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 콘텐츠로 건너뛰기

강만길, “건국절 운운은 이승만 분단주의의 연장”

지역

강만길, “건국절 운운은 이승만 분단주의의 연장”

익명 (미확인) | 월, 2017/11/20- 19:35

팔십 평생 분단 극복과 평화통일 연구에 힘써온 강만길 고려대 명예교수는 “북핵 문제를 해결하는 근본적인 길은 북·미 수교와 북·일 수교”라고 말했다. 그 길만이 한반도에 평화를 가져온다는 것이다.

▲ 강만길 고려대 명예교수는 “어떤 조건으로 친일을 했으며 그 결과가 어떠했는지 이를 학문적으로 소화해서 교과서에 정확하게 넣어야 한다”라고 말했다. ⓒ김흥구

북한 핵과 미사일 문제를 놓고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사이에 ‘말 전쟁’이 극단으로 치달았다. 고조되는 긴장에 비해 해법은 아직도 묘연하다. 길이 보이지 않을 때는 역사를 보라는 말이 있다. <분단시대의 역사인식> 등을 펴낸 강만길 고려대 명예교수는 팔십 평생 분단 극복과 평화통일 연구에 힘써온 역사학자다. 작고한 리영희 한양대 명예교수와 함께 1970년대 이래 우리 사회의 대표적 원로 지성으로 꼽힌다. 유신정권 시절에는 박정희 독재정권의 탄압으로 4년 동안 대학 강단을 떠나기도 했다. 그는 상지대 총장(2001~2005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위원장(2005~2007년)을 지낸 뒤 강원도 양양으로 거처를 옮겨 지내고 있다. 지난 7월 말 강원도 평창 알펜시아리조트에서 휴가를 보내던 문재인 대통령이 강 명예교수를 초청해 대담을 나누기도 했다. 팔순이 훌쩍 넘었지만 여전히 왕성한 집필 활동과 강연 등으로 역사의 진보를 설파하는 그를 양양에서 만났다.

한반도 전쟁 위기가 고조됐다.

북핵 문제가 제일 시급한데, 내가 보기에는 과거 역사를 돌아볼 필요가 있다. 핵 개발 중에도 북·미 관계가 좋을 때는 협상을 통해 북한이 핵 시설을 파괴하도록 만들었다. 클린턴 정부 때 북·미 수교, 고이즈미 내각 때 북·일 수교를 놓고 협상할 때였다. 역사적으로 보면 북핵 문제를 해결하는 근본적 길은 북·미 수교와 북·일 수교 아니겠는가. 그 길만이 한반도에 평화를 가져온다.

현재 북한은 수교를 하더라도 핵 보유를 인정받겠다는 입장 아닌가?

북·미나 북·일 수교를 하게 되면 핵은 포기하라든지 하는 조건이 붙을 것이다. 지금까지 북·미가 수교를 하지 않고 해마다 한·미 합동군사훈련을 벌이니까 결국 핵으로 대응하는 것이다. 한·미 합동군사훈련을 하며 북한 상륙작전까지 연습하니까 북한이 핵무기로 무장한다고 주장한다. 물론 평화주의 견지에서 보면 북한의 핵무기 개발이 옳다고 보기 어렵다. 어쨌든 상대가 있으니까 협상에 달렸다. 세계가 평화를 지향해가고 있는 시대이므로 북·미 평화협정, 북·일 수교를 통한 평화 관계도 마땅히 이룰 수 있다.

광복 72주년에 재현된 건국절 논란을 어떻게 보는가?

광복절이냐 건국절이냐 이런 문제인데, 광복절이란 우리가 일본의 지배에서 벗어난 기념일로서 이것은 민족주의적 견해라 할 수 있다. 이에 비해 건국절 주장은 국가주의적 견해이다. 결국 건국절 논란은 어떤 역사인식을 가질 거냐 하는 문제다. 계속 분단국가주의적 틀 속에서 살 것이냐, 아니면 통일민족주의적인 방향으로 나아갈 것이냐 하는 역사의식의 문제다.

역사적으로 1945년 광복 당시 건국 개념은 무엇이었나?

1919년 상해에서 구성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광복이 가까워질수록 좌우 합작 정부로 변모했다. 독립운동 내부에 좌익도 있고 우익도 있었는데 광복 후 이들이 합쳐야 하니까 임시정부가 사실상 좌우 합작이 된 것이다. 김구 선생이 주석이고 김규식 선생이 부주석인데 거기에는 아나키스트, 유림 등 모든 세력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위원으로 들어갔다. 그들은 광복이 되면 두 개의 국가가 생길 것이라고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다. 백범 김구로 말하자면 우익 중의 우익인데 좌우 합작 정부의 주석이었고 분단 이후에는 평양에 가지 않았나. 그것이 우리의 올바른 역사인식이다. 그걸 갈라놓은 게 이승만 정권이고. 오늘날 건국절 운운하는 것은 이승만의 분단주의 연장이나 다름없다.

노무현 정부 때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위원장을 지냈는데 남은 일제 잔재 청산 과제는?

최근 <친일인명사전>까지 나오긴 했지만 문제는 광복된 지 72년이나 됐는데 친일파 연구가 학문적으로 제대로 된 적이 없다는 점이다. 이승만 정권 이후로 자료가 전혀 모아지지 않다가 노무현 정부 때 비로소 자료를 모았다. 그 자료를 가지고 친일 문제를 학문적으로 접근해 제대로 반성해야 한다. 어떤 조건으로 친일을 했으며 그 결과가 어떠했는지 이를 학문적으로 소화해서 교과서에 정확하게 넣어야 한다.

문재인 정부의 적폐 청산이 화두다. 역사적으로 적폐가 누적된 근본 원인을 뭐라고 보나?

역사적으로 되돌아보면 업적을 세웠다는 걸 내세워 독재 체제를 얼버무리는 경우가 있다. 이것은 잘못된 인식이다. 이승만 정권의 제일 큰 오점이자 문제점은 친일 세력을 청산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또 민족사적으로 박정희 정권의 가장 큰 과오는 1965년 잘못 맺은 한·일 협정이다. 협정 당시 일본이 1910년부터 1945년까지 합법적으로 지배했느냐, 침략적으로 강점했느냐가 중요한 문제였다. 협정 당시 일본의 주장을 따르면 일제 36년이 합법적인 게 된다. 그러면 우리의 독립운동은 합법적인 지배에 저항한 잘못된 행동이 된다. 박정희 정권은 한·일 합방조약을 1910년 8월29일 한·일 합방이 된 그날부터 무효라고 인식하겠다 하고 아무런 대응 없이 넘어갔다. 역사적으로 큰 과오를 남긴 이 문제가 아직까지 제대로 지적되지 않고 있다(한·일 기본조약 제2조 ‘1910년 8월22일 및 그 이전에 대한제국과 대일본제국 간에 체결된 모든 조약 및 협정이 이미 무효(already null and void)임을 확인한다’를 놓고 한국은 ‘처음부터 무효다’라 주장했고, 일본은 ‘1948년 대한민국 성립 때까지는 유효했다’고 해석했다).

제2차 세계대전 전승국들은 한·일 병탄조약을 어떻게 보았나?

2차 대전이 끝났을 때 일본이 청일전쟁 끝에 빼앗은 타이완은 중국에 돌아갔다. 러일전쟁에서 빼앗은 북위 50° 이남의 사할린 땅도 소련에 넘어갔다. 한·일 합방조약이 합법적이라고 연합군이 인정했다면 한반도를 일본의 지배에서 빼낼 이유가 없었다. 일본이 한반도를 지배한 걸 침략 행위라고 규정했기 때문에 일본 영토에서 한반도를 벗어나게 한 것이다. 하지만 1965년 한·일 협정 때는 그게 전혀 반영이 안 됐다.

학계에서 그 문제가 전혀 제기되지 않았나?

한·일 합방 100주년이던 2010년 한·일 양국의 양심세력이 성명서를 냈다. ‘1910년에 체결된 한·일 합방조약은 원천적으로 무효다’라는 공동성명이었다. 하지만 민간에서 해봐야 법적 효력이 있나. 한·일 양국 정부가 하도록 촉구하는 의미였는데 이후 별다른 노력이 없었다. 이제라도 역사학계의 지적을 정부가 귀담아 듣고 일본 정부와 결론을 도출해야 한다.

한·일 협정을 통한 청구권 자금이 우리 경제성장의 종잣돈이 되었다며 박정희 정권의 긍정적 업적으로 내세우는 이들도 많은데?

박정희 정권의 업적으로 경제성장을 자꾸 말하는데, 전쟁이 끝나고 난 다음 복구 과정에서 경제가 발전하기 마련이다. 일본도 그렇고 독일도 그랬다. 심지어 북한도 1970년대까지는 남한보다 경제 사정이 나았지 않나. 경제성장이라는 게 어느 한 정권 때문에 이뤄진 것이 아니라 전후 복구 과정에서 으레 있을 수 있다고 본다. 그것을 독재정권을 미화하는 논거로 삼는 것은 역사적으로 잘못되었다.

▲ 2005년 5월31일 노무현 전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강만길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위원장(앞줄 오른쪽)에게 임명장을 수여한 뒤 접견실로 향하고 있다.


한·일 관계는 앞으로 어떻게 풀어가야 하나?

일본과는 독도 문제, 위안부 문제, 역사교육 문제 등이 있는데 독도 문제는 이미 해결된 거라고 본다. 우리가 우리 영토로 점유하며 증명하고 있다. 위안부 문제는 박근혜 정부가 잘못했다. 그 문제를 해결하려면 당사자들이 뭘 어떻게 원하느냐를 듣고 일본과 교섭해야 하는데, 박근혜 정부가 일방적으로 해치웠다. 그러니까 피해 당사자들이 가만히 있겠는가? 위안부 문제는 일본에 양해를 구해야 한다. 박근혜 정부와 합의할 때 당사자들의 목소리가 없었다. 당사자들이 아직 상당수 살아 있다. 그분들 의견이 들어가야 한다고. 그래야 일본도 이 문제를 해결할 것이다. 역사교육 문제는 일본의 지성들이 해결해야 한다. 아베 정권 이전까지 일본 역사학계의 분위기가 나쁘지 않았다. 내일 더 잘하기 위해 어제를 아는 것이 역사다. 그렇다고 어제를 알고 그냥 끝내서도 안 된다. 잘못된 과오는 반성해야 한다. 일본의 과거 침략주의에 대한 반성이 아직도 부족하다. 한·일 양국 역사학계가 공동으로 교류하면 역사교육 문제는 어느 정도 해결될 것이라 본다.

아베 정권 들어 일본이 우경화하면서 역사 왜곡이 심해지는데?

일본 정부가 교육을 통해 극우 사상을 넣으려 하는데 거기도 발전하는 세상이라 나는 그것이 오래가지 않으리라 본다. 일본 보수 정권이 비교적 오래가는 데는 여러 이유가 있다. 그래도 21세기인데 과거의 제국주의적 또는 냉전주의적 상황은 희석될 것이다.

역사학자가 보기에 현재 한반도 처지가 구한말과 비슷한가?

주변 4대 강국에 둘러싸여 있다는 점은 비슷하다. 4대 강국 시각에서 보면 한반도가 분단 상태에 있는 게 안전하다. 한반도가 중국이나 러시아 등 대륙 세력권에 들어가면 한반도는 해양 세력, 특히 일본을 찌르는 칼이 된다. 반대로 한반도가 일본이나 미국 등 해양 세력권에 포함되면 해양 세력이 대륙을 침략해 들어가는 다리가 된다. 과거 일제강점기가 대표적인 예 아닌가. 광복이 되면서 남북으로 갈렸다. 이 상태가 4대 강국에게는 안전하다. 4대 강국끼리 충돌을 방지하는, 칼도 안 되고 다리도 안 되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한반도 통일은 어렵다는 얘긴가?

우리는 4대 강국에 의해 민족 분단이라는 비극을 겪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나는 4대 강국이 포함된 6자 회담으로 통일 문제나 남북 문제를 해결하자는 주장에 한계가 있다고 본다. 한반도의 지정학적 위치가 그걸 말해준다. 내가 보기엔 남북한이 중심이 되어 해결해야 한다. 2000년 김대중 정부 때 이뤄진 6·15 남북공동선언은 그런 역사인식에서 나온 것이다.

남북한이 어떻게 주도적으로 풀어야 하나?

통일 문제를 어떻게 풀 것인가를 생각하면 분단이 어떻게 고착됐는지 살펴봐야 한다. 1차적으로 1945년 삼팔선이 생기면서 국토가 나뉘었다. 다음으로 1948년 남북한 단독 정권이 생기면서 국가가 분단되었다. 이어서 6·25 전쟁이 일어나면서 민족이 갈린 과정을 거쳤다. 이런 역사적 경험으로 보면 남북한은 베트남처럼 사이공 인민주의도 안 되고 독일처럼 흡수통일도 안 된다. 결국은 평화적인 접근이 필요하다. 그 문을 연 시작을 나는 6·15 남북공동선언이라고 본다. 6·15 남북공동선언으로 민족이 화해하기 시작했다. 금강산 관광과 개성공단도 열렸다. 통일은 하루아침에 되는 게 아니다. 남북한 사이에 연방제냐, 1정부 2체제냐, 2정부 2체제냐 하는 게 다를 뿐 통일국가 체제 논의도 상당 부분 합의가 이뤄졌다. 결국 2정부 2체제로 가는 건 공통분모다.

박근혜 정부 때도 역사학자로서 정부 승인을 받아 방북했는데?

박근혜 정부가 개성공단을 폐쇄하기 일주일 전인 2016년 2월 역사 발굴 때문에 개성에 들어갔다. 고려 왕궁터를 비롯해 여러 고려 문화 유적이 남아 있어서 복원하여 관광자원으로 삼자고 했다. 그런데 개성이 2000년대 초반에 비해 많이 달라졌더라. 5층짜리 아파트가 많이 생기고 남루했던 개성 사람들 옷차림도 달라졌다. 개성공단, 해주공단, 원산공단을 지어나가면 통일이 차츰 되어갈 것이다. 통일이란 게 남북한 사람들 의식이 같아지고 생활이 동화되어가는 데서 출발한다. 차츰 남북이 동화되어가면 통일비용이 그렇게 어마어마하게 들어갈까 의문이다.

1120-8

▲2005년 6월17일 김정일 국방위원장(왼쪽 세 번째)이 방북 중인 김민하 전 민주평통 수석부의장, 박용길 장로, 강만길 교수(왼쪽부터) 등을 접견한 뒤 기념촬영하고 있다. ⓒ통일뉴스 제공

북한 사람들과 북핵 문제도 이야기했을 것 같은데?

내가 북한에 갔을 때 어느 북측 인사가 이런 말을 하더라. 소련과 동유럽이 무너지기 전에 북한은 달러 한 푼 없이도 살 수 있었는데, 무너지고 나니 달러 없이는 하루도 살 수 없더라, 결국 상황이 그렇게 만든 거라고. 북핵을 대미 관계를 풀기 위한 마지막 카드라고 하더라. “우리를 승인하라는 것이고 인정하라”는 주장이었다.

역사란 지그재그로 발전한다고 강조했는데?

역사는 정치적으로 인간의 자유를 확대시키는 방향으로, 경제적으로는 인간 생활을 균등하게, 사회적으로는 인간을 평등하게, 그리고 사상적으로는 자유롭게 하는 방향으로 발전해왔다. 그런데 이게 직선으로만 가지 않는다. 그랬다면 인류의 역사가 여기 머물러 있겠나? 훨씬 더 많이 앞으로 갔을 것이다. 역사는 중간에 가다가 반작용을 만날 수 있다. 그렇지만 역사가 반복되는 게 아니고 나선형으로 올라간다. 우리 역사도 마찬가지다. 침략과 분단 등을 겪었지만 우리는 왕조시대를 극복하고 넘어섰다. 일본의 메이지유신이나 중국의 신해혁명 같은 것은 없었지만 독립운동을 통해 민족의식을 고취해갔다. 그래서 우리 힘으로 분단도 극복하고 통일도 되어야 한다는 인식과 자신감을 갖는 게 필요하고 또 중요하다.

취임 100일을 맞은 문재인 정부에 할 말이 있다면?

내치야 우여곡절을 겪더라도 궁극적으로 민주주의 발전 방향으로 나아갈 것이다. 대북 문제가 걱정이다. 미국 트럼프 정권도 대북 강경책을 쓸 가능성이 높아서 지난 10년간 닫힌 남북 관계를 푸는 게 쉽지 않다. 북·미 관계가 나빠지면서 야당과 수구 보수 세력이 정부를 비판한다. 아무리 어렵더라도 남북 관계의 문을 열어야 한다. 정부 내 대북 정책을 맡은 사람들의 의식이 중요하다. 얼마나 빨리 북한 문제를 해결해 나가느냐보다는 방향이 맞느냐가 중요하다. 그런 의식만 있다면 인내심을 갖고 북한을 설득하면서 해결할 수 있다고 본다. 또 민간단체가 남북 간 교류를 더 넓혀 나가야 한다.

정희상 기자 [email protected]

<2017-9-1> 시사in

☞기사원문: 강만길, “건국절 운운은 이승만 분단주의의 연장”

시민들의 의견

댓글 달기

Plain text

  • 웹 페이지 주소 및 이메일 주소는 자동으로 링크로 전환됩니다.
  • 줄과 단락은 자동으로 분리됩니다.
  • 사용할 수 있는 HTML 태그: <a href hreflang> <em> <strong> <cite> <blockquote cite> <code> <ul type> <ol start type> <li> <dl> <dt> <dd>
이미지
무제한 수의 파일을 이 필드에 업로드할 수 있습니다.
50 MB 한계입니다.
허용된 유형: png gif jpg jpeg.
Enter the YouTube URL. Valid URL formats include: http://www.youtube.com/watch?v=1SqBdS0XkV4 and http://youtu.be/1SqBdS0XkV4.
CAPTCHA
스펨 사용자 차단 질문

친일반민족행위자 유진오의 생가터와 추모비가 하남시 향토유적 제10호입니다.
이를 철회하려고 하남시청에 민원을 제기했으나 거절을 당했습니다.
친일부역자의 생가터와 추모비를 철회시키려고 하는데 힘이 되어주실 수 있는
분들은 힘이 되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010-6201-8234 심윤석

 

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539667&cid=46625&categoryId=46625

 

월, 2019/04/01- 09:10
8
0

출처: 김정육 구술/서혜원 기록, 「한국예술종합학교신문」 제308호, 2019.3.25

[헌법 13조 3항] 모든 국민은 자기의 행위가 아닌 친족의 행위로 인하여 불이익한 처우를 받지 아니한다.

0401-4

▲ 김상덕 반민특위 위원장의 자제인 김정육 선생

연좌제는 1981년 3월 25일 공식적으로 폐지되었다. 연좌제는 개인의 범죄를 가족·친지에게까지 책임을 묻는 형벌이다. 조선시대 삼족을 멸하던 악독한 형벌은 한차례 폐지된 적 있으나 그것이 가진 성격만치 끈질겼던 터라 사라지지 않고 생명을 연장해나갔다. 그리고 1950년대 무렵, 처음으로 내가 연좌제에 걸려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고등고시를 치기 위해 고향에 내려가 신원증명서를 발급받을 때였다. 담당자는 한참이 지나도 발급을 못하고 갸웃거렸다. ‘신원조회 불가능.’ 고시를 치기도 전에 자격을 박탈당했다.

왜 시험을 치지 않느냐는 친구들에게 속사정을 말하지 못했다. 연좌제에 걸려 아무것도 못하는 줄 알면 혹여 다 떠나버리지 않을까 하는 우려에서였다. 연좌제에 걸린 이는 호적부에 빨간 줄이 그어졌다. 빨간 줄을 가진 채로는 여행은커녕 취직도 할 수 없었다. 국내를 돌아다닐 때는 승인을 받아야 했다. 친일 경찰들이 빨갱이를 소탕하러 활개치던 시대였다. 그들은 마음대로 남의 가정집을 들쑤시며 시찰을 돌았다. 나라 팔아먹은 자들이 나라 지키던 분의 후손을 검문했다. 수상한 시절이었다.

아, 되짚을 말이 생겼다. 내게도 꼬리표가 있었구나. 시찰 대상이라는 꼬리표. 아버지에게도 비슷한 게 달려있었는데 좀 더 무시무시한 이름이었다. 살생 대상이라는 꼬리표. 남한 정부가 수립된 뒤 아버지는 친일 척결을 위한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위원장을 지냈다. 그러던 어느 날 이승만 대통령이 갑작스레 집에 방문했다. “친일 군경들을 건들지 말아라.” “장관 자리를 줄 테니 하지 말아라.” “왜 이러십니까?” 아버지는 이 대통령의 말을 끝내 듣지 않았다. 이후 일주일도 지나지 않아 반민특위 사무실이 습격당했다. 수많은 부상자가 생겼고 전국에서 온 친일행위 고발문은 불태워졌다. 아버지는 테러리스트의 살생부에 올랐다. 아버지는 결국 위원장 자리에 사표를 냈다. 아버지의 살생 딱지는 그 자취를 감추기에는 억울해 나에게까지도 미약하게 이어졌나 보다.

한때 대학에 입학한 적이 있다. 어릴 적 나는 김구, 신익희 등 알만한 독립운동가들 사이에서 자랐다. 한문이든 법이든 정치든 대단한 분들을 보고 터득했다. 그분들의 가르침을 물려받아 법학도를 꿈꿨다. 대학에 합격했지만 대학 등록금은 만만한 것이 아니었다. 언제나 밥걱정에 시달려온 내가 등록금을 마련한다는 게 가당한 일인가. 다섯 살 때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막내가 영양실조로 굶어죽은 뒤 근사한 밥을 먹었던 기억은 한 번뿐이다. 아버지가 중국에서 우리 남매를 고아원에 위탁하기 전, 누나와 나는 생전 처음 보는 음식을 맛있게도 먹었던 기억이 난다. 독립운동가가 자식을 삼시세끼 먹일 수 있는 선택은 그뿐이었다. 따뜻한 밥이라니 얼마나 생소한 말인지. 결국 대학을 관둬야 했다. 밥벌이가 시급했다. 나를 받아주는 곳은 공사판이었다. 신원증명서 없이 일을 하고 돈을 받을 수 있는 곳이었다. 고마운 직장이었다.

“중동에 가면 떼부자로 돌아온다.” 말단으로 들어가 현장소장으로 오른 내게 중동 공사 참가 제의가 들어왔다. “글쎄요. 저는 가지 않겠습니다. 딴 사람을 보내시죠.” 여권이 발급되지 않는다는 말은 굳이 할 필요 없는 것이었다. 욕심이 없는 척 묵묵히 일했다. 겉으론 태연했지만 어떻게 속상하지 않았을까. 결혼했고 안정된 가정을 원하던 처지였다. 하지만 중동에 갈 방법이 없었다. 그래도 다행인 일은 조금 지나 건설현장의 예산제도가 바뀌면서 일한 만큼 돈을 받게 되었던 것이다. 그것으로 나는 돈을 모을 수 있었고 성내동에 13평 아파트를 분양받았다. 약 40년 동안 꿈에만 그리던 내 집이었다. 뒤늦게 자식도 보았다.

88올림픽이 열리던 해는 아직도 기억이 생생하다. 아내가 쓰러졌다. 급성 신부전증이었다. 아내를 간호하기 위해서는 계속 공사판 일을 할 수 없었다. 멀리 떠나지 않고 오후에 아내 곁에 머물 수 있어야 했다. 그래서 신문지 돌리는 일을 했다. 그러다 돈을 더 벌고 싶어 신문 속지를 끼우는 작업을 추가로 맡았다. 이 작업을 하면 70만 원 정도가 들어왔다. 대신 속지작업이 끝나는 대로 새벽 배달을 나가야 하니 쉬는 시간이 없었다. 그래도 힘든 티를 낼 수 없었다. 어느 날은 아들이 새벽에 내 뒤를 몰래 따라와 일을 훔쳐보고 있었다. 결국에는 아버지를 돕는다고 시간이 날 때마다 속지작업을 도왔다. 돈을 그렇게 어찌어찌 벌었다. 아내에게 신장을 이식해 줄 은인도 나타났다. 무명의 천사는 나중에 알고 보니 민주당 총재의 부인이었다. “독립운동가의 후손이 어려움에 처했으니 구제하라.” 처음으로 그런 말을 들었다. 아내의 신장 이식 수술은 성공적이었다. 하지만 행복은 역시 길지 않았다. 아내는 2005년 10월 18일 13시 32분 세상을 떠났다. 이따금 아내가 눈을 감은 날짜를 소리내서 읊어본다. “이천오년 시월 십팔일 십삼시 삼십이분.”

그전에 아버지 얘기를 빠뜨렸다. 아버지는 1990년 국가로부터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아 훈장을 받았다. ‘받았다’는 말은 어쩐지 순순하게 들리니 ‘받아냈다’고 쓰겠다. 아버지가 임시정부에 있던 자료를 전부 보훈처로 보냈다. 얼마 기다리자 보훈처에서 심의중이라는 우편이 날라왔다. 그리고 그해 4월, 드디어 아버지의 국민장 서훈이 결정 났다. 국민장은 3급짜리 훈장이다. 뭐 이런 급수에 연연하고 싶지는 않지만 최근 별세한 5·16 쿠데타의 중심인물인 김종필 국무총리는 최고 등급인 무궁화장을 받았다. 김 총리가 가담한 일과 아버지가 해온 일 사이에는 무슨 차이가 있는가.

여하튼 나는 살아왔다. 올해 85세가 되었다. 사실 내 호적은 몇 번이나 장난질 쳐져 실제와는 다르지만 호적상 여든 다섯이다. 이 나이를 먹어서야 몇몇 사람들이 찾아온다. 내가 살아온 시절을 듣고 싶다고 한다. 구전동화 읊듯이 이야기를 한다. 으레 사람들은 마지막 질문으로 이런 말을 한다. “정부에게 원하는 것은 없습니까.” “아버지가 납북되시고 연좌제에 묶여 산 세월을 보상받으셔야죠.” “명예회복이 필요하지 않나요.” 고래를 가로젓는다. “내 평생 요즘처럼 정부에서 오는 공문이 친절한 적이 없어요.” 이전 세월 내가 정부에 탄원을 낼 때마다 답변을 받고는 화가 치밀지 않은 적이 없다. 아버지와 나를 짐짝처럼 처리하던 이들이 그래도 요즘은 같은 말일지언정 돌려가며 이야기한다. 더 바랄 것도 없다. 나이 여든을 넘겼다. 그저 고민은 내년 만기되는 아내의 무료 묘자리를 어떻게 처리할지에 관한 것이다. 한 푼 두 푼 모으면 아내를 편안한 안식처로 모실 수 있을까. 그러다 문득 나를 남겨두고 먼저 떠난 아들을 떠올린다. 배급소에서 아비를 돕던 착한 아들. 그가 남긴 어여쁜 손녀 손자. 김예일리와 김선리. 녀석들에게 할아버지와 증조부의 이야기를 전할 수 있을까. 아직 어린아이들이다. 아이들이 모를 이야기를 내 손으로 모두 적고 싶다는 바람을 가지고 나는 지금을 살아내고 있다.

0401-6

▲ 김상덕 반민특위 위원장

김정육 선생의 아버지는 김상덕 지사(1891~1956. 경북 고령 출신)이다. 김 지사는 1919년 도쿄 ‘2·8독립선언’을 주도한 유학생 대표 11인 중 한 명이었다. 2·8독립선언으로 1년 동안 옥고를 치른 뒤에는 만주로 건너가 독립운동단체 ‘정의부’의 최고집행위원으로 활동했다. 윤봉길 의사의 폭파 의거 후 한중 연합군을 창설하는 임무를 맡기도 했다. 또한 상해 임시의정원 의원, 대한민국임시정부 문화부장을 지냈다. 해방 후 고향에서 제헌국회 의원으로 활동했고, 친일 척결을 위한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위원장에 당선됐다. 그러다 6·25 한국전쟁 때 납북되었다. 평양 교외 재북인사묘역에 안장되어 있고, 1990년 건국훈장 독립장에 추서되었다.(<한국예술종합학교신문> 제308호, 2019.3.25.)

월, 2019/04/01- 14:26
22
0

寄友人(기우인)

 

草屋梅花發(초옥매화발)

南窓寄友人(남창기우인)

君吾爲李杜(군오위이두)

共醉詠芳春(공취영방춘)

 

벗님에게 띄우는 글

 

草屋에도 고운 매화 활짝 피니

남쪽 窓에서 벗님께 글 띄우네

그대와 나 李白과 杜甫가 되어

함께 취해 아름다운 봄을 읊세.

 

<時調로 改譯>

 

草屋에도 매화 피니 南窓에서 글 띄우네

그대는 李白이 되고 나는야 杜甫가 되어

둘이서 함께 취하여 아름다운 봄을 읊세.

 

*友人: 벗 *南窓: 남쪽으로 난 窓 *李杜: 李白과 杜甫 *芳春: 꽃 피는 아름다운 봄.

 

<2019.4.1, 이우식 지음>

월, 2019/04/01- 11:56
6
0
0206-4

)

홍용덕
전국2팀 선임기자

인천공항에서 중국으로 비행기를 타고 1시간이면 산둥반도의 웨이하이에 닿을 수 있다. 125년 전 한반도에 큰 영향을 끼친 청일전쟁(1894~1895·중국은 갑오전쟁, 일본은 일청전쟁으로 부름)의 승패가 결정된 곳이다. 일본군이 랴오둥반도에 이어 청나라 해군의 주력기지인 이곳 웨이하이의 류궁다오(유공도)를 점령하자, 청은 실권자인 리훙장(이홍장)을 일본에 보내 강화에 나선다.

류궁다오는 웨이하이에서 배로 15분 거리다. 중국은 1985년 이 섬에 청일전쟁을 기억하는 ‘중국갑오전쟁박물관’을 지었다. 서울 용산 전쟁기념관 크기로 청일전쟁 관련 유물 1천여점을 전시하는데, 패전기념관치고는 규모가 상당하다.

박물관에 들어서면 “잠자는 중국의 천년 꿈을 깨운 것은 갑오전쟁”이라는 문구가 들어온다. 청의 사상가 량치차오(양계초)의 글이다. 병자호란 때 조선을 침입해 인조를 무릎 꿇게 한 청의 기세등등함이 이 박물관에는 없다. 일본의 선제공격으로 시작돼 평양과 황해에서의 패전, 뤼순(여순)대학살, 청일전쟁 패배 이후 열강의 반식민지가 된 늙은 제국의 고통만이 손에 닿을 듯 펼쳐진다.

21세기 미-중 패권경쟁에 나선 중국이 왜 부끄러운 과거 역사를 드러내는 데 주저함이 없을까. 궁금함이 풀린 것은 기념관 출구에 적힌 ‘물망국치 원몽중화’란 글을 보면서다. ‘국가의 치욕을 기억해 중국의 꿈을 이루자’는 그 말은 애국주의를 선동하는 이른바 ‘국뽕’ 냄새가 다분하지만, 국가의 수치를 미래의 동력으로 삼겠다는 간절함만은 전해진다.

일본으로 건너간 리훙장이 도착한 곳은 부산 맞은쪽의 시모노세키다. 이곳에서 육순의 노인은 랴오둥반도와 대만을 일본에 내주는 시모노세키조약을 맺었고, 일본은 당시 협상장이던 산기슭에 ‘일청강화기념관’을 세웠다.

0401-11

▲ 중국갑오전쟁박물관.

무심코 지나쳤다 찾은 단층 건물의 전시실에는 1895년 조약 협상이 이뤄진 협상장이 복원돼 있다. 패자의 웅대한 박물관에 견줘, 승자의 기념관은 내용이나 규모에서 초라하다. 일본이 시모노세키조약을 맺고 15년 뒤 한반도를 강제병합하며 군국주의 국가로 나아가 아시아를 피로 물들인 출발점이 청일전쟁이었음을 감추고 싶은 속내가 보이는 듯도 하다.

부끄러운 역사를 치열하게 되새김하는 중국, 이를 축소하고 숨기는 일본 사이에 낀 우리는 어떤가. 서울 청파동 숙명여대 앞 골목에는 ‘식민지역사박물관’이 있다. 지난해 8월 문을 연 국내 유일의 일제 침략과 독립운동사를 보여주는 전문 박물관이다. 5층 건물 중 2층 상설전시장에는 400여점의 자료가 전시 중인데 ‘친일과 항일’의 흔적을 담기에는 그 공간(240㎡)이 비좁아 보인다. 수장고에는 10만여점의 자료가 묻혀 있다.

0401-11

▲ 친일인명사전. 한겨레

이 작은 공간 하나를 여는 데도 긴 시간과 노력이 들었다. 민족문제연구소가 2011년 시민 모금에 나섰고 박물관 건립에 7년이 걸렸다. 시민의 힘으로 세운 이 박물관은 방문객을 위한 주차 공간은 고사하고 건물을 사느라 빌린 20억여원의 이자를 다달이 내는 일도 버겁다. 부끄러운 역사를 청산하려는 시민들만의 노력은 여전히 힘겹다. 국가의 친일청산 노력은 또 어떤가.

노무현 정부 때 대통령 직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꾸려졌지만, 이명박·박근혜 보수정권이 출범하며 사라졌다. 정부가 처음으로 반민족행위자 1007명을 선정했으나, 추가조사는 물론 당시 확인된 반민족행위조차 국민에게 교육하고 알리는 일도 흐지부지됐다. 반민족적 행위로 얻은 재산을 조사할 친일재산조사위원회도 사라졌다. 국가의 친일청산 시계는 10년 전에 멈춰 서 있다.

오는 11일이면 상하이(상해) 임시정부 수립 100돌이다. 중국 대륙 수만리 피난길에서도 독립된 나라, 정의로운 나라를 꿈꾼 선열들의 바람과 달리, 우리는 지금도 제1야당 원내대표가 “(친일청산을 위한) 반민특위로 국론이 분열됐다”고 버젓이 말하는 ‘망언의 시대’를 살고 있다. 멈춰 선 시계를 다시 돌려야 할 때다. [email protected]

<2019-03-31> 한겨레 

☞기사원문: [한겨레 프리즘] 멈춰선 시계를 돌리자 / 홍용덕

월, 2019/04/01- 20:52
21
0

懇請北韓諸人民軍隊總蹶起

 

正恩家運盡(정은가운진)

不可逆天心(불가역천심)

極限人民苦(극한인민고)

哀哉淚滿襟(애재루만금)

 

북한의 모든 인민 군대에게 총궐기할 것을 간청함

 

김정은의 집안 運 이제 다했으니

하늘의 마음은 거스를 수 없다네

인민의 괴롬 궁극 한계에 이르러

슬프다! 눈물이 옷깃에 가득하네.

 

<時調로 改譯>

 

김정은 運 다했으니 저 하늘 뜻이라네

인민들의 그 괴롬 궁극 한계에 이르러

슬프다! 눈물이 흘러 옷깃에 가득하네.

 

*懇請: 간절히  청함. 또는  그런 청(請) *總蹶起: 모두 참여해 힘차게 일어남. 또는

그런  행위  *家運: 집안  운수  *不可逆: 변화를  일으킨 물질이 본디 상태로 돌아

수 없는  일.  비가역(非可逆)  *天心: 하늘의  뜻.  천의(天意). 눈에 뵈는 하늘 한가운

  *極限: 궁극의 한계. 사물이 진행해 도달할 수 있는 최후의 단계나 지점을 이름.

 

<2019.4.1, 이우식 지음>

월, 2019/04/01- 20:11
17
0

告朝家(고조가)

 

自派無高傑(자파무고걸)

非人作長官(비인작장관)

民心離叛甚(민심이반심)

未久味辛酸(미구미신산)

 

朝廷에 告함

 

자기 쪽의 系派에는 인물 없으니

사람답지 못한 者도 長官이 되네

백성들 마음 떠나 배반함 심하니

未久에 괴로움, 쓰라림 맛보리라.

 

<時調로 改譯>

 

自派엔 無高傑이니 폐인도 長官 되네

백성들의 마음 떠나 배반함이 심하니

未久에 괴롬과 쓰림 맛보게끔 되리라.

 

*朝家: 조정(朝廷). 조당(朝堂). 임금이 나라의 정치를 신하들과 의논하거나 집행하

곳.  또는  그런  기구 *自派:  자기  쪽의 계파(系派)나  유파(流派)  *高傑: 고상하고

걸출 인물 *非人: 사람답지 못한 사람. 폐인(廢人) *民心: 백성의 마음. 민정(民情)

*離叛:  人心  떠나서  배반함  *辛酸: 맵고  심.  괴로움과  쓰라림.  고생. 고초(苦楚).

 

<2019.4.2, 이우식 지음>

화, 2019/04/02- 10:21
12
0

화, 2019/04/02- 17:39
8
0

친일반민족행위자 유진오의 생가터와 추모비가 하남시 향토유적 제10호입니다. 이를 철회하려고 하남시청에 민원을 제기했으나 거절을 당했습니다. 친일부역자의 생가터와 추모비를 철회시키려고 하는데 힘이 되어주실 수 있는 분들은 힘이 되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화, 2019/04/02- 15:39
5
0

회원의 한사람으로 궁금해서 인터넷 검색을 해보았습니다

촉망받을 만한 인물이던데

왜 여기에서 미꾸라지 행태를 하는데 시간을 허비하는지요

시민운동에 한계를 느끼고 정치에 입문

잘 안되니 다시 시민운동가로 변신

이제 촛불시민의 대표자로 둔갑하여 새로운 정치를 모색하고 있더군요

촛불혁명 때 무엇을 했는지요 ㅎㅎ

정치나 하시고 이제  회원직도 내려 놓으심이 좋을 듯 합니다

여인철씨

 

화, 2019/04/02- 23:07
20
0

경기도 하남시 향토유적 제10호가
친일반민족행위자 유진오의 생가터와 추모비입니다.
이를 철회하기 위해서 도와달라도 민족문제 연구서
자유게시판에 올렸더니 연락이 오셔서
근시일내에 만나뵙고 조언을 듣고 도움도 받기로 했습니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하남시SNS시민기자단장  심윤석

수, 2019/04/03- 10:53
14
0

答問(답문)

 

問難吾豈答(문난오기답)

未免白頭童(미면백두동)

半識無爲道(반식무위도)

時時或可通(시시혹가통)

 

물음에 답하다

 

어려운 걸 물으니 내 어찌 답하랴

머리 허연 어린애 아직 못 면했소

저 無爲의 道에 대해 반쯤 아는데

때때로 혹 가히 통할 수도 있다오.

 

<時調로 改譯>

 

難問題 어찌 답하랴 白頭童 못 면했소

無爲의 道에 대하여 내 반쯤은 아는데

때때로 어쩌면 가히 통할 수도 있다오.

 

*答問: 물음에 대답함 *問難: 어려운 것을 물음 *白頭: 백수(白首). 허옇게 센 머리.

 

<2019.4.3, 이우식 지음>

수, 2019/04/03- 07:26
6
0

贈大富牧師

 

惡者蒙仁化(악자몽인화)

焉無欲報恩(언무욕보은)

餘錢方喜捨(여전방희사)

亦救我靈魂(역구아영혼)

 

큰 富者 목사에게 지어 주다

 

악인이 어진 德의 감화를 입었는데

어찌 은혜 갚고자 함이 없겠습니까

남은 돈 바야흐로 기꺼이 내놓으

또한 저의 영혼도 구하여 주옵소서.

 

<時調로 改譯>

 

仁化를 입었는데 왜 報恩 없겠습니까

남은 돈 바야흐로 기꺼이 내놓사오니

원컨대 저의 영혼도 구하여 주옵소서.

 

*大富: 큰 富者 *惡者: 악한 사람 *仁化: 인덕(仁德)의 감화 *報恩: 은혜를 갚음. 수은

(酬恩) *餘錢: 쓰고 남은 *喜捨: 어떤 목적을 위하여 기꺼이 돈이나 물건을 내놓음.

 

<2019.4.3, 이우식 지음>

수, 2019/04/03- 21:04
12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