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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친일 군인’ 박정희의 건물에 갇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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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친일 군인’ 박정희의 건물에 갇히다

익명 (미확인) | 화, 2018/02/27- 18:10

문화재청 ‘현충사 박정희 친필 현판 존치’ 판단 유감… 숙종 현판이 ‘복원 원칙’에 걸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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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충사 현판 박정희 대통령 친필 현판으로 1967년 걸렸다. ⓒ 구진영

문화재청(청장 김종진)은 지난 21일 문화재위원회 사적분과(위원장 이재범 전 경기대 교수)의 검토 결과에 따라 박정희 전 대통령이 쓴 아산 현충사 사당 현판을 그대로 유지하기로 했다.

문화재청이 밝힌 존치 이유는 세 가지다. 첫째, ‘박정희 전 대통령 친필 현판은 숙종 사액 현판을 철거하고 교체 설치한 것이 아니라 성역화 사업 당시 신 사당을 건립할 때 제작·설치하게 된 것’이며 둘째, ‘충무공파 후손들 간에도 서로 의견이 엇갈리고 있으며’ 셋째, ‘1967년 현충사 성역화사업 당시 만들어진 신 사당에 1932년 국민성금으로 건립된 구 사당에 걸려있는 숙종 사액 현판을 떼어내 옮겨 설치하는 것은 그 시대의 역사적 의미를 담고 있는 건물과 현판의 일체성을 훼손’한다는 것이다.

‘원형 복원 원칙’ 무시한 문화재청의 판단

문화재청이 밝힌 박정희 현판 존치 첫째 이유를 반박하기 위해서 우선 ‘광화문 제 모습 찾기’ 사업을 살펴보자. 광화문은 임진왜란(1592년)으로 소실됐다가, 고종 4년(1867년)에 다시 지어졌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에 조선총독부 청사가 신축되면서 1926년 해체돼 경복궁 동편인 지금의 국립민속박물관 정문으로 옮겨지면서 원형이 훼손·변형됐다. 그리고 1950년 한국전쟁으로 목조 부분이 불에 타 없어지고 석축만 남게 됐다.

그러다가 박정희의 특별지시로 1968년 12월 원래 자리로 옮겨 다시 지었다. 당시 박정희 정권과 언론들은 이를 두고 ‘복원’이라고 주장했지만 박정희가 새로 쓴 현판을 빼곤 목조였던 누각마저 모조리 콘크리트로 만들면서 당시 미술평론가는 물론 복원에 참여한 인사조차 ‘콘크리트 모조 건축’ ‘콘크리트 모뉴먼트’라고 말했다.

“광화문을 영원히 욕되게 하고 XX을 만들어 버린다”(<경향신문> 1968.3.20)라는 극단적인 평가에도 박정희는 광화문 완공 당시 자신의 친필 현판이 마음에 들지 않자 얼마 후 현판 글씨를 새로 써서 걸었다. 박정희가 문화재와 문화재 복원에 대해 어떻게 인식했는지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렇듯 박정희의 콘크리트 광화문은 2006년 12월 4일 ‘광화문 제 모습 찾기 선포식’과 더불어 철거될 때까지 38년을 이어오다 2010년 8월 15일 지금의 모습으로 ‘원형 복원’됐다(물론 지금도 광화문이 제대로 원형 복원됐는지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목소리가 여전히 존재한다). 원형 복원 원칙에 따라 ‘콘크리트 모조’ 광화문에 걸렸던 박정희 친필 현판은 19세기 말 중건 당시 훈련대장으로 서사관(書寫官)에 임명돼 광화문 편액을 쓴 임태영의 글씨로 교체돼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과정에서 문화재청은 <경복궁 영건일기>를 발견해 오랫동안 정학교가 광화문 편액을 썼다는 기존 통설을 수정하는 성과도 냈다. 이렇듯 ‘광화문 제 모습 찾기 사업’은 문화재청이 20년에 걸쳐 끈기 있게 완성한 경복궁 복원정비사업의 마지막 단계였으며 그중에서도 광화문 현판 복원은 화룡점정이라 할 수 있었다.

‘광화문 제 모습 찾기 사업’에서 원형 복원 원칙을 고수했던 문화재청이 왜 현충사에 대해서는 전혀 다른 태도를 보이는지 모르겠다. 1968년 박정희가 만든 광화문과 마찬가지로 현충사 신 사당 역시 박정희가 만든 콘크리트일망정 숙종 사액 현판이 있는 만큼 숙종 현판으로 교체해야 그나마 원형 복원 원칙에 가까운데 말이다. 2008년 소실돼 2013년 모습을 드러낸 숭례문 역시 원형 복원 원칙을 따랐음은 당연하다.

박정희가 새운 신 사당의 역사적 의미가 숙종보다 큰 걸까

문화재청은 박정희 현판 존치의 두 번째 이유로 ‘충무공파 후손들 간에도 서로 의견이 엇갈리고 있음’을 들고 있으나 그것이 왜 존치 이유가 될 수 있는지 도저히 이해가 안되므로 굳이 반박하지 않겠다.

문화재청의 박정희 현판 존치 세 번째 이유는 ‘1967년 현충사 성역화사업 당시 만들어진 신 사당에 1932년 국민성금으로 건립된 구 사당에 걸려있는 숙종 사액 현판을 떼어내 옮겨 설치하는 것은 그 시대의 역사적 의미를 담고 있는 건물과 현판의 일체성을 훼손’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일제강점기인 1932년 건립된 현충사 구 사당에 걸려 있는 조선시대 임금인 숙종 현판도 ‘건물과 현판의 일체성을 훼손’하고 있으므로 떼어내야 할까. 숙종 대인 1707년에 처음 세워진, 300년이 넘는 현충사 구 사당의 역사적 의미보다 1968년 박정희가 세운 불과 50년의 신 사당의 역사적 의미가 더욱 크다는 것에 동의하기 어렵다.

‘박정희의 역사를 남겨야 한다’는 의지가 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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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충사 현판 1707년 숙종이 사액한 현판의 모습 ⓒ 구진영

300년 역사를 지닌 현충사의 의미를 살리기 위해서는 숙종 사액 현판은 더욱 값지다. 서울 탑골공원 정문인 삼일문 현판은 서예가인 일중 김충현의 글씨가 걸려 있던 것을 1967년 12월 중수 준공식을 하면서 박정희의 친필 현판으로 교체됐다. 그러다 2003년 독립선언서 서체를 이용한 현재의 현판으로 교체됐다. 삼일문은 박정희가 1967년 중수한 그대로였지만 지금의 현판은 삼일운동의 발상지인 탑골공원의 정신을 담아 독립선언서 서체로 새로 만든 것이다. 삼일문의 경우에서 보듯 문화재청의 주장처럼 ‘건물과 현판의 일체성’은 영원불멸의 원칙은 아니다.

문화재청이 제시한 현충사 박정희 현판 존치의 세 가지 이유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현재의 현충사는 박정희가 심혈을 기울여 조성한 곳이니 그 어떤 것도 개입할 여지가 없이 온전히 박정희의 역사를 그곳에 남겨야 한다’는 의지가 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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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산 현충사 지도. 2만여 조선 민중이 뜻을 모아 세운 구 현충사(빨간색 동그라미)는 배변감을 느껴 화장실에 갈 때만 볼 수 있는 처지다. 파란색 동그라미 안의 현충사는 박정희가 1967년 성역화작업 당시 세웠다. ⓒ 문화재청 현충사관리소

당대 최고의 명필로 인정받는 숙종이 일필휘지로 써내려간 힘찬 필치의 현충사 현판은 문화재청 관계자들의 눈에는 박정희가 조성해 놓은 현충사에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이야기다. 숙종 현판이 걸려있는 구 사당은 박정희가 조성한 충무문-홍살문-충의문-현충사(신 사당)로 이어지는 중심축에서 벗어나 화장실 옆에 놓여 있는 처량한 신세다(이기환, ‘현충사, 꼭 박정희 현판이어야 하나’, 이기환의 역사흔적, 2018.2.8, leekihwan.khan.kr).

1932년 경매로 일본인에게 넘어갈 위기에 처한 이충무공 묘소의 위토(位土, 제사 등과 관련한 비용 충당을 위해 마련한 토지)를 성금을 모아 지켜내고 현충사(구 사당)를 중건했던 당시 2만여 명의 조선 민중들의 역사는 1968년 박정희의 현충사(신 사당)에 밀려 이제는 배변감을 느껴 화장실에 가야만 비로소 엿보게 되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충무문, 충의문 현판 역시 박정희가 썼다. 박정희는 1967년 신축 당시에는 한자로 ‘顯忠祠’ 현판을 걸었다가 1973년 지금의 한글 ‘현충사’ 현판으로 다시 걸었다. 광화문 현판을 두 번이나 다시 써서 걸었던 것처럼 말이다).

현충사에 공 들인 박정희, 그의 속내는

이러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현충사 신구 사당을 모두 살펴본 사람이라면 현충사가 ‘이순신 사당이 아닌 박정희 사당’으로 느껴진다는 평가에 어느 정도 동의할 것이다. 실제로 박정희는 2만여 명이 운집한 1967년 4월 28일 현충사 성역화사업 준공식 기념사에서 “수구 파쟁 시기 모략 아집 단견 무정견 등 전근대적이고 비생산적인 요소들이 이 나라의 새 역사 창조의 국민대열을 가로막고 있다”라면서 준공식 기념사로는 다소 어색한 발언을 했다.

이날은 당시 야당이던 신민당 후보로 아산이 고향인 윤보선과 맞선 대통령 선거일을 불과 5일을 앞둔 날이었다. 박정희 공화당 후보는 현충사에서 야당을 공격하는 일종의 선거유세를 했던 것이다. 이미 여러 연구에서 1965년 한일협정 이후 현충사를 비롯해 박정희 정권이 진행한 이른 바 성역화사업은 정권 유지를 위한 정당화 작업이었음을 밝히고 있다.

“현충사 성역화사업은 박정희가 이순신의 반일 이미지를 통해 자신의 친일 이미지 희석화하고, 이순신의 구국영웅적인 이미지를 통해 군인출신 대통령의 통치를 합리화하며, 이순신과 자신을 동일시하여 권력을 정당화했다.” – 전재호, ‘반동적 근대주의자 박정희’, 2000, 책세상 / 이상록, ‘민족의 수호신’ 만들기와 박정희체제의 대중규율화, 2004, 휴머니스트

“현충사 성역화사업의 계기는 한일협정이 제공했지만, 그 방향은 결코 반일에 있지 않았다. 즉 현충사 성역화사업의 결과로 만들어진 현충사는 반북이데올로기의 선전장, 반정부세력의 성토장, 그리고 투철한 국가관 확립을 위한 국민정신교육 도장이었던 셈이다.” – 은정태, ‘박정희시대 성역화사업의 추이와 성격’, 2005, 역사문제연구

실제로 1974년 4월부터 현충사 경역 내에 1만 평이 넘는 충무교육원이 개원돼, 학생·교원·일반 사회인사 등을 대상으로 한 정신교육과 훈련활동 프로그램이 마련됐는데 이곳에서는 중고생, 교육공무원·교수·서장·새마을운동 지도자 등을 대상으로 국민교육헌장 이념, 새마을정신교육, 유신이념, 반공・안보 교육으로 가득 채웠다(은정태, 2005). 한마디로 박정희가 충무공 정신을 빙자해 현충사를 정권 홍보의 교육장으로 활용했다는 것이다.

전국 각지에 퍼져 있는 ‘박정희의 흔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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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3년 현충사의 모습 구 현충사에서 행사를 진행하고 있는 모습. 이때는 박정희 성역화 작업 전으로 건물에 숙종 사액 현판이 걸려있는 게 보인다. ⓒ 국가기록원

<박정희 사상 서설>(정재경, 집문당, 1997)에 의하면 박정희가 직접 쓴 휘호는 1962년 1월 1일 ‘革命完遂'(혁명완수)를 시작으로 사망 당일인 1979년 10월 26일 ‘삽교천 유역 농업개발 기념탑’ 휘호까지 모두 647점에 이른다. “현충사 성역화사업이야말로 공장을 몇십 개 몇백 개 세우는 것보다 더 큰 민족적 의미를 갖는 것”이라고 역설하면서 성역화사업을 정권 유지의 수단으로 최대한 활용했던 박정희였던 만큼 그의 글씨들은 우리나라 역대 대통령들 중에서 가장 많은 곳에 현판과 금석문 등으로 남아있다.

현판으로는 <홍지문> <義節祠>(의절사) <忠烈祠>(충렬사) <육신사> <세종전> <훈민문> <文成祠>(문성사) <孤峯祠>(고봉사) 등이 있고, 이외에도 20여개가 더 남아 있다(장학진, ‘역대 대통령의 묵적 연구’, 원광대 동양학대학원 석사논문, 2016).

현판 외에도 건축물, 다리, 도로, 터널, 기념탑, 호수, 비문 등에 남겨진 박정희 글씨는 차고도 넘친다. 전 국토와 문화재를 자신의 화선지로 여겼던 박정희가 남겨놓은 흔적이 너무도 많기에 이들 모두를 없애자거나 교체하자는 주장은 하지 않겠다.

다만 수많은 문화재와 역사적 경관에 덧칠해져 있는 박정희와 박정희 시대의 정신이 원래 그 문화재와 역사적 경관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왜곡하거나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들이 지향하는 보편적 가치와 충돌된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예상컨대 이번 문화재청의 존치 결정으로 박정희 현판 교체 여론은 더욱 비등할 것이다. 문화재청은 이번 결정을 재고하고 박정희 현판을 현충사 내 충무공이순신기념관에 보관·전시하는 방안 등을 적극 검토하기를 바란다.

끝으로 박정희 현판을 대신해 숙종 사액 현판을 옮겨 설치하면 박정희 시대의 역사적 의미를 담고 있는 건물과 현판의 일체성을 훼손한다고 노심초사하는 문화재위원회 사적분과 위원들이 있는 한, 이순신 장군의 정신은 우리 시대와 교감하지 못하고 반세기가 넘도록 친일 군인이 만든 콘크리트 사당과 친일 화가가 그린 표준 영정에 갇혀 질식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를 쓴 방학진씨는 민족문제연구소 기획실장입니다. 이 기사는 뉴스퍼블리카에도 중복해서 게재됐습니다.

글: 방학진(vacationji) 편집: 김지현(diediedie)

<2018-02-27> 오마이뉴스

☞기사원문: 이순신, ‘친일 군인’ 박정희의 건물에 갇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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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식가(미리 식민지역사박물관에 가다)’

일제에 의해 나라를 빼앗긴 식민지시기, 민초들의 삶의 모습을 보여주는 아주 작은이야기를 골라 다소 깊게 파보겠습니다. 100년 전과 오늘 우리가 어떻게 연결되어있는지 추적하는 시간, 미리 식민지역사박물관에 가다.

미식가 5회 “골프, 친일귀족의 신선놀음”

출연 : 이순우, 김영환, 강동민

연출 : 임선화

금, 2018/06/01- 1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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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픽] 일제 강제동원 희생자 유골 얼마나 되나

日사찰 보관 유골 2천770위…오키나와 등 미발굴 유골 2만2천구
2004년 유골봉환 합의에도 일부만 반환…日정부 외면에 韓정부는 소극 대응

(이키<일본 나가사키현>=연합뉴스) 김병규 특파원 = 해방 후 70여년이나 흘렀지만 일제에 의해 강제로 끌려갔다 숨진 징용·징병자 중 적지 않은 사람들이 죽어서도 고향 땅을 밟지 못하고 있다.

1일 행안부 과거사업무지원단에 따르면 일본에서 발굴된 뒤 보관 중인 한반도 출신 징용·징병자의 유골은 2천770위에 달한다. 사찰이나 납골당 등 340여곳에 흩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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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 섬마을 사찰서 열린 강제징용자 유골 131위 추도식 (이키<일본 나가사키현>=연합뉴스) 김병규 특파원 = 31일 일본 나가사키(長崎)현 이키(壹岐)섬의 사찰 덴토쿠지(天德寺)가 한일 시민단체 활동가들과 종교인 등 100여명이 모인 가운데 추도식을 열고 징용 희생자와 가족 등을 포함한 한국인 유골 131위를 안치했다. 새 보금자리를 찾은 유골들은 지난달 중순까지 사이타마(埼玉)현의 사찰 곤조인(金乘院)에 있다가 일본 후생노동성의 창고와 다름 없는 보관 시설로 옮겨지며 안타까움을 샀던 것들이다. 2018.5.31 [email protected]

행안부가 일본 정부의 정보 제공 등을 통해 파악하고 있는 일본 사찰의 유골들은 홋카이도(北海道)·도호쿠(東北) 480위, 간토(關東) 560위, 긴키(近畿) 200위,주부(中部) 570위, 주고쿠(中國)·시코쿠(四國) 220위, 규슈(九州)·오키나와(沖繩) 740위 등이다.

유골 봉환 문제는 지난 2004년 노무현 당시 대통령과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당시 일본 총리가 정상회담을 통해 한반도 출신 강제동원 희생자의 유골 반환에 합의한 뒤 한때 급물살을 타기도 했다.

합의 후 도쿄도 메구로(目黑)구의 사찰 유텐지(祐天寺)의 유골 423위가 2008~2010년 4차례에 걸쳐 봉환되는 성과가 나오기도 했지만, 2012년 이명박 전 대통령의 독도 방문 이후 이와 관련한 양국 정부간 교섭이 중단되면서 진전을 보지 못했다.

그나마 봉환된 유텐지의 유골은 모두 군인과 군속(군무원)의 것으로 강제징용 노동자의 유골은 대상에서 제외됐다.

정부 간 논의가 진행되지 못하는 사이 유골 봉환은 양국의 시민단체들의 노력으로 성사되기도 했다.

한국과 일본 시민단체들은 지난 2015년 일본 북부 홋카이도(北海道)에서 징용으로 끌려갔다가 숨진 115명의 유골을 도쿄(東京)-교토(京都)-오사카(大阪)-히로시마(廣島)-시모노세키(下關) 등 강제로 끌려갔던 길을 되돌아오는 경로로 한국으로 봉환했다.

한편으로는 아직 발굴이 안된 유골들을 찾아내서 한국에 봉환해야 하는 문제도 있다.

한국과 일본의 관련 시민단체 등에 따르면 일제 강점기 말 격전이 치러졌던 일본 남부 오키나와(沖繩)를 비롯해 남태평양과 동남아시아 등에는 조선인 군인·군속의 유골이 최소 2만2천구가 발견되지 않은 채 묻혀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일본 정부는 지난 2016년 3월 ‘전몰자 유골수집 추진법’을 제정해 2차대전 당시 전몰자의 유골을 국가 차원에서 발굴하는 작업을 본격적으로 진행하고 있다.

유족의 DNA를 수집한 뒤 발굴한 유골과 대조 작업을 진행해 유골을 유족에게 찾아주고 있지만 한반도 출신자는 대상에서 제외해 한국인 전사자들의 유골을 가족들을 만나지 못하고 있다.

이미 찾아서 보관하고 있든, 아니면 앞으로 발굴해야 할 것이든 이들 두 부류의 유골 문제가 모두 풀리지 않고 있는 것은 일본 정부의 외면과 한국 정부의 무관심 때문이다.

일본 정부는 사찰에서 보관 중인 유골을 한국으로 봉환하는 일, 전사자 유골의 발굴·대조 작업에 한반도 출신자를 포함하는 문제 모두 한국 정부의 공식적인 요청이 있어야 가능하다고 밝히며 책임을 한국 정부에 미루고 있다.

이와 관련해 한국 정부는 실무선에서 일본 정부와 접촉을 하면서도 아직 유골 봉환이나 발굴에 대해 공식적인 요청을 하지 않고 있어 일본측의 핑곗거리를 만들어주고 있다는 비판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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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韓시민단체, 일본 정부에 조선인 전몰자 유골반환 촉구 요청서 (도쿄=연합뉴스) 데라사키 유카 통신원 =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이하 보추협)가 8일 일본 정부에게 한반도 출신 전몰자의 유골 반환을 촉구하는 요청서를 전달했다. 사진은 보추협 사무국 역할을 하는 민족문제연구소의 김영환 대외협력팀장(오른쪽)이 도쿄(東京) 지요다(千代田)구 참의원 의원회관에서 일본 후생노동성 담당자(왼쪽)에게 요청서를 주는 모습. 2018.2.8 [email protected]

한국과 일본은 작년 12월 일본에서 열린 한일 외교장관 회의에서 유골봉환 문제를 협의하기로 했지만, 협의에 속도가 붙지 않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2018-06-01> 연합뉴스

☞기사원문: 日외면·韓무관심에 죽어도 고향 못가는 일제 징용·징병자 유골

※관련기사

☞SBS: 일제 징용·징병자 유골, 일본의 외면과 한국의 무관심에 죽어도 고향 못가

☞연합뉴스: 갈곳 잃은 韓강제징용자 유골 131위, 日섬에서 새 안식처 찾다

☞한겨레: 바다가 삼킨 해방의 환희…일본 섬에 잠든 조선인 131명 유골

☞한겨레: [특파원 칼럼] 그들은 언제 고향으로 돌아갈까 / 조기원

금, 2018/06/01- 1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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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 2018/06/01- 1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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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름도 넣어라. 그 책에서 내 이름 빠지면 그 책은 죽은 책이다’
 
친일문제를 연구하던 임종국 선생의 아버지가 선생에게 한 말이다.
선생은 아버지의 친일행적을 친일문학론에 실었고,
선생의 유지를 이어받은 민족문제연구소는 친일인명사전에 “임문호”를 실었다.
 
“….1937년 4월 이후에는 청년당 당두로서 천도교중앙종리원 관정(觀正)에 선출되어…….일제 침략전쟁과 황민화 정책을 적극 후원하고 지원할 것을 독려했다…..”-친일인명사전에서

자신의 잘못을 솔직히 인정했던 아버지

아버지의 치부를 만천하에 드러낸 아들

진실을 밝힘에 있어 그 어떤 이해관계(비록 아버지일지라도..)도 철저히 배척하는 원칙주의자가 임종국 선생이다.

아버지의 친일 행적을 써 내려갔던 그 날
임종국 선생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토, 2018/06/02- 0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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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엔 100주년 기념식 개최 거절…현 정부 들어 재평가 작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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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피 300kg으로 만든 독립영웅 흉상
(서울=연합뉴스) 신준희 기자 = 1일 서울 육군사관학교에서 독립전쟁 영웅 5인 흉상 제막식이 열리고 있다. 육사는 독립전쟁에 일생을 바친 홍범도, 김좌진, 지청천, 이범석 장군, 그리고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한 이회영 선생의 흉상을 탄피 300kg을 녹여 제작했다. 2018.3.1 [email protected]

(서울=연합뉴스) 성서호 기자 = 일제강점기 시절 독립운동가의 산실이던 ‘신흥무관학교’ 설립 기념식이 처음으로 육군사관학교에서 열린다.

3일 신흥무관학교 기념사업회와 육군사관학교에 따르면 이들 기관은 오는 8일 오후 2시 육사 화랑연병장과 을지강당에서 신흥무관학교 설립 107주년 기념식을 연다.

기념사업회는 설립 100주년이던 2011년 처음으로 기념식을 열기로 하면서 육사에 개최를 요청했지만, 당시에는 제안을 거부당했다.

당시 서대문형무소에서 100주년 기념식을 연 기념사업회는 올해 2월 다시 육사의 문을 두드렸고, 올해 처음으로 육사 교내에서 기념식을 열게 됐다.

신흥무관학교는 1910년 3월 신민회의 국외독립기지 건설과 무관학교 설립 결의를 계기로 이듬해 6월 10일 ‘신흥강습소’라는 이름으로 공식 출발했다. 항일비밀조직이라는 사실을 감추기 위해 당시에는 ‘강습소’라는 간판을 달았다.

신흥강습소는 1912년 통화현으로 이전한 뒤 이듬해 건물을 신축해 신흥중학교로 개칭했다. 각지에서 지원자가 몰려오자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했다.

국권을 되찾기 위한 군 조직이라는 점에서 군의 효시라는 주장이 있지만, 여태껏 우리 군의 역사에 편입되지 못했다.

하지만 지난해 문재인 정부가 들어서면서부터 변화 움직임이 나타났다.

문 대통령은 작년 8월 국방부 업무보고 자리에서 “광복군과 신흥무관학교 등 독립군의 전통도 우리 육군사관학교 교과 과정에 포함하고 광복군을 우리 군의 역사에 편입시키는 노력도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이에 따라 지난해 12월 육군사관학교에서 ‘독립군·광복군의 독립전쟁과 육군의 역사’라는 주제로 학술대회가 열렸다. 학술대회는 육군의 초기 역사를 재조명하고자 열린 것으로, 당시 육사가 독립군과 광복군 활동을 주제로 학술 행사를 연 것은 이례적인 일이다.

올해 3월에는 독립전쟁에 나섰던 홍범도·김좌진·지청천·이범석 장군과 신흥무관학교를 세운 이회영 선생의 흉상을 교내 충무관에 설치했다. 흉상은 우리 군 장병이 훈련으로 사용한 실탄의 탄피 300㎏을 녹여 제작했다.

신흥무관학교 기념사업회 사무국장을 겸하는 민족문제연구소 방학진 기획실장은 “최근 들어 육사는 학술회의 등 여러 사업을 통해 신흥무관학교를 비롯한 독립군, 광복군의 역사를 자신의 뿌리로 재정립하려고 하고 있다”며 “앞으로 해군·공군사관학교, 더 나아가 전군 차원에서 이러한 작업이 지속적으로 진행되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육군 관계자는 “을사늑약 이후 국권 회복과 자주독립을 위해 목숨 바쳐 투쟁한 항일의병, 독립군·광복군의 역사와 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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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03> 연합뉴스

☞기사원문: 신흥무관학교 기념식 육사서 첫 개최…’軍 효시’ 자리 잡나

월, 2018/06/04- 1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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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칠승 의원, 친일반민족행위자 국립묘지 안장금지 및 이장 규정 마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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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충일을 이틀 앞둔 4일 오후 서울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 묘역에서 바라본 도심에 빌딩들이 보이고 있다.ⓒ뉴시스

오는 6일 제63회 현충일을 앞두고 친일반민족행위자들의 국립묘지 안장을 금지하고 친일반민족행위자의 국립묘지 밖 이장을 강제하는 방안이 국회에서 추진된다.

더불어민주당 권칠승 의원(경기 화성병)은 5일 이 같은 내용의 ‘국립묘지의 설치 및 운영에 관한 법 개정안’을 대표발의했다.

더불어민주당 권칠승 의원이 국가보훈처로부터 제출받은 ‘친일 반민족 행위자 국립묘지 안장 현황’ 자료에 따르면, 서울과 대전의 국립현충원에 ‘친일파’로 분류되는 인물이 무려 63명이나 안장돼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특히 2009년 대통령 소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친일·반민족행위를 했다고 결정한 사람 가운데 국립서울현충원에 7명(김백일, 김홍준, 백낙준, 신응균, 신태영, 이응준, 이종찬)이, 국립대전현충원에 4명(김석범, 백홍석, 송석하, 신현준)이 각각 안장돼 있다.

민족문제연구소가 2009년 발간한 친일인명사전 수록 친일인사 중 서울·대전 현충원에 안장된 경우까지 합하면 63명이 된다. 서울에 37명, 대전에 26명이 안장돼 있다.

그동안 과거사 청산 작업의 일환으로 이들의 묘지를 다른 곳으로 옮겨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곤 했지만, 이장을 강제할 법률상 근거가 마련돼 있지 않아 논의만 공전을 거듭해 왔다.

이에 대해 권 의원은 “현행법이 유지될 시 향후에도 친일반민족행위자가 국립묘지에 안장될 수 있다”며 “지금이라도 친일반민족행위자들의 국립묘지 이장을 명할 수 있도록 하여 국립묘지의 영예성과 국민들의 자부심을 회복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가운데 김홍준은 2015년9월3일 63명 중 가장 최근에 안장됐다. 그는 만주군 상위, 간도 특설대에서 복무했고, 남조선국방경비대 총사령부에 근무하면서 순직해 안장자격을 취득했다. 현재 위패만 안장돼 있다.

백낙준은 연희전문학교 교수이자 기독교 신문 이사 및 편집위원의 친일행위를 했다. 제2대 문교부 장관을 지내며 국가사회공헌을 이유로 안장자격을 취득했다.

심응균은 일본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일본군 소좌로 활동했다. 광복 이후 육군 중장을 지내며 안장자격을 취득했다.

신태영 역시 일본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일본군 중좌로 활동한 친일인사다. 한국전쟁에서 전북편선관 구사령관으로 참전하고 이후 국방부 장관을 지냈다.

이응준은 일본군 대좌 출신으로 시베리아 간섭전쟁에 참전했다. 한국전쟁 당시 수원지구 방위사령관으로 참전했으며, 이후 체신부 장관을 역임, 현충원에 안장됐다.

이종찬은 일본육군사관학교 출신으로 일본 정부로부터 금치훈장까지 수여받았지만, 한국전쟁 당시 육군 수도경비 사령관으로 참전, 육군 참모총장을 지낸 이유로 현충원에 안장됐다.

김석범은 만주군 상위 출신으로 만주국 훈6위 주국장을 수여받았고, 백홍석은 경성 육군병사부 과장 출신으로 재향군인회 초대 회장을 지냈다.

송석하는 간도특설대 중대장 출신으로 만주국 훈5등 경운장을 수여받았으며, 신현준은 간도특설대 창설기간 장교를 지내고 만주국 훈6위 경운장을 수여받았다.

특히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된 김창룡은 일본 관동군 헌병 출신으로 항일 독립투사들을 잡아들이고 김구 선생의 암살을 사주하는 등 온갖 반민족행위를 저질렀지만 육군 특무대장을 역임, 현충원에 안장됐다.

권 의원은 “독립유공자와 친일반민족행위자를 국립묘지에 나란히 안장하는 것은 독립유공자에 대한 모욕이자 무원칙의 표본”이라며 “이번 개정안은 잘못된 역사를 바로잡고 흐트러진 민족정기를 바로세우는 첫걸음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

<2018-06-05> 민중의소리

☞기사원문: 아직도 국립묘지에 안장된 친일반민족행위자 63명, 강제 이장 추진된다

※관련기사

파이낸셜뉴스: 국립묘지에 안장돼 있는 친일 반민족 행위자 무려 ’63명’

노컷뉴스: 권칠승 “현충원 안장 친일 63인 이장시켜야”..국립묘지법 개정안

화, 2018/06/05- 1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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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만길,정세현 특별대담] “4.27선언과 한반도의 미래” 

Q.1 – ‘4.27 판문점 선언’, 그날의 소회
주최 : 내일을 여는 역사재단
때 : 2018년 5월 18일 오후 2시
주관 : 민족문제연구소
곳 : 민족문제연구소 5층 교육장
대담 : 강만길 (고려대 명예교수) /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
사회 : 신용옥 (내일을여는역사 편집장)

※ 팟빵에서 오디오로 들으실 수도 있습니다~!!
http://www.podbbang.com/ch/14024

화, 2018/06/05- 1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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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만길,정세현 특별대담] “4.27선언과 한반도의 미래” 

Q.1 – ‘4.27 판문점 선언’, 그날의 소회
주최 : 내일을 여는 역사재단
때 : 2018년 5월 18일 오후 2시
주관 : 민족문제연구소
곳 : 민족문제연구소 5층 교육장
대담 : 강만길 (고려대 명예교수) /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 
사회 : 신용옥 (내일을여는역사 편집장)

※ 팟빵에서 오디오로 들으실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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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 2018/06/05- 1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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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만길,정세현 특별대담] “4.27선언과 한반도의 미래” 

Q.1 – ‘4.27 판문점 선언’, 그날의 소회
주최 : 내일을 여는 역사재단
때 : 2018년 5월 18일 오후 2시
주관 : 민족문제연구소
곳 : 민족문제연구소 5층 교육장
대담 : 강만길 (고려대 명예교수) /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 
사회 : 신용옥 (내일을여는역사 편집장)

※ 팟빵에서 오디오로 들으실 수도 있습니다~!!
http://www.podbbang.com/ch/14024

화, 2018/06/05- 1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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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만길,정세현 특별대담] “4.27선언과 한반도의 미래”

Q.6 – 종전선언과 평화협정 체결 이후 동북아시아의 질서 변화?

주최 : 내일을 여는 역사재단

때 : 2018년 5월 18일 오후 2시

주관 : 민족문제연구소 곳 민족문제연구소 5층 교육장(식민지역사박물관)

대담 강만길 (고려대 명예교수) /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

사회 신용옥 (내일을여는역사재단 편집장)

※ 팟빵에서 오디오로 들으실 수도 있습니다~!!

http://www.podbbang.com/ch/14024

목, 2018/06/07- 1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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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만길,정세현 특별대담] “4.27선언과 한반도의 미래”

Q.5 – 종전선언과 평화협정, 현실 국제정치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주최 : 내일을 여는 역사재단

때 : 2018년 5월 18일 오후 2시

주관 : 민족문제연구소 곳 민족문제연구소 5층 교육장(식민지역사박물관)

대담 강만길 (고려대 명예교수) /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

사회 신용옥 (내일을여는역사재단 편집장)

※ 팟빵에서 오디오로 들으실 수도 있습니다~!!

http://www.podbbang.com/ch/14024

목, 2018/06/07- 1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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