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 콘텐츠로 건너뛰기

도시의 심장부를 점령한 일제의 침략신사

지역

도시의 심장부를 점령한 일제의 침략신사

익명 (미확인) | 월, 2018/03/26- 17:22

01

조선신궁전경도, 77.6 X 26.9

02

용두산신사는 조선에 세워진 최초의 신사로 병합 이전에 이미 ‘관폐대사’로 승격운동이 일어날 만큼 일본인들 사이에서 큰 의미를 지녔던 신사다. 1936년 8월 1일 ‘국폐사’로 격상되었다. ‘국폐사’란 조선총독부가 관리 비용 일체를 부담하는 신사를 말한다.

 

“1678년 3월 왜관을 부산항에 설치할 때, 대마도 영주가 용두산에 평방 4척(尺)의 석조 소사(小祠)를 세워 한일 상선(商船)의 안전을 기리기 위해 금도비라(金刀比羅) 대신을 봉사한 것이 시작이었다. 처음 금도비라 신사로 칭하다 1894년 거류지신사로 개칭했고, 1899년 그 규모를 확장해 사전의 면목을 일신하자 용두산신사로 개칭했다. 이 신사는 부산을 대표하고 경남을 압도하는 조선 최고의 신사이자 대륙진출의 수호신으로 그 신위를 온 나라에 혁혁히 떨치고 있다.”
<대륙신사대관>,1941

 

서울 남산공원, 부산 용두산공원, 대구 달성공원, 전주 다가공원, 진해 제황산공원. 이들은 일제강점기에 조성된 공원으로 모두 일제의 침략신사가 자리했다. 신사神社란 일본 신도神道 신앙의 종교시설로, 왕실의 조상이나 민간 고유의 신앙 대상을 모신 건축물이다. 우리나라의 사당은 조상의 신주神主를 모신 집을 뜻하지만, 일본의 신사는 다양한 신을 경배의 대상으로 삼아 그 수가 무려 800만에 달한다. 일본을 ‘신의 나라’라고 표현하는 이유다.
1876년 부산 원산 인천 등이 개항된 후 조성된 일본인 거류지에는 서양식 공원이나 호텔, 교회 등과 같은 서구식 건물들이 들어섰다. 강제병합 이전 공원이나 묘지 등은 세금이 없는 땅이었기 때문에 곳곳에 일본인들을 위한 공원이 만들어졌고, 신사 설립도 적극 추진되었다. 1910년 일제가 조선을 강제병합하자 조선이 일본의 지배를 받게 된 것이 오히려 다행스러운 일이며 ‘천황’의 은혜로 선전하기 위해 조선총독부는 ‘천황’을 대중들에게 각인시키기 위한 시설로 ‘신사’를 이용했다.

 

03

대구 달성공원 내 황조요배전

04

전주 다가공원 내 전주신사

05

진해 제황산공원 내 진해신사

 

일본에서 메이지 ‘천황’이 사망하고 다이쇼 ‘천황’ 즉위 대례를 맞아 신사 관계 법규를 정비한 뒤인 1915년 8월 조선에서도 조선총독부령 「신사사원규칙」이 제정되었다. 신사와 사원은 희망자 30명 이상의 연서를 통해 설립을 허가받는 것으로 정해졌지만 사실상 그 이전부터 존재하던 신사가 공인되었다. 또 1917년 3월에는 「신사에 관한 건」으로 작은 규모의 신사, 즉 신사神祠도 총독의 허가를 받도록 하고 그 관리를 규정하여 보호, 육성하였다.
산 입구부터 계단을 쌓아 신사로 올라가는 참배로를 만들고, 산 중턱에는 도리이鳥居를 세워 도시 어느 곳에서도 우러러 볼 수 있는 곳에 신사를 지었다. 신사가 조성된 공원 주변에는 관공서와 금융기관, 경찰서 등 일제 핵심 통치기구들이 밀집했다. 이렇게 신사는 도시 중심부에 ‘식민통치의 성지聖地’로 자리 잡았다.
일제 침략신사의 목적을 가장 충실하게 구현한 신사는 ‘조선신궁’이다. 1912년부터 추진해 1920년 기공식을 가진 후, 1925년에 완공했다. 조선신궁이 들어선 남산은 조선시대 도성 사산四山의 하나이자, 금산禁山으로 엄격히 관리되었으며 국사당國師堂이 자리잡고 있는 등 한양의 수호산으로 여겨졌던 곳이다. 일제는 조선신궁을 건립하기 위해 산 정상의 국사당을 이전하고 현재 남산식물원 일대의 서쪽 산허리를 완전히 깎아냈다. 조선 초기부터 신성시하여 오던 남산은 침략신사인 조선신궁이 자리 잡은 천황제 이데올로기의 성역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 강동민 자료팀장

시민들의 의견

댓글 달기

Plain text

  • 웹 페이지 주소 및 이메일 주소는 자동으로 링크로 전환됩니다.
  • 줄과 단락은 자동으로 분리됩니다.
  • 사용할 수 있는 HTML 태그: <a href hreflang> <em> <strong> <cite> <blockquote cite> <code> <ul type> <ol start type> <li> <dl> <dt> <dd>
이미지
무제한 수의 파일을 이 필드에 업로드할 수 있습니다.
50 MB 한계입니다.
허용된 유형: png gif jpg jpeg.
Enter the YouTube URL. Valid URL formats include: http://www.youtube.com/watch?v=1SqBdS0XkV4 and http://youtu.be/1SqBdS0XkV4.
CAPTCHA
스펨 사용자 차단 질문

[소장자료 톺아보기•15]

건물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지만
<식민통치의 심장, 조선총독부> 기념엽서

남산에 위치한 구 조선총독부 청사

남산에 위치한 구 조선총독부 청사

 

경복궁 근정전 앞을 가로막은 형태로 지어진 조선총독부 신청사

경복궁 근정전 앞을 가로막은 형태로 지어진 조선총독부 신청사

 

경성의 명소로 소개하며 유통된 조선총독부 엽서들

경성의 명소로 소개하며 유통된 조선총독부 엽서들

 

경복궁 앞에 공사 중인 조선총독부 신청사, 조선총독부청사신영지, ⓒ 국립중앙도서관

 

1910년 8월 29일, 일제는 식민통치 기관 설립을 위해 「조선총독부 설치에 관한 건(朝鮮総督府設置ニ関スル件)」을 공포, 최고 통치기구이자 수탈기구인 조선총독부를 설치하였다. 식민지 조선의 입법·사법·행정기구는 모두 조선총독에 직속되었고, 1910년 9월 30일에 칙령 354호로 「조선총독부관제」가 공포됨으로써 조선총독부의 중앙 조직이 1관방 5부제로 구성되었다.
조선총독부의 행정조직이 새롭게 구성하게 되자 총독부와 중앙기관의 청사가 필요하게 되었다. 처음에 총독부는 남산 왜성대에 위치하였던 기존의 통감부 건물을, 중앙기관의 청사는 기존의 중앙관아나 관찰부, 일본이사청 등의 건물을 사용하였다. 필요에 따라 지속적으로 청사를 증축하였는데 ‘청사의 산재(散在)로 인한 집무 불편 및 노화’를 이유로 조선총독부 신청사 건립이 추진되어 1916년 6월 26일 지진제(地鎭祭)와 함께 신청사가 착공되었다.
조선총독부 신청사는 일제 식민통치의 상징적인 건물이었기 때문에 조선 내 최고기관으로서 권위를 나타내기 위해 입지 선정부터 심혈을 기울였다. 위압적인 식민통치를 위해 조선의 중심부인 경복궁, 그것도 경복궁의 중심이자 조선왕실을 상징하는 건축물인 근정전 앞에 대규모의 건축물로 계획하여 영구적인 청사로 사용하고자 했다.
또한 도시의 중심축인 광화문 앞 육조거리를 건물의 중심축과 일치하도록 설계함으로써 도시의 중심에 신청사를 두고자 하였다. 내부공간의 구성은 정면의 주 출입구와 중앙 홀을 중심으로 하는 가로축과 양 측면의 부 출입구를 중심으로 한 세로축을 중심으로 엄격한 日자형의 대칭으로 구성하여 상징성을 극대화하였다.
기초공사는 1916년 7월에 착수하여 1917년 3월 말까지 진행되었는데 말뚝은 압록강 기슭에서 벌목한 나무 9,388그루가 사용되었다. 또한 건물에 사용된 콘크리트조의 총용량은 3,248 입평, 철근 중량은 1,220여 톤으로 매일 800여 명의 조선인 노동인력이 투입되었다.

1920년 7월 10일 정초식(定礎式)과 1923년 5월 17일 상량식(上梁式)을 거쳐 1926년 10월1일 시정기념일에 맞춰 낙성식(落成式)을 거행함으로써 10년간의 긴 공사를 마무리하고 신청사가 준공되었다.
조선총독부 신청사는 5층 건물로 크기는 전면 약 131m, 측면 약 70m, 건평 2,219여 평, 연건평 9,471여 평에 달하는 건축물이었다. 건물 전체에 화강석을 두른 외관으로 높이는 정면 중앙부의 경우 약 23.3m, 첨탑 상부까지는 약 54.7m였다. 엄청난 크기로 식민지 조선인들을 압도한 조선총독부 신청사는 1945년 8월 독립을 맞이할 때까지 19년 간 조선인들에게 공포와 억압, 수탈의 상징이 되었다.
광복 후 미국의 제24군단사령부로 사용되다가 1948년 8월 15일부터 대한민국 정부청사인 중앙청으로 사용되었다. 군사독재정권까지 계속 중앙청으로 사용되던 청사는 1986년 6월부터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사용하였다. 김영삼 정부가 들어선 후 일제잔재 청산과 민족정기 회복 차원에서 광복 50주년인 1995년 철거가 단행됐다.
조선총독부 철거 결정 당시에 ‘일제 침략의 상징인 건물을 완전히 철거해야 한다’는 의견과 ‘오히려 건물을 보존해 역사의 교훈으로 삼아야 한다’는 의견이 강하게 충돌하였으나 결국 1995년 8월 15일 조선총독부 청사 중앙돔 첨탑철거를 시작으로 1996년 11월 전체 건물을 완전히 해체했다. 청사를 철거한 부재(部材)들은 현재 독립기념관 야외공원에 ‘조선총독부 철거부재 전시공원에 전시되어 있다.
불과 25년 전까지 민주혁명의 공간인 경복궁 앞 광화문에는 식민통치의 심장 조선총독부 청사가 자리 잡고 있었다. 건물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지만 아직도 뿌리 깊게 남아있는 ‘식민지 유산’을 청산하는 것이 진정한 해방이 아닐까.

• 강동민 자료팀장

화, 2020/05/26- 19:51
0
0

[소장자료 톺아보기 28]

다색판화로 보는 청일전쟁

 

• 강동민 자료팀장

1. 대일본해륙군조선상륙도 大日本海陸軍朝鮮上陸之圖
일본군 제1진 해군 육전대가 전함에서 상륙정으로 갈아타고 인천에 상륙한 모습을 묘사한 다색판화. 동학농민운동을 빌미로 청국이 파병 하자 일본은 텐진조약을 내세워 조선에 병력을 파견했다.

 

2. 조선경성 오오토리 공사 대원군을 호위하다 朝鮮京城 大鳥公使大 院君ヲ護衛ス
조선정부의 철병요구를 묵살한 일본은 조선의 내정에 개입할 것을 결 정하고 경복궁을 점거한 뒤 친일내각을 세웠다. 이 과정에서 조선군 과 전투를 벌이며 말을 탄 대원군을 호위하는 오오토리 공사가 경복 궁에 입성하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3. 조선풍도근해 격전 일군함대 대승리도 朝鮮豊島近海激戰日軍艦隊 大勝利の圖
7월 25일에 일본군은 아산만의 풍도 앞바다에서 청국 군함을 기습 공 격, 청일전쟁의 서막이 올랐다. 청나라의 순양함 제원(濟遠)과 광을 (廣乙)이 조선의 풍도 앞바다에서 일본의 순양함 요시노(吉野)와 나 니아(浪速) 함대 사이에 포격을 벌이다 도주하였다. 일본함대가 도주하는 청나라 함대를 쫓아갔는데 광을은 결국 좌초하고 제원은 일본 에 노획되었다.

 

4. 육군사단대만세 陸軍師團大萬歲
1894년 7월 29일 아산 전투를 묘사한 다색판화. 전투에서 패한 청국 군을 끝까지 쫓아가는 대규모 일본 군인들의 모습을 묘사했다. 쓰러 져 있는 군인들은 청국 병사뿐이며 쫓기듯 도망가는 청국병사들은 작 게, 쫓아가는 일본 병사들은 압도적으로 표현했다.

 

5. 조선평양대격전 朝鮮平壤大激戰
1894년 9월 15일 평양 전투를 묘사한 다색판화. 일본군이 평양으로 진 격하여 파죽지세로 청국군을 무찌르고 있다.

 

6. 아국대승리 적진 군기를 빼앗다 我軍大勝利 敵陣ニ軍旗ヲ奪ス
말을 탄 일본 장교가 청국기를 빼앗고, 이를 끝까지 놓지 않으려는 청 국 병사의 모습을 그린 다색판화. 일본의 군대가 적군인 청국의 깃발 을 빼앗으면서 전쟁의 마지막을 가늠하게 해준다.

 

더위가 한창이던 1894년 7월, 한반도는 무더위를 집어 삼키는 화염에 휩싸였다. 국토의 곳곳이 불타고 무너지고 시체가 뒹구는 처참한 전쟁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들었던, 청일전쟁이 일어난 것이다.
식민지역사박물관 개관 준비가 한창이던 2018년 3월 20일, ‘식민지역사박물관과 일본을 잇는 모임’을 통해 다카하시 가즈히꼬(高橋和彦) 씨가 족자 2점을 기증했다. 바로 청일전쟁을 주제로 한 두루마리 형태의 다색판화(錦繪, 니시키에) 33점을 2개의 족자로 분할하여 제작한 것이었다.
이번 자료는 바로 다카하시 씨가 기증한 청일전쟁 판화 중 몇 점을 소개한다. 니시키에는 당대의 풍속을 서민 감각으로 그려낸 근세 일본의 회화로 목판화 방식을 채용한 에도 시대에 크게 발전하였다. 실제로 전쟁 상황을 한번도 본 적이 없는 화가들의 상상력을 바탕으로 그려진 것이지만 일반 민중은 청일전쟁의 동향을 니시키에를 통해 사실처럼 알게 되었다. 특히 시중에 광범위하게 유통되었기 때문에 대중들에게 조선 침략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게 하는 선전수단으로 이용되었다.
청일전쟁이 조선을 사이에 두고 조선에서 일어난 전쟁임에도 니시키에 속에 조선인을 소재로 한 그림은 거의 찾아볼 수가 없다. 청일전쟁이 시작되면서 조선은 이미 니시키에 화가들의 상상력 속에서 사라져버리고 멸시의 대상은 일본군에게 패주하는 오합지졸 청국 병사들에게 옮겨갔다. 꽁무니 빼는 청나라 병사들을 멸시적인 비속어로 매도하고 조롱하며 청일전쟁을 ‘문명을 위한 전쟁’으로 미화했다. 거의 모든 그림이 근대적인 무기를 갖춘 병사들이 일사불란하게 전투하는 늠름하고 용감한 일본군의 모습을 묘사했다. 반면 청국 병사는 재래식 무기인 창과 칼을 지닌 오합지졸로 묘사했다. 

화, 2021/07/27- 23:33
0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