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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량리 떠나던 날, 청파에서 가꿀 새 꿈을 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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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량리 떠나던 날, 청파에서 가꿀 새 꿈을 꾸다

익명 (미확인) | 목, 2018/01/25- 17:15

기고

청량리 떠나던 날, 청파에서 가꿀 새 꿈을 꾸다

김승은 자료실장

연구소가 드디어 청량리에서 청파동으로 이전을 마무리했다. 2000년 3월부터 청량리 떡전교 사거리 금은빌딩에 터를 잡았으니 거의 18년 만에 새 둥지로의 이사였다. 그 사이 10명에 불과했던 상근자가 4배 가까이 늘었고, 3층 한켠만 겨우 차지하던 살림살이는 5층과 지하, 2층 일부까지 다 채울 정도로 커졌으니 이번 이사에 만만치 않은 준비가 필요했다.
먼저 사무실 이사 전문 업체를 선정하고 체계적인 이사 계획을 세우는 한편, 이전해 갈 서현빌딩의 안전진단과 시설점검을 진행했다. 2006년에 준공한 건물치고는 관리가 비교적 잘 된 편이었지만 손볼 데가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 꼼꼼한 건물 점검과 필요한 보수공사는 최규필 회원이 전적으로 맡아 도와주었다. 개인적으로도 몇 번이나 청파동에 찾아가 건물을 둘러보고 관리 상태를 돌아보는가 하면, 공사이력을 알아내고 가장 저렴하게 보수공사를 할 수 있도록 주변 지인들을 총동원해 주었다. 그 사이 곳곳에 쌓여 있던 묵은 짐을 정리하는 일도 만만치 않았다. 수장고에 보관했던 유물과 고도서들은 직접 확인하고 포장해야 해서 이사 두 달 전부터 작업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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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유물과 고도서를 포장하는 상근자들 3 포장된 유물상자로 가득 찬 청량리 사무실 임시전시실

상근자들은 보관・활용할 사무집기와 폐기물품을 점검하고, 이전하는 새 공간의 활용과 공간 배치 등 모든 이전 업무에 각자의 힘과 지혜를 모았다. 사무실 집기들을 점검하다 보니 갖가지 모양의 책상과 책장, 의자들이 수두룩했다. 문 닫는 사무실만 생기면 가서 주어다 모았기 때문에 통일감이란 ‘1’도 찾아보기 힘들었다. 짝 안 맞는 낡은 집기들이 우리 연구소가 걸어온 땀과 눈물의 험로를 고스란히 보여주는 지도 모른다. 손때 묻은 책장과 책상들을 차마 버릴 수가 없어서 거의 다 짊어지고 왔다. 서현빌딩에도 이전 건물주가 사용하던 붙박이장과 수납장이 많았지만, 예전 책장과 사무집기들은 우리가 새로 쓸모를 찾기도 하고, 필요한 단체가 있으면 기증도 하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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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전체 이사 계획과 일정을 점검하는 상근자회의 2사무집기 점검과 배치를 담당했던 ‘떡전용역팀’ 회의

 

서현빌딩에서도 새 살림살이가 들어갈 공간 정비가 진행되었다. 이례적인 한파가 시작된 12월 1일부터 5층 내부 공사, 옥상 철거와 보수공사를 시작했다. 4층에는 작은 공간을 효율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이동식 서가(모빌랙)를 설치했다. 각 층 전구는 모두 LED로 교체했다. 신용준 회원이 통 크게 후원해 주었고, 직접 시공까지 맡았다.
이삿날이 가까워 올수록 기온은 더 내려갔다. 이사 전에 여기저기 보수공사를 해야 했지만, 날씨 때문에 제대로 진행하기가 어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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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강의실 공사를 맡아 준 디자인 쏨니엄 관계자들과 회의 4옥상에 방치된 시설물 철거 공사 5강의실 내부 공사 6새로 설치된 이동식 서가 7신용준 회원이 건물 전체 조명을 LED로 교체하고 시공까지 맡아주었다.

 

쏜살같이 이삿날은 다가왔고 아직도 정리가 덜 된 짐이 산더미였다. 이사를 하루를 앞두고 4일간 이어질 이사 일정에 맞춰 역할을 분담하고 마지막 점검을 했다.

21스프레이 테러로 불그스름하게 물든 연구소 현판도 챙기고, 먼지 쌓인 연구소의 옛 추억들도 차곡차곡 상자에 담았다. 책이 예상보다 너무 많았는지 이사업체는 지하서고에 자동 밴딩 기계까지 설치하고 이틀 전부터 포장작업에 돌입했다. 그러는 사이에도 사무실은 일상 업무를 진행해야 해서 이사 전날 새벽까지 개인 짐을 싸는 상근자들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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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이사 이틀 전부터 책 포장에 들어간 지하서고 2연구소 소장자료 이전 준비를 마치고 이사 전날 늦게까지 개인 짐을 싸는 자료실 상근자 3통합 재단 운영 방침을 둘러싸고 새벽1시를 넘겨 이어진 실무회의. 왼쪽은 내일을여는역사재단 신용옥 상임이사, 맞은 편은 조세열 사무총장

 

드디어 12월 15일. 본격적인 이사를 시작했다. 하필 이사 첫날은 71년 만에 가장 빨리 한강이 얼었다는 바로 그날이었다. 추위도 큰 난관이었지만 역시 가장 큰 문제는 지하 서고였다. 꺼내고 꺼내어도 책은 여전히 서가에 가득했다. 다른 층 이전이 줄줄이 늦어졌다. 3층에 쌓인 짐을 건물 밖으로 실어내는 데만 이틀이 걸렸다. 금은빌딩에서 완전히 짐을 비우는 데만 꼬박 5일이 걸렸다. 게다가 이사 마지막 날이었던 12월 18일에는 대설경보가 나올 정도로 폭설이 내렸다. 이사는 또 다음날로 연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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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2월 12일, 박물관 건립 모금에 초석을 놓아 주신 송기인 신부님 등 과거사 관련 위원회 전 위원장님들이 서현빌딩을 방문해 격려해 주셨다. 53층 사무실 이전을 돕는 이용창 편찬실장과 유은호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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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금은빌딩 옛 사무실과 구분이 안 갈 정도로 꽉 찬 새 사무실 2한 달 가까이 이어진 이사에 지친 신다희 사무국원 3서현빌딩에서 다시 시작된 책 정리 4연구소에서 무슨 일이든 팔 걷고 나서는 김병구 회원팀장

 

장장 일주일이 넘게 걸린 이사는 12월 20일에야 마무리되었다. 친일인명사전 편찬의 산실이자, 민족문제연구소가 회원들과 가장 많이 만났던 3층 연구편찬실과 사무국, 친일독재미화 교학사 교과서와 국정교과서 폐기 운동의 본부 역할을 했던 2층 교육홍보실,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의 꿈을 품고 도전했던 5층 역사자료관과 연구소 숨은 보물창고인 지하 서고까지 깨끗이 비웠다. 상근자들의 끼니를 해결해 주신 주변 음식점 사장님들, 배달원 분들, 늘 급하게 주문해도 신속히 작업해 주시던 복사집, 인쇄소 분들께도 일일이 작별을 고하고 청량리를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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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탁구대 설치를 고민할 정도로 넓게만 느껴졌다던 금은빌딩 3층 6국정교과서 폐기 운동의 산실 2층 교육홍보실 7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의 시범 공간이었던 5층 임시전시실

 

사무실 이전 와중에도 워싱턴·뉴욕·LA 등 미주지부 창립을 위한 순회 강연집회, 항일음악 토크콘서트와 음악회, 박정희 동상 건립 반대 집회, 친일문학상 반대 집회, 서울시민대학 강좌, 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 아산 유해 발굴 시굴조사, 팟캐스트 시즌2 녹화 등 다양한 사업을 이어갔다. 덕분에 상근자들이 돌아가며 몸살과 독감에 시달렸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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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내부 철거공사 후 마지막 짐을 내리는 금은빌딩 2듬직한 어깨, 친절한 미소로 이사를 기분 좋게 마무리 해 주신 ‘일사천리’ 직원분들 310년 넘게 야스쿠니재판을 지원해 온 일본 변호인들이 금은빌딩의 마지막 추억을 남겼다.

 

새 건물로 이사를 가니 챙길 일도 참 많았다. 고장난 문고리나 전선 공사는 물론 변기 커버도 직접 갈고 쓰레기 분리수거, 출입문 보안까지 모든 것을 점검하고 챙겨야 한다. 동파에 터진 수도 배관을 보며 속 태우는 사무국이나, 자동 개폐식 출입문에 아직 적응 못하는 상근자들, 꽂고 꽂아도 산적한 책들에 허리가 휘는 자료실 인턴들, 1, 2층이 아직 공실이라 고스란히 올라오는 냉기에 발을 동동거리는 3층 연구원들 모두가 아직은 이 공간이 낯설고 서툴기만 하다.
하지만 지난 25년간 한결같은 회원들의 성원과 지지로 만들어진 새 둥지이니 그 안에서 새로 품은 꿈만큼은 창대하다. 연구소는 우리 사회의 비상식・부정의와 싸워 온 지난 25년을 발판삼아 상식과 정의가 뿌리내릴 수 있는 역사운동의 든든한 터전을 이곳 용산 청파동에서 만들어 나가고자 한다. 내일의 역사를 여는 새로운 길에 회원 여러분들이 늘 함께 해 주시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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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

경기도, 역대 도지사 친일행적 표시

 

경기도는 1월 9일 친일 행적이 확인된 역대 도지사 4명의 명단(구자옥, 이해익, 최문경, 이흥배)과 친일사실을 경기도 누리집에 공개하고, 14일에는 도청 신관 4층 회의실에 걸려있는 역대 도지사 액자 옆에 친일사실을 표기했다. 경기도 관계자는 “친일 행적을 했다고 해서 역대 도지사의 사진을 떼내는 것은 도지사를 지냈다는 역사적 사실을 부정하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며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내용을 요약해 인물 설명으로 달았다”고 말했다. 현재 경기도는 올해 친일을 목적으로 제작된 도내 유·무형 친일문화잔재와 활용 현황에 대한 전수조사를 진행하고 있다. 이 결과를 토대로 내년부터 본격적인 친일 잔재 청산 작업을 추진할 방침이다.

• 방학진 기획실장

목, 2020/02/20- 2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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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 비망록 50]

용산중학교, 일본 군인과 철도종사원의 자제들을 위한 교육기관
일본군 병영지의 배후지역에 포진한 일본인 학교들의 연혁

 

이순우 책임연구원

 

총독부 기관지인 일본어 신문 <경성일보> 1941년 9월 3일자에는 이른바 ‘용중(龍中, 용산중학교)’ 출신의 일본군 장교인 무로 켄조(室兼三)라는 육군대위가 중국 난주(蘭州) 공습에 참가하였다가 고사포에 맞아 자폭(自爆)하면서 전사했다는 소식이 장황하게 서술되어 있다. 이 기사에는 그의 모교 담임선생이었던 마츠나가 교유(松永 敎諭)의 말을 빌려 그가 용산중학교를 다닐 때의 증언담이 이렇게 실려 있다.

 

무로 군은 소화 5년(1930년) 치바중학(千葉中學)에서 전학을 왔는데 소화 7년(1932년) 졸업 당시는 전체 생도 183명 중 141등으로 전혀 볼품이 없는 성적이었으나 졸업 후에 육사(陸士, 육군사관학교)의 난관돌파를 목표로 삼아 맹렬히 분발하여 마침내 희망하던 육사를 패스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간바리즘(頑張りズム)은 소위(所謂) 용중혼(龍中魂)이라고 해도 좋지 않을까요?

 

(왼쪽) <경성일보> 1941년 9월 3일자에 수록된 ‘용산중학교’ 출신 육군대위 무로 켄조의 전사관련 보도내용이다. 그가 이 학교를 졸업한 것은 전적으로 자신의 아버지가 조선 주둔 제20사단장인 탓이었다. (오른쪽) <매일신보> 1930년 8월 5일자에 수록된 ‘신임 제20사단장 무로 켄지 중장’의 모습이다.
그의 아들이 용산중학교로 전학 와서 졸업한 시기는 그의 재임기간과 고스란히 일치한다.

 

그렇다면 그가 애당초 일본에서 경성으로 전학을 온 연유는 무엇이었을까? 알고 보니 그의 부친이 용산 주둔 일본군 제20사단장인 육군중장 무로 켄지(室兼次, 1876~1966. 재임 1930.8.1~1932.8.8)였던 것이다. 일본 치바현(千葉縣)에 자리한 육군야전포병학교(陸軍野戰砲兵學校)의 교장이던 무로 중장이 조선군사령부 제20사단장으로 부임한 때가 1930년 8월인데, 그의 아들 역시 아버지의 근무지 변경에 따라 치바중학교에서 용산중학교로 전학했던 시기가 그대로 일치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 기사에 나타난 사례는 바로 용산중학교의 존재 이유가 일본군 병영지의 배후지역에서 주로 군인들의 자제들을 위한 중등교육기관이라는 점에 있었다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더구나 이곳은 분명 일본인 학교인데 일본인이 아닌 조선인들이 이 학교를 다닌 경우가 더러더러 눈에 띄기도 한다.

 

1921년 8월 3일 일본 나고야(名古屋)에서 태어났다. 본적은 충청남도 공주다. 일본육사 제26기 졸업생으로서 일본군 대좌를 지낸 유승렬(劉升烈)의 차남이다. 일제강점기 충청남도 보령군수를 지낸 큰 아버지 유익렬(劉益烈)에게 양자로 출계(出系)했다. 다섯 살 되던 해 부친이 대위로 승진해 함경북도 나남으로 부임지를 옮기면서 경원군으로 이사했다.
경원의 소학교를 다니다가 3학년 때 나남소학교로 전학했다. 1년만인 1932년 부친이 용산 제20사단 보병 제79연대 대위로 옮기자 경성 삼판심상소학교로 전학했다. 1932년 경성의 용산중학교를 입학했으나 3학년 때 부친이 평양 77연대로 전속(轉屬)되어 평안북도 일원의 신의주중학교, 신의주동중학교, 신의주상업학교, 의주농업학교, 정주 오산중학교의 배속장교를 맡게 되자 신의주중학교로 전학했다.
1937년 신의주중학교 4학년 2학기에 평양 77연대에서 일본육사 예과에 응시해 합격한 후 1939년 12월 일본육군예과사관학교를 입학했다. (하략)

 

용산병영지의 확장과 맞물려 1918년에 설립되고 다시 1919년 6월에 준공된 용산중학교의 모습이다. 이 학교는 원래 관립학교였으나 1925년 4월부터 공립학교로 전환되었다. (<경성과 인천(京城と仁川)>, 1929)

 

<매일신보> 1938년 1월 1일자에 수록된 일본군 대대장 김석원(金錫源) 보병소좌의 가정탐방기사이다. 여기에는 그의 아들 김영철(金泳哲)이 용산중학교에 재학중인 것으로 표시되어 있다.

 

이 내용은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가 펴낸 <친일인명사전>(민족문제연구소, 2009)에 수록된 일본군 대위 출신 ‘유재흥(劉載興, 1921~2011)’ 항목의 일부를 발췌한 것이다. 유재흥 또한 1932년 용산에 자리한 삼판소학교(三坂小學校, 지금의 삼광초등학교)를 거쳐 용산중학교에 재학하게 된 것은 전적으로 일본군 보병대위였던 아버지 유승렬(1891~1958)의 근무지를 따라 다닌 결과로 볼 수 있다.
이것 말고도 제20사단 제78연대 대대장으로 중일전쟁에 가담했던 보병소좌 김석원(金錫源, 1893~1978)의 경우도 동일한 사례에 속한다.
<매일신보> 1938년 1월 1일자에 수록된 「출정장사가족(出征將士家族) 신년(新年)맞이, 가장(家長)의 무운장구(武運長久) 기원(祈願)으로 영신(迎新), 김석원 부대장 가정(金錫源 部隊長 家庭)」 제하의 기사를 보면, 그의 장남 김영철(金泳哲, 1921년 2월생)이 용산중학교 4학년생이면서 경성제대 예과 입학준비에 분주하다는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이 대목에서 용산중학교의 설립 연혁을 잠시 살펴보면, 이 학교는 1918년 4월 1일 조선총독부중학교 관제에 따라 대전중학교와 동시에 신설된 내력을 지녔다. 원래 식민지 조선에 있어서 일본인 중학교의 연원은 1909년 5월 22일에 친일단체 일진회(一進會)의 소유였던 독립관 국민연설대를 빌려 개교한 ‘경성거류민단립(京城居留民團立) 경성중학교’로 거슬러 올라간다.

1909년 5월 22일에 발행된 ‘경성거류민단립 경성중학교 개교기념엽서(2매)’이다. 독립문 오른쪽 언덕위에 보이는 돔 모양의 건물이 독립관에 딸린 국민연설대(國民演說臺, 일진회 소유)이다. (민족문제연구소 소장자료)

 

이 학교는 이내 1910년 4월 1일 관립학교(官立學校)로 전환되어 ‘통감부중학교’가 되었다가 경술국치와 더불어 ‘조선총독부중학교’로 개칭되었다. 이 당시만 하더라도 총독부중학교는 전국에 걸쳐 유일무이하였기 때문에 별도의 이름을 갖지 않았다가, 1913년 4월에 부산에도 총독부중학교가 추가 설치되면서 이를 구분하기 위해 비로소 ‘경성중학교’로 명명되었다.
총독부중학교(관립)는 일본인 거주자가 많았던 지역을 중심으로 경성, 부산, 평양, 용산, 대전, 대구, 원산, 광주, 나남의 순서로 추가되었고, 1925년 4월 이후 제학교관제(諸學校官制)의 개정을 통해 일괄 공립중학교(公立中學校)로 전환되었다.

총독부중학교 설립 연혁

<조선총독부관보> 1925년 2월 13일자에 실린 총독부중학교의 생도모집공고문이다. 이 당시에는 보통학교 졸업자(조선인)라도 중학교(일본인 학교)에 입학지원은 가능하였으나, 구술시험 항목을 보면 “국어(國語, 일본어)에 정통하지 못한 자는 불합격으로 한다”고 적고 있다.

 

용산중학교의 등장에 따라 서울지역에서 일본인 남자학교는 경성중학교와 더불어 단 2개 학교만 존재했으며, 이러한 상태는 1936년 2월 29일에 성동공립중학교(城東公立中學校, 행당리 70번지)가 신설될 때까지 지속되었다. 용산중학교는 개교 당시 경성중학교 재학생의 일부를 인계받는 형태를 취했는데, 이와 관련하여 경성부 편찬, <경성부사(京城府史)> 제3권(1941), 609쪽에는 용산중학교 설립 초기의 과정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매일신보> 1922년 5월 16일자에 공개된 ‘용산중학교’의 입학시험문제이다. 주로 일본어 해독능력을 측정하는 문제들로 구성되어 있다.

 

용산중학교는 대정 7년(1918년) 3월 칙령 제50호 조선총독부중학교 관제 개정에 의해 설치된 관립중학교이며, 동교(同校)는 동년 4월 16일 부내(府內) 정동(貞洞) 소재 조선총독부의 한 청사(廳舍, 정동에 있는 3법원 자리) 내에서 가개교(假開校)를 행하고, 다시 동월(同月) 영락정(永樂町, 지금의 저동)에서 가기숙사(假寄宿舍)를 개시했다.
생도(生徒)는 이에 앞서 경성중학교 재학 제2학년 생도 중에서 50명을 인계받고, 제1학년 150명은 경성중학교장에 위촉(委囑)하여 2월중에 모집을 완료했던 것이다. 초대 교장으로는 후쿠시마 마타야(福島亦八)가 취임했다. 여기에다 동교는 익(翌) 8년(1919년) 6월 16일 부내 한강통(漢江通)에 신축중인 제1기 공사가 준공되면서 그곳으로 이전하게 되었다.

여기에 덧붙여 또 하나 주목할 만한 부분은 용산중학교의 설립시기가 일본군 용산병영지의 추가 확장 과정과 고스란히 맞물려 있다는 점이다. 일제는 1915년 6월에 종래의 주차군(駐箚軍) 체제를 바꿔 조선 내에 2개 사단(師團)을 증설하여 상주군(常駐軍)으로 전환하는 결정을 내렸고, 새로운 편제에 맞춰 이들을 위한 병영지 건설공사를 광범위하게 진행하였다.

이에 따라 1916년 4월에 제19사단이 용산에서 창설되었고 부대편성이 어느 정도 완성되어가자 1918년 6월에는 이를 바탕으로 조선주차군사령부는 ‘조선군사령부(朝鮮軍司令部)’로 개칭되었다. 곧이어 1919년 4월에는 제20사단을 용산에서 새로 창설하는 동시에 먼저 생긴 제19사단은 함경북도 나남(羅南, 지금의 청진)으로 이동 배치하였다.

위 : 용산중학교에 이어 1922년에 군영지 배후지역의 일본인 중등교육기관으로 신설된 ‘경성제2공립고등여학교’의 전경이다. 앞쪽으로 하천의 물길이 흘러내리는 모습이 이채롭다. (<문교의 조선(文敎の朝鮮)> 1938년 4월호)

아래 : 1919년 4월에 창립될 당시의 삼판소학교(현재 삼광초등학교 자리) 전경이다. 아래쪽에 보이는 밭들은 몇 년 후에 학교 운동장으로 변하게 된다. (경성부,<경성부사> 제3권, 1941)

 

이러한 변화에 맞물려 원래 대전(大田)에 주둔하고 있던 보병 제79연대가 1917년 11월말에 용산으로 재배치되었고, 이들이 머물 보병영(步兵營; 1917년 6월 기공, 1920년 3월 준공)’이 기존의 보병 제78연대 병영터 서쪽 일대에 남아 있던 광활한 대지를 정하여 새로 건설되었다. 또한 제28기병연대와 제
20공병대대(서빙고동), 그리고 제26야포병연대(종전 용산연병장 자리)의 본부와 병영이 완공된 것도 모두 이 시기의 일이었다.
이 결과로 용산 지역일대는 시가지 팽창과 더불어 인구유입이 급속히 늘어났고, 당연히 이들의 자제들을 위한 학교 설립의 필요성도 증대되었던 것이다. 용산중학교에 이어 이곳과 인접한 지점에 통학거리의 편의를 고려하여 경성삼판공립심상소학교(京城三坂公立尋常小學校, 1919년 4월 설립)와 경성제2공립고등여학교(京城第二公立高等女學校, 1922년 5월 설립)가 비슷한 시기에 잇따라 들어선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뤄진 결과물이었다.

 

이 가운데 삼판소학교의 설립과정에 대해서는<경성부사> 제3권(1941), 603~604쪽 부분에 잘 요약되어 있는데, 여기에도 급격한 인구증가와 과밀학급해소가 주요한 배경이었음이 적시되어 있다.

 

경성학교조합(京城學校組合)이 경영하는 8개 공립소학교의 아동 총수는 대정 7년(1918년) 7월말 현재 8,140명으로 이를 146학급(學級)으로 편제(編制)하고 있으나, 그 가운데 일출(日出, 히노데), 남대문(南大門), 앵정(櫻井, 사쿠라이), 종로(鍾路) 및 용산(龍山) 등 5 소학교는 모두 18학급 이상으로 소학교령(小學校令)에 의한 제한을 초과하는 것이 총계 9학급에 달하고, 기타 3 소학교에서도 아동수용의 여지가 전혀 없어서 대정 8년도(1919년도)에 있어서 증가하는 취학아동 약 500인에 대해서는 새로이 1개교를 설립하지 않는 한 도저히 수용 불가능한 상태에 처하게 되었다.
이에 경성학교조합은 조합회의 결의를 거쳐 부내 삼판통(三坂通) 186, 187, 238, 239번지에 하나의 소학교를 신축했던 것이었다. 교사(校舍)의 대부분은 대정 7년도(1918년도)에 건축하고, 일부분은 필요에 따라 점차 건축하는 것으로 했다. 그리고 대정 7년(1918년) 9월 7일부로 설립인가신청(設立認可申請)을 하였고, 동년 10월 2일부로 인가를 받았다.(중략)
또한 동교 구역은 고시정(古市町, 동자동), 길야정(吉野町, 도동) 1정목과 2정목, 삼판통(三坂通, 후암동), 서계동(西界洞), 청엽정(靑葉町, 청파동) 1, 2, 3정목, 강기정(岡崎町, 갈월동), 한강통(漢江通, 한강로) 1, 2, 3, 4정목이며, 동 구역 내에 거주하는 내지인(內地人, 일본인) 호수(戶數) 및 인구는 대정 6년(1917년) 12월말 현재로 호수 1,126호, 인구 3,963인이었다.

 

일제강점기 서울에 거주한 경험을 지닌 일본인들로 구성된 경성용산공립소학교동창회(京城龍山公立小學校同窓會)가 펴낸 것으로 <용산소학교사·용회사(龍山小學校史·龍會史)>(1999)라는 책이 있다. 우선 이 책의 114쪽을 보면 “본교에 다니는 아동(兒童)은 철도(鐵道)와 군인(軍人)의 자제(子弟)가 많았다”는 설명이 흥미롭게 다가온다. 그리고 같은 책, 127쪽에도 이 학교의 가정환경과 관련하여 “군인관계(軍人關係), 철도관계(鐵道關係), 일반(一般, 주로 상공인) 세 가지로 대별(大別)된다”는 표현이 있는데, 용산 지역에 포진한 여러 일본인 학교들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학생구성상의 특징이 잘 묘사된 구절이 아닌가 한다.
일제가 이 땅에 남겨놓은 병영지와 그 배후공간에 흩어진 흔적들은 상당수 사라지거나 변형되었지만, 유독 일본인들의 자제들이 다닌 학교공간만큼은 100년의 세월을 넘기도록 지금도 그대로 사용되고 있거나 비교적 고스란히 그 영역을 유지하고 있다. 결과만 놓고 보자면 “교육은 100년 대계”라는 말이 그리 틀리지 않는 얘기가 되고 말았으니 이 대목에서 그저 쓴웃음만 짓게 된다.

금, 2019/09/20- 1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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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인사의 유물·유적을 조사하여
친일 청산 교육의 장으로 만들자

이계형 국민대학교 교양대학 교수

 

얼마 전 어느 젊은 웹툰 작가가 독립운동가와 그 후손을 비하하는 글을 올려 논란이 일었다. 자
신의 페이스북에 “친일파 후손들이 저렇게 열심히 살 동안 독립운동가 후손들은 도대체 뭐 한 걸
까”라는 질문을 던지고서는 자문자답의 글과 함께 ‘친일파 후손의 집’이라 적힌 고급 단독주택과
낡고 허름한 ‘독립운동가 후손의 집’ 사진을 나란히 보여줬다. 올바른 역사의식을 지닌 사람이라면
친일파를 비판적으로 바라보지 않을까?

 

친일인사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 높이기

친일파 논란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지만, 청장년층에까지 친일을 긍정하는 인식이 확산한 것이 아닌지 우려스럽다. 2019년 ‘신친일파’가 쓴 ????반일 종족주의????라는 책이 인기도서가 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김백일 동상 옆에 세워진 김백일 친일행적단죄비

 

당시는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 되는 해로 어느 때보다도 독립운동의 의미를 되새겼음에도 말이다. 이런 비판적인 시각에서 자라나는 청소년들에게 친일문제를 어떻게 이해하도록 할 것인지 다시금 되돌아봐야 한다.
2009년 대통령 직속으로 꾸려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는 1,005명을 친일파로 최종 선정한 바 있고, 같은해 비영리 단체 민족문제연구소는 식민지 지배에 협력한 인사 4,389명의 친일행각과 광복 전후 행적을 담은 ????친일인명사전????을 펴냈다. 완벽하지는 않지만 친일인사들을 총정리했다는 데 큰 의미가 있었다. 이후 ‘친일파와 관련한 기념비 등을 철거해야 한다, 국립묘지에 안장된 친일파 묘소를 이장해야 한다, 친일파의 이름을 딴 문학상을 폐지해야 한다’ 등의 주장이 제기되었지만, 실제 이행은 지지부진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친일인사들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도 크게 이슈화되지 않았다. 잊을 만하면 불거지는 보수인사들의 친일 망언과 그에 따른 잠깐의 성토가 있었을 뿐이다. 이는 한두 번이 아니라 그동안 반복되어온 일이다. 친일 화가·음악가·문학가 등의 작품에 대해 여러 번 지적되었지만, 사회적인 여론을 형성하지 못해 흐지부지되는 경우도 다반사였다. 어느 예술가의 생애를 다루는 TV 프로그램만 해도 친일활동에 대해서는 눈 감아 그의 예술성에 친일 정도는 가볍게 묻혀버린다. 내가 좋아하는 시, 가곡, 소설 작가인데 그 정도는 별것 아니라는 식이다. 그러다 보니 친일파에 대해 무감각해지고, 심지어 이들을 옹호하는 분위기까지 생겨나는 것은 아닌지 걱정스럽다.

 

친일 인사들의 유물•유적 관리하기

이제는 친일인물들의 행적을 정리하는 수준을 넘어 직접 행동할 때이다. 이를 위해서는 전국적으로 친일파들의 유물과 유적을 조사하고 살아있는 역사교육의 장소로 활용해야 한다. 무엇보다 청소년 역사교육 차원에서 교육현장의 친일잔재를 없애는 일이 선행되어야 한다. 교실에서는 독립운동가의 활동을 기리고 친일을 비판하는데, 여전히 교내에 친일인사의 동상이나 기념비가 있다면 모순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도 전국 17개 시·도 교육청 중 광주·전남만이 교내 친일 잔재 청산에 적극적인 듯하다. 이와 대
조적으로 부산·대구·세종·강원·충북·경북·경남 교육청은 그러한 사업에 대한 계획조차 없다. 2019년 민
족문제연구소가 경기도 소재 학교 내 친일 잔재 전수조사를 한 것은 매우 고무적인 일이었지만, 관할
교육청은 이를 바로잡기 위한 조사는커녕 청산 작업을 진행하지 않고 있다. 인천·대전·울산·경기·충남·
전북·제주 7개 교육청에서 교육현장 속 일제 잔재 실태 파악 및 청산 관련 조사나 토론회 등을 실시한 것은 그나마 다행이다.

친일작가 김경승이 제작한 전북 정읍에 위치한 전봉준 동상

 

다음으로 친일파와 관련한 기념비·기념탑·동상·기념관·도로명 등의 유물과 유적을 전수 조사하고 목록화해서 관리해야 한다. 이를 이미 시행하는 지자체도 있고 민족문제연구소와 같은 민간단체도 있다. 전라북도는 2020년 ‘친일 잔재 전수조사 및 처리 방안 연구용역’을 진행하였고, 이에 대한 처리 기준을 마련하여 역사교육에 활용할 것이라 한다. 이는 상당히 고무적인 일이지만 이러한 움직임을 보이는 지자체는 그리 많지 않다.
이를 반대하는 측은 친일파들의 행적을 논할 때, ‘공(功)과 과(過)’의 균형을 잡아야 한다는 주장을 내세우곤 한다. 유명인일 경우에는 더욱 민감하다 보니 기념비나 동상 등을 철거하기란 간단치 않다. 몇 년 전부터 민족문제연구소 등 민간단체들이 친일 기념비를 없애기보다는 좀 더 합리적인 방안으로 그 옆에 ‘단죄비(斷罪碑)’를 세우고 있는데, 논란에서 빗겨나갈 하나의 방안으로 보인다. 그 자체도 역사이니 친일 기념비를 역사교육 자료로 활용할 수 있다는 차원에서다. 그렇다손 치더라도 친일파가 제작하거나 건립한 독립운동가 동상과 기념비는 철거되어야 한다. 이는 단죄비를 세우는 것과는 다른 얘기다. 어느 누가 보더라도 논란의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이 부분에 대한 철거를 주장하는 경우가 많지만 맥없이 흐지부지되기 일쑤였다.
그렇다고 성과가 전연 없던 것도 아니다. 경남 마산시가 2003년 5월 선구자를 작곡한 친일파 조두남을 기리고자 ‘조두남기념관’을 지었으나, 그의 친일문제가 불거지면서 결국 2004년 7월 ‘마산 음악관’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2020년 12월 전북 정읍시는 친일작가 김경승이 제작한 덕천면 황토현전적지의 전봉준 장군 동상과 부조 시설물을 모두 철거하고 재건립하기로 하였다. 그런데 서울 탑골공원의 3·1운동사 부조, 서울 남산의 김구 동상 등도 그의 작품이다. 이외에도 강원도 원주 민긍호 의병장의 묘소 근처에는 친일파 정일권 전 육군참모총장의 충혼비 헌시가 버젓이 세워져 있다.
역사의 단죄는 잘못을 처벌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다. 역사의 잘잘못을 가려 친일행위가 더는 옹호해야 하는 대상이 아니라 청산의 대상이라는 점을 분명히 하는 것이다. 친일인사들의 유물과 유적을 전수 조사하고 목록화해서 통합·관리하는 것은 그것을 가리는 시작이 될 것이다. <독립기념관> 2021.2

화, 2021/03/02-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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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원마당]

편집자주 ― 신호근 부산지부 회원이 8월초 편지와 함께 얼굴마사지기 100개를 연구소로 보내주었다. 사연인즉 <민족사랑> 7월호에 실린 결산서에 400만원 적자가 난 것을 보고 회비를 증액했다고 한다. 신 회원의 연구소에 대한 관심과 성원에 대해 이 자리를 빌려 감사드린다.


 

부산회원 신호근입니다. 저는 평생 과학기술자로 살고 있습니다. 항상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몇일
전 소식지에 있는 결산서를 보고 운영 적자가 발생된 것을 알고 마음을 굳혔습니다.
십수년 전, 고향 형님, 선배들과 같이하는 자리에서 당시 친일재산환수 문제로 설왕설래하던 중 제가 민문연회원이라고 했습니다. 그 즉시 “야가!! 빨개이 아이가 니는, 니 혼자 저기 가서 먹어라”고 하여 충격받고, 이후 어디에서도 민문연 회원 얘기를 하지 못했습니다.(참고로, 저는 부산에서 선조부터 20대 이상을 거주하고 있습니다.)
외삼촌이 해방 직후 철도청 근무하였는데 학교 동문들 모임에 찬조하였다는 이유로, 보도 연맹희생자가 되었던 것을 오래전부터 알게 되었고 다른 외삼촌들은 적색분자 연좌죄로 공무원 취직도 안 되고, 군 생활에서도 보직 차별을 겪었다고 들어서 역사 공부를 하게 되었습니다. 지금도 고향 형님들 만나면 정치 얘기를 하지 않습니다.
이분들이 정재계 활동하시다보니 이런 얘기는 피하는 입장인데, 최근 변화가 있더군요. 남귤북지(南橘北枳)라는 옛말이 있듯이 처한 환경에 따라 달라지듯이 용기를 내어서 연락드리고 기부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조심스럽게 드리고 싶은 말씀은 민문연 창립과 함께 초기 활동하신 분들의 초심과 같이 운영하여 주십사 하는 것입니다. 많은 회원분들이 생각은 있으나, 저와 같이 나서지 못하는 어려움이 있어서 그렇지, 연구소의 활동을 지켜보고 있으며 운영에 어려움이 봉착되면 후원하고자 하는 분들이 많다는 것을 잊지 말기 바라며 용기를 내시기 바랍니다.

민문연 발전을 기원하며
2019.8.1. 부산에서 신호근 올림

금, 2019/09/20-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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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원회원 마당]

중국에서 온 편지

김춘련 중국 거주, 후원회원, 양세봉 장군 동생 양시봉의 외손녀

 

지난 1월 9일 방학진 기획실장이 “효창독립커피에 양세봉 장군 커피를 만들고 싶다”는 문자와 함께 사이트를 보내왔다. 사이트를 열어보니 아이디가 참신하여 좋다고 답장을 보냈다.
며칠 후 “양세봉 장군의 직계 후손은 없지요?” 또 문자가 와서 양세봉 친손주 양철수가 이북에서 살고, 2014년 8월, 2018년 겨울 두 번 중국에 왔을 때 내가 만났던 적이 있다고 답장을 보냈다. 열흘이 지나 <아직도 내 귀엔 서간도 바람소리가>(구술 허은, 기록 변창애, 민족문제연구소) 표지와 “시집살이” 내용 넉 장을 위쳇으로 보내왔다. 방실장은 아무 말을 안 했지만 보내준 문장이 뜻이 있을 거 같아 꼼꼼히
봤다. 순간 열흘 전에 물어봤던 문자가 뇌리에 떠올랐다.
허은 여사님 글에 “왕청문에서 일본놈들이 끌어다 때려서 죽였단다. 죽이고 나서도 ‘저놈은 죽여도 그래도 죄가 남는다’면서 죽은 사람의 목을 또 잘랐단다. 그리고 그(양세봉)의 세살 된 어린애까지 데려다 죽이고…후손이 없어서 아직 유해는 못 찾은 거 같았다.”
양세봉은 1934년 8월 19일에 변절한 아동양의 총에 맞아 이튿날 새벽에 눈을 감았다. 당시일주일간 장례식을 지니고 25일 흑구산 기슭에 시신을 안장했다. 이튿날 일본 통화영사관분관에서 양세봉이 피살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군용차에 일본군경을 가득 싣고 향수하자촌에 들이닥쳐 양세봉의 시신을 파내라고 위협했다. 흑구산 기슭에서 양세봉 시체를 파온 일경은 또 김도선에게 양세봉 목을 작두로 자르라고 호령했다. 그러나 김도선은 “우리 독립군 사령관의 목을 절대로 자를 수 없다”라고 완강히 거부하자 총을 쏘았다. 그리고 양세봉 머리를 작두로 잘라 조선의복에 싸서 통화사령관으로 가져가 통화, 산성진 등지에서 전시하였다. (조문기·정무, <양세봉> 278쪽)
허은 여사님이 “늦게까지 만주에 있다가 나온 분한테 들은 거”라고 했는데 잘못된 풍문을 들은 것이었다. 그때 함께 죽은 사람은 세 살된 어린애 양의준이 아니고 김도선이었다. 양의준은 1932년 5월, 청원현 소산성자에서 태어났다. 글에 나오는 시동생은 양세봉의 둘째 동생 양시봉이다. 양시봉과 양세봉 부인 윤재순이 수백리 길을 걸어 양세봉 부대를 찾아가 아들을 보여주었다. 양세봉은 그때 본 아들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후에 그 아들은 이북에서 1957년 3월 15일 임무수행 도중 뜻하지 않은 사고로 희생되었다. 당시 나이는 26살이었고 직무는 정치부대대장이었다. (양철수,<계승> 11쪽) 양세봉 친손자 양철수는 1956년 2월 10일 조선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라는 말도 떼기 전에 양세봉의 아들 양의준은 돌아갔고 한돌이 지나원인 모를 고열을 심하게 앓더니 혼자서는 걸을 수 없는 영영 불구의 몸이 되었다. 양철수는 현재 조선작가동맹중앙위원회 국가 1급작가이고 그의 대표작으로 아동문학창작집 <희망의
날개>, <계승>(2007.6)이 있다.
양세봉에게는 생전에 딸 둘, 아들 하나 있었다. 맏딸은 1920년 신빈현 금구자에서 태어났다.
“1931년, 양세봉 가족을 멸족하라는 지시가 떨어져 김씨성으로 고쳐 신빈현에서 청원현 소산성자에 이사 온 후 얼마 안 되어서의 일이었다. 단오날 양세봉의 맏딸 귀녀의 성화에 김화순이 두 살 난 자기 아이는 업고 12살 난 귀녀의 손을 잡고 거리에 나갔다가 일본놈의 폭격에 귀녀는 즉사했고 그녀도 피못에 쓰러졌다. 왼쪽 발목이 골절되었고 다리에 수많은 파편이 박혔다. 수개월동안 병상에 누워 생사박투하던 기억을 떠올리면 지금도 치가 떨린다고 했다. 그때 입은 상처가 흐린 날이면 아픈데 파편이 박혀 있는 곳은 더욱 쏜다고 하였다.”(<요녕조선문보> 1998.5.28) 김화순은 돌아가실 때까지 그 파편이 다리에 있었다.
둘째딸은 1928년 5월 중국 신빈현에서 태어났다. 이름은 양의숙이다. 1917년에 중국 신빈현에 이사온 뒤부터 1946년까지 장장 28년간 양시봉, 김화순 부부가 양세봉 가족까지 12식구를 거느리고 수없이 이사 다니며 파란 많은 곡절과 시련을 겪었다. 양세봉의 둘째딸 양의 숙 부부가 중국 신빈현 왕청문 향수하자향에 묻혀있던 양세봉의 머리 없는 유해를 1961년 평양 근교에 안장하고 기념비를 세웠다가 1986년에 평양 열사릉원에 이장했다. 
허은 여사님이 쓴 책과 특히 김동삼 손부 이해동님이 쓴 <만주생활77년>을 읽으면서 그분들이 겪은 고난의 생활이 어쩌면 나의 외할머니 김화순이 겪은 일과 너무나 비슷하여 구구절절하게 마음에 와 닿았다. 외할머니 생전에 나한테 들려줬던 이야기를 글로 남기지 못한 유감이 컸다. 비록 고인이 되신 조문기, 유연산, 강룡권 등 분들이 외할머니 생전에 취재하고 글을 남기었지만 워낙 양세봉의 공이 크다
보니 양세봉 할아버지 사적만 기록으로 남겼을 뿐이었다. 그때 외할머니가 고생한 이야기도 많이 했을텐데 묵혀버린 것 같아 매우 아쉬웠다. 빛이 강할수록 그늘이 짙다더니…

2021.2.1. 기록

화, 2021/03/02- 2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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