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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베의 평화헌법 개정, 세계평화포럼으로 막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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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베의 평화헌법 개정, 세계평화포럼으로 막자

익명 (미확인) | 목, 2017/11/16- 16:43

일본 헌법 공포 기념일(문화의 날)인 지난 11월 3일, 약 5만의 일본 시민이 의회를 포위하고 평화헌법 수호를 다짐하는 평화적 시위를 벌였다.

‘아베 9조 개헌 NO! 전국 시민 액션’이 주최한 이날 ‘11.3 국회 포위 대행동’ 모임에는 한국의 김영호 교수(전 유한대 총장, 산업자원부 장관)가 초청을 받아 강연을 했다.

동북아평화센터 이사장이자 주권자전국회의 고문이기도 한 김영호 교수는 ” 한국 촛불혁명의 한 작은 참여자로서 이번  일본 방문이 마지막이 될지 모른다는 비장한 마음으로 이 자리에 섰다”면서 “평화헌법 폐기는 동북아의 긴장을 크게 끌어 올리고 동아시아는 3차 대전의 발발 가능성이 가장 높은 지역으로 변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는 “소극적으로  평화헌법을 지키기만 할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세계에 확산시켜야 한다”면서 그 방법의 하나로 다보스 세계경제포럼(WEF)이나 브라질 세계사회포럼(WSF)을 능가하는 시민판 세계평화포럼(WPF)을 구성할 것을 제창했다.

일본 아사히신문에도 전문이 보도된 그의 강연은 일본의 지식인들과 사회운동계에도 큰 반향을 불러일으켜 이를 구체화하려는 움직임도 일고 있다.

김 교수의 승낙을 얻어 강연 전문을 소개한다(다른백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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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헌법 9조 개정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이는 일본 시민들.

 

(1) 세계문제로서의 일본 평화헌법 문제

한국에서 온 김영호입니다. “왜 외국인이?” 하고 생각하는 분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일본의 평화헌법은 안으로 국내용으로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밖으로 국제용으로 만들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2차 대전 이전 일본 역사의 침략주의 내지 군국주의의 역사를 반성하고 청산하는 차원에서 그리고 전후 국제적으로 평화적 교류관계를 구축하기 위한 전제 혹은 약속으로 평화헌법이 제정된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일본 평화헌법은 동아시아 평화의 귀한 보배이며 전후 세계평화체제를 지탱해온 기둥의 하나입니다 여기에서 일본 평화헌법 문제는 세계 문제이기도 하다는 점을 확인하고자 합니다. 따라서 평화를 사랑하는 외국인이 이 문제에 관한 논의에 참여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다만 상황이 간단치 않습니다. 나는 한국 촛불혁명의 한 작은 참여자로서 이번 일본 방문이 마지막이 될지 모른다는 비장한 마음으로 이 자리에 섰습니다.

 

(2) 평화헌법 개정의 프로세스

일본 평화헌법의 핵심은 주지하는 바와 같이 비무장, 부전(不戰)을 규정한 제 9조입니다. 이 9조를 개정하려는 개헌은 우선 개헌 과정 자체가 무섭습니다.

먼저 일본은 과거 침략과 식민 지배에 대한 반성과 사죄를 제대로 한 적이 없습니다. 반성과 사죄는 국회에서 만장일치로 하는 것이 원칙인데 일본은 국회에서 과거에 대한 반성과 사죄를 의결한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마루야마 마사오(丸山眞男) 선생은 일본이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 등을 일으켜 수천만 명의 목숨을 잃게 했으니 내셔널리즘의 처녀성을 잃었다고 지적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인공처녀성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을 간과했습니다. 역사수정주의사관이 바로 그것입니다. 역사수정주의는 반성과 사죄를 자학사관으로 배격합니다. 오히려 과거를 미화합니다. ‘아름다운 일본’은 전전의 일본입니다. ‘침략의 정의는 학자에 따라 다르다’는 식으로 침략 자체를 부정하려 합니다.

이러한 역사전쟁으로 아시아 여러 나라와 역사불화를 유발합니다. 이것은 ‘적 만들기’의 일환에 불과합니다. 이웃나라와 분쟁섬 만들기로 영토내셔널리즘을 조장합니다. 영토내셔널리즘은 안보내셔널리즘으로 발전시켜 나갑니다.

 

‘內는 善, 外는 惡’이라는 전통적 사고방식이 현대적으로 재생됩니다. 온갖 정보조작, 거리에는 헤이트 스피치(혐오 발언)로 요란합니다. 서점에는 헤이트 서적이 넘칩니다. 안보냐 개헌이냐, 악에의 굴종이냐 선의의 개헌이냐, 하는 식의 양자택일이 강요됩니다.

그래서 일본 시민은 1930년대 후반기처럼 파시즘 광기에 휩쓸리게 됩니다. 지금이 그때와 너무나 비슷합니다.

개헌이 이루어지면 그 결과는 어떻게 될까요? “보통국가”가 됩니까? 아닙니다. “파시즘국가의 재등장“입니다 “전후 레짐으로부터의 탈각”입니까? 아닙니다. “전전 레짐으로의 복귀”입니다.

일본의 국가이미지는 청일전쟁, 러일전쟁, 중일전쟁, 태평양전쟁 등의 전쟁국가의 연속선상에 설 가능성이 커지고 “청산되지 않은 과거의 악취”(귄터 그라스)가 넘칠 것입니다.

 

독일의 메르켈 총리는 나치즘은 히틀러 일파만의 범죄가 아니라 독일 시민과 지식인의 책임이라 했습니다. 3차 대전 전야인 지금, 일본 시민이 2차 대전 전야의 일본 시민처럼 평화헌법의 개정을 허용한다면 그것은 일본 시민의 책임입니다. 이것은 일본 시민사회의 사활이 걸린 문제입니다.

지금 일본의 시민사회는 평화헌법수호운동을 통하여 더욱 성숙할 것인가, 실패하여 국가주의 팽배 속에 퇴화할 것인가의 갈림길에 서 있습니다. 네루다의 “날지 않으면 길을 잃는다”는 시가 절실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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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평화헌법 개정 반대 집회. (사진 출처:연합뉴스)

(3) 동아시아의 두 개의 길

평화헌법 폐기의 결과는 무서울 것입니다. 평화헌법을 폐기한 군사대국 일본의 등장은 동북아의 긴장을 크게 끌어 올릴 것입니다. 이웃 국가들도 국가주의가 팽배하게 되고 군비를 더욱 확장하게 될 것입니다. 결국 국가간 적대적 상호의존의 고도화와 군비경쟁의 악순환이 심화되고, 핵도미노 현상에 빠져 동아시아는 3차 대전의 발발 가능성이 가장 높은 지역으로 변할 것입니다.

트럼프-아베 헌법 개정의 전쟁노선은 3차 대전으로 가는 첩경입니다. 핵전쟁은 모두가 패자가 되는 길입니다. 아직 태어나지 않은 세대들도 방사능 지옥에 살게 하는 길입니다. 일본은 평화헌법의 세계적 전개의 일환으로 평화적 해결의 길을 찾아야 합니다.

 

동아시아는 시장경제와 산업화의 결과로 약 14억의 중산층과 16억의 네티즌을 형성한 지역입니다. 이러한 중산층과 네티즌이 동아시아의 시민사회, ‘시빌 아시아(Civil Asia)’로 이어질 것인가? 즉 국가주의가 완화되고 시민주의가 강화되어 국가주의와 시민주의의 투 트랙으로 가게 되면 동아시아는 크게 안정적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군비 축소의 선순환이 기대되고 동아시아 비핵지대화가 가능할 것입니다 그만큼 복지의 아시아, 문명의 아시아로 갈 수 있을 것입니다.

일본의 시민사회가 평화헌법을 수호하여 ‘시빌 아시아’로, 비핵지대화로 갈 것인가. 아니면 평화헌법 개정으로 국가주의의 아시아. 군비경쟁의 아시아, 핵확산의 아시아로 갈 것인가. 지금 동아시아는 두 갈래의 갈림길에 서 있습니다.

 

북핵에 대해서도 평화헌법 개정으로 3차 대전에 의한 공멸의 길이 아닌, 평화헌법의 세계적 전개에 따른 평화적 공생이라는 훨씬 현명한 길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여기에서 일본의 시민사회와 동아시아의 시민 혹은 인민이 상호 연대하여야 할 충분조건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이 연대가 ‘평화헌법 지키기’로 더욱 확대 강화하게 되면 그 연장선상에서 ‘시빌 아시아’가 가능하게 되겠지요.

나는 평화헌법 9조 앞에서 동아시아 시민, 아니 세계의 시민들은 단결하자고 말하고 싶습니다.

 

(4) 일본 평화헌법의 세계적 확대

나는 일본에서 평화헌법 수호에 나선 시민들의 양심과 용기에 경의를 표하면서 한 가지 제의를 하고자 합니다.

지금까지는 주로 소극적으로 9조를 지키는 차원에 서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적극적으로 공세적 차원에 서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적극적으로 평화헌법의 세계적 전개를 추진해 달라는 것입니다.

일본 국내에서 헌법개정세력의 개헌선 확보라는 비상사태에 직면하여 일본의 시민사회와 동아시아 시민사회는 연대를 강화하여 함께 이 싸움에 세계 시민사회를 적극 끌어들이자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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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회포럼(World Social Forum)이 있습니다. 김영호 교수가 제창한 세계평화포럼(WPF)은 시민들의 평화잔치로 위기에 빠진 평화헌법을 세계적으로 전개해 보자는 것이다. 사진은 세계사회포럼(World Social Forum).

하나의 방법으로 세계 평화시민의 역량을 끌어들여 시민판 세계평화포럼(World Peace Forum)을 만들자는 것입니다. 지금 세계에는 다보스에서 열리는 세계경제포럼(World Economic Forum)이 있고, 경제보다는 사회를 우선하자는 세계사회포럼(World Social Forum)이 있습니다.

여기에 세계평화포럼(WPF)을 만들자는 것입니다. 세계경제포럼은 부자들의 잔치 같습니다만, WPF는 시민들의 평화잔치로 위기에 빠진 평화헌법의 세계적 전개의 한 형태로 WEF보다 더욱 영향력 있게 만들어 보자는 것입니다.

 

경비는 시민들의 크라우드 펀딩 형태로 충분히 가능합니다. 한국의 촛불혁명 때 필요한 경비를 크라우드 펀딩으로 조달했는데 목표치를 훨씬 초과하여 감격했습니다. 어떤 분은 돈을 내면서 “시민권력 취득료”라 했다더군요. 동서독 통합 때, 동독 시민들이 외친 “우리가 바로 주권자인 그 국민이다(Wir sind das Volk)”라는 구호가 생각났습니다.

이 WPF에 노벨평화상 수상자를 비롯한 세계 평화운동 지도자들을 모두 모읍시다. 모두 촛불을 들게 해도 좋습니다 세계의 가수들께 “We are the World”가 아닌 “We are the Peace” 합창을 요청해 볼 수도 있습니다. 필요하면 장소를 옮겨 서울에서 북핵 철폐에 초점을 모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할 일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평화는 위기 속에서 감동으로 재생합니다.세계 시민이 세계평화체제의 큰 기둥의 하나인 위기의 9조 앞에 모이는 그런 감동의 계기를 도쿄 시민이 만들어 주십사 하는 것이 한국의 촛불시민혁명이 전하는 간절한 메시지입니다. 감사합니다.

 

시민들의 의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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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2016/01/06- 1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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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하성 고려대 경영학과 교수가 ‘안철수의 멘토’에서 ‘문재인의 사람’으로 변신했다. 문재인 정부 초대 대통령비서실 정책실장이라는 요직을 맡았다. 외교ㆍ안보를 제외한 새 정부의 정책 전반을 관장하는 ‘컨트롤 타워’ 자리다.

1990년대 소액주주운동을 시작으로 개혁적 학자로서 대중적 명성과 지지를 쌓아온 그가 공직을 맡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¼¼­¿ï=´º½Ã½º¡½Àü½Å ±âÀÚ = ¹®ÀçÀÎ ´ëÅë·ÉÀÌ 21ÀÏ Ã»¿Í´ë ÃáÃß°ü ´ëºê¸®Çνǿ¡¼­ Ãß°¡ ÀÎ»ç ¸í´ÜÀ» ¹ßÇ¥ÇÑ ÈÄ Á¤ÀÇ¿ë(¿À¸¥ÂÊ) ±¹°¡¾Èº¸½ÇÀå, ÀåÇϼº Á¤Ã¥½ÇÀå°ú ¾Ç¼öÇϰí ÀÖ´Ù. 2017.05.21.  photo1006@newsis.com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5월 21일, 청와대 춘추관 대브리핑실에서 추가 인사 명단을 발표한 후 장하성 정책실장과 악수하고 있다. (사진출처: 뉴시스)

文 대통령 삼고초려… 안철수 멘토서 새 정부 정책실장으로

문재인 대통령은 장 신임 정책실장을 모시기 위해 말 그대로 말 그대로 삼고초려(三顧草廬)였다.

문 대통령은 2012년 18대 대통령 선거 당시 개인적 인연이 없던 장 정책실장에게 “경제 정책 설계를 맡아달라”고 캠프 참여를 제안했다. 하지만 장 정책실장은 문 대통령의 손을 뿌리치고 경쟁 관계인 ‘안철수 후보 캠프’에 국민정책본부장으로 합류했다.

문 대통령은 2016년 4ㆍ13 국회의원 총선거를 앞두고 장 정책실장에게 다시 한번 손을 내밀었다. 이후 국민의당 창당으로 이어진 탈당 사태로 내홍에 휩싸였던 새정치민주연합(현 더불어민주당)을 살리는 구원투수 역할을 맡아달라고 부탁했지만, “정치를 하지 않겠다”는 장 실장의 생각이 컸던 때문에 허사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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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2월, 광주 서구 김대중컨벤션센터에서 열린 ‘안철수, 천정배, 장하성의 위기의 대한민국, 공정성장으로 길을 찾다’ 토크콘서트에 참석한 당시 안철수 공동대표와 장하성 교수.

문 대통령은 포기하지 않고, 장 정책실장의 마음의 문을 두들겼고, 영입에 성공했다.

장 정책실장은 지난달 21일 인선 발표 직후 기자들과 만나 “아주 솔직한 심정으로 문재인 정부의 인사에 감동했다”며 “문 대통령의 인사를 보면서 뭔가 변화를 일으키고 국민 눈높이에 맞춘 것을 일궈내겠다는 의지가 있구나 (하는) 그것이 제 마음을 흔들어 놓았다”고 말했다.

인선 발표가 있을 때까지 장 정책실장의 발탁을 예상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문 대통령의 장 정책실장에 대한 신뢰는 두터워 보인다.

2015년 펴낸 자신의 저서 ‘왜 분노해야 하는가’에서 “진보적 정부였다고 평가 받는 노무현 대통령도 당선인 시절에 집권 초기 경제정책의 구성을 삼성경제연구소에 의뢰할 정도로 재벌에 의존적이었다”고 비판했던 정 정책실장이 문 대통령과 손을 잡고 어떤 그림을 그려낼지 주목된다.

독립운동가ㆍ정치인ㆍ학자… 3대를 이어온 뿌리

장 정책실장이 그려 낼 새 정부의 모습을 짐작해 볼 때 그의 집안 얘기를 빼놓을 수 없다.

그는 1953년 광주에서 태어났다. 호남의 대표적 명문가 품 아래였다. 할아버지 세대는 독립운동가로, 아버지 세대는 정치인ㆍ관료로 이름을 떨쳤다. 장 실장을 포함한 3세대는 내로라하는 학자가 여럿 배출됐다.

장 정책실장의 증조부는 구한말 전남 신안군 장산도 일대에서 손꼽히는 만석꾼 부호였다. 증조부 슬하 형제가 나란히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작은 할아버지 장홍재씨는 1929년 광주학생운동에 참가했다 일본 경찰에 붙잡힌 뒤 고문 끝에 어린 나이에 사망했다.

큰 할아버지 장병준씨는 일본 니혼대를 졸업한 뒤 김구 선생 곁을 지키며 중국 상하이 임시정부 외부무장을 지냈다.

막내 할아버지 장홍렴씨는 중국 베이징국민대를 다닌 뒤 만주 신흥무관학교로 들어가 독립군에 투신했다. 광복 후에는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 검사로 활약하기도 했다.

장 실장의 할아버지 장병상씨가 철도공무원으로 집안을 건사하며 형제들을 뒷바라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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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http://tstory.tistory.com/113)

장 실장의 아버지 세대는 정치인ㆍ관료가 주축이다. 아버지 장충식씨는 한국은행 출신으로 도의원을 지냈다.

작은 아버지 장영식씨는 장면 정부에서 경제비서관을 지냈다. 막내 삼촌은 3선 의원을 지낸 장재식 전 산업부 장관이다.

독립운동에 투신한 할아버지 세대에 이어 아버지 세대 4형제 모두가 6ㆍ25 전쟁에 참전했다. 아버지 장씨는 압록강 전투에서 기관총탄에 맞았지만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진 것으로 전해진다.

장 실장 세대는 이름만 대면 알만한 교수가 여럿 있다.

장 실장의 친누나는 충남대 사회학과 교수 출신의 장하진 전 여성가족부 장관이다. 막내 동생은 열린우리당 정책실장을 지낸 장하원 전 한국개발연구원(KDI) 교수다. 나란히 영국 케임브리지대에 몸담고 있는 장하준ㆍ장하석 교수가 사촌동생이다.

소액주주 운동ㆍ기업 지배구조 개선 앞장서 온 개혁성향 학자

물론 장 정책실장은 개혁 성향의 학자로서 더 이름이 나 있다. 미국 펜실베니아대 와튼스쿨에서 경영학 박사 학위를 받고 돌아온 1990년부터 고려대 경영학과 교수로 재임한 27년차 학자다. 시민사회를 중심으로 소액주주 운동을 주도하며 재벌ㆍ대기업 등 기업의 지배구조 개선을 주창해 왔다.

장 정책실장은 1996년 참여연대에 몸을 담으면서 언론의 큰 주목을 받았다. 지금은 모두에게 익숙한 경제민주화를 시민운동을 주도하며 참여연대에 ‘경제민주화 위원회’를 만들었다.

1998년 3월 삼성전자 주주총회에 참석해 13시간 17분간 계열사간 부당거래 문제를 집요하게 따져 물어 ‘삼성 저격수’ ‘재벌 저승사자’라는 별명이 붙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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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3월, 호암아트홀에서 열린 삼성전자 주주총회에서 당시 참여연대에서 활동하던 장하성 정책실장이 삼성전자의 책임경영 체제가 미흡하다며 성토하고 있다. (사진 출처: 연합뉴스)

소액주주들로부터 위임 받은 100만여주(지분율 1.05%)가 유일한 무기였다. 2006년 제일모직 소액주주 2명과 함께 “에버랜드 전환사채(CB) 인수를 포기하게 해 제일모직에 손해를 끼쳤다”며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해 130억여원의 배상판결을 이끌어 내기도 했다.

‘이건희-이재용’으로 이어지는 삼성 가(家) 편법승계의 핵심 고리에 대한 사법적 판단을 이끌어낸 사건이다.

시장의 힘을 빌어 기업 경쟁력을 훼손하는 불투명한 기업 지배 구조를 바꿔내겠다는 게 장 정책실장의 목표였다. 문재인 정부 첫 공정거래위원장으로 후보자로 지명된 김상조 한성대 교수 등이 장 정책실장과 함께 했었다.

2006년에는 ‘라자드한국기업지배구조편드’(KCGFㆍ일명 장하성 펀드)를 만들어 다시금 화제를 뿌렸다.

당시 태광그룹 계열사인 대한화섬 지분은 인수한 뒤 주주총회를 통해 불투명했던 그룹의 지배구조 개선 합의를 이끌어내는 성과를 내기도 했다. 이를 바탕으로 2008년 세계 최대 규모의 연기금인 미국 캘퍼스(캘리포니아 공무원 퇴직연금)으로부터 1억달러 규모의 투자를 유치하며, 남양유업ㆍ일성신약 등에 대한 지배구조 개선을 시도하기도 했다.

2010년에는 ‘좋은 기업지배구조 연구소’로 자리를 옮겨 운영위원과 수석 이코노미스트로 활동하는 등 재벌개혁에 앞장섰다.

재벌개혁과 국민성장, 두 마리 토끼 잡을까?

대중들에게는 ‘재벌 저격수’로 더 잘 알려져 있지만 학자로서 장 정책실장의 관심은 항상 ‘소득 양극화 해결’에 닿아 있었다.

문 대통령도 인선 결과 발표에 직접 나서 “한국 사회의 경제적 불평등 문제를 지속적으로 연구해오신 경제학 분야 석학이자 실천운동가”라며 “과거 재벌 대기업 중심 경제의 패러다임에서 벗어나 사람중심과 중소기업 중심의 경제·사회 정책으로의 변화와 경제 민주화, 소득주도 성장과 국민성장을 함께 추진할 수 있는 최고 적임자”라고 극찬했다.

장 정책실장은 최근 잇따라 펴낸 ‘한국 자본주의’ 등의 저서에서 소득양극화 해결 방안을 제시하기도 했다.

구체적 정책으로 기업이 투자를 하지 않고 쌓아두는 내부유보금과 관련한 초과 내부보유세 도입, 소득세 누진 강화, 법인세 개혁, 집단소송제 확대, 징벌적 배상제 도입 등을 언급했다.

이명박ㆍ박근혜 보수정권 10년 동안 강조해 온 성장 중심의 ‘낙수효과’가 아닌, 분배구조 개선을 통한 ‘분수효과’과 실현에 강조점이 찍혀 있는 정책들이다.

이러한 클 틀에서 재벌개혁이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 장 정책실장은 임명 직후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재벌 때리기에 나설 것이라는 재계의 우려가 있다’는 지적에 “재벌 개혁에 ‘두들겨 팬다’는 표현은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며 “재벌 개혁을 한다는 것은 새로운 강자, 새 중소기업의 성공 신화 등이 만들어지도록 하는 것이다”이라고 강조했다.

장 정책실장이 쓸 칼은 크게 두 자루다. 참여연대에서 손발을 맞춰본 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 후보자가 한 손에, 박근혜 정부에서 국무조정실장을 지낸 보수 성향의 테크노크라시 김동연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 후보자가 다른 한 손에 쥐어질 것으로 보인다.

재벌개혁과 국민성장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기 위해 추게 될 장 정책실장의 칼춤이 춤사위로 이뤄져 있을지 경제계는 물론 정치권도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목, 2017/06/08- 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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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8월21일(현지시각)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 마라카낭 주경기장에서 열린 2016년 리우올림픽 폐회식에 빨간 모자를 쓴 한 남자가 등장했다. 아베 신조(63) 일본 총리였다. 

일본의 대표적인 게임 캐릭터인 ‘슈퍼마리오’ 차림을 하고 2020 도쿄올림픽을 알린 그의 변신은 뜨거운 화제가 됐다. 

언론은 “일본이 리우올림픽 폐막식을 빼앗았다”고 평가했고, 그에게 감정이 좋지 않은 국내 누리꾼들마저 “신선하다”, “재밌다”는 호평을 쏟아냈다. 1985년 일본 닌텐도사가 창조한 슈퍼마리오는 배관공 마리오가 쉬지 않고 앞으로 달리며 장해물을 넘고 괴물을 쓰러트리며 공주를 구하는 게임이다.

거침없는 아베, 전후 최장수 총리

2012년 일본 총리에 오른 그는 이제 자신의 별명이 된 슈퍼마리오처럼 거침없이 달리고 있다. 

2016년 연말 64%로 3년 2개월 만에 국내 지지율 최고치를 기록한 그는 지난해 2021년까지 집권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고, 새해 벽두부터는 전쟁을 금지한 현행 헌법 9조의 개정을 포함한 개헌을 천명했다. 자신의 장기집권을 바탕으로 ‘전쟁 가능한 일본’을 만들겠다는 그의 포부는 2017년에도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이런 가운데 과거사 문제로 아베 총리 임기 내내 불편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한국 정부는 새해부터 부산 일본영사관 앞 위안부 소녀상 설치로 일본 정부와 충돌하고 있다. 아베 정부는 통화스와프 협의를 중단하고, 주한 일본대사와 부산 총영사의 귀국을 결정하는 등 강경 모드를 밀어붙이고 있다. 

2017년 아베 총리가 거침없이 달려갈수록 과거 일본 침략전쟁 피해자들의 고통은 더욱 커지고, 한국 정부는 계속 시험대에 오를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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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베 총리가 지난 4일 이세신궁에 참배하기 위해 각료들과 신궁으로 이동하고 있다. 이세신궁은 일본 전역에 있는 신사의 최정점에 있는 신사로, 일본의 건국신인 아마테라스오미카미를 모신 곳이다. 일본 천황은 이 건국신의 후손이라고 믿어진다.

아베는 1월4일 미에현 이세시에 있는 이세신궁을 참배한 뒤 신년 기자회견을 열고 2017년 국정운영 방침을 밝혔다. 

그는 이 자리에서 개헌과 장기집권에 대한 의욕을 감추지 않았다. 아베는 2017년이 “일본 헌법 시행 70년이 되는 해”라고 강조하며 “앞으로 70년을 내다보며 지금이야말로 새로운 나라 만들기를 진행해야 할 때”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또 “우리 자신의 손으로 미래를 개척해 나갈 것”, “아이들과 손자의 미래를 내다보며 새로운 나라 만들기에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 

아베를 포함한 일본 우익들은 현재 일본의 평화헌법이 2차 세계대전 뒤 연합군최고사령부(GHQ)의 압박 때문에 만들어진 것으로 ‘자주 헌법’을 제정해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즉 ‘우리 자신의 손’을 언급한 것은 이제 더는 ‘전범국가’ 일본으로 남아있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김정일 회담에서 스타 부상

이러한 아베의 행보는 외할아버지인 기시 노부스케 전 총리와 떼려야 뗄 수 없다. 아베 총리는 1954년 기시 노부스케 전 총리의 딸인 요오코와 아베 간의 아들 아베 신타로 전 외상 사이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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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베는 정치명문가 출신이다. 외할아버지(왼쪽 4번째)가 기시 노부스케 전 총리였고, 아버지가 아베 신타로 전 외상(오른쪽 첫번째)이다. 특히 이 집안은 일본 야마구치현에 정치적 기반을 두고 있는데, 이는 근대 일본 정치체제를 만든 메이지유신이 지금의 야마구치현(옛 조슈)과 가고시마현(옛 사쓰마) 출신 하급무사들의 반란으로 이뤄졌기 때문이다.

아베 총리의 친할아버지 아베 간은 중의원 의원을 지낸 정치인으로 도조 히데키(1884∼1948) 내각의 퇴진과 전쟁 종결을 주장한 인사다. 외할버지인 기시 노부스케는 A급 전범 용의자로 투옥된 적이 있는 우익인사다. 

기시는 ‘평화헌법’을 대체하는 ‘자주 헌법’의 완성을 ‘일본의 진정한 독립’이라고 주장했다. 아베 총리는 정치적으로 친가 대신 외가의 피를 이어받았다. 스스로 “나는 아베 신타로의 아들이지만 기시 노부스케의 DNA(유전자)를 이어받았다”고 말해왔다. 

실제로 정치인으로서의 아베가 걸어온 길은 외할아버지의 유지를 잇는 것을 방불케 한다. 실제로 아베 총리는 유년시절 외할아버지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정치인이던 아버지와 지역구 관리에 힘을 쏟은 어머니 대신 그를 돌본 건 유모와 주말마다 손자를 부른 외할아버지라고 한다. 

외조부를 롤모델로 정치인을 꿈꿨던 그는 세이케이대학 정치학과를 졸업, 미국 유학 뒤 귀국해 고베 제철소에서 3년 반 회사원 생활을 했다. 1982년 외상이었던 아버지의 비서관으로 재직하다 1993년 37살에 아버지의 지역구인 야마구치현 시모노세키에서 중의원에 당선되면서 정치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외할아버지, 아버지의 후광에 비해 다소 평범한 정치 이력을 보인 그는 2002년 북한의 일본인 납치 문제로 열린 김정일 국방 위원장과의 정상회담에서 고이즈미 전 총리를 수행하며 스타로 떠올랐다. “타협은 안 된다”며 강경론을 주장하며 ‘용기 있는 정치인’으로 불리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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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9월 방북한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왼쪽)가 김정일 국방위원장(오른쪽)과 인사하는 모습. 당시 관방부장관이었던 아베 신조(왼쪽 세번째)가 심각한 표정으로 지켜보고 있다 (사진 출처: 중앙일보)

이에 그는 2003년 고이즈미 전 총리의 지지를 업고 젊은 나이에 파격적으로 자민단 간사장으로 발탁되고, 2005년 10월 관방장관으로 내각에 들어가며 탄탄대로를 걷는다. 

결국 고이즈미 퇴임 후 아베는 자민당 총재직에 오르고 2006년 9월 최연소이자 전후 세대 첫 총리를 맡으며 꽃가마를 타게 된다. 하지만 1년 만인 2007년 9월 건강 악화를 이유로 사임했다.

펄펄 나는 일본, 손 놓은 한국

총리 재직시절인 2007년 3월, 위안부 동원 과정과 관련해 “강제성이 없었다”고 발언하며 논란을 불러일으킨 그는 총리직에서 내려온 뒤에도 과거사와 관련한 다양한 망언을 쏟아내며 일본 우익의 목소리를 대변했다. 

하지만 그를 다시 불러낸 건 민주당의 저조한 지지율과 침체에 빠진 일본 경제였다. 총선에서 자민당이 압승하고 5년만인 2012년 12월 다시 96대 총리에 오른 그는 경제 회복을 외치며 집권을 이어오고 있다. ‘아베노믹스’로 불리는 강력한 양적완화 정책으로 일본 경제의 고질적 문제였던 디플레이션을 다소 해결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자신감을 바탕으로 그는 재집권에 성공하고 다시 자신의 우익 DNA를 유감없이 드러내고 있다. 

2015년 ‘전쟁 가능한 일본’의 디딤돌이나 마찬가지인 안보법 국회 처리를 밀어붙인 그는 지난해 자민당의 당규 개정으로 2021년 8월까지 자신의 집권 가능성을 열어놨다. 

이제 개헌이라는 마지막 퍼즐을 통해 일본을 ‘보통국가’로 만들어 과거사에서 완전히 벗어나겠다는 야망을 드러낸 것이다. 물론 일본 국민 사이에서는 안보법에 대한 반대 여론이 여전히 높아 지난해 안보법을 이유로 아베의 지지율이 30%대로 떨어지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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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일 부산 동구 일본영사관 앞 소녀상에서 시민단체 회원이 아베 총리의 가면을 쓰고, 소녀상에 무릎 꿇고 사죄하는 모습을 연출하고 있다. (사진 출처: 한국일보)

하지만 아베는 이를  외교를 통해 정면 돌파하려는 모양새다. 미·일 동맹을 중심에.두고 과거 식민지 침략을 부정하며 한국과 중국과 충돌하는 것이 아베 외교 전략의 뼈대다. 

그는 2016년 연말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당선인, 버락 오바마 대통령,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을 연이어 만나며 뜨거운 연말을 보냈다. 국내에는 ‘망언’으로 대표되는 우익 정치인이라는 인식이 강하지만, 아베는 실용적인 입장을 취하며 국익을 극대화 시키는 면모를 보이고 있다.  

문제는 아베의 거침없는 행보에 한국 외교는 속수무책으로 쩔쩔매고 있다는 것이다. 

부산 일본대사관 위안부 소녀상 설치에 대한 아베의 강경책에 2015년 박근혜 정부가 일본과 한 합의가 발목을 잡고 있다. “위안부 문제가 최종적·불가역적으로 해결됐다”고 확인한 당시의 합의를 근거로 아베는 1월6일 “10억엔(위안부 재단 기금)을 냈으니 한국이 제대로 성의를 보여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위안부 피해자들에게 고통을 계속 안기는 것은 물론이고 ‘주권국가’라고 말하기 힘든 상황까지 추락한 것이다. 

아베는 오늘도 거침없는 발걸음을 내딛고 있지만, 한국은 박근혜 정부의 잘못된 합의에 발목을 잡힌데다, 박근혜-최순실 국정농단 게이트로 인한 국정 공백으로 계속 헤매고 있을 뿐이다. 

목, 2017/01/12- 1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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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7월10일 참의원 선거에서 압승을 거둔 아베 신조 일본 총리와 자민당은 승리에 취해 있었다. 자민·공명 연립여당과 개헌 찬성 세력이 개헌안 발의선(162석)을 넘는 165석을 확보했다. 곧바로 다음날 아베 총리는 숙원이었던 개헌 추진 의사를 공식화했다.

자민당 개헌안 초안에는 자위대를 정식 군대인 국방군으로 격상시키는 내용이 포함돼 있었다. 전쟁을 포기하고, 국가의 교전권을 인정하지 않는 현행 평화헌법을 무력화시키는 셈이다.

200만의 생전 퇴위 의사…개헌 견제 의도(?)

아베의 계획이 발표되고 불과 이틀 뒤 NHK는 아키히토(明仁·82) 일왕이 생전에 왕위를 물려주겠다는 뜻을 밝혔다는 보도를 내놓는다. 살아있는 일왕이 왕위를 내놓는 일은 오늘날의 일왕 체제가 갖춰진 메이지 유신 이후 처음이다. 거슬러 올라가도 1817년 고카쿠 일왕의 양위 이후 근 200년 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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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8일, 일본 도쿄 시내에서 시민들이 아키히토 일왕의 생전 퇴의 의사 방송을 지켜보고 있다.

일본 열도의 관심이 집중됐다. 아베 총리가 야심 차게 꺼내놓은 개헌 논의는 그만 쑥 들어가고 만다. 일본 사람들에게는 개헌보다 일왕의 메시지가 더 폭발력 있는 이슈였다.

첫 보도 당시 왕실을 담당하는 궁내청 장관은 사실상 일왕의 생전 양위를 부인했다. 그러다 한 달 만인 8월5일 일왕이 입장을 미리 녹화한 영상연설 형식으로 발표할 것이라고 밝혔다.

일왕의 영상 연설은 흔한 일이 아니다. 2011년 3월 동일본 대지진에 이어 딱 두 번째였다. 일왕은 8월8일 발표한 10분 남짓한 영상에서 ‘퇴위’라는 말을 꺼내지는 않았다.

그러나 “두 차례 외과수술을 받았고 고령에 따른 체력 저하를 느끼기 시작했다”며 “점차 신체 쇠약이 진행하는 것을 감안할 때 지금까지처럼 전신전력을 다해 상징으로서 책무를 수행하는 것이 어렵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말했다. 뜻은 분명했다. (아키히토의 퇴위 방송을 보려면 클릭!)

일왕의 세습은 헌법상 왕실전범의 규정에 따르게 돼 있다. 왕실전범은 국왕 별세 시에 왕세자가 즉위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따라서 생전 양위를 하려면 전범을 개정해야 한다. 이 작업에 2~3년은 걸릴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새로운 연호, 퇴위 뒤의 호칭, 역할, 거처 등도 심사숙고해야 한다. 현 국왕에게만 적용되는 특별법을 제정하는 방안을 검토한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아베 정부도 개헌보다 왕실전범 규정에 우선순위를 둘 수밖에 없게 됐다. 아베 내각이 허를 찔렸다는 반응도 흘러나왔다. 일왕이 결과적으로 개헌 논의에 찬물을 끼얹은 것 아니냐, 나아가 훼방을 놓은 것 아니냐는 이야기까지 나오는 이유다.

자민당의 개헌안은 평화헌법을 무력화시키는 내용뿐만 아니라 일왕을 일본국의 ‘상징’이 아니라 ‘원수’로 바꿔 규정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일왕이 이런 내용에 부담과 불안을 느꼈으리라는 것이다. 스스로 ‘건강상의 이유’를 들었지만 아직까지 업무수행에 지장을 줄 정도는 아니라는 것이 대체적인 시각이다.

어린시절 패전 경험….미국인 퀘이크교도에게 교육

아키히토 일왕이 평소 보여준 평화주의 성향은 그런 관측을 뒷받침한다.

그는 1933년 히로히토 일왕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여덟 살 때 부친이 태평양 전쟁을 일으켰다. 미군의 공습이 시작되자 방공호 생활을 해야만 했고, 결국 도쿄를 떠나 닛코 시의 다모자와 황실 별저에서 칩거하다 종전을 맞았다. 패전 이듬해 새해 첫날 13세의 소년 황태자는 새해의 다짐을 적은 붓글씨로 ‘평화국가 건설’이라는 문구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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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키히토 일왕(왼쪽에서 두번째)은 부친 히로히토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도쿄 공습과 패전의 경험이 그에게 강한 평화주의적 성향을 심어줬다는 평가가 있다.

극동국제군사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은 도조 히데키 등 A급 전범들은 1948년 그의 생일인 12월23일 처형됐다. 아키히토로서는 잊을 수 없는 기억이었을 것이다

아키히토는 1949년 가쿠슈인 고등과에 입학한 후 미국인 가정교사 엘리자베스 바이닝 부인에게 지도를 받았다. 바이닝 부인이 아키히토에게 끼친 영향은 미국식 사고방식뿐만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바이닝 부인은 어떠한 폭력과 무력에도 반대하는 퀘이커 교도였다. 아키히토도 어떤 식으로든 평화주의의 가치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는 계기가 됐을 터이다.

이후 그는 가쿠슈인 대학교에서 정치학을 공부하고, 영국 옥스퍼드대 대학원에 진학해 어류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는다. 부친이 생물학에 조예가 깊었던 것처럼 아키히토도 국내외 학술지에 여러 논문을 발표할 정도로 어류학에 깊은 애정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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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키히토 일왕은 젊은시절, 어류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고, 세계적 학술지에 적지 않은 영어 논문을 발표하기도 했다.

1959년에는 최초로 왕족이 아닌 평민 출신 쇼다 미치코를 아내로 맞아 화제를 뿌리기도 한다.

아키히토는 1989년 부친이 사망한 뒤 제125대 천황에 즉위했다. 그는 즉위 직후부터 과거 태평양 전쟁의 상흔을 간직한 지역을 차례로 방문했다. 1991년 태국,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방문을 시작으로 1992년에는 중국, 2005년에는 사이판, 2006년에는 싱가포르와 태국을 방문했다. 2009년에는 하와이, 2015년에는 팔라우를 방문했다.

방문지에서 일왕 부부는 일본인 병사의 위령비와 함께 반드시 상대국의 위령비도 참배했다. 2005년 사이판 방문 때에는 한국인 위령탑에 참배하기도 했다. 반면 야스쿠니 신사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참배하지 않았다. 아버지인 히로히토 역시 야스쿠니 신사를 8번 참배했으나 A급 전범이 합사된 1978년 이후에는 참배하지 않았다.

평화주의자로서의 면모

아키히토 일왕의 발언에는 일본의 과거 행적에 대한 반성과 평화주의자로서의 면모가 드러나 있다. 1998년 김대중 대통령의 방일 때에도 “우리나라가 한반도 사람들에게 고통을 주었다는 슬픔이 항상 기억 속에 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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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김대중 대통령은 일본을 방문해 아키히토 일왕과 만찬을 가졌다. 이 자리에서 아키히토 일왕은 “한반도 사람들에게 고통을 주었다는 슬픔이 항상 기억 속에 있다”고 말했다.(사진 출처: http://m.chosun.com/svc/particle.html?sname=premium&contid=2016072500319)

2009년 즉위 20주년을 맞아서는 “내가 오히려 걱정인 것은 차츰 과거 역사가 잊혀지는 것”이라며 “전쟁에서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고, 말도 못하는 고생과 희생 위에 지금의 일본이 세워진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전후 태어난 사람들에게 제대로 (역사를) 전달해 나가는 것이 국가 발전에 큰 도움이 된다”고 밝혔다.

아베 정권 출범 이후 우경화에도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2013년 팔순 생일 기자회견 때는 패전 이후 어쨌든 평화헌법이 오늘날 일본을 일궈낸 초석이라는 점을 다시 강조했다.

2015년 각료와의 신년 인사회에서도 아베 총리에게 “올해는 종전 70주년을 맞는 기념비적인 해”라며 “많은 분이 목숨을 잃은 전쟁이었다. 이 기회에 만주사변으로부터 비롯된 전쟁의 역사를 충분히 배워서 앞으로 일본 본연의 자세를 생각해 가는 것이 현재 지극히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한다”며 견제구를 던졌다.

지난해 8월15일에 이어 올해 8월15일에도 전몰자 추도식에 참석해 ‘깊은 반성’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는 점도 인상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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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5일, 종전기념일 전몰자 추도식에 참석한 아키히토 일왕과 아베 총리의 모습. 이 자리에서 아키히토 일왕은 “과거를 돌이켜 보면 깊은 반성과 함께 전쟁의 참화가 재차 반복되지 않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반면 아베 총리는 일본의 가해사실에 대한 언급은 없이 “내일을 살 세대를 위해 희망에 찬 국가의 미래를 개척해 가겠다”만 말했다. (사진 출처: http://www.segye.com/content/html/2016/08/15/20160815001866.html)

일왕은 총리가 바뀌면 사적으로 신임 총리 부부를 왕궁에 불러 환영 만찬을 열곤 한다. 그러나 아베 총리만은 한 번도 초대받지 못했는데, 이것이 아베의 우경화 노선에 대한 반대 의사를 표명한 것으로 해석되기도 할 정도다.

“백제 무령왕의 후손”….한국에 친근감

아키히토 일왕은 한국에도 친근감을 표시해 왔다. 2001년 68회 생일을 맞이한 일왕은 공개 기자회견장에서 “간무(桓武) 천황(재위 781~806년)의 생모가 백제 무령왕의 자손이라는 사실이 <속일본기>에 기록돼있다. 한국과 깊은 연을 느낀다”고 밝혔다.

2004년에는 일왕의 당숙이 충남 공주의 백제 무령왕릉을 참배했다. 아키히토 일왕은 왕실에 한국 요리사를 초청해서 김치·잡채 파티를 열고, 지하철 선로에 떨어진 취객을 구하다 사망한 고 이수현 씨를 소재로 한 영화도 관람했다. 또한, 기회가 있을 때마다 생전에 한국을 방문하고 싶다는 의사를 피력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국 일부에서 아직까지도 아키히토 일왕을 군국주의 향수나 자극하는 인물로 묘사하는 것은 다소 결을 잘못 짚은 사례로 보인다. 일본에서조차 천황제 자체에 반대하는 쪽에서도 아키히토 일왕 개인을 비판하지는 않는다고 한다.

‘일왕이 한국을 방문하려면 진심으로 사죄해야 한다’는 이명박 전 대통령의 공격은 그래서 번지수를 잘못 짚어도 한참은 잘못 짚었다는 비판이 나온다. 때에 따라서는 한일 역사화해의 물꼬를 트는 역할을 할 수도 있었을 일왕의 손을 뿌리쳐 버렸을 뿐만 아니라 많은 평범한 일본인들의 반감만 샀다.

아키히토 일왕은 2년 뒤면 즉위 30주년을 맞는다. 그는 ‘전쟁국가’로 질주하려는 아베 정권의 폭주에 제동을 걸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일까?

그가 평화주의적 면모를 지닌 것은 분명해 보인다. 일왕의 메시지가 일정한 효용을 지닌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개헌을 저지하는데 일왕을 방패막이로 내세우는 것은 무언가 꺼림칙한 일이다.

하종문 한신대 일본학과 교수는 “개헌을 원하지 않는다면 현재 민주주의 틀 내에서 결론이 나야 한다. 천황을 끌어들이고 활용하는 모양새 자체는 헌법을 지켜내더라도 불편하다”고 말한다.

일왕은 아베의 완충장치라는 견해도

따지고 보면 유구한 전통을 지닌 것처럼 보이는 ‘천황제’라는 제도 자체도 근대의 산물이다. ‘만세일계’ 천황의 시조로 불리는 일본 건국의 시조 진무 천황(재위 기원전 660~585) 역시 가공의 인물이라는 것이 현대 실증사학의 정설이다.

메이지 유신 이전, 에도 막부 시절 ‘천황’은 즉위식조차 올리지 못할 정도로 권위가 땅에 떨어져 있었다. 민초들은 막부의 쇼군은 알아도 천황은 전혀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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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군주제를 가진 나라이다. 그 뿌리를 기원전 660년의 진무일왕(사진 왼쪽)으로 잡고 있지만, 이를 믿는 사람은 많지 않다. 오랫동안 일왕은 정치적 실권이 없는 상징적 존재였다가 1876년 메이지유신 이후 절대권력자가 됐다. 유신주도자들은 그런 일왕을 실제보다 근엄하고 위엄있게 보이도록 상징조작을 했다. 메이지 일왕의 모습(사진 오른쪽).

오늘날 우리 머릿속에 있는 ‘천황 숭배’는 근대화의 후발주자로서 근대 국민국가를 창출하기 위해 국민 통합의 상징으로 천황제를 이용한 메이지정부의 작품이다. 메이지정부가 천황의 존재를 각인시키기 위해 천황의 전국 순행을 실시했다. 진무 천황의 능도 이때 축조된다.

그 천황제는 결국 시간이 흐르면서 황국신민들을 전쟁의 참화 속으로 뛰어들게 하는 최면제로서의 신화로 자리매김하고 말았다.

패전 후 히로히토 일왕은 전쟁의 책임을 지지 않았다. 일왕이 지닌 전쟁의 책임을 희석하기 위해 조선과 대만인을 포함한 전 국민 ‘1억 총참회’가 필요하다는 기상천외한 개념까지 등장했을 정도다.

그러나 일왕의 책임은 다시 말할 것도 없다. 일본 수뇌부가 종전을 미룬 것도 상황을 오판해서라기보다, 패전이 임박한 상황에서 어떻게 하면 황실을 보전할 것인가를 궁리했기 때문이다. 생체실험을 진행한 731부대는 히로히토 일왕의 칙령에 따라 창설된 유일한 부대이기도 하다.

천황제라는 신화는 패전 후 천황의 ‘인간선언’으로 스러져 버린 것일까. 아키히토 일왕의 생전 양위 선언을 계기로 다시금 물어보게 되는 질문이다.

아키히토 일왕 개인에 대한 평가는 남겨두고서라도, 불과 70여 년 전 세계를 전쟁의 소용돌이 속으로 밀어 넣는데 큰 역할을 담당했던 천황제가 이제는 평화헌법의 수호자가 되고 있는 아이러니를 우리는 목격하고 있다.

후지이 다케시 역사문제연구소 연구원은 결국 천황제가 보수적 일본 체제를 유지하는 안전장치와도 같은 기능을 하고 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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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키히토 일왕이 생전 퇴위를 하면 후계는 그의 장남 나루히토(왼쪽에서 3번째)에게로 넘어간다. 나루히토 역시 아버지와 같은 평화주의자로 알려져 있다. (사진 출처: 일본 궁내성)

아베 총리에게 반대하는 사람들이 일본이라는 국가 자체를 부정하는 방향으로 흐르지 않기 위해 아키히토 일왕이 “적어도 천황은 그런 사람이 아니다”라는 인식을 심어준다는 것이다. 일왕이 일종의 완충 역할을 하는 셈이다. 그리고 그런 장치가 있기 때문에 아베 총리가 다소 무리를 해도 된다는 설명이다.

“평화헌법을 지키려는 사람들이 오히려 천황제 쪽으로 쏠리고 있다는 게 문제인 것이죠. 마치 지금 평화헌법을 지키기 위해서는 천황을 지지해야 되는 것처럼.”

일왕이 영상 메시지를 전하던 날 왕궁을 향해 고개 숙여 인사하는 한 남성의 사진이 보여주는 것처럼, 일본에서 천황제 신화는 아직도 현재 진행 중인지도 모른다.

수, 2016/08/24- 1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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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의회 전문지 “미 하원 위안부 청문회 때 박근혜 그 자리에 있었다!”
-미 전 하원의원 ‘존 케리 美 국무, 위안부 할머니들에게 모욕’
-아베의 위안부 합의 용기 있다 박수는 책임 없는 행동
-위안부 할머니들의 굴욕과 고문에 관한 증언, 모두 읽어봐라!

미국 하원이 지난 2007년 ‘위안부 결의안’ 통과 시 미 하원 외무위원회 아시아태평양 및 지구환경 소위원회의 위원장으로 청문회를 주도했던 에니 팔레오마베가(민주당-사모아) 전 의원이 미국 의회 전문지인 ‘더 힐’에서 한일 간의 위안부 합의에 대한 미국 정부, 특히 존 케리 미 국무부 장관의 발언에 대해 강하게 성토하고 나섰다.

팔레오마베가 의원은 지난 8일 ‘더 힐’에 실린 ‘Japan’s ‘comfort women’ apology not good enough-일본의 ‘위안부’ 사과 충분치 않다‘라는 제목의 칼럼에서 존 케리의원이 위안부 합의 후 “위안부 문제의 타결”을 환영하고 이번 합의에 도달하는 “용기”를 보여준 아베 총리에게 박수를 보낸 사실을 거론하며 “할머니들의 의견이 물어질 때까지는 미국을 대표하여 말하는 사람이라면 인간적 고통을 가리키는 표현을 선택함에 있어 좀 더 책임감 있기를 나는 진심으로 희망한다”고 일침을 가했다.

팔레오마베가 의원은 그 이유로 “이번 합의에 있어, 문제가 “타결”되었다거나 잘못된 행동에 대해 사과하는 데 “용기”가 필요하다고 선언하는 것은 과거와 현재 모든 “할머니들”에 대한 모욕이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팔레오마베가 의원은 한미일 3국의 경제협력 및 안보협력의 필요성에도 불구하고 용기라는 단어는 범죄자(일본)에게 쓰는 것이 아니다라고 강하게 성토하며 2007년 청문회 당시 고통스러운 과거에도 불구하고 ‘용기’있게 증언한 위안부 할머니들의 기록을 모두가 읽어볼 것을 권한다고 말해 이번 위안부 합의의 조정자로 알려진 미국 정부에 대해 범죄자에 대해 동조한 것을 우회적으로 비판했다.

특히 팔레오마베가 의원의 칼럼에서 주목을 끄는 것은 2007년 청문회에 박근혜 대통령이 참석한 사실을 지적했다는 점이다.

팔레오마베가 의원은 “당시 국회의원이었던 박근혜 대통령은 미국 의회에서 개최된 첫 번째이자 유일한 그 역사적 청문회에 참석했다”며 “이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박근혜의 언약은 진실하고 온전하며 항상 그래 왔다. 나는 미국이 그녀를 본받아 마음에 깊은 상처를 입은 사람들에게 조금 더 부드럽기를 촉구한다.”고 말했다.

팔레오마베가 의원은 비록 외국 정상에 대해 우호적인, 외교적 관례에 따른 표현을 사용하고 있지만 그 청문회에 참석했던 박근혜 대통령이 어떻게 일본과 그런 합의를 허용했는지에 대한 반어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이다.

당시 청문회에는 한국인 종군위안부는 이용수 할머니와 김군자 할머니와 네덜란드 종군 위안부로 끌려갔던 잰 러프 오헤른 할머니 등 3명이 종군위안부 성노예 생활의 참상을 생생하게 증언해 미 하원들을 충격에 빠뜨렸고 미 하원에서 만장일치로 위안부 결의안이 통과되는 바탕이 된 바 있다. 팔레오마베가 의원은 박근혜가 바로 이 참혹한 생황을 증언하는 자리에 있었음을 박근혜에게 상기 시키고 있는 것이다.

팔레오마베가 의원은 이 외에도 미 백악관 청원 사이트인 “위 더 피플” 웹사이트에 캘리포니아 글렌데일의 “위안부” 소녀상 철거를 요청하는 청원이 올려졌고 이를 웹사이트에서 제거하라는 요청들이 백악관에 의해 무시된 사실을 상기시키며 “문명화된 정부는 전쟁 중 민간인을 공격 대상으로 삼는 것을 용납하지 않기 때문에 이것이 문제가 된다.”고 백악관을 비난했다.

팔레오마베가 의원은 나아가 “일본 정부가 이슬람 근본주의 테러단체인 ‘보코하람’처럼 부도덕한 태도로, 전쟁 중 민간인을 대상으로 하는 것을 용납했고 소녀들에게서 집과 미래를 앗아갔고 여러분과 나의 딸들처럼 한때 희망과 꿈이 있었던 어린 소녀들에 대한 존중과 존경에서, 미국 정부는 정부가 납세자들의 돈으로 운영하는 웹사이트에서 그 무례한 청원을 제거했어야 했다”며 미국이 검토없이 아베의 사과에 박수를 친 사실을 강하게 질타했다.

팔레오마베가 의원은 아베의 사과에 대해서도 핵심을 완전히 빠뜨렸으며 일본의 전쟁범죄를 축소했다고 비난 한 뒤 이 문제는 살아있는 진짜 심판관들(위안부 할머니들)이 해결되었다고 말할 때까지 절대 최종적으로나 불가역적으로 해결되지 않을 것이라며 “박근혜 대통령에게 일본의 책임을 묻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할 것”을 요구했다.

한일 위안부 합의는 배후 조정자인 미 정계에서도 비난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미국의 국익을 위해 미국이 그토록 강조하는 인권문제와 전쟁범죄를 외면했다는 비난이 높아지고 있는 것이다.

다음은 ‘더 힐’에 실린 팔레오마베가 전 하원의원의 칼럼을 뉴스프로가 전문 번역한 것이다.

번역 감수 : 임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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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2016/01/13- 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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