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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량리 떠나던 날, 청파에서 가꿀 새 꿈을 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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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량리 떠나던 날, 청파에서 가꿀 새 꿈을 꾸다

익명 (미확인) | 목, 2018/01/25- 17:15

기고

청량리 떠나던 날, 청파에서 가꿀 새 꿈을 꾸다

김승은 자료실장

연구소가 드디어 청량리에서 청파동으로 이전을 마무리했다. 2000년 3월부터 청량리 떡전교 사거리 금은빌딩에 터를 잡았으니 거의 18년 만에 새 둥지로의 이사였다. 그 사이 10명에 불과했던 상근자가 4배 가까이 늘었고, 3층 한켠만 겨우 차지하던 살림살이는 5층과 지하, 2층 일부까지 다 채울 정도로 커졌으니 이번 이사에 만만치 않은 준비가 필요했다.
먼저 사무실 이사 전문 업체를 선정하고 체계적인 이사 계획을 세우는 한편, 이전해 갈 서현빌딩의 안전진단과 시설점검을 진행했다. 2006년에 준공한 건물치고는 관리가 비교적 잘 된 편이었지만 손볼 데가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 꼼꼼한 건물 점검과 필요한 보수공사는 최규필 회원이 전적으로 맡아 도와주었다. 개인적으로도 몇 번이나 청파동에 찾아가 건물을 둘러보고 관리 상태를 돌아보는가 하면, 공사이력을 알아내고 가장 저렴하게 보수공사를 할 수 있도록 주변 지인들을 총동원해 주었다. 그 사이 곳곳에 쌓여 있던 묵은 짐을 정리하는 일도 만만치 않았다. 수장고에 보관했던 유물과 고도서들은 직접 확인하고 포장해야 해서 이사 두 달 전부터 작업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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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유물과 고도서를 포장하는 상근자들 3 포장된 유물상자로 가득 찬 청량리 사무실 임시전시실

상근자들은 보관・활용할 사무집기와 폐기물품을 점검하고, 이전하는 새 공간의 활용과 공간 배치 등 모든 이전 업무에 각자의 힘과 지혜를 모았다. 사무실 집기들을 점검하다 보니 갖가지 모양의 책상과 책장, 의자들이 수두룩했다. 문 닫는 사무실만 생기면 가서 주어다 모았기 때문에 통일감이란 ‘1’도 찾아보기 힘들었다. 짝 안 맞는 낡은 집기들이 우리 연구소가 걸어온 땀과 눈물의 험로를 고스란히 보여주는 지도 모른다. 손때 묻은 책장과 책상들을 차마 버릴 수가 없어서 거의 다 짊어지고 왔다. 서현빌딩에도 이전 건물주가 사용하던 붙박이장과 수납장이 많았지만, 예전 책장과 사무집기들은 우리가 새로 쓸모를 찾기도 하고, 필요한 단체가 있으면 기증도 하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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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전체 이사 계획과 일정을 점검하는 상근자회의 2사무집기 점검과 배치를 담당했던 ‘떡전용역팀’ 회의

 

서현빌딩에서도 새 살림살이가 들어갈 공간 정비가 진행되었다. 이례적인 한파가 시작된 12월 1일부터 5층 내부 공사, 옥상 철거와 보수공사를 시작했다. 4층에는 작은 공간을 효율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이동식 서가(모빌랙)를 설치했다. 각 층 전구는 모두 LED로 교체했다. 신용준 회원이 통 크게 후원해 주었고, 직접 시공까지 맡았다.
이삿날이 가까워 올수록 기온은 더 내려갔다. 이사 전에 여기저기 보수공사를 해야 했지만, 날씨 때문에 제대로 진행하기가 어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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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강의실 공사를 맡아 준 디자인 쏨니엄 관계자들과 회의 4옥상에 방치된 시설물 철거 공사 5강의실 내부 공사 6새로 설치된 이동식 서가 7신용준 회원이 건물 전체 조명을 LED로 교체하고 시공까지 맡아주었다.

 

쏜살같이 이삿날은 다가왔고 아직도 정리가 덜 된 짐이 산더미였다. 이사를 하루를 앞두고 4일간 이어질 이사 일정에 맞춰 역할을 분담하고 마지막 점검을 했다.

21스프레이 테러로 불그스름하게 물든 연구소 현판도 챙기고, 먼지 쌓인 연구소의 옛 추억들도 차곡차곡 상자에 담았다. 책이 예상보다 너무 많았는지 이사업체는 지하서고에 자동 밴딩 기계까지 설치하고 이틀 전부터 포장작업에 돌입했다. 그러는 사이에도 사무실은 일상 업무를 진행해야 해서 이사 전날 새벽까지 개인 짐을 싸는 상근자들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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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이사 이틀 전부터 책 포장에 들어간 지하서고 2연구소 소장자료 이전 준비를 마치고 이사 전날 늦게까지 개인 짐을 싸는 자료실 상근자 3통합 재단 운영 방침을 둘러싸고 새벽1시를 넘겨 이어진 실무회의. 왼쪽은 내일을여는역사재단 신용옥 상임이사, 맞은 편은 조세열 사무총장

 

드디어 12월 15일. 본격적인 이사를 시작했다. 하필 이사 첫날은 71년 만에 가장 빨리 한강이 얼었다는 바로 그날이었다. 추위도 큰 난관이었지만 역시 가장 큰 문제는 지하 서고였다. 꺼내고 꺼내어도 책은 여전히 서가에 가득했다. 다른 층 이전이 줄줄이 늦어졌다. 3층에 쌓인 짐을 건물 밖으로 실어내는 데만 이틀이 걸렸다. 금은빌딩에서 완전히 짐을 비우는 데만 꼬박 5일이 걸렸다. 게다가 이사 마지막 날이었던 12월 18일에는 대설경보가 나올 정도로 폭설이 내렸다. 이사는 또 다음날로 연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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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2월 12일, 박물관 건립 모금에 초석을 놓아 주신 송기인 신부님 등 과거사 관련 위원회 전 위원장님들이 서현빌딩을 방문해 격려해 주셨다. 53층 사무실 이전을 돕는 이용창 편찬실장과 유은호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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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금은빌딩 옛 사무실과 구분이 안 갈 정도로 꽉 찬 새 사무실 2한 달 가까이 이어진 이사에 지친 신다희 사무국원 3서현빌딩에서 다시 시작된 책 정리 4연구소에서 무슨 일이든 팔 걷고 나서는 김병구 회원팀장

 

장장 일주일이 넘게 걸린 이사는 12월 20일에야 마무리되었다. 친일인명사전 편찬의 산실이자, 민족문제연구소가 회원들과 가장 많이 만났던 3층 연구편찬실과 사무국, 친일독재미화 교학사 교과서와 국정교과서 폐기 운동의 본부 역할을 했던 2층 교육홍보실,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의 꿈을 품고 도전했던 5층 역사자료관과 연구소 숨은 보물창고인 지하 서고까지 깨끗이 비웠다. 상근자들의 끼니를 해결해 주신 주변 음식점 사장님들, 배달원 분들, 늘 급하게 주문해도 신속히 작업해 주시던 복사집, 인쇄소 분들께도 일일이 작별을 고하고 청량리를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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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탁구대 설치를 고민할 정도로 넓게만 느껴졌다던 금은빌딩 3층 6국정교과서 폐기 운동의 산실 2층 교육홍보실 7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의 시범 공간이었던 5층 임시전시실

 

사무실 이전 와중에도 워싱턴·뉴욕·LA 등 미주지부 창립을 위한 순회 강연집회, 항일음악 토크콘서트와 음악회, 박정희 동상 건립 반대 집회, 친일문학상 반대 집회, 서울시민대학 강좌, 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 아산 유해 발굴 시굴조사, 팟캐스트 시즌2 녹화 등 다양한 사업을 이어갔다. 덕분에 상근자들이 돌아가며 몸살과 독감에 시달렸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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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내부 철거공사 후 마지막 짐을 내리는 금은빌딩 2듬직한 어깨, 친절한 미소로 이사를 기분 좋게 마무리 해 주신 ‘일사천리’ 직원분들 310년 넘게 야스쿠니재판을 지원해 온 일본 변호인들이 금은빌딩의 마지막 추억을 남겼다.

 

새 건물로 이사를 가니 챙길 일도 참 많았다. 고장난 문고리나 전선 공사는 물론 변기 커버도 직접 갈고 쓰레기 분리수거, 출입문 보안까지 모든 것을 점검하고 챙겨야 한다. 동파에 터진 수도 배관을 보며 속 태우는 사무국이나, 자동 개폐식 출입문에 아직 적응 못하는 상근자들, 꽂고 꽂아도 산적한 책들에 허리가 휘는 자료실 인턴들, 1, 2층이 아직 공실이라 고스란히 올라오는 냉기에 발을 동동거리는 3층 연구원들 모두가 아직은 이 공간이 낯설고 서툴기만 하다.
하지만 지난 25년간 한결같은 회원들의 성원과 지지로 만들어진 새 둥지이니 그 안에서 새로 품은 꿈만큼은 창대하다. 연구소는 우리 사회의 비상식・부정의와 싸워 온 지난 25년을 발판삼아 상식과 정의가 뿌리내릴 수 있는 역사운동의 든든한 터전을 이곳 용산 청파동에서 만들어 나가고자 한다. 내일의 역사를 여는 새로운 길에 회원 여러분들이 늘 함께 해 주시길 기대한다.

시민들의 의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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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

경기도, 역대 도지사 친일행적 표시

 

경기도는 1월 9일 친일 행적이 확인된 역대 도지사 4명의 명단(구자옥, 이해익, 최문경, 이흥배)과 친일사실을 경기도 누리집에 공개하고, 14일에는 도청 신관 4층 회의실에 걸려있는 역대 도지사 액자 옆에 친일사실을 표기했다. 경기도 관계자는 “친일 행적을 했다고 해서 역대 도지사의 사진을 떼내는 것은 도지사를 지냈다는 역사적 사실을 부정하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며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내용을 요약해 인물 설명으로 달았다”고 말했다. 현재 경기도는 올해 친일을 목적으로 제작된 도내 유·무형 친일문화잔재와 활용 현황에 대한 전수조사를 진행하고 있다. 이 결과를 토대로 내년부터 본격적인 친일 잔재 청산 작업을 추진할 방침이다.

• 방학진 기획실장

목, 2020/02/20- 2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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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비망록 72]

일제패망기의 학교운동장이 고무공 천지로 변한 까닭은?

일본의 남방군(南方軍)이 보내온 침략전쟁의 전첩기념선물

이순우 책임연구원

 

초등학교 2학년 때 일본인들이 ‘대동아전쟁’이라 부른 태평양전쟁을 도발했고 전쟁 초에는 일본군이 연전연승한다고 야단이었다. 일본제국주의자들은 대동아전쟁이 아시아를 유럽제국주의 침략으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한 전쟁이라고 했다. 조선과 만주와 대만을 저들의 가혹한 식민통치 아래 둔 채 도발한 대동아전쟁이 아시아인의 해방을 위한 전쟁이라 떠벌린 것이다.
하와이 진주만 기습작전에서 전사했다는 9명인가를 군신(軍神)으로 찬양한 노래를 배우기도 했던 것 같고, 일본군이 고무가 많이 생산되는 (당시는 말레이시아의 일부이던) 씽가포르를 함락한 기념으로 초등학생들에게 고무공을 하나씩 주어 학교 운동장이 온통 고무공 천지였고, 말레이시아 고무로 만들었다는 운동화가 학생들에게 지급되기도 했다.

 

이것은 1933년 경남 마산 태생인 강만길(姜萬吉, 고려대 명예교수) 선생이 남긴 자서전 <역사가의 시간>(창비, 2010), 41쪽에 나오는 한 대목이다. 그가 기억하는 고무공 천지로 변한 학교운동장이 도대체 어떠한 상황으로 생겨난 것이었는지가 궁금하여 관련 자료 몇 가지를 뒤져보았더니, <매일신보> 1942년 7월 8일자에 수록된 「빛나는 남방 선물(南方 膳物), 금일(今日) 고무공 첫 배급(配給)」 제하의 기사에 이러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군인 아저씨, 참으로 고맙습니다. 대동아전쟁의 혁혁한 전과에 의하여 세계에서 가장 큰 고무산지인 마레이 보르네오가 우리 세력 범위 안에 들어온 오늘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고무를 제일 많이 가진 나라가 되었고 그 대신 동아의 천지에서 쫓겨난 미국과 영국은 지금 고무가 없어서 쩔쩔 매고 있는 형편이다. 관계 당국에서는 이와 같은 승리의 선물을 하루바삐 국내로 들여다가 총후에서 싸우고 있는 국민들에게 나누어 주고자 준비를 바삐 하고 있는데 위선 전첩축하기념 고무공을 소국민에게 제1회 배급을 8일의 대조봉대일에 하기로 되었다. 이것은 전선 국민학교 아동들에게 한 개씩 주기로 된 것이다. 운반관계로 8일에는 경성을 비롯하여 각 도청 소재지에 있는 국민학교 남자 아동에게만 학교에서 직접 배급하고 여자용은 한 10여 일 늦어질 터인데 값은 남자용이 20전, 여자용이 25전으로 결정되었다. 중학생과 어른들에게 주는 선물인 운동화, 지까다비도 이어 들어와 겨울까지는 배급하기로 될 터인데 승리의 선물에 우리는 감사하며 필승 신념을 더욱 굳게 하지 않아서는 안 되겠다.

 

<경성일보> 1942년 7월 9일자에는 남방 지역의 일본황군(皇軍)이 보내준 고무로 만든 ‘전첩 기념 고무공’이 경성사범학교 부속국민학교 학생들에게 배포되고 있는 장면이 소개되어 있다.

 

<매일신보> 1942년 7월 9일자에도 남방 지역 일본군의 선물인 ‘전첩 기념 고무공’이 조선에 도착하여 경성 지역의 여학생들에게도 배포되고 있는 장면이 수록되어 있다.

 

여기에 나오는 소국민(小國民)이라는 것은 전시체제기에 ‘어린 황국민’이란 정도의 의미로 어린이를 일컫는 용어로 사용된 표현이다. 이 글에는 일제가 잇따른 침략전쟁의 말미에 1941년 12월 진주만 기습과 더불어 전선을 남방(南方)으로 확대하여 1942년 2월에는 신가파(新嘉坡, 싱가폴)를 함락하였고, 그 결과 뜻하지 않게 세계 최대의 고무 생산국으로 급부상하였다는 내용이 서술되어 있다.
이 과정에서 확보된 풍부한 고무자원을 활용하여 고무공(ゴム毬; ゴムマリ), 운동화(運動靴), 지카다비(地下足袋, 바닥에 고무를 덧댄 버선 모양의 작업화), 게시고무(消しゴム, 지우개) 등이 만들어졌고, 다시 이것을 전첩기념선물(戰捷記念膳物)로 배급하는 방식으로 그들 나름의 전승분위기를 한껏 고취하는 수단으로 삼게 된다. 또한 이러한 선물의 수혜대상은 비단 ‘내지(內地, 일본 국내)’에만 국한되지 않고 식민지 조선에도 널리 미치게 되었으니, 마침내 이른바 ‘황군(皇軍)’ 덕분에 남방전선에서 확보된 고무로 만든 ‘전첩 축하 고무공(戰捷 祝賀 ゴムボール)’이 조선의 어린 학생들에게도 처음 전달된 것이 바로 1942년 7월의 대조봉대일(大詔奉戴日; 미국과 영국에 대해 선전포고의 조서가 내려진 1941년 12월 8일을 기려 매달 8일로 정하여 전쟁결의를 새로 다지는 날)이었다.
곧이어 고무신과 지카다비 등의 제품도 대량으로 흘러들어왔는데, <매일신보> 1942년 7월 28일에 수록된 「황군(皇軍)의 선물(膳物) 고무신, 전첩(戰捷)을 축하(祝賀) 조선(朝鮮)에 골고루 배급(配給)」 제하의 기사에는 각 도별로 배당된 수량까지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혁혁한 남방 전과의 선물로서 전선의 황군용사들로부터 총후반도로 보내어 오는 고무신, ‘지까다비’등의 고무제품은 총후 국민들로 하여금 황군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더욱 돋우고 특히 고무공은 소국민인 학동들로부터 ‘병정 아저씨의 선물’이라고 크게 환영되었는데 이번에는 다시 제2회 고무제품의 배급과 함께 이름도 빛나는 ‘제2회 전첩축하 고무제품배급’이라는 이름을 가진 다량의 특별배급 고무신이 들어왔다.
총수는 270만 켤레로 그 내용은 ▲ 운동화(運動靴) 820,000족(足), ▲ 지까다비 300,000족, ▲ 기타고무신 편리화(便利靴) 178,000족이고, 각 도별의 배급할당 예정수는
1. 운동화
경기 19,100/ 충북 19,700/ 충남 41,800/ 전북 45,900/ 전남 41,800/ 경북 73,000/ 경남 93,500/ 황해
44,300/ 평남 74,600/ 평북 44,300/ 강원 27,900/ 함남 59,800/ 함북 37,800
2. 지까다비
경기 31,200/ 충북 10,200/ 충남 16,800/ 전북 16,800/ 전남 24,900/ 경북 24,300/ 경남 26,700/ 황해 22,500/ 평남 25,200/ 평북 25,500/ 강원 24,900/ 함남 28,200/ 함북 22,800으로 되어 있으며, 이 중의 37만 켤레가 특별배급의 ‘전첩축하배급’으로 되어 있어 제1회 배급보다는 훨씬 많다. 경성부내에 배급 할당된 총수는 19만 1천 4백 켤레로 그 내용은 ▲ 지까다비 9,900족, ▲ 편리화 20,600족, ▲ 일반용 운동화 12,300족, ▲ 동(同) 학생용 120,600족인데 제1회 때보다 약 4만 켤레가 더 많다. 배급은 8월 초에 각지 소매상조합과 도연맹, 군, 부, 읍, 면 연맹으로부터 다시 각 애국반을 거쳐서 또는 각 학교로 전선 일제히 산업전사들과 학도들에게 배급되기로 되었다.

 

이를 테면 느닷없는 고무제품의 풍년 사태는 바로 이러한 침략전쟁이 빚어낸 부산물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매일신보> 1941년 11월 22일자에 수록된 「불인(佛印)서 고무공, 소국민(小國民)에게 배급(配給)」 제하의 기사는 싱가폴 함락에 앞서 이미 고무제품을 활용한 선물공세가 시도된 선례가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왼쪽) <매일신보>1942년 6월 20일자에는 남방 전선의 전첩 선물로 고무공과 운동화가 조선인 학동들에게 배급된다는 기사와 관련하여 “병정 아저씨 고맙습니다”라는 제목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 눈에 띈다. (오른쪽) <일본제국관보>1941년 11월 21일자에 수록된 ‘상공성 고시’ 내역에는 ‘일불인 공동방위기념 고무볼(日佛印 共同防衛記念ゴムボール)’ 개당 판매가격이 표시되어 있다.

 

[도쿄전화(東京電話)] 새해도 하루하루 가까워 오는데 이것은 또 굉장히 반가운 선사 ―. 늦어도 오는 정월까지에는 우리 제국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우방 불인(佛印)에서 수입된 고무를 재료로 하여 전국 25만의 귀여운 소국민들에게 25만여 타(打)나 되는 고무공(毬)과 4할이나 고무를 섞은 운동화 또는 일반노동자에게도 역시 4할을 섞은 지까다비가 배급된다. 우리 제국과 불인과는 지난 7월에 공동방위가 체결된 이래로 불인 측의 호의로서 다량의 고무가 수입되어 그 중의 일부분이 상공성을 위시하여육, 해, 문부성, 후생성과 기획원의 알선으로 귀여운 소국민들과 생산 확충에 밤낮을 헤아리지 않고 감투하는 산업전사 혹은 전선에서 활약하는 황군장병들의 적성에 대하여 보답키로 되었다.
고무공(球)의 수효는 남자는 3인에 한 개, 여자는 5인에 한 개씩 각각 배급되는 셈이니 결국은 각 국민학교에서 추첨케 될 터이나 종래와 같이 전표는 물론 학교장의 증명서도 필요 없게 되며 그 위에 품질은 사변 전과 똑같게 하였으며 고무공, 운동화, 지까다비 등은 모두 ‘일불인공동방위기념’이라는 ‘마크’를 넣게 되었다. 배급될 상세한 수량은 고무공이 소년용 9만 5천 30타(打, 1개에 가격이 24전씩이며 3인에게 한 개씩 배급될 터), 여자용 6만 1천 6백 40타(1개에 40전씩이며 5인에게 1개씩)이며 배급할 시기는 제1회가 금월말 내로 되어서 정월 설놀이까지에는 충분히 배급될 터이고 배급할 순서는 우선 6대 도시에서부터 먼저 시작하여 차츰 각 지방으로 될 것이다.

 

<매일신보>1941년 7월 29일자에는 불인(佛印,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주재 스미타 기관(澄田機關)의 스미타 소장(澄田 少將)과 도쿠(Jean Decoux)총독 사이에 공동방위에 관한 세목협정이 타결되었다는 소식이 수록되어 있다. 이 당시 이 지역에서 들여온 고무원료로 제작한 고무공이 처음으로 ‘공동방위 기념품’으로 학생들에게 널리 배포되기도 했다.

 

여기에 나오는 불인(佛印)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베트남, 라오스, 캄보디아 지역)’를 말하며, 1940년 6월 독일의 프랑스 점령과 비시 정권(Vichy Regime)의 등장에 따라 이 지역이 사실상 힘의 공백지대로 변하게 되자 일제가 일본군 진주와 남방 자원의 획득 기회로 삼고자 적극 개입한 결과물이 ‘일불인 공동방위 의정서(日佛印 共同防衛 議定書, 1941.7.23)’였다. 그러니까 이때에도 이 협정의 성사를 기념하여 국민학교 학생들에게 ‘기념 마크’가 새겨진 고무공을 저렴하게 배급한 전례가 이미 존재했었던 것이다. 그런데 옛 신문을 뒤적이다 보니 일찍이 이러한 고무제품의 배급과 아주 유사한 사례도 하나 더 눈에 띈다. 만주사변 직후 1933년에 맞이하는 제2회 사변기념일에 등장한 이른바 ‘만주빵(滿洲パン)’이 바로 그것이다. 이에 관해서는 <매일신보> 1933년 9월 15일자에 수록된 「17, 8 양일(兩日)에 만주(滿洲)빵 판매(販賣), 시내의 빵은 전부 이것으로, 기념계획(紀念計劃)의 일항목(一項目)」 제하의 기사에서 그 흔적을 확인할 수 있다.

 

(왼쪽) <조선신문> 1933년 9월 18일자에 소개된 만주빵 제조 과정을 담은 사진 자료이다. 만주사변 2주년을 기념하는 뜻에서 만주침략의 부산물로 얻어낸 만주산 곡물을 이용하여 만들어낸 것이 바로 ‘만주빵’이었다. (오른쪽) <동아일보> 1938년 9월 1일자에 소개된 파인애플 관련 기사이다. 여기에는 “파인애플은 열대지방 과실로 우리가 먹고 있는 것은 대만산(臺灣産)입니다”라는 구절이 포함되어 있는데, 이처럼 대만에서 생산되는 바나나, 파인애플 등 열대과일이 조선에까지 쉽사리 유통된 것은 이들 지역이 모두 일본의 식민지라는 사실에서 기인한 결과로 볼 수 있다.

<매일신보> 1941년 8월 1일자에 수록된 화태청(華太廳) 포획 해구신(海狗腎) 광고이다. 이러한 광고가 신문지상에 지속적으로 등장하는 것은 이곳 역시 일본의 점령지역이었으므로 이 지역의 특산품이 여타 식민지로 쉽사리 유통될 수 있었던 것으로 풀이된다.

 

20사단 경리부 작업소에서는 오는 18일 사변 당일 만주 소산인 소맥, 대두, 조, 고량 등 10종 곡물과 꿀과 계란을 가해서 ‘만주빵’을 제조해서 용산 일대 군인 가족 7천 인에게 노놔주기로 되었다. 그리고 18일 해행사에서 거행하는 기념연에도 특제빵을 사용할 터이요, 이것을 다만 군인의 가족에게만 배급해서는 널리 그 뜻을 알리지 못할 염려가 있어 일반 시민에게도 선전하기 위하여 13일에는 시내 각처 ‘빵’ 제조업자를 시켜 보통 ‘빵’의 제조는 중지하고 만주빵을 제조해서 전 시민에게 널리 팔게 할 터이라 한다.

 

일제가 만주 일대를 무력으로 장악하고 그곳에다 자신들의 뜻으로 만주국(滿洲國)을 성립시켰으며, 그 와중에 만주사변을 기념한답시고 만주 벌판에서 생산된 곡식으로 만들어낸 것이 만주빵이었던 것이다. 따지고 보면 일본제국이 자랑스런 전리품처럼 자신의 점령지역에서 들여와 다른 식민지역에 유통시킨 이국적이거나 이색적인 물품이 어디 이것뿐이었으랴!
지금으로서는 선뜻 상상하기 어렵지만 경성의 거리마다 바나나와 파인애플 같은 열대과일이 넘쳐나고 해구신(海狗腎)에 관한 광고가 신문지상에 잇따라 등장한 것도 알고 보니 이러한 연결고리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바나나와 파인애플이 일본제국의 식민지인 대만(臺灣)에서 들여온 것이고, 해구신 역시 그들의 점령지역이었던 화태청(樺太廳; 사할린) 관영(官營)으로 포획된 것이었으므로 결국 이들 모두가 일제의 식민지배가 가져다 준 부산물이었다는 점에서 그저 씁쓰레한 웃음만 짓게 될 따름이다

수, 2021/07/28- 18: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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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 비망록•64 ]

용산 보병 제78연대, 조선의 수부 경성을 수비하는 주력부대
이 부대를 거쳐간 조선 출신 일본군 장교들은 누구누구였을까?

이순우 책임연구원

조선 사람으로 일본사관학교를 졸업하고 군인이 되어 군대생활을 하는 사람은 도합 40명이나 되지 못하는데 그 중의 한 사람인 장기형(張璣衡, 26) 씨는 지금 보병소위로 금택(金澤, 카나자와) 제9사단 제35연대 제1중대부(附)로 현금 용산주차군 안에 있더라. 씨는 경기도 김포(金浦) 사람으로 처음에 경성무관학교를 다니었으며 그 후에 일본 동경에 들어가 중앙유년학교(中央幼年學校)를 졸업하고 인하여 사관학교를 졸업한 후에 금택 제9사단에 입대하였으며 동시에 주차군의 장교로 작년 6월에 조선으로 건너왔는데 35연대에 장 소위 한 사람밖에 조선 사람이라고는 없으나 제27기에 같이 사관학교를 졸업한 사람이 17명과 전기에 졸업한 17명의 졸업생은 다 각 연대에 배치되어 입대케 하였더라. (하략)

 

일본 육군사관학교 제27기 졸업생으로 제9사단 보병 제35연대(카나자와 주둔)에 근무했던 장기형(張璣衡) 보병 중위의 인물사진이다. 그가 소속된 보병 제35연대가 조선주차군 교대병력으로 파견되는 바람에, 그 역시 뜻하지 않게 초급장교 시절을 용산 보병영에서 보내게 된다. (민족문제연구소 소장자료)

 

이것은 <매일신보> 1916년 1월 14일자에 수록된 「용산연대(龍山聯隊)의 장소위(張少尉), 그의 당당한 풍채, 그의 유쾌한 생활」 제하의 기사에 등장하는 내용이다. 여기에 나오는 장기형 보병소위는 원래 일본 카나자와에 근거를 둔 제9사단 제35연대에 배속되었는데, 이 부대가 때마침 ‘조선수비(朝鮮守備, 1914.4~1916.4)’를 위해 조선주차군의 교대병력으로 파견된 상태였으므로 그 역시 덩달아 1915년 6월 이후 1년가량 용산에서 근무하는 기회를 얻게 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용산 지역 일본군 병영지의 보병연대(步兵聯隊) 주둔 연혁

장기형 소위가 근무처로 삼았던 보병 제35연대가 있던 자리는 1916년 4월에 조선주둔 2개 상주사단의 하나로 제19사단이 먼저 창설되면서 이때 예하부대로 함께 만들어진 보병 제78연대의 주둔지로 전환된다. 이곳은 1906년 이후 본격적으로 건설된 용산지역의 일본군 병영지 안에서 나중에 보병 제79연대가 추가 배치되기 직전까지는 단 하나의 보병영(步兵營)으로 존재했던 구역이기도 하다.
한국주차군경리부(韓國駐箚軍經理部)에서 펴낸 <조선주차군영구병영, 관아급숙사건축경과개요(朝鮮駐箚軍永久兵營, 官衙及宿舍建築經過槪要)>(1914)에 정리된 내역에 따르면, 이곳에는 1908년 준공 당시 보병연대(대대)본부 청사 1개동과 병사(兵舍) 및 부속가(附屬家) 6개동의 병영시설이 자리하였다. 이와 함께 별동(別棟) 부속건물(위병소, 영창, 하사집회소, 장교집회소 등) 22개동이 있었으며, 이 주변에 보병연대 장교합동숙사(將校合同宿舍) 4개동과 준사관하사합동숙사(準士官下士合同宿舍) 1개동이 추가로 배치되어 있었다.

1908년 보병영 완공 당시의 병사 및 부속건물 구성 내역

1908년에 완공된 용산보병영(龍山步兵營) 일대의 전경을 남쪽 방향으로 담아낸 사진엽서이다. 왼쪽 아래에 보이는 것이 부대 정문(正門)이고, 오른쪽 아래에 길게 보이는 건물이 ‘보병연대본부 및 대대본부’ 청사이다. 그 뒤쪽에 연병장 일대와 6개동에 달하는 병사(兵舍)가 2열로 배치된 모습이 포착되어 있다. (개인소장자료)

이른바 ‘코바야카와(小早川)’에 걸쳐 다리를 놓은 지점에 북면(北面)하여 설치한 용산보병영의 정문(正門) 모습을 담은 사진엽서이다. 대문 기둥에 ‘보병 제31연대’라는 간판이 붙어 있는 걸로 보아 제8사
단이 조선주차군으로 파견되어 있을 당시(1912.4~1914.2)에 촬영된 모습인 것을 알 수 있다. (개인소장자료)

 

부대의 정문(正門)은 용산병영지의 중간을 가로질러 동서로 흐르는 이른바 ‘코바야카와(小早川, 임진왜란 때의 왜군장수인 코바야카와 타카카게의 이름을 따서 붙인 하천 이름)’를 남쪽으로 건너는 지점 앞에 북향(北向)으로 설치되어 있었다. 이곳을 들어서면 먼저 연병장(練兵場)이 나타나고 그 뒤에 남쪽으로 병사(兵舍)가 2열 배치의 형태로 자리하였다.

 

3·1만세 시위 당시인 1919년 5월에 작성된 <군대분산배치요도(軍隊分散配置要圖)>에 표시된 보병 제78연대의 위수지역(경성 및 인천포함 경기북부지역)이다. 특히 이 지도의 여백에는 “경성 및 용산은 3대대로써 수비하고 있다”고 적고 있다.(민족문제연구소 소장자료)

 

이 대목에서 상주사단 편제에 있어서 보병 제78연대의 존재가치는 무엇보다도 식민지 조선의 수부(首府)인 경성(京城)을 수비하는 주력부대라는 사실에 놓여 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겠다. 예를 들어, 조선군사령부(朝鮮軍司令部)에서 제작한 <군대분산배치요도(軍隊分散配置要圖, 1919년 5월 20일 현재)>(민족문제연구소 소장자료)라는 군사지도를 보면, 보병 제39여단(평양 소재)의 예하부대인 보병 제78연대의 위수지역(衛戍地域)이 경성과 인천을 포함하여 한강 이북의 경기도 북부 일대에 걸쳐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이 보병 제78연대는 조선을 수비하는 역할에만 그치지 않고 일제가 벌이는 잇따른 침략전쟁마다 이른바 ‘출정부대(出征部隊)’로 거듭 동원된 내력도 지니고 있었다. 실제로 모리 모토 토미조(森本富藏)가 편찬한 <황군연대기사진첩(皇軍聯隊旗寫眞帖)>(1932)이란 자료를
보면, ‘보병 제78연대’의 항목에 군기약력(軍旗略歷)을 이렇게 적고 있다.

 

위수지(衛戍地) : 조선 용산(朝鮮 竜山)
소속(所屬) : 용산 제20사단(竜山 第二十師團)
一. 군기친수(軍旗親授) : 대정(大正) 5년(1916년) 4월 18일
一. 압록강안지방(鴨綠江岸地方)에 출동(出動) : 자(自) 소화(昭和) 3년(1928년) 5월 27일 지(至) 동년(同年) 7월 18일
一. 만주사변(滿洲事變)에 참가(參加) : 자(自) 소화(昭和) 6년(1931년) 9월 19일 지(至)목하(目下) 〇〇중(中)
보병 제78연대 잔류대(殘留隊) 부관(副官) 오쿠와 시게오(大桑茂男) 씨 보고

이 시기 만주사변에 참가한 흔적으로 남은 것이 바로 용산 보병 제78연대 구내에 잔존했던 ‘충혼비(忠魂碑, 1935.11.18 제막)’였다. 이 비석은 논공행상(論功行賞)의 혜택을 입은 이들이 돈을 걷어 출정중에 죽은 자신들의 전우를 위해 장교집회소(將校集會所) 앞에 세운 것이며, 당초 만주사변 4주년(1935년 9월 18일)을 앞두고 이 날짜에 맞춰 제막하려던 계획이었으나 실제로는 두 달이 지연되어 완공된 것으로 드러난다.

 

<조선신문> 1935년 11월 19일자에 수록된 용산 보병 제78연대의 ‘만주사변 충혼비’ 제막식 장면이다. 엉뚱하게 이 기념물은 해방 이후 ‘미8군 전몰자 기념비’로 재활용되다가 2017년 5월에 평택미군기지로 이전된 상태에 있다.

 

이러한 기념물이 제막된 날의 풍경에 대해서는 일본어 신문인 <조선신문(朝鮮新聞)> 1935년 11월 19일자에 수록된 「호국(護國)의 영령(英靈)을 달래려는 전우(戰友)의 미거(美擧) 결실을 맺으며, 제78연대에 충혼비 제막식(除幕式)」 제하의 기사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남아 있다.

 

만주사변(滿洲事變) 때에 재용산(在龍山) 보병 제78연대의 장병으로서 출정했던 관계자가 그 전우 중에 이 사변에서 순직(殉職)했던 키누가사 소좌(衣笠 少佐) 외 45용사(勇士)의 영령에 제사를 지내며 위령(慰靈)하고자 건립했던 보병 제78연대 관계 장사(將士)의 위령비 제막식은 동(同) 사건의 돌발일(突發日)에 맞춰 18일 오전 11시 반부터 동 연대 영정(同聯隊 營庭)에서 거행되었다. 식장(式場)은 영문(營門) 안쪽에 남면(南面)하여 설치되어 수불(修祓), 강신(降神), 헌찬(獻饌) 등 관례대로 엄숙리에 진행되었으며, 제주(祭主)의 축사(祝詞) 후에 햐쿠타케 연대장(百武 聯隊長)의 제문낭독(祭文朗讀), 이마무라 제40여단장(今村 第四十旅團長)의 조문낭독(弔文朗讀)이 있었고, 유족(遺族)인 고(故) 키시하
라 상등병(岸原 上等兵)의 엄부(嚴父)와 고(故) 코마츠 군조(小松 軍曹) 모당(母堂)의 손에 의해 제막되는 동시에 방구(放鳩), 마지막으로 재주(齋主), 제주(祭主) 옥관(玉串)을 바치고 폐식(閉式)했다. 이날 유족은 고(故) 히라타 중위(平田 中尉) 유족과 기타 20여 명이며, 별도로 조선군(朝鮮軍) 대표, 사단(師團) 대표, 기타 관민(官民)과 아울러 군부관계자(軍部關係者) 100여 명이 참렬(參列)하였고, 동 연대(同聯隊) 전병몰자(戰病歿者)는 다음과 같다. (이하 개별 명단 부분은 인용 생략)

 

그런데 그 이후 이른바 ‘지나사변(支那事變, 중일전쟁)’ 때에도 출동부대의 명단에서 보병 제78연대의 이름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용산 주둔 보병 제78연대의 거듭된 출정에 관한 얘기를 하자면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바로 ‘친일군인’으로 맹활약(?)한 김석원(金錫源, 1893~1978)이다. 무엇보다도 이 시기 그의 행적에 대해서는 <매일신보> 1942년 2월 3일자에 수록된 「반도인(半島人)에 최초(最初) 수훈갑(殊勳甲), 가네야마(金山) 부대장의 영예, 청사(靑史)에 찬연(燦然)한 북지전야(北支戰野)의 무훈(武勳)」 제하의 기사에 잘 요약되어 있다.

 

대동아전쟁하 전첩에 빛나는 신춘을 맞이하여 2일 제24회 지나사변 생존자 논공행상이 발표되었다. 그 중에는 지나사변 직후 대륙전선에서 용맹을 떨친 우리의 부대장 금산석원 중좌(金山錫源 中佐, 구명 김석원)가 반도인으로서는 처음인 수훈갑 공삼급 중수장(殊勳甲 功三級 中綬章)의 은명을 배수하여 향토의 명예를 떨치었다. 김석원 중좌는 소화 12년(1937년) 7월 지나사변이 일어나자 천안병단 남운부대(川岸兵團南雲部隊) 대장으로 용약 북지(北支)에 출정하여 유명한 남원낭방(南苑廊坊)의 전투를 비롯하여 태원(太原), 운성(運城)의 공략전에 이르는 전후 1년 반 동안 포연탄우를 무릅쓰며 북지의 각 전선에서 과감히 싸워 혁혁한 무훈을 세웠고 남원의 격전에서는 명예의 부상까지 입었으나 여기에 굴치 않고 다시 제일선에 나아가 적군을 철저히 섬멸하였다. 더욱이 산서성 영석(山西省 靈石) 부근의 격전에서는 과병으로 잘 적군의 대부대를 격멸한 위훈을 세워 감장(感狀)까지 받고 김석원 부대의 용맹을 떨치었던 것이다. 그런데 김 중좌는 부내 재동(齋洞) 출생으로 육군유년학교(陸軍幼年學校)와 육군사관학
교(陸軍士官學校, 제27기)를 거쳐 육군보병학교(陸軍步兵學校)를 졸업한 후에는 중위(中尉) 시대부터 중좌가 되기까지 15년 동안 조선 제22부대에서 근무하였다. 그 동안 만주사변 당시에는 만주에 출정하여 공사(功四)의 영예를 받자왔다. 그리고 소화 14년(1939년) 1월 북지에서 개선하였다가 소화 16년(1941년) 3월 다시 북지〇〇방면에 출동하여 방금 대동아건설을 위하여 정신분투하고 있는 중이다. 더욱이 김 중좌는 근엄한 무인이고 가정은 순내지식인 가정으로서 유명한데 조선에 있을 때에는 반도민중의 황국신민화와 풍속의 개선, 문화향상 등을 위하여 노력하였고 한편 성남(城南) 중학을 설립하고 반도청년의 연성에 노력하였다.

우선 여기에 나오는 ‘조선 제22부대’라는 것은 용산 주둔 보병 제78연대를 가리키는 통칭호(通稱號)이다. 그리고 이 기사에 ‘15년’ 동안 보병 제78연대에서 근무하였다고 적어놓은 대목은 사실관계가 약간 다른 듯하다.

 

<매일신보> 1942년 2월 3일자에 수록된 김석원 부대장에 대한 ‘수훈갑’ 논공행상 관련기사이다. 오른쪽에 있는 사진은 ‘김석원 중좌’의 모습이고, 왼쪽 아래가 ‘처 서달순, 장남 김영철, 3남 김영국’의 모습이다. 아들들의 이름에 ‘영(泳)’이 들어간 것은 박영효(朴泳孝)에게서 따온 것이라고 한다.

 

용산 보병 제78연대에서 발행한 <만주사변출동기념사진첩> (1932)에 수록된 김석원 대위의 모습이다. 여기에는 그의 직책이 ‘제1보병 포대장’으로 표시되어 있다. (민족문제연구소 소장자료)

 

<매일신보> 1939년 4월 5일자에 수록된 매일신보사 주최 ‘김석원 소좌 강연회(경성부민관)’ 안내광고이다. 중일전쟁 당시 북지전선(北支戰線)에 무공을 세우고 귀환한 그는 이 행사를 계기로 전국의 군청 소재지를 거의 빠짐없이 돌면서 침략전쟁을 선전하고 신생활운동을 강조하는 강연회를 한동안 지속하였다.

 

김석원은 앞에서 소개한 장기형 소위와 일본육군사관학교(제27기)를 함께 졸업하였으며, 이때 그의 첫 부임지는 일본 와카야마(和歌山)에 주둔한 보병 제61연대였다. 그러다가 중위의 신분으로 용산에 주둔한 보병 제78연대로 전속되어 온 것이 1919년 8월 21일의 일이었다.

 

이와 관련하여 김석원이 남긴 <노병(老兵)의 한(恨)>(육법사, 1977)이라는 자서전에는 용산으로 전출(轉出)을 오게 된 과정이 두어 쪽에 걸쳐 언급되고 있다. 여기에 서술된 내용에 따르면 와카야마 보병 제61연대에 근무할 당시 자신이 속한 부대의 최고지휘관인 제4사단장 우츠노미야 타로(宇都宮太郞) 육군중장과 안면이 생겼고, 때마침 그가 제9대 조선군사령관(재직 1918.7.24~1920.8.16)으로 옮겨가게 되자 휴가차 귀향(歸鄕)할 때를 틈타 그에게 특별히 부탁하여 조선으로 근무지를 옮길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 이후 김석원 중위는 1940년 1월에 후쿠야마(福山)에 주둔한 보병 제42연대로 전속(轉屬)될 때까지 무려 20년이 넘은 긴 세월을 오롯이 용산 주둔 보병 제78연대에서 근무했던 것으로 확인된다. 조선 출신 일본군 장교라고 해서 자신의 근무지가 반드시 조선으로 배치되는 것은 아닌 상황에서, 더구나 이토록 장기간 동일한 부대에서 남아 있는 것 자체가 매우 드문사례에 속했다. 그러니까 김석원이라는 존재는 용산의 주력부대인 ‘보병 제78연대’에서 글자그대로 산전수전(山戰水戰)을 다 겪은 ‘터줏대감’에 다름 아니었다. 그는 이곳에서 대위(1925년 8월)를 거쳐 소좌(1934년 3월)에서 중좌(1938년 9월)로 거듭 진급했을 뿐만 아니라 만주와 중국으로 출정하여 거듭 자신의 무공(武功)을 쌓았으니, 그것이야말로 전형적인 친일군인의 길이기도 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의 행적을 살펴보고자 자서전을 훑어보는 와중에 그가 느지막이 이러한 책을 남기는 뜻을 밝히는 대목에서 다음과 같은 구절이 포함된 것이 퍼뜩 눈에 띈다. …… 그렇다고 해서 내가 걸어온 생애가 타의 모범이 될 정도로 무슨 큰 공적이 있어서가 아니다. 또 국가나 민족을 위하여 남이 본받을 만한 일을 한 것도 아니다. 어쩌면 그 반대일는지도 모른다. 사실 나는 그동안 내가 살아온 80여 년 간의 뒤를 돌아다보면 아무래도 잘한 일보다는 잘못한 일이 훨씬 많은 것 같고 남에게 환영받을 일보다는 오히려 남에게 환영받지 못할 일이 더 많이 한 것 같다. 어떤 경우는 무지했던 탓으로 또 어떤 경우는 올바른 인생관과 올바른 세계관을 못 가졌던 탓으로 그동안 내가 저지른 잘못은 많다 할 것이다. 그 중에서도 이유야 어쨌든 일제 식민지시대에 오래도록 일본군인 노릇을 했다는 것은 나의 생애 중에서 큰 불명예라 생각되는 것이다. 이것으로 그가 일본군인의 노릇을 했다는 것을 스스로 큰 불명예로 여긴다고 생각했다는 점은 분명히 확인되지만, 이만한 정도의 언급이라도 남긴 이가 그리 많지는 않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그를 일컬어 친일행적을 참회한 인물로 받아들여야 할는지는 여전히 판단이 알쏭달쏭하기만 하다.

목, 2020/12/03- 0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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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원회원 마당]

이육사의 삶과 문학

김유 중국 광동지부장

 

한복을 입은 이육사 선생(앞줄 오른쪽)의 젊은 시절 모습. 뒷줄에 한복 입은 이는 바로 밑의 동생인 이원일 선생이다. 이육사문학관 제공

 

군자마을에서 하루를 보내고 차는 큰 길로 나와 안동호를 옆으로 끼고 달렸다. 마을의 방주라고 일컬어지는 친구는 몸이 불편한 나를 위해 고가(古家)의 전통주택임에도 화장실이 옆에 붙은 큰 방을 준비해 두었다. 그리고 새벽 3시까지 그동안 밀린 이야기로 분주하였다. 늦잠을 허용하지 않은 한국식 전통고가에서 아침 일찍 일어난 나는 벌써 일어난 그의 연락을 받고 식당으로 향하였다.
어젯밤 내내 울었던 뒷산의 소쩍새 소리는 친구를 오랜만에 만나는 즐거움과 함께 나를 알 수 없는 깊은 내면의 세계로 이끌어 갔다.
그리고 어젯밤 친구와 헤어질 때 툇마루에 서서 내려다본 안채 마당은 쏟아지는 달빛으로 환하였다. 정적으로 싸인 한밤중의 고택, 느껴지는 세월의 중압감, 까맣게 비쳐주는 뒷산의 산그늘은 지금이 삼경이고 이육사가 그의 수필에서 말한 것처럼 삼태성(三台星)이 은하를 건너가는 때이기 때문에 그렇게도 밝았을까. 애끊는 소쩍새 울음소리는 어쩌면 저 뒷산을 경계로 육사의 따님 이옥비 여사와 같이 들었는지도 모른다. 지리적 위치로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기실 안동의 유림은 독립운동의 중심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지만 또한 공산주의운동의 핵심지역이기도 하였다. 독립운동가가 많다는 빛만 있는 것은 아니다. 안동은 또한 종놈들은 절대 인정할 수 없고 전통을 무시할 수 없다는 위정척사운동의 중심이었다. 그들은 보민단을 조직하여 동학을 반대하였다. 그러면서도 나라가 어려울 적에 의병이 가장 많이 나온 것도 이 지역이니 아이러니한 일이다. 무언가 이율배반적인 요소를 간직하고 있으면서도 할일은 하는 곳이 안동이 아닐까. 동학을 반대하면서도 노비들을 풀어주고 전답들을 무상으로 나누어 주며, 심지어는 공산주의운동마저 횡행했던 곳, 그곳이 안동이다.
이육사는 1904년 5월 18일 안동시 도산면 원촌리 881번지에서 태어나 1944년 1월 16일 새벽 일본 영사관이 운영하는 중국 베이징 동창후통 지하 감옥에서 순국하였다. 마흔 살에 죽음을 맞이하게 될 때까지 열일곱 번 일제에 의해 구금되었다. 그때마다 그를 기다리는 것은 모진 고문이었으나 그는 한번도 투쟁을 멈추지 않았다. 이육사는 최후의 순간에도 일제 감옥 안에 있었으니 결국 반제국주의, 반식민주의 항일해방투쟁의 가시밭길을 불사신으로 살다가 순국한 것이다.

이육사는 보수적인 집안의 환경에서 자라났으나 정신적 지주였던 할아버지인 치헌공 중직은 동학을 반대하는 여느 유림과는 달리 노비문서를 불태우거나 노비들에게 토지를 일괄 무상분배하여 주기도 하였다. 또 이육사 본인은 사해동포를 주장하는 레닌을 숭상하고 일본과 화평을 희망하는 장개석을 맹렬히 비난하였다. 성격이 순결하고 고식적이어서 국민당 돈을 받아서 사회주의운동을 하는 김원봉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래서 나는 그가 의열단의 일원이 아니었다는데 동의한다. 역사는 추론을 떠나 있는 그대로 쓰여야 하며 신화에 의지하여서도 아니 된다.
이육사는 1933년 남경에 있는 조선혁명정치군사간부학교를 졸업하였다. 졸업식에서 그가 기획한 연극 <지하실>이 무대에 올랐다. 잠시 <지하실>의 내용을 보면, 노동운동에 있어서 노동자들의 각성을 말하고 공산주의사상을 이야기한다. 즉, “마침내 공산제도가 실현되어 토지는 국유로 되어서 농민에게 공평하게 분배되고, 식당 일터 주거 등이 노동자에게 각각 지정되어 완전한 노동자 농민이 지배하는 사회가 실현되었으므로 그들은 크게 기뻐하여 ‘조선혁명 성공 만세’를 고창하고 폐막하였다.” <지하실>에서 이육사는 극본을 썼을 뿐이 아니라 직접 배우로 출연하기도 하였다.
이육사는 모두 6형제였다. 자신은 둘째이고 그 아래아래 동생은 이원조로서 동경법정대학 불문과를 졸업한 시인이며 평론가였다. 이원조는 이육사의 유고를 편집하여 1946년 <육사시집>을 내었고 감동적인 평문을 쓴 바 있다. 그는 박헌영을 따라 1947년 말에 월북하였다. 1953년에 남로당 숙청 때 투옥되었으며 1955년에 옥사하였다고 알려져 있다. 문제는 그러했던 그를 우리가 어떻게 받아들이는가에 있다. 해방 후의 어지러운 상황이라든지 반민특위의 좌절 그리고 연좌법의 실시 하에서 육사라면 어찌하였을까. 어쩌면 그가 동생과 같이 월북하지는 않았을까. 차라리 해방되기 전에 순국함으로써 그 이름을 지금까지 아름답고 고귀하게 보존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멀리 갈 것도 없이 하나 남은 혈육 이옥비 여사의 겪을 수 있는 것은 모두 겪었다고 하는 이야기로 이해가 간다. 한국을 떠나야만 했던 개인적인 슬픈 이야기 그리고 아버지의 칼 같은 성격으로 외롭고 힘들어 했던 친어머니와 외갓집 식구들, 해방 후 극심한 이념의 대립, 독립운동가의 자손임을 숨기고 살아온 세월들, 청소부 그리고 외제 담배장사, 한때 순경만 보면 가슴이 덜컹했던 시절, 남과 북으로 갈라지고 지금도 강대국의 앞잡이가 되어 서로 총부리를 겨누는 원한의 증폭, 그러다가 그녀는 아버지가 더 큰 대의를 위해 하나 있는 목숨을 바쳤으며, 삶과 죽음은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함께 있는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고 한다. 성경을 세 번씩이나 필사하고 나서야 삭일 수 있었던 아픔이었으리라.
마찬가지로 육사라는 존재는 그의 유고시 ‘광야’의 광(曠)이 넓은 광(廣)이 아닌 빌 광(曠)이며 ‘모든 산맥’의 맥은 줄기 맥(脈)이 아니라 마주볼 맥(脉)이라는 것도 우리는 알아야 한다.
“광야(曠野)….모든 산맥(山脉)들이/바다를 연모해 휘달릴 때도/차마 이곳은 범하던 못하였으리라.”
평등한 사회를 꿈꾸었던 시대의 지성, 희생양으로서 그가 사회주의를 환영하고 공산주의를 공부하였다는 것도 우리는 인정해야 한다. 그래야만 나중에 실망하는 일이 없게 된다. 우리 스스로 이제는 사실을 사실대로 인정하는 것이 진정한 자존심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수, 2021/07/28- 18: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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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원회원 마당]

 

식민지역사박물관 관람을 마치고

김선태

효창공원에서 백범묘소, 삼의사 묘소와 임정요원 묘소까지 둘러보면서 참배도 하고나자, 이제 우리 일행을 식민지역사박물관으로 안내하였다. 우리 역사의 아픈 매듭이자 가장 슬픈 역사가 되어야 할 일제침탈의 역사를 살피고 그 아픔을 새겨 민족의 앞날을 밝히자는 뜻의 박물관이지만, 참으로 슬픈 ‘식민지’라는 이름이 미리 그 아픔을 전달하고 있었다.
식민지역사박물관을 찾아가는 길은 대로변도 아닌 이곳 청파동 골목길 중에서 중앙이라 할 숙대앞길에서 다시 골목길로 들어서서도 한참이나 더 들어가야 하였다. 슬픈 이름의 박물관이 위치까지도 ‘이건 아닌데…’하는 마음이 절로 들게 만들었다. 멀리에서도 알아볼 수 있을 만한 ‘식민지역사박물관’이란 간판을 보고 반가운 마음으로 걸음을 재촉하였다.
입구에 들어서는데 눈길을 사로잡은 동판에는 이 식민지역사박물관을 건립하는데 도움을 주신분들의 이름을 새긴 것으로 모두 10개 안팎이나 걸려서 여기 이름을 올리지 못한 나에게 ‘부끄러워하라’고 소리치는 것만 같아서 위압감을 주었다. 박물관으로 들어서기 전에 입구 한 켠에 ‘반민특위터’를 알리는 표지석이 전시되어 있었다. 너무 뜻밖이어서 의아하였는데, 본래 있던 자리에 새로 호텔건물을 짓고 있는데, 그래도 다행스럽게 공사장에서 연락해주어서 여기에라도 보관하고 있는 것이라며, 호텔이 완성되면 다시 제자리로 돌려보내고 싶지만 과연 받아줄 것인지 의문이란다. 호텔이라면 외국 손님들이 드나들게 되고 거기엔 일본사람들도 있을 텐데 호텔 측에서 리스크를 안고 이 표지석을 세워주려 할는지 걱정이란다. 국가에서 지정하여 세우면 모르지만 학술단체인 민족문제연구소에서 그럴만한 힘이 없어서 걱정이란다. “보훈처나 문광부 같은 정부기관에서 추진해 주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방학진 님의 간단한 박물관 소개와 민족문제연구소 직원들의 소개를 한 다음에 “박물관이 협소하여 한꺼번에 많은 인원이 함께 관람이 어려우므로 반으로 나누어서 일부는 먼저 관람을 하시고 절반은 여기에서 잠시 대기하고 계시다가 관람을 하시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관람을 하실 분은 손들어 주세요.” 하
여 먼저 출발하였다. 나는 손자를 독촉하여 얼른 우리도 따라 가자고 하여 첫 해설사를 따라 나섰다. 얼른 마치고 국립중앙박물관의 석조물 정원에 있는 <홍제동 5층 석탑>을 찾아가서 사진도 찍고 자료를 수집하여 와야 하기 때문이었다. 관람 순서에 따라 중점적으로 해설해주셨지만 40분 정도면 자세한 해설의 1/3 수준이므로 무척 바쁘고 하고 싶은 말을 다 할 수 없는 시간이었다.
순서에 따라 1부 일제는 왜 한반도를 침략했을까라는 전시장에서는 제국들의 전쟁터가 된 한반도라는 패널을 중심으로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의 상황 들을 해설해주는데, 러일전쟁시에 독도가 중요 거점이 되어서 러시아 극동함대를 일본이 격파하였다는 전황을 이야기 해주었다. 재작년 11월 동북아역사재단에서 모집하는 독도체험관 해설사 교육을 받고 울릉도와 독도를 답사할때에 일본이 러일전쟁 시에 울릉도에 설치하였던, 4개의 일본해군 관측소 <석포전망대 외3>가 있어서 러시아 함대의 움직임을 몰래 관측하였다는 곳들을 돌아보았는데, 독도에도 이런 관측소를 마련하여 러시아 함대를 공격하는데 큰 힘이 되었다고 들었다. 이어서 조선총독부에 관한 자료들이 있었고, 특히 우리 국민을 괴롭힌 새로운 지배자, 조선총독에 관한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다음 코너에서는 <총칼로 누르고 동화와 차별로 어르다>라는 주제로 어린이들의 놀이판으로 만든 조선 침략의 길, 그리고 일본화하기 위한 놀이판 등까지 수집이 되어 있었다. 마지막 코너 <빼앗긴 들, 황폐한 삶>에서는 일본의 수탈을 알리는 여러 가지 자료들이 있어서 한참을 바라보게 만들었다. 마지막으로 ‘1평으로 체험하는 식민지 : 학교 · 감옥’은 독립문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의 지하에 있는 고문과 형틀 등을 전시한 곳에서 보았던 작은 형틀(1인감옥 ; 서 있게 만든 것과 쭈그려 앉게 만든 것)을 생각케 만들었다.
2부 일제의 침략전쟁, 조선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라는 전시장에서는 맨 먼저 우리 민족을 배반한 대표적인 친일언론의 민낯을 보여주는 코너로 <‘천황’을 위해 기쁘게 목숨을 바쳐라>라는 주제로 그들의 친일행적을 전시하여 두었다. 다음으로 <숟가락 하나도 남김없이 총동원하라>는 코너에서는 일본이 전쟁 물자를 대기 위해 밥그릇까지 모두 빼앗아 갔던 이야기이다. 이때 우리 할아버지께서는 놋그릇들과 먹을 식량을 지붕 위에 멍석을 깔고 용머리를 들추고 지붕의 이엉을 파내고서 그곳에 쌀과 그릇들을 감추시었다는 지혜로운 분이셨다. 그리하여 그릇들을 지키셨고, 10여 명이나 되는 가족들이 굶주리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었단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또 하나 독립기념관을 개관할 때에 내가 <공출보국(供出報國)>이라는 글씨가 써진 사기 밥그릇을 기증하였었는데, 갑자기 그 그릇 생각이 났다. 놋쇠 밥그릇을 빼앗아 가고 대신에 밥을 담아 먹으라고 준 그릇이었다니 말이다. 다음 <청춘만장 앞세우고 끌려간 사람들>과 <돌아오지 못한 영혼, 남겨진 사람들>에서는 일본군으로 징병되어 끌려가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전시되어 있는데, 이때 “살아 돌아오라는 염원을 담아 입혀 주었던 옷에 새겨진 글씨 무운장구(武運長久)와 천인침(천사람이 한 뜸씩 바느질을 한 허리띠)을 만들어서 꼭 살아 돌아오라는 염원을 담아 보냈지만, 수없이 사라져 버린 우리 젊은이들의 모습과 유품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3부 한 시대의 다른 삶 – 친일과 항일라는 전시장에서는 이 코너는 민족문제연구소에서 펴낸 웹툰 책의 제목과 같은 것이어서 일단은 대충 둘러보며, 같은 시대에 부끄러운 친일을 하고 살아생전 호사를 누리던 친일파들과 끝까지 지조를 지키며 나라를 위해 몸을 바친 구국의 투사들의 삶을 비교하고 있다. <망국의 한 독립의 꿈>에서는 독립운동을 한 의사, 열사, 지사들의 삶을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라를 팔아 부귀영화를 누린 그들>에서는 친일인명사전에 오른 사람들의 친일행각을 그리고 그들의 벼슬, 자손들의 대한민국에서의 출세와 권세를 부리며 살았던 자들을 소개하고 있다. <‘천황’의 신민으로 거듭난 그들>은 친일 행각으로 벼슬을 한 사람들과 작위를 받은 사람들을 보여주며 마지막으로 <고백과 성찰을 위한 기록, 친일인명사전> 편에서는 인명사전의 기초 작업을 하셨던 임종국 선생 사진과 그 육필원고가 전시되어 있어서 그 연구자의 엄청난 노력에 머리가 숙여졌다.
4부 과거를 이겨내는 힘, 지금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전시장에서는 <반민특위의 좌절, 친일파의 귀환>에서 친일파들의 재등장의 역사를 보여주며, 입구에 있던 반민특위의 터조차 지키지 못하고 있는 대한민국의 현실을 깨닫게 해주었다. <분단과 독재, 지연된 역사정의>에서는 친일정권의 40년 집권의 흔적과 그런 사이 우리 민족정신의 망가짐을 일깨우고 있었고, <공감과 연대의 힘> <나는 싸우고 있다> 등에서는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일깨우고 있다. 중간에 영상으로 보여주는 <내가 역사의 증인이다>는 수많은 영상을 교대로 보여주고 있는데, 가장 관심이 가는 것들은 <살아있는데 야스쿠니에 합사된 강제동원피해자, 故 김희종 할아버지>와 <강제동원 피해자 유족 이희자 “김학순 할머니 이야기”> 그리고 일제와 끝까지 싸우고 계시는 <일본제철 재판 원고 故 김규수 할아버지>, <야하타 제철소 노무동원 주석봉> 등이 눈길을 끌었다, 물론 영상을 골라서 볼 수는 없었고, 시간에 쫓겨 다 보고 있을 시간도 없어서 차분하게 하루쯤 잡아서 보아야겠다고 다짐하였다. 장손 윤재가 유난히 관심을 가지고 해설을 열심히 들어 주어서 고맙고 감사하였다.

※ 6월 후원회원 초대의 날 참석 후기로 김선태 회원의 네이버 블로그 ‘70대 수퍼맨의 아름다운 노년’에 실린글이다. https://blog.naver.com/ksuntae/222408001759 김선태 회원은 78세로 이날 손주와 참석했다. 디지털문학 전자출판사를 운영했고 노년유니온 위원장, 국가인권위원회 노인인권지킴이 등을 역임했다.

토, 2021/08/28- 0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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