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서 우리는 포용의 정치를 제대로 돌아가게 하기 위해선, 즉 약자의 정치적 대표성을 제대로 보장해주기 위해선 무엇보다 현대적 정당정치가 활성화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기초 지식을 짚어보았다. 그런데 그 정당체계를 결정하는 가장 중대한 변수는 바로 선거제도다. 예를 들면, 소위 ‘뒤베르제의 법칙’으로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소선거구 1위대표제는 양당제를, 비례대표제는 다당제를 견인한다.
한국의 현행 선거제도는 득표-의석 간 비례성이 보장되지 않는 소선거구 1위대표제 중심의 것이다. 더구나 한국에선 이 불비례적 선거제도가 지역주의와 결합하여 작동하고 있다. 그러니 선거제도가 야기하는 민의 왜곡 현상은 심각한 지경일 수밖에 없다. 87년 체제 성립 이후 자유한국당 계열 정당들은 영남에서 50%대 득표율만 얻어도 그 지역 의석의 90%대를 점유해왔다. 한편, 민주당 계열 정당들은 호남에서 50%대 득표율만으로 80%대 점유율을 누렸다. 절반이 조금 넘는 유권자가 지지했을 뿐인데, 그 두 당은 각기 자기 지역에서 거의 모든 의석을 가져간 것이다. 국민들의 정당 지지도와 정당의 의석 확보율이 전혀 비례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민심이 이렇게 철저히 왜곡되니 약자를 위한 포용의 정치가 작동될 리 없다.
거듭 강조하거니와, 한국은 대의제 민주주의 국가다. 주인인 시민들이 선거로 자기 대리인을 뽑아 그들을 통해 나라를 운영하는 체제라는 것이다. 그러니 나라가 주인 섬기는 일을 잘 못한다면, 그것도 계속해서 그렇다고 한다면, 그리하여 양극화 심화, 비정규직 증대, 청년 불안 등의 문제가 지속돼가고만 있다면, 그건 필경 선거제도에 결함이 있다는 얘기다. 선거제도가 대의제 민주주의의 본령에 따라 제대로 설계됐더라면, 주인을 잘 모시는 사람들이 대리인으로 뽑혀야 한다. 그런데 주인을 제대로 모시지 않거나 모시지 못하는 대리인이 자꾸 선출되어 나라가 제 구실을 못한다면, 그건 선거제도가 잘 못된 거라고 봐야 마땅하다. 선거제도가 나쁘면, 좋은 대리인을 뽑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지 않은가. 이런 경우엔 선거제도를 고치는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다. 그래서 약자들이 자기 대리인을 제대로 뽑을 수 있도록 해줘야 한다. 그리하면 사회경제적 약자가 겪는 어려움은 점차 해결돼가기 마련이다.
사회경제적 약자라고 해서 정치적으로도 약자일 이유는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사실인즉슨, 선거제도만 올바르면 사회경제적 약자는 정치적으로는 오히려 강자가 될 가능성이 크다. 대의제 민주주의의 선거는 1인 1표의 원칙에 따라 치러지는데, 어느 나라에서나 사회경제적 약자의 수는 강자의 수에 비해 압도적으로 많기 때문이다. 그러니 선거제도만 개혁하면 사회경제적 약자는 정치적 힘을 충분히 가질 수 있고 자신들이 바라는 정책과 제도와 법을 (대리인을 통해) 넉넉히 만들어낼 수 있다.
지금의 소선거구제를 명실상부한 비례대표제로 바꾼다고 생각해보라. 즉, 모든 정당이 전국 득표수에 비례하여 국회의석을 서로 나누어 갖는 경우를 상정해보자는 것이다. 그 경우, 예를 들어, 전국에 퍼져있는 그 수많은 소상공인들이 전체 표의 10% 정도를 못 모아내겠는가? 그 표를 한 정당에 모아주면 국회의석 300석의 10%에 해당하는 30석짜리 유력 정당을 단박에 만들어낼 수 있다. 그건 비정규직 노동자나 청년도 마찬가지다. 선거제도만 제대로 고치면, 상당한 힘이 있는 소상공인 대표 정당, 비정규직 대표 정당, 청년 대표 정당 등이 들어서면서 사회경제적 약자의 삶이 확 달라질 수 있다. 선거제도 개혁은 정말 “먹고사는 문제”다.
남한학과 북한학이 아니라 한국학과 조선학이라고 해야 한다는 지적에 십분 공감했습니다. 다만 제가 한국학이라고 한 것은 개벽학의 발신지가 북조선도 아니고 중국도 아닌 ‘한국’이라는 의미이지, 결코 그 대상이 남한에 한정된다는 의미는 아니었습니다. 당연히 그 범위는 지구학이자 미래학이 되어야겠지요. 그래서 개벽학이 한국학의 영역이라는 말은, 량수밍의 동서문화론을 연구하는 분야는 중국학에 속한다고 말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한국학과 조선학을 고려학이라고 부르자는 제안도 여전히 숙제는 남는다고 생각합니다. 신라학, 고려학, 조선학이라고 할 때의 고려학과 구분이 안가니까요. 확실히 외국인들이 우리를 ‘고려인’(Korean)이라고 부르는 것은 맞지만, 외국인들이 중국을 China라고 부른다고 해서 중국인들이 ‘중국’을 버리고 ‘진(秦)’이라고 명칭을 바꾸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제 생각에는 고려도 아니고 조선도 아니고 한국도 아닌 전적으로 새로운 이름을 고민해야 한다고 봅니다. 그것도 가능하면 남북학자들이 합의해서요.
조선사상전사
작년에 교토대학의 오구라 기조 교수님이 『조선사상전사(朝鮮思想全史)』를 출간하셨습니다. 고조선 시대부터 시작해서 김대중과 김정일에 이르는 한반도의 문학·역사·철학·종교의 흐름을 개관한 역작인데, 이상하게도 책 제목을 『한국사상전사』라고 하지 않고 『조선사상전사』라고 했습니다. 우리로서는 선뜻 납득하기 어려운 선택인데, 아마도 일본인들이 한반도를 ‘조선반도’라고 부르기 때문에 ‘조선사상전사’라는 이름을 취한 게 아닌가 싶습니다. 일종의 ‘한반도사상전사’라는 뜻으로 ‘조선사상전사’라고 한 것이지요. 그러나 이 경우에도 신라사상사, 고려사상사, 조선사상사라고 할 때의 조선사상사와 구분이 안 된다는 단점이 있습니다. 이 역시 남북을 통칭하는 공식적인 학술용어가 아직 없기 때문에 빚어지는 현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전통시대에 한국인들이 한반도를 지칭했던 개념이 최치원 이래로 ‘동방(東方)’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조선사상사’나 ‘한국사상사’를 ‘동방사상사’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이 역시 문제는 남을 것입니다. 지금은 ‘동방’이라는 말을 중국이나 일본에서도 사용하고 있고, 그 의미도 한반도를 가리키기보다는 ‘동아시아’를 지칭하는 말로 사용하고 있으니까요. 그리고 ‘동방’이라는 말에는 중국에 대한 ‘동’이라는 이미지가 강한 것도 단점이 될 수 있습니다. 물론 최치원 자신은 ‘동’을 중국에 대한 ‘동’이 아니라 ‘해가 뜨는 곳’이라는 의미로 사용했습니다만-.
이렇듯 개념은 언제나 한계를 지니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그 개념이 발화될 때의 문맥과 상황을 반영할 뿐입니다. 노자가 “도가도비상도, 명가명비상명”이라고 한 것도 이러한 의미에서가 아닐까 싶습니다.
2. 개벽은 깨어있는 자세
제가 지난 20세기의 한국 인문학이 중화와 개화의 포로와 노예가 되었다고 한 것은 중국과 서양을 배척하자는 뜻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다만 맹목적이고 무비판적으로 추종하는 태도를 경계하자는 뜻이었습니다. 저는 지금도 중국과 서양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한문과 수학은 한국에서 인문학을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기초 정도는 마스터해야 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선생님이 말씀하시는 도학과 과학을 병행해야 한다는 지적에는 100% 공감하고 있습니다.
제가 생각하는 ‘개벽’의 가장 중요한 의미는 깨어있는 태도입니다. 그래서 만일에 누군가가 개벽에 사로잡혀서 동학이나 개벽사상만이 제일이라고 하는 맹목적인 태도를 보인다면, 이것이야말로 反개벽적인 태도일 것입니다.
손병희 학술대회(박길수)
지난주에 모시는사람들의 박길수대표님이 어느 학술대회에서 「손병희의 개벽사상」으로 발표를 하셨는데, 제일 인상에 남는 대목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은 3.1운동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손병희 선생이 천도교 리더들에게 한 말입니다.
“우리가 만세를 부른다고 해서 당장 독립이 되는 건 아니오. 그러나 겨레의 가슴에 독립정신을 일깨워 주어야 하기 때문에 이번 기회에 꼭 만세를 불러야 하겠소.”
저는 바로 이런 것이야말로 ‘정신개벽’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런 운동이 한국과 비슷하게 식민지지배를 당한 아프리카에서도 ‘흑인의식운동’이라는 형태로 전개되었습니다. 이런 점에서 한국 근대가 인도나 아프리카의 근대와 유사성이 있다는 뜻이지, 결코 지금의 한국이 제3세계와 비슷하다거나, 오늘날 동아시아 담론이 무용하다는 의미는 아니었습니다. 저는 중국과 일본의 개벽파를 찾아내고 발굴하는데에도 관심이 많습니다.
그리고 ‘영성적 근대론’은 그것이 한국 근대라는 사례를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되어서 관심을 갖고 있을 뿐입니다. 전 세계의 대부분의 근대론을 포괄할 수 있다고는 물론 생각하지 않습니다. 뒤집어 말하면 저는 한국의 근대나 한국의 사례를 설명할 수 없는 이론이나 학설에는 이제 관심이 적어졌습니다. 그것은 제 주된 연구 분야가 한국근대사상사이기 때문에 오는 한계일 것입니다.
3. 개벽으로 다시 보는 해방공간
‘해방공간의 재재인식’이라는 흥미로운 발상을 제안하셨습니다. 사실 제 요즘 관심분야도 ‘개벽으로 다시 보는 한국 근대’입니다. 덕분에 그동안 제가 모르고 있었던 현대사의 중요한 사실들도 많이 알게 되었습니다. 특히 1948년에 천도교에서 3.1운동을 재현하려 했다는 사실은 저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모르고 있었던 사건이라고 생각합니다.
천도교의 정치이념
해방정국(1945~1948)에서 개벽의 입장을 대변한 건국철학이 『천도교의 정치이념』(1947)과 원불교의 『건국론』(1945)인데 둘 다 흥미롭게 읽은 기억이 있습니다. 지적하신대로 남과 북, 성과 속을 모두 아우르고 있어서 개인적으로 공감을 많이 했습니다. 특히 『천도교의 정치이념』에 수록된 임형진 교수님의 해제 「천도교청우당, 새로운 세계를 기획하다」(모시는사람들)와 『문명의 대전환과 후천개벽』에 실려 있는 백낙청 교수님의 논문 「통일사상으로서의 송정산의 건국론」(모시는사람들)이 두 문헌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문명의 대전환과 후천개벽(백낙청)
『천도교의 정치이념』에서 특히 인상적이었던 점은 1923년에 창당된 천도교청우당의 세 가지 기본이념이었습니다. 그것은 정신개벽·민족개벽·사회개벽인데, 이돈화가 『신인철학』에서 주창한 삼대개벽과 용어가 동일합니다. 그런데 『천도교의 정치이념』에 의하면 “실제로 청우당의 활동 목적은 민족개벽과 사회개벽의 두 가지에 중점을 두었던 것이 사실이다”(48쪽)고 나와 있습니다. 즉 정신개벽은 상대적으로 소홀히 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다음과 같은 문장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민족개벽이라 함은 여러 가지 의의가 있지만, 일본 제국주의의 굴레에서 우리 민족이 해방을 얻자는 것이 제일의적이었고, 사회개벽이라 함은 자본 사회의 제도를 개혁하여 무산계급을 해방하자는 것이다. 이상을 종합해 보면 청우당의 현실적인 정치이념은 민족해방과 계급해방이었던 것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원래 보국안민(輔國安民)은 천도교의 신조요 염원인 만큼 천도교의 그것은 곧 당의 이념이 된다. 그런데 해석상 보국(輔國)은 민족해방이 되고, 안민(安民)은 계급해방이 되는 점에서 다시 의심할 여지가 없다.”(48쪽)
저는 이 대목에서 80년대 학생운동과 비슷한 이념을 떠올리게 됩니다. 즉 민족개벽=민족해방은 이른바 NL계열의 주장과 유사하고(대상은 일본에서 미국으로 바뀌었습니다만), 사회개벽=계급해방은 이른바 PD계열의 주장과 유사합니다. 그런 점에서 천도교가 고민한 보국과 안민의 문제는 한반도의 영원한 과제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다만 『천도교의 정치이념』의 경우에는 보국(민족)이나 안민(계급) 중에서 어느 한쪽에 기울어지지 않고 양자를 모두 병진하려 했다는 점인데, 이것은 원래 동학에서 ‘보국안민’이라는 슬로건을 표방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천도교의 정치이념』에 나오는 도식대로라면, 1차 동학농민혁명이 ‘안민’(계급)의 문제로 일어났다면, 2차동학농민혁명은 ‘보국’(민족)의 문제로 일어났다고 볼 수 있으니까요.
4. 천도교의 이중과제론
『천도교의 정치이념』에서는 보국과 안민의 문제를 ‘이중 과업’과 ‘양대 과제’라고도 말하고 있습니다.
“생각건대 조선민족에게 부여된 정치적 사명은 두 가지가 있으니, 그 첫째는 민족해방이요, 둘째는 사회해방이다. 연합국의 위대한 전승으로 인하여 우리의 민족해방이 대행된 것은 사실이지만 자주독립을 완성하지 못한 만큼 아직도 이 이중적인 정치 과업은 우리에게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이 또한 사실이다.… 두 가지 과업을 동시에 수행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된 것이 조선의 특수한 사정이다.… 여기서 우리는 냉정하게 생각하고 주밀하게 논의하여 민족 만년 대계인 이 양대 과제를 완전히 수행해야 하겠다.”(51쪽)
여기에서 알 수 있는 것은 본래 삼대개벽을 지향했지만, 결과적으로는 양대개벽으로 축소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즉 양대개벽을 추진할 정신적 동력인 정신개벽은 논의에서 빠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천도교인 개개인이 정신수양을 게을리했다는 것이 아니라 사회운동으로서의 정신개벽에 대한 노력은 상대적으로 소홀해졌다는 뜻입니다. 이런 상황은 80년대 운동권에 이르면 더욱 심화됩니다. 사회운동에 치중한 나머지 정신수양이나 영성수련을 할 여력이 없었던 것이지요. 제 생각에 원불교에서 ‘정신개벽’을 들고 나온 것은 이러한 공백을 메우기 위해서가 아닌가 싶습니다.
5. 『건국론』의 중도주의
원불교의 제2대 리더인 정산 송규가 쓴 『건국론』은 『천도교의 정치이념』보다 2년 빠른 1945년 10월에 나왔습니다. 해방 직후에 나온 셈입니다. 흥미롭게도 첫 장(章)부터 「정신」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정치」, 「교육」에도 ‘(정신)훈련’이나 ‘정신교육’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같은 ‘교정쌍전’이라고 해도 천도교가 ‘정(政)’에 방점을 두고 있다면 원불교는 상대적으로 ‘교(敎)’를 중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건국론』의 정신개벽의 특징은 ‘중도주의’를 표방하고 있다는 점에 있습니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습니다.
“건국은 단결로써 토대를 삼고, 단결은 우리의 심지가 명랑함으로써 성립되며, 명랑은 각자의 흉중에 갊아있는 장벽을 타파함으로써 얻게 되는 것이다. 그런즉 장벽은 과연 무엇일까? 이에 간단히 그 대요를 말하자면, 1. 각자의 주의에 편착하고 중도의 의견을 받지 아니해서 서로 조화하는 정신이 없는 것이요…” (제2장 「정신」)
건국론
저는 여기에서 말하는 ‘중도주의’야말로 우리가 해방 이후로 잃어버린 정신적 태도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생각해보면 무위당 장일순 선생도 ‘중립화 통일론’을 주창해서 감옥에 갔다고 하는데, 『건국론』의 중도주의와 상통하는 점이 있습니다. 제가 보기에 중도주의이든 중립화이든, 이들이 말하는 ‘중’은 단순한 ‘중간’이기보다는 “배제를 거부하는 포함의 태도”인 것 같습니다. 설령 자기와 생각이 다르고 이념이 다른 ‘타자’라 할지라도 처음부터 투쟁의 상대로 보기보다는 그들의 입장과 상황을 이해하려는 태도입니다. 장일순의 표현대로라면 ‘보듬으려는 태도’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건국론』에서 말하는 “내 마음의 장벽”을 무너뜨려야 하는데, 오히려 우리는 “내 마음의 장벽”을 공고히 하는 방향으로 달려온 것 같습니다. 달리 말하면 ‘영성‘ 대신에 ’아성(我性)‘을 공고히 해 왔다고나 할까요.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해방 이후에 잃어버린 정신은 『건국론』이나 장일순이 말하는 ‘중도’의 정신이라고 생각합니다. 최근에 유행하는 이른바 ‘혐오문화’도 이런 정신의 상실에서 비롯된 극단적인 사례가 아닐까요? 상대의 존재를 긍정하려 들기보다는 처음부터 부정하려는 태도가 앞서는게 혐오니까요.
개벽포럼(도법스님)
지난달에 있었던 제1회 개벽포럼에 도법스님이 연사로 오셔서, 서로 생각이 극단적으로 다른 사람들의 ‘가운데’에 서서 그들의 의견을 중재했던 경험들을 생생하게 들려주셨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야말로 부처님이 말씀하신 ‘중도의 길’이라고 생각한다”고 하셨습니다. 원효식으로 말하면 ‘화쟁’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 역시 『건국론』의 중도주의나 장일순의 중립주의 나 보듬는 태도와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개벽의 입장일 것입니다. 개벽은 양 극단의 가운데에 서서 ‘새길’을 모색하고자 하는 태도라고 할 수 있으니까요. 일종의 ‘중도개벽’인 셈입니다. 19세기식으로 말하면 유학과 서학의 중간에서 양자를 아우르면서 제3의 길을 모색한 개벽파의 태도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개벽포럼(청중)
6. 21세기의 공통가치를 찾아서
마지막으로 『천도교의 정치이념』을 읽으면서 또 하나 인상적이었던 점을 소개하면서 이번 서신을 마칠까 합니다. 그것은 보국과 안민이라는 서로 다른 과제를 추구하면서도 그 바탕에는 ‘하늘’이라고 하는 동학의 기본이념이 깔려 있는 점입니다. 80년대식으로 말하면 NL과 PD가 우선시하는 과제는 서로 달랐지만, 양자의 바탕에는 “시천주”라고 하는 공통가치가 공유되고 있었다고 할 수 있겠지요.
시천주는 두 말 할 것 없이 인간과 만물에 대한 존중의 태도를 말합니다. 이 점 또한 해방 이후에 우리가 잃어버린 전통일 것입니다. 각각의 진영에서 자기 주장을 외치면서 상대를 비난하려는 노력은 열심히 해왔지만, 입장이 서로 다른 상대와의 공통토대나 접점을 찾으려는 노력은 상대적으로 소홀했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태도에서 ‘공공’의 영역은 확보되기 어렵습니다.
오늘날 ‘개벽’이 주는 메시지는 여기에 있을 것입니다. 동학‧천도교‧증산교‧대종교‧원불교 등등이 비록 종교의 형태는 달랐지만 모두 ‘개벽’이라는 공통가치를 향해서 100년 넘게 계승하고 상생해 왔습니다. 아마도 우리가 개벽학을 정립하고자 하는 목적도 여기에 있을 것입니다. 해방 이후에 잃어버린 공통가치를 다시 회복하려는 노력입니다. 해방정국이 ‘좌’나 ‘우’라는 편도(偏道)를 고집했다면, 그리고 해방 이후가 ‘개화’라는 편도(偏道)로 치달았다면, 지금부터는 이들을 아우를 수 있는 중도(中道)를 ‘개벽학’이라는 이름으로 찾아보려는 것이지요.
유교, 개신교, 천주교, 천도교, 원불교 계열의 학자들이 한 자리에 모여서 동학을 공부하는 ‘하늘학회’(가칭)도 그러한 노력의 일환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늘’을 공통가치로 삼아서 뭇 종교들을 아우르려는 중도의 길을 찾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여기에 과학자까지 가세된다면 금상첨화겠지만요. 앞으로 뜻있는 분들이 하나씩 둘씩 동참해 주시리라 믿습니다. 개벽학당도 그런 중도의 일꾼들을 길러내는 산실이 되고 있다고 생각하고요.
내가 초등학교 고학년 때가 되자 일반 가정에서는 아직 생소했던 인터넷이 조금씩 보급되기 시작했다. 당시는 아직 전화회선으로 거액의 사용료를 지불하고 한정된 시간에 인터넷을 사용했던 기억이 남아 있다.
독일에서 알게 된 한 지인의 집을 방문했을 때 독일의 슈퍼에서 사온 딱딱한 두부를 요리해서 둘이서 먹었다. 독일인 지인은 “두부는 인터넷 같다. 처음에는 볼 수도 없었고 먹어 볼 기회도 없었는데 지금은 없는 곳이 없어 모두가 두부를 먹는다” 며 인터넷과 두부가 사회에 침투하는 속도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다.
스마트폰의 보급도 그것과 비슷할지 모르겠으나, 정보화 사회라는 것은 실로 무서운 것이어서 편리함의 중독에 빠져 있는 사이에 어느 편향된 이데올로기에 물들게 되는 경우도 있다.
일본에서의 조선민족에 대한 차별과 편견이 그 가장 대표적인 예가 아닐는지.
나도 아무런 악의 없이 단지 흥미위주로 성범죄에 대해 인터넷 검색을 통해 알아보던 중에 누가 썼는지도 모르는 기사에 ‘범인은 재일교포’ ‘한국과 북한은 성범죄대국’이라는 문자가 난무하는 것을 보고 그것을 의심 없이 그대로 믿었던 시기가 있었다.
그 가벼운 생각과 무지가 얼마만큼 일본에서 살고 있는 재일조선인(한국인)들은 괴롭히고 한반도 사람들을 멸시하는 지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했다.
나는 유럽 등 서양을 동경했고 실제로 프랑스에 체류한 적도 있지만, 한반도에 대해서는 이웃나라임에도 불구하도 아는 것이 거의 없었다.
그래도 기회가 있어서 한국에 지인도 생기고 가끔씩 한국을 방문하면서 젊었을 때의 내 생각이 얼마나 편향되고 무지했는지를 알게 되었다. 북한에는 가 본 적이 없지만 한국에 대해서만 말해보자면, 한국인은 일본인을 아주 오픈 마인드로 대해주고 일본인이 한반도를 통치했던 역사에 대해서도 이를 아주 냉정하게 받아들이고 있어, 일본의 TV 뉴스에서 보도하는 한일 간의 여러 가지 문제가 실은 전쟁 비즈니스를 획책하는 일본 정부가 이를 선동하고 있음을 뼈저리게 알게 되었다.
“가와나카 씨도 조선학교에 가보세요”라는 한국에 사는 페스트리치 씨에게 권유를 받았을 때, “네”라고 짧게 대답은 했으나 전혀 모르는 타인인 내가 조선학교를 찾아가면 과연 학교 사람들이 나를 반겨주겠냐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방문의 목적이 인터뷰로 정해졌을 때 지금까지 품어왔던 거리감 같은 것이 조금은 사라진 느낌이 들었다고나 할까, 나는 일본인이 갖고 있는 차별적 사고를 조금은 불식시킬 수 있는 계기가 되지 않을까하는 기대를 갖게 되었다.
내가 방문했던 가나가와 조선 중고급학교는 나라와 지자체로부터 차별을 받아 가나가와현 내의 외국인학교 가운데서 유일하게 수업료 무상화제도를 적용받지 못하고, 현은 이 학교를 포함해 다섯 개 학교에 다니는 아동·학생에 대한 학비보조를 2016년 이후 정지했다. 이에 대해 마에카와 기헤이[前川喜平] 전 문부과학성 사무차관은 요코하마 시내의 모처에서 행한 연설에서 “나라와 자치단체에서 솔선해서 차별을 하고, 국민의 차별감정을 조장하고 있다. 관제 헤이트다.”라며 이를 비판했다.
내가 가나가와 조선 중고급학교를 방문했을 때 김찬욱(金燦旭) 교장선생님은 나에게 넓은 교내를 구경시켜주며 wifi 배선 등도 졸업생과 학부형의 협력을 얻어 자신들이 직접 깔고 있다고 알려주었다. 높고도 넓은 천정에 저렇게 긴 배선을 깔려면 엄청난 노력과 시간이 걸릴텐데 그래도 그들은 자신들의 손으로 이것을 직접 해냈다.
가나가와 조선 중고급학교에서는 특히 어학교육에 힘을 쏟고 있는데, 학생들은 모두 조선어, 일본어, 영어의 세 언어를 철저히 배운다. 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각 언어의 검정시험의 자격보유를 목표로 하여 어려운 공부를 매일매일 거르지 않고 한다. 일본 학교가 도입하기도 전에 정보교육을 실시하고, 정보리터러시 등을 배워 스스로 정보를 발신할 수 있는 인재를 육성하고 있는 것도 이 학교의 특징 중 하나라고 김찬욱 교장선생님은 말했다. 그것은 이 학교에서 수행하는 여러 과제 중 일부인데, 무엇보다도 이 학교의 교육방침의 기본 베이스는 서로 돕는, 무언가를 잘하는 학생은 그렇지 못한 학생을 돕는, 상조(相助)의 정신을 기조로 한, 조선민족으로서의 마음과 자부심을 제대로 잘 가르치는 것이다.
내가 학생들과의 잡담에서, “장래에는 어떤 일을 하고 싶은가요?”라고 물으니 어떤 학생이 “이 조선학교를 계속 유지해나갈 수 있도록 뭔가 도움이 되는 일을 하고 싶다.”고 수줍어하며 대답해 주었다. 이 이야기를 김찬욱 교장선생님에게 들려주자 김찬욱 교장선생님은 “학생이 학교 걱정을 하다니, 이런 건 원래 안 해도 되는 건데요…”라고 했다. 가나가와 조선 중고급학교는 많은 학부형과 졸업생들의 도움에 의해 운영되기도 하고 있으니 학생들이 봤을 때 그건 당연하다고 의식하고 있는 걸까. 김찬욱 교장선생님은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내가 생각하기에 학생들의 의견은 김찬욱 교장선생님을 위시로 한 이 학교 선생님들의 교육 성과이기도 할 것이다. 거기에 조선민족의 상조 정신이 계승되고 있음을 나는 보았다.
교내에서는 누구를 만나도 웃는 얼굴로 발랄하게 인사를 하고, 전철 안에서 부딪쳐도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도 하지 않는 살벌한 분위기는 이곳에서는 털끝만큼도 느낄 수가 없었다.
수업을 견학해보니 학생들은 지진재해에 대한 방비를 확실히 하자든지, 인사는 중요함으로 특히 손윗사람에 대해서는 정중하게 인사를 하자든지 하는 주제를 자신들이 직접 정해 발표를 하고, 음악수업에서는 아카페라로 합창을 하며 서로 웃거나 하는 화기애애한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일본의 학교와는 조금 다르게 느낀 점은 발표 전에는 학생들이 다소 떠들거나 장난을 치더라도 선생님은 화를 내거나 하지 않고 같이 웃으며 학생들을 지켜보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거기에서 나는 너그러움과 관대함을 느꼈다.
내가 재일조선인들을 차별하는 일본인들에 대해서 질문을 했을 때도 감정적인 발언이 아닌 어디까지나 냉정하게 그들의 사상을 분석하고 결코 비난하거나 하지 않는 태도는 김찬욱 교장선생님 뿐만이 아니라 학생들에게도 볼 수가 있어서 조금 놀랐다.
예를 들면 많은 일본인들이 종군위안부 문제라든지, 징용공의 문제라든지, 전쟁책임에 대해 질문을 받으면 왠지 우리들을 일방적으로 힐문(詰問)한다고 느끼는 건지, 이미 해결이 다 끝난 문제를 계속해서 반복해 문제시 삼는 조선민족은 질이 좋지 않다는 식의 감정적인 의견이 많다.
실제로 한국에서 위안부 소녀상을 지키는 활동을 하고 있는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계속해서 배상을 요구하는 것은 일본의 정치가가 계속해서 위안부의 강제연행은 없었다든지, 필요악이었다는 등의 실언을 반복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그런 이야기를 해도 “한국 측 태도가 나쁘니 그런 발언을 하지 않을 수 없다”고 정색을 하는 일본인들도 꽤 있다.
인터뷰를 하는 동안 한 학생이 “우리들은 사상이랄까, 우리들 자신의 생각을 확실하게 갖는 것이 중요하다고 배웠기 때문에 일본 사람들도 제대로 자신들의 생각을 갖고 서로 이야기를 한다면 편향된 정보에 현혹됨 없이 서로를 이해할 수 있게 되리라 생각한다.”는 이야기를 했는데, 이 말을 듣고 그야말로 우리들 일본인은 우리 자신들의 생각을 잊어버렸음을 깨닫게 되었다.
김찬욱 교장선생님은 여러 번 반복해서 무지가 여러 가지 문제를 일으킨다고 했는데, 그것은 과거의 나 자신에게 들려주고 싶은 말이었다.
무지 –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아무 것도 모른다는 것이 얼마나 많은 차별을 만연케 하고 있는지. 예전의 나는 단순히 인터넷에 실려 있던 정보를 아무런 의심 없이 그대로 믿었기 때문에 편향된 사고를 갖게 되었는데, 그때 나는 ‘안다’는 것의 중요함조차 ‘몰랐던’ 것이다.
10대 때도 병 때문에 정신적으로 불안정해서 내 가족이 내밀어준 손도 보지 못하고 가족에 대해 못된 짓을 했던 경험이 있는데, 그야말로 많은 일본인들이 조선민족이 내민 손을 보지 못한 채 못된 짓을 계속하고 있는 구조와 겹쳐 보인다.
인간으로서의 당연한 배려와 공정한 시선이라는 것은 실수를 거듭하면서 배워나가는 것인지도 모르겠으나 완고해져버린 사람의 마음은 실패를 실패라 인정하지 않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김찬욱 교장선생님과 가나가와 조선 중고급학교의 학생들은 차별을 받는 입장에 있으면서도 ‘일본인과 평소와 같이 마주치며 서로를 이해하는 것’ ‘학교를 열린 장으로 해서 많은 일본인이 찾아와 주는 것’을 목표로 삼고 항상 노력하고 있다.
자기 자신의 불만과 불안을 누군가의 탓으로 돌림으로써 안심하려 드는 사람들은 아무리 욕을 먹더라도 자기들을 따뜻한 눈빛으로 받아주는 사람들의 마음이 없다면 안정되게 서 있을 수 없다.
아이러니하게도 그것을 가장 잘 실천하고 있는 것이 자기들이 차별하는 상대인 재일조선인들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지 않을까. 그들은 차별을 용서하지는 않더라도 아주 냉정하고 공정하게 대해줄 터이니.
학교를 떠날 때 “언제든지 또 오세요”라고 인사를 해준 김창욱 교장선생님과 밖에서 놀고 있다가 나를 발견하고는 또 인사를 해준 학생들을 보고 일본인들이 잃어가고 있는 마음을 그들이 ‘조선민족의 자부심’으로써 교육에 도입하여 끊임없이 계승하고 있음을 느꼈다.
따뜻한 그들을 만나보면 조선학교에 대한 보조금의 중단과 무상화제도에서 제외한 정부와 자치단체의 모든 대응이 잘 짜여진 비지네스와 같은 차별의 실태라는 것을 우리가 알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될 것이다.
“나는 미국의 사법체계가 제대로 작동하고 있음을 전세계에 보여 주었으면 한다” 미국 전 FBI 수장이었던 제임스 코미가 NYT에 보낸 칼럼의 구절이다. 그는 트럼프로부터 대통령직을 보호해 달라는 간접적이고 부당한 압력을 거부한 대가로 모욕적으로 트윗터로 해임당한 트럼프 정권내 첫 번째 최고위직 인사였다. 그러나 그는 개인적인 감정을 떠나, 트럼프의 자질에 대한 회의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장래를 위하여 진실이 밝혀지고 법치가 투명하고 흔들림 없이 공정하게 작동하길 희망하면서 담담하고 적어 내려가고 있다. 조폭 수준의 수많은 사건과 소용돌이 속에서도 미국이 여전히 위대한 국가인 것은 바로 뮬러와 코미 같은 강직한 공직자들이 미국을 지키고 있기 때문이다.
제임스 코미의 3월 21일자 뉴욕타임즈 기고문 :
미국은 지금 로버트 뮬러 특검의 보고서를 기다리고 있다. 많은 사람들은 보고서에서 그들이 원하는 특정한 이야기가 나오길 바라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가 탄핵당해 마땅한 범죄자라는 결과 혹은 그에게 기본적으로 죄도 없다는 결과 둘 중 하나이다.
하지만 사람들 모두가 보고서에서 어떤 이야기가 나와야 “맞는지”는 기대하는 것은 잘못이다. 나는 트럼프씨가 미국 대통령직을 맡기에 도덕적으로 부적합하다고 생각하지만, 뮬러 특검이 트럼프를 범죄자라고 발표하는 것을 지지하진 않는다. 나는 또한 뮬러 특검이 대통령에게 “면죄부”를 주는 것을 지지하지도 않는다. 나는 두 가지 모두 지지하지 않지만, 특검이 자신의 맡은 바 소임을 다할 수 있게, 그리하여 기소할 일은 기소하고 그가 조사한 내용을 보고서에 그대로 적을 수 있게 되길 바랄 뿐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특검에 대해 지속적으로 공격을 가했고, 연방수사국과 법무부는 지난 2년간 대통령이 특검에 개입해 업무를 수행하지 못하게 할 것이라는 전망을 내놓았다. 미국의 대통령이 사법부에 불을 지르는 식으로 스스로를 방어하는 이러한 행태는 심히 우려되는 일이다. 하지만 트럼프 대통령은 뮬러 특검의 수사를 막기 위해 그의 권력을 사용하진 않았다(만약 실제로 그랬다면 다른 차원의 비상사태였을 것이다. 수사의 신뢰도를 무시하려는 시도가 아니라 수사자체를 막는 시도일 테니). 그러므로 우리는 보고서의 내용에 대해 궁금해하고 희망을 가질 수도 있는 상황에 있는 것이다.
궁금해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특정한 답이 나오길 희망하는 것은 다른 이야기이다. 법치주의는 편파적이지 않고 완전한 수사에 기반을 둔 공정한 법집행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수사가 관련된 모든 의혹을 제대로 밝히고 사건의 진상에 가장 근접하는 것만이 사법정의가 국민을 위하는 길이다.
나는 트럼프씨가 러시아인들과 고의적으로 공모하여2016년 대선에 개입하였는지, 혹은 그가 충분히 부패한 의도를 가지고 재판을 방해하려 하였는지에 대해 특검이 어떤 결론을 내릴지 알지 못하며, 그러한 결과에 대한 관심 또한 없다. 나는 오직 수사가 제대로, 그리고 완전하게 이루어졌는지 에만 관심을 가지고 있다. 만약 그러하다면 이는 정리의 승리가 될 것이며, 국가의 지도부가 진실과 법치에 대한 책무를 저버린 이 시점에도 가장 중요한 미국적 가치들이 보호되었다는 뜻이 될 것이다.
나는 전세계에, 그리고 우리의 대통령과 의문고리의 권력들에게, 미국에는 제대로 작동하는 사법체계가 있으며, 이는 사법체계를 믿고 개인적 당파적 이익 이상을 생각하는 사람들 덕에 그것이 가능하다는 점을 보여 주었으면 한다. 우리의 체계가 도달하는 결론을 사람들이 지지하든 그렇지 않든, 정치와 무관한 법집행은 이 나라에 있어 맥동하는 심장과도 같은 것이다. 나는 그런 모습을 볼 수 있었으면 한다.
특검이 하는 수사에 대해 최대의 투명성을 보장하는 것이 가장 정의로운 일이다. 나는 수사의 종결에 대해 정확히 무엇을 말하고 또 언제 이야기를 꺼낼 지에 대한 고려에 대해선 전혀 알지 못한다. 하지만 법무부는 언제나 공익을 위해서만 행동해야 하며, 전통적으로 그래왔듯이, 종결된 수사에 대해 자세한 정보를 공공이 필요로 할 때 제공해야 한다.
나 스스로도 희망 하나를 품고 있었음을 고백해야 할 것 같다. 나는 트럼프씨가 탄핵을 당해 임기전에 집무실에서 물러나야 하는 일이 없기를 희망하고 있다 .물론 의회에서 보기에 입증가능한 사실들이 있다고 할 때 의회가 헌법에 명시된 탄핵절차를 진행해야 하지 말아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나는 그저 그럴만한 일이 없었으면 할 뿐이다. 만약 의회에 의해 트럼프씨가 집무실을 나가야 한다면, 트럼프를 지지했던 많은 사람들은 그것을 쿠데타로 볼 것이며, 이로 인해 그들은 미국적 삶의 보편적인 가치에서 멀어지고, 결국 국가를 분열시키고 말 것이다.
트럼프씨를 비판하는 이들은 왜곡하기 어려운 무언가, 혹은 불만을 해소할 무언가가 나오길 바랄 것이다, 적어도 탄핵보단 나은 결과여야 한다. 2020년 대선은 완전하게 치러져야 한다. 비록 주요한 정책문제 – 이민, 총기, 임신중절, 규제, 기후변화, 세금과 같은- 에서는 이견을 보일지라도, 국민들이 잠시 시간을 내 더 큰 무언가를 위한 통합을 이뤘음을 보여줘야 한다. 더 큰 무엇은 미국의 대통령이 거짓말을 일삼고 법치주의를 연신 공격하는 사람이어서는 안된다는 믿음이다. 그렇게 해야만 우리는 다음 단계로 넘어가 정책에 대한 시비를 가릴 수 있을 것이다.
요약
이 글은 미국 경제정책연구소(EPI)와 저자의 동의를 얻어, 모니크 모리세이 (Monique Morrissey)가 2019년 12월에 발표한 미국의 연금제도 동향과 과제에 대한 글을 번역한 것이다.
저자는 미국의 연금체계가 대표적인 확정기여형 퇴직연금제도인 401k를 중심으 로 발달하면서, 심각한 노후불안에 처해있다고 비판한다. 그리고 안정적인 노후 를 위한 현실적 대안으로 3가지를 제안한다.
먼저, 재정불안을 부추기고 정치적인 악의적 왜곡에도 불구하고, 공적연금(사회보장연금)의 역할과 확대를 가장 우선적인 과제로 꼽으면서, 급여 상향뿐 아니라 기여의 점진적 상향과 부과 소득상한 개선 등을 통해 공적연금을 더욱 강화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리고 확정기여형 중심의 퇴직연금에 대한 비판과 한계를 극 복하기 위해, 전통적인 확정급여형 연금을 지켜내는 한편, 노사가 공동으로 기여 하고 공적으로 관리하는 GRA(Guaranteed Retirement Account)를 현실적 대안 모델로 제시한다.
이 글은 미국의 연금제도에 대한 개괄적인 평가와 과제를 다루고 있지만, 한국의 연금개혁에도 많은 의미와 시사점을 제공해줄 수 있다. 보고서의 원제에서도 알 수 있듯이, 무엇보다 모든 국민들이 부담 가능하고 걱정 없는 안정적인 노후를 만들어 가기 위해서는 공적연금을 강화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시민들의 의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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