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빼앗긴 들, 빼앗긴 나랏말쌈 – 보통학교 조선어와 한문독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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빼앗긴 들, 빼앗긴 나랏말쌈 – 보통학교 조선어와 한문독본

익명 (미확인) | 목, 2017/10/19- 17:29

미리보는 식민지역사박물관 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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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총독부가 편찬한 1학년용 <보통학교 조선어와 한문독본>(1915) 표지와 본문>

 

10월 9일은 ‘훈민정음訓民正音’을 창제하여 세상에 펴낸 것을 기념하고 한글의 우수성을 기리기 위한 날, 바로 한글날이다. 올해는 훈민정음을 반포한(세종 28년, 1446년) 지 571년이 되는 해이다. 이번에 소개할 자료는 태극기가 아닌 일장기를 ‘국기’로, 그것도 ‘국어’의 지위를 빼앗긴 ‘한글’로 배우는 참담한 시대를 보여주는, 1915년 조선총독부가 발행한 제1학년용 ????보통학교조선어와한문독본普通學校朝鮮語及漢文讀本????교과서이다.교과서는한사회의교육이념을반영할뿐아니라그 사회의 구조 및 지식 발전 정도를 반영한다.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교과서는 1895년 학부에서 편찬한 ????국민소학독본????으로알려져있다.이 시기한성사범학교령,소학교령을공포하고한성사범학교 규칙과 소학교 규칙을 만들었다. 일제는 1908년에 ‘교과용도서 검정규정’을 공포하여 우리의 민족정신이 담긴 교과서들을 판매 금지시키는 한편, 1911년 「조선교육령」을 공포하여 ‘국어’라는 명칭 대신에 ‘조선어’를 사용하게 하고, 대부분의 교과서를 일본어로 기술하게 했다. 이로써 ‘조선어’와 ‘한문’ 과목 이외의 대부분의 교과서는 일본어로 편찬되었다.
「조선교육령」은 조선인을 일제의 충성스러운 제국신민으로 양성하는 것을 목적으로 했다. 일제강점기 조선인의 교육은 바로 이 「조선교육령」에 의거하여 이루어졌고, 조선총독이 모든 사항을 관할했다. 1911년 9월부터 시행된 제1차 조선교육령에서 우리말이 ‘조선어’로 일본어가 ‘국어’로 바뀌었으며, 일장기를 ‘국기’로 가르치게 되었다. 또한 일제는 조선을 식민통치하면서 이른바 ‘교육칙어’를 근거로 식민화 교육을 본격화하였다. 그 과정에서 총독부가 편찬한 ????조선어독본????과 ????국어[일어]독본????은 식민정책을 알리고 시행하는 교본과 같은 역할을 수행했다.
교과서의 내용은 ‘철자, 어휘, 절과 문장 학습, 글 읽기’ 등으로 이전 시기에 비해 좀 더 체계적인 모습을 띠게 되나, 「보통학교 조선어와 한문 독본」에서 볼 수 있듯이 우리 민족의 주체성이나 애국적인 내용은 모두 빠지게 된다. 그 대신에 주로 상식과 관련된 설명문, 우화 등의 이야기, 서간문, 속담, 노동, 수필, 문학 작품, 예절 등이 주류를 이루게 된다.
총 120쪽에 84과(課)로 구성된 「보통학교 조선어와 한문 독본」은 기본적인 한글체계인 모음을 제1과로 시작하여 자음과 단어 연습, 짧은 문장, 수와 관련된 글자를 ‘조선어’와 ‘한문’을 혼용하여 설명했다. 가족관계, 신체, 시계 등 간단한 단어를 시작으로 예절, 국기, ‘천황’ 등 ‘예절과 도덕’을 강조했는데, 이것은 식민치하의 특수한 상황에서 강요된 규율과 지침이었다. “황국 신민다운 자질과 품성을 구유(具有)케 해야 한다.”는 일제의 교육목표처럼, 도덕과 예절은 식민지민으로서 학생들이 갖추어야 할 덕목이다. 특히 제3차 조선교육령에서는 중일전쟁 이후 병참기지화 정책이 시행되면서 ‘국체명징’과 ‘내선일체’를 강조하며 대두된 ‘대동아 이데올로기’가 본격적으로 반영되었다. 따라서 일본을 중심으로 황국 신민화가 완성되어야 한다는 전제하에 내지인과 조선인을 구분하지 않고 ‘소학교-중학교(고등여학교)’의 단선 학제를 운영하도록 하였으며, 언어도 ‘국어’로 통일하여 조선어 말살정책을 실행하였다. ‘조선어 말살정책’은 1937년 이후 학교, 병영, 관공서, 사회 전반에 걸쳐 전국적으로 실행된 정책으로 이른바 ‘국어상용운동’이라는 이름으로 나타난다. 이를 반영한 제3차 조선교육령에서는 조선어 과목을 선택과목으로 바꾸어 사실상 폐지하였다. 이로써 1945년 광복이 오기까지 조선에서의 ‘나랏말’ 교육은 사라져 버렸다.

∷ 강동민 자료팀장

시민들의 의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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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국가보안법 폐지는 일제잔재 청산이다

 

원희복 <민족화해> 편집인(전 경향신문 부국장)

 

12월 1일 한국진보연대를 비롯, 137개 사회단체와 161명 인사가 “국가보안법 이제는 폐지해야 합니다”를 외쳤다. 이날 국회 앞에서 국가보안법 폐지를 촉구하는 청년학생 기자회견이 열렸고, 여타 많은
장소에서 국가보안법 폐지 행사를 가졌다. 이날 국가보안법 폐지 행사가 집중된 것은 국가보안법이 1948년 12월 1일 제정됐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과연 그럴까. 물론 대법전을 펼치면 나오는 국가보안법 제정날짜만보면 그렇다. 현행 법조문만으로 보면 그럴 수 있지만 역사적 맥락에서 보면 이는 ‘단견’이다. 문제는 이 ‘단견’이 국보법 운동의 의미와 실제 효과를 크게 반감시킨다는 것에 있다. 지금이라도 빨리 수정해야 한다는 측면에서 이 문제를 짚어본다. 일단 현재 사용하는 대법전을 접고, <민족문화대백과사전>을 보자. 보안법에 대해 “1907년
7월 24일(27일의 오류-편집자주) 집회와 결사·언론의 자유를 탄압하기 위해 일제가 대한제국 정부에게 제정, 반포하게 한 법률”이라고 명시하고 있다. 당시 분위기를 설명해 보자. 일제는 1905년 을사늑약으로 통감부를 설치해 대한제국의 외교권과 행정권을 행사했다. 일제는 1907년 헤이그 밀사 사건을 구실로 고종을 퇴위시키고 군대마저 해산시켰다. 이에 <대한매일신문>과 <황성신문>이 일제의 부당함을 지적하고, 조선 팔도에서 의병이 일어났다. 이에 당황한 일제는 이완용 내각을 강제해 법률 제1호(1907.7.24.)로 제정한 것이 바로 신문지법(新聞紙法)이다. 그리고 3일 후 일제는 자국의 치안경찰법을 본따 보안법(保安法)을 강제했다.(법률 제3호는 출판법) 그 주요 내용은 △사회의 안녕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경우 결사의 해산을 명할 수 있다 △경찰관은 사회의 안녕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경우 집회 또는 다중(多衆)의 운동 혹은 군집(群集)을 제한, 금지 또는 해산할 수 있다 △정치적으로 불온한 행동을 할 우려가 있는 자에 대해 그 거주지에서의 퇴거를 명할 수 있고, 동시에 특정 장소에 일정 기간 출입을 금지시킬 수 있다.
더 악독한 것은 처벌조항이다. 정치에 관하여 불온한 말이나 행동을 하고, 타인을 선동 또는 교사하고 치안을 방해하는 자에 대해서는 태형 50대 이상, 또는 10개월 이하의 금고, 2년 이하의 징역에 처할 수 있게 했다. 근대 사법제도를 도입한다는 명분으로 강제한 법에 태형이라는 전 근대적 처벌조항을 둔 것은 조선을 야만시한 행위다.
일제의 강압으로 만든 근대 법률 제1호가 조선인의 말을 틀어막는 신문지법이고, 법률 제2호가 사상의 자유를 옥죄는 보안법이다. 사실 언론의 자유(freedom of press)는 말할 자유(freedom of speech)에서 비롯된 것이며 말할 자유는 사상의 자유(freedom of thought)를 바탕으로 한다.
조선인의 말과 사상을 틀어막는 두 법이 필요했던 것은 조선병탄을 위해서였고, 일제는 이 법을 통해 매우 효율적으로 항일언론과 애국계몽운동, 의병활동을 탄압할 수 있었다. 이 보안법으로 대한자강회와 동우회 등 민족단체들이 해산되고, 많은 의병과 만세운동 가담자들이 억울하게 수감되거나 죽음을 당했다. 결국 일제는 1910년 조선병탄이라는 소기의 목적을 이뤄냈다. 일제는 1925년 치안유지법을 제정했다. 이 법은 일본 제국주의의 바탕인 일왕제에 대한 도전, 즉 국체를 수호하기 위한 법이다. 1917년 황제 차르가 무너지는 소련을 봤기 때문이다. 이 법은 일본공산당과 조선공산당은 물론 무고한 조선의 독립운동을 탄압하는데 활용됐다. 흔히 현재 국가보안법 기원을 이 법으로 삼는 사람이 있는데 구태여 이념이 짙게 개입된 이 법을 기원으로 삼을 필요가 있는가. 그보다 훨씬 앞서고 부담없이 전 국민의 호응을 받을 수 있는 보안법이 있는데 말이다.
일제는 한편으로 기성 언론을 통제하고 순치시켰다. 민족문제연구소가 지난 8월 ‘조선 동아 100년’을 기해 조선일보 방응모 사장과 동아일보 백관수 사장이 1937년 일제 경무국장 앞으로 쓴 서약서 ‘언문신문 지면쇄신요항’을 발굴 공개했다. 좀 길더라도 서약서 전문을 공개할 필요가 있다.

 

1. 황실기사는 정중히 지면 상단 중요한 장소에 오탈자 없이 할 것.
2. 황실 및 국가, 군기, 신사 등을 존중하고 국체명징, 국위선양, 연중행사 의식은 정중히 취급하고 크게 보도할 것. 가급적 그 사진을 실을 것.
3. 황실 및 국가적 경사에 대해 회사도 자발적 축하의 뜻을 보낼 것.
4. 외국 전보 등으로 제국의 불리를 보도하지 말 것.
5. 총독, 총감 기타 내외지의 현관귀빈의 동정은 성의를 가지고 보도할 것.
6. 총독의 유고, 관청의 발표사항 및 지사회의, 중추원회의 등 중요한 관청 회의는 빠짐없이 보도할 것.
7. 당국의 시정시설에 대해서는 민족적 편견을 제거하여 국가적 관점에서 보도하고 비판은 공명정대를 기할 것.
8. 사회주의자, 민족주의자 범죄에 관한 기사 및 국외 불령운동 기사를 과대하게 취급하거나 호의적 명칭을 쓰거나 상휼적 문자를 쓰지 말 것.
9. 소련의 선전적 통신을 호의적으로 등재하지 말 것.

10. 주의적 색채가 있는 논문, 소설 등을 배격할 것.
11. 농촌진흥, 자력갱생 등의 운동 및 이민노동자 알선 등의 사업을 성원하고 격려 고무하도록 노력할 것.
12. 천재사변 때는 관청의 구제 사업을 성원하고 결코 민심을 혹란하여 민중의기를 키우는 일이 없도록 할 것.
13. 함부로 조선민족의 궁핍을 곡설하고 민중생활의 비참한 상황을 나열하지 말 것.
14. 노동 소작 기타 쟁의에 관한 기사는 사안을 연구하여 공평한 보도를 하고 격화시키지 말 것.
15. 조선의 역사적 인물, 산악, 고분 등에 관한 기사나 기타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배일사상을 고조할 우려가 있는 것은 게재하지 말 것.
16. 내선인 간 충돌 기사는 취급을 신중히 하고 민족적 대립으로 나가지 않도록 할 것.
17. 존황정신을 취지로 대일본제국의 신문으로 임무를 다하도록 노력할 것.
18. 반국가적 또는 공산주의, 민족주의적 언론보도를 하지 말 것.

 

1980년대 전두환 정권의 보도지침을 능가할 정도로 꼼꼼하고, 조항 하나하나가 굴욕적 통제가 아닐 수 없다. 특히 조선 독립을 위한 민족주의자 혹은 사회주의자의 활동은 물론, 독립정신을 고양할 그 어떤 작은 싹도 용납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가득 담겨있다. 일제는 조선인이 말하고 생각할 수 있는 자유를 애당초 용납하지 않고, 독립운동 계열과 사회주의 계열을 이간시키는 작업에 언론을 활용했다.
1932년 윤봉길 의사의 의거를 ‘흉행’이라 보도한 조선일보의 보도태도를 보면 알 수 있다. 조선일보는 “소비에트 로서아의 명령에 따라 하르빈에서 적화운동을 하고 있는 사람”이라며 “적색테러 계획을 진행시켜 윤봉길로 하여금 이런 흉행을 하게 한 것”이라 보도했다. (조선일보 1932년 5월 8일자)
윤봉길 의거는 민족주의 임정세력(백범)에 의해 이뤄진 것은 당시 알 만한 사람은 다 알았다. 그래서 임정이 상해를 떠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윤봉길 의거가 러시아, 즉 사회주의 세력의 지시를 받았다고 쓴 것은 민족세력과 사회주의 세력을 이간질시키는 보도라고 할수 있다.
이것은 이른바 ‘빨갱이’ 논란으로 상징된다. 흔히 빨갱이의 기원을 비정규 무장세력인 파르티잔(partisan)에서 연유한 것으로 보아 해방, 즉 분단 이후로 판단하는 사람이 많다.(김득중, 빨갱이의 탄생, 2009) 하지만 필자는 이 견해에 동의하지 않는다. 앞서 보안법의 기원과, 조선총독부의 언문신문 지면쇄신요항에서 보듯이 일제는 사상과 이념통제를 조선병탄 수단으로 활용했다. 특히 1917년 러시아 혁명에서 적색은 깃발과 노래 등으로 사회주의 혹은 공산주의 상징색이 됐다. 일본에서 공산주의자를 붉은 색의 아카(赤)로 불렀다. 

 


일제의 강압으로 만든 근대 법률 제1호가 조선인의 말을 틀어막는 신문지법이고, 법률 제2호가 사
상의 자유를 옥죄는 보안법이다. 사실 언론의 자유(freedom of press)는 말할 자유(freedom of
speech)에서 비롯된 것이며 말할 자유는 사상의 자유(freedom of thought)를 바탕으로 한다.


 

일본은 일왕제를 수호하기 위해 1925년 치안유지법을 만들었고, 조선독립 세력을 이간질하는 수단으로 빨갱이를 사용했다.
우리 사회주의 독립운동가들도 붉은 색 종이에 소련의 <코뮤니스트>를 인쇄해 전국에 뿌렸다. 1932년 김단야를 비롯해 김형선, 김명시, 김찬 등은 5월 1일 ‘붉은 5·1절’(노동절)을 기해 붉은 색(혹은 푸른 색) 종이에 ‘일본 제국주의를 타도하라’ ‘조선의 절대적 노동자 농민의 정부를 수립하라’ ‘지주의 토지를 몰수해 농민에게 무상으로 분배하라’는 등의 삐라 수천 장을 만들어 뿌렸다. 그 붉은 색 삐라 그 말미에는 ‘조선공산당’이라는 문구를 새긴 것은 물론이다.(원희복, <한·중 항일혁명가 부부 김찬·도개손 평전> 2015) 따라서 일제는 독립운동가를 탄압하기 위해 ‘빨갱이’라는 비어를 만들었고, 이는 앞서 언문
신문 지면쇄신 요항에서 그대로 명시돼 있는 것이다. 1942년 이승만의 편지에는 “호놀룰루에서 얼마 전 이곳에 도착한 재미한족연합위원회의 전경무에 따르면 그(한길수)의 조직은 50명이 못되는 한국 ‘빨갱이’ 이상은 아니라고 합니다”라는 대목이 나온다. 해방 이전에도 보수세력이 공산주의 세력을 빨갱이라 비하했던 것이다.
2020년 문재인 대통령의 3·1절 기념사에서 “일제는 독립군을 ‘비적’으로, 독립운동가를 ‘사상범’으로 몰아 탄압했습니다. 여기서 ‘빨갱이’라는 말도 생겨났습니다. 사상범과 빨갱이는 공산주의자들에게만 적용되지 않습니다.
”라고 말했다. 이에 일부 보수언론은 ‘빨갱이라는 표현은 일제잔재가 아니다’라는 엉뚱한 주장을 했다. 이 역시 일제 잔재다운 보도태도라 할 수 있다. 
문제는 해방 후 당연히 폐기됐어야 할 이 보안법이 그대로 존속한 것이다. 미군정은 일제 강점기 법과 제도를 그대로 수용했다. 1945년 10월 9일 미군정은 법령 제11호를 발표했다. 이 법령 제11호는 일제의 정치범처벌법, 예비검속법 등 7개 법안만 폐지하는 것으로 보안법과 불온 문서 취체령 등 언론과 사상의 자유를 억압하는 일제 잔재는 그대로 존속시키는 조치였던 것이다.(내무부 치안국, <미군정법령집> 1956)이 보안법은 해방 후 진보, 혹은 좌파 언론과 단체를 탄압하는 수단으로 활용된 한 것은 물
론이다. 이런 가운데 제주 4·3, 대구 10·1 사건 등이 발생했으며 결국 남북 분단의 결정적 요인이 되고 말았다.
1948년 8월 15일 정부가 수립되고 모든 법이 새로 만들어지면서 보안법도 국가보안법이라고 이름만 바뀌고 다시 제정됐다. 흔히 국가보안법을 1948년 10월 여순사건을 기화로 제정됐다고 보는 사람이 적지 않다. 이는 이 법의 역사적 실제적 의미를 간과하고 ‘법전적’ 의미만 판 단한 것이다.
이 국가보안법이 제정되는 과정에서 이승만 대통령의 발언을 복기해 보자. 이승만 대통령은 1948년 11월 6일 제97차 국회본회의에 참석해 국가보안법 제정 필요성을 강조하며 “1945년 10월 이후로 친일파에 대해 제일 말 많이 한 것이 공산당 사람인줄 압니다. 군정에서 그들(친일파)을 몰아내고, 경찰에서 그들을 몰아내는 등 열렬히 요구하는 사람이 그 사람(공산당)입니다”라고 주장했다.(국회사무처, 1948 제97호, 802) 친일파 청산을 요구하는 세력은 공산당이라는 엉뚱한 프레임을 만든 것이다. 과거 많이 회자됐던 ‘말 많으면 공산당’이라는 말의 기원이 여기부터 시작된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입 닥치고 가만히 있으라, 그렇지 않으면 빨갱이로 몬다’는 무서운 발상이 바로 친일청산을 두고 벌어진 것이다.
이런 발상은 2013년 3월 13일 박근혜 청와대가 뉴라이트 인사와 오찬 모임에서 그대로 재연됐다. 이날 오찬에서 민족문제연구소가 만든 <백년전쟁>이라는 동영상에 대한 논의가 나왔다.
이인호 아산정책연구원장(후에 KBS이사장에 임명됐음)은 “이런 역사왜곡도 국가안보 차원에서 주의 깊게 봐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친일청산과 역사정의를 세우자는 것이 무슨 국가안보와 관련이 있는가. 이런 발상은 종북몰이를 통해 눈엣가시를 제거하겠다는 과거 이승만의 발상과 일치한다. 이모임 이후 종편 등을 동원한 민족문제연구소에 대한 비난은 현실화됐다. TV조선은 “<백년전쟁>은 김일성 대남 문화공작과 흡사하다”고 매도했다. 정확히 일제 잔재의 반복이고, 이승만적 발상이었다.
또 하나, 국가보안법을 제정한 제헌국회 국회법사위원장이 바로 백관수 전 동아일보 사장이다. 그는 1937년 앞서 언급한 일제 경무국장 앞으로 ‘언문신문 지면쇄신요항’이라는 굴욕적인 서약서를 쓴 당사자다. 이후 국가보안법은 정적(진보당 당수 조봉암)을 제거하는 수단으로, 군사 쿠데타의 정당성을 미국에 인정받으려(민족일보 조용수 사장 법살), 장기 집권을 위한 정치 분위기 조성용(인혁당 사건 등), 조직과 개인의 승진용 등으로 활용됐다. 이 과정에서 무수히 많은 사람이 억울하게 희생된 것은 이미 많은 과거사 사건 재심을 통해 확인됐다.
결론적으로 국가보안법의 기원은 분단이나 이념 문제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일제의 조선 침략을 위한 수단으로 활용된 일제 잔재일 뿐이다. 이를 정통성이 약한 권위주의 정권이 정치적으로 변질해 활용한 것일 뿐이다.
일제가 조선의 독립정신을 말살하고, 독립운동 세력을 이간시키려 만든 보안법이 지금 분단상황에 여전히 위력을 발휘하고 있다. 국가보안법은 같은 민족끼리 서로 알지도, 만나지도 못하게 하고 오히려 증오하게 만드는 반통일의 핵심 악법으로 작용하고 있다. 국가보안법 청산은 이념이나 분단의 문제가 아닌, 친일청산 작업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수, 2020/12/30-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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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소설, 정치를 통매하다> 감상문

김유 광동지부장

 

이 책은 그야말로 눈에서 비늘이 떨어지는 책이다. 책을 읽으면서 새삼 지나간 시절의 열정들이 떠올랐다. 그리고 지식인의 책무에 대해 다시 한 번 내가 할 일이 무엇인가를 일깨워 준다. 독서의 목적이 그 책을 읽는 독자들로 하여금 시대 상황을 바르게 인식하게 하고, 그 시대에 맞추어 무엇을 어떻게 하는 것이 바르고 옳은 일인지 생각하게 한다는 것은 글 쓰는 작자의 목적이라면 이 책은 대단히 성공한 책이다.“
에라, 늘그막에 객기 한번쯤 부려 보고자 추려 본 것들이 이 평론집이 되었다”고 하지만 이것은 “객기”가 아니다, “정론집”이다. 책은 정치를 질타하는 장용학의 소설들로부터 시작한다. 그리고 우리 문학에 커다란 획을 그은 대가들의 작품들을 소개한다. 그러나 잊지 않고 손석춘 씨 등 새로운 작가의 소개도 빠지지 않는다. 최인훈의 <광장>과 <회색인>, <총독의 소리>, <주석의 소리>를 이야기하는가 하면 그와의 개인적 친분도 에세이처럼 잔잔하게 풀어놓는다. 그가 좀 더 살아서 6·25 때 납북되었
던 이광수와 반민특위의 김상덕 위원장과 아마도(?) 같은 차 안에서 만나 이야기를 했었다면 어떤 얘기가 오갔을까?
남정현 작가를 언급할 때는 식민지의 정의와 함께 그의 대표작 <분지>와 <허허 선생> 연작을 빼놓지 않는다. 남정현의 반외세 의식과 민족의식의 각성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강한 존재로 우리 자신의 운명까지도 한 손에 잡고 흔들어 왔던 미국, 그리고 그 우산 밑에서 기생하여 맘껏 달리는 출세지향주의자들을 같이 풍자한다. 과연 우리에게는 민족이 우선인가, 아니면 이념이 우선인가… 그러면서도 선생의 산문집 <엄마, 아 우리 엄마>를 보면서 웃다가 흘리는 눈물이 우리를 숙연하게 한다. 실록적 요소가 강한 이병주의 소설 <그해 5월>은 소설을 쓴 작가의 변으로 “허상이 정립되지 않도록 후세의 사가들을 위해 구체적인 기록을 정리해 볼 작정”이라는 뜻을 분명히 하였다. 그리고 일본군 하급장교라는 말을 빈번하게 사용한다. 일본육군사관학교를 나온 사람이 안중근의 나라, 김구의 나라를 접수하였던 것이다. 그
리고 7·4공동성명을 맞이하여서는 남북이 같이하는 분단을 고착시키는 쇼라고 단정을 한다. 거
기에는 북한도 같은 쇼를 할 필요성이 있었을 것이다. 이 소설 즉, <그해 5월>을 임헌영 씨는 평론가적인 안목으로 풀어 쓰는데 “독재란 한 나라에 애국자는 한 사람밖에 없도록 만드는 공포 분위기에 다름아니다”라는 금언으로도 이 책은 훌륭하다. 씨는 역사와 민족이라는 화두를 평생지고 살아오면서 이 소설을 분석함에 있어 70년대 문학인 사건이나 1979년 시국사건으로 구속 수감되었던 기억이 더욱 새로웠을 것이다. 조정래의 <아리랑>은 바로 그 역사와 민족, 그리고 역사와 개인의 운명이 어떻게 얽히고설
키며 내려왔었는지를 우리에게 보여준다. 구한말부터 해방이 될 때까지 50년의 민족사를 기록한 것이다. 여기서 그는 독립군의 역사와 친일파 형성의 유래를 보여준다 그리고 불란서 비시정권의 치하에서 어떻게 대독협력의 민족반역자들이 생겼는지 열광, 인종(忍從) 및 사욕의 세 가지를 든다. 이 세 가지 유형으로 친일파의 발생을 추적한다. 역사와 운명의 변증법, 세월은 흐르고 역사는 기록된다. 그리고 개개의 인간에게 소설은 그에 걸맞는 삶의 궤적을 마련해 주는 것이다.
나는 요즈음 만주의 독립투사 양세봉 장군을 읽고 있는데 책에서 말하는 그의 삶이란 오로지 항일무장투쟁 하나로만 귀결되는 결말에서는 소설보다는 학술논문에 가까운 성격들임에 한층 외로움을 느낀다. 앞으로 나올 문학작품에 거는 기대가 남다른 것도 이 때문이라고도 하겠다. 선생의 이 책을 읽고 나서는 바로 한국에 연락하여 조정래의 아리랑 한 질(12권)을 다 주문하도록 하였다.
문학은 인간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로 개인의 내면적 질서를 잡아주고 사회적 통합을 이루게했다. 마르지 않는 문학의 역사 그것은 독자들에게 규범을 보여주며 현재의 상황을 이야기하며, 삶이 아무리 어렵고 힘들더라도 그것을 헤쳐 나가는 희망의 원리를 보여준다. 곧 문학이 이루는 변혁은 아주 작은 것이라도 타락한 시대에 타락한 방법이 아닌 올바른 삶을 바탕으로 고상한 싸움을 하는 것임을 이 책 곧 “한국소설, 정치를 통매하다”는 말하고 있는 것이다.

화, 2021/03/02- 2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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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

 

근현대사기념관 독립민주시민학교,
<문학과 예술로 보는 4·19–잔인한 사월, 위대한 혁명> 특별강좌 진행

 

근현대사기념관은 사월혁명 60주년을 맞아 <문학과 예술로 보는 4·19-잔인한 사월, 위대한 혁명>의 주제로 독립민주시민학교 특별강좌를 진행하고 있다. 이번 강좌는 해방 이후 민중의 힘으로 독재권력을 무너뜨린 4월혁명을 문화예술인들이 어떠한 창작활동으로 승화시켜 혁명정신을 이어 나가고자 했는지를 다루고 있다.
강좌는 9월 5일에서 9월 20일까지 매주 토, 일요일에 현장 수강과 온라인 수강을 병행할 계획이었지만 코로나-19 확산에 따른 사회적 거리두기 강화 방침에 따라 온라인 수강으로 변경되었다. 실제 강의를 촬영한 뒤 영상 편집을 마친 결과물을 근현대사기념관과 연구소 홈페이지에 올려 많은 시민들이 온라인으로 쉽게 수강할 수 있게 하였다.
첫 번째 강의는 문학평론가인 민족문제연구소 임헌영 소장이 <이승만 독재정권과 문화예술계의 대응-한국문학에서 본 4·19혁명>의 주제로 강의를 진행하였다. 해방 전후 많은 작가들의 작품을 통해 이승만에 대한 문학적 평가와 함께 혁명문학 소개를 통해서 세계혁명문학의 특징과 문학에서의 4월혁명의 성과를 알 수 있는 강의였다.
2강 <껍데기는 가라! 시인의 절규-4·19혁명과 한국문학>은 한양대학교 유성호 교수가 강의하였다. 이 강의를 통해서 신동엽, 김수영 등의 시인들의 작품에 4월혁명이 어떻게 반영되었는가를 이해할 수 있었다.
또한 3강 <혁명의 기록-사월의 노래>는 성공회대학교 이준희 교수가, 4강 <잘 돼 갑니다-우상의 시대>는 한상언영화연구소 한상언 소장이 맡았다. 대중문화 속에 4월혁명이 어떻게 나타났는가를 알 수 있는 강의였다. 이 외에도 5강 서울대학교 방민호 교수의 <피의 행진-대열 속에서>, 6강 숙명여자대학교 권성우 교수의 <성찰, 자유, 배신의 미학-4·19가 문학에 미친 영향과 파장> 강의도 온라인으로 수강할 수 있다.
독립민주시민학교 <문학과 예술로 보는 4·19-잔인한 사월, 위대한 혁명> 강좌는 근현대사기념관의 홈페이지 외에도 민족문제연구소와 서울시 강북구의 홈페이지에서 2020년 10월 18일까지 누구나 수강할 수 있다. 근현대사기념관은 11월에도 독립민주시민학교 시민강좌를 계획하여 많은 시민들에게 양질
의 역사교육 기회를 제공할 예정이다.

• 홍정희 근현대사기념관 학예연구원

목, 2020/09/24- 2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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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원회원 마당]

학교현장을 다시 떠나며

이민우 운영위원장

 

1981년 5월 21일 오후 8시경 인천제일교회에서 한완상 교수의 강연회가 끝나고 청년학생 500여 명이 스크럼을 짜고 ‘전두환 물러가라’ ‘노동3권 보장하라’ ‘광주민중항쟁 진실규명하라’ 외치며 동인천역으로 향했다. 당시 나는 인천 인성여고 교사이며 인천기독청년협의회 회장이었다. 1981년 5월 18일에 이미 5.18 민중항쟁에 대한 진실규명과 전두환정권의 사죄 등을 담은 성명서를 발표한 때였다.
나는 그날 저녁에 인천 중부경찰서에 잡혀갔다. 당시 동인천역 근처에 있었던 광야서점에 내 이름 앞으로 와 있던 유인물 300여 장의 출처를 대라며 경찰은 같이 연행되었던 다른 후배들과 나를 엄청 두들겨 고문하였다.
이렇게 되어 나는 결국 집시법 위반으로 징역 10월을 받고 만기 출소하고 인성여고에서 해직되어 교단을 떠났다. 내가 경찰서에서 두들겨 맞고 있는 때에 나중에 출소한 후에 알았지만 당시 학생회장이었던 학생은 학교 교무실의 내 자리를 지키며 내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다고 하여 참으로 눈물을 흘리기도 하였다.
출소 후에는 노동운동에 관심이 많아 당시 탄압받던 민주노조였던 콘트롤 데이터 노동조합 탄압저지대책위 간사로 또 원풍모방대책위 간사로 여기저기를 누비다가 결국 생산 노동현장으로 들어가 직접 함께 투쟁하자고 하여 가방공장에서, 트랜스 공장에서 1년여를 일하고 인천도시산업선교회 간사로 들어가 10년을 노동현장에 대한 상담과 투쟁에 대한 지원활동을 하였다. 1980년대 노동현장은 너무나도 열악한 상태였다. 그래서 1987년 7·8월 노동자 대투쟁이 일어나게 되었다. 나도 그 한복판에서 3개월여를 집에도 못가고 치열하게 현장과 함께하였다. 참으로 인생에서 가장 뜨거웠던 시절이었다.
이 세상이 변혁될 것이라 생각하였다. 그러나 역사의 물줄기를 완전히 바꾸지는 못하고 절차적 민주주의를 이루는 것으로 그나마 만족할 수밖에 없는 한계적인 변화를 가져온 시기였다. 인천에 선인학원 재단이 있었다. 당시 부패사학의 대명사였다. 이 재단을 실제로 만들고 운영한 사람은 그 유명한 백인엽이었다. 조그만 사립재단을 인수하여 선인재단으로 바꾸고 그 산하에 유치원 1곳, 초등학교 1곳, 중고등학교 10곳, 전문대학 1곳, 대학교 1곳 도합 14개의 학교를 거느린 거대 사학재단이었다.
박정희 정권의 비호를 받아 그야말로 사학재벌이 된 것이다. 여기에서 온갖 비리가 발생하여 인천교육계의 암덩어리가 되었다. 졸업장을 팔아먹고, 그야말로 학교 부지를 헐값에 사기 위하여 온갖 편법을 동원하고, 학교 건물을 짓는데도 학생의 교육환경은 최악으로 9층 건물에 화장실은 1층에 달랑 한 개뿐이었다. 이렇듯 이루 말할 수 없는 악조건의 교육환경에 학생들을 수용하고 학생들에게 노동을 시키기도 하고, 교사를 옛날의 하인을 부리 듯 하니 최악의 교육조건에 내몰린 학생들과 교사, 교수 들이 학원민주화를 외치며, 학원 부패척결을 외치며 들고 일어나자 지역사회에서 선인학원 정상화대책위원회를 만들어 이들의 싸움을 지원하였다. 나도 여기에 함께하여 결국에는 선인학원이 해체되어 14개의 학교가 공립화되고 인천대학교는 부패사학의 대학에서 국립대학교으로 탈바꿈하였다.
인천대학교의 정상화를 위하여 나는 이때에 교직원으로 들어가 5년여를 일하고 1999년 김대중정부에서 민주화운동 관련 교사 복직 때에 마지막으로 복직하였다. 그로부터 20여 년을 학교현장에서 평교사로 복무하고 정년을 맞이하여 다시 학교현장을 떠나게 되니 참으로 인생은 길고도 짧은 것 같다.
누구나 자기 인생을 이야기하면 책 몇 권 쓸 정도로 많은 굴곡을 겪으며 살아간다. 정년을 하면서 나를 돌아보니 참으로 사연과 굴곡 많은 인생을 살았고 시대정신에 부응하여 나의 삶을 살아왔다고 자부하나 한편으로는 많은 부분이 부족한 삶이어서 아쉬움도 크게 남는다. 앞으로 우리 민족적 과제인 평화와 통일, 아직도 미완인 친일 청산을 위해 씨름하며 살아가야겠다고 생각한다.

금, 2020/09/25- 0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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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안익태의 표절과 변절

 

김정희 한국예술종합학교 전통예술원 강사1

1. 들어가며

 

1942년 9월 18일 독일 베를린에서 열린 ‘만주국 건국 10주년 축하 음악회’에서 안익태가 자작곡인 교향환상곡 <만주국>을 직접 지휘하였다.

 

안익태 애국가2의 표절문제가 최초로 제기된 것은 1964년, 제3회 서울 국제음악제에 참석하기 위해 내한한 불가리아계 미국인 지휘자 피터니콜로프(Петър Николов)에 의해서이다.
그는 〈애국가〉가 불가리아 노래 〈오! 도브루잔스키 크라이(오 도브루자의 땅이여, О, Добруджански край)〉와 유사하다고 주장했다. 이후 불가리아 태생의 작곡가이자 UCLA 교수 보리스 크레만리에프가 〈오! 도브루잔스키 크라이〉의 악보를 보내오면서 표절의 근거를 제시하였다. 중앙대 이유선 교수는 저서 <한국양악백년사>에서 이를 한 번 더 언급하며 새 국가 제정의 필요성을 역설한 바 있다. 〈애국가〉의 표절에 관한 시비는 <코리아 타임스>의 음악평론가 제임스 웨이드(James Wade)와 전 연세대학교 음악대학 작곡과 교수 공석준에 의해 전개되었으며, 그 뒤에도 전 중앙대학교 교수 노동은에 의해 논의된 바 있다.
본고에서는 〈애국가〉와 〈오! 도브루잔스키 크라이〉의 유사성에 대해 선율형을 중심으로 한 세밀한 분석을 통해 표절 사실을 확인할 것이며, 〈애국가〉 작곡 이후 안익태가 전개한 자기표절의 일련의 과정이 어떻게 변절과 위장의 수단이 되었는지에 대해 살펴보겠다.


1 국가만들기시민모임 사무총장 겸 연구위원장
2 이하 <애국가>로 약칭함.

 

 

 

안익태의 대한국애국가(大韓國愛國歌) 자필악보. 1949년 4월 18일 사보(寫譜)

 

2. 안익태의 표절

애국가의 작곡시점은 1935년 11월, 미국 필라델피아이며, 같은 해 12월 28일 초연되었다. 즉 불가리아 방문 전에 〈애국가〉가 작곡된 점은 사실일 것이나, 공석준 스스로가 독보(讀譜)에 의한 참고 여부는 알 수 없다고 한 바 있다. 꼭 불가리아를 직접 방문해야만 불가리아의 노래를 접할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안익태는 〈애국가〉 작곡을 위해 40여 개국의 국가(國歌)를 수집하였으며, 세계 각국의 민요, 가곡, 성가곡들을 모아 기초자료로 삼았다 한다. 이러한 과정에서 〈오! 도브루잔스키 크라이〉를 접했을 개연성은 부정하기 어려우며, 따라서 두곡의 선율을 상세히 비교하여 표절 여부를 판단해야 할 것이다.
아래 악보의 윗단은 〈애국가〉이고, 아랫단은 〈오! 도브루잔스키 크라이〉이다. 굵은 선은 선율의 흐름이고, 위아래를 연결한 가는 선 중 초록색은 일치하는 음, 노란색 선과 원은 변주된 음이다.

 

 

셋째 단 이외의 부분에서 선율의 흐름이 유사하다는 점이 한눈에 드러난다. 〈애국가〉의 출현음 총 57개 중 맥락과 음정이 일치하는 음은 모두 33개(58%)이며, 변주된 음까지 포함하면 그 개수는 모두 41개(72%)이다. 즉 선율의 맥락과 음정의 일치도를 기준으로 하면 두 곡의 유사도는 58~72%이다. 이처럼 높은 유사도를 표절이 아니라면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애국가〉에서 노랫말과 선율이 부합하지 않는 부분들 또한 표절로 인한 결과로 추정된다. 예컨대 아래 악보 첫마디 ‘동해물과’에서 ‘해’가 악구의 정점에 있으며, 음가도 가장 길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이 음절에 악센트가 들어가게 된다. 따라서 ‘동’과 ‘해’는 연결되지 못하고 분리되어 ‘동/해물과’로 들리며, 결과적으로 노랫말이 제대로 전달되지 못한다. 제2마디의 ‘백두산이’는 더 심각하여, 한반도에서 가장 높으며 민족의 기상을 상징하는 백두산의 형상이 아래로 거꾸러진, 계곡과 같은 선율형으로 되어있다.

곡풍(曲風)에 있어서도 대체로 처량하여 기백을 느끼기 어렵고, 장엄하고 활기찬 면이 부족하며, 애국적 감격이 표현되지 못하였으며, 정체성이 부족하다는 점이 계속 지적되어왔다. 이는 〈오 도브루잔스키 크라이〉의 선율에 기존에 있던 〈애국가〉의 노랫말을 붙이면서 초래된 결과로 분석할 수 있다. 원래 약박인 선율을 강박으로 시작함으로써 ‘동/해물과’가 되었고, 원 선율을 변주하면서 백두산이 거꾸러진 형상이 되었으며, 원래 활기찬 행진곡 풍의 곡을 보통 빠르기보다 느리게 바꾸면서 활기와 기백이 감소된 것이다. 서양의 노래가 원곡이므로 한국의 문화적 정체성을 전혀 갖추지 못한 점도 문제이다. 결국 〈애국가〉가 〈오! 도브루잔스키 크라이〉의 선율을 결과적으로 상당 부분 차용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3. 안익태의 자기표절

안익태가 자신의 작품을 연주한 일시와 장소를 정리한 것3


3 이해영, 안익태 케이스, 37-38쪽의 표 참조.

 

 

안익태의 일본식 이름 ‘에키타이 안’(EKI TAI AHN)이 처음 등장한 것은 1938년 7월, 헝가리의 외트뵈쉬(Eötvös) 기숙학원 서류이다. 그는 이를 한국식 이름과 혼용했으며, 해방 이후인 1952년까지도 스페인에서 일본식 이름을 썼음이 확인된다.
〈에텐라쿠〉는 에키타이 안이 1938년에 작곡한 것으로 알려졌으며, 유럽에서 가장 많이 연주한 레퍼토리로, 일본의 아악 〈에텐라쿠(越天樂)〉의 주제 선율을 그대로 활용한 곡이다. 이 곡은 1940년에는 〈야상곡과 에텐라쿠〉라는 이름으로, 1960년 6월 15일에는 〈강천성악(降天聲樂)〉이라는 이름으로 연주된다. 1962년 1월 한국 초연시 언론에는 세종대왕이 지은 아악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1940년에 작곡했다고 보도된다. 〈에텐라쿠〉의 원 악보와 음원은 존재하지 않으나, 1941년 헝가리 월드 뉴스에 등장하는 1분 정도의 편집 영상을 KBS 음원의 6분 01초 이후와 비교하면 동일곡이라는 점이 이해영에 의해 밝혀진 바 있다. 즉 〈에텐라쿠〉는 〈강천성악〉으로 자기표절되었다.
1938년에 초연된 〈코리아 판타지〉는 1940년 10월 19일 불가리아 소피아에서 〈교쿠토(極東)〉가 연주되면서부터 자취를 감춘다. 〈교쿠토〉에는 〈애국가〉가 포함된 4악장의 합창 부분이 생략되고, 몽고여행의 기억을 담은 ‘음악이야기’로 대체된다. 그것은 불가리아 노래를 반 이상 닮은 〈애국가> 선율을 듣는다면 불가리아 청중들이 이를 눈치채지 못했을 리가 없기 때문이지 않았겠는가.
1943년 1월 3일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에텐라쿠〉와 함께 연주된 〈토아〉(Toa) 역시 〈교쿠토〉의 다른 이름으로, 일본어이며 ‘동아’(東亞)를 뜻한다. 이는 다시 1942년 9월 18일 독일 베를린에서 열린 만주국 건국 10주년 경축 음악회에서 〈만주국〉이라는 곡명으로 연주되며, 마지막 악장에 만주국을 찬양하고 추축국의 결속을 다짐하는 합창이 들어간다.
바로 이 4악장 합창 부분 대본을 에하라 고이치가 썼는데, 그는 만주국 건국 이후 하얼빈특별시 부시장을 역임하고, 독일이 만주국을 승인한 1938년부터 주 베를린 만주국 공사관 참사관으로 부임한 인물이며, 주독 일본 첩보기관(IS)의 총책이다. 에키타이 안은 에하라 고이치의 사저에서 1941년 말부터 1944년 4월 초까지 기거하며 그의 지원을 받아 활동하였으며, 그 대가로 일본제국과 나치독일에 선전 활동 용역을 제공하였다.
〈만주국〉은 1944년판 〈한국 환상곡〉으로 다시 재구성되어서, 1946년 3월 15일 바르셀로나 리세오 극장에서 연주된다. 이때 마지막 악장에는 다시 자신이 작곡한 애국가를 사용하였다. 즉 〈한국 환상곡(코리아 판타지)〉, 〈교쿠토〉, 〈토아〉, 〈만주국〉은 대동소이한 곡이며, 최초에 합창으로 표현된 ‘애국’의 자리는 ‘몽고’로, 또 ‘만주’로 바뀌었다가 다시 ‘애국’으로 돌아왔다. 만주국을 찬양하고 추축국 3국의 동맹을 다짐하던 그 선율로 다시 ‘애국’을 노래한 것이다. 결국 안익태의 대표작들은 모두 자기표절의 결과로 생성된 이명동곡(異名同曲)이었다.

 

4. 나가며
〈올드 랭 사인〉의 선율을 애국가로 부르는 것에 대한 수치심 때문에 작곡한 〈애국가〉가 어찌하여 결과적으로 불가리아 노래를 차용한 ‘표절’이 되었을까? ‘하나님’은 어찌하여 그로 하여금 독자적이면서 민족 정체성을 가진 선율을 쓰게 하지 않았을까? 그러한 〈애국가〉가 과연 ‘애국’에 도움이 될 수 있을까?
에키타이 안에게 있어 표절과 자기표절은 일신의 영달을 위한 변절과 위장의 수단이었다. 앞서 살펴보았듯 〈애국가〉가 〈오! 도브루잔스키 크라이〉의 선율을 결과적으로 표절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만일 의도적 표절이 아니라 할지라도 다른 나라의 노래와 이처럼 닮은 선율을 〈애국가〉로 부른다는 것은 그 자체로 낯 뜨거운 일이다. 국민 모두가 오랫동안 불러왔다고 해서 그 부끄러움이 해소되는 것은 아니다.
대한민국의 국가라면 적어도 우리나라의 건국이념, 철학, 역사, 자부심, 비전 등이 담기고, 모두가 함께 부르면서 정서적 공감대 형성뿐 아니라 인류 전체의 평화와 평등까지 고취시킬 수있는 좀 더 진취적이고 기상이 있는 선율이어야 할 것이다. 우리나라의 문화적 정체성이 담긴 전통장단과 악조라야 함은 물론이다.
일반에 널리 알려진 주제, 또는 자신이 특정 작품에서 썼던 주제를 다시 활용하여 창작하는 것은 여러 작곡가들이 즐겨 쓰는 창작기법이다. 그러나 잘 알려지지 않은 선율을 그 출처를 밝히지 않고 주제로 활용한다든가, 전반적으로 동일한 곡을 이름만 바꾸어 다시 발표하는 행위는 표절과 자기표절에 해당한다. 표절과 자기표절은 ‘창작’을 하는 모든 이들에게 금기시되는 행위이며, 가장 기본적인 ‘양심’의 문제이며, 법적, 도의적 책임을 져야 하는 사안이다. 〈오! 도브루잔스키 크라이〉가 오래 전에 만들어져서 저작권 관련 법적 문제가 발생하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결과적 표절임을 확인한 이상 공식적 행사에서 이를 부르기를 강요하거나 권장하는 일은 앞으로는 없어져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제야말로 우리의 정체성과 시대정신을 모두 반영한, 정통성과 품격을 갖춘, 대한민국의 법정 국가(國歌)를 만들기 위한 논의를 시작하여야 할 때이다.

목, 2020/09/24- 2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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