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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엇갈린 형제의 길, 심우섭과 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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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엇갈린 형제의 길, 심우섭과 심훈

익명 (미확인) | 목, 2018/02/22- 1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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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의 자리에서

어머님! 어머님께서는 조금도 저를 위하여 근심치 마십시오. 지금 조선에는 우리 어머님 같으신 어머니가 몇 천 분이요, 몇 만 분이나 계시지 않습니까? 그리고 어머님께서도 이 땅에 이슬을 받고 자라나신 공로 많고 소중한 따님의 한 분이시고, 저는 어머님보다도 더 크신 어머님을 위하여 한 몸을 바치려는 영광스러운 이 땅의 사나이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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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훈

19살 청년이 서대문감옥에서 어머니께 보낸 편지다. 이 청년은 우리가 잘 아는 <상록수>의 저자 심훈(본명 심대섭 沈大燮, 1901~1936)이다.

1919년 3월 1일 경성고등보통학교에 다니던 심훈은 독립운동 소식에 학교를 뛰쳐나왔다. 파고다 공원에서 대한문으로 옮겨가며 독립만세를 불렀다. 그날은 붙잡히지 않았다.

3월 5일 오전 9시, 심훈은 남대문역 앞에서 수만의 학생과 같이 조선독립만세를 불렀다. 일대 시위운동에 청년의 피가 끓었다. 어머님보다 더 큰 어머님, 조국을 위해 한 몸을 바치겠다는 혈기가 넘쳤다. 그날 밤 안국동 별궁 앞에서 헌병에게 체포되었다.

편지에서 보듯 만세시위에 나섰다 체포되어 옥고를 치른 사람은 몇 천, 몇 만이었다. 서대문감옥에 갇혀 있던 기간은 2개월 남짓이었다. 그해 겨울, 삼한 사온이 무색하게 나날이 춥기만 했다. 심훈은 감옥에 남은 동지들을 걱정했다. 걱정하는 한편으로 나라의 독립을 염원했다.

지금쯤 얼음 속 같은 옥중에 그저 남아 있는 사람들이야 과연 어떠할까? 살을 깎아내는 북풍은 철창에 불고 눈덩이 같은 밥을 먹고 허구한 날 우르르 떨기만 할 때에 그이들의 마음이야 과연 어떠할까. 그러나 그들의 마음은 그저 뜨거울 것이다. 서대문 감옥 높은 담 위에 태극기가 펄펄 날릴 때 굳센 팔다리로 옥문을 깨뜨리고 환호와 만세의 부르짖음으로 열광하여 뛰는 군중… 오- 상제여 그의 원한을 속히 이루어 주소서! (심훈일기, 1920.1.17)

31운동 1주기가 되었다. 일제는 경찰과 군대를 동원해 온 시가를 꽁꽁 에워쌌다. 신문에는 나지 않았지만 평양에서 야단이 났다고 하고 배재학당에서 독립만세를 불렀다는 소문도 들었다. 심훈은 홀로 남산에 올랐다. 여러 가지 일로 답답한 가슴이 그를 이끌었다.

남산에 올라갔다. 왜놈들에게 짓밟힌 남산 눈앞에 깔린 서울 시가며 꿈같은 먼 산과 띠 같이 흐르는 한강수까지 다 우리 것이련마는. 아! 슬프고 답답한 마음을 억제키 어렵다. 잠두(蠶頭)에 홀로 걸터앉아 넓은 시가와 산과 들과 강을 향하고 목청을 빼어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창가를 높이 불렀다. (심훈일기, 1920.3.27)

감옥에서 풀려난 심훈, 미래를 걱정하는 20살 청년이었다. 온 민족이 들고 일어나 독립만세를 부른지 1년이 지났지만 식민지라는 현실은 변한 게 하나 없다. 만세시위로 옥고를 치르느라 다니던 학교에서는 퇴학당했다. 문학에 뜻을 두었지만 길은 잘 보이지 않았다. 듣는 이 없는 산에 올라 애국가를 소리 높여 불러보지만 슬프고 답답한 마음은 쉬이 풀릴 리 없다.

그런 그의 눈앞에 자리보전하고 누운 큰형이 보였다. 큰형은 필명 천풍(天風)으로 유명한 심우섭(沈友燮, 1890~1948)이다. 둘 사이엔 작은 형 심명섭과 누이 심원섭이 있다. 그래서 큰형과 막내는 11살 나이 차이가 난다. 어린 막내가 보기에 큰형 심우섭의 처신이 참으로 못마땅하다.

형님의 병환이 그저 낫지 못한데 어제는 오지도 않았다고 보지도 않고 공연한 걱정을 하신다. 아무 아는 것도 없이 혼자 달관을 하고 초관(超觀)을 하고 안하무인으로 자임하여 말만 함부로 하고 다니며 하다가 신문경영에도 대실패를 하고 울화병이 든 것이다. 그러고 주색(酒色)에 몸은 약하여 가지고 온갖 번민을 하며 여러 가지로 고통을 받는 것이라 아무리 친형제 간이라도 동정하는 마음이 생길 수는 없다. 형님의 일은 만사가 다 그 수법이니 누가 환영을 하랴. 이렇다가도 형제간에 마음이나 상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큰 걱정이다. (심훈 일기, 1920.1.21)

형의 병 수발은 본처가 아닌 첩이 들고 있다. 이미 심우섭은 평양 출신 기생 초월과의 연애로 소문이 자자했는데, 이 무렵에는 또 다른 이를 첩으로 들였던 모양이다. 심훈은 형님 병의 원인을 타락적 쾌활과 불규칙한 생활, 조금도 없는 극기심, 특히 주색을 제1의 악마라고 생각했다. 당시 심우섭은 식민지 지식인으로서 신문에 소설도 발표하고 매일신보 기자로 필명을 날리던 쾌활남아였다. 그런 심우섭이 신문사도 그만두고 자리보전하고 누워 병문안 오지 않는다고 동생 타박이나 하고 있다. 이제 그 형 이야기를 해 보자.

기자 심우섭, 데라우치를 찬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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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우섭

1910년 3월 휘문의숙을 졸업한 심우섭이 맞닥뜨린 현실은 일본의 식민지가 된 조선이었다. 신학문을 배운 지식인으로서 심우섭의 고민이 시작되었다. 1912년 조선총독부 보통문관시험에 합격했다. 관료가 될 생각도 한 모양이다.

이듬해에는 잠시 사립학교 교사 노릇도 했다. 하지만 5개월 남짓 만에 그만두었다. 심우섭의 선택은 문인이자 언론인의 길이었다. ‘천풍’이란 필명으로 이름을 날렸다. 매일신보에 소설 <형제>(兄弟, 1914년 6~7월), <주>(酒, 1914년 9월), <산중화>(山中花, 1917년 4~9월)를 연재했다. 특히 1917년에는 세간을 떠들썩하게 했던 일본인들의 호랑이사냥에 동행하고 ‘정호기(征虎記)’를 연재했다. 매일신보사에 입사한 것은 1916년이었고 1918년부터는 지방과장이란 직함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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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명을 날리던 20대의 심우섭. 왼쪽부터 진학문 심우섭 이광수 이상협

이광수가 1917년에 발표한 소설 <무정>의 첫 장면에는 신문기자 신우선이 등장한다. “미스터 리, 어디로 가는가” 주인공 이형식을 뒤에서 부르며 나타나는 이.대팻밥모자를 살짝 뒤로 젖혀 쓰고 활개 치며 내려오는 신문기자 신우선이다. 김장로 집 딸 김선형의 영어 과외를 하러 가는 이형식에게 던지는 신우선의 농지거리는 그의 유쾌함과 활달함을 잘 드러낸다. 그렇지만 이형식은 그의 지나친 방탕함을 허물이라 생각하고 있다.

소설 <무정> 속 신우선이 매일신보 기자 심우섭을 모델로 했다는 건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름도 그렇고 <무정>이 매일신보 1면에 연재될 때 심우섭의 <산중화>는 4면에 연재되고 있었다. 그들이 함께 찍은 사진이다. 1918년, 매일신보 기자 시절에 찍은 이 사진 속 심우섭을 보면 생기 넘치는 젊음과 그에게 꼬리표처럼 항상 붙어 다니는 ‘해학’이라는 수식어를 떠올리게 하는 장난기가 엿보인다.

옆에 선 이는 이광수와 진학문, 이상협이다. 비슷한 연배에 매일신보를 매개로 어울리던 시절이다. 이렇게 매일신보에 소설을 연재하며 세상에 이름을 알렸고, 쾌활한 성격으로 음주가무를 즐기며 평양 출신의 유명한 기생과 연애도 하며 풍류남아 심우섭의 20대 청춘이 흘러갔다.

이 무렵 기자 심우섭의 기사 한 대목을 읽어보자. 꽤 긴 글인데, 일부를 발췌해도 역시나 길다.

백작이 조선을 혁신함이 의사가 난치병자에게 수술을 베품과 다를 바 없도다. 아니다. 다르지 않을 뿐 아니라 한층 심한 것이 있다. 즉 의사가 다만 병자의 복부나 다리를 해부하기에 그치지만 백작의 수술방법은 매우 엄혹하고 奇絶하여 옛 머리를 자르고 새 머리를 붙이며 四肢百體에 그 예리한 해부도는 縱橫敏活하여 자르고 쪼개지 않은 곳이 없다. 오호라. 당시 병상에 누웠던 우리 조선인 즉 병자의 고통이야 어찌 필설로 형용할 수 있겠으며, 백작에 대한 분노와 증오도 역시 극에 달하였으리로다. 백작이 전기한 공전절후의 대수술을 단행하고는 다시 환자의 회복에 힘을 다하여 恩威와 寬嚴이 오로지 병자로 하여금 加療靜食에 주의하게 하고 감히 分外의 事爲를 감행하지 못하게 한지 이제 만 6 개년여라. 시술 후 6년여 장기간에 周密한 좌우의 간호를 받으면서 병상에 누워 있다가 지금에 이르러는 크게 全快한지라. 다년 음용하던 미음은 쌀밥으로 변하고 그 착용하던 환자복도 새 옷으로 갈아입고 嚴切한 간호를 해탈하기에 이르렀으니 이에 의사의 주의방침도 일변하여 완전한 인간으로 대우하며 원래 무병한 자와 같은 행복을 누리게 할 시기가 멀지 않았다. 비로소 천오백만의 조선인민은 滿心歡情으로 백작의 손을 꼭 잡아 백작의 시술의 노고에 감사하고, 백작은 다년 병상의 고통을 위안하여 일반의 의심이 사라지고 和氣가 가득하기에 이른 것은 기약도 기대할만 하거늘. 애석하도다 무정한 寺內백작은 일이 이에 이르기 전에 조선을 떠나갔도다. (<매일신보> 1916.10.15. 밑줄은 인용자)

이 기사에서 찬양해 마지않는 백작은 다름 아닌 초대 조선총독 데라우치 마사다케(寺內正毅)이다. 1916년 10월 데라우치는 조선총독을 사임하고 일본에 돌아가 내각 총리대신에 취임했다. 심우섭 기자는 데라우치 백작을 전송하는 글(「寺內伯爵을 送함」, 天風生)을 매일신보에 실었다. 문예기자로서 주로 신소설을 연재하며 간혹 금강산 기행이나 호랑이 사냥 같은데 따라가 답사기를 쓰고, 혹은 문예면에 유쾌한 세태풍자기사를 주로 쓰던 심우섭이다 보니 이런 정치색 짙은 글은 참 의외다.

기자 심우섭이 데라우치의 조선통치를 어떻게 평가하는지 보자. 그는 조선과 조선인을 병상에 누운 환자에, 데라우치와 일본의 식민통치를 의사와 간호사에 비유했다. 의사의 수술방법은 매우 엄혹하고 기이하다. 옛 머리를 잘라내고 새 머리를 붙이는 것 같다. 병자의 온몸을 자르고 쪼개니, 그 고통이 이루 형용할 수조차 없다. 그 고통에 의사에 대한 병자의 분노와 증오는 극에 달했다. 그래도 의사는 대수술을 감행하더니 그 후 환자의 회복에 정성을 다했다. 6년여가 흘렀다. 이제 환자는 완전히 나았다. 환자복에서 새 옷으로 갈아입고 쌀밥도 먹을 수 있게 되었다. 비로소 환자는 의심을 거두고 의사의 노고에 감사하기에 이르렀다. 일본의 식민통치에 대한 찬사를 이렇게 이해하기 쉽게 설명해주니, 이런 글솜씨가 아무에게나 있겠는가. 이 기사는 심우섭의 생각을 명확하게 보여준다. 일본이 난치병에 걸린 조선과 조선인을 치료해 주고 행복의 길로 이끌고 있으니, 즉 일본의 식민통치를 통해 조선이 근대화되고 있으니 그 은혜에 고마워해야 한다. 매일신보가 총독부 기관지이고, 기자는 신문사의 논조에 구속받을 수밖에 없다고 해도 이 정도의 정성과 글솜씨를 보면 근본 생각이야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자치운동 잠깐, 그리고 참정권 운동으로

만세시위 열풍이 한풀 꺾인 1919년 7월 심우섭은 일본 도쿄로 향했다. 매일신보 기자는 그만두었던 것 같다. 동생 심훈도 감옥에서 풀려나왔을 무렵이다. 심우섭을 비롯해 함께 도쿄에 건너간 고희준, 채기두, 박승빈, 이기찬, 고원훈, 박병철 등은 조선에 자치제 시행을 위한 운동을 하려 했다. 세간에서는 이들을 ‘동상(東上) 7인조’라 불렀다. 일본 정계의 주요 인물들을 만나 ①관리를 공평하게 임용할 것 ② 조선의회를 개설할 것 ③ 언론의 자유를 인정할 것 ④ 소요(3.1운동) 범인을 석방할 것, 4개항을 제시하며 대조선 정책에 채용할 것을 역설했다. 또 하라 다카시(原敬) 수상을 만나 총독정치에 대한 종래의 실정을 비판하고 “조선은 조선인으로 하여금 다스리게 하거나 조선의회를 만들라”는 의사를 표명했다.

3・1운동의 충격은 일본 식민통치자들로 하여금 조선 통치에 대한 변화의 필요성을 절감하게했고, 동시에 조선인들의 정치운동 내지 정치적 요구도 다양하게 나타났다. 그 흐름 중 하나가 자치론 내지 자치운동이었다. 주로 이광수를 비롯한 동아일보 계열과 최린을 위시한 천도교 신파 쪽에서 1920년대를 거치는 동안 자치운동에 열심이었다.

일제시기 조선정치행위의 논리를 크게 독립운동론, 참정권론, 자치론으로 구분한다. 참정권론과 자치론은 식민 통치에의 ‘참여’ 논리, 독립운동론은 이에 대한 ‘저항’의 논리이다. 기본적으로 ‘참여’란 기존체제를 인정하는 범위 내에서의 행위이다. 따라서 자치론은 본질적으로 독립운동의 유보 내지 포기를 전제로 한 것이었다. 일부 논자들은 자치운동을 독립운동의 준비단계로 보기도 한다. 일제의 동화정책에 반대하며 정치적 결사를 통해 조선인을 정치적으로 훈련시키고 단결시켜 민족적 권리와 이익을 옹호하게 하자는 주장이 일견 그럴 듯 해 보이긴 하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조선의 자치운동은 독립운동을 포기하고 일제에 협력한 운동이었다. 다른 식민지(인도나 아일랜드)의 자치운동은 저항세력이 전개했는데, 조선에서는 일제에 협력적인 세력이 주도했다는 점을 간과하면 안 된다. 실제 자치운동은 일제 지배 하에서 일정한 정치권력을 획득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심우섭을 비롯한 ‘동상 7인조’는 일본의 조선 지배를 인정하는 범위 내에서 조선에 자치를 허용해줄 것을 제안했다. 이 무렵 심우섭은 3・1운동의 여파로 나타난 일제의 통치방침의 변화란 물결을 타고 정치운동에 나섰던 것으로 보인다. 동아일보가 자치운동에 본격적으로 나선 것이 1922년 7월 무렵이고, 이광수의 「민족적 경륜」이 발표된 것이 1924년 1월이니 심우섭 등의 자치운동은 아마도 그 시초가 아니었을까. 도쿄에서 돌아온 이들은 그해 11월 새로 부임한 조선총독 사이토 마코토(齋藤實)에게 청원서를 제출했다. 그런데 이 청원서는 기존의 주장에서 상당히 후퇴하여 언론 출판 집회 결사의 자유를 요구하는데 그치고, 조선의회 설치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었다. 즉 일본 하라 수상의 내지연장주의에 따른 동화정책과 사이토 총독의 ‘문화정치’라는 구도 하에서 조선인의 정치활동을 위한 공간 허용만을 요청했다. 이들의 자치운동은 그 정도 선에서 끝났던 것이다.

심우섭은 매일신보사에 복귀해 논설부장으로 일하는 한편 계명구락부 기관지인 <계명>의 주간을 맡아 보았다. 그러다 1925년 동민회에 들어갔다. 이번에는 자치운동과는 노선을 달리하던 참정권 운동에 투신한다. 일본의 동화주의를 적극 지지하는 참정권 운동 단체인 동민회는 ‘철저한 내선융화의 실현을 통한 아시아민족의 결합’을 내세운 단체였다. 당시 자치운동 측과 참정권 운동 측은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지고 맹렬히 비판하던 시기였다. 이른바 갈아타기라고 비판할 수도 있지만 참정권론이든 자치론이든 기본적으로 일본에 협조하고 일본의 우위와 지배를 인정한다는 점에서 큰 차이는 없다. 종국에는 이광수나 최린도 동화론자로 변절해 갔다는 사실을 볼때, 심우섭은 그들보다 한 발 앞서 움직였다고 볼 수 있다.

한편 심우섭을 비롯한 동상 7인조가 도쿄에 건너갔을 때 유력 인사들과의 교섭을 부탁한 인물이 아베 미쓰이에(阿部充家)였다. 아베 미쓰이에는 정치기자로서 1915~1918년 경성일보 및 매일신보 사장을 지냈고, 1920년대에는 사이토 조선총독의 개인 정치고문 역할을 했다. 조선통치에 관련이 깊은 사람으로 연구자들 사이에선 ‘제국의 브로커’라는 별명이 붙은 인물이다. 심우섭이 자치운동을 위해 도쿄를 찾은 1919년 7월에 아베는 일본 국민신문 부사장을 맡고 있었다. 이때 그는 심우섭 일행에게 일본 정치인들을 비롯한 유력 인사들을 소개하고 자치운동을 위한 조언도 해 주었다.

일찍부터 조선인 ‘신지식층’에 관심이 많았던 아베는 1920년 5월 조선을 방문했다. 경성일보 사장을 그만두고 떠난 지 2년 만이었다. 새 총독 사이토 마코토의 비공식 정치고문 역할을 시작한 것이다. 아베는 사이토의 기밀비를 받고 조선인과 재일유학생의 동향이나 일본 정계의 상황을 사이토에게 보고했다. 아베에게는 정치기자 시절 구축한 정보망과 경성일보・매일신보 사장시절 맺었던 조선인 네트워크가 있었다.

약 2개월 동안 아베는 조선 각지를 돌며 실업가, 지식인, 청년지도자, 3・1운동 지도자 등 조선인 유력자들을 만나고 다녔다. 그가 경성에 도착하자 예전부터 알고 있던 조선인들이 매일 “천객만래(千客萬來)”해서 환영하였다.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는 차례로 성대한 환영회를 열어 아베를 맞이했다. 아베가 매일신보 사장을 지내며 깊은 교류를 나눴던 젊은 ‘신지식인층’이 ‘문화통치’의 기류 속에 조선어 신문을 창간하던 시기였다. 그들은 아베를 통해 총독부의 자금 원조와 언론통제 완화 등을 요청했다.

아베를 만나려 줄을 선 이들 가운데 심우섭도 있었다. 그들의 인연은 아베가 경성일보・매일신보 사장이던 시절 심우섭이 매일신보 기자였다는 정도인데, 쾌활하고 주색을 즐기는 심우섭의 캐릭터를 고려하면 좀 더 개인적인 친밀함이 있었을 것이다. 당시 심우섭은 병석에서 일어난 직후였는데도 동생 심훈을 데리고 아베를 찾아갔다.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신문사도 그만두고 도쿄에 건너가 시도했던 자치운동이 별 신통찮은 결과를 보인데다가 큰 병을 앓고 난 직후인지라 꽤 침잠해 있던 시기였을 것이다. 그리고 얼마 있지 않아 매일신보에 복귀하는 걸로 봐서 취직자리를 부탁하지 않았을까 추측해 본다. 심우섭과 아베의 친분은 후에도 쭉 이어졌고, 1936년 아베가 사망하자 심우섭은 그의 흉상을 세우는 일에 앞장섰다.

흥미있는 연구가 있다. 사이토가 조선총독으로 재임하는 동안 어떤 조선인을 몇 차례나 만났는지를 그 횟수를 일일이 밝혀놓은 것이다. 그 가운데 1924년부터 1926년 말까지 사이토가 만난 조선인 제1위는 선우순으로 39회였다. 2위는 이진호(37회), 3위는 민영기(33회)였다. 그리고 다음 자리를 차지한 것이 심우섭인데 도합 31회를 만났다. 당시 조선총독부 고위 관료를 지낸 박중양(20회)이나 신석린(28회)보다, 재계의 거물 한상룡(27회)보다 사이토 총독을 많이 만났다.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다. 다만 심우섭이 조선총독을 자주 만날 만큼 비중 있는 인물이었다는 점, 그리고 동민회 활동과도 관련 있으리란 점은 짐작할 수 있다. 또 아베 미쓰이에가 사이토 총독의 정치고문으로 활약하던 시기였으니 아베와 친분이 있던 심우섭이 어떤 역할을 하지 않았을까 추정해본다.

서로 엇갈린 형제의 길

심우섭이 적극적 친일파의 길로 한걸음씩 내딛는 동안 동생은 식민지 현실을 정면으로 바라보며 좌절하고 분노했다.

1920년 말 심훈은 중국으로 떠났다. 일본 유학 대신 선택한 길이었다. 북경, 남경, 상해, 항주로 이어진 여정 속에서 걸출한 독립운동가들과 교류를 쌓았다. 항주에서는 지강대학(之江大學)에 진학했다. 1923년 중국에서 돌아온 심훈은 영화와 문학 창작을 통해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고자 하는 열망을 드러냈다. 급진적 문예조직이던 ‘염군사’, ‘카프’(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에 가입한 것으로 봐선 유학시절 사회주의에 어느 정도 영향을 받았다고 해석할 수 있다. 1924년엔 동아일보 기자가 되었지만 1926년 철필구락부사건으로 해직되었다. 심훈은 시를 쓰고 소설을 썼다. 그 속에 식민지 지식인의 고뇌와 저항을 담았다. 당시 심훈의 격정이 표출된 시가 「박군의 얼굴」이다.

이게 자네의 얼굴인가?
여보게 朴君, 이게 정말 자네의 얼굴인가? (중략)
오냐 朴君아
눈은 눈을 빼어서 갚고
이는 이를 뽑아서 갚아 주마!
너와 같이 모든 X를 잊을 때까지
우리들의 心臟의 鼓動이 끊길 때까지

심훈은 세 친구, 박열 박순병 박헌영을 생각하며 이 시를 썼다. 직접적 계기는 1927년 11월 병보석으로 출감하는 박헌영의 처참한 모습이었다. 그리고 지식인으로서 저항적 실천의 자세를 갖춰 나갔다. 심훈의 대표시 「그날이 오면」(1930)은 그의 정치사회적 태도와 문학적 지향을 잘 드러낸다.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며는
三角山이 일어나 더덩실 춤이라도 추고
漢江물이 뒤집혀 용솟음칠 그날이,
이 목숨이 끊기기 前에 와 주기만 하량이면,
나는 밤하늘에 날으는 까마귀와 같이
鐘路의 人磬을 머리로 들이받아 울리오리다.
頭蓋骨은 깨어져 散散 조각이 나도
기뻐서 죽사오매 오히려 무슨 恨이 남으오리까.

그날이 와서 오오 그날이 와서
六曹 앞 넓은 길을 울며 뛰며 뒹굴어도
그래도 넘치는 기쁨에 가슴이 미어질 듯하거든
드는 칼로 이 몸의 가죽이라도 벗겨서
커다란 북(鼓)을 만들어 들쳐메고는
여러분의 行列에 앞장을 서오리다,
우렁찬 그 소리를 한번이라도 듣기만 하면
그 자리에 거꾸러져도 눈을 감겠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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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날의 오면’ 총독부 검열본. 독립을 향한 염원이 담긴 시라 하여 검열당국에 의해 삭제 조치를 당했다.

1931년 일제는 만주를 침략했다. 심훈의 문학세계에는 일제의 검열이 들이닥쳤다. 시집 「그날이 오면」 출간이 가로막혔다. 우회로를 찾아야했다. 1932년 심훈은 부모님이 계신 충남 당진으로 내려갔다. 그곳에서 소설 <상록수>를 썼다. ‘국가’를 ‘고향’으로 변형시킨 우회전략으로 검열을 넘어 당대 식민지 사회의 모순을 비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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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7년 경성방송국 방송실에서. 뒷줄 가운데 안경 쓴 사람이 심우섭 제2방송과장

 

1936년 심훈이 세상을 떠났다. 심우섭의 삶은, 동생이 죽은 뒤 10년여 더 지속되었다. 일제 군국주의의 총구가 전 세계를 향하던 시기였다. 그 역시 여느 친일 지식인들처럼 일제가 일으킨 전쟁의 광기에 휩쓸려 들어갔다. 1930년대 후반부터 일제가 패망할 때까지 심우섭은 주로 경성방송국과 매일신보에서 일하며 각종 전쟁선전과 동원에 협력했다.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의 시국순회강연반에 참여해 강연활동에 나섰고, 조선유도연합회와 조선임전보국단에도 가담했다. 결국 동생은 독립운동가이자 항일 열정을 표출한 문학가로 이름을 남긴 반면, 형은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기록되고 말았다.

<참고자료>
박찬승, 「일제하의 자치운동과 그 성격」(1989)
이나미, 「일제시기 조선 자치운동의 논리-독립운동론, 참정권론과의 관계를 중심으로」(2006)
이형식, 「제국의 브로커 아베 미쓰이에와 문화통치」(2017)
박진영 교수 블로그 www.bookgrma.pe.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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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

연구소 설립 30주년 기념식

학예실 김슬기 연구원

1991년 2월 27일 문을 연 민족문제연구소가 올해로 30주년을 맞았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2월 27일 식민지역사박물관 1층 돌모루홀에서 ‘민족문제연구소 30주년 기념식’을 진행하였다. 코로나로 회원들을 초대하지 못하는 대신 유튜브 온라인 생중계로 진행된 이 행사에는 동시 접속자 300여 명이 온라인으로 참여하였으며 당일 2천여 명이 행사영상을 감상하였다.
먼저 회원들과 각계 인사들의 30주년 축하인사를 담은 영상을 감상한 후 광주지부 회원이자 작가인 주홍 씨가 샌드아트로 그린 연구소 30년사 영상으로 기념식의 문을 열었다. 함세웅 이사장은 30주년 기념사를 통해 “나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뿌리이듯 지금까지 민족문제연구소가 든든히 성장할 수 있도록 밑거름과 뿌리가 되어주신 분들은 후원회원 분들”이라며 감사인사를 전했다. 이어 김영환 대외협력실장과 안미정 자료실 주임연구원의 사회로 지난 30년의 역사를 훑어볼 수 있는 ‘민족문제연구소 10대 뉴스’를 진행했다. 마지막 순위를 발표하기 전 막간을 이용해 회원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소식 5가지
를 소개하는 ‘당신이 몰랐던 민족문제연구소’ 뉴스를 진행하기도 했다. 이어 모두가 예상했던 ‘친일인명사전 발간’이 1위로 선정되고 당시 영상이 재생되자 모두에게 그때의 감격이 다시금 떠오르는 듯했다.

음악 교사이자 <항일음악 330곡집>을 집필한 고 노동은 선생의 자제인 노관우 회원의 밴드는 축하공연으로 항일음악 ‘대한혼가’, ‘광복군 아리랑’ 등을 선보였다. 특히 연구소 30주년을 기념하여 새롭게 편곡·헌정한 ‘장타령’에는 흥겨운 가락과 함께 가사 ‘삼십년을 한결같이, 삼백년도 끄떡없게, 삼천리에 퍼져가세’가 울려 퍼지자 현장에 있던 이들의 함박웃음을 자아냈다. 뒤이어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30년 동안 함께 손잡아 주었던 후원회원들의 일상을 둘러볼 수 있는 ‘회원극장’을 상영하였다. 올해로 28년째 꾸준히 연구소를 후원하고 있는 유동성 회원, 백년전쟁을 통해 가입 후 명실상부 연구소 간식보급에 힘써온 김진주 회원, 참치횟집을 운영하며 손님들에게 연구소와 연구소의 활동을 알리는 박점구 회원의 일상이 직접 만날 수 없는 이 시기에 더욱 가깝고 애틋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끝으로 박수현 사무처장이 앞으로 진행될 연구소 30주년 기념사업을 발표하였고, 임헌영 소장 및 상근자 전원의 감사인사로 행사를 마쳤다. 임헌영 소장은 “민족문제연구소가 평화의 주춧돌이 되어 영구히 남아 불행했던 한세기를 증언하고 연구하고 교육하는 기관으로 남을 수 있도록 많은 시민들이 앞으로도 함께 해주시기를 부탁한다”고 당부했다. 30주년 기 념식 영상은 민족문제연구소 누리집과 유튜브 채널에서 언제든지 확인할 수 있다. 

목, 2021/03/25- 1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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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비망록 68]

일제가 경성(京城) 지역에만 두 곳의 감옥을 만든 까닭은?
장기수 전담감옥이었던 경성감옥 혹은 경성형무소의 건립 내력

이순우 책임연구원

<매일신보> 1921년 11월 5일자에 수록된 경성감옥(마포 공덕리) 앞에 모여든 인파의 모습이다. 이들은 독립선언사건으로 투옥되어 있다가 이날 한꺼번에 만기 출옥하는 16인을 맞이하기 위해 모여든 사람들이었다.

 

일제가 이른바 ‘만세소요사건(萬歲騷擾事件)’이라고 불렀던 거족적인 삼일만세운동의 여운이 아직도 뇌리에 생생하게 남아 있던 시절인 1921년의 어느 늦은 가을날, 이른 아침부터 4, 5백 명이 훨씬 넘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 바삐 아현(阿峴, 애오개)을 넘기 시작했다. 누구는 전차로, 누구는 자동차로, 누구는 직접 걸어서 각기 도착한 곳은 먼저 온 이들로 꽤나 혼잡해진 어느 감옥의 문 앞이었다.

<매일신보> 1921년 12월 23일자에 수록된 최린, 권동진, 한용운, 오세창, 이종일, 김창준, 함태영 등 7인의 가출옥 관련기사이다. 이들은 독립선언사건 관련 48인에 포함되어 최초에는 서대문감옥에 갇혀 있다가 확정판결 이후 경성감옥 쪽으로 이감된 상태였다.

 

사람들이 이렇게 잔뜩 모여든 까닭은 바로 ‘독립선언사건(獨立宣言事件)’으로 징역 2년형을 선고받았다가 이날 한꺼번에 만기출옥(滿期出獄)을 하는 16명의 인사들을 맞이하려 했기 때문이었다. 이날의 광경에 대해서는 <매일신보> 1921년 11월 5일자에 수록된 「악수(握手)하고 감루(感淚)만 종횡(縱橫), 경성감옥 문밖에는 5, 6백 명의 고구 친척이 산 같이 모였다, 작조(昨朝) 감옥(監獄)에서 출감(出監)된 17인(人)」 제하의 기사에 자세히 묘사되어 있다.

 

작(昨) 4일 오전 9시로부터 아현리(阿峴里) 경성감옥(京城監獄) 앞에는 남녀 합하여 4, 5백 명의 인원이 감옥으로 들어가는 전차길 옆으로부터 감옥 문 앞까지 사람이 피하여 다닐 수 없이 섞기여 섰고 자동차 7, 8대는 감옥 들어가는 어구에서 누가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사람 사람의 얼굴에는 오랫동안 그리웠던 사람을 일 분 일 초라도 얼른 좀 보았으면은 하는 빛이 나타난다. 이 일은 다른 일이 아니라 이미 본지로 보도되었던 바와 같이 손병희 일파 중에 2년 징역의 언도를 받고 장구한 사이에 춥고 더운 것을 참아가면서 또는 엄밀한 옥칙을 지키여 가면서 말할 수 없는 고생살이를 하다가 금월 3일까지가 만기되어 작 4일에 출옥되는 날이었는데 오전 9시 반이 되매 출옥하는 분들의 가족은 의복일습을 가지고 들어와서 감옥에 드리매 제1회로 박희도(朴熙道), 박동완(朴東完), 이필주(李弼柱), 김원벽(金元壁) 4인을 감방으로부터 나오게 하여 의복을 바꾸어 입히는 모양이더니 …… 그 뒤으로 제2회에는 신석구(申錫九), 나용환(羅龍煥), 임예환(林禮煥), 나인협(羅仁協) 4인이 나왔고, 제3회로 김완규(金完圭), 최성모(崔聖模), 박준승(朴準承), 홍병기(洪秉箕) 4인이 감방으로부터 함께 나아와서 앞서거니 뒤서거니 옥문 밖을 나아갔고 제4회로 권병덕(權秉悳), 양전백(梁甸伯), 이명룡(李明龍), 신홍식(申洪植) 4인이 나왔는데 시원하게 옥문을 벗어져 나오면서도 아직 1년이나 고생살이할 다른 분들을 애처롭게 여기면서 2년 전에 들어갔던 옥문을 다시 아주 나와 버리기는 11시 20분경이었더라.…… 그리고 별항에 보도한 바와 같이 손병희 일파 중에 2년 징역의 언도를 받았던 20명 중에 16명은 경성감옥으로부터 출옥되고 유여대(劉如大), 강기덕(康基德), 홍기조(洪基兆) 3인은 수속의 관계로 5일까지가 만기로 되었고 그 외 이종훈(李鍾勳)은 지우금(至于今) 서대문감옥(西大門監獄)에 있었던바 역시 2년이었으므로 작 4일 오전 10시에 만기 출옥되었더라.

 

이들에 이어서 그해 연말에는 권동진(權東鎭), 김창준(金昌俊), 오세창(吳世昌), 이종일(李鍾一), 최린(崔麟), 한용운(韓龍雲), 함태영(咸台永) 등 7인이 가출옥(假出獄)의 형태로 경성감옥에서 풀려났다. 다시 해가 바뀌어 1922년에는 마지막으로 남아 있던 오화영(吳華英)과 이갑성(李甲成), 그리고 이승훈(李昇薰)이 차례대로 만기출옥을 하면서 ‘독립선언사건’과 관련하여 투옥된 인사들은 모두 감옥을 벗어나게 되었다. 삼일만세운동이라고 하면 그 누구라도 퍼뜩 ‘서대문감옥(西大門監獄, 1923년 5월에 서대문형무소로 개칭)’의 존재를 먼저 떠올리기 마련이지만, 여기에 정리된 자료에서도 나타나듯이 독립선언사건에서 실형을 선고 받은 핵심인사들이 막판에 옥고를 치렀던 곳은 바로 경성감옥(京城監獄, 공덕리 105번지; 지금의 서울서부지방법원 구역 일대)이었던 것으로 확인된다. 이들이 맨 처음 투옥되었던 서대문감옥에서 경성감옥 쪽으로 이감(移監)된 것은 결국 최종심이 되고 말았던 경성복심법원의 항소심 선고(1920년 10월 30일)가 이루어지면서 기결수(旣決囚)로 신분이 바뀐 이후의 일로 보인다. 여기에 나오는 경성감옥의 편제는 조선총독부령 제11호 「조선총독부 감옥 및 감옥분감의 명칭, 위치(1912년 9월 3일 개정)」에 따라 처음 설치되었으며, 감옥의 소재지는 마포 공덕리였다. 이때 종전에 경성감옥이라고 했던 곳은 이 이름을 물려주고 ‘서대문감옥’으로 개칭되었다. 이보다 앞서 금화산(金華山) 아래 금계동(金鷄洞)에 신축 감옥이 들어선 것은 1908년 10월 19일의 일이었으니, 불과 4년 사이에 2개의 감옥이 잇달아 만들어진 셈이었다. 그렇다면 직선거리로 놓고 보더라도 3킬로미터 남짓에 불과한 구역 안에 서대문감옥과 경성감옥, 이렇게 둘씩이나 만들어진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이에 관해서는 명시적으로 그 연유를 풀어놓은 자료는 확인하지 못하였으나, 그 시절의 신문자료를 죽 훑어보았더니 독립문 밖의 새 감옥이 준공 된 지 6개월도 채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 벌써 “이곳이 협착(狹窄)하여 죄수를 수용하기 곤란하므로 다시 증축(增築)하기를 의논중이다”는 내용이 등장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에 따라 실제로 <대한매일신보> 1909년 6월 27일자(국문판)에서는 남부 둔지미(南部 屯芝味)가 새로 짓는 감옥서의 후보지로 거론된 바 있고, 그 직후에 다시 용산 청파 4계(靑坡四契)와 청파 피병원(避病院) 부근 등을 포함하여 심지어 효창원(孝昌園)의 일부에다 공역비 3만 원을 들여 1천 명을 수용할 큰 감옥을 건설한다는 기사가 잇달아 게재된 사실이 눈에 띈다. 

조선총독부가 편찬한 <시정이십오년사(施政二十五年史)> (1935)에 수록된 재감인원(在監人員) 추이에 관한 도표자료이다. 경술국치 이후 감옥에 갇힌 사람들의 숫자가 지속적으로 증가하는 가운데 특히, 삼일만세운동이 벌어진 1919년에는 이 수치가 15,000명 수준으로 크게 치솟아 오른 것을 확인할수 있다.

이러한 논의가 거듭된 끝에 1911년 4월에 이르러 신축감옥의 최종 후보지로 선정된 곳은 마포공덕리에 자리한 탁지부 양조소(度支部 釀造所, 아현리 451번지)의 건너편 지역이었다. 이곳의 위치는 애오개 너머 마포나루로 가는 길목의 동쪽에 자리하고 있었으며, 일제가 부여한 지번상으로는 ‘경성부 용산면 공덕리 105번지(총면적 16,817평)’에 해당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매일신보> 1911년 9월 2일자에 수록된 「경성감옥공사(京城監獄工事)」 제하의 기사는 신축감옥에 대한 착공 과정을 이렇게 적고 있다.

 

공덕리(孔德里)에 신설(新設)하는 경성감옥공사(京城監獄工事)는 작일(昨日) 총독부 영선과(總督府 營繕課)에서 지명입찰(指名入札)을 행(行)한 결과(結果) 약(約) 20만 원(圓)의 가격(價格)으로 마츠모토구미(松本組)에 낙찰(落札)이 되었는데 부지(敷地)는 전부(全部) 1만 6천여 평(評)이라. 선(先)히 지균(地均)을 행(行)하고 갱(更)히 감방(監房), 기타 부속가옥(附屬家屋)을 건축할 터인데 본(本) 감옥신축에 관하여는 내지(內地)의 신식감옥(新式監獄)의 건조물(建造物)을 시찰(視察)하고 각종(各種)으로 연구중(硏究中)인즉 조선감옥(朝鮮監獄)의 모범(模範)으로 건축할 터이오, 공사(工事)는 직(直)히 착수한다는데 46년(즉, 1913년) 상반기(上半期)에 준공(竣工)할 예정이라더라.

 

그 이후에 일부 설계변경이 있었고 이에 따라 당초의 예정보다는 공사일정이 크게 앞당겨질 것으로 보였으나, 막바지 공사가 한창 진행되던 1912년 12월 16일에 느닷없이 발생한 화재로 옥사(獄舍) 1동(棟)이 소실되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이 당시에는 아직 서대문감옥 쪽에서 죄수들이 옮겨오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공사인부 2백여 명만이 긴급하게 대피하는 소동이 벌어졌고, 불 탄 건물은 그 이듬해에 재건되었다고 알려진다. 이 당시 서대문감옥과 경성감옥을 통틀어 어떠한 수형자를 어느 곳에 수용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가늠하기 어렵다. 이에 관해 그나마 대략 참고할 수 있는 자료는 총독부 사법부 장관의 통첩(通牒)으로 고시되는 「감옥수용구분(監獄收容區分)의 변경에 관한 건(件)」 정도이다. 여기에는 우선 “경성지방법원과 관할 지청(인천, 춘천, 원주는 별도)의 판결을 받은 수형자는 ‘서대문감옥’에 수용되고, 이 가운데 내지인(內地人, 일본인)과 외국인(중국인은 제외) 남자는 ‘경성감옥 영등포분감(永登浦分監)’에 수용한다”는 구절이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정작 경성감옥 자체에 대해서는 어찌된 영문인지 명단에서도 전혀 보이지 않을 뿐더러 아무런 관련 규정이 적시된 것이 없다.

 

<용산시가도(龍山市街圖)>(1929)에 나타난 경성형무소(공덕리 105번지)의 위치이다. 이곳은 애오개와 만리재 쪽에서 각각 넘어온 길이 서로 만나는 지점에 가까우며, 마포가도의 길 건너편에는 총독부 양조시험소(釀造試驗所, 지금의 마포경찰서 자리)가 배치되어 있는 것이 눈에 띈다. 아래쪽으로 효창원과도 매우 가까운 거리라는 것을 한눈에 알 수 있다. (민족문제연구소 소장자료)

 

조선은행에서 펴낸  <픽토리얼 초센 앤 만츄리아(Pictorial Chosen and Manchuria)> (1919)에 수록된 경성감옥의 전경 사진이다. 이곳의 편제는 1912년 9월에 설정되었지만, 실제 감옥 시설이 완성된 것은 1913년으로 넘어간 시점이었다. 이 사진은 건립 초기에 촬영된 탓인지 외곽에 둘러진 담장의 모습이 벽돌 재질이 아닌 목책(木柵)인 것이 눈에 띈다.

경성감옥의 존재는 경성형무소로 개칭된 이후의 시점에 와서야 관련 규정상으로 처음 명시적으로 등장하는데, 1923년 12월 8일에 총독부 법무국장의 통첩으로 고시된 「감옥수용구분의 변경에 관한 건(개정, 1924년 1월 1일 시행)」이 바로 그것이다. 이때에 이르러 경성형무소의 관할 판결청으로 “경성지방법원 개성지청”이 명기되었고, 특히 별표(別標)의 말미에 따로 “본 수용구분중 무기(無期) 및 형기(刑期) 10년을 넘는 남자 수형자에 대해서는 내지인(內地人)인 때는 영등포형무소에, 기타의 것이 되는 때는 경성 및 평양복심법원 관내 각 형무소에 수용할 자는 경성형무소에, 대구복심법원 관내 각 형무소에 수용할 자는 대전형무소에 각 이를 집금(集禁)한다” 는 구절이 첨부되었다.
이 규정으로 본다면 경성형무소는 경성복심법원(京城覆審法院)과 평양복심법원(平壤覆審法院) 관내에서 무기 및 형기 10년 이상을 선고받은 장기수(長期囚), 그것도 조선인 남자 수형자만을 전담하여 가두는 공간으로 정의되는 셈이었다. 그 이후 이러한 구분에 다시 한 번 큰 변화가 일어난 것은 1940년 2월 19일에 총독부 법무국장의 통첩으로 고시된 「형무소수용구분(刑務所收容區分)의 변경에 관한 건(개정, 1940년 3월 1일 시행)」에 수록된 내용이었다.
여기에는 종래 ‘경성 및 평양복심법원 관내 각 형무소 및 지소’의 장기수형자(長期受刑者)는 집금형무소인 ‘경성형무소’에 수용한다는 구절을 바꿔 그 대상지역을 훨씬 더 확대하도록 결정한 사항이 표시되어 있다. 이를 테면 이 시기 이후로는 ‘조선 전체의 각 형무소와 지소’의 장기수형자를 초범(初犯), 누범(累犯), 사상범(思想犯) 등 세 가지 유형으로 구분하고, 이들을 각각 경성형무소, 대전형무소, 서대문형무소에 일괄 수용하는 방식으로 변경되었던 것이다.

 

<조선총독부관보> 1940년 2월 19일자에 게재된 법무국장 통첩 「형무소수용구분에 관한 건(개정)」을 보면 종래 경성복심법원 및 평양복심법원 관내에 속하는 장기수들을 수용하던 경성형무소의 기능이 폐지되고, 이때부터 그 대상이조선 전역으로 확대되어 무기 또는 형기 10년 이상의 남자 수형자 가운데 초범(初犯)을 집합 수용하는 집금형무소(集禁刑務所)로 전환된 사실이 드러나 있다.

경성감옥에 대한 얘기를 하노라면, 이곳에 갇힌 수형자들의 노역장으로 사용된 ‘마포연와공장 (麻浦煉瓦工場, 도화동 7번지)’의 존재를 그냥 지나치기 어렵다. 이곳은 원래 대한제국 시기에 활발하게 건립이 추진되던 각종 관아청사(官衙廳舍)와 관사(官舍)의 건립공사에 소요되는 건축자재를 저렴하게 조달하기 위해 1906년 10월에 영등포의 토관공장과 짝을 이뤄 탁지부건축소(度支部建築所)에 부속되어 만들어진 연와제조소(煉瓦製造所)에 뿌리를 두었다. 이것들은 1907년 4월과 7월에 잇달아 직영(直營)으로 편입되었으며 이곳에서 생산된 벽돌은 대한의원 본관, 탁지부 청사, 평리원 청사, 공업전습소 등의 신축공사에 사용된 것으로 알려진다. 
일제강점기로 접어든 직후에는 총독부의 직할로 전환되었다가 1913년 4월에 이르러 이곳의 업무가 일체 경성감옥의 관장(管掌)으로 넘겨지면서 감옥의 작업장으로 탈바꿈하였다. <동아일보> 1924년 8월 8일자에는 진광렬(秦光烈)이라는 사람이 기고한 「내동리 명물, 도화동 연와공장(桃花洞 煉瓦工場)」 제하의 글이 수록되어 있는데, 바로 이곳에서 펼쳐지는 풍경을 이렇게 그려놓고 있다. 이 글에 등장하는 ‘붉은 옷 입은 직공’이라고 하는 것은 기결수 수형자(旣決囚受刑者)가 착용하는 자색(赭色, 검붉은 황토색)의 죄수복을 가리킨다.

 

<동아일보> 1924년 8월 8일자에 수록된 연재기고문 「(내동리 명물) 도화동 연와공장」 관련 기사이다. 이곳은 1913년 4월 이후 경성형무소의 노역시설로 사용되었으며, 이 글에 나오는 ‘붉은 옷’이라는 것은 기결수들이 입는 죄수복을 가리키는 표현이다.

 

◇ 서울 안에 양제집이 겅성드뭇한 오늘날 벽돌 만드는 공장이 없어 될 수가 있습니까. 그래서 새문 밖 도화동에 연와공장이 생겼습니다.
◇ 도화(桃花)에는 흰 꽃 피는 벽도(碧桃)도 있건마는 보통 도화라 하면 붉은 빛을 생각하고 벽돌에도 여러 가지 빛이 있건마는 보통 벽돌이라 하면 붉은 빛으로 여깁니다. 벽돌 만드는 공장이 도화동에 앉은 것은 빛으로 어울린다고 할 수 있을 듯합니다.

◇ 이 도화동 연와공장에서 노동하는 직공(職工)들은 다른 공장 직공과 다릅니다. 붉은 옷 입은 직공들입니다. 붉은 옷 입은 직공들이 붉은 벽돌 만드는 것도 역시 빛으로 어울린다고 할 수 있습니다.
◇ 이 붉은 옷 입은 직공은 두 사람이 한데 쇠사슬로 매어 다니는 사람입니다. 물론 일할 때는 쇠사슬이 풀립니다. 그러나 총 든 사람이 망대 위에 서고 칼 찬 사람이 뒤를 따른답니다. 직공 중에는 따라지신세의 직공들입니다. 이 직공 중에는 붉은 염통의 끓는 피를 눈물 삼아 뿌릴 유지한 사람이 더러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빛으로 어울린다기가 차마 어려워 그만 두겠습니다.

경성감옥 혹은 경성형무소는 해방 이후에 서울형무소 지소(1945.11.21 개칭)와 마포형무소(1946.3.28 개칭)를 거쳐 마포교도소(1961.12.23 개칭) 시절을 거치게 된다. 그러다가 결국 세월의 흐름에 따라 주변 일대를 에워싸고 진행되는 급격한 도시화의 물결을 이기지 못하고 1963년 가을에 이르러 안양교도소의 신축 준공과 함께 그곳으로 옮겨감에 따라 최종 폐쇄되어 사라지게 되었다. 그런데 마포형무소의 내력을 뒤지다 보니 조금은 별스러운 기록 하나가 퍼뜩 눈에 띈다. <동아일보> 1949년 2월 25일자에 수록된 「노덕술(盧德述) 등도 이송(移送)」 제하의 기사에 이러한 내용이 담겨있다.

 

<경향신문> 1949년 2월 25일자에 수록된 기사에는 반민특위에 의해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 수용된 친일부역자 피의자들이 일괄 마포형무소로 이감될 것이라는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반민특위에서는 23일 위원회 결의로서 노덕술(盧德述), 문명기(文明琦), 노기주(魯璣柱), 하판락(河判洛), 이원보(李源甫) 등 5명을 동 특별검찰부로 송청하였다고 한다. 한편 동 특위에서는 종래에는 체포된 반민혐의자를 서대문형무소(西大門刑務所)에 수감하여 왔었던바 여기에는 미결수도 수용되어 있는 관계로 기밀누설의 염려가 있다 하여 위원회 결의로서 25일부터 일체의 반민혐의자를 마포형무소(麻浦刑務所)로 이감하기로 되었다 한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는 동안 독립선언사건의 주역들과 무수한 장기수 독립운동가들이 갇혀 옥고를 겪어야 했던 바로 그 공간이 어느덧 반민특위(反民特委)에 의해 체포된 친일파 군상의 집결지가 되고 있으니, 참으로 묘한 기분이 교차하는 인과응보(因果應報)의 순간이 아닐 수 없다.

목, 2021/03/25- 2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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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 스타의 추억 한 토막(3)

임헌영 소장•문학평론가

이 글은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기관지 <기억과 전망> 43호(2021)에 실린 글로 세 차례에 걸쳐 연재한다. 임헌영 소장은 1974년 ‘문인간첩단 사건’으로 갖은 고초를 겪었고 1979년에는 남민전 사건으로 투옥되기도 했다. 이 글에는 문인간첩단 사건 당시 ‘빙고호텔’(육군보안사 서빙고분실)에서의 끔찍한 고문의 과정, 서대문 귀소에서의 생활, 재판 진행과정, 석방 후 요시찰 인물로 살아야 했던 이야기 등이 담겼다. ― 편집자주

 

7. 진달래 활짝 피다
감방에서는 겨울과 여름은 길고 봄과 가을은 짧다. 춥거나 덥거나 둘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무리 독재 권력이 땡깡을 부려도 시간은 흘러 추위가 풀리고 4월이 되자 온 구치소는 축제를 맞은 분위기로 변했다. 진달래가 활짝 폈기 때문이다. 내가 구속됐던 그 삼엄한 겨울에 피신 중이었던 김지하가 무슨 재주로 영치금을 넣어줘 깜짝 놀랐는데 아니나 다를까, 얼마 후 잡혀와 나와 같은 처지가 되어버렸다. 바로 4.3 긴급조치 3호 위반자들과 함께였다. 유홍준(미술평론가, 명지대 교수)이 바로 내 옆방에 들어오더니 이어 강진 출신의 윤한봉(민주화 운동가), 일본인 하야가와 요시하루(早川嘉春) 등이 나와 같은 5사 하층으로 들어왔고, 앞 뒷동에도 낯익은 얼굴들이 꽉 들어차 서대문 구치소는 광복 이후 정치범이 가장 북적대는 때를 맞았다. 5동의 내 방과 거의 마주보고 있던 3동에는 인혁당의 서도원이 들어와, 자주 통방을 하면서 계속 안부를 확인했다. 그들은 우리의 빨간 딱지와는 달리 노란 걸 달았기에 ‘진달래’로 호칭했다. 온 구치소가 진달래 천지였다.
이때 같은 5사에는 방동규도 있었다. 문단에서는 구라라면 단연 황구라(황석영)판이었는데, 재야의 구라는 방동규였다. 그는 고교 시절부터 주먹으로 날렸던 미남에 몸집이 튼실한 문제아였는데, 아버지가 백기완에게 아들 버릇 좀 고쳐달라고 부탁했다. 백기완이 그에게 너 쌈 잘하니, 라고 물으니 한꺼번에 너덧 명은 문제없다는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귀싸대기를 갈기고는 “이눔아, 기껏 그런 조무래기들을 패대는 게 힘자랑이냐! 너 같은 녀석이 패대기쳐야 할 상대는 따로 있어!”라는 일갈로 대오 각성시켜 정작 싸울 상대가 누구인가를 일깨워 주었다는 설이 있다.
저 당송팔대가의 하나인 증공(曾鞏)이 천하장사 항우를 일러 “영웅본학만인적(英雄本學萬人敵, 영웅은 본래 만인을 대적하는 법을 배운다)”(<虞美人草>) 라는 명 구절을 상기시키는 멋진 장면이다. 이후 방동규는 백기완 사단에서 열심이었으나, 밥벌이 때문에 서독 광부 파견 1기생으로 나갔다. 돈을 모은 그는 프랑스 소르본대학에서 동물사회학을 청강한 뒤 조용히 귀국, 명동의 한 골목에다 양장점을 차렸다. 미남에다 건장한 체격, 거기다가 소르본 출신이라니까 뭇 숙녀들이 운집하여 엄청나게 돈을 모우는 재미에 주변의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숙녀들의 예방에 묻혀 재미가 쏠쏠했던 그의 은밀한 존재를 처음 알게 된 건 문학평론가 구중서였다. 경기도 광주 곤지암 출신인 그는 고향의 풍광을 자랑하며 작가 신상웅, 등단하기 직전의 김지하, 서울대 철학과의 기인으로 <청맥> 편집으로 통혁당 때 혼쭐이 났던 시인 주성윤, 평론가 백승철, 그리고 나를 초대하여 곤지암 강변에서 천렵으로 한 나절을 즐기고 상경, 헤어진 뒤 몇몇(구중서, 신상웅, 김지하, 나)이 남아 명동 길을 걷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구중서가 한 미남을 맞닥뜨리더니 “어, 너 언제 왔어?”하고 물었고, 그는 곤혹스러운 듯 어물거리더니 “나, 여기서 가게 해. 쉬었다가!”해서 들어가 보니 멋진 양장점이었고, 의자에는 아름다운 숙녀들이 디자인 잡지를 뒤적이고 있었다.
방 배추(그의 별명)는 고객들에게 나중에 들려달라고 내보내더니 얼른 중국집에다 각종 요리와 술을 주문했다. 구중서가 우리 일행을 소개했고, 그는 촌각이 아깝다는 듯이 서독에서의 광부 체험부터 파리 풍경 등등으로 썰을 풀었다. 그의 썰 즉 구라에 우리는 웃기에 바빴는데, 구라라면 뒤지지 않는 김지하는 대뜸 그의 추임새부터 말꼬리를 잡아 자신의 썰을 풀어대며 제법 말상대가 되자 “형님, 형님이 배추니까 나는 동생으로 상추로 합시다.”하며 궁합을 맞춰버렸다.
아마 밤이 깊어서야 우리는 헤어졌을 것이다. 방 배추는 우리에게 자신의 존재를 비밀로 해달라고 신신당부하며, 우리만 알고 자주 들리라고 했다. 우리는 그 당부를 지켜 전혀 소문을 안 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 한량기질이 도져서 스스로 백기완을 비롯한 여럿에게 연락, 거의 매일 양장점이 술판으로 이어지자 숙녀들이 다 발길을 끊어버리고 말았다.
그는 다시 빈털터리 처지에서 최전방 산악지대에다 엄청난 면적의 야산 개발권을 얻어 목장을 하게 되었다며 우리를 초청했다. 버스도 드문 그곳엘 찾아 갔더니 산 입구에서 해가 저물어야 밤에 산길을 더듬어 “방 배추”라고 고함을 질러대면서 찾아갔다. 명산대찰이 서기에 적합한 야산 중의 심산이었다. 거기서 우리가 갖고 간 술과 각종 간식을 다 털어먹으며 밤을 샌 후 헤어진 게 나와는 마지막 만남이었다가 서대문 호텔에서 대면하게 된 것이었다. 목장 일을 돕는 경상도 총각 하나를 데리고 있었는데, 북에서 내려오는 삐라를 주워 열심히 읽더라는 것이다. 그걸 소지만 해도 불법이었기에 모아서 다 태워버리라고 당부했다. 그런데 이 총각이 설날 귀향해서 벗들에게 그 내용을 자랑삼아 북쪽 이야길 하니까 신고를 당해 연행, 어디서 들었느냐니까 방 배추를 지목하여 졸지에 연행, 구속당한 처지였다. 대질심문을 요청해 내가 언제 그랬냐고 그 총각에게 물으니 그는 쳐다보기는커녕 대답도 못했다. 그러자 조사관이 그럼 누구로부터 그런 이야기를 들었느냐고 다그치니 고개를 푹 숙인 채 팔로 불쑥 방 배추를 가리켰다는 것이다. 이내 풀려나긴 했으나 억울함으로 따지면 나보다 더했다.

 

8. 재판, 그리고 석방 후 으악새 모임
문인간첩단 사건은 언론 방송들이 방정을 떨었던 것에서 날이 갈수록 점점 빛이 바래져 갔다. 더구나 우리 다섯 보다 더 <한양>지와 관계가 깊었던 문인들이 증인으로 나오면서 재판은 점점 희극처럼 변해갔다. 특히 구상 시인, 조연현 평론가의 증언은 분수령을 만들었다. 박정희 대통령과의 개인적인 관계 때문에 구상 시인의 증언은 관심의 대상이었는데, 감방 안으로 그가 증인으로 못 나올 것 같다는 소문이 들려와서 우리들은 서운하게 여기며 영감님에게 욕을 퍼부었다.
그런데 어느 재판 땐가 느닷없이 판사석으로 메모지가 전해졌다. 바빠서 증인으로 오기 어려운데 지금 시간이 나서 왔으니 당장 법정 증인석에 세워주길 바란다는 요지였다. 그는 여러 정황으로 미뤄볼 때 자신이 증인으로 출두한다면 온갖 반작용이 일어날 것 같아 안 나간다고 소문을 내고는 불쑥 후배 문인들을 위하여 등장한 것이었다. 이 사려 깊은 시인은 증인석에서 “여기 앉은 이 사람들보다 내가 <한양>지 사장(김기심 발행인과 그는 동향의 친구)이나 편집장과는 훨씬 더 가깝다”고 잘라 말하며, 무죄를 강변해 주었다. 조연현은 나의 등단 은사로 가까우면서도 문학관에서는 너무나 달랐는데, 매우 단호하게 자신과 <한양>지와의 친근감을 강조하며 이 사건의 무죄를 논리적으로 입증해 주었다. 내 개인적으로는 별로 가깝지 않았던 작가 손소희 역시 단호하게 <한양>지의 발행인이나 편집장은 결코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언명해 주었다. 나의 대학 은사 백철은 일제하에서 카프 사건으로 투옥 경험이 있는 데다, 한국전쟁 전후해서도 온갖 풍상을 겪었기에 무척 긴장된 표정으로 어물대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곤란한 대목에서는 “그럴 수도 있겠네요”라고 하여 우리를 긴장시켰으나 결정적인 쟁점에서는 분명히 부인해 주었다. 
1972년부터 안양교도소에 갇혀있던 마당발 정치인 김상현도 증인으로 등장했다. 기결수라 죄수복을 단정하게 입은 당찬 모습으로 그는 법정에 들어서면서 경호원들이 양쪽에서 부축하자 강하게 뿌리치며 혼자서 당당하게 우리에게 다가와 다섯 피고들에게 차례로 다 고생한다며 악수를 했다. 증인이 이렇게 당당한 건 처음 봤다.

 

<월간 다리> 1970년 9월호(창간), 10월호, 11월호

이 책을 들어 이런 저술을 남긴 김상현 의원 같은 분들도 있다며 반론의 자료로 삼았다. 박정희는 경제기획원 장관 김학렬로 하여금 이 책 5천 권 값 6백만 원을 지불토록 했고, 김상현은 그 돈을 밑천으로 윤형두(범우사 회장)에게 잡지를 하나 만들어 보자고 해서 시작한 게 월간 <다리>지였다. 창간 때 주간은 평론가 구중서였고, 그가 가톨릭에서 월간 <창조>를 창간하자 그리로 옮겨간 뒤에 내가 후임으로 갔다. 이래서 1970년대 초기의 박 정권 비판 잡지의 트리오였던 게 함석헌의 <씨알의 소리>, <다리>, <창조>가 되었다. 이 잡지들은 끊임없는 필화와 직간접적인 탄압에 시달렸다. <다리>지의 권두언(김상현 명의)이 <아사히신문>에도 소개되는 등 당시 일본 언론은 무척 진보적이었다. 김상현이 나에게 일본에 가서 푹 쉬고 오라는 선심을 쓴 건 1972년 1월이었다. 나 같은 요시찰 인물이 여권을 내려면 3급 이상 비선출직 공직자의 보증인을 둘 이상 내세워야 했는데, 나를 하루아침에 국회의원 수행비서로 등록시켜 신원조회도 없이 며칠 만에 여권과 비자를 다 얻었다.
김상현과 함께 일본 여행 중 내가 소개해서 <한양>지의 편집장과 호텔에서 만나 축사도 구두로 불러주곤 했었다. 더구나 그는 일본문제의 전문가라 김기심이나 한양이 조총련이 아니라 민단 소속임을 분명히 했고 충분히 재판부에게 신뢰감을 주었다.
그밖에도 남파 전향 간첩을 비롯해 여러 증인이 나왔는데, 가장 인상적인 인물은 <한양>지 편집장 김인재의 고향인 남해에서 상경한 모 농민이었다. 검찰 측 증인이라 우리는 무슨 거짓말을 하려나 바짝 긴장했다. 아니나 다를까, 검찰은 김인재가 6.25 때 ‘빨갱이’로 나서서 마을 사람들을 죽이는 등 만행을 저질렀지요? 라고 묻자, 그는 서슴없이 “아입니더. 그는 절대로 그런 일을 않았심더. 그는 아주 얌전하고 착했심더.”라고 단호하게 잘라버렸다. 당황한 검찰은 “그럼 이 조서에 왜 날인을 했느냐?”니까 “보안대에서 와서 찍어라 캐서 찍은 겁니더.”라고 해서 온 법정은 와르르 웃음바다가 되어버렸다. 판사는 얼른 그에게 끝났으니 나가라고 하자, “그냥 가면 됩니꺼?”라고 물어 된다고 하니 문을 열고 순순히 나가더니 이내 바로 되돌아 왔다. 판사가 왜 들어왔느냐니까 “차비를 준다고 캤는데 어디서 줍니꺼?”라고 해서 또 한 바탕 마음 푹 놓고 웃었지만 판사도 웃음을 제지하지 않았다.

국제앰네스티의 문인간첩단 피고인 석방운동 영문자료집인 <남한의 솔제니친> 표지와 목차

 

이쯤 되니 재판은 희극이 될 수밖에 없었다. <한양>지에 글을 많이 쓴 순서도 아니고, 그들과 자주 만난 친분관계의 깊이로 따진 것도 아니며, 돈과 선물을 많이 받은 서열도 아닌 그야말로 무작위로 뽑힌 다섯 명이었다.
여론은 단연 우리 편이었다. 문학인 297명의 진정서 제출, 국제앰네스티는 <남한의 솔제니친>이란 책자 발간과 세계적인 석방운동, 일본 문인들의 발빠른 석방운동과 서명 작업 등등으로 국제적인 관심사로 변해버린 ‘문인간첩단 사건’은 정작 한국 사회에서도 ‘간첩’이란 게 어마어마한 죄인 줄 알았는데 이렇게 조작될 수도 있구나 하는 인식의 변모를 가져다주었다. 특히 일본에서는 소책자를 만들어 대량 배포했는데, 오무라 마스오 와세다 대학 교수가 나를 만났던 기억을 되살리며 지원을 호소해 주었다. 일본에서는 진보적인 인권변호사의 상징이었던 나카다이라 겐키치 변호사가 재판 때마다 거의 방청하여 그 정황을 해외에 널리 알려주기도 했다. 그는 일본의 그릇된 역사교과서 바로잡기부터 재일한국교민의 인권문제와 북한 돕기 등에 관여해 온 잊을 수 없는 인물이었다.
감방의 밤은 왁자지껄하다. 그건 느끼기에 따라 시장바닥 같기도 하지만 온갖 벌레와 동물들의 대화로 시끌시끌한 여름 밤 숲속 같기도 하다. 그 소리들은 불협화음이지만 재밌다, “야, 이 도둑놈들아, 욕 좀 하자아아아”하면 바로 “네에미 씹니다.”가 나오고 이어 “네에미 씹이 씹이다.
”에 꼬리를 물고 “네에미 씹이 씹이 씹이다”라며 ‘씹’자가 한자씩 이자를 붙여 나가다가 “X방 000 깨져라” 하면 “*** 뒷문 가서 깨져라” 소리 지른다. 깨져라는 죽으라는 것, 뒷문은 사형장이다. 그러나 그 누구도, 어떤 죄인도 깨지기를 바라진 않는 게 감방의 정서다. 
“야 임마, 3대 째 징역 살아라”, “X방, 원숭이 폭 삶아 보낸다”라고도 했다. 원숭이는 일제 때부터 끔찍하게 재수 없는 상징으로 써온 저주로 그걸 삶기까지 했으니! 잠자리에 들기 전에 “어머니—”하고 목 놓아 부르는 소리가 며칠 째 계속 나기도 했다. 어느 날에는 “아, 집에 가고 싶다”는 하소연도 나왔다.
“어이 X방 000, 잘 자. ***(여자 이름) 참 안 됐어. 그 애 십년 후에 애나 낳을 수 있을까?”라는 근심도 터져 나왔다. 어떤 노처녀가 개나리(긴급조치 위반 상징)로 잡혀 온 걸 동정하는 말에, “야, 걱정 마. 그땐 국민소득 1천 5백 달러는 될 테니까 자식 없어도 사회보장제도가 잘 될 테지”라는 처방전도 나왔다. 이어 누군가 “잘 있거라, 나는 내일 목포 간다”라고 소리 지르니 얼른 “잘 있거라 나는 간다 이별의 말도 없이 … 목포행 완행열차”라는 구성진 <대전 발 0시 50분>(원제목은 <대전 브루스>)을 불러준다. 실제로 서울역을 출발, 대전에서 0시 50분에 대전으로 출발했던 제33열차는 1959년에 생겼다가 이듬해에 시간이 바뀌어 사라졌으나 노래는 그대로 남았다.
8차에 걸친 지루하고 따분한 심리가 끝나고 6월 28일 금요일이 제1심 판결 날이었다. 밖에서는 아예 다 풀려날 줄 알고 리영희 선생은 희대의 명저 <전환시대의 논리>를 출간하고서 그 출판기념회를 그날 저녁으로 잡았다. 우리가 풀려나면 다 참석하기 쉽게 하려는 배려였다. 그런데 기대를 저버린 채 정을병 혼자만 무죄였고, 김우종과 나는 집행유예, 이호철과 장백일은 실형이 선고되었다. 풀려나도 개운찮은 건 이호철・장백일의 실형(둘 다 2심에서 석방)과, 결국 그간 지녔던 사회적인 모든 직책과 활동이 깡그리 백지화 되어버린 때문이었다. 우리는 모두 복직도 복권도 안 된 채 요시찰인물로 살아야만 했다.
‘관제(官製) 빨갱이‘란 단어가 얼마나 허황된 독재권력의 산물인가를 여실히 보여준 사건이자, 그 피해로 일생을 불행하게 살아야만 되었던가의 본보기가 바로 이 사건이었다. 내가 정식으로 복권된 것은 1998년이었다.

 

출소 후 나카다이라 겐키치 변호사 초대 기념사진. 앞줄 왼쪽부터 어머니, 두 살 된 아들(민)을 안은 아내 고경숙, 나카다이라 변호사와 동행자, 뒷줄 정을병, 임헌영, 미상

 

바로 그해 여름 즉 1974년 8.15 경축식은 육영수의 저격 사건이 있었는데, 이호철은 감방 안에서 밥맛이 떨어질 정도로 흥분하며 석방을 고대한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그 둘은 예상대로 우리보다 3개월 더 옥살이를 한 뒤에야 2심에서 석방됐다.
그해 연말, 정확히는 12월 9일에 유신반대파였던 정치인 3인방인 김상현, 조연하, 조윤형이 안양교도소에서 출감했다. 갓 출옥한 김상현 환영을 겸한 송년 모임에서 이 풍진 세상을 소일하고자 으악새 모임이 만들어졌다. 한승헌, 장을병, 리영희, 이상두, 윤현, 김상현, 윤형두에다 나중 김중배, 한완상이 추가됐고 나는 최연소 회원으로 합세했다. 유신통치 시절의 유일한 여흥이었던이 모임의 <으악새 선언>은 한승헌이 작성했는데 실로 명문이다.

 

오늘 우리는 ‘체’에서 벗어나기로 한다.
허울 좋은 도덕의 멍에 때문에, 처세와 체면 때문에 ‘나’를 속박해온 ‘체’를 벗어 던지기로 한다. 자신을 학대해온 1년을 묻어버리고,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발산하기로 한다. 생각하면 얼마나 거짓생활에 이끌려 다녔던가. 우리의 고뇌와 피로를 알고 있는 것은 오로지 자신뿐이 아니던가. 화려한 위장보다는 처참하더라도 진실의 목소리를 우리는 그리워한다. 남을 속이는 기만보다는 자신을 속이는 일이 얼마나 고통스럽고도 불가한 것인가를 새삼 느낀다….
이에 우리는 겉으로 그럴듯하면서도 내심으로 외롭고 불행했던 자신을 위로하기 위하여, 나아가 그런 위로라도 없이는 이 해를 잊을 수 없는 비밀스러운 가슴을 마주 대하는 공동의 술상 앞에 나와 다음과 같은 행동강령을 전원의 뜻으로 선포한다.

1. 오늘 이 자리에서는 누구나 솔직해야 한다. 솔직할까 말까 망설이는 자는 천추의 한을 면치 못할 것이다.
1. 오늘 이 자리는 저질을 우대하는 자리다. 인간의 태어남이 곧 저질의 부산물인 고로 저질을 욕하는 자야말로, 태어남을 욕하는 자니라.
1. 오늘 우리는 모든 것을 잊어버리도록 한다. 어제와 오늘뿐 아니라 내일도 잊어버리라. 내일 내일 하지만 언제 내일이라는 것이 한 번이라도 있어봤나. 기다렸던 내일이란 것도 당하고 보면 항상 오늘이었지 않은가.
1. 오늘 우리는 기분에 살고 기분에 죽기를 맹세한다. 사람에게서 기분을 빼놓으면 주민등록증밖에 남을 것이 없다. 괜히 호마이카질 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의 감정발산에 일로매진하기를 다짐한다.
1. 만일 위와 같은 강령을 위반하는 자가 있거나 그로 인해서 이 자리의 무드에 금이 갈 염려가 있을 때에는 사회자가 본의 아닌 긴급조치를 취할 수 있다. 이 긴급조치를 위반하거나 비방하는 자는 아무런 벌도 받는 일이 없다.

 

주로 김상현이 스폰서를 모셔 오거나 자신이 지불하면서 맘껏 즐겼는데, 한정식, 양식, 일식집 고급부터 싸구려까지 두루 섭렵, 전전했다. 온갖 음담패설과 욕설이 담긴 속요들을 맘대로 불렀으나 춤을 추거나 여성을 들이진 않았다. 리영희가 여성이 동석하자 “낡은 부르주아” 운운하며 비토를 놓은 결과였다. 그러나 아주 가끔은 뭇 여성 펜이 많았던 한승헌이 자기 펜들만 초청하여 함께 하기도 했다. 오죽 답답했으면 이런 발광을 했을까. 익살과 와이당(猥談의 일어)에 일가견을 가졌던 김상현은 월남전에 참전했던 한 장군이 처했던 매독의 비극을 설파했다. 국제매독이라 고칠 수 없는 단계라서 그는 국내 명 의원은 물론이고 이웃나라까지 원정을 갔으나 한결같이 “잘라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몸이 점점 썩어 들어가 죽게 됩니다.”라는 진단이었다. 차마 그걸 잘라내기가 아쉬웠던 장군은 마지막으로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을지로 6가 허름한 골목의 중국인 명 한의를 찾아갔다. 늙은 한의는 안경 너머로 물끄러미 그 흉물을 쳐다보더니 “다른 병원에도 가 보셨습니까?” 정중히 물었고 “예, 다 다녀봤습니다”고 답하니 “뭐랍디까?”고 물었다. 장군은 근심어린 표정으로 답했다. “다들 똑 같이 이걸 잘라내야 한답니다.
”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한의는 “미친놈들! 자르긴 왜 잘라!” 했다. 이에 용기백배한 장군은 “그렇지요? 안 잘라도 되지요?” 하자 한의는 다시 “미친놈들!”을 서너 번 반복하기에 장군은 아예 희색을 띄우며, “예, 그렇지요! 안 잘라도 되지요?” 라고 용기 있게 답했다. 지그시 쳐다보던 그 명의는 다시 “미친 놈들! 그냥 둬도 뚝 떨어질 걸!”이라고 조용히 말했다.

이걸 1970년대의 유신통치 아래서 최상급 와이당이라고 내가 감히 평하는 것은 바로 그 한의사가 ‘역사적인 필연성’을 일깨워줬기 때문이다. 그냥 둬도 떨어질 건 떨어지고 만다! 실제로 1970년대 중반 이후 모든 민주투사들과 학자들은 박정희가 죽어야만 유신헌법이 끝날 것으로 전망했다. 10.26 이후에 다들 망할 걸 알았다고들 하지만 내가 감히 증언한다. 이미 민주화 운동권조차도 그 군부독재 체제가 쉬 붕괴할 것이란 기대는 갖지 않았다. 그러나 역사적 필연성은 피할 수 없다. 그렇다고 민주화를 위한 투쟁을 포기하자는 건 아니니 오해 없기 바란다. 결국 그는 이로부터 5년 뒤인 1979년 10월 26일에 저격당함으로써 유신통치의 막은 내렸다. 그냥 둬도 뚝 떨어진 것이다. 그러고도 사건 44년 뒤인 2018년 6월에야 나는 재심에서 무죄판결을 받았고, 이에 따른 형사적인 배상도 끝났다. 그러나 내 청춘을 빼앗겼던 민사적 배상 재판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세칭 ‘문인간첩단 사건’은 산적한 간첩조작사건의 목록 중 비정치적인 것이라 대중적인 선동력이 강했다. 이승만 치하에서 첫 간첩 조작이었던 ‘국회프락치 사’에 이어 ‘조봉암 조작사건’을 거쳤는데, 박정희 치하에서는 ‘인혁당 사건’이 대중들에게 가장 강력한 호소력으로 작용했고, 유신통치 아래서는 ‘문인간첩단 사건’으로, ‘간첩도 만들어 내는 독재’라는 인식을 널리 퍼트리게 작동됐다.

임헌영을 비롯한 문인간첩단 사건 관련자 전원 무죄 기사. <한국경제> 2018년 6월 24일자 기사

 

이런 조작술은 선거 때마다 ‘북풍’을 이용한 수구세력들의 기교가 다양화되어 널리 활용하므로써 각계각층에서 언제라도 필요하면 ‘간첩조작’을 수행할 수 있는 만반의 태세를 갖추도록 해 주었기 때문에 크게 보면 모든 조작사건은 다 정치권력이 날조해낸 결과였다. 민주화와 인권의 첫 걸음은 이런 ‘조작’이 불가능하도록 세상을 바꾸는 일인데, 정작 그 조작 전문가 집단이 민주화되자 사회의 그늘에서 여전히 ‘간첩’이 아닌 ‘여론’ 조작에 나서는 모양새가 참 우려스럽다. 그래서 그들은 지금도 자신들이 조작했던 사건들이 진짜라고 억지를 쓰고 있다. 진정한 민주화란 그 날조범들이 다시는 어떤 ‘조작’도 불가능하도록 사회를 정화하는 노력일 것이다.

목, 2021/04/29- 0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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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원회원 마당]

노을에 그리는 얼굴

최홍이 전 서울시 교육위원장

살아서 죽고 죽어서 산 천부의 아들
아무나 낯익은 타향
누구도 낯선 고향 노을에
약지 자른 왼손 낙관
그 유묵 그리며 마음 숙인다

대한의군 참모중장 안중근 의사 순국 111주년 오늘에
2021. 3. 26

목, 2021/04/29- 1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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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원회원 마당]

사랑하는 Miyanma 친구들이여

김순흥 광주지부장(전 광주대학교 교수)

당신들이 군사독재 밑에서 겪고 있는 어려움을 압니다.
당신들이 겪고있는 군부의 폭력과 학살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당신들이 이 모든 고난을 이겨낼 것을 믿습니다.

사랑하는 Miyanma 친구들이여

당신들은 이겨낼 수 있습니다.
아무도 정확한 시간을 알 수는 없지만,

우리는 그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확신합니다.
내일 아침에 갑자기 들이닥칠 수도 있습니다.
다음 주나 다음 달이나 내년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결국 승리는 여러분의 것이라는 것을 확신합니다.

여러분은 자유에 대한 꿈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민주주의에 대한 강한 바람이 있습니다.

여러분의 꿈과, 여러분의 바람은
반드시 여러분 앞에 승리를 가져다 줄 것입니다.

두려워하지 마세요.
미래에 대해 걱정하지 마세요.

여러분의 꿈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여러분의 바람은 반드시 성취됩니다.

친구들이여!
당신들은 혼자가 아닙니다.
당신들은 외롭지 않습니다.
우리 모두 함께 갑니다.
손에 손을 잡고 모두 함께 갑니다.

광주의 시민들은 여러분과 함께 합니다.
대한민국의 모든 국민들이 여러분을 지지합니다.
세계만방의 모든 인민들이 여러분과 함께 있습니다.
여러분은 결코, 결코, 결코 혼자가 아닙니다.

자유를 위해 나아갑시다.
민주주의를 위해 앞으로 나아갑시다.
힘내세요 미얀마. 힘내세요 미얀마. 힘내세요 미얀마.

미얀마 만세 !!!
민주주의 만세 !!!

※ 위 시는 김순흥 광주지부장이 4월 10일 광주광역시 동구 5.18민주광장에서 매주 토요일 열리는 ‘미얀마 민주주의를 응원하는 광주시민’ 6차 딴봉띠 집회에서 직접 영어로 전달한 메시지다.

목, 2021/04/29- 1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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