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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영동(南營洞)이라는 고약한 지명을 남기고 사라진 용산연병장 – 일본군대의 관병식과 일왕 봉도식, 친일파 장례식이 벌어지던 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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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영동(南營洞)이라는 고약한 지명을 남기고 사라진 용산연병장 – 일본군대의 관병식과 일왕 봉도식, 친일파 장례식이 벌어지던 공간

익명 (미확인) | 금, 2017/07/28- 18:55

식민지 비망록 26

13일 용산연병장의 본사 주최 자전거경주회장은 오전부터 남녀노소가 답지하여 수십 대의 전차는 서로 연하여 운전을 하나 오히려 올라탈 여가 없어 도보 혹은 인력거로 나오는 사람이 남대문에서 연병장까지 발자취를 서로 연함으로 운동장 부근은 인산인해를 이루어 그다지 넓은 대경주장 주위에는 송곳 세울 틈도 없이 사람이 열 겹, 스무 겹씩 둘렀고 산비탈 언덕 아래에도 사람으로 가리워 오후 2시경에는 십만 인 이상으로 계수할 지경이라. …… 그 다음에는 전조선 제일류(第一流)의 대경주를 개시하였는데 선수는 내지인(內地人) 네 명, 조선인 엄복동 황수복의 두 명이라. 용맹 활발한 여러 선수는 평생의 용맹을 다하여 명예 있는 일등을 다투는데 활동사진은 기념으로 사진을 백이며 십만 관객이 박수 응원하는 가운데 엄복동과 황수복은 항상 다른 선수보다 앞서서 나가다가 다른 선수와 좇아옴을 보고 더
욱 용맹을 내여 넓은 경주장을 겨우 이십이 분에 스무 번을 돌아 우리가 애독자 제군과 기다리고 바라던 전조선대경주회의 명예 있는 일등은 마침내 엄복동에게 떨어지고 황수복도 삼등을 점령하여(하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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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신보> 1913년 4월 5일자에 수록된 ‘전조선자전거대경주회’ 안내광고. 용산연병장에서 벌어진 실제 대회일정은 1주일이 연기되었으나, 이때 ‘엄복동’의 이름이 세상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이 기사는 <매일신보> 1913년 4월 15일자에 수록된 것으로 “떴다 보아라 안창남의 비행기, 내려다보니 엄복동의 자전거”라는 구전가요의 구절로 유명한 자전거대왕 엄복동(嚴福童, 1892~1952)이 처음 자신의 이름을 세상 사람들에게 널리 알리는 순간이 묘사되어 있다. 당시 매일신보와 경성일보가 공동주최한 ‘전조선자전거대경주회(全朝鮮自轉車大競走會)’는 인천, 경성, 부산, 평양의 네 곳에서 3주간에 걸쳐 연속 경기를 벌이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그런데 여기에는 엄복동이 자전거를 탄 장소가 ‘용산연병장(龍山練兵場)’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용산연병장은 그야말로 러일전쟁 이후 1906년 4월부터 용산지역에 대규모로 진행된 일본군영지 조성공사의 산물이다. 이 당시 가장 먼저 설치된 것은 군용도로와 연병장과 같은 기반시설이었다. 가령 남대문정거장 쪽에서 용산역으로 이어지는 한강통(漢江通, 지금의 한강로)이 개설된 것은 1906년 6월의 일이고, 후암동 방향에서 용산기지를 남북으로 관통하는 길은 1908년 12월에 공사를 마쳤다. 군사주둔지의 필수 구성요소인 연병장도 비교적 이른 시기인 1908년 5월에 완공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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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연병장’의 위치가 표시된 「경성급용산」 지도 자료. <조선철도여행안내>(1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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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신보> 1917년 1월 9일자에 소개된 용산연병장 관병식 장면. 말 위에 앉은 이는 조선주차군사령관 아키야마  요시후루(秋山好古) 육군대장.

 

1906년 4월부터 용산지역에 대규모로 진행된 일본군영지 조성공사의 산물이다. 이 당시 가장 먼저 설치된 것은 군용도로와 연병장과 같은 기반시설이었다. 가령 남대문정거장 쪽에서 용산역으로 이어지는 한강통(漢江通, 지금의 한강로)이 개설된 것은 1906년 6월의 일이고, 후암동 방향에서 용산기지를 남북으로 관통하는 길은 1908년 12월에 공사를 마쳤다. 군사주둔지의 필수 구성요소인 연병장도 비교적 이른 시기인 1908년 5월에 완공되었다.
이 연병장은 본연의 군사훈련장이라는 용도 이외에도 해마다 정초 또는 천장절이나 육군기념일과 같은 ‘경축일’이 되면 조선총독이 참석한 가운데 관병식(觀兵式)이 열리는 공간으로 사용되곤 했다. 또한 1912년 여름에는 그들의 천황이 세상을 뜨자 성대한 봉도식(奉悼式)이 이곳 연병장에서 거행되었고, 이보다 약간 앞서 친일파의 거두인 일진회 회장 이용구(李容九, 1868~1912)의 장례식이 이곳에서 벌어진 적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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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해군 군속기사 출신 나라하라 산지에 의해 제작된 ‘봉호(鳳號)’가 용산연병장에서 비행하는 장면. 우리나라에서 처음 비행기가 등장한 것은 이때의 일이다.(<매일신보> 1913. 4. 5)

 

용산 일본군 연병장은 서울 시내의 ‘훈련원 터’가 그러했던 것처럼 다수의 군중이 집결하기 용이한 위치에 있었던 탓에 여러 학교 단체의 운동회가 벌어지거나 갖가지 별스러운 흥행이 벌어지는 장소로 곧잘 사용되기도 했다.
예를 들어 1913년 4월에 일본해군 군속기사 출신의 나라하라 산지(奈良原三次, 1877~1944)가 나라하라식 4호 비행기인 ‘봉호(鳳號, 오토리호)’를 서울에서 처음 선을 보였을 때 비행장으로 사용된 곳이 용산연병장이었다. 1915년 조선물산공진회 당시 일본의 제국비행협회가 파견한 오자키 유키데루(尾崎行輝, 1888~1964)의 ‘삼중호(三重號, 미에호)’ 축하 비행을 비롯하여 1917년 미국인 곡예비행사 아트 스미스(Art Smith, 1890~1926)의 비행대회도 모두 이곳에서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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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을 찾아온 미국인 비행사 아트 스미스의 비행대회를 알리는 광고문안. 용산연병장에서 거행된 그의
비행묘기는 장차 비행사가 될 안창남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고 알려진다.(<매일신보> 1917. 9. 11)

 

그런데 1915년 6월 조선에 2개 사단을 증설하여 주차군 편제를 상주군으로 전환하는 결정과 관련하여
용산병영지가 확장됨에 따라 신연병장(新練兵場, 지금의 국립중앙박물관 자리 일대)이 새로 조성되는 한편 종래의 연병장 터는 야포병연대(野砲兵聯隊, 1920년 4월 병영공사 준공)가 차지하는 공간으로 변했다.
현재 이곳은 통칭 ‘캠프 코이너(Camp Coiner)’로 용산미군기지의 북쪽 끝 지역에 해당한다. 이때 연병장 터의 서쪽 대로변에 접한 구역에는 따로 시가지가 만들어졌는데, 이에 관해서는 <매일신보> 1918년 2월 27일자에 수록된 「조선부대 신영공사(朝鮮部隊 新營工事)」 제하의 기사를 통해 그 흔적을 확인할 수 있다.

신연병장(新練兵場)에 이전 후의 용산연병장 한강통 전차연선(漢江通 電車沿線) 전부의장(長)을 광(廣) 60간(間)에 긍(亘)하여 일대지(一帶地)를 시가지로 군사령부에서 총독부에 인도를 료(了)하고 기 후방(其 後方) 전부를 야포병연합대(野砲兵聯合隊)의 부지로7년도(1918년도)부터 병영공사에 착수하겠고(하략)

 

새로 생긴 동네는 일제가 정한 행정구역상으로는 한강통에 속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자리가 이미 연병장 터로 각인되어 있었던 탓에 대개 ‘연병정(練兵町)’으로 통용되었다. 더구나 연병장이 사라진 이후에도 구용산과 신용산의 분기점에 해당하는 이곳 전차정류장의 이름은 여전히 ‘연병정’으로 사용된 흔적도 발견할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매일신보???? 1924년 8월 5일자에 수록된 「경성부시(京城府市)의 행정구획정리」 제하의 기사는 그 무렵 ‘연병정’이 이미 속칭으로 뿌리를 내리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한강통 삼번지(漢江通 三番地) 부근은 속칭 연병정(練兵町)이라 하고 우(右) 칠번지각삼각정(七番地角 三角町) 등도 개(皆) 속칭이오 행정구획에 의하여 명명된 정명(町名)은 아닌 고로 금회의 정리에는 당연 우(右) 정명을 폐지하고 공식의 정명으로 변경치 아니하면 아니될 것이나 부당국(府當局)에서 혹 지방 거주자의 의지를 존중히 하여 현재 속칭 정명으로 그대로 명명하게 될지 알지 못하나(하략)

 

이러한 상태에서 일제패망기로 접어든 1941년 10월 1일에는 경기도고시 제379호를 통해 ‘정동리(町洞里)의 명칭 및 구역’이 개정됨에 따라 종래 ‘한강통’으로만 불러왔던 용산 일대의 군영지 및 배후지역이 여러 동네로 세분화하기에 이른다. 이때의 조치에 따라 옛 한강통 3번지 일대의 땅은 ‘공식적으로’ 연병정이라는 이름을 달게 되었고, 여타 구역에는 한강통 몇 정목이니 용산정 몇 정목이니 하는 식의 명칭이 부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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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연병장은 사라졌으나 ‘연병정’은 전차정류장 이름으로 여전히 남아 있었다.

사진은 <경성과 인천>(1929)에 수록된 연병정 전차분기점의 모습.

 

이로부터 불과 4년여 만에 일제가 패망했으나 그들이 부여해놓은 지명은 그대로 이 땅에 남는 상태가 되었다. 누가 봐도 ‘연병정’은 그대로 용납할 수 없는 표현이었으니만큼 1946년 10월 일본식 지명 잔재를 일소하는 차원에서 종전의 ‘연병정’을 대체하기 위한 지명이 창안되었는데, 이때 성급하게 붙여놓은 명칭이 ‘남영동(南營洞)’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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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신문> 1925년 1월 13일자에 수록된 일본인 활동사진관 경룡관(京龍館)의 화재위문 답례광고. 이곳의 지번 주소는 ‘한강통 3번지’이지만 광고문안에는 ‘용산 연병정’이라고 소재지를 그대로 기재한 것이 눈에 띈다.

 

????한국지명총람 1(서울편)????(한글학회, 1966)에 수록된 내용에 따르면, 이 이름의 유래에 대해 “서울 남쪽에 영문(營門)이 있던 곳이라고 하여 남영동으로 개칭함”이라고만 간략히 소개하고 있다. 하지만 여기에서 말하는 ‘영문’이 어느 시대에 존재했던 것인지, 아님 무슨 문헌상의 근거라도 있는 것인지에 대해 명확하게 관련 자료가 제시된 바는 없다. 그저 짧은 소견에 생각건대 남쪽에 있는 병영, 즉 남영은 일본군대의 용산 병영 그 자체를 뜻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질 따름이다.
이 와중에 지난 1974년 8월 15일 지하철 1호선 개통 당시부터 존재했던 ‘남영역’은 이미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우리의 일상에서 매우 익숙한 생활공간의 하나로 정착된 지 오래다.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정작 이 철도역사의 소재지는 ‘남영동’이 아니라 ‘갈월동’이라는 사실이다. 행정구역으로만 따지자면 ‘갈월역’이 되어야 했을지 모르겠으나, 어쨌건 지금껏 남영역이었고 앞으로도 이 이름으로 바뀔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인다.
애당초 ‘연병정’이라는 이름은 일본군대가 이 땅에 침탈의 흔적으로 남겨놓은 것이고, ‘남영동’ 이니 ‘남영역’이니 하는 것은 다시 거기에서 파생한 말이니 이래저래 꽤나 고약한 이름이 아닐수 없겠다. 많이 늦었지만 지금에라도 ‘남영동’이라는 지명은 삭제되어야 하고, 다른 적절한 명칭을 찾는 노력이 절실해 보인다.

∷ 이순우 책임연구원

시민들의 의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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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가기 [텀블벅 펀딩] 군함도, 끝나지 않은 전쟁

사라져가는 기억을 위해 집을 지어주려 합니다.
-민족문제연구소의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 프로젝트
0712-2

일본 남쪽, 나가사키 항에서 약 18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는 하시마(군함도)는 야구장 두 개 정도 크기의 작은 섬입니다. 1916년 일본 최초의 철근콘크리트 건물이 세워져 근대화의 상징으로 불렸던 이 섬은 좁은 섬에 근대식 아파트가 빽빽이 들어서는 모습이 마치 군함처럼 보여 그때부터 ‘군함도’라고 불렸습니다. 과거의 영화를 그대로 간직한 그 섬에서 과연 누가 살았을까요?

지상에서 일하는 일본인과 달리 강제동원 된 조선인 노동자들은 지하에서 석탄을 캐야 했습니다. 그 지하는 숨 쉬기조차 어렵고 몸을 펼 수 없을 만큼 좁았으며, 식량과 식수조차 주어지지 않는 말 그대로의 지옥이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석탄 채굴을 위해 강제동원 되었지만, 그곳에서 죽어간 사람들에 관한 기록은 단 한 줄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한때 조선인 희생자들의 유골이 담긴 항아리가 족히 10개는 넘게 들어 있다는 납골당과 공양탑은 지금은 파괴되어 들여다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일본이 ‘근대화의 상징’, ‘자랑스러운 세계유산’으로 포장하려는 군함도(하시마)는 일본의 근대화가 강제징용 된 조선인들의 무덤으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은폐하고 있었습니다. 0712-3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많은 나라들이 과거를 돌이켜보며 자신들의 과오에 대해 역사적으로 평가를 내리고 정리한 바 있습니다. 그러나 한국은 어떨까요? 우리는 아직도 친일문제가 분명하게 해결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습니다. 한일 과거사를 청산하고, 굴절된 역사를 바로 세우기 위해 반민특위 정신을 이어받고, 친일문제 연구에 평생을 바친 고 임종국 선생의 유지를 이어 1991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설립되었습니다. 민족문제연구소는 한일 과거사 문제뿐만 아니라 박정희기념관 건립 저지, 친일파기념사업 저지와 같은 다양한 활동과 전시회를 통해 국민들에게 과거사 청산의 당위성을 알리고자 노력해왔습니다. 이제 행사를 통해 사람들에게 알리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민족문제연구소가 꾸준히 모아온 자료를 시민들과 함께 공유하며 우리의 과거를 제대로 바라보고 기억하기 위해 2018년 식민지역사박물관을 건립하려 합니다.

식민지역사박물관의 건립은 오랜 기간에 걸쳐 진행되었습니다. 부지를 정했지만, 시민들과 함께할 수 있는 박물관의 형태를 만들기 위해 많은 것들이 부족합니다. 0712-4 Print

일본은 한일 과거사 문제가 불거질 때마다 ‘근거 없음’이라고 주장합니다. 과거에 동아시아에서 침략전쟁을 일으킨 것에 대해 반성하기는커녕 도리어 동아시아 안보를 지키는 파수꾼이라 자처합니다. 게다가 일본은 일제 침략 이후 분단과 전쟁으로 이어진 한국의 상황을 토대로 경제부흥을 이끌었지만, 전후 보상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강제동원의 역사를 부정하는 발언을 그치지 않습니다. 한국정부는 그렇다면 자기 역할을 제대로 했을까요? 한국정부 역시 일본정부와 다르지 않았습니다. 과거의 한국정부는 국민적 합의 없이 한일협정을 진행해 그 청구금을 경제발전의 재원으로 사용한 바 있습니다. 박근혜 정부 시절 위안부 합의 역시 당사자들의 동의를 구하지 않고 진행하여 피해자들에게 다시 한 번 눈물을 쏟게 만들었습니다.

우리 곁에는 과거를 부정하는 세력들에 저항하며 물러서지 않고 목소리를 내온 역사의 산 증인들이 살아 계십니다. 그러나 역사의 산 증인이신 어르신들이 하나둘씩 세상을 떠나며 과거를 증명하는 목소리가 사라지고 있습니다. 조금씩 사라지고 흩어져가는 기억들을 이제 한 곳에 모아 모든 이들이 함께 기억하고, 세대를 넘어 기억을 전달하고 공유할 수 있도록 식민지역사박물관을 지어주려 합니다. 이 기억들이 우리 곁에서 살아 숨 쉴 수 있도록 시민들의 힘이 필요합니다. 민족문제연구소와 시민들이 함께 모여 식민지역사박물관을 건립하여 제대로 된 역사 인식과 함께 역사를 통해 성찰할 수 있는 장을 만들고자 합니다.

역사의 참혹 앞에서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의 이야기가 시민의 귀에 닿도록 만든 것은 피해자의 용기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용기가 더 큰 힘을 얻을 수 있도록 곁에서 도운 것은 한국에서 조직된 시민들의 힘이었습니다. 역사는 시민의 것입니다. 강한 자들이 제멋대로 헝클어놓은 역사를 제대로 바라볼 수 있기 위해, 바라보는 것만으로 그치지 않고 이제 역사 위에서 성찰하기 위해 시민의 힘이 필요합니다. 민족문제연구소는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을 통해 과거사를 청산하고, 새로운 역사로 나아가기 위한 큰 길을 내고 싶습니다. 함께 동참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수, 2017/07/12- 1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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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소와 근현대사기념관은 서울시와 강북구, 신흥무관학교기념사업회, 3·1혁명100주년기념사업회 후원으로 12월 18일 서울 강북문화예술회관에서 ‘항일음악회-다시 부르는 독립의 노래’를 열었다. 좌석(670석)보다 더 많은 시민들이 모여들어 부득이 계단까지 좌석을 마련하여 800여 명이 관람했다. 이번 음악회에는 장사익・노브레인 등 출연진 자신의 히트곡 외에 ‘광복군 아리랑’ ‘안중근 옥중가’ ‘압록강행진곡’ ‘앞으로 행진곡’ ‘목동가’ 등 항일음악 11곡이 연주됐다. ‘망국의 한’ ‘독립의 꿈’ ‘아이들은 자라고’ ‘해방의 노래’ 등 국권 피탈부터 독립까지 한국근현대사의 흐름에 따라 구성된 항일음악회는 지난 8월 연구소가 기획하고 노동은 중앙대 명예교수가 집필한 ????항일음악 330곡집????에 담긴 곡에 대한 해설도 프로그램북에 충실히 담아 교육적인 효과를 높이고자 했다. 장사익과 오단해, 인디밴드 노브레인, 국립전통예술고교 두레소리 합창단, ‘기쁨의 아리랑’ 뮤지컬 공연단, 강북구립여성합창단 등이 출연했으며 특별히 지난해 광복절 경축식에 ‘올드 랭 사인’ 곡조의 애국가를 불러 화제가 된 여성광복군 오희옥 여사(92)가 무대에 올라 ‘안중근 옥중가’ 가사를 낭독해 잔잔한 감동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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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음악회는 신흥무관학교 설립 100주년을 맞아 2011년 11월 개최한 항일음악회(총감독 노동은)에 이어 연구소가 주최한 두 번째 항일음악회다. 앞으로 연구소는 항일음악을 학교와 군대에 보급해 널리 불릴 수 있도록 힘쓸 예정이다. 이 음악회에는 고 노동은 교수의 큰아들인 노관우 씨가 음악감독으로 참여했고 연구소 팟캐스트 ‘역적’ 노기환 MC와 김초롱 MBC 아나운서가 사회를 담당했으며, 송복남・황동욱 회원이 영상 제작, 장이근 회원이 사진 촬영, 손재호 회원이 오희옥 여사의 차량이동을 맡아주었다. 이 자리를 빌어 감사드린다.

• 방학진 기획실장

목, 2018/01/25- 1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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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저는 IDS 만 2천명의 피해자중 한명입니다.

2016년 9월 IDS 김성훈대표가 긴급구속이 되고

그 이후 모집책이 김성훈대표가 100%변제를 해줄것이라며

지난 1년이상 민사 형사 소송을 지연시켜왔습니다.

 

저의 상황을 너무 잘 알고 그동안 너무 신뢰했었던 사람이기에

이 일에 대해 모든것이 사기라는 것을 알게되고

모집책 또한 같은 사기공범이라는 것을 받아들이기에

너무나 힘겨운 하루하루를 보냈습니다.

 

이제 조금 정신을 차려

이 일에 대해 조금이라도 해결하고자

이리 뛰고 저리 뛰고

밤잠을 설쳐가며 너무나 고통스러운 마음을 다스려가며

그렇게 하루하루를 버텼습니다.

 

전액은 아니더라도 단돈 얼마라도 제발 변제를 해주었으면…

피해자들의 돈으로 법무법인 태평양을 선임하여 변호를 받고

구치소 동기인 한재혁과 공모하여 또다른 사기변제안을 만들고

 

 

IDS홀딩스 대위변제자 한 씨는 김성훈 ‘구치소 동기’

http://www.mediaus.co.kr/news/articleView.html?idxno=106792

 

 

그 대위변제자는 피해자들의 피같은 돈으로

경찰 인사 청탁을 하고

 

IDS홀딩스 대위변제자, 경찰 인사 청탁 정황 드러나

http://www.mediaus.co.kr/news/articleView.html?idxno=109452

 

양파껍질같이 하나하나 들어날때마다

너무나 고통스럽습니다.

 

 

 

그런데…

파산이라는 또 다른 커다란 시련이 피해자들의 앞을 가로막아

추운겨울 한파가 뼈속을 파고들고

흘린 눈물이 얼어붙는것같습니다.

 

 

제발… 제발…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민족문제연구소는 인권 평화 미래를 생각하는 올바른 역사행동을 하는 곳이고

이런 훌륭한 곳의 고문변호사를 맡고 계시는 분이니

피해자들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헤아려주시기 바랍니다.

 

수, 2017/12/06- 1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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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당 민주연구원 국립현충원 이장 추진
“친일인사와 함께 모실 수 없다” 반대 거세

▲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대선 예비후보가 25일 오후 서울 용산구 효창공원 내 독립운동열사 7위선열의 사당인 의열사를 찾아 참배하고 있다. (문재인 캠프 제공)2017.3.25/뉴스1

일제강점기 만주에서 일본 관동군 헌병으로 복무하며 독립투사 소탕에 앞장섰던 김창룡(1902~1956)은 대전 국립현충원에 묻혀 있다. 바로 맞은편 묘역에는 백범 김구 선생(1876~1949)의 모친 곽낙원 여사(1858~1939)와 장남 김인(1917~1945)이 잠들어 있다. 친일논란 대상인데다 백범 암살사건의 배후라는 의혹을 받는 인물과 독립투사의 유족이 마주보고 있는 셈이다.

더불어민주당이 2019년 3.1운동 100주년을 앞두고 김구 선생의 묘소를 국립현충원으로 이장한다는 구상을 밝히면서 비슷한 우려가 나온다. 민주당 민주연구원의 김민석 원장은 최근 기자간담회에서 임시정부의 법통을 잇는다는 의미에서 효창공원에 안장된 김구 선생과 윤봉길·이봉창·안중근 열사를 국립현충원으로 이장을 추진한다는 계획을 밝혔다. 문재인 대통령도 2017년 8월15일 광복절에 효창공원을 직접 찾아 참배해 임정 법통을 강조한 바 있다.

민족문제연구소 친일인명사전에 따르면 현재 국립현충원에 안장된 친일인사는 서울에 37명, 대전에 26명이다. 2009년 대통령 소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의 조사결과, 친일반민족 행위자로 규정된 인물 중에는 서울에 7명, 대전에 4명이 묻혔다. 이 때문에 친일인사의 이장을 위해 국립묘지법을 개정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크다.

박한용 민족문제연구소 교육홍보실장은 “여당이 임시정부 주석을 예우하기 위해 고민한다는 건 일리가 있다”면서도 “김창룡을 비롯해 친일인사들이 국립현충원에 남아있는데 그곳에 백범을 모시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냐”고 반문했다.

박 실장은 “역사적폐 청산 차원에서도 친일독재를 반대한 민족인사를 반민족인사와 함께 모신다는 건 적절하지 않다”고 이장 반대의사를 밝혔다.

김구 선생은 생전 자신이 세상을 떠나면 효창공원 독립운동 동지들 곁에 묻어달라는 유훈을 남겼다. 현재 효창공원에는 김구 선생 외에도 항일투쟁 중 순국한 윤봉길(1908~1932), 이봉창(1901~1932), 백정기(1896~1934) 3의사의 묘소와 유해를 찾지못한 안중근 의사(1879~1910)의 가묘도 설치됐다. 이동녕(1869~1940), 조성환(1875~1948), 차이석(1881~1945) 선생 등 임시정부 요인의 묘소도 있다. 이는 모두 김구 선생이 해방 후 직접 조성해 의미가 크다.

이장보다는 현재 효창공원을 성역화하는 게 독립운동가들을 기리는 합당한 예우라는 지적도 있다. 친일인사가 섞여있는 현충원보다 독립투사들만으로 조성된 효창공원이 역사적 성지로서 더욱 상징성이 있다는 것이다. 이승만, 박정희 정권 시절에는 출입이 제한되고 일부 부지가 훼손되는 등 굴곡진 현대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지금 효창공원은 국립묘지가 아닌 사적과 근린공원의 법적 지위로 용산구가 관리 중이다.

친일문제 전문가 정운현씨는 “효창공원은 역사성이 있고 백범기념관도 함께 운영 중이라는 가치도 있다. 백범도 땅속에서 이장을 원치않을 것”이라며 “효창공원을 국립묘지로 승격해 중앙정부 차원에서 예우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nevermind@

<2018-03-01> 뉴스1

☞기사원문: “백범도 친일파와 묻히기 원치 않아”…효창공원 묘소이장 논란

토, 2018/03/03- 0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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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앵커 ▶

오는 8월 29일은 한일합병조약문이 발표된 경술국치일입니다.

이날, 서울 용산에 식민지역사박물관이 개관합니다.

그동안 시민들의 성금으로 개관이 추진됐는데, 식민지 시대 민중들의 생활상을 볼 수 있다고 합니다.

개관에 앞서서 이지수 기자가 미리 다녀왔습니다.

◀ 리포트 ▶

빛바랜 종이에 가족들을 향한 그리움이 한 자 한 자 적혀 있습니다.

“부모님께오서 양 내외가 걱정없이 사시고 아들도 잘 지내며…”

강제징용 피해자인 김외준 씨가 전쟁터에서 부인에게 보낸 마지막 편지입니다.

편지 옆에는 전쟁터에 끌려가 시베리아에 억류됐다가 돌아오지 못한 이규철 씨의 수기가 전시돼 있습니다.

“누구를 위해서 전쟁터로 가야만 하나. 일본을 위해서 죽고싶지 않다…”

벽면 한쪽에는 순사 임명장, 조선총독부 관료 임명장 등 친일파들의 행적도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모두 식민지 시기를 겪었던 민중과 후손들이 수십 년 동안 간직했다가 기증한 물건들입니다.

강제징용 피해자나 항일운동가들의 유족들이 활동하면서 모은 자료는 물론, 일본 시민들이 보내온 것도 적지 않습니다.

[이희자/태평양전쟁피해자 보상추진협의회 대표]
“내가 활동을 하면서 나도 나이가 먹어가잖아요. (기록들이) 재탄생을 하게 돼서 나는 정말 30년의 활동이 허무하지 않았고…”

전시된 물건만 4백여 점, 서고에 보관된 기록물까지 합하면 7만 점 가까이 됩니다.

[김승은/민족문제연구소 자료실장]
“식민지배의 실상과 그 속에 살았던 사람들이 실제로 어떻게 살았는가 거기에는 일상적인 민중의 삶도 있고요…”

식민지역사박물관은 지난 2007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추진하기 시작해 11년 만에 시민 5천여 명의 기증품과 기금 35억 원이 모여 만들어졌습니다.

박물관은 오는 29일부터 일반인들에게 공개될 예정입니다.

MBC뉴스 이지수입니다.

<2018-08-14> MBC

☞기사원문: ‘경술국치’ 기록한다..식민지 역사박물관 개관

※관련기사

☞ 경향신문: 일제강점기 역사박물관, 시민 모금으로 ‘첫 개관’

☞ KBS: “치욕도 역사” 시민이 세운 ‘식민지 박물관’ 첫 공개


식민지역사박물관 개관 이끈 이이화 건립위원장 인터뷰 이 위원장
“식민지 시대 아픈 역사 고스란히 알릴 것…청소년 위한 토론장 돼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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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합뉴스와 인터뷰 하는 이이화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위원장 [촬영 성서호]

 

(파주=연합뉴스) 성서호 기자 = “3·1 운동 때 발표한 독립선언서의 원본을 확보했습니다. 일본 강점기에 강제로 끌려간 이들의 편지나 일기도 식민지역사박물관에서 볼 수 있어요.”

이이화(82)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위원장은 광복절을 맞아 경기도 파주 자택에서 진행한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박물관을 소개하며 설레는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한국사 대중화에 앞장섰다는 평가를 받는 사학자인 이 위원장은 처음 건립위원장 자리를 맡아달라고 했을 때만 해도 고령을 이유로 자리를 고사했지만, 오는 29일 박물관의 정식 개관을 누구보다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

공적 자금의 도움 없이 시민들의 모금과 자료 기증으로 마련된 박물관은 특히, 여러 박물관 중 가장 많은 기증품으로 채워질 예정이다.

이 위원장은 “돈을 주고 사 와도 자료를 못 구하는 마당에 국가 예산도 안 받고 어떻게 꾸릴지 걱정이 컸다”며 “그런데 예상치 못한 호응을 받았고, 여러 곳에서 자료를 희사해 주셨다”고 고마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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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순종의 칙유 [민족문제연구소 제공=연합뉴스]

 

그는 “전시 자료 7만 점 정도를 모았는데 국내외 통틀어 7개 정도밖에 없다는 3·1 운동 독립선언서 원본도 있다”며 “강제 징용된 일본군에서 몸에 두르던 ‘무운장구'(武運長久)라고 적힌 띠는 물론, 가족에게 보내는 편지글 등의 자료도 많이 받았다”고 말했다.

이밖에 식민지역사박물관에는 “한국의 통치권을 예전부터 친하고 믿고 의지하고 우러르던 이웃 나라 대일본 황제 폐하께 양여한다”는 내용의 순종 칙유(勅諭·임금의 말씀을 적은 포고문)와 초대 조선 총독인 데라우치 마사타케의 포고문 등 국치의 아픔을 담은 사료가 전시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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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병합기념 조선사진첩 [민족문제연구소 제공=연합뉴스]

 

나라를 팔고 귀족이 된 조선 고위층들이 1910년 11월 부부동반으로 일본을 관광하던 당시의 흑백사진 등을 담은 ‘병합기념 조선사진첩’이나 식민지 시절 조선인들을 감시·탄압했던 경찰들의 자료도 볼 수 있다.

무엇보다 나라를 빼앗긴 시절 민초들의 이야기를 엿볼 수 있다. 1940년 육군지원병에 끌려갔다가 전쟁터에서 소식이 끊겼던 임용택 씨의 사진부터 1945년 징집된 뒤 관동군 자폭특수대에서 훈련받은 이규철 씨의 육필일기 등은 당시 민중의 고통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이런 자료들은 강제 동원됐던 피해자들의 유족이 직접 기증한 것이다.

이 위원장은 식민지역사박물관의 의의를 해방 후 70년 넘게 계속되고 있는 과거사 청산의 ‘디딤돌’이라고 설명했다.

이 위원장은 “이명박 정부 시절 만든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은 해방 이후 경제 발전상에만 집중했지, 독립운동의 역사를 소홀히 하고 있다”며 “이번에 개관할 박물관은 식민지 시절의 아픔을 똑바로 알릴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우리의 지향점은 과거를 반성하고, 진실을 밝히고 화해하는 것”이라며 “일본과 친일파들이 반성하도록 하고 이후 화해하자는 뜻”이라고 덧붙였다.

초대 박물관장 제안을 손사래 치며 거부한 그는 앞으로 박물관이 ‘살아있는’ 곳이 되길 바랐다. 단순한 전시 공간이 아니라 강의도 듣고, 토론도 하는 학습장의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위원장은 “해방이라고 식민지의 역사가 끝난 것이 아닌 만큼 자꾸 말로만 떠드는 것보다는 국민이, 특히 청소년들이 많이 알게 해야 한다”며 “기본 성격은 박물관이지만, 참신한 방법으로 식민지 역사를 알리기 위해 프로그램을 마련하고 있다”고 말했다.

식민지역사박물관은 경술국치 108주년을 맞은 이달 29일 문을 연다. 2007년 준비위원회 발족 이후 약 11년 만으로, 공적 자금의 도움 없이 순수하게 일반시민 성금과 자료 기증으로 마련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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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8-14> 연합뉴스

☞기사원문: “시민의 힘으로 세운 식민지역사박물관…살아있는 역사 될 것”

수, 2018/08/15- 06: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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