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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자료] 강제동원 희생자 유골봉환 문제 대응을 위한 시민사회단체 긴급 기자회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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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자료] 강제동원 희생자 유골봉환 문제 대응을 위한 시민사회단체 긴급 기자회견

익명 (미확인) | 수, 2018/03/21- 18:50

[보도자료] [다운로드]

“돌아오지 못한 조선인 유골, 한일 정부가 책임져야”
“강제동원 희생자 유골 131구, 창고로 보낼 수 없습니다”
강제동원 희생자 유골 문제에 대한 일본시민사회의 노력에
한일 정부는 최소한의 성의를 보이고,
근본적으로 양국 정부가 나서서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0321-1

1. 일제 강점기 강제동원 희생자 유골문제가 아직도 해결되지 않고 있습니다. 많은 유족들이 제사도 올리지 못하며 유골을 찾아다니고 있고, 일본과 한국 양국정부가 이를 2005년부터 조사한다고 하였지만, 제대로 이행되지 않고 있습니다.

2. 이런 가운데 일본 사이타마현 토코로자와시 ‘곤죠인 사찰’의 유골131구가, 유족을 찾지 못한 채 임의로 처리될 상황에 놓여있습니다. 해방 이후 배를 마련해 귀향길에 나섰던 조선인들이 태풍 등으로 인해 조난을 당했고, 이 유해가 이키 섬과 스시마 섬의 해안으로 떠밀려와 매장되었습니다. 1976년 이키 섬과 1983년 스시마 섬에서 유해가 발굴되었고, 이 유골 131구가 현재 ‘곤죠인 사찰’에 모셔져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곤죠인 측에서 더 이상 희생자들의 유해를 모실 수 없는 상황이고 이 유해들을 옮길 마땅한 곳을 3월 30일까지 찾지 못할 경우에는 후생노동성 창고로 옮겨지게 됩니다. 그리고 이렇게 되면 유골은 한국으로 돌아오기가 더욱 어려워질 뿐더러, 유족을 찾게 되기는 거의 불가능해진다고 볼 수 있습니다.

3. 이에 대해 일본 시민사회에서는, 곤죠인 사찰에 더 이상 유골을 모시기 어려운 상황이라면 이키섬의 ‘텐토쿠지’에 유골을 다시 모시겠다고 요구하고 있습니다.

4. 이에 한국의 시민사회단체는, 이 유골에 대해 일본정부가 임의로 처리하지 말고 일본 시민사회의 요구를 존중할 것을 요구합니다. 한국정부도 일본정부에 이런 입장을 정확히 전달하고 교섭해야 합니다.

5. 근본적으로는 한국과 일본, 양국정부가 유골봉환문제에 대한 책임있는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DNA조사, 봉환사업 등에 대해 양국정부가 직접 나서야 합니다.

6. 한국의 시민사회단체들은, 유골봉환문제가 강제동원 문제 진상규명에 관련된 역사문제이며, 또한 한일 과거사를 바로 세우는 문제, 그리고 희생자와 희생자 유가족을 위한 인권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이에 긴급 기자회견을 진행하며, 이후에도 한국 시민사회는 물론 일본시민사회와 연대하여 공동으로 대응해나갈 것입니다.



강제동원 희생자 유골봉환 문제(곤죠인 사찰유골) 대응을 위한
시민사회단체 긴급 기자회견

○ 주최 : 근로정신대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 / 남북역사문화교류협회 / 대한불교조계종 민족공동체추진본부 / 민족문제연구소 / 우리겨레하나되기운동본부 /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과거사청산위원회 /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 / 평화디딤돌 / 한국노동조합총연맹

일시 : 2018. 03. 22.(목) 오전 11:00

장소 : 일본대사관 앞 (트윈트리 타워)

○ 담당 :
민족문제연구소 대외협력팀장 김영환 / 010-8402-1718 / [email protected] 
이하나 (겨레하나 정책국장) / 010-6584-2121 / [email protected]

○ 세부내용

▲곤죠인 사찰 유골문제에 대한 상황 공유와 경과 보고
곤죠인 사찰 131구 유골에 대한 상황, 일본 시민사회의 요구 등에 대한 상황 공유

▲유족, 대학생, 노동, 종교계 등 시민사회 각계 발언

▲강제동원 희생자 유골봉환 문제에 대해 일본대사관, 외교부에 요구사항 전달
일본대사관에 시민사회의 요구사항을 전달하고, 외교부 면담을 추진합니다
 


< 별첨 >

강제동원 희생자 유골봉환 문제에 대한 한국 시민사회단체의 요구사항

○ 일본정부에 대한 요구사항
1. 당면 현안으로서 곤죠인(金乗院)에 안치되었던 한국인 유골을 3월 말에 임의로 처리하지 말고, 일본 종교단체와 시민단체가 요구하는 이키 섬(壱岐島)의 텐토쿠지(天徳時)에 모시고자 하는 뜻을 존중하여 처리하라.

2. 일본정부는 1938년 이후 군인.군속 등으로 끌려가 사망한 한국인 유골 조사와 봉환사업을 하루 빨리 실시하고, 한국인 강제동원 희생자 유족들의 DNA 정보를 수집하라.
 
3. 일본정부는 일제시기 강제동원 되어 사망한 한국인 노동자 유골에 대해서도, 봉환 책임을 강제동원 관련 기업에게만 떠넘기지 말고 직접 조사와 봉환사업에 나서라.

○ 한국정부에 대한 요구사항

1. 당면 현안인 곤죠인 한국인 유골에 대해 일본 정부가 임의로 처리하지 못하도록 외교적 교섭을 즉각 실행하라.
 
2. 한국정부는 강제동원 희생자 유골 조사와 봉환사업에 대한 종합적인 대책을 마련해 하루빨리 일본정부와 교섭에 나서라.

3. 유골문제에 관해 한국정부가 교섭한다면 일본정부가 응할 것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2년간 교섭하지 않은 무책임에 대해 강제동원 희생자 유족들에게 사죄하라.

4. 강제노동 피해 배상 관련한 한국 대법원 확정판결에 따를 후속조치 마련과 유죠은행에 보관 중인 한국인 강제노동 피해자 저금통장 반환, 유네스코 산업유산과 강제노동 문제, 유골 조사와 봉환 문제 등 강제동원 문제를 종합적이고 체계적으로 다룰 정부 내 컨트롤 타워를 만들어라.
 

2018년 3월 22일
 근로정신대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 / 남북역사문화교류협회 / 대한불교조계종 민족공동체추진본부
민족문제연구소 / 우리겨레하나되기운동본부 /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과거사청산위원회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 / 평화디딤돌 / 한국노동조합총연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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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170619-삼성SDS, 인도네시아 물류BPO사업 공략 가속_0

삼성SDS, 인도네시아 열대우림 파괴 기업 코린도와 비즈니스 관계 중단 선언  

- 세계 시장과 언론, 시민사회로부터 지탄받는 코린도, 입지 점점 좁아져
  국제환경단체 마이티어스(Mighty Earth)와 국제소비자단체 섬오브어스(SumOfus)는 지난 12일 ‘삼성 SDS가 한국계 인도네시아 대기업인 코린도(Korindo)와 합작회사 및 여타 다른 사업을 추진할 계획이 없음을 알려왔다’고 밝혔다. 삼성 SDS는 지난 6월 자사 홈페이지를 통해 ‘삼성 SDS는 코린도 그룹과 글로벌 통합물류 운영에서 전략적 협약식을 체결하고 향후 합작회사(joint venture)로 발전시킬 계획이 있다’고 보도한 바 있다. [caption id="attachment_183248" align="aligncenter" width="640"]삼성SDS는 지난 6월 19일 코린도(Korindo)그룹과 글로벌 통합물류 운영을 위한 전략적 협약식을 체결했다고 밝혔다. (사진 왼쪽부터)삼성SDS SL사업부장 김형태 부사장, 인도네시아 코린도 그룹 박인철 부회장 /사진제공=삼성SDS 삼성SDS는 지난 6월 19일 코린도(Korindo)그룹과 글로벌 통합물류 운영을 위한 전략적 협약식을 체결했다고 밝혔다. (사진 왼쪽부터)삼성SDS SL사업부장 김형태 부사장, 인도네시아 코린도 그룹 박인철 부회장 /사진제공=삼성SDS[/caption] 삼성SDS의 이번 발표는 마이티어스와 섬오브어스가 삼성에 코린도 그룹과 업무협약을 중단할 것을 촉구하는 집중 온라인 캠페인을 펼친 뒤에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매우 의미 있는 선언으로 받아들여진다. 지난 7월 섬오브어스는 청원 페이지를 개설해 15,000명의 삼성 고객을 포함, 73,000여 명이 넘는 시민들의 지지서명을 받았으며 마이티어스는 같은 달 31일 한국을 방문해 삼성의 CSR팀 임원들에게 이를 직접 전달했다. 최근 국제산림보호 단체인 레인포레스트 레스큐(Rainforest Rescue)도 청원 페이지를 개설하면서, 서명은 188,500건 이상으로 늘었다. 지난 8월, 마이티어스와 섬오브어스는 삼성의 ‘갤럭시 노트 8’ 출시일(23일)에 맞춰 일주일간 집중 행동을 펼쳤다. 2,000명이 넘는 삼성 고객들이 삼성 기기로 삼성에 메일을 보내고, 1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온라인 액션을 취했으며, 약 100만여 명의 사람들이 삼성이 열대우림 파괴에 연루되어있음을 알리는 광고를 접했다. 결국 삼성 SDS 는 8월 31일 마이티어스에 서한을 보내 "삼성 SDS는 양 사 간의 사업을 개발할 계획이 없다"고 밝히며 코린도와의 사업추진계획을 공식 철회하기에 이르렀다. 마이티어스의 데보라 래피더스(Deborah Lapidus) 국장은 “삼성SDS가 인도네시아 열대우림 파괴로 악명 높은 기업인 코린도와 비즈니스 관계를 끊기로 결정한 것에 대하여 환영한다”고 밝혔다. 그는 “코린도는 자신들의 산림파괴 행위로 인해 팜유 뿐 만아니라 여러 사업 분야에서 위험에 처해있다”면서 “코린도가 사업적인 측면에서도 더 이상 산림파괴가 용납되지 않는 현실을 받아들이길 바란다”고 지적하고 코린도가 지속가능한 방식으로 사업 방침을 수립하고 이행할 것을 촉구했다. 코린도는 인도네시아 파푸아와 북말루쿠 지역에서 팜유 플랜테이션을 운영하며 저지른 대규모 산림파괴로 인해 세계 시장과 언론, 시민사회로부터 대대적인 압박에 직면해있다. 지난 해 ‘불타는 낙원(Burning Paradise)’ 보고서가 출시된 후 세계 주요 팜유업체들은 코린도와 거래를 중단했고, 지속가능한 산림경영 인증기관인 국제산림협의회(Forest Stewardship CounCil, FSC)는 코린도의 산림파괴 사안에 대해 조사를 착수했다고 밝혔다. 국제사회에서 요구하는 기준을 준수하며 좋은 기업으로 성장할지, 의미 있는 변화를 이루지 못한 채 ‘열대우림 파괴자’로 낙인찍혀 국제사회에서 멀어질 것인지는 전적으로 코린도의 선택에 달려있다.
2017년 9월 14일
환경운동연합
공동대표 권태선 박재묵 장재연 사무총장 염형철

문의:  김혜린 활동가(010-6426-2515 / [email protected])

목, 2017/09/14- 0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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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요청서

탈핵희망국토도보순례 기자회견

위험한 원전을 멈추고, 탈핵 한국을 만들자!

-핵발전소 확대정책 중단하라!

-월성1호기 수명연장 취소 판결, 항소를 철회하라!

-재생에너지 지원 및 확대정책 실시하라!

  인류와 모든 생명의 생존을 위협하는 핵발전소의 위험성을 알리고, 탈핵의 희망을 담아 기도하며 전국을 걸어온 탈핵희망국토도보순례단이 2월 18일(토) 광화문에 도착합니다. 이번 탈핵희망 도보 순례는 지난달 10일 영광핵발전소에서 출발하여 광주, 고창, 부안, 군산, 서산, 당진, 안산, 인천을 거쳐 서울 광화문까지 온 마음으로 588.6km 31일간 이어졌습니다.   2013년 6월 시작된 탈핵희망국토도보순례는 고리에서 시작하여 동해안 춘천 서울광화문 서해안 남해안을 돌아 고리까지, 다시 고리에서 부산 대구 대전 서울광화문까지, 다시 영광에서 광주 대구 경주 월성까지, 다시 영광에서 광주 전주 대전 청주 수원 서울광화문, 다시 고리에서 울산 경주 안동 제천 여주 서울 광화문까지, 이번에 영광에서 광화문까지 총 248일간 전국 4,341km를 순례했습니다.   핵발전소 확대를 중단하고, 태양광 등 재생에너지를 통해 탈핵의 길로 나아가기를 염원하는 탈핵희망순례단의 이번 일정을 마무리하는 행사를 아래와 같이 진행합니다. 많은 관심과 취재를 요청 드립니다.
○ 일 시 : 2017년 2월 18일 (토) 오후 1시 ○ 장 소 : 광화문광장 세월호천막, 이순신장군상 앞 * 12시 같은 자리에서 탈핵미사 후 연속진행 됩니다. ○ 프로그램 : 여는말씀 탈핵희망국토도보순례 보고 각계 발언 기자회견문 낭독 ○ 주 최 : 탈핵희망국토도보순례단 / 핵없는사회를위한공동행동  
  문의: 핵없는사회를위한공동행동 공동집행위원장 양이원영(010-4288-8402) 탈핵희망국토도보순례단 삼척핵발전소반대투쟁위원회 대표 성원기(010-6375-6354)

기자회견문

우리나라는 지금 25기의 핵발전소가 가동 중입니다. 그동안 정부는 핵발전 중심의 전력 정책을 펼쳐왔고, 그 결과 우리나라는 핵발전소 밀집도가 전 세계에서 가장 높은 나라가 되었습니다. 또한 이대로 가면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10개의 핵발전소가 밀집한 단지가 부산, 울산의 고리(신고리)와 울진 두 곳에 운영될 예정입니다. 그것도 모자라 청정지역 삼척과 영덕에 새로운 핵발전소 단지를 또 추진하고 있습니다.   다음 달이면 일본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 6주기가 됩니다. 재앙과 같은 사고를 통해 우리 국민과 인류 전체는 핵발전소가 얼마나 위험한지 다시 한 번 알게 되었습니다. 첨단 기술과 안전성을 자랑하던 핵발전소는 지진과 쓰나미 앞에 처참하게 무너졌고, 사고 이후 아직도 회복되지 못한 채 방사성 물질을 계속 내뿜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정부는 후쿠시마의 교훈을 망각한 채 핵발전소 건설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작년 9월 발생한 한반도 사상최대규모의 경주 지진과 550번을 넘어선 여진의 여파까지 우리나라도 더 이상 지진 안전지대가 아님이 증명되었습니다. 그리고 정부와 한수원에서는 경주에 활성단층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원전과 방폐장을 건설하기 위해 사실을 숨기고 은폐한 정황이 밝혀지기도 했습니다. 지진이 발생하고 경주 시민들은 제일 먼저 핵발전소가 터지지 않을까 걱정했습니다. 현재까지도 여진이 계속 되고 있어 시민들은 두려움에 떨고 있는데 원전을 가동하고 있습니다.   이달 초인 2월 7일 서울행정법원에서는 노후원전인 월성1호기의 수명연장 승인을 취소한다는 판결을 내렸습니다. 재판을 통해 승인 과정에 중대한 결격사유들이 있음이 속속 밝혀졌습니다. 그러나 정부기관은 당장 항소의사를 밝히며 부끄러운 줄을 모르고 있습니다. 핵의 위험성이 알려지면서 핵발전소는 이제 전국 어디에서도 환영받지 못할 기피시설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정부는 계속해서 신규원전 계획을 세우고, 핵연료 공장, 연구시설 등 핵 위험을 확대하는 연구개발에 막대한 세금을 낭비하고 있습니다. 지역 주민의 의사를 무시한 고준위 핵폐기물 관리계획도 일방적으로 강행하고 있습니다.   반면 우리나라는 20년째 OECD 국가 중 재생에너지 전력 비중이 꼴찌입니다. 많은 나라들이 재생에너지 100%를 국가 에너지정책의 목표로 삼을 때 우리는 재생에너지는 대안이 아니라며 핵발전소만 고집해 왔기 때문입니다. 석유 한 방울 나지 않아 에너지를 아껴야 한다지만, 수요관리와 에너지 효율 향상은 말뿐인 구호가 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탈핵도보순례를 하며 에너지정책전환을 요구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탈핵 그리고 재생에너지 확대라는 간절한 바람과 의지를 표현하는 행동으로서 전국을 걷고 있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이 지속불가능하고 미래 세대를 갉아먹는 전력 정책에 동의할 수 없습니다. 지진위험지역에 지어진 핵발전소의 위험을 더 이상 두고만 볼 수 없습니다. 비리와 각종 사고, 쏟아져 나오는 핵폐기물은 감당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핵발전소로 인한 온배수와 송전탑 피해는 전국 각지에서 끊이지 않고 나타납니다.   우리는 이 목소리를 우리나라 방방곡곡으로 퍼뜨릴 것입니다. 더 많은 이들을 만나 ‘핵발전소 없는 대한민국’을 만들자고 설득할 것입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행동할 것입니다. 한 방울 낙숫물이 모여 단단한 바위를 뚫듯, 우리의 힘은 수십 년간 지속되어 온 핵발전 위주의 전력 정책을 무너뜨릴 것입니다. ‘핵발전소 없는 대한민국’ 그것은 결코 허황된 꿈도 아니고 실현 불가능한 일도 아닙니다. 그리고 지금 현재를 살고 있는 우리 모두와 미래세대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일입니다. 그 청정한 미래를 위해 여기 모인 모든 분들과 힘차게 걸어 나갈 것입니다.    

2017년 2월 18일

탈핵희망국토도보순례단 / 핵없는사회를위한공동행동

문의: 핵없는사회를위한공동행동 공동집행위원장 양이원영(010-4288-8402) 탈핵희망국토도보순례단 삼척핵발전소반대투쟁위원회 대표 성원기(010-6375-6354) KakaoTalk_20170214_103553152
월, 2017/02/20- 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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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란만 키운 충북도의 청주 제2쓰레기매립장 주민감사청구 ‘각하’ 결정
- 청주 제2쓰레기매립장 논란 감사원 간다! -

 

 

 지난 8월 11일(금) 충북도청 소회의실에서 진행된 ‘충청북도 주민감사청구심의회’에서 청주시민 399명(청구인 대표 유영경)이 제출한 청주시 제2쓰레기매립장(이하 제2매립장) 주민감사청구가 ‘각하’되었다. 이로써 지난 6월 7일 주민감사청구서 제출로 시작되어 7월 20일 399명의 청구인 서명 제출까지 주민감사청구를 위한 두 달여 동안의 노력이 감사도 한번 이루어지지 못하고 중단되었다. 충북도의 이번 각하 결정은 그간 제2매립장 문제해결을 위해 노력한 청주시민들의 노력에 찬물을 끼얹는 심히 유감스런 결정이고 새로운 논란까지 불러일으키고 있다.

 

 먼저, 지방자치법 제16조에는 ‘지방자치단체와 그 장의 권한에 속하는 사무의 처리가 법령에 위반되거나 공익을 현저히 해친다고 인정되면 감사를 청구할 수 있다’라고 되어 있다. 그런데 충북도는 ‘청주시가 ES청원, ES청주의 폐기물 처리시설에 대한 적합통보 행위가 위법 사항이 없다’라고 하였다. 사실 주민감사를 청구한 399명은 청주시의 위법사항이 있는지 없는지 알지 못한다. 하지만 충북도 역시 청주시의 위법사항에 대해 정확히 알지 못하고 이런 결정을 내렸다. 왜냐하면 청주시의 위법사항에 대한 충북도 차원의 조사와 검증은 없었고 순전히 청주시(피청구인)가 제출한 자료만을 가지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보자. 피청구인 입장에서 실제로 위법사항이 있다 한들 위법사항이 있다고 하겠는가? 위법사항 여부는 충청북도가 감사를 통해서 확인했어야 하는 부분이다. 그런데 충청북도는 청주시의 답변만 듣고 위법사항이 없다고 판단하여 주민감사 자체가 이루어지지 않도록 ‘각하’ 결정을 한 것이다. 이는 충청북도가 주민감사청구제도의 취지와 목적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이라 할 수밖에 없다.

 

 두 번째로 충북도의 ‘공익 침해가 아니었다’라는 부분 역시 마찬가지다. 사(私)기업의 폐기물 처리시설보다 제2매립장이 더 공익에 부합하는 시설이라는 것은 누구나 안다. 제2매립장은 2014년 말 지붕형 매립장으로 공고를 내서, 2016년 6월 지붕형으로 최종 확정되었다. 그런데 2015년 8월 입지타당성조사 중간보고회에서 신정동, 후기리 두 후보지 모두 추가 부지 확보가 필요하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그렇다면 당연히 청주시는 추가 부지 확보를 위해 노력했어야 했다. 하지만 청주시는 추가 부지 확보를 위해 노력하기는커녕 제2매립장 부지 바로 옆에 신청된 ES청주 폐기물처리시설에 적합 통보를 내줘 제2매립장 추가 부지 확보를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결과적으로 청주시의 ES청주 적합통보로 제2매립장은 추가 부지 확보가 불가능해 지붕형 매립장을 조성할 수 없게 되었고, 청주시의 3년 동안의 지붕형 매립장 건설 노력도 수포로 돌아갔다. 이후 청주시의 일방적인 노지형 매립장 변경 조성으로 수많은 논란과 갈등이 유발된 것은 모두 아는 사실이다. 그리고 노지형 매립장의 경우 지붕형 보다 침출수, 분진, 냄새 피해 발생우려가 월등히 높다는 것을 청주시도 알고 있다. 이런 상황임에도 ‘공익 침해가 아니었다’는 충북도의 판단은 뭔가 부족해도 한참 부족한 판단이다. 도대체 ES청주의 폐기물처리시설과 제2쓰레기매립장 중 어떤 것이 더 공익(公益)에 부합하는 것인지 충북도에 묻지 않을 수 없다.

 

 이제 우리는 감사원에 정식으로 감사를 청구하려고 한다. 그래도 감사원은 공익(公益)이 무엇인지, 청주시의 이런 앞뒤가 다른 행정이 무엇이 문제인제 정확하게 밝혀낼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제2매립장 문제해결을 위한 노력도 계속해 나갈 것이다. 감사원 감사청구와 별도로 청주시와의 대화, 시민 대토론회 등을 통해 제2매립장 논란을 해결하고 매립장이 환경피해 발생우려가 적은 안전한 매립장으로 조성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것이다.


2017년 8월 16일

청주충북환경운동연합, 충북참여자치시민연대, 충북청주경실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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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2017/08/16- 15: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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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훈 노동당 서울시당 위원장

신곡보 철거요구 1인시위 2일차, 정상훈 노동당 서울시당 위원장

정상훈 노동당 서울시당 위원장 ○ 24일, 환경운동연합 등 시민사회단체와 진보정당은 경인운하 연장반대 및 신곡보철거를 요구하는 릴레이 1인시위를 이어갔다. 2일차 주자는 노동당 서울시당 정상훈 위원장이 맡았다. 정상훈 위원장은 “최근 문 대통령이 4대강 정책감사를 지시했고, 오늘 오전에는 환경단체들이 4대강 정비사업에 대한 공익감사를 청구했다.”며, “강이 제대로 흐르지 못하게 막고, 물을 썩게 만든 보를 하루 빨리 철거하여 강이 마음껏 흐를 수 있는 세상, 한강이 편안한 서울을 만들기 위해 노동당 서울시당도 함께 하겠다."고 밝혔다.   ○ 1인 시위는 매일 점심시간마다 릴레이로 진행될 예정이다. 225일(목)은 환경운동연합 신재은 활동가, 26일(금)은 서울복지시민연대 김경훈 간사, 29일(월)은 생태보전시민모임 민성환 대표가 릴레이를 이어간다. 환경운동연합 등은 이후에도 토론회, 감사청구 등의 활동을 이어나갈 예정이며, 30일에는 경인운하 연장하는 여의나루 토목사업 중단 및 박원순 시장 면담을 요청하는 기자회견을 개최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2017년 5월 24일

환경운동연합

공동대표 권태선 박재묵 장재연 사무총장 염형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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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자료]신곡보 철거요구 1인시위 2일차, 정상훈 노동당 서울시당 위원장

수, 2017/05/24- 1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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횡령과 폭리로 미군정하 법정에 선 박흥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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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3월 19일 횡령 및 포고령 위반 혐의에 대한 박흥식의 1차공판이 열렸다. <동아일보> 1946.3.20.>

1946년 2월 15일 화신백화점 사장이자 조선비행기공업주식회사 대표이사인 박흥식은 신내영 검사가 지휘하는 검사국에 의해 구속되었다. 그러나 당시 경기도경찰부장으로 있던 장택상의 농간으로 담임검사의 허락도 없이 풀려났다가 이튿날 다시 잡혀왔다. 그는 검사국에 구속된 지 열흘 만인 2월 26일 장물기장죄(贓物寄臧罪)·횡령·사기·포고령 위반 등의 죄명으로 기소되어 공판에 회부되었다. 검사의 공소장에 의해 박흥식의 피의사실을 정리해보면 다음 세 가지다.
첫째, 박흥식은 1945년 8월 27일 조선군사령관 고쓰기 요시오 중장로부터 조선비행기공업주식회사의 정리기금이란 명목으로 3,150만 원을 받아 식산은행의 차입금, 민규식 외 351명의 주주들에게 주식대금을 지불하고 남은 1,300만 원을 착복하였다.
둘째, 일본의 무조건 항복으로 회사가 문을 닫게 되자 강제 징용되어 끌려온 2천여 명의 노동자들이 퇴직금과 위로금 문제로 들고 일어났다. 그래서 8월 27일 박흥식이 조선군사령관에게서 노자문제 해결기금과 위로금 명목으로 2천만 원을 받았으나 노동자들에게는 전혀 주지 않고 조선은행과 식산은행 등에 가족, 친척, 회사 임원 명의로 차명 예금하여 이를 은닉하였다.
셋째, 1945년 11월 15일 화신백화점을 개업하면서부터 박흥식은 조선비행기공업주식회사 종업원에게 조선총독부가 배급해준 포목 등 생필품을 전부 매장으로 돌려 매입가의 최고 45배로 판매하여 1946년 2월까지 70만 원의 폭리를 취했다.

 

이 사건의 첫 공판은 3월 19일 오전 10시부터 서울재판소 대법정에서 이천상 판사의 주심 아래 개정되었다. 방청석에는 박흥식 가족과 화신 관계자, 박흥식의 심리광경을 보고자 몰려온 군중들이, 변호사석에는 강병순, 배정현, 백붕제, 김광근이 앉아 있었다. 이런 가운데 박흥식은 고동색 두루마기에 회색 바지, 검정운동화, 귀를 덮은 머리에 용수를 쓰고 손목에 고랑을 차고 간수에게 끌리어 법정에 들어섰다.
이천상 재판장이 “피고는 어떠한 뜻으로 일본 군부가 관계하는 조선비행기회사 초대 사장에 취임하였는가”라고 묻자, “당시 총독부와 군사령부에서 강제적으로 시켜 피할 길이 없이 부득이 취임하였을 뿐이며 군부에서 받았다는 돈도 회사에서 당연히 받을 돈이며 이 돈 역시 나 개인을 위해 쓴 일은 없으며 앞으로 이것을 활용해서 과거를 청산하고 오로지 나라를 위하여 대학도 세우고 큰 병원도 설립하고 이외 여러 가지 대사업을 하려고 설계를 세우는 도중에 이런 일을 당하였다”고 유창하게 답변하였다.
제1회 공판에서 시작하여 7차 공판까지 열렸는데 그동안 박흥식이 복역하던 서울형무소 감방에는 전기히터 등 각종 편의시설이 설치되어 있어 감방이 아니라 별장이나 다름없다는 비아냥을 들었다. 변호인단은 담당검사의 병환으로 공판이 연기되자 판사를 찾아가 공판 강행을 요청하거나 박흥식의 건강이 나빠졌다는 이유로 병보석을 강청하는 등 무리한 요구를 일삼아 사회적인 질타를 받기도 하였다.
3월 26일 제6회 공판으로 심리를 전부 마치고 신내영 검사는 “박흥식은 세상이 다 아는 민족반역자이므로 마땅히 극형에 처해도 가할 것이나 그 법적 근거가 아직 없음이 유감이다. 그러나 장물기장, 폭리 등 죄상이 뚜렷하니 징역 3년에 벌금 200만 원을 구형한다”고 준엄하게 논고하였다. 검사의 징역 3년 구형에 대해 사회적으로 의견이 분분하였으나 박흥식에게 실형 언도가 내릴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이천상 판사는 5월 3일 서울지방법원 제4호 법정에서 열린 선고공판에서 무죄를 언도하였다. 그는 “미군정하에 있는 본 법정으로서는 친일파와 민족반역자를 처단할 아무런 법적 근거가 없다”고 운을 뗀 후 검사가 제시한 피의사실 세 가지에 대해 모두 증거불충분을 이유로 무죄판결을 내렸던 것이다.
그로부터 3년 후인 1949년 반민특위 재판정에서도 박흥식은 전혀 반성함이 없이 모든 친일행위를 조선총독부와 일제의 강압에 못 이겨 한 것이고, 조선비행기공업주식회사 덕택으로 2천 명의 동포가 목숨을 온전히 보존할 수 있었다고 오히려 큰소리쳤다. 이승만 정권의 탄압으로 철저히 망가진 반민특위는 결국 적반하장의 매판자본가 1호에게 무죄판결을 내림으로써 역사정의 실현의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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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남포 미곡상에서 ‘조선의 백화점왕’으로
박흥식은 1903년 8월 6일 평안남도 용강 지역 토호였던 부친 박제현과 모친 이선 사이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11살 연상의 친형 박창식이 일찍 죽고 아버지도 39세의 나이로 사망하여 어린 나이에 집안의 가장 노릇을 하게 되었다. 박흥식은 1915년에 용강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고향에 머물며 한학을 배우다가 17세 때 진남포로 나와 진남포상공학교를 다녔으나 중도에 그만두었다.
1919년 2월 박흥식은 진남포 비석리에서 미곡상을 시작했다. 19세 때인 1920년 2월에 평안남도 용강에서 선광당인쇄소를 설립했으며, 1924년 3월 자본금 10만 원의 선광인쇄주식회사로 개편하고 사장으로 취임했다. 1925년 10월부터 1928년 5월까지 면화와 미곡 등 지역물산 매매와 알선을 하는 서선흥산주식회사를 경영하였다. 미곡상을 시작으로 상업활동에 투신한 박흥식은 천부적인 상술과 특유의 친화력을 발휘하여 사업에 성공, 용강 지역 최대 지주로 성장하였고 이후 인쇄업과 무역업을 통해 향후 지물업을 시작할 재원을 마련할 수 있었다.
박흥식은 1926년 서울로 올라와 그해 6월 선일지물주식회사를 설립하였다. 처음에는 서울 시내의 출판사와 인쇄소를 중심으로 영업하였는데, 인쇄용지를 다량 구입하는 고객에게 금강산 관광과 일본 유명 관광지 여행을 사은품으로 제공하는 판매전략이 기대 이상의 호응을 받아 전국 각지의 수백 군데 거래처를 확보할 수 있었다. 그 여세를 몰아 이듬해인 1927년 지물업의 메이저 사업인 신문용지에 도전하였다. 박흥식은 신문용지를 공급받기 위해 일본에 건너가 굴지의 제지회사와 교섭했으나 거절당하였다. 하지만 곧바로 수입선 다변화를 꾀해 스웨덴의 제지회사와 교섭하여 양질의 신문용지를 훨씬 싼 가격에 공급받았다. 더욱이 조선총독부 외사과장 다나카 다케오(田中武雄)의 알선과 박리다매 전략으로 동아일보, 조선일보, 중앙일보, 매일신보 등과 신문용지 전속구매계약을 체결하였다. 그 결과 1929∼1932년 매년 150만 원을 초과하는 판매액에 2만 원 안팎의 당기순이익을 얻었다. 25만 원의 소자본으로 출발한 선일지물주식회사는 이후 2배로 증자하고 연간 판매고가 500만 원에 이르는 중견기업으로 성장했다.
1930년대 초반은 1929년 세계대공황의 여파가 차차 가라앉고 서구자본주의경제가 기지개를 켜기 시작하였고, 일제는 상품시장 확대와 원자재 확보를 위해 만주 침략을 강행한 시기였다.
1920년대를 거치며 조선인들의 문화수준과 소비성향이 한껏 높아졌고, 이 무렵 호경기를 반영하듯이 서울에서도 미쓰코시, 조지아, 미나카이, 히라타 등 4곳의 일본백화점이 경합을 벌이며 성황 중이었다. 박흥식은 오랜 기간 관심을 두고 있던 자본주의의 꽃인 백화점사업에 진출하였다. 1931년 신태화가 경영하던 금은 잡화의 화신상회를 인수하여 자본금 100만원의 화신상회를 설립하였고, 1932년 5월 목조 2층 규모의 화신상회를 콘크리트 3층으로 증개축해 최신식 초대형 종합잡화상으로 탈바꿈시켰다. 하지만 두 달 뒤 바로 옆에 들어선 최남이 경영하는 동아백화점과 2개월간 전쟁 같은 혈투를 치렀다. 박흥식은 혈투 직후 염가양품(廉價良品) 전략 즉, 질 좋은 상품을 싸게 판다는 방침을 천명하고 일본 오사카에 3층 빌딩을 임대하여 그곳에 오사카 구매부를 설치하고 일본 제조업체로부터 각종 상품을 공장가격으로 직수입하였다. 그 덕택에 동아백화점은 물론 일본 백화점보다 훨씬 싼 가격에 물건을 내놓아승리할 수 있었다. 1932년 최남의 동아백화점을 인수해 종로 상권을 평정하였고, 평양에 세워진 평안백화점까지 인수하여 조선인 유일의 백화점 사장이 되었다. 1935년 연초에 화신상회가 화재로 전소하자 화신백화점 신축공사를 추진해 1937년 11월 지하 1층과 지상 6층, 연건평 2,034평, 엘리베이터 4대, 에스컬레이터 2대를 구비한 최신식 화신백화점을 개설하였다.
이로부터 광복 직후까지 화신백화점은 서울의 명물이자 랜드마크로 자리 잡았다. 1938년 6월에는 진남포에 3층짜리 화신백화점 진남포지점을 개설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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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937년 11월 새로 신축된 화신백화점. 지하 1층과 지상 6층, 연건평 2,034평, 엘리베이터 4대, 에스컬레이터 2대를 구비한 최신식시설로서 당시 미쓰코시, 조지아 등 일본백화점의 규모를 능가했다. 옆의 도면은 1937년 개장시 화신백화점의 층별 매장 배치도.

 

1934년 박흥식이 백화점사업과 연계해서 야심차게 준비한 것은 연쇄점 방식의 유통업 진출이었다. 당시 4대 일본백화점이 주요 지방도시에 지점을 설치해 현지 중소 상인의 타격이 컸다. 이에 대한 대책으로 박흥식은 1934년 6월 연쇄점 모집 공고를 일간신문에 발표하였다.
조선 전역에 걸쳐 1천여 개소의 화신연쇄점을 개설하는 한편, 화신측이 이들 연쇄점에 자금과 상품을 공급하는 등 자금과 판매를 일원화한다는 구상이었다. 또한 지방의 소상인들로 구성된 가맹점의 자금 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출자금 대신 부동산을 받아 이를 담보로 식산은행에서 자금을 대출받았다. 이 자금으로 상품을 구입해 연쇄점에 공급하며 상품 결제도 현금이 아닌 장기 어음으로 하도록 하고 그 어음을 식산은행에서 할인받아 현금화하려는 것이었다. 1934년 11월 제1기 계획으로 350개의 연쇄점이 개설되었고(1937년 중일전쟁의 여파로 추가 모집을 중단함), 저가 상품 구매를 위해 일본 오사카지점을 신설하는 한편 개별 연쇄점에 대한 원활한 상품공급을 위해 주요 5개 도시에 상품배급소를 설치하였다. 연쇄점 사업이 확대되자 1936년 3월 자본금 200만 원의 화신연쇄점주식회사를 설립하여 화신백화점에서 독립시켰다.
1939년 시점에서 박흥식은 화신백화점을 필두로 한 6개의 화신 계열사를 거느리고 있었다. 자본금 25만 원의 선일지물주식회사(용지도매업), 100만 원의 화신주식회사(화신백화점), 200만 원의 대동흥업주식회사(부동산), 200만 원의 화신연쇄업주식회사, 270만 원의 화신무역주식회사, 50만 원의 제주도흥업(부동산, 취체역 사장은 박준석)이 바로 그것이다. 1926년 상경하여 자본금 25만 원으로 시작한 사업을 13년이 채 되지 않아 총 850여 만 원의 재벌 기업으로 성장시킨 박흥식은 ‘조선의 백화점왕’으로 불렸고 1938년 호별세 25,000원을 납부하여 서울 조선인 중 최대 납세자에 올랐다. 이와 더불어 그해 말 박흥식은 조선인 기업인 경성방직과 조선생명보험, 일본인 기업인 조선석유와 북선제지화학공업 등 8개 사의 중역도 겸직하였다.
조선비행기공업 설립 주도
1941년 일제는 진주만을 기습해 태평양전쟁으로 확전됐다. 1938년 ‘국가총동원법’ 시행으로 시작된 전시통제체제는 더욱 강화되어 1941년 ‘생활필수물자통제령’과 ‘물자통제령’ 1942년 식량관리법 등으로 철저한 가격통제와 생활필수품 배급통제가 일상화되었다. 이러한 위기상황에서 1941년 9월 박흥식은 화신무역주식회사, 화신연쇄점주식회사, 선일지물주식회사를 합병해서 자본금 500만 원의 화신상사주식회사를 설립하여 대처해나갔다. 이 무렵 주력기업인 화신백화점은 일본산 수입의존도가 50% 정도여서 경성의 4대 일본 백화점에 비해 유리하여 미나카이, 히라다 두 백화점을 앞지르고 미쓰코시, 조지아 두 백화점과 대등한 영업실적을 보였다. 하지만 일본 수입품 비중이 80%를 차지한 화신연쇄점으로서는 총체적 위기였다. 앞서 말한 각종 경제통제령이 발동되고 물자공급이 중단되면서 1년 사이 350개의 연쇄점은 250개로 감축되었고 1943년에 거의 문을 닫게 되었다.
박흥식은 1942년 12월 도쿄에서 열린 산업경제인 대표자대회에서 일본 천황을 ‘배알’한 후 비행기 제작에 뛰어들 결심을 하였다.1) 1944년 7월 12일 박흥식의 주도로 조선비행기공업 설립을 위한 제1회 발기인총회가 개최되었는데 이때 이하라 준지 참모장을 비롯해 군부 7명, 총독부 7명 등이 참석하였다. 이 자리에서 설립 취의서를 확정하고 이를 조선총독부에 전달하였고 7월 17일 조선총독에게서 설립인가를 받았다. 설립 취의서에서 회사 설립 목적과 사업개요, 설립 이유, 예산 및 자금조달을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첫째 회사 설립 목적과 사업개요는 조선군의 지도감독에 따라 군용비행기 제조를 목적으로 한다. 1차 사업년도에 제조에 필요한 건설 및 부품 가공설비를 시설하고 2차 사업년도부터 일관작업을 추진해 월 60기 이상 제작하고, 3차 사업년도부터 월 120기 이상 생산한다. 둘째 회사 설립 이유는 세계정세의 가열찬 전국(戰局)을 고려해서 비행기의 대량생산이 초미의 급무이며 국가적 요청이다. 셋째 자금은 자본금의 반액 납입과 일부를 전시금융금고 차입금으로 충당해서 시설하고 사업 확장에 따라 2회 자본금 납입을 통해 조달한다.”


  1. 흔히 반민특위 박흥식 공판자료에 의거해 박흥식이 비행기 제작에 참여한 이유가 조선총독부와 조선군사령부의 끈질긴 회유와 종용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그런 면도 작용했겠지만 극심한 전시통제기에 이르러 유통업의 전망이 어두워지자 새로운 사업을 모색하고자 하는 박흥식의 야망이 크게 작용했다고 본다. 다음은 7월 17일 조선비행기공업의 설립인가를 받은 후 박흥식 설립위원장이 앞으로의 포부를 밝힌 글인데, 비행기 제작 참여 계기와 그 과정을 간략히 언급하고 있다. “재작년 12월 나는 산업경제계 대표자의 1인으로서 황공하옵게도 천황폐하께 배알의 분부를 받자옵는 파격의 광영을 입었는데 이때 나는 산업경제인으로서의 책무의 중대함을 깨닫고 국가를 위한 직접 봉공의 길은 없을까 하고 생각한 결과, 비행기 증산을 위하여 정신(挺身)하기를 결의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이 결의와 계획을 총독부 및 군부에 피력하였던바 파격적인 지원 아래 직간접으로 편달을 받고 또 재계 각위의 절대한 원조에 의하여 예의 본사를 설립하게 된 것이다.”(<매일신보> 1944.8.19. 2면)

 

1944년 9월 임시발기인총회를 열어 총 자본금 5천만 원 중 제1회 납입자본금 2,500만 원의 출자관계를 결정, 주식총수 100만주 가운데 85만주는 발기인에게 배당하고 나머지는 조선금융단에 의뢰해 전국에서 공모하기로 하였다.
1944년 10월 조선비행기공업이 정식 설립하여 박흥식이 사장에 취임하였고, 12월에는 일본육군대신으로부터 군수회사로 지정받았다. 설립 직후 조선비행기공업의 출자구성을 보면, 법인주주로는 전시금융금고(지분율 17%) 조선식산은행(17%) 동양척식(16%) 화신주식회사(15만주, 15%) 등이고 발기인 주주 중 조선인으로는 박흥식(2만주, 지분율 2%) 박중양(0.1%) 장직상(0.3%) 한상룡(0.3%) 민규식(0.3%) 김연수(0.5%) 박춘금(1%) 백낙승(2%)이다. 박흥식과 화신주식회사는 총 100만주 중에 17만주와 17%의 지분율이고 금액으로는 400만 원으로 조선인 주주 중에 압도적 격차로 1위를 차지하고 있다.
조선비행기공업에서 만들고자 한 비행기는 ‘キ79丙’ 기종의 목철(木鐵)혼합기였다. ‘キ79丙’ 고등연습기는 만주비행기제조가 생산한 전투기 기종으로 1939년 노몬한 전투에 참가한 79식 전투기를 고등연습기로 개조한 것이다. 조선총독부와 조선군사령부의 지도하에 이 기종을 생산하기로 결정하고 만주비행기제조와 기술협약을 맺고 비행기 생산자재를 수입하였다. 이와 별도로 박흥식은 10월 하순 기술진을 초빙하고 공작기계를 마련하기 위해 도쿄와 상하이를 찾아갔다. 도쿄에서는 중앙당국과 선진 비행기공장 임원들과 교섭한 결과 군수성 칙임기사 하타에 외 60여 명의 기술진을 확보하였다. 이어서 상하이로 건너가 상하이 주둔 노보리부대와 교섭하여 비행기 부품 제작에 필요한 공작기계류 550대를 입수하였다. 한편 국내에서는 조선직물과 동양방적의 안양공장 및 인근 토지 10만 평을 매수해 정비와 조립공장, 격납고와 비행장을 순차적으로 건설토록 하였다. 또한 기술자 양성을 위해 박흥식이 이사장으로 있던 광신상업학교를 조선비행기공업학교로 전환해서 항공과와 기계과 두 학급 240명을 선발하여 기술교육에 힘썼다. 박흥식을 비롯한 조선비행기공업 임원들의 노력으로 1945년 5월 당시 1호기의 주익(主翼) 제작을 마치고 8월에 시험비행이 성공하였다. 이어서 제2·3호기의 부분품 제작도 9월말에 완료할 예정으로 안양공장의 비행기 양산체제가 완성될 즈음 일제 패망을 맞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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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キ79’ 고등연습기의 하나. 만주비행기제조(주)가 97식 전투기를 디그레이드하여 고등 연습기로 제작한 것이다. 박흥식의 조선비행기공업(주)도 이와 동일한 기종의 비행기를 생산키로 하였다.

 

정경유착과 그 귀결로서의 전쟁협력

박흥식의 성공 신화 이면에는 조선총독부와 일본 정부 곧 제국주의 권력과의 추악한 정경유착이 자리한다. 1926년 상경하여 선일지물주식회사를 차리고 신문용지의 거래처를 확보할 때 조선총독부 관료의 개입으로 가능했고, 1930년대에 들어와 화신백화점과 화신연쇄점의 설립자금과 운영자금을 국책은행이었던 조선은행과 식산은행으로부터 손쉽게 대출받았다. 사업이 어려움에 처할 때마다 조선총독이나 총독부 관리와의 비밀 회동을 통해 문제를 해결해나갔다. 1935년 연초 대목 때 화신백화점이 화재로 전소되자 평소에 친분이 두터웠던 우가키 총독을 만나 구 종로경찰서 자리를 빌려 임시매장을 차리는 것을 허락받아 화신백화점의 영업 손실을 최소화했다는 일화는 총독부와의 유착관계가 어느 정도인지 짐작케 한다.
1937년 중일전쟁 이후 전시통제기에 들어서자 박흥식은 관변단체, 친일단체 간부로서 활동하고, 전쟁협력을 위한 각종 강연과 기고, 국방헌금 헌납 등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대표적인 관변단체·친일단체 활동을 살펴보면 사상범의 전향업무를 담당한 경성보호관찰소 촉탁보호사(1937), 총독부 시국대책조사회 위원(1938), 조선인의 전쟁협력을 이끌어내기 위해 조직한 전쟁협력단체인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발기인 겸 이사(1938), 경성부 지원병후원회 이사(1939), 영국 타도를 목적으로 조직된 배영동지회 상담역(1939), 일제의 대표적인 경제수탈기관인 동양척식주식회사 감사(1941),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을 확대 개편한 국민총력조선연맹 이사(1941), 조선임전보국단 발기인 겸 상무이사(1941) 국민총력조선연맹 연성부 연성위원회 위원 겸 국민총력 경기도연맹 참여(1943) 그리고 패망 직전인 1945년 2월 미영격멸, 성전필승을 내건 대화동맹 심의원으로 활동했고 그해 6월 전쟁협력과 황도주의 확산을 목적으로 박춘금이 조직한 대의당 위원을 맡았다.
이와 함께 막대한 자금을 직접 국방헌금으로 헌납했을 뿐 아니라 국방헌금을 독려하는 활동을 전개했다. 1937년 7월 노구교사건이 일어나자 종로경찰서에 5,000원을 냈고, 9월에는 애국경기호헌납기성회의 집행위원을 맡았다. 1939년 종로경찰서 신축 기성회비로 5만 원을 기부했다. 1941년 8월 임전대책협력회가 주관한 채권가두유격대에 참여하여 일반인에게 국방채권을 강매하였다. 그해 12월 화신주식회사와 화신상사의 종업원에게 국방헌금 3만 원을 갹출하여 종로경찰서에 헌납하였다. 1943년 7월 민규식 김연수와 함께 청소년들의 군사훈련을 위해 쓸 연성비 5만 원씩을 국민총력조선연맹에 헌납했다.
또한 일제의 침략전쟁을 찬양하고 전시통제시책에 순응하며, 징병 징용을 독려하는 강연과 연설, 기고를 하였다. 「대동아전과 우리의 결의-광명의 천지를 향하여」(<조광> 1942.2), 미나미 총독의 이임에 즈음한 「영원히 못 잊을 자부(慈父)」(<매일신보> 1942.5.30), 1942년 12월 일본산업경제간담회에 조선인 대표로 참석하여 천황을 만나고 그 감격을 피력한 「배알의 광명의 감읍」(<매일신보> 1942.12.16)과 「배알 1주년-지성으로 봉공」(<매일신보> 1943.12.17) 등 다수의 친일 논설과 담화를 발표하였다.

해방 후 세 번의 구속, 그리고 사후의 역사적 심판

해방이 되자 박흥식은 1946년 12월 화신백화점, 흥한피복주식회사, 화신무역주식회사를 설립하고 취체역에 취임하였다. 1950년 화신산업주식회사 사장, 재판법인 흥한재단 이사장, 1953년 흥한방직주식회사 회장, 1959년 신선무역주식회사 회장을 지냈다. 1962년 경제개발계획 1차년도 때 외자 도입을 통해 흥한화학섬유주식회사를 설립했으나 전력난과 불경기로 큰 적자를 보고 2년 만에 손을 뗐다. 1980년 10월 화신과 그 계열사들이 300억 원의 연쇄부도로 파산하면서 박흥식은 재계를 떠났다. 1994년 5월 10일 92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해방 후 박흥식은 미군정, 이승만정권, 박정희정권 등 각 시기에 걸쳐 한 차례씩 모두 세 차례나 구속되었지만 그때마다 용케 빠져나왔다. 첫 번째는 앞서 말했듯이 1946년 2월 횡령과 폭리로 미군정하 서울지방법원에서 기소되어 징역 3년과 벌금 200만 원이 구형되었으나 무죄선고를 받았다. 두 번째는 1949년 1월 반민법 제4조 7항(비행기·병기·탄약 등 군수공업을 책임 경영한 자)·제7조(범죄자 옹호·도피 협조자) 위반 혐의로 반민특위 제1호로 체포되었으나 9월 26일 그는 ‘공민권 정지 2년’이라는 가벼운 구형에 이어 당일로 무죄판결을 받고 풀려났다. 세 번째는 1961년 5·16군사쿠데타 직후 국가재건회의에 의해 부정축재 혐의로 체포되었으나 그해 7월 석방되었다.
여러 차례 구속과 무죄판결을 반복하며 정경유착과 친일의 죄를 무난히 넘겨온 그였지만 2009년은 절대 피할수 없는 역사적인 심판의 해였다. 정부기관인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조선총독부의 내선일체 황민화정책과 전쟁수행에 적극 협력한” 죄목(반민족행위진상규명특별법 2조 11호 13호 14호 17호 18호 각호 위반)으로 그를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결정하였고, 그해 민족문제연구소가 펴낸 <친일인명사전>에 그의 친일행적이 소상히 실렸기 때문이다.
그동안 일제강점기 최고의 성공신화로 포장되어온 화신기업의 성장은 제국주의 권력과의 유착과 굴종의 대가였고 일제 자본의 논리에 철저히 종속된 매판자본이었음이 역사자료에 의해 남김없이 드러났다. 역사 심판에는 시효가 없다는 경구를 다시금 떠올리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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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신고등학교 교정에 세워져 있었던 박흥식동상. 이 동상은 박흥식 사후인 1996년 광신재단 이사장으로 있던 그의 아들이 세운 것이다. 2001년 10월부터 민족문제연구소 서울관악동작지부 회원들이 광신고등학교 정문에서 박흥식 동상 철거를 촉구하는 시위를 벌이자 그해 연말에 자진 철거되었다.

∷ 박광종 선임연구원

월, 2017/09/25- 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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