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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신소설 작가 이인직(3) – 계몽운동, 아시아연대론, 사회진화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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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신소설 작가 이인직(3) – 계몽운동, 아시아연대론, 사회진화론

익명 (미확인) | 화, 2018/03/27- 16:19

사회진화론과 조선 그리고 이인직

사회와 사회적 결과의 상(上)에 진화론을 응용하야 사회적 단체로서 공구(攻究)의 대상을 삼는 것이 중요한 바니 개(蓋) 차(此) 단체가 개인과 무이(無異)함도 유(有)하나 생존의 수단을 인(因)하야 상호 경쟁함은 개인보다 가장 제(諸) 단체에 재(在)함이라 (중략) 차(此)와 여(如)히 일체의 사회적 제도는 선악의 각 인종을 일 사회적 단체에 결합한 것인데 기 단체는 상적(相滴)한 경쟁자와 경쟁하는 일 단위라. 부(夫) 자연도태의 제법(諸法)은 차 사회적 단체 상(上)에 행(行)하며 차(此) 단체는 사회진화 과정에 중요한 단위라.(이인직, 「사회학 속(續)」, <소년한반도>,190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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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한반도>창간호(1906.11.1)

 

이인직의 신소설은 보았어도 이른바 ‘진화론’에 대해 언급한 글은 대부분 처음 보았을 겁니다. 여기서 이인직이 언급한 진화론은 찰스 다윈(Charles Robert Darwin. 1809-82)의 생물학적 진화론이 아니라 사회진화론(Social Darwinism)입니다. 사회진화론은 흔히 쓰이는 약육강식, 우승열패, 적자생존이라는 말이 여기서 비롯됐다면 이해될 런지요.
19세기 서구에는 다양한 사상들이 난무했습니다. 그러나 종국에는 콩트(Auguste Comte. 1798-1857)의 사회학과 실증주의, 스펜서(Herbert Spencer. 1820-90)를 중심으로 한 사회진화론으로 귀결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특히 사회진화론은 19세기 중반부터 20세기 초까지 서구를 풍미했던 이론입니다. ‘Social Darwinism’ 즉 ‘사회다위니즘’이란 이름에서 다윈의 진화론을 사회적으로 적용한 이론이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이 명칭은 20세기 중반에 19세기의 사상적 흐름을 정리하면서 후세에 붙여진 이름이지 당시에 쓰이던 명칭은 아닙니다. 오히려 사회진화론에 대한 저서는 다윈의 <종의 기원에 대하여(On the Origin of Species>(1859)보다 먼저 출간되었습니다. 사회진화론의 시조인 스펜서는 사회진화론에 대한 최초의 저서 <진보의법칙과원인(Progress: Its Laws and Cause)>를1857년에발표했습니다.물론 사회진화론이 나중에 다윈의 진화론을 흡수한 것은 사실이며 심지어 다윈조차 사회진화론에 영향을 받기도 합니다.
사실 사회진화론은 스펜서 개인의 이론만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당시 다윈의 이론을 흡수하여 사회의 발전을 사회유기체적 관점에서 해석하거나, 자유주의를 강조하여 인간의 경쟁을 장려하는 많은 사상가의 시도를 사회진화론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회진화론은 다윈의 진화론을 상당히 왜곡하고 있습니다. <종의기원에대하여>라는 다윈의 진화론 저서 제목에서도 진화(evolution)라는 말은 등장하지 않을 뿐 아니라 이 책의 본문 속에서도 다윈은 진화(evolution)라는 표현을 쓰지 않았습니다. ‘진화’라는 표현은 진화 이전 보다 ‘우월’해 졌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다윈의 진화론에서의 진화는 우월함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 의미는 생존경쟁(Struggle for Life)에 의한 자연선택(Natural Selection)일 뿐입니다. “더 강하거나 우월해서 살아남은 것”이 아니라 “생존에 적합했기에 살아남은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다윈은 진화(evolution)라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고 ‘변화를 포함한 계승(descent with modification)’이라는 표현을 썼습니다. 더군다나 스펜서의 경우 생물학적 진화론의 관점은 다윈보다 라마르크(LAMARCK, Jean Baptiste Pierre Antoine de Monet, Chevalier de. 1744-1829)에 가깝습니다. 이른바 ‘용불용설(用不用說)’로 대표되는 그의 이론은 ‘획득형질의 유전’ 즉 후천적인 노력으로 획득한 형질이 유전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회진화론은 19세기 서구 사상계를 휩씁니다. 결국 다윈마저도 <종의 기원에 대하여> 제5판에서 ‘진화(evolution)’라는 말을 채택하기에 이릅니다. 애초에스펜서의 사회진화론은 철학과 자연과학의 통합된 이론을 만드는 것과 ‘자유주의’에 대한 옹호를 목적으로 했습니다만, 문제는 당시 제국주의는 이것을 약육강식의 제국주의적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한 이데올로기로 활용한다는 점이며, 사회진화론이 그에 부합했다는 점은 부인하기 힘듭니다.
한중일 3국의 사회진화론의 수용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로는 중국의 량치차오(梁啓超, 1873~1929), 일본의 가토 히로유키(加藤弘之, 1836~1916)와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 1835~1901)를 들 수가 있습니다. 그 중 가토 히로유키와 량치차오는 절대적이었습니다. 한국에서 사회진화론은 1880년대부터 영향을 끼치고 있었습니다. 사회진화론을 아시아에서 가장 처음 받아들인 일본에서는 가토 히로유키가 다윈과 스펜서의 번역서 수준을 넘어서서 사회진화론에 대한 새로운 원리론을 형성해가고 있었습니다. ‘evolution’의 역어로 진보와 개화를 조합한 ‘진화’라는 신조어를 만든 것도 그였습니다. 개화파의 ‘개화자강론’은 국가주의와 제국주의론을 뒷받침하는 구실을 하던 일본 사회진화론의 수용 위에서 만들어졌습니다.
한국에서 사회진화론을 접하고 흡수했던 경우는 유길준처럼 서구 유학을 통해 직접 접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대부분 중국과 일본을 통해 간접적으로 접하는 방식이었습니다. 즉, 중국과 일본에 의해 재가공된 사회진화론이었습니다.
중국과 일본이 사회진화론을 해석하는 방식은 다소 차이가 있습니다. 중국이 방어적인 태도를 취한다면 일본은 다소 공격적인 태도를 가집니다. 이는 사회진화론에 대한 번역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옌푸(嚴復, 1854~1921)와 가토의 번역을 비교하면 ‘evolution’을 각각 ‘천연(天演)’과 ‘진화(進化)’, ‘struggle for existence’을 ‘물경(物競)’과 ‘생존경쟁(生存競爭)’, ‘natural selection’을 ‘천택(天擇)’과 ‘도태(淘汰)’, ‘survival of the fittest’을 ‘택종유량(擇種留良)’과 ‘우승열패(優勝劣敗)’ ‘적자생존(適者生存)’이라 번역합니다. 이외에도 옌푸는 사회복지와 관련된 용어들은 ‘부강’과 관련되는 용어로 번역했습니다. ‘natural selection’(자연선택)을 예로 들면 옌푸는 원 단어의 뜻에 가까운 ‘천택’으로 번역한 반면 가토의 경우 불필요한 것, 부적당한 것이 ‘제거’되고 적합한 것만이 남긴다는 의미의 ‘도태’라는 단어를 선택합니다.
일본의 사회진화론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사회유기체설’입니다. 스펜서의 사회진화론은 사회도 생물 유기체와 마찬가지로 하나의 유기체라고 보았습니다. 이 이론은 스펜서가 비록 ‘자유주의’를 옹호하기 위한 사회진화론을 논리를 전개했음에도 논리적 귀결은 전체주의로 흐를 수밖에 없는 한계를 갖고 있었습니다. 사회유기체설은 사회를 유기적 전체로 파악함으로써 개인을 사회에 종속되는 존재로 인식하는 논리입니다. 그래서 1880년대 일본정부는 ‘천부인권설’에 근거한 자유민권운동에 대항하기 위해 국가의 개인에 대한 우월성을 지향하던 국권신장파 가토를 앞세웠고 결국 관민협조론이 득세하게 됩니다.
일본의 사회진화론 외에도 중국의 사회진화론 또한 국내 지식인에게 흡수되는데 헉슬리(Thomas Henry Huxley. 1825-95)의 <진화와윤리>를번역한옌푸의<천연론(天演論)>(1898)등이 출판과 동시에 한국에 수입되기도 했지만 중국의 사회진화론이 지식인을 비롯한 대중들에게 본격적으로 소개된 것은 량치차오의 글을 통해서입니다. 1899년 <황성신문>과 <독립신문에량치차오의 논설 「애국론(愛國論)」을 시작으로 량치차오 붐이 일어납니다. 그리고 1903년 량치차오의 사회진화론이 담겨있는 <음빙실문집(飮冰室文集)>(1902)을비롯해1914년까지100여개의 글이 번역 소개됩니다. 량치차오의 사회진화론은 ‘약육강식’의 국제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한 ‘자강’과 ‘부국강병’으로 귀결되며 한국의 ‘계몽주의’와 ‘자강론’에도 많은 영향을 미칩니다. 그런데 량치차오 역시 일본에서 망명생활을 하면서 일본 사회진화론의 영향을 받게 되고 종국에 사회진화론과 관련된 용어도 가토가 번역한 용어로 모두 교체하게 됩니다.
다소 장황하게 ‘사회진화론’에 대해 정리한 것은 이인직을 비롯해 당시 지식인들이 혼란된 세계관 속에서 어떤 ‘선택’을 했는지에 대해 정리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서구의 근대 사상과 문물이 밀려들어오고 제국주의 열강의 위협이라는 혼란 속에서 구한말 지식인들이 판단과 선택을 하게 했던 사상적 배경을 짚고 넘어가는 것이 필요했습니다. 이것은 ‘이해’하기 위한 것이지 ‘용서’하기 위한 것은 아닙니다.
이 시기 한국의 지식인들은 사회진화론과 그에 근거한 근대지상주의, 동양평화론, 대동합방론등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고 있었습니다. 대한제국 관비유학생으로 일본 도쿄정치학교에서 공부한 이인직은 일본의 사회진화론에 크게 영향을 받았습니다.

 

연이(然而) 기(其) 발전(發展)하야 일정(一定)의 직능(職能)을 수(遂)하는 소사회(小社會)와 차등(此等) 소사회(小社會)를 포함(包含)하는 대사회(大社會)의 간(間)에는 중요(重要)한 차별(差別)이 유(有)함으로써 (중략) 기(其) 사회(社會)의 골격(骨格)되고 구조(構造)된 자 (者)-니라. 생물학상(生物學上)의 어(語)를 적(籍)하야 말하진디 기(其) 기관(機關)이라 칭 (稱)할만한 자(者)라 (중략) 오인(吾人)은 사회(社會)의 일분자(一分子)이라.(이인직, 「사회」, <소년한반도> 1, 1906)

 

개(盖) 국가(國家)의 대직능(大職能)은 내부(內部)의 규리(睽離)와 외부(外部)의 공격(攻擊)에 대(對)하야 신민(臣民)을 보호(保護)하는 바라. 차(此)와 여(如)히 일체(一切)의 사회적(社會的) 제도(制度) 선악(善惡)의 각종인(各種人)을 일사회적(一社會的) 단체(單體)에 결합(結合)한 것인디 기(其) 단체(團體)는 상적(相適)한 경쟁자(競爭者)와 경쟁(競爭)하는 일단위(一單位)라. 부(夫) 자연도태(自然淘汰)의 제법(諸法)은 차(此) 사회적(社會的) 단체상(團 體上)에 행(行)하며 차(此) 단체(團體)는 사회진화과정(社會進化過程)에 중요(重要)한 단위 (單位)라.(이인직, 「사회학 속」, <소년한반도> 3, 1907)

 

위 글은 ‘사회유기체설’에 정확히 부합하는 내용입니다. 생존경쟁과 그 경쟁에서 도태되는 단위를 국가로 인식하는 것입니다. 이 국가가 치열한 생존경쟁에서 도태되지 않으려면 국가 내의 각 성원들은 그들의 직능을 국가를 위하여 최대한 발휘해야 한다는 논리입니다. 이는 이인직만이 아니라 당시에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진 논리였습니다. 이러한 논리에서는 개인의 권리보다 국가의 이익 혹은 권리가 우선시됩니다. 어쩌면 이 논리는 지금도 반복되고 있습니다. 군사독재시절 국가를 위해 개인의 희생을 강요하는 논리가 그것입니다.

 

이인직과 친일

이인직이 사회진화론을 수용하여 본격적으로 계몽운동에 투신하는 시기는 1906년 귀국 후인 일제의 통감정치 때입니다. 이인직은 당연히 통감정치에 찬성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가토의 사회진화론에 따르면 국가 간에도 생존경쟁에 의해 적자생존의 논리가 적용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일본 사회진화론의 논리 중 한국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것은 다루이 도키치(樽井藤吉 1850-1922)의 <대동합방론(大東合邦論)>(1893)입니다.그 내용은“동양의쇠운을만회하고흥아(興亞)의 대업을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동아(東亞)의 여러 나라가 대동아연맹을 결성해야 한다”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특히 한국과 일본은 대등한 입장에서 합방하여 ‘대동국(大東國)’이라는 나라를 세우고, 중국과는 동맹관계를 맺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이 사상은 이후 일본 군국주의가 태평양전쟁을 일으키는 사상적 기초인 ‘대동아공영권’으로 이어집니다. 즉 ‘대동합방론’은 일본의 아시아 제국(諸國)에 대한 침략을 정당화시키기 위한 도구에 불과했습니다. 이인직은 귀국 전부터 이런 태도를 보였습니다.

 

슬프다. 나라의 세력과 백성의 힘이 쇠미해짐이 이와 같이 심하니 어찌 마음을 놓고 있을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양(洋)을 따지지 말고 우방에게 호소하고 그 감응의 동정을 구하는 것이 실로 목하의 급무일 것이다. 지금 사처(四處)를 돌아봐도 이를 얻을 수 있는 곳은 동양의 문명국 일본밖에 없다 (중략) 원컨대 선진한 일본국 인인군자(仁人君子)는 그 동정을 찬성하여 문명의 모범을 가르쳐주시기를 (「韓國新聞創設趣旨書」, <都新聞>,1903.5.5)

 

방금 서세동점하여 아주일폭(亞洲一幅)은 거의 사분오열에 이르려고 한다. 단 일본은 홀연히 국초(國礎)를 굳게 하여 동양의 우이(牛耳)를 잡고 보차순치(輔車脣齒)의 의(宜)를 인방(隣邦)에게 두텁게 하여, 백년의 장책을 이에 확립하였다.(「夢中放語」, <都新聞>,1901.12.8)

 

이인직이 1906년 2월 친일단체 일진회의 기관지 <국민신보> 주필로간 것은어찌보면당연한 것입니다. 물론 4개월만인 같은 해 6월에 일진회에 대항하기 위해 천도교에서 창간한 민족지 <만세보(萬歲報)>의 주필로 자리를 옮겨 신소설 <혈의누>를 연재하기도 했지만 그가 어떤길을 선택할 것인가에 대답은 이미 나와 있었습니다. 1907년 이완용 내각의 기관지 <대한신문> 사장으로 취임하면서 그는 이완용의 비서역할을 겸하며 일관되게 친일의 길을 걷게 됩니다.
1909년 12월 4일 이완용 내각과 대립하던 일진회 이용구가 합방청원서를 제출하자 이완용 내각은 이인직 등을 동원하여 즉각 조직적 반대운동을 시작했습니다. 이인직은 「국민대연설회」의 연사로 직접 나서기까지 했는데, 그 반대운동은 겉으로는 합방에 반대하는 것이었지만 실상은 일진회에 합방의 주도권을 빼앗기지 않기 위한 반대운동이었습니다. 12월 22일 이완용은 명동에서 이재명의 칼에 찔려 중태에 빠졌지만, 이틀 전인 12월 20일 이인직은 이완용의 밀명으로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의 각 신문, 재일유학생, 대한동지회 등과 교섭해 일진회 반대 여론을 조성하고 이듬해 3월에 귀국합니다.
결국 1910년 8월 4일 일본어를 못하는 이완용을 대신해 통감부 외사국장 고마츠(小松綠)와 합방에 관한 담판을 벌입니다. 이인직은 통감부와 대한제국 내각 간의 연결통로 역할을 했고, 두 사람의 담판은 양측의 재가를 얻어 한일합방조약의 초안이 됩니다.
이인직이 했던 역할에 비하면 합방 후 그 대가는 초라했습니다. 이완용을 비롯한 한일합방의 공로자들에게는 귀족 작위와 거액의 은사금이 내려졌으나 이인직에게는 이렇다 할 것이 없었습니다. 그가 서얼 출신인 것이 영향을 끼친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이완용과 그의 절친 조중응이 각각 백작・자작과 은사금을 받고 죽을 때까지 호위호식을 누린 것과 비교하면 그가 그토록 봉건주의를 비판했던 결과가 무색해지는 순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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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직 사망 기사. 매일신보 1916. 11. 28

 

조선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문>의 객원을 거쳐 종래에는 친일유림단체경학원(經學院) 의사성(司成)에 올라 천황을 찬양하는 글을 쓰며 여생을 보냅니다. 1916년 11월 총독부의원에서 입원 치료중 사망하는데 장례식은 일본 천리교 의식에 따라 치러졌고 아현 화장장에서 한 줌의 재로 사라집니다. 그가 죽자 조선총독부에서 지급한 장례비는 450원이었습니다.

김덕영 선임연구원

시민들의 의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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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역사박물관과 함께하는 시민역사강좌 열려

• 임무성 상임교육위원

식민지역사박물관은 서울시 평생교육진흥원에서 주관하는 민간연계 시민대학에 3년 연속으로 선정되어 시민역사강좌를 개최하였다. 6월 29일부터 9월 14일까지 3개월 간 진행되는 시민역사강좌는 ‘프로그램Ⅰ: 내일을 여는 선언-우리시대 표상이 된 가치들과 그 역사’ 5꼭지와 ‘프로그램Ⅱ: 한일역사부정론의 궤변’ 5꼭지로 구성되며, 매주 화요일 오후 7시 식민지역사박물관 5층 강의장에서 온라인 ZOOM
화상강좌로 진행하고 있다. 수강생은 일반 시민과 민족문제연구소 후원회원, 식민지역사박물관 발기인 등이 참여하고 있는데, 20대에서 70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연령 분포를 보인다. 비대면으로 진행하는
강의지만 꾸준하게 매주 30여 명이 참여하여 시민강좌에 대한 열의를 보여주고 있다.
프로그램Ⅰ은 노동, 여성, 난민, 동물생명권, 지역을 주제로 한국현대사에서 변혁을 위해 외쳐진 각 분야의 선언의 시대적 상황을 이해하고 우리시대가 현재 지향하고 있는 다음 사회의 모습을 성찰하는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 또한 8월 17일부터 진행할 프로그램Ⅱ의 기획 의도는 현재의 일본과 한국에서 나타나는 역사부정 현상을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제국주의 일본에 의해 자행된 강제동원의 문제를 똑바로 인식하는 것이다. 무더운 여름을 이열치열로 이겨내려는 참여자들의 열기는 우리 사회현상의 변화와 역사에 대한 관심과 시민사회의 공감대 형성이라는 실천적 움직임으로 승화하고 있다.

화, 2021/07/27- 2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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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자의 목소리를 기억하라! 강제동원의 역사를 전시하라!>
강제동원증언전 개막

 

• 최우현 학예실 주임연구원

피해자들의 목소리로 일본의 산업유산 시설이 지워버린 강제동원·강제노동의 역사를 ‘증언’하는 기획전 <피해자의 목소리를 기억하라! 강제동원의 역사를 전시하라>가 7월 16일(금) 식민지역사박물관에서 개막했다. 이번 전시는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과 공동으로 주최했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가
시작하는 날에 맞춰 개막한 이 전시회는 강제동원 피해자 19명의 증언을 통해 일본에 ‘전체 역사를 알게 하라’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의 권고 이행을 촉구하는 메시지를 담고있다. 전시는 크게 2부로 나눠진다. 먼저 제1부 ‘피해자의 목소리를 기억하라’에서는 ▲‘가라면 가는 거지’ – 식민지 조선 청년의 강제동원 실상 ▲‘갇혀서 일하는 신세야’ – 강제노동 현장의 일상 ▲‘살아도 사는 게 아니야’ – 반인권적인 처우와 사건·사고 ▲‘다 같은 노예 신세였어’ – 중국인 피해자와 연합군 포로의 강제노동 실태 등이 피해자들의 증언영상을 중심으로 전시된다. 이 같은 증언영상들은 ▲민족문제연구소와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 「2020년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 구술채록」 사업(민족문제연구소 수행) ▲일제강점하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위원회(2004년 출범) 조사활동 ▲강제동원피해자 소송운동 ▲일본 시민단체 ‘오카마사하루 기념 나가사키평화자료관’과 ‘나가사키 중국인 강제연행의 진상을 조사하는 모임’을 통해 확보된 것들이다.

 

특히 하시마 강제동원 피해자인 서정우 씨, 이경운·이지창 씨의 증언영상과 연합군 포로수용소의 강제노동실태는 국내에서 처음으로 공개되는 자료들이다. 수십 년간 이 문제에 천착해온 일본 시민단체 POW연구회와 오카 마사하루 기념 나가사키평화자료관의 협력으로 공개가 가능했다. 제2부 ‘강제동원의 역사를 전시하라’에서는 유네스코 일본 산업유산의 등재 논란과 현재 강제동원·강제노동의 역사를 부정하는 산업유산정보센터의 문제점을 다루었다. 특히, 제2부는 2015년 제39차 세계유산위원회가 열린 독일 본에서 일본 산업유산 전시(戰時) 강제노동의 어두운 역사를 세계유산위원들에게 알리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 <부정적 세계유산과 미래가치> 특별전(민족문제연구소 주최·주관)의 확장판이라고도 볼 수 있다. 이에 폴란드 아우슈비츠수용소, 독일 푈클링겐 제철소 등과 같은 ‘부정적 세계유산Negative Heritage)’이 어떤 방식으로 후대에 교훈을 전하고 있는지를 소개하면서 일본 산업유산의 역사부정 실태를 꼬집는다. 
아울러 연구소는 이날 전시 개막과 함께 강제동원의 전체 역사를 전시하도록 촉구한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의 권고안을 지지하고 일본 정부의 충실한 이행을 촉구하는 한일 시민단체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이 같은 활동들은 일본 산업유산 현장에서 한국인, 중국인, 연합군 포로 등에게 가해진 전시 강제노동의 역사를 알리는 온라인 한일시민연대공동행동의 일환으로 추진되고 있다. 앞으로도 다양한 캠페인 및 이벤트가 기획·추진될 예정으로 회원 여러분들의 많은 관심과 응원을 부탁드린다.

수, 2021/07/2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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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원회원 마당]

잊으면 잃고, 잃으면 잊혀질 역사와 진실

 

김지형

 

민족문제연구소(이하 ‘민문연’)를 만나러 가는 길, 휴대전화를 분실했습니다. 다행히 습득하신 분과 연락이 닿아 휴대전화를 되찾았고, 효창공원앞역에 도착하니 시간은 벌써 12시 55분이 되어 있었습니다. 부리나케 달려갔습니다. 뙤약볕이 내리치는 언덕길을 얼마나 지났을까요. 집결지인 백범기념관이 눈앞에 보였습니다. 저 멀리 보이는 인파, 행사는 이미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땀에 젖은 옷깃은 축축했고, 늦은 것에 대한 무안함과 죄송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휴대전화를 잃어버린 스스로가 원망스러웠습니다. 감사하게도 민문연 선생님들께서 땀에 젖은 지각생을 친절히 안내해주셨고, 기쁘게도 행사에 합류할 수 있었습니다. 선생님들께서 건네주신 생수로 목을 축여 더위를 씻어낼 수 있었고, 진중함에 위트까지 더해진 해설에 금방 몰입되어 탐방을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탐방의 시작은 백범 김구 선생님의 묘역 앞이었습니다. 백범 선생님의 삶과 같이 위엄과 담대함이 느껴질 만큼 커다란 묘역이었습니다. 본래 선생님은 민중 위에 군림하지 않는, 민중과 어깨를 나란히 하길 바라셨던 분이라고 들었습니다. 왕릉처럼 거대한 무덤 속에 잠들어 계신 선생님이지만, 그분은 지금도 자신의 호(號)처럼 평범하게, 민중과 동등한 눈높이에서 함께하실 것 같다는 생각이 잠시나마 들었습니다.
백범 선생님께 묵념을 드리고 이봉창 의사, 윤봉길 의사, 백정기 의사 그리고 안중근 의사께서 잠들어 계신 묘역 앞에 섰습니다. 그분들께서 민족을 위해 손에 쥐었던 총과 폭탄의 중압감은 얼마나 무거웠을까요. 오히려 나라를 위해 몸 바쳐 싸울 수 있음을 영광으로 생각하셨을 것 같기도 합니다. 숙연함만이 느껴졌습니다. 독립을 위해 온몸으로 희생하신 그분들 앞에 이외에 어떤 감정은 느낄 수가 없었습니다.
끝내 유해가 발견되지 못한 안중근 의사는 허묘 안에서 넋으로만 잠들어 계셨습니다.
그분은 민족에 긍지와 독립 열망의 불씨를 쥐어 주셨지만, 후손인 우리는 그분의 유해 한조각도 찾아드릴 수 없다는 것이 안타까운 현실이었습니다. 탐방 중 가장 부끄럽고, 마음이 아팠던 순간이었습니다.
다음은 임정요인 묘역 앞이었습니다. 대한민국임시의정원 초대의장 이동녕,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위원 차리석, 군무차장 조성환……. 부끄럽지만, 저에게는 성함만 얼핏 들어본 것이 전부인 세 분이었습니다. “아, 내가 정말 너무 모르고 살았구나. 내가 진정 근현대사에 관심이 있었다고 생각한 게 맞는 것인가?” 솟구치는 부끄러움에 잠시 더위를 잊을 만큼 온몸에 한기까지 느껴졌습니다. 그동안 잊고 살아와 죄송한 마음입니다. 묵념을 올리며 앞으로 세 임정요인의 행보를 기억에 새기고, 감사함을 마음에 새길 것을 다짐했습니다.
탐방의 마무리는 대망의 식민지역사박물관이었습니다. 입구부터 상해임시정부 정문의 모습을 본따 지어올린 계단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저와 탐방객 모두는 시간을 거슬러 오르듯 계단을 올랐고, 내부에는 민족의 아픔과 치욕이 기록된 일제강점기 사료들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선조들의 목을 겨눴을 일제의 총과 칼부터 끝내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한 강제징용 피해자들의 기록물까지……. 모든 것들이 슬프지만 결코 외면해서는 안 될 민족수난의 증거들이었습니다.
우리는 소중한 인연, 소중한 공간, 하물며 소중한 물건 하나만 잃어버려도 적지 않은 아픔을 느낍니다. 아픔의 크기만큼 그것이 소중했다는 방증일 것입니다. 비할 바는 아니나, 행사장으로 가는 길 휴대전화 하나만 잃었을 뿐인데 큰 당혹감을 느꼈던 제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하물며 국가를 잃는다는 것은 어떤 느낌, 어떤 감정일까요. 형언하려는 것이 주제넘은 일일 것이며, 저로서는 감히 상상할 수 없었습니다. 이번 행사를 통해 잊어도, 잃어도 안 될 역사와 진실을 마주할 수 있게 되어 참으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마지막 간담회 자리에서 부친의 강제동원 역사를 말씀하신 어르신을 뵈며 많은 것을 느꼈습니다. 나이가 지긋하신 어르신이었습니다. 아직도 저는 어르신의 또렷하고 강인한 시선, 단단하고 꼿꼿한 어깨를 잊을 수 없습니다. 어르신께서는 아픈 역사를 생생히 목도하고 기억하기 위해 눈빛에 총기를 잃지 않으시고, 일제의 억압에 굴하지 않고 견디기 위해 어깨에 더욱 단단히 힘을 주고 살아오신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힘이 실린 시선과 어깨를 통해 그분의 삶을 엿볼 수 있었고, 시대의 증인으로서 현장에 함께해주신 것에 대한 감사함을 느꼈습니다.
끝으로 저를 박물관 회원으로 연대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저에게 시원한 물을 건네주고 뜻깊은 현장을 의미 있는 영상으로 남겨주고 촬영과 더불어 원활한 현장 진행을 위해 달려주었으며 듣는 이로 하여금 이해하기 쉽게 해설을 진행해주었고, 이 모든 행사를 기획하고 운영해준 민문연 모든 선생님께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뜻깊은 자리에 함께할 수 있어 영광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수, 2021/07/28- 1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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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원회원 마당]

광저우기의열사능원(廣州起義烈士陵園)

 

김유 중국 광동지부장

슬픈 노래 그리고 마침 비가 오는지라 높게 이는 연못물이 아득하고 구슬퍼서 물결을 가르고 또한 헤집는 듯하였다. 우산을 펴고 희생자 분향탑을 지나 뒤쪽으로 막 층계를 내려간 순간 보이는 크나큰 호수 그리고 갑자기 들려오는 음악소리, “저 음악은 1년 365일을 끊이지 않고 울립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끊임이 없습니다.” 안내해주는 분의 설명을 들었다. 그러고 보니 음악소리는 공원에서 시시때때 틀어놓고 듣는 그런 소리는 아니었다. 해금을 닮은 깽깽이 소리가 구슬프게 하늘을 맴돌고 한동안 이어지다가 끊어지자 다시금 온갖 악기들이 어우러지면서 구곡을 끊어내는 듯 한꺼번에 울어내는 소리가 허공에 사무쳤다.
오늘 아침에 광저우기의열사능원을 간다고 하였을 때 그곳은 그저 과거의 지나간 한때였으며 혁명의 와중에 흔히 있는 싸움과 희생 그리고 후세의 승리자들에 의해 선별되어진 유적들이 있는 곳이라고 생각했는데 이곳에 와서 음악을 듣는 순간 달라졌다.
공원은 월수구(越秀區) 안에 있다. 여느 공원과 마찬가지로 혁명을 찬양한 기념비와 조각들이 즐비하다. 그러나 이곳은 광저우 코뮨의 3일 천하로 끝난 아쉬움, 사람이 많이 죽은 아픔으로 충만하다. 공원의 한가운데에는 당시 코뮨 때에 희생된 5천여 명이 넘는 시신이 모셔진 커다란 봉분이 있다. 그 봉분에는 150여 구의 조선인 시신도 있다고 한다. 1920년대의 광저우는 혁명의 중심지였다. 약 800명에 달하는 조선의 젊은이들이 조국광복을 위해 만주나 러시아, 일본 등에서 왔으며, 그들은 이웃나라 혁명의 성공이 조국독립의 선결조건이라고 믿었다. 그런 그들에게 1927년 국민당의 쿠데타로 공산당이 궤멸되고 또한 반군벌 반봉건세력이 무너질 때 조국의 독립도 물 건너간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중국인민은 그들 나름대로 지방군벌이 득세하는 나라에 대한 걱정, 한편 조선의 독립운동가들에게는 생각지도 못한 국민당의 배신으로 멀어져간 조국독립에의 꿈이 광저우 봉기의 시발점이었다.
그즈음 나는 김산의 광동에서의 흔적을 탐사하는 여행을 하는 중에 있었다. 1927년의 김산 역시 이곳 기의(起義)에 참가를 하였었다. 그들은 장개석 군이 잠시 자리를 비우고 광저우 군벌 진형명(陳炯明)이 잠시 외지로 나간 틈을 타 봉기를 일으켜 광저우를 점령하지만 그들의 목숨은 장개석 군대와 진형명 군대가 돌아오면서 끝을 맞이하게 된다. 치열한 전투 끝에 그들은 모두 제압되었다. 참고로 그는 이곳에서 흔적없이 사라져 간 150여 명의 조선인 동포들을 ‘물에 녹은 소금’이라고 비유하고 안타까워하였다. 계속해서 내리는 비를 피해 층계를 내려와 찾은 곳은 팔각정자였다. 왠지 빗소리에 멀리서 들리는 듯 하던 음악소리가 연못을 지나갈 때는 더 한층 크게 들리는 것 같았다. 

(왼쪽) 조우원용과 천티엔쥰의 마지막 모습을 형상화한 동상 (오른쪽) 혈제헌원 정자

연못가의 녹음으로 가려진 곳이 음악소리의 발원지였다. 소리는 울부짖듯 한꺼번에 내딛다가, 흐느낄 듯 한 줄기 연기처럼 사라질 듯 하고 다시 봄날의 햇빛처럼 찬란하게 흐르는 곡조의 유장함이 더해지고 종국에는 모든 악기들이 한꺼번에 어우러져 내는 소리로 마감되었다.
조우원용(周文雍)과 천티엔쥰(陳鐵軍)의 죽은 시신은 그렇게 양쪽의 연못에 버려지고 묻혔다. 1927년 11월, 남창(南昌) 봉기에 이어 광저우에서 봉기가 삼일천하로 끝나고, 나중에 봉기의 주모자들을 체포할 때 이들도 잡힌 것이다. 봉기가 실패한 결과는 5천여 명의 목숨이 조선에서 온젊은이들과 같이 죽음을 맞이했다. 조우원용 23세 그리고 천티엔쥰 24세, 그들은 처형되기 직전에 결혼했다. 그리고 이 둘의 이승에서 맺어지지 못한 사랑을 기념한 정자(血祭軒轅亭)는 1957년에 세워졌다. 연못은 당시의 처형장이었으니 이곳에서 죽어간 것이다. 끝간 데 없이 허공에 울려퍼지는 음악소리는 사실은 그때 죽은 사람들과 조우원용 그리고 천티엔쥰의 진혼곡이었음을 알기에는 그리 많은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정자 곁에 세워진 그 두 사람의 동상. 약간은 머리를 숙인 듯, 조우원용의 가슴에 머리를 기댄 천티엔쥰의 모습이 애처로워 보였다. 호수의 중심에서 동쪽으로 바라보면 보이는 커다란 정자는 봉기에 참여한 150여 명의 조선인 희생자들을 기념하고 있었다. 지금으로부터 꼭 94년 전, 나라가 망하고 설움의 길을 걸어야 했던 시절의 젊음들이 해왔던 선택이었다. 그리고 세월이 지났다.
이번에는 공간을 달리하여 한국이었다. 군사정권 아래 대학가는 뒤숭숭하였다. 그러다가 5월의 어느 날, 남쪽으로부터 흉흉한 소식이 들려왔다. 누군가 끌려가고 실종되었으며 또 죽었다는 사실 그리고 같이 입에서 입으로 전파되던 노래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 윤상원은 한때 은행직원이었다. 영어도 유창했던 그는 혼자서도 잘 먹고 잘 살 수 있었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민주화항쟁의 마지막 날 쳐들어오는 계엄군에 맞서 싸우다가 쓰러졌다. 윤상원에게는 몇 년 전 연탄가스 사고로 운명을 달리한 같이 야학을 하던 여자 친구가 있었다. 비록 생전에 연인 사이는 아니었지만, 친지들은 이불운한 처녀 총각의 영혼결혼식을 올려주기로 하였다. 이 영혼결혼식을 기념하기 위해 만들어진 노래가 바로 이 <님을 위한 행진곡>이었다. 윤상원과 박기순이 그 주인공이었다.
이렇게 혁명은 언제나 인간을 위한다는 구실로 피와 땀을 요구하였다. 절망과도 같은 삶을 개선해 보고자 죽음 앞으로 나섰던 사람들을 우리는 ‘선각자’라고 부르고 잊지 못한다. 선각자라는 미명 아래 얼마나 많은 소중한 인명들이 이름 석자 남기지 못하고 꽃처럼 사라져 갔는가. 여기에서 ‘물속의 소금’ 그리고 ‘봄날의 눈’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져 간 사람들, 심지어 그들은 이념과 대립의 희생양이 되어 지금은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다.
한편 혈제헌원정의 조우원용과 천티엔쥰 그리고 광주의 윤상원과 박기순은 가슴 아픈 이야기이지만 우리에게 남겨져 있고, 남겨져 있는 한 우리는 그들을 기억한다. 지금의 우리 모두는 이름을 남기건 남기지 못했건 모두 그들의 희생 위에 서 있다. 누군가 이곳 정자를 낀 연못을 돌 때 들리는 노랫가락이 진혼가임을 안다면 한줌의 꽃이라도 그들을 위해 뿌려주지 않겠는가, 조우원용과 천티엔쥰, 윤상원과 박기순 그리고 남의 나라 혁명에 가담하고 이름없이 스러져 간 조선의 젊은 혼들에게.

토, 2021/08/28- 0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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