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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영동(南營洞)이라는 고약한 지명을 남기고 사라진 용산연병장 – 일본군대의 관병식과 일왕 봉도식, 친일파 장례식이 벌어지던 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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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영동(南營洞)이라는 고약한 지명을 남기고 사라진 용산연병장 – 일본군대의 관병식과 일왕 봉도식, 친일파 장례식이 벌어지던 공간

익명 (미확인) | 금, 2017/07/28- 18:55

식민지 비망록 26

13일 용산연병장의 본사 주최 자전거경주회장은 오전부터 남녀노소가 답지하여 수십 대의 전차는 서로 연하여 운전을 하나 오히려 올라탈 여가 없어 도보 혹은 인력거로 나오는 사람이 남대문에서 연병장까지 발자취를 서로 연함으로 운동장 부근은 인산인해를 이루어 그다지 넓은 대경주장 주위에는 송곳 세울 틈도 없이 사람이 열 겹, 스무 겹씩 둘렀고 산비탈 언덕 아래에도 사람으로 가리워 오후 2시경에는 십만 인 이상으로 계수할 지경이라. …… 그 다음에는 전조선 제일류(第一流)의 대경주를 개시하였는데 선수는 내지인(內地人) 네 명, 조선인 엄복동 황수복의 두 명이라. 용맹 활발한 여러 선수는 평생의 용맹을 다하여 명예 있는 일등을 다투는데 활동사진은 기념으로 사진을 백이며 십만 관객이 박수 응원하는 가운데 엄복동과 황수복은 항상 다른 선수보다 앞서서 나가다가 다른 선수와 좇아옴을 보고 더
욱 용맹을 내여 넓은 경주장을 겨우 이십이 분에 스무 번을 돌아 우리가 애독자 제군과 기다리고 바라던 전조선대경주회의 명예 있는 일등은 마침내 엄복동에게 떨어지고 황수복도 삼등을 점령하여(하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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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신보> 1913년 4월 5일자에 수록된 ‘전조선자전거대경주회’ 안내광고. 용산연병장에서 벌어진 실제 대회일정은 1주일이 연기되었으나, 이때 ‘엄복동’의 이름이 세상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이 기사는 <매일신보> 1913년 4월 15일자에 수록된 것으로 “떴다 보아라 안창남의 비행기, 내려다보니 엄복동의 자전거”라는 구전가요의 구절로 유명한 자전거대왕 엄복동(嚴福童, 1892~1952)이 처음 자신의 이름을 세상 사람들에게 널리 알리는 순간이 묘사되어 있다. 당시 매일신보와 경성일보가 공동주최한 ‘전조선자전거대경주회(全朝鮮自轉車大競走會)’는 인천, 경성, 부산, 평양의 네 곳에서 3주간에 걸쳐 연속 경기를 벌이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그런데 여기에는 엄복동이 자전거를 탄 장소가 ‘용산연병장(龍山練兵場)’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용산연병장은 그야말로 러일전쟁 이후 1906년 4월부터 용산지역에 대규모로 진행된 일본군영지 조성공사의 산물이다. 이 당시 가장 먼저 설치된 것은 군용도로와 연병장과 같은 기반시설이었다. 가령 남대문정거장 쪽에서 용산역으로 이어지는 한강통(漢江通, 지금의 한강로)이 개설된 것은 1906년 6월의 일이고, 후암동 방향에서 용산기지를 남북으로 관통하는 길은 1908년 12월에 공사를 마쳤다. 군사주둔지의 필수 구성요소인 연병장도 비교적 이른 시기인 1908년 5월에 완공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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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연병장’의 위치가 표시된 「경성급용산」 지도 자료. <조선철도여행안내>(1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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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신보> 1917년 1월 9일자에 소개된 용산연병장 관병식 장면. 말 위에 앉은 이는 조선주차군사령관 아키야마  요시후루(秋山好古) 육군대장.

 

1906년 4월부터 용산지역에 대규모로 진행된 일본군영지 조성공사의 산물이다. 이 당시 가장 먼저 설치된 것은 군용도로와 연병장과 같은 기반시설이었다. 가령 남대문정거장 쪽에서 용산역으로 이어지는 한강통(漢江通, 지금의 한강로)이 개설된 것은 1906년 6월의 일이고, 후암동 방향에서 용산기지를 남북으로 관통하는 길은 1908년 12월에 공사를 마쳤다. 군사주둔지의 필수 구성요소인 연병장도 비교적 이른 시기인 1908년 5월에 완공되었다.
이 연병장은 본연의 군사훈련장이라는 용도 이외에도 해마다 정초 또는 천장절이나 육군기념일과 같은 ‘경축일’이 되면 조선총독이 참석한 가운데 관병식(觀兵式)이 열리는 공간으로 사용되곤 했다. 또한 1912년 여름에는 그들의 천황이 세상을 뜨자 성대한 봉도식(奉悼式)이 이곳 연병장에서 거행되었고, 이보다 약간 앞서 친일파의 거두인 일진회 회장 이용구(李容九, 1868~1912)의 장례식이 이곳에서 벌어진 적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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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해군 군속기사 출신 나라하라 산지에 의해 제작된 ‘봉호(鳳號)’가 용산연병장에서 비행하는 장면. 우리나라에서 처음 비행기가 등장한 것은 이때의 일이다.(<매일신보> 1913. 4. 5)

 

용산 일본군 연병장은 서울 시내의 ‘훈련원 터’가 그러했던 것처럼 다수의 군중이 집결하기 용이한 위치에 있었던 탓에 여러 학교 단체의 운동회가 벌어지거나 갖가지 별스러운 흥행이 벌어지는 장소로 곧잘 사용되기도 했다.
예를 들어 1913년 4월에 일본해군 군속기사 출신의 나라하라 산지(奈良原三次, 1877~1944)가 나라하라식 4호 비행기인 ‘봉호(鳳號, 오토리호)’를 서울에서 처음 선을 보였을 때 비행장으로 사용된 곳이 용산연병장이었다. 1915년 조선물산공진회 당시 일본의 제국비행협회가 파견한 오자키 유키데루(尾崎行輝, 1888~1964)의 ‘삼중호(三重號, 미에호)’ 축하 비행을 비롯하여 1917년 미국인 곡예비행사 아트 스미스(Art Smith, 1890~1926)의 비행대회도 모두 이곳에서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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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을 찾아온 미국인 비행사 아트 스미스의 비행대회를 알리는 광고문안. 용산연병장에서 거행된 그의
비행묘기는 장차 비행사가 될 안창남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고 알려진다.(<매일신보> 1917. 9. 11)

 

그런데 1915년 6월 조선에 2개 사단을 증설하여 주차군 편제를 상주군으로 전환하는 결정과 관련하여
용산병영지가 확장됨에 따라 신연병장(新練兵場, 지금의 국립중앙박물관 자리 일대)이 새로 조성되는 한편 종래의 연병장 터는 야포병연대(野砲兵聯隊, 1920년 4월 병영공사 준공)가 차지하는 공간으로 변했다.
현재 이곳은 통칭 ‘캠프 코이너(Camp Coiner)’로 용산미군기지의 북쪽 끝 지역에 해당한다. 이때 연병장 터의 서쪽 대로변에 접한 구역에는 따로 시가지가 만들어졌는데, 이에 관해서는 <매일신보> 1918년 2월 27일자에 수록된 「조선부대 신영공사(朝鮮部隊 新營工事)」 제하의 기사를 통해 그 흔적을 확인할 수 있다.

신연병장(新練兵場)에 이전 후의 용산연병장 한강통 전차연선(漢江通 電車沿線) 전부의장(長)을 광(廣) 60간(間)에 긍(亘)하여 일대지(一帶地)를 시가지로 군사령부에서 총독부에 인도를 료(了)하고 기 후방(其 後方) 전부를 야포병연합대(野砲兵聯合隊)의 부지로7년도(1918년도)부터 병영공사에 착수하겠고(하략)

 

새로 생긴 동네는 일제가 정한 행정구역상으로는 한강통에 속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자리가 이미 연병장 터로 각인되어 있었던 탓에 대개 ‘연병정(練兵町)’으로 통용되었다. 더구나 연병장이 사라진 이후에도 구용산과 신용산의 분기점에 해당하는 이곳 전차정류장의 이름은 여전히 ‘연병정’으로 사용된 흔적도 발견할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매일신보???? 1924년 8월 5일자에 수록된 「경성부시(京城府市)의 행정구획정리」 제하의 기사는 그 무렵 ‘연병정’이 이미 속칭으로 뿌리를 내리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한강통 삼번지(漢江通 三番地) 부근은 속칭 연병정(練兵町)이라 하고 우(右) 칠번지각삼각정(七番地角 三角町) 등도 개(皆) 속칭이오 행정구획에 의하여 명명된 정명(町名)은 아닌 고로 금회의 정리에는 당연 우(右) 정명을 폐지하고 공식의 정명으로 변경치 아니하면 아니될 것이나 부당국(府當局)에서 혹 지방 거주자의 의지를 존중히 하여 현재 속칭 정명으로 그대로 명명하게 될지 알지 못하나(하략)

 

이러한 상태에서 일제패망기로 접어든 1941년 10월 1일에는 경기도고시 제379호를 통해 ‘정동리(町洞里)의 명칭 및 구역’이 개정됨에 따라 종래 ‘한강통’으로만 불러왔던 용산 일대의 군영지 및 배후지역이 여러 동네로 세분화하기에 이른다. 이때의 조치에 따라 옛 한강통 3번지 일대의 땅은 ‘공식적으로’ 연병정이라는 이름을 달게 되었고, 여타 구역에는 한강통 몇 정목이니 용산정 몇 정목이니 하는 식의 명칭이 부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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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연병장은 사라졌으나 ‘연병정’은 전차정류장 이름으로 여전히 남아 있었다.

사진은 <경성과 인천>(1929)에 수록된 연병정 전차분기점의 모습.

 

이로부터 불과 4년여 만에 일제가 패망했으나 그들이 부여해놓은 지명은 그대로 이 땅에 남는 상태가 되었다. 누가 봐도 ‘연병정’은 그대로 용납할 수 없는 표현이었으니만큼 1946년 10월 일본식 지명 잔재를 일소하는 차원에서 종전의 ‘연병정’을 대체하기 위한 지명이 창안되었는데, 이때 성급하게 붙여놓은 명칭이 ‘남영동(南營洞)’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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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신문> 1925년 1월 13일자에 수록된 일본인 활동사진관 경룡관(京龍館)의 화재위문 답례광고. 이곳의 지번 주소는 ‘한강통 3번지’이지만 광고문안에는 ‘용산 연병정’이라고 소재지를 그대로 기재한 것이 눈에 띈다.

 

????한국지명총람 1(서울편)????(한글학회, 1966)에 수록된 내용에 따르면, 이 이름의 유래에 대해 “서울 남쪽에 영문(營門)이 있던 곳이라고 하여 남영동으로 개칭함”이라고만 간략히 소개하고 있다. 하지만 여기에서 말하는 ‘영문’이 어느 시대에 존재했던 것인지, 아님 무슨 문헌상의 근거라도 있는 것인지에 대해 명확하게 관련 자료가 제시된 바는 없다. 그저 짧은 소견에 생각건대 남쪽에 있는 병영, 즉 남영은 일본군대의 용산 병영 그 자체를 뜻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질 따름이다.
이 와중에 지난 1974년 8월 15일 지하철 1호선 개통 당시부터 존재했던 ‘남영역’은 이미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우리의 일상에서 매우 익숙한 생활공간의 하나로 정착된 지 오래다.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정작 이 철도역사의 소재지는 ‘남영동’이 아니라 ‘갈월동’이라는 사실이다. 행정구역으로만 따지자면 ‘갈월역’이 되어야 했을지 모르겠으나, 어쨌건 지금껏 남영역이었고 앞으로도 이 이름으로 바뀔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인다.
애당초 ‘연병정’이라는 이름은 일본군대가 이 땅에 침탈의 흔적으로 남겨놓은 것이고, ‘남영동’ 이니 ‘남영역’이니 하는 것은 다시 거기에서 파생한 말이니 이래저래 꽤나 고약한 이름이 아닐수 없겠다. 많이 늦었지만 지금에라도 ‘남영동’이라는 지명은 삭제되어야 하고, 다른 적절한 명칭을 찾는 노력이 절실해 보인다.

∷ 이순우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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過寒露寄友人

 

霜降丹楓落(상강단풍락)

還鄕與我吟(환향여아음)

爲君新釀酒(위군신양주)

共醉臥空林(공취와공림)

 

寒露를 지나 벗님에게 띄우는 글

 

서리 오고 우수수 단풍도 지면

고향에 돌아와 나와 詩를 읊세

그대 위해 새로 술도 빚었으니

함께 취해 空林에 누워도 보세.

 

<時調로 改譯>

 

霜降에 단풍도 지면 還鄕하여 詩를 읊세

그대 벗님을 위하여 새로 술도 빚었으니

둘이서 함께 취하여 空林에 누워도 보세.

 

*友人: 벗 *霜降: 이십사절기(二十四節氣)의 하나. 한로(寒露)와 입동(立冬) 사이

들며, 아침과 저녁의 기온이 내려가고, 서리가 내리기 시작할 무렵이다. 10월

23일경이다  *還鄕: 고향(故鄕)으로  돌아옴  *釀酒: 술을 빚어서 담금. 온양(醞釀)

*空林: 나뭇잎이 떨어져 공허한 숲. 또는 인가(人家)에서 멀리 떨어진 한적한 숲.

 

<2018.10.12, 이우식 지음>

토, 2018/10/13- 0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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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일본 오키나와에서 조선인 묘표가 확인됐다는 소식 어제(15일) 전해드렸는데요.

오키나와 곳곳에 조선인이 매장된 것으로 추정되는 장소들이 남아있습니다.

하지만 조선인의 유해가 발굴돼 국내로 돌아온 적은 한 번도 없었고, 유해 반환에 대한 논의도 답보 상탭니다.

윤봄이 기자가 보도합니다.

[리포트]

오키나와 본섬의 최남단.

패전을 앞둔 일본군이 후퇴해 주둔했던 숲입니다.

미군의 집중 공격을 받은 곳인데, 조선인으로 구성된 특설수상근무대도 이 일대에 주둔했습니다.

전쟁이 끝난 지 70년이 넘게 지났지만, 유해 발굴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자원봉사자들이 이렇게 깊은 산 속까지 찾아와 발굴 작업에 힘쓰고 있습니다.

일본 정부가 손을 놓은 사이, 유해 발굴을 계속 하고 있는 건 자원봉사자 대여섯 명입니다.

[“(뭐가 나왔나요?) 손가락뼈. 아마도 이 부위인가? 손인지, 발인지 아직 확실하게는 잘 모르겠지만…”]

발굴된 유해는 오키나와 현에서 임시 보관하고 있는데, 대부분 DNA 확인도 못했습니다.

[구지켄 다카마츠/유해 발굴 자원봉사자 : “지금까지 발견된 유골 중에 조선인도 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생각합니다.”]

발굴 현장 인근엔 유골 3만 5천구가 묻혔다는 자리가 남아있습니다.

전쟁 직후 농부들이 밭을 갈 때마다 유해가 쏟아져 나와, 이를 한 번에 묻고 탑을 세운 겁니다.

[오키모토 후키코/강제 동원 조선인 연구자 : “(조선인 부대가) 이곳에서 전멸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조선인들의 유골도 이 혼백의 탑 아래에 들어갔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미군이 일본군 포로 7천 명을 감시했다는 수용소 자리.

이 해안가엔 지금 마을이 들어섰고 포로수용소 터를 표시하는 비만 남아있습니다.

일본의 한 단체가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에서 확인한 매장자 명단.

조선인으로 보이는 이름도 여럿 확인됩니다.

하지만 이들이 어디에 어떻게 묻혔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습니다.

산속부터 해안까지, 오키나와에서 숨지거나 행방불명된 조선인은 최소 7백여 명.

조선인 유해가 발굴돼 반환된 사례는 없는 것으로 확인됩니다.

정부 차원의 논의는 지지부진합니다.

[김영환/ 민족문제연구소 대외협력팀장 : “일본 정부와 유해 반환 교섭에서 어떤 내용을 요구했고, 이후 어떤 노력을 하고 있는지에 대해서 저희가 수차례 정보공개청구를 요청한 바가 있습니다. 그런데 외교적 사안이라 공개할 수 없다.”]

오키나와 외에도 소재가 파악된 한국인 유골은 2천 8백 위에 달하지만, 정부 차원의 유해 반환은 2010년을 마지막으로 중단된 상태입니다.

KBS 뉴스 윤봄이입니다.

<2018-08-16>  KBS

☞기사원문: 오키나와 섬 곳곳 거대한 무덤…조선인 유해 반환은 ‘0건’

금, 2018/08/17- 1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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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당 민주연구원 국립현충원 이장 추진
“친일인사와 함께 모실 수 없다” 반대 거세

▲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대선 예비후보가 25일 오후 서울 용산구 효창공원 내 독립운동열사 7위선열의 사당인 의열사를 찾아 참배하고 있다. (문재인 캠프 제공)2017.3.25/뉴스1

일제강점기 만주에서 일본 관동군 헌병으로 복무하며 독립투사 소탕에 앞장섰던 김창룡(1902~1956)은 대전 국립현충원에 묻혀 있다. 바로 맞은편 묘역에는 백범 김구 선생(1876~1949)의 모친 곽낙원 여사(1858~1939)와 장남 김인(1917~1945)이 잠들어 있다. 친일논란 대상인데다 백범 암살사건의 배후라는 의혹을 받는 인물과 독립투사의 유족이 마주보고 있는 셈이다.

더불어민주당이 2019년 3.1운동 100주년을 앞두고 김구 선생의 묘소를 국립현충원으로 이장한다는 구상을 밝히면서 비슷한 우려가 나온다. 민주당 민주연구원의 김민석 원장은 최근 기자간담회에서 임시정부의 법통을 잇는다는 의미에서 효창공원에 안장된 김구 선생과 윤봉길·이봉창·안중근 열사를 국립현충원으로 이장을 추진한다는 계획을 밝혔다. 문재인 대통령도 2017년 8월15일 광복절에 효창공원을 직접 찾아 참배해 임정 법통을 강조한 바 있다.

민족문제연구소 친일인명사전에 따르면 현재 국립현충원에 안장된 친일인사는 서울에 37명, 대전에 26명이다. 2009년 대통령 소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의 조사결과, 친일반민족 행위자로 규정된 인물 중에는 서울에 7명, 대전에 4명이 묻혔다. 이 때문에 친일인사의 이장을 위해 국립묘지법을 개정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크다.

박한용 민족문제연구소 교육홍보실장은 “여당이 임시정부 주석을 예우하기 위해 고민한다는 건 일리가 있다”면서도 “김창룡을 비롯해 친일인사들이 국립현충원에 남아있는데 그곳에 백범을 모시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냐”고 반문했다.

박 실장은 “역사적폐 청산 차원에서도 친일독재를 반대한 민족인사를 반민족인사와 함께 모신다는 건 적절하지 않다”고 이장 반대의사를 밝혔다.

김구 선생은 생전 자신이 세상을 떠나면 효창공원 독립운동 동지들 곁에 묻어달라는 유훈을 남겼다. 현재 효창공원에는 김구 선생 외에도 항일투쟁 중 순국한 윤봉길(1908~1932), 이봉창(1901~1932), 백정기(1896~1934) 3의사의 묘소와 유해를 찾지못한 안중근 의사(1879~1910)의 가묘도 설치됐다. 이동녕(1869~1940), 조성환(1875~1948), 차이석(1881~1945) 선생 등 임시정부 요인의 묘소도 있다. 이는 모두 김구 선생이 해방 후 직접 조성해 의미가 크다.

이장보다는 현재 효창공원을 성역화하는 게 독립운동가들을 기리는 합당한 예우라는 지적도 있다. 친일인사가 섞여있는 현충원보다 독립투사들만으로 조성된 효창공원이 역사적 성지로서 더욱 상징성이 있다는 것이다. 이승만, 박정희 정권 시절에는 출입이 제한되고 일부 부지가 훼손되는 등 굴곡진 현대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지금 효창공원은 국립묘지가 아닌 사적과 근린공원의 법적 지위로 용산구가 관리 중이다.

친일문제 전문가 정운현씨는 “효창공원은 역사성이 있고 백범기념관도 함께 운영 중이라는 가치도 있다. 백범도 땅속에서 이장을 원치않을 것”이라며 “효창공원을 국립묘지로 승격해 중앙정부 차원에서 예우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nevermind@

<2018-03-01> 뉴스1

☞기사원문: “백범도 친일파와 묻히기 원치 않아”…효창공원 묘소이장 논란

토, 2018/03/03- 0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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팟캐스트 내일을 여는 역사 ‘역적’ 시즌2로 돌아왔습니다!!

시즌2부터는 민족문제연구소와 국민TV가 함께합니다.

국민TV 채널에서는 팟캐스트 역적을 영상으로 보실 수 있습니다.

국민TV  : https://www.youtube.com/watch?v=-ehfv…

화, 2018/02/20- 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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