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신 초안은 ‘역사적인 문서 등에 대한 더 많은 조사’를 ‘요청 사항’으로 제시했고 정보센터와 관련해서는 ‘강력한 장려’ 사항으로 “(유산)시설의 전체 역사에 대한 해석 작업을 할 때 최선의 국제관행을 고려해야 한다”고 두루뭉술하게 적었다.
논의 과정에서 초안의 내용이 바뀔 수는 있지만, 그대로 통과되면 이 보고서는 일본 정부가 세계유산 등재시 약속했던 후속조치를 향후 제대로 이행하지 않을 명분으로 사용할 우려가 있다.
세계유산위원회에는 의장국 바레인과 부의장국 중국, 브라질, 스페인, 짐바브웨, 아제르바이잔 등 21개 국가가 회원국으로 속해 있다. 회원국이었던 한국은 작년 12월1일부로 임기가 종료됐다. 이번 회의에서 메이지 유산 관련 안건은 다음달 초 논의될 것으로 예상된다.
▲ ‘지옥섬’ 군함도 기록사진…목포 김대중기념관서 전시
(목포=연합뉴스) 전남 목포 김대중노벨평화상기념관은 일본 나가사키(長崎)현 하시마(端島·일명 군함도) 강제노역 실상을 기록한 이재갑 작가의 사진을 내년 3월 30일까지 전시한다. 사진은 이 작가가 기록한 군함도의 모습. 2017.12.26 [김대중노벨평화상기념관 제공=연합뉴스] [email protected]
2015년 세계유산으로 등재됐던 ‘메이지 일본 산업혁명 유산’은 하시마 탄광과 나가사키(長崎) 조선소 등 조선인들이 강제노동한 현장 7곳을 포함한 23개 산업 시설이다.
일본 정부는 한국 등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들 시설을 세계문화유산에 등재하면서 정보센터 건립 등 강제 노역을 인정하고 희생자를 기리는 조치를 취하겠다고 약속했었다.
하지만 이런 약속과 달리 ‘보전상황 보고서’는 피해 사실을 알리는 산업유산정보센터를 군함도가 있는 규슈(九州) 지역이 아니라 1천㎞ 이상 떨어진 도쿄(東京)에 설치하겠다는 내용을 담아 한국 여론의 거센 비판을 받았다.
일본 정부는 또한 보고서에서 강제노동 조선인에 대해 “국가총동원법에 따라 전쟁 전과 중, 후에 일본의 산업을 지원(support)한 많은 수의 한반도 출신자가 있었다”고 표현하며 유산 등재 당시 한일 양국 정부가 합의한 ‘강제(forced)’라는 단어를 빼기도 했다.
이 보고서가 위원회에 제출됐을 때 우리 정부는 외교부 대변인 논평을 통해 유감을 표하며 “국제사회에 약속한 대로 강제 노역 희생자들을 기리기 위한 후속조치를 성실히, 그리고 조속히 이행할 것을 촉구한다”고 밝혔었다.
▲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 회의 모습 [EPA=연합뉴스 자료사진]
이런 보고서가 이번 세계유산위원회 회의에서 별 문제 제기 없이 받아들여질 가능성이 커지자 양심적인 일본 시민단체들은 최근 회의 개막을 앞두고 회원국들에 성명서를 배포하며 보고서의 문제를 적극적으로 알리고 있어서 주목된다.
강제동원의 실상을 알리는 활동을 하는 일본 시민단체 ‘강제동원진상규명네트워크’는 한국의 민족문제연구소와 함께 지난 20일 “일본 정부는 보고서는 위원회가 강제노동을 비롯한 ‘역사의 전모’를 밝히도록 권고한 것에 대해 충실한 이행 계획을 담고 있지 않다”는 내용의 성명서를 회원국들에 보냈다.
이들 단체는 “보고서는 강제 노역 피해자를 산업을 지원한 사람으로 탈바꿈하고 있다”며 “도쿄에 세계유산정보센터를 세우겠다는 계획은 도쿄가 세계유산에서 아주 멀리 떨어져 피해자들을 기리기 위한 목적과 관련이 없어서 부적절하다”고 비판했다.
그러면서 “일본 정부가 군국주의의 역사를 찬미하는 역사 인식을 가지고 있다”며 “침략전쟁을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를 전파하던 곳이 인류의 보편적인 가치에 기여하는 것은 처음부터 불가능했다”고 지적했다.
▲ ‘메이지(明治) 일본 산업혁명 유산’과 관련해 일본 정부가 제출했던 ‘보전상황 보고서’에 대한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의 초안. 파란색 네모 부분이 강제 징용 관련 부분에 대한 요구 사항이다. 이 초안은 ‘역사적인 문서 등에 대한 더 많은 조사’를 ‘요청 사항’으로 제시했고 정보센터와 관련해서는 ‘강력한 장려’ 사항으로 “(유산)시설의 전체 역사에 대한 해석 작업을 할 때 최선의 국제관행을 고려해야 한다”고 두루뭉술하게 적었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 홈페이지 캡처]
“한인사회당은 그 뒤 상해파 고려공산당으로 개명되나 이동휘가 이 당을 만든 것은 단순히 한국 독립 후원자를 얻기 위해 만들었다고 한다. 그럴 것이 이동휘란 사람은 원래 구한국군의 정령(正領) 출신으로 열렬한 반일민족운동자이지, 사회주의 이념을 알고 있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만큼 초기 독립운동가 가운데는 나라의 독립운동을 위해 짐짓 공산당 조직에 몸담은 사람이 많았는데 볼셰비키 집단이 이들을 항일운동에 이용했다고 볼 수 있다. 아무튼 이동휘는 도량이 넓고 활동력이 큰 독립운동가였다.”
최초의 사회주의 정당 ‘한인사회당’
▲ 성재 이동휘 한인사회당은 1918년 4월 28일 하바롭스크에서 결성된 독립운동 단체이자 사회주의 정당이다. 이동휘는 항일 독립운동을 승리로 이끌기 위해 볼셰비키의 원조가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한인사회당은 연해주와 아무르주에 8개 지부를 설치했다. 한인사회당 최초 중앙위원에는 위원장 이동휘, 부위원장 오와실리, 군사부장 유동열, 선전부장 김립, 김알렉산드라가 뽑혔다. ⓒ 성재이동휘선생기념사업회
한인사회당은 조선인 최초 사회주의 정당일 뿐 아니라 아시아에서 처음으로 조직된 사회주의 정당이다. 1918년 출범한 한인사회당은 1921년과 1922년 각각 창설된 중국공산당과 일본공산당보다 더 빨리 탄생했다.
성재 이동휘는 한인사회당을 기반으로 연해주에서 공산주의 운동을 벌였다. 한인사회당은 기관지를 만들고, 군사학교를 세웠다. 100여 명으로 구성된 한인적위대(韓人赤衛隊)도 구성했다. 한인적위대가 참여한 우수리 전투는 러시아 한인이 참여한 첫 무장투쟁이었다. 한때 개신교도였던 이동휘는 왜 사회주의자가 되었을까?
“참된 그리스도인은 사회주의자가 되어야 한다. 참된 사회주의자는 그리스도인이 틀림없다.”(A true Christian must be a socialist and a real socialist must be a Christian)
칼 바르트(Karl Barth)의 말처럼, ‘개신교도’였던 그는 ‘사회주의자’가 되었다.
그의 종교이자 이념이었던 ‘독립’
▲ 윤석남이 그린 김알렉산드라 1885년 김알렉산드라(본명 알렉산드라 페트로브나 김)은 우수리스크에서 태어났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여학교를 졸업하고, 교사 생활을 했다. 1917년 소련 공산당에 입당한 그녀는 조선인 최초로 공산주의자가 되었다. 이동휘를 구명 활동으로 석방한 그녀는 한인사회당 창당 5개월 만에 백군에게 체포됐다. 1918년 9월 16일에 처형당했다. ‘싸우는 여자들 역사가 되다’ 전시회에서 촬영. ⓒ 백창민
‘무인’이었던 이동휘가 ‘혁명가’의 길을 걸은 것은 자연스러운 귀결인지 모른다. 여운형은 “이동휘는 공산주의의 ABC조차 모르는 사람”이라고 평했지만, 성재는 종교와 이념도 독립을 위한 ‘도구’로 여겼다. 이동휘에게 ‘독립’은 종교이자 이념이었다. 실제로 1919년 12월 25일 <혁신공보>에 실린 인터뷰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이천만 동포는 다 최후의 일인(一人)이 필사(畢死)하기까지 최후의 일인(一人)의 혈점(血點)이 필적(畢滴)하기까지 독립을 필성(必成)코야 말 줄로 확신하노라.”
1919년 3.1 운동 전후 조선에는 한성정부가, 중국에는 상하이 임시정부가, 러시아에는 대한국민의회가 탄생했다. 각각 활동하던 세 정부는 상하이 임시정부로 통합되었다. 1919년 11월 3일 이동휘는 상하이 임시정부 초대 국무총리가 되었다.
초창기 상하이 임시정부를 이끈 지도자는 이승만, 안창호, 이동휘였다. 세 사람이 주도했기 때문에 ‘삼각정부’ 또는 ‘삼각내각’이라 불렸다. 상하이 임시정부를 이끈 세 지도자의 독립운동 노선은 달랐다. 우남 이승만은 ‘친미외교론’을, 도산 안창호는 ‘실력양성론’을, 성재 이동휘는 ‘무장투쟁론’을 펼쳤다. 성재는 오직 무기와 피로써만 독립을 쟁취할 수 있다는 ‘철혈주의'(鐵血主義)를 표방했다.
상하이 임시정부 초대 국무총리
▲ 상하이 임시정부 시절 이동휘와 그의 동지 1919년 8월 이동휘는 상하이 임시정부 국무총리에 취임했다. 이동휘는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받기 위해 한인사회당 소속 한형권을 모스크바에 특사로 보냈다. 모스크바로부터 지원받은 거액의 자금은 예상치 못한 사건으로 이어졌다. 이 자금을 유용했다는 이유로 백범 김구는 내각 비서장 김립을 암살했다. 일제는 “반일 조선인 가운데 재주와 학식이 제일류의 인물”로 김립을 꼽았다. 그런 독립운동가를 독립운동가가 죽인 사건이 터진 것이다. 사진 앞줄 오른쪽 끝이 김립이다. 김립부터 시계 방향으로 박진순, 이동휘, 이극로, 김철수, 계봉우, 신원미상이다. ⓒ 성재이동휘선생기념사업회
1920년 여름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에서 승리하며 조선인 무장투쟁이 큰 성과를 거뒀다. 그 보복으로 일제는 만주 간도에서 조선인 수천 명을 학살하는 ‘간도참변’을 일으켰다. 만주의 조선인 동포를 제대로 보호하지 못하자 임시정부에 대한 비판이 크게 일었다. 독립운동 노선에 대한 논쟁도 터져 나왔다. 이동휘는 급진론에 근거해 임시정부의 전면 개혁을 요구했지만, 그의 개혁은 좌절되었다.
여기에 레닌의 독립운동 자금 유용 시비가 맞물려 일어났다. 성재가 임시정부 국무총리로 있을 때 한인사회당은 레닌으로부터 200만 루블의 독립운동자금 제공을 약속받은 바 있다. 임시정부 개혁이 실패하자 성재는 1921년 1월 24일 국무총리를 사임하고 상하이 임정을 탈퇴했다.
총리 사임 후 성재는 북만주와 연해주를 무대로 활동을 이어갔다. 1921년 5월 20일 이동휘는 ‘고려공산당’ 대표자 회의에서 중앙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같은 해 이동휘는 모스크바를 방문해서 11월 고려공산당 대표로 레닌과 회담을 했다.
이 무렵 러시아 극동에서 한인 공산주의자의 주도권을 둘러싸고 상하이파와 이르쿠츠크파가 대립했다. 여기에 ‘자유시 참변’까지 터지면서 어려운 상황이 이어졌다. 1923년부터 이동휘는 새롭게 출범한 코민테른 꼬르뷰로(Korbureau 고려국) 위원으로 활동했다.
해외 독립운동 무대가 된 ‘도서관’
▲ 대한간호협회 광고 2019년 대한간호협회는 3.1 운동 100주년을 맞아 캠페인을 벌였다. 독립운동에 참여한 34인의 간호사와 간호 학생을 기억하자는 내용이었다. <친일인명사전>에 이름을 올린 윤익선, 이범승, 이긍종, 이묘묵 같은 ‘친일 도서관인’ 외에 ‘독립운동을 벌인 도서관인’은 없었을까? ⓒ 대한간호협회
1924년 2월 꼬르뷰로가 해산하자 이동휘는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新韓村) ‘고려도서관’에서 관장으로 일했다. 신한촌은 ‘노바 카레이스카야 슬라바’, 말 그대로 한인이 꾸린 새로운 마을이었다. 고려도서관 관장으로 일하면서 그는 조선 땅에서 해외 동포 위문을 목적으로 보내온 백과사전과 책을 바탕으로 문맹 퇴치 운동을 벌였다.
교육구국운동을 펼친 성재가 도서관을 통해 그 행보를 이어갔음을 알 수 있다. 연해주 신한촌에서는 1910년대부터 ‘도서관’을 마련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연해주 독립운동의 대부 최재형은 <대동공보>가 발행금지를 당하자 한글 신문 <대양보> 발간을 준비했다. 신개척리에 <대양보> 발행소를 새로 지으려 한 최재형은 건물 일부를 ‘도서관’으로 계획했다.
러시아 연해주뿐 아니라 해외 독립운동가가 도서관에 몸담은 사례가 있다. 송재 서재필과 성엄 김의한, 김영숙(난영)은 해외 도서관에서 활동했다. 1920년대 초까지 일제는 조선에 도서관을 짓지 않는 ‘무도서관'(無圖書館) 정책을 펼쳤다. 이동휘가 신한촌에서 도서관을 운영할 무렵, 조선 땅에 도서관은 흔치 않았다.
타국을 정처 없이 떠돈 독립운동가가 도서관에 몸담은 흔적이라 이동휘의 사례는 적지 않은 의미를 지닌다. 그를 ‘도서관인’으로 부르기는 어렵겠지만, 학교와 도서관을 기반으로 펼친 성재의 구국운동은 ‘해외 독립운동사’ 뿐 아니라 조선인의 ‘해외 도서관 운동사’ 차원에서 새롭게 평가할 대목이다.
‘도서관인’으로 스스로 인식했는지 여부를 따지는 이도 있다. 하지만 이역만리에서 풍찬노숙하던 그들에게 정규 도서관 교육을 받았는지, 도서관인으로 자각했는지 묻는 것은 사치스러운 질문 아닐까? 도서관인 인식 여부와 상관없이, 도서관은 그들에게 독립운동의 ‘무대’요, 또 다른 ‘무기’였다.
조선인이 많이 거주한 간도와 연해주 지역 학교는 제법 알려졌지만 도서관은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지금까지 한국 문헌정보학은 우리 땅에 명멸한 도서관 위주로 관심을 가져왔지만, 해외에서 한국인이 운영한 도서관 역사도 추적할 필요가 있다. ‘속지주의'(屬地主義)에서 ‘속인주의'(屬人主義)로 관점을 확장하는 것은 한국 도서관사 연구의 과제다.
3.1 운동 100주년을 맞은 2019년, 대한간호협회는 독립운동에 참여한 간호인 34인을 기념하는 캠페인을 펼쳤다. 대한간호협회는 ‘간호사, 독립운동 전선에서 빛나다’라는 주제로 세미나를 연 데 이어 신문광고를 했다. ‘독립운동가 간호사들을 만나다’라는 특별전시회도 개최했다.
그러면 독립운동에 참여한 ‘도서관인’은 없었을까? ‘도서관을 무대로 펼쳐진 독립운동’은 없었을까? 이동휘 사례처럼 도서관에 자랑스러운 역사가 없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기록’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기억’은 사라진 것이 아닐까.
시베리아 벌판을 말 달리던 마지막 조선 무장
▲ 국제혁명자후원회(모플) 시절 이동휘 이동휘는 원동변강 국제혁명자후원회(모플 MOPR) 위원으로 활동했다. 모플은 혁명운동 과정에서 희생되고 고통받는 혁명가와 그 가족들을 후원하기 위해 모금과 선전 활동을 펼쳤다. 원동변강 모플위원회는 이동휘의 열성적인 활동과 공적을 인정하여, 1932년 10월 12일 하바롭스크에서 열린 모플 열성자대회에서 그에게 훈장을 수여했다. 사진 둘째 줄 오른쪽에서 두 번째가 이동휘다. ⓒ 성재이동휘선생기념사업회
고려도서관을 운영하던 성재는 1928년 12월부터 조선공산당 재건을 추진했다. 1929년에는 조선공산당 재건준비위원회에서 코민테른과 연락을 담당하는 총지휘자가 되었다. 1930년부터 1935년까지는 변강 국제혁명자후원회(MOPR)에서 활동했다.
활발히 활동을 이어가던 이동휘는 1935년 1월 31일 심한 독감에 걸려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에서 숨졌다. 작가 김성동이 “시베리아 벌판을 말 달리던 마지막 조선 무장”이라 칭했던 이동휘는 그렇게 세상을 떠났다. 혁명가로 분투했으나 그는 조국의 해방과 혁명을 보지 못했다.
62세로 숨진 이동휘는 오랫동안 ‘사회주의 운동가’라는 이유로 외면받았다. 1995년 대한민국 정부는 성재에게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성재가 세상을 떠난 지 60년, 조국이 해방된 지 50년 만이었다. 권업회 사무실 바로 옆에 있었다는 이동휘의 신한촌 집도 이젠 사라졌다. 그 자리엔 아파트와 상점이 들어섰다. 성재가 관장으로 일한 도서관은 이제 그 위치를 알 수 없다.
이동휘 집안은 3대에 걸친 독립운동가 집안이다. 성재의 부친 이승교는 3.1 운동에 가담했다. 큰딸 이인순은 길동여학교 교사로, 둘째 딸 이의순은 명동여학교와 삼일여학교에서 교사로 활동했다. 두 딸뿐 아니라 성재의 사위들 역시 애국 계몽운동에 참여했다.
성재의 아버지 이승교는 독립장을, 이동휘는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그의 큰딸과 둘째 딸은 애족장을 받았다. 첫째 사위 정창빈은 대통령표창을, 대한민국 임시정부 법무부장으로 활동한 둘째 사위 오영선은 독립장을 추서 받았다. 그 중심에 이동휘가 있었음은 말할 나위 없다. 독립운동의 한복판에 늘 성재가 있었음에도 우리는 그의 무덤이 어디 있는지조차 알지 못한다. 그를 기념하는 동상도 기념관도 없다.
아명이 ‘독립'(獨立)이었던 성재는 이름처럼 ‘독립’에 몸 바친 삶을 살았다. ‘다른 나라에 의지하는 외교가 아닌, 오직 무장투쟁과 최후 혈전을 통해서만 영원한 독립을 쟁취할 수 있다’라고 주창한 그는 독립운동의 제단에 자신의 피를 뿌렸다.
이동휘가 활약한 신한촌에는 3개의 기둥으로 만든 기념비가 서 있다. 3개의 기둥은 각각 조선에 있던 한성정부와 중국 상하이 임시정부, 러시아에 있던 대한국민의회를 상징하는 동시에, 남한과 북한, 그리고 러시아 해외동포를 의미한다.
그의 독립은 아직 오지 않았다
▲ 신한촌 기념비 신한촌은 조선인이 집단 거주했던 곳이다.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서북방, 개척리의 정북방에 있다. 신한촌에는 권업회, 대한광복군정부, 한인신보사, 일세당, 대한국민의회, 노인동맹단 같은 독립운동 단체가 활동했다. 연해주 신한촌은 1910년대 국내외 독립운동을 주도한 중추 기지였다. 1999년 사단법인 국외 한민족연구소는 3.1 독립운동 80주년을 맞이하여 신한촌 기념비를 건립했다. 기념비는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하바롭스카야 26A에 있다. ⓒ flickr
해방된 조국은 결국 갈라졌고, 해외 독립운동가의 후손은 남도 북도 아닌 러시아와 중국의 소수민족으로 오랫동안 살아야 했다. 해외에서 ‘독립’을 위해 싸운 그들이 바라던 해방 조국이 ‘분열’된 세상은 아니었을 것이다. 1913년 권업회에서 이동휘는 이렇게 연설했다.
“나누면 멸망을 받을지니 과연 오늘날은 살부살형(殺父殺兄)의 원수라도 우리의 광복을 희망하여 서로 나누지 말자.”
남북이 둘로 나뉘어 민족상잔의 전쟁을 치를 것을 성재는 알았던 걸까? 살부살형의 원수라도 진정한 해방을 위해 서로 나뉘지 말자고 역설했던 그의 말은 민족의 미래를 향한 예언자적 일갈이었다. 성재가 강화도에 처음 세운 근대학교 이름도 ‘합일학교'(合一學敎)다. 하나가 된다는 의미다.
‘나누면 망하고 합하면 흥한다’라며 ‘단합’도 아닌 ‘영원단합’을 강조한 성재는 죽어서 눈을 감을 수 있었을까? 노바 카레이스카야 슬라바에 세운 세 기둥이 하나 되는 날은 오지 않았다. 성재의 ‘혁명’과 그의 진정한 ‘독립’은 아직 오지 않았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①편과 ②편 2개의 기사로 나뉘어 있습니다. 이 글은 ②편입니다.
특집 : 역사하는 사람들의 생태보고서, 핏빛 혹은 장밋빛 이야기
○ (좌담) 지역연구자의 삶과 꼬뮨 만들기 / 권명아 정계향 김대성 강화정
○ 별일 아닌 것들로 별일이 됐던 어느 날들 / 작자미생
○ 굿바이 루카치 – 어느 연구자의 일상 / 허민
○ 2020년, 역사학과 여성사, 이 기울어진 세계의 이야기 / 한봉석
○ (대담) 해외에서 역사하며 살기 : 유럽의 한국사 연구와 교육 / 안종철 이동원
○ (대담) 해외에서 역사하며 살기 : 일본의 한국사 연구와 교육 / 니시무라 나오토 김영진
○ 역사교육, 역사를 매개로 읽고 쓰고 듣고 말하기를 통해 민주주의를 몸으로 익히기 / 우현주
○ (인터뷰) 푸른역사의 산증인 박혜숙 대표를 만나다 / 박혜숙 김헌주
○ (좌담) 피해자의 삶이 역사가 되었듯이 활동가의 삶이 역사가 되다-역사를 실천하며 살아가는 대일과거사 활동가들의 이야기 / 강경란 김명준 김진영 김해슬 이하나 야지마 츠카사 정은주 최상구 김영환
기획 : 구술로 본 전쟁과 일상(2)
○ 난을 피하는 여러 가지 방법 : 한국전쟁기 피난 이야기 / 김수향
○ 오음리에서 사이공까지 : 구술을 통해 본 ‘파월전사’의 참전 과정과 현지 경험 / 류기현
연재 : 온라인으로 만나는 역사(2)
○ 한국전쟁 전후 북한 영화 관련 온라인 자료 소개 / 한상언
○ 8월 14일 기림의 날 개관한 아카이브814 – 일본군‘위안부’ 관련 자료 보기 / 강윤희
인물로 보는 역사
○ 이탈리아어판 『코민테른인명사전』에 실린 한국인들 ④ 김단야 박헌영 김재봉 / 임경석
리뷰
○ 긴축 정책과 빈부 격차 그리고 차별 : 단지 영국 중학생들만의 이야기가 아닌 이유
– 브래디 미카코, 『나는 옐로에 화이트에 약간 블루』, 다다서재, 2020 / 백은진
<책소개>
역사하는 ‘우리’를 이야기하며 다시 내일을 꿈꾸다
언젠가는 역사로 밥 먹고 사는 사람들의 삶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싶었다. ‘역사를 이렇게 봐야 한다’, ‘역사적 진실은 이런 것이다’ 등등 역사 이해의 결과물에 대해서 주목할 뿐, 그 말을 만들고 옮기고 말이 현실이 되게끔 노력해온 사람들의 삶과 의식세계를 소홀히 여겨온 것은 아닌가. 역사도 사람이 하는 일인데 그들이 발 딛고 있는 환경에 눈을 돌려야 하지 않겠는가. 그래야 사람들이 하는 그 일에 대한 의미도 찾을 수 있지 않겠는가. 이런 생각을 나만 아니라 여럿이 함께 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한 순간, 기획은 시작되었다.
역사가 하나의 서사 형태를 갖추게 되고, 누군가의 입을 통해 전파되며, 과거의 역사적 사실을 통해 인류의 미래를 설계하게 되는 데 얼마나 많은 과정이 존재할까. 그리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 과정에 개입할까. 사람마다 각각 자신의 경험이 다르고 역사와 대면하게 되는 계기도 다양하기 때문에, 역사의 생산과 전파 및 실천적 개입 등을 하나의 ‘타임테이블’에 올려놓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렇지만 수많은 시간대들이 중첩되어 있는 실제 상황을 잠시 접어두고 이러한 국면에 참여하는 집단들을 생각나는 대로 짚어보면, 역사 연구자, 역사교사, 종이·음성·시각 매체를 통한 역사프로젝트 기획자, 피해자의 구제와 역사적 기억 형성에 관여하는 역사단체 활동가 등을 꼽을 수 있겠다.
물론 이들은 항상 동일한 목표와 균등한 영향력을 가진 주체들이 아니다. 근대 이후 정부는 통치권력으로 기능하며, 역사하는 사람들의 행로를 결정하는 ‘슈퍼 갑’이었다. 이와 같은 정부의 힘이 상수로 존재하는 가운데, 때로는 연구하고 쓰는 사람들이 가르쳐야 하는 사람들의 역할을 규정했다. 또한 역사대중화라고 포장한 채 이윤 창출을 목적으로 대중의 역사의식을 특정 방향으로 이끌어가려는 ‘선동가’가 역사하는 사람들 전체를 곤경에 빠뜨리기도 했다. 즉 역사하는 여러 과정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들의 얽혀있는 관계는 반드시 역사관으로만 설명할 수 없으며, 자신이 속한 위치에 따라 좌우될 수 있다. 그래서 오늘날의 역사하는 행위에 대해서 성찰적으로 되짚어보려면, 이들 모든 영역들이 어우러져 문제의식을 공유할 필요가 있다.
서로 다른 분야에서 역사하는 사람들 사이의 협업적 관계 구축을 위한 논의를 시작하자는 게 이 기획의 첫 번째 의도라면, 두 번째 목표는 각 분야에 몸담고 있는 사람들은 과연 2021년 현재를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 자신의 존재가치를 증명하기 위해서 지속가능한 생존의 환경을 만들기 위해서 어떠한 노력이 필요한가, 점검해보는 데 있다. 말로는 평화 공영을 내세우며 누군가의 희생 덕에 연구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국민적 소속감의 형성에 역사교육을 넘겨주고 있는 것은 아닌가. 역사의 전파자는 역사를 어떠한 가치가 있는 지식으로 다루고 있는가. 역사 활동가들은 역사의 정치화와 어떻게 거리를 유지해야 하는가. 우리가 우리 스스로에게 던져야 할 질문은 그리 가볍지 않으며, 그 무게를 견뎌내기 위한 첫 걸음을 떼려는 것이다.
이러한 연유에서 <내일을 여는 역사> 통권 80호 <특집> 제목을 ‘역사하는 사람들의 생태보고서, 핏빛 혹은 장밋빛 이야기’로 정했다. 지난 2020년 11월 무렵부터 편집위원회를 통해 아이디어를 공유하기 시작했는데, 업무보고서·연차보고서 한 편도 제대로 완성하기 힘든 마당에 생태보고서를 쓴다는 게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참신한 제안들을 성사시키지 못한 사례도 여럿이다. 본문에서 밝히듯이 여성사 연구자들의 좌담을 통해 한국근현대사학계의 연구환경과 연구경향을 말해보려 했지만 아쉽게도 기획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역사교육연구소에서 펴낸 ‘역사의식조사’처럼 연구자들이 느끼는 현실을 데이터화 하는 설문 작업도 구체화시켜보고자 했으나 편집위원회가 단기간에 감당할 수 있는 계획은 아니었다.
결국 생생한 이야기를 담아내기 위해 가급적 많은 말을 담기로 했다. 또한 말을 모으기 위해 여러 사람들의 도움을 받기로 했다. 2020년 12월 개편 호 발행 당시 원고 투고 방식에 한정되지 않은 열린 시도를 하자고 다짐했던 터라, 편집위원이 직접 발로 뛰는 노동집약적 기획이 가능했다. 좌담, 대담, 인터뷰, 기고 청탁 등 다양한 방식으로 23명이 참여하여 역사하는 동네의 현상, 이면과 측면을 담은 생태보고서를 만들었다.
대학에서 연구하고 가르치는 사람이 편집위원회에 제일 많다는 핑계로, 이 분야에 대한 이야기를 가장 많이 담았다. 일단 지역과 해외라는 공간으로 사람들을 찾아갔다. 지역 연구자의 목소리는 시종일관 차분하고 묵직했다. 강화정 편집위원이 중심을 잡고 이끌어간 좌담에 권명아, 정계향, 김대성 세 명의 부산경남지역 역사학/인문학 연구자들이 참여했다. 참가자들은 2021년 대입 입시에서 드러난 지방대학 ‘붕괴’에 대한 단상을 시작으로 지역에서 산다는 것이 자신의 연구에 미치는 영향, 지역이 단일한 공동체가 아니라 오히려 오래된 촘촘한 그물망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 곳이라는 점, 수도권 집중화로 식어버린 대지일 수도 있겠으나 새로운 희망을 일구기 위해서 분투하는 사람들의 활동장이라는 점 등을 말한다. 한 참가자의 지적처럼 지역은 언제나 전체 기획의 맨 끝에서 구색 맞추기처럼 소비되는 경우가 많았다. 우리 생태계의 불균등성을 보여주는 사례로, 맨 먼저 읽어주시길 부탁드린다.
코로나 유행 상황이 발달시킨 비대면 화상회의 방법으로 두 명의 해외 연구자와 대담을 추진했다. 이동원 편집위원은 이탈리아에서 활동중인 안종철 교수와, 김영진 편집위원은 일본의 신진연구자인 니시무라 나오토 조수와 대담을 나눴다. 한국에서 한국사를 공부하는 사람들의 연구환경과 연구주제를 상대화·객관화하기 위한 시도이자, 우리가 대화하고 소통해야 하는 역사하는 사람들의 범위가 한국에만 한정되어서는 안 된다는 고민에 따라 추진되었다.
이 대담을 통해 안종철은 유럽의 고등교육제도와 한국학의 궤적을 설명하면서 한국이 유럽과의 교류 범위를 넓혀갈 것을 제안한다. 특히 유럽에서 한국사/한국학은 여전히 인정투쟁을 벗어나기 어렵다는 말이 해외 연구자의 실존과 관련해서 짙게 여운을 남긴다. 한편 니시무라 나오토는 대학원 시절 한국에서의 생활, 한류로 인한 한국문화에 대한 관심, 일본에서 한국사를 가르치는 제반 여건 등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가 풀어놓은 경험담은 ‘생각보다’ 특수하지 않았다. 일본이니까, 일본인이니까, 뭔가 자극적이고 특별한 얘기가 나올 거라고 기대한 내 편견이 컸던 탓이다. 그는 한국의 누구나 그렇듯이 역사에 관심 없는 대학생에게 역사를 가르치는 일이 힘든, 보다 안정된 환경에서 공부하고자 하는 연구자이다. 두 곳의 문화와 시스템의 차이를 인지하면서도 생태계에 대한 고민을 함께 해야 하는 이유이다.
다음으로 편집위원회는 연구자의 신분과 지위에 주목했다. 역사학의 영역에서 아무리 짧게 잡아도 석박사 과정을 졸업하는 데 10년은 훌쩍 넘게 걸린다. 그리고 박사학위를 취득한다고 해도 안정된 일자리를 찾기 쉽지 않은 실정이다. 대학원생노동조합, 비정규교수노동조합 등이 만들어지면서, 연구자로 완성되기 위한 수련의 과정으로만 오랫동안 간주되던 비인권적 처지에 대한 문제제기가 많아졌으나 아직도 현실은 변하지 않고 있다. 역사 연구하는 사람들의 생태계가 안정되려면, 약육강식·우승열패의 사회진화론적 세계관이 아닌 공생과 상호부조의 관점이 폭넓게 수용될 필요가 있다.
대학원생·신진연구자 단체 만인만색 연구자 네트워크 소속 연구자들이 작자미생이라는 이름으로 2017년 역사학대회 때 발표했던 원고를 일부 수정하여 게재했다. 타교 출신 대학원생에 대한 차별, 학회와 연구소 업무의 전가, 지도교수의 일방적 관계 설정 등의 문제를 제기한다. 또한 허민은 어느 비정규직 연구자의 일상을, 학술대회 발표문 마감일 1주일 전부터 학술대회 당일에 이르는 긴장을 바탕으로 촘촘하게 르포 형태로 풀어냈다. 이들의 글이 피해자성을 전시하고 사적 개인을 고발하는 데 목적이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현실을 이해하는 이야기로서, 학문 연구의 영역에 있는 모든 이들이 숙고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
지금까지 지역, 해외, 대학원생, 비정규직 연구자처럼 공간과 지위에 따라서 연구 생태계를 살펴보았다면, 한봉석은 여성사에 대한 학계의 연구 지형, 출판 경향을 분석하면서 여성사 연구가 시대가 요청하는 바인 다양한 관계와 개인의 정동에 주목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희망을 담았다. 그는 페미니즘 전성시대에 역사학계가 함께하지 못하는 문제점을, 여성사 연구자가 성장할 수 있는 토대가 되어주지 못한 환경과 칭찬의 부재로부터 찾는다. 그가 내심 표현하고자 했던 것은, 재기 넘치고 열성적인 여성 연구자들을 불안과 위기로 내몬 우리 생태계에 대한 비판이 아닐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여성 연구자에 대한 지지를 에둘러 말하는 것이라고 믿는다.
한국연구재단의 통계에 따르면 현재 역사학 전공자는 5,600명 정도이다. 그런데 교사모임 관계자의 전언을 통해 추정해볼 때, 역사교사도 대략 8,000명이 된다고 한다. 그러니까 역사교사 역시 연구자들과 마찬가지로 역사하는 사람들의 주축이라고 할 수 있다. 인원만이 아니라 실제 수행하는 역할에 있어서도 그렇다. 살아가는 동안 얻게 되는 많은 역사지식이 역사교사로부터 비롯된다. 물론 최근에는 미디어의 역사 상품화로 학교 역사교육의 위상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을 것이라 판단된다.
23년차 역사교사 우현주는 역사 공부의 기본 목적이 역사적 감수성을 키우는 데 있다고 말한다. 독서 수업을 통해 스스로 생각하게끔 하고, 느리더라도 오래가는 공부를 강조한다. 또한 역사가 ‘지금 이 순간’의 과거에 대한 사회적 기억이 결정된 것이라는 점에서, 민주주의 역사를 만들어가는 현재진행형의 관점에서 역사수업을 하고 있다는 점을 상세히 설명한다. 현장의 고민을 담은 역사교사의 생존기를, 다른 분야에서 역사하는 사람들도 많이 읽어주셨으면 한다.
역사대중화라는 이름으로 통용되지만, 여러 매체를 통한 역사프로젝트 역시 역사하는 사람들이 관심을 가져야 하는 대목이다. 연구자와 교육자, 활동가 등이 모두 개입하는 분야이자 상업적 이윤 창출과 맞물려 대중에게 직접적으로 많은 영향을 미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역사 출판과 방송 출연 등은 연구자들의 사회적 기여의 한 방편으로 생각되었지만, ‘설민석 사태’에서 드러났듯이 미디어는 전문연구자를 소외시키며 흥미 위주로 구미에 맞는 ‘국뽕’ 류의 단선적인 역사담론을 재창출하기도 한다.
역사 전문 출판사 푸른역사 박혜숙 대표는 20년 넘게 이 생태계에서 살아가고 있는 주체이자 목격자이다. 김헌주 편집위원이 진행한 인터뷰에서 박혜숙은 푸른역사의 역사대중화 시도, 전문 역사 연구와 역사 출판의 긴장, 역사 출판계를 둘러싼 최근 동향, 출판과 영상매체와의 관계 등 자신의 경험을 솔직담백하게 선보였다. 향후 역사가 어떻게 대중에게 다가설지, 특히 출판뿐만 아니라 다양한 역사프로젝트의 발굴을 위해서도 참고해야 할 자료가 될 것이다.
<특집>의 마지막은 활동가들의 목소리를 듣는 데 할애했다. 김영환 편집위원이 주선해서 강경란·김명준·김진영·김해슬·이하나·야지마 츠카사·정은주·최상구 등 여덟 명의 대일과거사 활동가가 참가한 좌담은, 활동가들을 조직의 일원으로서가 아니라 출발점이 제각기 다른 ‘고민하는 사람’으로 이해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만큼 우리는 활동가가 된 개인적 경험에 대한 관심이 부족했다. 그리고 그들이 활동을 하게 된 동기에서 엿보이듯이 대일과거사는 집단의 이야기면서 수많은 개인의 삶이 켜켜이 쌓여있는 영역임을 확인할 수 있다. 좌담은 대일과거사 활동가들이기 때문에 겪는 공감대를 기초로 진행되었다. 식민지 경험에 따른 반일정서가 운동의 진행과정에서 지지기반이 된다는 점, 또한 일본사회의 변화로부터 어쩔 수 없이 영향을 받기 때문에 우경화가 날로 심해지는 상황에서 어떻게 새로운 운동을 준비할지 고민이라는 점 등은 대일과거사 활동의 현 상황을 보여준다. 주로 일본군‘위안부’, 강제동원 피해자와 연대하면서 과거사청산운동을 전개한 활동가들이기 때문에, ‘네가 유족이냐’는 물음은 다반사로 경험했을 터. 현재 나눔의집 민주화운동을 전개하고 있는 야지마 츠카사의 ‘나눔의집이 할머니의 역사를 팔아왔다’는 비판과, 나눔의집 정상화 이후 일본사회와 연대를 더욱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싶다는 다짐이 큰 울림을 준다.
이상과 같이 이번 호 <특집>에는 전체 아홉 개의 기획을 담았다. 역사하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든 분야를 망라해 이야기를 수집했으나, 돌이켜보면 각 분야 사이의 관계성을 점검하는 데, 그를 통해 역사가 순환되는 전체 생태계를 살펴보는 데 어쩔 수 없는 한계가 있었다. 우리가 부족한 능력으로 제한된 시간에, 지면에 담을 수 있는 이야기는 여기까지였다. 다만 여기 흩뿌려놓은 단서들이 핏빛으로 변할지, 장밋빛으로 피어날지 그건 아직 미지수이다. 기왕 사람들에 주목했으니까, 앞으로의 방향에 대한 전망도 역사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성찰하고 바꿔나가는지 지켜보는 것으로 여운을 남기고자 한다.
한편 <특집> 외에도 여느 호와 마찬가지로 독자들과 소통하고 싶은 읽을거리를 준비했다. <기획>에서는 ‘구술로 본 전쟁과 일상’을 두 번째로 실었다. 김수향과 류기현이 한국전쟁기 피난과 파월전사에 각각 주목했다. <연재>도 지난 호와 마찬가지로 ‘온라인으로 만나는 역사’로 찾아왔다. 한상언은 북한 영화/문화 연구를 위한 길잡이가 될 수 있는 온라인 자료 접근 방법을 소개했다. 강윤희는 일본군‘위안부’연구소의 아카이브를 상세히 해설했다. <인물로 보는 역사>에는 임경석의 ‘이탈리아판 코민테른 인명사전’에 실린 한국인에 대한 소개 마지막회를 실었다. 끝으로 <리뷰>에는 한국에서도 충분히 음미해볼 만한, 영국 중학생들의 교육환경을 다룬 『나는 옐로에 화이트에 약간 블루』에 대한 백은진의 서평을 담았다. 긴 호흡과 짧은 호흡이 함께 어우러진 글들을 <특집>과 함께 읽어주시길 부탁드린다.
“새벽종이 울렸네 새 아침이 밝았네 / 너도 나도 일어나 새마을을 가꾸세 / 살기 좋은 내 마을 우리 힘으로 만드세”
구미 박정희 생가 옆에 위치한 새마을공원 박정희 동상 앞에 서자 귀에 익은 새마을 노래가 들려왔다. 갑자기 유신 시대로 돌아간 것 같아 으스스한 기분에 겁이 덜컥 나고 나도 모르게 주위에 경찰이 없나 둘러보게 됐다.
그러자 엉뚱하게도 2018년 지방선거가 생각이 났다. 박근혜 탄핵과 촛불의 여파 속에 치러진 선거인만큼 이 선거에서 더불어민주당이 전국적으로 싹쓸이를 했지만, 영남, 특히 보수의 텃밭인 경북은 예외였다. 헌데 경북 지역에서 유일하게 더불어민주당 광역단체장 후보가 당선된 곳이 있었다. 의외지만, 구미였다. 박근혜 탄핵과 촛불의 덕을 봤다고는 하지만, 다른 곳도 아니고 보수 세력이 신봉하는 박정희의 출생지인 구미에서 더불어민주당 시장이 등장하다니 놀라운 일이다.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그 이유는 역설적으로 구미가 박정희의 고향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고향이기 때문에 박정희는 1973년 구미에 공단을 지었고, 전두환이 1983년 제2공단을, 노태우가 제3공단을 지었다. 박정희의 고향이란 이유로 다른 지역을 제치고 공단을 집중적으로 지으면서, 구미에는 외부 인구들이 대폭 유입됐다. 구미는 경북에서 외부 인구가 가장 많은 도시이며, 그 결과 정치적으로는 경북의 보수적 영향을 상대적으로 덜 받게 된 것이다. 그것이 경북 중 구미에서 유일하게 더불어민주당 시장이 등장한 이유일 것이다.
최근 여러 공장들이 빠져나가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구미는 여전히 대표적인 공단도시다. 그 덕으로 외지인들이 많기는 하지만, 구미는 누가 뭐라고 해도 ‘박정희의 도시’다. 도시 한가운데는 그가 친필로 쓴 낡은 ‘수출산업의 탑’이 하늘을 찌르고 있고 도시 곳곳에서 박정희기념관으로 가는 방향을 표시한 ‘박정희 대통령 생가’라는 안내판을 볼 수 있다. ‘박정희로’라는 길도 있다. 박정희 생가와 기념시설들 앞의 큰 길이 박정희로다.
▲ 구미 시내에 우뚝 서 있는 ‘수출산업의 탑’. 하단에는 박정희가 직접 쓴 ‘수출산업의 탑’이라는 글씨가 있다.(좌) 구미 시내의 박정희로. ‘박정희대통령생가’라는 도로판이 사방에 눈에 띈다(우) ⓒ손호철
박정희 생가에는 코로나19에도 불구하고, 큰 주차장에 차들이 가득했고 단체 참관객을 싣고 온 관광버스도 여러 대 눈에 띄었다(5인 이상 집합 금지 이전이었다). 역시 이 지역의 박정희 인기를 실감할 수 있었다. 주차장에서 생가 쪽으로 향하면 제일 먼저 우리를 맞는 것은 새마을복을 입고 손수레를 끌고 있는 농민들의 조각이다.
생가 쪽으로 올라가면 왼쪽에는 보리밥으로 연명하던 어려운 시절을 실제로 체험해 볼 수 있는 ‘보릿고개 체험장’이 있고 오른쪽에 생가가 있다. 생가 앞에는 실물 크기의 박정희와 육영수 여사의 전신상이 세워져있어 이들이 살아 우리를 맞는 것 같은 착각을 느끼게 한다. 두 고인을 추모할 수 있는 추모관이 있고 가족사진들이 걸려 있다. 아버지 옆에 선 앳된 박근혜의 사진을 보자, 부모를 모두 총격으로 잃고 능력 밖의 대통령 직을 맡아 결국 감옥을 가야했던 그의 삶에 안타까움이 느껴졌다.
뒤편으로 조금 걸어가면 박정희 기념 장소에는 언제나 볼 수 있는 “내 일생 조국과 민족을 위하여”라는 커다란 박정희 글씨가 돌에 새겨져 있다. 그 뒤에 박정희 동상, 그 뒤로 박정희의 연보와 새마을 악보 등을 새긴 검은 대리석이 세워져 있다.
▲ 코로나19에도 불구하고 박정희 생가의 주차장에는 차들이 가득하다. ⓒ손호철▲ 박정희 부부 모형이 방문객을 맞는 박정희 생가 ⓒ손호철
박정희는 한국 현대사에서 이승만과 함께 가장 논쟁적인 인물이다. 태극기부대 등에게 ‘박정희는 대한민국을 수천 년의 가난에서 구하고 선진국으로 도약할 수 있는 발판을 만든 불세출의 영웅’이다. ‘진보주의자’ 등은 그를 ‘많은 사람들이 독립운동을 할 때 일본군 장교가 된 민족반역자이며 경제 발전이란 이름 하에 유신 등으로 민주주의를 압살하다가 부하의 총에 맞아 죽은 독재자’로 혐오한다.
둘 중 어느 것이 올바른 평가인가? 이는 매우 논쟁적인 주제이지만 크게 보아 두 가지에 달려있다. 첫째, 한국의 경제발전은 박정희 덕분인가? 둘째, 여러 부작용에도 불구하고 경제발전을 위한 독재, 즉 ‘개발독재’는 올바른 것이었나?
첫 번째는 사실적 인과관계에 관한 것이라면, 두 번째는 어떤 가치가 더 중요하냐는 가치선택에 대한 문제이다. 보수적인 박정희 지지자들은 둘 다 그렇다고 답할 것이고, 진보적인 비판자들은 둘 다 아니라고 답할 것이다. 그 사이에 첫 번째에는 ‘그렇다’이지만, 두 번째는 ‘아니다’라는 입장, 경제발전은 박정희 덕분이지만 그 공보다 과가 더 크다는 입장도 있다.
이는 앞으로도 계속 논쟁이 진행될 사안이다. 1990년대 말 생겨난 박정희 향수에 대한 학술회의에서 진보적 현대사 연구를 대표하는 한 학자는 “박정희 신화는 정치학자들이 공부를 안 해 박정희가 얼마나 나쁜 지도자인가에 대한 제대로 된 연구가 없기 때문”이라고 정치학자들을 비판했다. 박정희 신화는 극우 정부와 보수 언론 등에 의해 세뇌당한 ‘무지한 대중들의 착각’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는 전형적인 ‘관념론’이다. 박정희 현상은 단순히 대중의 착각이 아니라 ‘객관적인 물적 기반’이 있다. 그것은 박정희 때 보릿고개에서 탈피해 먹고 살 수 있게 됐다는 대중들의 직접적인 체험이다. 물론, 아래에서 설명하겠지만, 보릿고개를 벗어난 주된 원인이 박정희는 아니다. ‘까마귀 날자 배 떨어졌다’고 까마귀가 배를 떨어뜨린 것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박정희 시대에 보릿고개를 벗어났으니 박정희 시대와 보릿고개 탈피 사이에 ‘상관관계’는 있지만, 박정희 때문에 보릿고개를 벗어난 것(인과관계)은 아닐 수 있다.
그러나 이 같은 대중의 체험을 논리로 깨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특히 많은 대중들이 ‘진실’이 무엇인지에는 관심이 없고 ‘가짜뉴스’ 등 자신들이 믿는 것만 보고 들으려고 하는 ‘탈진실 시대’에는 더욱 그러하다. 이를 전제로 위의 두 질문을 간단히 살펴본다면 다음과 같다(자세한 내용은 손호철의 <촛불혁명과 2017년 체제> 중 ‘해방 70년과 박정희 신화’ 참조).
주목할 것은 한국만이 아니라 ‘아시아 4인방(한국, 대만, 싱가포르, 홍콩)’이 모두 경제 성장에 성공했다는 사실이다. 한국의 발전이 박정희, 특히 그의 개발 독재 때문이라면, 이들 나라들은 박정희도 없는데, 특히 홍콩은 개발 독재가 아니라 영국 지배 하의 ‘민주체제’였는데, 어떻게 경제성장에 성공했느냐는 것이다.
4인방의 공통점은 개발 독재가 아니라 남미 등과 다르게 산업화를 가로막는 지주 계급이 도시국가(싱가포르, 홍콩)라 원래 없거나, 분단에 따른 체제 경쟁(한국 대 북한, 대만 대 북한) 때문에 할 수밖에 없었던 농지개혁으로 몰락했기 때문이다(선진국에 농산물을 수출하고 싼 공산품을 수입하기를 원한 지주들은 산업화의 장애이다). 사실 이승만 정권기와 박정희 시기를 비교하면 이승만 시기가 박정희 시기보다 다른 제3세계에 비해 더 빠르게 발전했다.
“소련 동구가 망해서요.” IMF 경제 위기 당시인 1998년, 정부 수립 50주년을 맞아 한 언론의 의뢰를 받아 한국정치에 대한 세계적인 석학인 미국의 브루스 커밍스를 만나 한국에 경제위기가 온 이유를 묻자, 그는 엉뚱하게 국내 학계에선 거론도 안 된 ‘탈냉전’을 들고 나왔다.
“한국, 대만, 싱가포르 등이 경제성장에 성공한 것은 내부 요인도 있지만 냉전 때문이에요. 냉전의 최전방에 위치해 사회주의에 대한 자본주의의 우위를 보여주기 위해 미국이 남미들과 달리 산업화와 경제 성장을 허용한 것이지요. 헌데 소련 동구가 망하니 한국 등 아시아를 더 봐줄 필요가 없어 손 본 것이에요.” 다시 말해, 한국, 대만, 싱가포르 등이 경제성장을 한 것은 박정희나 장제스, 리콴유가 똑똑해서가 아니라 냉전의 최전선에 위치해 있는 이들 나라들을 미국이 봐줬기 때문이다.
이처럼 지주의 몰락과 냉전이라는 구조적 요인들이 ‘한강의 기적’의 근본적인 이유이다. 이를 대전제로 하여, 스탈린의 강압적인 산업화가 소련을 빠른 시간동안 세계 양대 강국으로 만들어줬듯이 노동자 등 민중들을 짓밟은 민중 억압적인 박정희의 개발 독재가 경제 성장에 기여했을 것이다.
하지만 인권과 민주주의의 파괴, 노동 탄압 등 수많은 부작용에도 불구하고 이를 찬양하는 것은 경제적 성과를 이유로 스탈린을 찬양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사실 스탈린이 이 같은 강압적 산업화의 덕으로 히틀러의 공격을 격파해 세계를 구하고 유럽의 낙후국인 소련을 미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세계 양대 강국으로 만든 ‘공’에 비하면, 박정희의 공은 ‘하찮다’고 하겠다. 특히 박정희가 남긴 부정적 유산 중 주목할 것은 결과 제일주의이다. 결과가 좋으면 과정이나 수단은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결과 제일주의는 아직도 우리를 괴롭히고 있는, 불행한 박정희의 유산이다.
결론적으로, 산업화의 장애인 지주의 몰락과 냉전이라는 구조적 요인 때문에 박정희가 아니었어도 우리는 상당히 빠른 산업화와 고도성장을 하게 되어 있었다. 문제는 얼마나 빠른 성장이냐는 것인데, 나는 박정희 체제보다 조금 덜 빠르게 성장을 하더라도 민주적이고, 덜 억압적이고 ‘민중친화적’인 경제 발전을 추구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중요한 것은 박정희에 대한 평가가 정세의 효과에 따라 좌우로 진동해 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는 사실이다. 사실 죽은 박정희를 살린 것은 운동권에서 극우로 변신한 김문수 전 경기도지사나 이영훈 전 서울대 교수 같은 ‘뉴라이트’ 박정희 추종자들이나 ‘태극기부대’가 아니다. 역설적이지만, 흔히들 ‘민주정부’라고 부르는 ‘자유주의적인 개혁 세력’, 특히 김영삼과 김대중 전 대통령이다(김대중, 노무현, 문재인 정부를 흔히들 ‘진보’라고 부르는데 이는 잘못이다. 이들은 자유주의, 즉 리버럴이지 민주노총이나 정의당 같은 ‘진보(progressive)’는 아니므로 ‘개혁’ 내지 ‘자유주의’ 세력이라고 불러야 맞다).
박정희에 저항했던 민주화 운동 출신의 김영삼 전 대통령이 1997년 IMF 경제 위기를 가져왔다. 이 같은 위기 속에 집권한 김대중 전 대통령은 IMF의 시장만능 신자유주의 정책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해 빠른 시간 내에 경제 위기를 벗어났지만, 그 부작용으로 사회적 양극화가 심화되고 민생이 어려워졌다. 그 결과, 서민층을 중심으로 ‘박정희 향수’가 생겨난 것이다. 박정희 향수는 박정희에 대한 학술적, 논리적 분석의 결과도 아니고, 박정희의 실체에 대한 좋은 연구가 없어서도 아니라, ‘개혁 정부’ 하에서 대중이 직접 체험한 ‘객관적 현실’의 결과이다.
투표 결과가 이를 입증해준다. 김대중과 이회창이 대결했던 1997년 대선에서 가난한 사람일수록 김대중을 찍었지만, 김대중, 노무현 정부를 거친 10년 뒤에 치려진 2007년 대선에서는 가난한 사람일수록 이명박을 찍었다. 이어진 2008년 총선에서도 서민층들은 “부패가 무능보다 낫다”며 박정희를 이어받은 냉전적 보수 정당에 압승을 선사했다.
이 같은 박정희 향수에 찬물을 뿌린 것도 진보사학자가 고대한 박정희의 잘못에 대한 제대로 된 연구가 아니라 ‘현실’이다. 즉 박근혜의 실정이다. 박근혜의 실정이 드러나고 탄핵을 당하고 감옥에 가자, 박정희 향수도 주춤해진 것이다.
▲ 박정희 생가에 전시되어 있는 가족 사진. 아버지를 따라 대통령 자리에 올랐다가 감옥에 가 있는 박근혜의 앳띤 모습
안타깝게도 박정희 향수는 다시 살아나고 있다. 경제적 양극화 심화, 조국 사태, 안희정‧박원순‧오거돈의 성추문, LH 사태, 김상조 청와대 정책실장 등 여권 핵심의 전세값 인상 파동 등 연이은 측근들의 도덕적 실추 같은 문재인 정부의 실정이 계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지난 주 서울시장과 부산시장 보궐선거에서 박정희의 후예라고 볼 수 있는 국민의힘이 압승을 거뒀다.
한마디로, 박정희의 평가와 박정희 향수는 ‘정세의 효과’이며 ‘현재의 정치에 대한 성적표’, 특히 ‘개혁 정부’에 대한 성적표이다. 박정희 향수가 살아나고 있다면, 개혁 정부들이 죽을 쑤고 있다는 뜻이다. 거꾸로 박정희 향수가 조용하다면, 이는 개혁 정부들이 잘 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박정희에 대한 평가와 기억을 좌우하는 것은 결국 현재의 정치다.
박정희 생가를 떠나 이제는 새 청사로 이전을 하고 문을 닫은 구미경찰서로 향했다. 박정희가 가장 존경했던 형 박상희(김종필의 장인)가 미군정의 친일파 중용 등에 저항해 대구시민들이 일어난 1946년 대구 10월 항쟁 때 구미경찰서를 공격하고 퇴각하다가 사살된 곳이다.(이에 대해서는 ‘손호철의 발자국’, <한국일보>, 2021년 2월 1일자 참조). 구미경찰서 앞에 서자 남로당에 가입해 활동했던 박정희의 ‘짧은 외도’와 파란만장했던 그의 삶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 1946년 대구 10월항쟁 당시 박정희의 형이 공격했던 구미경찰서. 그는 이후 도주하다 사살당했다. ⓒ손호철
“심히 분수에 넘치고 송구하지만 무리가 있더라도 반드시 국군(일본군-인용자)에 채용해주실 수 없습니까? (중략) 일본인으로서 수치스럽지 않을 만큼의 정신과 기백으로서 일사봉공의 굳건한 결심입니다. 목숨을 다해 충성을 다할 각오입니다.” 1939년 3월 31일자 <만주일보>에 보도된 박정희의 혈서다.
박정희는 일제 말 사범학교를 졸업, 문경에서 초등학교 선생을 하고 있었다. 따라서 생계에 어려움에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게다가 많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일본왕에게 충성 맹세 혈서를 쓰면서까지 일본 육사에 입학해 독립군을 때려잡던 만주군에 근무했다. 그의 친일은 생계 때문에 불가피했던 ‘생계형 친일’과는 전혀 질이 다른 ‘출세형 친일’, ‘악질 친일’이다.
▲ 박정희가 일본왕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혈서를 써서 일본육군사관학교에 지원했다는 당시 <만주신문> 사본이 민족문제연구소의 식민지역사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친일파에서 공산주의자, 밀고자를 거쳐 반공주의자로 변신에 변신을 계속한 것이다. 박정희는 기본적으로 생존을 위해서는 어떤 변신도 서슴지 않았던, 동지도 부하도 언제든지 버렸던, ‘생존주의자’, ‘생존지상주의자’였다.
“첫째, 민족의 적입니다. 일본제국의 용병이었으니까요. 둘째, 민주주의 적입니다. 쿠데타로서 합헌 민주정부를 전복한 자니까요, 셋째, 윤리의 적입니다. 자기 하나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 자기 친구를 모두 밀고해서 사지에 보낸 자니까요. 넷째, 현재 국민의 적입니다. 학생이건 지식인이건 인정사정없이 탄압하는 자이니까요.”
언론인이었던 이병주는 5‧16 쿠데타가 나자 오랜 술친구였던 박정희에게 필화사건으로 구속됐다. 출감 후 소설가로 변신한 그는 ‘그를 버린 여인’이란 소설에서 여순 사건 때 박정희의 배신으로 아버지를 잃은 청년들의 입을 통해 박정희를 이 같이 고발했다.
박정희는 ‘생존주의자’로 민족, 민주주의, 친구, 동지, 국민을 모두 버리고 살아남았지만, 영구집권을 꾀하다가 부인을 총격으로 잃었고 자신도 최측근의 총탄에 목숨을 잃었다. 그리고 딸마저도 결국 탄핵을 당하고 감옥에 가야 했다. 게다가 지금까지도 숭배와 증오의 주인공이 되고 있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정말 파란만장하다.
친일조각가가 제작한 전북 정읍시 덕천면 황토현전적지의 전봉준 장군 동상과 부조물. 정읍시 제공
친일 작가 작품이란 지적을 받아온 전북 정읍시 황토현전적지의 전봉준 장군 동상을 철거한다.
정읍시는 전봉준 장군 동상 철거에 따른 문화재청의 현상변경 허가승인이 완료됐다고 20일 밝혔다. 군사정권 시절인 1987년 10월에 정읍시 덕천면 하학리 황토현전적지에 세워진 이 동상은 친일조각가 김경승이 제작했다. 이 동상 및 배경 부조 시설물은 높은 화강암 받침대 위에 짙은 청동색으로 높이 6.4m, 좌대 3.7m, 형상 3.7m 규모다.
친일인명사전에는 이 동상을 제작한 조각가 김경승(1915~1992)이 대표적 친일인물로 나와 그동안 동학관련 단체 등은 철거를 요구해왔다. 친일인명사전에는 “김경승은 1942년 6월3일자 <매일신보>에 ‘더 중대한 문제는 재래 구라파의 작품의 영향과 감상의 각도를 버리고 일본인의 의기와 신념을 표현하는 데 새 생명을 개척하는 대동아전쟁 하에 조각계의 새 길을 개척하는 것일 것입니다. 나는 이같이 중대한 사명을 위해 미력이나마 다하여 보겠습니다’라는 기고문을 게재할 정도로 친일행적이 뚜렷해, 해방 이후 만들어진 조선미술건설본부에 참여하지 못하기도 했다”고 나온다.
특히 몸체는 격문을 든 농민군 지도자의 모습이지만 머리는 죄수처럼 맨상투로 돼 있어 어울리지 않는다는 지적을 받아 왔다. 또한 동상 뒤의 부조에도 죽창·농기구를 들고 싸움터로 나가는 비장한 농민군의 표정 등이 보이지 않아 역사적·예술적으로 논란이 있었다. 이에 따라 시는 시민과 단체들의 의견을 수렴해 동상 철거를 결정했고, 철거된 동상은 박물관으로 옮기기로 했다. 시는 예산 12억원을 확보했다. 다음달 공모를 거쳐 내년 5월 완성을 목표로 추진할 방침이다.
유진섭 정읍시장은 “오는 7월 동상 철거 이후 새롭게 제작할 동상은 각계 전문가 자문을 통해 동학농민혁명 사상과 시대정신을 보여주는 작품으로 제작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정읍 황토현전적지는 1894년 동학농민군이 최초로 관군과의 전투에서 대승을 거둔 역사적인 장소로, 1981년 12월 사적 제295호로 지정됐다. 정부는 황토현전승일을 기리기 위해 오랜 논란 끝에 ‘5월11일’을 동학농민혁명기념일로 2018년에 제정하고 매년 기념식을 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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