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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의 심장부를 점령한 일제의 침략신사

지역

도시의 심장부를 점령한 일제의 침략신사

익명 (미확인) | 월, 2018/03/26- 1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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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신궁전경도, 77.6 X 2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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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두산신사는 조선에 세워진 최초의 신사로 병합 이전에 이미 ‘관폐대사’로 승격운동이 일어날 만큼 일본인들 사이에서 큰 의미를 지녔던 신사다. 1936년 8월 1일 ‘국폐사’로 격상되었다. ‘국폐사’란 조선총독부가 관리 비용 일체를 부담하는 신사를 말한다.

 

“1678년 3월 왜관을 부산항에 설치할 때, 대마도 영주가 용두산에 평방 4척(尺)의 석조 소사(小祠)를 세워 한일 상선(商船)의 안전을 기리기 위해 금도비라(金刀比羅) 대신을 봉사한 것이 시작이었다. 처음 금도비라 신사로 칭하다 1894년 거류지신사로 개칭했고, 1899년 그 규모를 확장해 사전의 면목을 일신하자 용두산신사로 개칭했다. 이 신사는 부산을 대표하고 경남을 압도하는 조선 최고의 신사이자 대륙진출의 수호신으로 그 신위를 온 나라에 혁혁히 떨치고 있다.”
<대륙신사대관>,1941

 

서울 남산공원, 부산 용두산공원, 대구 달성공원, 전주 다가공원, 진해 제황산공원. 이들은 일제강점기에 조성된 공원으로 모두 일제의 침략신사가 자리했다. 신사神社란 일본 신도神道 신앙의 종교시설로, 왕실의 조상이나 민간 고유의 신앙 대상을 모신 건축물이다. 우리나라의 사당은 조상의 신주神主를 모신 집을 뜻하지만, 일본의 신사는 다양한 신을 경배의 대상으로 삼아 그 수가 무려 800만에 달한다. 일본을 ‘신의 나라’라고 표현하는 이유다.
1876년 부산 원산 인천 등이 개항된 후 조성된 일본인 거류지에는 서양식 공원이나 호텔, 교회 등과 같은 서구식 건물들이 들어섰다. 강제병합 이전 공원이나 묘지 등은 세금이 없는 땅이었기 때문에 곳곳에 일본인들을 위한 공원이 만들어졌고, 신사 설립도 적극 추진되었다. 1910년 일제가 조선을 강제병합하자 조선이 일본의 지배를 받게 된 것이 오히려 다행스러운 일이며 ‘천황’의 은혜로 선전하기 위해 조선총독부는 ‘천황’을 대중들에게 각인시키기 위한 시설로 ‘신사’를 이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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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달성공원 내 황조요배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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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 다가공원 내 전주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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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해 제황산공원 내 진해신사

 

일본에서 메이지 ‘천황’이 사망하고 다이쇼 ‘천황’ 즉위 대례를 맞아 신사 관계 법규를 정비한 뒤인 1915년 8월 조선에서도 조선총독부령 「신사사원규칙」이 제정되었다. 신사와 사원은 희망자 30명 이상의 연서를 통해 설립을 허가받는 것으로 정해졌지만 사실상 그 이전부터 존재하던 신사가 공인되었다. 또 1917년 3월에는 「신사에 관한 건」으로 작은 규모의 신사, 즉 신사神祠도 총독의 허가를 받도록 하고 그 관리를 규정하여 보호, 육성하였다.
산 입구부터 계단을 쌓아 신사로 올라가는 참배로를 만들고, 산 중턱에는 도리이鳥居를 세워 도시 어느 곳에서도 우러러 볼 수 있는 곳에 신사를 지었다. 신사가 조성된 공원 주변에는 관공서와 금융기관, 경찰서 등 일제 핵심 통치기구들이 밀집했다. 이렇게 신사는 도시 중심부에 ‘식민통치의 성지聖地’로 자리 잡았다.
일제 침략신사의 목적을 가장 충실하게 구현한 신사는 ‘조선신궁’이다. 1912년부터 추진해 1920년 기공식을 가진 후, 1925년에 완공했다. 조선신궁이 들어선 남산은 조선시대 도성 사산四山의 하나이자, 금산禁山으로 엄격히 관리되었으며 국사당國師堂이 자리잡고 있는 등 한양의 수호산으로 여겨졌던 곳이다. 일제는 조선신궁을 건립하기 위해 산 정상의 국사당을 이전하고 현재 남산식물원 일대의 서쪽 산허리를 완전히 깎아냈다. 조선 초기부터 신성시하여 오던 남산은 침략신사인 조선신궁이 자리 잡은 천황제 이데올로기의 성역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 강동민 자료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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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원회원 마당]

<한국소설, 정치를 통매하다> 감상문

김유 광동지부장

 

이 책은 그야말로 눈에서 비늘이 떨어지는 책이다. 책을 읽으면서 새삼 지나간 시절의 열정들이 떠올랐다. 그리고 지식인의 책무에 대해 다시 한 번 내가 할 일이 무엇인가를 일깨워 준다. 독서의 목적이 그 책을 읽는 독자들로 하여금 시대 상황을 바르게 인식하게 하고, 그 시대에 맞추어 무엇을 어떻게 하는 것이 바르고 옳은 일인지 생각하게 한다는 것은 글 쓰는 작자의 목적이라면 이 책은 대단히 성공한 책이다.“
에라, 늘그막에 객기 한번쯤 부려 보고자 추려 본 것들이 이 평론집이 되었다”고 하지만 이것은 “객기”가 아니다, “정론집”이다. 책은 정치를 질타하는 장용학의 소설들로부터 시작한다. 그리고 우리 문학에 커다란 획을 그은 대가들의 작품들을 소개한다. 그러나 잊지 않고 손석춘 씨 등 새로운 작가의 소개도 빠지지 않는다. 최인훈의 <광장>과 <회색인>, <총독의 소리>, <주석의 소리>를 이야기하는가 하면 그와의 개인적 친분도 에세이처럼 잔잔하게 풀어놓는다. 그가 좀 더 살아서 6·25 때 납북되었
던 이광수와 반민특위의 김상덕 위원장과 아마도(?) 같은 차 안에서 만나 이야기를 했었다면 어떤 얘기가 오갔을까?
남정현 작가를 언급할 때는 식민지의 정의와 함께 그의 대표작 <분지>와 <허허 선생> 연작을 빼놓지 않는다. 남정현의 반외세 의식과 민족의식의 각성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강한 존재로 우리 자신의 운명까지도 한 손에 잡고 흔들어 왔던 미국, 그리고 그 우산 밑에서 기생하여 맘껏 달리는 출세지향주의자들을 같이 풍자한다. 과연 우리에게는 민족이 우선인가, 아니면 이념이 우선인가… 그러면서도 선생의 산문집 <엄마, 아 우리 엄마>를 보면서 웃다가 흘리는 눈물이 우리를 숙연하게 한다. 실록적 요소가 강한 이병주의 소설 <그해 5월>은 소설을 쓴 작가의 변으로 “허상이 정립되지 않도록 후세의 사가들을 위해 구체적인 기록을 정리해 볼 작정”이라는 뜻을 분명히 하였다. 그리고 일본군 하급장교라는 말을 빈번하게 사용한다. 일본육군사관학교를 나온 사람이 안중근의 나라, 김구의 나라를 접수하였던 것이다. 그
리고 7·4공동성명을 맞이하여서는 남북이 같이하는 분단을 고착시키는 쇼라고 단정을 한다. 거
기에는 북한도 같은 쇼를 할 필요성이 있었을 것이다. 이 소설 즉, <그해 5월>을 임헌영 씨는 평론가적인 안목으로 풀어 쓰는데 “독재란 한 나라에 애국자는 한 사람밖에 없도록 만드는 공포 분위기에 다름아니다”라는 금언으로도 이 책은 훌륭하다. 씨는 역사와 민족이라는 화두를 평생지고 살아오면서 이 소설을 분석함에 있어 70년대 문학인 사건이나 1979년 시국사건으로 구속 수감되었던 기억이 더욱 새로웠을 것이다. 조정래의 <아리랑>은 바로 그 역사와 민족, 그리고 역사와 개인의 운명이 어떻게 얽히고설
키며 내려왔었는지를 우리에게 보여준다. 구한말부터 해방이 될 때까지 50년의 민족사를 기록한 것이다. 여기서 그는 독립군의 역사와 친일파 형성의 유래를 보여준다 그리고 불란서 비시정권의 치하에서 어떻게 대독협력의 민족반역자들이 생겼는지 열광, 인종(忍從) 및 사욕의 세 가지를 든다. 이 세 가지 유형으로 친일파의 발생을 추적한다. 역사와 운명의 변증법, 세월은 흐르고 역사는 기록된다. 그리고 개개의 인간에게 소설은 그에 걸맞는 삶의 궤적을 마련해 주는 것이다.
나는 요즈음 만주의 독립투사 양세봉 장군을 읽고 있는데 책에서 말하는 그의 삶이란 오로지 항일무장투쟁 하나로만 귀결되는 결말에서는 소설보다는 학술논문에 가까운 성격들임에 한층 외로움을 느낀다. 앞으로 나올 문학작품에 거는 기대가 남다른 것도 이 때문이라고도 하겠다. 선생의 이 책을 읽고 나서는 바로 한국에 연락하여 조정래의 아리랑 한 질(12권)을 다 주문하도록 하였다.
문학은 인간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로 개인의 내면적 질서를 잡아주고 사회적 통합을 이루게했다. 마르지 않는 문학의 역사 그것은 독자들에게 규범을 보여주며 현재의 상황을 이야기하며, 삶이 아무리 어렵고 힘들더라도 그것을 헤쳐 나가는 희망의 원리를 보여준다. 곧 문학이 이루는 변혁은 아주 작은 것이라도 타락한 시대에 타락한 방법이 아닌 올바른 삶을 바탕으로 고상한 싸움을 하는 것임을 이 책 곧 “한국소설, 정치를 통매하다”는 말하고 있는 것이다.

화, 2021/03/02- 2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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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

신흥무관학교기념사업회 주최 한국광복군 창설 80주년 기념

강화 드라이브스루 답사

연구소가 사무국을 맡고 있는 신흥무관학교기념사업회가 주최하고, 연구소와 서울시의 후원으로 9월 26일(토), 10월 24일(토), 25일(일) 총 세 차례의 ‘한국광복군 창설 80주년 기념답사’를 강화도에서 진행했다. 이번 답사는 올해 코로나19로 인해 답사 장소와 일정이 몇 차례 변경된 끝에 드라이브스루 답사라는 방식으로 실시하게 되었다. 당초 올해 신흥무관학교기념사업회의 답사는 한국광복군 창설 80주년을 맞아 정미의병(강화), 신흥무관학교(안동), 조선의용대(밀양)를 차례로 살펴보며 한국광복군의 원류를 되돌아보고자 했는데 코로나19로 강화도에서만 답사를 진행하게 되어 아쉬운 마음이 컸다.
드라이브스루 답사는 참석자 각자가 자기 차를 타고 답사지로 이동하며 진행했다. 방역 수칙에 따라 참가자 전원이 항상 마스크를 썼고 각 차량에는 3명 이상 타지 않도록 제한을 뒀으며, 식사도 흩어져 도시락을 먹었다. 3차례의 답사에는 총 67명(1차 17명, 2차 18명, 3차 32명)의 참가자와 스태프 3명(방학진 기획실장, 신다희 총무 부팀장, 김무성 회원사업 부팀장)이 참여했다. 답사 안내는 1차 답사에 황평우 한국문화유산정책연구소 소장이, 2차 답사에 한정우 산마을고등학교 선생님이, 3차에 방학진 기획실장이 맡아주었다.

 


답사는 강화 만남의 광장에 집결하는 것으로 시작해서 통제영학당 옛터에서 성공회 강화성당, 합일초, 강화중앙교회를 차례대로 보고, 마지막으로 연미정으로 이동하며 진행되었다.
첫 답사지인 통제영학당은 대한제국에서 세운 최초의 근대식 해군사관학교이다. 이동 중 보수 공사 중인 진해루 외벽에 그려진 강화의 역사를 표현한 그림 앞에서 강화의 지리와 역사에 대해 듣고, 강화도에서 벌어진 수차례의 민간인 학살에 대한 이야기도 나누었다. 2009년 해군참모총장이 세운 표지석 외엔 아무것도 없는 공터인 통제영학당 옛 터에서 대한민국 국군의 뿌리가 어디인지 생각해 볼 수 있었다.
성공회 강화성당으로 이동하여 성당 앞 공원에서 답사단은 흩어져 도시락으로 점심 식사를 했다. 식사 후에 구한말에 상대적으로 늦게 들어온 성공회와 감리교회가 강화도 민중들에게 다가가기 위해 기울인 노력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한옥 성당인 성공회 강화성당은 이런 답사가 아니더라도 한번쯤 볼 만한 건축물이다. 합일초등학교에서 백범 김구의 친필을 보며 백범 김구가 청년 시절 강화도에서 잠시 머물렀던 사연을 듣고 근처 강화중앙교회로 이동했다.
강화중앙교회(잠두교회)는 강화 최초 교회로 잠두의숙(훗날 합일초등학교)을 설립했다. 성공회와 감리교 등 기독교로 인해 근대교육을 받은 강화의 민중들은 3·1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된다. 민중교육에 힘썼던 초기 기독교를 보며, 변질된 현재의 한국 기독교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었다.
3차 답사에서는 김구 선생이 1900년 강화도에서 숨어 지내는 동안 서당을 열어 강화 아이들을 가르쳤던 고택 대명헌에 방문해 이 집의 운영자인 최성숙 님의 배려로 관람했다. 연미정으로 이동하기 전에 한국광복군 설립 80주년의 의미, 내년 신흥무관한교 설립 110주년에 대해 설명하며, 국군의 날과 의병의 날 등 기념일을 변경해야 하는 필요성에 대해 이야기했다. 마지막 답사지인 연미정에 오른 답사단은 바로 눈앞에 보이는 북한 땅을 보며 저렇게 가까운 곳에 가지 못하는 분단 현실과, 남북 간의 교류가 정체되고 있는 상황에 대한 안타까움을 느꼈다.
마치 나들이하듯 참여한 답사단은 강화도 지역 역사에 대한 설명을 들으며 무척이나 만족스러워했다. 코로나19로 인해 적은 인원수로 최대한 대면 접촉을 줄이려고 노력한 답사였는데, 참가자들이 적극적인 자세로 임해주었고, 반응도 뜨거웠다. 참가자들의 뜨거운 반응을 보며 코로나19라는 어려운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드라이브스루 방식의 소규모 답사를 앞으로 계속준비하고자 한다.

• 기획실 회원사업 부팀장 김무성

수, 2020/12/02- 2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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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

독립군가 복원 프로젝트 : 100년의 소리

 

연구소는 2017년 <항일음악 330곡집>(노동은 편저) 발행을 시작으로 항일음악회 개최(2011년, 2017년, 2018년) 등 독립군가 복원과 보급에 힘쓰고 있는 가운데 YTN 라디오가 경기도 후원으로 진행 중인 <독립군가 복원 프로젝트 : 100년의 소리>를 자문하고 있다. 올해 10편을 시작으로 내년까지 꾸준히 제작·방송할 예정으로 특히 독립운동가 후손들이 직접 노래를 부르고 선친을 회상하여 더욱 의미를 더하고 있다. 독립군가 복원 프로젝트는 연구소 후원회원이기도 한 이은지 YTN PD가 담당하고 있다. 노래는 연구소 누리집에서 들을 수 있으며 현재까지 제작된 노래는 아래와 같다.
1편 : 국치추념가(이준식 독립기념관장), 2편 : 안중근 옥중가(함세웅 안중근의사기념사업회 이사장), 3편 : 신흥무관학교 교가(이항증 석주 이상룡 선생 증손자), 4편 : 압록강 행진곡(김영관 한국광복군동지회 회장), 5편 : 격검가(차영조 동암 차리석 선생 아들), 6편 : 새야새야 파랑새야(정남기 동학농민군 정백현 선생 손자), 7편 : 광복군 아리랑(장병화 광복군 장이호 선생 아들) • 방학진 기획실장

수, 2020/12/30- 1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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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 비망록 60]

역대 조선총독과 정무총감이 잇달아 벽제관을 시찰한 까닭은?
사쿠라와 단풍나무 동산으로 구축한 그들만의 성지

이순우 책임연구원

 

<승정원일기> 고종 40년(1903년) 10월 3일(양력 11월 21일) 기사에는 평양이궁(平壤離宮)인 풍경궁(豐慶宮)에 어진과 예진을 봉안하는 일을 수행하기 위해 현지로 떠나려던 의정 이근명(議政 李根命, 1840~1916)에게 고종황제가 하문하는 내용 가운데 다음과 같은 대화 한 토막이 수록되어 있다.

 

…… 이어 전교하기를,
“어느 곳으로 길을 잡았는가?” 하니, 이근명이 가로되, “처음에는 수로(水路)로 가기로 계획하였습니다만, 감동당상 민영철(監董堂上 閔泳喆)이 전보한 바에 근일(近日) 수로에 풍랑이 잦아 육행(陸行)을 권하기에 육로로 가려고 하나이다.” 하였다.
…… 상(上)이 이르기를, “며칠간의 노정(路程)인가?” 하니, 이근명이 가로되, “550리인데, 하루에 7, 80리를 가면 7, 8일이면 가능할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갑오년(1894년) 이전에 칙사(勅使)나 동지사(冬至使)가 지날 때는 도로가 광탄(廣坦)하고 점막(店幕)도 즐비했는데, 지금은 틀림없이 많이 황폐해졌을 것이니라. ” 하니, 이근명이 가로되, “그렇습니다.” 하였다

 

사진엽서에 남아 있는 벽제관의 옛 모습이다. 아래의 설명문에는 “임진왜란 때 코바야카와 타카카게가 명나라군대를 격파했던 곳”이라고 하여 이 공간의 의미를 전적으로 자신들의 전승지라는 점과 결부시켜놓고있다. 언덕 위에 보이는 것이 ‘괘갑수(掛甲樹)’라고 전해지는 느티나무이다.(민족문제연구소 소장자료)

 

(왼쪽) 벽제관의 외대문에 달려 있는 ‘벽제관(碧蹄館)’ 편액의 모습이다. 이 사진의 아래에는 성종 때 사신으로 왔던 동월(董越, 1430-1502)이 쓴 글씨라고 전한다는 설명이 적혀 있다. 이 편액의 잔편은 현재 일산호수공원에 있는 ‘고양600년기념전시관’에 보관되어 있다. (경전하이킹코스 제6집, <벽제관>, 1938)
(오른쪽) 여러 차례에 걸친 ‘보존공사’로 인해 오히려 원형을 상실해가고 있는 벽제관의 모습이다. 이곳은 원래 온돌 구조의 방바닥과 벽면이 가리고 있는 형태였으나 느닷없이 마루 모양으로 변형되었고, 더구나 앞뜰과 주변 일대는 사쿠라와 단풍나무가 점령한 상태로 바뀌어 있다. (경전하이킹코스 제6집,
<벽제관>, 1938)

 

이러한 대화는 1894년 청일전쟁과 더불어 전통적인 외교관계가 단절된 이후 불과 10여 년 사이에 두 나라의 사신들이 오가던 곳이 옛 모습을 크게 상실하였다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더구나 선박이나 철도와 같은 근대적인 교통수단의 등장으로 인해 이러한 옛길의 이용빈도가 두드러지게 저하된 상황을 엿볼 수 있다.
흔히 사행로(使行路) 또는 연행로(燕行路)라고 불렀던 이 길은 서울에서 의주까지 1,050리(里), 다시 의주에서 북경까지 2,061리, 도합 3,111리에 왕복으로는 6,222리나 되는 머나먼 행로이다. 홍대용(洪大容, 1731~1783)의 문집 <담헌서(湛軒書)> 「외집(外集)」 권10에 수록된 ‘연기(燕記)’에는 대략 다음과 같은 노정(路程)이 정리되어 있다.

 

한성(漢城) → 고양 벽제관(高陽 碧蹄館, 40리) → 파주 파평관(坡州 坡平館, 40리) → 장단 임단관(長湍 臨湍館, 30리) → 송도 태평관(松都 太平館, 45리) → 금천 금릉관(金川金陵館, 70리) → 평산 동양관(平山 東陽館, 30리) → 총수참 보산관(葱秀站 寶山館, 30리) → 서흥 용천관(瑞興 龍泉館, 50리) →검수참 봉양관(劒水站 鳳陽館, 40리) → 봉산동선관(鳳山 洞仙館, 30리) → 황주 제안관(黃州 齊安館, 40리) → 중화 생양관(中和 生陽館, 50리) → 평양 대동관(平壤 大同館, 50리) → 순안 안정관(順安 安定館, 50리) → 숙천 숙녕관(肅川 肅寧館, 60리) → 안주 안흥관(安州 安興館, 60리) → 가산 가평관(嘉山 嘉平館, 50리) → 납청정(納淸亭, 25리) → 정주 신안관(定州 新安館, 45리) → 곽산운흥관(郭山 雲興館, 30리) → 선천 임반관(宣川 林畔館, 40리) → 철산 차련관(鐵山 車 輦館, 40리) → 용천 양책관(龍川 良策館, 30리) → 소곶참 의순관(所串站 義順館, 40리) → 의주 용만관(義州 龍灣館, 35리) → [이하 중국 행로는 생략]

 

여기에서 보듯이 이 머나먼 행로 가운데 서울 도성에서 벗어난 첫 번째 기착지이자 되돌아오는 여정의 끝을 알리는 마지막 숙소의 역할을 하는 곳이 바로 고양 벽제관(高陽 碧蹄館)이다.사신을 떠나보내고 맞이하는 공식행렬과는 별개로 수행원들의 친구나 친지들이 이들의 무사 귀환을 빌며 전송하고 작별하거나 귀로에 오른 이들을 다시 마중하는 공간이기도 했다. 조선시대를 통틀어 이곳을 소재로 한 무수한 시문(詩文)이 남아 있는 것은 바로 그러한 까닭이다.
그런데 일제강점기 이후 이 땅의 주인행세를 했던 일본인들에게는 벽제관이라는 공간을 기억하는 방식이 전혀 달랐다. 무엇보다도 그들에게는 벽제관 일대가 임진왜란 당시 그들을 추격하던 명나라 장수 이여송(李如松, 1549~1598)의 직속부대를 맞이하여 치명적인 반격을 가했던 일본군의 전승지(戰勝地)였으므로 매우 특별한 의미를 지닌 곳으로 치부되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탓에 이곳이 남다른 관심의 대상으로 부각되곤 했다는 것은 식민통치권력의 최고 정점에 있는 역대 총독과 정무총감이 잇달아 이곳을 시찰하였다는 사실에서도 잘 드러난다. 이에 관한 가장 이른 시기의 흔적은 초대 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 1852~1919)에 의한 벽제관 시찰이다.
<매일신보> 1912년 4월 30일자에는 「총독 벽제관행(總督 碧蹄館行)」 제하의 기사를 통해 그의 행로를 이렇게 간단히 정리하고 있다.

 

데라우치 총독(寺內 總督)은 재작(再昨) 28일(日) 오후(午後) 2시(時)부터 아카시 소장(明石 少將), 아라이 탁지부장관(荒井 度支部長官), 후지타 부관(藤田 副官)을 종(從)하여 자동차(自動車)를 승(乘)하고 고양군 벽제관(高陽郡 碧蹄館)에 부왕(赴往)하여 문록역(文祿役)의 전적(戰跡)을 시찰(視察)하고 오후(午後) 6시(時)에 귀저(歸邸)하였다더라.

 

데라우치 총독 자신이 남긴 일기(日記)에도 이날의 동선이 기록되어 있는데, 특히 그가 이날 벽제관 앞에 벚나무(櫻樹, 사쿠라)를 심어 기념으로 삼았다는 대목이 눈길을 끈다. 이때 그가 심은 벚나무 주위에는 나중에 돌기둥에 쇠사슬을 연결하여 보호난간을 둘러 정성껏 관리하는 모습이 연출된 것으로 알려진다.
아닌 게 아니라 일본인들에 의한 벽제관 일대의 공간변형을 통틀어 가장 두드러진 풍경의 하나는 이곳 주변이 온통 벚꽃 동산으로 바뀌었다는 사실이다. 예를 들어, <매일신보> 1929년 4월 4일자에 수록된 「녹화운동(綠化運動)의 선구(先驅), 본사기념식수(本社紀念植樹), 작(昨) 3일(日) 기념일(紀念日)을 복(卜)하여, 벽제관(碧蹄館)에 앵풍 만주(櫻楓 萬株)」 제하의 기사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남아 있다.

 

본사(本社)에서는 기념식수일(紀念植樹日)에 순응(順應)하여 3일 벽제관에서 기념식수를 하였는데 수년 전 본사에서는 한강반(漢江畔) 급(及) 이번에 기념식수를 한 벽제관에 앵화(櫻花)의 식수를 행하여 지금에는 직경 척여(直徑 尺餘)의 대목(大木)이 되어 과거 본사공적(本社功績)을 영구히 전하게 되었다. 이에 감(鑑)하여 본사는 작추(昨秋)에 거행된 소화대제(昭和大帝)의 어대전(御大典)을 광고(曠古)에 전하려고 종종(種種) 기념사업을 연구한 결과 조선에 재(在)한 민간녹화운동(民間綠化運動)의 선구(先驅)로서 식수(植樹)는 가장 적당한 사업이므로 이번에 벽제관 뒤의 국유지(國有地) 수십정보(數十町步)에 앵목(櫻木) 5천 주(株), 풍(楓) 5천 주 합계(合計) 1만 주(株)를 식재하였다. 당일은 본사원(本社員)은 물론 경성부내(京城府內)에서 다수의 내빈을 초대하고, 벽제관 부근 주민도 봉사적(奉仕的)으로 참가하여 기념식수를 하였다.

<조선> 1930년 9월호에 수록된 벽제관 후면 언덕의 ‘괘갑수(掛甲樹)’이다. 이곳이 정말 왜군의 갑주가 걸린 곳이었는지는 일본인들 스스로 의심하는 바였지만, 어쨌거나 사진에서 보듯이 돌난간과 표석을 세워 나름으로 소중한 기념물의 하나로 관리되었다.

 

여기에 나오는 ‘기념식수일’은 조선총독부가 한국병합(韓國倂合)의 대업(大業)을 영구히 기리는 동시에 애림사상(愛林思想)을 고취하고 식림(植林)을 장려한다는 명분으로 1911년 4월 3일 신무천황제일(神武天皇祭日; 공휴일)을 기하여 처음 기념수재일(記念樹裁日)로 정한 이래로 해마다 식목행사를 거행한 날이다. 위의 신문기사에 따르면, 총독부의 기관지인 매일신보가 주축이 되어 벽제관 주변에 벚나무와 단풍나무 1만 그루를 심었고, 이보다 앞서 ‘수년 전’에도 이미 이곳에서 식목행사를 거행한 사실이 드러난다.
그런데 비단 이 시기뿐만 아니라 일제강점기로 접어든 직후 시점부터 벽제관 일대에는 일본산 벚나무가 대량으로 식재되기 시작했다는 흔적도 발견된다. 가령 경성일보와 매일신보의 감독으로 장기간 서울에 체류했던 토쿠토미 소호(德富蘇峰, 1863~1957)가 남긴 <연하승유기(烟霞勝遊記) 하권(下)>(1924), 325쪽에는 그 자신이 1916년 3월 17일에 벽제관을 탐방한 때의 감흥을 이렇게 적은 바 있다.

 

…… 관후(館後)의 소구(小丘)에는 당년(當年)의 괘갑수(掛甲樹)라고 칭(稱)하는 노규(老槻, 느티나무 고목)가 있다. 구상(丘上)에서 지점(指點)하면, 양군공전(兩軍攻戰)의 터가역력(歷歷)하게 보인다. 이 주변에는 천주(千株)의 길야앵(吉野櫻, 요시노 사쿠라), 천주(千株)의 풍(楓, 카에데)을 기념(記念) 삼아 심었지만, 거의 전벌(剪伐)되어져 가까스로 두어 그루를 남기고 있을 따름이다. 조선인(朝鮮人)의 수목(樹木)에 무돈(無頓)이 지나침은 참으로 가공(可恐)할 만 했다.

 

여기에 나오는 ‘괘갑수’는 벽제관전투 당시 싸움을 마치고 일본군 장졸(將卒)이 갑주(甲冑)를 벗어 이곳에 걸어놓고 휴식을 취했다거나 그 당시 선봉에 섰던 왜장 코바야카와 타카카게(小早川隆景, 1533~1597)가 자신의 투구를 걸었던 곳이라거나 하는 식의 전설이 있는 벽제관 뒷동산의 느티나무였다. 그러나 실상 이러한 얘기는 일본인들 스스로가 사실관계를 의심하는 글들이 곧잘 남아 있기는 한데, 어쨌거나 이곳 역시 그들이 늘 자랑스러운 곳으로 여기는 중요한 기념물이라는 점에 있어서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매일신보> 1928년 4월 3일자에 수록된 이케카미 정무총감의 벽제관 수리공사 현장시찰 관련 보도내용이다. 여기에는 이케카미 정무총감이 정의현(鄭儀鉉) 벽제면장과 더불어 기념식수를 하는 보도사진이 함께 수록되어 있다.

 

건설(公園建設)을 계획, 면민(面民)은 관상목 식재(觀賞木 植栽)」 제하의 기사 등에도 벽제관 일대에 대규모로 벚나무를 식재한다는 소식을 잇달아 전하고 있는 것이 눈에 띈다.
이처럼 벽제관 일대에 벚나무와 단풍나무를 적극적으로 심고 이를 관리하려고 했던 것은 이곳을 일본군의 전승지(戰勝地)라는 공간의 의미에 더하여 봄가을로 벚꽃구경과 단풍나들이의 명소와 같은 탐방지로 부각시키려는 의도에 따른 것으로 풀이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일제강점기 후반에 이르러 경승지(景勝地)로 자리매김한 벽제관 일대는 관람객들을 쉽사리 맞이할 수 있는 유원지(遊園地)의 형태로 적극 개발하기 위한 조치들이 거듭 시도된 바 있었다.
예를 들어 <매일신보> 1936년 5월 22일자에 수록된 「벽제관 전등시설(碧蹄館 電燈施設)과 뻐스 연장요망(延長要望), 벽제면민(碧蹄面民)이 경전(京電)에 진정(陳情)」 제하의 기사를 통해 이러한 변화의 일면을 엿볼 수 있다.

 

[벽제(碧蹄)] 고양군 벽제관은 대도회지 경성(大都會地 京城)을 거(距)하기 4, 50리의 지점에 있어 불결(不潔)한 공기와 풍진(風塵) 사이에서 피곤한 뇌를 잠시 수양(修養)할 만한 유일한 유원지로서 근일(近日)은 매일 수십 명의 관람객을 맞게 되는 바인데 조등기관(照燈機關)과 교통기관(交通機關)이 불완전함을 관민일동(官民一同)이 통감(痛感)한 바있어 거(去) 18일에 신면장(申面長), 카타카쿠 부장(片角部長), 후지노 교장(藤野校長), 이 본보 분국장(李 本報分局長), 기타 민간유지(其他 民間有志) 수십 명이 회동하여 전등가설(電燈架設)과 뻐스 총연장(總延長)을 경전회사(京電會社)에 실행토록 내(來) 22일에 진정하기로 결의하였는데 일반민간에서는 지방발전(地方發展)과 산업개발상(産業開發上) 필요하므로 실행을 기대중이며 교섭위원(交涉委員)으로 좌(左)의 제민(諸民)을 선정하였다. 신 면장(申面長), 이 이사(李理事), 카타카쿠 부장(片角部長), 임창운(林昌雲), 이본보 분국장(李 本報分局長), 코야마 협의원(小山協議員), 후지노 교장(藤野校長), 사에키 소장(佐伯所長), 안 기자(安記者).

 

여기에 나오는 ‘신 면장’은 일제강점기에 춘천군수, 원주군수, 홍천군수(1924년 12월 퇴직)를 역임하고 나중에 고양군 벽제면장(1932.1~1939.10)을 지낸 신규선(申圭善, 1882~1958)을 말하며, 지금도 벽제관 터 앞에는 1941년 1월에 건립한 ‘면장 신규선 치적비’가 남아 있다. 그리고 ‘사에키 소장’이라고 하는 이는 벽제우편소장(碧蹄郵便所長)이던 일본인 사에키 토루(佐伯融)를 가리킨다.
그는 벽제관고적보존회의 활동에 앞장서 참여하였고, 나중에 벽제관전적기념비(碧蹄館戰蹟記念碑, 1933년 9월 9일 제막)를 조성할 때도 주도적인 활동을 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특히 총독부의 고관 또는 내외귀빈(內外貴賓)을 포함하여 일반 탐방객이 벽제관을 찾을 때마다 벽제관 일대의 고적안내를 전담하다시피 했던 사람이기도 했다.

 

옛 벽제면사무소가 자리했던 벽제관 터 앞쪽 비석군에는 ‘벽제면장 신규선(申圭善) 치적비(1941년 1
월 25일 제막)’가 지금도 그대로 남아 있다.

 

 

벽제우편소장 사에키 토루(佐伯融)의 경력과 활동상이 자세히 소개된 <매일신보> 1933년 10월 12일
자의 보도내용이다. 그는 벽제관 전적지의 보존과 기념비 건립에 주도적인 활동을 했고, 조선총독의 시찰 때거나 일반 탐방객의 방문 때건 간에 벽제관 일대의 고적안내를 전담하다시피 했던 인물이었다.

 

그런데 <매일신보> 1944년 10월 1일자에 수록된 「형석(螢石)의 채굴을 독려, 개성에서 고미술(古美術)도 감상한 총독」 제하의 기사를 통해 마지막 조선총독 아베 노부유키(阿部信行, 1875~1953)가 부임 후 두 달 남짓에 이곳 벽제관을 시찰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 이렇게 누누이 훈시를 한 다음 점심을 마치고 개풍군 중면(開豊郡 中面)에 있는 종양장(種羊場)을 시찰하고 대룡광산(大龍鑛山)을 찾아 경금속(輕金屬) 증산에 중요한 자재인 형석(螢石)의 채굴하는 현장을 독려하고 자동차로 귀로에 올랐다. 모색이 어리는 장단(長湍) 나루를 나룻배로 건너, 도중 벽제관(碧蹄館)에 들러 충혼비(忠魂碑)의 비명(碑銘)을 읽고 측근의 설명을 들어가며 한 동안 감개 깊은 듯 2백여 년 전의 옛일을 회고하고 일로 경성으로 돌아왔다.

 

이렇듯 일제는 자신들의 패망을 코앞에 두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지금은 사쿠라와 단풍나무의 천국으로 변한 자신들만의 성지(聖地)에서 얼토당토않게 그저 그 옛날과 같은 또 한번의 전승을 간절히 꿈꾸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화, 2020/07/28- 0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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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

‘부민관 폭파 의거’ 75주년 기념 행사

1945년 7월 24일 조선인으로는 유일하게 일본 중의원까지 지낸 친일거두 박춘금이 조직한 대의당 주최로 ‘아세아민족분격대회’가 열렸다. 이 대회는 내선일체와 황민화를 앞세워 태평양전쟁에 조선 젊은이들의 참여를 선동하기 위한 것으로 조선총독, 조선군사령관을 비롯한 일제의 수괴들과 거물급 친일파들이 대거 참석하고 있었다. 대회 소식을 사전에 입수한 ‘대한애국청년당’ 소속 조문기(1927~2008, 민족문제연구소 제2대 이사장 역임), 유만수(1924~1975), 강윤국(1926~2009) 등은 대담하게 대회장에 다이너마이트 2개를 설치, 폭파시켜 대회를 무산시켰다. 이 통쾌한 의거로써 패망 전 최후의 발악을 하던 일제와 친일파들의 간담을 서늘케 하였다.
‘부민관 폭파 의거’는 일본 패망 직전 경성 한복판에서 조선독립의 의지를 널리 알린 일제강점기 의열투쟁의 대미를 장식한 쾌거로 평가받고 있다. 연구소는 매년 의거일에 기념행사를 진행하고 있으며 특히 의거 70주년이었던 2015년 7월 24일에는 의거 현장인 서울특별시의회 본 회의장에서 재연극 ‘정의의 폭탄’을 공연한 후 영상과 교육자료로 제작하여 서울 시내 중·고등학교 210여곳에 배포한 바 있다. 서울특별시의회 역시 3·1운동 100주년이었던 2019년 서울특별시의회 본회의장이 항일투쟁의 현장임을 알리는 홍보 영상과 전시물을 제작해 독립정신 고취에 나서고 있다.
연구소는 코로나19 예방을 위한 사회적 거리두기에 동참하기 위해 의거 기념식은 생략하고 7월 24일 임헌영 소장, 윤경로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장, 이항증(임정 초대 국무령 석주 이상룡선생 후손), 차영조(임정 비서장 동암 차리석 선생 후손), 장병화(광복군 장이호 선생 후손), 김재운 신흥무관학교기념사업회 기획팀장, 방학진 기획실장 등이 김인호 서울시의회 의장과 함께 의회 내 부민관 의거 전시 시설을 관람하고 면담했다. 이 자리에서 서울 왕산로(의병장 허위 선생의 호를 딴 도로로 청량리 시조사 입구에서 신설동역에 이르는 길)에 왕산 허위 의병장 동상 건립 등에 대한 의견을 나눴다. 한편 연구소 후원회원이기도 한 김인호 의장은 이날 “우리 민족은 큰 위기를 겪을 때마다 굳은 의지와 기개로 반드시 위기를 극복해낸 경험이 있다.”고 언급하며 “부민관 폭파 의거 75주년을 맞이해 우리의 민족정신을 다시금 되새기고, 지금 처한 위기를 의연하게 대응해나가는 서울시의회가 되겠다.”고 밝혔다

수, 2020/08/26- 0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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