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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파 부자, 박기순과 박영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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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파 부자, 박기순과 박영철

익명 (미확인) | 월, 2017/08/07- 14:23

친일인명사전을 차근차근 들추다 보면 형제, 부자, 조손, 사촌 등 혈연관계에 있는 인물들이 함께 실려 있는 경우를 볼 수 있다. 박기순과 박영철이 그런 경우다. 국가도 이들의 행위를 친일반민족행위로 결정했다. 전북 전주에서 미곡상으로 시작해서 조선을 대표하는 재벌로 성장하기까지, 그리고 친일파하면 떠오르는 ‘명성’을 얻기까지 이 부자의 행적을 따라가 보자.

신도시 개발 특수를 누리다
박기순(朴基順, 1857~1935)의 장례식을 전하는 신문기사(<매일신보>1935.10.6)에의하면,그는 40세가 넘어서야 재산을 모으기 시작했는데 생전에 1만 5천여 석을 넘길 정도의 부를 이루었다고 한다. 그가 79세에 사망했으니 그의 재산 형성 시점은 일본인들이 경제침탈을 본격화하는 시기와 일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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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기순과 취향정(醉香亭). 취향정은 박기순이 1917년 자신의 환갑을 기념해 전주 덕진공원 내 연지에 세운 정자다.

 

박기순은 열두 살에 부친을 여의고 어느 상점의 사환 노릇을 하다가 미곡상으로 독립하였고, 전주평야의 미곡을 군산에서 인천으로 내다 팔아 큰 이득을 얻었다. 이를 기반으로 토지를 사들여 만석꾼의 이름을 얻었고, 당시 전라도에서 모르는 이가 없는 ‘토지왕’이 되었다.(<삼천리>,1931)특히박기순은신도시‘이리’(지금의익산)개발과정에서막대한시세차익을얻었다. 오늘날의 강남 개발이나 수도권 신도시 개발의 벼락부자를 떠올리게 한다.
일찍이 일본 자본은 한반도에서 가장 비옥한 토지인 만경강 일대 호남평야에 주목했다. 강제병합 후 그들은 이 비옥한 평야지대에서 생산한 쌀을 일본으로 수출하는 식민지 수탈경제를 구축해 갔다. 

181920년대 이리역 주변 모습

지대에서 생산한 쌀을 일본으로 수출하는 식민지 수탈경제를 구축해 갔다. 그 과정에서 군산과 전주를 사이에 둔 식민도시 이리가 개발되었다. 1914년 1월 호남선이 경성-대전-이리-나주-목포로 연결되
었고, 그해 11월에는 이리와 전주를 잇는 전북경편철도가 개통했다. 10여 호에 불과하던 작은 마을 ‘솜리’는 가로로는 군산과 전주, 세로로는 경성·대전과 목포를 잇는 교통 중심지로 거듭났다. 신도시 이리 개발은 식민지경영을 통해 가시적인 성과를 내려는 총독부 권력층의 의도와 일본인 대토지자본가들과 박기순과 같은 일부 조선인자본가들의 적극적 개입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였다.
박기순은 신도시 및 역세권 개발의 혜택을 온전히 누렸다. 원래 박기순의 소유 토지는 전주도심이 아니라 외곽지대에 분포하고 있었다. 주로 이리역, 구이리역, 대장촌역, 삼례역, 전주역, 신리역 등 경편철도 연변에 집중되었다. 따라서 그는 신도시·경편철도·역세권 개발로 이어진 토지가치 상승의 최대 수혜자가 되었다. 그의 토지는 1930년 현재 685정보였고, 사망하기 2년 전인 1933년 조선신탁주식회사에 320만평을 신탁했는데 당시 토지 시가는 150만 원에 달했다.
그렇다고 떨어지는 감을 누워 받아먹은 것은 아니다. 박기순은 전주경편철도설치기성회 회장을 맡아 전주-이리간 경전철을 만드는데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철도가 개통한 후 1916년에는 전북경편철도주식회사 이사까지 맡았다.
개발에 필요한 기부도 아끼지 않았다. 1912년부터 1919년 사이에 박기순은 호남선 부지, 전주-군산 간 도로부지, 전주-영동 간 도로부지, 전주 덕진공원 건설비, 전주 다가공원 방천석축, 전주 다가교 가설비 등을 기부했다. 그 덕에 조선총독부로부터 목배 10세트와 감수포장 등을 받았다. 자신이 소유한 땅을 중심으로 새로운 기차역과 시가지가 개발되도록 총력을 기울였음을 알 수 있다.
조선총독부와의 관계도 잘 관리했다. 여산군수, 조선식산은행 이사, 전주면협의회 의원,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까지 지역 유지들이 일제 협력을 통해 성장해 가는 과정을 체계적으로 밟아갔다. 특히 1919년 3.1운동이 일어났을 때 전북자성회를 조직한 점이 주목된다. 당시 3.1운동을 방해하고 저지할 목적으로 전국 각지에서 반대 단체가 조직되었다. 자제단이란 이름으로 잘 알려져 있다.
전북자성회 규약에는 ‘경거망동하지 말고, 만세시위 참여를 권유하는 자를 배척하며, 그러한 자가 있다면 곧 본부장이나 지부장에게 밀고할 의무’를 명시했다. 박기순은 이 단체의 조직에 앞장섰고, 전주지부의 지부장을 맡았다.

여기에 아들 박영철(朴榮喆, 1879~1939)이 힘을 보탰다. 박영철은 1912년 8월부터 1918년 9월까지 전북 익산군수를 지냈다. 신도시 이리가 개발되는 가장 중요한 시기였다.
즉 박영철은 신도시 개발과 주변지역을 잇는 도로 및 철도 개설에 있어서 관권 즉 조선총독부의 입장을 대변하고 실행하는 위치에 있었던 것이다. 식민권력을 등에 업은 부자의 콤비플레이는 그들을 일약 전북을 대표하는 갑부로 끌어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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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상업은행 은행장 시절의 박영철(52세)

 

이제는 중앙이다
터닝포인트는 조선상업은행이었다. 1931년 박영철은 전국적 지점망을 가진 대형은행인 조선상업은행의 은행장 자리를 꿰찼다. 전북을 주름잡던 박기순-박영철 부자는 조선을 대표하는 자산가로 도약한 것이다.
1920년 박기순은 전주에서 삼남은행을 설립했다. 미곡상을 거쳐 신도시 개발에서 축적한 막대한 토지자본이 금융자본으로 변신하는 순간이었다. 전주 지역 대지주와 유지들이 대주주이자 경영진으로 참여했다. 그렇지만 삼남은행이 성장해 가는 몇 년 동안 박기순은 대주주와 중역들을 차츰 물갈이해나갔다. 기존 주주들이 매도한 주식은 박기순 일족이 사들였다. 1925년 무렵이 되면 본인이 사장이자 최대 주주였고, 아들 박영철을 비롯한 박준철, 박판철, 박신철 등 일가붙이가 대부분의 주식을 소유했다. 삼남은행은 식민지 시기에 형성된 주식 세습구조의 한 사례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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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소공동에 위치한 조선상업은행

 

박기순은 삼남은행을 경영하면서 전북경편철도, 전북잠업, 전북축산주식회사 등의 이사로 참여했다. 은행가로서 그 재력을 토대로 다른 분야에까지 활동 영역을 넓혀 나갔다. 그의 기업활동은 전주를 넘어 익산, 남원, 군산 등지로 확대되어 갔다. 그 과정에서 지역의 각종 공직과 사회단체, 학교조합 활동에도 적극적이었다. 이제 박기순은 전북 지역을 대표하는 자본가이자 유지로 성장했으며, 1924년에 중추원 참의에 임명됨으로써 그의 명망과 사회적 입지는 한층 더 공고해졌다.
중추원 참의가 되고 전북을 대표하는 지역유지가 되었지만, 박기순의 경제적 기반은 여전히 지역적인 한계를 갖고 있었다. 이 한계를 뛰어넘어 전국적 레벨의 자본가로 발돋음하는 것은 아들 박영철의 몫이었다.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나와 군인의 길을 걷던 박영철은 강제병합후 행정관료로 변신했다. 처음 부임한 곳이 전북 익산이었고 앞서 보았듯이 신도시 이리 개발과정에 힘을 보탰다. 조선총독부 지시에 철저히 순응하면서도 행정가로서의 자질을 발휘하여 신도시 개발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하였던 것이다. 그 결과 익산군수에 이어 도참여관, 도지사로 초고속 승진을 거듭했다. 이때 박영철은 새로운 도약을 모색했는데 바로 중앙 재계로의 진출이었다.
함경북도 지사를 마지막으로 관계에서 물러난 박영철은 박기순으로부터 삼남은행의 경영권을 물려받은 후 곧바로 조선상업은행과의 합병을 단행했다. 1928년 5월 당국의 인가를 받은 은행 합병으로 조선상업은행은 전국 지점망을 가진 대형은행이 되었고, 삼남은행은 6개월 뒤 단행된 ‘신은행령’(자본금 200만원 이상의 주식회사가 아니면 은행 업무를 할 수 없음)의 파고를 무사히 넘길 수 있었다. 조선총독부의 금융정책에 관한 정보를 미리 알지 못했다면 할수 없었을 발빠른 대처였다. 박영철은 조선상업은행 부행장에 취임했다. 지역 관료출신인 박영철이 본격적으로 중앙 재계에 진출하는 순간이었다. 그로부터 2년 후 조선상업은행 은행장자리에 올랐다. 이제 그는 토지의 민영휘, 금광의 최창학, 방직의 김연수와 함께 조선인 4대 재벌로 불렸다.(<삼천리>, 1932) 박영철은 차츰 자신의 입지를 넓혀 갔다. 1930년에는 조선미곡창고회사 이사, 1932년 10월에는 조선철도회사 이사에 선임되었다. 이어 1932년 12월 조선신탁주식회사 이사가 되었다.
이 회사는 경제공황에 대처하기 위해 기업들을 대상으로 한 금융신탁업무를 담당했다. 박기순이 이 회사에 320만 평(시가 150만 원)의 부동산을 신탁했으므로 박영철의 기반은 더욱 공고해졌다. 이 밖에도 동양척식주식회사, 조선맥주회사, 북선제지화학공업주식회사 등의 중역을 맡았다.
조선의 4대 재벌이라 해도 총독부 권력과의 돈독한 관계는 필수였다. 만주사변에서 중일전쟁으로 확전해 가는 동안 박영철은 조선국방의회연합회,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시국대응전선사상보국연맹, 경성부육군병지원자후원회 등 일제의 전쟁을 지원하기 위한 단체의 주요간부로 활동했다. 또 조선미곡조사위원회, 조선산업경제조사회, 임시교육심의위원회, 저축장려위원회, 물가위원회, 시국대책조사회 등에 참여하는 등 총독부의 식민통치 파트너로 활약했다. 이제 박영철은 “한상룡과 함께 중앙의 중요한 지위에서 활약하는 조선 문제의 대표자”란 평판을 얻었다.(<시정25년기념 약진지조선>, 1935)
한시에서 드러나는 친일의 진정성 박영철은 일제강점기에 군수, 도지사, 중추원 참의를 비롯한 고위 관공직을 역임했고, 일본이 일으킨 전쟁에 적극 협력한 친일파로 손꼽히는 인물이다. 또 조선 재계에서 알아주는 전국구 재벌이었다. 그렇다 보니 박영철이라고 하면 친일파 재벌이라는 이미지가 강하다. 박찬승 교수는 박영철을 일러 ‘전방위 활약을 보인 친일파’라 표현했다.(<친일파99인>,1993)그런데 박영철은 많은 한시와 여행기, 그리고 회고록을 남긴 문학인이기도 하다. 현재 <백두산유람록(白頭山遊覽錄)>(1921),<아주기행(亞洲紀行)>(1925),<구주음초(歐洲吟草)>(1928),<오십년의 회고(五十年の回顧)>(1929),<다산시고(多山詩稿)>(1932,1939)와같은 저작이확인된다.
친일파들이 하는 흔한 변명 중 하나가 ‘어쩔 수 없이 협력했다’는 것이다. 내심으론 일제의 통치를 달가워하지 않았지만 일제 권력의 위협과 강제 앞에서 한 개인이 저항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는 주장이다. 물론 허접한 변명에 불과하다. 특히 박영철의 시와 산문처럼 내면의 목소리가 담긴 문학작품은 그런 변명을 일축할 분명한 증거가 된다.
<다산시고>를보자.다산(多山)은박영철의호다.박영철은1932년에자신의한시를모아이 책을 펴냈고, 그후에 쓴 시를 합쳐 1939년에 다시 같은 제목의 책을 냈다. 모두 859수의 한시가 실렸는데, 관련 연구에 따르면 이 가운데 대략 100여 수를 친일작품에 해당한다.

  風雲日露兩交兵 풍운처럼 일본과 러시아가 전쟁을 벌이니
  東亞安危在此行 동아시아의 안위가 여기에 달렸구나
  萬里從征投筆起 만리 출정길에 붓 던지고 일어서니
  誰知定遠是書生 정원후(定遠侯, 班超 33~102)가 서생임을 누가 알리요
 〈종군일로전역 從軍日露戰役, 1904〉

박영철은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러일전쟁에 종군했다. 그때 지은 시이다. 일본과 러시아의 전쟁을 동양과 서양의 대결로 인식하고, 동양의 평화는 일본이 러시아에 승리하는데 달렸다고 생각했다. 그는 반초를 떠올렸다. 후한시대 학자였지만 무인으로 자원해 서역 흉노원정에 용맹을 떨친 반초처럼 자신도 붓을 던지고 일본의 대륙 진출에 공을 세우겠다는 의지를 드러냈다. 서구의 위협에 대항하기 위해 동양인들은 일본을 중심으로 연대하여야 한다는 생각은 일제가 조선을 강제병합하기 위해 내세웠던 이른바 ‘대동아합방론’에 정확히 부합한다.
박영철은 일본에 공감하여 그들의 조선 통치를 현실적으로 받아들이고 식민지 건설에 적극 협력하였다. 박영철이 추구하는 세상은 일본제국주의의 번영과 함께 했다. 따라서 일본의 통치에 저항하고 독립을 추구하는 행동은 무모할 뿐만 아니라 그동안의 역사 발전을 돌이키려는 것으로 보았다.
3・1운동이 일어났을 때 함경북도 참여관이던 박영철은 “신정(新政) 이래 생명재산의 안전 또는 교육 민업의 발달은 구한국정치에 비할 바가 아님은 누구라도 이의 없을” 것이니 성과 없는 무모한 운동은 그만두라는 담화문을 발표했다. 조선인과 일본인의 차별이란 것도 두 민족이 같은 수준에 이르면 권리의무에 차별이 없어질 것이란 희망도 피력했다.
박영철에게 조선은 ‘일본 내지가 연장된 곳’이었다. 동민회(同民會) 활동은 그런 생각의 실천이었다. 동민회는 ‘철저한 내선융화의 실현을 통한 아시아민족의 결합’을 주장하며 참정권 청원 운동을 벌인 단체다. 즉 제국 신민의 일원이란 의식의 내면화를 기반으로 조선인들에게도 일본 국정에 참여할 권리를 달라는 요구였다. 서구 세계를 여행하는 동안 그런 생각은 더욱 확고해졌다. 1928년 시베리아열차를 타고 유라시아대륙을 횡단하고 유럽 각지를 돌아본 후 박영철의 감상은 이런 시로 표현되었다.

  白黃人種各西東 백인종 황인종이 각기 서양과 동양을 차지해
  文字方言互不通 문자와 지역 말이 서로 통하지 않는다.
  欲求平和長久策 평화를 이루려는 장구한 대책은
  先須全亞結心同 먼저 모든 아시아가 한 마음으로 뭉쳐야 한다.
  〈세계대세 世界大勢, 1928〉

러일전쟁 한복판에서 가졌던 박영철의 다짐은 20여 년이 흐른 뒤에도 변함없이 재현되었다. 이제 일본과 조선을 넘어 동양이 하나가 되어 서구 열강을 막아내야 한다. 드디어 일본 제국의 성장과 번영이 중국대륙으로 뻗어 나가니 박영철의 가슴은 희망으로 부풀었다. 아래는 1932년 만주국에 가서 발표한 경축시, 그리고 1937년 중일전쟁을 일으켜 중국 본토를 공략하는 일본군대를 찬양하는 시다.

  滿洲九月下天兵 9월 만주에 하늘의 군사가 내려오니
  一境簞壺老幼迎 노유를 막론하고 밥 싸들고 환영한다.
  革舊而今新政好 옛 제도를 혁파하니 이제 새 정치가 좋아서
  三千萬衆得蘇生 삼천만 민중들이 다시 살아났도다.
  〈축만주신건국 祝滿洲新建國, 1932〉

  北京戰捷又南京 북경을 점령하고 남경을 함락하니
  萬里山河旭日隆 만리산하에 빛나는 태양이 떠오르네
  赫赫皇威光四表 혁혁한 천황 군대의 위세 사방에 빛나니
  東洋自此保平和 이 때문에 동양이 평화를 유지하는구나
  〈황군위문가 皇軍慰問歌, 1937〉

1937년 박영철은 경성 주재 만주국 명예총영사가 되었다. 시에서 보듯 그는 일본과 조선이 하나이고, 더 나아가 만주와 중국도 일체라는 대동아공영론을 확신하고 있다. 일본 군대는 침략자가 아니었다. 새로운 정치를 구현할 해방자였다. 만주의 민중들을 다시 살린 일본 군대는 하늘이 내린 천병이요, 중국대륙을 점령한 천황의 군대는 동양의 평화를 가져올 평화유지군이었다. 일제의 전쟁은 동양평화와 인류복지를 위한 성전이었다. 당연히 조선 사람도 신성한 일본의 전쟁에 동참해야 했다. 1938년 조선지원병제도가 실시되자 중추원 참의 박영철은 “반도민의 국민관념에 신기원을 그은” 것으로 평가하고, 신성한 의무를 위해 “부디 모범적이고 개인이나 가정에 치부가 없는 자신 있는 사람이 지원”하기를 당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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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 주재 만주국 명예총영사 시절 박영철. 1937년 7월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박영철 총영사는 북중국과 몽고 각지를 순회하며 일본군을 위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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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산유람록>과 <아주기행>

 

박영철은 시 외에도 기행문과 회고록 등을 남겼다. <백두산유람록>은박영철이전라북도참여관이던 1921년에 출간한 것으로 백두산 기행문과 시를 엮은 것이다. <아주기행>은강원도지사 시절에 발간한 기행문으로 백두산·지리산·한라산 등 국내여행지와 일본·대만·간도·블라디보스톡·만주·몽고·중국 등 해외를 견문한 것이다. <구주음초>는1928년암스테르담올림픽을 참관하기 위해 3개월에 걸쳐 아시아·유럽 여러 나라를 여행하며 남긴 기록이다.
<오십년의회고>는박영철이51세되던1929년에낸 회고록이다.한글이나한문이아닌일본어로 썼으며, 본인의 행적보다는 한국의 역사와 문화를 정리하고 자신의 견해를 덧붙이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아마도 주 독자층으로 일본인을 염두에 두었던 것으로 보인다. 가령 조선 멸망의 원인을 우리 민족에게 돌리고 있다. 정치적으로는 특권계급의 창궐과 관리의 부패, 정의와 공적 도의의 전멸 등을 꼽았고, 무기력하고 나태한 민족성, 낮은 문화와 생활수준을 지적했다. 일제의 식민통치를 합리화하는 사대주의적 자학사관에 빠져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문화애호가이자 수장가 박영철
박기순·박영철 부자는 조선 중기의 유학자 박순(朴淳)의 후손으로 알려졌다. 본래는 양반이었지만 점차 가세가 기울어 박기순 대에 이르러서는 평민이나 다름없는 처지였다. 그렇지만 미곡상으로 시작해 ‘토지왕’으로 이름을 날리는 등 형편이 나아지자 한학에 관심을 쏟았다. 1935년 박기순이 사망할 때 그의 집에는 3만여 권의 장서가 있었다고 한다.
박영철도 일본에 유학가기 전에는 서당에서 한학을 배웠는데, 이후 한시를 즐겨 짓고 한문으로 저작을 남기는 등 한학에도 조예가 깊었다. 그래서인지 고서화와 시문 등 전통예술에 큰관심을 기울였다. 경성 소격동 144번지(현재 정독도서관 앞 선재미술관 자리) 박영철의 저택
에는 추사 김정희와 오세창 등의 그림과 글씨, 고려자기 등이 널려 있었다. 1930년과 1932년에는 동아일보사가 개최한 조선고서화전람회에 유명한 고서화를 다수 출품하기도 했다. 조선에서 손꼽히는 거부를 이룬 경제력이 그 밑바탕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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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역화휘>와 <근역서휘>

 

그런데 박영철을 단순히 수장가로만 평가하고 넘어갈 수 없는 대목이 있다. 당시 박영철은 위창 오세창의 지도를 받아 <근역화휘(槿域畵彙)> 3책과 <근역서휘(槿域書彙)> 35책을 펴냈다. <근역화휘>는 조선초기부터 말기까지 그림 67점을 수록한 것으로 안견의 그림으로 전하는 산수도, 신사임당의 그림 등이 실렸다. <근역서휘>는 조선시대 명현의 글씨를 망라한 책이다.
흩어져 있던 고서화를 모으고 위창의 안목에 기대 가치 있는 작품들을 책으로 엮었으니, 우리문화유산의 정수들이 실렸다고 평가된다. 특히 1932년 5월에는 <연암집(燕巖集)>을 17권 6책으로 간행해 냈다. 학계에 ‘박영철본 <연암집>’으로 잘 알려진 책이다. 그동안 필사본으로만 전하던 <열하일기>와 <과농소초> 등 연암 박지원의 저작을 최초로 공간하여 세상에 알렸다는 역사적 평가를 받고 있으며, 내용 또한 매우 정확하여 한국고전번역원에서 펴낸 국역 연암집도 박영철본을 대본으로 했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1939년 박영철이 사망한 후 유족은 경성제국대학에 115점의 유물을 기증했다. 자신의 수장품과 진열관 건립비를 경성제국대학에 기증하라는 박영철의 유언에 따른 것이었다. 거기엔 <근역화휘>, <근역서휘> 외에도 김정희, 이황, 정약용, 정선, 김홍도, 장승업 등의 작품이 포함되었다. 경성제국대학은 이를 기초로 경성제국대학진열관을 건립했고, 이를 인수한 서울대학교는 1946년 부속박물관을 개관했다.
박영철의 인생에서 <근역화휘>, <근역서휘>, <연암집>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민족을 말살하려 했던 일제의 식민통치에 적극 협력한 인물이면서도 결과적으로 그는 우리 전통문화를 수호하는 데 일조했으니 아이러니도 이런 아이러니가 없어 보인다.
박영철이 고서화를 수장한 것은 한학에 관심이 컸고 한시와 서화 등을 즐겼던 그의 성정에 따른 것이라고 본다. 또 자신의 수장품을 조건없이 기증하고 심지어 전시실 건립비까지 쾌척한 사실은 문화애호가이자 수장가로서의 모범을 보인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다만 박영철이 수장품을 기증한 곳이 서울대학교가 아닌 경성제국대학이란 점에 주목해야 한다. 중일전쟁에서 일본 군대가 승승장구하던 때였다. 박영철은 조선의 문화와 예술 역시 일본이 건설할 ‘대동아’의 문화적 자산이 될 것을 기대했을 것이다. 그것은 잃어버린 민족의 유산, 그래서 다시 찾아야 할 가치가 아니었다. 일본이 대동아주의를 내세우며 추구한 동양성의 한 축을 담당할 미래 가치였다.

아버지와 아들, 친일파의 오명을 남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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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천황이 친히 장례식에 쓸 폐백과 제물을 내렸다는 <동아일보> 1939년 3월 15일자 기사.

 

1939년 3월 뇌일혈로 갑자기 사망한 박영철에게 일본 천황은 친히 장례식에 쓸 폐백과 제물을 내리고 훈2등 욱일중수장을 추서했다. 당시 박영철의 사망으로 뇌일혈이 대중의 관심을 끌었다. 의학박사 김성진은 “뇌일혈이란 대체로 지식계급에 많은 병입니다. 그 이유는 혈액이 몰려오는 기회가 노동자보다는 훨씬 많기 때문에 출혈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혈압이 높아져서 혈관이 파열되어 뇌에 출혈을 일으키게 됩니다. 장소가 뇌인만큼 위험하고 또 뇌를 많이 쓰는 저명인사에게 많게 됩니다. 대체로 비대하고 술과 고기를 많이 먹는 이에게 많은 병으로 노동자에게는 좀 드문 병입니다.”(<매일신보>1939.3.15)라고설명했다.
뇌일혈이 노동자보다 지식계급에 많은 병이라는 설명은 지금의 의학상식으로선 동의할 수 없지만, ‘비대하고 술과 고기를 많이 먹는’ 사람에게 많이 나타난다는 설명은 일견 납득이 가는 대목이다. 아마도 박영철의 비대한 몸집을 염두에 둔 설명인 듯하다. 박영철의 사진들을 보면 그의 체구 변화를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일제의 식민통치가 깊어짐과 함께 박영철의 몸집도 비대해져 갔던 것이다.
일본의 식민지배를 받는 땅에서 지배자에게 코드를 맞춘 삶으로 대대로 부귀영화를 누렸으니, 해방 후 그들의 고백처럼 세상이 뒤바뀔 줄 몰랐을 것이고, 세월이 흘러 부자가 나란히 치욕의 이름으로 역사에 남을 줄은 짐작이나 했을까. 대를 이어 친일한 사람들 중 아랫대의 누군가는 해방을 맞아 일제의 패망을 보아야 했다. 그런데 박기순-박영철 부자처럼 해방 전에 목숨이 다하기도 한다. 그들은 자신들의 세상이 계속될 것을 믿어 의심치 않으며 친일로 이룬 부를 누리다 삶을 마쳤다. 하지만 역사의 심판에는 시효가 없다. 게다가 아버지와 아들이 모두 친일파라고 평가받는다면 그 치욕이 배가되지 않을까.

∷ 권시용 선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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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음악회창원의 정호영임더,
이공일팔엔
약조희빌
결재가능할거가슴더,
저는도움격려덕부네.
리화장모텔에서 버서나 회원구 봉암동 지역의 학원가..
원루메?
원룸하나 어더 슴더,
팔용산 여풀때기…..
아이구 오메아베!(사진은경남민언련)

일, 2017/12/31- 0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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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학래 회고록 ‘전범이 된 조선청년’, 민족문제연구소서 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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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범이 된 조선청년’ 저자 이학래 씨 [연합뉴스 자료사진]

(서울=연합뉴스) 정아란 기자 = 식민지 조선에서 일제의 포로 감시원으로 동원됐다가 전후 이른바 ‘B·C급 전범’으로 전락했던 이학래(92) 씨의 회고록이 국내에서 출간됐다.

신간 ‘전범이 된 조선청년'(민족문제연구소 펴냄)은 1925년 전라남도 보성에서 태어난 조선인 청년이 어떻게 이국땅에서 일본군의 말단 포로감시원이 됐고, ‘전범’의 멍에를 지게 됐는지를 구술한다.

17살 청년의 인생은 3천 명의 포로 감시원을 2년 계약으로 모집한다는 일제 광고를 접하면서 일순간에 뒤바뀐다.

면사무소에서도 그에게 시험을 볼 것을 권했는데, 당시 관공서의 이야기를 거절하기 매우 어려운 상황이었기에 “사실은 강제징용”이었다는 게 이씨 주장이다.

2개월간 군사 훈련을 받은 뒤 도착한 곳은 태국·미얀마 철도 건설 현장이었다.

포로 감시와 작업 인원 모집 등을 맡은 이씨는 허기져 몰려든 포로들에게 화를 내거나 규칙을 위반한 이들의 뺨을 때리는 등 별다른 인식 없이 비인간적인 대우를 했음을 숨기지 않는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로 인정머리 없는 짓을 했다고 후회하고는 하지만, 당시의 일본군은 포로를 인간으로 취급한 적이 없었어요. 일본군에게 포로는 무시해도 좋은 존재였어요.”

일제 패망 직후 이씨와 동료들은 자기 변론도 허용되지 않는 전범 재판을 받으며 변호사의 민족적 편견 등으로 더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책 후반부는 사형수에서 극적으로 살아남은 이씨가 반세기 넘는 세월 동안 일본 정부를 상대로 평생을 싸우고, 또 스스로 반성했던 과정을 펼쳐 보인다.

세상 물정에 어두웠던 젊은이는 공부 모임 ‘평화그룹’ 참여, 중앙노동학원 입학 등을 하면서 왜 식민 피해자인 자신이 전범이 되었는지를 공부해 나간다.

이씨와 조선인 전범 동료는 1955년 4월 ‘동진회’를 결성하고 일본 정부에 지속해서 국가 보상과 유골 반환을 요구했다.

1960년대 초 실현될 듯하던 국가 보상은 1964년 한일협정 타결로 없던 일이 됐다.

일본 정부는 보상은 한국 정부의 몫이라며 책임을 외면했고, 대일 민간 청구권이 1945년 8월 15일 이전으로 한정되면서 조선인 전범의 사형 같은 경우는 포함되지 않았다.

이씨는 “양국 정치의 사각지대, 전전·전후의 사각지대에 우리 문제는 함몰되고 말았다. 한일 어느 나라 정부와 교섭해도 해결되지 않았다”고 당시 답답했던 마음을 토로했다.

이후에도 포기하지 않고 끈질기게 입법화 운동 등을 펼쳐 온 이씨는 1997년부터 전 연합국 포로와 가족들을 초대해 사죄하면서도 조선인 전범들은 못 본 척하는 일본 정부의 이중적인 면모를 강도 높게 비판한다.

“포로에 대해서 정중한 사과를 하는 한편, 포로 관리를 시키고 책임을 떠안긴 우리는 왜 방치 상태로 내버려 두고 있는 것일까. 우리는 일본에 의해 잠시 쓰이고 버려졌습니다. 우리 문제는 한국과 일본 정부간 교섭대상에서도 제외됐습니다. 실로 허무하고 비통한 심경을 떨칠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이씨는 포기하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전범이 돼 일본의 책임을 떠안고 죽어간 동료의 원한을 다소나마 풀어주는 것이 살아남은 자신의 책무라는 것이다.

‘동진회’가 수십 년의 활동을 이어오는 동안 생활고와 우울증, 친일파라는 손가락질 등으로 조선인 전범 자신이나 그 가족이 비극적 선택을 한 사례들은 독자의 마음을 무겁게 한다.

이 씨는 한국판 발간 후기에서 “반강제적이었다고 해도 동시대에 독립 투쟁을 한 분들도 있었기에 부채감은 쉽사리 떨칠 수 없었다”라면서 “한국 정부가 2006년 일본 강점기하 강제동원 피해자로 인정해 명예 회복해준 점에 감사한다”고 밝혔다.

312쪽. 1만5천 원.0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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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1-02> 연합뉴스
☞기사원문: “전범 돼 죽어간 동료들 원한 푸는 것이 제 책무”

화, 2018/01/02-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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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IDS 홀딩스의 피해자입니다.

15년형을 받은 IDS 홀딩스 대표 김성훈의 파산은 부당합니다.

IDS 홀딩스 사건 관련 내용 : http://bbs1.agora.media.daum.net/gaia/do/debate/read?bbsId=D110&article…

파산 반대 청와대 국민 청원 및 제안 : https://www1.president.go.kr/petitions/45021?navigation=petitions

1조 피해, 37명이 목숨을 잃은 사건 입니다.
정재계 인사들이 엮인 일반 시민이 겪기엔 이미 너무 큰 사기 사건입니다.

피해자들은 오늘도 1심에서 무죄를 받은 지점장들을 2심에서 유죄로 만들려고
애를 쓰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한곳에 집중하기에도 모자른 이 시간에
파산을 막기 위해 또 생업을 뒤로하고 진정서와 시위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김성훈의 파산은 김성훈의 파산만으로는 끝나지 않을 겁니다.
책임을 져야 하는 지점장과 본부장 또한 피해자를 수배하여 피해자로 인한 파산 신청을 할겁니다.

그리고 현재 재판을 받거나 사기를 진행 중인 많은 금융사기꾼들의 표본이 될것입니다.
현재 파산 신청인들 중에 영업자 등록을 한 자도 포함되어 있는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 의도가 순수하다고 할 수 있는지 의문입니다.

훌륭한 일을 하시는 정만순 변호사님
더이상의 억울한 피해자가 나오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부디 사기꾼 파산을 소수의 피해자들로 인하여 다수의 피해자에게
억울한 일이 생기지 않도록 다시 한번 이 사건을 들여다봐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민족문제연구소는 과거의 잘못된 것을 바로 잡는 훌륭한 일을 하는 곳으로 알고 있습니다.
현재의 잘못도 바로 잡을 줄 알아야 과거의 잘못도 올바로 바로 잡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소수의 피해자들과 파산을 진행중인 정만순 변호사님에게 부디 부당한 파산으로
김성훈이 어디에 숨겨놨을지 모를 재산들을 지킬 수 있는 기회를 주지 않으시길 진심으로 부탁드립니다.

목, 2018/01/04- 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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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문제연구소와 국민TV가 함께하는 내역사 ‘역적’ 시즌2 1-2

“효창원 역사적폐청산 과제_차영조 선생님과 함

(차영조 선생님) 영상은 국민TV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국민TV : https://www.youtube.com/watch?v=b39IxmCb32I

팟빵 : http://www.podbbang.com/ch/14024?e=22493120

목, 2018/01/04- 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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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엔=문용식 <아시아엔> 독자] 답답한 심경에 이 글을 올린다.

나는 실향민인 아버지(문순남)의 2남1녀 중 장남으로 김포공항 인근 농촌마을에서 자랐다. 부친이 돌아가시고 형편은 더 어려워져 중학자격 검정고시를 거쳐 공고 졸업 후 사회생활을 하게 되었다.

아이들이 커가면서 할아버지에 대해 종종 묻곤 했지만 실향민인 부친과 함께 한 시간이 짧아 제대로 알려줄 수 없어 늘 미안한 마음이 많았다.

그같은 미안한 마음은 언젠가는 부친의 생전 삶을 복원해 보겠다는 생각으로 이어졌다. 그러던 중 2005년 한 시민단체가 한일양국간 체결한 청구권 문서 공개 요청 소송에서 법원이 “협정문서를 공개하라”는 판결을 한 사실을 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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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뉴시스>

그 결과 국회에서 ‘일제강제동원 피해조사 및 지원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되고 나 역시 본격적으로 부친의 삶을 복원하는 일에 나서게 됐다. 이런 과정에서 한국, 일본, 러시아 정부기관에 3년간 민원을 넣어 부친의 스무살 젊은 시절 삶을 확인하는 공식문서를 러시아정부로부터 받았다.

부친 문순남은 1924년 경기도 개풍군 청교면 출신으로 1945년 6월 2차대전 막바지에 강제동원되어 일본 관동군 130여단 776대대 소속으로 8월16일 중국 선양에서 소련군에 체포됐다. 부친은 이어 러시아 연방 카자흐스탄공화국 내 카라간다 탄광지역 99수용소에 수용돼 강제노동을 하다 49년 2월 남한으로 귀환하였다.

74년 부친이 사고사가 아닌 지병으로 별세했는데, 당시 상가에 파출소 순경이 와서 이것저것 묻고 갔다. 시간이 지나 나중에야 그 이유를 알았다. 부친은 과거 적성국가에 체류한 일로 ‘요주의 인물’로 늘 기관의 감시를 받고 사셨다는 것을···.

오는 2월이면 ‘시베리아 억류 한국인 귀환 69주년’이 된다.

일본은 2차대전 막바지 패전 위기에 몰리자 만주에서 중국과 전쟁 중이던 정예병력을 본토방어를 위해 차출했다. 이에 따라 부족 병력은 그들이 식민지로 삼았던 지역에서 동원령을 선포해 무차별 징집하고 만주 등 최전선으로 내몰았다.

한국인 귀환자들은 전쟁 막바지에 일본 군인으로 동원되어 일본의 항복선언과 동시에 만주와 사할린 등에서 소련군에 포로가 됐다. 이들은 시베리아 등에서 강제노동에 내몰리다 천신만고 끝에 북측 지역인 흥남을 거쳐 1949년 2월 남한으로 귀환하게 되었다.

2009년 2월 27일, 귀환 60주년 행사가 민족문제연구소 주관으로 국회도서관에서 진행되고 곧 이어 3월 2~15일 관련 자료전시회가 열렸다. 벌써 9년 전 일이다. 당시 행사에는 일본에서 곤노 아즈마 참의원과 몇몇 의원이 참석했으나 정작 한국에선 이정희 의원과 노회찬 전 의원(당시)만 참석할 뿐이었다. 국회 내에서 진행된 행사임에도 주요정당의 ‘잘난 의원님’들은 얼굴도 비치지 않았다. 피해자와 유족들은 서운한 마음이 많았다.

해방 이후에 전쟁포로가 되어 지옥같은 체험을 하고 조국에 귀환한 지 70년이 되도록 ‘시베리아 억류문제’는 국가가 해결도 못하고 있어 억울하고 답답한 심정은 말로 다할 수 없다. 그동안 국가의 무관심 속에 피해자들은 한을 품고 하나둘 쓰러져 이제 생존자는 채 10명도 안 된다.

촛불혁명으로 달성한 문재인 정부에서도 마찬가지다. 참으로 가슴이 아프다. 정부와 정치권이 과연 이 문제에 대해 해결할 의지는 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청와대와 외교부에 그간 수차례 호소문을 제출하며 문제해결을 요청했다. 하지만 달라진 것은 아무 것도 없다.

한일의원연맹 총회가 매년 봄·가을 양국을 오가면서 2번씩 열려도 지금까지 의제로 의논 한번 되지 않았다. 피해를 당한 국민이 명백히 존재하며, 정부에 기록도 있고 수년 전 진상조사도 완료한 사안이다.

나같은 유족은 그 억울함을 어디에 호소해야 한단 말인가? 일제하 징병 갔다가 구소련에 의해 억류돼 강제노동을 해야 했으며, 이같은 행위는 명백히 국제법 위반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피해국민의 주권국가가 가해자인 상대국에 대해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는 이상한 일이 대한민국에서 70년이 지나도록 일어나고 있다.

새정부 들어 촛불민심을 반영하는 국민참여 제안에 18만건이 접수되고 정부는 그 제안을 바탕으로 5개년 국정 계획으로 5대 국가비전 전략목표와 20대 국정 전략과제를 수립하고 총 100개의 현안 목표를 수립했다. 과거사 문제는 전략목표 1번 3번째에 위치할 정도로 중시하고 있다. 특히 ‘국민의 눈높이’에 맞는 과거사 문제해결을 내걸고 있다. 과거사 문제를 제대로 처리해달라는 여망이 많았기 때문이다.

다시 한번 스스로에게 묻는다. 새정부가 과거사 문제를 국정 우선과제로 삼아 관리해 나갈 계획을 갖고 있다고 철썩같이 믿어 온 내가 잘못 생각한 것은 아닌가 하고. 내 가슴이 이럴진대 당사자이자 먼저 가신 아버지, 그리고 아직도 생존하신 피해자들 마음은 어떨까 생각하면 피눈물이 솟는다.

<2018-01-05> 아시아기자협회

☞기사원문: 시베리아 억류 피해자 유족의 피맺힌 절규

금, 2018/01/05- 1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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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년에 “우리에게는 페미니스트 선생님이 필요합니다” SNS 해시태그 운동을 펼쳐 큰 호응을 얻은 ‘초등성평등연구회’가 제7회 이돈명인권상을 받았다. (이미지 출처 = 초등성평등연구회 페이스북)

초등학교 페미니즘 교육을 실천해 온 교사 모임이 이돈명인권상을 받는다.

천주교인권위원회는 초등학교 교사 13명이 모인 ‘초등성평등연구회’를 제7회 이돈명인권상 수상자로 선정했다고 1월 4일 밝혔다.

이에 대해 초등성평등연구회 서한솔 회원은 “2017년은 이룬 것이 없는 굉장히 고생스러웠던 해였는데, 이돈명인권상 수상은 유일하게 들려온 좋은 소식”이라면서 “여성 인권, 모든 인간의 삶에 관한 아직 해결되지 않은 문제들을 교육의 역할로 조금 더 나아지게 노력하겠다”고 <가톨릭뉴스 지금여기>에 말했다.

천주교인권위는 초등성평등연구회가 창립한 지 2년이 채 되지 않았지만, SNS에서 “우리에게는 페미니스트 선생님이 필요합니다” 해시태그 운동으로 페미니즘 교육의 필요성을 알렸다고 소개했다.

또한 천주교인권위는 초등성평등연구회의 활발한 활동, 자체 연구 제작한 교안의 완성도와 수업 활용도, 향후 활동에 대한 기대 등을 종합해 볼 때, “우리 사회에 꼭 필요한 실질적 성평등 과제를 초등학교까지 넓혀 사회적 확산효과가 크다”고 시상 이유를 설명했다.

초등성평등연구회는 교과서의 성불평등을 분석하고 재구성하기, 학생들이 접하는 미디어를 젠더(성, Gender) 관점에서 비판적으로 보기 등을 수업에 적용해 왔고, 창의적 체험활동으로 성편견 인식과 생리에 관한 수업, 독서교육을 통한 양성평등 수업 등 다양한 페미니즘 교육을 하고 있다.

이돈명 변호사(1922-2011)는 천주교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 민족문제연구소 이사장 등을 역임했고, 1986년 부천경찰서 성고문 피해자 권인숙 사건 변호를 맡는 등 민주화와 천주교 사회운동에 기여했다.

천주교인권위는 이 변호사를 추모하고 인권의 가치에 대한 고인의 뜻을 이어가기 위해 2011년 인권상을 만들었다. 2017년 이돈명인권상은 평화운동 단체 ‘전쟁없는세상’이 받았다.

시상식은 1월 10일 오전 11시 서울 정동 프란치스코 교육회관에서 열린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gt;

<2018-01-05> 가톨릭뉴스 

☞기사원문: ‘초등성평등연구회’에 이돈명인권상 

금, 2018/01/05- 2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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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을 여는 역사 2017년 겨울 호 어직 출판 안되었나요???

토, 2018/01/06- 1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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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자료 중 11월 29일 탑재된 가이드북 한글파일 자료가 탑재가 되어 있지 않은 것 같습니다. 확인 부탁 드립니다.

영문이나 일문은 다운이 가능한 것 같구요…

 

일, 2018/01/07- 06: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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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한용 교육홍보실장

11월 9일(목) 워싱턴을 향해

지난 11월 9일 임헌영 소장님을 모시고 인천공항 오전 10시 15분발 워싱턴행 비행기를 탔습니다. 미국의 워싱턴, 뉴욕, LA에 민족문제연구소 지부를 결성하기 위해 8박 9일의 긴 출장에 오른 것입니다.
워싱턴까지는 무려 13시간 40분. 비행시간이 긴만큼 기대는 높아졌습니다. 워싱턴 덜레스 국제공항(IAD)에 도착하니 시차 때문에 여전히 9일 아침 9시 50분입니다(이후 일자 시간은 현지 기준).
주희영 회원과 박현숙 님(윤흥로 박사님 부인)이 공항에 마중 나와 주셨습니다. 인사 후 바로 숙소로 향했습니다. 숙소는 워싱턴 교외인 알링톤(Arlington)의 가정집입니다. 이번 워싱턴 지부 결성에 핵심 역할을 해주신 윤흥로 민주평통 워싱턴지회장님 댁입니다. 이미 한국에서 뵈었던 터인데다가 유머도 있으신 분이라 내 집 같이 편안하게 느껴졌습니다.
짐을 풀고 잠시 쉰 후 ‘설악가든’이라는 식당으로 갔습니다. 점심식사를 겸해서 중앙일보 워싱턴지국, 한국일보 워싱턴지국, 기쁜소리방송 등 현지 한인 언론과 합동인터뷰를 하기 위해서입니다. 중앙일보 워싱턴지국 기자들은 한국 본사와 달리 진보적인 분들입니다. 출국하기 전 제가 보낸 원고도 그대로 실어주었습니다. 다만 양면 통광고로 이승만·박정희 유료광고가 같이 실린 건 유감이지만 말입니다. 소장님이 쓰신 원고도 한국일보 워싱턴판에 실렸고요. 이 글들이 실리자마자 워싱턴에 도착해 또 한 차례 심층인터뷰를 진행한 겁니다. 시작이 좋습니다.
윤흥로, 정석구, 주희영, 김미현 등 곧 조직될 워싱턴지부 핵심 회원들과 함께 인터뷰를 진행했습니다. 인터뷰 내용은 주로 민족문제연구소에 대한 소개, 친일인명사전, 식민지역사박물관, 워싱턴지부 결성의 의미와 앞으로의 활동계획 등이었습니다. 소장님이 주로 인터뷰를 하시고 그 외 현지 회원분들과 저도 거들었습니다.
점심 후 숙소로 돌아와 몇 시간 정도 숙면했습니다. 시차적응도 안 된데다가 14시간 가까이 비행기를 타고 오면서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저녁에는 숙소에서 환영을 겸한 만찬을 했습니다.

윤흥로 부부, 노병원, 김조명, 박희구, 정석구, 주희영, 김미현 등 70대부터 30대까지 어우러진 즐거운 자리였습니다. 노병원 선생께서 갑자기 “박선생은 민족주의를 무어라고 생각합니까?” 라고 물어보시기에, 저는 “억압받는 자들의 해방 담론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정도로만 대답했습니다. 조심스럽기도 해서요.
식사에 와인을 곁들인 멋진 만찬이었지만, 모두 차를 갖고 오신 터라(밤 10시30분경 끝냈습니다) 전 헨리 16세가 먹었다는 술부터 시작해 다양한 와인을 빨리 많이 마셨습니다

10월 10일(금) 워싱턴 2일차, 민주평통 특강

이날 오전은 주희영, 김미현 두 분의 안내로 워싱턴의 몇 군데를 들러보았습니다. 먼저 아메리카홀로코스트 뮤지엄에 갔습니다. 미국 유대인들이 출연한 민간기구로 무료입니다. 실로 어마어마한 크기와 시설에는 놀랐지만 진품이나 원본이 많지는 않았습니다. 자신들의 홀로코스트는 기억해달라면서 정작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학살에 대해서는 침묵하는 현실을 생각하자니, 다소 불편했습니다. 또 나치 희생자에는 공산주의자, 사회주의자, 집시, 동성애자 등이 있었는데 왜 자신들에게 가해진 것만 보라는 건지… 문득 수구집회 때의 이스라엘 국기가 생각나 감정이 롤러코스트를 타는 듯했습니다.
이어 국회의사당도서관에 들렀습니다. 단순한 도서관이 아니라 전시회를 비롯해 각종 이벤트가 열려 시민들이 즐겨 찾는 곳입니다. 토마스 제퍼슨의 기증자료를 기반으로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담에는 맞은편의 국회의사당 건물을 겉으로만 보았습니다. 미국 대통령도 이 건물 정문 계단 위 월대에서 취임 선서식을 합니다. 그 악명 높은 가쓰라-태프트밀약이 이뤄진 방도 이 건물에 있다고 주희영 회원이 일러줍니다.
점심은 워싱턴 DC에서 가장 오래되었다는 식당인 Old Ebbit Grill에서 박진영(American University 교수. 동아시아사상사 강의) 교수님, 주희영, 김미현 씨와 함께 먹었습니다. 박교수님은 워싱턴의 초대 지부장이 되실 분입니다. 식사하면서 우리 연구소와 지부의 향후 사업방향에 대해 대화를 나누고 박교수님과 헤어졌습니다.
저녁 6시 30분. 한미과학협력센터(Koran-US Science Cooperation Center)에서 워싱턴 민주평통 초청 특강 ‘분단을 넘어 통일의 길로’라는 주제로 제가 두 시간 정도 강연과 질의응답을 했습니다. 제가 정부유관단체에서 통일을 주제로, 그것도 워싱턴이라는 제국의 수도 부근에서 강의하다니!!!
당연히 임헌영 소장님이 하셔야 할 강연을 외람되게도 제가 하게 되어 송구했습니다. 민주평통 사무국의 일부 잔존 인사들이 제가 좌빨이라는 이유로 반대함에도 관철시키고 마땅히 소장님이 하셔야 함에도 일부러 제게 기회를 주신 윤흥로 회장님의 깊은 뜻에 감사드립니다.
강의 내용과 평가는 어땠냐구요? 직접 말하기는 민망하지만 “베리 굿!”이었다고 합니다. 초청측 인사나 우리 연구소 위상에 누가 되지 않아 천만다행입니다.
밤 9시쯤 고려촌이란 식당에서 심훈 선생의 손주 사위, 이재수님 등도 합석해 순두부에 막걸리를 함께 마시고 밤 11시경 숙소로 돌아왔습니다.

10월 11일(토) 워싱턴 3일차, 지부 창립대회 개최

이날은 소장님께서 강행군 하신 날입니다. 오전 10시부터 오후 4시까지 워싱턴지역의 문인들을 대상으로 ‘사랑과 행복, 구원으로서의 문학’이라는 주제로 점심시간을 포함해 6시간 가까이 강의를 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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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간에 저는 고약하게도 주희영, 김미현 회원과 링컨기념홀, 백악관 앞 등을 ‘관광’하였습니다. 그리고는 일식 초밥집에서 윤흥로 정석구 두 분도 함께 어울려 점심을 먹었습니다. 웬만하면 엄두를 내기 어려울 정도로 푸짐하게 각종 초밥을 맛보게 해주신 윤흥로 회장님 덕에 모두들 잘 먹었습니다.
저녁 6시부터 9시까지 어제와 같은 곳인 한미과학협력센터에서 우리가 온 목적인 강연회와 워싱턴지부 창립총회가 열렸습니다. 제 강의 주제는 ‘우리 시대 역사적폐를 말한다’였는데, 썩 잘하진 못했습니다. 그래도 지부는 순조롭게 결성되었습니다. 지부 이사장에는 윤흥로, 지부장은 박진영 교수, 사무총장 주희영, 간사 정석구 김미현 등 기본꼴을 갖추었습니다. 미국의 심장부인 워싱턴-소장님은 ‘세계의 수도’라고-에 최초의 미주 지부가 결성되는 감격의 순간입니다. 이렇게 워싱턴의 마지막 밤은 깊어갔습니다.

10월 12일(일) 뉴욕 지부 창립준비위원회 개최

워싱턴 Reagan National 공항에서 10시에 출발해 뉴욕 JFK 공항에 11시 좀 넘어 도착했습니다. 박매헌-클래어 부부회원이 공항까지 마중 나오셨습니다. 뉴욕 촛불집회를 이끈 젊은 부부입니다. 박매헌 회원의 미국식 이름은 Kevin인데 스스로 윤봉길 의사의 호를 따서 활동할 정도로 민족의식과 민주주의 신념이 투철한 분입니다. 곧장 숙소이자 모임장소인 이춘범님 댁으로 갔습니다. 70대의 이춘범 선생님은 한국에서 코리아 헤럴드 기자로 3년간 일하시다가 뉴욕으로 오셨답니다. 전면에 나서지는 않고 뒤에서 뉴욕 한인들을 중심으로 민주화운동에 헌신하셨고, 박매헌 부부 등의 촛불집회에도 많은 응원을 해주신 분입니다. 개인적으로 한국 관련 자료 특히 한국전쟁과 관련해 많은 자료들을 소장하고 계십니다. 소장님이나 저도 전혀 몰랐던 분입니다. 이춘범 선생님의 말씀에 소장님과 저는 감격했습니다. “나는 그동안 일체의 단체 직을 맡지 않았지만, 죽기 전에 민족문제연구소 뉴욕지부를 만들어 활동하는 게 유일한 희망입니다. 인터넷으로 늘 민족문제연구소 활동을 보고 응원해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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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지부 창립준비위원회 결성 후

저녁 5시부터 사모님이 손수 마련한 음식들로 저녁을 나누면서 뉴욕지부 창립준비모임을 위한 간담회를 가졌습니다. 한국의 민주화운동에 헌신한 80대부터 40대 뉴욕 촛불집회세대까지 30명 이상 모였습니다. 소장님과 저는 연구소 소개, 해외지부 설치 의미 등을 설명한 후 참석자분들과 질의응답식으로 진행해 뉴욕지부 창설을 결의했습니다. 지부 이사장님으로 이춘범 선생님을 만장일치로 추대했습니다. 내년 3월경 창립총회를 가질 예정입니다.
뉴욕지부는 정치의식이 뛰어난 원로부터 작년 뉴욕 촛불집회를 주도한 젊은 세대가 어우러져 아주 좋습니다. 아일랜드 출신의 노동운동가도 한국인 아내인 이선아 회원을 따라 참석해, 미제국주의를 규탄하고 한국의 민주화와 남북 평화통일을 기원하는 발언을 해서 박수갈채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캐나다 토론토에서 19세 소녀가 12시간 동안 버스를 타고 절 만나러 와 또 감격했습니다.

10월 13일(월) LA 첫날, 지부 결성 준비회의를 하다

이춘범 선생님의 차로 JFK공항으로 가 11시 15분발 비행기로 마지막 행선지인 LA로 향했습니다. 6시간 넘게 걸려 JFK공항에 도착했는데도 시차 때문에 LA 현지 시간으로 오후 2시 반쯤 되었습니다.
마중 나온 정찬열 선생님(문인)의 차를 타고 곧장 ‘명동교자’라는 식당으로 직행했습니다. 기내에서 점심을 사먹지 않아서 배가 많이 고팠습니다. 칼국수와 만두국 등을 시켜먹었는데, 칼국수가 기가 막히게 맛있었습니다. 1인분이 한국에서는 2인분 정도입니다.
식사 후 소장님과 함께 숙소인 JJ Hotel로 들어갔는데, 이 호텔 2층에서 박정희출생백년기념학술대회가 열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숙소에 짐을 풀고 로비로 내려오다가, 엘리베이터 입구에서 조갑제 씨와 마주쳤습니다. 소장님이 아는 체 하자(실은 오래전부터 잘 아는 사이) 조갑제 씨는 눈조차 마주치지 못하고 몸을 굽신굽신하면서 도망치듯 엘리베이터를 타는 겁니다. 이겁니다!!! 가짜는 진짜를 만나면 쥐가 고양이를 만나듯이 됩니다.
저녁 6시 우리는 중국식당인 용식당에서 LA지역 유력 단체 관계자들과 저녁식사를 하면서 지부 결성건을 논의했습니다. 70대의 통일운동과 민주화운동 1세대 어른부터 40대 성공회 신부님, 세월호, 일본군 ‘위안부’ 관련 운동단체, 촛불집회 핵심관련자들이 함께 참가했습니다.
마치 LA시민단체 연석회의 분위기였습니다. 공교롭게도 조갑제 김평우 같은 수구 인사들이 우리가 묵고 있는 호텔에서 박정희 탄생 100돌 기념학술대회를 열었고, 우리가 지부창립총회 준비회의를 하는 동안 건넌방에서 이들도 뒤풀이 모임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지금 두 개의 LA가 미래를 놓고 치열한 싸움을 시작한 셈입니다.

11월 14일 LA 2일차, LA지부 창립

오전과 오후는 소장님을 모시고 LA 민족학교와 지역 문인들을 만나면서 보냈습니다. 그리고 저녁 7시부터 9시까지 LA원불교 교당에서 민문연 LA지부 창립대회 겸 강연회가 열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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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립식에서 정찬열 선생님이 지부장, 김창옥님(국선도 사범)이 사무국장으로 선출되셨습니다. 드디어 미국 속의 작은 한국 LA에 연구소 지부가 출범한 것입니다. 이어 신은미 님의 축가와 저의 특강이 이어졌습니다. 박근혜정권 때 북한 방문기를 순회토크쇼로 진행하다가 추방되었던 바로 그분입니다. 부군과 함께 2시간 반이나 차를 몰고 참석했습니다.
신은미 님이 피아노를 치면서 ‘그리운 금강산’을 부르니 그만 저까지 울컥해졌습니다. ‘우리시대 역사적폐: 분단적폐’라는 주제로 강의를 시작하는데 목이 메어 잠시 민망했습니다. 처음에 사람이 많지 않아 걱정했는데 강연이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아 교당이 꽉 찼습니다. 강연 반응은 매우 좋았습니다. 소장님도 크게 기뻐하셨습니다. 비로소 저도 안도의 한숨을 쉬었습니다. 머나먼 미국까지 와서 강연마저 신통치 않으면 무슨 면목으로 돌아가겠습니까.

11월 15일(수) LA 3일차, 소장님의 문학 강연

소장님의 인맥은 넓고 다채롭습니다. 이날 점심은 미주한국문인협회장 이윤흥, 미주시인협회장 조옥동, 재미수필문학가협회장 김화진, 미주소설가협회장 곽셜리, 미주가톨릭문협회장 정찬열, 미주시학회장 정미셸 등과 함께 했습니다. 점심 후 저는 할 일이 없습니다. 저녁 6시부터 9시까지 소장님은 현지 문인들을 대상으로 ‘사랑과 행복, 구원으로서의 문학’이라는 주제로 강연을 하셨습니다.
저는 따로 연구소 이상윤 회원이 긴급 연결해준 외삼촌이란 분과 횟집에서 편안하게 술 한 잔 했습니다. LA에 다시 들르면 술친구 삼아 만나자고 하십니다. 신은미 씨 부부도 뒤늦게 합류해 잠시나마 즐거운 시간을 가졌습니다. 이제 워싱턴 뉴욕 LA에 가면 우리를 맞아줄 동지들이 있으니 얼마나 즐겁습니까.

 

11월 16일(목) 서울을 향해

미국시간 11월 16일 톰브레들리공항에서 오전 11시발 비행기를 타고 13시간 정도 걸려 인천공항에 도착했습니다. 8박 9일의 출장으로 워싱턴, 뉴욕, LA 등 미주 3대 지부를 결성하는 역사의 현장을 함께하여 그 보람은 이루 말하기 어렵습니다. 여기에는 현지 회원들의 노력도 컸지만 소장님이 오랫동안 공을 들이신 결과이기도 합니다.
7박 8일 동안 칠십이 훨씬 넘으신 고령이심에도. “박실장, 이런 출장, 신나지 않아?” 하시며 놀라운 체력과 열정을 보여주신 임헌영 소장님. 새삼 존경합니다. 그리고 워싱턴 뉴욕 LA지부 창립에 헌신하신 현지 동지들과 기꺼이 회원이 되어주신 동포 여러분께도 깊이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이 출장을 매끄럽게 준비해준 연구소 사무총장님 이하 상근 동지들에게도 감사드립니다.

박한용 교육홍보실장

화, 2018/01/09- 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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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전 친일파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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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몽운동과 신소설

1904년 러일전쟁이 발발하자 이인직은 일본육군성 한국어 통역으로 임명되어 제1군 사령부에 배속되며, 1905년에 그 공적을 인정받아 80원의 사금(賜金)을 받습니다. 일본 유학 시절 이미 일본제국주의에 호의적인 태도를 갖고 있던 그였기에 가능했던 선택입니다.
하지만 그가 러일전쟁의 성격을 어디까지 이해하고 있었는지 알 수 없지만 한국에 대한 주도권을 갖기 위한 전쟁, 그리고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한국에 대한 주도권을 갖게 되고, 결과적으로 한국 강점까지 이어지는 일련의 과정에서 그 결정적 계기부터 기여했다는 것은 그의 미래를 암시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일본에 대한 호의가 곧바로 직접적인 매국행위로 이어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1904년 러일전쟁과 1905년 을사늑약 등을 계기로 일제로부터 침탈당한 국권을 회복하기 위해 애국계몽운동이 전개되었고, 문학에 있어서도 계몽주의 문학이 전개됩니다. 한국의 계몽주의 문학은 갑오개혁 이후의 창가나 신소설 등을 말하는데 이인직이 쓴 <혈의누>가 신소설로는 최초의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한국의 계몽주의는 서구의 계몽주의와는 조금 다른 양상을 보입니다. 어찌 보면 계몽운동이 일어나는 역사적 배경이 다르기 때문에 당연한 얘기일지도 모르겠지만 그 차이점에 대해서는 짚고 넘어가겠습니다.
서구의 계몽주의는 17세기 후반 영국에서 시작되어 18세기를 풍미합니다. 계몽주의의 영어, 독일어, 프랑스어 단어인 ‘enlightenment, Aufklärung, lumières’에 볼 수 있듯이 서구의 계몽주의는 빛(light)과 관련된 말로 표현됩니다. 그 빛의 연원은 성경에서 출발합니다. 창세기 1장 3절에 “빛이 있으라(Let there be light)”가 그것입니다. 즉 빛은 그것이 생김을 통해 무질서한 혼돈의 카오스(chaos)가 질서정연한 코스모스(cosmos)로 변화하는 것을 상징합니다. 계몽주의에서 이 빛에 해당하는 것이 바로 ‘이성(reason)’입니다. 전통적인 기독교적 세계관을 거부하고, 이성에 의해 우주의 법칙을 이해할 수 있고, 무한히 진보할 수 있다고 믿었던, 이성을 통해 인간, 사회, 자연에 대해 새로운 인식을 펼치는 철학운동이었습니다.
계몽주의의 핵심적 가치들은 이성, 기계론적 과학, 보편주의, 진보, 개인주의, 관용, 자유주의, 사유재산, 세속주의 등으로 정리될 수 있습니다. 이른바 근대주의의 총합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 ‘민족주의’까지 연관됩니다, 좀 복잡한 문제라 더 자세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르네상스부터 시작하여 계몽주의, 19세기 사회진화론까지 이어지는 일련의 사상적 흐름들을 설명해야겠지만 이 정도에서 갈음하겠습니다. 결과론적으로 계몽주의는 교회와 절대왕권으로부터의 ‘자유주의’ 확산을 가져왔으며 세계 3대 시민혁명에 영향을 끼쳤습니다.
이렇게 보면 ‘계몽주의’라는 번역은 ‘enlightenment’라는 단어로 보나 내용적으로 보나 뭔가 부족한 번역임에는 틀림없습니다. 물론 서구의 계몽사상가는 ‘계몽’을 위해 더 많은 독자에게 다가설 수단을 개발했으며 소설, 연극, 풍자시, 심지어 포르노그래피까지 동원하여 기성 세계와 가치관을 비웃고 공격했습니다만 핵심이 ‘계몽’ 그 자체에만 있던 것은 아닙니다.
그에 반해 한국의 계몽주의는 서구의 근대화를 쫓아가기 위한 계몽이었습니다. 근대적인 방향으로 변화하는 사회의 반영으로서 근대적인 사상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중국적 세계질서가 깨지고 서구의 근대적 국제질서가 그 자리를 대신한 것을 의미합니다. 화이(華夷)사상에 입각해서 야만, 오랑캐로 상징되던 서양이 아니라 서세동점(西勢東漸) 시대의 반영이었습니다. 개화, 자강 등의 단어가 이를 상징하는데 그래서 한국의 계몽주의․계몽운동은 개화운동의 연장선상에서 바라봐야 합니다. 특히 1904년 이후의 계몽주의·계몽운동은 일제 침략에 대한 구국운동의 성격을 가집니다. 이는 그 자체로 혼란입니다. 또한 역사적 배경이 서로 완전히 다른 서구사상 즉, 18세기 계몽주의의 뒤를 이은 19세기 ‘사회진화론’까지 동시에 혼재되는 양상이 이 혼란을 증명합니다. 서구에서 2세기에 걸친 사상적 흐름이 10여 년 정도의 기간에 왜곡된 형태로 압축되어 전개된 것은 제국주의라는 외부 충격에 의해 억지로 근대로 진입하고자 하는 시도가 얼마나 큰 혼란을 초래하는지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이인직은 일본에서 귀국한 후 1906년 2월 국민신보 주필을 거쳐 1906년 6월 만세보 주필을 역임하면서 1906년 7월부터 <혈(血)의누(淚)>를 만세보에 연재합니다.이후 <귀(鬼)의성(聲)>(1906.10)을이어서 연재한 다음 1908년 유일서관에서 <치악산(雉岳山)>과 <은세계(銀世界)>를 출간합니다.

 

양반을 보면 대포로 놓아서 무찔러 죽여 씨를 없애고 싶은 마음이 있으면서 거죽으로 따르고 (귀의 성)

우리나라 일은 깊은 잠 어지러운 꿈과 같아 불러도 아니 깨이고 몽둥이로 때려도 아니 깨이는 터이라. 어느 때든지 하늘이 뒤집히도록 천변이 나고 벼락불이 뚝뚝 떨어지기 전에는 저 꿈 깨기가 어려우리라 싶은 것도 옥남의 생각이라(은세계)

 

이인직의 신소설은 평가가 엇갈리는 측면이 있습니다. 특히 위의 글에서 보이는 것처럼 반봉건사상은 1920년대를 대표하는 시인이자 사회주의 문학운동가 임화조차 경우 매우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습니다.

 

거기에서 낡은 사회기구의 부패상이나 몰락과정뿐만 아니라 그 가운데 있는 계층적인 제 모순과 사회적인 제 갈등이 투쟁의 높이에까지 고조되어 표현되고 있다. 즉 봉건적인 학정 하에 신음하는 인민의 참을 수 없는 상태와 더불어 그들의 반항심과 그것이 유발하는 행위가 부패한 구기구와 더불어 자연스럽게 취급되고 있다. 이 점은 범백의 신소설 중 <은세계>를 가지고 최고봉을 삼지 아니할 수 없다.(임화, 「개설 신문학사」, <조선일보> 1940년 2월 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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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의 글에서도 이인직이 일관되게 봉건의 문제를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다고 표현했듯이 “이인직에게 글쓰기는 봉건체제에 대한 이데올로기 투쟁”(한기형, <한국근대소설사의 시각>,1999)이라는지적은일면타당해 보입니다.
하지만 그의 글이 일본에 우호적인 태도로 일관된 것은 부정하기 힘듭니다. <혈의누>와 <귀의성>의경우제목에서부터 일본의 영향을 드러냅니다. <혈의누>와 <귀의성>는우리말로‘피눈물’과‘귀신소리’인데한문혹은 한국어는 이렇게 복합명사를 간단히 붙여 쓴 명사의 나열로 표기하여 앞의 명사가 뒤에 오는 명사의 재료 또는 구성요소임을 나타내는 게 일반적입니다. ‘피의 눈물’과 같은 방식으로 ‘~의(の)’를 체언의 뒤에 관형격 조사를 붙여 복합명사를 표현하는 것은 일반적이지 않습니다. <血의淚>와 <鬼의聲>은일반적으로 <血淚>와 <鬼聲>이라고 간단히 표현합니다. 이런 식으로 관형격 조사를 붙이는 방식은 石の橋(돌다리), 竹の子(죽순) 등처럼 일본어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복합명사의 표현방식 중 하나입니다. 이인직이 10년간 일본생활을 했던 습관이든 아니면 의도적이었든 최초의 신소설이 일본어투의 제목을 달고 계몽주의를 표방했다는 것은 의미심장한 일입니다.
이인직의 신소설은 대부분 한국의 후진성에 대비한 문명개화의 당위성과 이를 위한 ‘교육’의 필요성을 강조한 작품입니다. 물론 이인직뿐만 아니라 신소설 작가들은 자신의 작품을 ‘문명개화’ 사상 전파의 수단으로 생각했습니다. 여기서 문제는 계몽이 누구의 관점에서 바라본 것인가 입니다.

 

구씨의 목적은 공부를 힘써 하여 귀국한 뒤에 우리나라를 독일국같이 연방도를 삼되, 일본과 만주를 한데 합하여 문명한 강국을 만들고자 하는 비사맥 같은 마음이요.(혈의누)

 

만일 우리나라가 칠십년 전에 개혁이 되어서 해삼위(海蔘威)에 아라사 사람이 저러한 근거지를 잡기 전에 우리나라가 먼저 착수하였을 것이요, 만일 오십년 전에 개혁이 되었다면 해삼위는 아라사 사람에게 양도하였으나, 청국 만주는 우리나라 세력 범위 안에 들었을 것이오.
만일 사십년 전에 개혁이 되었으면 우리나라 육해군의 확장이 아직 일본만 못하나, 또한 당당한 문명국이 되었을 것이오. 만일 삼십년 전에 개혁이 되었으면 삼십년 동안에 중등 강국은 되었을지라. 남으로 일본과 동맹국이 되고 북으로 아라사 세력이 뻗어 나오는 것을 틀어막고 서로 청국의 내버리는 유리(遺利)를 취하여 장차 대륙에 전진의 길을 열어서 불과 기년에 또한 일등 강국을 기약하였을 것이오.(은세계)

 

일본의 아시아연대론에 기초한 「삼진연방(三陣聯邦)」을 비롯해 이인직은 소설을 비롯해 여타의 저작을 통해 일관되게 일본의 입장을 옹호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문제는 확연하게 드러납니다. 이인직의 계몽운동은 일본의 관점에서 바라본, 즉 일본의 세계관에 입각한 계몽사상이라고. 그가 가진 이런 사상과 관점은 그의 논설을 통해 직접적으로 드러나며 경술국치에 구체적인 행동으로 드러나게 됩니다.
▪ 3부에 계속

김덕영 선임연구원

화, 2018/01/09- 1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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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증자료]

심정섭 지도위원 제60차 자료기증, 도서와 문서류 총 50점 보내와
10월 25일 심정섭 지도위원 겸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이 60번째 자료를 기증했다.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 체신국에서 발행한 우편저금통장, 보험증서가 주를 이룬다.

‘식민지역사박물관과 일본을 잇는 모임’을 통한 자료 기증 잇달아
10월 19일 ‘식민지역사박물관과 일본을 잇는 모임’의 히구치 유이치 공동대표가 연구소를 방문하여 1950~60년대 소책자와 ????民族時報????등 총 18점을기증했다.아울러11월 14일 우편으로 소장자료 5박스를 기증했는데, 주로 일본의 과거사 청산운동과 인권운동에 관한 자료로 전단, 포스터, 뉴스레터, 전단지 자료 등이다.

기타무라 메구미 씨, 제5차 일본 교류관계의 소장자료 전달
일본에서 수화 통역자로 활동하고 있는 기타무라 메구미 회원이 이번에도 교류단체와 개인의 소장자료를 전달받아 11월 20일 연구소에 기증했다.
1923년 9월 간토대지진, 1941년 태평양전쟁 등 관련 기사가 실린 일본의 주요 신문(나고야, 마이니치, 아사히, 서부마이니치 신문) 등 총 33점이다. 또한 지난 9월 26일에는 우편으로 소장자료 2점을 기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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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 열사의 외증손 조근송 선생이 1961년 재건운동본부 관련 자료 3점을 기증했다. 귀중한 자료를 보내주신 분들께 감사드린다.

• 자료실 안미정

화, 2018/01/09- 1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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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소 소장을 지낸 한상범 교수님이 지난 10월 15일 81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교수님은 2001년 2월부터 2003년 9월까지 연구소 2대 소장을 지내셨으며 2002년 4월부터 2004년 12월까지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위원장을 끝으로 공식적인 대외활동은 거의 못하셨다. 그 이유는 갑자기 찾아온 병마 때문이었다.
선과 악의 문제에 있어서는 조금의 주저함이 없으셨고 다양한 사회적 문제에 대해서는 명쾌하게 본질을 꿰뚫어 설명하셨던 교수님, 실천하지 않고 현학적인 수사만 늘어놓는 지식 장사꾼들을 날카롭게 비판하시던 교수님을 더 이상 뵙지 못함이 안타깝다. 연구소 소장님으로 2년 남짓 모셨던 인연으로 몇 가지 교수님과의 일화를 소개하는 것으로나마 고인의 명복을 빌고자 한다.
1991년 창립부터 10년 동안 봉사해온 김봉우 초대 소장이 피치 못할 사정으로 갑자기 소장 직을 그만둔 후 후임 소장 물색은 그리 녹록한 일이 아니었다. 그때 조문기 이사장님께서 신의 한 수처럼 모셔 온 분이 바로 한상범 동국대 법대 교수님이었다. 연구소로서는 천군만마요 야구로 치면 믿을만한 구원투수의 등판이었다. 왜냐하면 보수적이기로 유명한 법학계에서 한교수님만큼 친일청산의 중요성을 역설한 분이 없었기 때문이다.
1991년 <한국법학계를지배한일본법학의유산>을 발표해 법학계의 일제잔재청산을 공개적으로 문제화한 것을 시작으로 <한국의 법문화와 일본제국주의의 잔재><일제잔재 무엇이 문제인가>등 제목만보면연구소가 펴낸책 이라고해도 믿을정도로 한교수님은 친일청산문제에 남다른 관심과 대안을 가지고 있는 분이었다. 게다가 <박정희, 역사법정에세우다><전두환체제의 나팔수들>에서 볼수 있듯이 독재와 불의에 대해서는 타협을 모르는 강직한 분이었다. 그야말로 준비된 구원투수의 등장이 아닐 수 없었다.

연구소 소장 재임 시절 술을 전혀 안 하시는 이유를 여쭤보니 1980년대 초 평생 마실 술을 다 드셨다고 한다. 이유인즉 신군부 시절 불법으로 연행당해 며칠 동안 고초를 겪고 난 뒤 울화가 치밀어 매일 밤 독주가 없으면 잠을 잘 수 없었다고 한다. 법을 가르치는 일을 업으로 하는 사람에게 무법이 횡행하는 시절을 살아내기란 너무나도 힘든 일이었을 터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복기, 김기춘, 우병우 등 시대를 막론하고 늘 ‘법꾸라지’들이 난무했기에 교수님은 ????화있을진저 너희들 법률가여????라는책을펴내서법기술자들을질타했다.
또한 법 문구를 어렵게 만들고 난해하게 표현하여 특권층의 도구로 삼아선 안 된다며 <한글헌법 노트><한자숭배 나라망친다>는책을 펴내기도했다.법학자로서보기 드문 한글 사랑으로 한교수님은 ‘외솔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한번은 재일교포 단체 초청으로 일본을 함께 방문한 적이 있었다. 독재시절 민주화운동을 했던 재일교포들과 양심적인 일본인들을 대상으로 한 강연에서 한교수님은 원고 없이 유창한 일본어로 잠시 강연하시더니 곧바로 “나는 민족문제연구소 소장 자격으로 왔으므로 이제부터 한국말로 연설하겠으니 이해해 달라”고 하신다. 실용에 앞서 자존을 중시하는 태도였다.
민족적 자존 나아가 인간의 존엄은 개성 출신으로서 6·25의 참화를 처절하게 겪어낸 한교수님이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가치였다. 따라서 인간 존엄을 해치는 체제에 대한 본능적 저항은 한교수님에게는 당연한 귀결이었는지도 모른다.
한교수님은 멀리 지방 출장길은 물론이거니와 가까운 외출 때도 늘 작은 책을 가지고 다닌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시집일 때가 많다. 한번은 나에게 “시인 중에 누굴 좋아하시나?”라고 물으시며 “사회운동하는 사람들은 시와 문학작품을 많이 읽어야 한다.”고 하셨다. 사회적 모순과 싸운답시고 자칫 거칠고 메마를 수 있는 감정을 다독이며 사회운동의 초심을 지키라는 조언이셨을 것이다.
지방 출장 중에 부득이 한방에서 묵어야 할 때도 전혀 개의치 않으시면서 늦은 시간까지 당대 인물들에 대한 평을 하시던 모습이 생생하다. 그 당시 평판에 올랐던 인물 중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이명박근혜 정권 때 중용되어 지금까지도 몇몇은 여전히 악명을 떨치고 있다.(스마트폰이 없던 시절이라 그 인물평들을 녹음해 두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다.)
이 밖에 서울 문래동 박정희 흉상 철거로 나를 포함해 여러 명이 재판을 받을 당시, 법정에 참고인으로 출석해 법적, 역사적으로 박정희의 악행을 거론하며 흉상 철거는 정당하다고 저항권의 입장에서 무죄를 주장하던 한교수님은 피고인석에 선 우리들에게 든든한 버팀목이셨다.
이제 연구소는 1991년 창립 이래 터 잡고 활동하던 동대문시대를 접고 용산시대를 연다. 동대문시대에 〈친일인명사전〉 발간이라는 역사적 과업을 성취했다면 용산시대에는 〈식민지역사박물관〉 개관과 대중화라는 또 다른 과제를 안고 있다. 동대문을 떠나며 가장 어려운 시절 연구소 2대 소장으로서 큰 역할을 해주셨던 한상범 교수님이 더욱 그리워진다.
“국가보안법? 허~ 참나. 머릿속의 생각을 벌주는 나라가 어딨어?”

방학진 기획실장

화, 2018/01/09- 1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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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단시대 민족음악의 스승이셨던 노동은 교수님!
선생님께서 2016년 12월 2일 국민적인 애도 속에 우리 곁을 떠나실 무렵, 대한민국의 방방곡곡은 촛불시민혁명의 불길로 타오르고 있었습니다. 그 촛불은 마치 선생님께서 일생 동안 민족음악의 역사적 실현이란 과업을 이룩하고자 노심초사하시던 열망처럼 타올랐습니다. 그런데 민주주의를 갈망하던 민족적인 소망은 결실을 맺고 전기를 맞이하였으나, 선생님은 그 국민적인 승리의 합창을 듣지 못한 채 기어이 소천하시고 말았습니다.
민주화의 깃발 아래서 보다 자유롭고 넉넉하게 선생님께서 탐구해 오셨던 민족음악의 세계를 구축하실 수 있게 된 새로운 세상을 향유하시지 못한 채 떠나버린 선생님이시기에 저희들은 더더욱 안타깝습니다.
민족음악의 발전을 위하여 혼신을 다하셨던 노동은 교수님이시여!
선생님은 일찍이 음악이란 “인간을 위한 인간의 조직화된 소리”라고 정의하여, 음악을 전문 음악인의 전유물에서 모든 인간이 함께 즐겨 듣고 감동하며 공감대를 형성하는 것으로 풀이해 주었습니다. “음악은 국경이 없다”며, 베토벤이 너무나도 좋아 그의 머리를 흉내 내려고 미장원엘 다녔다고 했습니다.
선생님이 좋아하던 베토벤은 “나는 어렸을 때부터 내 예술을 고통 받는 인간들을 위하여 사용하겠다는 정열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러한 과제를 수행하면서 내적인 만족감 이외에는 다른 어떠한 보상도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해 왔다.”고 말했습니다.
국경이 없이 모든 ‘고통 받는 인간들’을 위로하고자 음악활동을 했다는 베토벤의 예술적 투지는 바로 노동은 선생님의 예술적 투혼이기도 합니다.
국경이 없다는 음악임에도 불구하고 선생님께서 굳이 민족음악을 강조하시며 일생을 민족음악의 구축에 심혈을 기울인 까닭은 바로 고통 받는 민족을 위로하고 용기와 투지를 북돋아 주고자 함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선생님은 일찍이 이강숙, 이건용 선생님과 함께 ‘민족음악 연구자 3총사’로 맹활약하셨습니다.

선생님은 참다운 민족음악의 얼을 찾고자 작곡가 김순남과 정율성 등과 같은 격변기의 민족해방투사의 음악에 대한 연구와 보급에 열정을 쏟았습니다.
이어 선생님께서는 일제가 남긴 폐해에도 주목하여 친일음악과 왜색가요의 청산을 강력히 주장하셨습니다. ‘결혼행진곡’의 작곡자가 나치가 숭앙했던 바그너였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그 곡은 물론이고 바그너 음악 전체를 연주 금지시켰을 뿐만 아니라 이를 어기면 끝까지 추적하여 벌한다고 알려준 것도 바로 선생님이셨습니다.
그렇다고 선생님은 결코 폐쇄적이거나 배타적이지는 않았습니다. 피아노와 풍물을 함께 가르쳐야 한다고 주장한 것도 선생님이셨습니다.
나아가 “우리 문화 속에 이미 널리 스며든 뽕짝 같은 왜색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느냐”고 묻자 “그것조차도 우리 문화의 일부이므로 비판적으로 수용, 발전시켜 역수출을 해야 한다”고 우문에 현답을 내놓기도 하셨습니다. 피아노를 치며 노래와 강의를 겸하시던 그 열강을 이제 우리는 다시 들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다행스럽게도 선생님은 병고에 시달리면서도 민족음악사에 길이 남을 ????항일음악 330곡집????을 남겨 주셨습니다.
노동은 선생님! 선생님을 잃은 저희들이 슬픔을 딛고 그나마 위안을 삼는 점은 선생님의 유업들이 끊이지 않고 계승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유명진 사모님과 아드님 노관우 선생을 비롯하여 많은 제자들, 그리고 우리 민족문제연구소가 힘을 합해 선생님께서 터 잡은 민족음악의 고귀한 과업을 이어 가겠습니다.
그러니 선생님, 이제 모든 염려 놓으시고 편안히 영면하시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삼가명복을 빕니다.

2017. 12. 9. 임헌영 올림

화, 2018/01/09- 1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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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흥무관학교 교관을 지냈던 김경천 장군 증손녀 김올가 씨

 

독립투사의 후손으로 산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자랑스러운 선조를 갖는다는 것이 마냥 좋지만은 않은 것 같다. 우리 역사가 독립투사를 제대로 대우했던 역사가 아니라, 제대로 기억하지 않고 제대로 기념하지 않은 역사였기에 더욱 그렇다.
일본육사를 나와 일본군 장교로 복무하다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독립운동에 나섰던 김경천 장군의 증손녀 김올가 씨를 만나 인터뷰를 나눴다.09

문 : 연구소 회원들을 위해 김경천 장군이 어떤 분인지 소개해주세요.

답 : 증조할아버지인 김경천 장군은 ‘백마 탄 김장군’이라는 전설로 유명한 독립투사예요. 본명은 김광서였는데 무관가문 출신이었어요. 아버지 김정우는 일본 유학을 다녀온 고위 장교로 대한제국 군대의 병참 분야 최고 직위인 군기창감을 지내셨어요. 형 김성은은 일본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돌아와 공병대장을 지내셨구요.
아버지는 공업을 배우라고 권하는데 나폴레옹 전기를 탐독하던 할아버지가 결국 군인의 길을 선택하셨대요. 1904년 대한제국 관비유학생으로 뽑혀 일본으로 건너가셨어요. 일본육군유년학교를 거쳐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셨어요. 말 타고 싸우는 기병장교로 동경 제1사단 기병 제1연대에서 근무하다가 3·1운동 후인 1919년 6월 만주로 탈출해서 신흥무관학교 교관이 되셨어요. 할아버지는 일본육군사관학교 후배인 이청천 장군, 중국 사관학교를 나온 이범석 장군과 함께 청년들을 가르치셨어요. 이후 러시아 연해주로 가셔서 독립군 대장이 되셨어요. 동포들을 괴롭히는 마적들을 소탕하셨고, 러시아 내전에 출병한 일본군과도 싸우셨어요. 그렇게 평생을 바쳐 나라를 위해 싸우셨어요.
한국이 독립된 뒤 할아버지의 동지인 이범석 장군님은 국무총리가 되시고 이청천 장군님도 장관과 국회의원을 지내셨는데 할아버지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 불행하게 돌아가셨어요.

문 : 1919년 6월이면 3·1운동 직후로군요. 일본군 장교로 복무 중 독립운동에 투신하신 건데, 정말 쉽지 않은 선택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답 : 조국을 빼앗겼는데 당연히 되찾아야 된다고 생각하셨죠. 할아버지는 일본육사 생도 시절에 3년 후배인 홍사익, 이청천, 이응준과 함께 요코하마에 가서 맹세하셨다고 해요. 조국이 부르면 독립전쟁에 투신하자고 말이에요. 하지만 나라가 망하고 일제의 식민지가 되면서 그 맹세를 지키기가 쉽지 않게 되었어요. 육사 졸업 후 일본군 장교가 되기도 했고요. 결국 홍사익과 이응준은 망명하지 않았어요. 하지만 증조할아버지와 육사 후배인 이청천 두 분만 모든 걸 내던지고 독립투쟁에 나섰어요. 자기 같은 군사전문가가 해야 할 일이었겠죠.
그리고 가장 큰 계기는 삼일만세였어요. 증조할아버지는 당시 종로의 만세시위 현장에 있었고 시위대 속으로 들어갔었어요. 이후 1919년 6월에 이청천과 탈출해 만주 신흥무관학교로 갔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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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 장교 시절 김경천 장군과 부인 유정화

 

문 : 김경천 장군은 주로 러시아 연해주에서 활동하셨어요. 연해주를 선택하신 이유가 있으신가요?

답 : 증조할아버지가 압록강을 건너 서간도 유하현에 있는 신흥무관학교를 찾아가셨어요. 그곳에서 교관이 되어 독립군 양성에 매진하셨구요. 여기서 구한국무관학교 출신인 신팔균 장군도 만나셨대요. 그래서 증조할아버지와 이청천, 신팔균 이렇게 세 분이 하늘 천(天)이 들어가는 별호를 나눠 가지셨는데, 증조할아버지는 경천(驚天), 지대형(이청천 장군의 본명)은 청천(靑天), 신팔균 장군은 동천(東天)이라고 했대요. 세 분을 일컬어 남만주 3천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그런데 증조할아버지는 이청천 장군과 의논해서 이청천 장군은 상해임시정부와 연락하기 위해, 증조할아버지는 연해주로 무기구입 루트를 개척하기 위해 각각 이동하셨어요. 연해주는 혁명전쟁(러시아내전) 중이었지만, 15만여 명에 달하는 한인 공동체가 있고, 소비에트 정부가 한국 독립운동에 우호적이었기 때문에 여러모로 도움을 받을 수 있다고 판단하셨던 것 같아요.

문 : 러시아 연해주에서 김경천 장군의 활약이 정말 대단했다고 하는데, 그 활약상에 대해서도 말씀해주세요.

답 : 아직 많은 연구가 필요한 부분인데 일단 몇 가지 말씀드리자면, 스찬[水淸. 지금의 빨치산스크] 지역에서 동포들을 괴롭혔던 마적단 300여 명을 전멸시키고 말 300여 필과 소총 300여 정을 노획한 적도 있고요. 증조할아버지는 마적 퇴치 투쟁으로 시베리아지역에서 큰 명성을 얻었고, 이때부터 ‘김장군’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어요. 그 후 증조할아버지는 이 지역에서 군정을 펼쳐 동포들을 보호했다고 합니다.
1922년에는 이만에서 러시아 백군과 전투를 벌이게 되는데 이 전투에서의 활약상도 널리 알려져 있어요. 전투 중에 적군(赤軍)의 사령관이 백군에 항복했음에도 불구하고 증조할아버지는 자신이 지휘하는 스찬의병대와 함께 적군 잔여 병력도 함께 지휘하며 백군을 물리치고 이만을 점령했다고 합니다. 연해주 혁명사에 길이 남을 큰 승리였어요. 당시 일본은 이 지역에 최대 병력을 출병시켜 백군을 돕고 있었기 때문에 더 의미 있는 승리라 할 수 있어요.

문 : 그런데 김경천 장군은 1930년대 이후 소련 정부의 탄압을 받으신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왜 그런 건가요?

답 : 증조할아버지에게 일본 간첩이라는 혐의를 씌워 체포한 거예요. 이것은 스탈린의 대숙청과 한인 강제이주 정책 등과 맞물려 벌어졌어요. 대숙청 과정에서 한인 공산당 간부들이 대거 숙청됐고, 증조할아버지는 귀족가문에서 태어났고 일본육사를 나왔으니 소련의 관점으로는 나쁜 성분이었어요. 게다가 공산주의자도 아니었고 공산당원도 아니었어요. 이 무렵 한인 독립운동 지도자들, 오랫동안 민족운동을 했던 사람들이 대부분 체포되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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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증조할아버지는 블라디보스토크에 있는 극동고려사범대학에서 군사학과 일본어를 가르치고 있었는데 체포되셨다고 해요. 1936년 9월 체포되셔서 3년형을 받으셨고 2년 반 정도 복역한 후 1939년 2월 석방되셨어요.
이후 가족들이 있는 카자흐공화국으로 이동하셨는데, 거기서 다시 인민의 적이라는 혐의로 체포되어 8년형을 선고받고 카라간다에 있는 교정강제노동수용소에 갇히게 되셨어요. 1941년에는 시베리아로 이감되셨고, 1942년에는 꼬미자치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으로 유배되셨는데, 거기서 결국 숨을 거두셨어요. 안타깝게도 스탈린독재의 횡포에 희생되신 거죠. 증조할아버지는 스탈린 사후인 1959년 2월 복권되셨어요. 증조할아버지 유해를 찾아 고향으로 모시려는 소망을 아직도 포기하지 않았어요. 어느 나라든 간에 자기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기 위해서 증조할아버지 같은 분들을 제대로 대우하면서 기념해야 하지요.

문 : 독립운동가의 가족은 흔히 힘겨운 삶을 살아가곤 합니다. 가족들의 생활은 어떠했나요? 특히 카자흐스탄으로 이동하신 후의 삶에 대해 말씀해주세요.

답 : 가장 많이 고생하신 분은 증조할머니인 유정화 할머니예요. 선비 가문에서 출생해서 고생을 모르고 곱게 자란 규수였는데 독립투사의 아내가 되어 힘든 삶을 사셨어요. 카자흐스탄에서의 삶은 유형지로 간 죄수의 아내로서 특히 힘드셨지요. 그 당시 청소 같은 궂은일을 했어야 되는 상황이었고 고생이 심했죠. 하지만 그런 일도 귀족처럼 꿋꿋이 하셨다고 합니다.

문 : 김올가 씨는 지금 전남대 대학원에 재학중이시죠? 전공은 무엇인가요?

답 : 전남대 대학원 디아스포라학과 박사과정에 재학 중입니다. 최근 수료했고요. 현재는 박사논문을 쓰고 있습니다. 논문 주제는 국내 거주 동포의 지역 수용에 관련한 연구입니다. 주로 안산과 광주에 있는 고려마을을 비교하여 연구를 진행할 예정입니다. 사실 부담이 좀 돼요. 전공 자체가 저와 저의 가족들, 더 나아가 고려인들의 삶과 연관되어 있고, 제가 이런 주제로 박사논문을 쓴다는 것은 저 혼자의 논문이라기보다는 고려인을 대표하여 쓰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거든요. 그래서 더 열심히 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문 : 김올가 씨는 연구소와 어떻게 인연을 맺게 되셨나요? 특히 광주지부와 밀접하다고 들었습니다만.

답 : 네. 한국에 온 지 약 4년 됐는데, 처음엔 한국 생활에 적응하는데 여러모로 어려움이 많았어요. 카자흐스탄에서 석사까지 마치고 왔으나 전남대에서 박사과정을 하는 것이 문화와 언어 기타 문제나 그런 것 때문에 부담이 많았어요. 그런데 이학효 선생님을 통해서 광주대학교 김순흥 교수님을 만나게 되었어요.
교수님을 통해서 민족문제연구소 광주지부 식구들을 만나게 되었구요. 한국의 낯선 환경에 적응하는데 김순흥 교수님과 광주지부 식구들이 큰 도움이 되었어요. 이 자리를 빌려 감사드리고 싶어요.

문 : 최근 서울 사직동에 김경천 장군의 생가 표지석을 세우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진행 과정에서 어려움 같은 건 없었나요?

답 : 카자흐스탄에 있을 때부터 몇 가지 소망이 있었는데 그 중 하나가 사직동 집터에 증조할아버지의 표지석을 세우는 것이었어요. 신흥무관학교를 세우신 우당 이회영 선생님의 손자인 이종찬 선생님과 우당기념관 상임이사인 황원섭 선생님께서 도와주셔서 다행히 표지석을 세울 수 있었어요. 근데 생각보다 너무 작아서 잘 보일 것 같지 않더라구요. 조금 실망했지만 그래도 없는 것보다 낫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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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 마지막으로 앞으로 하고 싶은 일이 있으면 말씀해주세요.

답 : 방금 카자흐스탄에 있을 때부터 몇 가지 소망이 있다고 말씀드렸는데, 하나는 이미 이루어졌지만 몇 가지가 더 있어요. 증조할아버지에 대한 본격적인 전기를 출간하는 일, 백마를 탄 형상의 증조할아버지 동상을 세우는 일, 증조할아버지에 대한 영화를 제작하는 일, 증조할아버지에 대한 기념관을 세우는 일, 증조할아버지의 유해를 찾는 일이 그것입니다. 사실 가장 먼저 해야 하는 일이 유해를 찾는 일이지만 이것은 DNA검사 등 복잡한 작업이 필요하고 필수적으로 한국 정부와 러시아 정부의 협조를 얻어야 하는 일이어서 가장 힘든 일이에요. 하지만 실현될 수 있도록 계속 노력할 생각입니다. 다른 일들도 마찬가지구요.
다행스러운 건 우리 증조할아버지가 정말 좋은 일을 많이 하셨었나 봐요. 하늘도 할아버지 편을 드는 것 같아요. 오랫동안 증조할아버지에 관심을 가지고 있던 소설가 이원규 선생님이 증조할아버지에 대한 평전을 쓰고 있어요. 거의 탈고 단계이구요, 늦어도 내년 내에 출간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연구소 회원분들도 김경천 장군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져주시면 고맙겠습니다.

화, 2018/01/09- 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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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1일 연구소가 한국인 BC급 전범 이학래 선생의 회고록 <전범이된조선청년>을펴냈다.강제동원 피해자의 회고록으로는 원폭피해자 곽귀훈 선생의 회고록 <나는한국인피폭자다>에이어 두 번째다.
<전범이된조선청년>은 일본에서 출판된 <한국인전BC급전범의호소>를 번역한 책이다. 번역은 <적도에묻히다>, <오동나무 아래에서 역사를 기록하다>등을 번역한 김종익 선생이 무료로 맡아주었고, 일본 게이센여학원대학 이영채 교수가 번역 원고를 검토해주어 책의 가치를 높였다. 일본어판에 해설을 실었던 우쓰미 아이코 선생이 한국어판 출판에 맞춰 새롭게 해설을 써주었고, 인천대 이상의 교수도 해설을 덧붙여 한국인 BC급 전범 문제가 가진 역사적 의미를 재조명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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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은이 이학래 옮긴이 김종익ㅣ출판사: 민연 l 15,000원 ㅣ신국판 312page l 발행일: 2017.12.01.ㅣISBN 978-89-93741-22-3

 

 

이학래 선생은 열일곱의 나이로 최연소 포로감시원이 되었다. 포로는 감시와 감독의 대상일 뿐, 포로를 인도적으로 처우해야 한다는 것은 전혀 배우지 못한 채, 상급자가 시키는 대로 맡은 바 임무를 성실히 수행한 죄로 그는 전쟁이 끝난 직후 전범으로 체포되었다. 일본군의 포로정책 책임자들이 대부분 빠져나간 가운데, 포로를 직접 대면해야 했던 최말단 한국인 포로감시원들이 그 책임을 떠맡게 된 것이다. 일본에 의해 강제동원 되었던 그들은 ‘일본인’으로 취급되어 처벌받았지만, 이후엔 ‘조선인’으로 취급되어 일본으로부터 제대로 된 보상도 받지 못했다.
한국인 BC급 전범문제는 일제하 강제동원문제 가운데 낯선 부분에 속한다. 연구소는 2013년 서울역사박물관에서 ‘전범이 된 조선청년들-한국인 포로감시원의 기록’이라는 전시회를 개최하여 한국사회에 이 문제를 환기한 바 있다. 이학래 선생의 회고록 <전범이된조선청년>의 출간으로 다시 한 번 한국사회에 한국인 BC급 전범문제가 재조명되기를 바란다.

• 조한성 출판팀장

화, 2018/01/09- 0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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