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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조약은 강제로 체결된 불법조약이다! – 헤이그 특사 위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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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조약은 강제로 체결된 불법조약이다! – 헤이그 특사 위임장

익명 (미확인) | 금, 2017/07/28- 1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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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호에 소개할 자료는 1907년 4월 20일 고종이 헤이그 특사에게 준 위임장이라고 알려진 문서이다.
1905년 11월 17일, 대한제국은 일제의 강압으로 체결된 ‘을사조약’으로 실질적인 주권을 잃게 되었다. ‘을사조약’ 체결 소식이 전해지자 전국에서는 의병들이 들불처럼 일어났으며, 나라의 자주 독립을 호소하며 자결하거나 친일 매국노의 처단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거세졌다.
고종은 1907년 6월 15일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제2차 만국평화회의가 개최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국권회복의 염원을 국제사회에 호소하고자 회의 참가를 요청하였다. 또한 프랑스・벨기에 주재공사 민영찬에게 이 문제를 협의하라는 훈령을 내렸고, 러일전쟁 이후 불어학교 교사로 활동하던 마르텔을 비밀리에 베이징에 파견하여 베이징 주재 러시아 공사를 만나 만국평화회의에 대한제국 대표를 초청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결국 네덜란드로부터 초청장을 받은 대한제국은 12번째 초청국으로 만국평화회의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일본은 만국평화회의에 외교권을 상실한 국가가 회의에 참가한 전례가 없다는 이유로 한국 참가를 반대했다. 러시아는 러일전쟁 이후에도 한국 독립에 대한 국제사회의 승인을 얻어내 한국에 대한 영향력을 유지하고자 대한제국을 만국평화회의에 초청하려고 하였으나 결국 일본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한다는 방침을 정하고 대한제국을 초청하는 것을 포기했다.
한편 1905년 9월 고종의 밀사인 이용익이 러시아로 건너가 국내와 비밀접촉을 하면서 만국평화회의를 준비하고 있었다. 국내에서는 상동청년회와 연결되어 이동녕, 이시영, 안창호, 김구 등이 이준과 이상설을 특사로 보내기로 의견을 모아 고종에게 특사 파견을 요청하였다. 이를 받아들여 고종은 이상설, 이준, 이위종 세 명의 특사를 헤이그 평화회의에 파견하였다.

이때 고종이 특사에게 위임장을 전해준 것으로 알려졌는데, 미국 뉴욕에서 발행된 <The Independent> 1907년 8월 22일자(주간, 제3064호), 「A Plea for Korea(By Prince Ye We
Chong)」에 이위종이 쓴 호소문과 그가 소지하고 있던 신임장의 사본 및 번역문이 게재되어 있다. 여기에는 “1907년 4월 20일 한양 경성 경운궁에서 친히 서명하고 옥새를 찍노라”고 적혀 있다. 연구소가 소장한 ‘위임장’은 ????The Independent????에 소개된 것을 해방 이후 복제한 것으로 추정된다.
1907년 6월 25일 헤이그에 도착한 세 특사는 6월 27일자로 서명된 각국 대표에게 보내는 탄원서를 지니고 활동을 개시했다. 이들은 중재재판을 취급하는 만국평화회의 제1분과위원회를 찾아가 한국문제를 다루어 줄 것을 요청하고, 일본을 제외한 40여 개 참가국에게 탄원서를 배포하였으며 영국·미국·프랑스·독일의 대표위원을 만나 한국 독립을 지원해 줄 것을 강력히 호소하였다.
그러나 당시는 일본이 제국주의 열강으로부터 한국에 대한 지배권을 승인 받은 상태였기 때문에 어느 나라도 일본의 반대를 무릅쓰고 한국의 독립을 지원하려 하지 않았다. 일본의 집요한 방해공작과 열강의 냉담한 반응으로 한국독립을 위한 외교활동은 당시 국제관계를 볼 때 성공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결국 특사의 희망과는 달리 만국평화회의는 한국을 철저히 외면했다.
일본은 헤이그특사 파견을 ‘을사조약’ 위반행위로 몰아 7월 22일 고종을 강제 퇴위시켰다. 이준 특사는 현지에서 순국하고 이상설·이위종 두 특사는 망명했다. 그들은 끝내 고국에 돌아오지 못했다.

대한제국특파위원 전 의정부 참찬 이상설, 전 평리원 검사 이준,
전 주러시아공사관 참서관 이위종 위임장

대황제가 칙서를 내리는바 우리나라의 자주독립은 세계 여러 나라가 공인한 것으로 짐이 지난번 여러 나라와 조약을 맺고자 하여 서로 우방으로서 긴밀함을 갖은즉, 이제 세계 여러 나라가 평화를 위하여 한 자리에 모이기에 응당 참석함이 마땅한 것인데 1905년 11월 18일 일본이 우리나라에 대하여 국가 간의 법을 어기고 도리에 어긋난 협박으로 우리의 외교권을 빼앗아 우방과의 외교를 단절케 하였다. 또한 일본의 모욕적인 침략은 이르지 않은 곳이 없을 뿐더러 그 침략의 의도는 인도자의 도리에도 어긋나는 것이다. 짐의 생각이 이에 미치니 참으로 가슴 아픔을 느끼는 바이다. 이에 여기 종2품 전 의정부 참찬 이상설, 전 평리원 검사 이준, 전 주러시아공사관 참서관 이위종을 특파하여 네덜란드 헤이그 평화회의에 가서 본국의 모든 실정을 온 세계에 알리고 우리의 외교권을 다시 찾아 여러 우방과의 외교관계를 원만하게 하도록 바라노라. 짐이 생각건대 특사들의 성품이 충실하고 강직하여 이번 일을 수행하는 데 가장 적임자인 줄 안다.
대한 광무 11년 4월 20일 한양 경성 경운궁에서 친히 서명하고 옥새를 찍노라.

대황제 수결 황제어새

 

∷ 강동민 자료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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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월혁명 60주년 기념 특별전 <잔인한 사월, 위대한 혁명> 개막

 

 

사월혁명 60주년 기념 특별전 〈잔인한 사월, 위대한 혁명〉이 9월 25일 개막하였다. 올해는 역사적인 사월혁명이 일어난 지 60주년 되는 해이다. 이번 전시는 예기치 않았던 코로나-19 상황으로 근현대사기념관이 장기적으로 휴관하여 오랜기간 미루어졌지만 민주혁명의 서막을 알리는 1960년 4월을 기억하기 위하여 가을의 시작과 함께 전시를 개막하였다.
근현대사기념관이 주최하고 민족문제연구소가 주관하는 이번 특별전은 모두 4부로 구성되어 있다. 전시는 4월혁명이 일어나기 전 이승만정부의 독재와 부정부패, 4월혁명의 진행과정, 5·16군사쿠데타로 인한 혁명의 좌절, 그리고 문화예술인들이 민중의 힘으로 독재권력을 무너뜨린 4월혁명을 어떠한 창작활동으로 승화시켰는지 보여주고 있다.
제1부 〈우상의 시대-‘국부’가 된 독재자〉에서는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밀어붙여 1948년 초대대통령으로 선출된 이승만과 자유당 독재정권이 권력을 남용하고 부정부패를 일삼으며 어떻게 이승만을 ‘국부’로 우상화 하였는지 보여준다. 당시 이승만 우상화의 도구가 된 〈대한뉴스〉 영상들과 다양한 사료들은 독재정권을 노골화한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제2부 〈구호로 보는 사월혁명〉은 “학원에 자유를 달라”고 외치던 2·28대구학생의거와 “3·15선거는 불법이다” “정부통령선거 다시 하라”고 외치던 1차 마산의거를 지나 “이승만 정부는 물러가라” 등의 정권타도 구호와 함께 4월혁명의 반독재투쟁을 보여준다. 그리고 4월혁명 이후 “한미경제협정 결사반대”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 만나자 판문점에서” 등 사회변혁 운동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를 연표의 시대순에 따라 보여주고 있다. 또한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소장하고 있는 4월혁명 당시의 현장감 있는 모습을 담은 사진들도 함께 만나 볼 수 있다.
제3부 〈사월 그날, 이후〉에서는 1960년 4월 19일 ‘피의 화요일’이 26일 이승만의 하야로 ‘승리의 화요일’로 바뀐 이후 민중들의 혁명정신을 되살리려 한 변혁의 의지를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7·29총선으로 집권한 민주당이 4월혁명의 이념을 제대로 구현하지 못하자 대두한 혁명세력의 저항과 변혁운동 등이 5·16군사쿠데타 세력의 철저한 탄압으로 ‘미완의 혁명’이 되는 과정을 확인할 수 있다. 유물로는 4월혁명 이후 만들어진 많은 단체들이 어떠한 목소리를 내려하였는지 보여주는 격문이 실물자료로 전시되어 있다.
마지막으로 제4부 〈문학과 예술로 보는 4·19〉에서는 4월혁명이 문학과 예술에 어떠한 역사의식을 불어넣어 주었는지 볼 수 있는 공간이다. 4월혁명이 미완으로 끝나고 혁명정신이 퇴색하는 상황에서 자기반성과 사회에 대한 비판의식을 조지훈, 김수영, 신동엽 등 시인의 노래를 통해 함께 생각할 수 있다. 또한 영화와 대중가요에서 4월혁명 전후 어떠한 변화가 나타났는지를 당시의 음반과 출판물 등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특히 북한에서 남한의 4월혁명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었는지 볼 수 있는 북한자료들도 전시되어 있다.
이번 특별전시는 근현대사기념관 2층 기획전시실에서 11월 15일까지 사전예약을 통해 관람할 수 있으며 VR전시로도 제작 중이어서 10월 말부터 근현대사기념관과 민족문제연구소 홈페이지에서도 만나볼 수 있다. 〈잔인한 사월, 위대한 혁명〉 특별전을 통해 60년 전 앞선 세대가 피흘리며 쟁취하고자 했던 자유, 민주, 평등의 가치가 무엇인지 마음속에 새겨보는 뜻깊은시간이 되기를 바란다.

• 홍정희 근현대사기념관 학예연구원

수, 2020/11/11- 0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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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 스타의 추억 한 토막(1)

임헌영 소장•문학평론가

 

이 글은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기관지 ????기억과 전망???? 43호(2021)에 실린 글로 세 차례에 걸쳐 연재한다. 임헌영 소장은 1974년 ‘문인간첩단 사건’으로 갖은 고초를 겪었고 1979년에는 남민전 사건으로 투옥되기도 했다. 이 글에는 문인간첩단 사건 당시 ‘빙고호텔’(육군보안사 서빙고분실)에서의 끔찍한 고문의 과정, 서대문 귀소에서의 생활, 재판 진행과정, 석방 후 요시찰 인물로 살아야 했던 이야기 등이 담겼다.― 편집자주

 

1. 박정희와 같은 뱀띠의 다른 운명

분단 한국은 별들의 전쟁이래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육군사관학교를 나온 진짜 별들과 5·16쿠데타를 비판하며 민주화와 통일을 염원하다가 투옥당했던 국립 서대문대학(서대문구 현저동의 서울교도소)을 나온 전과자라는 별들의 전쟁 말이다. 교도소에서는 전과 1범을 별 하나, 둘은 투 스타로 불렀는데 원수급인 5성도 적잖으니 아마 별들의 숫자로 보면 국방부의 별보다는 법무부의별들이 훨씬 많을 것이다. 두 별들의 차이는 엄청나게 많으나 가장 중요한 점은 국방부의 별들은 한 번 달면 평생을 보장받는 신분적인 우대로 성우회란 막강한 단체가 있으나, 법무부의 별들은 천차만별인 데다 분파가 많다는 점이다. 

1974년 3월 2일 문인간첩단 사건으로 법정에 선 이호철ㆍ임헌영ㆍ김우종ㆍ장백일ㆍ정을병 씨의 모습(오른쪽부터)

 

군부독재란 바로 이런 다양한 별들을 과잉 배출하는 별을 찍어내는 공장인지라, 그래서 총총 하늘에는 별들도 많고 국민들 가슴엔 근심만 많은 세월이었다. 박정희와 내가 닮은 건 같은 뱀띠라는 건데, 세속적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그의 사주는 정사년(丁巳年) 출생으로 신해월(辛亥月)에다 경신일(庚申日)에 무인시(戊寅時)에 태어난 것으로 소문나있다. 사주에서 흔히 말하듯이 인신사해(寅申巳亥)가 다 들어있는 사맹격(四孟格)으로 고난을 헤치고 야망을 이룰 수 있는 천운이라고들 하는데, 이것까지가 가짜라는 설도 파다하다. 그런데 내 사주에는 그 사맹 중 셋은 갖췄지만 ‘신’이 빠진 채라, 복권 숫자가 앞자리에서는 잘 맞아 돌아가다가 마지막이 틀어져 버린 격이라 천을귀인(天乙貴人)이 2개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게 형충파해(刑沖破害)를 당한다는 풀이다. 결국 내가 발산하는 빛은 매우 강하나 구름이 끼어 있어 짱짱하게 빛을 내기 어렵다는 것이다. 각종 운명철학이나 점을 나는 별로 믿지 않지만 그냥 심심풀이로 해본 소리니 웃어넘기시기 바란다.
그러기에 믿거나 말거나지만, 별들로 따진다면 박정희나 나나 둘 다 투 스타로 동급이었다는 게 내 소견이다. 그가 5·16 때까지 달았던 별은 투 스타였고 그 뒤에 단 건 말짱 헛것이란 뜻이다. 전두환 역시 12·12반란 때는 투 스타였으나 그 뒤 제 멋대로 별을 더 달았으니 박정희의 판박이다. 세계의 모든 쿠데타는 다 권력욕에 불타는 갱단들의 난장판이라 일단 성공하고 나면 자신의 어깨에다 별들의 숫자를 올렸다. 그렇지 않고 쿠데타를 혁명으로 승화시킨 유일한 사례가 가말 압델 나세르로, 그는 거사 때의 대령 그대로 대통령이 되어 제3세계 국제정치사에 회오리를 일으켰다. 20세기 정치인 중 내가 좋아하는 순번에 들어가는 인물이다.
박정희와 전두환이 쿠데타 후에 자기 손으로 갖다 붙이기 이전에는 같은 투 스타였기에 감히 투 스타였던 내가 당당히 그들과 맞장 뜰 수 있는 게 아닌가. 이렇게 농 삼아 지껄이지만 정작 그들의 별과 나의 별은 천문학적으로 그 좌표도가 완전히 달라 내 인생은 아무리 말로 수식을 해도 험난하기만 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여기서는 지면 관계상 초라한 내 인생살이 전체를 다 털어놓을 수는 없기에 두 별들의 사연 중 첫 번째 별을 달게 된 경위만 간략하게 정리해 보려 한다.

 

2. 빙고동 호텔

나에게 첫 스타를 달아준 곳은 ‘빙고동 호텔’이었고 때는 1974년 1월 긴급조치가 갓 발동된 하수상하던 시절이었다. 이때 나와 함께 원 스타를 달았던 동기생으로는 작가 이호철, 정을병, 평론가 김우종과 장백일 5인조로, 세칭 ‘문인 간첩단 사건’ ‘공범’들이다. 이 호텔의 호적명은 육군보안사령부로 군부통치 시절에 스타를 많이 배출했던 남산(중앙정보부)과 남영동(치안본부 대공분실)과 함께 3대 유명 재야 사관학교 중 하나였다. 이 트로이카 명문 중 빙고동 호텔은 일단 입교하기만 하면 팔다리가 부러지거나 어딘가에 탈이 난다고 할 정도로 성한 몸으로는 나오지 못하기로 악명이 자자했다.

이 호텔의 이력서는 찬연하고 그 명칭 또한 화류계 여성처럼 휘황찬란하다. 미 군정청 국방사령부 산하에 설치됐던 정보과(1945.11)가 남조선국방경비대 정보과(1946.1), 육군본부 정보국 특별조사대(1948.11), 방첩대(1949.10)란 명칭을 거쳐 육군본부 직할 특무부대(特務部隊, CIC, 1950.10)로 신분을 바꿨다. 그동안 이 기구가 이승만 독재체제를 위하여 비판세력에게 어떤 만행을 저질렀던가는 구태여 여기서 읊을 필요는 없을 것이다. 사월혁명 후 육군 방첩부대로 개칭(1960.7)됐으나 5·16쿠데타 세력은 육군 보안사령부로 개칭(1968. 9), 이어 육군뿐이 아니라 해공군을 망라하여 국군보안사령부로 확대 개편(1977.9), 시종 박정희 군사정권의 버팀목으로 중앙정보부와 충성 경쟁을 전개한 쌍두마차였다. 그러니 내가 입교했던 1974년은 아직도 ‘육군보안사령부’ 시절이었다.
남산 3호 터널이나 반포대교가 없던 시절이라 서울역 – 삼각지에서 이태원으로 좌회전해서 언덕길을 오르면 그 이태원 입구(지금의 녹사평역. 당시에는 콜트장군 동상이 서있었다), 그 부근에서 우회전하여 내리막길(지금의 반포대교길, 초라한 도로)을 달리노라면 좌우가 다 미군부대 철조망만 있었다. 길은 좁고 왕래 차는 거의 없었다. 지금의 크라운 호텔을 지나면 이내 반포대교로 이어지는데, 그 직전에 동작대교로 빠지는 오른쪽 길로 들어서면 이내 왼쪽으로 약간 경사진 곳에 삼엄한 검문대가 나타난다. 지금은 민주기행 코스로 공개되어 있지만 그땐 그 장소 자체가 국가기밀이어서 그냥 ‘빙고동 호텔’이라고 불렀다.
1974년은 정초부터 어수선했다. 1월 7일 ‘문인 61인 개헌지지 성명’(유신헌법 철폐)이 발표되자 재빠르게 이튿날 1.8긴급조치가 선포되더니, 10일에는 관할 경찰서에서 우리 집을 다녀갔고 이틀 후 또 방문, 그 뒤 다시 전화로 꼬치꼬치 캐물었다.
이미 이호철은 연행당했다는 소식이고, 함석헌 천관우 안병무 문동환 김동길 법정 계훈제 제씨를 연행, 심문 중이며, 장준하 백기완은 긴급조치 1호위반으로 구속했다는 흉흉한 때였다. 보안사에서 다녀갔다기에 일단 몇일간 피신했다가 그럴 필요가 없다고 판단하곤 귀가, 17일 밤에 아주 신사적으로 연행됐다. 그들은 항상 한 30분이면 끝난다고 하지만 그걸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나를 가운데 앉힌 채 양쪽에서 조이면서 검은 지프차는 퇴계로의 모 호텔(현 세종호텔 맞은 편쯤)에 들렸다. 으슥한 방으로 들어가자 마왕이라도 나올 듯한 어두컴컴하고 큰 방 입구에 책상과 걸상이 있는데 앉으라고 강박했다. 잠시 후 내가 태어난 뒤 처음 본 가장 덩치가 큰 중후한, <쿠오바디스>의 우루서스 같은 남성이 내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미남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추남도 아닌 이 거대한 존재 앞에서 나는 왜 그리도 초라하게 느껴졌던 걸까. 아무리 뜯어봐도 우리와 같은 피를 가진 혈통 속에서도 저런 골조의 인간이 있었던가를 의심케 하는 모양새다. 나는 그를 바라보는 것만으로 그냥 얼어붙었다. 반나치 영화에서 레지스탕스들이 잡혀가면 첫 신에서 비슷한 위협적인 장면을 보여줬던 기억이 떠올랐다. 우선 덩치에서 아무리 대담한 레지스탕스도 야코가 팍 죽어버린다. 뭐라 한 미디 묻자 마음에 안 들면 마치 기중기가 작은 바위를 들어 팽개치듯이 던져버리는 장면. 그런데 그는 아무 말도 않고 그냥 나를 한참 동안 응시했다. 바로 마주보는 것이 아니라 고개를 약간 숙인 채 눈을 치켜뜨고는 꼬나보기에 나는 점점 더 얼어붙었다. 그렇게 아마 한 10분정도 지나자 “데려 가!”라고 딱 한 마디를 천둥처럼 울리게 내뱉었다. 그러자 나를 연행해 왔던 장년 신사들은 어디론가 사라져버렸고, 대학생처럼 보이는 청년 사병들이 “예” 하더니 나를 양쪽에서 옥죄며 방을 나섰다. 그 뒤를 몇이서 따르며 “본대로 간다, 본대로 간다” 하면서 신이 났다. 겁주기의 제1단계였고, 본대란 육군보안사령부 대공처 심문소, 속칭 ‘빙고동 호텔’이었다.

 

재일동포 잡지 한양 1962년 6월호

 

1층 어느 방, 카펫이 안 깔린 맨바닥에다 벽은 머리를 쳐다 박아도 상처 나지 않도록 특수장치를 했으며, 간이침대만한 쪽에 있고, 화장실은 복도 밖에 있었다. 허리띠부터 소지품 전부를 압수, 의학박사가 간단한 건강진단(얼마나 때려도 괜찮은지를 검토) 등등을 마치고는 인정심문이 끝나면 바로 고문이 시작된다. ‘네 죄를 네가 알렷다’라는 식이다. 무조건 털어놓으라면서 매질이다. 뭘 털어 놓으라는지도 모른 채 비명 지르기에 혼비백산할 즈음에야 의자에 앉으라더니 그간 살아온 이야기를 다 쓰라는 명령이다. 바로 라이프 스토리다. A4 용지로 한 10매 정도로 얽어서 건네주면 그걸 대충 읽고는 엉터리라며 확 찢어버리고는 더 자세히 쓰라면서 그제서야 큰 인심이라도 쓰듯이 일본 여행 간 적 없느냐, 그걸 자세히 써 넣으라고 일러준다. 그 힌트를 받고나자 아, 바로 재일동포들이 내는 월간 종합 교양지 <한양(漢陽)>을 트집 잡으려는구나 하고 뜬구름을 잡고는 얼핏 통박을 굴려보니 그거라면 자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유신통치 독재체제라 한들 죄가 될 것 같지 않았다.
1962년에 창간한 이 잡지는 재일동포들이 주축으로 내는 것으로 그동안 한국 내 유명 문사들(박종화 백낙준 백철 이해랑 모윤숙 김동리 조연현 정비석 조경희 유주현 등)이 거의 망라된 필진이 참여했던 데다 한국 보급 총책으로 박정희와 개인적으로 아주 친숙한 구상 시인이 맡았던 터라 어떤 명분으로도 나 같은 피라미가 얽혀들 것 같지는 않았다. 국회도서관에도 비치될 정도로 전혀 불법이 아니었다. 내 라이프 스토리는 무려 20매로 늘어났으나 그들은 짜증을 내며 찢어 쓰레기통에 처박으며, “이 새끼 안 되겠구먼. 군복으로 갈아 입혀!” 하더니 진짜 그런다. 매질의 예고편이었다. 가끔은 “이 새끼 엘리베이터 태워야 하나”라고도 해서 뭔 뜻인지 몰랐는데, 친절하게 설명도 해준다. 나중 들은 바로는 엘리베이터에 태워서 땅 밑 몇 백 미터로 하강시켜 죽여 시신도 없애버린다는 위협이었다. 실제로 죽이진 않고 그냥 속임수로 땅 밑으로 깊이깊이 내려가는 것처럼 느끼게 해서 어느 지점에서는 문이 열리면서 갑자기 고문 담당자들이 몰려들어 매타작을 하고는 다시 집어넣어 내려가다 보면 또 문이 열려 다른 식의 고문을 행하는 것으로 빙고동 호텔에서 가장 끔찍한 고문으로 자랑하는 메뉴였다. 실은 몇 백 미터를 내려가는 게 아니라 엘리베이터의 조작으로 그런착각을 일으키게 한다는 것이었다.
우리 사건 총책을 맡은 ‘강 전무’(한 사건 때마다 그 성과 직함이 바뀐다. 5공 때 민정당 국회의원 이상재)는 이 방 저 방 다니며 고문을 독려했다. 여러 고통 중 바닥에 꿇어앉힌 채 날카로운 구둣발을 옆 날로 세워 바로 무릎 위를 세차게 걷어차는 것인데, 이미 숙달된 그 발길질은 치명적이라 차라리 매를 맞는 게 훨씬 낫다고 할 정도로 며칠간 절뚝거렸다. 젊었을 땐 몰랐는데 늙어가면서 그 부분은 지금도 흐리거나 비가 내리면 시큰거린다. 뺨 때리기는 예사고 몸통 뻗기, 꿇어앉히기, 팬츠 차림 등등은 그들에게 오락이었다. 고약한 자는 아예 발가벗겨 세워두곤 나체를 감상하는데 내 풀죽은 남성 심볼이 너무나 부끄러웠다. 심문할 땐 어디선가 희미하게, 그러나 분명히 알아차릴 수 있도록 ‘아아아아’ 하는 신음소리가 들렸다.
‘당신도 저럴 수 있다’는 음향 효과를 배경에 깔고 심문을 진행하는 기법이었다. 오륙 명이 한 조가 되어 그 중 한 명은 내 맞은편 의자에 앉고, 나머지는 나를 병풍처럼 둘러싼 채 심문자의 말을 큰소리로 반복하거나 윽박지르고 나머지는 “이 새끼가 아직도 정신 못 차리는군!”이라든가 “뭐 이런 놈이 다 있어!”라는 추임새를 수시로 넣어서 단 한 순간도 내가 말할 틈새를 주지 않고 “….했지!?”라고 다그치면 “예”란 대답만 나오도록 유도했다. 그렇게 한참동안 매타작을 하고는 지금까지 말했던 그대로 적으라며 백지와 볼펜을 주고는 사라진 자리에 대학생 징집자들로 이뤄진 사병들이 감시하는 가운데서 나는 손목이 시릴 정도로 ‘대하소설’(내 자서전) 집필을 몇 번이고 고쳐 썼다. 심문과 고문이 거듭될수록 점점 길어져 100매 전후를 넘나들었다.

 

육군보안사 서빙고분실

 

요지는 ‘북괴의 간첩’들이 내는 잡지인 <한양>지에 글을 써서 원고료를 받았고, 일본 여행 중 그 잡지의 발행인이나 편집인으로부터 대접과 선물을 받았으며, 그들에게 국가기밀(원고료가 너무 싸다, 잡지마다 고료 액수가 다르다, 한국 문인들의 근황 등등)을 누설했으니 우리도 ‘간첩’이라는 주장이었다. 그들이 북한 공작원이라는 가정 아래서 엮어낸 데다 그들이 간첩임을 우리가 알고서도 그런 행위를 저질렀다는 논리였다. 세상에! ‘나 간첩이요’라고 하는 경우가 어디 있으며, 그런말을 않는데도 그들이 간첩임을 무슨 재주로 우리가 알 수 있단 말인가. 나중에 보니 개헌서명을 한 이호철과 나는 간첩이고 나머지 셋은 그냥 반공법 위반으로 휘몰아갔다. 징집당해온 근무병들은 옆에서 거의 지켜봤기에 요원들이 자리를 비운 사이에 “망해라!”라고 소리 지르며 노골적으로 나를 동정하면서 필요한 것 있으면 연락해 줄 터니 부탁하라고 동정어린 표정을 지었다. 고마운 한편 이 젊은 것들도 앞잡이가 되었나 하는 의구심이 솟아 뜨악했는데, 며칠 간 지내면서 보니 그게 진심이었다. 어느 수사관은 지나다가 들러 천장의 텔레비전과 녹음장치를 가리키며 조심하란 몸짓과 함께 종이에다 “반공법, 문제가 많다”고 써서 보여주곤 잘게 종이를 찢어 휴지통에 버리곤 했다. 나중 그는 자기 아내에게 안동사범학교 출신 친구가 있어 여러 이야기를 들었다고 살갑게 대해 줬다. 이쯤 되니 곧 풀려나겠구나 낙관했는데 며칠 사이에 슬그머니 분위기가 얼어붙더니 그간 정들었던 사법경찰관이 바뀌었다.

 

3. 분단 한국과 서독, 그리고 타이완

“젊은 사람이 매로 다스렸으면 이제 늙은이가 슬슬 엮어서 징역을 보내야지”라며 본격적인 서류작성에 들어갔다. 그런데 뭔가 뜻대로 안되자 사법경찰관이 또 바뀌어 무척 경직된 분위기로 표변하기에 아하, 기어이 징역을 보낼 작정이구나 싶었다. 왜 이렇게 변했을까. 나중에 들은 이야기를 종합해 보면 각료회의에서 문공부장관(윤주영, 당시의 명칭)이 자신에게 사전 통보도 없이 군 관련 기관에서 문인들을 연행해 간 사실을 문제시하여 풀릴 듯 했지만 보안사는 이를 기정사실화하려고 확실한 범죄로 몰아갔으며, 여기에다 예술단체 모 간부(시인)가 은근히 이를 지지해 줬고, 정치권 역시 민주화운동을 억압코자 삼엄한 분위기를 조성할 필요가 있었던 터라 3박자가 잘 맞아 떨어져 버렸다는 것이었다. 대단히 유명한 모 여류문인이 육영수에게 은근히 이 사건의 부당성을 진언하자 도리어 확실한 증거가 있다는 반론만 강조하더라는 뒷이야기도 있다. 보안사는 이 심문 및 재판 기간 중 가족들의 대사회적인 구원활동을 막고자 계속 다방에 다섯 구속자의 아내를 불러모아 발을 묶어두곤 했음을 나중에서야 알게 되었다.
날이 갈수록 이제 고문자들이나 심문자들과도 말문이 터져서 온갖 이야기도 나눌 처지가 되었다. 필시 그들 자신도 이 간첩 조작이 무리임을 알았기 때문에 나사를 느슨하게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심문관 중 한 무표정한 분은 월남한 진짜 간첩 출신으로 눈빛이 매섭고 과묵하면서도 어딘가 공포가 느껴졌는데, 한쪽 손 무지가 뭉그러져 있었다. 나중 알게 된 바로는 체포당해 고문을 받다가 그렇게 된 것이라 했다. 그 사실을 알고부터는 왠지 연민의 정이 갔다. 어느 눈이 쌓인 날, 한 호의적인 심문관이 나에게 답답하니 잠시 시원한 바람이나 쏘이라며 사병에게 건물 옆 뜰로 산책을 시켜주게 했다. 마침 거기에 바로 그 월남 간첩이 우두망찰 쪼그리고 앉아 담배를 피우며 연기를 하염없이 허공으로 날리고 있었다. 나는 그 순간 그의 표정을 잊을 수가 없다. 그 허망함! 그는 대체 무슨 생각을 할까? 그의 착잡한 심경과 뇌리의 흐름에는 어떤 회한이 서려 있을까. 북녘의 고향과 부모와 어렸을 적의 동무들, 남녘에 와서 얻게 된 처자식들, 자신이 믿었던 ‘인민공화국의 이상’과 남녘의 풍요로운 ‘미제의 식민지로서의 미끼인 달콤한 물질적인 유혹의 삶’의 괴리가 주는 번민, 민족, 역사, 진리, 정의, 그리고 국가, 대체 그런 게 뭐란 말인가. 그는 나에게 가끔씩 “이 사람이!”라는 협박성 말을 내뱉으며 눈을 부라렸지만 눈 덮인 땅에 쪼그
리고 앉아 담배 연기를 뿜어내는 그 순간을 보고서 나보다 더 처량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그나 나나 다 강대국에 빌붙어 자기 국민을 괴롭히는 독재세력들 때문에 이런 고통을 당한 게 아닌가 하는 동병상련 같은 것이었다. 이런 나의 속셈을 그도 읽었는지 그 뒤부터 나를 보는 그의 시선도 약간 달라진 듯 했다. 기계론적으로 적용하는 잣대인 전향자 운운이나, 왜 살아남아 그런 반동적인 행위를 저지르면서까지 치욕스럽게 지내느냐, 어서 자살이라도 해라, 라는 식의 당위론적인 테제만이 정당할까. 물론 이런 내 생각은 나중 두 번째 별을 달고 징역을 살았던 대구교도소의 비전향 장기수들의 고통 앞에서는 여지없이 허물어졌지만 적어도 빙고동 호텔의 눈 덮인 뜰에서만은 잠시 보살처럼 내 마음이 너그러워졌다.
홀연히 엔도 슈사쿠의 가톨릭 순교를 다룬 20세기 최고의 걸작 <침묵>(1966)이 떠올랐다. 원제는 <양지의 향기(日向の匂い)>였으나 편집자의 제안으로 <침묵>이 되었다. 일본에서 기독교 탄압에 대한 잔혹성은 가히 세계 최악이었다. 우리나라가 기독교도에게 자행했던 고문의 야만성은 일본에 비하면 양반이었다. 야마 하이리 고문(山入拷問)은 화산인 운젠(雲仙) 온천에 데려가 뜨거운 물 퍼붓기, 뜨거운 바위 위에 세워두기, 입 막고 열탕에 처박기 등이었고, 아나츠리(穴吊り)는 볏짚으로 몸을 꽁꽁 묶어 거꾸로 매달아 머리를 땅구덩이에다 넣어 귀에다 바늘구멍만한 상처를 내어 출혈하도록 해서 며칠 동안 그 고통을 느끼도록 했다. 피가 똑똑 덜어지는 소릴 들으며 서서히 죽도록 하는 것이다. 파도가 들이치는 해변의 기둥에 매달아 그대로 숨이 멎을 때까지 두기도 했다. 그 고통을 못 이겨 배교하겠다면 말로만 되는 게 아니라 예수의 십자가상을 새긴 동판을 더러운 발로 밟고 지나가도록 하는 후미에(踏絵)를 시켰다. 일본 농부들은 그런 고통의 고문 중에 죽어갔고 살아남자면 후미에를 여러 사람이 보는 앞에서 감행해야만 되었다.
서양 선교사들은 이런 고문은 이겨낼 수 있었으나 자신을 따랐던 신자 농부들을 바로 눈앞에서 살해하는 걸 차마 견딜 수 없었다. 버젓이 후미에를 했건만 하나씩 죽이기에 항의하자 관리들은 이 농부를 살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오로지 선교사인 당신이 직접 후미에를 하는 것밖에 없다고 윽박질렀다. 차라리 자신을 얼른 죽여 달라고 했으나 그럴 수 없다, 반드시 후미에를 해야만 한다는 강박이었다. 자신의 고통 때문이 아니라 신도들의 생명을 구하자면 결국 배교할 수밖에 달리 길이 없다. 그런 고뇌의 순간에 하나님은 침묵만 하고 있다. 바로 그 순간, “고난의 순간에 하나님은 어디 계신가?”라는 자문 앞에서 그는 예수의 음성을 듣는다.

 

밟아도 좋다. 너 앞의 그 발의 아픔을, 내가 제일 잘 알고 있다. 그 아픔을 알기 때문에 내가 이 세상
에 태어나서, 십자가를 지게 되었다(踏むがよい。お前のその足の痛(いた)みを、私がいちばん
よく知っている。その痛みを分かつために私はこの世に生まれ、十字架を背(せお)ったの
だから, Trample! Trample! It is to be trampled on by you that I am here.)

 

이런 환청도 들렸다. “나는 침묵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너와 함께 괴로워하고 있다. / 약한 것이 강한 것보다 더 고통스럽다고, 누가 말했던가(私は沈黙していたのではない。お前たちと共に苦しんでいたのだ. ” “弱いものが強いものよりも苦しまなかったと、誰が言えるのか?)” 이래서 주인공 로드리고는 후미에를 해서 농부들을 살려냈고 자신도 생명을 부지했다. 그러나 섬나라 관료들의 잔혹성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로드리고로 하여금 순교로 죽은 한 농민의 아내에게 장가를 들게 하여, 일본을 위해 서양문물을 번역, 소개하도록 강박했다. 그의 사생활 일체는 감시 하에서 십자가를 상징하는 어떤 것도 가까이에 두지 못하게 막았다. 그러다가 후배 선교사들이 오면 그들을 배교시키도록 설득작전에 나섰다.

기독교 신자도 아닌 내가 이 소설을 중시한 것은 인간의 신념과 현실적인 괴리를 어떻게 하면 조화롭게 병립시킬 수 있을까 라는 인간존재의 근본을 추구하기 위해서였다. 일본은 이런 잔혹성을 바탕 삼아 제국주의로 중무장하여 우리나라를 침탈했다. 식민지시기에 독립운동가들에게 가했던 잔혹성의 뿌리는 섬나라의 편협한 ‘부시도(武士道)’이며, 그 연장선이 기독교도에 대한 탄압이었고, 그 유산이 점령지에 내린 탄압이었음을 나는 느꼈다. 특히 공산주의자들에게 가했던 그들의 악랄한 전향 강요는 이 기독교 배교시키기와 너무나 닮았다. 이걸 그대로 전수받은 게 8·15 이후 친일세력들이 지배했던 권력의 대행자였던 정보기관이었음을 연상하는 데는 통박을 그리 많이 굴리지 않아도 될 것이다.
전향자의 운명은 아마 두꺼운 책으로도 모자랄 지경일 만큼 한국 근현대사의 비화로 흥미진진하다. 멀리 갈 것도 없이 1970년대에 민주화운동권에 투신했던 왕년의 열렬한 투사 출신들 중 고무신을 거꾸로 신은 인사들의 행적만 추적해도 어디 소설 <침묵>에 그칠손가.
북에서 월남해 오면 반드시 북한 비난 대중강연에 동원하여 반공캠페인을 벌리기 일쑤다. 꼭 그 길밖에 없을까? 아니다. 동독의 작가 우베 욘존은 작품 출간이 불가능한 데다 직장도 보장 못 받자 서독으로 갔다. 기자회견에서 그는 끝내 ‘망명‘이란 단어를 피하고 “10년 동안만 사용했던 국적을 반환하고 서베를린 당해지 관리의 허가를 얻어 이사”했다고 주장했다.
<순애보>의 작가 박계주는 장편 <여수(旅愁)>(1961)에서 동베를린에서 서베를린으로의 피난민을 어떻게 다루는가를 자상하게 소개해준다. 위생검사 후 심문 내용은 성명과 연령 및 가족, 탈출하게 된 동기, 동독에서의 직업과 생활상태, 희망하는 직업과 살고 싶은 지역 등으로 5~10분이면 끝난다는 것이었다. 바로 수용소로 보내져 비행기 등 교통사정과 직장 알선 때문에 7~8일간만 기다리면 이주절차가 완료된다. 스파이가 많을 텐데 너무 관대한 것이 아니냐고 반문하자 서독은 이미 동독의 문제인물 리스트를 장악하고 있기에 문제없으며, 설사 놓치더라도 언제나 적발할 수 있다는 것이다. 간첩이나 국가변란죄의 최고형은 5년이라며 서독 검사는 주인공 춘우에게 반문했다.

 

“귀국에서는 얼맙니까.”
“사형입니다.”
이번에는 검찰간부가 깜짝 놀랐다.
“왜 사형합니까.”
“국가를 전복시키는 건데 그에서 더 큰 죄가 어디 있습니까.”
“그 사람은 당신네 나라 백성이 아닙니까. 우리는 그러한 죄수를 감옥에서 그냥 가두어 두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6년간 사랑으로서 감화시키는 운동을 하고 있습니다.”(박계주, <여수>)

 

중국도 마찬가지다. 타이완 출신 여류작가 천뤄시(陳若曦)는 미국 유학 중 캐나다로 이주했다가 베이징으로 가서(1966) 잘 살다가 다시 타이완(1973)으로 돌아왔다. 관계당국은 그녀의 ‘망명’을 환영했으나 이 작가는 끝내 그 단어를 피하며, 자신은 ‘반공 의거’가 아닌 ‘중국인의 증언자’라고 주장했다.
차이는 이것만이 아니었다. 1970년대 이전까지 일본은 여행을 다녀오기에 제일 위험한 지역이었고, 특히 유학생에게는 더욱 위태로웠다. 조총련이 워낙 센 지역이라 미처 알지도 못 한 채 걸려들기 십상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장학금제도가 조총련계에 많아서 함부로 받으면 바로 ‘간첩’으로 일생을 망치기도 했다. 그런데 타이완은 한국과 달랐다. 그들은 중국계 장학금을 받으면 관계기관이 소환하여 그 사실 여부를 확인한 후 더 이상 말려들지만 말고 열심히 학업에 전념하도록 격려해 주었다고 한다.
빙고동 호텔에 대해서는 김병진의 <보안사>(소나무, 1988)가 실감나게 그 전모를 소개하고 있다. 그는 재일동포 유학생으로 보안사에 연행, 고문 유경험자로 거기서 2년간 근무 후 사직하고 이 책을 통해 그 사실을 폭로했다. 이곳이 재일동포 모국 유학생 간첩 사건을 주로 다룬 곳임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으며, 그 대표적인 예가 서승-서준식 형제들이다. (다음 호에 계속)

화, 2021/03/02-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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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

신흥무관학교기념사업회 주최 한국광복군 창설 80주년 기념

강화 드라이브스루 답사

연구소가 사무국을 맡고 있는 신흥무관학교기념사업회가 주최하고, 연구소와 서울시의 후원으로 9월 26일(토), 10월 24일(토), 25일(일) 총 세 차례의 ‘한국광복군 창설 80주년 기념답사’를 강화도에서 진행했다. 이번 답사는 올해 코로나19로 인해 답사 장소와 일정이 몇 차례 변경된 끝에 드라이브스루 답사라는 방식으로 실시하게 되었다. 당초 올해 신흥무관학교기념사업회의 답사는 한국광복군 창설 80주년을 맞아 정미의병(강화), 신흥무관학교(안동), 조선의용대(밀양)를 차례로 살펴보며 한국광복군의 원류를 되돌아보고자 했는데 코로나19로 강화도에서만 답사를 진행하게 되어 아쉬운 마음이 컸다.
드라이브스루 답사는 참석자 각자가 자기 차를 타고 답사지로 이동하며 진행했다. 방역 수칙에 따라 참가자 전원이 항상 마스크를 썼고 각 차량에는 3명 이상 타지 않도록 제한을 뒀으며, 식사도 흩어져 도시락을 먹었다. 3차례의 답사에는 총 67명(1차 17명, 2차 18명, 3차 32명)의 참가자와 스태프 3명(방학진 기획실장, 신다희 총무 부팀장, 김무성 회원사업 부팀장)이 참여했다. 답사 안내는 1차 답사에 황평우 한국문화유산정책연구소 소장이, 2차 답사에 한정우 산마을고등학교 선생님이, 3차에 방학진 기획실장이 맡아주었다.

 


답사는 강화 만남의 광장에 집결하는 것으로 시작해서 통제영학당 옛터에서 성공회 강화성당, 합일초, 강화중앙교회를 차례대로 보고, 마지막으로 연미정으로 이동하며 진행되었다.
첫 답사지인 통제영학당은 대한제국에서 세운 최초의 근대식 해군사관학교이다. 이동 중 보수 공사 중인 진해루 외벽에 그려진 강화의 역사를 표현한 그림 앞에서 강화의 지리와 역사에 대해 듣고, 강화도에서 벌어진 수차례의 민간인 학살에 대한 이야기도 나누었다. 2009년 해군참모총장이 세운 표지석 외엔 아무것도 없는 공터인 통제영학당 옛 터에서 대한민국 국군의 뿌리가 어디인지 생각해 볼 수 있었다.
성공회 강화성당으로 이동하여 성당 앞 공원에서 답사단은 흩어져 도시락으로 점심 식사를 했다. 식사 후에 구한말에 상대적으로 늦게 들어온 성공회와 감리교회가 강화도 민중들에게 다가가기 위해 기울인 노력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한옥 성당인 성공회 강화성당은 이런 답사가 아니더라도 한번쯤 볼 만한 건축물이다. 합일초등학교에서 백범 김구의 친필을 보며 백범 김구가 청년 시절 강화도에서 잠시 머물렀던 사연을 듣고 근처 강화중앙교회로 이동했다.
강화중앙교회(잠두교회)는 강화 최초 교회로 잠두의숙(훗날 합일초등학교)을 설립했다. 성공회와 감리교 등 기독교로 인해 근대교육을 받은 강화의 민중들은 3·1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된다. 민중교육에 힘썼던 초기 기독교를 보며, 변질된 현재의 한국 기독교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었다.
3차 답사에서는 김구 선생이 1900년 강화도에서 숨어 지내는 동안 서당을 열어 강화 아이들을 가르쳤던 고택 대명헌에 방문해 이 집의 운영자인 최성숙 님의 배려로 관람했다. 연미정으로 이동하기 전에 한국광복군 설립 80주년의 의미, 내년 신흥무관한교 설립 110주년에 대해 설명하며, 국군의 날과 의병의 날 등 기념일을 변경해야 하는 필요성에 대해 이야기했다. 마지막 답사지인 연미정에 오른 답사단은 바로 눈앞에 보이는 북한 땅을 보며 저렇게 가까운 곳에 가지 못하는 분단 현실과, 남북 간의 교류가 정체되고 있는 상황에 대한 안타까움을 느꼈다.
마치 나들이하듯 참여한 답사단은 강화도 지역 역사에 대한 설명을 들으며 무척이나 만족스러워했다. 코로나19로 인해 적은 인원수로 최대한 대면 접촉을 줄이려고 노력한 답사였는데, 참가자들이 적극적인 자세로 임해주었고, 반응도 뜨거웠다. 참가자들의 뜨거운 반응을 보며 코로나19라는 어려운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드라이브스루 방식의 소규모 답사를 앞으로 계속준비하고자 한다.

• 기획실 회원사업 부팀장 김무성

수, 2020/12/02- 2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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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 비망록 60]

역대 조선총독과 정무총감이 잇달아 벽제관을 시찰한 까닭은?
사쿠라와 단풍나무 동산으로 구축한 그들만의 성지

이순우 책임연구원

 

<승정원일기> 고종 40년(1903년) 10월 3일(양력 11월 21일) 기사에는 평양이궁(平壤離宮)인 풍경궁(豐慶宮)에 어진과 예진을 봉안하는 일을 수행하기 위해 현지로 떠나려던 의정 이근명(議政 李根命, 1840~1916)에게 고종황제가 하문하는 내용 가운데 다음과 같은 대화 한 토막이 수록되어 있다.

 

…… 이어 전교하기를,
“어느 곳으로 길을 잡았는가?” 하니, 이근명이 가로되, “처음에는 수로(水路)로 가기로 계획하였습니다만, 감동당상 민영철(監董堂上 閔泳喆)이 전보한 바에 근일(近日) 수로에 풍랑이 잦아 육행(陸行)을 권하기에 육로로 가려고 하나이다.” 하였다.
…… 상(上)이 이르기를, “며칠간의 노정(路程)인가?” 하니, 이근명이 가로되, “550리인데, 하루에 7, 80리를 가면 7, 8일이면 가능할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갑오년(1894년) 이전에 칙사(勅使)나 동지사(冬至使)가 지날 때는 도로가 광탄(廣坦)하고 점막(店幕)도 즐비했는데, 지금은 틀림없이 많이 황폐해졌을 것이니라. ” 하니, 이근명이 가로되, “그렇습니다.” 하였다

 

사진엽서에 남아 있는 벽제관의 옛 모습이다. 아래의 설명문에는 “임진왜란 때 코바야카와 타카카게가 명나라군대를 격파했던 곳”이라고 하여 이 공간의 의미를 전적으로 자신들의 전승지라는 점과 결부시켜놓고있다. 언덕 위에 보이는 것이 ‘괘갑수(掛甲樹)’라고 전해지는 느티나무이다.(민족문제연구소 소장자료)

 

(왼쪽) 벽제관의 외대문에 달려 있는 ‘벽제관(碧蹄館)’ 편액의 모습이다. 이 사진의 아래에는 성종 때 사신으로 왔던 동월(董越, 1430-1502)이 쓴 글씨라고 전한다는 설명이 적혀 있다. 이 편액의 잔편은 현재 일산호수공원에 있는 ‘고양600년기념전시관’에 보관되어 있다. (경전하이킹코스 제6집, <벽제관>, 1938)
(오른쪽) 여러 차례에 걸친 ‘보존공사’로 인해 오히려 원형을 상실해가고 있는 벽제관의 모습이다. 이곳은 원래 온돌 구조의 방바닥과 벽면이 가리고 있는 형태였으나 느닷없이 마루 모양으로 변형되었고, 더구나 앞뜰과 주변 일대는 사쿠라와 단풍나무가 점령한 상태로 바뀌어 있다. (경전하이킹코스 제6집,
<벽제관>, 1938)

 

이러한 대화는 1894년 청일전쟁과 더불어 전통적인 외교관계가 단절된 이후 불과 10여 년 사이에 두 나라의 사신들이 오가던 곳이 옛 모습을 크게 상실하였다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더구나 선박이나 철도와 같은 근대적인 교통수단의 등장으로 인해 이러한 옛길의 이용빈도가 두드러지게 저하된 상황을 엿볼 수 있다.
흔히 사행로(使行路) 또는 연행로(燕行路)라고 불렀던 이 길은 서울에서 의주까지 1,050리(里), 다시 의주에서 북경까지 2,061리, 도합 3,111리에 왕복으로는 6,222리나 되는 머나먼 행로이다. 홍대용(洪大容, 1731~1783)의 문집 <담헌서(湛軒書)> 「외집(外集)」 권10에 수록된 ‘연기(燕記)’에는 대략 다음과 같은 노정(路程)이 정리되어 있다.

 

한성(漢城) → 고양 벽제관(高陽 碧蹄館, 40리) → 파주 파평관(坡州 坡平館, 40리) → 장단 임단관(長湍 臨湍館, 30리) → 송도 태평관(松都 太平館, 45리) → 금천 금릉관(金川金陵館, 70리) → 평산 동양관(平山 東陽館, 30리) → 총수참 보산관(葱秀站 寶山館, 30리) → 서흥 용천관(瑞興 龍泉館, 50리) →검수참 봉양관(劒水站 鳳陽館, 40리) → 봉산동선관(鳳山 洞仙館, 30리) → 황주 제안관(黃州 齊安館, 40리) → 중화 생양관(中和 生陽館, 50리) → 평양 대동관(平壤 大同館, 50리) → 순안 안정관(順安 安定館, 50리) → 숙천 숙녕관(肅川 肅寧館, 60리) → 안주 안흥관(安州 安興館, 60리) → 가산 가평관(嘉山 嘉平館, 50리) → 납청정(納淸亭, 25리) → 정주 신안관(定州 新安館, 45리) → 곽산운흥관(郭山 雲興館, 30리) → 선천 임반관(宣川 林畔館, 40리) → 철산 차련관(鐵山 車 輦館, 40리) → 용천 양책관(龍川 良策館, 30리) → 소곶참 의순관(所串站 義順館, 40리) → 의주 용만관(義州 龍灣館, 35리) → [이하 중국 행로는 생략]

 

여기에서 보듯이 이 머나먼 행로 가운데 서울 도성에서 벗어난 첫 번째 기착지이자 되돌아오는 여정의 끝을 알리는 마지막 숙소의 역할을 하는 곳이 바로 고양 벽제관(高陽 碧蹄館)이다.사신을 떠나보내고 맞이하는 공식행렬과는 별개로 수행원들의 친구나 친지들이 이들의 무사 귀환을 빌며 전송하고 작별하거나 귀로에 오른 이들을 다시 마중하는 공간이기도 했다. 조선시대를 통틀어 이곳을 소재로 한 무수한 시문(詩文)이 남아 있는 것은 바로 그러한 까닭이다.
그런데 일제강점기 이후 이 땅의 주인행세를 했던 일본인들에게는 벽제관이라는 공간을 기억하는 방식이 전혀 달랐다. 무엇보다도 그들에게는 벽제관 일대가 임진왜란 당시 그들을 추격하던 명나라 장수 이여송(李如松, 1549~1598)의 직속부대를 맞이하여 치명적인 반격을 가했던 일본군의 전승지(戰勝地)였으므로 매우 특별한 의미를 지닌 곳으로 치부되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탓에 이곳이 남다른 관심의 대상으로 부각되곤 했다는 것은 식민통치권력의 최고 정점에 있는 역대 총독과 정무총감이 잇달아 이곳을 시찰하였다는 사실에서도 잘 드러난다. 이에 관한 가장 이른 시기의 흔적은 초대 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 1852~1919)에 의한 벽제관 시찰이다.
<매일신보> 1912년 4월 30일자에는 「총독 벽제관행(總督 碧蹄館行)」 제하의 기사를 통해 그의 행로를 이렇게 간단히 정리하고 있다.

 

데라우치 총독(寺內 總督)은 재작(再昨) 28일(日) 오후(午後) 2시(時)부터 아카시 소장(明石 少將), 아라이 탁지부장관(荒井 度支部長官), 후지타 부관(藤田 副官)을 종(從)하여 자동차(自動車)를 승(乘)하고 고양군 벽제관(高陽郡 碧蹄館)에 부왕(赴往)하여 문록역(文祿役)의 전적(戰跡)을 시찰(視察)하고 오후(午後) 6시(時)에 귀저(歸邸)하였다더라.

 

데라우치 총독 자신이 남긴 일기(日記)에도 이날의 동선이 기록되어 있는데, 특히 그가 이날 벽제관 앞에 벚나무(櫻樹, 사쿠라)를 심어 기념으로 삼았다는 대목이 눈길을 끈다. 이때 그가 심은 벚나무 주위에는 나중에 돌기둥에 쇠사슬을 연결하여 보호난간을 둘러 정성껏 관리하는 모습이 연출된 것으로 알려진다.
아닌 게 아니라 일본인들에 의한 벽제관 일대의 공간변형을 통틀어 가장 두드러진 풍경의 하나는 이곳 주변이 온통 벚꽃 동산으로 바뀌었다는 사실이다. 예를 들어, <매일신보> 1929년 4월 4일자에 수록된 「녹화운동(綠化運動)의 선구(先驅), 본사기념식수(本社紀念植樹), 작(昨) 3일(日) 기념일(紀念日)을 복(卜)하여, 벽제관(碧蹄館)에 앵풍 만주(櫻楓 萬株)」 제하의 기사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남아 있다.

 

본사(本社)에서는 기념식수일(紀念植樹日)에 순응(順應)하여 3일 벽제관에서 기념식수를 하였는데 수년 전 본사에서는 한강반(漢江畔) 급(及) 이번에 기념식수를 한 벽제관에 앵화(櫻花)의 식수를 행하여 지금에는 직경 척여(直徑 尺餘)의 대목(大木)이 되어 과거 본사공적(本社功績)을 영구히 전하게 되었다. 이에 감(鑑)하여 본사는 작추(昨秋)에 거행된 소화대제(昭和大帝)의 어대전(御大典)을 광고(曠古)에 전하려고 종종(種種) 기념사업을 연구한 결과 조선에 재(在)한 민간녹화운동(民間綠化運動)의 선구(先驅)로서 식수(植樹)는 가장 적당한 사업이므로 이번에 벽제관 뒤의 국유지(國有地) 수십정보(數十町步)에 앵목(櫻木) 5천 주(株), 풍(楓) 5천 주 합계(合計) 1만 주(株)를 식재하였다. 당일은 본사원(本社員)은 물론 경성부내(京城府內)에서 다수의 내빈을 초대하고, 벽제관 부근 주민도 봉사적(奉仕的)으로 참가하여 기념식수를 하였다.

<조선> 1930년 9월호에 수록된 벽제관 후면 언덕의 ‘괘갑수(掛甲樹)’이다. 이곳이 정말 왜군의 갑주가 걸린 곳이었는지는 일본인들 스스로 의심하는 바였지만, 어쨌거나 사진에서 보듯이 돌난간과 표석을 세워 나름으로 소중한 기념물의 하나로 관리되었다.

 

여기에 나오는 ‘기념식수일’은 조선총독부가 한국병합(韓國倂合)의 대업(大業)을 영구히 기리는 동시에 애림사상(愛林思想)을 고취하고 식림(植林)을 장려한다는 명분으로 1911년 4월 3일 신무천황제일(神武天皇祭日; 공휴일)을 기하여 처음 기념수재일(記念樹裁日)로 정한 이래로 해마다 식목행사를 거행한 날이다. 위의 신문기사에 따르면, 총독부의 기관지인 매일신보가 주축이 되어 벽제관 주변에 벚나무와 단풍나무 1만 그루를 심었고, 이보다 앞서 ‘수년 전’에도 이미 이곳에서 식목행사를 거행한 사실이 드러난다.
그런데 비단 이 시기뿐만 아니라 일제강점기로 접어든 직후 시점부터 벽제관 일대에는 일본산 벚나무가 대량으로 식재되기 시작했다는 흔적도 발견된다. 가령 경성일보와 매일신보의 감독으로 장기간 서울에 체류했던 토쿠토미 소호(德富蘇峰, 1863~1957)가 남긴 <연하승유기(烟霞勝遊記) 하권(下)>(1924), 325쪽에는 그 자신이 1916년 3월 17일에 벽제관을 탐방한 때의 감흥을 이렇게 적은 바 있다.

 

…… 관후(館後)의 소구(小丘)에는 당년(當年)의 괘갑수(掛甲樹)라고 칭(稱)하는 노규(老槻, 느티나무 고목)가 있다. 구상(丘上)에서 지점(指點)하면, 양군공전(兩軍攻戰)의 터가역력(歷歷)하게 보인다. 이 주변에는 천주(千株)의 길야앵(吉野櫻, 요시노 사쿠라), 천주(千株)의 풍(楓, 카에데)을 기념(記念) 삼아 심었지만, 거의 전벌(剪伐)되어져 가까스로 두어 그루를 남기고 있을 따름이다. 조선인(朝鮮人)의 수목(樹木)에 무돈(無頓)이 지나침은 참으로 가공(可恐)할 만 했다.

 

여기에 나오는 ‘괘갑수’는 벽제관전투 당시 싸움을 마치고 일본군 장졸(將卒)이 갑주(甲冑)를 벗어 이곳에 걸어놓고 휴식을 취했다거나 그 당시 선봉에 섰던 왜장 코바야카와 타카카게(小早川隆景, 1533~1597)가 자신의 투구를 걸었던 곳이라거나 하는 식의 전설이 있는 벽제관 뒷동산의 느티나무였다. 그러나 실상 이러한 얘기는 일본인들 스스로가 사실관계를 의심하는 글들이 곧잘 남아 있기는 한데, 어쨌거나 이곳 역시 그들이 늘 자랑스러운 곳으로 여기는 중요한 기념물이라는 점에 있어서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매일신보> 1928년 4월 3일자에 수록된 이케카미 정무총감의 벽제관 수리공사 현장시찰 관련 보도내용이다. 여기에는 이케카미 정무총감이 정의현(鄭儀鉉) 벽제면장과 더불어 기념식수를 하는 보도사진이 함께 수록되어 있다.

 

건설(公園建設)을 계획, 면민(面民)은 관상목 식재(觀賞木 植栽)」 제하의 기사 등에도 벽제관 일대에 대규모로 벚나무를 식재한다는 소식을 잇달아 전하고 있는 것이 눈에 띈다.
이처럼 벽제관 일대에 벚나무와 단풍나무를 적극적으로 심고 이를 관리하려고 했던 것은 이곳을 일본군의 전승지(戰勝地)라는 공간의 의미에 더하여 봄가을로 벚꽃구경과 단풍나들이의 명소와 같은 탐방지로 부각시키려는 의도에 따른 것으로 풀이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일제강점기 후반에 이르러 경승지(景勝地)로 자리매김한 벽제관 일대는 관람객들을 쉽사리 맞이할 수 있는 유원지(遊園地)의 형태로 적극 개발하기 위한 조치들이 거듭 시도된 바 있었다.
예를 들어 <매일신보> 1936년 5월 22일자에 수록된 「벽제관 전등시설(碧蹄館 電燈施設)과 뻐스 연장요망(延長要望), 벽제면민(碧蹄面民)이 경전(京電)에 진정(陳情)」 제하의 기사를 통해 이러한 변화의 일면을 엿볼 수 있다.

 

[벽제(碧蹄)] 고양군 벽제관은 대도회지 경성(大都會地 京城)을 거(距)하기 4, 50리의 지점에 있어 불결(不潔)한 공기와 풍진(風塵) 사이에서 피곤한 뇌를 잠시 수양(修養)할 만한 유일한 유원지로서 근일(近日)은 매일 수십 명의 관람객을 맞게 되는 바인데 조등기관(照燈機關)과 교통기관(交通機關)이 불완전함을 관민일동(官民一同)이 통감(痛感)한 바있어 거(去) 18일에 신면장(申面長), 카타카쿠 부장(片角部長), 후지노 교장(藤野校長), 이 본보 분국장(李 本報分局長), 기타 민간유지(其他 民間有志) 수십 명이 회동하여 전등가설(電燈架設)과 뻐스 총연장(總延長)을 경전회사(京電會社)에 실행토록 내(來) 22일에 진정하기로 결의하였는데 일반민간에서는 지방발전(地方發展)과 산업개발상(産業開發上) 필요하므로 실행을 기대중이며 교섭위원(交涉委員)으로 좌(左)의 제민(諸民)을 선정하였다. 신 면장(申面長), 이 이사(李理事), 카타카쿠 부장(片角部長), 임창운(林昌雲), 이본보 분국장(李 本報分局長), 코야마 협의원(小山協議員), 후지노 교장(藤野校長), 사에키 소장(佐伯所長), 안 기자(安記者).

 

여기에 나오는 ‘신 면장’은 일제강점기에 춘천군수, 원주군수, 홍천군수(1924년 12월 퇴직)를 역임하고 나중에 고양군 벽제면장(1932.1~1939.10)을 지낸 신규선(申圭善, 1882~1958)을 말하며, 지금도 벽제관 터 앞에는 1941년 1월에 건립한 ‘면장 신규선 치적비’가 남아 있다. 그리고 ‘사에키 소장’이라고 하는 이는 벽제우편소장(碧蹄郵便所長)이던 일본인 사에키 토루(佐伯融)를 가리킨다.
그는 벽제관고적보존회의 활동에 앞장서 참여하였고, 나중에 벽제관전적기념비(碧蹄館戰蹟記念碑, 1933년 9월 9일 제막)를 조성할 때도 주도적인 활동을 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특히 총독부의 고관 또는 내외귀빈(內外貴賓)을 포함하여 일반 탐방객이 벽제관을 찾을 때마다 벽제관 일대의 고적안내를 전담하다시피 했던 사람이기도 했다.

 

옛 벽제면사무소가 자리했던 벽제관 터 앞쪽 비석군에는 ‘벽제면장 신규선(申圭善) 치적비(1941년 1
월 25일 제막)’가 지금도 그대로 남아 있다.

 

 

벽제우편소장 사에키 토루(佐伯融)의 경력과 활동상이 자세히 소개된 <매일신보> 1933년 10월 12일
자의 보도내용이다. 그는 벽제관 전적지의 보존과 기념비 건립에 주도적인 활동을 했고, 조선총독의 시찰 때거나 일반 탐방객의 방문 때건 간에 벽제관 일대의 고적안내를 전담하다시피 했던 인물이었다.

 

그런데 <매일신보> 1944년 10월 1일자에 수록된 「형석(螢石)의 채굴을 독려, 개성에서 고미술(古美術)도 감상한 총독」 제하의 기사를 통해 마지막 조선총독 아베 노부유키(阿部信行, 1875~1953)가 부임 후 두 달 남짓에 이곳 벽제관을 시찰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 이렇게 누누이 훈시를 한 다음 점심을 마치고 개풍군 중면(開豊郡 中面)에 있는 종양장(種羊場)을 시찰하고 대룡광산(大龍鑛山)을 찾아 경금속(輕金屬) 증산에 중요한 자재인 형석(螢石)의 채굴하는 현장을 독려하고 자동차로 귀로에 올랐다. 모색이 어리는 장단(長湍) 나루를 나룻배로 건너, 도중 벽제관(碧蹄館)에 들러 충혼비(忠魂碑)의 비명(碑銘)을 읽고 측근의 설명을 들어가며 한 동안 감개 깊은 듯 2백여 년 전의 옛일을 회고하고 일로 경성으로 돌아왔다.

 

이렇듯 일제는 자신들의 패망을 코앞에 두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지금은 사쿠라와 단풍나무의 천국으로 변한 자신들만의 성지(聖地)에서 얼토당토않게 그저 그 옛날과 같은 또 한번의 전승을 간절히 꿈꾸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화, 2020/07/28- 0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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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

‘부민관 폭파 의거’ 75주년 기념 행사

1945년 7월 24일 조선인으로는 유일하게 일본 중의원까지 지낸 친일거두 박춘금이 조직한 대의당 주최로 ‘아세아민족분격대회’가 열렸다. 이 대회는 내선일체와 황민화를 앞세워 태평양전쟁에 조선 젊은이들의 참여를 선동하기 위한 것으로 조선총독, 조선군사령관을 비롯한 일제의 수괴들과 거물급 친일파들이 대거 참석하고 있었다. 대회 소식을 사전에 입수한 ‘대한애국청년당’ 소속 조문기(1927~2008, 민족문제연구소 제2대 이사장 역임), 유만수(1924~1975), 강윤국(1926~2009) 등은 대담하게 대회장에 다이너마이트 2개를 설치, 폭파시켜 대회를 무산시켰다. 이 통쾌한 의거로써 패망 전 최후의 발악을 하던 일제와 친일파들의 간담을 서늘케 하였다.
‘부민관 폭파 의거’는 일본 패망 직전 경성 한복판에서 조선독립의 의지를 널리 알린 일제강점기 의열투쟁의 대미를 장식한 쾌거로 평가받고 있다. 연구소는 매년 의거일에 기념행사를 진행하고 있으며 특히 의거 70주년이었던 2015년 7월 24일에는 의거 현장인 서울특별시의회 본 회의장에서 재연극 ‘정의의 폭탄’을 공연한 후 영상과 교육자료로 제작하여 서울 시내 중·고등학교 210여곳에 배포한 바 있다. 서울특별시의회 역시 3·1운동 100주년이었던 2019년 서울특별시의회 본회의장이 항일투쟁의 현장임을 알리는 홍보 영상과 전시물을 제작해 독립정신 고취에 나서고 있다.
연구소는 코로나19 예방을 위한 사회적 거리두기에 동참하기 위해 의거 기념식은 생략하고 7월 24일 임헌영 소장, 윤경로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장, 이항증(임정 초대 국무령 석주 이상룡선생 후손), 차영조(임정 비서장 동암 차리석 선생 후손), 장병화(광복군 장이호 선생 후손), 김재운 신흥무관학교기념사업회 기획팀장, 방학진 기획실장 등이 김인호 서울시의회 의장과 함께 의회 내 부민관 의거 전시 시설을 관람하고 면담했다. 이 자리에서 서울 왕산로(의병장 허위 선생의 호를 딴 도로로 청량리 시조사 입구에서 신설동역에 이르는 길)에 왕산 허위 의병장 동상 건립 등에 대한 의견을 나눴다. 한편 연구소 후원회원이기도 한 김인호 의장은 이날 “우리 민족은 큰 위기를 겪을 때마다 굳은 의지와 기개로 반드시 위기를 극복해낸 경험이 있다.”고 언급하며 “부민관 폭파 의거 75주년을 맞이해 우리의 민족정신을 다시금 되새기고, 지금 처한 위기를 의연하게 대응해나가는 서울시의회가 되겠다.”고 밝혔다

수, 2020/08/26- 0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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