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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석동 한강변 언덕 위에 한강신사가 건립된 까닭은? – 서울 지역 곳곳에 포진한 일제 침략신사들의 흔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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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석동 한강변 언덕 위에 한강신사가 건립된 까닭은? – 서울 지역 곳곳에 포진한 일제 침략신사들의 흔적

익명 (미확인) | 월, 2018/07/02- 17:18

식민지비망록 37

흑석동 한강변 언덕 위에 한강신사가 건립된 까닭은?
– 서울 지역 곳곳에 포진한 일제 침략신사들의 흔적

 

이순우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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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한강신사 터를 활용하여 지난 1994년에 재건된 ‘효사정’의 모습.

 

한강대교를 남쪽으로 건너 서울현충원 방향으로 500미터 남짓 걷다보면, 지하철 9호선 흑석역(중앙대입구)에 조금 못 미쳐 한강변 쪽으로 약간 솟아오른 작은 봉우리 하나를 만나게 된다. 1955년 6월 25일에 건립된 학도의용병현충비(學徒義勇兵顯忠碑) 앞을 지나 돌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효사정(孝思亭)이라는 이름의 정자가 나타난다.
효사정은 원래 세종 때 우의정을 지낸 공숙공(恭肅公) 노한(盧閈, 1376~1443)의 별서(別墅)였다고 전해지는 유적이다. 그는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시묘살이를 했던 곳에다 정자를 짓고 때때로 이곳에 올라 모친을 그리워했고, 멀리 개성 땅에 묘지를 쓴 부친을 추모했다고 하여 ‘효사정’이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경기금천현(衿川縣)‘누정(樓亭)’조에“노량나루터 남쪽 언덕에 있는 정자”라는 정도의 간략한 내용이 남아 있긴 하나 사실상 이것만으로는 더 이상의 정확한 원위치 고증이 어려운 상태이다.
하지만 지난 1994년에 서울 정도 600년을 맞이하여 이를 기리는 사업의 하나로 한강주변의 유적지를 복원 정비하는 계획이 추진되었고 이때 편의상 부득의하게 지금의 자리를 선정하여 정자를 재건하기에 이르렀다. 이곳이 진짜 효사정 자리인지에 대한 논란을 차치하고라도 이 정자에 오르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강 쪽 전망이 참으로 빼어나다는 점에 공감하게 된다.
그런데 이 장소는 일제강점기를 거치는 내내 ‘한강신사(漢江神社)’라는 시설물이 터를 잡고 있었던 곳이라는 사실도 꼭 함께 기억할 필요가 있다. 후지이 가메와카(藤井龜若)가 펴낸 <경성의광화(京城の光華)>(조선사정조사회,1926)를 보면, 이한강신사의 건립유래가 다음과 같이 정리되어 있다.

 

한강신사는 인도교(人道橋)를 건너 동쪽의 작은 언덕에 숲속에 한줄기 끈과 같은 가느다란 길이 산꼭대기까지 걸쳐 있는데 그 산부리의 약간 높은 상두산령(象頭山嶺)의 영지(靈地)에서 제사를 지낸다. 제신(祭神)은 미야지대사(宮地大社), 코토히라대신(金刀羅大神), 스가와라대신(菅原大神)의 삼신(三神)으로 인도교 가교 청부인(請負人)이던 시키 노부타로(志岐信太郞) 씨가 대정 원년(1912년) 금상폐하(今上陛下, 대정천황을 말함)의 즉위를 기념하고 아울러 고국을 멀리 떠나온 재선민(在鮮民: 조선 거주 일본인)을 비롯하여 동포선인(同胞鮮人)에게 경신숭조(敬神崇祖)의 미풍을 가르치려는 돈독한 뜻에 따라 이곳 산자수명한 정지(淨地)를 택해 사재 십수 만 원을 들여 한강수호의 신으로 삼아 헌립(獻立)한 것이며, 매년 봄가을(5월 4일, 10월 4일)에 행해지는 대제례일에는 내선인의 참배자가 원근에서 운집하여 번잡함이 흡사 대공원의 모습을 보여준다.
섭사(攝社)에는 이나리신사(稻荷神社), 시키신사(志岐神社), 야신신사(矢心神社)를 모시며, 이 지역은 예로부터 영산(靈山)으로서 조선인들이 숭배하던 곳이다. 경내의 바위 사이에는 기이한 한 그루의 소나무가 있다. 와룡송(臥龍松)이라 부르는 유명한 나무로 수령이 수백 년이 넘는 신목(神木)이다.

 

여기에 나오는 시키 노부타로는 1869년생으로 일본 후쿠오카현(福岡縣) 출신이며, 자신의 토목건축회사인 시키구미(志岐組)를 통해 경부철도 속성공사를 비롯한 철도관련 청부업에 주력하여 부를 축적한 인물이었다. 그는 특히 1921년에 조선의 특산물이라고 일컬어지던 천연빙(天然氷), 즉 겨울철 한강 얼음을 채취하여 저장 판매하기 위해 조선천연빙주식회사 및 조선천연빙창고주식회사를 설립하였고, 1936년에 이들 회사와 여타 제빙회사가 조선제빙주식회사(朝鮮製氷株式會社)로 통합 전환한 이후에도 사장의 자리를 지킨 바 있다. 따라서 그는 이래저래 한강과는 많은 인연을 지닌 사람이었던 것으로 풀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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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일보>1934년 12월 2일자에 수록된 토끼사냥 야유대회관련 명수대 주변 약도에는 ‘한강신사’의 위치가 또렷이 표시되어 있다. 오른쪽 아래에 ‘화장사’라고 표시된 사찰은 오늘날 서울현충원 구내에 있는 ‘호국지장사’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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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신사가 자리한 흑석동 한강변의 풍경. (<일본지리대계(조선편)>, 신광사, 1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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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1년 기노시타 사카에가 개발을 주도한 명수대 주택지(현 흑석동)의 전경. 왼쪽으로 보이는 한강변 봉우리 위의 건물이 한강신사이다. (경성전기주식회사, <뻗어가는경성전기>, 1935)

 

이곳 한강신사의 제신으로 언급된 ‘미야지대사’는 일본 후쿠오카 소재 ‘미야지다케신사(宮地嶽神社)’를 말하는데, 시키의 고향에 있는 신사 그 자체가 숭배의 대상이었던 듯하다. 또한 ‘스가와라대신’은 일본 헤이안시대의 정치가 스가와라노 미치자네(菅原道眞)를 말하며, 대개 ‘학문의 신’으로 추앙되는 인물이기도 하다. 그리고 ‘코토히라대신’은 불교에서 일컫는 약사십이신장(藥師十二神將)의 하나이며 원래 인도 갠지즈강에 살았다는 쿰비라(Kumbhira, 蛟龍)에서 유래된 것으로, 일본에서는 바다를 수호하는 신으로 인지되어 일반적으로 선박 안전을 비는 대상으로 자리매김되어 있다. 한강신사가 자리한 봉우리를 일컬어 상두산(象頭山)이라고 한 것은 일본 가가와현(香川縣)에 있는 곤피라산(金刀比羅宮: 신사명)의 소재지에서 그대로 따온 이름으로 받아들여진다.
오카 료스케(岡良助)가 쓴 <경성번창기>(박문사,1915)라는책에는이곳이웅진강신사(熊津江神社)라는 이름으로 소개되어 있는데, 한강신사는 그 이후의 시점에서 고쳐진 명칭인 듯하다. 아무튼 이곳은 일본인의 입장에서 한강 수호의 신으로 삼아 설립된 것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1912년에 그네들의 천황이 등극한 것을 기념하는 뜻에서 이러한 신사가 탄생하게 되었다는 점에도 깊이 유념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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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총독부관보>1934년 5월 14일자에는 한강신사가 ‘신메이신사’라는 이름으로 새로 설립허가를 받은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그런데 일제패망기에 대륙신도연맹(大陸神道聯盟)에서 엮어낸 <대륙신사대관(大陸神社大觀)>(1941)을 보면, 여기에는 한강신사의 명칭이 ‘神社’가 아닌 ‘神祠’로, 이곳의 제신(祭神)이 ‘천조대신(天照大神, 아마테라스 오미카미) 외 11신’으로, 창립일도 1912년이 아닌 ‘1934년 5월 9일’로 각각 변경 표기되어 있는 것이 확인된다. 이 점에 착안하여 <조선총독부관보>를뒤져보았더니1934년 6월 14일자에 수록된 “경기도 시흥군 북면 흑석리에 신메이신사(神明神祠) 설립의 건이 기노시타 사카에(木下榮) 외 72명으로부터 원출(願出)된 것에 대해 5월 9일부로 이를 허가함”이라는 기록이 눈에 띈다.
여기에 나오는 기노시타는 한강신사의 설립자인 시키의 고향 후배이면서 ‘시키구미’와 ‘조선천연빙주식회사’에 오랫동안 근무하면서 경력을 쌓았고, 1931년에는 지금의 흑석동 일대에 명수대토지경영사무소(明水臺土地經營事務所)를 꾸려 자신만의 이상향(理想鄕)으로 가꾸는 일에 주력했던 사람이었다. 1917년 3월 22일에 제정된 총독부령 제21호 「신사(神祠)에 관한 건」에 따르면 “신사(神祠)라고 칭함은 신사(神社)가 아니면서 공중(公衆)에 참배를 시키기 위해 신기(神祇)를 봉사하는 곳을 말한다”고 규정하고, 이를 설립하려는 때는 조선총독의 허가를 받도록 되어 있었다. 따라서 기노시타가 신사의 설립을 새로 청원한 것은 이에 따른 절차인 듯이 보인다. 또한 신메이는 아마테라스 오미카미의 별칭이므로, ‘신메이신사’는 이를테면 이세신궁(伊勢神宮)을 총본산으로 삼아 아마테라스 오미카미를 주된 제신으로 모시는 가장 보편적인 형태의 신사(神祠, 격이 낮은 소규모 신사)인 셈이다. 이런 사실에 비춰보면 1930년대 전시체제기로 접어들면서 이러한 시대의 변화에 맞물려 한강신사 자체의 기능과 성격에 있어서 제도적인 환골탈태가 진행된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일제강점기 서울지역에 설치되어 있던 일제의 신사들을 얘기하면, 남산 왜성대에 자리한 경성신사(京城神社)와 남산 중턱 옛 한양공원 터에 들어선 조선신궁(朝鮮神宮, 1925년 10월 준공) 정도를 언급하는 것이 보통이다. 원래 경성신사는 1898년에 남산대신궁(南山大神宮)으로 설립되었다가 1913년에 경성신사로 개칭되었으며, 이 안에 천만궁(天滿宮, 1902년 창립), 남산도하신사(南山稻荷神社, 1931년 창립), 팔번궁(八幡宮, 1931년 창립)을 섭사로 거느리고 있었다.
이밖에 경성신사의 뒤쪽에 자리하고 있는 노기신사(乃木神社, 1934년 창립)와 용산 일본군병영지의 후면 남산 기슭에 조성된 경성호국신사(京城護國神社, 1943년 창립) 등의 존재도 곧잘 언급되고 있다. 하지만 이것들 말고도 태평로 쪽에 에비스신사(惠比須神社, 1913년 창립)를 비롯하여 원효로 인근 영정(榮町, 지금의 신계동 1번지 위치)에 있는 문평산(文平山)에는 가토신사(加藤神社, 1914년 창립)라는 것이 있었고, 신메이신사는 영등포동, 용두동, 신길동, 이태원동 등지에도 두루 포진하고 있었던 사실이 확인된다.
<매일신보>1943년5월18일자에는「신사(神祠)의신마(神馬)도출정(出征),금일한강신사(漢江神祠)에서 장행회(壯行會) 거행」 제하의 기사가 수록되어 있는데, 이것이 한강신사에 관해 현재까지 드러난 막바지 기록이다.

 

미영격멸에 신마(神馬)도 출정 ― 부내 한강신사 앞에 모셔 논 구리로 만든 신마가 출정하기로 되어 17일 오전 10시 동 신사에서 장행회를 거행하였다. 여기에는 군 애국부의 히라이 대위(平井大尉)와 기노시타(木下) 흑석정 총대 이하 정민(町民) 다수가 참열한 아래 성대히 거행하였는데 이 신마는 대정 10년도(1921년도)에 건립하여 지금까지 23년 동안 동 신사 앞에서 있던 것으로 이번에 육군에 헌납키로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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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신보> 1943년 5월 18일자에 수록된 한강신사 신마 출정 장행회 관련 보도사진.

 

여기에 흑석정 총대로 언급된 기노시타는 바로 명수대토지경영사무소 사장과 동일인이다. 겉으로는 한강 수호의 성지인 듯이 말하지만 결국에는 출정황군의 무운장구를 빌거나 전쟁동원을 위한 총력체제의 결집장소로 활용되고 마는 것이 바로 일제가 만든 이들 침략신사의 본질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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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짬] 기념사업회 윤경로 상임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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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경로 신흥무관학교 기념사업회 상임대표.

신흥무관학교는 지난 10일 설립 107년을 맞았다. 올 기념식은 예년과 달랐다. 육군사관학교에서 열린 것이다. 지난 8일 서울 태릉 육사 화랑연병장에서 생도 1100여 명이 107돌을 기념하기 위한 분열 의식을 했다. 신흥무관학교 기념사업회(상임대표 윤경로) 참석자들을 향해 충성 구호도 외쳤다. 육사 강당에선 항일 음악 발표회도 있었다.

1911년 6월 10일 만주 서간도에 세워진 신흥무관학교는 1920년 폐교까지 2천여 명의 항일 투사를 길러냈다. 이 학교 출신들은 청산리와 봉오동 전투의 중심이었다. 지청천 이범석 김경천 장군은 교관을 지냈다. 우당 이회영과 석주 이상룡 일가의 가산이 학교 설립에 쓰인 것은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예로 잘 알려져 있다. 2011년 꾸려진 사업회를 이끄는 윤경로 대표를 18일 서울 소공동 한 식당에서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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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8일 육사에서 열린 기념식 뒤 사업회 쪽 참석자와 생도 대표 등이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사업회를 만들고 가장 먼저 추진한 게 육사의 뿌리 찾기였죠. 육사 연혁을 보면 미군정이 만든 군사영어학교가 전신입니다. 친일파가 많은 학교였어요.” 사업회는 애초 신흥무관학교 100돌 기념사업을 치르기 위해 만들었다. “2011년 육사에 공문을 보내 숱한 독립군을 배출한 신흥무관학교가 육사의 뿌리란 걸 조명하는 세미나를 열고 기념식도 육사에서 하자고 제안했죠. 답이 없더군요.”

6년이 흐른 뒤 기류가 바뀌었다. “지난해 8·15 행사 뒤 육사 쪽에서 만나자고 했죠. 김완태 당시 육사 교장과 두 번 만났어요. (정진경 현 교장은 지난 5월 부임) 김 교장이 그래요. ‘난 육사 교장을 끝으로 군복을 벗는다. 소신껏 하겠다’고요.” 김 전 교장은 사업회 제안을 받아들여 지난해 12월 육사에서 ‘독립군·광복군의 독립전쟁과 육군의 역사’ 학술대회를 열었다. 올 3월 1일엔 학교 안에 홍범도 지청천 김좌진 이범석 장군과 이회영 선생의 흉상을 세웠다. 생도들이 군사훈련 때 쓴 탄피를 녹여 만들었다. 그리고 기념식이 육사 교정에서 열렸다.

윤 대표는 작년 8월 14일 애국지사·유족들과 함께 청와대에서 대통령과 점심을 먹었다. 광복절을 하루 앞둔 초청 행사였다. “문 대통령이 사업회 활동에 관심을 보이더군요. 그래서 제가 세 가지를 이야기했어요. 육사 모체를 친일파가 우글거렸던 군사영어학교로 하는 건 잘못이다, 자존심의 문제라고요. 국군의 날은 유엔군이 38선을 넘은 10월 1일이 아니라 광복군 설립일인 4월 27일이어야 한다고도 했죠. 탑골공원 정화사업의 필요성도 말했죠.” 대통령은 2주 뒤 국방부 업무보고에서 “광복군과 신흥무관학교 등 독립군 전통도 육사 교과과정에 포함하고 광복군을 군 역사에 편입하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화답했다.

지난 8일 육사서 107돌 기념식
작년엔 신흥 조명 학술대회도
육사 새정부 들어 사업회안 수용
“친일파 학교가 육사 전신은 잘못
신흥무관학교가 육사 뿌리 돼야
독립운동 전공자 교수 채용을”

한성대 총장을 지낸 윤 대표는 경실련 창립 멤버이다. 2003년부터 친일인명사전 편찬위원장도 맡고 있다. 고려대에서 강만길 교수 지도로 ‘105인 사건’을 주제로 박사 학위를 땄다. 2012년 한성대에서 정년 퇴임했다.
“사업회 설립 때 우당 손자인 이종찬 전 국정원장은 군 장성 중심으로 하자고 했죠. 하지만 내부 토론을 거쳐 유족과 학계 중심으로 하는 게 맞다고 의견을 모았어요. 첫해 중국 답사 때는 예비역 장성 13명이 참가했어요.”

그는 신흥무관학교가 제대로 조명을 받지 못한 데는 ‘분단 현실에 갇힌 독립운동 연구’ 탓이 크다고 했다. “(신흥 출신) 변영태는 남한 초대 외무장관을 했지만 김원봉 등은 북으로 갔어요. 이런 사정으로 연구가 제대로 안 되었죠. (분단의 제약으로) 남에서 한국 독립운동 연구는 상하이 임시정부 위주로만 했어요. 극복이 필요합니다.” 학교 터에 표지석을 세우려 했지만 중국 당국의 허락을 받지 못했단다. “터를 가보니 다 옥수수밭이고 유적지를 찾기 어려웠어요.”

그는 “사업회의 문제 제기가 이제 공론화된 것”이라며 앞으로 학교를 한국군의 뿌리로 정립하려는 노력을 차근차근해나가겠다고 했다. “육사에 연혁 수정을 요구해야죠. 제 생각으로는 대한제국의 장교 양성기관인 군사무관학교에서 출발해 신흥무관학교와 독립군·광복군 양성 학교로 내려오는 게 바람직합니다. 공사와 해사도 함께해야죠.” 덧붙였다. “육사 교수진에 한국독립운동사 전공 교수가 없어요. 독립운동사를 체계적으로 가르치려면 전임 교수가 필요하죠.”

육사 생도들 반응? “학술대회 때 생도들과 함께 식사했어요. 대부분 신흥무관학교가 있는 줄 몰랐다고 해요. 100년 전 나라가 어려울 때 선배들이 이런 일을 했다는 게 감동적이다, 자긍심이 생긴다고 했죠.” 그는 학교를 알리는데 영화나 연극 같은 문화 콘텐츠를 적극 활용하겠단 얘기도 했다. “신흥무관학교 출신이 주인공인 영화 <암살>로 학교가 많이 알려졌어요. 배우 조진웅씨는 사업회 홍보 대사이죠. 우당기념사업회에서 뮤지컬도 만들어 몇 번 공연했어요.”

그는 15년째 친일인명사전 편찬위원장으로 일하고 있다. “2009년 사전이 나온 뒤 사자 명예 훼손 등을 이유로 8번 소송이 있었지만 다 우리가 이겼어요. 있는 사실 만을 썼기 때문이죠. 서훈 심사 때 사전을 참고한다고 해요.” 개정 작업? “보완이 필요해요. 빠진 사람이 있는지 면밀히 보고 있어요. 지방이나 해외 친일파는 책 출간 때 충분히 조사하지 않았거든요.” 편찬위원장 자리에 자긍심 못지 않게 책임감도 크단다. “공인 아닌 공인이죠. 이런저런 공직 제안도 있었지만 가지 않은 것도 그런 이유에서죠.”

글·사진 강성만 선임기자 [email protected]

<2018-06-21> 한겨레

☞기사원문: “독립군 산실 ‘신흥무관학교’ 육사 생도들 자랑스러워해”

금, 2018/06/22- 1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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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인재단x민족문제연구소x통일시대민족문화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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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게임인재단, 민족문제연구소, 통일시대민족문화재단이 게임을 통한 역사 대중화를 위한 협약식을 했다.

게임인재단이 역사 연구 기관과 손잡고 게임을 통한 역사 대중화에 나선다.

재단법인 게임인재단은 3월16일 사단법인 민족문제연구소, 재단법인 통일시대민족문화재단과 함께 ‘게임을 통한 역사 대중화’ 협약식을 했다. 각 기관은 이번 협약으로 대중문화로 자리 잡은 게임을 활용해 역사 인식을 높이고 일반 대중들에게 역사를 친숙한 형태로 알려 나가기로 뜻을 모았다.

특히, 교육에만 초점을 맞춘 게임에서 벗어나 재미와 몰입도를 갖춘 형태로 역사를 쉽게 알리는 방법을 다양하게 모색할 계획이다. 이를 위해 각 기관은 게임과 역사의 가교 역할을 하면서 각종 지원 사업을 공동으로 추진해나가기로 했다.

게임인재단은 2013년 게임 업계 종사자를 주축으로 문화 산업으로서 게임에 대한 인식을 높이기 위해 설립됐다. 민족문제연구소와 통일시대민족문화재단은 ‘친일인명사전’을 편찬하고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을 주도하는 등 한일 과거사 청산 운동의 핵심 역할을 해온 역사 연구 단체다. 두 단체의 만남이 어떤 결과물을 끌어낼지 주목되는 부분이다.

게임인재단은 “이번 협약을 계기로 게임이 대중문화를 넘어, 사회적 역할과 시대적 메시지를 담아낼 수 있는 보다 크고 넓은 그릇이 되는 첫걸음이 될 수 있도록 역할을 다할 것”이라며 “대한민국 게임이 양적인 성장을 넘어 영역을 확장하는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라고 전했다.

민족문제연구소 측은 “그동안 영화 <암살>, 드라마 <각시탈>, 다큐멘터리 <백년전쟁> 등 주로 영상 영역이 역사의 대중화를 이끌어 왔다”라며 “이번 협약은 게임과 역사가 만나 역사 대중화의 지평을 넓히는 새롭고 신선한 시도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2018-03-16> 블로터닷넷

뉴스1: 민문연 “게임으로 우리 역사 대중화 나선다”

☞기사원문: 게임인재단-민족문제연구소, 게임 통한 역사 대중화 나선다

※관련기사

☞아이뉴스24뉴스: 게임 활용해 우리 역사 알린다

연합뉴스: “게임으로 역사 알리자”…게임인재단, 민족문제硏 등과 협약

일간스포츠: 게임으로 우리 역사 알린다…게임인재단, 민족문제연구소 등과 공동 사업

NSP통신: 게임, 대중 문화 넘어 시대적 역할과 메시지 담는다

금, 2018/03/16- 1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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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려는 현실로 되고 있다.
8월 전쟁위기설이 점차 현실화되는 과정이다.
북한의 최첨단 핵무기들이 하나 둘씩 확인되고 있는 상황에서 결국 6차 핵실험이 진행되었고, 이것은 지난 괌 타격 유보를 이제는 집행할 의도로 볼 수 있다.

특히 9월 9일은 북한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기념일 중의 하나로,
광인 트럼프의 막말대잔치와 미국의 뒷구녕을 핥아대는 문재인 정부의 시대착오적 대북제재 망발에 대한 응징으로 될 가능성이 크다.






실제 주요 해외 언론의 동향은 괌 타격이 9월 9일에 진행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목, 2017/09/07- 1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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