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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량리 떠나던 날, 청파에서 가꿀 새 꿈을 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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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량리 떠나던 날, 청파에서 가꿀 새 꿈을 꾸다

익명 (미확인) | 목, 2018/01/25- 17:15

기고

청량리 떠나던 날, 청파에서 가꿀 새 꿈을 꾸다

김승은 자료실장

연구소가 드디어 청량리에서 청파동으로 이전을 마무리했다. 2000년 3월부터 청량리 떡전교 사거리 금은빌딩에 터를 잡았으니 거의 18년 만에 새 둥지로의 이사였다. 그 사이 10명에 불과했던 상근자가 4배 가까이 늘었고, 3층 한켠만 겨우 차지하던 살림살이는 5층과 지하, 2층 일부까지 다 채울 정도로 커졌으니 이번 이사에 만만치 않은 준비가 필요했다.
먼저 사무실 이사 전문 업체를 선정하고 체계적인 이사 계획을 세우는 한편, 이전해 갈 서현빌딩의 안전진단과 시설점검을 진행했다. 2006년에 준공한 건물치고는 관리가 비교적 잘 된 편이었지만 손볼 데가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 꼼꼼한 건물 점검과 필요한 보수공사는 최규필 회원이 전적으로 맡아 도와주었다. 개인적으로도 몇 번이나 청파동에 찾아가 건물을 둘러보고 관리 상태를 돌아보는가 하면, 공사이력을 알아내고 가장 저렴하게 보수공사를 할 수 있도록 주변 지인들을 총동원해 주었다. 그 사이 곳곳에 쌓여 있던 묵은 짐을 정리하는 일도 만만치 않았다. 수장고에 보관했던 유물과 고도서들은 직접 확인하고 포장해야 해서 이사 두 달 전부터 작업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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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유물과 고도서를 포장하는 상근자들 3 포장된 유물상자로 가득 찬 청량리 사무실 임시전시실

상근자들은 보관・활용할 사무집기와 폐기물품을 점검하고, 이전하는 새 공간의 활용과 공간 배치 등 모든 이전 업무에 각자의 힘과 지혜를 모았다. 사무실 집기들을 점검하다 보니 갖가지 모양의 책상과 책장, 의자들이 수두룩했다. 문 닫는 사무실만 생기면 가서 주어다 모았기 때문에 통일감이란 ‘1’도 찾아보기 힘들었다. 짝 안 맞는 낡은 집기들이 우리 연구소가 걸어온 땀과 눈물의 험로를 고스란히 보여주는 지도 모른다. 손때 묻은 책장과 책상들을 차마 버릴 수가 없어서 거의 다 짊어지고 왔다. 서현빌딩에도 이전 건물주가 사용하던 붙박이장과 수납장이 많았지만, 예전 책장과 사무집기들은 우리가 새로 쓸모를 찾기도 하고, 필요한 단체가 있으면 기증도 하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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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전체 이사 계획과 일정을 점검하는 상근자회의 2사무집기 점검과 배치를 담당했던 ‘떡전용역팀’ 회의

 

서현빌딩에서도 새 살림살이가 들어갈 공간 정비가 진행되었다. 이례적인 한파가 시작된 12월 1일부터 5층 내부 공사, 옥상 철거와 보수공사를 시작했다. 4층에는 작은 공간을 효율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이동식 서가(모빌랙)를 설치했다. 각 층 전구는 모두 LED로 교체했다. 신용준 회원이 통 크게 후원해 주었고, 직접 시공까지 맡았다.
이삿날이 가까워 올수록 기온은 더 내려갔다. 이사 전에 여기저기 보수공사를 해야 했지만, 날씨 때문에 제대로 진행하기가 어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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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강의실 공사를 맡아 준 디자인 쏨니엄 관계자들과 회의 4옥상에 방치된 시설물 철거 공사 5강의실 내부 공사 6새로 설치된 이동식 서가 7신용준 회원이 건물 전체 조명을 LED로 교체하고 시공까지 맡아주었다.

 

쏜살같이 이삿날은 다가왔고 아직도 정리가 덜 된 짐이 산더미였다. 이사를 하루를 앞두고 4일간 이어질 이사 일정에 맞춰 역할을 분담하고 마지막 점검을 했다.

21스프레이 테러로 불그스름하게 물든 연구소 현판도 챙기고, 먼지 쌓인 연구소의 옛 추억들도 차곡차곡 상자에 담았다. 책이 예상보다 너무 많았는지 이사업체는 지하서고에 자동 밴딩 기계까지 설치하고 이틀 전부터 포장작업에 돌입했다. 그러는 사이에도 사무실은 일상 업무를 진행해야 해서 이사 전날 새벽까지 개인 짐을 싸는 상근자들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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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이사 이틀 전부터 책 포장에 들어간 지하서고 2연구소 소장자료 이전 준비를 마치고 이사 전날 늦게까지 개인 짐을 싸는 자료실 상근자 3통합 재단 운영 방침을 둘러싸고 새벽1시를 넘겨 이어진 실무회의. 왼쪽은 내일을여는역사재단 신용옥 상임이사, 맞은 편은 조세열 사무총장

 

드디어 12월 15일. 본격적인 이사를 시작했다. 하필 이사 첫날은 71년 만에 가장 빨리 한강이 얼었다는 바로 그날이었다. 추위도 큰 난관이었지만 역시 가장 큰 문제는 지하 서고였다. 꺼내고 꺼내어도 책은 여전히 서가에 가득했다. 다른 층 이전이 줄줄이 늦어졌다. 3층에 쌓인 짐을 건물 밖으로 실어내는 데만 이틀이 걸렸다. 금은빌딩에서 완전히 짐을 비우는 데만 꼬박 5일이 걸렸다. 게다가 이사 마지막 날이었던 12월 18일에는 대설경보가 나올 정도로 폭설이 내렸다. 이사는 또 다음날로 연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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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2월 12일, 박물관 건립 모금에 초석을 놓아 주신 송기인 신부님 등 과거사 관련 위원회 전 위원장님들이 서현빌딩을 방문해 격려해 주셨다. 53층 사무실 이전을 돕는 이용창 편찬실장과 유은호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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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금은빌딩 옛 사무실과 구분이 안 갈 정도로 꽉 찬 새 사무실 2한 달 가까이 이어진 이사에 지친 신다희 사무국원 3서현빌딩에서 다시 시작된 책 정리 4연구소에서 무슨 일이든 팔 걷고 나서는 김병구 회원팀장

 

장장 일주일이 넘게 걸린 이사는 12월 20일에야 마무리되었다. 친일인명사전 편찬의 산실이자, 민족문제연구소가 회원들과 가장 많이 만났던 3층 연구편찬실과 사무국, 친일독재미화 교학사 교과서와 국정교과서 폐기 운동의 본부 역할을 했던 2층 교육홍보실,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의 꿈을 품고 도전했던 5층 역사자료관과 연구소 숨은 보물창고인 지하 서고까지 깨끗이 비웠다. 상근자들의 끼니를 해결해 주신 주변 음식점 사장님들, 배달원 분들, 늘 급하게 주문해도 신속히 작업해 주시던 복사집, 인쇄소 분들께도 일일이 작별을 고하고 청량리를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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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탁구대 설치를 고민할 정도로 넓게만 느껴졌다던 금은빌딩 3층 6국정교과서 폐기 운동의 산실 2층 교육홍보실 7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의 시범 공간이었던 5층 임시전시실

 

사무실 이전 와중에도 워싱턴·뉴욕·LA 등 미주지부 창립을 위한 순회 강연집회, 항일음악 토크콘서트와 음악회, 박정희 동상 건립 반대 집회, 친일문학상 반대 집회, 서울시민대학 강좌, 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 아산 유해 발굴 시굴조사, 팟캐스트 시즌2 녹화 등 다양한 사업을 이어갔다. 덕분에 상근자들이 돌아가며 몸살과 독감에 시달렸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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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내부 철거공사 후 마지막 짐을 내리는 금은빌딩 2듬직한 어깨, 친절한 미소로 이사를 기분 좋게 마무리 해 주신 ‘일사천리’ 직원분들 310년 넘게 야스쿠니재판을 지원해 온 일본 변호인들이 금은빌딩의 마지막 추억을 남겼다.

 

새 건물로 이사를 가니 챙길 일도 참 많았다. 고장난 문고리나 전선 공사는 물론 변기 커버도 직접 갈고 쓰레기 분리수거, 출입문 보안까지 모든 것을 점검하고 챙겨야 한다. 동파에 터진 수도 배관을 보며 속 태우는 사무국이나, 자동 개폐식 출입문에 아직 적응 못하는 상근자들, 꽂고 꽂아도 산적한 책들에 허리가 휘는 자료실 인턴들, 1, 2층이 아직 공실이라 고스란히 올라오는 냉기에 발을 동동거리는 3층 연구원들 모두가 아직은 이 공간이 낯설고 서툴기만 하다.
하지만 지난 25년간 한결같은 회원들의 성원과 지지로 만들어진 새 둥지이니 그 안에서 새로 품은 꿈만큼은 창대하다. 연구소는 우리 사회의 비상식・부정의와 싸워 온 지난 25년을 발판삼아 상식과 정의가 뿌리내릴 수 있는 역사운동의 든든한 터전을 이곳 용산 청파동에서 만들어 나가고자 한다. 내일의 역사를 여는 새로운 길에 회원 여러분들이 늘 함께 해 주시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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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

친일화가가 그린 이순신 표준영정, 47년 만에 지정 해제

 

우리 연구소는 지난 2004년부터 친일경력이 있는 화가들이 그린 위인들의 표준영정에 대해 문제를 제기해왔다. 그리고 연구소 충남지부와 천안아산지회는 2014년 10월부터 아산 현충사 앞에서 “친일화가 장우성이 그린 이순신 장군 표준영정을 즉각 교체하라”는 내용의 기자회견과 서명운동을 벌여왔다.

이러한 여론을 바탕으로 2010년과 2017년 문화재청 산하 현충사관리 사무소는 문화체육관광부 영정심의위원회에 이순신 표준영정 지정 해제를 신청했지만 모두 반려됐다.
2010년 영정심의위원회는 심의규정에 ‘멸실, 도난, 훼손 등의 경우’에만 영정을 교체할 수 있기 때문에 작가의 친일 논란은 지정 해제 사유로 보기 어렵다는 이유로 신청을 반려했다. 2017년에는 “충무공은 국민적 영웅으로서 표준영정 지정 해제에 따른 혼란과 갈등이 야기될 우려가 있어,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고 판단,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표준영정은 국가사적지인 현충사의 중요한 문화적 자산으로 현상변경의 필요성에 대해 문화재위원회 사전심의 검토가 선행”되어야 한다는 이유로 역시 신청을 반려했다.
그러다 지난해 10월 국회 문화체육관광위원회 국정감사에서 민주당 김영주 의원은 “항일의 상징인 충무공의 영정을 친일 화가가 그린다는 건 말이 안 된다. 즉각 교체해야 한다”고 지적하면서 지정해제는 급물살을 타게 되었다. 특히 김영주 의원은 영정심의위원회 규정과 심의위원회 구성의 문제점도 지적했다. 그 결과 문체부는 지난해 12월 영정 심의규정에 ‘복식, 용모 등이 잘못 표현된 경우’와 ‘사회통념에 비춰 재제작의 사유가 발생한 경우’를 추가한 것이다. 즉 ‘친일’이라는 직접적인 표현은 아니지만 ‘사회통념’을 추가하여 사실상 작가의 친일 경력을 재제작 사유에 추가한 것이다. 또한 미술계 인사들이 대다수였던 심의위원에도 역사 분야 전문가를 대폭 추가해 다양한 판단이 가능하도록 했다.
문체부가 7월 중에 영정심의위원회를 열어 이순신 표준영정을 지정 해제하고, 광복절 이전에 현충사에 봉안된 영정을 철거하기로 내부 방침을 세우고 2023년까지 새로운 충무공 표준영정 제작과 지정 절차를 마칠 예정이다.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김은호, 김기창, 장우성 화백이 그린 표준영정은 전체 표준영정 98점 가운데 14점이다. • 방학진 기획실장

월, 2020/07/27-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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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 비망록 59]

군부대 소재지를 일컬어 ‘◯◯대(臺)’라는 별칭이 생겨난 연유는?
일본천황이 육군사관학교에 ‘상무대’로 하사한 것이 최초 용례

이순우 책임연구원

 

이른바 ‘7080세대’이면서 수도권대학에 다닌 사람이라면 누구나 문무대(文武臺)라는 명칭에 대해 아련한 기억 한 자락씩은 머릿속에 남아 있는 것이 보통이다. 해묵은 자료를 뒤져보니 ‘김신조 사건(1.21사태)’으로 촉발된 안보위기를 빌미로 대학생을 상대로 한 군사교육(교양필수과목으로 교련과목을 설정)이 처음 시작된 것은 1969년이었다.

<동아일보> 1976년 6월 29일자에 수록된 학생병영훈련소 즉, ‘문무대’ 준공 관련 보도내용이다.

 

여기에 더하여 1975년에 월남이 패망하자 유신체제 하의 군사정권은 유비무환(有備無患)과 총력안보(總力安保)라는 구호를 앞세워 그 이듬해부터 이른바 ‘병영집체훈련’이라는 제도를 장착하였다. 이때 긴급하게 경기도 성남시에 ‘학생병영훈련소’가 만들어졌으며, 여기에 붙여진 이름이 ‘문무대’였던 것이다.
<동아일보> 1976년 6월 29일자에 수록된 「학생병영훈련소(學生兵營訓鍊所), ‘문무대’ 준공」 제하의 기사는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전해주고 있다.

 

대학생 병영훈련의 도장이 될 학생병영훈련소가 준공, 28일 오후 〇〇지역 현장에서 이세호(李世鎬) 육군참모총장 등이 참석한 가운데 준공식 및 현판식이 있었다. 박(朴) 대통령의 휘호로 ‘문무대(文武臺)’라 명명된 이 훈련소에는 7월 1일부터 11월 중순까지 전국 57개 대학 일반군사교육 대상자 중 1학년 일부가 단계적으로 입영, 10일간의 집체교육을 받게 된다.

 

더구나 이곳에는 1977년 4월 14일에 이은상(李殷相)이 지은 건립취지문을 덧붙여 박정희대통령의 휘호를 새긴 문무탑(文武塔)이 건립된 사실도 확인할 수 있다. 그 이후 1981년에는 ‘전방부대 입소교’이란 것이 생겨나 철책선 경계근무가 추가되었고, 재학생 입영연기와 더불어 최대 6개월의 복무기간 단축이라는 혜택 아닌 혜택이 주어졌던 대학생 군사교육제도는 민주화 과정의 초입에 들어선 1989년에 와서야 완전히 폐지되었다.
그런데 주변을 가만히 살펴보면 군부대의 이름을 ‘무슨무슨대’라고 부르는 사례는 생각보다 상당히 많이 존재한다는 것을 직감할 수 있다. 구태여 군대를 직접 체험한 사람이 아니더라도 이러한 명칭을 접하는 것은 그리 새삼스러운 일이 아닐 정도이다.
무엇보다도 논산훈련소를 ‘연무대’라고 하는 것이 그러하고, 광주민주화운동과 관련된 ‘상무대’라든가 육군사관학교를 일컫는 ‘화랑대’, 그리고 육해공군본부가 터를 잡은 ‘계룡대’와 같은 곳도 일상용어처럼 자주 언급되는 공간이다. 어쩌다가 군부대에 면회를 갈 기회가 있을 때마다 정문 초입에 들어서자마자 큰 돌에 ‘〇〇대(臺)’라고 새겨진 휘호비(揮毫碑)를 목격하곤 했던 것도 제법 익숙한 풍경의 하나이다.
그렇다면 군부대의 이름을 ‘무슨무슨대’라는 별칭으로 부르는 것은 도대체 어떻게 생겨난 일이었을까? 대(臺)라는 것은 원래 사전적으로 여러 가지 의미를 내포하는 표현이기는 하지만, 대개 “인위적으로 쌓은 것이건 자연적으로 생겨난 것이건 간에, 사방을 내려다 볼 수 있는 높고 평평한 공간 또는 그러한 곳에 조성된 건축물”이라는 뜻으로 새겨지는 말이다.

 

<매일신보> 1937년 12월 21일자에는 일본 천황에 육군사관학교 졸업식에 임석한 내용과 더불어 이곳 소재지에 대해 ‘상무대(相武台)’라는 명칭을 하사하였다는 사실이 수록되어 있다.

 

 

<매일신보> 1943년 6월 4일자에 수록된 일본 카나가와현 소재 육군사관학교 탐방기에는 이곳 교정에 건립된 ‘상무대’ 휘호비의 모습이 함께 소개되어 있다.

 

예를 들어, 속리산 문장대(文藏臺)라든가 남한산성 수어장대(守禦將臺)라든가 부산 영도 태종대(太宗臺)라든가 하는 것들이 여기에 속한다. 하지만 ‘높고 평평한 지형’이라고 하는 범주와는 결코 거리가 먼 군부대 소재지, 그것도 전 지역을 포괄하는 개념으로 ‘무슨무슨대’라고 부르는 것은 애당초 어떻게 시작된 것인가 말이다. 알고 봤더니 여기에도 결코 그냥 흘려듣기 어려운 군국주의 시절의 일제가 남긴 유습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흔적들이 속속 드러난다.
우선 이에 관해서는 <매일신보> 1937년 12월 21일자에 수록된 「육사소재지(陸士所在地)에 신명칭 어하사(新名稱 御下賜)」라는 제목의 기사가 퍼뜩 눈에 띈다.

 

[도쿄전화(東京電話)] 대원수폐하(大元帥陛下)께옵서는 20일 육군사관학교 졸업식에 어임석(御臨席)하옵시기 위하여 신장(新裝)한 카나가와현 자마(神奈川縣 座間)의 동교에 처음으로 행행(行幸)하옵시었는데 졸업식 종료후 오후 2시 본관 2층 어좌소(御座所)에 스기야마 육상(杉山 陸相, 육군대신), 하타 교육총감(畑 敎育總監)을 어소(御召)하옵시고 동교 소재지에 대하사 상무대(相武台, 소부다이)의 명칭을 하사(下賜)하옵신 지(旨)를 궁내성(宮內省)으로부터 발표되었다.

 

일본의 육군사관학교는 이른바 ‘황군(皇軍)’의 근간을 이루는 육군장교를 배출하는 기관이 니만큼 해마다 졸업식에는 일본천황이 직접 임석하는 것이 오랜 관례였다. 특히, 1937년에는 육군사관학교 본과(本科)를 도쿄 신쥬쿠(東京 新宿)의 이치가야혼무라쵸(市ケ谷本村町)에서 카나가와현 코자군 자마촌(神奈川縣 高座郡 座間村)으로 신축 이전하였는데, 이때의 졸업식은 이러한 소재지 변경 이후에 최초로 거행되는 행사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이 자리에서 일본천황이 새로운 육군사관학교 소재지에 대해 하사한 명칭이 ‘상무대’였던 것이다. 이 이름은 이곳이 역사적으로 사가미노쿠니(相模國)의 옛터에 속하고 바로 이러한 유서깊은 곳에서 무(武)를 연마한다는 뜻에서 명명된 것으로 알려진다. 옛 사관학교 자리가 언덕위의 평지를 차지하고 있었던 탓에 통칭 ‘이치가야다이(市ケ谷台)’라고 부른 전례가 있긴 하지만, 이러한 지형과는 무관하게 벌판에 자리한 군사학교 소재지 전체에 대해, 그것도 천황의 명명에 의해 ‘무슨무슨대’라는 명칭이 하사된 것은 이것이 최초였다.

 

이로부터 몇 해가 흘러 1941년 3월 28일에 사이타마현 토요오카쵸(埼玉縣 豊岡町)에 자리한 육군항공사관학교(陸軍航空士官學校)에 일본천황이 이곳을 찾았을 때 다시 수무대(修武臺, 슈부다이)라는 명칭이 하사되는 일이 이어졌다. 또한 1943년 12월 9일에는 사이타마현 아사카(埼玉縣 朝霞)에 있는 육군예과사관학교(陸軍豫科士官學校)에 행차하였을 때도 직접 이곳 일대의 대지(臺地)에 대해 ‘진무대(振武臺, 신부다이)’라는 이름을 하사하였다.
여기에 나오는 ‘진무’라는 표현은 중국 고전인 <국어(國語)> ‘진어편(晉語篇)’에 나오는 “임금은 그 백성을 형벌하여 바로 잡은 후에 밖으로 무위를 떨치는 것이다. 그러므로 안으로 조화로 우면 밖으로 위무가 드러나게 된다.(君人者 刑其民 成而後 振武於外 是以內龢而外威)”는 구절에서 취한 것으로 ‘무비(武備)를 진작(振作)하라’는 뜻이 담겨 있었다. 그리고 일제 패망 직전인 1945년 3월 13일에는 도쿄육군유년학교(東京陸軍幼年學校)의 졸업식 때 일본천황이 차견(差遣)한 황족 조향궁(朝香宮, 아사카노미야)에 의해 이곳 소재지에 대해 ‘건무대(建武臺, 켄부다이)’라는 이름이 부여되었다.

 

<매일신보> 1942년 10월 20일자에 수록된 일본 사이타마현 소재 육군항공사관학교 탐방기에는 이곳 교정에 건립된 ‘수무대’ 휘호비의 모습이 함께 소개되어 있다.

 

일본 사이타마현에 자리한 육군예과사관학교에 대해 소재지 전체의 명칭으로 ‘진무대(振武臺)’라는 이름이 하사 되었다는 소식이 수록된 <매일신보> 1943년 12월 11일자의 보도내용이다.

 

불과 몇 년 사이에 ‘무(武)’자 돌림의 소재지 명칭하사가 거듭되다 보니, 여타의 군사학교 등 지에도 ‘무슨무슨대’라고 부르는 방식이 유행처럼 번져나가게 되었던 것이다. 이와는 별도로 만주국 육군군관학교(통칭 ‘신경군관학교’)의 경우에도, 학교 소재지를 ‘동덕대(同德台)’라는 별칭으로 불렀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여기에서 보듯이 일본천황이 머지않아 침략전쟁의 선봉에 설 일본군 예비장교들을 독려할 목적으로 여러 사관학교의 소재지 명칭으로 ‘〇〇대(臺)’를 잇따라 하사한 것은 그야말로 군국주의가 최고조에 달했던 시기의 전형적인 소산물인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참으로 안타깝게도 일제가 즐겨 사용했던 이러한 명명법은 해방 이후 단절되기는커녕 남북분단과 한국전쟁이라는 긴박한 상황을 맞이하여 되레 별다른 고민의 여지도 없이 그대로 차용되는 결과로 이어지고 말았다.

 

 

전라남도 광주에 신설된 육군종합학교에 대한 기지명명식에서 이승만 대통령이 이곳을 ‘상무대(尙武臺)’라는 이름을 부여하였다는 소식이 수록된 <경향신문> 1952년 1월 9일자의 보도내용이다.

 

이러한 흔적들 가운데 가장 빠른 용례는 한국전쟁 시기인 1951년 11월 1일에 충청남도 논산 지역에 설치된 ‘육군제2훈련소’에 대해 이승만 대통령이 직접 휘호를 내려 명명한 ‘연무대(鍊武臺)’였다. 곧이어 1952년 1월 6일에는 전라남도 광주에 개설된 육군종합학교에 대해서도 대통령에 의해 ‘상무대(尙武臺)’라는 이름이 주어졌다. 이에 관해서는 <경향신문> 1952년 1월 9일자에 수록된 「육군종합학교 기지 결정, 대통령 상무대라 명명」 제하의 기사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보인다.

 

이 대통령은 6일 광주 육군종합학교 기지 명명식 석상에서 요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벤프리트 장군 이하 여러 장병과 내외 귀빈 앞에 우리 국군의 보병, 포병, 통신병학교 개교식을 하게 된 데 대하여 이 훈련장에 이름을 지으라고 해서 상무대(尙武臺)라고 하였다. 미국과 같은 나라에서도 군인을 양성하고 무기를 만들어 내는 것이 평화를 숭상하고 수호하기 위함과 같이 우리도 상무를 한다면 그와 같은 것이다. 미국이 전력을 다하여 우리들을 돕고 유엔 각국이 우리와 같이 어깨를 겨누고 이 전쟁을 해 나가는 것을 우리는 영광으로 알 것이며 우리는 국군을 강대하게 만들어서 국방력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유엔에 협력해서 세계평화를 확보하기 위한 평화수호군대의 선봉이 될 것이다. (하략)

 

 

박정희 대통령이 공군사관학교에 대해 ‘성무대(星武臺)’라고 명명한 사실을 알리는 <경향신문> 1966년 5월 13일자의 보도내용이다.

 

 

이러한 방식은 5.16쿠데타를 통해 집권한 군사정권 시절로 접어들면서 더욱 성행하게 되어 1966년 4월에는 공군사관학교 소재지에 대해 박정희 대통령의 명명으로 ‘성무대(星武臺)’라는 이름을 갖게 된 것으로 확인된다. 그 이후에도 전국 각처에 새로운 군사편제에 따른 상급단위의 군부대가 설치되거나 각종 군사학교가 만들어질 때마다 ‘무슨무슨대’라는 식의 이름이 붙여지는 사례가 속속 등장하였다.
혹여 누군가는 우리들 역시 과거시험장이기도 했던 곳에 대해 경무대(景武臺)라든가 춘당대(春塘臺)라든가 하는 표현을 사용한 전통이 있었고, 수원 화성에도 연무대(鍊武臺)라는 시설이 있었다는 점을 들어 사실관계에 대한 반론을 제기할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러한 사례는 궁궐 안의 누대(樓臺)와 그 앞에 펼쳐진 일정한 공간에 국한된 명칭이거나 건축물 그 자체를 지칭하는 것이므로 군부대 소재지 전체를 일컫는 ‘무슨무슨대’라는 부르는 방식과는 결을 달리한다는 부분에 유의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누가 보더라도 군사교육시설을 대상으로 ‘무(武)’자 돌림의 이름이 최고통수권자인 대통령의 손으로 작명되어 붙여지는 형태가 일본제국의 그것과 고스란히 닮아 있음을 부인하기는 어려울 듯하다. 여러 군부대 소재지마다 ‘〇〇대(臺)’라고 부르는 것은 아무래도 일제 군국주의 시절의 소산물과 직접 맞닿아 있다는 점을 확실하게 인식하고, 지금에라도 이러한 명명법을 개선하거나 청산하는 방식을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때가 아닌가 한다.

화, 2020/06/23- 2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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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 비망록 51 ]

철도순직자조혼비, 조선철도 1천리 돌파가 남긴 기념물
해마다 용산철도공원에서 벌어진 철도순직자조혼제의 풍경

이순우 책임연구원

 

 

최남선(崔南善, 1890~1957)이 주도한 조선광문회(朝鮮光文會)에서 편찬한 <신자전(新字典) >(1915)의 말미를 보면, 시대의 흐름에 따라 그 뜻이 완전히 색달라졌거나 새로 창안되어 일본 등지에서 흘러들어온 여러 한자어들을 따로 묶어 수록한 부분이 포함되어 있다. 예를 들어, 미국의 달러(dollar)를 불(弗)로 쓴다거나 센트(cent)를 선(仙)으로 표기하는 따위가 그것이다.
또한 서양식 미터법의 도입에 따라 미터(m)는 미(米)로, 그램(g)은 와(瓦) 또는 극(克)으로, 리터(ℓ)는 입(立)으로 사용하는 방식도 이러한 범주에 속한다. 흥미로운 것은 가령 천(粁)과 같은 글자인데, 미터(米)가 천(千)개 모여 있는 모양이므로 이는 곧 ‘킬로미터’를 뜻한다. 마찬가지로 천(瓩)이라는 글자 역시 그램(瓦)이 천(千)개이므로 ‘킬로그램’을 가리키는 표현이 되는 것이다.
야드 파운드법에 따른 한자어에도 재미있는 사례들이 많이 있다. 여기에는 촌(寸, 치)이나 척(尺, 자)과 같은 재래식 단위표기의 개념을 결합 활용하는 방식이 주로 사용되는데, 예를들어 촌(吋)은 인치(inch)이며, 척(呎)은 피트(feet)이며, 마(碼)는 야드(yard)이며, 리(哩)는 마일(mile)을 나타낸다. 이것들은 전적으로 영국(英國)에서 건너온 단위이므로 대개 촌(吋)은 영촌(英寸)이라 하고, 척(呎)과 리(哩)는 각각 영척(英尺)과 영리(英里)라고 적어도 상관이 없다.
한 가지 주목할 만한 사실은 이러한 야드 파운드법에 따른 한자식 표기가 가장 빈번하게 사용되는 영역의 하나가 바로 철도 관련 분야라는 점이다. 아무래도 철도라고 하면 종주국이라고 하는 영국의 영향이 월등히 큰 측면이 있으므로 이곳에서는 유달리 미터법보다는 야드 파운드법이 선호되는 경향이 우세했다. 따라서 정거장 사이의 거리라든가 철도선로의 총연장은 몇 킬로미터가 아니라 몇 마일로 기재되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런데 <매일신보> 1915년 7월 23일자의 제1면 상단에는 ‘조선철도 일천리 개통기념(朝鮮鐵道 一千哩 開通記念) 철도대경주(鐵道大競走)’ 행사를 예고하는 안내 문안이 큼직하게 게재되어 있다. 여기에서 말하는 ‘1천 리’는 ‘1천 마일’을 가리키는 것이므로, 이는 곧 ‘1,609킬로미터’ 남짓한 거리에 해당하는 셈이다. 경술국치 이후 호남선(湖南線, 1914년 1월)과 경원선(京元線, 1914년 8월)이 잇따라 개통된 데에 이어 1914년 10월부터 착공한 함경선(咸鏡線)의 원산 문천 구간 12.5마일이 1915년 8월 1일에 부분 개통됨에 따라 조선총독부 철도국 소관의 철도영업이정(鐵道營業哩程)은 마침내 1,000마일을 돌파하여 총누계 1,006마일을 상회하기에 이르렀다.

이 당시 조선총독부는 대개 산업의 개발과 문화의 보급이 교통운수의 진보에 의지하는 바가 크고, 특히 지방에서는 교통의 발달이 개진(開進) 방법의 최대요건이라 일컬어진다는 뜻에 따라 철도영업거리가 1천 마일을 돌파한 것에 대해 상당한 의미를 부여하였다. 여기에 더하여 조선종관선(朝鮮縱貫線)은 부산의 해륙연락설비와 압록강의 대가교(大架橋)를 통해 유라시아 대교통로 간선철도(歐亞 大交通路 幹線鐵道)의 일부로서 지대한 가치를 지닌다는 해석을 덧붙이기도 했다.
이러한 평가의 이면에는 “조선의 재력(財力)과 부력(富力)의 정도에 비하면 1천 마일의 철도를 가진 것 자체가 조선통치 5년간의 치적에 있어서 가히 자랑거리의 하나가 됨을 부인하기 어렵다”는 자화자찬식의 인식을 깔고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큰 경사이니만큼 때마침 총독정치의 치적을 과시하기 위해 경복궁(景福宮)에서 거행되는 시정오년기념(始政五年記念) 조선물산공진회(朝鮮物産共進會)에 맞춰 성대한 축하회와 더불어 기념조형물을 건립하려는 계획이 진즉부터 추진되고 있었던 것으로 드러난다.
이에 따라 한창 공진회가 진행중이던 1915년 10월 3일에는 일본 황족 칸인노미야(閑院宮)와 이른바 ‘창덕궁 이왕(昌德宮 李王; 순종)’, 그리고 데라우치 조선총독을 비롯하여 야마가타 정무총감 등 총독부 고위관리들이 일제히 참석한 가운데 경복궁 근정전에서 조선철도 1천리 기념축하식이 거행되고, 경회루에서는 축하연회가 열려 성황을 이루었다. 이튿날인 10월 4일 오후 2시에는 철도국 소관 용산철도정원(龍山鐵道庭園, 나중의 용산철도공원)에 건립된 조혼비(弔魂碑) 앞에서 제막식을 겸해 철도순직자조혼제(鐵道殉職者弔魂祭)가 열렸고, 곧이어 이웃하는 철도구락부(鐵道俱樂部)로 자리를 옮겨 국원공적표창식(局員功績表彰式)이 진행되었다.

이때 제막된 ‘조혼비’는 추풍령(秋風嶺)에서 채석한 화강암으로 제작되어 총 높이가 41.6 척(尺; 12.6미터)에 달했으며, 비면의 글씨는 데라우치 총독이 쓴 것으로 드러난다. 그리고 여기에는 총독부 철도국 장관 오야 곤페이(大屋權平, 1862~1924)가 지은 비문이 부착되어 있었는데, 그 내용을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비석의 앞면은 조선총독 데라우치 백작의 휘호이다. 조선철도는 경인선으로 효시를 삼는다. 이윽고 경부철도의 부설계획이 있었는데, 이때 일로(日露, 일본과 러시아)의 국교(國交)가 장차 위태로워지려 하매 우리 정부(일본정부)는 곧 보조 공비를 내어 이를 서둘러 완성하려했다. 오래지 않아 간과(干戈, 방패와 창)가 충돌하여 향도(餉道, 군량을 나르는길)가 긴급을 요하는 상황으로 바뀌었다. 정부는 다시 육군으로 하여금 경의, 마산 양 철도의 속성을 서둘러 동사자(董事者)는 밤낮으로 병마(兵馬)를 바삐 분주하게 한 사이에 3선은 모두 완성되었다. 평화극복 후에 여러 선로는 국유(國有)로 귀속되고 통감부를 거쳐 총독부 관리로 옮겨졌다. 기설선로가 개수되었고, 압록강 갑교(閘橋)가 가설됨으로써 유라시아대륙과 연락이 되고 국제철도의 대열에 들어서게 되었다. 평남, 호남, 경원 3선로가 완성되고 다시 함경선의 기공으로 나아갔다. 이 사이에 봉공순직(奉公殉職)한 사람이 매우 많았는데 자신을 돌보지 않은 절개를 어찌 백전무공(百戰武功)이라 하지 않으리. 이에 철도 일천리의 가신(佳辰, 경사)을 맞이하여 그 영혼을 위로하고자 비석을 세우고 동도지은(同道之恩)을 오래도록 기록하노라.
대정 4년(1915년) 10월 조선총독부철도국장관 공학박사 오야 곤페이 짓고 쓰다.

 

이로부터 해마다 10월 4일에는 이곳에서 철도종사자로서 철도건설이나 유지보수 과정에서 희생되거나 운수업무에 종사하다가 순직한 이들에 대한 조혼위령제가 꼬박꼬박 거행되는 풍경이 펼쳐졌다. 다만, 1937년에 총독부 철도국이 경인철도 시절에 노량진 제물포 구간을 처음 운행한 날인 9월 18일을 택하여 ‘철도기념일(鐵道記念日)’을 새로 제정한 것에 영향을 받아 1940년 이후로는 바로 이 날짜에 조혼제가 열리는 것으로 변경되었다.
남아 있는 자료의 한계로 해마다 증가하는 철도순직자의 추이를 따로 집계할 수는 없었으나, 최소한 1940년으로 접어드는 시기에 그 숫자가 현저하게 증가하는 현상만큼은 충분히 감지할 수 있다. 예를 들어, 1932년에 누적 순직자는 2,790명(전년대비 +146명)이었던 것이 1939년에는 4,137명(+296명)으로, 다시 1943년에는 조혼제의 합사자(合祀者)가 6,132명(+593명)으로 급증한 것으로 나타난다. 

 

이는 절대 규모면에서 1915년 최초의 조혼제 당시 철도순직자의 총수가 635명이었다는 점과도 크게 대비가 된다. 이와 같은 시기에 조선경찰협회와 조선소방협회의 주관으로 해마다 경복궁 근정전 용상에
제단을 설치하고 행사를 치른 순직경찰관 경방직원초혼제(警防職員招魂祭)의 경우, 1944년 10월 현재 순직경찰관이 403명에 순직소방수가 55명으로 이를 모두 합쳐도 458명 정도의 규모였다. 이러한 사실과 비교하면, 철도순직자의 규모가 압도적이었다는 것을 그대로 실감 할 수 있을 듯하다.
그런데 이곳 조혼비가 자리한 용산철도공원 일대(지금의 ‘한강로 3가 65번지’ 철우아파트및 용산세무서가 자리한 위치)는 야구대회나 자전거경주 등 여러 가지 체육행사가 벌어진 공간이라는 점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이곳에서는 심지어 풀장이 마련되어 이곳에서 수영대회가 열리거나 근처의 연못에서 아이스하키 대회가 거행된 시절도 있었다.
이에 관해서는 우선 <동아일보> 1930년 4월 12일자에 연재된 「10주년 기념 조선야구사(朝鮮野球史), (10) 조선 최초의 야구대회」 제하의 기사를 보면, 1915년 6월 13일에 조선공론사(朝鮮公論社)가 전조선야구대회(全朝鮮野球大會)를 최초로 이곳 용산철도공원, 속칭 ‘구(舊) 그라운드’에서 개최하였다는 내용이 남아 있다. 이때 참가단체로는 철도구락부청년단, 체신구락부, 조선은행군, 경성중학, 경성실업구락부군, 철도구락부소년단 등 여섯 팀 이외에 조선인 단체로 오성친목회군(五星親睦會軍)이 유일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그리고 이곳은 용산 병영지의 인접지역에 자리한 탓에 이곳에 일본군 병력이 집결한 흔적도 곧잘 눈에 띈다. 예를 들어 <매일신보> 1916년 4월 15일자에는 신설되는 제19사단 병력과 종전의 조선주차 제9사단 병력이 교대되는 상황에서 이들에 대한 환송 및 환영을 위한 대원유회(大園遊會)가 용산철도공원에서 펼쳐질 예정이라는 기사가 수록되어 있다. 또한 1930년 10월에 사단대항연습(師團對抗演習)이란 대규모 군사훈련이 거행될 당시에는 이 일대에서 고사포대(高射砲隊)가 진지를 펼친 한편 훈련참가부대의 강평회(講評會)와 야연(野宴)이 벌어지기도 했다.
한편, 해방 이후 시기에 이르러 일제가 용산철도공원에 조성했던 철도순직자조혼비가 어떻게 처리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단서도 찾을 수 없다. 그 대신에 별도의 순직비가 조성되고 순직철도종사원에 대한 합동추도식이 해마다 재연된 흔적이 완연히 포착된다. 이와 관련하여 <경향신문> 1955년 9월 18일자에 수록된 「합동위령제 엄수, 철도사고 순직자」 제하의 기사는 어떠한 연유로 철도순직자에 대한 위령제가 재개된 것인지를 잘 설명해주고 있다.

교통부에서는 16일 오후 1시부터 용산에 있는 동부(同部) 후정에서 제3차(회) 순직자합동위령제(殉職者合同慰靈祭)를 거행하였다. 그런데 금번 위령제는 (단기) 84년(1951년) 9월 1일 이래 철도운수사업에 종사하다 불의의 사고로 순직한 141주(柱)의 영령을 추도하기 위한 것으로 위령제가 끝난 후 유가족들에게는 광목(廣木) 반 통과 기타 물품이 증정되었으며, 특히 동 위령제에 참석하기 위하여 지방에서 상경한 유가족들을 위로하기 위하여 시내 극장에 안내하고 이들에게 위안의 하루를 보내게 하였다.

 

여기에 나오는 교통부(交通部)의 후정(後庭)이라고 하는 곳은 ‘한강로 3가 63번지 구역’에 자리한 교통고등학교 구역을 가리킨다. 1953년 7월 부산에 피난중이던 정부가 환도(還都)할 적에 오갈 데가 없어진 교통부가 용산의 교통학교 교재전시장(敎材展示場) 용도로 사용하던 건물을 새로운 청사로 삼아 터를 잡았고, 그 후 1963년 9월 1일에는 철도청(鐵道廳)이 발족하면서 교통부 청사를 그대로 물려받아 사용하게 되었던 것으로 확인된다.
이러한 연유로 철도순직자위령제가 벌어지는 공간은 시기에 따라 교통부 후정이나 철도청 뒷마당으로 표기되었고, 또 어떤 때는 순직비의 소재지가 철도고등학교 교정(校庭)이라거나 교통공무원교육원 뒤뜰로 표기되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한국전쟁이라는 혼란기가 실제로 다수의 철도순직자를 만들어냈고, 그것이 촉매제가 되어 일제의 유습(遺習)이 분명했던 철도순직자 조혼제의 관행은 그 유래를 따질 겨를도 없이 불과 7, 8년 사이에 고스란히 부활하는 상황이 초래되고 말았던 것이다.

수, 2019/10/30- 0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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空理空論(공리공론)

 

朝鮮何滅沒(조선하멸몰)

空理益空論(공리익공론)

但事儒家道(단사유가도)

終成日本呑(종성일본탄)

 

空理空論에 대하여

 

朝鮮은 어찌 망하여 없어졌는가

空理에다 또 空論을 더하였다네

오로지 儒家의 道만 섬기었으니

마침내 일본이 꿀꺽 집어삼켰네.

 

<時調로 改譯>

 

朝鮮은 왜 망했는가 空理에 空論 더했네

孔子 가르친 그 道만 섬길 따름이었으니

마침내 일본이 꿀꺽 삼켜 버리고 말았네.

 

*空理空論: 실천이 따르지 않는 헛된 이론이나 논의 *滅沒: 망해 없어짐. 멸해

없앰 *儒家: 孔子 학설, 학풍을 신봉하는 학자나 학파 *終成: 마침내 이뤄짐.

 

<2019.2.18, 이우식 지음>

월, 2019/02/18- 0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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