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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파 부자, 박기순과 박영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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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파 부자, 박기순과 박영철

익명 (미확인) | 월, 2017/08/07- 14:23

친일인명사전을 차근차근 들추다 보면 형제, 부자, 조손, 사촌 등 혈연관계에 있는 인물들이 함께 실려 있는 경우를 볼 수 있다. 박기순과 박영철이 그런 경우다. 국가도 이들의 행위를 친일반민족행위로 결정했다. 전북 전주에서 미곡상으로 시작해서 조선을 대표하는 재벌로 성장하기까지, 그리고 친일파하면 떠오르는 ‘명성’을 얻기까지 이 부자의 행적을 따라가 보자.

신도시 개발 특수를 누리다
박기순(朴基順, 1857~1935)의 장례식을 전하는 신문기사(<매일신보>1935.10.6)에의하면,그는 40세가 넘어서야 재산을 모으기 시작했는데 생전에 1만 5천여 석을 넘길 정도의 부를 이루었다고 한다. 그가 79세에 사망했으니 그의 재산 형성 시점은 일본인들이 경제침탈을 본격화하는 시기와 일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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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기순과 취향정(醉香亭). 취향정은 박기순이 1917년 자신의 환갑을 기념해 전주 덕진공원 내 연지에 세운 정자다.

 

박기순은 열두 살에 부친을 여의고 어느 상점의 사환 노릇을 하다가 미곡상으로 독립하였고, 전주평야의 미곡을 군산에서 인천으로 내다 팔아 큰 이득을 얻었다. 이를 기반으로 토지를 사들여 만석꾼의 이름을 얻었고, 당시 전라도에서 모르는 이가 없는 ‘토지왕’이 되었다.(<삼천리>,1931)특히박기순은신도시‘이리’(지금의익산)개발과정에서막대한시세차익을얻었다. 오늘날의 강남 개발이나 수도권 신도시 개발의 벼락부자를 떠올리게 한다.
일찍이 일본 자본은 한반도에서 가장 비옥한 토지인 만경강 일대 호남평야에 주목했다. 강제병합 후 그들은 이 비옥한 평야지대에서 생산한 쌀을 일본으로 수출하는 식민지 수탈경제를 구축해 갔다. 

181920년대 이리역 주변 모습

지대에서 생산한 쌀을 일본으로 수출하는 식민지 수탈경제를 구축해 갔다. 그 과정에서 군산과 전주를 사이에 둔 식민도시 이리가 개발되었다. 1914년 1월 호남선이 경성-대전-이리-나주-목포로 연결되
었고, 그해 11월에는 이리와 전주를 잇는 전북경편철도가 개통했다. 10여 호에 불과하던 작은 마을 ‘솜리’는 가로로는 군산과 전주, 세로로는 경성·대전과 목포를 잇는 교통 중심지로 거듭났다. 신도시 이리 개발은 식민지경영을 통해 가시적인 성과를 내려는 총독부 권력층의 의도와 일본인 대토지자본가들과 박기순과 같은 일부 조선인자본가들의 적극적 개입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였다.
박기순은 신도시 및 역세권 개발의 혜택을 온전히 누렸다. 원래 박기순의 소유 토지는 전주도심이 아니라 외곽지대에 분포하고 있었다. 주로 이리역, 구이리역, 대장촌역, 삼례역, 전주역, 신리역 등 경편철도 연변에 집중되었다. 따라서 그는 신도시·경편철도·역세권 개발로 이어진 토지가치 상승의 최대 수혜자가 되었다. 그의 토지는 1930년 현재 685정보였고, 사망하기 2년 전인 1933년 조선신탁주식회사에 320만평을 신탁했는데 당시 토지 시가는 150만 원에 달했다.
그렇다고 떨어지는 감을 누워 받아먹은 것은 아니다. 박기순은 전주경편철도설치기성회 회장을 맡아 전주-이리간 경전철을 만드는데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철도가 개통한 후 1916년에는 전북경편철도주식회사 이사까지 맡았다.
개발에 필요한 기부도 아끼지 않았다. 1912년부터 1919년 사이에 박기순은 호남선 부지, 전주-군산 간 도로부지, 전주-영동 간 도로부지, 전주 덕진공원 건설비, 전주 다가공원 방천석축, 전주 다가교 가설비 등을 기부했다. 그 덕에 조선총독부로부터 목배 10세트와 감수포장 등을 받았다. 자신이 소유한 땅을 중심으로 새로운 기차역과 시가지가 개발되도록 총력을 기울였음을 알 수 있다.
조선총독부와의 관계도 잘 관리했다. 여산군수, 조선식산은행 이사, 전주면협의회 의원,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까지 지역 유지들이 일제 협력을 통해 성장해 가는 과정을 체계적으로 밟아갔다. 특히 1919년 3.1운동이 일어났을 때 전북자성회를 조직한 점이 주목된다. 당시 3.1운동을 방해하고 저지할 목적으로 전국 각지에서 반대 단체가 조직되었다. 자제단이란 이름으로 잘 알려져 있다.
전북자성회 규약에는 ‘경거망동하지 말고, 만세시위 참여를 권유하는 자를 배척하며, 그러한 자가 있다면 곧 본부장이나 지부장에게 밀고할 의무’를 명시했다. 박기순은 이 단체의 조직에 앞장섰고, 전주지부의 지부장을 맡았다.

여기에 아들 박영철(朴榮喆, 1879~1939)이 힘을 보탰다. 박영철은 1912년 8월부터 1918년 9월까지 전북 익산군수를 지냈다. 신도시 이리가 개발되는 가장 중요한 시기였다.
즉 박영철은 신도시 개발과 주변지역을 잇는 도로 및 철도 개설에 있어서 관권 즉 조선총독부의 입장을 대변하고 실행하는 위치에 있었던 것이다. 식민권력을 등에 업은 부자의 콤비플레이는 그들을 일약 전북을 대표하는 갑부로 끌어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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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상업은행 은행장 시절의 박영철(52세)

 

이제는 중앙이다
터닝포인트는 조선상업은행이었다. 1931년 박영철은 전국적 지점망을 가진 대형은행인 조선상업은행의 은행장 자리를 꿰찼다. 전북을 주름잡던 박기순-박영철 부자는 조선을 대표하는 자산가로 도약한 것이다.
1920년 박기순은 전주에서 삼남은행을 설립했다. 미곡상을 거쳐 신도시 개발에서 축적한 막대한 토지자본이 금융자본으로 변신하는 순간이었다. 전주 지역 대지주와 유지들이 대주주이자 경영진으로 참여했다. 그렇지만 삼남은행이 성장해 가는 몇 년 동안 박기순은 대주주와 중역들을 차츰 물갈이해나갔다. 기존 주주들이 매도한 주식은 박기순 일족이 사들였다. 1925년 무렵이 되면 본인이 사장이자 최대 주주였고, 아들 박영철을 비롯한 박준철, 박판철, 박신철 등 일가붙이가 대부분의 주식을 소유했다. 삼남은행은 식민지 시기에 형성된 주식 세습구조의 한 사례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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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소공동에 위치한 조선상업은행

 

박기순은 삼남은행을 경영하면서 전북경편철도, 전북잠업, 전북축산주식회사 등의 이사로 참여했다. 은행가로서 그 재력을 토대로 다른 분야에까지 활동 영역을 넓혀 나갔다. 그의 기업활동은 전주를 넘어 익산, 남원, 군산 등지로 확대되어 갔다. 그 과정에서 지역의 각종 공직과 사회단체, 학교조합 활동에도 적극적이었다. 이제 박기순은 전북 지역을 대표하는 자본가이자 유지로 성장했으며, 1924년에 중추원 참의에 임명됨으로써 그의 명망과 사회적 입지는 한층 더 공고해졌다.
중추원 참의가 되고 전북을 대표하는 지역유지가 되었지만, 박기순의 경제적 기반은 여전히 지역적인 한계를 갖고 있었다. 이 한계를 뛰어넘어 전국적 레벨의 자본가로 발돋음하는 것은 아들 박영철의 몫이었다.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나와 군인의 길을 걷던 박영철은 강제병합후 행정관료로 변신했다. 처음 부임한 곳이 전북 익산이었고 앞서 보았듯이 신도시 이리 개발과정에 힘을 보탰다. 조선총독부 지시에 철저히 순응하면서도 행정가로서의 자질을 발휘하여 신도시 개발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하였던 것이다. 그 결과 익산군수에 이어 도참여관, 도지사로 초고속 승진을 거듭했다. 이때 박영철은 새로운 도약을 모색했는데 바로 중앙 재계로의 진출이었다.
함경북도 지사를 마지막으로 관계에서 물러난 박영철은 박기순으로부터 삼남은행의 경영권을 물려받은 후 곧바로 조선상업은행과의 합병을 단행했다. 1928년 5월 당국의 인가를 받은 은행 합병으로 조선상업은행은 전국 지점망을 가진 대형은행이 되었고, 삼남은행은 6개월 뒤 단행된 ‘신은행령’(자본금 200만원 이상의 주식회사가 아니면 은행 업무를 할 수 없음)의 파고를 무사히 넘길 수 있었다. 조선총독부의 금융정책에 관한 정보를 미리 알지 못했다면 할수 없었을 발빠른 대처였다. 박영철은 조선상업은행 부행장에 취임했다. 지역 관료출신인 박영철이 본격적으로 중앙 재계에 진출하는 순간이었다. 그로부터 2년 후 조선상업은행 은행장자리에 올랐다. 이제 그는 토지의 민영휘, 금광의 최창학, 방직의 김연수와 함께 조선인 4대 재벌로 불렸다.(<삼천리>, 1932) 박영철은 차츰 자신의 입지를 넓혀 갔다. 1930년에는 조선미곡창고회사 이사, 1932년 10월에는 조선철도회사 이사에 선임되었다. 이어 1932년 12월 조선신탁주식회사 이사가 되었다.
이 회사는 경제공황에 대처하기 위해 기업들을 대상으로 한 금융신탁업무를 담당했다. 박기순이 이 회사에 320만 평(시가 150만 원)의 부동산을 신탁했으므로 박영철의 기반은 더욱 공고해졌다. 이 밖에도 동양척식주식회사, 조선맥주회사, 북선제지화학공업주식회사 등의 중역을 맡았다.
조선의 4대 재벌이라 해도 총독부 권력과의 돈독한 관계는 필수였다. 만주사변에서 중일전쟁으로 확전해 가는 동안 박영철은 조선국방의회연합회,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시국대응전선사상보국연맹, 경성부육군병지원자후원회 등 일제의 전쟁을 지원하기 위한 단체의 주요간부로 활동했다. 또 조선미곡조사위원회, 조선산업경제조사회, 임시교육심의위원회, 저축장려위원회, 물가위원회, 시국대책조사회 등에 참여하는 등 총독부의 식민통치 파트너로 활약했다. 이제 박영철은 “한상룡과 함께 중앙의 중요한 지위에서 활약하는 조선 문제의 대표자”란 평판을 얻었다.(<시정25년기념 약진지조선>, 1935)
한시에서 드러나는 친일의 진정성 박영철은 일제강점기에 군수, 도지사, 중추원 참의를 비롯한 고위 관공직을 역임했고, 일본이 일으킨 전쟁에 적극 협력한 친일파로 손꼽히는 인물이다. 또 조선 재계에서 알아주는 전국구 재벌이었다. 그렇다 보니 박영철이라고 하면 친일파 재벌이라는 이미지가 강하다. 박찬승 교수는 박영철을 일러 ‘전방위 활약을 보인 친일파’라 표현했다.(<친일파99인>,1993)그런데 박영철은 많은 한시와 여행기, 그리고 회고록을 남긴 문학인이기도 하다. 현재 <백두산유람록(白頭山遊覽錄)>(1921),<아주기행(亞洲紀行)>(1925),<구주음초(歐洲吟草)>(1928),<오십년의 회고(五十年の回顧)>(1929),<다산시고(多山詩稿)>(1932,1939)와같은 저작이확인된다.
친일파들이 하는 흔한 변명 중 하나가 ‘어쩔 수 없이 협력했다’는 것이다. 내심으론 일제의 통치를 달가워하지 않았지만 일제 권력의 위협과 강제 앞에서 한 개인이 저항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는 주장이다. 물론 허접한 변명에 불과하다. 특히 박영철의 시와 산문처럼 내면의 목소리가 담긴 문학작품은 그런 변명을 일축할 분명한 증거가 된다.
<다산시고>를보자.다산(多山)은박영철의호다.박영철은1932년에자신의한시를모아이 책을 펴냈고, 그후에 쓴 시를 합쳐 1939년에 다시 같은 제목의 책을 냈다. 모두 859수의 한시가 실렸는데, 관련 연구에 따르면 이 가운데 대략 100여 수를 친일작품에 해당한다.

  風雲日露兩交兵 풍운처럼 일본과 러시아가 전쟁을 벌이니
  東亞安危在此行 동아시아의 안위가 여기에 달렸구나
  萬里從征投筆起 만리 출정길에 붓 던지고 일어서니
  誰知定遠是書生 정원후(定遠侯, 班超 33~102)가 서생임을 누가 알리요
 〈종군일로전역 從軍日露戰役, 1904〉

박영철은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러일전쟁에 종군했다. 그때 지은 시이다. 일본과 러시아의 전쟁을 동양과 서양의 대결로 인식하고, 동양의 평화는 일본이 러시아에 승리하는데 달렸다고 생각했다. 그는 반초를 떠올렸다. 후한시대 학자였지만 무인으로 자원해 서역 흉노원정에 용맹을 떨친 반초처럼 자신도 붓을 던지고 일본의 대륙 진출에 공을 세우겠다는 의지를 드러냈다. 서구의 위협에 대항하기 위해 동양인들은 일본을 중심으로 연대하여야 한다는 생각은 일제가 조선을 강제병합하기 위해 내세웠던 이른바 ‘대동아합방론’에 정확히 부합한다.
박영철은 일본에 공감하여 그들의 조선 통치를 현실적으로 받아들이고 식민지 건설에 적극 협력하였다. 박영철이 추구하는 세상은 일본제국주의의 번영과 함께 했다. 따라서 일본의 통치에 저항하고 독립을 추구하는 행동은 무모할 뿐만 아니라 그동안의 역사 발전을 돌이키려는 것으로 보았다.
3・1운동이 일어났을 때 함경북도 참여관이던 박영철은 “신정(新政) 이래 생명재산의 안전 또는 교육 민업의 발달은 구한국정치에 비할 바가 아님은 누구라도 이의 없을” 것이니 성과 없는 무모한 운동은 그만두라는 담화문을 발표했다. 조선인과 일본인의 차별이란 것도 두 민족이 같은 수준에 이르면 권리의무에 차별이 없어질 것이란 희망도 피력했다.
박영철에게 조선은 ‘일본 내지가 연장된 곳’이었다. 동민회(同民會) 활동은 그런 생각의 실천이었다. 동민회는 ‘철저한 내선융화의 실현을 통한 아시아민족의 결합’을 주장하며 참정권 청원 운동을 벌인 단체다. 즉 제국 신민의 일원이란 의식의 내면화를 기반으로 조선인들에게도 일본 국정에 참여할 권리를 달라는 요구였다. 서구 세계를 여행하는 동안 그런 생각은 더욱 확고해졌다. 1928년 시베리아열차를 타고 유라시아대륙을 횡단하고 유럽 각지를 돌아본 후 박영철의 감상은 이런 시로 표현되었다.

  白黃人種各西東 백인종 황인종이 각기 서양과 동양을 차지해
  文字方言互不通 문자와 지역 말이 서로 통하지 않는다.
  欲求平和長久策 평화를 이루려는 장구한 대책은
  先須全亞結心同 먼저 모든 아시아가 한 마음으로 뭉쳐야 한다.
  〈세계대세 世界大勢, 1928〉

러일전쟁 한복판에서 가졌던 박영철의 다짐은 20여 년이 흐른 뒤에도 변함없이 재현되었다. 이제 일본과 조선을 넘어 동양이 하나가 되어 서구 열강을 막아내야 한다. 드디어 일본 제국의 성장과 번영이 중국대륙으로 뻗어 나가니 박영철의 가슴은 희망으로 부풀었다. 아래는 1932년 만주국에 가서 발표한 경축시, 그리고 1937년 중일전쟁을 일으켜 중국 본토를 공략하는 일본군대를 찬양하는 시다.

  滿洲九月下天兵 9월 만주에 하늘의 군사가 내려오니
  一境簞壺老幼迎 노유를 막론하고 밥 싸들고 환영한다.
  革舊而今新政好 옛 제도를 혁파하니 이제 새 정치가 좋아서
  三千萬衆得蘇生 삼천만 민중들이 다시 살아났도다.
  〈축만주신건국 祝滿洲新建國, 1932〉

  北京戰捷又南京 북경을 점령하고 남경을 함락하니
  萬里山河旭日隆 만리산하에 빛나는 태양이 떠오르네
  赫赫皇威光四表 혁혁한 천황 군대의 위세 사방에 빛나니
  東洋自此保平和 이 때문에 동양이 평화를 유지하는구나
  〈황군위문가 皇軍慰問歌, 1937〉

1937년 박영철은 경성 주재 만주국 명예총영사가 되었다. 시에서 보듯 그는 일본과 조선이 하나이고, 더 나아가 만주와 중국도 일체라는 대동아공영론을 확신하고 있다. 일본 군대는 침략자가 아니었다. 새로운 정치를 구현할 해방자였다. 만주의 민중들을 다시 살린 일본 군대는 하늘이 내린 천병이요, 중국대륙을 점령한 천황의 군대는 동양의 평화를 가져올 평화유지군이었다. 일제의 전쟁은 동양평화와 인류복지를 위한 성전이었다. 당연히 조선 사람도 신성한 일본의 전쟁에 동참해야 했다. 1938년 조선지원병제도가 실시되자 중추원 참의 박영철은 “반도민의 국민관념에 신기원을 그은” 것으로 평가하고, 신성한 의무를 위해 “부디 모범적이고 개인이나 가정에 치부가 없는 자신 있는 사람이 지원”하기를 당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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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 주재 만주국 명예총영사 시절 박영철. 1937년 7월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박영철 총영사는 북중국과 몽고 각지를 순회하며 일본군을 위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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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산유람록>과 <아주기행>

 

박영철은 시 외에도 기행문과 회고록 등을 남겼다. <백두산유람록>은박영철이전라북도참여관이던 1921년에 출간한 것으로 백두산 기행문과 시를 엮은 것이다. <아주기행>은강원도지사 시절에 발간한 기행문으로 백두산·지리산·한라산 등 국내여행지와 일본·대만·간도·블라디보스톡·만주·몽고·중국 등 해외를 견문한 것이다. <구주음초>는1928년암스테르담올림픽을 참관하기 위해 3개월에 걸쳐 아시아·유럽 여러 나라를 여행하며 남긴 기록이다.
<오십년의회고>는박영철이51세되던1929년에낸 회고록이다.한글이나한문이아닌일본어로 썼으며, 본인의 행적보다는 한국의 역사와 문화를 정리하고 자신의 견해를 덧붙이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아마도 주 독자층으로 일본인을 염두에 두었던 것으로 보인다. 가령 조선 멸망의 원인을 우리 민족에게 돌리고 있다. 정치적으로는 특권계급의 창궐과 관리의 부패, 정의와 공적 도의의 전멸 등을 꼽았고, 무기력하고 나태한 민족성, 낮은 문화와 생활수준을 지적했다. 일제의 식민통치를 합리화하는 사대주의적 자학사관에 빠져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문화애호가이자 수장가 박영철
박기순·박영철 부자는 조선 중기의 유학자 박순(朴淳)의 후손으로 알려졌다. 본래는 양반이었지만 점차 가세가 기울어 박기순 대에 이르러서는 평민이나 다름없는 처지였다. 그렇지만 미곡상으로 시작해 ‘토지왕’으로 이름을 날리는 등 형편이 나아지자 한학에 관심을 쏟았다. 1935년 박기순이 사망할 때 그의 집에는 3만여 권의 장서가 있었다고 한다.
박영철도 일본에 유학가기 전에는 서당에서 한학을 배웠는데, 이후 한시를 즐겨 짓고 한문으로 저작을 남기는 등 한학에도 조예가 깊었다. 그래서인지 고서화와 시문 등 전통예술에 큰관심을 기울였다. 경성 소격동 144번지(현재 정독도서관 앞 선재미술관 자리) 박영철의 저택
에는 추사 김정희와 오세창 등의 그림과 글씨, 고려자기 등이 널려 있었다. 1930년과 1932년에는 동아일보사가 개최한 조선고서화전람회에 유명한 고서화를 다수 출품하기도 했다. 조선에서 손꼽히는 거부를 이룬 경제력이 그 밑바탕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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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역화휘>와 <근역서휘>

 

그런데 박영철을 단순히 수장가로만 평가하고 넘어갈 수 없는 대목이 있다. 당시 박영철은 위창 오세창의 지도를 받아 <근역화휘(槿域畵彙)> 3책과 <근역서휘(槿域書彙)> 35책을 펴냈다. <근역화휘>는 조선초기부터 말기까지 그림 67점을 수록한 것으로 안견의 그림으로 전하는 산수도, 신사임당의 그림 등이 실렸다. <근역서휘>는 조선시대 명현의 글씨를 망라한 책이다.
흩어져 있던 고서화를 모으고 위창의 안목에 기대 가치 있는 작품들을 책으로 엮었으니, 우리문화유산의 정수들이 실렸다고 평가된다. 특히 1932년 5월에는 <연암집(燕巖集)>을 17권 6책으로 간행해 냈다. 학계에 ‘박영철본 <연암집>’으로 잘 알려진 책이다. 그동안 필사본으로만 전하던 <열하일기>와 <과농소초> 등 연암 박지원의 저작을 최초로 공간하여 세상에 알렸다는 역사적 평가를 받고 있으며, 내용 또한 매우 정확하여 한국고전번역원에서 펴낸 국역 연암집도 박영철본을 대본으로 했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1939년 박영철이 사망한 후 유족은 경성제국대학에 115점의 유물을 기증했다. 자신의 수장품과 진열관 건립비를 경성제국대학에 기증하라는 박영철의 유언에 따른 것이었다. 거기엔 <근역화휘>, <근역서휘> 외에도 김정희, 이황, 정약용, 정선, 김홍도, 장승업 등의 작품이 포함되었다. 경성제국대학은 이를 기초로 경성제국대학진열관을 건립했고, 이를 인수한 서울대학교는 1946년 부속박물관을 개관했다.
박영철의 인생에서 <근역화휘>, <근역서휘>, <연암집>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민족을 말살하려 했던 일제의 식민통치에 적극 협력한 인물이면서도 결과적으로 그는 우리 전통문화를 수호하는 데 일조했으니 아이러니도 이런 아이러니가 없어 보인다.
박영철이 고서화를 수장한 것은 한학에 관심이 컸고 한시와 서화 등을 즐겼던 그의 성정에 따른 것이라고 본다. 또 자신의 수장품을 조건없이 기증하고 심지어 전시실 건립비까지 쾌척한 사실은 문화애호가이자 수장가로서의 모범을 보인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다만 박영철이 수장품을 기증한 곳이 서울대학교가 아닌 경성제국대학이란 점에 주목해야 한다. 중일전쟁에서 일본 군대가 승승장구하던 때였다. 박영철은 조선의 문화와 예술 역시 일본이 건설할 ‘대동아’의 문화적 자산이 될 것을 기대했을 것이다. 그것은 잃어버린 민족의 유산, 그래서 다시 찾아야 할 가치가 아니었다. 일본이 대동아주의를 내세우며 추구한 동양성의 한 축을 담당할 미래 가치였다.

아버지와 아들, 친일파의 오명을 남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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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천황이 친히 장례식에 쓸 폐백과 제물을 내렸다는 <동아일보> 1939년 3월 15일자 기사.

 

1939년 3월 뇌일혈로 갑자기 사망한 박영철에게 일본 천황은 친히 장례식에 쓸 폐백과 제물을 내리고 훈2등 욱일중수장을 추서했다. 당시 박영철의 사망으로 뇌일혈이 대중의 관심을 끌었다. 의학박사 김성진은 “뇌일혈이란 대체로 지식계급에 많은 병입니다. 그 이유는 혈액이 몰려오는 기회가 노동자보다는 훨씬 많기 때문에 출혈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혈압이 높아져서 혈관이 파열되어 뇌에 출혈을 일으키게 됩니다. 장소가 뇌인만큼 위험하고 또 뇌를 많이 쓰는 저명인사에게 많게 됩니다. 대체로 비대하고 술과 고기를 많이 먹는 이에게 많은 병으로 노동자에게는 좀 드문 병입니다.”(<매일신보>1939.3.15)라고설명했다.
뇌일혈이 노동자보다 지식계급에 많은 병이라는 설명은 지금의 의학상식으로선 동의할 수 없지만, ‘비대하고 술과 고기를 많이 먹는’ 사람에게 많이 나타난다는 설명은 일견 납득이 가는 대목이다. 아마도 박영철의 비대한 몸집을 염두에 둔 설명인 듯하다. 박영철의 사진들을 보면 그의 체구 변화를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일제의 식민통치가 깊어짐과 함께 박영철의 몸집도 비대해져 갔던 것이다.
일본의 식민지배를 받는 땅에서 지배자에게 코드를 맞춘 삶으로 대대로 부귀영화를 누렸으니, 해방 후 그들의 고백처럼 세상이 뒤바뀔 줄 몰랐을 것이고, 세월이 흘러 부자가 나란히 치욕의 이름으로 역사에 남을 줄은 짐작이나 했을까. 대를 이어 친일한 사람들 중 아랫대의 누군가는 해방을 맞아 일제의 패망을 보아야 했다. 그런데 박기순-박영철 부자처럼 해방 전에 목숨이 다하기도 한다. 그들은 자신들의 세상이 계속될 것을 믿어 의심치 않으며 친일로 이룬 부를 누리다 삶을 마쳤다. 하지만 역사의 심판에는 시효가 없다. 게다가 아버지와 아들이 모두 친일파라고 평가받는다면 그 치욕이 배가되지 않을까.

∷ 권시용 선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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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11월 30일, 일본정부의 ‘메이지 산업혁명 유산’ 해석전략 보고(2017.12.1)를 앞두고 <한일시민이 함께 만드는 세계유산 가이드북-일본의 메이지산업혁명 유산과 강제노동>(이하‘가이드북’)이 제작, 배포되었다. 이 ‘가이드북’은 우리 연구소와 일본의 ‘강제동원 진상규명네트워크’가 중심이 되어 현지조사와 자료수집을 통해 제작한 것이다.
2015년 7월,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는 일본의 23개 산업시설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선정하며 ‘전체 역사를 알 수 있도록 하라’고 일본정부에 권고했다. 이에 유네스코 일본 대사는 ‘관련 조치를 취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답변했다. 하지만 현지답사 결과 한국인과 중국인, 연합군 포로 등의 강제노동에 대한 설명은 찾아볼 수 없었다. 현지 시설 안내자들은 ‘강제노동’ 문제에 대한 질문에 ‘내가 답변할 수 있는 질문이 아니다’라고 얼버무릴 뿐이었다. 오히려 ‘올바른 역사를 추구하는 하시마 도민회’는 그들이 배포하고 있는 동영상 「군함도의 진실」을 통해 강제노동을 부정하면서 한국이 역사를 왜곡·날조하고 있다고 비판하였다.
‘가이드북’은 유네스코의 권고에 기초하여 일본정부가 해당시설의 전체 역사를 충실히 밝히고, 강제동원·강제노동 문제를 하루빨리 해결하도록 촉구하기 위해 만든 것이다. ‘가이드북’에는 일본정부가 숨기고 싶어 하는 개별 시설의 어두운 역사와 함께 피해자들의 증언이 실려 있다. 독자들이 설명을 따라가다 보면 자연스럽게 일본의 ‘산업화와 전쟁, 국가폭력과 인권침해’의 역사를 함께 이해할 수 있도록 구성했다. 또한 ‘산업혁명유산’ 시설 주변에 있는 일본시민들이 만든 각종 추모비를 소개하여 현지 방문자가 역사의 진실을 마주할 수 있도록 했다.
현재 유네스코 세계유산 중에는 식민통치와 강제수용, 노예무역 등에 대해 이해할 수 있는 ‘부정적 유산(negative heritage)’이 많이 있다. 자국사를 찬미하는 수단이 아니라 인권문제를 환기시키는 가치가 있다고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일본의 메이지 산업혁명 유산’ 또한 일본의 ‘강제노동과 인권침해’의 실상을 보여줌으로써 인류의 미래를 위한 자산이 되기를 바란다.
‘가이드북’은 한글판, 영어판, 일본어판 세 종류로 제작했고 일본 내각관방 등 일본의 유관기관을 비롯하여 유네스코 세계유산협약 당사국 및 관련 국제기구들에 배포했다. 이 책은 연구소 누리집에서 PDF 파일로 내려 받을 수 있다.

• 편집부

화, 2018/01/09- 0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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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소가 사무국을 맡고 있는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의 유족들이 제소한 야스쿠니 합사 철회 2차 소송 13차 구두변론이 지난 11월 28일 오전 10시 30분 도쿄지방재판소에서 열렸다. 이날 재판에서 원고 이인복 씨는 법정 진술을 통해 일본의 침략전쟁에 강제로 동원되어 희생된 끝에 야스쿠니신사에 무단으로 합사된 아버지의 이름을 야스쿠니에서 뺄 것과 일본정부와 야스쿠니신사의 사죄를 요구하였다. 이인복 씨의 아버지 고 이민구 씨는 일본군으로 동원되어 1944년 4월 뉴기니에서 전사하였다. 이 소송은 자신의 가족이 야스쿠니신사에 무단으로 합사된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 유족 27명이 일본 정부와 야스쿠니 신사를 상대로 무단합사 철회와 사죄, 유골봉환을 요구하며 2013년 10월 일본 도쿄지방재판소에 제소한 것이다.
함께 방일한 이희자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 공동대표는 같은 날 니시도쿄에서 열린 ‘함께 노래하는 모임’에서 ‘아버지의 기록을 찾아 야스쿠니와 맞서다’라는 주제로 강연했으며, 김영환 대외협력팀장은 가나가와 종합정책연구센터 주최로 열린 ‘세계와 지역을 잇는 가나가와포럼’에서 ‘촛불혁명과 동아시아 평화를 생각하다’라는 주제로 강연했다.

• 김영환 대외협력팀장

화, 2018/01/09- 0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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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대표 도시인 워싱턴, 뉴욕, LA에 민족문제연구소 지부가 창립되거나 창립준비 중이다.
연구소의 국제적 네트워크를 강화하고 세계를 무대로 활동을 전개하기 위해 해외 지부를 결성해야 한다는 필요성은 진작부터 제기되었다. 특히 미주지역은 그 상징성이나 영향력 등을 고려하자면 일본 지역과 함께 빼놓을 수 없는 곳이다. 이 때문에 임헌영 소장은 몇 년 전부터 미주 지역 지인들과 연락을 지속하면서 지부 결성을 위한 토대를 다져왔다. 그리고 워싱턴의 윤흥로(민주평통 워싱턴지회장), 주희영 회원 등이 연구소를 방문하면서 급물살을 타 11월경 소장 등 연구소 관계자들을 초청해 강연과 지부 창립대회를 열기로 하고 일을 진행시켜왔다. 워싱턴 지역 회원들이 뉴욕의 박매헌-클레어 부부와 이춘범 선생과 연결되어 뉴욕에서도 일정을 맞추어 지부 창립 준비를 하기로 하고, LA 또한 정찬열 선생(문인) 등 현지동포들이 적극 호응하면서 11월 중에 3개 지역 지부를 결성하기로 일정을 조정했다.
이에 맞춰 11월 9일부터 16일까지 8박 9일간 임헌영 소장과 박한용 교육홍보실장은 미국의 워싱턴과 뉴욕 그리고 LA에 지부 창립과 현지 동포들을 대상으로 한 역사와 문학 강연차 출장을 다녀왔다. 현지 동포들의 반응도 뜨거워서 11월 11일(현지 일자)에는 워싱턴 한미과학협력센터에서 박한용 실장의 강연에 이어 20-30명 정도의 회원을 기초로 하여 워싱턴지부가 창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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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부 이사장에는 윤흥로, 지부장은 박진영 아메리칸대 철학과 교수가 추대되었고, 사무총장은 주희영, 간사로는 정성덕 김미현 회원 등이 선임되었다. 이어 11월 12일에는 이춘범 선생 댁에서 30여 명이 모여 뉴욕지부 준비위원회를 결성하고, 지부 이사장에는 이춘범 선생을 만장일치로 추대했다. 뉴욕지부는 3월경 정식 출범식을 가질 예정이다. 한편 11월 14일에는 LA 원불교교당에서 LA지부 창립총회를 열어 지부장은 정찬렬, 사무국장은 김창옥(국선도 사범)을 선임하고 이어 박한용 실장의 강연(우리시대의 역사적폐-분단적폐)을 들은 후 행사를 마쳤다. 이로써 최초의 해외 지부인 일본 도쿄지회(총무 조영숙)에 이어 미주에서도 해외지부가 만들어져 연구소의 활동이 국제적으로 확대되는 계기를 맞았다.

8박 9일간 방미 일정
11월 09일 인천 출발, 워싱턴 도착.
12시(이하 현지시각) 현지 한인언론 합동인터뷰
11월 10일 저녁 6시-9시 워싱턴 평통 강연
<분단과 전쟁을 넘어 평화통일로 가는 길>
(박한용, 한미과학협력센터)
11월 11일 오전 10시- 오후 4시 문학 강좌
<사랑과 행복, 구원으로서의 문학>
(임헌영, 뉴스타부동산회사 교육관)
저녁 6-9시 민문연 워싱턴 지부 창립총회 및 강연
<우리시대의 역사적폐를 말한다>
(박한용, 한미과학협력센터)
11월 12일 워싱턴 출발, 뉴욕 도착
저녁 5-8시 민문연 창립준비를 위한 좌담 및
뉴욕지부준비위원회 발족(이춘범 선생 자택)
11월 13일 뉴욕 출발, LA 도착
저녁 6시 민문연 LA 지부 창립 준비모임(용식당)
11월 14일 저녁 7시-9시 민문연 LA 지부 창립대회 및 강연
<우리시대의 역사적폐 : 분단적폐>
(박한용, LA 원불교 교당)
11월 15일 저녁 6시-9시 강연
<사랑과 행복, 구원으로서의 문학>
(임헌영, LA 한국교육원 2층)
11월 16일 귀국

 

미주 지부 결성 소식이 널리 알려지면서 필라델피아에서도 지부 창립 요청이 들어와 준비작업이 진행 중이다. 또 브라질 상파울로의 동포가 직접 연구소를 방문해 브라질 지부 창립을 추진하겠다고 했고, 독일 프랑크푸르트의 동포로부터 지부를 창설하고 싶다는 요청이 있으며, 일본 간사이지역에서도 지부 설립을 추진 중이다. 민족문제연구소가 식민지역사박물관을 개관하는 시기와 맞춰 해외 지부 창립이 활발해지면서 연구소의 국제적 위상도 높아지고, 해외동포와 연계하면서 세계를 무대로 활동을 펼쳐나갈 수 있는 중요한 터전이 마련되었다(자세한 내용은 ‘민족문제연구소 미국 3대 지부 결성 방문기’ 참조).

• 박한용 교육홍보실장

화, 2018/01/09- 0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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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비망록 31] 포방터시장으로 남은 홍제외리 조선보병대 사격장의 흔적 – 헌병보조원 출신 항일의병의 총살 장소로도 사용된 공간 

이순우 책임연구원

서울 서쪽 무악재 고개 너머에 있는 홍제원(弘濟院)은 조선시대에 병들고 굶주린 사람들을 진휼(賑恤)하는 곳인 동시에 서울을 오가는 중국 사신을 영접하거나 전송할 때 주로 사용된 공간이었다. 지금의 홍제동은 의당 이 홍제원에서 파생된 지명이다. 옛 지명자료를 살펴봤더니 홍제천 곧 ‘모래내’를 사이에 두고 홍제원내동(弘濟院內洞)과 홍제원외동(弘濟院外洞)이 나란히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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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이 운영하던 경성목장(京城牧場)으로 변한 옛 홍제원 터 일대의 전경 사진. (<경성부사>제2권,1936)

 

이 동네들은 1914년 일제에 의해 행정구역 통폐합이 이뤄질 때 고양군 은평면에 속한 ‘홍제내리(弘濟內里)’와 ‘홍제외리(弘濟外里)’가 되는데, 이 가운데 홍제내리는 다시 1936년에 경성부로 편입되면서 홍제외리의 홍제천 이남 구역과 합쳐 홍제정(弘濟町)으로 전환된다. 홍제외리의 경우에는 해방 이후 1949년 8월에 이르러 은평면 일대가 서울시로 일괄 편입됨에 따라 1950년 3월 15일에 ‘홍은동(弘恩洞, 홍제외리와 은평면의 앞 글자를 따서 조합한 지명)’으로 동명이 개정되었다.
원래 홍은동이라고 하면 하천변을 따라 황량한 산비탈이 대다수를 차지하는 구역이었으나, 일제강점기를 거치는 동안 이곳에 집단이주촌이 건설되면서 동네 모습이 크게 달라졌다. 1930년대 중반 서울 시내 곳곳에 흩어져 있던 토막민(土幕民, 움집에 거주하는 사람들)을 대거 변두리 지역으로 이주시키면서 새로운 주거단지가 형성되었는데, 홍제외리도 그 가운데 하나였다.

<동아일보>1936년 8월 2일자에 수록된 「밀려난토막민(土幕民)순방기(巡訪記)(2)이름은좋다 환희촌(歡喜村), 서부 홍제외리 새 두옥촌(斗屋村)」 제하의 기사에는 이러한 변화의 실상을 다음과 같이 그려놓고 있다.

 

(전략) 주택지로서는 인연이 먼 이 험한 돌산, 영양도 부족한 이 여윈 토막민들의 피땀을 얼마나 흘리게 하고 있는가? 국유림을 토막민 구제라는 미영 아래 불하한 경성부(京城府)는 그의 경영관리를 일개 사회사업단체에 일임한 채 오불상관. 더구나 터 닦는 것쯤이야 알은 체나 하랴? …… 무성의한 경성부 태도에 다시금 흥분되며 동리의 홍제천을 끼고 동남으로 휘돌아드니 이 동리로는 중앙 동본원사(東本願寺) 향상대(向上臺) 사무소가 있고 그 아래로 ‘향상대염매소(向上臺廉賣所)’라는 큰 간판이 붙어 있는 큰 집이 새로 건설되는 이 마을의 한 이채이다. 동명은 홍제외리(弘濟外里)라 하나 구역을 따라 환희촌(歡喜村), 보은촌(報恩村), 지혜촌(智慧村), 청정촌(淸淨村), 정신촌(正信村), 신락촌(信樂村), 무량촌(無量村), 해탈촌(解脫村)으로 나뉘어 있다. 환희촌을 찾아 그들의 기쁨을 나누자 함도 아니요 보은촌을 찾아 보은의 뜻을 알자 함도 아니요 해탈촌을 찾아 속세를 떠나자 함은 아니나 동구에 들어놓은 발길은 자연 이곳저곳으로. (하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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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1936년 8월 2일자에 수록된 일본불교 ‘향상회관’이 위탁 운영하던 홍제외리 토막민 이주촌(향상대)의 탐방기사.

 

여기에 나오는 ‘향상대’라는 표현은 일본 불교의 한 갈래인 대곡파 본원사 경성별원(大谷派 本願寺 京城別院; 남산 동본원사)에 속한 향상회관(向上會館)이 운영하는 주택단지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1922년 8월에 설립된 향상회관(지금의 천연동 동명여중 자리)은 포교와 더불어 수산(授産; 빈곤자나 무직자에게 일거리를 주는 것)을 목표로 한 일종의 사회교화단체였다.
바로 이들에게 홍제외리 집단이주촌의 운영이 위탁된 까닭에 ‘보은’이니 ‘무량’이니 ‘해탈’이니 불교색채가 농후한 것들이 마을이름을 차지하고 있다. 지금에야 이 일대가 재개발사업으로 인해 옛 모습을 거의 찾아보기 어려운 상태로 바뀌었지만, 풍림아파트 후면에 자리한 ‘실락어린이공원’이라든가 홍은벽산아파트 앞쪽에 있는 ‘보은소공원’과 같은 것들은 이를테면 향상대 시절의 유산인 셈이다. 실락은 본디 ‘신락’이 와전된 말일 텐데, 그 내력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한 사이에 잘못된 발음 그대로 버젓이 공원의 이름을 차지하게 된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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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조선보병대 사격장 자리에 들어선 홍은동 포방터 시장의 입구 전경

그런데 홍은동 지역에는 이곳 말고도 또 다른 근대시기의 흔적이 남아 있다. 홍제천을 따라 상류로 약간 더 거슬러 올라가면 물줄기가 크게 굽이치는 지점에 포진한 ‘포방터시장’이 바로 그것이다. 포방(砲放)이라 함은 글자 그대로 ‘포를 놓는다’는 뜻이므로, 포방터는 곧 사격장을 가리킨다. 그렇다면 이곳에는 언제부터 어떻게 사격장이 들어선 것일까? 어떤 자료에는 조선시대 이래로 이곳에서 군사들이 사격훈련을 했다고 서술한 경우도 있지만, 거기에 구체적인 근거자료가 함께 제시된 사례는 아직 들어보지 못했다. 이곳에 관한 근대시기의 자료 가운데 비교적 빠른 용례로 확인되는 것은 ????독립신문????1899년5월12일자에수록된 「대포시험」 제하의 기사이다.

 

포병대 참령 이민섭 씨가 칙령을 봉승하여 재작일에 회선포 이문(二門)과 극로백(克魯伯) 이문을 가지고 창의문밖 수마동에 나가서 시험차로 방포하였다더라.

 

위의 기사에 나오는 회선포(回旋砲)는 ‘개틀링 기관총(Gatling gun)’이고 ‘극로백’은 ‘크루프(Krupp) 야포’를 말하며, 수마동(水磨洞)은 지금의 홍은동 포방터 일대를 가리키는 옛 지명이다. 이밖에 ????황성신문????1907년6월24일자에수록된기사에따르면,그 당시일본육군대신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가 만주지역시찰을 겸해 우리나라를 방문했을 때 그가 경운궁 돈덕전 앞에서 한국 황제에게 헌상한 기관포(機關砲)에 대한 시험발사가 이뤄진 곳이 수마동의 포방터였다.
약간 특이한 기록으로는 <대한제국관보>1909년 7월 3일자에 “작란죄인(作亂罪人)헌병보조원(憲兵補助員) 강재녕(姜在寧)에 대한 포형(砲刑, 총살형)이 6월 30일에 홍제원 수마동에서 집행되었다”는 내용이 남아 있다. 그런데 <대한매일신보> 1909년 7월 2일자에는“장단고랑포파주소(高浪浦派駐所) 헌병보조원 강기동(姜基東)이 의병에 투입(投入)하다가 체포되어 재작일에 신문외 수마동에서 포살되었다”고 하여 그의 이름을 다르게 적고 있다. 하지만 강기동은 양주 고안헌병분견소에 소속된 헌병보조원 출신으로 1911년에 순국할 때까지 의병장으로 이름을 날린 별개의 인물이라는 점에서, 이 기사에서 말하는 강기동은 강재녕의 표기오류가 아닌가 여겨진다.
일제강점기로 접어든 이후에는 이곳이 조선보병대(朝鮮步兵隊)의 사격장으로 사용된 것으로 드러나는데, 이에 관해서는 여러 신문자료를 통해 사실관계를 확인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매일신보>1921년8월 22일자에 수록된 「은평면민(恩平面民)의 탄원서(歎願書), 육군사적장(陸軍射的場)이 있어 교통에 불편하니 옮겨달라고 탄원」 제하의 기사를 보면 “이곳 사격장은 구 한국시대에 건설한 것인 바 …… 운운”하는 구절이 포함되어 있다. 또한 <동아일보> 1921년 10월 27일자에 실린 서대문경찰서원의 사격연습 관련 기사에는 이곳의 명칭이 ‘홍제원 조선보병대사격장’으로 표시한 것이 눈에 띈다.27

<매일신보> 1931년 4월 9일자에 수록된 조선보병대해산식광경

 

조선보병대라고 하는 것은 1907년 군대해산 당시 황궁(皇宮)의 의장(儀仗)과 수위(守衛)를 전담할 목적으로 유일하게 남겨진 1개 대대 규모의 ‘근위보병대’가 경술국치 이후 일본군 소속으로 전환된 이후의 명칭이다. 이때 1개 중대 규모의 ‘근위기병대’도 함께 남겨졌으나, 조선기병대(朝鮮騎兵隊)라는 이름을 달고 있던 1913년 4월에 이르러 진즉에 폐지되고 말았다. 지금의 정부서울청사 자리에 있던 조선보병대는 애당초 ‘무용지물’에 가까운 군대로 취급되다가 경제대공황의 여파로 경비절감문제가 불거지면서 1931년 4월 8일에 이르러 완전히 해산되는 수순을 밟았다.
조선보병대가 사라진 이후에 이곳은 서대문경찰서 사격장으로 전환되었는데, <동아일보> 1932년 5월 21일자에 수록된 「경관무장(警官武裝)시킬방탄(防彈)조끼시험(試驗)」 제하의 기사에는 흥미롭게도 다음과 같은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30총독부 경무국에 의해 홍제외리 서대문경찰서사격장에서 방탄조끼 성능시험이 진행되는 광경이다. (<매일신보> 1932년 5월 21일자)

 

일상 기거에 갑주를 입어야 할 만큼 험난한 세상이 되어 일본서는 방금 방탄복(防彈服) 연구열이 대단하다. 조선에도 이전과 달라 총기를 사용하는 ‘테로’행동이 자주 발생하므로 경무국에서는 경관에게 방탄족기를 입히고 강철투구를 씌우려고 이전부터 각 방면으로 연구중이라 함은 기보한 바어니와 경무국분실에서 그간 연구를 거듭한 결과 실용에 적당한 물건을 만들어놓고 19일 오후 독립문(獨立門) 밖에 고양군 은평면, 이전 조선보병대 사격장에서 성능시험을 행하였다.
센다이(仙臺)동북제국대학 혼다(本多) 박사가 연구한 니켈, 크롬과 탄소의 특수합금으로 만든 전중량 4백 량중의 조끼를 개량한 실용품을 사진과 같이 나무막대기에 입혀놓고 모젤식 권총으로 20메돌(미터)의 거리로부터 15메돌, 10메돌까지 단축하며 쏘았으되 자리가 움푹하게 날 뿐이지 관통되지는 않아 이만하면 된다고 합격되었다. (하략)

 

1933년에 발행된 <경성종로경찰서기념사진첩>을 보면, 종로경찰서원들이 실탄사격연습을 하는 장면이 담긴 한 장의 사진이 실려 있다. 뒤쪽에 드러나 있는 북한산 봉우리와 사대(射臺)로 사용하는 언덕 주변에 심어진 포플러 나무의 배열 모습을 보아하니, 이곳이 홍제외리의 옛 조선보병대 사격장이란 것을 간파할 수 있다. 말하자면 이곳은 서대문경찰서의 전용공간이 아니라 종로경찰서를 비롯한 여타 경찰서에 속한 일제 경찰관들의 함께 사용했던 곳이었던 모양이었다.
일제패망기로 접어든 이후 <매일신보> 1940년 11월 17일자에 보도된 내용에는 “경성사단 관하의 각부대가 용산사격장과 홍제원외리 사격장에서 사격경기대회를 가진다”는 내용이 수록되어 있는데, 이것이 이 사격장과 관련한 막바지의 기록이다. 이곳이 언제까지 사격장으로 운영된 것인지는 잘 알지 못하나, 그래도 이 주변에는 도로명주소로 ‘포방터길’이 두루 사용되고 있으며, 포방터시장으로 건너가는 홍제천 다리의 이름도 ‘포방교’로 작명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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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제외리 사격장에서 종로경찰서 서원들이 실탄사격연습을 하는 모습. (<경성종로경찰서기념사진첩>,1933)

 

다만 한 가지 아쉬운 것은 이 주변 그 어디에도 포방터의 정확한 내력과 옛 모습을 살펴볼 수 있는 안내시설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곳이 일제의 허수아비 군대인 조선보병대는 물론이고 강압적인 식민통치의 선봉이 섰던 일제 경찰들이 사격 훈련을 했던 장소였다는 사실을 제대로 기억할 수 있는 이들은 이제 과연 얼마나 남아 있을까?

화, 2018/01/09- 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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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취하는사회

술권하는 빙허

현기자와나

그리고

그여교수와나

아직도 아펀 조국

ㅅㅏ진은 경남민언련 참조

개성공단

우리민족끼리

당국끼리

하비바라!

조운소식……………그러나 나는 머꼬

또해고

문자메시지

위아현대공작기계

동력선 조립라인  일당  니가아라서  입금시키라…..동생사장님

돈도라일당으로해고라면,

태양카메라행림에게  애좀고마밀란다.

수, 2018/01/10- 0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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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드뉴스를 재밌봤는데  1년째 연재가 안되서요. 더이상 연재 안하나요?

그리고 다운로드 되게 해주세요.

목, 2018/01/11- 1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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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11-200

▲ 저자: 내일을여는역사재단·민족문제연구소ㅣ출판사:민연ㅣ15,000원ㅣ294pageㅣ발행일: 2017.12.01.ㅣISSN 1228-8802ㅣ9771228880200-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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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을 여는 역사>는 2000년 창간해 현재까지 17년 동안 역사대중화를 위해 힘써온 잡지입니다. 2016년부터 ‘내일을여는역사재단’과 ‘민족문제연구소’가 함께 힘을 합치고 있습니다. 친일·독재 비호세력들이 어줍지 않게 국민들의 일상과 정신세계마저 지배하려는 이때, 우리들은 힘을 합쳐 관제 역사의 전파를 막는 데 앞장서고자 합니다.

<내일을 여는 역사>가 역사의 진실을 알리고 사회의 정의를 지키는 데 훌륭한 도구가 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것을 약속하면서, 우리 역사를 사랑하는 여러분의 뜨거운 관심과 성원을 부탁드립니다.


촛불혁명 완성을 위한 공부길

2017년은 조금 진부한 표현이지만 다사다난한 한 해였습니다. 12월 20일 날짜에 대통령선거일이라고 빨간색으로 표시된 달력을 볼 때마다 더욱 그러한 생각이 듭니다. 한겨울 추위를 견디며 들었던 촛불은 박근혜 탄핵을 이끌었고, 30년 동안 유지되었던 겨울 대선을 앞당겼습니다. 그리고 5월 9일 새로운 정부를 출범시켰습니다.

2016년 12월 9일 국회의 탄핵소추 의결로부터 1년이 지난 2017년 겨울, 촛불에 대한 평가가 언론 지상을 가득 채우고 있습니다. 대부분 불의에 항거한 촛불의 의의를 크게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촛불이 없었다면 문화계 블랙리스트, 국정원의 정치 개입 등은 드러날 수 없었을 겁니다. 한국 수구・보수의 민낯을 여실히 대면하기도 어려웠을 겁니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여전히 관행이라는 이름 아래 불법・탈법이 자행되었겠죠.

평화적 방법으로 민주주의를 발전시킴으로써 세계로부터 인정받는 나라가 되었다는 자부심이 드러납니다. 2019년 3・1운동 100주년을 눈앞에 두고 대중봉기의 흐름 가운데 촛불을 배치하는 시도도 나타납니다. 우리 역사의 물줄기를 바로 잡은 자랑스러운 시민 행동이라는 규정이 지배적입니다. 분명 촛불은 과거의 ‘적폐’를 청산하고 미래로 나아갈 기초를 닦았습니다.

그렇지만 냉정하게 말하면 촛불은 아직 공식 평가를 받을 단계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1960년 4・19혁명을 예로 들어보면, 1950년대 후반부터 본격적으로 전개된 이승만 정부 비판과 부정선거 반대 운동은 이승만 하야와 민주당 정부의 출범을 이끌었지만 결국 1961년 5・16군사쿠데타로 막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4월 26일 이승만 하야까지를 4・19혁명으로 한정한다면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다고 볼 수 있지만, 민주당 정부 시기를 시야에 넣는다면 사회 구조를 재편하는 데 수많은 한계를 드러냈습니다.

50여 년 전의 역사는 촛불이 현대사에서 합당한 지위를 획득하기 위해서 바로 지금부터가 더욱 중요하다는 점을 보여줍니다. 즉 촛불이 촛불혁명이 되기 위해서는 앞으로의 ‘혁명과정’이 충실히 전개되어야 합니다. 문재인 정부가 정치개혁의 과제를 성공적으로 수행해야 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리고 장기적으로 가장 필요한 것은 촛불시민의 역사의식이 높아져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특히 분단체제에 대한 올바른 인식이 확립되어야 합니다. 한 마디로 우리 모두 공부가 필요합니다.

지난 시기 촛불시위 과정에서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라는 함성이 크게 퍼져나갔습니다. 그런데 돌이켜보면 평화체제를 건설하기 위한 문제 제기는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촛불이 국정농단으로부터 기인했기 때문에 민주주의 문제가 핵심이 된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이미 박근혜 정부는 전쟁위기를 고조시키며 안보이데올로기를 전면에 내세운 통치를 전개했습니다. 이는 정부수립 이후 위정자들이 시행한 분단국가주의에 기초한 국정 운영과 동일 선상에 있는 것이었습니다. 한국 현대사의 독재정권은 냉전의 최전선에서 남북 분단을 바탕으로 국가에 순응하는 국민이 될 것을 요구했습니다. 분단은 독재자를 낳았고, 독재자는 분단을 이용했습니다. 민주화운동 세력이 이룩한 가장 큰 성과 중 하나가 분단 극복과 민주주의 발전이 동전의 양면이라는 점을 발견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역사의식, 현실인식은 오히려 대한민국이라는 분단국가 안에 갇혀있는 것이 아닌가 반성하게 됩니다.

분단체제에 대한 인식은 한국근현대사, 나아가 우리 역사 전반에 대한 이해로부터 시작될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날 사회 구조의 원형이 어디로부터 형성되었는지, 이 가운데 다양한 역사적 주체는 어떠한 활동을 했는지 생생히 파악해야 할 것입니다. 이를 구체적 과제로 정리하면 바로 우리의 근대는 어떠한 과정을 거쳤고, 그 가운데 저항적 지식인으로부터 일상을 살아간 일반 민중까지 삶의 양상을 복원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2017년 겨울호(통권 69호)에도 다채로운 내용의 글을 독자들께 내놓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먼저 <쟁점으로 보는 역사>는 한국사학계에서 뜨거운 주제 두 가지를 다뤘습니다. 조선후기 농업사 연구에서 내재적 발전과 자본주의 맹아의 근거로 제기되었던 경영형 부농론과 광무개혁을 비롯한 대한제국의 역사적 성격에 대한 논의입니다. 염정섭은 김용섭이 제시한 경영형 부농론의 실증적 한계와 근대주의적 인식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사학사에 내려놓을 것’을 제안합니다. 김윤희는 대한제국에 대한 연구 경과를 비판적으로 정리하는 것과 함께 2017년 ‘대한제국 선포 120주년’을 맞아 고종과 대한제국을 주축으로 하는 지배자 중심의 역사서술이 민족주의적 감성을 자극하며 문화콘텐츠로 확산되는 데 대해서도 경계의 목소리를 냈습니다. 두 편의 글은 우리 역사, 우리의 근대를 이해하는 ‘방법’을 제시하고 있으므로 앞으로 공부길에 길잡이 역할을 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와 함께 활발한 논쟁을 촉발하는 계기가 된다면 더욱 좋겠습니다.

<지금 우리는?>은 민주주의 정치의 한 모델로서 시민의회에 대한 의의와 탈원전 에너지 전환의 필요성을 일목요연하게 소개한 두 편의 글을 묶었습니다. 이는 2017년 ‘신고리 5・6호기 공론화위원회’ 활동과 연관된 것들입니다. 전자는 숙의민주주의 형식에 대한 고민과 연결되고, 후자는 원자력 발전의 문제점을 정리하면서 에너지 정책 전환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21세기 지속 가능한 삶의 형식과 내용을 탐색하는 독자들께 일독을 권합니다.

<인물로 보는 역사>는 세 명의 유교 지식인을 함께 살펴보게 되었습니다. 53세의 나이에 망명의 길을 떠나고 말년에 마르크스주의를 수용하며 사상적 전환을 이룬 석주 이상룡, 독립투쟁으로부터 반독재민주화운동까지 초지일관 비타협의 삶을 살았던 심산 김창숙, 식민지하 법원 관리로부터 시작해 기업가로 변신하는가 하면 친일단체 조선유도연합회를 이끌었던 이명세가 주인공입니다. 역사의식을 갖는다는 것은 결국 자신이 ‘어떤 역사의 편에 설 것인가?’라고 끊임없이 질문하는 과정과 연결됩니다. 세 사람의 삶을 타산지석으로 삼을 수 있겠습니다.

<사실 체크>는 조선시대, 일제식민지시기 여성이 처했던 삶의 조건에 대한 상식에 도전했습니다. 이순구는 며느리의 지위를 성리학적 규범과 가부장제 아래 억압받는 삶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 ‘시댁’이라는 새로운 공간에서 주체적 활동의 가능성에 주목합니다. 소현숙은 이혼청구권이 식민지시기에 허용된 것은 일제의 선물이 아니라, 관습주의를 표방했던 일제의 통치정책에 대립하면서 자신의 삶을 지켜온 무수한 여성의 행위 때문이라고 지적합니다. 여성의 삶은 우리 역사학이 소외시켜왔던 주제입니다. 여성 주체에 대한 관심이 더욱 확대되고, 이뿐만 아니라 다양한 주체들이 역사 서술의 전면에 등장할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세계사의 현장>은 오키나와 현대사를 담았습니다. 정영신은 오키나와의 군사기지화 과정과 그에 맞선 1956년, 1968년, 1995년 세 차례의 ‘섬전체투쟁’을 정리했습니다. 전오키나와민투쟁도 아니고, ‘섬전체투쟁’이라는 개념은 왠지 모르게 계속해서 여운을 남깁니다. 미일동맹과 섬이라는 지정학적 조건, 동화를 추구했지만, 일본 본토 수호를 위해 철저히 배반당했던 오키나와 민의 심성 등이 복합적으로 반영되었다는 인상입니다. 우리의 분단체제를 사색하는 데도 유용한 글이라고 생각합니다.

<북한의 이해>는 이번 호를 통해 처음으로 선보이는 연재 코너입니다. 홍석률은 1968년 1・21사태, 푸에블로사건, 울진・삼척 무장간첩 침투사건 등의 발생 원인과 이후 위기 국면이 대화 분위기로 전환되어가는 상황을 검토했습니다. 베트남전의 발발이라는 국제정세와 김일성 유일체제 형성 이후 군부의 모험주의적 노선의 제기 등 북한 내부 동향 등을 분석했습니다. 결국 1960년대 후반 북한의 행동 양식에 대한 연구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북한의 이해>는 반공주의적 시선에서 보면 기이하게만 보이는 북한의 역사적 활동을 국제적・국내적으로 조명함으로써, 분단체제 극복을 위한 길잡이 역할을 하고자 합니다.

이밖에도 독자 여러분과 함께 호흡하고자 하는 여러 코너를 준비했습니다. <내일을 여는 책>에서는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을 다뤘습니다. 피치자의 관점에서 『군주론』 읽기를 제안하는 필자의 시선이 흥미롭습니다. <사료의 재발견>을 통해 『제왕운기』와 ‘한일회담 관계 사료’ 두 가지를 소개하고자 했습니다. 전자는 『삼국유사』보다 단군 계승 인식을 뚜렷하게 드러낸 저술로 몽골과 대립했던 시대적 상황이 반영되었다는 점을 짚었습니다. 후자는 현재까지 공개된 문서의 주요 내용을 정리하는가 하면, 식민지 과거청산을 위해 계속해서 자료 공개가 이루어져야 함을 촉구합니다.

<예인 열전>은 지난 호에 이어서 문사 화가 이인상의 삶과 작품세계를, <역사와 공간>에는 현대적 공간 변용 가운데 과거를 그려내는 필자의 공력이 돋보이는 두 편이 글이 수록되었습니다. 우리 사회의 다양한 목소리를 담아내려고 하는 <독자 마당>에는 대학원생의 현실에 대한 감상을 실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서평>은 한국의 파병문제를 다룬 서보혁의 『배반당한 평화』에 대한 정상호의 비평을 수록했습니다. ‘평화주의적 파병’이 짧지만, 논점으로 제기되었습니다. 이상론과 현실론이 충돌하는 가운데 과연 어디쯤 서야 할까, 고민을 끌어냅니다.

2018년은 몇 주년, 몇 주년 기념하기 좋아하는 역사학자들에게 풍성한 한 해가 될 것 같습니다. 고려 건국 1100주년을 준비하는 움직임이 들려옵니다. 현재적 의미를 되짚어봐야 하는 여러 사건이 기다리고 있지만, 그 가운데에도 2018년이 1948년으로부터 70년이 되는 해라는 점에 집중할 필요가 있습니다. 유엔 한국위원단의 활동, 남한 단독선거 결정, 4・3사건, 남북협상, 5・10선거,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립, ‘여순사건’ 등을 통해 남북 분단이 공식화된 출발점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역사의식을 높이기 위해 공부하기에 좋은 해가 될 것 같습니다. 촛불 혁명을 완성하기 위한 공부길을 여는 한 해가 되길 소망합니다.

편집위원 조형열

목 차

1. 여는 글/조형열

2. 쟁점으로 보는 역사
-조선후기 경영형 부농론을 사학사에 내려놓기/염정섭
-대한제국, 한국 근대사 역사서술의 문제를 드러내다/김윤희

3. 지금 우리는?
-시민의회, 민주주의에 어떤 의미를 갖는가?/하승수
-탈 원전, 에너지 전환으로 가는 길/박진희

4. 인물으로 보는 역사
[독립운동가 열전] 석주 이상용의 독립운동과 사상/김희곤
[식민지 지식인의 엇갈린 선택] 마지막 선비와 황도유학의 신봉자 -김창숙,이명세/이준식

5. 사실 체크
-딸에서 며느리로-조선 여성의 삶과 결혼/이순구
-이혼권은 일제가 가져다 준 선물인가? – 이혼법의 변화를 통해 본 식민지시기 여성들의 삶과 결혼/소현숙

6. 내일을 여는 책
-『군주론』 : 나비스를 보라, 아니 나비스 당시의 시민을 보라!/이남석

7. 사료의 재발견
-『제왕운기』, 새로운 역사인식의 등장/김보광 -한일회담, 무엇을 말하고 무엇을 말하지 않았을까?/박진희

8. 예인열전
-이인상, 기이한 별품의 사기화가(士氣畵家) 2/최열

9. 세계사의 현장
-차별과 전쟁, 군사기지에 맞선 오키나와의 현대사/정영신

10. 역사와 공간
– 조선시대 충청도 해안 방어의 요충지, 보령(保寧)의 시대적 변천/정요근
– 나는 죄가 없는데, 어찌 하늘이 나를 벌하겠소?
– 조선 초기 청주목을 찾아서/김창회·신동훈

13. 북한의 이해
– 1960년대 후반 북한의 대외공세/홍석률

14. 독자마당
-대학원 오지 말라고 그랬잖아요/백가을

15. 서평
-『배반당한 평화』/서원대 정상호

목, 2018/01/11- 1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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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문제연구소 기록인터넷물 담당자에게 요청..

항모&&&&씨고 ,처음만내   어부이고  갑장들아!

다음달!

들봄달엔…

밀린희비

꾼돈가파야 댈낀데,….

토, 2018/01/13- 1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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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 민청학련 등 굵직한 시국사건 변호…남양주 묘소에 동료·가족모여 추모
민주화운동 동료들 “겸손한 고인 뜻에 맞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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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권운동 대부’ 이돈명 변호사를 기억하며
(서울=연합뉴스) 이돈명 변호사의 7주기를 기리기 위해 인권운동을 함께한 동료와 가족이 지난 11일 경기 남양주 별내면 천주교 성당묘지를 찾았다. 왼쪽부터 문국주 전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전 상임이사, 김정남 전 청와대 교육문화수석, 이 변호사의 장남 이영일씨, 박중기 추모연대 명예의장. 2018.1.14. [민족문제연구소 제공]

(서울=연합뉴스) 황재하 기자 = 영화 ‘1987’ 흥행으로 과거 민주화운동에 헌신한 이들이 재조명을 받는 가운데 우리나라 ‘인권운동의 대부’로 불린 고(故) 이돈명 변호사의 7주기가 최근 특별한 행사 없이 조용히 치러졌다.

14일 이 변호사의 민주화운동 동료들에 따르면 고인의 7주기인 지난 11일 경기도 남양주 별내면 천주교 성당묘지의 묘소에는 가족과 동료들이 찾아 차분하게 추모의 시간을 보냈다.

영화 1987에서 배우 설경구가 연기한 김정남 전 청와대 교육문화수석과 문국주 전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상임이사, 박중기 민족민주열사·희생자 추모단체연대회의(추모연대) 명예의장 등은 묘소에 모여 고인의 생전 뜻을 기렸다.

이들은 모두 이 변호사와 함께 민주화운동에 헌신했으며, 지금은 모두 진보진영 시민사회 원로로 꼽힌다.

천주교 정의평화위원회에서 이 변호사와 함께 활동한 문 전 상임이사는 연합뉴스와의 통화에서 “이 변호사께서 생전 워낙 겸손한 분이었기 때문에 조용하게 (고인을) 기리는 편이 고인의 뜻에 맞는 일”이라고 말했다. 이 변호사는 평생 대중교통을 이용할 정도로 검소하고 소박했던 것으로도 잘 알려졌다.

이 변호사 별세 이후 그가 위원장을 맡았던 천주교인권위원회는 매년 추모 미사를 집전했으나 2016년 5주기 미사가 마지막이었다. 올해 추모 미사에는 가족만 참석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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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권운동 대부’ 이돈명 변호사 [연합뉴스 자료사진]

이 변호사는 1974년 4월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 사건의 변론을 맡으면서 인권 변호인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이후 인혁당 사건과 김지하 반공법 위반 사건, 청계피복노조 사건, 크리스천아카데미 사건, 광주 민주화운동 등 굵직한 시국사건에 빠지지 않고 활약했다. 황인철·조준희·홍성우 변호사와 ‘4인방 인권변호사’라는 별칭도 얻었다.

이 변호사는 1986년 5·3 인천사태와 관련해 수배 중이던 이부영 당시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 사무처장을 숨겨줬다는 이유로 8개월 동안 구속되기도 했다.

그는 같은 해 한승헌·홍성우·조영래 변호사 등 인권변호의 취지에 공감하는 이들과 ‘정의실현 법조인회(정법회)’를 결성했다. 정법회는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민변)의 전신이기도 하다.

이 변호사는 이후 천주교 정의평화위원회 인권위원장, 민변 고문, 조선대 총장, 한겨레신문 상임이사,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 상임의장, 상지학원 이사장, 천주교 인권위원회 이사장 등 왕성한 활동을 하다 2011년 노환으로 별세했다.

<2018-01-14> 연합뉴스
☞기사원문: 조용하고 검소하게…’인권운동 대부’ 이돈명 변호사 7주기

일, 2018/01/14- 1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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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철 칼럼] 명예도 이름도 없는 민주 교도관들

지난해 12월27일 개봉한 영화 ‘1987’이 1월12일이면 관객 500만 명을 돌파할 것으로 보인다. 박근혜 정권 시기에 기획되어 은밀하게 제작되고 있던 이 작품은 박근혜가 대통령직에서 쫓겨나지 않았더라면 빛을 보지도 못한 채 창고에 갇히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1987’은 촛불혁명 덕분에 밝은 세상에서 많은 이들, 특히 20~30대의 사랑까지 받는 ‘국민영화’로 솟아오를 수가 있었다.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격동적인 민주·민족·민중운동이 펼쳐진 1980년대는 촛불혁명의 뿌리라고 볼 수 있다. 그 시기에 가장 두드러진 사건은 1980년 5월의 광주민중항쟁과 1987년의 6월항쟁이었다. 영화 ‘1987’은 6월항쟁의 기폭제가 된 그해 정초의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과 6월의 이한열 최루탄 피격사건을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다. 이 두 사건은 지난 30여년 동안 나라 안팎에 그 진상이 널리 알려졌는데, 정작 이 영화는 ‘사실’을 그대로 전달하지는 않는다. 가공(加工) 또는 허구(虛構)가 도처에 널려 있다. 그 대표적인 보기로,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은폐·조작의 진상을 재야민주화운동권에 전달한 영등포교도소 교도관 한병용의 이름과 더불어 그가 겪은 고초의 내막을 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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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1987’ 포스터

내가 명확히 알고 있는 사실은 1987년 봄 영등포교도소에 수감되어 있던 이부영(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동아투위) 위원· 민통련 사무처장)이 작성한 비밀편지(박종철 사건 은폐·조작의 실상)를 그의 친구인 김정남(나중에 김영삼 정부 청와대 교육문화수석)에게 간접적으로 전달한 교도관은 한재동이었다. 한재동은 1970년대에 서대문구치소에서 함께 근무한 바 있는 전직 교도관 전병용에게 ‘비둘기’를 전했고, 전병용이 김정남에게 그 문건을 건넨 것이었다. 박종철 사건 은폐·조작의 전모를 폭로하는 이부영의 두 번째 비밀편지를 한재동이 극비리에 받았던 때, 전병용은 도피 중인 재야인사를 숨겨준 혐의로 체포되어 영등포구치소에 수감되어 있어서 한재동이 김정남에게 그것을 직접 전달했다. 김정남은 그 내용을 면밀하게 검토한 뒤 문서로 만들어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함세웅(신부)에게 맡겼고, 5월18일 밤 8시30분 서울 명동성당에서 ‘5·18광주항쟁 희생자 추모 미사’가 끝난 뒤 홍제동성당 주임신부 김승훈이 그 문서를 낭독함으로써 전두환 정권을 뿌리째 뒤흔드는 6월항쟁에 불길을 댕긴 것이었다.

영화 ‘1987’의 한병용은 한재동의 한과 전병용의 병용을 차용한 이름이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이 영화에서는 두 사람의 역할이 하나로 뒤섞여 있다. 한병용이 치안본부 대공처장 박처원에게 무자비하게 고문을 당하는 장면도 시나리오작가와 연출자가 만들어낸 허구임이 분명하다. 내가 1975년 봄 이래 서너 번 서대문구치소에 수감되어 친밀한 사이가 된 전병용과 한재동은 그렇게 무참한 고난을 겪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당시 전두환 정권의 폭압정치를 상징적으로 묘사하기 위해 그런 장면을 연출한 사실을 나무랄 생각은 전혀 없다.

1970년대 박정희 유신독재와 1980년대 전두환 군사독재 시기에 전국 여러 곳의 구치소와 교도소에는, 민주화운동과 독재타도투쟁을 하다 잡혀온 양심수들이나 정치범들을 은밀하게 도와줌으로써 실질적으로 그들의 ‘동지’가 된 민주교도관들이 적지 않았다. 대표적인 인물이 전병용과 한재동이다. 1975년 3월17일 동아일보사에서 폭력에 밀려 쫓겨난 기자, PD, 아나운서 등 113명이 결성한 동아투위 위원들 가운데 15명 이상이 박정희·전두환 정권 때 옥살이를 했다. 1970년대에 서울구치소에서 그들을 은밀하게 도와주면서 바깥 정보를 전달해준 교도관은 전병용과 한재동을 비롯한 여러 명이었다.

이제는 밝혀도 될 그 이름은 최양호, 나장균, 김재술, 김형옥, 최영옥, 김성렬, 김영배, 나종남이다. 전병용과 한재동은 박정희 정권 말기인 1979년 3월 초, ‘민주교도관’이라는 낙인이 찍혀 각기 순천과 김천의 교도소로 전출되었다가 결국 강제 사직 당했다. 한재동은 한 달 동안 수감생활까지 한 뒤 1981년 1월 행정소송에서 승소해 복직할 수 있었다. 그는 1984년 6월 영등포교도소로 전출해 오랜 지기인 이부영을 만날 수 있었는데, 날마다 퇴근 이전인 저녁 5시쯤 그가 갇힌 감방 앞에 가서 한 시간쯤 대화를 나누던 끝에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에 관한 진상을 온 세상에 알리게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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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1987’ 포스터

나는 개인적으로 전병용·한재동과 각별한 인연이 있다. 1980년 5월17일 전두환의 신군부가 쿠데타를 일으킨 직후 지명수배를 당해 도피생활을 하던 나를 그들이 온갖 위험을 무릅쓰고 숨겨주거나 다음 은신처를 물색해 주었던 것이다. 그 쿠데타가 터지기 한 달쯤 전에 나는 한재동으로부터 ‘난감한’ 부탁을 받았다. 여동생이 결혼할 계획인데 주례를 맡아 달라는 것이었다. 그는 그때 실직 상태였고, 여동생은 영등포 어느 공장의 노동자였다. 신랑감은 작은 구두공장에서 일하고 있다고 했다. 당시 나는 만 36세였으므로 주례를 서기에는 터무니없이 젊은 나이였다. 내가 한사코 고사하자 그는 어느 날 주례로 내 이름을 박은 청첩장을 내 손에 쥐어주었다. 그러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서울의 봄’을 맞아 민주화운동의 열기가 뜨겁던 5월5일 오전 11시, 나는 아내와 함께 세 살 박이 아들의 손을 잡고 용산구 남영동 큰길가에 있는 허름한 건물의 예식장으로 갔다. 식단 앞으로 어색하게 다가가자 안내를 맡은 여성이 이상하다는 듯이 나를 쳐다보았다. 내가 당황해서 “제가 주례인데요”라고 우물거리자 그는 “새파랗게 젊은 분이 주례를 보세요?” 하면서 내 손에 흰 장갑을 끼워주었다.

나는 그날 진지하게 ‘주례사’를 했는데, 나중에 한재동에게 들어보니 큰 실수를 한 대목이 있다는 것이었다. 내가 신부의 오빠와 맺은 인연 때문에 주례를 맡게 되었다고 말한 뒤에 서대문구치소에서 민주화운동 투사들을 돕다가 파면 당했지만 꿋꿋하게 살고 있다고 소개한 내용이 바로 그것이었다. 하례객 대다수는 한재동의 고향인 전남 순천에서 올라온 순박한 친척과 농민들로, 그 지방의 명문인 순천고등학교를 나온 그가 서울에서 공무원으로 잘 살고 있으리라고 믿고 있었다고 한다.

‘서울의 봄’이 싸늘하게 식어버린 5월18일부터 도피자 신세가 되어버린 나는 당장 숨어 지내야 하는 데 마땅히 갈 곳이 없었다. 그때 한재동은 서대문구 현저동 산동네의 단칸방에 세 들어 살고 있었다. 한 평을 겨우 넘는 방이라서 둘이 누우면 칼잠을 자야 했다. 그래도 그는 여러 날이 지나도록 전혀 불편한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앞에 이름을 소개한 민주교도관들 역시 동아투위는 물론이고 청년·학생운동권의 수배자들을 적극적으로 숨기고 보살펴주었다.

전병용은 지금 성남시 분당에서 농사를 짓고 있고, 한재동은 수원시의 한 대학에서 비정규직으로 조경(造景) 일을 하고 있다. 김대중·노무현 정부 시기에 웬만한 민주화운동가들 대다수는 적절한 보상을 받았는데 민주교도관들은 ‘명예도 이름도 없이’ 지내 왔다. 그래도 70대 안팎의 그들은 충실하게 생업에 종사하면서 겸손하게 살고 있다. 요즘도 한 달에 한 번씩 만나서 회포를 푼다고 한다. 이명박·박근혜 정권은 그렇다 치고, 촛불혁명으로 태어난 문재인 정부는 이제라도 민주교도관들에게 ‘숨은 노고’를 치하하는 상패라도 주어야 하지 않을까?

※ 이 글은 ‘뉴스타파’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종철 자유언론실천재단 이사장 [email protected]

<2018-01-12>미디어오늘
☞기사원문: 영화 ‘1987’에 숨어 있는 이야기

일, 2018/01/14- 1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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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인 김미화 씨 등 각계인사들 ‘우토로 지킴이’로 나서…“우토로의 인간 존엄과 평화, 오랫동안 기억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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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일 ‘우토로 역사관을 위한 시민모임이 결성식을 가졌다.ⓒ민중의소리

‘마지막 일제징용 마을’로 기억되는 일본 우토로에 역사관을 만들자는 시민들의 자발적인 움직임이 본격화됐다. MBC 예능프로그램 ‘무한도전’에 방영된 이후, 국민적 관심을 받게된 우토로 마을은 일제 식민지 정책과 전쟁 수행의 피해자였던 조선인 노동자들의 집단 합숙소이자 60여년 세월이 고스란히 묻어있는 주민들의 삶의 터전이다.

토지 소유권자들의 분쟁 탓에 강제철거 위기까지 겪었던 이 곳은 가까스로 한국 정부의 지원과 민간 모금 등으로 안정을 찾긴 했지만, 우토로 동포들의 흔적 또는 추억이 점차 지워져가고 있다. 특히 최근 일본 정부의 마을 정비 사업이 진행되면서 우토로를 기억할 수 있는 역사관 설립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점차 커지고 있다.

‘우토로 역사관을 위한 시민모임’이 12일 서울시NPO지원센터에서 결성식을 갖고, 그 시작을 알렸다. 시민모임의 주축이 된 57명의 ‘우토로 지킴이’에는 방송인 김미화 씨를 비롯 이장희 한국외대 법학전문대학원 명예교수,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장, 함세웅 민족문제연구소 이사장, 진관 불교인권위원회 공동대표 등 각계각층의 인사들이 함께했다. 공동대표는 류종열 흥사단 이사장, 박연철 전 우토로국제대책회의 상임대표, 정진우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부이사장이 맡았다.

이들은 이날 결성선언문을 통해 “지금 우토로는 조선사람이 사는 낯익은 마을 풍경이 사라지고, 장구소리와 김치냄새가 사라져가고 있다. 마을을 일구고 지킨 사람들이 사라지고 있다”면서 “그러나 우리는 우토로가 외쳐온 인간 존엄과 평화를 향한 간절한 소망을 기억하고 있고, 오랫동안 기억하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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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토로 마을의 재일동포 모습이 담긴 전시물ⓒ민중의소리

또 “그들이 그토록 지키고자 했던 소중한 가치들이 우리 후세에, 한국과 일본, 재일동포 모두에게 오랫동안 전해질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라며 “저항과 분노를 넘어 평화와 희망의 메시지를 발할 수 있는 곳이 되도록 하겠다”고 강조했다. 아울러 “‘우토로 역사관을 위한 시민모임’은 우토로 동포들의 버팀목이 되어 이상의 노력을 다해나아갈 것”이라고 덧붙였다.

향후 이들은 민간 모금 등으로 매입한 우토로 토지 위에 세워진 공적주택에 동포들이 첫 입주하는 기념행사를 시작으로 우토로 동포들의 구술기록집과 사진집(正史) 발간 등 다양한 사업을 벌인다는 계획이다.

시민모임의 배지원 사무국장(전 우토로국제대책회의 사무국장)은 “역사관은 우토로 동포들과 한국 시민들의 약속이자 꿈이었다”면서 “작고 소박하지만 자자손손 평화의 홀씨를 퍼뜨리는, 우토로의 파수꾼이 되어줄 역사관이 우토로 땅에 세워질 수 있도록 많은 분들이 참여해달라”고 당부했다.

<2018-01-12>민중의소리
☞기사원문: 조선인들의 우토로, 영원히 기억하자” 우토로 역사관 위한 시민모임 발족

일, 2018/01/14- 1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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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인천낚싯배 15희생제물, 대통령 중국방문수모, 충북제천 29희생제물에 대한 섭리적 해설과 호토용사상회일(虎兎龍蛇相會日)의 결실은 정신문명발동에 의한 지구촌 통일임을 무술년(戊戌年)을 맞이하여 밝히고자 합니다.

출처:모정주의사상원(母情主義思想院, http://www.mojung.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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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 2018/01/15- 1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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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인천낚싯배 15희생제물, 대통령 중국방문수모, 충북제천 29희생제물에 대한 섭리적 해설과 호토용사상회일(虎兎龍蛇相會日)의 결실은 정신문명발동에 의한 지구촌 통일임을 무술년(戊戌年)을 맞이하여 밝히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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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 2018/01/15- 1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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