 신메이신사(神明神祠) 설립의 건이 기노시타 사카에(木下榮) 외 72명으로부터 원출(願出)된 것에 대해 5월 9일부로 이를 허가함”이라는 기록이 눈에 띈다.
여기에 나오는 기노시타는 한강신사의 설립자인 시키의 고향 후배이면서 ‘시키구미’와 ‘조선천연빙주식회사’에 오랫동안 근무하면서 경력을 쌓았고, 1931년에는 지금의 흑석동 일대에 명수대토지경영사무소(明水臺土地經營事務所)를 꾸려 자신만의 이상향(理想鄕)으로 가꾸는 일에 주력했던 사람이었다. 1917년 3월 22일에 제정된 총독부령 제21호 「신사(神祠)에 관한 건」에 따르면 “신사(神祠)라고 칭함은 신사(神社)가 아니면서 공중(公衆)에 참배를 시키기 위해 신기(神祇)를 봉사하는 곳을 말한다”고 규정하고, 이를 설립하려는 때는 조선총독의 허가를 받도록 되어 있었다. 따라서 기노시타가 신사의 설립을 새로 청원한 것은 이에 따른 절차인 듯이 보인다. 또한 신메이는 아마테라스 오미카미의 별칭이므로, ‘신메이신사’는 이를테면 이세신궁(伊勢神宮)을 총본산으로 삼아 아마테라스 오미카미를 주된 제신으로 모시는 가장 보편적인 형태의 신사(神祠, 격이 낮은 소규모 신사)인 셈이다. 이런 사실에 비춰보면 1930년대 전시체제기로 접어들면서 이러한 시대의 변화에 맞물려 한강신사 자체의 기능과 성격에 있어서 제도적인 환골탈태가 진행된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일제강점기 서울지역에 설치되어 있던 일제의 신사들을 얘기하면, 남산 왜성대에 자리한 경성신사(京城神社)와 남산 중턱 옛 한양공원 터에 들어선 조선신궁(朝鮮神宮, 1925년 10월 준공) 정도를 언급하는 것이 보통이다. 원래 경성신사는 1898년에 남산대신궁(南山大神宮)으로 설립되었다가 1913년에 경성신사로 개칭되었으며, 이 안에 천만궁(天滿宮, 1902년 창립), 남산도하신사(南山稻荷神社, 1931년 창립), 팔번궁(八幡宮, 1931년 창립)을 섭사로 거느리고 있었다.
이밖에 경성신사의 뒤쪽에 자리하고 있는 노기신사(乃木神社, 1934년 창립)와 용산 일본군병영지의 후면 남산 기슭에 조성된 경성호국신사(京城護國神社, 1943년 창립) 등의 존재도 곧잘 언급되고 있다. 하지만 이것들 말고도 태평로 쪽에 에비스신사(惠比須神社, 1913년 창립)를 비롯하여 원효로 인근 영정(榮町, 지금의 신계동 1번지 위치)에 있는 문평산(文平山)에는 가토신사(加藤神社, 1914년 창립)라는 것이 있었고, 신메이신사는 영등포동, 용두동, 신길동, 이태원동 등지에도 두루 포진하고 있었던 사실이 확인된다.
<매일신보>1943년5월18일자에는「신사(神祠)의신마(神馬)도출정(出征),금일한강신사(漢江神祠)에서 장행회(壯行會) 거행」 제하의 기사가 수록되어 있는데, 이것이 한강신사에 관해 현재까지 드러난 막바지 기록이다.

 

미영격멸에 신마(神馬)도 출정 ― 부내 한강신사 앞에 모셔 논 구리로 만든 신마가 출정하기로 되어 17일 오전 10시 동 신사에서 장행회를 거행하였다. 여기에는 군 애국부의 히라이 대위(平井大尉)와 기노시타(木下) 흑석정 총대 이하 정민(町民) 다수가 참열한 아래 성대히 거행하였는데 이 신마는 대정 10년도(1921년도)에 건립하여 지금까지 23년 동안 동 신사 앞에서 있던 것으로 이번에 육군에 헌납키로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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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신보> 1943년 5월 18일자에 수록된 한강신사 신마 출정 장행회 관련 보도사진.

 

여기에 흑석정 총대로 언급된 기노시타는 바로 명수대토지경영사무소 사장과 동일인이다. 겉으로는 한강 수호의 성지인 듯이 말하지만 결국에는 출정황군의 무운장구를 빌거나 전쟁동원을 위한 총력체제의 결집장소로 활용되고 마는 것이 바로 일제가 만든 이들 침략신사의 본질이 아닌가 싶다.

시민들의 의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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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펨 사용자 차단 질문

암혹했던 시절 독립을 꿈꾸며 항일운동을 하셨던 선조들의 가르침을 배우고 싶습니다.

일, 2018/06/24- 1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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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시대에 알고싶은 내용이 있을땐 구글, 네이버, 다음 같은 곳에서 검색을 하게 됩니다

안익태가 친일인명사전에 등록되어있는 내용을 알아보려고 민족문제연구소에 접속하여 검색에서 안익태를 입력하고 검색했더니 친일인명사전앱에서 처럼 검색이 되지 않아서 실망됩니다

위키백과처럼 검색어를 입력하면 곧장 해당내용이 출력되게 하여야 합니다

일반인이 사전을 활용하듯이 친일인명사전을 사용하는 경우는 없습니다

친일인명사전앱을 구입한 저도 몇번 설치하기는 했지만 스마트폰이 느려지기 때문에 자주 사용하지 않는 앱은 지우게 됩니다

친일인명사전을 전문가(?)를 위해서 만든것이 아니라면, 앱을 설치하지 않아도 위키백과처럼 쉽게 접근해서 쉽게 친일파를 확인 할 수 있게 만들어주시길 바랍니다

일반인은 친일인명사전앱이 필요해서 구입하지는 않습니다(조금의 힘을 보텐다는 마음으로 구입할 뿐)

 

 

월, 2018/10/08- 2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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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20-11

수, 2017/09/20- 1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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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성의 뉴스 팩트체크] 독립투사의 딸 초청한 주중대사관, 아무 문제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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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16일 ‘조선일보’가 보도한 ‘주중 한국대사관 광복절 행사에… 6.25때 중공군 정율성 딸도 초청’ 기사. ⓒ조선일보 PDF

지난 15일 베이징 주재 한국대사관이 주최한 제73주년 광복절 경축식에 독립투사 정율성의 딸인 정소제(75)씨가 초청된 것을 두고 <조선일보>가 자극적인 기사를 내보냈다. 경축식에는 임시정부 비서였던 김동진의 딸과, 님 웨일스가 쓴 <아리랑>의 주인공인 김산(본명 장지락)의 아들도 초청됐다.

16일자 <조선일보>는 베이징 특파원 명의의 기사에서 정소제씨 초청 대목에만 문제를 제기했다. <조선일보>는 “주중 한국대사관 광복절 행사에… ‘6·25 때 중공군’ 정율성 딸도 초청”이란 제목 아래 정율성이 중국공산당원으로 가입했고 “조선인민군 행진곡을 작곡해 김일성에게 바쳤”으며 “6·25 때는 중공군으로 참전해 서울까지 내려왔”다는 점을 부각시켰다. 주중대사관이 대단히 불순한 인물의 딸을 초청한 듯한 인상을 풍긴 것이다.

정율성은 나라 잃은 지 4년 뒤인 1914년 전라도 광주에서 출생했다. 이것이 인연이 돼 오늘날 광주광역시에 정율성로라는 도로명이 있다. 또 해마다 10월에 사흘간 ‘정율성 국제음악제도 광주에서 열린다. 이 행사는 광주광역시가 주최하고 광주정율성국제음악제추진위원회가 주관한다.

광주 남구에 있는 정율성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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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주 남구 양림동 휴먼시아 아파트 입구 정율성로(路)에 광주 출신의 중국 혁명 음악가 정율성 선생의 흉상이 조성됐다. 2009년 7월 15일, 흉상 조성을 축하하는 제막식이 열렸다. ⓒ연합뉴스

단순히 광주 출신이라는 이유만으로 광주 사람들이 정율성을 기념하는 것은 아니다. 국가적 차원에서 기념해도 부족함 없는 인물이지만, 국가가 하지 않으므로 고향 사람들이라도 나서서 그렇게 하는 것이다. 정율성 국제음악제를 여는 취지와 관련해, 문화체육관광부 홈페이지의 문화광장 코너는 이렇게 설명한다.

“중국인이 아닌 조선인이면서도 중국에서의 항일투쟁과 탁월한 음악적 업적으로 중국 3대 음악인으로 추앙받고 있는 정율성의 삶과 음악성을 재조명해 업적을 기리고…(하략)”

항일투쟁과 음악적 성과로 중국 3대 음악인으로 추앙받는 점이 정율성 국제음악제 개최의 결정적 원동력이 됐다는 설명이다. 대표작 <연안송>이 어떤 위상을 차지하고 있는지 살펴보면, 오늘날 그의 중국 내 위상을 짐작할 수 있다. 중앙대 국악대학장 및 한국음악학회장 등을 역임한 고 노동은 교수가 정리하고 민족문제연구소가 기획한 <항일음악 330곡집>은 이렇게 설명한다.

“<연안송>은 중국의 마오쩌둥(모택동)과 저우언라이(주은래)·주더(주덕) 등이 이끌었던 항일혁명의 성지 옌안을 찬양하는 노래다. 이 노래는 중국인들에게 대표적인 항일가이자 서정적인 가곡으로 깊이 각인되어 지금까지도 널리 사랑받고 있다.”

<연안송> 외에 <중국인민해방군가>도 정율성이 작곡했다. 뿐만 아니라 북한의 <조선인민군 행진곡>도 그의 작품이다. 이렇게 바로 옆에서 큰 사랑을 받고 있는 한국인 작곡가가 정작 한국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그가 국제적 음악가라는 사실은 물론 열혈 독립투사였다는 사실도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

운전자가 바로 옆에 있는 차량도 발견하지 못하는 것은 딴 데 정신이 팔려 시야가 좁아졌기 때문이다. 독립운동에 대한 우리의 시야 역시 그렇게 좁아져 있기 때문에 정율성을 잘 모르는 것이다.

이로 인해 정율성의 기본 이력조차 잘 알려지지 않은 탓에 <조선일보> 같은 보수언론이 그를 ‘6·25 때 중공군’으로 아무렇지도 않게 소개할 수 있는 것이다. 그의 삶을 살펴보면 ‘6·25 때 중공군’이라는 프로필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일인지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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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항일음악 300곡>에 수록된 <연안송> 악보. ⓒ김종성

율성(律成): 오선지로 독립운동을 하다

정율성은 1914년 전라도 광주에서 출생했다. 본명은 정부은이다. 율성(律成)은 ‘음율이 성취되다’라는 어의에서 느낄 수 있듯이 음악가가 되기로 결심한 뒤에 지은 이름이다. 개명에 얽힌 이야기가 역사학자 이이화가 쓴 <천재 음악가 정율성>에 소개돼 있다.

“그의 아버지는 단순한 농부가 아닌 지식인이었다. 음악에 열중하는 어린 아들을 보고, 예전에는 외적을 물리칠 적에 북과 나팔로 사기를 돋우었던 일을 상기하며 우리에게 군가가 없다는 한탄을 들려주었다. 이에 그는 깊이 느낀 바가 있었고 또 그런 음악을 작곡하는 작곡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이때 ‘음악을 이룬다’는 뜻을 지닌 율성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 월간 <길을 찾는 사람들> 제92권에 실린 글 중에서

정율성은 외적을 물리칠 때 북과 나팔로 아군의 사기를 돋우는 음악가가 되고 싶었다. 항일 음악가가 돼 나라를 독립시키고 싶었던 것이다. 음악을 통한 항일이 얼마나 중요한가는 성가대가 교회 예배나 전도활동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생각하면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오선지로 하는 독립운동도 총으로 하는 독립운동 못지 않게 중요했다. 정율성은 오선지로 하는 독립운동만 한 게 아니라 총으로 하는 독립운동에도 참여했다. 다만 오선지에 좀 더 비중을 뒀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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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항일음악 300곡>에 수록된 정율성 사진. ⓒ김종성

정율성은 19세 때인 1933년 중국으로 건너갔다. 첫째형 정남근, 둘째형 정인제, 셋째형 정의근처럼 독립투사가 될 목적이었다. 열혈 독립운동단체인 의열단의 조선혁명간부학교를 졸업한 뒤, 독립운동단체 사무를 보면서 음악공부를 병행했다. 그 뒤 항일군정대학 정치부 선전과에서도 활동하고 뤼신예술학원에서 음악도 가르쳤다.

1941년부터는 화북조선청년연합회나 화북조선혁명청년학교 등에 소속돼 항일투쟁에 박차를 가했다. 해방 뒤에는 북한에 가서 음악을 가르치며 인민군협주단을 만들었다. 한국전쟁 때는 중국 국적을 취득해 중국인민지원군이 된 뒤 전선 위문활동을 펼쳤다. 1951년 4월 중국으로 돌아간 뒤 작곡 활동에 전념하다가 1976년 세상을 떠났다. 그는 그렇게 독립투사 출신의 음악가로 일생을 마감했다.

<조선일보> 논리의 문제점

<조선일보> 기사에서는 주중대사관이 정율성의 딸을 초청한 것과 관련해 크게 두 가지 문제점을 제기했다. 하나는 그가 정부로부터 서훈을 받은 독립투사가 아니라는 점이다.

“김동진 지사와 김산은 정부에서 독립유공자 서훈을 받았으나, 정율성은 아니다.” – <조선일보> 기사 중

이제껏 대한민국은 독립운동가를 제대로 예우하지 않기로 유명한 나라였다. 제대로 대우하지 않은 것은 물론이고, 누가 독립운동을 했는지도 제대로 밝혀내지 못했다. 그렇기 때문에 대한민국 정부가 서훈을 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독립운동가가 아니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런 서훈을 받았든 안 받았든, 독립운동가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정율성이 정부의 서훈을 받지 못했다면, 이번 기회에 서훈을 추진하면 되는 것이다. “정율성은 아니다”라는 <조선일보> 기사의 표현을 “정율성에게도 서훈을 줘야 한다”는 긍정적 의미로 독자들이 해석하면 되는 것이다.

<조선일보>가 제기한 두 번째 문제점은 그가 북한 정권에 협력했다는 점이다. 해방 후 6년간 북한에 머물며 정치적 음악 활동에 종사했다는 점을 거론했다. 하지만 <조선일보>가 간과하는 점이 있다. 그것은 독립운동이 사상보다 상위에 있다는 엄중한 사실이다.

독립운동에는 사회주의자도 가담했고 그렇지 않은 사람도 가담했다. 이런 분들이 상호 경쟁하면서도 독립운동에 참여한 것은, 민족의 독립을 최상위의 가치로 인정했기 때문이다. 독립 쟁취가 우리 민족의 공통 관심사였다는 점은, 서로 다른 세계관과 우주관을 가진 불교·기독교·천도교·유교 교인들이 독립운동에 다 함께 동참한 사실에서도 드러난다.

또 해방 뒤에 남으로 갔든 북으로 갔든, 독립운동가였다는 사실만큼은 변하지 않는다. 대한민국이 한반도 전부를 지배하는 것도 아니고 절반 밖에 지배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모든 한민족 구성원과 모든 독립투사가 대한민국 정부의 관할을 받을 수는 없었다.

대한민국의 관할을 받고 싶어도 대한민국에 올 수 없었던 사람들도 적지 않다. 그러므로 “당신은 왜 대한민국 영역에 들어오지 못했냐?”고 물을 게 아니라, 대한민국정부 스스로 “왜 그분들을 모시지 못했나?”라고 자문하는 게 먼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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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주광역시에 있는 ‘음악가 정율성 선생 탄생지’ 비석. ⓒ 위키백과

그리고 북으로 간 독립운동가는 독립운동가가 아니라고 한다면, 남으로 온 독립운동가 역시 북한 입장에서는 독립운동가가 아닌 게 된다. 백범 김구가 남으로 온 독립운동가라 하여, 또 <백범일지>에서 사회주의에 대한 혐오를 드러냈다 하여, 북한 정부가 김구를 독립운동가로 인정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얼마나 우습고 모순된 일인지는 굳이 언급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북에서 그런 식으로 말한다면 남한 사람들은 부당하다는 느낌을 갖게 될 것이다. 마찬가지로 북으로 갔다 해서 독립운동가를 독립운동가로 인정하지 않는다면, 북한 사람들 입장에서도 똑같은 부당함을 느끼게 될 것이다.

남으로 왔든 북으로 갔든, 독립운동가는 독립운동가다. 그런 사유를 갖고 독립운동가를 차별해서는 안된다. 사상과 종교는 물론이고 거주지를 갖고도 독립운동가를 차별해서는 안된다. 모든 유형의 독립운동가들을 다 받들고 존경하는 것이 우리 사회의 통합과 탕평을 이루는 출발점이라는 점을 간과할 수 없다.

남이냐 북이냐 하는 거주지를 갖고 독립운동가를 차별하게 되면, 지금 진행중인 한반도 평화정착과 통일운동에도 차질이 생길 수밖에 없다. 평화와 통일을 이루려면 그런 일로 분란을 조성하지 말아야 한다. 남에서 존경하는 분들을 북에서도 존경해주고, 북에서 존경하는 분들을 남에서도 존경해줘야 남과 북이 하나의 마음을 가질 수 있다.

독립운동은 사상보다 위에 있다

독립운동이 사상·종교·거주지보다 상위 개념이라는 점은 헌법 조문만 봐도 알 수 있다. 헌법 전문(서문)은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 민주이념을 계승”한다고 했다. 3·1운동으로 상징되는 독립운동이 대한민국 정통성의 근원이라는 것이다.

좌파든 우파든 모든 독립운동가들은 3·1운동 정신의 실천자들이다. 헌법이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3·1운동에 두고 있으므로, 이 이념에 입각해 독립운동을 한 정율성 같은 분들을 대한민국 정부로서는 예우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 분들을 차별할 권리가 대한민국 정부한테는 없다. 주중대사관도 마찬가지다. 주중대사관에게는 정율성의 딸을 초청자 명단에서 뺄 권리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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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세 부르는 애국지사 후손들 제73주년 광복절을 맞아 15일 중국 베이징 주중 한국대사관에서 열린 광복절 경축식에서 애국지사 김산의 아들 고영광 선생(오른쪽에서 두번째)과 정율성 선생의 딸 정소제(왼쪽 두번째) 여사가 만세를 부르고 있다. ⓒ 연합뉴스

독립운동을 사상의 상위에 놓지 않고, 거꾸로 사상을 독립운동의 상위에 놓은 사람들이 이제껏 저질러온 잘못들을 열거하면 한도 끝도 없다. 그중 대표적인 것은 친일청산을 훼방하고 지연시킨 점이다.

해방 직후에 반민특위의 친일청산이 무산된 것은 이승만 정권이 친일청산을 공산주의로 매도했기 때문이다. 이승만 입장에서는 독립운동보다 사상이 더 중요했던 것이다. 이런 잘못을 앞으로도 답습한다면, 대한민국에서 독립운동과 친일청산의 가치가 빛을 발하기는 힘들 것이다.

무엇보다 우리 국민들의 시대정신이 그것을 더 이상 용인하지 않는다. 촛불혁명 때 우리 국민들은 사상을 독립운동의 상위에 놓는 구세력 핵심부를 청와대에서 끌어내 감옥으로 보냈다. 박근혜로 대표되는 구세력은 독립운동이나 친일청산보다는 자신들의 낡은 이념을 최상위로 평가했다. 그들은 우리 국민들이 넓은 시야로 역사와 세상을 보는 것을 방해했다. 우리 국민들이 넓은 시야로 ‘운전’하는 것을 훼방했다.

그래서 우리 국민들은 촛불을 들고 그들을 쫓아냈다. 그 겨울의 별빛 아래서, 마치 악귀를 쫓듯 촛불을 들고 그들을 쫓아냈다. 그런 마당에 <조선일보>가 ‘악귀들’의 행태를 답습하며 그들의 가치관을 대변하는 기사를 계속 내보내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정율성은 헌법으로 봐도 문제없고, 촛불 정신으로 봐도 문제없는, 명실상부한 독립투사다. 북한뿐 아니라 남한의 법제도로 봐도 이 분은 틀림없는 열혈 독립투사다. 그분의 딸을 공식 행사에 초청하는 것은 그래서 문제없는 일이다.

정율성 같은 훌륭한 독립투사를 허무맹랑하게 색깔론을 덧씌워 소개하는 일은 독립운동의 역사를 폄훼하는 일이다. 북과 나팔로 외적을 물리치고 ‘조선’을 살리고자 애쓰신 분을 ‘6·25 때 중공군’으로 소개한 <조선일보>는 팩트를 제대로 보지 못한 보도를 자행했다.

<2018-08-17> 오마이뉴스

☞기사원문: 조선일보의 ‘정율성’ 보도, 독립운동을 폄훼하다

금, 2018/08/17- 18: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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