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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신소설 작가 이인직(3) – 계몽운동, 아시아연대론, 사회진화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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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신소설 작가 이인직(3) – 계몽운동, 아시아연대론, 사회진화론

익명 (미확인) | 화, 2018/03/27- 16:19

사회진화론과 조선 그리고 이인직

사회와 사회적 결과의 상(上)에 진화론을 응용하야 사회적 단체로서 공구(攻究)의 대상을 삼는 것이 중요한 바니 개(蓋) 차(此) 단체가 개인과 무이(無異)함도 유(有)하나 생존의 수단을 인(因)하야 상호 경쟁함은 개인보다 가장 제(諸) 단체에 재(在)함이라 (중략) 차(此)와 여(如)히 일체의 사회적 제도는 선악의 각 인종을 일 사회적 단체에 결합한 것인데 기 단체는 상적(相滴)한 경쟁자와 경쟁하는 일 단위라. 부(夫) 자연도태의 제법(諸法)은 차 사회적 단체 상(上)에 행(行)하며 차(此) 단체는 사회진화 과정에 중요한 단위라.(이인직, 「사회학 속(續)」, <소년한반도>,190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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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한반도>창간호(1906.11.1)

 

이인직의 신소설은 보았어도 이른바 ‘진화론’에 대해 언급한 글은 대부분 처음 보았을 겁니다. 여기서 이인직이 언급한 진화론은 찰스 다윈(Charles Robert Darwin. 1809-82)의 생물학적 진화론이 아니라 사회진화론(Social Darwinism)입니다. 사회진화론은 흔히 쓰이는 약육강식, 우승열패, 적자생존이라는 말이 여기서 비롯됐다면 이해될 런지요.
19세기 서구에는 다양한 사상들이 난무했습니다. 그러나 종국에는 콩트(Auguste Comte. 1798-1857)의 사회학과 실증주의, 스펜서(Herbert Spencer. 1820-90)를 중심으로 한 사회진화론으로 귀결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특히 사회진화론은 19세기 중반부터 20세기 초까지 서구를 풍미했던 이론입니다. ‘Social Darwinism’ 즉 ‘사회다위니즘’이란 이름에서 다윈의 진화론을 사회적으로 적용한 이론이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이 명칭은 20세기 중반에 19세기의 사상적 흐름을 정리하면서 후세에 붙여진 이름이지 당시에 쓰이던 명칭은 아닙니다. 오히려 사회진화론에 대한 저서는 다윈의 <종의 기원에 대하여(On the Origin of Species>(1859)보다 먼저 출간되었습니다. 사회진화론의 시조인 스펜서는 사회진화론에 대한 최초의 저서 <진보의법칙과원인(Progress: Its Laws and Cause)>를1857년에발표했습니다.물론 사회진화론이 나중에 다윈의 진화론을 흡수한 것은 사실이며 심지어 다윈조차 사회진화론에 영향을 받기도 합니다.
사실 사회진화론은 스펜서 개인의 이론만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당시 다윈의 이론을 흡수하여 사회의 발전을 사회유기체적 관점에서 해석하거나, 자유주의를 강조하여 인간의 경쟁을 장려하는 많은 사상가의 시도를 사회진화론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회진화론은 다윈의 진화론을 상당히 왜곡하고 있습니다. <종의기원에대하여>라는 다윈의 진화론 저서 제목에서도 진화(evolution)라는 말은 등장하지 않을 뿐 아니라 이 책의 본문 속에서도 다윈은 진화(evolution)라는 표현을 쓰지 않았습니다. ‘진화’라는 표현은 진화 이전 보다 ‘우월’해 졌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다윈의 진화론에서의 진화는 우월함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 의미는 생존경쟁(Struggle for Life)에 의한 자연선택(Natural Selection)일 뿐입니다. “더 강하거나 우월해서 살아남은 것”이 아니라 “생존에 적합했기에 살아남은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다윈은 진화(evolution)라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고 ‘변화를 포함한 계승(descent with modification)’이라는 표현을 썼습니다. 더군다나 스펜서의 경우 생물학적 진화론의 관점은 다윈보다 라마르크(LAMARCK, Jean Baptiste Pierre Antoine de Monet, Chevalier de. 1744-1829)에 가깝습니다. 이른바 ‘용불용설(用不用說)’로 대표되는 그의 이론은 ‘획득형질의 유전’ 즉 후천적인 노력으로 획득한 형질이 유전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회진화론은 19세기 서구 사상계를 휩씁니다. 결국 다윈마저도 <종의 기원에 대하여> 제5판에서 ‘진화(evolution)’라는 말을 채택하기에 이릅니다. 애초에스펜서의 사회진화론은 철학과 자연과학의 통합된 이론을 만드는 것과 ‘자유주의’에 대한 옹호를 목적으로 했습니다만, 문제는 당시 제국주의는 이것을 약육강식의 제국주의적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한 이데올로기로 활용한다는 점이며, 사회진화론이 그에 부합했다는 점은 부인하기 힘듭니다.
한중일 3국의 사회진화론의 수용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로는 중국의 량치차오(梁啓超, 1873~1929), 일본의 가토 히로유키(加藤弘之, 1836~1916)와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 1835~1901)를 들 수가 있습니다. 그 중 가토 히로유키와 량치차오는 절대적이었습니다. 한국에서 사회진화론은 1880년대부터 영향을 끼치고 있었습니다. 사회진화론을 아시아에서 가장 처음 받아들인 일본에서는 가토 히로유키가 다윈과 스펜서의 번역서 수준을 넘어서서 사회진화론에 대한 새로운 원리론을 형성해가고 있었습니다. ‘evolution’의 역어로 진보와 개화를 조합한 ‘진화’라는 신조어를 만든 것도 그였습니다. 개화파의 ‘개화자강론’은 국가주의와 제국주의론을 뒷받침하는 구실을 하던 일본 사회진화론의 수용 위에서 만들어졌습니다.
한국에서 사회진화론을 접하고 흡수했던 경우는 유길준처럼 서구 유학을 통해 직접 접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대부분 중국과 일본을 통해 간접적으로 접하는 방식이었습니다. 즉, 중국과 일본에 의해 재가공된 사회진화론이었습니다.
중국과 일본이 사회진화론을 해석하는 방식은 다소 차이가 있습니다. 중국이 방어적인 태도를 취한다면 일본은 다소 공격적인 태도를 가집니다. 이는 사회진화론에 대한 번역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옌푸(嚴復, 1854~1921)와 가토의 번역을 비교하면 ‘evolution’을 각각 ‘천연(天演)’과 ‘진화(進化)’, ‘struggle for existence’을 ‘물경(物競)’과 ‘생존경쟁(生存競爭)’, ‘natural selection’을 ‘천택(天擇)’과 ‘도태(淘汰)’, ‘survival of the fittest’을 ‘택종유량(擇種留良)’과 ‘우승열패(優勝劣敗)’ ‘적자생존(適者生存)’이라 번역합니다. 이외에도 옌푸는 사회복지와 관련된 용어들은 ‘부강’과 관련되는 용어로 번역했습니다. ‘natural selection’(자연선택)을 예로 들면 옌푸는 원 단어의 뜻에 가까운 ‘천택’으로 번역한 반면 가토의 경우 불필요한 것, 부적당한 것이 ‘제거’되고 적합한 것만이 남긴다는 의미의 ‘도태’라는 단어를 선택합니다.
일본의 사회진화론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사회유기체설’입니다. 스펜서의 사회진화론은 사회도 생물 유기체와 마찬가지로 하나의 유기체라고 보았습니다. 이 이론은 스펜서가 비록 ‘자유주의’를 옹호하기 위한 사회진화론을 논리를 전개했음에도 논리적 귀결은 전체주의로 흐를 수밖에 없는 한계를 갖고 있었습니다. 사회유기체설은 사회를 유기적 전체로 파악함으로써 개인을 사회에 종속되는 존재로 인식하는 논리입니다. 그래서 1880년대 일본정부는 ‘천부인권설’에 근거한 자유민권운동에 대항하기 위해 국가의 개인에 대한 우월성을 지향하던 국권신장파 가토를 앞세웠고 결국 관민협조론이 득세하게 됩니다.
일본의 사회진화론 외에도 중국의 사회진화론 또한 국내 지식인에게 흡수되는데 헉슬리(Thomas Henry Huxley. 1825-95)의 <진화와윤리>를번역한옌푸의<천연론(天演論)>(1898)등이 출판과 동시에 한국에 수입되기도 했지만 중국의 사회진화론이 지식인을 비롯한 대중들에게 본격적으로 소개된 것은 량치차오의 글을 통해서입니다. 1899년 <황성신문>과 <독립신문에량치차오의 논설 「애국론(愛國論)」을 시작으로 량치차오 붐이 일어납니다. 그리고 1903년 량치차오의 사회진화론이 담겨있는 <음빙실문집(飮冰室文集)>(1902)을비롯해1914년까지100여개의 글이 번역 소개됩니다. 량치차오의 사회진화론은 ‘약육강식’의 국제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한 ‘자강’과 ‘부국강병’으로 귀결되며 한국의 ‘계몽주의’와 ‘자강론’에도 많은 영향을 미칩니다. 그런데 량치차오 역시 일본에서 망명생활을 하면서 일본 사회진화론의 영향을 받게 되고 종국에 사회진화론과 관련된 용어도 가토가 번역한 용어로 모두 교체하게 됩니다.
다소 장황하게 ‘사회진화론’에 대해 정리한 것은 이인직을 비롯해 당시 지식인들이 혼란된 세계관 속에서 어떤 ‘선택’을 했는지에 대해 정리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서구의 근대 사상과 문물이 밀려들어오고 제국주의 열강의 위협이라는 혼란 속에서 구한말 지식인들이 판단과 선택을 하게 했던 사상적 배경을 짚고 넘어가는 것이 필요했습니다. 이것은 ‘이해’하기 위한 것이지 ‘용서’하기 위한 것은 아닙니다.
이 시기 한국의 지식인들은 사회진화론과 그에 근거한 근대지상주의, 동양평화론, 대동합방론등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고 있었습니다. 대한제국 관비유학생으로 일본 도쿄정치학교에서 공부한 이인직은 일본의 사회진화론에 크게 영향을 받았습니다.

 

연이(然而) 기(其) 발전(發展)하야 일정(一定)의 직능(職能)을 수(遂)하는 소사회(小社會)와 차등(此等) 소사회(小社會)를 포함(包含)하는 대사회(大社會)의 간(間)에는 중요(重要)한 차별(差別)이 유(有)함으로써 (중략) 기(其) 사회(社會)의 골격(骨格)되고 구조(構造)된 자 (者)-니라. 생물학상(生物學上)의 어(語)를 적(籍)하야 말하진디 기(其) 기관(機關)이라 칭 (稱)할만한 자(者)라 (중략) 오인(吾人)은 사회(社會)의 일분자(一分子)이라.(이인직, 「사회」, <소년한반도> 1, 1906)

 

개(盖) 국가(國家)의 대직능(大職能)은 내부(內部)의 규리(睽離)와 외부(外部)의 공격(攻擊)에 대(對)하야 신민(臣民)을 보호(保護)하는 바라. 차(此)와 여(如)히 일체(一切)의 사회적(社會的) 제도(制度) 선악(善惡)의 각종인(各種人)을 일사회적(一社會的) 단체(單體)에 결합(結合)한 것인디 기(其) 단체(團體)는 상적(相適)한 경쟁자(競爭者)와 경쟁(競爭)하는 일단위(一單位)라. 부(夫) 자연도태(自然淘汰)의 제법(諸法)은 차(此) 사회적(社會的) 단체상(團 體上)에 행(行)하며 차(此) 단체(團體)는 사회진화과정(社會進化過程)에 중요(重要)한 단위 (單位)라.(이인직, 「사회학 속」, <소년한반도> 3, 1907)

 

위 글은 ‘사회유기체설’에 정확히 부합하는 내용입니다. 생존경쟁과 그 경쟁에서 도태되는 단위를 국가로 인식하는 것입니다. 이 국가가 치열한 생존경쟁에서 도태되지 않으려면 국가 내의 각 성원들은 그들의 직능을 국가를 위하여 최대한 발휘해야 한다는 논리입니다. 이는 이인직만이 아니라 당시에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진 논리였습니다. 이러한 논리에서는 개인의 권리보다 국가의 이익 혹은 권리가 우선시됩니다. 어쩌면 이 논리는 지금도 반복되고 있습니다. 군사독재시절 국가를 위해 개인의 희생을 강요하는 논리가 그것입니다.

 

이인직과 친일

이인직이 사회진화론을 수용하여 본격적으로 계몽운동에 투신하는 시기는 1906년 귀국 후인 일제의 통감정치 때입니다. 이인직은 당연히 통감정치에 찬성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가토의 사회진화론에 따르면 국가 간에도 생존경쟁에 의해 적자생존의 논리가 적용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일본 사회진화론의 논리 중 한국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것은 다루이 도키치(樽井藤吉 1850-1922)의 <대동합방론(大東合邦論)>(1893)입니다.그 내용은“동양의쇠운을만회하고흥아(興亞)의 대업을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동아(東亞)의 여러 나라가 대동아연맹을 결성해야 한다”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특히 한국과 일본은 대등한 입장에서 합방하여 ‘대동국(大東國)’이라는 나라를 세우고, 중국과는 동맹관계를 맺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이 사상은 이후 일본 군국주의가 태평양전쟁을 일으키는 사상적 기초인 ‘대동아공영권’으로 이어집니다. 즉 ‘대동합방론’은 일본의 아시아 제국(諸國)에 대한 침략을 정당화시키기 위한 도구에 불과했습니다. 이인직은 귀국 전부터 이런 태도를 보였습니다.

 

슬프다. 나라의 세력과 백성의 힘이 쇠미해짐이 이와 같이 심하니 어찌 마음을 놓고 있을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양(洋)을 따지지 말고 우방에게 호소하고 그 감응의 동정을 구하는 것이 실로 목하의 급무일 것이다. 지금 사처(四處)를 돌아봐도 이를 얻을 수 있는 곳은 동양의 문명국 일본밖에 없다 (중략) 원컨대 선진한 일본국 인인군자(仁人君子)는 그 동정을 찬성하여 문명의 모범을 가르쳐주시기를 (「韓國新聞創設趣旨書」, <都新聞>,1903.5.5)

 

방금 서세동점하여 아주일폭(亞洲一幅)은 거의 사분오열에 이르려고 한다. 단 일본은 홀연히 국초(國礎)를 굳게 하여 동양의 우이(牛耳)를 잡고 보차순치(輔車脣齒)의 의(宜)를 인방(隣邦)에게 두텁게 하여, 백년의 장책을 이에 확립하였다.(「夢中放語」, <都新聞>,1901.12.8)

 

이인직이 1906년 2월 친일단체 일진회의 기관지 <국민신보> 주필로간 것은어찌보면당연한 것입니다. 물론 4개월만인 같은 해 6월에 일진회에 대항하기 위해 천도교에서 창간한 민족지 <만세보(萬歲報)>의 주필로 자리를 옮겨 신소설 <혈의누>를 연재하기도 했지만 그가 어떤길을 선택할 것인가에 대답은 이미 나와 있었습니다. 1907년 이완용 내각의 기관지 <대한신문> 사장으로 취임하면서 그는 이완용의 비서역할을 겸하며 일관되게 친일의 길을 걷게 됩니다.
1909년 12월 4일 이완용 내각과 대립하던 일진회 이용구가 합방청원서를 제출하자 이완용 내각은 이인직 등을 동원하여 즉각 조직적 반대운동을 시작했습니다. 이인직은 「국민대연설회」의 연사로 직접 나서기까지 했는데, 그 반대운동은 겉으로는 합방에 반대하는 것이었지만 실상은 일진회에 합방의 주도권을 빼앗기지 않기 위한 반대운동이었습니다. 12월 22일 이완용은 명동에서 이재명의 칼에 찔려 중태에 빠졌지만, 이틀 전인 12월 20일 이인직은 이완용의 밀명으로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의 각 신문, 재일유학생, 대한동지회 등과 교섭해 일진회 반대 여론을 조성하고 이듬해 3월에 귀국합니다.
결국 1910년 8월 4일 일본어를 못하는 이완용을 대신해 통감부 외사국장 고마츠(小松綠)와 합방에 관한 담판을 벌입니다. 이인직은 통감부와 대한제국 내각 간의 연결통로 역할을 했고, 두 사람의 담판은 양측의 재가를 얻어 한일합방조약의 초안이 됩니다.
이인직이 했던 역할에 비하면 합방 후 그 대가는 초라했습니다. 이완용을 비롯한 한일합방의 공로자들에게는 귀족 작위와 거액의 은사금이 내려졌으나 이인직에게는 이렇다 할 것이 없었습니다. 그가 서얼 출신인 것이 영향을 끼친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이완용과 그의 절친 조중응이 각각 백작・자작과 은사금을 받고 죽을 때까지 호위호식을 누린 것과 비교하면 그가 그토록 봉건주의를 비판했던 결과가 무색해지는 순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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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직 사망 기사. 매일신보 1916. 11. 28

 

조선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문>의 객원을 거쳐 종래에는 친일유림단체경학원(經學院) 의사성(司成)에 올라 천황을 찬양하는 글을 쓰며 여생을 보냅니다. 1916년 11월 총독부의원에서 입원 치료중 사망하는데 장례식은 일본 천리교 의식에 따라 치러졌고 아현 화장장에서 한 줌의 재로 사라집니다. 그가 죽자 조선총독부에서 지급한 장례비는 450원이었습니다.

김덕영 선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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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국가보안법 폐지는 일제잔재 청산이다

 

원희복 <민족화해> 편집인(전 경향신문 부국장)

 

12월 1일 한국진보연대를 비롯, 137개 사회단체와 161명 인사가 “국가보안법 이제는 폐지해야 합니다”를 외쳤다. 이날 국회 앞에서 국가보안법 폐지를 촉구하는 청년학생 기자회견이 열렸고, 여타 많은
장소에서 국가보안법 폐지 행사를 가졌다. 이날 국가보안법 폐지 행사가 집중된 것은 국가보안법이 1948년 12월 1일 제정됐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과연 그럴까. 물론 대법전을 펼치면 나오는 국가보안법 제정날짜만보면 그렇다. 현행 법조문만으로 보면 그럴 수 있지만 역사적 맥락에서 보면 이는 ‘단견’이다. 문제는 이 ‘단견’이 국보법 운동의 의미와 실제 효과를 크게 반감시킨다는 것에 있다. 지금이라도 빨리 수정해야 한다는 측면에서 이 문제를 짚어본다. 일단 현재 사용하는 대법전을 접고, <민족문화대백과사전>을 보자. 보안법에 대해 “1907년
7월 24일(27일의 오류-편집자주) 집회와 결사·언론의 자유를 탄압하기 위해 일제가 대한제국 정부에게 제정, 반포하게 한 법률”이라고 명시하고 있다. 당시 분위기를 설명해 보자. 일제는 1905년 을사늑약으로 통감부를 설치해 대한제국의 외교권과 행정권을 행사했다. 일제는 1907년 헤이그 밀사 사건을 구실로 고종을 퇴위시키고 군대마저 해산시켰다. 이에 <대한매일신문>과 <황성신문>이 일제의 부당함을 지적하고, 조선 팔도에서 의병이 일어났다. 이에 당황한 일제는 이완용 내각을 강제해 법률 제1호(1907.7.24.)로 제정한 것이 바로 신문지법(新聞紙法)이다. 그리고 3일 후 일제는 자국의 치안경찰법을 본따 보안법(保安法)을 강제했다.(법률 제3호는 출판법) 그 주요 내용은 △사회의 안녕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경우 결사의 해산을 명할 수 있다 △경찰관은 사회의 안녕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경우 집회 또는 다중(多衆)의 운동 혹은 군집(群集)을 제한, 금지 또는 해산할 수 있다 △정치적으로 불온한 행동을 할 우려가 있는 자에 대해 그 거주지에서의 퇴거를 명할 수 있고, 동시에 특정 장소에 일정 기간 출입을 금지시킬 수 있다.
더 악독한 것은 처벌조항이다. 정치에 관하여 불온한 말이나 행동을 하고, 타인을 선동 또는 교사하고 치안을 방해하는 자에 대해서는 태형 50대 이상, 또는 10개월 이하의 금고, 2년 이하의 징역에 처할 수 있게 했다. 근대 사법제도를 도입한다는 명분으로 강제한 법에 태형이라는 전 근대적 처벌조항을 둔 것은 조선을 야만시한 행위다.
일제의 강압으로 만든 근대 법률 제1호가 조선인의 말을 틀어막는 신문지법이고, 법률 제2호가 사상의 자유를 옥죄는 보안법이다. 사실 언론의 자유(freedom of press)는 말할 자유(freedom of speech)에서 비롯된 것이며 말할 자유는 사상의 자유(freedom of thought)를 바탕으로 한다.
조선인의 말과 사상을 틀어막는 두 법이 필요했던 것은 조선병탄을 위해서였고, 일제는 이 법을 통해 매우 효율적으로 항일언론과 애국계몽운동, 의병활동을 탄압할 수 있었다. 이 보안법으로 대한자강회와 동우회 등 민족단체들이 해산되고, 많은 의병과 만세운동 가담자들이 억울하게 수감되거나 죽음을 당했다. 결국 일제는 1910년 조선병탄이라는 소기의 목적을 이뤄냈다. 일제는 1925년 치안유지법을 제정했다. 이 법은 일본 제국주의의 바탕인 일왕제에 대한 도전, 즉 국체를 수호하기 위한 법이다. 1917년 황제 차르가 무너지는 소련을 봤기 때문이다. 이 법은 일본공산당과 조선공산당은 물론 무고한 조선의 독립운동을 탄압하는데 활용됐다. 흔히 현재 국가보안법 기원을 이 법으로 삼는 사람이 있는데 구태여 이념이 짙게 개입된 이 법을 기원으로 삼을 필요가 있는가. 그보다 훨씬 앞서고 부담없이 전 국민의 호응을 받을 수 있는 보안법이 있는데 말이다.
일제는 한편으로 기성 언론을 통제하고 순치시켰다. 민족문제연구소가 지난 8월 ‘조선 동아 100년’을 기해 조선일보 방응모 사장과 동아일보 백관수 사장이 1937년 일제 경무국장 앞으로 쓴 서약서 ‘언문신문 지면쇄신요항’을 발굴 공개했다. 좀 길더라도 서약서 전문을 공개할 필요가 있다.

 

1. 황실기사는 정중히 지면 상단 중요한 장소에 오탈자 없이 할 것.
2. 황실 및 국가, 군기, 신사 등을 존중하고 국체명징, 국위선양, 연중행사 의식은 정중히 취급하고 크게 보도할 것. 가급적 그 사진을 실을 것.
3. 황실 및 국가적 경사에 대해 회사도 자발적 축하의 뜻을 보낼 것.
4. 외국 전보 등으로 제국의 불리를 보도하지 말 것.
5. 총독, 총감 기타 내외지의 현관귀빈의 동정은 성의를 가지고 보도할 것.
6. 총독의 유고, 관청의 발표사항 및 지사회의, 중추원회의 등 중요한 관청 회의는 빠짐없이 보도할 것.
7. 당국의 시정시설에 대해서는 민족적 편견을 제거하여 국가적 관점에서 보도하고 비판은 공명정대를 기할 것.
8. 사회주의자, 민족주의자 범죄에 관한 기사 및 국외 불령운동 기사를 과대하게 취급하거나 호의적 명칭을 쓰거나 상휼적 문자를 쓰지 말 것.
9. 소련의 선전적 통신을 호의적으로 등재하지 말 것.

10. 주의적 색채가 있는 논문, 소설 등을 배격할 것.
11. 농촌진흥, 자력갱생 등의 운동 및 이민노동자 알선 등의 사업을 성원하고 격려 고무하도록 노력할 것.
12. 천재사변 때는 관청의 구제 사업을 성원하고 결코 민심을 혹란하여 민중의기를 키우는 일이 없도록 할 것.
13. 함부로 조선민족의 궁핍을 곡설하고 민중생활의 비참한 상황을 나열하지 말 것.
14. 노동 소작 기타 쟁의에 관한 기사는 사안을 연구하여 공평한 보도를 하고 격화시키지 말 것.
15. 조선의 역사적 인물, 산악, 고분 등에 관한 기사나 기타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배일사상을 고조할 우려가 있는 것은 게재하지 말 것.
16. 내선인 간 충돌 기사는 취급을 신중히 하고 민족적 대립으로 나가지 않도록 할 것.
17. 존황정신을 취지로 대일본제국의 신문으로 임무를 다하도록 노력할 것.
18. 반국가적 또는 공산주의, 민족주의적 언론보도를 하지 말 것.

 

1980년대 전두환 정권의 보도지침을 능가할 정도로 꼼꼼하고, 조항 하나하나가 굴욕적 통제가 아닐 수 없다. 특히 조선 독립을 위한 민족주의자 혹은 사회주의자의 활동은 물론, 독립정신을 고양할 그 어떤 작은 싹도 용납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가득 담겨있다. 일제는 조선인이 말하고 생각할 수 있는 자유를 애당초 용납하지 않고, 독립운동 계열과 사회주의 계열을 이간시키는 작업에 언론을 활용했다.
1932년 윤봉길 의사의 의거를 ‘흉행’이라 보도한 조선일보의 보도태도를 보면 알 수 있다. 조선일보는 “소비에트 로서아의 명령에 따라 하르빈에서 적화운동을 하고 있는 사람”이라며 “적색테러 계획을 진행시켜 윤봉길로 하여금 이런 흉행을 하게 한 것”이라 보도했다. (조선일보 1932년 5월 8일자)
윤봉길 의거는 민족주의 임정세력(백범)에 의해 이뤄진 것은 당시 알 만한 사람은 다 알았다. 그래서 임정이 상해를 떠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윤봉길 의거가 러시아, 즉 사회주의 세력의 지시를 받았다고 쓴 것은 민족세력과 사회주의 세력을 이간질시키는 보도라고 할수 있다.
이것은 이른바 ‘빨갱이’ 논란으로 상징된다. 흔히 빨갱이의 기원을 비정규 무장세력인 파르티잔(partisan)에서 연유한 것으로 보아 해방, 즉 분단 이후로 판단하는 사람이 많다.(김득중, 빨갱이의 탄생, 2009) 하지만 필자는 이 견해에 동의하지 않는다. 앞서 보안법의 기원과, 조선총독부의 언문신문 지면쇄신요항에서 보듯이 일제는 사상과 이념통제를 조선병탄 수단으로 활용했다. 특히 1917년 러시아 혁명에서 적색은 깃발과 노래 등으로 사회주의 혹은 공산주의 상징색이 됐다. 일본에서 공산주의자를 붉은 색의 아카(赤)로 불렀다. 

 


일제의 강압으로 만든 근대 법률 제1호가 조선인의 말을 틀어막는 신문지법이고, 법률 제2호가 사
상의 자유를 옥죄는 보안법이다. 사실 언론의 자유(freedom of press)는 말할 자유(freedom of
speech)에서 비롯된 것이며 말할 자유는 사상의 자유(freedom of thought)를 바탕으로 한다.


 

일본은 일왕제를 수호하기 위해 1925년 치안유지법을 만들었고, 조선독립 세력을 이간질하는 수단으로 빨갱이를 사용했다.
우리 사회주의 독립운동가들도 붉은 색 종이에 소련의 <코뮤니스트>를 인쇄해 전국에 뿌렸다. 1932년 김단야를 비롯해 김형선, 김명시, 김찬 등은 5월 1일 ‘붉은 5·1절’(노동절)을 기해 붉은 색(혹은 푸른 색) 종이에 ‘일본 제국주의를 타도하라’ ‘조선의 절대적 노동자 농민의 정부를 수립하라’ ‘지주의 토지를 몰수해 농민에게 무상으로 분배하라’는 등의 삐라 수천 장을 만들어 뿌렸다. 그 붉은 색 삐라 그 말미에는 ‘조선공산당’이라는 문구를 새긴 것은 물론이다.(원희복, <한·중 항일혁명가 부부 김찬·도개손 평전> 2015) 따라서 일제는 독립운동가를 탄압하기 위해 ‘빨갱이’라는 비어를 만들었고, 이는 앞서 언문
신문 지면쇄신 요항에서 그대로 명시돼 있는 것이다. 1942년 이승만의 편지에는 “호놀룰루에서 얼마 전 이곳에 도착한 재미한족연합위원회의 전경무에 따르면 그(한길수)의 조직은 50명이 못되는 한국 ‘빨갱이’ 이상은 아니라고 합니다”라는 대목이 나온다. 해방 이전에도 보수세력이 공산주의 세력을 빨갱이라 비하했던 것이다.
2020년 문재인 대통령의 3·1절 기념사에서 “일제는 독립군을 ‘비적’으로, 독립운동가를 ‘사상범’으로 몰아 탄압했습니다. 여기서 ‘빨갱이’라는 말도 생겨났습니다. 사상범과 빨갱이는 공산주의자들에게만 적용되지 않습니다.
”라고 말했다. 이에 일부 보수언론은 ‘빨갱이라는 표현은 일제잔재가 아니다’라는 엉뚱한 주장을 했다. 이 역시 일제 잔재다운 보도태도라 할 수 있다. 
문제는 해방 후 당연히 폐기됐어야 할 이 보안법이 그대로 존속한 것이다. 미군정은 일제 강점기 법과 제도를 그대로 수용했다. 1945년 10월 9일 미군정은 법령 제11호를 발표했다. 이 법령 제11호는 일제의 정치범처벌법, 예비검속법 등 7개 법안만 폐지하는 것으로 보안법과 불온 문서 취체령 등 언론과 사상의 자유를 억압하는 일제 잔재는 그대로 존속시키는 조치였던 것이다.(내무부 치안국, <미군정법령집> 1956)이 보안법은 해방 후 진보, 혹은 좌파 언론과 단체를 탄압하는 수단으로 활용된 한 것은 물
론이다. 이런 가운데 제주 4·3, 대구 10·1 사건 등이 발생했으며 결국 남북 분단의 결정적 요인이 되고 말았다.
1948년 8월 15일 정부가 수립되고 모든 법이 새로 만들어지면서 보안법도 국가보안법이라고 이름만 바뀌고 다시 제정됐다. 흔히 국가보안법을 1948년 10월 여순사건을 기화로 제정됐다고 보는 사람이 적지 않다. 이는 이 법의 역사적 실제적 의미를 간과하고 ‘법전적’ 의미만 판 단한 것이다.
이 국가보안법이 제정되는 과정에서 이승만 대통령의 발언을 복기해 보자. 이승만 대통령은 1948년 11월 6일 제97차 국회본회의에 참석해 국가보안법 제정 필요성을 강조하며 “1945년 10월 이후로 친일파에 대해 제일 말 많이 한 것이 공산당 사람인줄 압니다. 군정에서 그들(친일파)을 몰아내고, 경찰에서 그들을 몰아내는 등 열렬히 요구하는 사람이 그 사람(공산당)입니다”라고 주장했다.(국회사무처, 1948 제97호, 802) 친일파 청산을 요구하는 세력은 공산당이라는 엉뚱한 프레임을 만든 것이다. 과거 많이 회자됐던 ‘말 많으면 공산당’이라는 말의 기원이 여기부터 시작된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입 닥치고 가만히 있으라, 그렇지 않으면 빨갱이로 몬다’는 무서운 발상이 바로 친일청산을 두고 벌어진 것이다.
이런 발상은 2013년 3월 13일 박근혜 청와대가 뉴라이트 인사와 오찬 모임에서 그대로 재연됐다. 이날 오찬에서 민족문제연구소가 만든 <백년전쟁>이라는 동영상에 대한 논의가 나왔다.
이인호 아산정책연구원장(후에 KBS이사장에 임명됐음)은 “이런 역사왜곡도 국가안보 차원에서 주의 깊게 봐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친일청산과 역사정의를 세우자는 것이 무슨 국가안보와 관련이 있는가. 이런 발상은 종북몰이를 통해 눈엣가시를 제거하겠다는 과거 이승만의 발상과 일치한다. 이모임 이후 종편 등을 동원한 민족문제연구소에 대한 비난은 현실화됐다. TV조선은 “<백년전쟁>은 김일성 대남 문화공작과 흡사하다”고 매도했다. 정확히 일제 잔재의 반복이고, 이승만적 발상이었다.
또 하나, 국가보안법을 제정한 제헌국회 국회법사위원장이 바로 백관수 전 동아일보 사장이다. 그는 1937년 앞서 언급한 일제 경무국장 앞으로 ‘언문신문 지면쇄신요항’이라는 굴욕적인 서약서를 쓴 당사자다. 이후 국가보안법은 정적(진보당 당수 조봉암)을 제거하는 수단으로, 군사 쿠데타의 정당성을 미국에 인정받으려(민족일보 조용수 사장 법살), 장기 집권을 위한 정치 분위기 조성용(인혁당 사건 등), 조직과 개인의 승진용 등으로 활용됐다. 이 과정에서 무수히 많은 사람이 억울하게 희생된 것은 이미 많은 과거사 사건 재심을 통해 확인됐다.
결론적으로 국가보안법의 기원은 분단이나 이념 문제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일제의 조선 침략을 위한 수단으로 활용된 일제 잔재일 뿐이다. 이를 정통성이 약한 권위주의 정권이 정치적으로 변질해 활용한 것일 뿐이다.
일제가 조선의 독립정신을 말살하고, 독립운동 세력을 이간시키려 만든 보안법이 지금 분단상황에 여전히 위력을 발휘하고 있다. 국가보안법은 같은 민족끼리 서로 알지도, 만나지도 못하게 하고 오히려 증오하게 만드는 반통일의 핵심 악법으로 작용하고 있다. 국가보안법 청산은 이념이나 분단의 문제가 아닌, 친일청산 작업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수, 2020/12/30-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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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원회원마당]

줏대있는 중립이 우리의 몫이다

조회환 한국외대 명예교수(4월혁명회 회원)

 

 

이 땅 한반도에서 오천년 역사를 일궈온 우리민족은 당연히 한반도의 토박이고 주인이다. 우리의 무사안일과 외세의 침탈로 인하여 식민지나 분단이라는 쓰디쓴 역사도 있지만, 오늘의 북한 땅이나 남한 땅 모두 한 덩어리의 삶의 터전이었던 것이다. 갖은 곡절 끝에 지금은 미국과 중국 두 초강대국의 눈치를 보아야 하는 입장이 되었다. 내 땅에 살면서 남의 눈치를 보아야 하는 태도는 타파해야 하며 그 책임은 우리자신에게 있다. 우리는 이제 당당하게 주권을 찾아야 한다.
첫째, 우리 국민, 우리 민족의 주체성 확립이 선결조건이다. ‘근본이 서야 길이 생긴다’(本立道生)는 옛 성인의 말씀을 빌릴 필요가 없이, 우리가 피동적으로 남에게 끌려가거나 의탁하지 않고, 줏대 있게 사는 것은 우리의 당당한 고유권한이다. 우리는 지금 경제적으로나 군사적으로나 세계 10위 이내 강국 내지 중견국의 지위에 있다. 자생 자립 자위에 필요할 정도의 물질적 실력을 갖추고 있다. 여기에 정신적으로 다시금 ‘3.1 독립혁명정신’이나 ‘사월혁명정신’을 발휘하면 확실히 ‘자기확립’이 되는 것이다. 주인다운 주인이 되려면 타자의 간섭이나 강요는 배격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초강대국 사이에 끼어서 상대적으로 약소함을 비관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 대국들이 우리를 서로 ‘자기 편’ 또는 ‘자기와 유대관계 유지’를 바라고 있는 것은 우리의 위치가 그만큼 중요하다는 인식의 반영임으로, 우리의 지혜 있는 대처가 ‘중요도’의 수준을 결정할 것이다.
둘째, 한반도가 강대국들의 전쟁터가 되는 것을 막아야 한다. 강대국들이 자기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싸우고 말고는 우리와 상관없다. ‘투키디데스 함정’(Thucydides Trap)설에 의하면 기존 강대국과 새로 부상하는 강대국은 전쟁으로 승부를 겨루는 경우가 ‘많다’는 설인데, ‘꼭 싸운다’는 말은 아니어서 다행이다. 그런데 요즈음 미국과 중국 간의 갈등이 예사롭지 않다. 우리는 긴장이 된다. 그 이유는 ① 우리가 미국의 ‘동맹국’이기 때문에, 미중 간에 전쟁이 일어난다면, 우리가 동맹관계를 파기하지 않는 한, 자동적으로 미국과 함께 총을 들어야 하고, ② 내 땅에 주둔한 미군과 미군기지는 유사시 중국 측의 일차적인 타격 표적이 되어 미군도 다수 희생되겠지만, 우리의 인명과 땅 그리고 재산의 손실은 가공할 수준일 것이므로 우리도 마땅히 반격하게 되어 중국과는 중첩적으로 적이 되는 것이다. 이웃사촌과의 불화는 없어야 하는 것이다. 두 강대국이 자기들의 생존을 위하여, 서로 상대방의 본토 공격은 두려워서 전면전은 피하겠지만 주변지역, 특히 한반도와 그 주변에서 국지전의 위험은 있다. 왜 남들이 자기 땅은 놓
아두고 내 땅에서 싸우는가? 우리는 당연히 ‘반대’ 또는 ‘동조거부’ 자세를 취해야 하며 그러면 외세는 다른 편법을 찾거나 평화의 길로 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셋째, 국제평화를 위해 우리가 중심을 잡자. 더러는 한미동맹만 굳건하면 미국의 위세 때문에 ‘무사태평’할 것으로 착각하고 말끝마다 ‘ 굳건한 한미동맹을 바탕으로’ 라는 말만 앞세운다. 외세의존이 생리화된 심상의 노출이다. 그러나 미국은 우리가 영원히 의탁하기엔 ‘남이라는 한계’가 있고, 또 미국도 이미 중국 러시아와 더불어 3대 군사강대국중 하나일 뿐이다. 미국과 중국의 무력에는 분명 차이가 있다. 그렇지만 비교의 기준은 여러 가지 측면이 있다. 대칭적으로 비교하면, 핵무기의 경우 미국이 6천개 중국이 4백 개 정도라니 15대 1이다. 그러나 차이에도 불구하고 파괴력의 무섭기는 똑같아서 비교가 무의미하다. 또 비대칭적으로 보면 여섯 배나 많은 미국의 항공모함 수는 중국의 뚱펑-21, 26 등 ‘항공모함 킬러’ 앞에서는 이미 한물 간 무기라고 중국은 주장한다. 어떻든 전쟁은 서로 무서울 수밖에 없다. 설령 미국이 다소 비교우위에 있다 하더라도 전세는 불리할 수밖에 없다. 중국 격언에 “아무리 강한 용이라도
현지 토박이 왕뱀을 제압하기는 어렵다”고 했다. 미국은 원거리 원정이라는 공간적 불리함 때문이다. 월남전 등에서 미국이 패한 것은 약해서가 아니지 않는가? 이제는 우리가 중심국이 되어 전쟁은 말리자는 것이다. 사실 과거 열강들은 식민지화를 당연시해왔고 현지 민간인 대량학살이나 노예화는 다반사가 아니었던가 ! 이제 우리나라는 중견국이 되었고 또 국민의 결기도 대단하지 않은가! 우리가 일어서는 한 어느 나라도 단독으로는 우리의 운명을 좌우할 수 없는 위치이다. 우리의 자력 덕분이기도 하지만 강대국들의 ‘경계적 관심’도 그렇게 만든다. 그래서 중심만 잘 잡고 중지를 모으면 더욱 확실하게 ‘세계의 중심국’까지 될 수 있는 것이다. 이제부턴 세계의 스포트라이트(the Spotlight)를 받아가며 강대국들의 헤게모니 쟁탈행위를 막고 평화공존의 길로 가도록 견인할 책무와 능력이 우리에게 있는 것이다.
넷째, 이제 강대국들에게 ‘잘못된 과거사’의 해결을 촉구하자 한반도의 분단은 미국의 제안과 러시아(당시 소련)의 동의에 의하여 결정된 것이다. 원래 분할한다면 패전국이자 전범국인 일본을 분할 점령하는 것이 관례인데 이상하게도 우리 땅 남과 북을 분할 점령하였으니 미소 양국이 애당초 잘못했던 것이다. 북한의 남침을 개탄하지만, 분단되지 않았다면 남침은 없었을 것이다. 러시아군은 일찍 철군했지만 그 대신 인접한 중국이 한국전에 개입했고, 미군은 한국의 ‘동맹국’이라는 새로운 지위로 인해 한국주둔을 계속하고 있다. ‘안보’라는 이유로 ‘어떤 조건’ 동안 ‘장기 주둔’을 이해할 수 있으나 ‘너무 장기주둔’을
‘허용’하거나 ‘면죄부’를 줄 수는 없는 것이다. 사실 분단의 폐단은 ‘통째 점령’ 보다 결코 더 나아진 것도 아니었다. 일제 때는 맨 북쪽의 함경도와 평안도민부터 맨 남쪽의 전라 경상 제주도민까지 알게 모르게 한마음 한뜻으로 단결하여 서로 사랑하면서 국내외에서의 의병전투나 독립투쟁 등 대일항전을 하던 국민일체감이 살아있었다. 지금은 남북 동포간의 적대관계라는 ‘민족 내부의 불행’과 ‘외세에 대한 부담’이라는 2중의 장애에 직면해있다. ‘분할통치’(divide and rule), 그것은 제법 식자연할 용어이지만 제국주의 시대의 유산인 ‘간악한 이간질’이며, 이간시킨 자는 손쉽게 ‘이간당한 자들’을 조종하니 우리의 비극은, ‘외세의존’에 타성(惰性)화된 자기망실 상태에 있으며 이대로 가면 거의 ‘영구적’으로 지배당할 수도 있는 것이다. ‘묶은 자라야 (묶인 자를) 풀 수 있다’(結者解之)는 말은 지당한 얘기이다. 묶은 자가 풀어 주지 않는다면, 풀어줄 만한 제3자라도 있어야 하는데, 있기도 쉽지 않고, 있다 해도 ‘묶인 자’의 요청과 ‘묶은 자들’의 협조가 있어야 한다. 그러니 이제부터는 묶은 자들을 향해서 풀어달라는 요구를 끝까지 관철하는 것이 관건(關鍵)이다. 국제정치에서는 ‘힘이 곧 정의’라는 악담이 난무하지만 ‘정의’가 꼭 없는 것도 아니고, 만약 없다면 있게 해야 되는 것이기도 하다. 지금 미국주도의 평화체제(Pax Americana)가 오래이다 보니 결함도 많았다. 그러나 이 체제의 핵심도 원래는 ‘평화’가 먼저이고 ‘주도권’ (hegemony)은 그 다음이다. 그 점도 미국에게 일깨워주어야 한다. 상생하는 해결책을 제시하는 것이 중심국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책무이다. 동시에 “단계적인 평화통일”이건 “연방제 평화통일”이건
남북은 자주적으로 허심탄회 얘기하여 통일된 나라를 후손에게 물려주어야 한다. 통일의욕을 상실하고 분단생활에 안주하여 나몰라하면 점점 더 잘게 분열하고 콩가루가 되어 결국은 남의 손쉬운 먹이가 되지 않겠는가. 이제 우리는 통일을 이루어 더욱 확실하게 줏대있는 중심국이 됨은 물론이고, 더 나아가 국제평화도 주도해야 될 것이다.

수, 2020/12/30- 2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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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

효창독립커피 4탄 김창숙 커피, 5탄 지청천 커피 출시

 

연구소는 일상 속에서 독립운동가를 기억하고자 효창독립커피를 기획하여 4월 차리석 커피를 시작으로 이상룡, 권기옥 커피에 이어 12월 24일부터 김창숙 커피와 지청천 커피를 선보인다. 김창숙 커피의 디자인은 국외 독립운동유적지를 찾아 알리고 있는 사진작가 김동우 회원이 성균관대 인문사회과학캠퍼스 안에 있는 김창숙 선생 동상을 촬영했으며 한글 글씨는 이진경 작가가 써주었다. 지청천 커피의 디자인은 이윤엽 판화가가 제작했다. 효창독립커피 구입은 hyochangmall.com(효창몰)에서 가능하다.

수, 2020/12/30- 1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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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노래로 만인보(萬人譜)를 엮어내다
– 가수 이지상을 만나다(1)

인터뷰 김종욱 기획위원

 

찌뿌드드한 하늘, 새벽부터 미세먼지가 잔뜩 끼어 하루종일 해를 볼 수 없었던 날, 가수 이지상 씨를 만났다. 역촌동에 자리한 그의 작업실. 흔히 예술인의 작업공간이라면 너저분하게 흐트러진, 살짝 지저분함을 상상했겠지만 뜻밖에 그의 사무실은 너무나도 깨끗했다. 이런 걸 상상하진 못했는데……. 암튼 깔끔한 그의 사무실에서 인터뷰를 진행했다. 그를 처음 본 건 28년 전인 1992년 그가 마지막 학생이던 시절이었다. 경희대학교 노천극장에서 통기타 하나를 어깨에 메고 정오차의 ‘바윗돌’을 부르던 모습이었는데, 그게 여전히 기억에 남아 있는 걸 보면 당시의 모습이 상당히 인상적이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첫 질문은 그의 가수생활에 대한 것으로 시작했다.

미세먼지가 자욱했던 날, 은평구 역촌동의 이지상 씨 사무실에서 인터뷰를 진행했다.

 

● 언제부터 노래를 시작하셨나요?

● 군대를 다녀오고 1989년에 국문과 노래패를 만들었어요. ‘궁상각치우’라는 이름의 노래패를 만들어 활동하면서부터일 겁니다. 노래패를 만들어 활동했는데, 그 활동이 잘 되니까 옆 과들도 노래패들을 만들기 시작했죠. 또 당시 단과대 학생회의 제안으로 단과대 차원으로 과노래패협의회(과노협)가 만들어지는 계기가 되었어요. 그게 모태가 되어서 ‘장작불’이란 단과대 노래패도 만들게 되었어요.

말 그대로 계통을 제대로 밟아가며 노래패를 만들고 조직화했던 모양이다. 그 당시는 학생회 활동, 학생운동이 융성하던 시절이었으니 가늠이 되었다. 이야기를 이어갔다.

● 어떤 계기로 그런 활동을 했나요?
● 따로 계기가 있었던 건 아니고, 과 노래패 ‘궁상각치우’를 만들었는데, 기타 칠 사람이 없다고 해서 기타 반주를 해 줬어요. 그러다가 노래패 회장을 하게 되었고, 과노협 회장도 하고, 단과대 노래패 패장도 했죠. 그리고 1991년도에는 ‘전대협 노래단’을 만들었고, 1992년 전대협 노래단 준비위원회가 ‘조국과 청춘’이란 노래패로 발전을 하게 되면서 거기서도 활동을 하게 되었습니다.

1998년 발매된 이지상 씨의 1집 앨범. ‘사람이 사는 마을’. ‘사이판에 가면’, ‘철길’, ‘방황’ 등 서정적이면서도 가사를 음미하며 들을 수 있는 좋은 곡들로 가득한 앨범이다.

 

그는 얼떨결에 노래패를 만들게 되었고, 그러다보니 음악활동을 하게 되었다고 멋쩍은 듯 이야기했지만, 그의 활동 이력을 보면 그 당시 학생운동 차원의 노래운동, 문예패 운동의 중심에 그가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는 답이다. 이후 그는 ‘노래마을’ 활동도 잠시 했는데, 주로 작곡과 세션을 담당했다고 한다. 그리고는 주로 작곡에 전념하게 되는데, 그의 표현을 빌자면 가수들이 자신을 찾지 않았다고……. 그래서 직접 자신의 곡을 알릴 겸 불러줄 가수를 찾을 겸 하여 본인이 직접 노래를 부르게 되었단다. 그 작업의 결실로 그의 첫 앨범 <사람이 사는 마을>이 나오게 되었다. 본격적으로 그의 가수활동, 음반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갔다.

 

● 현재까지 총 여섯 장의 앨범을 발매하셨는데요. 혹시 지금까지 곡을 만들면서 특별히 기억에 남는 노래가 있거나, 만들 당시 너무 힘들게 만들어서 생각나는 곡이 있을까요?

● 그거야 다 힘들고, 다 기억에 남죠. 어디 쉬운 것이 있었을 라고요? 생각해 보세요. 열 손가락 깨물어서 안 아픈 손가락이 있겠어요?

사실 서로 알고 지낸 지 20여 년이 훌쩍 넘은 상황에 그가 그동안 발매한 앨범이 언제 나왔는지 훤히 알고 있는 필자의 질문이나 열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 있겠느냐는 화자의 답변이나 너무나도 틀에 박힌 질문과 답이었다.
그러나 이 인터뷰는 그를 잘 모르는 연구소 회원들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다. 그러니 식상하지만 서로 처음 만난 사이인양 꾸며서 대화를 이어 나가야만 했다. 글 읽으시는 분들의 너른 양해를 구하는 바이다.

● 지금까지 발매된 앨범들을 살펴보면 역사적으로 의미 있는, 혹은 사실에 기반을 둔 사람에 대한 이야기가 많던데요. 그에 대한 특별한 이유라도 있나요?
● 글쎄……. 노래라는 것에 담길 것이 사람 말고 또 다른 게 있나요?
● 풍경이라던가, 아니면 가장 흔한 것이 사랑 이야기 아닌가요?
● 그렇긴 하지요. 그래도 사람의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거잖아요. 나는 백인보(百人譜)라고 해야 하나? 이를테면 백 사람 쯤 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곡으로 만들어 기록해 보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곡을 만들고 노래를 부르고 있어요. 내 노래 중에 ‘반성의 좌표’는 김남식 선생(통일운동가 김남식 선생 아닙니다. 다음 편에 자세한 이야기가 실릴 예정입니다), ‘사이판에 가면’은 일본군 성노예, 위안부 할머니들 이야기, ‘살아남은 자의 슬픔’은 항일 독립군 이우석……. 다 그런 기조에서 만들어진 노래들이죠. 내가 만나는 사람들 중에 특별히 잘난 사람이 없잖아요?(웃음) 그런 사람들 중에 기억에 남는 사람들을 기록하는 게 내 일이 아닐까 생각하면서 작업하고 있어요.
● 그러네요. ‘보산리 그 겨울’이란 곡은 윤금이 씨를 생각하며 만드신 곡이죠?
● 예. ‘지친 날개를 접고’는 배달호 열사를 생각하며 만든 곡이고, ‘김득구’는 제목 그대로 권투선수 김득구를 생각하면서 만든 곡이고……. 그래서 내가 만든 곡들 중에 추모곡이 많아요

 

노래 테이프가 판매되던 시절, 집회나 행사 등에서 판매되던 지금은 아련한 기억으로 남아있는 노래패들의 이름들을 되뇌었고, 소중히 보관하던 노래 테이프들이 사라지게 된 사연까지 시간여행 하듯 옛이야기를 서로 주고받으며 잡담을 나누던 중 이지상 씨에게 전화가 와서 약 5분간 인터뷰가 중단되기도 했다.

 

● 최근에 6집 앨범을 발매하셨어요. 아직 전체적으로 다 들어보진 못하고 대표적으로 들어본 것 중에 ‘기차는 그 새벽을 떠났다’를 들었는데요. 그 곡을 들으면 러시아 민요 같은 분위기라 느꼈고, 다수의 독립 운동가들이 등장하던데요
● 그냥 흉내만 낸 거죠. 분위기만…….
● 그렇다면 6집 앨범의 전체적인 콘셉트가 따로 있나요?
● 콘셉트니 이런 건 없고요. 애초에 콘셉트니 목적이니 그런 거 잡고 만든다고 그 목적을 다 이루고 그러나요? 나는 지금까지 무슨 목적이니 하는 걸 정하고 앨범을 만든 적이 없어요. 오늘 하루하루가 중요하지.

이지상 씨의 사무실 한편에 놓여있는 앨범과 책들. 그 중 가장 최근에 발매된 그의 6집 앨범 <나의 늙은 애인아>가 눈에 띄었다.

 

● 그래도 앨범에 곡을 배치하고 담을 때는 무언가 제작자의 의도나 목적, 담고 싶은 무언가가 있잖아요?
● 음. 그런 걸 콘셉트라고 하면 그런 건 있죠. 하지만 가끔은 신나기도 하고, 어떨 때는 의미도 있고 그런 거죠. 이번에는 제가 시베리아를 여러 번 다녀왔으니까 시베리아 이야기가 많이 담겼죠. 내 활동의 반영인 거죠.
● 그동안 시베리아 횡단열차 타고 다녀오셨던 것 말씀하시는 거죠?
● 그렇죠. ‘보드카’라는 곡도 있고요. 그런 게 콘셉트라면 콤셉트고, 그런 것들을 담은 음반이죠.
● 그동안 ‘희망래일’이라는 단체 활동을 하면서 대륙횡단열차 타고 시베리아를 다녀오신 활동의 결산이라고 생각하면 되겠네요?
● 그렇죠. 그런 활동의 정리라고 할 수 있죠. 우리가 대륙을 꿈꾸면서 이야기할 수 있는 건 자주적인 통일? 이런 것까지 꿈 꿔야 한다는 생각으로 마지막 곡으로 ‘새의 날개는 누가 대신 달아주지 않는다’ 이런 곡도 넣고 그런 거죠.
● 아! 말씀 듣고 보니까 작년에 책을 새로 한 권 출간하셨잖아요? 『여행자를 위한 에세이 北』 이었던가요? 이 앨범 내신 것과 일맥상통하는 게 있나요?
● 그것과는 좀 거리가 있어요. 2018년에 4.27 판문점 선언 이후에 북에 대해 제대로 알아야겠다는 북한바로알기 붐이 일었잖아요? 기획 글을 담아보자는 차원에서 출판사의 제안이 들어와서 내가 글을 쓰기로 했어요. 그런데 우리들이 북에 대해서 잘 모르잖아요? 그래서 찾아보니 현재 대부분 나와 있는 자료들이 대북사업을 했던 사람들의 이야기나 탈북자들의 증언들이 대부분인 거예요. 이런 분들 만나서 인터뷰하고 그걸 정리해서 글을 쓰는 게 맞나? 싶은 의구심이 들었죠.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아니다 싶어서 공부하고 찾아서 내가 글을 쓰겠다고 해서 궁금한 것들, 또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알고 싶은 것들을 찾아서 쓴 거죠.

2019년 9월에 출간된 이지상 씨의 책 『여행자를 위한 에세이 北』. 그는 이 책에 대해 북과의 평화를 원한다면, 대화하고자 한다면 먼저 현재 서로가 겨누고 있는 총을 내려놓고, 자유롭게 만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30여 년 전, 한창 ‘북한 바로알기 운동’ 차원으로 <사람이 살고 있었네>, <더디 가도 사람 생각하지요> 등의 책들이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많이 읽히던 시절이 있었다. 당시엔 북에 대한 정보가 거의 전무한 상태라 북에 직접 다녀 온 이들의 책들이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켰고, 이는 당시 들불처럼 번졌던 대학생들의 통일운동의 한 방편으로 유용하게 사용되었다. 하지만 지금은 탈북한 이들이 주로 종편 채널에 출연해서 이야기하는 단편적이면서 왜곡된 이야기들과 심지어 북을 탈출해 온 북의 고위관료가 국회의원 배지를 달고 공공연하게 떠드는 이 역시 검증되지 않은 이야기들을 통해 그것이 진실인양 북에 대한 정보를 접하는 시대가 되었다. 필자는 북에 대해 긍정적인 면만을 부각시키는 시각과 또 한편으로 부정적인 면만을 부각시키려는 시각, 이 둘 사이의 편향을 걷어내고 조금은 객관적 입장에서 북을 바라봐야 하고, 있는 그대로의 북을 조망할 수 있을 때 좀 더 합리적이고 많은 이가 동의할 수 있는 대화의 장이, 통일이 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될 수 있겠다 싶은 생각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그에게 그런 요지의 질문을 던졌는데, 그의 답은 조금 달랐다.

● 나는 객관적인 시각이니, 균형 잡힌 시각이니 하는 말을 믿지 않아요. 어떻게 사람이 객관적인 시각으로 상대방을, 피조물을 설명할 수 있죠? 그런 건 다 거짓이에요. 어떻게 인간이 균형을 잡으면서 객관적으로 살 수 있겠어요? 이 넓디넓은 지구에서 두 발로 서 있는 것도 버거울 지경인데, 무슨 재주로…….내가 아무리 객관적이라고 주장한다고 해도 그게 대중들에게도 객관적이라고 말할 수 있나? 난 그런 자신은 없어요. 우리가 평화를 지향한다고 하면, 또 북을 통일을 할 대상으로 생각한다면 먼저 맞대고 있는 총을 치워야 할 것 아녜요? 그리고 이야기할 때 차라도 한잔 마시면서 이야기도 해야죠. 그러려면 서로 우호적인 관계여야 가능한 거죠.
그런데 이렇게 이야기하면 다른 쪽에서는 속칭해서 ‘북한을 칭찬한다.’ ‘시각이 편향적이다’고 지적해요. 하지만 내 생각엔 그렇게 이야기하는 건 평화하지 말자는 거라고 보이거든요. 전 세계 어디를 가 봐도 우리나라 분단선처럼 살벌한 데가 없다고 생각해요. 민통선 지역 양쪽으로 지뢰가 수없이 매장되어 있고……. 원래 편하고 친한 관계라면 그렇게 국경선이 살벌한 풍경이면 안 되는 거거든요. 평화를 하자면 친해져야 하는 거예요. 친하지는 않더라도 최소한 서로 욕은 하지 말아야지. 그 책은 그런 취지의 책이에요. 나름 재미있는 구절이 꽤 많은 책이에요.(웃음)

 

듣고 보니 맞는 말이다. 인간이란 동물이 어떻게 자기 주관을 거두고 완벽한 객관의 입장에서 사람과 사물을 판단하고 그에 대해 평론할 수 있을까? 소위 객관적이라는 말로, 균형 잡힌 시각이란 말로 자신의 입장과 소신을 밝히는 이들이 있다. 하지만 그가 신이 아닌 다음에야, 또 감정이 배제된 AI가 아닌 다음에야 어떻게 사람이 그런 입장을 취할 수 있을 것인가? 점점 그의 이야기에 빠져 들며 이야기를 이어갔다.(다음호에 계속)

수, 2020/12/30- 2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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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축년(辛丑年) 새해 민족문제연구소를 위해 애쓰시는 회원 여러분과 임직원들에게 축복을 기원하며 코로나19로 고생하시는 우리 사회공동체 구성원 모든 분들에게 기쁨과 희망의 해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소는 우직하고, 성실하며, 깊은 인내심을 상징합니다. 특히 하얀 소는 신성하여 상서로운 일
이 많이 생기는 해라고 합니다. 우리나라와 연구소에 즐거움과 행복이 가득한 한 해가 되기를 바라며 거듭 축복의 인사를 드립니다.
새해는 임종국 선생의 유지를 이은 우리 연구소가 창립 30주년을 맞습니다. 선생께서는 1965년 한일국교 정상화를 보면서 ‘세계만방이 한집이다. ’는 팔굉일우(八紘一宇)의 황국사관(皇國史觀)을 우려하며 <친일문학론>을 펴내셨고 이후 친일파의 실체를 밝히고 친일잔재 청산을 위해 헌신하셨습니다. 선생께서 유명을 달리하신 후 후학들이 선생의 뜻과 정신을 이어가기를 다짐하고 ‘반민족문제연구소’를 설립하였고 1995년 ‘민족문제연구소’로 이름을 바꾸어 30주년이 되었습니다. 1945년 8월 15일, 도둑처럼 찾아왔던 해방의 기쁨은 단 하루뿐이었다는 역설을 우리는 아픈 마음으로 되새기곤 합니다. 선생께서 일제침탈의 잔혹상을 다시 생각하셨던 1965년 당시 한국사회는 ‘친일파’가 득세 했던 시기였습니다. 5·16 군사 반란으로 국가권력을 장악한 군부 핵심이 친일세력이었으며 그 군부는 미군정 이후 국가의 행정, 사법 권력을 장악했던 친일파를 거침없이 호위 세력으로 이용한 때였습니다. 선생께서는 친일의 핵심적인 문제가 ‘정신’ 곧 ‘가치관’, ‘역사관’이라 생각하셨습니다. 친일파의 가장 큰 문제는 일제의 가치관, 역사관에 동화된 정신의 문제입니다. 그들은 일제의 요구에 따라 조선의 백성을 수탈과 억압의 대상으로 삼았고 교화와 개조의 대상으로 생각했습니다. 군부 독재가 가능했던 이유이며 독재의 방식이었습니다.

새해는 해방 76주년, 연구소 창립 30주년입니다. 한국사회는 그 변화를 이루었는지, 그 변혁을 위해 우리 연구소 구성원 모두 선생의 뜻을 실천하며 살고 있는지 다시 생각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먼저 ‘민족’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고 신념을 지녀야 합니다. 우리 연구소가 이 논의의 중심이 되어 일제 잔재 청산을 넘어 남북 8천만 겨레의 미래 기틀을 만드는 초석이 되기를 바랍니다. 
지난 한 해 격렬하게 우리 사회를 달구었던 검찰, 사법, 행정 개혁의 시작이 선생께서 이루려 했던 친일 잔재 청산, 친일파의 역사를 단절하는 계기가 되어야 합니다. 검찰, 사법, 행정 체계와 제도가 일제의 통치방식을 수용했으며 친일파들이 권력을 장악하고 독재의 수단으로 활용했던 제도이기 때문입니다. 단순히 검찰 권력의 약화라는 취지만으로 접근하는 개혁 방식은 지양되어야 합니다. 공동체 구성원들에게 검찰 권력을 포함한 행정, 사법 체계가 어떠한 방식으로 구성되었으며 문제가 무엇인지 진지하게 설명하고 미래 우리 사회공동체를 위해 어떤 제도가 필요하고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지 우리 모두 지혜와 힘을 모아야 할 때입니다.
그 핵심적 가치가 친일잔재 청산이라는 사실을 사회공동체가 함께 확인하고 공감해야 합니다. 새해를 맞으며 우리 연구소 구성원들이 더 큰 열정과 사명감을 가져야 하는 이유입니다. 친일과 독재에 부역한 사람들은 그 시대의 지식인, 권력자, 재산을 가진 자들이었다는 사실을 되새기며 우리 시대 지식인, 권력자, 부자들의 회심을 위해 함께 노력합시다.
새해 남북 8천만 겨레 모두 행복한 삶을 위해 한 마음, 한 뜻으로 서로를 위로하고 격려하는 아름다운 공동체를 상상합니다. 감사합니다.

이사장 함세웅

월, 2021/01/25-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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