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빼앗긴 들, 빼앗긴 나랏말쌈 – 보통학교 조선어와 한문독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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빼앗긴 들, 빼앗긴 나랏말쌈 – 보통학교 조선어와 한문독본

익명 (미확인) | 목, 2017/10/19- 17:29

미리보는 식민지역사박물관 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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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총독부가 편찬한 1학년용 <보통학교 조선어와 한문독본>(1915) 표지와 본문>

 

10월 9일은 ‘훈민정음訓民正音’을 창제하여 세상에 펴낸 것을 기념하고 한글의 우수성을 기리기 위한 날, 바로 한글날이다. 올해는 훈민정음을 반포한(세종 28년, 1446년) 지 571년이 되는 해이다. 이번에 소개할 자료는 태극기가 아닌 일장기를 ‘국기’로, 그것도 ‘국어’의 지위를 빼앗긴 ‘한글’로 배우는 참담한 시대를 보여주는, 1915년 조선총독부가 발행한 제1학년용 ????보통학교조선어와한문독본普通學校朝鮮語及漢文讀本????교과서이다.교과서는한사회의교육이념을반영할뿐아니라그 사회의 구조 및 지식 발전 정도를 반영한다.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교과서는 1895년 학부에서 편찬한 ????국민소학독본????으로알려져있다.이 시기한성사범학교령,소학교령을공포하고한성사범학교 규칙과 소학교 규칙을 만들었다. 일제는 1908년에 ‘교과용도서 검정규정’을 공포하여 우리의 민족정신이 담긴 교과서들을 판매 금지시키는 한편, 1911년 「조선교육령」을 공포하여 ‘국어’라는 명칭 대신에 ‘조선어’를 사용하게 하고, 대부분의 교과서를 일본어로 기술하게 했다. 이로써 ‘조선어’와 ‘한문’ 과목 이외의 대부분의 교과서는 일본어로 편찬되었다.
「조선교육령」은 조선인을 일제의 충성스러운 제국신민으로 양성하는 것을 목적으로 했다. 일제강점기 조선인의 교육은 바로 이 「조선교육령」에 의거하여 이루어졌고, 조선총독이 모든 사항을 관할했다. 1911년 9월부터 시행된 제1차 조선교육령에서 우리말이 ‘조선어’로 일본어가 ‘국어’로 바뀌었으며, 일장기를 ‘국기’로 가르치게 되었다. 또한 일제는 조선을 식민통치하면서 이른바 ‘교육칙어’를 근거로 식민화 교육을 본격화하였다. 그 과정에서 총독부가 편찬한 ????조선어독본????과 ????국어[일어]독본????은 식민정책을 알리고 시행하는 교본과 같은 역할을 수행했다.
교과서의 내용은 ‘철자, 어휘, 절과 문장 학습, 글 읽기’ 등으로 이전 시기에 비해 좀 더 체계적인 모습을 띠게 되나, 「보통학교 조선어와 한문 독본」에서 볼 수 있듯이 우리 민족의 주체성이나 애국적인 내용은 모두 빠지게 된다. 그 대신에 주로 상식과 관련된 설명문, 우화 등의 이야기, 서간문, 속담, 노동, 수필, 문학 작품, 예절 등이 주류를 이루게 된다.
총 120쪽에 84과(課)로 구성된 「보통학교 조선어와 한문 독본」은 기본적인 한글체계인 모음을 제1과로 시작하여 자음과 단어 연습, 짧은 문장, 수와 관련된 글자를 ‘조선어’와 ‘한문’을 혼용하여 설명했다. 가족관계, 신체, 시계 등 간단한 단어를 시작으로 예절, 국기, ‘천황’ 등 ‘예절과 도덕’을 강조했는데, 이것은 식민치하의 특수한 상황에서 강요된 규율과 지침이었다. “황국 신민다운 자질과 품성을 구유(具有)케 해야 한다.”는 일제의 교육목표처럼, 도덕과 예절은 식민지민으로서 학생들이 갖추어야 할 덕목이다. 특히 제3차 조선교육령에서는 중일전쟁 이후 병참기지화 정책이 시행되면서 ‘국체명징’과 ‘내선일체’를 강조하며 대두된 ‘대동아 이데올로기’가 본격적으로 반영되었다. 따라서 일본을 중심으로 황국 신민화가 완성되어야 한다는 전제하에 내지인과 조선인을 구분하지 않고 ‘소학교-중학교(고등여학교)’의 단선 학제를 운영하도록 하였으며, 언어도 ‘국어’로 통일하여 조선어 말살정책을 실행하였다. ‘조선어 말살정책’은 1937년 이후 학교, 병영, 관공서, 사회 전반에 걸쳐 전국적으로 실행된 정책으로 이른바 ‘국어상용운동’이라는 이름으로 나타난다. 이를 반영한 제3차 조선교육령에서는 조선어 과목을 선택과목으로 바꾸어 사실상 폐지하였다. 이로써 1945년 광복이 오기까지 조선에서의 ‘나랏말’ 교육은 사라져 버렸다.

∷ 강동민 자료팀장

시민들의 의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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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

사월혁명 60주년 기념 특별전 <잔인한 사월, 위대한 혁명> 개막

 

 

사월혁명 60주년 기념 특별전 〈잔인한 사월, 위대한 혁명〉이 9월 25일 개막하였다. 올해는 역사적인 사월혁명이 일어난 지 60주년 되는 해이다. 이번 전시는 예기치 않았던 코로나-19 상황으로 근현대사기념관이 장기적으로 휴관하여 오랜기간 미루어졌지만 민주혁명의 서막을 알리는 1960년 4월을 기억하기 위하여 가을의 시작과 함께 전시를 개막하였다.
근현대사기념관이 주최하고 민족문제연구소가 주관하는 이번 특별전은 모두 4부로 구성되어 있다. 전시는 4월혁명이 일어나기 전 이승만정부의 독재와 부정부패, 4월혁명의 진행과정, 5·16군사쿠데타로 인한 혁명의 좌절, 그리고 문화예술인들이 민중의 힘으로 독재권력을 무너뜨린 4월혁명을 어떠한 창작활동으로 승화시켰는지 보여주고 있다.
제1부 〈우상의 시대-‘국부’가 된 독재자〉에서는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밀어붙여 1948년 초대대통령으로 선출된 이승만과 자유당 독재정권이 권력을 남용하고 부정부패를 일삼으며 어떻게 이승만을 ‘국부’로 우상화 하였는지 보여준다. 당시 이승만 우상화의 도구가 된 〈대한뉴스〉 영상들과 다양한 사료들은 독재정권을 노골화한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제2부 〈구호로 보는 사월혁명〉은 “학원에 자유를 달라”고 외치던 2·28대구학생의거와 “3·15선거는 불법이다” “정부통령선거 다시 하라”고 외치던 1차 마산의거를 지나 “이승만 정부는 물러가라” 등의 정권타도 구호와 함께 4월혁명의 반독재투쟁을 보여준다. 그리고 4월혁명 이후 “한미경제협정 결사반대”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 만나자 판문점에서” 등 사회변혁 운동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를 연표의 시대순에 따라 보여주고 있다. 또한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소장하고 있는 4월혁명 당시의 현장감 있는 모습을 담은 사진들도 함께 만나 볼 수 있다.
제3부 〈사월 그날, 이후〉에서는 1960년 4월 19일 ‘피의 화요일’이 26일 이승만의 하야로 ‘승리의 화요일’로 바뀐 이후 민중들의 혁명정신을 되살리려 한 변혁의 의지를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7·29총선으로 집권한 민주당이 4월혁명의 이념을 제대로 구현하지 못하자 대두한 혁명세력의 저항과 변혁운동 등이 5·16군사쿠데타 세력의 철저한 탄압으로 ‘미완의 혁명’이 되는 과정을 확인할 수 있다. 유물로는 4월혁명 이후 만들어진 많은 단체들이 어떠한 목소리를 내려하였는지 보여주는 격문이 실물자료로 전시되어 있다.
마지막으로 제4부 〈문학과 예술로 보는 4·19〉에서는 4월혁명이 문학과 예술에 어떠한 역사의식을 불어넣어 주었는지 볼 수 있는 공간이다. 4월혁명이 미완으로 끝나고 혁명정신이 퇴색하는 상황에서 자기반성과 사회에 대한 비판의식을 조지훈, 김수영, 신동엽 등 시인의 노래를 통해 함께 생각할 수 있다. 또한 영화와 대중가요에서 4월혁명 전후 어떠한 변화가 나타났는지를 당시의 음반과 출판물 등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특히 북한에서 남한의 4월혁명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었는지 볼 수 있는 북한자료들도 전시되어 있다.
이번 특별전시는 근현대사기념관 2층 기획전시실에서 11월 15일까지 사전예약을 통해 관람할 수 있으며 VR전시로도 제작 중이어서 10월 말부터 근현대사기념관과 민족문제연구소 홈페이지에서도 만나볼 수 있다. 〈잔인한 사월, 위대한 혁명〉 특별전을 통해 60년 전 앞선 세대가 피흘리며 쟁취하고자 했던 자유, 민주, 평등의 가치가 무엇인지 마음속에 새겨보는 뜻깊은시간이 되기를 바란다.

• 홍정희 근현대사기념관 학예연구원

수, 2020/11/11- 0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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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원회원 마당]

빛나는 삶

김원근 전 교사

 

숨죽여 그늘을 걸을지라도
누군가에게 흙탕물 튕기지 않았다면
그 또한 빛나는 삶 아니겠는가

쓰린 이별 뒤 어딘가 둥지 틀고 살지라도
어쩌지 못하는 그리움으로 긴긴 겨울밤 뒤척이고 있다면
그 또한 빛나는 삶 아니겠는가

울고 싶어 어딘가를 홀로 떠돌지라도
부모님의 소소한 안부를 잊지 않고 이따금씩 떠올린다면
그 또한 빛나는 삶 아니겠는가

보잘 것 없고 든든한 배경이 없을지라도
누군가의 작은 햇살 한 줌으로 미소에 젖어 있다면
그 또한 빛나는 삶 아니겠는가

무엇보다도
우리는 그 누군가에 비스듬히 기대어
또는 이따금 비스듬히 떠받치기도 하며
저마다의 초저녁 어스름 길을 가고 있는 거 아닌가

화, 2021/03/02-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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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상중계]

4월혁명 60주년 기념 특별전 – 잔인한 사월 위대한 혁명

 

올해는 4월혁명이 일어난 지 60년이 되는 뜻깊은 해이다. 이를 기념하여 근현대사기념관과 민족문제연구소는 4월혁명이 일어난 원인과 전개, 5·16쿠데타로 인한 좌절, 4월혁명이 한국문학과 예술에 미친 영향 등 4월혁명을 다각적으로 재조명하는 전시회를 마련했다. 원래 4월 19일에 개막하려 했으나 코로나 19 사태로 인해 9월 25일에야 겨우 전시회를 열게 되었다. 전시회 구성은 제1부 우상의 시대 : ‘국부’가 된 독재자, 제2부 구호로 보는 사월혁명, 제3부 사월 그날 이후, 제4부 문학과 예술로 보는 4·19로 이루어져 있으며 8개의 패널과 이승만 관련 〈대한뉴스〉 영상, 신동엽 시인, 여중생이 죽기 전 남긴 편지 등 4개 영상, 그리고 4월혁명 관련 서적과 당시 격문, 음반, 영화포스터 등 다양한 실물자료를 전시하고 있다. 전시 자료는 민족문제연구소가 소장한 자료가 다수이나 민족일보기념사업회, 아이엠피터
tv, 연세대학교박물관, 옛가요사랑모임 유정천리, 한상언영화연구소로부터 귀중한 자료의 전시 협찬을 받았다. ‘잔인한 사월, 위대한 혁명’ 전시회 지상중계에서는 각 주제별 전시회 현장 사진과 주요 실물
자료를 중점적으로 소개하고자 한다.

 

 

<대통령에 리승만 박사 부통령에 이기붕 선생을 추대하며> 자유당, 1956.4. 근현대사기념관 소장
대통령후보 이승만박사 선거사무장 이재학, 부통령후보 이기붕선생 선거사무장 박영출, 자유당중앙위원 일동 명의의 자유당 제3대 정부통령선거 후보 추대 홍보물이다. 사사오입 개헌으로 장기집권의 길을 연 자유당은 1956년 3월 5일 전당대회를 열고 이승만과 이기붕을 5·15 정부통령 선거 후보로 지명했다.

① <4·19> 학생운동기 – 아혼록 1960.2.28.~4.28. 민족문제연구소 소장(이하 동일) 1960년 2월 28일부터 4월 28일까지 4월혁명에 참가한 학생들의 활동을 기록하였다.

② <피어린 4월의 증언> 1960. 부산 거주 대학생의 일기로 1960년 1월부터 12월까지 대학생들의 활동을 중심으로 부산지역의 4월혁명 양상을 전해준다.

③ <영한대역-4월의 영웅들>, 일신사, 1960. ‘세계의 눈에 비친-한국 자유혁명의 산 기록’이란 부제가 말해주듯, 뉴욕타임즈 워싱턴포스트 등 영미권 유수 언론이 이승만의 독재와 4월혁명에 대한 분석과 전망을 다룬 사설 칼럼 보도 등을 영한대역으로 실었다.

④ <혁명재판 공판기> 1960.8. 혁명재판 법정 녹음을 녹취한 공판기록. 부정선거관리·모의·지령사건, 정치깡패사건, 발포명령자사건, 장면부통령저격사건, 전성천선거법위반사건 순으로 편제되어 있다.

<격! 참의원 의원의 망동을 규탄한다> 사단법인 사월혁명단, 1961. 민족문제연구소 소장

격! 삼천만은 사월 혁명 영령의 명복을 빌자> 월요회, 1961.4. 민족문제연구소 소장

① 〈오발탄〉 1961년 4월 13일 개봉 이범선이 쓴 동명의 단편소설을 유현목이 연출한 영화이다. 전후 한국사회가 직면하고 있는 여러 문제들을 어두운 화면과 우울한 정조를 통해 보여준 리얼리즘 영화의 수작이다. 사월혁명이 가져온 대표적 영화로 5·16쿠데타 이후 한때 상영 중지되었다.

② 〈삼등과장〉 1961년 5월 4일 개봉 삼등과장의 아들인 영구는 사월혁명을 주도한 대학생 계층으로 자부심이 있으나 놀고먹기를 좋아하며 여자친구에게 푸념만 하는 젊은이로 그려진다. 이러한 설정은 사월혁명이 ‘실패’로 자인되고 있던 1961년 초의 사회 분위기를 드러내준다.

③ 〈잘돼갑니다〉 1968년 작, 1989년 9월 9일 개봉 경무대 이발사의 눈을 통해 자유당 정권의 말로를 묘사한 영화이다. 한운사 작 동명의 인기 라디오 드라마를 1968년 영화로 만들었다. 개봉을 앞둔 상황에서 삼선개헌을 추진하던 박정희 정권에 의해 상영금지 되었다. 민주화 이후인 1989년에 가서야 해금되었다.

① 〈남원 땅에 잠들었네〉 유성기음반, 도미도레코드, 1960. 옛가요사랑모임 유정천리 소장(이하 동일)
② 〈사월의 깃발〉 유성기음반, 미도파레코드, 1960.
③ 〈아 4·19〉 유성기음반, 미도파레코드, 1960.

④ 〈너를 찾아 서울 왔다〉 수록 <송운선 작곡집>, 세광출판사, 1961. 송운선은 송성운이라는 이름을 함께 사용하며 1950년대 말부터 작품을 발표했으며, 혁명 관련 대중가요로 〈어머니는 울지 않으리〉, 〈못 잊을 4·19〉, 〈광명의 4·19〉 등을 만들었다. 〈너를 찾아 서울 왔다〉는 혁명 1주년을 앞두고 기획된 작품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⑤ 〈광명의 4·19〉 수록 노래책, 세광출판사, 1961.
⑥ 〈어머니는 울지 않으리〉 유성기음반, 아세아레코드, 1960.

 

① <항쟁의 불길>, 조선작가동맹출판사, 1960. 한상언영화연구소 소장(이하 동일) 4월혁명을 소재로 한 정론, 시, 소설, 희곡을 실은 북한의 작품집
② <조선> 1960년 제5호, 조선화보사. 4월혁명 소식을 사진과 함께 비중 있게 보도한 북한의 대외선전용 화보

③ <남조선 학생운동>, 조선로동당출판사, 1964. 4월혁명을 비롯해 해방 후 남한에서 일어났던 각종 학생운동을 소개한 북한 도서

④ 〈항쟁의 서곡〉 영화 스틸사진, 조선예술영화제작소 출품, 창춘(長春)영화제작소 더빙, 중국영화배급사 배급, 1960. 4월혁명 직후 북한에서 제작한 영화 〈항쟁의 서곡〉 스틸 사진. 강홍식이 연출을 맡았으며 심영, 김연실 등 유명 월북영화인들이 출연했다.

수, 2020/11/11- 0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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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 스타의 추억 한 토막(1)

임헌영 소장•문학평론가

 

이 글은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기관지 ????기억과 전망???? 43호(2021)에 실린 글로 세 차례에 걸쳐 연재한다. 임헌영 소장은 1974년 ‘문인간첩단 사건’으로 갖은 고초를 겪었고 1979년에는 남민전 사건으로 투옥되기도 했다. 이 글에는 문인간첩단 사건 당시 ‘빙고호텔’(육군보안사 서빙고분실)에서의 끔찍한 고문의 과정, 서대문 귀소에서의 생활, 재판 진행과정, 석방 후 요시찰 인물로 살아야 했던 이야기 등이 담겼다.― 편집자주

 

1. 박정희와 같은 뱀띠의 다른 운명

분단 한국은 별들의 전쟁이래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육군사관학교를 나온 진짜 별들과 5·16쿠데타를 비판하며 민주화와 통일을 염원하다가 투옥당했던 국립 서대문대학(서대문구 현저동의 서울교도소)을 나온 전과자라는 별들의 전쟁 말이다. 교도소에서는 전과 1범을 별 하나, 둘은 투 스타로 불렀는데 원수급인 5성도 적잖으니 아마 별들의 숫자로 보면 국방부의 별보다는 법무부의별들이 훨씬 많을 것이다. 두 별들의 차이는 엄청나게 많으나 가장 중요한 점은 국방부의 별들은 한 번 달면 평생을 보장받는 신분적인 우대로 성우회란 막강한 단체가 있으나, 법무부의 별들은 천차만별인 데다 분파가 많다는 점이다. 

1974년 3월 2일 문인간첩단 사건으로 법정에 선 이호철ㆍ임헌영ㆍ김우종ㆍ장백일ㆍ정을병 씨의 모습(오른쪽부터)

 

군부독재란 바로 이런 다양한 별들을 과잉 배출하는 별을 찍어내는 공장인지라, 그래서 총총 하늘에는 별들도 많고 국민들 가슴엔 근심만 많은 세월이었다. 박정희와 내가 닮은 건 같은 뱀띠라는 건데, 세속적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그의 사주는 정사년(丁巳年) 출생으로 신해월(辛亥月)에다 경신일(庚申日)에 무인시(戊寅時)에 태어난 것으로 소문나있다. 사주에서 흔히 말하듯이 인신사해(寅申巳亥)가 다 들어있는 사맹격(四孟格)으로 고난을 헤치고 야망을 이룰 수 있는 천운이라고들 하는데, 이것까지가 가짜라는 설도 파다하다. 그런데 내 사주에는 그 사맹 중 셋은 갖췄지만 ‘신’이 빠진 채라, 복권 숫자가 앞자리에서는 잘 맞아 돌아가다가 마지막이 틀어져 버린 격이라 천을귀인(天乙貴人)이 2개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게 형충파해(刑沖破害)를 당한다는 풀이다. 결국 내가 발산하는 빛은 매우 강하나 구름이 끼어 있어 짱짱하게 빛을 내기 어렵다는 것이다. 각종 운명철학이나 점을 나는 별로 믿지 않지만 그냥 심심풀이로 해본 소리니 웃어넘기시기 바란다.
그러기에 믿거나 말거나지만, 별들로 따진다면 박정희나 나나 둘 다 투 스타로 동급이었다는 게 내 소견이다. 그가 5·16 때까지 달았던 별은 투 스타였고 그 뒤에 단 건 말짱 헛것이란 뜻이다. 전두환 역시 12·12반란 때는 투 스타였으나 그 뒤 제 멋대로 별을 더 달았으니 박정희의 판박이다. 세계의 모든 쿠데타는 다 권력욕에 불타는 갱단들의 난장판이라 일단 성공하고 나면 자신의 어깨에다 별들의 숫자를 올렸다. 그렇지 않고 쿠데타를 혁명으로 승화시킨 유일한 사례가 가말 압델 나세르로, 그는 거사 때의 대령 그대로 대통령이 되어 제3세계 국제정치사에 회오리를 일으켰다. 20세기 정치인 중 내가 좋아하는 순번에 들어가는 인물이다.
박정희와 전두환이 쿠데타 후에 자기 손으로 갖다 붙이기 이전에는 같은 투 스타였기에 감히 투 스타였던 내가 당당히 그들과 맞장 뜰 수 있는 게 아닌가. 이렇게 농 삼아 지껄이지만 정작 그들의 별과 나의 별은 천문학적으로 그 좌표도가 완전히 달라 내 인생은 아무리 말로 수식을 해도 험난하기만 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여기서는 지면 관계상 초라한 내 인생살이 전체를 다 털어놓을 수는 없기에 두 별들의 사연 중 첫 번째 별을 달게 된 경위만 간략하게 정리해 보려 한다.

 

2. 빙고동 호텔

나에게 첫 스타를 달아준 곳은 ‘빙고동 호텔’이었고 때는 1974년 1월 긴급조치가 갓 발동된 하수상하던 시절이었다. 이때 나와 함께 원 스타를 달았던 동기생으로는 작가 이호철, 정을병, 평론가 김우종과 장백일 5인조로, 세칭 ‘문인 간첩단 사건’ ‘공범’들이다. 이 호텔의 호적명은 육군보안사령부로 군부통치 시절에 스타를 많이 배출했던 남산(중앙정보부)과 남영동(치안본부 대공분실)과 함께 3대 유명 재야 사관학교 중 하나였다. 이 트로이카 명문 중 빙고동 호텔은 일단 입교하기만 하면 팔다리가 부러지거나 어딘가에 탈이 난다고 할 정도로 성한 몸으로는 나오지 못하기로 악명이 자자했다.

이 호텔의 이력서는 찬연하고 그 명칭 또한 화류계 여성처럼 휘황찬란하다. 미 군정청 국방사령부 산하에 설치됐던 정보과(1945.11)가 남조선국방경비대 정보과(1946.1), 육군본부 정보국 특별조사대(1948.11), 방첩대(1949.10)란 명칭을 거쳐 육군본부 직할 특무부대(特務部隊, CIC, 1950.10)로 신분을 바꿨다. 그동안 이 기구가 이승만 독재체제를 위하여 비판세력에게 어떤 만행을 저질렀던가는 구태여 여기서 읊을 필요는 없을 것이다. 사월혁명 후 육군 방첩부대로 개칭(1960.7)됐으나 5·16쿠데타 세력은 육군 보안사령부로 개칭(1968. 9), 이어 육군뿐이 아니라 해공군을 망라하여 국군보안사령부로 확대 개편(1977.9), 시종 박정희 군사정권의 버팀목으로 중앙정보부와 충성 경쟁을 전개한 쌍두마차였다. 그러니 내가 입교했던 1974년은 아직도 ‘육군보안사령부’ 시절이었다.
남산 3호 터널이나 반포대교가 없던 시절이라 서울역 – 삼각지에서 이태원으로 좌회전해서 언덕길을 오르면 그 이태원 입구(지금의 녹사평역. 당시에는 콜트장군 동상이 서있었다), 그 부근에서 우회전하여 내리막길(지금의 반포대교길, 초라한 도로)을 달리노라면 좌우가 다 미군부대 철조망만 있었다. 길은 좁고 왕래 차는 거의 없었다. 지금의 크라운 호텔을 지나면 이내 반포대교로 이어지는데, 그 직전에 동작대교로 빠지는 오른쪽 길로 들어서면 이내 왼쪽으로 약간 경사진 곳에 삼엄한 검문대가 나타난다. 지금은 민주기행 코스로 공개되어 있지만 그땐 그 장소 자체가 국가기밀이어서 그냥 ‘빙고동 호텔’이라고 불렀다.
1974년은 정초부터 어수선했다. 1월 7일 ‘문인 61인 개헌지지 성명’(유신헌법 철폐)이 발표되자 재빠르게 이튿날 1.8긴급조치가 선포되더니, 10일에는 관할 경찰서에서 우리 집을 다녀갔고 이틀 후 또 방문, 그 뒤 다시 전화로 꼬치꼬치 캐물었다.
이미 이호철은 연행당했다는 소식이고, 함석헌 천관우 안병무 문동환 김동길 법정 계훈제 제씨를 연행, 심문 중이며, 장준하 백기완은 긴급조치 1호위반으로 구속했다는 흉흉한 때였다. 보안사에서 다녀갔다기에 일단 몇일간 피신했다가 그럴 필요가 없다고 판단하곤 귀가, 17일 밤에 아주 신사적으로 연행됐다. 그들은 항상 한 30분이면 끝난다고 하지만 그걸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나를 가운데 앉힌 채 양쪽에서 조이면서 검은 지프차는 퇴계로의 모 호텔(현 세종호텔 맞은 편쯤)에 들렸다. 으슥한 방으로 들어가자 마왕이라도 나올 듯한 어두컴컴하고 큰 방 입구에 책상과 걸상이 있는데 앉으라고 강박했다. 잠시 후 내가 태어난 뒤 처음 본 가장 덩치가 큰 중후한, <쿠오바디스>의 우루서스 같은 남성이 내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미남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추남도 아닌 이 거대한 존재 앞에서 나는 왜 그리도 초라하게 느껴졌던 걸까. 아무리 뜯어봐도 우리와 같은 피를 가진 혈통 속에서도 저런 골조의 인간이 있었던가를 의심케 하는 모양새다. 나는 그를 바라보는 것만으로 그냥 얼어붙었다. 반나치 영화에서 레지스탕스들이 잡혀가면 첫 신에서 비슷한 위협적인 장면을 보여줬던 기억이 떠올랐다. 우선 덩치에서 아무리 대담한 레지스탕스도 야코가 팍 죽어버린다. 뭐라 한 미디 묻자 마음에 안 들면 마치 기중기가 작은 바위를 들어 팽개치듯이 던져버리는 장면. 그런데 그는 아무 말도 않고 그냥 나를 한참 동안 응시했다. 바로 마주보는 것이 아니라 고개를 약간 숙인 채 눈을 치켜뜨고는 꼬나보기에 나는 점점 더 얼어붙었다. 그렇게 아마 한 10분정도 지나자 “데려 가!”라고 딱 한 마디를 천둥처럼 울리게 내뱉었다. 그러자 나를 연행해 왔던 장년 신사들은 어디론가 사라져버렸고, 대학생처럼 보이는 청년 사병들이 “예” 하더니 나를 양쪽에서 옥죄며 방을 나섰다. 그 뒤를 몇이서 따르며 “본대로 간다, 본대로 간다” 하면서 신이 났다. 겁주기의 제1단계였고, 본대란 육군보안사령부 대공처 심문소, 속칭 ‘빙고동 호텔’이었다.

 

재일동포 잡지 한양 1962년 6월호

 

1층 어느 방, 카펫이 안 깔린 맨바닥에다 벽은 머리를 쳐다 박아도 상처 나지 않도록 특수장치를 했으며, 간이침대만한 쪽에 있고, 화장실은 복도 밖에 있었다. 허리띠부터 소지품 전부를 압수, 의학박사가 간단한 건강진단(얼마나 때려도 괜찮은지를 검토) 등등을 마치고는 인정심문이 끝나면 바로 고문이 시작된다. ‘네 죄를 네가 알렷다’라는 식이다. 무조건 털어놓으라면서 매질이다. 뭘 털어 놓으라는지도 모른 채 비명 지르기에 혼비백산할 즈음에야 의자에 앉으라더니 그간 살아온 이야기를 다 쓰라는 명령이다. 바로 라이프 스토리다. A4 용지로 한 10매 정도로 얽어서 건네주면 그걸 대충 읽고는 엉터리라며 확 찢어버리고는 더 자세히 쓰라면서 그제서야 큰 인심이라도 쓰듯이 일본 여행 간 적 없느냐, 그걸 자세히 써 넣으라고 일러준다. 그 힌트를 받고나자 아, 바로 재일동포들이 내는 월간 종합 교양지 <한양(漢陽)>을 트집 잡으려는구나 하고 뜬구름을 잡고는 얼핏 통박을 굴려보니 그거라면 자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유신통치 독재체제라 한들 죄가 될 것 같지 않았다.
1962년에 창간한 이 잡지는 재일동포들이 주축으로 내는 것으로 그동안 한국 내 유명 문사들(박종화 백낙준 백철 이해랑 모윤숙 김동리 조연현 정비석 조경희 유주현 등)이 거의 망라된 필진이 참여했던 데다 한국 보급 총책으로 박정희와 개인적으로 아주 친숙한 구상 시인이 맡았던 터라 어떤 명분으로도 나 같은 피라미가 얽혀들 것 같지는 않았다. 국회도서관에도 비치될 정도로 전혀 불법이 아니었다. 내 라이프 스토리는 무려 20매로 늘어났으나 그들은 짜증을 내며 찢어 쓰레기통에 처박으며, “이 새끼 안 되겠구먼. 군복으로 갈아 입혀!” 하더니 진짜 그런다. 매질의 예고편이었다. 가끔은 “이 새끼 엘리베이터 태워야 하나”라고도 해서 뭔 뜻인지 몰랐는데, 친절하게 설명도 해준다. 나중 들은 바로는 엘리베이터에 태워서 땅 밑 몇 백 미터로 하강시켜 죽여 시신도 없애버린다는 위협이었다. 실제로 죽이진 않고 그냥 속임수로 땅 밑으로 깊이깊이 내려가는 것처럼 느끼게 해서 어느 지점에서는 문이 열리면서 갑자기 고문 담당자들이 몰려들어 매타작을 하고는 다시 집어넣어 내려가다 보면 또 문이 열려 다른 식의 고문을 행하는 것으로 빙고동 호텔에서 가장 끔찍한 고문으로 자랑하는 메뉴였다. 실은 몇 백 미터를 내려가는 게 아니라 엘리베이터의 조작으로 그런착각을 일으키게 한다는 것이었다.
우리 사건 총책을 맡은 ‘강 전무’(한 사건 때마다 그 성과 직함이 바뀐다. 5공 때 민정당 국회의원 이상재)는 이 방 저 방 다니며 고문을 독려했다. 여러 고통 중 바닥에 꿇어앉힌 채 날카로운 구둣발을 옆 날로 세워 바로 무릎 위를 세차게 걷어차는 것인데, 이미 숙달된 그 발길질은 치명적이라 차라리 매를 맞는 게 훨씬 낫다고 할 정도로 며칠간 절뚝거렸다. 젊었을 땐 몰랐는데 늙어가면서 그 부분은 지금도 흐리거나 비가 내리면 시큰거린다. 뺨 때리기는 예사고 몸통 뻗기, 꿇어앉히기, 팬츠 차림 등등은 그들에게 오락이었다. 고약한 자는 아예 발가벗겨 세워두곤 나체를 감상하는데 내 풀죽은 남성 심볼이 너무나 부끄러웠다. 심문할 땐 어디선가 희미하게, 그러나 분명히 알아차릴 수 있도록 ‘아아아아’ 하는 신음소리가 들렸다.
‘당신도 저럴 수 있다’는 음향 효과를 배경에 깔고 심문을 진행하는 기법이었다. 오륙 명이 한 조가 되어 그 중 한 명은 내 맞은편 의자에 앉고, 나머지는 나를 병풍처럼 둘러싼 채 심문자의 말을 큰소리로 반복하거나 윽박지르고 나머지는 “이 새끼가 아직도 정신 못 차리는군!”이라든가 “뭐 이런 놈이 다 있어!”라는 추임새를 수시로 넣어서 단 한 순간도 내가 말할 틈새를 주지 않고 “….했지!?”라고 다그치면 “예”란 대답만 나오도록 유도했다. 그렇게 한참동안 매타작을 하고는 지금까지 말했던 그대로 적으라며 백지와 볼펜을 주고는 사라진 자리에 대학생 징집자들로 이뤄진 사병들이 감시하는 가운데서 나는 손목이 시릴 정도로 ‘대하소설’(내 자서전) 집필을 몇 번이고 고쳐 썼다. 심문과 고문이 거듭될수록 점점 길어져 100매 전후를 넘나들었다.

 

육군보안사 서빙고분실

 

요지는 ‘북괴의 간첩’들이 내는 잡지인 <한양>지에 글을 써서 원고료를 받았고, 일본 여행 중 그 잡지의 발행인이나 편집인으로부터 대접과 선물을 받았으며, 그들에게 국가기밀(원고료가 너무 싸다, 잡지마다 고료 액수가 다르다, 한국 문인들의 근황 등등)을 누설했으니 우리도 ‘간첩’이라는 주장이었다. 그들이 북한 공작원이라는 가정 아래서 엮어낸 데다 그들이 간첩임을 우리가 알고서도 그런 행위를 저질렀다는 논리였다. 세상에! ‘나 간첩이요’라고 하는 경우가 어디 있으며, 그런말을 않는데도 그들이 간첩임을 무슨 재주로 우리가 알 수 있단 말인가. 나중에 보니 개헌서명을 한 이호철과 나는 간첩이고 나머지 셋은 그냥 반공법 위반으로 휘몰아갔다. 징집당해온 근무병들은 옆에서 거의 지켜봤기에 요원들이 자리를 비운 사이에 “망해라!”라고 소리 지르며 노골적으로 나를 동정하면서 필요한 것 있으면 연락해 줄 터니 부탁하라고 동정어린 표정을 지었다. 고마운 한편 이 젊은 것들도 앞잡이가 되었나 하는 의구심이 솟아 뜨악했는데, 며칠 간 지내면서 보니 그게 진심이었다. 어느 수사관은 지나다가 들러 천장의 텔레비전과 녹음장치를 가리키며 조심하란 몸짓과 함께 종이에다 “반공법, 문제가 많다”고 써서 보여주곤 잘게 종이를 찢어 휴지통에 버리곤 했다. 나중 그는 자기 아내에게 안동사범학교 출신 친구가 있어 여러 이야기를 들었다고 살갑게 대해 줬다. 이쯤 되니 곧 풀려나겠구나 낙관했는데 며칠 사이에 슬그머니 분위기가 얼어붙더니 그간 정들었던 사법경찰관이 바뀌었다.

 

3. 분단 한국과 서독, 그리고 타이완

“젊은 사람이 매로 다스렸으면 이제 늙은이가 슬슬 엮어서 징역을 보내야지”라며 본격적인 서류작성에 들어갔다. 그런데 뭔가 뜻대로 안되자 사법경찰관이 또 바뀌어 무척 경직된 분위기로 표변하기에 아하, 기어이 징역을 보낼 작정이구나 싶었다. 왜 이렇게 변했을까. 나중에 들은 이야기를 종합해 보면 각료회의에서 문공부장관(윤주영, 당시의 명칭)이 자신에게 사전 통보도 없이 군 관련 기관에서 문인들을 연행해 간 사실을 문제시하여 풀릴 듯 했지만 보안사는 이를 기정사실화하려고 확실한 범죄로 몰아갔으며, 여기에다 예술단체 모 간부(시인)가 은근히 이를 지지해 줬고, 정치권 역시 민주화운동을 억압코자 삼엄한 분위기를 조성할 필요가 있었던 터라 3박자가 잘 맞아 떨어져 버렸다는 것이었다. 대단히 유명한 모 여류문인이 육영수에게 은근히 이 사건의 부당성을 진언하자 도리어 확실한 증거가 있다는 반론만 강조하더라는 뒷이야기도 있다. 보안사는 이 심문 및 재판 기간 중 가족들의 대사회적인 구원활동을 막고자 계속 다방에 다섯 구속자의 아내를 불러모아 발을 묶어두곤 했음을 나중에서야 알게 되었다.
날이 갈수록 이제 고문자들이나 심문자들과도 말문이 터져서 온갖 이야기도 나눌 처지가 되었다. 필시 그들 자신도 이 간첩 조작이 무리임을 알았기 때문에 나사를 느슨하게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심문관 중 한 무표정한 분은 월남한 진짜 간첩 출신으로 눈빛이 매섭고 과묵하면서도 어딘가 공포가 느껴졌는데, 한쪽 손 무지가 뭉그러져 있었다. 나중 알게 된 바로는 체포당해 고문을 받다가 그렇게 된 것이라 했다. 그 사실을 알고부터는 왠지 연민의 정이 갔다. 어느 눈이 쌓인 날, 한 호의적인 심문관이 나에게 답답하니 잠시 시원한 바람이나 쏘이라며 사병에게 건물 옆 뜰로 산책을 시켜주게 했다. 마침 거기에 바로 그 월남 간첩이 우두망찰 쪼그리고 앉아 담배를 피우며 연기를 하염없이 허공으로 날리고 있었다. 나는 그 순간 그의 표정을 잊을 수가 없다. 그 허망함! 그는 대체 무슨 생각을 할까? 그의 착잡한 심경과 뇌리의 흐름에는 어떤 회한이 서려 있을까. 북녘의 고향과 부모와 어렸을 적의 동무들, 남녘에 와서 얻게 된 처자식들, 자신이 믿었던 ‘인민공화국의 이상’과 남녘의 풍요로운 ‘미제의 식민지로서의 미끼인 달콤한 물질적인 유혹의 삶’의 괴리가 주는 번민, 민족, 역사, 진리, 정의, 그리고 국가, 대체 그런 게 뭐란 말인가. 그는 나에게 가끔씩 “이 사람이!”라는 협박성 말을 내뱉으며 눈을 부라렸지만 눈 덮인 땅에 쪼그
리고 앉아 담배 연기를 뿜어내는 그 순간을 보고서 나보다 더 처량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그나 나나 다 강대국에 빌붙어 자기 국민을 괴롭히는 독재세력들 때문에 이런 고통을 당한 게 아닌가 하는 동병상련 같은 것이었다. 이런 나의 속셈을 그도 읽었는지 그 뒤부터 나를 보는 그의 시선도 약간 달라진 듯 했다. 기계론적으로 적용하는 잣대인 전향자 운운이나, 왜 살아남아 그런 반동적인 행위를 저지르면서까지 치욕스럽게 지내느냐, 어서 자살이라도 해라, 라는 식의 당위론적인 테제만이 정당할까. 물론 이런 내 생각은 나중 두 번째 별을 달고 징역을 살았던 대구교도소의 비전향 장기수들의 고통 앞에서는 여지없이 허물어졌지만 적어도 빙고동 호텔의 눈 덮인 뜰에서만은 잠시 보살처럼 내 마음이 너그러워졌다.
홀연히 엔도 슈사쿠의 가톨릭 순교를 다룬 20세기 최고의 걸작 <침묵>(1966)이 떠올랐다. 원제는 <양지의 향기(日向の匂い)>였으나 편집자의 제안으로 <침묵>이 되었다. 일본에서 기독교 탄압에 대한 잔혹성은 가히 세계 최악이었다. 우리나라가 기독교도에게 자행했던 고문의 야만성은 일본에 비하면 양반이었다. 야마 하이리 고문(山入拷問)은 화산인 운젠(雲仙) 온천에 데려가 뜨거운 물 퍼붓기, 뜨거운 바위 위에 세워두기, 입 막고 열탕에 처박기 등이었고, 아나츠리(穴吊り)는 볏짚으로 몸을 꽁꽁 묶어 거꾸로 매달아 머리를 땅구덩이에다 넣어 귀에다 바늘구멍만한 상처를 내어 출혈하도록 해서 며칠 동안 그 고통을 느끼도록 했다. 피가 똑똑 덜어지는 소릴 들으며 서서히 죽도록 하는 것이다. 파도가 들이치는 해변의 기둥에 매달아 그대로 숨이 멎을 때까지 두기도 했다. 그 고통을 못 이겨 배교하겠다면 말로만 되는 게 아니라 예수의 십자가상을 새긴 동판을 더러운 발로 밟고 지나가도록 하는 후미에(踏絵)를 시켰다. 일본 농부들은 그런 고통의 고문 중에 죽어갔고 살아남자면 후미에를 여러 사람이 보는 앞에서 감행해야만 되었다.
서양 선교사들은 이런 고문은 이겨낼 수 있었으나 자신을 따랐던 신자 농부들을 바로 눈앞에서 살해하는 걸 차마 견딜 수 없었다. 버젓이 후미에를 했건만 하나씩 죽이기에 항의하자 관리들은 이 농부를 살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오로지 선교사인 당신이 직접 후미에를 하는 것밖에 없다고 윽박질렀다. 차라리 자신을 얼른 죽여 달라고 했으나 그럴 수 없다, 반드시 후미에를 해야만 한다는 강박이었다. 자신의 고통 때문이 아니라 신도들의 생명을 구하자면 결국 배교할 수밖에 달리 길이 없다. 그런 고뇌의 순간에 하나님은 침묵만 하고 있다. 바로 그 순간, “고난의 순간에 하나님은 어디 계신가?”라는 자문 앞에서 그는 예수의 음성을 듣는다.

 

밟아도 좋다. 너 앞의 그 발의 아픔을, 내가 제일 잘 알고 있다. 그 아픔을 알기 때문에 내가 이 세상
에 태어나서, 십자가를 지게 되었다(踏むがよい。お前のその足の痛(いた)みを、私がいちばん
よく知っている。その痛みを分かつために私はこの世に生まれ、十字架を背(せお)ったの
だから, Trample! Trample! It is to be trampled on by you that I am here.)

 

이런 환청도 들렸다. “나는 침묵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너와 함께 괴로워하고 있다. / 약한 것이 강한 것보다 더 고통스럽다고, 누가 말했던가(私は沈黙していたのではない。お前たちと共に苦しんでいたのだ. ” “弱いものが強いものよりも苦しまなかったと、誰が言えるのか?)” 이래서 주인공 로드리고는 후미에를 해서 농부들을 살려냈고 자신도 생명을 부지했다. 그러나 섬나라 관료들의 잔혹성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로드리고로 하여금 순교로 죽은 한 농민의 아내에게 장가를 들게 하여, 일본을 위해 서양문물을 번역, 소개하도록 강박했다. 그의 사생활 일체는 감시 하에서 십자가를 상징하는 어떤 것도 가까이에 두지 못하게 막았다. 그러다가 후배 선교사들이 오면 그들을 배교시키도록 설득작전에 나섰다.

기독교 신자도 아닌 내가 이 소설을 중시한 것은 인간의 신념과 현실적인 괴리를 어떻게 하면 조화롭게 병립시킬 수 있을까 라는 인간존재의 근본을 추구하기 위해서였다. 일본은 이런 잔혹성을 바탕 삼아 제국주의로 중무장하여 우리나라를 침탈했다. 식민지시기에 독립운동가들에게 가했던 잔혹성의 뿌리는 섬나라의 편협한 ‘부시도(武士道)’이며, 그 연장선이 기독교도에 대한 탄압이었고, 그 유산이 점령지에 내린 탄압이었음을 나는 느꼈다. 특히 공산주의자들에게 가했던 그들의 악랄한 전향 강요는 이 기독교 배교시키기와 너무나 닮았다. 이걸 그대로 전수받은 게 8·15 이후 친일세력들이 지배했던 권력의 대행자였던 정보기관이었음을 연상하는 데는 통박을 그리 많이 굴리지 않아도 될 것이다.
전향자의 운명은 아마 두꺼운 책으로도 모자랄 지경일 만큼 한국 근현대사의 비화로 흥미진진하다. 멀리 갈 것도 없이 1970년대에 민주화운동권에 투신했던 왕년의 열렬한 투사 출신들 중 고무신을 거꾸로 신은 인사들의 행적만 추적해도 어디 소설 <침묵>에 그칠손가.
북에서 월남해 오면 반드시 북한 비난 대중강연에 동원하여 반공캠페인을 벌리기 일쑤다. 꼭 그 길밖에 없을까? 아니다. 동독의 작가 우베 욘존은 작품 출간이 불가능한 데다 직장도 보장 못 받자 서독으로 갔다. 기자회견에서 그는 끝내 ‘망명‘이란 단어를 피하고 “10년 동안만 사용했던 국적을 반환하고 서베를린 당해지 관리의 허가를 얻어 이사”했다고 주장했다.
<순애보>의 작가 박계주는 장편 <여수(旅愁)>(1961)에서 동베를린에서 서베를린으로의 피난민을 어떻게 다루는가를 자상하게 소개해준다. 위생검사 후 심문 내용은 성명과 연령 및 가족, 탈출하게 된 동기, 동독에서의 직업과 생활상태, 희망하는 직업과 살고 싶은 지역 등으로 5~10분이면 끝난다는 것이었다. 바로 수용소로 보내져 비행기 등 교통사정과 직장 알선 때문에 7~8일간만 기다리면 이주절차가 완료된다. 스파이가 많을 텐데 너무 관대한 것이 아니냐고 반문하자 서독은 이미 동독의 문제인물 리스트를 장악하고 있기에 문제없으며, 설사 놓치더라도 언제나 적발할 수 있다는 것이다. 간첩이나 국가변란죄의 최고형은 5년이라며 서독 검사는 주인공 춘우에게 반문했다.

 

“귀국에서는 얼맙니까.”
“사형입니다.”
이번에는 검찰간부가 깜짝 놀랐다.
“왜 사형합니까.”
“국가를 전복시키는 건데 그에서 더 큰 죄가 어디 있습니까.”
“그 사람은 당신네 나라 백성이 아닙니까. 우리는 그러한 죄수를 감옥에서 그냥 가두어 두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6년간 사랑으로서 감화시키는 운동을 하고 있습니다.”(박계주, <여수>)

 

중국도 마찬가지다. 타이완 출신 여류작가 천뤄시(陳若曦)는 미국 유학 중 캐나다로 이주했다가 베이징으로 가서(1966) 잘 살다가 다시 타이완(1973)으로 돌아왔다. 관계당국은 그녀의 ‘망명’을 환영했으나 이 작가는 끝내 그 단어를 피하며, 자신은 ‘반공 의거’가 아닌 ‘중국인의 증언자’라고 주장했다.
차이는 이것만이 아니었다. 1970년대 이전까지 일본은 여행을 다녀오기에 제일 위험한 지역이었고, 특히 유학생에게는 더욱 위태로웠다. 조총련이 워낙 센 지역이라 미처 알지도 못 한 채 걸려들기 십상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장학금제도가 조총련계에 많아서 함부로 받으면 바로 ‘간첩’으로 일생을 망치기도 했다. 그런데 타이완은 한국과 달랐다. 그들은 중국계 장학금을 받으면 관계기관이 소환하여 그 사실 여부를 확인한 후 더 이상 말려들지만 말고 열심히 학업에 전념하도록 격려해 주었다고 한다.
빙고동 호텔에 대해서는 김병진의 <보안사>(소나무, 1988)가 실감나게 그 전모를 소개하고 있다. 그는 재일동포 유학생으로 보안사에 연행, 고문 유경험자로 거기서 2년간 근무 후 사직하고 이 책을 통해 그 사실을 폭로했다. 이곳이 재일동포 모국 유학생 간첩 사건을 주로 다룬 곳임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으며, 그 대표적인 예가 서승-서준식 형제들이다. (다음 호에 계속)

화, 2021/03/02-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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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

신흥무관학교기념사업회 주최 한국광복군 창설 80주년 기념

강화 드라이브스루 답사

연구소가 사무국을 맡고 있는 신흥무관학교기념사업회가 주최하고, 연구소와 서울시의 후원으로 9월 26일(토), 10월 24일(토), 25일(일) 총 세 차례의 ‘한국광복군 창설 80주년 기념답사’를 강화도에서 진행했다. 이번 답사는 올해 코로나19로 인해 답사 장소와 일정이 몇 차례 변경된 끝에 드라이브스루 답사라는 방식으로 실시하게 되었다. 당초 올해 신흥무관학교기념사업회의 답사는 한국광복군 창설 80주년을 맞아 정미의병(강화), 신흥무관학교(안동), 조선의용대(밀양)를 차례로 살펴보며 한국광복군의 원류를 되돌아보고자 했는데 코로나19로 강화도에서만 답사를 진행하게 되어 아쉬운 마음이 컸다.
드라이브스루 답사는 참석자 각자가 자기 차를 타고 답사지로 이동하며 진행했다. 방역 수칙에 따라 참가자 전원이 항상 마스크를 썼고 각 차량에는 3명 이상 타지 않도록 제한을 뒀으며, 식사도 흩어져 도시락을 먹었다. 3차례의 답사에는 총 67명(1차 17명, 2차 18명, 3차 32명)의 참가자와 스태프 3명(방학진 기획실장, 신다희 총무 부팀장, 김무성 회원사업 부팀장)이 참여했다. 답사 안내는 1차 답사에 황평우 한국문화유산정책연구소 소장이, 2차 답사에 한정우 산마을고등학교 선생님이, 3차에 방학진 기획실장이 맡아주었다.

 


답사는 강화 만남의 광장에 집결하는 것으로 시작해서 통제영학당 옛터에서 성공회 강화성당, 합일초, 강화중앙교회를 차례대로 보고, 마지막으로 연미정으로 이동하며 진행되었다.
첫 답사지인 통제영학당은 대한제국에서 세운 최초의 근대식 해군사관학교이다. 이동 중 보수 공사 중인 진해루 외벽에 그려진 강화의 역사를 표현한 그림 앞에서 강화의 지리와 역사에 대해 듣고, 강화도에서 벌어진 수차례의 민간인 학살에 대한 이야기도 나누었다. 2009년 해군참모총장이 세운 표지석 외엔 아무것도 없는 공터인 통제영학당 옛 터에서 대한민국 국군의 뿌리가 어디인지 생각해 볼 수 있었다.
성공회 강화성당으로 이동하여 성당 앞 공원에서 답사단은 흩어져 도시락으로 점심 식사를 했다. 식사 후에 구한말에 상대적으로 늦게 들어온 성공회와 감리교회가 강화도 민중들에게 다가가기 위해 기울인 노력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한옥 성당인 성공회 강화성당은 이런 답사가 아니더라도 한번쯤 볼 만한 건축물이다. 합일초등학교에서 백범 김구의 친필을 보며 백범 김구가 청년 시절 강화도에서 잠시 머물렀던 사연을 듣고 근처 강화중앙교회로 이동했다.
강화중앙교회(잠두교회)는 강화 최초 교회로 잠두의숙(훗날 합일초등학교)을 설립했다. 성공회와 감리교 등 기독교로 인해 근대교육을 받은 강화의 민중들은 3·1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된다. 민중교육에 힘썼던 초기 기독교를 보며, 변질된 현재의 한국 기독교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었다.
3차 답사에서는 김구 선생이 1900년 강화도에서 숨어 지내는 동안 서당을 열어 강화 아이들을 가르쳤던 고택 대명헌에 방문해 이 집의 운영자인 최성숙 님의 배려로 관람했다. 연미정으로 이동하기 전에 한국광복군 설립 80주년의 의미, 내년 신흥무관한교 설립 110주년에 대해 설명하며, 국군의 날과 의병의 날 등 기념일을 변경해야 하는 필요성에 대해 이야기했다. 마지막 답사지인 연미정에 오른 답사단은 바로 눈앞에 보이는 북한 땅을 보며 저렇게 가까운 곳에 가지 못하는 분단 현실과, 남북 간의 교류가 정체되고 있는 상황에 대한 안타까움을 느꼈다.
마치 나들이하듯 참여한 답사단은 강화도 지역 역사에 대한 설명을 들으며 무척이나 만족스러워했다. 코로나19로 인해 적은 인원수로 최대한 대면 접촉을 줄이려고 노력한 답사였는데, 참가자들이 적극적인 자세로 임해주었고, 반응도 뜨거웠다. 참가자들의 뜨거운 반응을 보며 코로나19라는 어려운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드라이브스루 방식의 소규모 답사를 앞으로 계속준비하고자 한다.

• 기획실 회원사업 부팀장 김무성

수, 2020/12/02- 2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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