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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엇갈린 형제의 길, 심우섭과 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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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엇갈린 형제의 길, 심우섭과 심훈

익명 (미확인) | 목, 2018/02/22- 1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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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의 자리에서

어머님! 어머님께서는 조금도 저를 위하여 근심치 마십시오. 지금 조선에는 우리 어머님 같으신 어머니가 몇 천 분이요, 몇 만 분이나 계시지 않습니까? 그리고 어머님께서도 이 땅에 이슬을 받고 자라나신 공로 많고 소중한 따님의 한 분이시고, 저는 어머님보다도 더 크신 어머님을 위하여 한 몸을 바치려는 영광스러운 이 땅의 사나이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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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훈

19살 청년이 서대문감옥에서 어머니께 보낸 편지다. 이 청년은 우리가 잘 아는 <상록수>의 저자 심훈(본명 심대섭 沈大燮, 1901~1936)이다.

1919년 3월 1일 경성고등보통학교에 다니던 심훈은 독립운동 소식에 학교를 뛰쳐나왔다. 파고다 공원에서 대한문으로 옮겨가며 독립만세를 불렀다. 그날은 붙잡히지 않았다.

3월 5일 오전 9시, 심훈은 남대문역 앞에서 수만의 학생과 같이 조선독립만세를 불렀다. 일대 시위운동에 청년의 피가 끓었다. 어머님보다 더 큰 어머님, 조국을 위해 한 몸을 바치겠다는 혈기가 넘쳤다. 그날 밤 안국동 별궁 앞에서 헌병에게 체포되었다.

편지에서 보듯 만세시위에 나섰다 체포되어 옥고를 치른 사람은 몇 천, 몇 만이었다. 서대문감옥에 갇혀 있던 기간은 2개월 남짓이었다. 그해 겨울, 삼한 사온이 무색하게 나날이 춥기만 했다. 심훈은 감옥에 남은 동지들을 걱정했다. 걱정하는 한편으로 나라의 독립을 염원했다.

지금쯤 얼음 속 같은 옥중에 그저 남아 있는 사람들이야 과연 어떠할까? 살을 깎아내는 북풍은 철창에 불고 눈덩이 같은 밥을 먹고 허구한 날 우르르 떨기만 할 때에 그이들의 마음이야 과연 어떠할까. 그러나 그들의 마음은 그저 뜨거울 것이다. 서대문 감옥 높은 담 위에 태극기가 펄펄 날릴 때 굳센 팔다리로 옥문을 깨뜨리고 환호와 만세의 부르짖음으로 열광하여 뛰는 군중… 오- 상제여 그의 원한을 속히 이루어 주소서! (심훈일기, 1920.1.17)

31운동 1주기가 되었다. 일제는 경찰과 군대를 동원해 온 시가를 꽁꽁 에워쌌다. 신문에는 나지 않았지만 평양에서 야단이 났다고 하고 배재학당에서 독립만세를 불렀다는 소문도 들었다. 심훈은 홀로 남산에 올랐다. 여러 가지 일로 답답한 가슴이 그를 이끌었다.

남산에 올라갔다. 왜놈들에게 짓밟힌 남산 눈앞에 깔린 서울 시가며 꿈같은 먼 산과 띠 같이 흐르는 한강수까지 다 우리 것이련마는. 아! 슬프고 답답한 마음을 억제키 어렵다. 잠두(蠶頭)에 홀로 걸터앉아 넓은 시가와 산과 들과 강을 향하고 목청을 빼어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창가를 높이 불렀다. (심훈일기, 1920.3.27)

감옥에서 풀려난 심훈, 미래를 걱정하는 20살 청년이었다. 온 민족이 들고 일어나 독립만세를 부른지 1년이 지났지만 식민지라는 현실은 변한 게 하나 없다. 만세시위로 옥고를 치르느라 다니던 학교에서는 퇴학당했다. 문학에 뜻을 두었지만 길은 잘 보이지 않았다. 듣는 이 없는 산에 올라 애국가를 소리 높여 불러보지만 슬프고 답답한 마음은 쉬이 풀릴 리 없다.

그런 그의 눈앞에 자리보전하고 누운 큰형이 보였다. 큰형은 필명 천풍(天風)으로 유명한 심우섭(沈友燮, 1890~1948)이다. 둘 사이엔 작은 형 심명섭과 누이 심원섭이 있다. 그래서 큰형과 막내는 11살 나이 차이가 난다. 어린 막내가 보기에 큰형 심우섭의 처신이 참으로 못마땅하다.

형님의 병환이 그저 낫지 못한데 어제는 오지도 않았다고 보지도 않고 공연한 걱정을 하신다. 아무 아는 것도 없이 혼자 달관을 하고 초관(超觀)을 하고 안하무인으로 자임하여 말만 함부로 하고 다니며 하다가 신문경영에도 대실패를 하고 울화병이 든 것이다. 그러고 주색(酒色)에 몸은 약하여 가지고 온갖 번민을 하며 여러 가지로 고통을 받는 것이라 아무리 친형제 간이라도 동정하는 마음이 생길 수는 없다. 형님의 일은 만사가 다 그 수법이니 누가 환영을 하랴. 이렇다가도 형제간에 마음이나 상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큰 걱정이다. (심훈 일기, 1920.1.21)

형의 병 수발은 본처가 아닌 첩이 들고 있다. 이미 심우섭은 평양 출신 기생 초월과의 연애로 소문이 자자했는데, 이 무렵에는 또 다른 이를 첩으로 들였던 모양이다. 심훈은 형님 병의 원인을 타락적 쾌활과 불규칙한 생활, 조금도 없는 극기심, 특히 주색을 제1의 악마라고 생각했다. 당시 심우섭은 식민지 지식인으로서 신문에 소설도 발표하고 매일신보 기자로 필명을 날리던 쾌활남아였다. 그런 심우섭이 신문사도 그만두고 자리보전하고 누워 병문안 오지 않는다고 동생 타박이나 하고 있다. 이제 그 형 이야기를 해 보자.

기자 심우섭, 데라우치를 찬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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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우섭

1910년 3월 휘문의숙을 졸업한 심우섭이 맞닥뜨린 현실은 일본의 식민지가 된 조선이었다. 신학문을 배운 지식인으로서 심우섭의 고민이 시작되었다. 1912년 조선총독부 보통문관시험에 합격했다. 관료가 될 생각도 한 모양이다.

이듬해에는 잠시 사립학교 교사 노릇도 했다. 하지만 5개월 남짓 만에 그만두었다. 심우섭의 선택은 문인이자 언론인의 길이었다. ‘천풍’이란 필명으로 이름을 날렸다. 매일신보에 소설 <형제>(兄弟, 1914년 6~7월), <주>(酒, 1914년 9월), <산중화>(山中花, 1917년 4~9월)를 연재했다. 특히 1917년에는 세간을 떠들썩하게 했던 일본인들의 호랑이사냥에 동행하고 ‘정호기(征虎記)’를 연재했다. 매일신보사에 입사한 것은 1916년이었고 1918년부터는 지방과장이란 직함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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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명을 날리던 20대의 심우섭. 왼쪽부터 진학문 심우섭 이광수 이상협

이광수가 1917년에 발표한 소설 <무정>의 첫 장면에는 신문기자 신우선이 등장한다. “미스터 리, 어디로 가는가” 주인공 이형식을 뒤에서 부르며 나타나는 이.대팻밥모자를 살짝 뒤로 젖혀 쓰고 활개 치며 내려오는 신문기자 신우선이다. 김장로 집 딸 김선형의 영어 과외를 하러 가는 이형식에게 던지는 신우선의 농지거리는 그의 유쾌함과 활달함을 잘 드러낸다. 그렇지만 이형식은 그의 지나친 방탕함을 허물이라 생각하고 있다.

소설 <무정> 속 신우선이 매일신보 기자 심우섭을 모델로 했다는 건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름도 그렇고 <무정>이 매일신보 1면에 연재될 때 심우섭의 <산중화>는 4면에 연재되고 있었다. 그들이 함께 찍은 사진이다. 1918년, 매일신보 기자 시절에 찍은 이 사진 속 심우섭을 보면 생기 넘치는 젊음과 그에게 꼬리표처럼 항상 붙어 다니는 ‘해학’이라는 수식어를 떠올리게 하는 장난기가 엿보인다.

옆에 선 이는 이광수와 진학문, 이상협이다. 비슷한 연배에 매일신보를 매개로 어울리던 시절이다. 이렇게 매일신보에 소설을 연재하며 세상에 이름을 알렸고, 쾌활한 성격으로 음주가무를 즐기며 평양 출신의 유명한 기생과 연애도 하며 풍류남아 심우섭의 20대 청춘이 흘러갔다.

이 무렵 기자 심우섭의 기사 한 대목을 읽어보자. 꽤 긴 글인데, 일부를 발췌해도 역시나 길다.

백작이 조선을 혁신함이 의사가 난치병자에게 수술을 베품과 다를 바 없도다. 아니다. 다르지 않을 뿐 아니라 한층 심한 것이 있다. 즉 의사가 다만 병자의 복부나 다리를 해부하기에 그치지만 백작의 수술방법은 매우 엄혹하고 奇絶하여 옛 머리를 자르고 새 머리를 붙이며 四肢百體에 그 예리한 해부도는 縱橫敏活하여 자르고 쪼개지 않은 곳이 없다. 오호라. 당시 병상에 누웠던 우리 조선인 즉 병자의 고통이야 어찌 필설로 형용할 수 있겠으며, 백작에 대한 분노와 증오도 역시 극에 달하였으리로다. 백작이 전기한 공전절후의 대수술을 단행하고는 다시 환자의 회복에 힘을 다하여 恩威와 寬嚴이 오로지 병자로 하여금 加療靜食에 주의하게 하고 감히 分外의 事爲를 감행하지 못하게 한지 이제 만 6 개년여라. 시술 후 6년여 장기간에 周密한 좌우의 간호를 받으면서 병상에 누워 있다가 지금에 이르러는 크게 全快한지라. 다년 음용하던 미음은 쌀밥으로 변하고 그 착용하던 환자복도 새 옷으로 갈아입고 嚴切한 간호를 해탈하기에 이르렀으니 이에 의사의 주의방침도 일변하여 완전한 인간으로 대우하며 원래 무병한 자와 같은 행복을 누리게 할 시기가 멀지 않았다. 비로소 천오백만의 조선인민은 滿心歡情으로 백작의 손을 꼭 잡아 백작의 시술의 노고에 감사하고, 백작은 다년 병상의 고통을 위안하여 일반의 의심이 사라지고 和氣가 가득하기에 이른 것은 기약도 기대할만 하거늘. 애석하도다 무정한 寺內백작은 일이 이에 이르기 전에 조선을 떠나갔도다. (<매일신보> 1916.10.15. 밑줄은 인용자)

이 기사에서 찬양해 마지않는 백작은 다름 아닌 초대 조선총독 데라우치 마사다케(寺內正毅)이다. 1916년 10월 데라우치는 조선총독을 사임하고 일본에 돌아가 내각 총리대신에 취임했다. 심우섭 기자는 데라우치 백작을 전송하는 글(「寺內伯爵을 送함」, 天風生)을 매일신보에 실었다. 문예기자로서 주로 신소설을 연재하며 간혹 금강산 기행이나 호랑이 사냥 같은데 따라가 답사기를 쓰고, 혹은 문예면에 유쾌한 세태풍자기사를 주로 쓰던 심우섭이다 보니 이런 정치색 짙은 글은 참 의외다.

기자 심우섭이 데라우치의 조선통치를 어떻게 평가하는지 보자. 그는 조선과 조선인을 병상에 누운 환자에, 데라우치와 일본의 식민통치를 의사와 간호사에 비유했다. 의사의 수술방법은 매우 엄혹하고 기이하다. 옛 머리를 잘라내고 새 머리를 붙이는 것 같다. 병자의 온몸을 자르고 쪼개니, 그 고통이 이루 형용할 수조차 없다. 그 고통에 의사에 대한 병자의 분노와 증오는 극에 달했다. 그래도 의사는 대수술을 감행하더니 그 후 환자의 회복에 정성을 다했다. 6년여가 흘렀다. 이제 환자는 완전히 나았다. 환자복에서 새 옷으로 갈아입고 쌀밥도 먹을 수 있게 되었다. 비로소 환자는 의심을 거두고 의사의 노고에 감사하기에 이르렀다. 일본의 식민통치에 대한 찬사를 이렇게 이해하기 쉽게 설명해주니, 이런 글솜씨가 아무에게나 있겠는가. 이 기사는 심우섭의 생각을 명확하게 보여준다. 일본이 난치병에 걸린 조선과 조선인을 치료해 주고 행복의 길로 이끌고 있으니, 즉 일본의 식민통치를 통해 조선이 근대화되고 있으니 그 은혜에 고마워해야 한다. 매일신보가 총독부 기관지이고, 기자는 신문사의 논조에 구속받을 수밖에 없다고 해도 이 정도의 정성과 글솜씨를 보면 근본 생각이야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자치운동 잠깐, 그리고 참정권 운동으로

만세시위 열풍이 한풀 꺾인 1919년 7월 심우섭은 일본 도쿄로 향했다. 매일신보 기자는 그만두었던 것 같다. 동생 심훈도 감옥에서 풀려나왔을 무렵이다. 심우섭을 비롯해 함께 도쿄에 건너간 고희준, 채기두, 박승빈, 이기찬, 고원훈, 박병철 등은 조선에 자치제 시행을 위한 운동을 하려 했다. 세간에서는 이들을 ‘동상(東上) 7인조’라 불렀다. 일본 정계의 주요 인물들을 만나 ①관리를 공평하게 임용할 것 ② 조선의회를 개설할 것 ③ 언론의 자유를 인정할 것 ④ 소요(3.1운동) 범인을 석방할 것, 4개항을 제시하며 대조선 정책에 채용할 것을 역설했다. 또 하라 다카시(原敬) 수상을 만나 총독정치에 대한 종래의 실정을 비판하고 “조선은 조선인으로 하여금 다스리게 하거나 조선의회를 만들라”는 의사를 표명했다.

3・1운동의 충격은 일본 식민통치자들로 하여금 조선 통치에 대한 변화의 필요성을 절감하게했고, 동시에 조선인들의 정치운동 내지 정치적 요구도 다양하게 나타났다. 그 흐름 중 하나가 자치론 내지 자치운동이었다. 주로 이광수를 비롯한 동아일보 계열과 최린을 위시한 천도교 신파 쪽에서 1920년대를 거치는 동안 자치운동에 열심이었다.

일제시기 조선정치행위의 논리를 크게 독립운동론, 참정권론, 자치론으로 구분한다. 참정권론과 자치론은 식민 통치에의 ‘참여’ 논리, 독립운동론은 이에 대한 ‘저항’의 논리이다. 기본적으로 ‘참여’란 기존체제를 인정하는 범위 내에서의 행위이다. 따라서 자치론은 본질적으로 독립운동의 유보 내지 포기를 전제로 한 것이었다. 일부 논자들은 자치운동을 독립운동의 준비단계로 보기도 한다. 일제의 동화정책에 반대하며 정치적 결사를 통해 조선인을 정치적으로 훈련시키고 단결시켜 민족적 권리와 이익을 옹호하게 하자는 주장이 일견 그럴 듯 해 보이긴 하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조선의 자치운동은 독립운동을 포기하고 일제에 협력한 운동이었다. 다른 식민지(인도나 아일랜드)의 자치운동은 저항세력이 전개했는데, 조선에서는 일제에 협력적인 세력이 주도했다는 점을 간과하면 안 된다. 실제 자치운동은 일제 지배 하에서 일정한 정치권력을 획득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심우섭을 비롯한 ‘동상 7인조’는 일본의 조선 지배를 인정하는 범위 내에서 조선에 자치를 허용해줄 것을 제안했다. 이 무렵 심우섭은 3・1운동의 여파로 나타난 일제의 통치방침의 변화란 물결을 타고 정치운동에 나섰던 것으로 보인다. 동아일보가 자치운동에 본격적으로 나선 것이 1922년 7월 무렵이고, 이광수의 「민족적 경륜」이 발표된 것이 1924년 1월이니 심우섭 등의 자치운동은 아마도 그 시초가 아니었을까. 도쿄에서 돌아온 이들은 그해 11월 새로 부임한 조선총독 사이토 마코토(齋藤實)에게 청원서를 제출했다. 그런데 이 청원서는 기존의 주장에서 상당히 후퇴하여 언론 출판 집회 결사의 자유를 요구하는데 그치고, 조선의회 설치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었다. 즉 일본 하라 수상의 내지연장주의에 따른 동화정책과 사이토 총독의 ‘문화정치’라는 구도 하에서 조선인의 정치활동을 위한 공간 허용만을 요청했다. 이들의 자치운동은 그 정도 선에서 끝났던 것이다.

심우섭은 매일신보사에 복귀해 논설부장으로 일하는 한편 계명구락부 기관지인 <계명>의 주간을 맡아 보았다. 그러다 1925년 동민회에 들어갔다. 이번에는 자치운동과는 노선을 달리하던 참정권 운동에 투신한다. 일본의 동화주의를 적극 지지하는 참정권 운동 단체인 동민회는 ‘철저한 내선융화의 실현을 통한 아시아민족의 결합’을 내세운 단체였다. 당시 자치운동 측과 참정권 운동 측은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지고 맹렬히 비판하던 시기였다. 이른바 갈아타기라고 비판할 수도 있지만 참정권론이든 자치론이든 기본적으로 일본에 협조하고 일본의 우위와 지배를 인정한다는 점에서 큰 차이는 없다. 종국에는 이광수나 최린도 동화론자로 변절해 갔다는 사실을 볼때, 심우섭은 그들보다 한 발 앞서 움직였다고 볼 수 있다.

한편 심우섭을 비롯한 동상 7인조가 도쿄에 건너갔을 때 유력 인사들과의 교섭을 부탁한 인물이 아베 미쓰이에(阿部充家)였다. 아베 미쓰이에는 정치기자로서 1915~1918년 경성일보 및 매일신보 사장을 지냈고, 1920년대에는 사이토 조선총독의 개인 정치고문 역할을 했다. 조선통치에 관련이 깊은 사람으로 연구자들 사이에선 ‘제국의 브로커’라는 별명이 붙은 인물이다. 심우섭이 자치운동을 위해 도쿄를 찾은 1919년 7월에 아베는 일본 국민신문 부사장을 맡고 있었다. 이때 그는 심우섭 일행에게 일본 정치인들을 비롯한 유력 인사들을 소개하고 자치운동을 위한 조언도 해 주었다.

일찍부터 조선인 ‘신지식층’에 관심이 많았던 아베는 1920년 5월 조선을 방문했다. 경성일보 사장을 그만두고 떠난 지 2년 만이었다. 새 총독 사이토 마코토의 비공식 정치고문 역할을 시작한 것이다. 아베는 사이토의 기밀비를 받고 조선인과 재일유학생의 동향이나 일본 정계의 상황을 사이토에게 보고했다. 아베에게는 정치기자 시절 구축한 정보망과 경성일보・매일신보 사장시절 맺었던 조선인 네트워크가 있었다.

약 2개월 동안 아베는 조선 각지를 돌며 실업가, 지식인, 청년지도자, 3・1운동 지도자 등 조선인 유력자들을 만나고 다녔다. 그가 경성에 도착하자 예전부터 알고 있던 조선인들이 매일 “천객만래(千客萬來)”해서 환영하였다.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는 차례로 성대한 환영회를 열어 아베를 맞이했다. 아베가 매일신보 사장을 지내며 깊은 교류를 나눴던 젊은 ‘신지식인층’이 ‘문화통치’의 기류 속에 조선어 신문을 창간하던 시기였다. 그들은 아베를 통해 총독부의 자금 원조와 언론통제 완화 등을 요청했다.

아베를 만나려 줄을 선 이들 가운데 심우섭도 있었다. 그들의 인연은 아베가 경성일보・매일신보 사장이던 시절 심우섭이 매일신보 기자였다는 정도인데, 쾌활하고 주색을 즐기는 심우섭의 캐릭터를 고려하면 좀 더 개인적인 친밀함이 있었을 것이다. 당시 심우섭은 병석에서 일어난 직후였는데도 동생 심훈을 데리고 아베를 찾아갔다.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신문사도 그만두고 도쿄에 건너가 시도했던 자치운동이 별 신통찮은 결과를 보인데다가 큰 병을 앓고 난 직후인지라 꽤 침잠해 있던 시기였을 것이다. 그리고 얼마 있지 않아 매일신보에 복귀하는 걸로 봐서 취직자리를 부탁하지 않았을까 추측해 본다. 심우섭과 아베의 친분은 후에도 쭉 이어졌고, 1936년 아베가 사망하자 심우섭은 그의 흉상을 세우는 일에 앞장섰다.

흥미있는 연구가 있다. 사이토가 조선총독으로 재임하는 동안 어떤 조선인을 몇 차례나 만났는지를 그 횟수를 일일이 밝혀놓은 것이다. 그 가운데 1924년부터 1926년 말까지 사이토가 만난 조선인 제1위는 선우순으로 39회였다. 2위는 이진호(37회), 3위는 민영기(33회)였다. 그리고 다음 자리를 차지한 것이 심우섭인데 도합 31회를 만났다. 당시 조선총독부 고위 관료를 지낸 박중양(20회)이나 신석린(28회)보다, 재계의 거물 한상룡(27회)보다 사이토 총독을 많이 만났다.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다. 다만 심우섭이 조선총독을 자주 만날 만큼 비중 있는 인물이었다는 점, 그리고 동민회 활동과도 관련 있으리란 점은 짐작할 수 있다. 또 아베 미쓰이에가 사이토 총독의 정치고문으로 활약하던 시기였으니 아베와 친분이 있던 심우섭이 어떤 역할을 하지 않았을까 추정해본다.

서로 엇갈린 형제의 길

심우섭이 적극적 친일파의 길로 한걸음씩 내딛는 동안 동생은 식민지 현실을 정면으로 바라보며 좌절하고 분노했다.

1920년 말 심훈은 중국으로 떠났다. 일본 유학 대신 선택한 길이었다. 북경, 남경, 상해, 항주로 이어진 여정 속에서 걸출한 독립운동가들과 교류를 쌓았다. 항주에서는 지강대학(之江大學)에 진학했다. 1923년 중국에서 돌아온 심훈은 영화와 문학 창작을 통해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고자 하는 열망을 드러냈다. 급진적 문예조직이던 ‘염군사’, ‘카프’(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에 가입한 것으로 봐선 유학시절 사회주의에 어느 정도 영향을 받았다고 해석할 수 있다. 1924년엔 동아일보 기자가 되었지만 1926년 철필구락부사건으로 해직되었다. 심훈은 시를 쓰고 소설을 썼다. 그 속에 식민지 지식인의 고뇌와 저항을 담았다. 당시 심훈의 격정이 표출된 시가 「박군의 얼굴」이다.

이게 자네의 얼굴인가?
여보게 朴君, 이게 정말 자네의 얼굴인가? (중략)
오냐 朴君아
눈은 눈을 빼어서 갚고
이는 이를 뽑아서 갚아 주마!
너와 같이 모든 X를 잊을 때까지
우리들의 心臟의 鼓動이 끊길 때까지

심훈은 세 친구, 박열 박순병 박헌영을 생각하며 이 시를 썼다. 직접적 계기는 1927년 11월 병보석으로 출감하는 박헌영의 처참한 모습이었다. 그리고 지식인으로서 저항적 실천의 자세를 갖춰 나갔다. 심훈의 대표시 「그날이 오면」(1930)은 그의 정치사회적 태도와 문학적 지향을 잘 드러낸다.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며는
三角山이 일어나 더덩실 춤이라도 추고
漢江물이 뒤집혀 용솟음칠 그날이,
이 목숨이 끊기기 前에 와 주기만 하량이면,
나는 밤하늘에 날으는 까마귀와 같이
鐘路의 人磬을 머리로 들이받아 울리오리다.
頭蓋骨은 깨어져 散散 조각이 나도
기뻐서 죽사오매 오히려 무슨 恨이 남으오리까.

그날이 와서 오오 그날이 와서
六曹 앞 넓은 길을 울며 뛰며 뒹굴어도
그래도 넘치는 기쁨에 가슴이 미어질 듯하거든
드는 칼로 이 몸의 가죽이라도 벗겨서
커다란 북(鼓)을 만들어 들쳐메고는
여러분의 行列에 앞장을 서오리다,
우렁찬 그 소리를 한번이라도 듣기만 하면
그 자리에 거꾸러져도 눈을 감겠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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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날의 오면’ 총독부 검열본. 독립을 향한 염원이 담긴 시라 하여 검열당국에 의해 삭제 조치를 당했다.

1931년 일제는 만주를 침략했다. 심훈의 문학세계에는 일제의 검열이 들이닥쳤다. 시집 「그날이 오면」 출간이 가로막혔다. 우회로를 찾아야했다. 1932년 심훈은 부모님이 계신 충남 당진으로 내려갔다. 그곳에서 소설 <상록수>를 썼다. ‘국가’를 ‘고향’으로 변형시킨 우회전략으로 검열을 넘어 당대 식민지 사회의 모순을 비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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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7년 경성방송국 방송실에서. 뒷줄 가운데 안경 쓴 사람이 심우섭 제2방송과장

 

1936년 심훈이 세상을 떠났다. 심우섭의 삶은, 동생이 죽은 뒤 10년여 더 지속되었다. 일제 군국주의의 총구가 전 세계를 향하던 시기였다. 그 역시 여느 친일 지식인들처럼 일제가 일으킨 전쟁의 광기에 휩쓸려 들어갔다. 1930년대 후반부터 일제가 패망할 때까지 심우섭은 주로 경성방송국과 매일신보에서 일하며 각종 전쟁선전과 동원에 협력했다.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의 시국순회강연반에 참여해 강연활동에 나섰고, 조선유도연합회와 조선임전보국단에도 가담했다. 결국 동생은 독립운동가이자 항일 열정을 표출한 문학가로 이름을 남긴 반면, 형은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기록되고 말았다.

<참고자료>
박찬승, 「일제하의 자치운동과 그 성격」(1989)
이나미, 「일제시기 조선 자치운동의 논리-독립운동론, 참정권론과의 관계를 중심으로」(2006)
이형식, 「제국의 브로커 아베 미쓰이에와 문화통치」(2017)
박진영 교수 블로그 www.bookgrma.pe.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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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전쟁 선포 100주년 기념 특별전 <나는 의병입니다 그리고 독립군입니다> 개막

 

 

특별전 <나는 의병입니다 그리고 독립군입니다>가 2020년 12월 22일 근현대사기념관 2층 기획전시실에서 개막하였다. 근현대사기념관과 독립기념관이 공동 개최하고 민족문제연구소가 주관하는 이번 전시의 제1부 <나는 의병입니다>는 근현대사기념관이, 제2부 <나는 독립군입니다>는 독립기념관이 준비하였다.

제1부 <나는 의병입니다>는 ‘군대해산, 자결로 답하다’, ‘시위대, 서울에서 의병전쟁의 서막을 열다’, ‘진위대, 전국으로 의병전쟁을 확산하다’, ‘의병과 군인, 연합부대를 만들다’, ‘13도 창의군, 서울로 진군하다’, ‘유격전의 확산과 일본군의 잔인한 탄압’, ‘압록강 너머 두만강 건너, 만주로 연해주로’의 구성으로 되어 있다.

1907년 군대해산 직후 박승환의 자결은 의병전쟁의 신호탄이 되었다. 전시는 시위대가 각지에서 일어난 의병부대와 합류하여 일제의 침략에 저항하고, 전국적 의병전쟁으로 확산되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박승환의 「시위 보병 제1연대 제1대대장 임명장」, 1900년대 초반 경성부 지도, 1907년 프랑스 잡지 L’ILLUSTRATION에 수록된 일본군과 전투 후 시위대 병사들의 모습, 1907년 8월 민긍호 의병부대와 일본군의 활동지역을 나타낸 지도, 관동창의대장 이인영이 해외동포에게 보낸 격문 내용을 알 수 있는 신문기사, 1910년 초에 작성된 연해주 13도의군의 서명록으로 추정되는 「의원안」 등을 전시하고 있다.

제2부는 2020년 독립기념관 기획전 <나는 독립군입니다>의 순회전시로 ‘독립군, 독립전쟁을 쓰다’, ‘독립군을 양성하라’, ‘독립전쟁이 시작되다’, ‘우리의 군대, 한국광복군’, ‘독립전쟁 제1회전, 봉오동 전투’, ‘만주에 울려 퍼진 승전보, 청산리 전투’, ‘전진하는 독립군’, ‘독립군을 지키는사람들’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일제의 탄압으로 국내활동이 어려워진 의병들이 만주와 연해주로 망명하여 ‘독립군’으로 재편되어 독
립전쟁을 하는 여정과 광복 후 총칼을 내려놓은 독립군들이 자신의 일상을 기록하여 독립군의 역사를
남긴 일기, 수기 등을 보여주고 있다. 전시에서 신흥무관학교 졸업생을 중심으로 한 신흥교우단의 기
관지인 <신흥교우보> 제2호, 북로군정서의 훈련교본, 대한민국임시정부 군무부 포고 제1호・제3호, 봉오동전투상보와 더불어 의병 출신 독립군 김정규 일기, 한국광복군 김문택 수기, 지청천 친필 일기 <자유일기>, 홍범도 일지(이인섭 필사본), 청산리 전투 참가자 이우석 수기, 한국광복군 지복영 수기 등을 만나볼 수 있다.
근현대사기념관 특별전시 <나는 의병입니다 그리고 독립군입니다>를 통해 일제에 맞선 수 많은 의병과 독립군들의 간절한 바람과 희생을 되돌아보고 의병전쟁, 독립전쟁을 이끌어온 한민족의 위대한 저력을 느낄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하였다. <나는 의병입니다 그리고 독립군입니다> 특별전은 VR전시로도 제작하였다. 현재 근현대사기념관은 사전예약제로 운영되어 현장 관람에는 제약이 있지만, 2020년 11월에 개막한 상설전시, 특별기획전 <잔인한 사월, 위대한 혁명>과 함께 홈페이지에서 전시 영상을 시청할 수 있다.

• 근현대사기념관 학예연구원 홍정희

월, 2021/01/25- 2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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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지역의 일제잔재를 찾아라> 역사부교재 발간

 

지난 12월 경기도, 지역사연구소, 식민지역사박물관이 함께 친일청산 교육부교재 개발을 위해 공동 작업을 진행하여 <우리 지역의 일제잔재를 찾아라>(전5권)를 발간하였다. 2019년 경기도가 추진하고 우리 연구소가 조사연구를 맡아 진행한 <경기도 친일문화잔재 조사・연구> 사업의 성과를 토대로 학교현장에서 교사들에게 필요한 부교재를 만들어 보급하고자 하는 취지에서였다.
경기도의 일제잔재는 크게 인적 잔재라고 할 수 있는 ‘친일인물’과 물적 잔재인 ‘친일 관련기념물’을 대상으로 하였다. 경기도 출신 ‘친일인물’ 선정은 민족문제연구소가 발간한 <친일인명사전>과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의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보고서>를 근거로 하였다.
<친일인명사전> 수록자 4,389명과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선정한 1,006명의 반민족행위자 가운데 경기도 출생・출신자는 모두 267명이다. 이들의 주요 경력에 따라 매국・귀족, 일제 통치기구 협력자인 관료・중추원・법조인, 경찰・군인, 문화계, 예술계 친일인물 등 6개 영역으로 분류하였다. ‘친일 관련 기념물’은 일제강점기 건축물, 친일 인물의 기념비·송덕비, 그 외 기념조형물 등 71개를 조사하였다. 역사부교재는 경기도를 4개 권역으로 나누어 일제잔재를 소개하고, 일제잔재 청산의 방법과 의미를 이해할 수 있는 도움 자료를 함께 실었다. 전체 구성을 살펴보면 먼저 1권은 일재잔재의 개념과 유형별 분류를 제시했고, 친일인물 가운데 경기도 내 지역을 특정할 수 없는 인물들과 친일 관련 기념물 중 경기도의 신사(神社) 해설, 학교생활 속 일제잔재와 그 청산 사례를 소개했다. 그리고 2권~4권은 동부, 남부, 서부・북부 4개 권역별로 친일인물, 친일 관련 기념물, 교수-학습과정안으로 구성되었다. 그리고 5권 사료편에는 친일인물 근거 사료, 친일파 관련규정・법령과 분야별 사료 해제, 친일 문제 이해를 돕는 논문과 참고문헌이 실려 있다.
이 역사부교재는 경기도 소재 학교에 근무하는 교사들이 직접 집필하였다. 이 부교재가 학교 현장에서 지역의 일제잔재를 둘러싼 다양한 토론장을 만들어 내고, 친일 청산의 대안과 실천을 마련해 나가는데 도움이 되길 바란다. 역사부교재는 경기도 소재 1100여 곳의 중・고등학교에 배포되었고, 전권 PDF는 식민지역사박물관 홈페이지에서 보실 수 있다.

• 김승은 학예실장

월, 2021/01/25- 2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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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천지부, <한 시대 다른 삶> 만화와 웹툰으로 제작

 

 

부천지부(지부장 박종선)는 2020년 경기도 문화예술 일제잔재 청산 공모사업에 선정되어 <친일파와 독립운동가의 엇갈린 삶-웹툰 ‘한 시대, 다른 삶’>을 웹툰과 만화로 제작하여 보급하고 있다. 일제강점기 친일과 항일의 각각 다른 길을 걸었던 역사 인물들을 비교하여 독립운동가의 애국정신을 우리 공동체의 가치로 재인식함과 동시에 사회 일각에 여전히 존재하는 식민지배 미화 등 반역사적 행태에 대한 경각심을 높인다는 취지이다. 이 사업에는 전국시사만화협회(회장 최민) 소속 작가들이 대거 참여했다. 만화에 등장하는 역사 인물과 작가는 다음과 같다. 신석구・정춘수(최승춘), 한용운・강대련(하재욱), 차미리사・김활란(성덕환), 신채호・최남선(정태권), 여운형・김성수(국태이), 지청천・이응준(최인수), 안재홍・방응모(최승춘), 조명희・김동인(전진이), 이육사・서정주(오금택), 한형석・현제명(서상균). 각 작품마다 전문가의 감수를 받아 작품의 수준을 높였는데 강태구(한국음악연구소 연구원) 김승태(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장) 박광종(연구소 선임연구원) 이순우(연구소 책임연구원) 이준식(독립
기념관장) 장신(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장원석(몽양여운형생가·기념관 학예실장) 한상권(덕성여대 명예교수) 등이 참여했다. 470쪽 분량의 2권으로 제작된 이 만화는 경기지역 모든 초·중·고등학교 2,400곳에 무상으로 보급되었으며 조만간 부천지부사이트(minjok21.kr)를 통해서도 웹툰 형식으로 공개된다.

• 방학진 기획실장

월, 2021/01/25- 2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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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원회원 마당]

빛나는 삶

김원근 전 교사

 

숨죽여 그늘을 걸을지라도
누군가에게 흙탕물 튕기지 않았다면
그 또한 빛나는 삶 아니겠는가

쓰린 이별 뒤 어딘가 둥지 틀고 살지라도
어쩌지 못하는 그리움으로 긴긴 겨울밤 뒤척이고 있다면
그 또한 빛나는 삶 아니겠는가

울고 싶어 어딘가를 홀로 떠돌지라도
부모님의 소소한 안부를 잊지 않고 이따금씩 떠올린다면
그 또한 빛나는 삶 아니겠는가

보잘 것 없고 든든한 배경이 없을지라도
누군가의 작은 햇살 한 줌으로 미소에 젖어 있다면
그 또한 빛나는 삶 아니겠는가

무엇보다도
우리는 그 누군가에 비스듬히 기대어
또는 이따금 비스듬히 떠받치기도 하며
저마다의 초저녁 어스름 길을 가고 있는 거 아닌가

화, 2021/03/02-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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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원회원 마당]

경기도 후원, 지역사연구소·식민지역사박물관 발행
교사용 학습 부교재 『우리 지역 친일잔재를 찾아라』

김찬수 수원동원고 교사

“선생님, 친일파가 뭐예요?”
“경기도에는 친일인물이 누가 있어요?”
“우리 지역의 일제잔재는 무엇인가요?”
“우리 학교 교목(校木)과 교가(校歌)는 왜 일제잔재인가요?”

교육현장에서 학생들의 당연한 이 질문에 쉽게 답하기에는 범위가 넓고 다양하여 학생들의 궁금증을 다 풀어주기에는 어려움이 컸다.
사실은 교육을 맡은 선생님들이 더 답답하다. 2009년 11월 8일 <친일인명사전> 발간이라는 벅찬 감격에 이어 2012년에는 모바일 친일인명사전까지 출시되었지만, 일반인들이나 성장하는 학생들의 궁금증을 풀어줄 교육자들을 위한 ‘친일교육자료’는 많이 부족하였다. 인물별, 기관별로 여러 가지 노력이 있기도 했지만, 비교적 넓은 지역을 아우르는 지역의 친일파 관련 자료집은 많지 않았다. 그동안 선생님 개인의 역량과 노력에 기댈 뿐이었다. 그런데 올해 초에 선생님들의 갈증을 풀어주는 아주 적절한 친일 관련 역사교육 자료집이 나왔다. 이 자료집은 역사교육을 맡고 있는 선생님들이 사용하기에 아주 유용하도록 편집되어 1권의 첫 장을 펼치면서부터 답답했던 가슴이 시원해진다. 사료편(PDF로 제공)을 포함하여 총 5권으로 구성된 이 책은 경기도를 4개 권역 즉 1편 경기도, 2편 경기동부지역, 3편 경기남부지역, 4편 경기서부·북부지역으로 나누어 집필되어 있다. 선생님 책상 위의 책꽂이에 꽂혀져 언제든지 찾아서 활용하기에 최적이다. 이제 경기도교육청의 선생님들은 근무지가 바뀌어 어디에서 근무하든 근무지역의 식민지 시대 친일인물과 그 흔적을 쉬게 찾아서 가르칠수 있게 되었다. 1권에서는 일제잔재의 개념과 유형별로 분류하고, 친일인물 중에 경기도 내 지역을 특정할 수 없는 인물과 일제강점기 신사(神社)를 정리해서 설명하였고, 학교생활 속의 일제잔재와 그 청산 사례를 소개하고 있다. 선생님들도 한 번쯤 궁금했고 정리가 필요하다고 느꼈던 일제잔재 용어 사용 문제, 일제잔재 유형, 일제잔재 대상 시기, 일제잔재 청산 관련 사료집이나 관련법 그리고 매국행위 친일인물부터 통치기구 협력자, 군인, 경찰, 친일단체, 문화계 친 일인물을 표로 만들어서 잘 정리하였고, 경기도 곳곳에 있었던 ‘신사(神社)’ 그리고 학교 속의 일제잔재로서 교가와 교표가 왜 일제잔재인지 설명하고 있다.

‘반장’, ‘부반장’, ‘간담회’, ‘결석계’ 심지어 ‘차렷 경례’, ‘수학여행’도 일제잔재라는 것에 지금까지의 교육활동 모든 것을 되돌아보게 한다. 더욱 의미있는 것은 가평 대성초등학교, 김포 대명초등학교, 동두천 양주 삼숭초등학교, 이천 이헌고등학교, 수원 삼일학원, 화성 정남초등학교의 교표를 바꾸는 노력을 친일잔재 청산 사례로 소개하고 있다. 이어 2-4권은 권역별 친일인물, 친일 관련기념물, 교수-학습과정안을 담았다. 지역 출신 친일인물을 분류하여 그들의 행위들을 정리하고 각종 일제강점기 건축물, 기념비, 송덕비, 기념물을 사진과 함께 설명하고 있다. 
조금만이라도 식민지 역사에 대해 궁금해하고 고민한 분들이라면 이러한 자료의 발간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안다. 우리는 책이 나오기까지 고생하신 분들의 노고를 기억해야 한다. 경기도의 후원으로 지역사연구소 중심이신 신대광 선생(원일중학교)과 식민지역사박물관 김승은 학예실장이 기획하고, 김진호 선생(원곡고등학교), 이을 선생(원곡고등학교), 이철환 선생(안산디자인문화고등학교), 최도현 선생(단원고등학교)이 함께 집필하였다. 이제 이 역작의 활용방안은 각종 교사연수, 토론회, 발표대회, 다양한 교육활동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좋은 자료집은 아쉬움도 있게 마련이다. 우선 경기도 지역에 한정되어 아쉽다. 서울과 경기, 인천은 별개 지역이 아니다. 과거 식민지 시대에는 지역 구분이 없었다. 현재의 행정구역 경계 때문에 함께 하지 못하는 것은 많이 아쉽다. 이 자료집으로 서울과 인천이 자극을 받아 이 같은 집필 작업이 이어질 것을 기대해 본다. 아울러 시·군 단위 기초자치단체의 세부 작업이 필요할 것이다. 각 기초자치단체의 문화
원과 이 작업을 함께하면 더 좋을 것이다. 초중고 학생용 친일잔재 관련 교육자료도 만들어져야 할 것이다. 학생 수준별 서술의 전문성이 필요할 수도 있다. 쉽게 쓰여지고 설명하는 것이 더 어렵기 때문이다. 그리고 문화유산답사 해설사나 관련 업무 종사자 분들을 위한 자료제공 노력도 필요할 것이다.
최대한 찾으려 노력했겠지만 사진 자료도 적고 편집과 인쇄가 흑백이어서 조금 아쉽다. 더불어, 경기도교육청 차원에서 이 자료집을 모든 역사 선생님들에게 모두 배부할 수 있는 방안을 찾았으면 좋겠다.
자료집이기에 실제 수업을 위한 선생님들의 또 다른 노력이 더욱 필요하다. 많은 선생님들과 네트워크를 맺어 함께하면 어깨가 좀 더 가볍지 않을까? 교사 연수 때 연수 교육과정으로 담을 경기도교육청의 의지가 반드시 필요하다. 을사늑약 이래로 40년 동안의 치욕의 역사를 찾아 기록하고 교육하는 작업은 40년 이상 걸릴 것이다. 아니 시기적으로 늦어져서 역사의 흔적이 많이 사라진 까닭에 더 오래 걸릴 것이다. 해방 이후 세대가 여러 번 바뀌면서 몇 단계로 성장한 친일파 청산 작업들이 위기를 맞을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있다. 친일파들이 득세하고 독재정치를 경험한 우리 세대에는 친일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갈증은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세대들은 지난날의 세대만큼 역사문제에 절실하지 않다. 그래서 지금 세대의 역사교육을 책임져야 할 우리의 책임이 막중하다. “제2의 독립운동”은 계속되어야 한다.

화, 2021/03/02-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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