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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량리 떠나던 날, 청파에서 가꿀 새 꿈을 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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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량리 떠나던 날, 청파에서 가꿀 새 꿈을 꾸다

익명 (미확인) | 목, 2018/01/25- 17:15

기고

청량리 떠나던 날, 청파에서 가꿀 새 꿈을 꾸다

김승은 자료실장

연구소가 드디어 청량리에서 청파동으로 이전을 마무리했다. 2000년 3월부터 청량리 떡전교 사거리 금은빌딩에 터를 잡았으니 거의 18년 만에 새 둥지로의 이사였다. 그 사이 10명에 불과했던 상근자가 4배 가까이 늘었고, 3층 한켠만 겨우 차지하던 살림살이는 5층과 지하, 2층 일부까지 다 채울 정도로 커졌으니 이번 이사에 만만치 않은 준비가 필요했다.
먼저 사무실 이사 전문 업체를 선정하고 체계적인 이사 계획을 세우는 한편, 이전해 갈 서현빌딩의 안전진단과 시설점검을 진행했다. 2006년에 준공한 건물치고는 관리가 비교적 잘 된 편이었지만 손볼 데가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 꼼꼼한 건물 점검과 필요한 보수공사는 최규필 회원이 전적으로 맡아 도와주었다. 개인적으로도 몇 번이나 청파동에 찾아가 건물을 둘러보고 관리 상태를 돌아보는가 하면, 공사이력을 알아내고 가장 저렴하게 보수공사를 할 수 있도록 주변 지인들을 총동원해 주었다. 그 사이 곳곳에 쌓여 있던 묵은 짐을 정리하는 일도 만만치 않았다. 수장고에 보관했던 유물과 고도서들은 직접 확인하고 포장해야 해서 이사 두 달 전부터 작업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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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유물과 고도서를 포장하는 상근자들 3 포장된 유물상자로 가득 찬 청량리 사무실 임시전시실

상근자들은 보관・활용할 사무집기와 폐기물품을 점검하고, 이전하는 새 공간의 활용과 공간 배치 등 모든 이전 업무에 각자의 힘과 지혜를 모았다. 사무실 집기들을 점검하다 보니 갖가지 모양의 책상과 책장, 의자들이 수두룩했다. 문 닫는 사무실만 생기면 가서 주어다 모았기 때문에 통일감이란 ‘1’도 찾아보기 힘들었다. 짝 안 맞는 낡은 집기들이 우리 연구소가 걸어온 땀과 눈물의 험로를 고스란히 보여주는 지도 모른다. 손때 묻은 책장과 책상들을 차마 버릴 수가 없어서 거의 다 짊어지고 왔다. 서현빌딩에도 이전 건물주가 사용하던 붙박이장과 수납장이 많았지만, 예전 책장과 사무집기들은 우리가 새로 쓸모를 찾기도 하고, 필요한 단체가 있으면 기증도 하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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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전체 이사 계획과 일정을 점검하는 상근자회의 2사무집기 점검과 배치를 담당했던 ‘떡전용역팀’ 회의

 

서현빌딩에서도 새 살림살이가 들어갈 공간 정비가 진행되었다. 이례적인 한파가 시작된 12월 1일부터 5층 내부 공사, 옥상 철거와 보수공사를 시작했다. 4층에는 작은 공간을 효율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이동식 서가(모빌랙)를 설치했다. 각 층 전구는 모두 LED로 교체했다. 신용준 회원이 통 크게 후원해 주었고, 직접 시공까지 맡았다.
이삿날이 가까워 올수록 기온은 더 내려갔다. 이사 전에 여기저기 보수공사를 해야 했지만, 날씨 때문에 제대로 진행하기가 어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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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강의실 공사를 맡아 준 디자인 쏨니엄 관계자들과 회의 4옥상에 방치된 시설물 철거 공사 5강의실 내부 공사 6새로 설치된 이동식 서가 7신용준 회원이 건물 전체 조명을 LED로 교체하고 시공까지 맡아주었다.

 

쏜살같이 이삿날은 다가왔고 아직도 정리가 덜 된 짐이 산더미였다. 이사를 하루를 앞두고 4일간 이어질 이사 일정에 맞춰 역할을 분담하고 마지막 점검을 했다.

21스프레이 테러로 불그스름하게 물든 연구소 현판도 챙기고, 먼지 쌓인 연구소의 옛 추억들도 차곡차곡 상자에 담았다. 책이 예상보다 너무 많았는지 이사업체는 지하서고에 자동 밴딩 기계까지 설치하고 이틀 전부터 포장작업에 돌입했다. 그러는 사이에도 사무실은 일상 업무를 진행해야 해서 이사 전날 새벽까지 개인 짐을 싸는 상근자들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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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이사 이틀 전부터 책 포장에 들어간 지하서고 2연구소 소장자료 이전 준비를 마치고 이사 전날 늦게까지 개인 짐을 싸는 자료실 상근자 3통합 재단 운영 방침을 둘러싸고 새벽1시를 넘겨 이어진 실무회의. 왼쪽은 내일을여는역사재단 신용옥 상임이사, 맞은 편은 조세열 사무총장

 

드디어 12월 15일. 본격적인 이사를 시작했다. 하필 이사 첫날은 71년 만에 가장 빨리 한강이 얼었다는 바로 그날이었다. 추위도 큰 난관이었지만 역시 가장 큰 문제는 지하 서고였다. 꺼내고 꺼내어도 책은 여전히 서가에 가득했다. 다른 층 이전이 줄줄이 늦어졌다. 3층에 쌓인 짐을 건물 밖으로 실어내는 데만 이틀이 걸렸다. 금은빌딩에서 완전히 짐을 비우는 데만 꼬박 5일이 걸렸다. 게다가 이사 마지막 날이었던 12월 18일에는 대설경보가 나올 정도로 폭설이 내렸다. 이사는 또 다음날로 연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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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2월 12일, 박물관 건립 모금에 초석을 놓아 주신 송기인 신부님 등 과거사 관련 위원회 전 위원장님들이 서현빌딩을 방문해 격려해 주셨다. 53층 사무실 이전을 돕는 이용창 편찬실장과 유은호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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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금은빌딩 옛 사무실과 구분이 안 갈 정도로 꽉 찬 새 사무실 2한 달 가까이 이어진 이사에 지친 신다희 사무국원 3서현빌딩에서 다시 시작된 책 정리 4연구소에서 무슨 일이든 팔 걷고 나서는 김병구 회원팀장

 

장장 일주일이 넘게 걸린 이사는 12월 20일에야 마무리되었다. 친일인명사전 편찬의 산실이자, 민족문제연구소가 회원들과 가장 많이 만났던 3층 연구편찬실과 사무국, 친일독재미화 교학사 교과서와 국정교과서 폐기 운동의 본부 역할을 했던 2층 교육홍보실,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의 꿈을 품고 도전했던 5층 역사자료관과 연구소 숨은 보물창고인 지하 서고까지 깨끗이 비웠다. 상근자들의 끼니를 해결해 주신 주변 음식점 사장님들, 배달원 분들, 늘 급하게 주문해도 신속히 작업해 주시던 복사집, 인쇄소 분들께도 일일이 작별을 고하고 청량리를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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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탁구대 설치를 고민할 정도로 넓게만 느껴졌다던 금은빌딩 3층 6국정교과서 폐기 운동의 산실 2층 교육홍보실 7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의 시범 공간이었던 5층 임시전시실

 

사무실 이전 와중에도 워싱턴·뉴욕·LA 등 미주지부 창립을 위한 순회 강연집회, 항일음악 토크콘서트와 음악회, 박정희 동상 건립 반대 집회, 친일문학상 반대 집회, 서울시민대학 강좌, 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 아산 유해 발굴 시굴조사, 팟캐스트 시즌2 녹화 등 다양한 사업을 이어갔다. 덕분에 상근자들이 돌아가며 몸살과 독감에 시달렸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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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내부 철거공사 후 마지막 짐을 내리는 금은빌딩 2듬직한 어깨, 친절한 미소로 이사를 기분 좋게 마무리 해 주신 ‘일사천리’ 직원분들 310년 넘게 야스쿠니재판을 지원해 온 일본 변호인들이 금은빌딩의 마지막 추억을 남겼다.

 

새 건물로 이사를 가니 챙길 일도 참 많았다. 고장난 문고리나 전선 공사는 물론 변기 커버도 직접 갈고 쓰레기 분리수거, 출입문 보안까지 모든 것을 점검하고 챙겨야 한다. 동파에 터진 수도 배관을 보며 속 태우는 사무국이나, 자동 개폐식 출입문에 아직 적응 못하는 상근자들, 꽂고 꽂아도 산적한 책들에 허리가 휘는 자료실 인턴들, 1, 2층이 아직 공실이라 고스란히 올라오는 냉기에 발을 동동거리는 3층 연구원들 모두가 아직은 이 공간이 낯설고 서툴기만 하다.
하지만 지난 25년간 한결같은 회원들의 성원과 지지로 만들어진 새 둥지이니 그 안에서 새로 품은 꿈만큼은 창대하다. 연구소는 우리 사회의 비상식・부정의와 싸워 온 지난 25년을 발판삼아 상식과 정의가 뿌리내릴 수 있는 역사운동의 든든한 터전을 이곳 용산 청파동에서 만들어 나가고자 한다. 내일의 역사를 여는 새로운 길에 회원 여러분들이 늘 함께 해 주시길 기대한다.

시민들의 의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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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

대전지부, 독립운동가 조문기 선생 추모식과 백선엽 안내문 철거

 

대전지부(지부장 박해룡)는 2월 5일 독립운동가 조문기(연구소 2대 이사장) 선생의 13주기 추모식을 대전현충원 애국지사 3묘역에서 진행했다. 이날 추모식에는 대전지부 후원회원을 비롯해 광복회 대전지부(지부장 윤석경) 회원 등 30여 명이 참석했다. 추모식은 헌화, 묵념, 약력보고, 추모사 순으로 진행됐다. 조문기 선생은 유만수, 강윤국과 더불어 1945년 7월 24일 ‘부민관 폭파의거’의 주역이다. 이 의거는 경성부 부민관에서 대표적인 친일반민족행위자 박춘금이 주최한 아세아민족분격대회장에 사제 시한폭탄 두 개를 설치해 폭발시켜 대회를 무산시킨 사건이다. 조문기 선생은 2001년 이돈명 변호사에 이어 연구소 2대 이사장에 취임한 이후 <친일인명사전>을 발간에 확고한 토대를 마련했으나 사전 발간 1년 전인 2008년 별세하였다. 정부는 2008년 고인에게 국민훈장 모란장을 추서했으며, 2014년에는 모교인 화성매송초등학교 교정에 회원과 시민들이 성금을 모아 동상(제작 : 김서경 김운성)을 세
우기도 했다. 동상과 묘비에는 평소 선생의 어록이 다음과 같이 새겨져 있다. “이 땅의 독립운동가에게는 세 가지 죄가 있다. 통일을 위해 목숨을 걸지 못한 것이 첫 번째요, 친일청산을 하지 못한 것이 두 번째요, 그런데도 대접을 받고 있는 것이 세 번째다.” 이날 추모식을 마친 참가자들은 당초 작년 7월 장군2묘역에 안장된 친일반민족행위자 백선엽 묘와 바로 맞은편 독립유공자 4묘역에 안장된 광복군 출신 김준엽 선생(전 고려대 총장) 묘를 둘러보며 국립묘지법 개정의 필요성을 다시금 인식하고자 했다. 그러나 참가자들은 백선엽 묘를 찾기 쉽도록 안내하는 개별 안내문이 여러 개 설치되어 있는 데다 현충원 직원 수십 명이 백선엽 묘지를 호위하듯 지켜서 있는 모습에 대해 강하게 항의하였다. 결국 현충원 측은 하루 만에 백선엽 묘지 안내문을 철거했지만, 조선일보와 중앙일보 등 수구 언론은 여러 차례 연구소를 비난하는 기사를 냈고 대한민국상이군경회·전몰군경유족회·전몰군 경미망인회 등은 2월 9일 ‘호국 영령들의 영원한 안식처 훼손 행위를 엄단하라’는 공동 입장문을 냈다.

 

토, 2021/02/27- 0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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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모/사

고 조문기 이사장님의 영전에 삼가 추모의 마음을 올립니다

이순옥 운영위원회 부위원장

 

완전한 친일청산과 조국의 통일만을 염원하시던 선생께서 영면하신 지도 어언 열두 해가 지나 다시 뵈옵는 오늘입니다. 절기는 입춘을 지나 봄의 문턱을 넘어섰지만, 대지는 여전히 얼어붙은 채 찬바람만 살을 에며 지나고 있습니다. 꽁꽁 언 아스팔트 바닥에서 들고 일어선 촛불혁명으로 수구 모리배들을 무너뜨리고 민중의 뜻을 담아 민주정부를 탄생시킨 지도 3년이 되어 옵니다.
독재자의 딸과 그에 붙어 기생하던 하수인들을 법의 심판대 위에 세우고, 이제 민주주의가 꽃피는 세상,
민중이 주인 되는 세상, 노동자가 대접받고 정의가 춤을 추는 세상이 우리 앞에 펼쳐질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의 착각이었습니다.
바뀐 것은 대통령 한 사람뿐, 당신께서 그토록 사랑하고 아끼시던, 민주주의를 열망하는 민초들의 나라는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100년 이상 권세를 누리며 역사와 민중을 착취해 온 적폐 잔당들이 기득권과 이익을 한 톨, 한 치도 내놓지 않으려고 검찰과 언론이라는 무기를 사용하여 이빨 빠진 칼로 거친 칼춤을 추듯 민주주의와 법치를 유린하며 마지막 발악을 하는 모습을 두 눈 뜨고 보고 있는 실정입니다.
또한 우리는 민족 통일과 한반도 평화를 위하여 온갖 수모를 견디며 혼신의 힘을 다했던 북미하노이정상회담을 장사꾼 트럼프가 한순간에 뭉개버릴 수 있는 것이 우리 민족 앞에 놓인 힘의 논리라는 사실에 치를 떨었습니다. 예의도 원칙도 없는 트럼프가 통일을 앞당기는 마중물이 돼 줄 것이라고 잠시나마 기대를 걸었다는 사실에 자괴감마저 들었습니다.
우리의 촛불혁명은 미완성입니다. 아직도 어둡고 차가운 구시대의 끄트머리에 우리는 앉아 있습니다.
그러나 선생이시여! 저희는 결코 좌절하거나 포기하지 않겠습니다. 목표가 무엇인지, 목적지가 어디인지 분명히 알고 그곳만을 향해 나아가겠습니다.
문재인 대통령도 우리 민족의 문제는 누구에게 의존하지 않고 우리민족끼리 한 발 앞서는 행보를 하겠다고 하였으니, 선생이시여! 바람막이도 없이 위태로운 등불을 꺼트리지 않고 기어이 살려내려는 민족의 염원을 지켜 주시고 힘을 주소서.
1945년 7월 24일 부민관에서 친일 반역자들의 간담을 서늘케 하였던 선생의 고귀한 열정을 우리 모두의 가슴에 하나하나 심어 주소서.
적폐 잔당들을 말끔히 쓸어버리고 외세의 간섭에서 벗어나 통일된 조국을 이룩하는 그날이 올 때까지, 민중이 주인 되고 노동자가 대접받는 그날이 올 때까지 저희는 결코 투쟁을 멈추지 않겠습니다. 선생의 조국에 대한 사랑과 열정을 본받아 끝끝내 싸워 이겨내겠습니다.
그리하여 선생의 영전에 반드시 승리의 꽃다발을 바치겠습니다.

2020년 2월 5일 민족문제연구소 후원회원 일동

목, 2020/02/20- 2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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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비망록 54]

일본 개신교의 가마쿠라보육원으로 변신한 후암동 ‘전생서’ 옛 터
결국 양화진외국인묘지에 묻힌 소다 카이치 원장

이순우 책임연구원

전의감(典醫監), 전옥서(典獄署), 전원국(典圜局), 전선사(典膳司), 전설사(典設司), 전생서(典牲署), 전교서(典校署), 전농사(典農司), 전연사(典涓司), 전비사(典備司), 전함사(典艦司)등등 ……
. 여기에 나열한 것들은 ‘전(典)’자 돌림으로 시작하는 조선시대의 관아 명칭이다.

‘전’이라는 것은 “무엇 무엇을 관장한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이 가운데 ‘전생서’의 생(牲)은 우리가 흔히 ‘희생양’이라고 부르는 관용구에 등장하는 것과 동일한데, 이는 곧 여러 제향(祭享)에 쓸 희생(犧牲, 제물로 바칠 짐승)을 기르는 일을 관장하는 관아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조선의 개국 초기에는 전구서(典廐署)가 설치되어 이 일을 맡았으나, 세조 때에 이르러 이곳이 ‘전생서’로 개칭된 것으로 알려진다.
순조 때의 인물인 유본예(柳本藝, 1777~1842)가 지은 『한경지략(漢京識略)』에는 전생서의 항목이 이렇게 정리되어 있다.

 

전생서는 숭례문 밖 남부 둔지방(南部 屯智坊) 목멱산 남쪽에 있다. 개국 초에 창설하였고, 희생을 기르는 일을 맡았다. 정청(正廳)은 간줄헌(看茁軒)이라 하며, 곁에 연못이 있어 정자를 일컬어 불구정(不垢亭)이라 한다. 사천 이병연(槎川 李秉淵)의 간줄헌기(看茁軒記)가 있다.
살피건대 우리나라에는 양(羊)이 없으나 이곳에서만 양과 고력(羖䍽, 흑염소)을 길러 제향에 공급하였다. 지금에 와서는 단지 염소만 있고 양이 없다고 한다. 생우(牲牛)로는 종묘(宗廟)에는 검은 소를 쓰고, 문묘(文廟)에는 성(騂, 붉은 소)을 쓴다.

 

이곳 전생서는 도성 남쪽 일대에서는 유달리 그 존재감이 두드러진 곳이었으므로, 두텁바위(蟾巖, 두껍바위)에서 유래한 후암동(厚巖洞)이라는 지명이 정착되기 전에는 전생동(典牲洞)의 사용빈도가 압도적이었다. 실제로 일제강점기로 접어든 직후 1914년 4월 1일에 시행된 행정구역개편 당시 일본식 지명인 ‘삼판통(三坂通, 지금의 후암동)’ 구역은 종전의 ‘갈월리(葛月里) 일부’와 ‘전생동’을 합쳐 만든 것이라고 표시되어 있다.
더구나 전생서 앞을 지나는 길은 한강나루로 이어지는 주요한 교통로의 하나였다는 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고산자 김정호(金正浩)가 정리한 <대동지지(大東地志)>의 정리고(程里考) ‘성문분로(城門分路)’에 표시된 내용에 따르면, 서울 도성 숭례문에서 벗어나 부산 동래(4대로)를 향하는 이들이 거쳐야하는 행로가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숭례문 남쪽으로 이문동을 지나 주교, 청파역, 석우참까지 4리이다. ○ 석우참 동남쪽으로 둔지산을 지나 서빙고진에 이르기를 6리(한강진 아래에 있고 숭례문에서 10리 거리)이다.
(4대로를 보라) ○ 이문동에서 도저동을 경유하여 남묘, 이태원을 지나 곧장 서빙고에 이르는 것이 이것의 지름길이다. (崇禮門南經里門洞舟橋靑坡驛石隅站四里○石隅站東南經屯之山至西氷庫津六里在漢江鎭之下卽漢江津距崇禮門十里○見四大路○自里門洞由桃楮洞經南廟利泰院直至西氷庫此捷路)

 

여기에서 보듯이 동래 방향으로 내려가는 행로는 본디 청파배다리, 돌모루, 둔지산을 거쳐 서빙고나루에 닿는 것이 보통이지만, 때로 남묘와 이태원을 거쳐 바로 서빙고로 가는 샛길이 활용되기도 했던 것이다. 이 경우 남묘 앞을 경유하지 않고 곧장 우수현(牛首峴, 雨水峴)을 넘어오는 방법을 택할 수도 있지만, 어쨌거나 전생서 앞길을 거쳐 가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수선전도(首善全圖)에는 숭례문을 빠져나와 남묘, 이태원을 거쳐 서빙고에 이르는 전생서 앞길(지름길)의 행로가 잘 묘사되어 있다.

 

이러한 내력을 지닌 전생서는 갑오개혁 당시 궁내부의 종백부(宗伯府) 소관이 되었다가 이내 혁파(革罷)되었고, 희생을 기르는 일은 1897년 1월 29일 이후 봉상사(奉常司)의 소임으로 넘겨졌다. 그러다가 1902년 4월에는 포달(布達) 제82호를 통해 궁내부 소속 직원으로 내장원 전생과(內藏院 典牲課)를 증치(增置)했다는 기록이 보이는 것을 마지막으로 그 흔적이 더 이상 드러나지 않는다.
그리고 오래지 않아 일제강점기로 접어든 직후 옛 전생서 터는 본격적으로 공간해체의 위기에 몰리는 상황을 맞이하기에 이른다. 이와 관련하여 『순종실록부록(純宗實錄附錄)』 1911년 11월 29일 기사에는 “중부 황토현 기념비각(記念碑閣), 북부 관광방 옛 도서과(元圖書課) 및 부속지, 남부 둔지방 전생서 기지(典牲署 基址), 중부 황토현 옛 기로소(耆老所) 토지 건물이 총독부에 인계되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그런데 <조선총독부관보> 1914년 7월 11일자에 게재된 ‘불필요 관유재산 입찰불하공고(不必要 官有財産 入札拂下公告)’의 내용을 보면, 여기에 전생서 터에 포함된 토지와 건물 일체가 매각대상에 나왔던 사실이 드러난다. 여기에 표시된 택지면적(宅地面積)을 단서로 살펴볼 때 ‘ 삼판통 370번지(1,028평, 국유지)’가 전생서 터였다는 것은 분명히 확인되지만, 부속지로 표기 된 곳이 어딘지는 아쉽게도 구체적인 지번까지 확인할 수 없는 상태이다.

 

경성부 용산 삼판통 원 전생서(元 典牲署) (조서 제328호)
一 택지면적 1,078평(坪) 2합(合) 8작(勺)
이 자리 안에 있는 조선식 기와건축은 9동(棟), 136평 6합 8작
경성부 용산 삼판통 원 전생서 부속(附屬) (조서 제330호)
一 택지면적 232평 5합 7작
이 자리 안에 있는 조선식 기와건축은 2동, 33평 6합 6작

 

<매일신보> 1914년 7월 12일자에 수록된 ‘관유토지건물 입찰불하공고’ 내역에는 옛 전생서 터와 부속지에 대한 내용이 나란히 등장한다.

 

이때의 공매처분은 응찰이 이뤄지지 않았던 것인지 끝내 무산되었고, 그 후 1917년에 이르러 무상대여의 형태로 이곳을 차지한 주체는 일본 기독교 계열의 사회사업기관인 ‘재단법인 가마쿠라보육원 경성지부(財團法人 鎌倉保育園 京城支部)’였다. 이 단체의 연혁에 대해서는 조선총독부 내무국 사회과 편, <조선사회사업요람(朝鮮社會事業要覽)>(1924)에 잘 기술되어 있다

 

재단법인 가마쿠라보육원 경성지부
△ 소재지 : 경성부 삼판통 370번지
△ 설립 : 대정 2년(1913년) 8월 11일
△ 연혁 : 본원(本園)은 가나가와현(神奈川縣) 가마쿠라보육원의 지부이다. 원주(園主) 사타케 오토지로(佐竹音次郞)는 대정 원년, 2년(1912, 3년)에 걸쳐 조선시찰의 결과 신개지(新開地)에서 고아구제(孤兒救濟)의 필요를 느끼고, 동 2년(1913년) 8월 본부 출신의 남녀 2명씩을 동반하여 경성으로 와서 장곡천정(長谷川町, 지금의 소공동) 일본기독교회(日本基督敎會)에서 결혼을 시키고 곧장 한 부부를 남만주 여순(南滿洲 旅順)으로 파견하여 그곳에서 보육(保育) 및 개간(開墾)의 사업을 개시하도록 했으며, 다른 부부를 당지(當地)에 남겨 지부를 창설하도록 했다. 부부, 즉 전 주임(前主任) 사타케 곤타로 부처(佐竹權太郞 夫妻)는 한강통(漢江通) 삼각지(三角地) 부근에 협소한 집을 빌려 사업을 개시하
였는데, 이보다 앞서 인천(仁川, 내지인)으로부터 소아(小兒) 5인에 대한 구호신청이 있어서 사업개시와 동시에 이들을 인수하여 양육하여 왔으나 지부의 방침은 오로지 조선인 고아의 수용을 목적으로 하였으므로 이들 내지인 아동은 가마쿠라 본부로 옮기고 그 후 조선인만의 수용에 주력하였다. 대정 4년(1915년)에 이르러 한강통 일본기독교회의 신축 이전에 따라 그 터를 빌려 이전하였다. 당시 가족(家族; 본원은 고아 및 종사자를 전부 일가족으로 부른다)은 21명이다.
대정 6년(1917년) 8월 총독부에게서 경성 삼판통 옛 한국정부 전생서 터의 토지가옥을 무상대하(無償貸下)를 얻어 이곳으로 이전하였다. 이 자리는 천여 평의 면적을 지녔고, 커다란 건축물이었을 뿐만 아니라 남산(南山)의 남록(南麓)에 있어서 조망이 좋아 대단한 건강지(健康地)여서 이 사업을 위해서는 실로 천여(天與)의 호적지(好適地)이다. 후에 가옥을 수선하고 증축하여 대정 7년(1918년) 경성부에서 수용 구호했던 빈아(貧兒)와 기아(棄兒)의 양육업무를 넘겨받아 해마다 사업을 확장시켜 현재에 이르고 있다. 그리고 지금은 소다 카이치(曾田嘉伊智) 씨 부처에 의해 경영되고 있다. (하략)

 

이곳에서는 경성부에서 맡겨지는 조선인 아동들을 양육하는 것을 주된 일로 삼았다. 여기에는 고아(孤兒, 홀로 된 아이)뿐만이 아니라 미아(迷兒, 길 잃은 아이)와 기아(棄兒, 버려진 아이)도 포함되는데, 서울 지역에서 해당 사례가 발생하면 대개 이곳 가마쿠라보육원이나 ‘옥천동 126번지’에 자리한 경성보육원(京城保育院, 1920년 1월 3일 창립)으로 나뉘어 수용되는 것이 보통이었다.

 

<조선사회사업요람> (1927)에 수록된 가마쿠라보육원 경성지부의 모습이다. 건물 전면에 ‘간줄헌(看茁軒)’ 편액이 또렷이 보이는 것을 보면 이때까지도 옛 전생서 건물이 그대로 잘 보존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파악할 수 있다.

소다 카이치 내외가 가마쿠라보육원 원생들과 나란히 기념촬영을 한 사진자료이다. 뒤로 보이는 건물은 옛 전생서의 정청(正廳)이다. (조선총독부, , 1935)

<매일신보> 1916년 5월 19일자에 수록된 가마쿠라보육원 탐방기사에는 이곳에 수용된 조선인 고아들이 죄다 일본 복장에다 조선어는 잊어버린 상태라고 소개하고 있다. 이 당시는 아직 전생서 터를 무상 대여하기 전이므로, ‘일본기독교회 터 (한강통 13번지)’에 있던 시절의 모습으로 봐야 할 것이다.

 

또한 이보다 앞선 시기의 자료이긴 하지만, <매일신보> 1916년 5월 19일자에 수록된 「일본화(日本化)된 가련아(可憐兒)」 제하의 보육원 탐방기사를 통해 또 다른 운영 실태를 엿볼 수 있다.

 

지나간 8일에 경기도청에서 다년 자선공공에 종사한 점으로 표창된 용산의 ‘가마쿠라보육원’ 지부 사타케 곤타로(佐竹權太郞) 씨를 방문하여 씨의 다년 진력하여 오던 소아보육 사업을 구경 갔더니 마침 사타케 씨는 집에 없고 부인이 정답게 면회하여 이층 위 한 방으로 인도하는데 창문 밖에는 뚝뚝 덧는 녹음이 어우러졌으나 방안에는 월계의 조화 하나 밖에 아무 장식품도 없더라.
부인은 근신하는 태도로 말하여 왈(曰) “지금 아이들은 열여섯 명 있는데 다 조선 아이들이나 아주 일본 아이들 모양이 되었고 또 말도 조선말은 잊어버리고 일본말을 잘 합니다.
제일 큰 아이가 열여덟 살이요 제일 어린 아이가 네 살인데 다 말도 잘 듣고 조용히 잘 있습니다. 하는 일은 별로 없어요. 돝(돼지)과 닭을 치는 이외에는 아무 일도 없고 아침저녁에는 찬미가를 노래하고 기도를 할 뿐입니다. 또 매일 냉수목욕을 시키는데 전체가 다 건강은 합니다. 조선 아이들은 일본 아이들과 같지 아니하여 재주들이 있고 공부를 시키면 한나절이고 하루 동안이고 싫어하지 아니하고 잘 합니다. 일본 아이들과는 달라요. 풍금같은 것이라도 하나 있었으면 아이들을 위로하여 주겠다고 생각합니다. 또 저녁때는 큰 아이들이 어린 아이를 데리고 의좋게 산보를 다닙니다.
뜰에 나가본즉, 등꽃이 곱게 피어있는 아래에서 아이들이 닭의 모이도 주고 군대의 남은 밥을 얻어다가 돝을 기르기도 하는 옆에서 조그마하나 아이가 모래 장난을 하고 있는 모양이 참 평화한 지경을 이루었더라.

 

약간 특이한 점은 이곳이 이른바 ‘사회사업기관’이라고 하여 해마다 기원절(紀元節, 2월 11일)을 기려 일본 천황이 하사하는 ‘사회사업장려’ 명목의 내탕금(內帑金)을 수령하는 수혜기관의 명단에 가마쿠라보육원이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또한 1934년 4월 6일에는 당시 우가키 가즈시게(宇垣一成) 조선총독이 엄창섭(嚴昌燮) 총독부 학무국 사회과장의 안내를 받아 직접 이곳을 시찰한 일도 있었다.

 

<황성신문> 1906년 10월 4일자에 게재된 ‘황성기독교청년회 학원 모집광고’에 일본어 교사 ‘소다 카이치’의 이름이 등장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리고 가마쿠라보육원이라고 하면 으레 함께 떠올려지는 인물은 앞서 연혁 설명에서 나온 소다 카이치(曾田嘉伊智, 1867~1962)이다. 그의 행적에 관한 자료를 뒤져보니 일찍이 1906년 이래로 황성기독교청년회관(종로YMCA)에서 일본어 교사로 활동한 사실 정도가 우선 눈에 띈다.
그 후 가마쿠라보육원의 운영을 떠맡게 되는 시기는 명확하지 않지만, <윤치호일기> 1919년 7월 10일자의 기록에는 옛 전생서 터였던 가마쿠라보육원 지부를 방문한 일과 관련하여 당시 이곳의 운영자로 일본인 기독교도인 사타케 곤타로(佐竹權太郞, 본부 원주인 사타케 오토지로의 아들)를 언급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에 비춰보면, 소다가 선임자인 사타케에 뒤이어 두 번째 주임으로서 이곳에 처음 부임한 때는 최소한 1920년을 넘어가는 시점이 아닌가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1938년 5월 8일에 “내선인 기독교인의 단결을 도모하고 서로 협력하여 기독교 전도의 실효를 선양하고 황국신민으로서 총후보국의 정성을 다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내선인기독교연합회(內鮮人基督敎聯合會)가 결성될 때 평의원(評議員)의 한 사람으로 이름을 올린 사실이 드러나지만, 그에 관한 여타의 행적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려진 바 없다. 1940년에는 원산(元山)으로 옮겨가서 그곳에서 전도사업에 주력하다가 일제의 패망을 맞이한 것으로 전해진다.

<동아일보> 1962년 3월 29일자에 수록된 소다 카이치의 사망 기사이다. 그는 전년도인 1961년 5월 7일에 입국한 지 10개월여 만에 옛 가마쿠라보육원 경성지부 자리인 영락보린원에서 숨졌다.

<경향신문> 1950년 1월 16일자에 수록된 소다 타키코 여사(소다 카이치의 처)의 사망기사이다.

 

해방 이후 소다 카이치는 1947년 가을에 일본으로 되돌아갔으나 그의 처인 소다 타키코(曾田瀧子, 1878~1950)는 홀로 잔류하였다가 1950년 1월 14일 세브란스병원에서 숨졌다. 이때 사회부장관이 장의위원장이 되어 소다 원모(院母)의 사회장이 거행되었고, 유해는 ‘홍제동 화장장’으로 옮겨진 바 있었다.

양화진외국인묘지에 자리한 ‘고아의 자부’ 소다 카이치의 묘소 전경이다. 오른쪽은 소다 카이치의 묘비이고, 왼쪽은 1987년에 사타케 신(佐竹伸)이 건립한 소다 카이치와 강진형(姜振馨, 가마쿠라보육원의 조선인 주임) 묘역 참배 기념비이다.

 

이로부터 다시 10년의 세월이 흐른 다음 1961년 5월 7일, 이번에는 90세를 훌쩍 넘긴 소다 카이치가 여생을 한국에서 보내기 위해 김포공항을 통해 서울로 들어왔고, 해를 넘겨 1962년 3월 28일 영락보린원(永樂保隣院; 1947년 가마쿠라보육원 터 불하, 1948년 서울보육원 인가, 1956년 영락보린원 개칭)으로 전환된 옛 전생서 터이자 가마쿠라보육원 경성지부터에서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25년 가량에 걸쳐 조선인 아동들에 대한 보육활동을 한 그에게는 ‘이례적으로’ 문화훈장이 주어졌으며, 그는 ‘고아(孤兒)의 자부(慈父)’라는 수식어와 함께 양화진외국인묘지에 묻혔다.

 

1947년 이후 서울보린원을 거쳐 영락보린원으로 변신한 옛 가마쿠라보육원 경성지부 터의 현재 전경이다. 정문 앞쪽에는 ‘전생서 터’ 표석 하나가 다소곳하게 놓여 있다.

화, 2020/01/21- 0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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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인사의 유물·유적을 조사하여
친일 청산 교육의 장으로 만들자

이계형 국민대학교 교양대학 교수

 

얼마 전 어느 젊은 웹툰 작가가 독립운동가와 그 후손을 비하하는 글을 올려 논란이 일었다. 자
신의 페이스북에 “친일파 후손들이 저렇게 열심히 살 동안 독립운동가 후손들은 도대체 뭐 한 걸
까”라는 질문을 던지고서는 자문자답의 글과 함께 ‘친일파 후손의 집’이라 적힌 고급 단독주택과
낡고 허름한 ‘독립운동가 후손의 집’ 사진을 나란히 보여줬다. 올바른 역사의식을 지닌 사람이라면
친일파를 비판적으로 바라보지 않을까?

 

친일인사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 높이기

친일파 논란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지만, 청장년층에까지 친일을 긍정하는 인식이 확산한 것이 아닌지 우려스럽다. 2019년 ‘신친일파’가 쓴 ????반일 종족주의????라는 책이 인기도서가 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김백일 동상 옆에 세워진 김백일 친일행적단죄비

 

당시는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 되는 해로 어느 때보다도 독립운동의 의미를 되새겼음에도 말이다. 이런 비판적인 시각에서 자라나는 청소년들에게 친일문제를 어떻게 이해하도록 할 것인지 다시금 되돌아봐야 한다.
2009년 대통령 직속으로 꾸려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는 1,005명을 친일파로 최종 선정한 바 있고, 같은해 비영리 단체 민족문제연구소는 식민지 지배에 협력한 인사 4,389명의 친일행각과 광복 전후 행적을 담은 ????친일인명사전????을 펴냈다. 완벽하지는 않지만 친일인사들을 총정리했다는 데 큰 의미가 있었다. 이후 ‘친일파와 관련한 기념비 등을 철거해야 한다, 국립묘지에 안장된 친일파 묘소를 이장해야 한다, 친일파의 이름을 딴 문학상을 폐지해야 한다’ 등의 주장이 제기되었지만, 실제 이행은 지지부진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친일인사들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도 크게 이슈화되지 않았다. 잊을 만하면 불거지는 보수인사들의 친일 망언과 그에 따른 잠깐의 성토가 있었을 뿐이다. 이는 한두 번이 아니라 그동안 반복되어온 일이다. 친일 화가·음악가·문학가 등의 작품에 대해 여러 번 지적되었지만, 사회적인 여론을 형성하지 못해 흐지부지되는 경우도 다반사였다. 어느 예술가의 생애를 다루는 TV 프로그램만 해도 친일활동에 대해서는 눈 감아 그의 예술성에 친일 정도는 가볍게 묻혀버린다. 내가 좋아하는 시, 가곡, 소설 작가인데 그 정도는 별것 아니라는 식이다. 그러다 보니 친일파에 대해 무감각해지고, 심지어 이들을 옹호하는 분위기까지 생겨나는 것은 아닌지 걱정스럽다.

 

친일 인사들의 유물•유적 관리하기

이제는 친일인물들의 행적을 정리하는 수준을 넘어 직접 행동할 때이다. 이를 위해서는 전국적으로 친일파들의 유물과 유적을 조사하고 살아있는 역사교육의 장소로 활용해야 한다. 무엇보다 청소년 역사교육 차원에서 교육현장의 친일잔재를 없애는 일이 선행되어야 한다. 교실에서는 독립운동가의 활동을 기리고 친일을 비판하는데, 여전히 교내에 친일인사의 동상이나 기념비가 있다면 모순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도 전국 17개 시·도 교육청 중 광주·전남만이 교내 친일 잔재 청산에 적극적인 듯하다. 이와 대
조적으로 부산·대구·세종·강원·충북·경북·경남 교육청은 그러한 사업에 대한 계획조차 없다. 2019년 민
족문제연구소가 경기도 소재 학교 내 친일 잔재 전수조사를 한 것은 매우 고무적인 일이었지만, 관할
교육청은 이를 바로잡기 위한 조사는커녕 청산 작업을 진행하지 않고 있다. 인천·대전·울산·경기·충남·
전북·제주 7개 교육청에서 교육현장 속 일제 잔재 실태 파악 및 청산 관련 조사나 토론회 등을 실시한 것은 그나마 다행이다.

친일작가 김경승이 제작한 전북 정읍에 위치한 전봉준 동상

 

다음으로 친일파와 관련한 기념비·기념탑·동상·기념관·도로명 등의 유물과 유적을 전수 조사하고 목록화해서 관리해야 한다. 이를 이미 시행하는 지자체도 있고 민족문제연구소와 같은 민간단체도 있다. 전라북도는 2020년 ‘친일 잔재 전수조사 및 처리 방안 연구용역’을 진행하였고, 이에 대한 처리 기준을 마련하여 역사교육에 활용할 것이라 한다. 이는 상당히 고무적인 일이지만 이러한 움직임을 보이는 지자체는 그리 많지 않다.
이를 반대하는 측은 친일파들의 행적을 논할 때, ‘공(功)과 과(過)’의 균형을 잡아야 한다는 주장을 내세우곤 한다. 유명인일 경우에는 더욱 민감하다 보니 기념비나 동상 등을 철거하기란 간단치 않다. 몇 년 전부터 민족문제연구소 등 민간단체들이 친일 기념비를 없애기보다는 좀 더 합리적인 방안으로 그 옆에 ‘단죄비(斷罪碑)’를 세우고 있는데, 논란에서 빗겨나갈 하나의 방안으로 보인다. 그 자체도 역사이니 친일 기념비를 역사교육 자료로 활용할 수 있다는 차원에서다. 그렇다손 치더라도 친일파가 제작하거나 건립한 독립운동가 동상과 기념비는 철거되어야 한다. 이는 단죄비를 세우는 것과는 다른 얘기다. 어느 누가 보더라도 논란의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이 부분에 대한 철거를 주장하는 경우가 많지만 맥없이 흐지부지되기 일쑤였다.
그렇다고 성과가 전연 없던 것도 아니다. 경남 마산시가 2003년 5월 선구자를 작곡한 친일파 조두남을 기리고자 ‘조두남기념관’을 지었으나, 그의 친일문제가 불거지면서 결국 2004년 7월 ‘마산 음악관’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2020년 12월 전북 정읍시는 친일작가 김경승이 제작한 덕천면 황토현전적지의 전봉준 장군 동상과 부조 시설물을 모두 철거하고 재건립하기로 하였다. 그런데 서울 탑골공원의 3·1운동사 부조, 서울 남산의 김구 동상 등도 그의 작품이다. 이외에도 강원도 원주 민긍호 의병장의 묘소 근처에는 친일파 정일권 전 육군참모총장의 충혼비 헌시가 버젓이 세워져 있다.
역사의 단죄는 잘못을 처벌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다. 역사의 잘잘못을 가려 친일행위가 더는 옹호해야 하는 대상이 아니라 청산의 대상이라는 점을 분명히 하는 것이다. 친일인사들의 유물과 유적을 전수 조사하고 목록화해서 통합·관리하는 것은 그것을 가리는 시작이 될 것이다. <독립기념관> 2021.2

화, 2021/03/02-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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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원마당]

편집자주 ― 신호근 부산지부 회원이 8월초 편지와 함께 얼굴마사지기 100개를 연구소로 보내주었다. 사연인즉 <민족사랑> 7월호에 실린 결산서에 400만원 적자가 난 것을 보고 회비를 증액했다고 한다. 신 회원의 연구소에 대한 관심과 성원에 대해 이 자리를 빌려 감사드린다.


 

부산회원 신호근입니다. 저는 평생 과학기술자로 살고 있습니다. 항상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몇일
전 소식지에 있는 결산서를 보고 운영 적자가 발생된 것을 알고 마음을 굳혔습니다.
십수년 전, 고향 형님, 선배들과 같이하는 자리에서 당시 친일재산환수 문제로 설왕설래하던 중 제가 민문연회원이라고 했습니다. 그 즉시 “야가!! 빨개이 아이가 니는, 니 혼자 저기 가서 먹어라”고 하여 충격받고, 이후 어디에서도 민문연 회원 얘기를 하지 못했습니다.(참고로, 저는 부산에서 선조부터 20대 이상을 거주하고 있습니다.)
외삼촌이 해방 직후 철도청 근무하였는데 학교 동문들 모임에 찬조하였다는 이유로, 보도 연맹희생자가 되었던 것을 오래전부터 알게 되었고 다른 외삼촌들은 적색분자 연좌죄로 공무원 취직도 안 되고, 군 생활에서도 보직 차별을 겪었다고 들어서 역사 공부를 하게 되었습니다. 지금도 고향 형님들 만나면 정치 얘기를 하지 않습니다.
이분들이 정재계 활동하시다보니 이런 얘기는 피하는 입장인데, 최근 변화가 있더군요. 남귤북지(南橘北枳)라는 옛말이 있듯이 처한 환경에 따라 달라지듯이 용기를 내어서 연락드리고 기부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조심스럽게 드리고 싶은 말씀은 민문연 창립과 함께 초기 활동하신 분들의 초심과 같이 운영하여 주십사 하는 것입니다. 많은 회원분들이 생각은 있으나, 저와 같이 나서지 못하는 어려움이 있어서 그렇지, 연구소의 활동을 지켜보고 있으며 운영에 어려움이 봉착되면 후원하고자 하는 분들이 많다는 것을 잊지 말기 바라며 용기를 내시기 바랍니다.

민문연 발전을 기원하며
2019.8.1. 부산에서 신호근 올림

금, 2019/09/20-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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