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의 식민지 역사를 돌아보고, 새로운 대구의 역사를 모색하는 학술세미나가 경북대에서 열린다.
▲ ’식민지 역사와 도시의 재현, 그리고 대구’ 학술세미나 [사진=경북대 인문학술원]
경북대 인문학술원(원장 허정애)과 대구경북학회(회장 김영철), 대구경북연구원(원장 이주석)은 오는 24일 오후 2시 경북대 대학원동 학술회의실에서 ‘식민의 역사와 도시의 재현, 그리고 대구’를 주제로 학술세미나를 개최한다.
황보영조 경북대 인문대학장 사회로 진행되는 이번 세미나는 김일수 경운대 벽강교양대학 교수, 김경남 경북대 사학과 교수, 이정희 인천대 중국학술원 교수, 이정찬 민족문제연구소 대구지부 사무국장 등이 발표자로 나서 식민지 시대 대구의 도시 재편 문제와 식민지 역사의 재구성, 그리고 도시 콘텐츠 문제 등 다양한 주제로 발표·토론할 예정이다.
이어 박승희 대구경북학회 부회장 사회로 권상구 시간과공간연구소 이사, 김석수 경북대 인문학술원 부원장, 이재필 대구경북연구원 대구경북학센터장, 조명근 영남대 역사학과 교수, 홍성덕 전주대 역사문화콘텐츠학과 교수가 토론을 진행한다.
허정애 경북대 인문학술원장은 “대구의 식민지 연구는 대구의 미래를 위한 중요한 과제 중 하나다. 이번 학술세미나가 식민지 도시에 대한 성찰과 반성, 나아가 새로운 대구를 위한 토대가 되길 바란다”고 밝혔다.
민족연 ‘역사 현장 시민답사’ 이원규 작가 강연·안내 성황 “국가유공 수훈이 진정한 복권”
▲조봉암 연구의 권위자인 이원규 소설가가 ‘조봉암의 생애와 꿈’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민족문제연구소 인천지부는 22일 ‘강화 죽산 조봉암 생가터와 청년기 활동 및 추모비’를 살펴보는 ‘역사 현장 시민답사’ 행사를 진행했다.
이날 답사는 강화에서 나고 자라 청년기를 보냈던 죽산의 생애를 돌아보고 그의 업적과 정신을 되새기기 위해 기획됐다.
죽산 연구에 독보적인 지위를 굳혀 온 소설가 이원규 작가의 강연과 안내로 진행된 행사에는 강화와 인천지역 주민, 민족문제연구소 회원 등이 대거 참석해 성황을 이뤘다.
답사단 일행은 죽산의 모교인 강화초등학교를 출발, 생가터 표지석이 남아 있는 강화읍사무소를 거쳐, 갑곶돈대 앞 진해공원추모비와 선원면 생가터를 차례로 살펴봤다.
이원규 작가는 답사에 앞서 진행된 강연에서 ▲죽산의 출생과 소년시절 ▲3.1 만세운동과 청년시절 ▲독립운동과 고난기 ▲광복 후의 영광과 굴레 ▲53년 만의 무죄선고 ‘햇빛 속으로’ 등 시기별로 조봉암의 생애에 대한 설명을 이어나갔다.
▲강화지역 조봉암 생거지 및 활동지역 현장답사 참가자들이 이원규 작가로부터 죽산의 독립운동사와 정치역정에 대한 강연을 듣고 있다.
-죽산의 생애
죽산은 1899년 강화 선원면에서 출생했다. 농업보습학교를 졸업한 뒤 강화군청 사환 임시고원으로 취직했지만 3.1 만세운동에 참가해 구속과 고문을 되풀이하며 ‘민족적 각성’을 다져 나갔다. 일본과 러시아 모스크바 유학을 거치면서 사회주의자의 길로 접어든 죽산은 국내와 중국 상하이를 오가며 눈부신 독립운동을 펼쳐나갔다.
중국에서 체포돼 신의주 형무소에서 7년간 형극의 수감 기간을 겪은 뒤 출옥해 인천에 정착했지만, 광복 직전인 1945년 1월 예비구금령으로 헌병대에 구속돼 감옥 안에서 해방을 맞았다. 해방 직후 여운형, 박헌영 등과 손잡고 건국준비위원회와 민전(민주주의 민족전선)을 조직했으나, 미군의 공작으로 전향 성명을 내고 공산당을 떠나 ‘비(非) 공산정부 건립’을 기치로 내걸었다.
1947년 하반기에 우파와 결합해 단독정부안을 받아들인 뒤, 48년 5월 제헌의원으로 당선돼 헌법 기초 의원으로 활동했으며, 그해 7월에는 초대 농림부장관으로 취임해 “혁명 없이 신속한 토지 균등성을 확보했다”는 평가를 받은 ‘농지개혁법’을 주도했다.
국회부의장으로도 탁월한 능력을 발휘한 죽산은 1952년 8월 5일 2대 대통령에 출마해 79만 표를 얻었으며, 56년 5월 15일 치러진 3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216만 표를 획득, 이승만 정권의 간담을 서늘케 했다.
1956년 11월 진보당을 창당했으나 그의 득표력에 위기를 느낀 이승만 정권은 ‘간첩’이라는 누명을 씌워 1심 형량인 5년을 2심에서 뒤집고 사형을 선고한 뒤, 1959년 7월 31일 재심이 기각된 지 17시간 만에 사형을 집행하는 ‘사법살인’을 저질렀다.
20세 청년기에 3.1 운동에 뛰어들어 모진 고초를 감내하며 20여 년간 독립운동에 매진했고, 광복 뒤에는 ‘농지개혁’ 등 화려한 업적을 남긴 죽산은 “내가 비록 사형을 당해도 애국심에는 변함이 없다”는 유언을 남긴 채 60세의 나이로 비운의 생을 마감했다.
▲강화지역 조봉암 생거지 및 활동지역 현장답사 참가자들이 이원규 작가로부터 죽산의 독립운동사와 정치역정에 대한 강연을 듣고 있다.
– 죽산의 꿈과 남겨진 과제
지난 2005년 진실화해위원회의 재심 권유에 따라 2011년 2월 11일 대법원에서 무죄 선고해 50여 년 만에 ‘간첩죄’의 누명을 벗었으나, 지금까지도 ‘독립유공 서훈’이 이뤄지지 않고 있다.
‘죽산이 가졌던 꿈’과 그가 뿌린 ‘씨앗’에 대해 이원규 작가는 “죽산은 유상몰수 유상분배를 관철시켜 신속한 시간 안에 세계 최고 수준의 토지균등성 확보에 성공했고, 이는 농민들이 공산혁명을 거부하는 원동력으로 작용했다”면서 “자경농이 된 농민들은 자녀교육에 집중해 기적적인 경제성장을 이룩하는 발판을 마련했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그가 추구한 ‘평등과 정의의 사회’는 여전히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 숙제를 던져주고 있다. 진보당 강령인 ▲민주주의 체제 확립과 책임 있는 혁신정치 실현 ▲생산분배의 합리적 통제를 통한 민족자본 육성 ▲평화적인 조국 통일 실현 ▲교육의 완전 국가보장제 및 노동자 권리 보장 등은 “오늘 왜 다시 죽산인가?”를 대변하고 있다.
▲이원규 작가가 죽산의 생가터로 추정되는 금월리 가지마을을 가리키고 있다.
– 죽산의 생가터, 선원면 금월리 가지마을 26-3
갑곶돈대 앞 ‘진해공원 추모비’에 이어 선원면 생가터를 찾은 답사단 일행은 이 작가의 안내에 따라 죽산의 정확한 출생지에 대한 의문을 풀어나갔다. 죽산이 태어난 곳에 대해서는 두 가지 견해가 맞서고 있다. 한쪽은 강화군 선원면 선원사를 등지고 바라보이는 마을 왼편 구릉지대인 ‘지산리 남산대’ 를 다른 쪽은 바로 옆 100m 지점의 ‘금월리 가지 마을’이라고 주장한다.
‘남산대’를 주장하는 쪽은 먼 친척형으로부터 “‘너희들은 기억하고 있다가 후손에게 알려 줘라. 독립운동가인 봉암이라는 우리 집안 사람이 남산대에서 태어나 강화 성내 소학교를 다녔는데 대문고개를 넘으며 책을 읽었다’라는 얘기를 들었다”고 전한다. 반면 이 마을 출신 친척인 전직 교장 조규성 씨는 “1957년 강화초등학교 교사로 부임 직후 출생지가 ‘선원면 가지마을’로 표시된 죽산의 생활기록부를 봤다”고 기억한다.
이에 대해 이 작가는 “현장 확인과 증언 등을 종합하면, 금월리 가지마을이 정확한 것으로 보인다”면서 “가지마을의 지적도에 나오는 대지 7필지에 대해 현지에서 전수 조사한 결과, 26-3 한 곳의 내력이 확인되지 않는 점에 비추어 이 곳이 가장 유력한 출생지로 판단된다”고 밝혔다.
이 작가는 답사를 마치는 자리에서 “죽산은 진보정당과 보수정당이 양 날개처럼 선의의 경쟁을 하는 ‘잘 사는 나라’를 추구했고, 남북이 대화를 통해 평화통일을 이뤄야 한다는 신념을 갖고 있었다”면서 “죽산의 국가유공 수훈이 관철되는 것이 진정한 복권이자, 국가 양심을 회복하는 길‘이라고 강조했다.
이원규 작가 1947년 인천에서 태어나 인천고와 동국대 국문학과를 졸업한 뒤 1984년 월간문학 신인상에 단편소설 ’겨울 무지개‘가 당선돼 문단에 등단했다. 활발한 저술 활동을 벌이는 가운데도 동국대와 인하대에서 소설 강의를 맡는 등 후학양성에도 힘을 쏟았다. 분단에 대한 진보적 시각을 온건한 필체로 표현해왔다는 평가를 받고 있으며, 세 차례의 조봉암 평전과 김원봉, 김산 평전 등 독립운동가의 생애를 조명하는데도 열정을 기울였다. 대한민국 문학상, 현대문학상, 박영준 문학상, 동국 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인천지역 역사현장 시민답사 프로그램 참가자들이 죽산 조봉암 생가터를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광주지역 독립운동가 고 김한동(1915∼1950) 선생의 학창 시절 모습. 민족문제연구소 광주지부 제공
독립운동에 헌신했지만 좌익이었다는 이유로 외면당한 독립운동가에게 광주시민이 정부를 대신해 서훈을 수여했다.
민족문제연구소 광주지부는 “광복 76주년을 맞아 전날 광주 서구 마을카페 ‘싸목싸목’에서 고 김한동(1915∼1950) 선생 유족에게 ‘자랑스러운 독립유공자 서훈패’를 전달했다”고 15일 밝혔다.
1915년 11월18일 전남 함평에서 태어난 김 선생은 1929년 4월 광주고등보통학교(현 광주제일고)에 입학하며 그해 11월 일어난 광주학생독립운동에 가담했다가 이듬해 1월 퇴학당했다.
그는 1932년 5월 항일·노동운동 단체였던 전남노동협의회에 참가해 체포됐으나 미성년자여서 기소유예 처분을 받았다. 1937년 4월 서울에서 항일 적색노동조합 준비위원회에 참가했다가 1939년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징역 2년형 선고받고 1941년 만기 출옥했다.
1945년 8월9일에는 옛 소련(러시아)이 태평양전쟁에 참여하자 진행된 사회주의자 예비검속 때 붙잡혀 해방 뒤에야 석방됐다. 석방 당시 김 선생이 던진 첫마디는 “조선옷 주라”였다고 한다.
14일 광주광역시 서구 마을카페 싸목싸목에서 사회주의 독립운동가 고 김한동 선생의 장남 김승일씨(왼쪽)씨가 광주시민 명의로 제작된 ‘자랑스러운 독립유공자 서훈패’를 전달받고 있다.민족문제연구소 광주지부 제공
김 선생은 1948년 11월 미군정청의 군정법령을 위반해 5년형을 선고받고 경북 김천형무소에 수감됐다. 당시 김 선생의 혐의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유족은 경찰이 여순사건과 엮은 것으로 보고 있다.
이듬해 6·25 전쟁이 발발하자 이승만 정부는 남쪽으로 후퇴하면서 좌익계열 수감자 등을 적법 절차도 없이 대거 학살했는데, 김 선생도 1950년 7월 중순께 진주시 명석면에서 총살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장남 김승일(78)씨 등 유족은 1998년 국가보훈처에 김 선생의 독립유공자 서훈을 신청했으나 사회주의 계열이라는 이유로 거부당했다.
김순흥 민족문제연구소 광주지부장은 “사회주의 독립운동가를 정부가 외면하니 시민 명의로 서훈패를 증정했다”고 말했다. 민족문제연구소 광주지부는 2019년 지난해 윤윤기·김범수, 지난해 이기홍·장재성 등 사회주의 독립운동가에게도 ‘자랑스러운 독립유공자’ 서훈패를 전달한 바 있다.
시민들의 의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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