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의 식민지 역사를 돌아보고, 새로운 대구의 역사를 모색하는 학술세미나가 경북대에서 열린다.
▲ ’식민지 역사와 도시의 재현, 그리고 대구’ 학술세미나 [사진=경북대 인문학술원]
경북대 인문학술원(원장 허정애)과 대구경북학회(회장 김영철), 대구경북연구원(원장 이주석)은 오는 24일 오후 2시 경북대 대학원동 학술회의실에서 ‘식민의 역사와 도시의 재현, 그리고 대구’를 주제로 학술세미나를 개최한다.
황보영조 경북대 인문대학장 사회로 진행되는 이번 세미나는 김일수 경운대 벽강교양대학 교수, 김경남 경북대 사학과 교수, 이정희 인천대 중국학술원 교수, 이정찬 민족문제연구소 대구지부 사무국장 등이 발표자로 나서 식민지 시대 대구의 도시 재편 문제와 식민지 역사의 재구성, 그리고 도시 콘텐츠 문제 등 다양한 주제로 발표·토론할 예정이다.
이어 박승희 대구경북학회 부회장 사회로 권상구 시간과공간연구소 이사, 김석수 경북대 인문학술원 부원장, 이재필 대구경북연구원 대구경북학센터장, 조명근 영남대 역사학과 교수, 홍성덕 전주대 역사문화콘텐츠학과 교수가 토론을 진행한다.
허정애 경북대 인문학술원장은 “대구의 식민지 연구는 대구의 미래를 위한 중요한 과제 중 하나다. 이번 학술세미나가 식민지 도시에 대한 성찰과 반성, 나아가 새로운 대구를 위한 토대가 되길 바란다”고 밝혔다.
▲ 1987년 인천 6월 항쟁의 중심지인 부평역 광장에는 ‘6월 민주항쟁 30주년 인천조직위원회’가 건립한 기념 표석이 자리 잡고 있다.
민족문제연구소 인천지부(지부장·김재용)는 12일 인천 부평역 일원에서 대통령 직선제를 이끌어낸 인천지역 6월 항쟁의 현장을 돌아보는 ‘87년 6월 항쟁 현장 탐방’ 행사를 개최했다.
인천광역시의 지원을 받아 ‘2021년 인천지역 역사현장 시민답사 프로그램’ 첫 번째 순서로 전행된 이날 행사는 안재환 인천민주화운동계승사업회 이사가 해설을 맡았다. 답사단은 오전 10시 부평역을 출발해 백마장 입구-세림병원-부평경찰서-현 산곡역 앞을 거쳐 영아다방 앞까지 3시간 가까이 탐방을 이어갔다.
▲ 안재환 인천민주화운동계승사업회 이사가 ‘인천에서 벌어진 87년 6월 항쟁의 진행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6월 항쟁의 직접적인 원인은 87년 1월 14일 남영동에서 고문을 받다가 숨진 박종철 열사의 사망 사건이었다. 하지만 인천의 6월 항쟁은 한 해 전인 1986년 인천 전역에서 불꽃처럼 일어난 5.3 항쟁 때 이미 준비되고 있었다.
1년 뒤인 1987년 6월 10일,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 주최로 대한성공회 서울교구에서 개최된 “박종철군 고문치사 조작, 은폐 규탄 및 호헌철폐 국민대회”와 때를 맞춰 부평역을 중심으로 대학과, 성당, 교회, 동인천역 등 시내 곳곳에서 대규모 가두시위가 전개됐다.
‘민주헌법쟁취 인천지역 공동대책위원회’가 이날 오후 6시 부평역 광장에서 개최한 궐기대회는 ‘장기집권 획책하는 군부독재 타도하자’는 대형 플랜카드를 앞세운 수천 명의 시위대가 광장과 거리를 가득 메웠다. 택시기사들은 경적을 울렸고 거리의 시민들을 박수를 보냈다.
상점 주인들은 빵과 음료수, 휴지를 건네며 너나없이 경찰에 쫓기는 시위대를 숨겨줬다. 경찰은 이날 집회를 빌미로 집회를 준비한 공동대책위 7명을 수배해 그중 안영근(전 국회의원) 인천지역사회운동연합 집행국장 등 12명을 구속했다.
인천 항쟁이 최고조에 달한 것은 6월 18일 부평구청 앞에서 열린 ‘호헌 철폐와 최루탄 추방을 위한 인천 시민대회’였다. 오후 6시가 되자 불어난 시위행렬은 2만 명을 넘어서 구청 부근과 인근 행복예식장 일대가 시위대로 넘쳐났다.
▲ 이남희 당시 인천지역민주노동자연맹 투쟁부장이 6월 항쟁 당시 인천지역 노동자들의 투쟁을 소개하고 있다.
엄청난 시위대에 두려움을 느낀 경찰은 ‘부평만행사건’이라고 불릴 정도로 무차별적인 폭력을 휘두르며 다음날 새벽 5시까지 700명이 넘는 시민, 학생, 노동자들을 연행했다. 주변 철마산으로 피신했던 시위대 일부는 청천동과 효성동 파출소를 공격하기도 했다.
전국 37개 도시에서 일제히 ‘범국민대회’가 열린 6월 26일 오후, 부평시장 골목에서 5백여 명의 시위대가 나무십자가를 앞세우고 구호를 외치며 ‘범시민 평화대행진’을 시작했다. 부평우체국과 백마장 사이의 부평로에서는 시민과 노동자, 학생 등 2천여 명이 도로를 점거하여 연좌시위를 벌였다. 가두의 시민들은 “최루탄을 쏘지 마라!”고 외치며 경찰의 무차별 폭력진압에 항의했다. 시위대 일부는 경찰에 연행되는 시민들을 구출할 만큼 놀라운 투쟁의지를 보였다. 안 이사는 “이날 부평역 인근에서부터 백마장 입구까지는 그야말로 ‘해방구’였다”고 회고했다.
▲ ‘6월 항쟁 현장 탐방’ 행사 참가자들이 인천 6월 항쟁 당시 집회 참가자들이 무더기로 끌려가 고초를 겪었던 부평경찰서 앞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전두환 정권은 6월 항쟁이 벌어진지 19일 만에 굴복하고 말았다. 노태우는 ‘6·29 민주화 선언’을 통해 “직선제 개헌 요구를 수용한다”고 발표하면서 인천 시민들의 항쟁은 마침내 승리로 마무리됐다.
안 이사는 “인천지역의 6월 항쟁의 가장 큰 특징은 노동자 주도로 이뤄졌다는 점”이라고 밝히고 “여러 한계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 민주화 발전과 사회운동의 비약적 성장에 크게 기여했다”고 말했다.
[시사토픽뉴스]인천광역시교육청(교육감 도성훈)은 지난 29일 제110주년 경술국치일을 맞아 ‘인천 학교 내 남아있는 일제 잔재 및 군사문화 바로 알기’ 조사를 진행했으며, 현재 조사 결과에 대해 정밀화 및 학술 검토를 진행 중이라고 밝혔다.
인천시교육청은 작년 12월에 민족문제연구소 인천지부와 업무 협약을 맺고 전문적인 조사를 의뢰했다. 기초 사료 조사를 시작으로 올해 3월부터 5월까지 관내 학교의 상징물(교명, 교가, 교목, 교화, 교표 등)과 조형물에 대한 1차 전수조사를 마쳤으며, 현재 학교 현장의 의견수렴과 협의회를 거쳐 3차 검토가 진행 중이다.
연구진은 일제식 지명과 관련된 교명, 친일인명사전에 등록된 인물이 작사 또는 작곡한 교가, 학교 내 일본식 석등이나 조형물, 군사문화 일부로 여겨지는 동상 등을 발견했다고 보고했다.
향후 연구진이 검토를 완료하면 인천시교육청은 모든 학교에 보고서를 배부할 예정이다. 또한 교육공동체가 일제 잔재와 군사문화에 대한 정확한 정보와 인식을 공유하고, 자율적으로 개선해 나갈 수 있도록 지원할 방침이다.
도성훈 교육감은 “객관적으로 사실을 확인하고 충분히 검토한 후 학교에 알리고자 한다”며 “시간이 걸리더라도 교육적으로 개선해 나가는 것이 미래 세대를 위해 우리가 할 일이다”고 강조했다.
▲ ‘인천지역 김구선생 발자취 탐방 행사’ 참가자들이 출발지인 인천역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민족문제연구소 인천지부는 8일 오전 중구 일대에서 백범 김구선생의 발자취를 탐방하는 ‘인천지역 역사현장 시민답사 프로그램’ 두 번째 행사를 진행했다. 이 행사는 청년 김구(김창수)가 일본인 살해 혐의로 체포돼 인천감옥(감리서)에 갇혀 있으면서 인천 지사들의 도움으로 사상 전환을 한 뒤 탈옥해 민족운동가로 성장하는 과정을 살펴보기 위해 기획됐다.
장회숙 도시자원디자인연구소장과 이희환 도시공공성네트워크 대표의 해설로 진행된 탐방에는 인천내항살리기시민연합, 구월지역아동센터 어린이 등이 시민들과 함께 참석해 성황을 이뤘다.
참가자들은 인천역을 출발해 중구청(구 일본 영사관 자리)과 인천감리서터(인천 감옥), 김구 선생의 탈옥길(답동 마루터)을 답사했다. 이어 선생의 모친인 곽낙원 여사가 김구 선생의 옥중 생활을 돌보던 ‘옥바라지길과 내리교회, 선생이 수감 중 직접 쌓은 축항 노역길을 둘러 봤다.
– 인천 감옥(감리서) 수감생활과 탈옥
황해도 해주가 고향인 김구 선생과 인천과의 인연은 청년시절부터 시작된다. 일본인들이 명성황후를 시해한 다음해인 1896년 3월 김구는 일본인들에게 복수를 하기 위해 황해도 치하포에서 스치다 조스케를 살해한 뒤 체포됐다.
인천감옥으로 옮겨진 김구는 미결수로 생활하던 기간 동안 중국에서 발간된 ‘세계 역사·지지’ 등 신서적을 읽으며 사상적 전환을 이뤘다. 22세 때 사형선고를 받은 뒤에도 다른 죄수들을 공부시켜 ‘김창수 덕분에 인천 감옥이 학교로 불렸다’는 신문보도가 나오기도 했다.
모친 곽낙원 여사는 감리서 주변에서 기거를 하며 인천 객주들의 도움을 받아가며 모진 고초를 마다하지 않고 아들의 옥바라지를 했다. 백초 유완무와 인천 서구 서천동 출신 서예가 유희강은 수감 중이던 김구의 사상 전환을 도와준 것으로 알려졌다.
선생은 주변의 도움을 받아 1898년 3월 칠흑 같은 어둠을 틈타 탈옥을 감행했다. 탈옥 경로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남아 있으나 현재 인천시는 대강의 탈옥로를 ‘백범로’로 이름 붙여 기념하고 있다.
– 광복 직후 첫 전국순회 방문지로 인천 찾아
광복 직후 어렵사리 귀국한 김구가 1946년 38선 이남 지방을 순시하면서 처음 들른 곳이 인천이다. 22세의 젊은 나이에 사형선고를 받았다가 23세 때 탈옥·도주했고 41세 때 17년 형을 선고받고 또다시 감옥으로 들어간 형극의 장소를 첫 방문지로 선택한 것이다.
지난 1996년 전국순회로 열렸던 백범 김구의 겨레사랑전이 인천종합문화예술회관 대전시실에서 개최된 것을 계기로 ‘백범 김구선생 동상건립 인천시민위원회’가 꾸려졌다. 그 다음해인 1997년 전국 최초로 시민들의 성금으로 인천대공원에 백범광장이 조성됐고 김구 동상에 세워졌다.
이 때 어머니 곽낙원 여사의 실물크기 동상이 서울 효창동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회 전시관에서 인천대공원 백범 동상 옆으로 옮겨졌다. 곽 여사가 하루 종일 객주집에서 허드렛일을 해서 얻은 찬밥을 바가지에 담아 선생이 갇혀있는 감옥으로 향하는 모습을 새긴 동상이다.
인천시는 현재 백범의 발자취가 남아 있는 중구 신포로 주변에 ‘청년 김구 거리’ 조성을 추진하고 있으며 내년 말쯤 완공할 예정이다. 이곳에는 내동 감리서 터 주변의 ‘탈옥로 도보 순례길’과 곽낙원 여사의 노고가 서린 신포시장 주변의 ‘옥바라지길’, 백범의 손길이 남아있는 내항 1부두 일대의 ‘노역길’ 등이 만들어질 예정이다.
시민들의 의견
댓글 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