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 콘텐츠로 건너뛰기

[텀블벅 펀딩] 군함도, 끝나지 않은 전쟁

지역

[텀블벅 펀딩] 군함도, 끝나지 않은 전쟁

익명 (미확인) | 수, 2017/07/12- 16:54

바로가기 [텀블벅 펀딩] 군함도, 끝나지 않은 전쟁

사라져가는 기억을 위해 집을 지어주려 합니다.
-민족문제연구소의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 프로젝트
0712-2

일본 남쪽, 나가사키 항에서 약 18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는 하시마(군함도)는 야구장 두 개 정도 크기의 작은 섬입니다. 1916년 일본 최초의 철근콘크리트 건물이 세워져 근대화의 상징으로 불렸던 이 섬은 좁은 섬에 근대식 아파트가 빽빽이 들어서는 모습이 마치 군함처럼 보여 그때부터 ‘군함도’라고 불렸습니다. 과거의 영화를 그대로 간직한 그 섬에서 과연 누가 살았을까요?

지상에서 일하는 일본인과 달리 강제동원 된 조선인 노동자들은 지하에서 석탄을 캐야 했습니다. 그 지하는 숨 쉬기조차 어렵고 몸을 펼 수 없을 만큼 좁았으며, 식량과 식수조차 주어지지 않는 말 그대로의 지옥이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석탄 채굴을 위해 강제동원 되었지만, 그곳에서 죽어간 사람들에 관한 기록은 단 한 줄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한때 조선인 희생자들의 유골이 담긴 항아리가 족히 10개는 넘게 들어 있다는 납골당과 공양탑은 지금은 파괴되어 들여다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일본이 ‘근대화의 상징’, ‘자랑스러운 세계유산’으로 포장하려는 군함도(하시마)는 일본의 근대화가 강제징용 된 조선인들의 무덤으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은폐하고 있었습니다. 0712-3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많은 나라들이 과거를 돌이켜보며 자신들의 과오에 대해 역사적으로 평가를 내리고 정리한 바 있습니다. 그러나 한국은 어떨까요? 우리는 아직도 친일문제가 분명하게 해결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습니다. 한일 과거사를 청산하고, 굴절된 역사를 바로 세우기 위해 반민특위 정신을 이어받고, 친일문제 연구에 평생을 바친 고 임종국 선생의 유지를 이어 1991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설립되었습니다. 민족문제연구소는 한일 과거사 문제뿐만 아니라 박정희기념관 건립 저지, 친일파기념사업 저지와 같은 다양한 활동과 전시회를 통해 국민들에게 과거사 청산의 당위성을 알리고자 노력해왔습니다. 이제 행사를 통해 사람들에게 알리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민족문제연구소가 꾸준히 모아온 자료를 시민들과 함께 공유하며 우리의 과거를 제대로 바라보고 기억하기 위해 2018년 식민지역사박물관을 건립하려 합니다.

식민지역사박물관의 건립은 오랜 기간에 걸쳐 진행되었습니다. 부지를 정했지만, 시민들과 함께할 수 있는 박물관의 형태를 만들기 위해 많은 것들이 부족합니다. 0712-4 Print

일본은 한일 과거사 문제가 불거질 때마다 ‘근거 없음’이라고 주장합니다. 과거에 동아시아에서 침략전쟁을 일으킨 것에 대해 반성하기는커녕 도리어 동아시아 안보를 지키는 파수꾼이라 자처합니다. 게다가 일본은 일제 침략 이후 분단과 전쟁으로 이어진 한국의 상황을 토대로 경제부흥을 이끌었지만, 전후 보상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강제동원의 역사를 부정하는 발언을 그치지 않습니다. 한국정부는 그렇다면 자기 역할을 제대로 했을까요? 한국정부 역시 일본정부와 다르지 않았습니다. 과거의 한국정부는 국민적 합의 없이 한일협정을 진행해 그 청구금을 경제발전의 재원으로 사용한 바 있습니다. 박근혜 정부 시절 위안부 합의 역시 당사자들의 동의를 구하지 않고 진행하여 피해자들에게 다시 한 번 눈물을 쏟게 만들었습니다.

우리 곁에는 과거를 부정하는 세력들에 저항하며 물러서지 않고 목소리를 내온 역사의 산 증인들이 살아 계십니다. 그러나 역사의 산 증인이신 어르신들이 하나둘씩 세상을 떠나며 과거를 증명하는 목소리가 사라지고 있습니다. 조금씩 사라지고 흩어져가는 기억들을 이제 한 곳에 모아 모든 이들이 함께 기억하고, 세대를 넘어 기억을 전달하고 공유할 수 있도록 식민지역사박물관을 지어주려 합니다. 이 기억들이 우리 곁에서 살아 숨 쉴 수 있도록 시민들의 힘이 필요합니다. 민족문제연구소와 시민들이 함께 모여 식민지역사박물관을 건립하여 제대로 된 역사 인식과 함께 역사를 통해 성찰할 수 있는 장을 만들고자 합니다.

역사의 참혹 앞에서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의 이야기가 시민의 귀에 닿도록 만든 것은 피해자의 용기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용기가 더 큰 힘을 얻을 수 있도록 곁에서 도운 것은 한국에서 조직된 시민들의 힘이었습니다. 역사는 시민의 것입니다. 강한 자들이 제멋대로 헝클어놓은 역사를 제대로 바라볼 수 있기 위해, 바라보는 것만으로 그치지 않고 이제 역사 위에서 성찰하기 위해 시민의 힘이 필요합니다. 민족문제연구소는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을 통해 과거사를 청산하고, 새로운 역사로 나아가기 위한 큰 길을 내고 싶습니다. 함께 동참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시민들의 의견

댓글 달기

Plain text

  • 웹 페이지 주소 및 이메일 주소는 자동으로 링크로 전환됩니다.
  • 줄과 단락은 자동으로 분리됩니다.
  • 사용할 수 있는 HTML 태그: <a href hreflang> <em> <strong> <cite> <blockquote cite> <code> <ul type> <ol start type> <li> <dl> <dt> <dd>
이미지
무제한 수의 파일을 이 필드에 업로드할 수 있습니다.
50 MB 한계입니다.
허용된 유형: png gif jpg jpeg.
Enter the YouTube URL. Valid URL formats include: http://www.youtube.com/watch?v=1SqBdS0XkV4 and http://youtu.be/1SqBdS0XkV4.
CAPTCHA
스펨 사용자 차단 질문

민족문제연구소는 2017년 『항일음악 330곡집』을 발간한 이후 <항일음악회> 개최 등 항일음악 보급을 통한 독립정신 선양에 앞장서고 있습니다. YTN 라디오는 민족문제연구소의 자문을 받아 2020년 11월 ‘국치추념가’를 시작으로 <독립군가 복원 프로젝트 : 100년의 소리>를 방송 중입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독립군가 복원 프로젝트 : 100년의 소리>

☞ 24편 : 광복군 제3지대가 _ 김일진(광복군 제3지대장 김학규 장군, 광복군 오광심 지사 아들)

☞ 23편 : 추도가 _ 원형재(원심창 선생 아들)

☞ 22편 : 한반도가 _ 나중화(나창헌 선생 아들)

☞ 21편 : 독립군행진곡 _ 김완태(전 육군사관학교장)

☞ 20편 : 영웅추도가 _ 김성태(오석 김혁 장군 증손자)

☞ 19편 : 선봉대가 _ 권현(권기옥 선생 후손)

☞ 18편 : 대한혼가 _ 김재홍 함경북도지사(규암 김약연 선생 증손자)

☞ 17편 : 희망가 _ 김수옥(우사 김규식 선생 손녀)

☞ 16편 : 목동가 _ 김정륙(독립운동가 김상덕 반민특위 위원장 아들)

☞ 15편 : 고려인 홀로아리랑 _ 안톤 강(독립운동가 유상돈 선생 증손자)

☞ 14편 : 여옥사_8호감방의노래 _ 김정애(유관순 열사 조카 며느리)

☞ 3·1절특집: 끝나지않은 노래’독립운동歌’

☞ 13편 : 기전사가 _ 정철승(독립운동가 규운 윤기섭 장손)

☞ 12편 : 최후의결전 _ 우원식 국회의원(임시정부 법무국 비서국장 김한 외손자)

☞ 11편 : 올드랭사인애국가 _ 김주(심산 김창숙 손녀)

☞ 10편 : 광복군아리랑 _ 장병화(광복군 장이호 지사 장남)

☞ 9편 : 앞으로행진곡 _ 김자동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장(김의한, 정정화 외아들)

☞ 8편 : 독립군가(임청각이 복원되던 날)

☞ 7편 : 신흥학우단가 _ 이종걸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 의장(우당 이회영 손자)

☞ 6편 : 새야새야파랑새야 _ 정남기(동학농민군 비서 정백현 손자)

☞ 5편 : 격검가 _ 차영조(동암 차리석 아들)

☞ 4편 : 압록강행진곡 _ 광복군 김영관 지사

☞ 3편 : 신흥무관학교교가 _ 이항증(석주 이상룡 증손자)

☞ 2편 : 안중근옥중가 _ 함세웅 신부

☞ 1편 : 국치추념가 _ 이준식 독립기념관장(한국독립군 총사령관 지청천 장군 외손)

☞[출처] YTN Radio: 독립운동歌 복원 프로젝트, 100년의 소리

금, 2021/07/23- 00:50
1
0

일본 나가사키 하시마(군함도) 전경. 김영민 기자

유네스코(UNESCO) 세계유산위원회가 일본이 ‘군함도’(하시마·端島) 등에서 벌어진 조선인 강제노동의 역사를 제대로 전달하지 않았다는 지적이 담긴 결정문을 만장일치로 채택했다. 일본 정부를 향해 ‘강한 유감(strongly regret)’ 등의 강도높은 표현이 담긴 것은 이례적이라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고 22일 교도통신이 보도했다.

보도에 따르면 세계유산위원회는 결의문에서 군함도에 관해 설명하는 도쿄의 산업유산정보센터를 개선하라고 일본 정부에 요구했다. 구체적으로는 한국인 등이 강제노역 피해를 입었다는 사실을 제대로 알리지 않았고, 희생자들에 대한 추모 조치 역시 미흡했다고 지적했다.

일본 정부는 2015년 군함도 등 일제 강점기 조선인 강제 노역 현장이 다수 포함된 일련의 근대 산업시설을 세계 유산으로 등재하는 과정에서 한국 등의 반대를 극복하기 위해 징용을 포함한 ‘전체 역사’를 알리겠다고 국제사회에 약속했다. 하지만 군함도의 역사를 알리기 위해 도쿄에 설치한 산업유산정보센터의 전시물은 조선인에 대한 차별이나 인권침해가 없었던 것과 같은 이미지를 부각하고 있다.

산업유산정보센터를 운영하는 일반재단법인 산업유산국민회의(이하 국민회의)는 인권 침해의 역사를 부정하는 내용의 옛 군함도 주민 동영상 등을 홈페이지에 게시하기도 하는 등 역사 왜곡에 앞장서고 있다. 한국 정부와 뜻있는 한일 시민단체는 일본 정부에 징용 등 강제 노역의 역사를 제대로 알리도록 전시관을 개선할 것을 거듭 촉구했으나 일본 정부는 “약속한 조치를 성실하게 이행해 왔다”며 주장해왔다.

앞서 일본은 유네스코의 지적에 반발해왔다. 지난 12일 결정문이 최초 공개되자 일본 정부 대변인인 가토 가쓰노부(加藤勝信) 관방장관은 이튿날인 13일 기자회견에서 “일본은 세계유산위원회의 결의·권고를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자국 정부가 약속한 조치를 포함해 성실히 이행해왔다”고 주장했다. 교도통신도 지난 17일 “일본 정부가 세계유산위원회에서 반론을 펼치기로 방침을 세우고, 일본은 (산업유산정보센터 관련 설명을) 성실하게 하고 있다는 입장을 밝히기로 했다”고 보도했다. 하지만 하지만 결정문은 토의 없이 채택됐으며, 일본 측도 이에 대해 추가 발언을 신청하지 않은 것으로 전해졌다.

<2021-07-22> 경향신문

☞기사원문: 유네스코, ‘일본 군함도 왜곡’ 결정문 만장일치 채택

※관련기사

☞연합뉴스: 유네스코, ‘日군함도 역사왜곡’ 비판결의…”징용설명 부족”

☞한국일보: 유네스코, 군함도 역사왜곡 비판결의 채택… “강한 유감”

☞아시아경제: 유네스코, 日군함도 역사왜곡 비판 결의문 채택

☞뉴시스: 유네스코, 日 군함도 역사왜곡 비판 결정문 채택…”강한 유감”

☞MBC: 유네스코, ‘日 군함도 역사왜곡 비판’ 결의 채택

☞SBS: 유네스코, 군함도 역사 왜곡 비판결의 채택…”개선하라” 요구

금, 2021/07/23- 07:09
0
0

[손호철의 발자국] 59. 서울 문래근린 공원 : ‘역사전쟁의 현장’ 5‧16쿠데타의 발상지

“자, 이제 작전을 시작합시다.” 1961년 5월 16일 새벽. 서울 영등포구 문래동에 위치한 6관구 지하벙커에는 별 두 개가 달린 모자를 쓴, 한 마른 군인이 날카로운 눈매로 앞에 모인 장교들에게 결연한 어투로 말했다. 한국현대사를 근본적으로 바꾼 5‧16쿠데타가 시작된 것이다.

5‧16쿠데타를 주도한 박정희는 당시 제2군 부사령관이었지만, 쿠데타 1년 전까지 서울을 방어하는 이곳 6관구(이후 수도경비사령부로 변함) 사령관으로 근무해 이곳을 잘 알고 있었다. 특히 이곳이 서울중심부에서 가장 가까운 부대라는 점을 고려해 박정희는 이곳을 5‧16쿠데타 지휘본부로 선택했다.

▲ 1961년 5월 16일 새벽 6관구를 출발해 중앙청에 도착한 박정희 소장

사전에 모의한대로, 이날 새벽 출동한 김포의 해병대와 공수특전단 등 2500여 명의 군인들은 한강대교애서 가벼운 총격전을 한 뒤 한강을 건너 육군본부와 서울의 주요시설을 장악했다. 4‧19혁명이라는 학생들과 시민들의 피로 얻어낸 민주주의가 1년 만에 무너지고 만 것이다.

이 역사적인 장소는 1985년 6관구의 후신인 수도경비시령부가 이전하면서 문래근린공원으로 변했다. 이 공원은 지하철 2호선 문래역에서 내려 5분정도 걸어가면 만나는, 가까운 곳에 위치해 있다. 많은 지역 시민들이 산책을 나오는 이곳이 깊은 역사적 의미를 가진 곳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서울시민들은 말할 것도 없고 지역주민들 중에도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나 역시 고등학생 시절 이 근처에 살았었지만, 전혀 이 같은 사실을 몰랐다.

▲ 5.16 쿠데타의 지휘본부였던 6관구 지하벙커가 이제는 서울 문래근린공원에 방치돼 있다. ⓒ손호철

특히 이 지하벙커는 공원 제일 구석에 위치해 있고 굳게 닫힌 그 입구에는 아무런 표시조차 없이 운동기구들로 둘러싸여 있어 사람들로부터 잊혀 있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이 벙커 앞에 서자 이곳이 한국현대사를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은 비극의 현장이라는 생각에 나도 모르게 숙연해졌다.

지하벙커에서 조금 가면 낯익은 얼굴이, 낯익지 않는 복장으로 우리를 맞는다. 별 두개 달린 군모를 쓰고 군복을 입는 박정희의 흉상이다. 5‧16쿠데타 당시의 박정희를 형상화한 동상으로, 그 밑에는 ‘5‧16혁명발상지’라는 한자어가 우리를 맞는다. 5‧16쿠데타가 아니라 ‘5‧16혁명’이라고? 오른쪽에는 초록색 새마을기가, 왼쪽에는 태극기가 펄럭이는 동상의 뒷면에는 오랜 세월동안 마모되어 읽기가 쉽지 않은 글씨들이 나타난다.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아니 흔들리나니
차마 부정불의무능의 천지를 볼 수 없었던
나라를 구하려는 일편단심 침착 용단 과감
결연히 이곳에 칼을 뽑아
창공을 향하여 성화를 높이 들다
1966년 7월 7일’

▲ 박정희 흉상 밑에는 ‘5.16혁명발상지’라는 글씨가 쓰여있다. ⓒ손호철

5‧16쿠데타 5년 뒤인 1966년, 즉 55년 전에 만든 동상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동상을 올려다 보고 있자, 몇 년 전 처음으로 위내시경 검사를 받은 경험이 생각났다. 수면내시경이라 주사를 맞자마자 잠들고 말았는데 잠에서 깨자 검사가 끝나 있었다. 헌데 근 20년간 몸이 아플 때면 찾아가 잘 아는 동네의사의 얼굴이 심상치가 않았다. ‘아 암이구나.’ 나는 최대한 동요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물었다. “그래 몇 기에요?” 의사의 답이 황당했다. “몇 기가 아니라, 교수님 왜 박정희 욕을 그리 하세요?” ‘아니 이게 무슨 황당한 이야기?’ 알고 보니 마취주사로 수면을 시키자 갑자기 “박정희 개XX”하며 계속 욕을 하더라는 것이다. 어린 대학시절 잡혀가 고문을 당하고 감옥도 가고 대학도 잘렸지만, 그렇다고 수십 년이 지난 현재까지 깊은 잠재의식 속에 박정희에 대한 증오가 남아있다니. 나 역시 놀랐고 ‘내 자신이 수양이 덜 됐구나’ 부끄러워 한 적이 있다.

이곳은 지나간 역사의 한 유물이 아니라 우리의 현대사를 놓고 현재도 진행되고 있는 ‘역사전쟁’의 치열한 현장이다. 2000년 민족문제연구소 회원 등이 박정희가 ‘한 목숨 다해 충성함’이라는 충성혈서까지 써서 만주국 일본군관학교에 입학했고, 이후 일본군 장교로 복무한 친일 경력에 주목해 이 흉상에 욱일승천기를 씌운 뒤 밧줄로 묶어 쓰러트려 홍익대로 가져가려다가 징역 1년 6개월 형을 선고받았다.

영등포구청은 동상 철거 과정에서 코 부분이 훼손된 흉상을 다시 설치했고 2006년 ‘박정희 대통령정신문화선양회’가 코를 복원했다. 박근혜 퇴진 촛불항쟁이 거세던 2016년 12월, 조형예술가 최황 씨는 이 흉상에 빨간색 스프레이를 뿌리고 흉상을 받치고 있는 좌대에도 빨간 스프레이로 ‘철거하라’라고 쓰면서 페이스북에 올린 글에서 다음과 같이 고발했다.

“박정희는 일왕에게 충성을 다짐하고 만주군에 합류한 친일군인이었고, 쿠데타를 통해 정권을 장악했으며, 경제발전을 빌미로 수많은 비민주적인 행위와 법치를 훼손한 인물이다. 또 한국사회에 ‘빨갱이’라는 낙인효과를 만들어낸 악인이다.” 법원은 그에게 이런 방법이 아닌 여론 청원 등 다른 절차를 밟아야 한다며 100만원 벌금형을 선고했고 최 씨는 항소했다.

이 같은 수난의 역사를 잘 증언하는 듯, 이 동상은 넓은 면적을 보호구역으로 만들어 4면을 철제 울타리로 보호하고 있다. 동상 옆에도 ‘경고 : 박정희 대통령 흉상과 지하벙커에 대하여 손괴하는 자는 이유여하를 불문하고 민형사 처벌함을 경고함 – 박정희대통령 흉상 보존회’라는 경고문과 ‘그립습니다, 우리의 영웅이시여. 전국여성구국총연합’이라는 화환이 놓여있었다.

▲ 민주화 세력이 박정희 흉상을 훼손하면서 흉상 주위에 철장을 쳐 보호하고 있다. ⓒ손호철
▲ 박정희 동상이 민주화 이후 여러차례 수난을 당하자 박정희 지지자들이 경고문을 설치해 놓았다. ⓒ손호철
▲ 박정희 지지자들이 보낸 화환 ⓒ손호철

이곳에 서있으면 여러 가지 생각이 머리를 스쳐간다. 박정희는 최 씨와 진보세력의 주장처럼 다른 젊은이들이 광복을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울 때 일왕에 충성을 맹세하고 독립군을 때려잡던 친일군인에, 민주정부와 민주세력을 짓밟은 독재자에 불과한가? 그렇다면 그의 동상은 철거해야 하는가? 아니면 부끄러운 역사로 보존되어야 하는가? 아니면 그는 냉전적 보수세력이 신봉하듯이 대한민국을 수천 년의 가난에서 구한 ‘구국의 영웅’인가? 두 극단적 입장 중간에는 박정희가 경제발전에 일정한 공이 있지만 과오가 더 크다는 ‘공3과7론’으로부터 일정하게 과오가 있지만 공이 더 크다는 ‘공7과3론’ 등 다양한 입장이 있을 것이다. 이승만과 함께 박정희는 한국현대사에서 가장 논쟁적인 인물임에 분명하다.

결국 이 문제는 1) 우리의 경제발전이 과연 박정희 때문에 가능했던 것인가? 아니면 박정희가 아니었어도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인가? 2) 만일 경제발전이 박정희 때문이라면 그 성과가 박정희가 가져온 많은 부정적 측면을 넘어서는 긍정적인 것이었는가라는 문제에 의해 좌우될 수밖에 없다(이에 대해서는 ‘손호철의 발자국’ 18. 구미 박정희생가, <프레시안> 2021년 4월 16일자 참조). 그러나 그가 확실히 보여준 것이 있다. 그것은 ‘총으로 일어선 자, 총으로 쓰러진다’는 교훈이다. 그는 부인(육영수)을 총으로 잃었고 자신도 최측근의 총에 쓰러졌다.

후기 : 마산의 역사전쟁

▲ 창원시 회원천변에 설치되어 있는 ‘5.16군사혁명기념비’. 이 역시 민주화 이후 시민단체들이 철거해 개천에 버린 것을 주민들이 다시 세웠다. ⓒ임영일 박사 제공

박정희와 5‧16을 둘러싼 ‘역사전쟁’은 문래동 이외에도 여러 곳에서 계속되고 있다. 창원시 마산의 회원2동(회원남로)이 대표적이다. 회원천변에는 임진왜란 이후 우리 역사를 지켜봐온 500년 된 거목이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다. “방자한 세력이 재앙을 부르는 것을 우리 군대가 나서서 위무도 당당하게 혁명을 성공시켰다.” 그 밑에는 생뚱맞게도 이 같은 ‘5‧16군사혁명기념비’가 자리 잡고 있다. 5‧16쿠데타 발생 두 달 뒤인 1961년 8월, 쿠데타에 참가한 사단장 집안에서 설치한 것이라고 한다.

박정희와 유신체제를 끝장낸 부마항쟁이 20주년 되던 1999년, 열린사회희망연대라는 한 시민단체가 “유신 철폐에 온 몸을 불태웠던 민주의 고장 마산에 아직도 유신의 잔재가 남아 있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라며 이 비를 철거해 천변에 버렸다. 하지만 보수적 주민들이 비석을 끌어올려 원래의 자리에 다시 설치했다. 그 옆에는 동민을 대표한 보존회장의 이름으로 이를 다시 설치한 이유를 설명했는데, 이제는 여러 글씨가 없어져 읽기가 쉽지 않다. 남아 있는 글씨들을 복원해보면 ‘(…) 광명의 역사든 오욕의 역사든 (…) 보존하여 역사의 반면교사로 나라발전의 디딤돌로 삼아야 한다는 의미에서 (…) 다시 세운다’고 쓰여 있다.

손호철 서강대학교 명예교수

<2021-07-23> 프레시안

☞기사원문: 철거냐 존치냐, 서울 복판 박정희 흉상을 보며

금, 2021/07/23- 21:19
4
0

경기도, 친일잔재 청산 관련 조례 발의… 2019년 9월 18일
도내 유·무형 문화유산 대상, 잔재 조사연구 용역… 지난해 4월 완료
이재명 경기지사, ‘2021년 경기도 친일청산 원년’ 선포… 청산 박차
생활 속 무형의 잔재 주목… 실질적 실천운동 확산 노력

▲ 경기도는 도청 신관 4층 대회의실에 걸린 역대 도지사 액자 가운데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1대 · 2대 · 6대 · 10대 도지사의 액자 밑에 친일 행적을 부착했다. (사진=경기도 제공)

우리가 일제잔재를 청산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우리의 고유문화가 불순한 의도에 의해 훼손되거나 왜곡, 심지어 사라졌기 때문이다.

게다가 정상적으로 받아들인 문화가 아니라, 일본의 식민지화를 위한 민족문화말살 정책에 따라 강압적으로 주도면밀하게 주입한 것이기에 더욱 그렇다. 오죽하면 한국인이 ‘싸움이나 잠꼬대까지 일본어로 하는 상태’를 만들어내고자 했다는 말이 있을까.

일제잔재 청산의 문제는 이제 ‘지속적인 실천운동’으로의 전환이 요구된다. 더 이상 간헐적인 지적과 막연한 구호에 그쳐서는 안 될 일이다. 그런 점에서 구체적으로 무엇을 어떻게 정리해 나갈 것인가 하는 방향성과 대상의 채택이야말로 매우 중요한 대목이다.

▲ 경기도가 지난 3월부터 ‘항일 독립운동 유적지’ 120개소에 대한 알리기 사업을 실시하고 있다. (사진=경기뉴스광장 제공)

경기도에서 일제에 의해 훼손된 문화 복원 및 지원에 관한 조례안이 발의된 것은 지난 2019년 9월 18일이다. 이 조례는 일제에 의해 도에서 사라진 우리 고유의 문화를 복원하고 지원하는데 필요한 사항 규정을 목적으로 한다고 제1조를 통해 명시했다.

또한, 4조에는 도지사가 실태조사를 할 수 있고, 전문성과 인력을 갖춘 연구기관이나 법인 또는 단체에 이를 의뢰해 실시할 수 있도록 규정해 놓았다. 사업의 경우 일제에 의해 훼손된 문화 연구, 문화 복원 및 청산, 문화에 관한 출판물 발간 및 데이터베이스 구축·관리와 교육·홍보, 전문 인력 육성 등을 가능하도록 했다.

경기도는 곧바로 친일 목적으로 제작된 도내 유·무형의 문화유산을 대상으로 한 잔재 조사연구 용역에 돌입, 2020년 4월 완료했고 그 결과를 바탕으로 문화·예술 분야 일제잔재 청산 공모 사업, 친일문화잔재 기록보관소 구축 및 활용 사업 등을 지속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 경기도가 실시한 ‘새로운 경기도 노래’ 작곡 공모전에 총 1084곡이 참여, 이를 선정할 도민심사위원단을 모집했다. (사진=경기도 제공)

당시 용역에서는 일제강점기(1905년~1945년 8월)에 형성된 생활문화 속 친일잔재에 대해 시공간적 범위와 용어 및 개념 정의, 이에 따른 자료 수집과 조사 연구를 통해 친일 인물 257명, 친일 기념물 및 송덕비 161개, 친일 인물이 만든 교가 89개, 일제를 상징하는 모양의 교표 12개 등 일제잔재를 밝혔다.

이 가운데 대표적 친일잔재로 경기도가(京畿道歌)와 춘원 이광수의 기념비가 꼽혔다. 수십년 동안 불려진 경기도가가 친일파 이흥렬이 작곡한 것으로 드러나자 도는 발빠르게 공모를 진행, 도민들의 참여 속에 ‘경기도에서 쉬어요’라는 새로운 경기도 대표 노래를 탄생시켰다.

▲ 이재명 경기도지사는 ‘2021년을 경기도 친일청산의 원년’으로 삼겠다고 강조, 철저한 조사와 준비작업을 통해 잔재청산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사진=경기도 제공)

이 노래는 매일 아침 경기도청 청사에 울려퍼지고 있다는데, 마치 우리에게 하루 한 번씩 ‘친일잔재, 일제잔재는 꼭 청산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들려주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특히 지난해 12월 31일 송년 제야행사에서 처음으로 공개, 올해 시무식 행사를 통해 공식적으로 선보였다는 점도 그 의미가 남다르게 다가온다.

지난 3·1절 기념식에서 ‘2021년을 경기도 친일청산의 원년으로 삼겠다’고 한 이재명 경기도지사의 말은 허언이 아니었다. 그야말로 하나하나 철저하게 조사하고 착실하게 준비한 뒤 가열차게 추진해 나가고 있음을 증명해 보이고 있으니 말이다.

이렇듯 경기도는 우리 생활 속에 깊이 박힌 친일문화 잔재 청산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 중이다.

일제잔재의 유형은 크게 인적·물적 잔재, 유형·무형의 잔재, 친일 잔재, 민족말살정책의 산물 등으로 구분할 수 있고, 이들 중 어느 것 하나도 빼놓을 수 없을 만큼 중요한 문제들임에 틀림없다.

▲ (사진=경기도 친일문화잔재 아카이브 포털서비스 홈페이지 메인 화면 캡처)

인적·물적 잔재는 일제의 침략전쟁과 식민통치에 부역한 친일반민족행위자를 포함해 혈연, 지연, 학연 등으로 맺어져 이해관계를 같이하고 기득권을 유지한 ‘친일파’, 그리고 그들이 형성한 친일재산을 말한다.

또 일제가 침략전쟁과 식민통치를 효율적으로 하기 위해 조성한 시설물과 선전 조형물 등 유형의 잔재와 장기간 식민지배 하에서 오염된 정신문화와 훼손된 전통문화 등을 일컫는 무형의 잔재가 있다.

이와는 별개로 그들의 행위와 주장을 미화·옹호하는 논리와 기념사업 등 친일잔재, 일제에 의해 의도적으로 파괴 멸실된 문화와 원형이 손상된 건축 문화유산 등 민족말살정책의 결과물 등이 여기에 속한다.

▲ ‘매일신보’ 1933년 10월 26일자. ‘조선잠업계(朝鮮蠶業界)의 은인(恩人) 미야하라(宮原) 씨 동상 건립(銅像 建立), 31일 성대한 제막식 거행’. (사진=경기도 친일문화잔재 아카이브 포털서비스)

이 가운데 우선적으로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무형의 잔재’로, 그 중에서도 제대로 알지 못해 무의식적으로 사용하고 있거나 왜곡돼 전해지고 있는 것들을 대상으로 삼아 소개하려 한다.

특히 생활문화 속 잔재들의 구체적 사례를 들어 조목조목 짚어보고, 실질적인 실천운동으로까지 확대시킬 수 있도록 하는데 초점을 맞출 예정이다.

예컨대, 일제식 생활잔재로 분류되는 ‘삼베 수의’의 경우 언제부터 쓰였는지, 그 배경에는 어떤 이유가 있었는지 등을 전문가들과 함께 자세히 알아보고, 과연 우리는 어떻게 행동하는 것이 바람직할까에 대해 공감대를 형성하는 방식이다.

한반도에 마을굿 대신 일본의 국체관념인 신사신앙을 이식하기 위한 정책이 본격화된, 1936년 이후에 대해서도 살펴보게 될 것이다. 물론 보존이냐 철거냐를 놓고 논란이 많은 건축물이나 기념비 등에 대해서도 한 번쯤은 고민하고 생각해봐야 하지 않을까 싶다.

아울러 경기문화재단(대표이사 강헌)이 심혈을 기울여 진행 중인 ‘2021 문화예술 일제잔재 청산 및 항일 추진 민간공모 지원’ 1차 사업으로 선정된 단체들 가운데 프로그램을 선별, 면면을 들여다보는 과정 속에서 그 의미를 되새겨보는 시간도 갖게 될 것이다.

말그대로 부지불식간에, 우리 자신도 모르는 사이 우리의 의식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일제잔재는 무엇인지, 이번 기회에 각별한 관심을 가지고 명확히 알고 없애기 위한 노력들이 사회적으로 확산되길 바라는 마음이다.

우리 고유문화의 정통성을 찾고, 그 위상을 올바로 정립하는 일은 더 이상 미룰 수도 없고, 미뤄서는 안 되는 일임을 인식하는 계기가 되길 또한 기대해본다.

[ 경기신문 = 강경묵 기자 ]

<2021-07-25> 경기신문

☞기사원문: [일제잔재 청산 및 항일 기획시리즈] ②일제잔재 청산, 지속적 실천운동 돼야

※관련기사

☞경기신문: [일제잔재 청산 및 항일 기획시리즈] ① 진정한 ‘문화독립’ 완성하는 날까지

월, 2021/07/26- 00:47
2
0

[한겨레S] 기획
인터뷰/신카이 도모히로 강제연행 재판 지원모임 사무국장

유네스코 세계유산위 결정문 채택
“군함도 강제노역 피해 외면 유감”
일 강제동원 피해 규명 활동 시민들
“피해 목소리 들을 때 역사 숨쉬어”

2015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일본 메이지산업혁명유산 23곳 가운데 한곳인 군함도. 2차대전 당시 일제는 한국인, 중국인, 연합군 포로를 군함도와 다카시마, 나가사키 조선소 등에 몰아넣고 비인간적 노동을 시켰다. 세계유산위원회는 강제노동을 포함한 ‘전체 진실’을 알리라고 권고했지만, 일본 정부는 이를 6년째 모른 척하고 있다. 민족문제연구소 제공

“한국인 등의 강제노역 피해를 제대로 알리지 않았고, 희생자 추모 조치 역시 미흡했다는 데 강한 유감을 표한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WHC)가 22일 일본 나가사키현 군함도(정식 이름 하시마·端島) 등에서의 한국인, 중국인, 연합군 포로 강제동원 진실을 감춘 일본 정부의 태도를 비판하는 결정문을 채택했다. 통상 정치적 판단을 하지 않는 유네스코가 ‘강한 유감’이란 표현까지 동원해 날을 세운 것은 일본 정부의 태도가 도를 넘었기 때문이다.

지난해 3월 도쿄 신주쿠 총무성 제2청사 별관 건물에 개관한 산업유산정보센터는 과거 군함도 주민 입을 빌려 “군함도에서 (조선인이) 괴롭힘당했다는 얘기는 전혀 듣지 못했다”, “주위 사람들이 친절했다”는 식의 가짜뉴스 홍보를 하고 있다. 애초 일본 정부는 2015년 7월 열린 세계유산위원회 제39차 회의에서 군함도 포함 메이지산업혁명유산 23곳을 세계문화유산에 등재하는 조건으로, 이 센터를 통해 군함도 등에서 강제동원이 있었다는 사실을 포함한 ‘전체 역사’를 알리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이후 5년이나 뜸을 들인 끝에 문을 연 센터는 오히려 강제동원 역사 왜곡의 전초기지 구실을 하고 있다. 위원회는 세계유산 등재 때 해당국이 약속한 이행 조건을 2년마다 점검하는데, 지난달 조사단을 파견한 뒤 일본 정부가 ‘전체 역사’를 알리라는 권고를 여태껏 이행하지 않았다는 보고서를 지난 12일 누리집에 공개했다.

일본 정부는 왜 군함도의 진실을 두려워하는 것일까. 2차대전 시기 강제동원 피해자를 돕는 일본 시민단체 ‘나가사키 중국인 강제연행 재판을 지원하는 모임’의 신카이 도모히로 사무국장은 “일본 정부가 약속을 이행하지 않는 근본적 이유는 과거 불법적 식민지배와 아시아 국가 침략을 인정하지 않기 위해서”라고 말했다.

그는 20, 22일 <한겨레>와 한 비대면 화상과 서면 인터뷰에서 “일본 정부는 ‘징용의 특성상 대상자가 본인 의사에 반해 끌려왔을 수 있지만, 전시 징용은 합법적 수단이며 (법적) 문제는 없다’는 논리를 편다. 이런 배경에는 한반도 병합 자체가 합법이었으며, 이후 한국인을 상대로 한 일본의 모든 행위는 ‘법에 근거한’ 합법 행위라는 인식을 깔고 있다”고 설명했다. 신카이 사무국장은 일본 내 평화운동가이자, 한국과 중국을 오가며 2차대전 강제동원 피해자를 지원해왔다. 민족문제연구소 등 한국 평화단체들과도 긴밀한 교류를 이어오고 있다.

일본 군함도 한 건물의 잔해. 연합뉴스

식민지배 구현한 두 얼굴의 군함도

―군함도는 어떤 섬이었나?

“일본의 근대화에서 군함도는 여러 지위를 갖는다. 우선 정부 입장에선 품질 좋은 석탄 공급원으로 단기간에 일본의 근대화, 산업화를 이끌어준 원동력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다. 이를 기반으로 일본의 제철업이 성장해 산업화, 군사화를 추진할 수 있었던 게 사실이다. 반면, 군함도는 높은 이윤을 얻기 위해 비인간적 노동을 강요한 섬이기도 했다. 특히 역사적으로 2차대전 당시 한반도 사람들을 끌고 와 가혹한 노동을 시켰고, 1944년에는 중국인을 납치해 강제노동을 시켰다. 대일본제국의 침략전쟁과 식민지배를 구현한 섬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일본 정부가 군함도에 집착하는 이유는 뭔가?

“애초 일본 정부는 군함도의 세계유산 추진이 국제적으로 큰 논란이 되지 않을 거라는 느슨한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군함도가 일본 산업화의 상징 같은 재벌 기업인 미쓰비시 소유의 섬이자, 국가에 막대한 석탄원료를 공급했던 곳이어서 군함도를 다카시마와 함께 일본의 산업혁명에 공헌한 지역으로 묶어 설명하려 했을 거다. 또 일본 함선의 모양을 닮은 군함도가 비주얼적으로도 매력적인 부분이 있다. 바다 위에 일본 최초의 철근 콘크리트 아파트와 4~10층짜리 고층건물 10여동이 세워진 군함도가 압도적 존재감을 과시하는 만큼, 관광자원이라는 점에서 군함도를 반드시 넣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군함도에서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것은 갱구와 호안 일부뿐이다.”

―군함도에 한국인 피해자가 유독 많았다.

“역설적으로, 일본 정부가 세계문화유산의 강제동원 지역 논란 때마다 주로 군함도로 관심을 돌리는 이유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일본 정부가 가장 두려워하는 게, 미국이나 영국 등이 강제동원 문제에 클레임을 제기하는 것이다. 마침 군함도에서는 연합군 포로가 일하지 않았다. 일본 입장에서는 세계문화유산 문제에서 연합군 포로가 초점화되는 것만은 피하고 싶었을 것이다. 군함도는 (주로 한국인 강제노동이 이뤄졌기 때문에) ‘일본과 한국의 대립’이란 구도로 정리할 수 있다고 생각했을 수 있다.”

―국제사회를 상대로 정부 차원의 약속마저 지키지 않는 태도는 좀처럼 납득하기 어렵다.

“사실 한반도에서 강제동원은 1939년부터 시작됐다. 일본 정부는 이를 ‘모집’이나 ‘알선’에 의한 것으로, 노동자 본인의 자유로 일본에 넘어온 것이지 강제동원은 아니라는 주장을 고수해왔다. 여기에 더해 1944년 9월 이후는 일본인도 영장이 나오면 징병·징용을 따랐던 시기인데, 이때 일본 정부가 한국인을 ‘일본인’으로 취급했기 때문에 본인 의사에 반해서 이뤄졌더라도 불법은 아니라는 식이다. 물론 이것은 완전한 오류다.”

군함도 강제징용 피해자 고 최장섭씨는 “강제징용 당시 느닷없이 개 패듯 패가지고 강제로 (나를) 들고 나갔다”며 “(군함도에서) 도주하다 붙잡히면 고무튜브로 피부가 벗겨질 정도로 맞고 고문당했다”고 기억했다. 징용자들이 이곳을 ‘지옥섬’으로 불렀던 이유다.

―산업유산정보센터에서 강제동원의 진실은 어떻게 은폐됐나?

“한국인들이 노동자였다는 사실은 인정하지만, 강제노동이나 차별은 없었다는 식으로 왜곡하고 있다. 예를 들어, 전시 내용 가운데 부모님이 한국 사람으로 어린 시절 현지에 살았던 스즈키 후미오씨는 ‘조선 사람이라서 괴롭힘당한 걸 본 적이 없다, 반대로 귀여움을 받았다’는 식으로 증언한다. 스즈키씨의 부친은 강제동원기 훨씬 이전에 온 일반 노동자로, 강제동원의 실상을 알 수 없었고 스즈키씨가 군함도를 떠난 건 8~9살 때였던 1942년이다. 아울러 군함도는 아니지만, 다른 메이지산업혁명유산에서 중국인, 연합군 포로(네덜란드·영국·오스트레일리아 등) 강제동원 피해자가 있었다는 사실도 기억했으면 한다. 군함도와 다카시마에는 중국인이, 미쓰비시 나가사키 조선소에는 연합군 포로가 한국인과 함께 일했다. 산업유산정보센터는 중국인과 연합군 포로에 대해 완전히 침묵한다.”

―어떻게 바로잡아야 할까?

“강제동원으로 심각한 피해를 입었던 고 서정우씨 등의 증언이 서적으로 남았다. (이런 자료들을 통해) 군함도 탄광에서 사망한 노동자의 인원수나 이름을 추측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군함도에 1944년에 연행된 중국인은 204명인데, 이들 전원의 이름과 출신지를 알 수 있다. 전쟁이 끝난 뒤 작성된 미쓰비시의 ‘사업장 보고서’를 보면, 사망자나 공상병자의 기록이 있다. 화장·매장 인허증 등으로 이름과 출신지, 사망 상황 등을 알 수도 있다. 머나먼 고향을 떠나 이국땅에서 억울하게 죽은 희생자를 기억에 남기기 위한 전시는 얼마든지 가능하다.”

일본 시민단체 ‘나가사키 중국인 강제연행 재판을 지원하는 모임’의 신카이 도모히로 사무국장은 22일 <한겨레>와 한 비대면 화상 인터뷰에서 “일본 정부가 군함도 강제동원 역사를 부정하는 것은 불법적 식민지배와 아시아 국가 침략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정용 선임기자 [email protected]

숨쉬는 역사 위해 필요한 건 ‘진실’

일본 정부는 유네스코와 국제사회의 거듭되는 압력에도 불구하고, 강제동원 문제에 대한 적반하장식 태도를 바꿀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2015년 7월 세계유산위원회 산업혁명유산 심의 때 “1940년대 한국인 등이 ‘자기 의사에 반해’(against their will) 동원되어 ‘강제로 노역’(forced to work)했던 일이 있었다”고 인정한 것도, 이후 불가피한 합법 행위란 식으로 둘러대고 있다.

―이번 세계유산위원회 결정문 채택은 어떤 의미가 있나?

“강제노동을 이해할 수 있는 ‘전체 역사’를 전시하지 않은 것, 희생자를 기억할 전시가 없다는 것을 지적했다. 유네스코 정신에 걸맞은 지극히 공정하고 온당한 것이다. 세계유산위가 당연히 내놨어야 하는 것이고, 이 권고를 지지한다.”

―어떤 방향으로 매듭지어야 할까?

“일본 정부의 역사 부정·왜곡 움직임을 정말 우려하고 있다. 2차대전 패전 후 70여년 동안 전쟁과 침략 행위, 식민지배 등에 관해 올바른 역사인식을 확립하지 못한 결과다. 교육을 통해 역사적 진실을 알리고, 과거로부터 배우는 자세를 확립하는 게 중요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문부과학성을 포함한 일본 정부가 근본적으로 역사 인식을 바꿀 필요가 있다.”

일본 정부의 적반하장식 태도에 대해 각국 정부뿐 아니라 깨어 있는 시민단체들도 활동의 강도를 높이고 있다. 국내에선 민족문제연구소와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 등이 지난 16일부터 약 넉달간 서울 용산구 식민지역사박물관(historymuseum.or.kr)에서 ‘피해자의 목소리를 기억하라, 강제동원의 역사를 전시하라’ 기획전을 진행하고 있다. 일본 정부의 역사왜곡 문제에 대한 한·일 시민연대 온라인 공동행동도 본격화하는 등 더 강하게 어깨를 겯고 있다. 신카이 사무국장은 “전쟁 희생자, 피해자의 ‘소리 없는 목소리’에 귀 기울일 때 역사는 피가 통하고, 살아 숨쉬는 것이 된다”고 말했다.

홍석재 기자 [email protected]

<2021-07-24> 한겨레

☞기사원문: “일, 군함도 역사왜곡은 침략전쟁 인정 않겠다는 것”

월, 2021/07/26- 00:33
2
0

[보도 그 후] ‘미니풋볼’ 제작사, 메일로 입장 보내와… “한국인에 상처될 줄 몰랐다”

▲ 전세계적으로 천만 명 이상이 다운받은 “미니풋볼” 게임에 등장한 욱일기. 경기장 이름이 Rising Sun, 욱일이다. ⓒ 미니클립
▲ 전세계적으로 천만 명 이상이 다운받은 “미니풋볼” 게임에 등장한 욱일기. 경기장 이름이 Rising Sun, 욱일이다. ⓒ 미니클립

전 세계적으로 1000만 명 이상 다운로드 한 구글플레이 인기 게임 ‘미니풋볼(Mini Football)’에서 일본 군국주의의 상징인 욱일기 경기장이 삭제 조치됐다.

19일 <오마이뉴스> 기사 <천만 다운 게임에 버젓이 등장한 전범 상징 ‘욱일기’>(http://omn.kr/1ui8h)가 나간 직후에 취해진 조치로, 해당 내용을 제보한 김아무개씨는 “이렇게 빠르게 변화가 생길 줄 몰랐다”면서 “이제 마음 편하게 게임을 즐길 수 있게 됐다”라고 말했다.

미니풋볼을 제작한 미니클립 측은 보도 당일 오후 6시께 기자에게 이메일을 통해 “이 사안에 대해 사과한다”면서 “미니클립 측은 욱일기 경기장이 (한국인에게) 상처가 될 것을 전혀 인식하지 못했다. 게임에서 제국주의 깃발이나 메시지를 묘사할 의도가 전혀 없었다”라는 입장을 밝혔다. 그러면서 “다시 한 번 이와 같은 문제를 유발한 인식부족에 대해 사과드린다”라고 재차 강조했다.

한 마디로 욱일기의 의미를 몰라서 사용했다는 것인데, 앞서 18일 <오마이뉴스>는 미니클럽 측에 ‘나치의 상징인 하켄크로이츠와 다르지 않은 일제의 상징(욱일기)을 게임에 사용한 의도’를 직접 물은 바 있다.

앞서 개발사 미니클립은 지난 9일 공지를 통해 “7월 15일 떠오르는 태양 시즌(Rising Sun Cup)이 시작된다. 새로운 이벤트가 8월 12일까지 이어진다”라고 알리면서 게임 속 경기장인 ‘Rising Sun(욱일)’ 운동장 바닥에 욱일기와 같은 무늬를 새겨넣었다.

해당 게임에서 경기장 바닥 배경으로 사용된 ‘욱일’ 문양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이 사용한 제국주의 깃발 모양이다.

민족문제연구소가 작성한 ‘식민지 비망록’에 따르면 욱일기는 일본제국주의 침략전쟁 때마다 빠지지 않고 선봉에 등장했다. 일제는 시베리아 침략전쟁과 간도침공, 만주사변, 중일전쟁, 태평양전쟁 등 자신들이 일으킨 제국주의 전쟁 과정에서 ‘욱일기’를 선두에 걸고 전쟁에 임했다.

한편 게임 미니풋볼의 제작사인 미니클립은 스위스 눼샤텔주에 본사를 둔 회사로 2001년 창립했다. 이후 핸드폰 모바일 시장이 발전함에 따라 회사 규모 역시 가파르게 상승해 매년 £2억(3150억 원)이 넘는 수익을 창출하고 있다.

김종훈(moviekjh)

<2021-07-20> 오마이뉴스

☞ 기사원문: ‘욱일기’ 삭제 스위스 게임업체 “의도하지 않았다” 사과

※관련기사

☞오마이뉴스: 천만 다운 게임에 버젓이 등장한 전범 상징 ‘욱일기’

월, 2021/07/26- 22:10
2
0

[주장] 최초 지역축제 춘향제 위상, 최초 영정 돌려놔야 제대로 정립

▲ 최봉선과 춘향사당 1931년 춘향제를 시작한 남원권번 으뜸 기생 최봉선과 전국의 권번과 남원 시민들의 성금으로 지은 춘향사당 ⓒ 화면캡처

날도 뜨거운데 남원은 ‘춘향영정 문제’로 나날이 더 뜨겁다. 1년 가까이 진행되고 있는 춘향영정 봉안 문제는 잘 모르는 시민들에게는 한심하고 짜증나는 일이다. 최근 <연합뉴스>(7.22) 기사(친일 작가가 그린 남원 광한루원 ‘춘향 영정’ 교체 왜 늦어지나)에 달린 댓글만 봐도 ‘소설 속의 인물인데 무슨 영정이냐? 춘향이한테 제사도 지내냐?’ 하는 볼멘 소리가 끝도 없다.

춘향제는 1931년에 시작된 우리나라 최초의 지역 축제다. 일제강점기 남원 예기권번의 수기생이었던 최봉선의 제안으로 춘향 사당을 만들고 영정을 봉안한 뒤 제향을 올린 게 춘향제의 시작이다.

그렇다면 최봉선과 전국의 예기권번 기생들, 그리고 남원의 뜻있는 인사들은 왜 춘향제를 시작했을까? 당시 권번의 기생들은 흔히 생각하는 그런 창기가 아니라 사라져가는 전통예술의 맥을 잇는 예술인들이었다. 그런 기생들이 춘향의 제사를 지낸 이유를 알면 영정 문제를 결코 ‘쓸데없는 짓’이라고 말할 수 없다.

춘향제는 남원 사람들만의 행사가 아니었다. 전국의 예기권번에서 성금을 냈고 100여명의 대표 기생들이 참여해 제향을 올리고 광한루에서 판소리 명창 대회를 했으니 가히 전국구 행사였다. 구경꾼들도 전국에서 수만 명 씩 몰렸다.

춘향사당을 짓는 운동은 1929년부터 시작되었다. 1929년은 만세운동 10주년이 되는 해였고 전국의 신간회와 청년동맹, 형평사 같은 항일운동 단체에서 제2의 만세운동같은 대규모 시국대회를 준비했다가 발각이 되어 조직이 와해되기 시작한 해다. 11월에 광주학생독립운동으로 수많은 학생들이 검거되자 신간회가 다시 일어서고자 했으나 탄압을 받아 결국 국내 독립운동은 거의 힘을 잃게 되었다.

‘남원항일운동사’에 의하면 당시 남원에도 항일운동 단체로 신간회와 청년회, 형평사가 있었다. 1929년 2월 신간회 부지회장 겸 총무로 뽑힌 이현순, 그리고 청년회 회장이었던 정광옥, 이 두 사람에겐 공통점이 있었다. 바로 최봉선과 함께 춘향사당 건립운동의 핵심 인사들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또 하나 중요한 것, 전북 권번을 연구한 논문에 의하면 전북에서 유일하게 남원권번에서는 돈줄이었던 일본사람들을 상대하기 위한 필수 요건이었던 일본말을 안 가르쳤다고 한다. 최봉선은 인물도 뛰어날 뿐만 아니라 명창으로도 유명했으며 구례 수재민 돕기 공연을 펼치기도 한 매우 비범한 기생이었다.

최봉선은 29세에 기생을 그만두고 부산관이라는 유명한 요릿집을 운영하면서도 사당 할매로 불릴만큼 영정과 사당을 지키는데 헌신했고 6.25전쟁 때는 영정을 머리에 이고 피난을 가서 영정을 구하기도 했다. 그리고 전 재산을 제수답으로 기증해 춘향제가 지속될 수 있도록 했다.

이런 역사가 있기에 춘향선양회에서 발행한 ‘춘향제 60년사’에서는 춘향제의 시작을 ‘일제 하에 잠든 민족혼을 깨우쳐 주면서 춘향정절의 숭고한 정신을 우리 민족 모두의 가슴 속에 뿌리내려 춘향전의 문예적 가치를 만방에 빛낼 목적으로 발상하였다’고 정리했다. 그리고 남원시민들은 지금까지 한 해도 거르지 않고 91년 동안 춘향제를 지내왔다.

그런데 춘향영정에는 우역곡절이 많다. 1937년 중일전쟁이 터지자 조선식산은행장 하야시 시게조가 내선일체의 방편으로 당시 가장 인기 아이템이었던 춘향을 악용한 것이다. 당시 조선 고위층 부인들이 조선 총독에게 전쟁 승리를 위해 쓰라며 패물과 돈을 바치는 ‘봉차금납도’라는 그림을 그린 당시 최고의 화가 김은호에게 춘향 영정을 새로 그리게 했다. 그 때 그림값을 낸 사람은 호남은행장 현준호였다. 김은호와 현준호는 반민족친일인명사전에 나오는 우리나라 대표 친일파다.

▲ 춘향제를 탄생시킨 춘향영정 60여년간 남원향토박물관 수장고에 보관돼 있던 최초 춘향영정.이 영정을 사당에 봉안하고 제향을 지내면서 춘향제는 시작되었다. ⓒ 남원향토박물관

그 때 김은호가 그린 춘향이는 일본과 식민지 치하 조선에서 엄청나게 인기를 끌었던 일본 전통극 가부키 형식의 춘향전에 등장하는 얼굴 하얀 춘향이었다. 그리고 그 춘향이를 16세 아가씨로 그렸다. 본래 영정은 어사부인이 된 30대 쪽진 머리를 한 춘향이였는데 말이다.

일제는 봉안식이 아니라 일본의 신사에서 하는 ‘입혼식’을 한 뒤 본래 있던 영정 위에 일본 춘향이를 덧세우게 했다. 내선일체를 상징하는 이중 봉안이었다. 그런 치욕을 견디며 해방을 맞았건만 친일파 청산이 안 됐듯이 김은호가 그린 영정도 치워지지 않았다. 그러다 한국전쟁이 터졌을 때 누군가 김은호가 그린 영정을 칼로 찢어 버렸다. 일제의 국민정신총동원 전남 이사장이었던 현준호도 광주에서 피살되었다. 그렇게 끝났어야 했다. 그렇게 끝났다면 오늘의 영정 싸움도 일어나지도 않았을 것이다.

1961년, 6.25때 훼손되어 없어진 영정과 똑같은 영정이 다시 춘향사당에 쳐들어 오는 일이 벌어졌다. 박정희 정권의 내각수반이었던 송요찬이 ‘외국인 관광객을 위해 이쁜 춘향이로 대치하라(1965.5.11 조선일보)’는 명령과 함께 원래 영정을 내쫓고 김은호가 새로 그린 춘향이를 다시 올린 것이다. 그 춘향이는 예전에 없어진 것과 거의 똑같은 왜색 춘향이 그림이었다.

2021년 올해는 최초 영정이 쫓겨난 지 60년이 되는 해다. 1965년 조선일보에서 최봉선은 ‘관에 밀려난 고전 춘향의 초상화를 반드시 돌려 놓겠다고 관에 선전포고’를 했다. 그리고 1966년 신문 기사를 마지막으로 최봉선이라는 이름조차도 남원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진다.

그렇게 잊혀진 이름 최봉선과 최초 영정의 존재는 작년 친일화가 김은호의 그림을 내린 뒤 다시 떠올랐다. 영정이 남원 향토박물관 수장고에 걸려있었던 것이다. 남원시는 당연히 그 영정을 본래 자리로 돌려놓으려 했다. 그러나 일부 시의원들이 좀 더 많은 시민들의 의견을 들어봐야 한다며 봉안을 막았고 거의 1년 가까이 시민들의 뜨거운 원성을 무시한 채 봉안을 미루고 있다.

미루는 것뿐만 아니라 작년 12월부터 ‘춘향영정 제작(선정) 기본계획 용역’ 설문조사(최초 영정 봉안이 우세하게 나왔으나 발표하지 않음)와 연구용역을 실시했다. 처음부터 완전히 새로 그리기로 작정한 것이었기에 연구용역 결과는 그런 결과가 나왔다. 미술사 관련 전공자들로만 구성된 연구자들이 연구한 것이었는데 그들은 보고서만 내놓고 지금까지 발표의 의무를 수행하지도 않고 있다.

그러면서 남원시는 최근 연말 안에 제3의 작품을 공모할 계획이라고 언론(7월22일 연합뉴스)을 통해 밝혔다. 그 이유는 최초 영정의 작가가 정확하지 않고(강수주 화백 낙관이 없고) 소설 속 춘향이는 16세인데 반해 영정 속 인물은 30대 어사부인이고 복식이 조선시대가 아닌 1920년대라는 이유다. 시가 이렇게까지 영정을 새로 그리려는 진짜 이유가 뭔지 시민들은 몹시 궁금하다. 최초 영정은 안 된다면서 시에서 말한 세 가지 이유에 대한 답은 내가 알려주겠다.

서슬 퍼런 일제강점기에 민족혼을 되살리기 위해 그린 영정에 누가 낙관을 찍을 수 있겠는가? 본래 영정에는 낙관을 안 찍는 경우가 많으며 조선 후기에 그려진 김수로왕의 영정도 작가를 알지 못한다. 그래도 잘 봉안되어 있다.

복식과 나이가 안 맞는다고 했다. 최초 영정은 소설 속 예쁜 춘향이를 그린 게 아니다. 모진 고난을 이기고 신분을 뛰어넘어 사랑을 쟁취한 열녀를 그린 것이다. 그 항거정신과 한 남자를 향한 정절을 우리 민족을 향한 것으로 바꿔서 영정을 그렸다. 그래서 일제강점기인 1920년대 복식과 열녀로서 완성된 30대 어사부인을 그린 것이다. 열여섯살 예쁘기만한 어린 춘향이에게 뭐하러 제사를 지내겠는가? 이런 역사성을 이해한다면 저런 이유를 댈 수가 없다.

대한민국 최초의 지역축제인 춘향제의 위상은 최초 영정을 제자리에 돌려 놓을 때 비로소 제대로 정립될 수 있다. 일제의 내선일체 정책에 악용된 춘향제가 아니라 민족정신을 고취시키기 위한 민족운동의 하나로서 말이다. 그렇기에 이 싸움은 뒤틀린 역사를 바로 잡는 매우 가치있는 일이고 굵은 땀방울이 아깝지 않은 뜻깊은 일이다. 1931년작 최초 춘향영정은 미술 작품이 아니고 영정이며, 박물관이 아니라 반드시 사당에 봉안되어야 한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는 남원작은변화포럼 대표이자 역사동화작가입니다.

<2021-07-26> 오마이뉴스

☞기사원문: 춘향 영정 공모하겠단 남원시… 납득할 수 없는 이유

화, 2021/07/27- 07:05
2
0

간토대지진 희생 조선인 추도 비문

1923년 9월 간토대지진 당시 일본인의 폭동으로 희생된 조선인 6천여 명을 추도하는 도쿄도 위령당 내의 비문. [연합뉴스 자료사진]

(서울=연합뉴스) 정성조 기자 =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 등 시민사회 원로들은 26일 성명을 내고 1923년 일본 간토(關東) 대지진 당시 조선인 학살 사건의 진상규명과 추모사업 진행을 촉구했다.

이들은 “2023년은 간토 대지진 조선인 학살 100주기가 되는 해로 이제라도 일본 정부는 진상을 공개하고 공식 사과해야 한다”며 “한국 정부와 국회도 나서 자료 보존과 공개를 일본 정부에 요구하고, 9월 1일을 국가 추모일로 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성명에는 김자동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장, 박만규 흥사단 이사장, 송인동 한국YMCA전국연맹 이사장, 윤경로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 위원장, 이만열 시민모임 독립 이사장, 이종찬 국립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건립위원장, 지선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이사장, 함세웅 민족문제연구소 이사장 등 원로 17명이 참여했다.

<2021-07-26> 연합뉴스

☞기사원문: 시민사회 원로들 “日간토학살 진상규명·추모사업해야”

※관련기사

☞오마이뉴스: 최소 6600여명의 학살… 일본 의원도 나섰는데 우리 의원은 왜 말이 없나

☞오마이뉴스: “일본을 벌하라, 나는 죄가 없다” 예순 두군데나 찔린 조선인이 남긴 유언

화, 2021/07/27- 06:50
0
0

2021년 7월 28일
[주진우 라이브] KBS 1 Radio FM 97.3MHz 월-금 17:05~19:00

▷[훅인터뷰] 김영환 민족문제연구소 대외협력실장
– 일본 군함도 유네스코 등재, 역사왜곡이 아닌 과거사 직시의 현장이 되어야

목, 2021/07/29- 05:41
0
0

김민철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l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위원

김민철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모처럼 상식적인 이야기가 중국에서 전해졌다. 지난 7월 16일부터 코로나19로 인해 온라인으로 진행된 제44차 세계유산위원회가 의제 중 하나인 ‘일본 메이지 산업혁명 유산: 철강, 조선, 석탄산업(이하 메이지 산업혁명 유산)’에 대한 등재 후속 조치 이행을 촉구하는 결정문을 초안대로 채택했다. 초안은 유네스코와 국제기념물유산협의회(ICOMOS) 공동조사단이 올해 6월 7일부터 9일까지 도쿄 산업유산정보센터 방문과 온라인 회의를 통해 정리한 보고서와 결론을 토대로 만든 것이다.

조사단의 임무는 ①각 시설의 전체역사 해석전략 ②한국인 등 강제노동 이해 조치 ③희생자 추모 조치 ④국제 모범 사례 ⑤당사자간 대화 등 다섯 가지 사항에 대해 일본정부가 2015년 등재 당시, 그리고 이후에 한 약속들을 충실히 이행하고 있는가를 조사해서 보고하는 것이었다. 조사 결과, “조사단은 위원회 결정의 여러 측면이 준수되었고 일부는 모범적인 방식으로 준수되었고 당사국의 여러 약속도 충족되었지만, 산업유산정보센터는 등재 당시 당사국이 한 약속이나 등재 당시와 이후에 세계유산위원회의 결정을 아직 완전히 이행하지 않았다고 결론지었다(조사단 보고서, 22쪽).”

디지털 해석 전략이라는 기술적인 부분에서는 증강현실(AR) 지도와 몰입형 다중 디스플레이를 사용하여 세계적인 모범 사례를 구축했다고 평가했으나 한국 정부와 한일 시민단체와 강제동원 피해자 유족들이 문제로 제기한 ‘전체 역사’에 관해서는 “여전히 불충분하며” 산업유산정보센터에는 강제노동에 대한 기술이 없고, 희생자 추모를 기리는 시설도 없음에 ‘강한 유감’을 표명했다. 한일 양국 정부와 전문가들의 의견 청취, 현장 방문과 관련 자료 조사 등을 근거로 보고서가 만들어졌기 때문에 보고서 내용은 매우 공정하고 객관적으로 서술되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제44차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는 지난 22일 군함도 탄광 등 일본 근대산업시설 세계유산 등재 후속조치 불이행에 대해 강한 유감을 표명하고, 충실한 이행을 촉구하는 결정문을 컨센서스로 채택했다. (사진합성·일러스트=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한 마디로 말해서 “약속을 이행하지 않았다”는 것이 조사단의 보고서와 세계유산위원회의 결정문이 지적하고 있는 핵심이다. 단순하지만 무게 있는 이 지적에 일본은 야단법석이다. 사실과 다르다니 한국 정부가 로비한 탓이라니 하면서 구차한 변명을 늘어놓고 있다. 국제적으로 망신살을 뻗친 것이다. 이 망신살은 이미 예견된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메이지 산업혁명 유산은 등재에서부터 산업유산정보센터 운영에 이르기까지 가토 고코라는 특정 인물을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다. 공적 자산이자 공공기념 시설이 이처럼 한 개인에 의해 좌지우지 되는 것부터가 공공성을 상실한 것이며 일본 민주주의를 위해서도 불행한 일이다. 더 심각한 문제는 가토 고코와 그가 전무이사로 있는 산업유산국민회의가 ‘역사수정주의’에 기초하여 메이지 산업혁명 유산을 관리하고 있다는 점이다.

독일의 역사수정주의자들이 홀로코스트를 부정하거나 모든 전쟁이 다 그렇다는 식으로 범죄성을 희석시키려 하듯이 일본의 역사수정주의자들은 식민지배와 침략전쟁을 부정한다. 또한 난징대학살과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비롯한 강제동원과 강제노동의 역사를 교과서와 기념시설에서 삭제하려 한다. 그래서 어느 일본 평론가는 일본 역사수정주의를 “썩은 내 나는 것에 비단보를 덮어씌운 신판 황국사관”이라고 비판했던가. 그런데 최근 수년 동안 일본의 역사수정주의자들은 ‘부인’과 ‘부정’을 넘어 오히려 한국 정부와 강제동원 피해자·유족들이 역사를 날조하고 왜곡하고 있는 거짓말쟁이라고 국제무대에서 공격하고 있다. 산업유산과 관련해서는 산업유산정보센터를 위탁 운영하고 있는 산업유산국민회의가 그 중심에 서있다.

산업유산정보센터 3구역(참조 전시실)은 어린 시절 하시마 섬에 살았던 주민들의 구술 영상으로 가득 채워져 있다. 민족차별 없이 사이좋게 잘 지냈으며 강제노동도 없었다는 게 주요 내용이다. 가토 고코는 “한국이 왜곡된 역사를 선전하는 걸 바로잡기 위해서” 3구역을 만들었다고 조사단에 말했다. 탄광 노동을 하지 않았던 어린애들의 이야기로 수많은 강제동원·강제노동 피해자들의 생존 증언을 부정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발상 자체가 어처구니없다. 더구나 그 피해자들은 한국인뿐만 아니라 중국인도 있으며, 인근 다카시마탄광에서는 연합군 포로들도 있었다. 주민들의 말대로라면 피해를 증언했던 그들 모두가 거짓말쟁이가 돼야 한다. 조사단의 질문은 왜 이런 피해자들의 증언은 전시돼 있지 않느냐는 것이다. 그런 내용을 전시하는 흉내라도 냈더라면 보고서가 아마 이렇게까지 나오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좀 더 근본적인 비판을 하면, 산업유산정보센터를 비롯해 산업유산을 홍보하는 자료에는 일본인 노동자들의 삶조차 반영돼 있지 않다. 산업유산의 명암이 제대로 담겨져 있지 않다는 것이다. 산업유산에는 단지 아시아 최초의 산업혁명 유산이라는 기계와 ‘성공’이라는 빛바랜 신화만 등장한다. 이 유산에서 기술자와 노동자들이 흘린 땀과 노력, 한숨과 눈물, 저항과 좌절, 그리고 희망과 절망 등을 읽어낼 수는 없다. 아니 그 흔적이라도 다음 세대에게 알려주려는 시도조차 보이지 않는다. 남은 것은 박제화된 전시장과 상품으로 바뀐 체험관, 그리고 녹슨 기계들뿐이다.

일본 정부가 다음 세계 산업유산으로 사도광산을 등재하려고 한다. 이 사도광산의 정보센터에는 일본인 노동자가 읊은 <나의 노래를>이라는 글이 전시될 수 있을까.

“사도금광은 나라의 보물. 언제나 황금꽃이 핀다. 조그마한 연립주택에서 광산으로 창백한 노동자의 행진곡소리-아직 밝지 않은 아이카와 바다로 퍼진다. 여기에 천 명의 삶은 굳어지고 눈뜨고 볼 수 없는 지하의 노동. 노동자는 바뀌고 또 바꿔서 오랜 세월 여기 무덤의 왕국 전각을 쌓아 올리고, 광산의 소리는 날마다 울려 퍼지는데- 그 소리는 우리들의 소리일까? 지하 1천 척 갱도에서 생명줄 칸델라에 죄수처럼 곡괭이를 흔드는 노동자, 오늘도 ‘규폐’로 피폐해진 2번 갱의 노동자, 불사신의 나는 날마다 비틀거리고, ‘비틀거리’면 휴지조각처럼 버려지는 나, 놈들은 결코 그것을 돌보지 않는다.”(1931년)

세계유산위원회가 권고한 ‘전체 역사’란 바로 이런 것을 포함한다. 그럴 때 비로소 산업유산은 ‘희생자의 존엄성을 회복하는 장, 시민 학습의 장, 국제적인 학술 교류의 장’으로서 기능할 것이다. 필자는 한일 정부와 시민사회에 산업유산정보센터를 역사 갈등의 장이 아니라 함께 ‘동아시아 공동 기억의 집’으로 만들어 가자고 여러 차례 제안했다.

그러나 지금의 산업유산정보센터를 볼 때, 이런 제안은 사치스럽다. 세계유산위원회가 결정문을 채택하자 가토 고코는 산업유산국민회의 누리집에 올린 ‘유네스코 결의, 유네스코·이코모스 전문가 보고서에 대해’라는 글에서 보고서 내용이 사실에 반하며, 전문가들이 한국인 피해자를 전쟁포로(POW)로 잘못 알고 있다고 황당한 주장을 한다.

도대체 어느 전문가가 한국인 강제동원 피해자를 전쟁포로라 했는가. 산업유산의 ‘전체 역사’에 한국인 외에 연합군 포로도 강제노동했다는 사실을 기록하라고 요구한 걸 이렇게 이해하고 있다. 오해인가 무지인가. 게다가 그는 ‘희생자’에 대한 견해가 조사단과 다르다고 항변한다. 그는 희생자라는 단어가 가해자를 전제하기 때문에 이 용어를 쓰기 싫어하는 속내를 내비친다. 그래서 그냥 산업재해로 죽은 사람들을 소개하는 것으로 ‘희생자 추모’를 대체하려는 편법을 제시한다. 위원회의 결정을 전혀 외면할 순 없으니 이런 저런 형태로 물타기를 시도하려는 모양이다. 여전히 갈 길이 멀다.

<2021-07-28> 대한민국 정책브리핑

☞기사원문: ‘군함도’ 국제 약속 안지킨 일본, 고립을 자초하다

※관련영상

목, 2021/07/29- 00:00
1
0

진주 민간인 학살 유족 증언록

사진 진주시 명석면 명석고개 진주지역 유해 임시 안치소.

올해는 한국전쟁이 발발한 지 71주년이다. 전쟁과정에서 남북한에 걸쳐 수많은 전사자와 부상자가 발생했다. 군과 경찰에 의한 민간인학살과 함께 인민군과 좌익에 의한 학살도 자행되었다. 진주에서는 명석면과 용산면에서 국민보도연맹 가입자를 중심으로 많은 민간인학살이 있었다.

단디뉴스는 민간인학살 유해 공동발굴단에서 제1차~11차까지 자원봉사자로 활동한 김영희님의 글을 통해 전국각지 유해발굴 현장의 기록과 발굴을 둘러싼 사연, 증언록에 실린 생생하고 가슴 아픈 증언, 남겨진 과제 등을 15회에 걸쳐 연재할 계획이다. 연재가 한국전쟁의 기억을 되새기고 화해와 치유에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 편집자 주 –

「학살된 사람들 남겨진 사람들」 연재 계획.

▲ 진주국민보도연맹 사건 배경

한국전쟁 기간 동안 진주지역은 왜 다른 지역보다 유달리 ‘보도연맹(保導聯盟)’ 가입자와 민간인 희생자가 많았을까? 이러한 의문을 풀기 위해서는 진주지역만이 가지고 있는 특수한 사회-문화사적 배경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진주는 물산이 풍부한 지역으로 고려시대부터 중요한 거점 행정단위인 ‘목(牧)’이 설치되었다. 특히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정 3품에 해당하는 목사(牧使)를 파견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1800년 이후부터 세도정치의 발호로 인해 국가 기강이 무너지면서 각종 수탈과 빈부격차가 커지면서 진주는 이 지역만의 사회-문화사적인 특징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즉 진주지역이 갖는 독특한 특징을 규정 지울 수 있는 역사적 사건 세 가지가 최초로 발발하였다.

이러한 세 가지 큰 사건들은 진주지역을 상당히 진보적인 성향을 나타내주는 사건이라 할 수 있으며, 결국 한국전쟁 기간에 민간이 대학살이라는 비극적인 사건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주게 되었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조선 후기 임술년(1862년)에 진주민 유계춘의 주동으로 수만 명이 삼정의 문란과 탐관오리의 세금 착취에 저항한 임술농민항쟁(壬戌農民抗爭)이 최초로 진주에서 발발한다. 이 저항은 진주민의 사회의식의 성장에 기폭제가 되었다.

둘째, 1923년부터 일어난 백정들의 신분해방운동인 형평운동(衡平運動)이다. 진주에서 이학찬, 장지필 등 백정 출신과 강상호, 신현수, 천석구 등 양반 출신이 합심하여 조직을 결성한다. 당시 백정이라는 신분은 법제상으로는 해방되었으나 실질적으로는 여전히 차별이 지속되어 결국 차별 해소를 요구했는데, 이에 개화 양반들도 참여하는 등 많은 이들의 호응을 얻었다. 이 사건은 진주라는 지역이 상당한 진보적인 성향을 갖게 되는 데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셋째, 조선에서 맨 처음으로 소년운동의 깃을 든 곳이 바로 진주이다. 강영호(姜英鎬,1896~1950) 선생은 진주 출신 소년 운동가로 동경대학에서 문학 공부를 하였다. 당시 일본 유학 시절에 한국 학생들과 함께 처음으로 어린이 운동단체를 만들고자 했다. 1923년 방정환 선생을 비롯해 강영호, 고경인, 박춘성 등 뜻이 맞는 사람들과 어린이 문화 운동단체 ‘색동회’를 조직한다. 당시 일제강점기 시대 속 민족계몽 정신을 아이들에게 심어주고자 하였고, 처음으로 어린이날 행사를 시작한다. 그리하여 1920년 진주소년운동으로 시작되는 아동문학운동이 진주 문학의 싹이 되기도 했다. (주1)

사진 2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아 풀만 무성한 강상호 선생 묘지

또한 진주사범학교 등 중등학교가 4개나 있어 교육받은 인력이 많이 배출되어 진보적인 환경이 조성되었고, 이러한 인적자원을 바탕으로 사회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이처럼 사회운동의 기반이 되어 진주지역 보도연맹은 가입자도 많았고 희생자도 많았다. 진주지역에서 해방 후 정치적 갈등은 1946년 ‘대구10월사건’이(주2) 발생하면서 본격화되었다. 10월 7일에 경남으로 파급되면서, 진주와 마산에서 가장 격렬했다. 진주지역에서는 봉기가 일어나 진양군 정촌지서, 대평지서, 명석지서 등이 시위자들에게 점거되었다.

이후 시위자들이 경찰이 발포하여 16명이 사살되었고, 시위자 100여 명이 체포되었다. 당시 주모자로 체포된 인민위원장 강대창 등 6명이 미군정 법정에서 사형을 언도받았다. 이때부터 진주형무소에는 좌익사범들이 넘쳐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진주는 빨치산의 근거지였던 지리산 인근에 위치하여 지리산에 은거하던 빨치산이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전까지 진주형무소를 자주 습격하였다. 1949년 10월 말경에 빨치산이 진주형무소, 진주시청, 진양군청을 습격하기도 한다.

이후 진주보도연맹은 1949년 12월 8일 진주극장에서 자수자와 전향자 등 천여명이 참여하고 진주경찰서장(이정용)이 이사장을 맡고 진주인민당 위원장(박진환)이 간사장을 맡아 결성된다.(주3)

좌(사진 3 형평운동 기념탑 칠암동 경남문화예술회관 건너편), 우(사진 4 신현수 선생 頌公碑(송공비) 망진산 봉수대 아래).

▲ 진주국민보도연맹 대학살 희생 경위

1945년 9월 초순 남한의 형무소 재소자는 모두 2,600명이었다.(주4) 그러나 1926년 7월에는 17,000여 명으로, 1948년 봄에는 22,000여 명으로 늘었다.(주5) 그 후에도 전국 19개 형무소 재소자 수는 계속 늘어나 1950년 1월에는 48,000여 명에 이르렀다. 진주형무소는 한국전쟁 당시 직원이 120명이며 재소자는 1,000여 명이 수용되어 있었다.(주6) 재소자 중 가장 많이 수감되어 있었던 재소자들은 정치범들이었다. 진주 형무소에는 진주지청 산하 진주, 사천, 하동, 의령, 합천, 산청 등지에서 온 좌익사범들이 수용되어 있었다.

그 후 정부는 1950년 2월 11일 국회본회의에서 좌익인사들의 보도연맹 강제 가입을 종용하여 협박하면서 한 개 군에 일만 명 가입시킬 것을 지시한다. 1950년 6월 25일 내무부 치안국은 「전국요시찰인 단속 및 전국 형무소 경비의 건」(城署査 제 1799호) 제목의 비상 통첩으로 전달하고 1950년 6월 29일 ‘불순분자 구속의 건’, 6월 30일 ‘불순분자 구속처리건’과 석방금지령을 지시한다. 7월 11일 ‘불순분자 검거의 건’을 하달하고 전국 보도연맹원 예비검속(혐의자를 미리 잡아 가두어 놓는 일)을 단행하라 지시한다.

당시 진주경찰서는 1950년 7월 15일 진주시와 진양군 관내 지서 별로 보도연맹원을 예비검속하여 지서에 소집하고 진주경찰서로 구금한다. 구금 기간이 7일~10일 정도인데 그 기간 중 심사를 거쳐 갑, 을, 병으로 분류되었다. 일부는 진주형무소로 이송되었고, 진주형무소에는 산청, 진주, 삼천포, 하동, 의령, 진양군, 사천 등지에서 끌려온 사람도 있었다. 그리고 1950년 7월 하순부터 진주는 하동에서 진격해오는 인민군 제6사단(사단장 방호산)과 함양으로 진격해오는 인민군 제4사단(사단장 이권무)에 의해 점령 위기에 처하면서(주7) CIC(특무부대), 헌병, 경찰이 7월27일부터 후퇴하기 시작했다.(주8)

진주형무소 재소자와 진주지역 보도연맹원들은 그 직전에 집중적으로 학살되었다. 진주경찰서 구금자 중 ‘갑’으로 분류된 사람들은 7월 21일경 학살되었으며, 나머지 사람들도 7월 26일까지 몇 차례에 걸쳐 학살되었다. 그리고 진주형무소에 구금된 보도연맹원과 재소자들도 7월 22일부터 7월 26일 사이에 명석면 관지리, 우수리, 용산리, 문산 상문리, 마산 여양리 등에서 모두 학살되었다.

사진 5 진주형무소 재소자 희생사건과 진주국민보도연맹 사건 발생장소

▲ 제노사이드(집단학살범죄)는 무엇일까?

세계적으로 제노사이드는 고의로 혹은 제도적으로 어떤 민족, 종족, 인종, 종교, 이념 집단의 전체나 일부를 파괴하는 집단학살을 말한다. 권력을 가진 지배자 혹은 특정 집단이 어느 한 집단을 영원히 제거하기 위해 소위 씨를 말리는 전쟁을 벌이는 것이다. (주9) 이와 유사한 용어가 ‘홀로코스트’가 있다. 홀로코스트는 제2차 세계대전 중 나치 독일에 의해 자행된 유대인 대학살을 지칭하는 고유명사로 사용한다. 전쟁에서 군인은 적국의 군대와 싸운다.

그러나 제노사이드는 특정 집단의 사람들을 상대로 전쟁을 벌이는 것이다. 권력을 가진 지배자 혹은 특정 집단이 어느 한 집단을 영원히 제거하기 위해 소위 씨를 말리는 전쟁을 벌인다. 가해자들은 희생자들의 문화와 역사를 포함한 모든 흔적을 지우려고 한다.

한국전쟁 당시 우리나라에서도 집단학살범죄가 자행되었다. 한국전쟁이 시작되고 국민보도연맹원들의 학살은 대다수가 이승만 대통령이 맥아더에게 한국군 작전지휘권을 넘긴 1950년 7월 14일 이후부터 9월 하순 집단학살 금지령이 내려질 때까지 계속됐다. 당시 국민보도연맹원이 몇 명 학살당했는지 정확한 통계는 없다. 다만 보도연맹원 가입자 수가 30만 명 내지 35만 명이었다는 통계가 있고, 서울의 보도연맹원 수가 1만 9,800여 명이었다는 기록(동아일보 50년 5월 5일 자)이 있고 학살된 보도연맹원들이 최소한 15만 내지 20만 여명으로 추산된다.(주10) 세계적으로 자행되었던 제노사이드의 대표적 사례(민족, 종족, 인종, 종교, 이념)는 다음과 같다.

민족 청소’의 사례로 ‘옛 유고슬라비아의 민족 청소’가 있다. 1991년 세르비아가 크로아티아를 침공함으로써 4년에 걸친 전쟁이 시작되었다. 보스니아계 세르비아인들은 피란민 주거지인 스레브레니차에서 일주일 만에 8,000여 명의 보스니아 성인 남자와 소년의 목숨을 빼앗았다.

종족 청소’의 사례로는 아프리카 르완다의 제노사이드를 들 수 있다. 르완드를 식민지 지배한 벨기에는 소수 투치족을 활용하여 다수의 후투족을 지배했다. 종족간의 갈등이 누적된 결과 독립 후 후투족은 투치족을 100일 만에 대략 80만 명을 학살했다.

홀로코스트’, 악명높은 유대인 대학살은 ‘인종 청소’다. 1933년에 권력을 잡은 히틀러는 독일을 단일 인종인 ‘아리안’의 땅으로 만들고자 하였다. 반유대인법을 만들고 유럽 전역에 강제 수용소를 15,000여 개나 설치했다. 2차 대전 중 유럽의 950만 유대인 중 600만여 명이 나치의 손에 살해되었다.

오스만 제국의 아르메니아인 학살은 ‘이교도(異敎徒) 청소’의 경우다. 이슬람교를 믿는 오스만 제국은 기독교를 믿는 아르메니아인을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로 대량 학살했다. 1894년부터 1896년까지 10~30만 명의 아르메니아인이 목숨을 잃었다. 제1차세계대전 과정에서 아르메니아인 100만 명이 살해당했고, 최소 50만 명이 추방되거나 탈출한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

캄보디아 ‘킬링필드’는 ‘이념 갈등에 따른 집단학살’ 사례다. 냉전 체제하에서 1975년에 집권한 크메르루주는 도시민, 지식인들을 농촌으로 강제 이주시키고 반대 세력에 대해 숙청, 고문, 학살을 자행했다. 크메르루주 정권 아래 기아, 고문, 처형, 강제노동 등으로 목숨을 잃은 사람은 당시 인구의 4명 가운데 한 명 꼴인 170만∼220만 명으로 추산된다.

세계적으로 발생한 제노사이드의 다섯 가지 사례를 간략히 살펴보았다. 우리나라는 이념적 갈등 속에서 집단학살이 자행되었다. 집단학살을 하기 위한 수단으로 법적 근거도 없는 국민보도연맹이란 기구를 결성한 것이다. 국민보도연명이란 도대체 어떤 기구인지 살펴보자.

▲ 국민보도연맹(國民保導聯盟)이란 무엇인가?

국민보도연맹은 이승만 정권이 국민의 사상통제를 목적으로 조직한 반공단체다. 1948년 12월 시행된 국가보안법에 따른 좌익 전향자를 계몽・지도한다는 취지로 1949년 4월 20일 관변단체인 국민보도연맹이 결성된다. 국민보도연맹은 1949년 9월20일부터 지방지부 조직에 착수하는데,(주12) 도내 각 경찰서 단위로 하부조직을 설립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주11) 한국전쟁으로 1950년 6월 말부터 9월경까지 수만 명 이상의 국민보도연맹원이 군과 경찰에 의해 살해되었다.

국민보도연맹 경상남도연맹(약칭 경남도연맹)은 1949년 11월 11일 경남 경찰국 무도회관에서 ‘임시발기인대회’를, 13일에는 부산지법 회의실에서 ‘정식발기인대회’를, 15일에는 ‘결성대회 정식 준비위원회’를 개최하였고, 20일 ‘결성선포대회’를 개최함으로써 출범하였다. 이후 경상도 산하 각 시•군 연맹과 읍•면 지부가 결성된다. 검•경 당국은 1949년 10월25일부터 1949년 11월30일까지 남로당원 자수 주간을 설정하고 대대적인 자수•전향 작업을 진행한다. 경남도연맹에서 발표한 경남의 자수전향자는 5,548명이었다. (주13)

조직결성 명분은 ‘개선의 여지가 있는 좌익세력에 기회를 준다’ 는 것이었다. 그리고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재생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고 가족의 생명•재산 등을 보호하여 준다’며 남로당원 자수 주간을 선포하였다. (주14) 그러나 1950년 2월 11일 제11차 국회 본회의에서 ‘보도연맹에 가입하지 않으면 신분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협박까지 하면서 1개 군에서 만 명에 가까운 사람들에게 가입을 종용하였다. 이로 인해 좌•우익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사람들까지 가입되어 좌익이라는 낙인이 찍혔다’(주15)

1949년 12월 2일 경상남도 경찰국 발표에 의하면, 집단학살사건은 경남도 내 어느 한 곳도 빼놓지 않고 자행되었는데, 시•군마다 200여 명에 달하는 보도연맹원과 예비검속자, 진주, 마산, 부산 형무소 수감재소자 및 예비검속자 3,300여 명을 비롯 약 7,000여 명 정도가 희생된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주16)


진주지역의 자수전향자는 259명이었다. (주17) 진주경찰서는 좌익활동 전력자뿐만 아니라, 농민조합 등에 가입했던 사람, 각종 시위나 행사의 단순 가담자, 그들의 친인척, 빨치산에게 식량 등을 제공했던 사람, 또는 국민보도연맹이 어떠한 단체인지도 모르던 농민들까지 여기에 가입하게 했다. 가입한 보도연맹원에게는 통제 목적으로 보도연맹원증을 발급했으며 지서 별로 이들을 훈련, 교육하는 등 조직적으로 관리했다.

국민보도연맹원 가입 당시에는 사상이 무엇인지조차 모르는 일반 국민들이 다수 가입되었으며, 배급을 준다거나, 비료를 준다, 아니면 글을 가르쳐 준다는 등으로 회유하였으며, 협박과 강압에 의한 강제 가입까지도 불사했던 것으로 보인다. 다음은 이를 입증하는 당시 보도연맹에 가입 권유를 받은 사람의 증언이다.

“나는 보도연맹에는 가입하지 못했제. 순사가 몇 번 찾아와서능 가입하면 글을 배와준다카데, 배급도 주고 가입 하고자프믄 지서로 오먼 된다카더마. 그래 지서에 갈라꼬 뱃가(나루터)에까징 갔제. 그란데 배가 없능기라 그래서 도라왔제. 지금 생각해도 기가 막히는구마. 만일에 내가 그때 배를 타고 갔시모 내도 그때 죽었을기구마”

사진6 국민보도연맹원증

▲ 증언록의 증언자(유족분) 정○○(희생자의 아들) 인터뷰 내용

질문 : ‘아버지가 희생될 당시 살던 곳 주소를 아시나요?’

대답 : 진양군 대평면 대평리 000번지. 그 주소를 계속 가지고 있다가 1997년 남강댐 공사 중에 이주단지로 오면서 바뀌었습니다. 그 이전에는 할머니가 너희 아버지 살아올 수 있으니까 절대 이사 가지 말라고 그랬습니다. 내가 세 살때 어머니는 할머니가 저년이 들어서 망했다고 나쁜년이라고 그러고 그러면서 꼭 매일 아침 강에 가서 정화수 떠다놓고(빌었어요). 그 당시에는 강물을 먹었거든요. 할머니가 매일 부엌에다가 싸 한 줌 놓고 기도하고 그랬어요. 그래서 ‘할머니 뭐하는 건데?’하니까 ‘혹시 너거 아버지 살아 돌아올지 모르니까 이사 가지마라’하셨어요. 초가집에 물이 들어왔어 지붕개량을 하고 그대로 이사는 끝까지 안가고 거기 살았어요.(본문245쪽)

사진 7 진주시 명석면 용산고개 발굴장 입구

질문: ‘혹시 아버지가 학살당했을 것이라는 소식을 듣고 가족들이 시신을 찾으러 가셨나요?’

대답: “삼촌이랑 어머니가 용산리 고개를 갔었대요. 6월 초열흘쯤 됐을 거랍니다. 시신을 찾아가도 된다는 소문을 듣고 가니까, 조그만 둔덕에 시체가 쫙 드러누웠는데 못 찾겠더라 하대요. 총을 맞아가지고 6월이다 보니까 부패가 돼가지고 얼굴 형태도 모르겠고, 그냥 뭐 허리끈이나 옷이나 보고 아는 거지 모르겠더랍니다. 우리 형은 할머니한테 나는 엄마 뱃속에 있었고, 그래 냄새가 나니까 쑥을 뜯어가지고 코를 막고 찾았대요. 그렇게 찾으려고 했는데 도저히 못 찾겠어서 이래 가지고 안 되는 거다. 삼촌이 ‘형수님 갑시다. 이래 안 되는 기고 산 사람은 살아야지 갑시다.’했대요. 딱 한번 찾으로 갔대요”(본문 251쪽)

본인이 죽어 묻힐 구덩이를 손수 파게 한 후 학살을 하고 밀어 넣어버렸다고 한다. 고인 핏물이 구덩이를 넘쳐 계곡에 피가 흘러내렸다고 한다. 제가 발굴차 용산고개 현장에 몇 차례 가봤지만 깊은 계곡은 풀로 뒤덮여 아무 말이 없다.

질문: ‘세 살 때 집을 나간 어머니는 다시 만났을 때 아버지에 대해서 어떤 이야기를 해주셨나요?’

대답: “그래 인자 늦게나마 어머니를 만나니까 어머니가 여기(팔뚝)에 문신을 두 개 탁탁 새겼더라고, 팔에 문신을 새겼어, 어머니가 ‘나는 너거 아버지 찾을 수 있다. 살아오면 찾는다’ 하더라고, 아버지와 문신을 같이 했대요. ‘너거 아버지도 여기 하고 나도 여기 하고 문신이 똑같다. 혹시 내가 죽고 없더라도 너거 아버지 살아오거든 이놈(문신)보고 찾아라’ 하셨어요.(눈물)(본문260쪽)

두 분은 저승에서 만나시어 문신으로 확인하시고 해원(解冤)하시기 바란다.

질문: ‘구수회라는 분은 용산리 학살 장소를 어떻게 그렇게 잘 알고 있었던 건가요?’

대답: “그 매장지에서 500미터도 안 되는 동네에 살았으니까, 나무하고 소 먹이러 가면서 맨날 ‘요는 머이 묻혔고 머이 묻혔고’하는 말을 어른들한테 들었대요. ‘거기 소나무 밑에 갈비(소나무 낙엽 채취)하지 마라 거기 송장 썩은 거 묻어 놨은께, 거기(시체를 묻어서 그랬는지)는 풀이 잘 자라더래요. 학살 후 그 이듬해 산사태가 나니까 해골이 도랑에 굴러 내려오더랍니다. 그래 이걸 주워가지고 서부시장에 갖다 팔더라 하데요. 왜 파느냐, 그 당시에 영양실조가 많아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천질이라는 하늘이 준 병리라고, 애가 가만 가다가 탁 쓰러져서 거룸 물고 기절했다가 또 살아났다가 또 가고, 아, 간질, 간질병이죠. 간질환자 아니면 나환자가 이 머리뼈를 갈아서 먹으면 낫는다는 소문이 진주시에 엄청 났대요. 그래서 용산고개에서 파 내려오는 사람도 가끔 봤대요. 어린애들이 소 먹이다 오면 나이 많은 영감들이 보자기에 둥그런 걸 싸 내려오더랍니다. 그래 ‘뭐이고?’하니까 ‘너들은 이런거 보년 안 된다.’이러면서 가져 내려오고 하더랍니다. 개울에는 머리가 막 시퍼렇게 곰팡이 피어 갖고 구석에 묻혀있고 그랬대요.(본문264쪽)

증언록을 읽으면서 이러한 제노사이드(집단학살범죄)는 왜 반복될까? 제노사이드는 다른 가치나 이념은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파시즘적 범죄이다. 국가나 집단의 경우 자신의 범죄행위를 솔직히 드러내고 반성하기보다는 미화하고 사실 자체를 왜곡하는 경우가 흔하다. 그리고 제노사이드는 우리와는 관계없는 먼 옛날에 일어난 일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제노사이드는 과거와 마찬가지로 지금도 현재 진행형이다’. 그래서 과거의 잘못된 역사가 반복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우리나라는 식민지 시대와 민족 분단의 한국 현대사의 굴절 속에서 집단학살의 아픈 역사가 자리잡고 있다. 2008년 1월 24일에 참여정부 노무현 대통령은 현직 대통령으로서는 최초로 ‘과거 정부의 공권력에 의한 불법적인 양민학살 행위’로 인정하여 국민보도연맹 사건으로 희생된 유가족들에게 공식적으로 위로와 사과의 뜻을 밝혔다. 아울러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약칭 진화위)를 발족하여 전체 유족들의 15% 정도의 배상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명박•박근혜 정권 시절은 조사가 전면 중단되었다가 문재인 정부에서 진화위 2기(2020년 12월 10일)가 출범되어 보•배상 미신청자 유족들의 재신청 및 전 지역을 조사 중이다. 국가에 의해 집단 학살된 보도연맹 사건을 은폐하고 금기시할 것이 아니라, 감시와 차별을 받아온 유족들의 아픈 마음의 응어리를 풀어주고 배•보상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주⟧

(주1) 진주관광 sns 기자단, “진주에서 시작된 소년운동의 역사”, 2020년 12월 29일.
(주2) 대구 10•1 사건은 1946년 10월 1일에 미군정하의 대구에서 발발한 영남 지역의 사건으로 이후 남한 전역으로 확산된다. 식량부족, 친일경찰에 대한 반감, 독립국가 수립이 지연되는 현실에 대한 불만이 결합해서 폭발한 사건이다.
(주3) 남조선민보, 1949년 12월 10일자. 《제4차 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 유해발굴 공동조사 자료집》, 2017, 19쪽(주4) 법무부, 『한국 교정사』, 1987, 448쪽.
(주5) 최정기, 「해방 이후 한국전쟁까지의 형무소 실태연구-행형제도와 수형자의 경험을 중심으로」, 한국제노사이드연구회, 『제노사이드 연구』 제2호, 2007, 20~21쪽.
(주6) 법무부, 『한국 교정사』, 1987, 535쪽.
(주7) 명석면사편찬위원회, 『명석면사』, 늘함께, 2000, 225쪽.
(주8) 신경득, 『조선종군실화로 본 민간인 학살』, 살림터, 2002, 189쪽.
(주9) 마크 프리드먼/한진여 옮김/홍순권 감수, 『제노사이드 집단학살은 왜 반복될까?』, 내인생의책, 2015, 17쪽.(주10) 한국전쟁전후 진주민간인 희생자유족회, 《백골의 귀향》, 2014년 2월 19일
(주11) 자유민보, 1949년 11월 20일자.
(주12) 동아일보 1949년 4월 23일자.
(주13) 민주중보, 1949년 12월 3일자.
(주14) 동아일보, 1949년 10월 30일자.
(주15) 제6회 국회속기록 제28호, 598~602쪽, 1950년 2월 11일.
(주16) 한국전쟁후 진주민간인희생자유족회, 《백골의 귀향》, 2014년 2월19일, 32쪽
(주17) 민주중보, 1949년 12월 3일자.

김영희 ‘한국전쟁 민간인학살 유해발굴 공동조사단’ 자원봉사자

고등학교 역사교사를 지냈고, 현재 민족문제연구소 진주지회 회원이다. 발굴 1차부터 10-1차까지 한국전쟁 민간인학살 유해발굴에 자원봉사자로 참여했다.

<2021-07-27> 단디뉴스

☞기사원문: 학살된 사람들, 남겨진 사람들⓶ ‘진주국민보도연맹 대학살 사건’

※관련기사

☞단디뉴스: 학살된 사람들, 남겨진 사람들➀ “아직도 풀리지 않는 70년의 한을 어찌할꼬?”

목, 2021/07/29- 11:18
3
0

박시백 지음 | 민족문제연구소 기획 | 비아북 펴냄 | 2021. 08. 9. | 값 16,000원 | 300쪽 | 170*235 | ISBN 979-11-91019-44-5 (03910) | 담당자 : 손지원 | T) 02-334-6123 | E) [email protected]

■ 책 소개

박시백,
청산하지 못한 역사를 말하다

올해 초, 한 인사가 친일파 후손과 독립운동가 후손의 주거 격차를 드러낸 사진을 가져와 “친일파 후손들이 저렇게 열심히 살 동안 독립운동가 후손들은 도대체 뭘 한 걸까? 100년 전에도 친일파들은 열심히 살았던 사람들이고 독립운동가들은 대충 살았던 사람들 아니었을까”라는 발언을 해 논란이 되었다. 또한 ‘위안부’ 문제와 강제징용 피해자 배상 문제 등 한일간의 역사에서 비롯된 갈등을 바라보는 주류의 시각 중에는 일본의 입장에 동조하여 우리의 잘못을 지적하는 이들이 많다. 박시백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광복 76주년, 친일파는 여전히 건재하다.”

일본에 강제 병합된 1910년부터 1945년 해방까지, 35년에 이르는 일제강점기의 역사를 만화로 풀어낸 작품 《35년》의 저자 박시백이 《친일파 열전》으로 다시 돌아왔다. 일제강점기 35년이라는 방대한 역사에서 친일파의 역사로 초점을 좁혀 촘촘하게 훑어내어 고리타분하게 들리는 ‘친일 청산’이라는 단어에 다시 한번 현재성을 불어넣는다.

‘작가의 말’에서 저자는 왜 친일 청산이 여전히 현재의 문제인지에 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해방이 된 후에도 친일파는 청산이 되지 못했을 뿐 아니라 도리어 우리 사회의 주류로 자리 잡았다. 이런 역사를 빼놓고서 지금의 상황을 이해할 수 있을까? 그렇다. 친일파는 여전히 건재하다. 일제강점기 시절 침략자에 붙어 민족을 배반했고 해방 후에도 주류가 되어 떵떵거렸던 당사자들은 이제 생물학적 수명을 다해 사라지고 없지만 그들의 혈연적, 사상적 후예들은 여전히 우리 사회의 한 축을 형성하고 있다.”

우리는 역사에서 무엇을 배우는가?
《35년》이 던진 질문에
《친일파 열전》으로 답하다

일제강점기 역사를 다룬 전작 《35년》에서 저자는 3‧1운동을 ‘혁명’이라고 명명했다. 독립으로까지 이어지지는 못했으나 3‧1혁명 이후로 독립운동의 양상이 크게 바뀌었으며, 조선의 민중은 근대인으로 거듭났다. 일제 또한 크게 당황하여 식민 정책을 바꾸었고 감시의 눈은 더욱 은근하고 집요해졌다. 그런 와중 3‧1혁명을 ‘절호의 기회’로 본 이들이 있었다.

“능력이 없으면 나라가 부강해질 수 없다”, “조선 청년이여, 경거망동을 그만두어라”, “반성만이 살길이다” 등 ‘불령하고 어리석은 조선인’을 향한 수많은 경고와 꾸짖음이 신문과 강연 등을 통해 쏟아져 나왔으며, 더러는 직접 진압봉을 움켜쥐고 거리로 나섰다. 이들에게 있어 3‧1혁명은 하나의 ‘건수’였으며 총독부의 눈에 들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전국 각지에서 들불처럼 번졌던 학생항일운동, 비밀리에 움직인 크고 작은 독립단체 등 숱한 ‘기회’마다 ‘건수’를 놓치지 않은 이들의 손에 무고한 목숨들이 스러져갔다.

친일파는 갑작스럽게 발생한 것이 아니다. 《친일파 열전》은 외교권을 빼앗겼던 강화도조약부터 해방 이후까지, 친일파의 탄생부터 이들이 어떻게 세를 불리고 어떻게 부를 쌓아왔는지 또 해방 이후 어떻게 그 죗값을 피해갔는지를 상세하게 추적한다.

《35년》에서 저자는 역사를 배우는 이유에 관해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우리는 역사를 왜 배우는가. 과거로부터 교훈을 얻고 과거의 잘못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라고 흔히 답한다. 혹자는 역사에서 살아갈 지혜를 얻는다고도 한다. 그런데 항일투쟁의 길은 고난과 죽음의 길이었던 반면 친일 부역의 길은 안락과 영화의 길이었다. 후자처럼 사는 게 역사에서 얻는 지혜가 되어버리고 만다면 역사를 배우는 건 너무 참담한 일이 된다.”

《친일파 열전》은 이 문제에 대해 저자가 내놓은 한 가지 해결책이다. 친일파들의 후손이 현재진행형으로 걷고 있는 안락과 영화의 길 아래에는 이제는 잊힌 수많은 목숨이 깔려 있다. 해방 이후, 무수한 친일파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는 식의 얄팍한 변명을 통해 처벌을 피해갔다. 이 책은 흔히 ‘친일을 했다’라고 뭉뚱그려지는 행위가 실은 얼마나 적극적으로 무고한 이들을 사지로 내몬 것인지, 또 얼마나 많은 비극이 거기서 기인했는지 치밀하게 추적하여 그려냄으로써 건조한 사실에 진실의 음영을 더한다. 그럼으로써 비틀린 순서를 바로 잡고자 했다. 그간 은폐해왔던 우리 사회의 상처를 직시하고, 그에 맞는 처벌이 이루어질 때 비로소 우리는 지혜를 얻을 만한 역사를 세울 수 있을 것이다.

강화도조약부터 해방 이후까지,
친일의 탄생과 역사를 파헤치다

이 책은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에서 펴낸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된 4,389명의 인물 중 특히 주목할 필요가 있는 150여 명의 친일파를 가려내어 그 행적을 낱낱이 공개한다. 시대의 흐름에 맞추어 인물들을 살펴볼 수 있도록 3장으로 구성했다.

먼저 제1장 ‘친일의 역사’에서는 강화도조약부터 해방 직후까지 친일의 형성과 역사를 넓게 짚는다. 뒤이어 소개할 각계각층의 친일파들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고자 시간의 흐름에 초점을 맞추어 굵직한 인물들의 행적을 중심으로 소개한다. 제2장 ‘우리는 황국신민이다’에서는 을사오적, 정미칠적, 경술국적 등의 국적들, 귀족 작위를 받은 친일파들, 경찰과 밀정들, 만주에서 활동한 친일파들 등을 각각 분류하여 소개한다. 제3장 ‘학도여, 성전에 나서라’에서는 일제강점기 조선을 주름잡았던 명망가들의 친일 행위, 관리들과 군인들, 문학계, 연극계, 영화계, 음악계 등 각계각층에서 활약한 친일파들을 상세하게 소개한다.

부록으로 수록된 ‘박시백의 친일인명사전’에는 이 책에 등장하는 150여 명의 친일파의 행적을 찾아보기 편리하도록 정리했다.

제2의 반민특위, 《친일인명사전》의 정신을 이어받다!
민족문제연구소 창립 30주년 특별 기획

평생 친일문제 연구에 헌신한 임종국 선생이 1989년 타계한 후, 그 유지를 이은 후학들이 1991년 반민족문제연구소(1995년 민족문제연구소로 개칭)를 열었다. 1999년 ‘제2의 반민특위, 《친일인명사전》을 만들자’는 운동을 시작, 2009년 11월 8일, 드디어 4,389명의 친일파 명단이 들어간 《친일인명사전》이 발간되었다. 박시백 작가는 《35년》으로 임종국 선생을 기리는 임종국선생기념사업회로부터 제14회 임종국상을 수상했다. 기념사업회는 ‘역사의 사각지대를 조명하고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여 괄목할 만한 성과를 이뤄냈다는 점을 높이 평가하며, 국내외에서 역사 왜곡이 자행되고 있는 시점에 창작을 통해 역사 대중화에 크게 기여한 박시백 화백의 노고와 도전정신에 경의를 표하면서’ 작가를 수상자로 결정했다. 민족문제연구소가 창립 30주년 특별 기획으로 박 작가에게 친일파의 탄생과 역사를 새로 구성한 역사 만화책 출간을 제안한 것도 바로 이런 인연 때문이다. 박시백 작가 역시 임종국 선생의 유지대로 ‘각 분야의 친일파들을 널리 알려 그들이 우리 현대사에 자리하고 있는 터무니없는 위상을 바로잡는 것이 시대적 과제인 친일 청산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는’ 생각으로 작업에 임했고, 광복 76주년을 맞아 《친일파 열전》을 출간하게 되었다.

■ 저자 소개

박시백
제주에서 태어나 고려대학교 경제학과 졸업 후, 〈한겨레〉의 만평으로 데뷔했다. 스토리가 있는 시사만화 ‘박시백의 그림세상’으로 독자들에게 이름을 알렸다. 2001년 돌연 신문사를 떠난 작가는 《조선왕조실록》을 만화로 그리는 작업에 매진했고, 12년 만인 2013년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20권을 완간했다. 이 작품은 독자들의 뜨거운 지지를 받으며 대한민국 만화대상, 부천만화대상 등을 수상했다. 이후 일제 강점 ‘35년’의 역사를 만화로 옮기는 작업을 시작했다. 독립운동의 현장을 답사하고, 각종 자료 수집과 공부 끝에 2018년 《35년》 1권을 출간했고, 2020년 전 7권으로 완간했다. 《35년》은 독자와 평단으로부터 사관과 관점이 균형 잡혔다는 평을 얻으며 제14회 임종국상을 수상했고, 2020 청소년 교양도서에 선정됐다.

■ 차례
제1장 친일의 역사
제2장 우리는 황국신민이다
제3장 학도여, 성전에 나서라
● 특별부록 | 친일인물약력

월, 2021/08/02- 19:40
2
0

[대전 골령골 유해발굴 현장취재기] 40여 일간 찾은 유해만 400여 구, 이번 주 1차발굴 마무리

▲ 주말에 비가 내렸지만, 다행히 유해 발굴지는 비 피해가 전혀 없었다. 비 피해에 대비해 유해발굴지 위에 천막과 비닐을 덮었다. ⓒ 심규상

2일 오전 7시. 일찌감치 골령골(대전 동구 낭월동)로 향했다. 유해발굴 현장을 둘러보기 위해서다. 발굴 현장 부근에 임시 사무실을 마련한 대전산내사건희생자유족회의 전미경 회장이 기자보다 먼저 도착했다. 이날 유해발굴을 위한 자원봉사자에게 점심을 제공하기 위해 멀리 부여에서 한달음에 달려왔다.

대전 골령골은 전쟁이 나던 1950년 6월 말부터 이듬해 초까지 대전 형무소 재소자 등과 대전 충남·북 일원의 보도 연맹원 등 적게는 4천여 명에서 많게는 7천여 명의 민간인이 군인과 경찰에 의해 살해된 땅이다. 행정안전부와 대전 동구청 주도로 한국선사문화연구원 등이 지난 6월부터 유해를 발굴 중이다.

▲ 박선주 책임연구원이 아침 회의를 통해 작업 지시를 내렸다. 약 200여 구에 이르는 드러난 유해를 수습하는 일이 핵심 작업이다. ⓒ 심규상
▲ 주말에 비가 내렸지만, 다행히 유해 발굴지는 비 피해가 전혀 없었다. 발굴단원들이 유해수습을 위해 천막과 비닐을 걷어 내고 있다. ⓒ 심규상

오전 8시 30분. 유족회 사무실 옆 유해발굴 현장으로 향했다. 주말에 비가 내렸지만, 다행히 유해 발굴지는 비 피해가 없었다. 15여 명의 유해발굴단들이 작업 준비가 한창이다. 박선주 책임연구원이 아침 회의를 통해 작업 지시를 내렸다. 약 200여 구에 이르는 드러난 유해를 수습하는 일이 핵심 작업이다.

매장지를 덮고 있던 천막과 비닐을 펼쳤다. 순간 참혹한 현장이 그대로 드러났다. 가로 약 2미터, 세로 약 40여 미터에 가까운 긴 구덩이에 유골이 즐비했다. 두개골, 다리뼈, 치아, 탄피 등이 뒤엉켜 있다.

대략 눈 짐작만으로도 200여 구는 넘어 보였다. 그야말로 ‘유골밭’이다. 이 구덩이는 아직 발굴하지 않은 반대편까지 길게 이어져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미발굴 지역을 합쳐 셈해보니 한 구덩이 길이가 대략 100여 미터는 돼 보였다.

뒤엉켜 드러난 유해… 눈 짐작만으로도 200여 구 이상

▲ 매장지를 덮였던 천막과 비닐을 펼쳤다. 순간 참혹한 현장이 그대로 드러났다. 가로 약 2미터, 세로 약 40여 미터 가까운 긴 구덩이가 온통 유골로 뒤덮여 있다. 박선주 책임연구원이 드러난 유해를 가르키고 있다. ⓒ 심규상
▲ 박선주 책임연구원(충북대 명예교수)이 발굴된 유해의 특징을 설명하고 있다. ⓒ 심규상

한 구덩이만이 아니다. 그 위로 길게 또는 불규칙하게 유해가 묻힌 여러 개의 구덩이가 드러났다. 또 다른 구덩이에서 수습한 유해만 200여 구 남짓이다. 이미 수습한 유해는 인근 건물 수십 평 바닥을 꽉 채우고 있다. 약 40여 일 동안 가로 40미터, 세로 1미터 공간에서 발굴한 유해만 모두 400여 구에 이르는 셈이다.

박선주 책임연구원(충북대 명예교수)은 “이번 발굴로 한 개의 구덩이가 100여 미터에 이르는 구간을 찾아냈다”며 “여성은 물론 10대에서부터 노인까지 다양한 연령대의 유해가 뒤섞여 있다”고 말했다. 이어 “산기슭 경계를 따라 수십여 명이 묻힌 여러 개의 구덩이도 드러났다”며 “대부분 대전형무소 수감자들의 유해로 보이지만 정확한 희생자 유형과 매장지별 특성을 분석하고 있다”고 말했다.

오전 10시. 유해를 본격 수습하기에 앞서 현장 촬영이 시작됐다. 드론이 날며 유해 매장지를 입체 촬영했다. 또 각 유해를 세분화해 구역별로 세부 촬영하기 시작했다. 이는 유해매장 상태는 물론 매장지 지형 특성을 분석하는 자료로 활용될 예정이다.

또 이후 골령골 현장에 들어설 한국전쟁 민간인집단희생자의 위령 시설인 ‘진실과 화해의 숲’ 설계용역에도 사용된다. 행정안전부와 대전시 동구청은 지난해 12월 진실과 화해의 숲 국제공모 당선작이 선정된 이후 이를 구체화하기 위한 설계용역을 진행 중이다.

갑자기 거세진 빗줄기, “한나절만 참아줬더라면…”

▲ 유해 매장지 내 유해를 덮은 비닐과 천막 위로 누런 흙탕물이 쏟아져 고이기 시작했다. 수중 펌프를 설치해 고인 물을 퍼내기 시작했다. ⓒ 심규상
▲ 한 시간 남짓 퍼부은 비로 유해 매장지 내에 40센티미터 넘게 잠겼다. 수중 펌프도, 삽질도 역부족이었다. ⓒ 심규상

오전 10시 20분. 후두두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갈수록 빗줄기가 거세졌다. 현장 촬영도 중단됐다. 다시 비밀과 천막으로 유해매장지가 서둘러 덮였다. ‘소나기처럼 한 줄기 쏟아지고 말겠지’ 하며 기다렸지만 쉬이 그치지 않았다. 오히려 빗줄기가 굵어졌다. 거세졌다.

오전 11시. 골령골 전체가 쏟아지는 빗줄기 소리뿐이다. 사방이 흙물이다. 유해 매장지 내 유해를 덮은 비닐과 천막 위로 누런 흙탕물이 쏟아져 고이기 시작했다. 유해를 지키기 위해 발굴단원들이 뛰어들었다. 수중 펌프를 설치해 고인 물을 퍼내기 시작했다. 유해 매장지 주변에 배수로를 내 물줄기를 돌리기 위한 쉼 없는 삽질이 시작했다. 발굴단원들은 흙탕물과 땀으로 속옷까지 흠뻑 젖었지만 빗속을 뛰어다닌다.

오전 11시 30분. 1시간 남짓 퍼부은 비로 유해 매장지 안이 40센티미터 넘게 잠겼다. 수중 펌프도, 삽질도 역부족이었다.

오전 11시 50분. 비가 그쳤다. 하지만 현장 촬영도, 유해수습도 당분간 어려울 만큼 피해를 입었다. 적어도 한나절 이상 현장을 말리고 또 비가 올 때를 대비해 배수로도 정비해야 하기 때문이다.

박 책임연구원은 몇 번씩 “한나절만 참아줬더라면 드러난 유해수습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라며 “하늘이 야속하다”라고 안타까워했다.

유해발굴단은 이번 주 1차 발굴을 마무리한 후 내주에는 수습한 유해를 분석하는 데 집중하기로 했다. 이어 오는 9월부터 두 달 여 동안 2개 구역에 대한 추가 유해발굴을 시작할 예정이다.

대전 골령골에서는 지난 2007년 지난 해까지 모두 유해 288구(2007년 진실화해위원회 34구, 2015년 시민사회 공동조사단 20구, 2020년 행정안전부와 대전 동구청 234구)를 발굴했다.

올해 1차 발굴한 유해를 합할 경우 모두 700구 가까이 될 것으로 보인다.

심규상 기자

<2021-08-02> 오마이뉴스

☞기사원문: 천막 들추자 유골밭… 모습 드러낸 40m 학살구덩이

※관련기사

☞오마이뉴스: 쇠가죽 대전지도 위에 새긴 ‘부역자’ ‘빨갱이’ 낙인

화, 2021/08/03- 03:59
1
0

일본대사관 앞서 한달 간 1인시위… 첫날 한국YMCA전국연맹사무총장·천도교청년회장 참여

▲ 이재선 천도교청년회장이 간토대지진 조선인 학살 사건 진상규명을 촉구하는 1인시위를 하고 있다. ⓒ 신채원

1923년 간토대지진 조선인 학살사건의 진상공개와 공식사과를 요구하는 일본대사관 앞 1인시위가 2일부터 진행됐다.

시민모임 독립(이사장 이만열 상지대이사장·전 국사편찬위원장)은 앞으로 한 달간 1인 시위를 이어가겠다고 밝혔다. 일본 대사관 앞에서 한 달간 진행되는 1인 시위는 코로나19 방역 수칙에 따라 1인씩 피켓을 들고 이어 나간다.

학생, 직장인, 자영업자 등 일반 시민들이 자원 참가하는 이번 1인 시위는 1923년 간토대지진 조선인 학살사건이 일본 정부가 촉발하고, 조선인에 대한 혐오가 투영된 명백한 제노사이드 범죄임에도 일본정부가 진상공개와 공식사과에 대해 모르쇠로 일관하는 역사 부정의 현실에서 출발했다.

▲ 김경민 한국YMCA전국연맹사무총장이 간토대지진 조선인 학살 사건 진실 공개와 사과를 요구하는 1인 시위를 하고 있다. ⓒ 신채원
▲ 간토대지진 조선인 학살 사건 진상규명을 촉구하는 1인시위 현장에 격려 방문한 이만열 이사장. 이 이사장은 “1인 시위가 하나의 역사적인 화해와 용서의 단서가 되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 신채원

특히 첫날인 2일 1인 시위에 김경민 한국YMCA전국연맹 사무총장과 이재선 천도교청년회장이 나선 것은 상징적인 의미가 있다. 1923년 간토대지진 당시 조선인 학살이라는 참상을 목격하고 이재동포위문반(罹災同胞慰問班)을 조직해 실태 파악에 나선 것이 천도교 동경지부와 YMCA동경지부였기 때문이다. YMCA동경지부는 매해 추모제를 진행해왔으며 국내에서는 일제의 삼엄한 감시와 탄압 속에서 1924년 1주기 추모식을 거행한 바 있는 천도교중앙대교당에서 지난 2020년 추모식과 추모문화제를 거행한 바 있다.

시민모임 독립은 일본대사관에 공문을 보내 일본 정부의 진상 공개와 공식 사과를 요구하고 1인시위 진행을 통지했다.

이날 격려차 현장을 찾은 이만열 이사장은 사건 발생 이후 98년이 되었는데도 사건의 희생자, 특히 조선인 희생자 숫자나 참혹한 진상이 밝혀지지 않았음을 지적하며, “이번 기회를 통해 우리 국민들과 일본인, 세계가 간토대지진 사건에 대해 희생자들에 대해서도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며 대한민국 정부가 서고 국회가 있음에도 아직도 이 문제에 대해 진상조사와 희생자 조사의 필요성을 강조하며 국회와 정부로 하여금 100주년이 되는 2023년까지 특별법 제정과 희생자에 대한 예우를 갖추는 국회와 정부가 되기를 촉구했다.

끝으로 이만열 이사장은 “우리가 이런 시위를 하려는 것은 보복과 비난이 아닌 우리는 이 시위를 통해 100년간 쌓여온 원한과 원망을 해소하기 위한 것이다. 진상규명을 통해 용서하고 화해하는 기회를 만들었으면 한다. 이 1인 시위가 하나의 역사적인 화해와 용서의 단서가 되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이재선 천도교 청년회장과 김경민 한국YMCA전국연맹사무총장은 이날 현장에서 공동으로 1인 시위를 시작하며 “1923년 간토대지진 때 일본은 조선인을 희생양으로 삼아 학살하고 진상규명이 100년이 다 되도록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것은 해방된 국가를 가지고 있는 한국시민으로서 부끄러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지금이라도 98년 전 희생된 희생자들의 영령을 추모하면서 해원할 수 있도록, 한일 간 화해의 공감을 만들어낼 수 있고 과거사에 대한 올바른 인식으로 한일 관계를 새롭게 만들어갈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또 100년 전 일제에 맞서 심장부인 도쿄에서 희생자 조사를 한 유학생들에 대한 경의를 표하며 오늘날에도 이어지고 있는 조선인에 대한 유언비어와 차별에 대해 지적하며 간토대지진 조선인 학살 사건에 대해 진상규명과 공식 사과를 요구하는 것은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책임이라고 밝혔다.

또 현장에서 1인 시위에 참여한 한 시민은 “일본정부에 대해 책임있는 진상규명과 진심 어린 사죄를 요구하는 결연한 의지를 보여야 하며 이것만이 과거청산을 통한 상호 호혜평등한 평화 공존 번영의 미래지향적인 동반자관계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이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한편 시민모임 독립은 현재 전국적으로 진행 중인 ‘전봉준 최시형 서훈운동’을 이끌어낸 바 있다. 박용규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위원의 문제 제기로 전봉준, 최시형 등 2차 동학농민혁명 참여자의 독립유공 서훈의 정당성을 주제로 성일종 의원과 더불어민주당 우원식, 민형배, 이성만 의원, 열린민주당 강민정 의원이 공동주최로 국회에서 ‘전봉준‧최시형 등 제2차 동학농민혁명 참여자들에 대한 독립운동 서훈의 당위’ 학술토론회를 개최하였고 현재 이는 전국적 ‘서훈운동’으로 확산되어 지난 6월부터 국가보훈처, 전국 각지로 퍼져나가고 있다.

간토대지진 조선인 학살 사건은 1923년 9월 1일 일본 관동지방에서 매그니튜드 7.9의 강진이 일어난 직후 ‘조선인이 폭동을 일으킨다’, ‘조선인이 방화하였다’,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넣었다’ 등의 유언비어로 인해 군대와 경찰, 민중이 조선인 6천여 명을 학살한 사건이다. 지진으로 인해 파괴된 도시에서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참혹하게 학살당한 채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 그들에게 고향이 있었고 이름이 있었다.

1923년 9월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 사건의 진실은 98년이 흐른 지금도 여전히 침묵을 지키고 있다.

민족차별이 불러온 학살의 기억은 돌아오지 못한 그들에게 참혹한 현실로 이어지고 있다.

1960년대부터 재일 역사학자 강덕상, 금병동 등에 의해 일본에서 연구가 시작된 이후 한국에서도 소수의 역사학자에 의해 연구가 이루어졌지만 현재까지도 이 사건에 대한 인식의 틀은 확장되지 않은 채 98년의 시간이 흘러왔다.

▲ 관동대지진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 ⓒ 오충공

재일교포 영화감독 오충공에 의해 1980년대 사건 당시의 증언을 담은 다큐멘터리 <감춰진 손톱자국>(1983), <불하된 조선인>(1986)이 제작되어 국내에서 상영된 바 있다. 오 감독은 현재까지도 일본과 한국을 오가며 일본 정부가 은폐하고 있는 진실을 찾고자 희생자들의 유족을 찾는 등 진상규명을 위해 39년간 노력해왔다.

또 1980년대부터 민속학자 고 심우성, 극단 현대극장 대표 고 김의경, 전 서울신문사장 고 신우식 등에 의해 진상규명 운동을 진행해왔고 시민 모금운동을 통해 학살이 있었던 치바현 관음사에 위령의 종 ‘보화종루’를 세운 바 있다. 운동에 앞장섰던 사람들 모두 고인이 되었다.

▲ 보화종루 일본 치바현 관음사에 세운 “보화종루” 1985년 민속학자 故심우성, 극단 현대극장 대표 故김의경 등이 시민 모금운동을 통해 세운 위령의 종 ⓒ 신채원

간토대지진 조선인 학살 사건은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아직도 밝혀야 할 과제가 많은 사건이다.

이번 1인 시위 운동으로 인해 간토대지진 조선인 학살 사건을 기억하고 다시는 이런 슬픈 역사를 쓰지 않기 위해 용서와 화해로 과거를 딛고 미래를 열어가기를 기대한다.

신채원 기자

<2021-08-03> 오마이뉴스

☞기사원문: “간토대지진 조선인 학살사건 진상 조사하고 공식 사과하라”

수, 2021/08/04- 04:35
2
0

김태림 앵커>

‘8.15 광복절’이 다가오고 있지만 일본의 역사 왜곡이 여전합니다.

세계유산에 조선인 강제노동 사실을 제대로 알리지 않아 유네스코의 비판을 받았는데요.

일제강점기 당시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증언을 담은 전시가 열려 관심을 끌고 있습니다.

김유진 국민기자가 다녀왔습니다.

김유진 국민기자>
(영상제공: 민족문제연구소, 식민지역사박물관 기획전시실 / 서울시 용산구))

일제강점기 당시 강제노역으로 일본에 끌려간 조선인은 3만 3천여 명.

많은 조선인이 탄광과 조선소, 제철소로 동원됐는데요.

고된 노동에 시달렸지만 부실한 음식으로 하루하루를 버텨야 했습니다.

악몽 같은 그 시절을 피해자들이 생생하게 증언한 영상을 담은 전시가 열렸는데요.

나라 잃은 슬픔을 엿볼 수 있습니다.

<인터뷰> 최장섭 / 하시마 탄광 강제 동원 피해자

“땀방울로 목욕을 하고 심지어는 수건이 아니면 땀을 막아낼 수 없어요. 더러 맞기도 많이 맞았죠. 강제성을 띠어서 새까만 콩밥 한 덩이로 연명하고…”

일제의 만행에 시달렸다는 영상 증언을 지켜본 관람객들.

일본에 사과를 요구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인터뷰> 한미정 / 모로코 거주 교포

“기본적인 의식주가 해결되지 않았고 여러 가지를 보면 이제는 조용히 일본이 우리에게 사과할 때까지 기다릴 것이 아니라 우리가 강하게 사과를 요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민족문제연구소가 서울에 있는 식민지역사박물관에서 마련한 이번 전시.

일제강점기에 일본의 산업시설에 강제 동원된 피해자 19명의 영상 증언을 볼 수 있습니다.

<인터뷰> 손용암 / 다카시마 탄광 강제 동원 피해자

“들어가서 보니까 6, 7명인가 와 있더라고요. 거기서 문 잠그고 내려놓질 않는 거예요. 납치죠. 완전히 납치죠. 거기 간 사람들 전부 다 납치예요.”

강제 동원 피해자들은 기술 훈련이나 안전 교육도 받지 못한 채 고된 육체노동에 시달려야 했는데요.

하지만 임금은커녕 용돈 수준의 월급을 받았을 뿐이라는 피해자 증언도 있습니다.

열악한 작업환경을 견디지 못해 탈출을 시도하기도 했고,

<인터뷰> 김규수 / 야하타 제철소 강제 동원 피해자

“한밤중에만 탈출할 수 있는 거예요. 얼마나 갔는지 모르지만 제가 생각하기엔 한 2~3km는 가지 않았나…”

안타깝게도 붙잡히는 바람에 구타를 당하는 수모를 겪었다고 합니다.

<인터뷰> 김규수 / 야하타 제철소 강제 동원 피해자

“창고 같은 빈방인데 거기에다 꿇어 앉혀 놓고서는 그때부터 때리면서 심문하는 거죠.”

관람객들은 전시 영상 앞에 놓인 헤드폰을 통해 생생한 증언을 들으며 일제 만행을 알 수 있습니다.

<인터뷰> 김승은 / 식민지역사박물관 학예실장

“세계유산이 된 그 현장에서 어떠한 강제 노동의 가혹한 현실이 있었는지 생생하게 증언하고 있거든요. 그분들의 목소리에 조금이나마 귀 기울일 수 있는 기회를 얻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일본 근대산업시설은 논란 끝에 조선인 강제 동원 사실을 알리는 조건으로 세계유산이 됐는데요.

하지만 일본이 어두운 역사를 제대로 안내하지 않아 최근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가 개선할 것을 촉구하는 결의문을 채택했습니다.

<인터뷰> 김기범 / 경기도 의정부시

“유네스코에서 등재될 때 강제노역에 대한 문제를 전 세계 사람들한테 알리라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알리지 않았다는 점에서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많이 분노했고…”

많은 조선인이 강제 동원된 산업시설은 군수품을 생산하는 곳인 만큼 연합군의 공습을 받았는데요.

얼마나 많은 조선인이 희생됐는지 정확히 알 수 없는 상황.

단지 원자폭탄이 투하된 나가사키에서 숨지거나 다친 조선인이 3만 명 정도 될 것으로 추정됩니다.

(촬영: 박성애 국민기자)
(영상·사진제공: 민족문제연구소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

다가오는 광복절을 앞두고 관심이 쏠리고 있는 이번 전시, 코로나19 감염 예방을 위해 사전예약을 받고 관람 인원도 한 번에 25명으로 제한되는데요.

오는 11월 초까지 계속 열립니다.

우리가 결코 잊어서는 안 될 일제강점기 강제 동원 피해자들.

이번 전시가 역사 왜곡을 하는 일본에 경종을 울리고 나라의 소중함을 다시 한번 되새겨보는 자리가 되길 기대해봅니다.

국민리포트 김유진입니다.

<2021-08-03> KTV국민방송

☞기사원문: 일본 역사 왜곡 속 ‘강제노역 증언’ 관심 쏠려

수, 2021/08/04- 04:43
1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