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 콘텐츠로 건너뛰기

청량리 떠나던 날, 청파에서 가꿀 새 꿈을 꾸다

지역

청량리 떠나던 날, 청파에서 가꿀 새 꿈을 꾸다

익명 (미확인) | 목, 2018/01/25- 17:15

기고

청량리 떠나던 날, 청파에서 가꿀 새 꿈을 꾸다

김승은 자료실장

연구소가 드디어 청량리에서 청파동으로 이전을 마무리했다. 2000년 3월부터 청량리 떡전교 사거리 금은빌딩에 터를 잡았으니 거의 18년 만에 새 둥지로의 이사였다. 그 사이 10명에 불과했던 상근자가 4배 가까이 늘었고, 3층 한켠만 겨우 차지하던 살림살이는 5층과 지하, 2층 일부까지 다 채울 정도로 커졌으니 이번 이사에 만만치 않은 준비가 필요했다.
먼저 사무실 이사 전문 업체를 선정하고 체계적인 이사 계획을 세우는 한편, 이전해 갈 서현빌딩의 안전진단과 시설점검을 진행했다. 2006년에 준공한 건물치고는 관리가 비교적 잘 된 편이었지만 손볼 데가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 꼼꼼한 건물 점검과 필요한 보수공사는 최규필 회원이 전적으로 맡아 도와주었다. 개인적으로도 몇 번이나 청파동에 찾아가 건물을 둘러보고 관리 상태를 돌아보는가 하면, 공사이력을 알아내고 가장 저렴하게 보수공사를 할 수 있도록 주변 지인들을 총동원해 주었다. 그 사이 곳곳에 쌓여 있던 묵은 짐을 정리하는 일도 만만치 않았다. 수장고에 보관했던 유물과 고도서들은 직접 확인하고 포장해야 해서 이사 두 달 전부터 작업을 시작했다.

13

1, 2유물과 고도서를 포장하는 상근자들 3 포장된 유물상자로 가득 찬 청량리 사무실 임시전시실

상근자들은 보관・활용할 사무집기와 폐기물품을 점검하고, 이전하는 새 공간의 활용과 공간 배치 등 모든 이전 업무에 각자의 힘과 지혜를 모았다. 사무실 집기들을 점검하다 보니 갖가지 모양의 책상과 책장, 의자들이 수두룩했다. 문 닫는 사무실만 생기면 가서 주어다 모았기 때문에 통일감이란 ‘1’도 찾아보기 힘들었다. 짝 안 맞는 낡은 집기들이 우리 연구소가 걸어온 땀과 눈물의 험로를 고스란히 보여주는 지도 모른다. 손때 묻은 책장과 책상들을 차마 버릴 수가 없어서 거의 다 짊어지고 왔다. 서현빌딩에도 이전 건물주가 사용하던 붙박이장과 수납장이 많았지만, 예전 책장과 사무집기들은 우리가 새로 쓸모를 찾기도 하고, 필요한 단체가 있으면 기증도 하려고 한다.

 

14

1전체 이사 계획과 일정을 점검하는 상근자회의 2사무집기 점검과 배치를 담당했던 ‘떡전용역팀’ 회의

 

서현빌딩에서도 새 살림살이가 들어갈 공간 정비가 진행되었다. 이례적인 한파가 시작된 12월 1일부터 5층 내부 공사, 옥상 철거와 보수공사를 시작했다. 4층에는 작은 공간을 효율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이동식 서가(모빌랙)를 설치했다. 각 층 전구는 모두 LED로 교체했다. 신용준 회원이 통 크게 후원해 주었고, 직접 시공까지 맡았다.
이삿날이 가까워 올수록 기온은 더 내려갔다. 이사 전에 여기저기 보수공사를 해야 했지만, 날씨 때문에 제대로 진행하기가 어려웠다.

 

15

3강의실 공사를 맡아 준 디자인 쏨니엄 관계자들과 회의 4옥상에 방치된 시설물 철거 공사 5강의실 내부 공사 6새로 설치된 이동식 서가 7신용준 회원이 건물 전체 조명을 LED로 교체하고 시공까지 맡아주었다.

 

쏜살같이 이삿날은 다가왔고 아직도 정리가 덜 된 짐이 산더미였다. 이사를 하루를 앞두고 4일간 이어질 이사 일정에 맞춰 역할을 분담하고 마지막 점검을 했다.

21스프레이 테러로 불그스름하게 물든 연구소 현판도 챙기고, 먼지 쌓인 연구소의 옛 추억들도 차곡차곡 상자에 담았다. 책이 예상보다 너무 많았는지 이사업체는 지하서고에 자동 밴딩 기계까지 설치하고 이틀 전부터 포장작업에 돌입했다. 그러는 사이에도 사무실은 일상 업무를 진행해야 해서 이사 전날 새벽까지 개인 짐을 싸는 상근자들이 많았다.

 

16

1이사 이틀 전부터 책 포장에 들어간 지하서고 2연구소 소장자료 이전 준비를 마치고 이사 전날 늦게까지 개인 짐을 싸는 자료실 상근자 3통합 재단 운영 방침을 둘러싸고 새벽1시를 넘겨 이어진 실무회의. 왼쪽은 내일을여는역사재단 신용옥 상임이사, 맞은 편은 조세열 사무총장

 

드디어 12월 15일. 본격적인 이사를 시작했다. 하필 이사 첫날은 71년 만에 가장 빨리 한강이 얼었다는 바로 그날이었다. 추위도 큰 난관이었지만 역시 가장 큰 문제는 지하 서고였다. 꺼내고 꺼내어도 책은 여전히 서가에 가득했다. 다른 층 이전이 줄줄이 늦어졌다. 3층에 쌓인 짐을 건물 밖으로 실어내는 데만 이틀이 걸렸다. 금은빌딩에서 완전히 짐을 비우는 데만 꼬박 5일이 걸렸다. 게다가 이사 마지막 날이었던 12월 18일에는 대설경보가 나올 정도로 폭설이 내렸다. 이사는 또 다음날로 연기되었다.

 

17

412월 12일, 박물관 건립 모금에 초석을 놓아 주신 송기인 신부님 등 과거사 관련 위원회 전 위원장님들이 서현빌딩을 방문해 격려해 주셨다. 53층 사무실 이전을 돕는 이용창 편찬실장과 유은호 책임연구원

18

1금은빌딩 옛 사무실과 구분이 안 갈 정도로 꽉 찬 새 사무실 2한 달 가까이 이어진 이사에 지친 신다희 사무국원 3서현빌딩에서 다시 시작된 책 정리 4연구소에서 무슨 일이든 팔 걷고 나서는 김병구 회원팀장

 

장장 일주일이 넘게 걸린 이사는 12월 20일에야 마무리되었다. 친일인명사전 편찬의 산실이자, 민족문제연구소가 회원들과 가장 많이 만났던 3층 연구편찬실과 사무국, 친일독재미화 교학사 교과서와 국정교과서 폐기 운동의 본부 역할을 했던 2층 교육홍보실,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의 꿈을 품고 도전했던 5층 역사자료관과 연구소 숨은 보물창고인 지하 서고까지 깨끗이 비웠다. 상근자들의 끼니를 해결해 주신 주변 음식점 사장님들, 배달원 분들, 늘 급하게 주문해도 신속히 작업해 주시던 복사집, 인쇄소 분들께도 일일이 작별을 고하고 청량리를 떠났다.

 

19

5탁구대 설치를 고민할 정도로 넓게만 느껴졌다던 금은빌딩 3층 6국정교과서 폐기 운동의 산실 2층 교육홍보실 7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의 시범 공간이었던 5층 임시전시실

 

사무실 이전 와중에도 워싱턴·뉴욕·LA 등 미주지부 창립을 위한 순회 강연집회, 항일음악 토크콘서트와 음악회, 박정희 동상 건립 반대 집회, 친일문학상 반대 집회, 서울시민대학 강좌, 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 아산 유해 발굴 시굴조사, 팟캐스트 시즌2 녹화 등 다양한 사업을 이어갔다. 덕분에 상근자들이 돌아가며 몸살과 독감에 시달렸지만 말이다.

 

20

1내부 철거공사 후 마지막 짐을 내리는 금은빌딩 2듬직한 어깨, 친절한 미소로 이사를 기분 좋게 마무리 해 주신 ‘일사천리’ 직원분들 310년 넘게 야스쿠니재판을 지원해 온 일본 변호인들이 금은빌딩의 마지막 추억을 남겼다.

 

새 건물로 이사를 가니 챙길 일도 참 많았다. 고장난 문고리나 전선 공사는 물론 변기 커버도 직접 갈고 쓰레기 분리수거, 출입문 보안까지 모든 것을 점검하고 챙겨야 한다. 동파에 터진 수도 배관을 보며 속 태우는 사무국이나, 자동 개폐식 출입문에 아직 적응 못하는 상근자들, 꽂고 꽂아도 산적한 책들에 허리가 휘는 자료실 인턴들, 1, 2층이 아직 공실이라 고스란히 올라오는 냉기에 발을 동동거리는 3층 연구원들 모두가 아직은 이 공간이 낯설고 서툴기만 하다.
하지만 지난 25년간 한결같은 회원들의 성원과 지지로 만들어진 새 둥지이니 그 안에서 새로 품은 꿈만큼은 창대하다. 연구소는 우리 사회의 비상식・부정의와 싸워 온 지난 25년을 발판삼아 상식과 정의가 뿌리내릴 수 있는 역사운동의 든든한 터전을 이곳 용산 청파동에서 만들어 나가고자 한다. 내일의 역사를 여는 새로운 길에 회원 여러분들이 늘 함께 해 주시길 기대한다.

시민들의 의견

댓글 달기

Plain text

  • 웹 페이지 주소 및 이메일 주소는 자동으로 링크로 전환됩니다.
  • 줄과 단락은 자동으로 분리됩니다.
  • 사용할 수 있는 HTML 태그: <a href hreflang> <em> <strong> <cite> <blockquote cite> <code> <ul type> <ol start type> <li> <dl> <dt> <dd>
이미지
무제한 수의 파일을 이 필드에 업로드할 수 있습니다.
50 MB 한계입니다.
허용된 유형: png gif jpg jpeg.
Enter the YouTube URL. Valid URL formats include: http://www.youtube.com/watch?v=1SqBdS0XkV4 and http://youtu.be/1SqBdS0XkV4.
CAPTCHA
스펨 사용자 차단 질문

[식민지 비망록 51 ]

철도순직자조혼비, 조선철도 1천리 돌파가 남긴 기념물
해마다 용산철도공원에서 벌어진 철도순직자조혼제의 풍경

이순우 책임연구원

 

 

최남선(崔南善, 1890~1957)이 주도한 조선광문회(朝鮮光文會)에서 편찬한 <신자전(新字典) >(1915)의 말미를 보면, 시대의 흐름에 따라 그 뜻이 완전히 색달라졌거나 새로 창안되어 일본 등지에서 흘러들어온 여러 한자어들을 따로 묶어 수록한 부분이 포함되어 있다. 예를 들어, 미국의 달러(dollar)를 불(弗)로 쓴다거나 센트(cent)를 선(仙)으로 표기하는 따위가 그것이다.
또한 서양식 미터법의 도입에 따라 미터(m)는 미(米)로, 그램(g)은 와(瓦) 또는 극(克)으로, 리터(ℓ)는 입(立)으로 사용하는 방식도 이러한 범주에 속한다. 흥미로운 것은 가령 천(粁)과 같은 글자인데, 미터(米)가 천(千)개 모여 있는 모양이므로 이는 곧 ‘킬로미터’를 뜻한다. 마찬가지로 천(瓩)이라는 글자 역시 그램(瓦)이 천(千)개이므로 ‘킬로그램’을 가리키는 표현이 되는 것이다.
야드 파운드법에 따른 한자어에도 재미있는 사례들이 많이 있다. 여기에는 촌(寸, 치)이나 척(尺, 자)과 같은 재래식 단위표기의 개념을 결합 활용하는 방식이 주로 사용되는데, 예를들어 촌(吋)은 인치(inch)이며, 척(呎)은 피트(feet)이며, 마(碼)는 야드(yard)이며, 리(哩)는 마일(mile)을 나타낸다. 이것들은 전적으로 영국(英國)에서 건너온 단위이므로 대개 촌(吋)은 영촌(英寸)이라 하고, 척(呎)과 리(哩)는 각각 영척(英尺)과 영리(英里)라고 적어도 상관이 없다.
한 가지 주목할 만한 사실은 이러한 야드 파운드법에 따른 한자식 표기가 가장 빈번하게 사용되는 영역의 하나가 바로 철도 관련 분야라는 점이다. 아무래도 철도라고 하면 종주국이라고 하는 영국의 영향이 월등히 큰 측면이 있으므로 이곳에서는 유달리 미터법보다는 야드 파운드법이 선호되는 경향이 우세했다. 따라서 정거장 사이의 거리라든가 철도선로의 총연장은 몇 킬로미터가 아니라 몇 마일로 기재되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런데 <매일신보> 1915년 7월 23일자의 제1면 상단에는 ‘조선철도 일천리 개통기념(朝鮮鐵道 一千哩 開通記念) 철도대경주(鐵道大競走)’ 행사를 예고하는 안내 문안이 큼직하게 게재되어 있다. 여기에서 말하는 ‘1천 리’는 ‘1천 마일’을 가리키는 것이므로, 이는 곧 ‘1,609킬로미터’ 남짓한 거리에 해당하는 셈이다. 경술국치 이후 호남선(湖南線, 1914년 1월)과 경원선(京元線, 1914년 8월)이 잇따라 개통된 데에 이어 1914년 10월부터 착공한 함경선(咸鏡線)의 원산 문천 구간 12.5마일이 1915년 8월 1일에 부분 개통됨에 따라 조선총독부 철도국 소관의 철도영업이정(鐵道營業哩程)은 마침내 1,000마일을 돌파하여 총누계 1,006마일을 상회하기에 이르렀다.

이 당시 조선총독부는 대개 산업의 개발과 문화의 보급이 교통운수의 진보에 의지하는 바가 크고, 특히 지방에서는 교통의 발달이 개진(開進) 방법의 최대요건이라 일컬어진다는 뜻에 따라 철도영업거리가 1천 마일을 돌파한 것에 대해 상당한 의미를 부여하였다. 여기에 더하여 조선종관선(朝鮮縱貫線)은 부산의 해륙연락설비와 압록강의 대가교(大架橋)를 통해 유라시아 대교통로 간선철도(歐亞 大交通路 幹線鐵道)의 일부로서 지대한 가치를 지닌다는 해석을 덧붙이기도 했다.
이러한 평가의 이면에는 “조선의 재력(財力)과 부력(富力)의 정도에 비하면 1천 마일의 철도를 가진 것 자체가 조선통치 5년간의 치적에 있어서 가히 자랑거리의 하나가 됨을 부인하기 어렵다”는 자화자찬식의 인식을 깔고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큰 경사이니만큼 때마침 총독정치의 치적을 과시하기 위해 경복궁(景福宮)에서 거행되는 시정오년기념(始政五年記念) 조선물산공진회(朝鮮物産共進會)에 맞춰 성대한 축하회와 더불어 기념조형물을 건립하려는 계획이 진즉부터 추진되고 있었던 것으로 드러난다.
이에 따라 한창 공진회가 진행중이던 1915년 10월 3일에는 일본 황족 칸인노미야(閑院宮)와 이른바 ‘창덕궁 이왕(昌德宮 李王; 순종)’, 그리고 데라우치 조선총독을 비롯하여 야마가타 정무총감 등 총독부 고위관리들이 일제히 참석한 가운데 경복궁 근정전에서 조선철도 1천리 기념축하식이 거행되고, 경회루에서는 축하연회가 열려 성황을 이루었다. 이튿날인 10월 4일 오후 2시에는 철도국 소관 용산철도정원(龍山鐵道庭園, 나중의 용산철도공원)에 건립된 조혼비(弔魂碑) 앞에서 제막식을 겸해 철도순직자조혼제(鐵道殉職者弔魂祭)가 열렸고, 곧이어 이웃하는 철도구락부(鐵道俱樂部)로 자리를 옮겨 국원공적표창식(局員功績表彰式)이 진행되었다.

이때 제막된 ‘조혼비’는 추풍령(秋風嶺)에서 채석한 화강암으로 제작되어 총 높이가 41.6 척(尺; 12.6미터)에 달했으며, 비면의 글씨는 데라우치 총독이 쓴 것으로 드러난다. 그리고 여기에는 총독부 철도국 장관 오야 곤페이(大屋權平, 1862~1924)가 지은 비문이 부착되어 있었는데, 그 내용을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비석의 앞면은 조선총독 데라우치 백작의 휘호이다. 조선철도는 경인선으로 효시를 삼는다. 이윽고 경부철도의 부설계획이 있었는데, 이때 일로(日露, 일본과 러시아)의 국교(國交)가 장차 위태로워지려 하매 우리 정부(일본정부)는 곧 보조 공비를 내어 이를 서둘러 완성하려했다. 오래지 않아 간과(干戈, 방패와 창)가 충돌하여 향도(餉道, 군량을 나르는길)가 긴급을 요하는 상황으로 바뀌었다. 정부는 다시 육군으로 하여금 경의, 마산 양 철도의 속성을 서둘러 동사자(董事者)는 밤낮으로 병마(兵馬)를 바삐 분주하게 한 사이에 3선은 모두 완성되었다. 평화극복 후에 여러 선로는 국유(國有)로 귀속되고 통감부를 거쳐 총독부 관리로 옮겨졌다. 기설선로가 개수되었고, 압록강 갑교(閘橋)가 가설됨으로써 유라시아대륙과 연락이 되고 국제철도의 대열에 들어서게 되었다. 평남, 호남, 경원 3선로가 완성되고 다시 함경선의 기공으로 나아갔다. 이 사이에 봉공순직(奉公殉職)한 사람이 매우 많았는데 자신을 돌보지 않은 절개를 어찌 백전무공(百戰武功)이라 하지 않으리. 이에 철도 일천리의 가신(佳辰, 경사)을 맞이하여 그 영혼을 위로하고자 비석을 세우고 동도지은(同道之恩)을 오래도록 기록하노라.
대정 4년(1915년) 10월 조선총독부철도국장관 공학박사 오야 곤페이 짓고 쓰다.

 

이로부터 해마다 10월 4일에는 이곳에서 철도종사자로서 철도건설이나 유지보수 과정에서 희생되거나 운수업무에 종사하다가 순직한 이들에 대한 조혼위령제가 꼬박꼬박 거행되는 풍경이 펼쳐졌다. 다만, 1937년에 총독부 철도국이 경인철도 시절에 노량진 제물포 구간을 처음 운행한 날인 9월 18일을 택하여 ‘철도기념일(鐵道記念日)’을 새로 제정한 것에 영향을 받아 1940년 이후로는 바로 이 날짜에 조혼제가 열리는 것으로 변경되었다.
남아 있는 자료의 한계로 해마다 증가하는 철도순직자의 추이를 따로 집계할 수는 없었으나, 최소한 1940년으로 접어드는 시기에 그 숫자가 현저하게 증가하는 현상만큼은 충분히 감지할 수 있다. 예를 들어, 1932년에 누적 순직자는 2,790명(전년대비 +146명)이었던 것이 1939년에는 4,137명(+296명)으로, 다시 1943년에는 조혼제의 합사자(合祀者)가 6,132명(+593명)으로 급증한 것으로 나타난다. 

 

이는 절대 규모면에서 1915년 최초의 조혼제 당시 철도순직자의 총수가 635명이었다는 점과도 크게 대비가 된다. 이와 같은 시기에 조선경찰협회와 조선소방협회의 주관으로 해마다 경복궁 근정전 용상에
제단을 설치하고 행사를 치른 순직경찰관 경방직원초혼제(警防職員招魂祭)의 경우, 1944년 10월 현재 순직경찰관이 403명에 순직소방수가 55명으로 이를 모두 합쳐도 458명 정도의 규모였다. 이러한 사실과 비교하면, 철도순직자의 규모가 압도적이었다는 것을 그대로 실감 할 수 있을 듯하다.
그런데 이곳 조혼비가 자리한 용산철도공원 일대(지금의 ‘한강로 3가 65번지’ 철우아파트및 용산세무서가 자리한 위치)는 야구대회나 자전거경주 등 여러 가지 체육행사가 벌어진 공간이라는 점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이곳에서는 심지어 풀장이 마련되어 이곳에서 수영대회가 열리거나 근처의 연못에서 아이스하키 대회가 거행된 시절도 있었다.
이에 관해서는 우선 <동아일보> 1930년 4월 12일자에 연재된 「10주년 기념 조선야구사(朝鮮野球史), (10) 조선 최초의 야구대회」 제하의 기사를 보면, 1915년 6월 13일에 조선공론사(朝鮮公論社)가 전조선야구대회(全朝鮮野球大會)를 최초로 이곳 용산철도공원, 속칭 ‘구(舊) 그라운드’에서 개최하였다는 내용이 남아 있다. 이때 참가단체로는 철도구락부청년단, 체신구락부, 조선은행군, 경성중학, 경성실업구락부군, 철도구락부소년단 등 여섯 팀 이외에 조선인 단체로 오성친목회군(五星親睦會軍)이 유일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그리고 이곳은 용산 병영지의 인접지역에 자리한 탓에 이곳에 일본군 병력이 집결한 흔적도 곧잘 눈에 띈다. 예를 들어 <매일신보> 1916년 4월 15일자에는 신설되는 제19사단 병력과 종전의 조선주차 제9사단 병력이 교대되는 상황에서 이들에 대한 환송 및 환영을 위한 대원유회(大園遊會)가 용산철도공원에서 펼쳐질 예정이라는 기사가 수록되어 있다. 또한 1930년 10월에 사단대항연습(師團對抗演習)이란 대규모 군사훈련이 거행될 당시에는 이 일대에서 고사포대(高射砲隊)가 진지를 펼친 한편 훈련참가부대의 강평회(講評會)와 야연(野宴)이 벌어지기도 했다.
한편, 해방 이후 시기에 이르러 일제가 용산철도공원에 조성했던 철도순직자조혼비가 어떻게 처리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단서도 찾을 수 없다. 그 대신에 별도의 순직비가 조성되고 순직철도종사원에 대한 합동추도식이 해마다 재연된 흔적이 완연히 포착된다. 이와 관련하여 <경향신문> 1955년 9월 18일자에 수록된 「합동위령제 엄수, 철도사고 순직자」 제하의 기사는 어떠한 연유로 철도순직자에 대한 위령제가 재개된 것인지를 잘 설명해주고 있다.

교통부에서는 16일 오후 1시부터 용산에 있는 동부(同部) 후정에서 제3차(회) 순직자합동위령제(殉職者合同慰靈祭)를 거행하였다. 그런데 금번 위령제는 (단기) 84년(1951년) 9월 1일 이래 철도운수사업에 종사하다 불의의 사고로 순직한 141주(柱)의 영령을 추도하기 위한 것으로 위령제가 끝난 후 유가족들에게는 광목(廣木) 반 통과 기타 물품이 증정되었으며, 특히 동 위령제에 참석하기 위하여 지방에서 상경한 유가족들을 위로하기 위하여 시내 극장에 안내하고 이들에게 위안의 하루를 보내게 하였다.

 

여기에 나오는 교통부(交通部)의 후정(後庭)이라고 하는 곳은 ‘한강로 3가 63번지 구역’에 자리한 교통고등학교 구역을 가리킨다. 1953년 7월 부산에 피난중이던 정부가 환도(還都)할 적에 오갈 데가 없어진 교통부가 용산의 교통학교 교재전시장(敎材展示場) 용도로 사용하던 건물을 새로운 청사로 삼아 터를 잡았고, 그 후 1963년 9월 1일에는 철도청(鐵道廳)이 발족하면서 교통부 청사를 그대로 물려받아 사용하게 되었던 것으로 확인된다.
이러한 연유로 철도순직자위령제가 벌어지는 공간은 시기에 따라 교통부 후정이나 철도청 뒷마당으로 표기되었고, 또 어떤 때는 순직비의 소재지가 철도고등학교 교정(校庭)이라거나 교통공무원교육원 뒤뜰로 표기되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한국전쟁이라는 혼란기가 실제로 다수의 철도순직자를 만들어냈고, 그것이 촉매제가 되어 일제의 유습(遺習)이 분명했던 철도순직자 조혼제의 관행은 그 유래를 따질 겨를도 없이 불과 7, 8년 사이에 고스란히 부활하는 상황이 초래되고 말았던 것이다.

수, 2019/10/30- 01:36
4
0

[후원회원 마당]

김산의 <아리랑>로드를 찾아서(2)

주동욱 서울 송파 후원회원

광주(광저우)에 도착하다

2020년 1월 10일 ‘아리랑 답사단’ 33명이 4박 5일 일정으로 중국 광주(광저우, 廣州)에 도착했다. 민족문제연구소 광동지부 회원들이 공항에 나와 반갑게 맞이했다. 〈아리랑 로드〉 답사는 독립운동 유적지 발굴과 연구에 앞장선 광동지부 회원들이 기획했다.
중국 남방지역 역사 답사는 드문 편이다. 이번 〈아리랑 로드〉는 독립운동사 전공자도 처음 방문하는 곳이 많고, 김산(金山)의 삶에서 가장 치열했던 현장을 찾아가는 답사여서 관심을 끌었다. 버스에서는 이정찬 교수의 열정넘친 중국 근대사 강의가 날마다 이어졌다. 〈아리랑〉과 〈김산평전〉을 읽는 답사자도 눈에 띄었다.
첫날 광주공항에서 동쪽으로 험한 길과 산을 넘어 용문현(龍門縣) ‘홍군 4사(紅軍 4師) 주둔지’에 도착했다. 1927년 12월 광주봉기(광저우기의) 실패 후 약 1,200여 명의 봉기군이 화현(花縣, 현재 화두 화성소학교)에서 개편한 부대가 홍군 4사이다. 김산을 비롯한 조선인 20여 명이 홍군 4사에 있었다.

 

고담진과 해풍 답사

이튿날 고담진(가오탄, 高潭鎭)의 ‘붉은 거리’를 산책하며 본격적인 답사에 나섰다. 홍군 4사부대가 잠시 머물렀던 ‘붉은 거리’는 1927년 러시아혁명 10주년을 맞이해 조성되었다. 마르크스 동상이 세워진 광장을 중심으로 마르크스거리, 레닌거리가 이어졌고 건물마다 사회주의 혁명 구호가 적혀있다.
답사단은 연화산(蓮花山) 선인동을 거쳐 해륙풍(하이루펑, 海陸豊)의 주요 도시인 산웨이(汕尾) 해풍(하이펑, 海豊)으로 향했다. 광동성 해풍현(海豊縣)과 륙풍현(陸豊縣)을 합쳐 부르는 해륙풍은 중국 최초로 농민소비에트가 세워진 곳이다.
농민혁명가 팽배(펑파이, 彭拜)가 일찍이 해풍에서 농민운동을 전개하며 농민자위군을 창설했다. 광주에서 반혁명 정변(1927.4.15)이 일어나자 팽배가 지도하는 농민자위군이 해륙풍에 혁명근거지를 마련한다. 그 뒤 남창봉기(南昌蜂起,1927.8.1)에 참가한 부대가 해풍에 도착하여 홍군 2사(紅軍 2師)로 편성되었다. 마침내 홍군 2사와 혁명군이 봉기(1927.10.30)하여 해륙풍 일대에 소비에트 정권을 수립한다.

 


‘팽배의 도시’답게 그를 기리는 기념관과 동상이 곳곳에 세워져 있다. 답사단이 ‘해풍혁명투쟁사기념관’에 도착하자 기념관장이 직접 안내를 했다. 해륙풍 소비에트 역사를 비롯해 광동꼬뮌과 중국대혁명(동정・북벌)에 참여한 조선인 기록물이 전시되어 있다. 그 중 약산 김원봉(金元鳳)과 김산 등 조선인 혁명가 15명의 사진이 눈에 띄었다.
‘홍궁 홍장(紅宮 紅場)’은 해풍소비에트 대표회의와 군중대회가 열린 곳이다. 김산을 비롯해 홍군 4사가 해풍에 도착하자(1928.1.6) 수 만 명이 홍장에 모여 ‘인민대회’와 ‘조선인동지환영대회’를 열었다. 특히 홍장에는 홍군 2사와 홍군 4사 부대의 상봉 장면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대형 조각상이 세워져 있다.
김산이 교편을 잡았던 ‘동강당교(東江党校, 현재 해성제2소학교)’를 방문했다. 학교에서 답사단을 맞아 환영회를 열고, 교장이 당시 조선인의 활약에 대해 설명했다. 김산은 동강당교 교관으로 세계혁명사, 경제학 등을 강의하며 선전공작을 지도했다. 김산을 비롯한 조선혁명가들은 해풍 소비에트에 깊은 관심을 보였으며, 언젠가 조국에 돌아가 이러한 운동을 이끌겠다는 꿈을 가졌다고 한다.
곧이어 당시 격렬한 전투가 벌어진 ‘오파령(우푸링, 五坡岭)’을 찾았다. 〈아리랑〉에서 ‘오복령(五福嶺)’으로 잘못 표기된 곳으로 지금은 한적한 공원으로 바뀌었다. 1928년 5월, 홍군은 해풍을 포위한 국민당 정부군에 맞서 오파령에서 최후의 결전을 펼쳤으나 패한다. 김산은 생존자의 최후 집결지인 검유령(젠유링, 劍遊嶺)을 거쳐 홍콩으로 탈출하며 목숨을 건졌다. 광동지부에서는 연화산 일대를 검유령으로 추정하고 있다. 답사단은 ‘홍군 4사 임시사령부’가 있던 부담촌(浮潭村)에 들린 뒤 동관(東莞)으로 향했다. 동관은 제1차 중・영전쟁(아편전쟁)이 일어난 곳이다.

 

광주(광저우) 답사

중국 광주는 중국 대륙 남부를 굽이쳐 흐르는 주강(珠江) 삼각주 하류에 자리 잡은 도시다. 광주에서 답사는 이틀 동안 진행되었다. 편의상 중국근대사 서술에 따라 답사 유적지를 정리했다.

 

1) 황화강72열사능원(黃花崗七二烈士陵園) 3・29봉기(황화강사건)의 희생자 72명이 묻혀있는 곳이다. 1900년대 초부터 쑨원이 이끄는 중국혁명동맹회가 청나라에 맞서 무장봉기 했으나 거듭 실패한다. 1911년 4월 27일(음력3월 29일), 120여 명의 결사대가 다시 봉기했지만 86명이 희생되었다.
동맹회 회원 판다웨이가(潘达微)가 피로 얼룩진 시신 72명을 찾아 수습해서 황화강에 매장했다. 3・29봉기는 비록 실패했지만 그 해 10월 10일 우창봉기(武昌蜂起), 곧 신해혁명(辛亥革命)의 도화선이 되었다.

 

 

2) 루쉰기념관(魯迅紀念館)・중국국민당1차대회의 구지
루쉰은 광주 중산대학에서 잠시 교편을 잡았다. 기념관에 루쉰의 숙소와 강의실 등을 꾸며 놓았다. 루쉰기념관에는 국민당 제1차 전국대표회의가 열린 강당이 보존되어 있다. 제1차 국공합작을 결정한 역사적 장소이다.
1924년 1월 20~30일에 중국국민당 대표회의가 열렸다. 공산당원 모택동(毛澤東)・구추백(瞿秋白) 등도 참여해 국민당 중앙집행위원으로 당선된다. 약산 김원봉(金元鳳)과 권준(權晙)은 강당 2층에서 대회를 참관했다. 신흥무관학교 출신인 두 사람은 그뒤 황포군관학교 4기생으로 졸업하고 북벌에 참전했다.

 

 

3) 황포군관학교(黃埔軍官學校)
국공합작이 이루어진 뒤 쑨원이 코민테른의 지원을 받아 1924년 6월 황포군관학교를 설립한다. 정식 명칭은 ‘중국국민당육군군관학교’이지만 광주시 황포 장주도(長州島)에 있었기 때문에 ‘황포군관학교’라고 불렀다. 개교 뒤 학교장에 장개석(蔣介石), 정치부 부주임에 주은래(周恩來)가 선임
되었다.
1925년 8월경 의열단 간부진과 단원이 광주로 오고, 의열단 본부도 광주로 옮긴다. 그 뒤 김원봉을 포함한 의열단원과 많은 조선인이 황포군관학교에서 훈련을 받거나 교관으로 활동했다.

 

 

4) 중산대학 구지(中山大學 舊址)
쑨원(孫文)은 황포군관학교를 열고난 뒤 정치 간부도 양성하고자 1924년 11월 국립광동대학을 설립한다. 이듬해 쑨원이 서거하자 그의 호를 따서 1926년에 중산대학으로 개칭했다.
1926년 〈국립중산대학 학생명책〉에 따르면 50명에 가까운 조선청년들이 중산대학에서 공부했다. 김산은 1926년 중산대학 의학과에 편입하고, 유월(留粤, 광동의 별칭)한인청년동지회・조선혁명청년연맹에서 조직 활동을 한다. 시인 이육사(李陸史)도 김산과 함께 유월한인청년동지회 집행위원으로 활동했다.

 

5) 광주기의열사능원(廣州起義烈士陵園)

1926년부터 북벌이 시작되었다. 국민혁명군이 우한(武漢)을 함락하고 광주에 있던 국민정부를 우한으로 옮겼다.
그러자 장개석이 상해에서 반공쿠데타(1927.4.12)를 일으키고 남경에 국민정부를 세운다. 중국의 정세가 급격하게 바뀌었다. 국공합작은 결렬되고, 광주에서도 국민당이 대숙청을 벌였다.
1927년 12월 11일 광주에서 ‘기의(起義)’했지만 3일만에 무너지고 7,000여 명이 희생되었다. 그 중에는 “광주와 중국을 혁명의 바람 속으로! 우리 조국을 독립의 바람 속으로!”라는 구호를 외치며 봉기에 참여한 약 200여 명의 조선인도 포함되었다.
광주봉기를 기리고 희생자를 추모하기 위해 대규모 열사능원이 조성되었다. 정문에 들어서면 정면에 억센 손으로 총을 쥐고 있는 조각상이 보인다. 열사능원 공원에 있는 ‘혈제헌원정(血祭軒轅亭)’과 동상도 눈길을 끌었다. 옥중결혼식을 올리고 같은 날 처형된 저우웬용(周文雍)과 첸티웨진(陣鐵軍)를 추모하
기 위해 세웠다.
많은 한인들이 ‘중조인민혈의정(中朝人民血誼亭)’을 찾는다. 중조혈의정 석비 앞면에 “중국조선 양국 인민의 전투로 쌓은 우의여, 영원하라!(中朝兩國人民的戰鬪友誼萬古長靑!)”는 글씨가 큼직하게 쓰여 있다. 아리랑 답사단의 묵념이 끝나자 열사능원에 어느덧 긴 어둠이 내렸다.

 

6) 중산기념당(中山紀念堂)

중산기념당은 중국혁명의 선구자 쑨원을 기리기 위해 축조되었다. 쑨원의 친필 ‘천하위공(天下爲公)’이라는 글이 새겨진 커다란 편액이 정문에 걸려있다.
“추호의 사심도 없이 백성을 위한다.”는 글 뜻에서 쑨원의 드넓은 흉금을 느낄 수 있다.

 

7) 대한민국임시정부광동청사(東山栢園)

광주에 대한민국임시정부 청사 건물이 남아있다. 1938년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임정요인들과 가족이 호남성 장사(長沙)를 떠나 7월 22일 광주에 도착했다. 임정요인들은 광주 동산백원(東山栢園)에서 약 두 달 간 머무르며 집무를 보았다. 2017년 건물의 현존 사실이 공식 확인되었지만 입구에 아무런 표식이 없다.

8) 대신공사 옛 건물·동아대주점·대동빈관

유림대표 김창숙(金昌淑)이 1919년 광동으로 오자 환영회를 개최한 대신공사 옛 건물, 3·1 독립선언 4주년 기념식을 치른 동아대주점, 여운형(呂運亨)·신규식(申圭植)·민필호(閔弼鎬)가 묵었던 대동빈관 건물이 남아 있다.

 

답사를 마치며

 

광동성은 옛 월(越)나라 땅이었다. 변방은 변혁의 땅으로 거듭났다. 태평천국운동, 변법자강운동, 민족・민권・민생의 삼민주의가 움텄던 중국혁명의 발상지 광동성은 곧 중국의 근현대사라고 해도 과
언이 아니다.
1920년대 김산・이영(李瑛, 이준열사아들)・박진(朴鎭) 형제 등 수많은 엘리트 조선인이 광동으로 왔다. 이념은 조금씩 달랐지만 이들은 모두 ‘진리를 탐구하고’ 중국혁명의 승리와 더불어 조선의 독립을
실현하려는 꿈을 갖고 있었다.
넷째 날 답사단은 영서봉림으로 이동해 송별회를 가졌다. 약 한 세기 전 뜨거운 조국애를 갖고 숨진 열사들을 기억하며 부른 ‘임을 위한 행진곡’ ‘광야에서’ ‘인터내셔널가’의 노랫소리가 광동성 널리 울려 퍼졌다. 분단으로 위축된 이념에서 벗어나면, 우리의 독립운동사가 보다 깊고 넓다는 것을 느낀 답사였다.
2020년 〈아리랑 로드〉 답사는 민족문제연구소 광동지부 회원들의 헌신과 노고가 아니었다
면 불가능했다. 김유 지부장이 불편한 몸을 이끌고 끝까지 동행했고, 박호균 사무국장과 신광용・김선주 선생이 애정과 열정으로 답사를 이끌었다. 또 많은 광동지부 회원이 함께 동행했다. 다시 한 번 감사드린다.

목, 2020/03/26- 03:04
4
0

[식민지 비망록 56]

수원화성 방화수류정 언덕에 자리했던 순직경찰관초혼비
3•1만세운동 때 처단된 일본인 순사들을 위한 기념물

 

이순우 책임연구원

 

수원화성 팔달문 쪽에서 성벽 옆의 계단길을 삼백미터 남짓 따라 올라가면 서남 암문 앞쪽에 이르러 숲속의 작은 빈터에 자리한 ‘3.1독립운동기념탑’을 만나게 된다. 이것은 1969년 3월 1일 ‘삼일독립기념탑’이란 명칭으로 중포산(中布山)에 조성되었던 것을 삼일동지회(三一同志會, 1969년 4월 12일 창립)에 의해 그해 10월 15일에 다시 지금의 자리로 이전 건립한 것으로 알려진다.
그런데 이 기념탑 바로 옆에는 이것과 함께 옮겨온 약간은 이색적인 또 다른 기념비 하나가 남아 있는데, 가까이 가서 살펴보니 앞뒷면에 한글로 ‘대한민국독립기념비’라고 새겨넣은 것이 눈에 띈다. 한쪽 옆에는 ‘수원읍민 수원군내 학생 일동’이라고 되어 있고, 다른 한쪽에는 ‘단기 4281년 8월 15일 건립(유근홍 씀, 이상훈 만듬)’이란 글씨가 있다.

 

수원 팔달산에 자리하고 있는 ‘대한민국독립기념비’의 모습이다. 원래 수원화성 화홍문 옆 방화수류정 언덕에 있었으나 1969년에 지금의 자리로 옮겨졌다.

 

<동아일보> 1949년 1월 18일자에 수록된 ‘대한민국독립기념비’ 제막 관련 기사이다. 일제 때 조성된 ‘순직경찰관초혼비’를 헐어내고 바로 그 자리에 이 비석이 건립되었다.

 

이 비석의 건립 내력이 궁금하여 신문자료를 찾아보았더니, 한참의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 <동아일보> 1949년 1월 18일자에 수록된 「수원에서 대한독립기념비 제막식 성대 거행」 제하의 기사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보인다.

 

[수원] 잔악무도한 왜적을 이 땅에서 몰아내고 또 그대들이 세운 가증한 공비를 부시고 왜적들로 말미암아 쓰러진 수많은 선열들의 거룩하신 유업을 찬양하는 동시에 이 땅의 독립을 영구히 빛내일 독립기념비의 거사는 수원읍내에 세우기로 결정되어 민(閔) 군수를 비롯한 26만에 달하는 군민들의 끊임없는 지성으로 지난해 10월 22일부터 착공하여 오던 바 연공사일 80일 만에 52만여 원에 달하는 거액을 던진 공사는 드디어 준공되었던 것이다. (사진은 동 독립기념비)
역사를 자랑하는 수원군민들의 기쁨은 더 한층 크련만 지하에 잠든 투사들의 영령 좋아 이 비(碑) 위에 감돌아 춤출 것이다. 이 뜻 깊은 기념비의 제막식은 드디어 지난 16일 상오 11시부터 이(李) 대통령 대리인 신(申性模) 안(安浩相) 신(申翼熙) 국회의장을 비롯하여 구(具滋玉) 경기도지사와 당지 유지 다수 참석하 먼저 국민의례에 이어 민(閔泰鼎) 군수의 열렬한 식사가 있고 제막이 있은 후 신 내무장관으로부터 뜻 깊은 독립기념비 제막에 당하여 여러 학생과 군민들에게 말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 대한민국은 세계열강이 승인한 독립국가이며 이 기쁨이란 바로 여기 세운 기념비와 같이 있는 것이다.(하략)

 

이 기사를 통해 이 비석은 표면상으로 대한민국 정부수립일인 1948년 8월 15일에 건립한 것으로 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그 이듬해인 1949년 1월 16일에 제막된 것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또한 이 기사에는 “그대들이 세운 가증한 공비를 부시고”라는 구절이 등장하는데,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이에 관한 궁금증은 <조선중앙일보> 1949년 1월 18일자에 수록된 <대한독립기념비, 내무장관 참석 제막식> 제하의 기사를 통해 풀어낼 수 있다.

 

16일 아침 9시 30분 경무대를 나선 내무장관 신성모(申性模) 씨 수행을 따라 경원(京原)간 40리(哩, 마일) 연도의 싸늘한 공기를 헤치고 기자는 이곳 방화수류정(訪花隨柳亭) 언덕 위에 뜻 깊이 선 대한민국독립기념비(大韓民國獨立記念碑) 제막식에 참가하였다.……
이 기념비는 지난 10월 22일에 착공하여 준공까지 연공사일(延工事日) 80일간 그리고 52만 원의 공사비로 민(閔) 수원군수와 유지를 비롯한 26만 명의 군민과 더불어 어린 3만 명 학도들의 열렬한 지성의 결정으로 된 것이다.
그리고 더욱 이 비는 3.1독립운동 당시 우리의 애국선열들을 무참히도 학살(虐殺)하고 맞아죽은 노구치 고조(野口廣三)과 가와바다 도요타로(川端豊太郞)의 가증 무쌍한 추념비(追念碑)를 8.15 해방과 함께 분쇄(粉碎)하여 버린 그 자리에 지금 맑게 개인 하늘 아래 우리가 꿈속에도 그리워 마지않던 독립비는 당당히 그 자리를 힘차게 나타낸 것이다.(하략)

 

여기에는 일본인들이 세운 비석의 정체가 “3.1 독립운동 당시 우리의 애국선열들을 무참히도 학살하고 맞아죽은 일본인 순사들의 가증 무쌍한 추념비”라고 밝히고 있다. 이들 중 노구치 고조(野口廣三, 1889~1919)는 수원경찰서 순사부장으로 1919년 3월 28일 만세시위대를 진압하기 위해 부하들을 이끌고 현지에 파견되었다가 수원군 송산면 사강리에서 권총을 발사하였고 이에 격분한 시위군중들에게 쫓겨 돌에 맞아 처단된 인물이었다. 그리고 가와바다 도요타로(川端豊太郞, 1895~1919)는 수원경찰서 화수리경찰관주재소의 순사이며, 1919년 4월 3일 수원군 우정면 화수리에서 주재소로 몰려든 시위대를 진압하고자 총격을 가하며 도망을 가다 그를 추격한 군중에 의해 역시 처결되었다.

 

<순직경찰 소방직원 초혼향사록> (1937)에 수록된 노구치 순사부장과 가와바다 순사 관련 항목이다. 여기에는 “소요사건 때 폭동진압 중 투석(投石)에 중상을 입어 사망”이라고 적고 있다. (민족문제연구소 소장자료)

 

1937년에 발행된 <순직경찰 소방직원 초혼향사록(殉職警察 消防職員 招魂享祀錄)>을 보면, 노구치 순사부장과 가와바다 순사의 순직 원인을 “경기도 수원경찰서 관내에서 소요사건 때에 폭동 진압 중 투석(投石)으로 중상을 입어 사망”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경성일보> 1919년 4월 12일자에 수록된 수원경찰서 노구치 순사부장과 화수리주재소 가와바다 순사의 사망에 관한 보도내용이다.

 

그러니까 이들의 추모비를 걷어내고 이 자리에 ‘대한민국독립기념비’를 건립한 것은 비단 대한민국 정부수립을 기리는 데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일제의 탄압에 숨진 만세시위대 희생자들을 기리는 뜻도 함께 포함된 것으로 풀이된다. 듣자하니 독립기념비의 기단석은 추모비의 것을 그대로 사용하였다 하니 어찌 보면 그 자체가 일제치하를 벗어난 극복의 의미를 일부나마 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죽은 일본인 순사들을 위한 비석은 언제 만들어진 것일까? 이 부분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뚜렷한 자료가 알려진 바 없었으나 일제강점기에 발행된 일본어 신문 몇 종류를 뒤져보니, <경성일보(京城日報)> 1926년 6월 30일자에 수록된 <순직경관 기념비, 27일 성대한 제막식을 거행> 제하의 기사를 통해 간신히 다음과 같은 기록을 찾을 수 있었다.

 

<경성일보> 1926년 6월 30일자에 수록된 이른바 ‘순직경찰관초혼비’의 제막 당시 모습이다. 이 비석의 사진자료가 공개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수원] 전부터 화홍문(華虹門)의 고대(高臺)에 건설중이던 순직경관(殉職警官)의 초혼기념비(招魂記念碑)가 준공되어 27일 오전 10시부터 성대한 제막식이 거행되었다. 참렬자는 지원(地元, 그 지방) 수원(水原)및 경성의 관민 수백 명으로 순직자 가와바다 도요타로(川端豊太郞)의 유족(遺族, 모당, 누이, 딸)이 제막의 거적을 당겼고, 남성적인 여름의 햇볕을 받아 눈부시게 서 있는 기념비는 영원히 빛나는 순직자의 영예 그것과도 같으며, 식후 비전(碑前)에서는 무도대회(武道大會)를 거행, 도내 각서(各署)에서 30조(組)가 출장하여 장렬한 시합을 벌였고, 본사 기증의 특제메달을 받은 고점시합(高點試合)의 우승자는 다음과 같다. (사진은 기념비) (이하 내용 생략)

 

여기에서 말하는 ‘화홍문의 고대’는 앞서 ‘대한민국독립기념비’의 제막장소였던 ‘방화수류정 언덕’과 동일한 장소를 가리키는 표현이다. 특히 이 기사에는 그동안 전혀 알려진 바 없었던 비석의 사진자료가 함께 수록되어 있다는 것이 매우 주목할 만한 부분이기도 하다. 이 사진을 통해 비석의 전면에는 ‘순직경찰관초혼비(殉職警察官招魂碑)’라는 글자가 새겨진 사실을 확인 할 수 있다.
<순직경찰 소방직원 초혼향사록>(1937)을 살펴보면, 일제강점기를 통틀어 수원경찰서 관내에서 순직한 경찰관은 노구치 순사부장과 가와바다 순사 이외에는 전무하였다는 것이 드러나므로, 이 초혼비는 결국 전적으로 3.1만세사건 당시에 숨진 두 일본인 경찰관을 위한 것이었음이 분명해진다. 이러한 연유로 이곳에서는 일제가 패망할 때까지 해마다 4월이 되면 이들을 위한 초혼제가 거행된 흔적을 어렵잖게 발견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조선신문(朝鮮新聞)> 1935년 4월 29일자에 수록된 「수원경찰관(水原警察官) 초혼제(招魂祭) 집행」 제하의 기사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포착된다.

 

[수원] 일찍이 수원경찰서 관내에서 폭민(暴民) 때문에 순직(殉職)했던 노구치(野口), 가와바다(川端) 양 경찰관에 대한 제17회 초혼제는 수원경찰서 및 경우회(警友會) 주최 아래 4월 27일 오후 1시부터 양씨 기념비전에서 집행할 예정이었으나 공교롭게도 당일 우천(雨天) 탓에 공립보통학교 강당에서 집행, 제주(祭主) 후지타 서장(藤田署長), 경우회장(警友會長), 곤도 토라노스케(近藤虎之助), 내빈(來賓) 오카와우치 군수(大河內郡守)의 제사(祭詞)와 옥관봉전(玉串奉典) 등이 있은 후에 후지타 서장으로부터 경우회 및 내빈에 대한 인사를 마치고 개연(開宴)이 있었는데 당일의 인원은 이백여 명으로 종래 그 예를 보면 성의(盛儀)를 이뤘다.

 

<매일신보> 1929년 5월 13일자에 수록된 제9회 순직경찰관초혼제의 광경이다. 여기에는 경복궁 근정전 용상이 죽은 일본순사들의 제단으로 사용되는 모습과 야마나시 조선총독이 제단에 옥관(玉串, 타마구시)을 바치는 장면이 수록되어 있다.

 

참고적으로, 다른 지역의 사례도 살펴보니까 3.1운동 과정에서 죽은 일본군 헌병과 조선인 헌병보조원을 위한 기념비가 건립된 흔적이 눈에 띈다. 우선 강원도 이천군에서는 이천헌병분견소(伊川憲兵分遣所)의 헌병보조원으로 있다가 죽은 고세진(高世鎭)을 위한 비석이 건립되어 1921년 10월 15일에 제막된 일이 있었으며, 평안남도 성천군에서는 1919년 3월 4일에 중상을 당하여 결국 숨진 성천헌병분대장 헌병대위 마사이케 카쿠조(政池覺造)의 기념비가 특히 사이토 조선총독의 휘호를 받아 1925년 10월 10일에 제막된 사실이 확인된다.
그런데 노구치 순사부장과 가와바다 순사의 경우, 그들에 대한 초혼제가 수원지역에서만 거행된 것은 아니었다. 그들의 초혼비가 건립되기 이전에 이미 1921년 4월 26일에 조선경찰협회(朝鮮警察協會)의 주관으로 처음 시작된 ‘순직경찰관초혼제’에도 당연히 대상자에 포함되어 있었다. 이 초혼제는 초기에는 남산공원 광장, 왜성대, 광화문 경찰관강습소 등에서 거행되었고, 1926년 7월 4일에 열린 제6회 순직경찰관초혼제 때에 경복궁 근정전으로 자리를 옮겨 거행되는 과정이 이어졌다.
그리고 이듬해인 1927년에는 막 준공된 조선총독부 신청사 대홀에서 열렸다가 다시 1928년부터는 경복궁 근정전으로 되돌아왔으며, 그 이후로 줄곧 이곳에서 어김없이 초혼제가 개최된 바 있었다. 1935년부터는 ‘순직소방수’에 대한 초혼제도 곁들여 함께 거행되기 시작했으나, 이 시기에도 경복궁 근정전의 용상이 이들을 위한 제단으로 사용되는 고약하고도 어처구니없는 상황은 그대로 지속되었다.
이처럼 죽은 ‘왜놈 순사들’을 극진히 모시는 초혼제는 해마다 거행되면서도 정작 그들에 의해 희생된 조선인들을 위한 추모행사가 벌어졌다는 얘기는 결단코 들어본 적이 없다. 이 점에 있어서 <동아일보> 1923년 5월 21일자에 수록된 「수원사건(水原事件)에서 김상옥사건(金相玉事件)까지, 허다참극(許多慘劇)의 와중(渦中)에 순직했다는 경관이 46명, 그 중에는 조선사람도 열아홉」 제하의 기사에는 이러한 초혼제를 지켜보는 그 당시 조선인들의 심정이 과연 어떠했는지를 엿볼 수 있는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늦은 봄비가 개일 듯 말 듯한 작일 왜성대(倭城臺)에서는 조선경찰협회(朝鮮警察協會)의 주최로 소위 순직경관(殉職警官)의 초혼제(招魂祭)를 거행하였다. 그리하여 초혼의 제물을 받는 그들 중에는 전염병(傳染病)의 예방에 종사하다가 병이 들어 죽은 자도 있으며, 저희들끼리 격검(擊劍)연습을 하다가 맞아 죽은 자도 있으며, 물에 빠진 사람을 건지려다가 죽은 자도 있고, 강도(强盜)나 절도(竊盜) 범인을 잡으려다가 죽은 자도 있고, 그리고 또한 가지는 무수한 조선독립단(朝鮮獨立團)들을 죽이다가 다시 독립단들의 들쳐오는 총칼에 맞아 죽은 자도 있다. 그리하여 독립단의 손에 죽어 버린 자는 전체 일백 한 사람 중에서 마흔 여섯 사람이나 되며 다시 그 중에서 열아홉 사람은 조선의 아비를 모시고 조선의 아들을 거느린 조선사람이다.
그리하여 조선의 독립을 위하여 힘쓰는 독립단과 또는 독립에 관한 사건으로 싸우다가 죽은 자는 지금으로부터 4년 전 3월 1일 탑골공원(塔洞公園)에서 독립만세(獨立萬歲) 소리가 일어난 지 스물일곱째 날 세계의 이목을 놀라게 하고 사람의 피가 끓게 한 수원의 참사(水原慘事) 당시에 약한 주먹에서 날리는 백성들의 돌팔매에 맞아 죽은 일본인 순사부장(巡査部長)을 비롯하여 금년 1월 17일 새벽 시내 삼판통(三坂通)에서 김상옥(金相玉)의 육혈포에 맞아 죽은 일본인 순사부장 전촌(田村)으로 끝을 마치었다. (중략) 이와 같이 일백 한 명의 죽은 자를 위하여 그 남은 혼(魂)을 불러주는 자의 정성에는 조선사람이나 일본사람의 구별이 없이 또는 전염병을 예방하다가 죽었든지 독립단을 죽이다가 죽었든지의 구별이 없이 오직 사람으로의 최후의 목숨을 버린 그를 위하여 설워하는 줄을 아는 사람도 역시 그 ‘사람으로의 죽음’을 위하여 가석히 여기는 동시에 그 일이 명의 경관들이 죽어 넘어진 벌판에 다시 기백 천 ‘사람’의 죽음이 깔렸음을 과연 기억할는지, 일백 한명의 죽음은 초혼의 제물을 받치는 자나 있거니와 궂은비에 추추히 우는 기백 천의 영혼은 부칠 곳이 어디인가?

 

이 기사의 원문에는 원래 기사작성자의 표시가 없으나 해방 이후에 나온 소오 설의식(小梧薛義植, 1900~1954)의 <금단의 자유>(새한민보사, 1949), 150~151쪽에 이 기사가 그대로 수록되어 있으므로, 청년기자 시절의 그가 이 글을 적었음을 알 수 있다. 이 기사에 나오는 “순직경찰관 한, 두 사람의 죽음 너머에는 수백, 수천의 불쌍한 죽음이 깔려 있다”는 지적은 전혀 틀린 말이 아니라 하겠다.
해방 이후 노구치 순사부장과 가와바다 순사의 초혼비가 헐리고 바로 그 자리에 ‘대한민국 독립기념비’가 들어선 것은 한, 두 사람의 죽음 너머에 외면받고 있던 수백, 수천의 영혼에 대한 추모와 위령의 뜻을 담아내고자 했던 것이 아니었을까?

목, 2020/03/26- 02:40
4
0

[특집] 

미리 보는 식민지역사박물관 기획전시 │ 조선 동아 적폐언론 100년을 다시 본다(1)

항일 민족지의 출발은 조선・동아가 아니라
조선독립신문이었다

김승은 학예실장

민족문제연구소와 식민지역사박물관은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창간 100년을 맞아 기획전을 마련했다. 영광과 오욕의 100년 가운데 ‘오욕’이 사라진 100년을 비판하기 위해 기획됐다. 원래 두 신문의 창간일에 맞춰 3월에 개막하고자 했으나 코로나 19 감염병 확산으로 박물관을 잠정 휴관함에 따라 전시를 8월로 연기했다. 민족사랑에 3회에 걸쳐 미리 전시회의 주요 내용과 자료를 소개한다.

 

3‧1운동 101주년인 올해 우리나라 거대 두 신문사가 창간 100주년을 맞았다. 조선일보는 지난 3월 5일 100주년 특집호 표지에서 “조선일보의 역사는 우리 근현대사의 거울”이었고, 조선일보는 “일제에 저항하며 민족혼을 일깨웠”다고 자평했다. 다음 100년에도 “사실 보도라는 저널리즘 본연의 가치를 지키며 정론의 길”을 걷겠다는 다짐도 실었다. 동아일보는 4월 1일 창간 100주년 사설을 통해 “무엇이 진짜 뉴스인지 궁금할 때면 눈을 들어 동아일보를 보라”고 말할수 있는 기준이 되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과연 두 신문이 이렇게 당당하게 과거 100년에 이어 다음 100년의 존재가치를 말할만한 자격이 있을까. 많은 사람들이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적폐의 대명사, 살아 있는 언론권력으로 ‘검언유착’ ‘권언유착’을 일삼으며 한국사회에 큰 해악을 끼쳐온 대표적인 신문이니 말이다. 100주년 기념사가 사과와 반성이 아닌 자화자찬 일색인 것은 놀랍지도 않다. 현재도 매 시각 쏟아내는 기사마다 의혹만 부풀리고, 갈등을 부추겨 정치쟁점화하고, 인신공격에 인격살인도 서슴지 않으며, 사실 왜곡을 확대 재생산해 독자들의 비판적 독해력을 마비시키고 있다. 진실은 주장에 갇히고 정의는 공허한 외침으로 그치는 일들이 최근에 더욱 자주 목격된다. 조선‧동아 두 신문은 반민주적 반인권적 언론일 뿐 아니라 반역사적 기득권을 토대로 여전히 반역사적 범죄를 저지르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뉴스타파 <조동(朝東)100년 : 두 신문 이야기>

 

동아투위‧조선투위 등 57개 언론‧시민단체는 이미 작년 9월 ‘조선 동아 거짓과 배신의 100년 청산 시민행동’을 꾸렸다.
적폐언론 청산을 위해 <조선‧동아 거짓과 배신의 100년, 최악 보도 100선> 발간, ‘조선일보100년’ 전시, 아카이브 구축 등 다양한 활동을 펼쳐왔다. 우리 연구소도 지난 100년 간 두 신문사가 자의적으로
왜곡하거나 은폐한 오욕의 역사를 되짚으며 그들 자신이 써낸 기사를 통해 그들의 실체를 밝히는 두 가지 기획을 준비했다.
첫 번째는 뉴스타파와 공동 기획한 ‘조동(朝東)100년: 두 신문 이야기’이다. 조선일보 창간일인 3월 5일부터 동아일보 창간일인 4월 1일까지 총 13편의 연속보도 가운데 연구소는 일제강점기를 다룬 6편의 기획과 제작에 참여했다. 우리 연구소와 역사디자인연구소, 뉴스타파는 두 신문의 창간부터 1940년 8월 폐간까지 기사를 시기별로 분석하고, 그 가운데 특히 1937년 이후 일제 침략전쟁과 총동원체제에 두 신문이 어떻게 적극적으로 협력했는지 추적했다.
두 번째는 식민지역사박물관과 함께 준비하는 기획전시이다. 두 신문사는 100주년 기념사에 여전히 ‘민족지’라는 타이틀을 자신의 대표적인 수식어로 내걸었다. 100년이라는 긴 역사 속에 그들이 민족사에 기여한 ‘자랑거리’가 왜 없겠는가. 그러나 두 신문사는 1937년 이후 노골적인 일제 협력과 침략전쟁 미화에 지면을 할애한 전쟁부역언론이었다는 사실만으로도 마땅히 해방 후 철저히 청산되었어야 할 언론사였고, 사주들이었다. 그런데도 두 신문사는 부역의 역사를 은폐하고 온전히 ‘민족지’로 다시 포장해 과거를 날조하려는 의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이번 기획전시는 그들이 덧발라온 분칠을 벗겨내고 자신들이 내뱉은 기사를 통해 민족을 배반한 거짓의 민낯을 드러내고자 한다.
기획전시는 경술국치 110년을 맞는 8월, 그것도 일제의 폐간 농간에 순응해 마지막 신문을 발행한 8월 11일에 개막할 예정이다. 개막을 앞두고 앞으로 3회에 걸쳐 <민족사랑> 지면을 통해 기획전의 일부 내용을 미리 소개한다.

 

누가 ‘민족지’인가

이번 호에 소개할 첫 번째 주제는 “과연 두 신문은 민족지인가”이다. 창간 65주년을 맞았던 1985년, 두 신문은 꽤 떠들썩하게 상대방 신문을 “친일신문”으로 공격한 적이 있다. 이른바 ‘민족지 논쟁’으로 불린 이 사태를 기억하는 분들도 많을 것이다. 모르는 분들은 조선일보와 동아일보가 100주년을 맞아 구축한(!) 디지털아카이브에서 관련 기사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1985년 4월 1일자 동아일보가 “조선일보는 실업신문임을 위장한 친일신문”이라고 첫 포문을 열자, 조선일보는 4월 14일자 사설에서 “반일, 친일논쟁이 격화되면 궁극적으로 인촌 선생까지도 욕보이는 결과”가 될 것이라고 격앙된 반응을 보였다. 이에 동아일보는 4월 17일자 사보 「애독자 제현에게 알려 드립니다-동아‧조선 창간과 ‘민족지’ 시비에 대하여」에서 “조선일보가 친일신문으로 창간된 것은 사실 기록에서 착오가 없는 것”이라며 물러서지 않았다. 조선일보도 공세에 나서 4월 19일자 사보 「우리의 입장-동아일보의 본보 비방에 붙여」에서 “식민통치의 가장 중추적 동맹군인 토착귀족 지주세력과 기성 친일언론인으로 혼성된 측에 허가된 신문이 동아일보”라며 “한일합방의 공로로 일본 후작의 작위를 받은 박영효가 동아일보 초대 사장”이었다고 반격했다. 또한 “민족사의 내측에 숨겨있던 친일 계보는 속속들이 파헤쳐야 한다”는 주장도 이어갔다. 참으로 놀라운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조선일보가 무려 35년 전에 ‘친일청산’을 주장했었다니 말이다. 물론 ‘민족지논쟁’ 이후에도 이들은 여전히 독재를 찬양하고 민주화에 역행하는 부역언론의 길을 걸었다. 특히 친일청산을 국론분열・친북용공으로 몰아세우는데에는 ‘일심동체’였다.

 

 

항일 민족 언론의 부활, 조선독립신문

그렇다면 이들이 자인한대로 두 신문사는 과연 얼마만큼 ‘친일’에 그 뿌리를 두고 있을까. 우리가 잘 알다시피 일제는 군대와 각종 식민지 악법을 내세워 식민지 조선인들의 손발을 묶어 놓았을 뿐 아니라, 모든 언로를 차단해 조선인들의 눈과 귀와 입을 막았다. 그러나 일제 무단통치에 대한 민중의 저항은 끊이지 않았고, 문명과 번영을 기약한 “한일병합”은 무력 탄압과 차별로 점철된 “강점”이자 “병탄”이었다는 사실을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일제 강점 후 9년 만인 1919년, ‘조선의 독립과 자주민임’을 외치는 3․1운동이 일어났다. 전국에서 터져 나온 만세운동의 열기는 일제의 탄압에도 반년 넘게 지속됐다. 혁명적 에너지는 이름 모를 청년 학생들이 한 장 한 장 만들어 배포한 지하신문들이 끌어 올린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3‧1운동은 독립선언서와 지하신문을 통해 전국으로 퍼져 나갔다. 일제 강점과 동시에 모든 민족 언론이 폐간됐지만 3․1운동을 계기로 우리는 다시 우리의 언론을 갖게 된 것이다.
그 가운데 가장 빨리 만들어진 지하신문은 바로 독립선언서와 함께 3월 1일부터 배포된 <조선독립신문>이다. 신문 체제를 제대로 갖추지 못한 호외 형태의 단면 인쇄지였지만, 항일 민족언론의 부활을 상징하는 신호탄이었다. <조선독립신문> 외에도 <국민회보> <신조선신문> <자유민보> <국민신보> <국민신문> <진민보> 등 약 30여 종의 지하신문이 1919년 내내 전국에서 발행됐다. 정확하게 말하면 일제 당국에 의해 ‘적발’돼 우리는 그 실체를 알 뿐이다.

 

「조선독립신문」 제1호, 1919.3.1(연세대학교이승만연구원 소장) 최초로 발간된 지하신문. 초기 천도교 계열의 신문 발행 관계자들이 모두 체포되자 9호부터는 이름 모를 후계자들이 발행을 이어갔다. 현재까지 43호와 호외, 국치기념호가 제작됐다는 사실만 알려져 있고 이 신문이 정확하게 몇 호까지 발행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출판물 차압의 건 보고 통보」 1919.4.23 (국사편찬위원회 소장) 일제가 출판법 위반으로 발매·배포를 금지해 압수 처분한 독립선언서와 지하신문의 목록들이다. 이 압수목록은 3•1운동 당시 얼마나 다양한 지하신문이 발행되었는지를 보여준다.

 

당시 발행된 항일 지하신문들은 조선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가 3‧1운동을 축소‧왜곡 보도하자 이에 맞서 만세운동을 확산시키고 독립의지를 불태우는 역할을 했다. 지하신문 <진민보>에 실린 신문의 역할은 식민지 조선인들이 바라는 민족 언론의 사명 그 자체였다.
“우리의 민족적 운동을 한껏 옹호하라, 우리의 운동이 안팎에서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신속하게 보
도하라, 그리고 조용한 가운데 나아가더라도 소리만은 벽력같이 크게 질러라.” 항일지하신문은 조선총독부뿐만 아니라 3‧1운동을 폄훼하고 비난하는 친일파에 대해서도 질책했다.
‘강제병합’에 앞장섰던 국적 이완용·송병준을 비롯해 일제 주구가 된 친일경찰과 헌병보조원들, 허위‧왜곡보도를 일삼았던 매일신보 기자 등 다양한 직업군의 친일파들을 비판했다. 또한 조선 독립을 부정하고 식민통치를 인정하며 자치를 주장하던 친일파에 대한 비판도 신랄했다. 대표적인 자치론자인 민원식에 대해 <조선독립신문>은 “부여족의 면피(面皮)로서 일본의 혼을 가졌다. 인류의 골격으로서 짐승의 심장을 가졌다”고 지적했다.

 

굴뚝을 만들어야

이렇게 3‧1운동의 의의를 전파하고 혁명운동의 기운을 고조시키는 조선인들의 자발적 언론운동이 활발해지자 일제 당국은 깊은 고민에 빠졌다. 조선총독부는 3․1운동을 미리 막지 못한 이유를 조선인의 민심을 파악할 조선인 언론의 부재에서 찾았다. 지하신문을 압수하고 탄압하는 것만으로는 한계가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일제는 신문발행을 허가해 조선인의 불만을 누그러뜨리는 한편, 이를 통해 민심을 살피거나 여론 조작의 수단으로 이용하려고 했다. 조선총독 사이토 마코토(齋藤實)와 함께 정무총감으로 부임한 미즈노 렌타로(水野鍊太郞)는 당시 조선의 긴장된 공기를 완화하기 위한 분출구, 즉 ‘굴뚝’을 만들어 준 것이 바로 조선어신문의 허용이라고 회고했다. 결국 3‧1운동으로 폭발한 독립의 열기는 지하신문을 통해 조선 민중의 의사를 적극적으로 표출하는 민족 언론의 부활을 이끌었으나 총독부가 정작 신문 발행을 허가한 대상은 친일파들이었다. 조선인 신문 발행 곧 언론의 자유를 허용하는 것은 ‘문화정치’의 상징과 같은 조치였지만 실상은 달랐다.

 

총독부가 발행 허가한 신문―조선일보 시사신문 동아일보

발행 허가를 받은 신문은 민원식이 주도한 국민협회의 시사신문, 친일단체인 대정(실업)친목회가 주도한 조선일보, 그리고 조선일보가 지적한대로 토착귀족 지주세력과 기성 친일언론인의 합작인 동아일보 세 신문뿐이었다. 앞서 지하신문들이 신랄하게 비판했던 민원식이 ‘동화주의’를 내걸고 참정권‧자치운동을 벌인 국민협회의 시사신문은, 민원식이 항일투사 양근환에게 암살된 후 자연스럽게 폐간됐다. 이후 조선‧동아 두 신문이 조선의 언론계를 대표하는 것처럼 인식되었다. 조선일보는 발행 허가를 받을 때 비정치적인 ‘실업계 신문’을 표방했다. 이를 주도한 면면을 보면 조선총독부가 시사신문과 함께 우군으로 인식하기에 충분한 인적구성을 가졌다.
조선일보 창간을 주도한 세력이 대정친목회였다는 사실은 조선일보 사사에도 간간히 밝혔지만, 발기인 39명 중 32명이 대정친목회 회원이자 임원이라는 것으로 봐도 분명하게 실체를 알 수있다. 대정친목회는 조선인 전직 관료와 조선귀족, 대지주, 실업가 등이 망라돼 내선융화운동을 주도한 조선 최대의 대표적인 친일단체였다.
이들은 3․1운동 직후 ‘자력으로 독립은 불가능하다’ ‘조선인은 실력을 길러야한다’며 일본 제국의 통치에 잘 따라서 산업 발달과 문화 향상을 이룰 것을 주장했던 인물들이다. 이들이 주도한 조선일보는 초기부터 ‘친일신문’으로 민중의 배격을 받았다. 그래서 초기 경영난을 극복하지 못한 조선일보는 극단적 변신을 꾀하기도 했다. 창간 초기 30건의 압수, 23회의 발매 반포금지, 2회의 정간을 받을 정도로 조선일보는 조선총독부의 탄압을 받았는데, 이는 당대 최대의 친일단체가 가장 탄압받는 ‘저항신문’을 발행한 꼴이다. 이에 대해 장신 박사는 <개벽> 제37호의 기사를 인용하며 그들이 ‘항일’ 기사를 게재한 이유는 경영난 타개를 위한 ‘판매 확장책’에 지나지 않는다고 평가했다.

 

동경유학생 등의 동아일보 「성토문」

 

그러면 “조선민중의 표현기관임을 자임”한 동아일보는 순항했을까. 최근 연구소는 1924년 일본 유학생 단체들의 동아일보 ‘성토문’의 원문을 입수했고 이번 전시회에 공개할 예정이다. 이 성토문은 이광수의 ‘민족적 경륜’에서 발단이 됐다. 1924년 1월 2일부터 6일까지 동아일보는 일제에 타협적인 정치운동을 주장한 이광수의 사설을 실었다. 즉각 동아일보에 대한 비난과 배척운동이 곳곳에서 일어났고, 멀리 도쿄의 조선유학생학우회 등 11개 단체도 ‘성토문’을 발표한 것이다. 이 성토문에는 동아일보를 향한 민중의 배신감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동아일보를 둘러싼 논란은 중국 동북지방의 조선인 사회까지 전파됐다. 민족지로서 자임하며 출발한 동아일보는 창간 4년 만에 김성수 일가에 장악당해 사익을 추구하는 언론사가 되어 가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오래된 신문이 아니라, ‘정론의 길’을 걷는 제대로 된 신문이다. 이들의 출발이 ‘친일’에 오랜 연원을 두고 있다는 사실을 이번 전시에서 분명하게 확인하게 될 것이다.

 

참고문헌
박찬승, 「3•1운동기 지하신문의 발간 경위와 기사내용」, <동아시아 문화연구> 44권, 2008
박용규, 「3•1운동기 항일지하신문의 친일파 비판」, <언론정보연구> 56권 4호, 2019
장신, 「1920년대 대정친목회의 조선일보 창간과 운영」, <역사비평>, 2010.8.
장신, 「1924년 동아일보의 개혁운동과 언론계의 재편」, <역사비평>, 2006.5.

화, 2020/05/26- 20:29
4
0

광주학생독립운동의 발원지인 광주일고는 11월 19일 오전 교내 강당에서 친일작곡가 이흥렬이 만든 교가(1953년 제작)를 대신할 새 교가 발표회를 열었다. 경과보고에 이어 교내 합창단과 동문 관현악단의 연주로 열리는 발표회에는 동창회 임원과 학생, 학부모, 교직원 등이 참석했다.
새 교가는 민중가요 ‘임을 위한 행진곡’ 작곡한 김종률 씨와 교내 공모를 통해 선정된 재학생 4명이 공동으로 작사 작곡에 참여했다. 김종률 씨는 이 학교 졸업생이다. 이승오 교장은 인사말에서 “우리 학생들이 주옥같고 의미심장한 가사를 빚어냈고, 김종률 작곡가가 힘찬 기백과 진취성을 담아 새 교가를 창작하였다. 새 교가를 부르며 새로운 100년 광주일고의 비상을 기약하자.
”고 말했다. 광주서중일고총동창회 김상곤 회장은 축사에서 “우리 후배들은 친일잔재를 청산하지 못한 한국현대사의 불행을 단호히 배격하고, 새 교가를 만드는 모든 과정에 혼연일체가 되어, 마침내 흠결 없고 자랑스러운 교가를 부르게 되었다. 일고 공동체 99년 역사의 쾌거가 아닐 수 없다.”고 치하했다.
인천에서 최초로 3·1운동이 일어난 곳으로도 알려진 창영초등학교는 11월 25일 학교 체육관에서 ‘친일 잔재 청산 새로운 교가 선포식’을 진행했다. 창영초등학교가 주최하고 창영초등학교 전교어린이회가 주관한 이번 행사에는 교직원·학생·학부모·동문회 등 240여 명이 참석했다.
창영초교는 지난 3월 교가를 개정하기 위해 교사·학부모·동문회·육군사관학교·학생대표 등 9명으로 태스크포스(TF)팀을 구성했다. 이후 4월부터 설문조사 등으로 학교 구성원들의 의견을 수렴했으며, 10월 31일 학교운영위원회에서 교가의 작곡만 개정하기로 합의했다. 이후 창영초교는 ‘그리운 금강산’을 만든 33회 졸업생 최영섭 작곡가를 섭외해 새로운 교가 작곡을 의뢰했으며, 25일 ‘친일 잔재 청산, 새로운 교가 선포식’을 진행했다. 새로운 교가는 창영초교 합창부 학생들이 직접 음원을 녹음했다. 임용렬 창영초교 교장은 선포식에서 “일제강점기 시절 나라를 되찾기 위해 열심히 활동한 창영초교 선배님들이 있지만, 그동안 우리가 부른 교가는 부끄럽게도 친일파(임동혁)가 작곡한 교가였다”며 “현재 일본에 경제적인 압박을 받는 상황에서 이제라도 새로운 교가를 만든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했으면 좋겠다”고 밝혔다.

• 방학진 기획실장

금, 2019/12/20- 23:06
4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