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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량리 떠나던 날, 청파에서 가꿀 새 꿈을 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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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량리 떠나던 날, 청파에서 가꿀 새 꿈을 꾸다

익명 (미확인) | 목, 2018/01/25- 17:15

기고

청량리 떠나던 날, 청파에서 가꿀 새 꿈을 꾸다

김승은 자료실장

연구소가 드디어 청량리에서 청파동으로 이전을 마무리했다. 2000년 3월부터 청량리 떡전교 사거리 금은빌딩에 터를 잡았으니 거의 18년 만에 새 둥지로의 이사였다. 그 사이 10명에 불과했던 상근자가 4배 가까이 늘었고, 3층 한켠만 겨우 차지하던 살림살이는 5층과 지하, 2층 일부까지 다 채울 정도로 커졌으니 이번 이사에 만만치 않은 준비가 필요했다.
먼저 사무실 이사 전문 업체를 선정하고 체계적인 이사 계획을 세우는 한편, 이전해 갈 서현빌딩의 안전진단과 시설점검을 진행했다. 2006년에 준공한 건물치고는 관리가 비교적 잘 된 편이었지만 손볼 데가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 꼼꼼한 건물 점검과 필요한 보수공사는 최규필 회원이 전적으로 맡아 도와주었다. 개인적으로도 몇 번이나 청파동에 찾아가 건물을 둘러보고 관리 상태를 돌아보는가 하면, 공사이력을 알아내고 가장 저렴하게 보수공사를 할 수 있도록 주변 지인들을 총동원해 주었다. 그 사이 곳곳에 쌓여 있던 묵은 짐을 정리하는 일도 만만치 않았다. 수장고에 보관했던 유물과 고도서들은 직접 확인하고 포장해야 해서 이사 두 달 전부터 작업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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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유물과 고도서를 포장하는 상근자들 3 포장된 유물상자로 가득 찬 청량리 사무실 임시전시실

상근자들은 보관・활용할 사무집기와 폐기물품을 점검하고, 이전하는 새 공간의 활용과 공간 배치 등 모든 이전 업무에 각자의 힘과 지혜를 모았다. 사무실 집기들을 점검하다 보니 갖가지 모양의 책상과 책장, 의자들이 수두룩했다. 문 닫는 사무실만 생기면 가서 주어다 모았기 때문에 통일감이란 ‘1’도 찾아보기 힘들었다. 짝 안 맞는 낡은 집기들이 우리 연구소가 걸어온 땀과 눈물의 험로를 고스란히 보여주는 지도 모른다. 손때 묻은 책장과 책상들을 차마 버릴 수가 없어서 거의 다 짊어지고 왔다. 서현빌딩에도 이전 건물주가 사용하던 붙박이장과 수납장이 많았지만, 예전 책장과 사무집기들은 우리가 새로 쓸모를 찾기도 하고, 필요한 단체가 있으면 기증도 하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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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전체 이사 계획과 일정을 점검하는 상근자회의 2사무집기 점검과 배치를 담당했던 ‘떡전용역팀’ 회의

 

서현빌딩에서도 새 살림살이가 들어갈 공간 정비가 진행되었다. 이례적인 한파가 시작된 12월 1일부터 5층 내부 공사, 옥상 철거와 보수공사를 시작했다. 4층에는 작은 공간을 효율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이동식 서가(모빌랙)를 설치했다. 각 층 전구는 모두 LED로 교체했다. 신용준 회원이 통 크게 후원해 주었고, 직접 시공까지 맡았다.
이삿날이 가까워 올수록 기온은 더 내려갔다. 이사 전에 여기저기 보수공사를 해야 했지만, 날씨 때문에 제대로 진행하기가 어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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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강의실 공사를 맡아 준 디자인 쏨니엄 관계자들과 회의 4옥상에 방치된 시설물 철거 공사 5강의실 내부 공사 6새로 설치된 이동식 서가 7신용준 회원이 건물 전체 조명을 LED로 교체하고 시공까지 맡아주었다.

 

쏜살같이 이삿날은 다가왔고 아직도 정리가 덜 된 짐이 산더미였다. 이사를 하루를 앞두고 4일간 이어질 이사 일정에 맞춰 역할을 분담하고 마지막 점검을 했다.

21스프레이 테러로 불그스름하게 물든 연구소 현판도 챙기고, 먼지 쌓인 연구소의 옛 추억들도 차곡차곡 상자에 담았다. 책이 예상보다 너무 많았는지 이사업체는 지하서고에 자동 밴딩 기계까지 설치하고 이틀 전부터 포장작업에 돌입했다. 그러는 사이에도 사무실은 일상 업무를 진행해야 해서 이사 전날 새벽까지 개인 짐을 싸는 상근자들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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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이사 이틀 전부터 책 포장에 들어간 지하서고 2연구소 소장자료 이전 준비를 마치고 이사 전날 늦게까지 개인 짐을 싸는 자료실 상근자 3통합 재단 운영 방침을 둘러싸고 새벽1시를 넘겨 이어진 실무회의. 왼쪽은 내일을여는역사재단 신용옥 상임이사, 맞은 편은 조세열 사무총장

 

드디어 12월 15일. 본격적인 이사를 시작했다. 하필 이사 첫날은 71년 만에 가장 빨리 한강이 얼었다는 바로 그날이었다. 추위도 큰 난관이었지만 역시 가장 큰 문제는 지하 서고였다. 꺼내고 꺼내어도 책은 여전히 서가에 가득했다. 다른 층 이전이 줄줄이 늦어졌다. 3층에 쌓인 짐을 건물 밖으로 실어내는 데만 이틀이 걸렸다. 금은빌딩에서 완전히 짐을 비우는 데만 꼬박 5일이 걸렸다. 게다가 이사 마지막 날이었던 12월 18일에는 대설경보가 나올 정도로 폭설이 내렸다. 이사는 또 다음날로 연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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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2월 12일, 박물관 건립 모금에 초석을 놓아 주신 송기인 신부님 등 과거사 관련 위원회 전 위원장님들이 서현빌딩을 방문해 격려해 주셨다. 53층 사무실 이전을 돕는 이용창 편찬실장과 유은호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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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금은빌딩 옛 사무실과 구분이 안 갈 정도로 꽉 찬 새 사무실 2한 달 가까이 이어진 이사에 지친 신다희 사무국원 3서현빌딩에서 다시 시작된 책 정리 4연구소에서 무슨 일이든 팔 걷고 나서는 김병구 회원팀장

 

장장 일주일이 넘게 걸린 이사는 12월 20일에야 마무리되었다. 친일인명사전 편찬의 산실이자, 민족문제연구소가 회원들과 가장 많이 만났던 3층 연구편찬실과 사무국, 친일독재미화 교학사 교과서와 국정교과서 폐기 운동의 본부 역할을 했던 2층 교육홍보실,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의 꿈을 품고 도전했던 5층 역사자료관과 연구소 숨은 보물창고인 지하 서고까지 깨끗이 비웠다. 상근자들의 끼니를 해결해 주신 주변 음식점 사장님들, 배달원 분들, 늘 급하게 주문해도 신속히 작업해 주시던 복사집, 인쇄소 분들께도 일일이 작별을 고하고 청량리를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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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탁구대 설치를 고민할 정도로 넓게만 느껴졌다던 금은빌딩 3층 6국정교과서 폐기 운동의 산실 2층 교육홍보실 7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의 시범 공간이었던 5층 임시전시실

 

사무실 이전 와중에도 워싱턴·뉴욕·LA 등 미주지부 창립을 위한 순회 강연집회, 항일음악 토크콘서트와 음악회, 박정희 동상 건립 반대 집회, 친일문학상 반대 집회, 서울시민대학 강좌, 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 아산 유해 발굴 시굴조사, 팟캐스트 시즌2 녹화 등 다양한 사업을 이어갔다. 덕분에 상근자들이 돌아가며 몸살과 독감에 시달렸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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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내부 철거공사 후 마지막 짐을 내리는 금은빌딩 2듬직한 어깨, 친절한 미소로 이사를 기분 좋게 마무리 해 주신 ‘일사천리’ 직원분들 310년 넘게 야스쿠니재판을 지원해 온 일본 변호인들이 금은빌딩의 마지막 추억을 남겼다.

 

새 건물로 이사를 가니 챙길 일도 참 많았다. 고장난 문고리나 전선 공사는 물론 변기 커버도 직접 갈고 쓰레기 분리수거, 출입문 보안까지 모든 것을 점검하고 챙겨야 한다. 동파에 터진 수도 배관을 보며 속 태우는 사무국이나, 자동 개폐식 출입문에 아직 적응 못하는 상근자들, 꽂고 꽂아도 산적한 책들에 허리가 휘는 자료실 인턴들, 1, 2층이 아직 공실이라 고스란히 올라오는 냉기에 발을 동동거리는 3층 연구원들 모두가 아직은 이 공간이 낯설고 서툴기만 하다.
하지만 지난 25년간 한결같은 회원들의 성원과 지지로 만들어진 새 둥지이니 그 안에서 새로 품은 꿈만큼은 창대하다. 연구소는 우리 사회의 비상식・부정의와 싸워 온 지난 25년을 발판삼아 상식과 정의가 뿌리내릴 수 있는 역사운동의 든든한 터전을 이곳 용산 청파동에서 만들어 나가고자 한다. 내일의 역사를 여는 새로운 길에 회원 여러분들이 늘 함께 해 주시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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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미리 보는 식민지역사박물관 기획전시 │ 조선 동아 적폐언론 100년을 다시 본다(1)

항일 민족지의 출발은 조선・동아가 아니라
조선독립신문이었다

김승은 학예실장

민족문제연구소와 식민지역사박물관은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창간 100년을 맞아 기획전을 마련했다. 영광과 오욕의 100년 가운데 ‘오욕’이 사라진 100년을 비판하기 위해 기획됐다. 원래 두 신문의 창간일에 맞춰 3월에 개막하고자 했으나 코로나 19 감염병 확산으로 박물관을 잠정 휴관함에 따라 전시를 8월로 연기했다. 민족사랑에 3회에 걸쳐 미리 전시회의 주요 내용과 자료를 소개한다.

 

3‧1운동 101주년인 올해 우리나라 거대 두 신문사가 창간 100주년을 맞았다. 조선일보는 지난 3월 5일 100주년 특집호 표지에서 “조선일보의 역사는 우리 근현대사의 거울”이었고, 조선일보는 “일제에 저항하며 민족혼을 일깨웠”다고 자평했다. 다음 100년에도 “사실 보도라는 저널리즘 본연의 가치를 지키며 정론의 길”을 걷겠다는 다짐도 실었다. 동아일보는 4월 1일 창간 100주년 사설을 통해 “무엇이 진짜 뉴스인지 궁금할 때면 눈을 들어 동아일보를 보라”고 말할수 있는 기준이 되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과연 두 신문이 이렇게 당당하게 과거 100년에 이어 다음 100년의 존재가치를 말할만한 자격이 있을까. 많은 사람들이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적폐의 대명사, 살아 있는 언론권력으로 ‘검언유착’ ‘권언유착’을 일삼으며 한국사회에 큰 해악을 끼쳐온 대표적인 신문이니 말이다. 100주년 기념사가 사과와 반성이 아닌 자화자찬 일색인 것은 놀랍지도 않다. 현재도 매 시각 쏟아내는 기사마다 의혹만 부풀리고, 갈등을 부추겨 정치쟁점화하고, 인신공격에 인격살인도 서슴지 않으며, 사실 왜곡을 확대 재생산해 독자들의 비판적 독해력을 마비시키고 있다. 진실은 주장에 갇히고 정의는 공허한 외침으로 그치는 일들이 최근에 더욱 자주 목격된다. 조선‧동아 두 신문은 반민주적 반인권적 언론일 뿐 아니라 반역사적 기득권을 토대로 여전히 반역사적 범죄를 저지르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뉴스타파 <조동(朝東)100년 : 두 신문 이야기>

 

동아투위‧조선투위 등 57개 언론‧시민단체는 이미 작년 9월 ‘조선 동아 거짓과 배신의 100년 청산 시민행동’을 꾸렸다.
적폐언론 청산을 위해 <조선‧동아 거짓과 배신의 100년, 최악 보도 100선> 발간, ‘조선일보100년’ 전시, 아카이브 구축 등 다양한 활동을 펼쳐왔다. 우리 연구소도 지난 100년 간 두 신문사가 자의적으로
왜곡하거나 은폐한 오욕의 역사를 되짚으며 그들 자신이 써낸 기사를 통해 그들의 실체를 밝히는 두 가지 기획을 준비했다.
첫 번째는 뉴스타파와 공동 기획한 ‘조동(朝東)100년: 두 신문 이야기’이다. 조선일보 창간일인 3월 5일부터 동아일보 창간일인 4월 1일까지 총 13편의 연속보도 가운데 연구소는 일제강점기를 다룬 6편의 기획과 제작에 참여했다. 우리 연구소와 역사디자인연구소, 뉴스타파는 두 신문의 창간부터 1940년 8월 폐간까지 기사를 시기별로 분석하고, 그 가운데 특히 1937년 이후 일제 침략전쟁과 총동원체제에 두 신문이 어떻게 적극적으로 협력했는지 추적했다.
두 번째는 식민지역사박물관과 함께 준비하는 기획전시이다. 두 신문사는 100주년 기념사에 여전히 ‘민족지’라는 타이틀을 자신의 대표적인 수식어로 내걸었다. 100년이라는 긴 역사 속에 그들이 민족사에 기여한 ‘자랑거리’가 왜 없겠는가. 그러나 두 신문사는 1937년 이후 노골적인 일제 협력과 침략전쟁 미화에 지면을 할애한 전쟁부역언론이었다는 사실만으로도 마땅히 해방 후 철저히 청산되었어야 할 언론사였고, 사주들이었다. 그런데도 두 신문사는 부역의 역사를 은폐하고 온전히 ‘민족지’로 다시 포장해 과거를 날조하려는 의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이번 기획전시는 그들이 덧발라온 분칠을 벗겨내고 자신들이 내뱉은 기사를 통해 민족을 배반한 거짓의 민낯을 드러내고자 한다.
기획전시는 경술국치 110년을 맞는 8월, 그것도 일제의 폐간 농간에 순응해 마지막 신문을 발행한 8월 11일에 개막할 예정이다. 개막을 앞두고 앞으로 3회에 걸쳐 <민족사랑> 지면을 통해 기획전의 일부 내용을 미리 소개한다.

 

누가 ‘민족지’인가

이번 호에 소개할 첫 번째 주제는 “과연 두 신문은 민족지인가”이다. 창간 65주년을 맞았던 1985년, 두 신문은 꽤 떠들썩하게 상대방 신문을 “친일신문”으로 공격한 적이 있다. 이른바 ‘민족지 논쟁’으로 불린 이 사태를 기억하는 분들도 많을 것이다. 모르는 분들은 조선일보와 동아일보가 100주년을 맞아 구축한(!) 디지털아카이브에서 관련 기사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1985년 4월 1일자 동아일보가 “조선일보는 실업신문임을 위장한 친일신문”이라고 첫 포문을 열자, 조선일보는 4월 14일자 사설에서 “반일, 친일논쟁이 격화되면 궁극적으로 인촌 선생까지도 욕보이는 결과”가 될 것이라고 격앙된 반응을 보였다. 이에 동아일보는 4월 17일자 사보 「애독자 제현에게 알려 드립니다-동아‧조선 창간과 ‘민족지’ 시비에 대하여」에서 “조선일보가 친일신문으로 창간된 것은 사실 기록에서 착오가 없는 것”이라며 물러서지 않았다. 조선일보도 공세에 나서 4월 19일자 사보 「우리의 입장-동아일보의 본보 비방에 붙여」에서 “식민통치의 가장 중추적 동맹군인 토착귀족 지주세력과 기성 친일언론인으로 혼성된 측에 허가된 신문이 동아일보”라며 “한일합방의 공로로 일본 후작의 작위를 받은 박영효가 동아일보 초대 사장”이었다고 반격했다. 또한 “민족사의 내측에 숨겨있던 친일 계보는 속속들이 파헤쳐야 한다”는 주장도 이어갔다. 참으로 놀라운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조선일보가 무려 35년 전에 ‘친일청산’을 주장했었다니 말이다. 물론 ‘민족지논쟁’ 이후에도 이들은 여전히 독재를 찬양하고 민주화에 역행하는 부역언론의 길을 걸었다. 특히 친일청산을 국론분열・친북용공으로 몰아세우는데에는 ‘일심동체’였다.

 

 

항일 민족 언론의 부활, 조선독립신문

그렇다면 이들이 자인한대로 두 신문사는 과연 얼마만큼 ‘친일’에 그 뿌리를 두고 있을까. 우리가 잘 알다시피 일제는 군대와 각종 식민지 악법을 내세워 식민지 조선인들의 손발을 묶어 놓았을 뿐 아니라, 모든 언로를 차단해 조선인들의 눈과 귀와 입을 막았다. 그러나 일제 무단통치에 대한 민중의 저항은 끊이지 않았고, 문명과 번영을 기약한 “한일병합”은 무력 탄압과 차별로 점철된 “강점”이자 “병탄”이었다는 사실을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일제 강점 후 9년 만인 1919년, ‘조선의 독립과 자주민임’을 외치는 3․1운동이 일어났다. 전국에서 터져 나온 만세운동의 열기는 일제의 탄압에도 반년 넘게 지속됐다. 혁명적 에너지는 이름 모를 청년 학생들이 한 장 한 장 만들어 배포한 지하신문들이 끌어 올린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3‧1운동은 독립선언서와 지하신문을 통해 전국으로 퍼져 나갔다. 일제 강점과 동시에 모든 민족 언론이 폐간됐지만 3․1운동을 계기로 우리는 다시 우리의 언론을 갖게 된 것이다.
그 가운데 가장 빨리 만들어진 지하신문은 바로 독립선언서와 함께 3월 1일부터 배포된 <조선독립신문>이다. 신문 체제를 제대로 갖추지 못한 호외 형태의 단면 인쇄지였지만, 항일 민족언론의 부활을 상징하는 신호탄이었다. <조선독립신문> 외에도 <국민회보> <신조선신문> <자유민보> <국민신보> <국민신문> <진민보> 등 약 30여 종의 지하신문이 1919년 내내 전국에서 발행됐다. 정확하게 말하면 일제 당국에 의해 ‘적발’돼 우리는 그 실체를 알 뿐이다.

 

「조선독립신문」 제1호, 1919.3.1(연세대학교이승만연구원 소장) 최초로 발간된 지하신문. 초기 천도교 계열의 신문 발행 관계자들이 모두 체포되자 9호부터는 이름 모를 후계자들이 발행을 이어갔다. 현재까지 43호와 호외, 국치기념호가 제작됐다는 사실만 알려져 있고 이 신문이 정확하게 몇 호까지 발행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출판물 차압의 건 보고 통보」 1919.4.23 (국사편찬위원회 소장) 일제가 출판법 위반으로 발매·배포를 금지해 압수 처분한 독립선언서와 지하신문의 목록들이다. 이 압수목록은 3•1운동 당시 얼마나 다양한 지하신문이 발행되었는지를 보여준다.

 

당시 발행된 항일 지하신문들은 조선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가 3‧1운동을 축소‧왜곡 보도하자 이에 맞서 만세운동을 확산시키고 독립의지를 불태우는 역할을 했다. 지하신문 <진민보>에 실린 신문의 역할은 식민지 조선인들이 바라는 민족 언론의 사명 그 자체였다.
“우리의 민족적 운동을 한껏 옹호하라, 우리의 운동이 안팎에서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신속하게 보
도하라, 그리고 조용한 가운데 나아가더라도 소리만은 벽력같이 크게 질러라.” 항일지하신문은 조선총독부뿐만 아니라 3‧1운동을 폄훼하고 비난하는 친일파에 대해서도 질책했다.
‘강제병합’에 앞장섰던 국적 이완용·송병준을 비롯해 일제 주구가 된 친일경찰과 헌병보조원들, 허위‧왜곡보도를 일삼았던 매일신보 기자 등 다양한 직업군의 친일파들을 비판했다. 또한 조선 독립을 부정하고 식민통치를 인정하며 자치를 주장하던 친일파에 대한 비판도 신랄했다. 대표적인 자치론자인 민원식에 대해 <조선독립신문>은 “부여족의 면피(面皮)로서 일본의 혼을 가졌다. 인류의 골격으로서 짐승의 심장을 가졌다”고 지적했다.

 

굴뚝을 만들어야

이렇게 3‧1운동의 의의를 전파하고 혁명운동의 기운을 고조시키는 조선인들의 자발적 언론운동이 활발해지자 일제 당국은 깊은 고민에 빠졌다. 조선총독부는 3․1운동을 미리 막지 못한 이유를 조선인의 민심을 파악할 조선인 언론의 부재에서 찾았다. 지하신문을 압수하고 탄압하는 것만으로는 한계가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일제는 신문발행을 허가해 조선인의 불만을 누그러뜨리는 한편, 이를 통해 민심을 살피거나 여론 조작의 수단으로 이용하려고 했다. 조선총독 사이토 마코토(齋藤實)와 함께 정무총감으로 부임한 미즈노 렌타로(水野鍊太郞)는 당시 조선의 긴장된 공기를 완화하기 위한 분출구, 즉 ‘굴뚝’을 만들어 준 것이 바로 조선어신문의 허용이라고 회고했다. 결국 3‧1운동으로 폭발한 독립의 열기는 지하신문을 통해 조선 민중의 의사를 적극적으로 표출하는 민족 언론의 부활을 이끌었으나 총독부가 정작 신문 발행을 허가한 대상은 친일파들이었다. 조선인 신문 발행 곧 언론의 자유를 허용하는 것은 ‘문화정치’의 상징과 같은 조치였지만 실상은 달랐다.

 

총독부가 발행 허가한 신문―조선일보 시사신문 동아일보

발행 허가를 받은 신문은 민원식이 주도한 국민협회의 시사신문, 친일단체인 대정(실업)친목회가 주도한 조선일보, 그리고 조선일보가 지적한대로 토착귀족 지주세력과 기성 친일언론인의 합작인 동아일보 세 신문뿐이었다. 앞서 지하신문들이 신랄하게 비판했던 민원식이 ‘동화주의’를 내걸고 참정권‧자치운동을 벌인 국민협회의 시사신문은, 민원식이 항일투사 양근환에게 암살된 후 자연스럽게 폐간됐다. 이후 조선‧동아 두 신문이 조선의 언론계를 대표하는 것처럼 인식되었다. 조선일보는 발행 허가를 받을 때 비정치적인 ‘실업계 신문’을 표방했다. 이를 주도한 면면을 보면 조선총독부가 시사신문과 함께 우군으로 인식하기에 충분한 인적구성을 가졌다.
조선일보 창간을 주도한 세력이 대정친목회였다는 사실은 조선일보 사사에도 간간히 밝혔지만, 발기인 39명 중 32명이 대정친목회 회원이자 임원이라는 것으로 봐도 분명하게 실체를 알 수있다. 대정친목회는 조선인 전직 관료와 조선귀족, 대지주, 실업가 등이 망라돼 내선융화운동을 주도한 조선 최대의 대표적인 친일단체였다.
이들은 3․1운동 직후 ‘자력으로 독립은 불가능하다’ ‘조선인은 실력을 길러야한다’며 일본 제국의 통치에 잘 따라서 산업 발달과 문화 향상을 이룰 것을 주장했던 인물들이다. 이들이 주도한 조선일보는 초기부터 ‘친일신문’으로 민중의 배격을 받았다. 그래서 초기 경영난을 극복하지 못한 조선일보는 극단적 변신을 꾀하기도 했다. 창간 초기 30건의 압수, 23회의 발매 반포금지, 2회의 정간을 받을 정도로 조선일보는 조선총독부의 탄압을 받았는데, 이는 당대 최대의 친일단체가 가장 탄압받는 ‘저항신문’을 발행한 꼴이다. 이에 대해 장신 박사는 <개벽> 제37호의 기사를 인용하며 그들이 ‘항일’ 기사를 게재한 이유는 경영난 타개를 위한 ‘판매 확장책’에 지나지 않는다고 평가했다.

 

동경유학생 등의 동아일보 「성토문」

 

그러면 “조선민중의 표현기관임을 자임”한 동아일보는 순항했을까. 최근 연구소는 1924년 일본 유학생 단체들의 동아일보 ‘성토문’의 원문을 입수했고 이번 전시회에 공개할 예정이다. 이 성토문은 이광수의 ‘민족적 경륜’에서 발단이 됐다. 1924년 1월 2일부터 6일까지 동아일보는 일제에 타협적인 정치운동을 주장한 이광수의 사설을 실었다. 즉각 동아일보에 대한 비난과 배척운동이 곳곳에서 일어났고, 멀리 도쿄의 조선유학생학우회 등 11개 단체도 ‘성토문’을 발표한 것이다. 이 성토문에는 동아일보를 향한 민중의 배신감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동아일보를 둘러싼 논란은 중국 동북지방의 조선인 사회까지 전파됐다. 민족지로서 자임하며 출발한 동아일보는 창간 4년 만에 김성수 일가에 장악당해 사익을 추구하는 언론사가 되어 가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오래된 신문이 아니라, ‘정론의 길’을 걷는 제대로 된 신문이다. 이들의 출발이 ‘친일’에 오랜 연원을 두고 있다는 사실을 이번 전시에서 분명하게 확인하게 될 것이다.

 

참고문헌
박찬승, 「3•1운동기 지하신문의 발간 경위와 기사내용」, <동아시아 문화연구> 44권, 2008
박용규, 「3•1운동기 항일지하신문의 친일파 비판」, <언론정보연구> 56권 4호, 2019
장신, 「1920년대 대정친목회의 조선일보 창간과 운영」, <역사비평>, 2010.8.
장신, 「1924년 동아일보의 개혁운동과 언론계의 재편」, <역사비평>, 2006.5.

화, 2020/05/26- 2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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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

경기도, 역대 도지사 친일행적 표시

 

경기도는 1월 9일 친일 행적이 확인된 역대 도지사 4명의 명단(구자옥, 이해익, 최문경, 이흥배)과 친일사실을 경기도 누리집에 공개하고, 14일에는 도청 신관 4층 회의실에 걸려있는 역대 도지사 액자 옆에 친일사실을 표기했다. 경기도 관계자는 “친일 행적을 했다고 해서 역대 도지사의 사진을 떼내는 것은 도지사를 지냈다는 역사적 사실을 부정하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며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내용을 요약해 인물 설명으로 달았다”고 말했다. 현재 경기도는 올해 친일을 목적으로 제작된 도내 유·무형 친일문화잔재와 활용 현황에 대한 전수조사를 진행하고 있다. 이 결과를 토대로 내년부터 본격적인 친일 잔재 청산 작업을 추진할 방침이다.

• 방학진 기획실장

목, 2020/02/20- 2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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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 비망록 55]

가토신사(加藤神社), 당고개에 터를 잡은 왜군장수의 추모공간
다치바나 조선주차헌병대사령관이 깊이 관여했던 신사의 건립과정

이순우 책임연구원

 

일반적으로 일제강점기 서울지역에 설치되어 있던 일제의 신사들을 얘기하면, 남산 왜성대에 자리한 경성신사(京城神社)와 남산 중턱 옛 한양공원 터에 들어선 조선신궁(朝鮮神宮, 1925년 10월 준공) 정도를 언급하는 것이 보통이다. 원래 경성신사는 1898년에 남산대신궁(南山大神宮)으로 설립되었다가 1913년에 경성신사로 개칭된 내력을 지녔으며, 이 안에 천만궁(天滿宮, 1902년 창립), 남산도하신사(南山稻荷神社, 1931년 창립), 팔번궁(八幡宮, 1931년 창립)을 섭사(攝社)로 거느리고 있었다.
그리고 1916년 5월 22일에 타니무라 요리타카(谷村賴尙) 외 69명의 출원(出願)에 따라 신사창립에 대한 조선총독의 허가를 받았는데, 이는 1915년 8월 16일에 조선총독부령 제82호 「신사사원규칙(神社寺院規則)」의 제정 당시에 덧붙여진 부칙규정에 따른 조치였다. 여기에는 “본령 시행 당시 현존하는 신사는 시행일(1915.10.1일)부터 5개월 이내에 신사창립의 허가수속을 할 것”으로 정하고 있었다.
그 후 경성신사는 1936년 8월 1일부터 국폐소사(國幣小社, 조선총독부가 관리비용 일체를 부담하는 신사)로 승격되었고, 이와 동시에 1936년 8월 11일에는 기존의 「신사사원규칙」을 폐지하고 조선총독부령 제76호 「신사규칙(神社規則)」이 새로 제정되었다. 이곳 경성신사에서는 ‘천조대신(天照大神, 아마테라스 오미카미)’, ‘국혼대신(國魂大神, 쿠니타마 오미카미)’, ‘대기귀명(大己貴名, 오나무치노미코토)’
, ‘소언명명(小彦名命, 스쿠나히코나노미코토)’을 제신(祭神)으로 삼았다.

대륙신도연맹(大陸神道聯盟)에서 엮어낸 <대륙신사대관(大陸神社大觀)> (1941)에 수록된 경기도 지역 신사(神祠) 목록이다. 가토신사와 한강신사를 비롯하여 신메이신사가 두루 나열되어 있다.

 

이밖에 경성신사의 뒤쪽에 자리하고 있는 노기신사(乃木神社, 1934년 창립)와 용산 일본군병영지의 후면 남산 기슭에 조성된 경성호국신사(京城護國神社, 1943년 창립) 등의 존재도 곧잘 언급되고 있다. 하지만 이것들 말고도 한강 건너 흑석동에 있던 한강신사(漢江神社, 1912년 창립)를 비롯하여 태평로 쪽에 에비스신사(惠比須神社, 1913년 창립), 죽첨정(竹添町, 지금의 충정로) 지역에 이즈모대사(出雲大社), 삼각지 인근에 도하신사(稻荷神社, 이나리 신사) 등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리고 신메이신사(神明神祠)라는 것은 영등포동, 용두동, 신길동, 이태원동 등지에도 두루 포진하고 있었던 사실이 확인된다.
여기에서 말하는 신메이는 아마테라스 오미카미의 별칭이므로, ‘신메이신사’는 이를테면 이세신궁(伊勢神宮)을 총본산으로 삼아 아마테라스 오미카미를 주된 제신으로 모시는 가장 보편적인 형태의 신사(神祠, 격이 낮은 소규모 신사)인 셈이다. 1917년 3월 22일에 제정된 총독부령 제21호 「신사(神祠)에 관한 건」에 따르면 “신사(神祠)라고 칭함은 신사(神社)가 아니면서 공중(公衆)에 참배를 시키기 위해 신기(神祇)를 봉사하는 곳을 말한다”고 규정하고 있으므로 신사(神社)와 신사(神祠)는 명확하게 구분되는 용어라는 점도 가늠해둘 필요가 있다.
그리고 원효로 인근 영정(榮町, 지금의 신계동 1번지 위치)에 있는 문평산(文平山)에 터를 잡은 가토신사(加藤神社, 1914년 창립)의 존재도 결코 이 목록에서 제외할 수 없다. 오카 료스케(岡良助)가 쓴 <경성번창기>(박문사, 1915)라는 책, 173쪽에는 “용산 원정(元町, 지금의 원효로) 2정목 와카노이케(和歌の池) 옆에 있다. 가토 키요마사 공(加藤淸正公)의 신령(神靈)을 제사지내는 구마모토(熊本) 가토신사의 분령(分靈)을 대정 3년(1914년) 12월에 봉영(奉迎)했다”고 쓴 구절이 있는데, 이를 통해 최초에는 다른 장소에 터를 잡고 있었다는 사실을 파악할 수 있다.

<조선철도여행안내> (1915)에 수록된 「경성급용산」 지도를 통해 ‘와카노이케’의 위치를 확인할 수 있다. 바로 이 연못 곁에 가토신사가 처음 터를 잡았던 것으로 알려진다.

여기에 나오는 ‘와카노이케’라는 연못은 조선총독부 철도국에서 펴낸 <조선철도여행안내>(1915)에 수록된 「경성급용산(京城及龍山)」 지도자료에 그 위치가 표시되어 있으며, 또한 1912년에 임시토지조사국에 의해 제작된 「토지조사부」와 「지적원도」를 통해 확인해본즉 그 당시 ‘경성부 용산면 대도정(大島町, 지금의 용문동) 9번지(전체면적 2,734평)’에 해당하는 구역으로 드러난다.
<매일신보> 1916년 5월 18일자에 수록된 「가토신사 춘계대제(加藤神社 春季大祭)」 제하의 기사에도 ‘와카노이케’라는 연못의 존재가 드러나 있다.

 

구마모토시 쿄마치(熊本市 京町) 가토신사에서는 작년 이래 구용산 야시마쵸 와카노이케(舊龍山 八島町 和歌之池) 측(側)에 키요마사공(淸正公)의 분령(分靈)을 봉사(奉祀)하였는데 내(來) 24일로 복(卜)하여 춘계대제를 집행하기로 목하(目下) 준비중인데 기일(其日)은 생화진열회(生花陳列會), 예기가무(藝妓歌舞), 소인스모(素人相撲) 등 여흥도 거행하기 위하여 유지자(有志者) 간에 주선중이라더라.

 

이 기사에서 언급한 ‘야시마쵸(八島町)’는 ‘오시마쵸(大島町)’의 인쇄 착오로 봐야할 듯싶다. 어쨌건 가토신사의 위치는 여러 자료에서 거듭 확인되는 바와 같이 ‘와카노이케’ 옆에 가까우면서 ‘원정 2정목’에 속한 자리였던 것으로 보이지만, 구체적인 지번 주소까지 확인하기는 어려운 상태이다. 이보다 좀 더 세월이 흘러 일본어 신문인 <조선신문> 1930년 1월 10일자에 수록된 「가토신사 개축(改築)」 제하의 기사는 이 신사가 문평산(文平山, 통칭 ‘당고개’ 지역) 아래 공터로 자리를 옮긴 때의 상황을 이렇게 적고 있다.

 

용산의 가토신사를 개축하여 용산의 사람들이 결혼(結婚), 기타 의식(儀式)을 그 신전(神前)에서 거행할 수 있도록 그렇게 되면 만사(萬事)가 편리할 것이라고 하는 몇 사람의 이야기에서 이 논의가 점차 진전되어 왔는데, 만약 이 이야기가 진전되면 이를 기회로 동(同) 신사를 문평산(文平山) 아래 공지(空地)에 신축하고 현재의 신사부지(神社敷地)를 경성신사(京城神社)의 어려소(御旅所; 신사의 제례 때 신령을 태운 가마가 순행하는 도중에 쉬거나 숙박하는 장소)로 충당할 것이라고 말하는 것 같다.

 

이러한 결과로 그 이듬해인 1931년 4월 24일에는 가토신사의 춘계대제에 맞춰 참도개수준공봉고제(參道改修 竣工奉告祭)가 열리기에 이른다. 이때 새로 조성된 가토신사의 위치에 대해서는 <지번구획입 대경성정도(地番區劃入 大京城精圖)> 제8호(1936)와 일한서방(日韓書房) 편찬, <대경성시가지도(大京城市街地圖)>(1937)의 후면에 수록된 「경성요부(京城要部)」 와 같은 지도자료를 통해 문평산 지역의 철도수도급수소(鐵道水道給水所) 바로 옆쪽에 표시된 것이 남아 있으므로 이를 참고할 수 있다.

 

일본어 신문인 <조선신문> 1931년 4월 28일자에 수록된 ‘가토신사’ 참도개수 준공봉고제의 광경이다. 뒤로 보이는 언덕 일대가 이른바 ‘문평산(文平山, 통칭 당고개)’이다.

 

일본어 신문인 <경성일보> 1932년 10월 20일자에 수록된 가토신사 고소사건 관련기사이다. 여기에는 흥미롭게도 조선국 왕자인 임해군과 순화군, 그리고 가토의 통역이던 조선인 김관이 함께 배향되어 있었다는 사실이 서술되어 있다.

 

그런데 가토신사의 건립 내력과 관련하여 꽤나 흥미로운 내용 하나가 눈에 띄는데, <경성일보> 1932년 10월 20일자에 수록된 「신사령(神社令)에 얽힌 가토신사(加藤神社)를 고소, 종교단체(宗敎團體)의 책동(策動)인가, 용산서(龍山署) 일응취조(一應取調)」 제하의 기사가 바로 그것이다.

 

가토 키요마사 공(加藤淸正公)을 주신(主神)으로 하고, 순화(順和, 순화군) 임해(臨海, 임해군) 양왕자(兩王子)와 당시 키요마사공의 통역(通譯)으로 종사하면서 위덕(威德)을 경모하여 내지(內地, 일본)에 귀화(歸化)했고 장렬한 순사(殉死)를 했던 조선인 김관(金官)을 배사(配祀)하는 내선동화(內鮮同化)의 신(神) 용산의 가토신사에 대해 수 일 전 용산서(龍山署)에 고소장(告訴狀)이 제기되어 목하(目下) 동서(同署)에서는 관계자를 불러 취조중이다.
측문(仄聞)한 바에 의하면 동(同) 신사는 대정 3년(1914년) 통감시대의 경무총장(警務總長)이던 육군중장(陸軍中將) 다치바나 코이치로(立花小一郞) 씨(氏)의 재임중(在任中)에 용산의 유지가 상계(相計)하여 봉신회(奉信會)라는 것을 조직, 키요마사공 분령소(分靈所)를 건설하고자 당국의 허가를 얻어 가토신사를 건설, 구마모토(熊本)의 본사(本社)에서 사사(社司) 타케시타 마사미(竹下眞美) 씨가 내선(來鮮), 동사 건설과 흥륭을 위해 진력했으나 그 후 일시 동씨(同氏)를 대신하여 엔인 히토시(圓印等)가 사사(社司)로서 사사(社事)를 맡았으나 이런저런 재미없는 문제를 야기하여 결국 그 부덕(不德)한 행위로
부터 용산부민(龍山府民)의 비난을 야기(惹起)하여 퇴사(退社)에 의해 내지(內地)로 물러났고, 재차 부민의 간망(懇望)에 의하여 타케시타 씨가 사사로 취임하여 금일에 이르렀던 것이다.
고소(告訴)의 이유는 근년 동사 관계자와 유력자가 동사를 용산신사(龍山神社)로 개명(改名)하여 경성신사와 같은 모양으로 크게 하려는 의향에 당국에 출원(出願)했으나 당국으로서는 일부일사(一府一社)라고 하는 것이 정해져 있었으므로 허가되지 않았던 것인데, 이내 신사령(神社令)이 개혁(改革)되어 당시 이 신령(新令)에 부응하지 않는 전국의 각사는 5개월 내에 새롭게 신사(神社)로서의 허가 신청을 하도록 되어 있었던 것을, 동사(同社)에서는 먼저 용산신사(龍山神社)로 개명하려는 의향도 있어서, 개정된 신령에 따라 가토신사(加藤神社)로의 수속(手續)을 게을리 했던 관계상 형식적으로는 신사로서 존재
하지 않는 것이 될 수밖에 없는 상태에 있다고 하는 이유에서, 여기에 주목하여 부내(府內) 황금정(黃金町, 지금의 을지로)에 거주하는 원(元) 한강신사(漢江神社) 근무 우에자키 아무개(上崎某)와 용산〇〇교(敎) 일파의 아무개(某)가 책동하고, 이에 겸해 이름 하여 신도관구소(神道管究所)라는 것을 통해 사실 현존한 가토신사의 〇〇을 꾸몄던 것이다. (이하 생략)

 

며칠 후 <경성일보> 1932년 10월 25일자에 다시 등장한 고소사건의 후속 기사에 따르면, 익명(匿名)으로 표기된 종교단체의 정체는 천리교(天理敎)였던 것으로 드러난다. 그런데 위의 기사에는 몇 가지 주목할 만한 사실이 서술되어 있는데, 우선 가토신사에는 왜군장수 가토 키요마사(加藤淸正, 1562~1611)뿐만이 아니라 임진왜란 당시 그에게 포로로 잡힌 조선국 왕자 임해군(臨海君: 1574~1609. 선조의 장자)과 순화군(順和: 1580~1607. 선조의 6남), 그리고 가토의 통역을 지냈다는 김관(金官)이라는 조선인도 함께 배향되어 있었다는 부분이 그 가운데 하나이다.

조선주차헌병대사령관 겸 조선총독부 경무총장으로 새로 임명된 다치바나 코이치로(立花小一郞) 육군소장의 인물 사진이다. 그는 가토신사의 건립과정에 깊이 관여했던 것으로 드러난다. <매일신보> 1914년 4월 19일자

<조선총독부관보> 1934년 4월 18일자에 수록된 ‘가토신사’의 설립허가내역이다. 가토신사의 최초 설립은 1914년 12월의 일이지만, ‘용산신사’로 개명하려던 시도가 계속 지연되면서 총독부령에 의한 설립허가는 이때 처음으로 이뤄졌다

 

6년 가까이 조선에 머물렀던 인물이었다. 이 시기는 일제의 강압통치가 본격화하던 때와 고스란히 겹치며, 특히 그 자신이 헌병경찰제도의 수장인 ‘총독부 경무총장’을 지낸 만큼 이른바 ‘무단통치(武斷統治)’를 자행한 장본인이기도 한 셈이다.
그리고 앞선 기사에서 눈길을 끌만한 또 다른 내용의 하나는 이곳이 ‘용산신사(龍山神社)’로 개명을 시도한 적이 있었다는 부분이 될 것이다. 이것은 물론 일부일사(一府一社; 하나의 부에 하나의 신사만 두는 것)의 원칙에 따라 허가가 불발되었는데, 여느 신사들과는 달리 유독 이곳 가토신사에서는 1915년 8월의 「신사사원규칙」 또는 1917년 3월의 「신사(神祠)에 관한 건」에 따른 절차를 거친 아무런 흔적이 발견되지 않았던 것인지를 설명해주는 단서가 된다. 실제로 가토신사의 신사설립허가에 관한 기록은 무려 19년 가까운 공백기를 지나 <조선총독부관보> 1934년 4월 18일자 「휘보(彙報)」에 “경기도 경성부 영정(榮町) 1번지에 가토신사(加藤神祠) 설립의 건, 사이키 츠구시(齋木胤志) 외 25명의 원출(願出)에 대해 4월 11일부로 이를 허가함”이라고 기재된 것이 최초이다. 짐작컨대 이 마저도 앞선 기사에 채록된 1932년의 고소사건을 수습하기 위한 조치의 결과물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당시에는 신사(神祠)였던 것이 다시 신사(神社)의 격을 갖춰 설립허가를 새로 받은 것은 일제패망을 몇 달 앞둔 시점의 일이었는데, <조선총독부관보> 1945년 5월 18일자 「휘보」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신사창립허가(神社創立許可)] 경기도 경성부 용산구 영정(榮町)에 가토신사(加藤神社) 창립의 건, 이시하라 이소지로(石原磯次郞) 외 62명의 원출(願出)에 대해 소화 20년(1945년) 5월 15일부로 이를 허가함.

 

여기에 나오는 이시하라 이소지로(石原磯次郞)는 용산 지역에 근거를 둔 실업가로 창덕가정 여학교(彰德家庭女學校, 한강로 1가 50번지)의 설립자인 동시에 경기도회 관선의원을 역임했던 인물이었다. 특히 그는 1927년 7월 14일 정토종 대념사(淨土宗 大念寺; 한강통 11번지)의 사원창립허가와 1943년 10월 20일 경성호국신사(京城護國神社)의 신사창립신청 때에도 대표자의 명단에 그의 이름이 등장한다는 점도 아울러 기억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러한 내력을 지닌 가토신사는 일찍이 조선을 침략한 왜군장수를 내선융화(內鮮融和)의 상징으로 삼았던 공간이니만큼 일제의 침략전쟁과도 전혀 무관할 리가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매일신보> 1941년 9월 26일자에는 이곳에서 산업진흥과 황군(皇軍, 일본군)의 무운장구(武運長久)를 비는 기원제와 아울러 시국영화(時局映畫) 상영회가 열렸다는 소식이 수록되어 있다.
그리고 불과 며칠 후에는 이곳에서 약간 별스러운 행사가 벌어진 흔적도 눈에 띈다.
<매일신보> 1941년 9월 28일자에 수록된 「비행기, 탱크, 오토바이로 남방보도(南方寶島)를 정벌(征
伐), 모모타로회 대표(桃太郞會 代表), 가토신사에 참예 맹서(參詣 盟誓)」 제하의 기사에는 이러한 내용이 남아 있다.

 

<매일신보> 1941년 9월 28일자에 수록된 ‘모모타로회(桃太郞會)’의 가토신사 참배 관련 기사내용이다. 일제의 침략전쟁이 가속화하면서 이곳도 예외 없이 전쟁동원의 공간으로 사용되었음을 말해주는 장면이다.

 

국민의 남방에 대한 관심이 날로 높아가고 있는데 부내 구용산 방면의 국민학교 생도들 사이에는 동화(童話) 속의 영웅 ‘모모타로(桃太郞)’가 남방의 보배섬을 쳐서 그곳의 금, 은, 보배를 가져왔다는 이야기를 생각하고 한 달 전부터 ‘모모타로’ 운동을 일으키게 되어 금정국민학교(錦町國民學校) 고등과 생도 야마모토 유키오(山本行雄, 15) 군을 비롯한 지원병지망소년의용대(志願兵志望少年義勇隊) 60명은 이 운동에 남 먼저 참가하여 모모타로회(桃太郞會)를 조직하여 26일 오후 3시반 원정(元町) 2정목 가토신사에 세 명의 대표자가 복숭아를 그린 ‘일본일(日本一)’의 깃발을 기증하며 다음과 같은 맹서를 하였다고 한다.
“우리들은 옛날의 모모타로와 같이 씩씩하고 명랑하고 굳세인 소년이 되겠습니다. 그리고 모모타로의 꿩과 원숭이와 개 대신에 우리들은 비행기와 탱크와 오토바이를 가지고 남방의 보배섬을 치겠습니다.
” (사진은 모모타로회 대표들의 기도)

 

여기에 나오는 금정국민학교는 옛 용산공립보통학교에서 전환된 것으로 지금의 ‘금양초등학교(錦陽初等學校, 효창동 126번지)’를 가리키며, 이곳은 원래 조선인 학교였으므로 야마모토 유키오라는 학생 역시 창씨개명한 조선인 아동인 것임에 틀림없다. 이들이 이곳을 찾아 ‘모모타로’와 같은 소년이 되겠다고 맹세한 것은 일제 패망기에 이르러 가토신사도 예외 없이 전쟁동원의 공간으로 사용되었음을 새삼 확인할 수 있는 기록인 셈이다.

금, 2020/02/21- 0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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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 비망록 52]

통칭호(通稱號), 침략군대의 정체를 감추기 위한 암호명
조선주둔 일본군은 어떠한 통칭호를 사용했을까?

이순우 책임연구원

보병 군조 후지모토 쇼조가 중일전쟁 당시에 소지했던 ‘지나사변출동경력’ 표기 일장기의 모습이다. 여기에는 자신의 소속부대가 ‘지휘관의 성’을 따서 명명하는 방식으로 표기되어 있다. (민족문제연구소 소장자료)

 

식민지역사박물관의 2층 진열공간에는 구겨지고 빛바랜 한 장의 일장기(日章旗)가 전시유물로 걸려 있다. 가운데 히노마루(日の丸, 붉은 원) 안에는 기(祈)라고 하였고, 호신용 부적과 같은 의미로 네 귀퉁이에 한 글자씩 무운장구(武運長久)라고 쓴 이 일장기에는 ‘지나사변출동경력(支那事變出動經歷)’이라고하여 참전일지와 같은 내역이 순서대로 빼곡히 정리되어 있는 것이 눈에 띈다.
여기에는 이 깃발의 주인인 보병군조(步兵軍曹 : 지금의 중사에 해당하는 계급) 후지모토 쇼조(藤元正三)가 중일전쟁(中日戰爭)이 터지자 1937년 8월초에 일본 미야자키현 미야코노죠시(宮崎縣 都城市 : 제23연대 부대주둔지)를 출발하여 부산과 안동현, 산해관, 북평 등지를 거치고 마침내 그해 12월초 남경(南京)을 공략하고 입성하기까지의 과정이 죽 나열되어 있다. 그 이후 시기에는 1938년 말에 이르기까지 그가 경비 또는 전투에 참여했던 각종 작전지역에 관한 내역들이 길게 이어진다.
그런데 이 깃발의 가장자리에는 그의 소속이 특이하게도 ‘稻葉部隊(舊谷部隊) 佐野部隊(岡本「鎭」部隊) 松崎隊(河喜多隊) 肥後隊’라 고 표시되어 있다. 알기 쉽게 몇 사단, 몇 연대, 몇 대대 …… 이런 식으로 소속편제의 고유명칭을 직접 표시하지 않고 지휘관의 명자(名字, 성)만 따서 무슨무슨 부대라고 부르는 것은 무슨까닭일까?
이는 전쟁상황에서 적(敵)에게 자신들의 부대에 관한 세부사항이 노출되지 않도록 방첩(防諜) 차원에서 고안된 방편이라고 알려진다. 대개는 성만 따오는 것이 원칙이지만, 동일한 성을 가진 지휘관이 복수로 존재한다면 그 다음의 이름을 더 넣어 이를 구분하기도 한다. 가령 위에서 ‘岡本「鎭」’이라고 한 것은 오카모토 연대장이 두 사람이었던 탓에, 원래의 이름 오카모토 시즈오미(岡本鎭臣)에서 한 글자를 더 취하여 이를 표시한 경우에 해당한다.
아무튼 위의 소속부대를 지휘관의 이름을 통해 판별해보면, ‘이나바 사단장(중장; 전임 타니 사단장) ― 사노 연대장(대좌; 전임 오카모토 연대장) ― 마츠자키 대대장(소좌; 전임 카와키타 대대장) ― 히고 중대장(중위)’이었던 것으로 드러난다. 이를 다시 일반편제의 순서로 전환하면 후지모토 군조의 소속부대는 ‘보병 제6사단 제23연대 제3대대 제9중대’로 정리된다.
일반적으로 전쟁상황에 돌입하면 부대 이동, 병력규모, 병과(兵科) 및 병종(兵種), 작전내용, 전투결과 등에 대한 세밀한 사항이 드러나지 않도록 이를 ‘모부대(某部隊)’라고 표현하거나, 특히 숫자와 관련된 정보는 〇〇〇과 같이 공란으로 처리하여 공표하는 것은 흔히 있어 왔던 일이다. 예를 들어 만주사변(滿洲事變) 시절의 자료를 찾아보면, ‘나남(羅南) 보병 〇〇연대’라든가 ‘〇〇부대’, 그리고 ‘무로(室) 〇단장(團長) 이하 용산부대’, ‘카무라(嘉村) 〇단장(團長) 이하 용산부대주력(龍山部隊主力)’, ‘제〇〇〇단사령부’, ‘야포(野砲) 〇〇연대’라든가 하는 식의 표기방법이 공공연하게 사용된 흔적을 확인할 수 있다.
여기에 나오는 ‘무로 〇단장’은 무로 켄지(室兼次, 육군중장) 보병 제20사단장(용산 주둔)을, ‘카무라 〇단장’은 카무라 타츠지로(嘉村達次郞, 육군소장) 보병 제39여단장(평양 주둔) 을 가리킨다.

 

<매일신보> 1932년 4월 19일자에 수록된 만주 출동 관련 기사에는 ‘나남 보병’이라는 표시는 드러나 있지만 나머지 몇 연대라거나 파견병력수에 관한 부분만큼은 〇〇 표시로 공란 처리되어 있다.

 

<매일신보> 1939년 11월 16일자에 수록된 전사자 명단은 소속부대의 고유명칭을 사용하지 않고 지휘관의 이름을 따서 명명한 부대로만 소개되어 있다. 확인해본즉, 무로야부대(谷部隊)는 보병 제78연대[연대장 무로야 츄이치(室谷忠一)]이고, 키고시부대(木越部隊)는 보병 제79연대[연대장 키고시 지로(木越二郞)]를 가리키는 표현이다.

 

그러니까 ‘〇단장’은 이것이 여단장인지 아니면 사단장인지 하는 정도만 알 수 없도록 가리는 수단이었던 셈이다. 또한 부대의 소재지에 나남이라든가 용산이라든가 하는것이 그대로 노출된 것을 보면 구태여 감추고자 하는 군사정보의 대상이 제한적이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표기방식이란 것도 신문지상과 같은 언론매체에 수록되는 보도내용에 대한 통제의 결과였을 뿐이지 부대의 고유명칭 자체는 그대로 유지되었다. 이러한 상태에서 부대의 명칭을 인위적으로 감춰 부르는 방식이 처음으로 등장한 것은 중일전쟁의 전개과정과 맞물려 있는 1937년 9월 1일의 일이었다.
이때 일본 육군성(陸軍省)에서는 육밀(陸密) 제1014호 「동원부대 등(動員部隊 等)의 칭호명(稱號名)에 관(關)한 건(件)」을 제정하였는데, “병력 등을 비닉(秘匿)하는 것”을 목적으로 “외지부대(外地部隊)는 부대장의 성(姓)을 붙여 칭호하도록” 정하였던 것이다. 다만, 이 당시에 ‘내지부대(內地部隊; 일본 본토에 주둔하는 부대)’의 경우에는 이 방식이 적용되지 않았다.
그러니까 앞서 보았던 후지모토 쇼조의 일장기에 표시된 소속부대는 바로 이러한 조치에 따랐던 것이고, 1937년이라는 시점도 고스란히 일치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지휘관의 이름으로 부대명칭을 정하는 방식은 그 나름의 문제가 있었다. 예를 들어 지휘관이 전보(轉補)되거나 전사(戰死)하게 되면 그때마다 부대명의 변경을 동반하게 된다는 부분이 그것이었다. 이러한 불편을 해소하는 동시에 부대명칭의 비닉성(秘匿性)을 더욱 강화하기 위해 새롭게 고안한 것이 ‘통칭호(通稱號)’ 방식이다.
이에 관한 규정은 1940년 9월 10일에 제정된 육밀(陸密) 제1533호 「통칭호 사용에 관한건」을 통해 공식화하였다. 여기에는 “「소화 16년도 육군동원계획령 세칙」으로써 동원관리관(動員管理官)인 군사령관, 사단장(내지, 조선, 대만 및 만주부대) 등에게 병단문자부(兵團文字符)와 통칭번호(通稱番號)를 배당하고, 이를 동원계획된 부대에 통칭번호로 부여하도록 정한다”는 내용이 포함되었다.
‘병단’이라고 하는 것은 통상 사단과 여단에 해당하는 편제단위를 일컫는 표현이다. 예를 들어, 조선주둔 제19사단은 ‘虎(토라)’, 제20사단은 ‘朝(아사)’라는 문자부호를 사용하였다. 이에 따라 가령 제19사단 예하부대인 보병 제75연대(회령)는 ‘虎8505’, 보병 제76연대(나남)는 ‘虎8506’, 그리고 제20사단 예하부대인 보병 제78연대(용산)는 ‘朝2053’, 보병 제79연대(용산)는 ‘朝2054’와 같은 방식으로 통칭호를 표시하였다. 그 후 치열한 전쟁상황이 지속됨에 따라 ‘통칭호’의 사용에 관해 이를 강화하는 기밀명령이 거듭 하달되면서 여러 차례 관련 내용이 개정된 것으로 나타난다. 일제의 패망 직전인 1945
년 4월 20일에는 「육군부대 전시통칭호규정」에 따라 기존의 통칭호 관련 규정이 전면 개편 되었고, 이 당시 조선군사령부를 대체하여 1945년 2월 6일에 창설된 ‘제17방면군사령부’의 경우 ‘築(키즈쿠)’라는 통칭호가 채택되었다.

 

‘조선 제23부대’라는 표기가 또렷이 새겨져 있는 <지나사변기념사진첩>(1940년 11월 발행)의 표지이다. (민족문제연구소 소장자료)

 

중국으로 출정하는 ‘조선 제23부대’ 병력이 군기(욱일기)를 앞세우고 용산병영을 떠나는 모습이  <지나사변기념사진첩>에 수록되어 있다. 정문 기둥에 걸린 부대 간판은 ‘검열관계’로 글자가 뭉개져 있으나, 사진엽서 또는 다른 사진첩에 포착된 장면을 통해 이곳이 ‘보병 제79연대’라는 것은 누구나 짐작할 수 있다.(민족문제연구소 소장자료)

 

조선 제23부대라는 주소지 표기가 들어 있는 나카노요시타케(中野義雄)의 개인엽서이다. ‘18(1943).6.5’ 일부인 아래 ‘점검제(點檢濟)’라는 검열확인도장이 함께찍혀 있다.

 

일본국립공문서관 아시아역사자료센타의 소장자료인 <(소화 20년 7월 10일 현재) 제17방면군 조선군관구 제부대 통칭호 소재지 일람표>의 표지이다.

 

조선군관구(朝鮮軍管區) 주요 부대의 소재지 및 통칭호 일람 (1945년 7월 10일 현재)

그런데 1940년 9월 10일자에 하달된 「통칭호 사용에 관한 건」이 등장하기 이전에 이미 <매일신보> 1940년 8월 13일자를 보면 “전몰용사 유족에게 금치훈장 수여식을 ‘용산 제23부대’에서 거행한다”는 소식이 수록된 것이 눈에 띈다. 이러한 점에 비춰보면 조선지역에 주둔하던 일본군대에 대해 ‘숫자부대명칭’을 사용하는 별도의 ‘통칭호’ 관련 규정이 존재했을 것으로 짐작이 되지만, 구체적인 근거규정이 무엇이었는지는 잘 확인되질 않는다.
그리고 1940년 11월 14일에 하달된 육만기밀(陸滿機密) 제13호 「재만 제부대(在滿 諸部隊) 통칭호 규정」에 따라 만주 주둔 부대의 경우 ‘병단문자부’를 일괄 ‘만주(滿洲)’로 표기하도록 변경한 바 있다. 잔혹한 생체실험으로 악명이 높은 ‘관동군방역급수부본부(關東軍防疫給水部本部)’를 일컬어 흔히 ‘만주 제731부대’라고 하는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나온 표현인 셈이다.
해를 넘겨 1941년 7월 25일 육군대신 도죠 히데키(陸軍大臣 東條英機)의 명의로 제정된 육지밀(陸支密) 제2249호 「만주, 조선에 있어서 동원(임시편성)된 부대의 통칭호에 관한 건달(件達)」에 따라 “조선에서 동원(임시편성)된 부대의 통칭호는 ‘병단문자부’를 ‘조선(朝鮮)’으로 한다”고 정하였다. 하지만 이보다 앞선 시기에 이미 ‘조선 제몇부대’라는 표현이 등장하는 자료들이 있으므로 이 부분 역시 세밀한 확인이 필요한 대목이라 하겠다.
아무튼 이러한 조치의 결과로 1940년을 넘어가는 시점에서는 경성사단(京城師團), 나남사단(羅南師團), 평양사단(平壤師團, 추을사단) 등의 표기는 계속 허용되었으나, 가령 ‘보병 제78연대’와 같은 고유명칭방식은 말할 것도 없고 ‘용산보병연대’라는 정도의 표현조차도 완전히 자취를 감추게 된다.
<매일신보> 1940년 9월 25일자에 수록된 「과거 무훈을 찬양, 74부대 개대 기념식(開隊記念式) 성대」 제하의 기사에는 부대명칭을 ‘통칭호’로 감추고 소재지도 공란으로 처리한 실제 사례가 남아 있다.

 

[〇〇] 74부대의 빛나는 개대(開隊)기념일을 당하여 부대에서는 〇〇〇〇〇 원두에서 23일 오전 9시부터 개대기념식을 엄숙하고 성대하게 거행하였다. 이날 만추(晩秋)의 청공은 74부대를 축복하는 듯 맑게 개었다.
식장에는 가토(加藤) 부대장을 비롯하여 나카노(中野) 부대 본부장, 사이토(齋藤) 44부대장, 이구로(伊黑) 병사부장, 기쿠치(菊池) 헌병대장, 오가타(緖方) 해군중좌, 기타 〇〇있는 각부대장 이하 관민 다수가 참석하여 금번 지나사변을 물론 ‘노몬한’ 사건, 장고봉(張鼓峰) 사건 등에 있어 빛나는 무훈을 날린 74부대의 위훈을 찬양, 식은 가토(加藤) 부대장의 식사와 옥관봉전(玉串奉奠)이 있은 후 최후로 사토(佐藤) 부윤으로부터 부민을 대표하는 옥관봉전이 있은 후 식을 마치고 계속하여 운동경기회로 들어갔는데 경기 번외로 서문고녀(西門高女)의 기원 2600년 창가가 일반의 인기를 끌고 부민대망의 황취(荒鷲, 아라와시. 전투기를 뜻함) 격추의 대모의전이 전개되어 10여 문의 거포가 일제히 불꽃을 올리어
당일 〇〇〇 일대는 마치 실전장(實戰場)과 같은 장관을 이루고 오후 5시경에 산회하였다.

 

이 기사에는 74부대의 소재지에 대해 모두 공란으로 처리하고 있으나, ‘서문고녀(西門高女)’라든가 ‘사토 부윤(佐藤 府尹)’이라든가 하는 구절로써 이곳이 평양이라는 것을 파악하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다. 그리고 “비행기 격추를 위한 10여 문의 거포 운운”하는 부분은 이곳이 고사포부대(高射砲部隊)라는 것을 짐작케 한다. 이러한 단서를 취합하면 여기에서 언급된 제 74부대는 바로 평양 평천리(平川里)에 자리한 고사포 제6연대(1935년 창설)로 추정할 수 있다. 이 당시 고사포 제6연대는 가토 타카미네(加藤隆峰) 연대장의 휘하에 있었으므로 이를 ‘가토부대’라고 지칭한 것이며, 축하내빈으로 참석한 ‘사이토 44부대장’의 정체는 확인 결과 사이토 마사히코(齋藤正彦) 보병 제77연대장(평양 주둔)인 것으로 드러난다.

 

<매일신보> 1941년 4월 14일자에 소개된 조선 제26부대(야포병 제26연대)의 제22회 창립기념식 광경이다. 이날 함께 제막된 ‘충혼비’에 새겨진 ‘忠魂’이라는 글씨는 1938년 6월에서 1939년 9월 사이에 제20사단장(용산)을 지낸 우시지마 미츠네(牛島實常) 육군중장이 쓴 것으로 확인된다.

 

<매일신보> 1941년 4월 27일자에 수록된 조선 제27부대(공병 제20연대)의 창립기념식 모습이다. 이 부대는 원래 공병 제20대대로 출범하였으나 1936년 5월에 치중병대대와 함께 일괄 연대 편제로 승격된 바 있다.

 

이러한 통칭호 부대명칭에 대해서는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는 자료가 거의 눈에 띄질 않는데, 아쉬운 대로 <매일신보>와 같은 보도내용 등에 드러난 단서들을 하나씩 취합하면 대략 다음과 같은 일람표 형식의 재구성이 가능하다.

 

조선주둔 일본군의 주요 부대 통칭호 일람표

해방 후에 간행된 강제동원 관련 여러 증언 자료집들을 살펴보면, 여기에도 이러한 부대명칭이 무시로 등장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말하자면 이른바 ‘육군지원병’이건 ‘학도지원병(학병)’ 이건 ‘징집병’이건 간에 강제동원을 통해 전쟁터에 끌려간 이들에게는 입영부대 또는 배속부대였던 22부대니, 24부대니, 30부대니, 42부대니, 44부대니 하는 이런 명칭들이 그 시절의 고통을 기억하는 연결고리로서 어김없이 뇌리에 깊이 각인되어 있었던 것이다.
만주사변에서 중일전쟁을 거쳐 태평양전쟁으로 확산되는 침략전쟁의 와중에 일본군 전투부대가 자신들의 정체를 모호하게 만드는 한편 조금이라도 자기들에게 유리하도록 교묘한 전략기법의 하나로 짜낸 것이 바로 ‘통칭호’의 개념이다. 지금도 여느 군부대 앞의 정문 기둥 마다 걸려 있는 ‘육군 제XXXX부대’라는 식으로 표기한 간판이란 것도 본연의 군사보안 목적이 있어서 사용하는 것이긴 할 테지만, 구태여 그 뿌리를 따지고 든다면 일본군대가 저지른 침략전쟁의 산물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지워버리기는 어려울 듯하다.

금, 2019/11/29- 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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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 비망록•64 ]

용산 보병 제78연대, 조선의 수부 경성을 수비하는 주력부대
이 부대를 거쳐간 조선 출신 일본군 장교들은 누구누구였을까?

이순우 책임연구원

조선 사람으로 일본사관학교를 졸업하고 군인이 되어 군대생활을 하는 사람은 도합 40명이나 되지 못하는데 그 중의 한 사람인 장기형(張璣衡, 26) 씨는 지금 보병소위로 금택(金澤, 카나자와) 제9사단 제35연대 제1중대부(附)로 현금 용산주차군 안에 있더라. 씨는 경기도 김포(金浦) 사람으로 처음에 경성무관학교를 다니었으며 그 후에 일본 동경에 들어가 중앙유년학교(中央幼年學校)를 졸업하고 인하여 사관학교를 졸업한 후에 금택 제9사단에 입대하였으며 동시에 주차군의 장교로 작년 6월에 조선으로 건너왔는데 35연대에 장 소위 한 사람밖에 조선 사람이라고는 없으나 제27기에 같이 사관학교를 졸업한 사람이 17명과 전기에 졸업한 17명의 졸업생은 다 각 연대에 배치되어 입대케 하였더라. (하략)

 

일본 육군사관학교 제27기 졸업생으로 제9사단 보병 제35연대(카나자와 주둔)에 근무했던 장기형(張璣衡) 보병 중위의 인물사진이다. 그가 소속된 보병 제35연대가 조선주차군 교대병력으로 파견되는 바람에, 그 역시 뜻하지 않게 초급장교 시절을 용산 보병영에서 보내게 된다. (민족문제연구소 소장자료)

 

이것은 <매일신보> 1916년 1월 14일자에 수록된 「용산연대(龍山聯隊)의 장소위(張少尉), 그의 당당한 풍채, 그의 유쾌한 생활」 제하의 기사에 등장하는 내용이다. 여기에 나오는 장기형 보병소위는 원래 일본 카나자와에 근거를 둔 제9사단 제35연대에 배속되었는데, 이 부대가 때마침 ‘조선수비(朝鮮守備, 1914.4~1916.4)’를 위해 조선주차군의 교대병력으로 파견된 상태였으므로 그 역시 덩달아 1915년 6월 이후 1년가량 용산에서 근무하는 기회를 얻게 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용산 지역 일본군 병영지의 보병연대(步兵聯隊) 주둔 연혁

장기형 소위가 근무처로 삼았던 보병 제35연대가 있던 자리는 1916년 4월에 조선주둔 2개 상주사단의 하나로 제19사단이 먼저 창설되면서 이때 예하부대로 함께 만들어진 보병 제78연대의 주둔지로 전환된다. 이곳은 1906년 이후 본격적으로 건설된 용산지역의 일본군 병영지 안에서 나중에 보병 제79연대가 추가 배치되기 직전까지는 단 하나의 보병영(步兵營)으로 존재했던 구역이기도 하다.
한국주차군경리부(韓國駐箚軍經理部)에서 펴낸 <조선주차군영구병영, 관아급숙사건축경과개요(朝鮮駐箚軍永久兵營, 官衙及宿舍建築經過槪要)>(1914)에 정리된 내역에 따르면, 이곳에는 1908년 준공 당시 보병연대(대대)본부 청사 1개동과 병사(兵舍) 및 부속가(附屬家) 6개동의 병영시설이 자리하였다. 이와 함께 별동(別棟) 부속건물(위병소, 영창, 하사집회소, 장교집회소 등) 22개동이 있었으며, 이 주변에 보병연대 장교합동숙사(將校合同宿舍) 4개동과 준사관하사합동숙사(準士官下士合同宿舍) 1개동이 추가로 배치되어 있었다.

1908년 보병영 완공 당시의 병사 및 부속건물 구성 내역

1908년에 완공된 용산보병영(龍山步兵營) 일대의 전경을 남쪽 방향으로 담아낸 사진엽서이다. 왼쪽 아래에 보이는 것이 부대 정문(正門)이고, 오른쪽 아래에 길게 보이는 건물이 ‘보병연대본부 및 대대본부’ 청사이다. 그 뒤쪽에 연병장 일대와 6개동에 달하는 병사(兵舍)가 2열로 배치된 모습이 포착되어 있다. (개인소장자료)

이른바 ‘코바야카와(小早川)’에 걸쳐 다리를 놓은 지점에 북면(北面)하여 설치한 용산보병영의 정문(正門) 모습을 담은 사진엽서이다. 대문 기둥에 ‘보병 제31연대’라는 간판이 붙어 있는 걸로 보아 제8사
단이 조선주차군으로 파견되어 있을 당시(1912.4~1914.2)에 촬영된 모습인 것을 알 수 있다. (개인소장자료)

 

부대의 정문(正門)은 용산병영지의 중간을 가로질러 동서로 흐르는 이른바 ‘코바야카와(小早川, 임진왜란 때의 왜군장수인 코바야카와 타카카게의 이름을 따서 붙인 하천 이름)’를 남쪽으로 건너는 지점 앞에 북향(北向)으로 설치되어 있었다. 이곳을 들어서면 먼저 연병장(練兵場)이 나타나고 그 뒤에 남쪽으로 병사(兵舍)가 2열 배치의 형태로 자리하였다.

 

3·1만세 시위 당시인 1919년 5월에 작성된 <군대분산배치요도(軍隊分散配置要圖)>에 표시된 보병 제78연대의 위수지역(경성 및 인천포함 경기북부지역)이다. 특히 이 지도의 여백에는 “경성 및 용산은 3대대로써 수비하고 있다”고 적고 있다.(민족문제연구소 소장자료)

 

이 대목에서 상주사단 편제에 있어서 보병 제78연대의 존재가치는 무엇보다도 식민지 조선의 수부(首府)인 경성(京城)을 수비하는 주력부대라는 사실에 놓여 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겠다. 예를 들어, 조선군사령부(朝鮮軍司令部)에서 제작한 <군대분산배치요도(軍隊分散配置要圖, 1919년 5월 20일 현재)>(민족문제연구소 소장자료)라는 군사지도를 보면, 보병 제39여단(평양 소재)의 예하부대인 보병 제78연대의 위수지역(衛戍地域)이 경성과 인천을 포함하여 한강 이북의 경기도 북부 일대에 걸쳐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이 보병 제78연대는 조선을 수비하는 역할에만 그치지 않고 일제가 벌이는 잇따른 침략전쟁마다 이른바 ‘출정부대(出征部隊)’로 거듭 동원된 내력도 지니고 있었다. 실제로 모리 모토 토미조(森本富藏)가 편찬한 <황군연대기사진첩(皇軍聯隊旗寫眞帖)>(1932)이란 자료를
보면, ‘보병 제78연대’의 항목에 군기약력(軍旗略歷)을 이렇게 적고 있다.

 

위수지(衛戍地) : 조선 용산(朝鮮 竜山)
소속(所屬) : 용산 제20사단(竜山 第二十師團)
一. 군기친수(軍旗親授) : 대정(大正) 5년(1916년) 4월 18일
一. 압록강안지방(鴨綠江岸地方)에 출동(出動) : 자(自) 소화(昭和) 3년(1928년) 5월 27일 지(至) 동년(同年) 7월 18일
一. 만주사변(滿洲事變)에 참가(參加) : 자(自) 소화(昭和) 6년(1931년) 9월 19일 지(至)목하(目下) 〇〇중(中)
보병 제78연대 잔류대(殘留隊) 부관(副官) 오쿠와 시게오(大桑茂男) 씨 보고

이 시기 만주사변에 참가한 흔적으로 남은 것이 바로 용산 보병 제78연대 구내에 잔존했던 ‘충혼비(忠魂碑, 1935.11.18 제막)’였다. 이 비석은 논공행상(論功行賞)의 혜택을 입은 이들이 돈을 걷어 출정중에 죽은 자신들의 전우를 위해 장교집회소(將校集會所) 앞에 세운 것이며, 당초 만주사변 4주년(1935년 9월 18일)을 앞두고 이 날짜에 맞춰 제막하려던 계획이었으나 실제로는 두 달이 지연되어 완공된 것으로 드러난다.

 

<조선신문> 1935년 11월 19일자에 수록된 용산 보병 제78연대의 ‘만주사변 충혼비’ 제막식 장면이다. 엉뚱하게 이 기념물은 해방 이후 ‘미8군 전몰자 기념비’로 재활용되다가 2017년 5월에 평택미군기지로 이전된 상태에 있다.

 

이러한 기념물이 제막된 날의 풍경에 대해서는 일본어 신문인 <조선신문(朝鮮新聞)> 1935년 11월 19일자에 수록된 「호국(護國)의 영령(英靈)을 달래려는 전우(戰友)의 미거(美擧) 결실을 맺으며, 제78연대에 충혼비 제막식(除幕式)」 제하의 기사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남아 있다.

 

만주사변(滿洲事變) 때에 재용산(在龍山) 보병 제78연대의 장병으로서 출정했던 관계자가 그 전우 중에 이 사변에서 순직(殉職)했던 키누가사 소좌(衣笠 少佐) 외 45용사(勇士)의 영령에 제사를 지내며 위령(慰靈)하고자 건립했던 보병 제78연대 관계 장사(將士)의 위령비 제막식은 동(同) 사건의 돌발일(突發日)에 맞춰 18일 오전 11시 반부터 동 연대 영정(同聯隊 營庭)에서 거행되었다. 식장(式場)은 영문(營門) 안쪽에 남면(南面)하여 설치되어 수불(修祓), 강신(降神), 헌찬(獻饌) 등 관례대로 엄숙리에 진행되었으며, 제주(祭主)의 축사(祝詞) 후에 햐쿠타케 연대장(百武 聯隊長)의 제문낭독(祭文朗讀), 이마무라 제40여단장(今村 第四十旅團長)의 조문낭독(弔文朗讀)이 있었고, 유족(遺族)인 고(故) 키시하
라 상등병(岸原 上等兵)의 엄부(嚴父)와 고(故) 코마츠 군조(小松 軍曹) 모당(母堂)의 손에 의해 제막되는 동시에 방구(放鳩), 마지막으로 재주(齋主), 제주(祭主) 옥관(玉串)을 바치고 폐식(閉式)했다. 이날 유족은 고(故) 히라타 중위(平田 中尉) 유족과 기타 20여 명이며, 별도로 조선군(朝鮮軍) 대표, 사단(師團) 대표, 기타 관민(官民)과 아울러 군부관계자(軍部關係者) 100여 명이 참렬(參列)하였고, 동 연대(同聯隊) 전병몰자(戰病歿者)는 다음과 같다. (이하 개별 명단 부분은 인용 생략)

 

그런데 그 이후 이른바 ‘지나사변(支那事變, 중일전쟁)’ 때에도 출동부대의 명단에서 보병 제78연대의 이름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용산 주둔 보병 제78연대의 거듭된 출정에 관한 얘기를 하자면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바로 ‘친일군인’으로 맹활약(?)한 김석원(金錫源, 1893~1978)이다. 무엇보다도 이 시기 그의 행적에 대해서는 <매일신보> 1942년 2월 3일자에 수록된 「반도인(半島人)에 최초(最初) 수훈갑(殊勳甲), 가네야마(金山) 부대장의 영예, 청사(靑史)에 찬연(燦然)한 북지전야(北支戰野)의 무훈(武勳)」 제하의 기사에 잘 요약되어 있다.

 

대동아전쟁하 전첩에 빛나는 신춘을 맞이하여 2일 제24회 지나사변 생존자 논공행상이 발표되었다. 그 중에는 지나사변 직후 대륙전선에서 용맹을 떨친 우리의 부대장 금산석원 중좌(金山錫源 中佐, 구명 김석원)가 반도인으로서는 처음인 수훈갑 공삼급 중수장(殊勳甲 功三級 中綬章)의 은명을 배수하여 향토의 명예를 떨치었다. 김석원 중좌는 소화 12년(1937년) 7월 지나사변이 일어나자 천안병단 남운부대(川岸兵團南雲部隊) 대장으로 용약 북지(北支)에 출정하여 유명한 남원낭방(南苑廊坊)의 전투를 비롯하여 태원(太原), 운성(運城)의 공략전에 이르는 전후 1년 반 동안 포연탄우를 무릅쓰며 북지의 각 전선에서 과감히 싸워 혁혁한 무훈을 세웠고 남원의 격전에서는 명예의 부상까지 입었으나 여기에 굴치 않고 다시 제일선에 나아가 적군을 철저히 섬멸하였다. 더욱이 산서성 영석(山西省 靈石) 부근의 격전에서는 과병으로 잘 적군의 대부대를 격멸한 위훈을 세워 감장(感狀)까지 받고 김석원 부대의 용맹을 떨치었던 것이다. 그런데 김 중좌는 부내 재동(齋洞) 출생으로 육군유년학교(陸軍幼年學校)와 육군사관학
교(陸軍士官學校, 제27기)를 거쳐 육군보병학교(陸軍步兵學校)를 졸업한 후에는 중위(中尉) 시대부터 중좌가 되기까지 15년 동안 조선 제22부대에서 근무하였다. 그 동안 만주사변 당시에는 만주에 출정하여 공사(功四)의 영예를 받자왔다. 그리고 소화 14년(1939년) 1월 북지에서 개선하였다가 소화 16년(1941년) 3월 다시 북지〇〇방면에 출동하여 방금 대동아건설을 위하여 정신분투하고 있는 중이다. 더욱이 김 중좌는 근엄한 무인이고 가정은 순내지식인 가정으로서 유명한데 조선에 있을 때에는 반도민중의 황국신민화와 풍속의 개선, 문화향상 등을 위하여 노력하였고 한편 성남(城南) 중학을 설립하고 반도청년의 연성에 노력하였다.

우선 여기에 나오는 ‘조선 제22부대’라는 것은 용산 주둔 보병 제78연대를 가리키는 통칭호(通稱號)이다. 그리고 이 기사에 ‘15년’ 동안 보병 제78연대에서 근무하였다고 적어놓은 대목은 사실관계가 약간 다른 듯하다.

 

<매일신보> 1942년 2월 3일자에 수록된 김석원 부대장에 대한 ‘수훈갑’ 논공행상 관련기사이다. 오른쪽에 있는 사진은 ‘김석원 중좌’의 모습이고, 왼쪽 아래가 ‘처 서달순, 장남 김영철, 3남 김영국’의 모습이다. 아들들의 이름에 ‘영(泳)’이 들어간 것은 박영효(朴泳孝)에게서 따온 것이라고 한다.

 

용산 보병 제78연대에서 발행한 <만주사변출동기념사진첩> (1932)에 수록된 김석원 대위의 모습이다. 여기에는 그의 직책이 ‘제1보병 포대장’으로 표시되어 있다. (민족문제연구소 소장자료)

 

<매일신보> 1939년 4월 5일자에 수록된 매일신보사 주최 ‘김석원 소좌 강연회(경성부민관)’ 안내광고이다. 중일전쟁 당시 북지전선(北支戰線)에 무공을 세우고 귀환한 그는 이 행사를 계기로 전국의 군청 소재지를 거의 빠짐없이 돌면서 침략전쟁을 선전하고 신생활운동을 강조하는 강연회를 한동안 지속하였다.

 

김석원은 앞에서 소개한 장기형 소위와 일본육군사관학교(제27기)를 함께 졸업하였으며, 이때 그의 첫 부임지는 일본 와카야마(和歌山)에 주둔한 보병 제61연대였다. 그러다가 중위의 신분으로 용산에 주둔한 보병 제78연대로 전속되어 온 것이 1919년 8월 21일의 일이었다.

 

이와 관련하여 김석원이 남긴 <노병(老兵)의 한(恨)>(육법사, 1977)이라는 자서전에는 용산으로 전출(轉出)을 오게 된 과정이 두어 쪽에 걸쳐 언급되고 있다. 여기에 서술된 내용에 따르면 와카야마 보병 제61연대에 근무할 당시 자신이 속한 부대의 최고지휘관인 제4사단장 우츠노미야 타로(宇都宮太郞) 육군중장과 안면이 생겼고, 때마침 그가 제9대 조선군사령관(재직 1918.7.24~1920.8.16)으로 옮겨가게 되자 휴가차 귀향(歸鄕)할 때를 틈타 그에게 특별히 부탁하여 조선으로 근무지를 옮길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 이후 김석원 중위는 1940년 1월에 후쿠야마(福山)에 주둔한 보병 제42연대로 전속(轉屬)될 때까지 무려 20년이 넘은 긴 세월을 오롯이 용산 주둔 보병 제78연대에서 근무했던 것으로 확인된다. 조선 출신 일본군 장교라고 해서 자신의 근무지가 반드시 조선으로 배치되는 것은 아닌 상황에서, 더구나 이토록 장기간 동일한 부대에서 남아 있는 것 자체가 매우 드문사례에 속했다. 그러니까 김석원이라는 존재는 용산의 주력부대인 ‘보병 제78연대’에서 글자그대로 산전수전(山戰水戰)을 다 겪은 ‘터줏대감’에 다름 아니었다. 그는 이곳에서 대위(1925년 8월)를 거쳐 소좌(1934년 3월)에서 중좌(1938년 9월)로 거듭 진급했을 뿐만 아니라 만주와 중국으로 출정하여 거듭 자신의 무공(武功)을 쌓았으니, 그것이야말로 전형적인 친일군인의 길이기도 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의 행적을 살펴보고자 자서전을 훑어보는 와중에 그가 느지막이 이러한 책을 남기는 뜻을 밝히는 대목에서 다음과 같은 구절이 포함된 것이 퍼뜩 눈에 띈다. …… 그렇다고 해서 내가 걸어온 생애가 타의 모범이 될 정도로 무슨 큰 공적이 있어서가 아니다. 또 국가나 민족을 위하여 남이 본받을 만한 일을 한 것도 아니다. 어쩌면 그 반대일는지도 모른다. 사실 나는 그동안 내가 살아온 80여 년 간의 뒤를 돌아다보면 아무래도 잘한 일보다는 잘못한 일이 훨씬 많은 것 같고 남에게 환영받을 일보다는 오히려 남에게 환영받지 못할 일이 더 많이 한 것 같다. 어떤 경우는 무지했던 탓으로 또 어떤 경우는 올바른 인생관과 올바른 세계관을 못 가졌던 탓으로 그동안 내가 저지른 잘못은 많다 할 것이다. 그 중에서도 이유야 어쨌든 일제 식민지시대에 오래도록 일본군인 노릇을 했다는 것은 나의 생애 중에서 큰 불명예라 생각되는 것이다. 이것으로 그가 일본군인의 노릇을 했다는 것을 스스로 큰 불명예로 여긴다고 생각했다는 점은 분명히 확인되지만, 이만한 정도의 언급이라도 남긴 이가 그리 많지는 않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그를 일컬어 친일행적을 참회한 인물로 받아들여야 할는지는 여전히 판단이 알쏭달쏭하기만 하다.

목, 2020/12/03- 0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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