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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조약은 강제로 체결된 불법조약이다! – 헤이그 특사 위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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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조약은 강제로 체결된 불법조약이다! – 헤이그 특사 위임장

익명 (미확인) | 금, 2017/07/28- 1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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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호에 소개할 자료는 1907년 4월 20일 고종이 헤이그 특사에게 준 위임장이라고 알려진 문서이다.
1905년 11월 17일, 대한제국은 일제의 강압으로 체결된 ‘을사조약’으로 실질적인 주권을 잃게 되었다. ‘을사조약’ 체결 소식이 전해지자 전국에서는 의병들이 들불처럼 일어났으며, 나라의 자주 독립을 호소하며 자결하거나 친일 매국노의 처단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거세졌다.
고종은 1907년 6월 15일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제2차 만국평화회의가 개최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국권회복의 염원을 국제사회에 호소하고자 회의 참가를 요청하였다. 또한 프랑스・벨기에 주재공사 민영찬에게 이 문제를 협의하라는 훈령을 내렸고, 러일전쟁 이후 불어학교 교사로 활동하던 마르텔을 비밀리에 베이징에 파견하여 베이징 주재 러시아 공사를 만나 만국평화회의에 대한제국 대표를 초청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결국 네덜란드로부터 초청장을 받은 대한제국은 12번째 초청국으로 만국평화회의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일본은 만국평화회의에 외교권을 상실한 국가가 회의에 참가한 전례가 없다는 이유로 한국 참가를 반대했다. 러시아는 러일전쟁 이후에도 한국 독립에 대한 국제사회의 승인을 얻어내 한국에 대한 영향력을 유지하고자 대한제국을 만국평화회의에 초청하려고 하였으나 결국 일본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한다는 방침을 정하고 대한제국을 초청하는 것을 포기했다.
한편 1905년 9월 고종의 밀사인 이용익이 러시아로 건너가 국내와 비밀접촉을 하면서 만국평화회의를 준비하고 있었다. 국내에서는 상동청년회와 연결되어 이동녕, 이시영, 안창호, 김구 등이 이준과 이상설을 특사로 보내기로 의견을 모아 고종에게 특사 파견을 요청하였다. 이를 받아들여 고종은 이상설, 이준, 이위종 세 명의 특사를 헤이그 평화회의에 파견하였다.

이때 고종이 특사에게 위임장을 전해준 것으로 알려졌는데, 미국 뉴욕에서 발행된 <The Independent> 1907년 8월 22일자(주간, 제3064호), 「A Plea for Korea(By Prince Ye We
Chong)」에 이위종이 쓴 호소문과 그가 소지하고 있던 신임장의 사본 및 번역문이 게재되어 있다. 여기에는 “1907년 4월 20일 한양 경성 경운궁에서 친히 서명하고 옥새를 찍노라”고 적혀 있다. 연구소가 소장한 ‘위임장’은 ????The Independent????에 소개된 것을 해방 이후 복제한 것으로 추정된다.
1907년 6월 25일 헤이그에 도착한 세 특사는 6월 27일자로 서명된 각국 대표에게 보내는 탄원서를 지니고 활동을 개시했다. 이들은 중재재판을 취급하는 만국평화회의 제1분과위원회를 찾아가 한국문제를 다루어 줄 것을 요청하고, 일본을 제외한 40여 개 참가국에게 탄원서를 배포하였으며 영국·미국·프랑스·독일의 대표위원을 만나 한국 독립을 지원해 줄 것을 강력히 호소하였다.
그러나 당시는 일본이 제국주의 열강으로부터 한국에 대한 지배권을 승인 받은 상태였기 때문에 어느 나라도 일본의 반대를 무릅쓰고 한국의 독립을 지원하려 하지 않았다. 일본의 집요한 방해공작과 열강의 냉담한 반응으로 한국독립을 위한 외교활동은 당시 국제관계를 볼 때 성공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결국 특사의 희망과는 달리 만국평화회의는 한국을 철저히 외면했다.
일본은 헤이그특사 파견을 ‘을사조약’ 위반행위로 몰아 7월 22일 고종을 강제 퇴위시켰다. 이준 특사는 현지에서 순국하고 이상설·이위종 두 특사는 망명했다. 그들은 끝내 고국에 돌아오지 못했다.

대한제국특파위원 전 의정부 참찬 이상설, 전 평리원 검사 이준,
전 주러시아공사관 참서관 이위종 위임장

대황제가 칙서를 내리는바 우리나라의 자주독립은 세계 여러 나라가 공인한 것으로 짐이 지난번 여러 나라와 조약을 맺고자 하여 서로 우방으로서 긴밀함을 갖은즉, 이제 세계 여러 나라가 평화를 위하여 한 자리에 모이기에 응당 참석함이 마땅한 것인데 1905년 11월 18일 일본이 우리나라에 대하여 국가 간의 법을 어기고 도리에 어긋난 협박으로 우리의 외교권을 빼앗아 우방과의 외교를 단절케 하였다. 또한 일본의 모욕적인 침략은 이르지 않은 곳이 없을 뿐더러 그 침략의 의도는 인도자의 도리에도 어긋나는 것이다. 짐의 생각이 이에 미치니 참으로 가슴 아픔을 느끼는 바이다. 이에 여기 종2품 전 의정부 참찬 이상설, 전 평리원 검사 이준, 전 주러시아공사관 참서관 이위종을 특파하여 네덜란드 헤이그 평화회의에 가서 본국의 모든 실정을 온 세계에 알리고 우리의 외교권을 다시 찾아 여러 우방과의 외교관계를 원만하게 하도록 바라노라. 짐이 생각건대 특사들의 성품이 충실하고 강직하여 이번 일을 수행하는 데 가장 적임자인 줄 안다.
대한 광무 11년 4월 20일 한양 경성 경운궁에서 친히 서명하고 옥새를 찍노라.

대황제 수결 황제어새

 

∷ 강동민 자료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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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전태일 열사 분신 항거 50년에 만난
청계노조 출신 신광용 회원

인터뷰 방학진 기획실장

 

신광용 후원회원

2020년은 우리나라뿐 아니라 인류 역사에도 특별히 기록될 것이 분명하다. 바로 코로나19 때문인데, 인류 역사상 이처럼 하나의 주제로 인류가 실시간으로 동시에 같은 고민을 하던 때가 있었던가. 생각을 확장해 가다 보니 1, 2차 세계대전은 어쩌면 1, 2차 지역전쟁에 불과했는지도 모르며 따라서 앞으로의
세계 전쟁은 말 그대로 인류 멸망과 동의어가 될 것이 분명하다. 누군가는 인류 멸망을 대비해 화성인이 되려고 노력한다지만 그 속도의 차이로 볼 때, 마치 개미가 호수를 건너려고 노력하는 것과 같아 보인다. 여하튼 코로나19가 바꿔놓은 일상은 2020년에 의미 있게 맞이했을 여러 기념일마저 비대면, 온라인이라는 말에 묻히고 있다. 그러한 아쉬움을 확인이라도 시켜주듯이 올해는 10년 단위의 계기를 맞이하는 역사적 사건들이 많다. 경술국치 110년, 봉오동·청산리전투 등 독립전쟁 100주년, 한국광복군 창설 80주년, 6·25전쟁 70주년, 4·19혁명 60주년, 전태일 열사 분신 50주년, 5·18민주화운동 40주년, 6·15 남북공동선언 20주년. 이번 달 인터뷰는 이러한 숨가쁜 역사적 사건 중에서 전태일 열사와 청계피복노조와 관련된 회원을 만나보려 한다. 문익환 목사가 교회를 벗어나 사회에 나오게 된 이유가 전태일 열사의 분신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리고 양대 노총은 전태일 열사의 분신항거일에 맞춰 매년 노동자 대회를 열어 자신들이 전태일의 후예임을 자부하고 있다. 전태일 열사의 기념관도 청계천에 잘 마련되어 있으니 관련 이야기는 가급적 생략하고 청계피복노조운동의 중심인물 중 한 명이었던 신광용 회원 이야기를 들어보자. 그는 지금 한국에 없다. 내가 그를 만난 곳은 중국 광저우에서다. 신광용 회원은 작년에 결성된 연구소 광동지부 회원으로서 현재 부인인 김선주 님과 함께 광동에서 의류업체를 경영하고 있다. 자체 브랜드도 있는 중견 업체이다. 신광용, 김선주는 청계노조 활동을 함께했던 동지이기도 하다. 전태일 열사의 분신항거와 이어진 청계피복노조를 통한 노동운동은 박정희·전두환 군부독재 시절에 가장 치열한 민주화운동이었다. 그 과정에서 신광용은 여러 차례 수난을 겪는다. 1977년 8월 이소선 여사가 중심이 되어 만든 ‘노동교실’ 강제폐쇄에 항거한 투쟁으로 구속된 것을 시작으로 1981년 청계피복노조 강제해산에 맞서 아프리 점거 농성 중 부상을 입었다. 아프리(AAFLI)는 아시아 아메리카 자유노동기구로서 미국의 노총에서 후진국 노동운동을 지원하는 기구이기 때문에 당시의 상황으로서는 외국인 사무실에서 농성을 벌여야 우리의 투쟁이 많은 국민들한테 알려질수 있을 것이라는 판단에서 아프리 사무소를 농성장소로 선택한 것이다. 청계노동자들의 아프리 농성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경찰은 건물 벽을 부수고 농성장에 난입하여 무자비하게 진압하여 무려 11명을 구속시켰다. 이 과정에서 신광용, 전태삼(전태일 열사의동생) 등 2명이 투신하여 신광용 회원은 다리를 크게 다쳤다.

『경향신문』 1981년 1월 31일자 기사. 청계피복노조원 신광용 씨가 아프리에서 농성을 벌이며 경찰의 진압에 맞서다 3층 아래로 뛰어내려 다리를 크게 다쳤다.

 

문:민족문제연구소 광동지부에 가입하시어 활동하시게 된 계기는 어떤 것이었나요?

답:중국에서 사업하는 한국인들이 만든 광저우 산악회에서 김유 님과 박호균 님을 만나게 되었어요. 이
두 분은 현재 민족문제연구소 광동지부 지부장과 사무국장을 맡고 계시지요. 이분들을 만나게 되어 서로의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 잘맞고, 마음도 잘 통하더라구요. 그래서 주저없이 민족문제연구소 광동지부에 가입하게 되었습니다. 특히 박호균 사무국장님과는 올해 1월에 진행한 김산의 아리랑 로드 답사를 준비하기 위해 여러 차례 현지답사를 함께하면서 더욱 친밀해졌습니다. 답사를 준비하고 진행하면서 김산, 김원봉 선생 등의 독립운동 발자취를 하나하나 찾아보았고 잘 알려지지 않은 조선인 독립투사 13인의 명단도 찾아볼 수 있어서 아주 보람이 있었습니다.

문:신광용 회원님도 생업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올해 초 아리랑 로드 답사에 크나큰 수고와 역할을 해주셨습니다, 지난 번 민족사랑(2020년 1월호)에 김유 지부장님과 박호균 사무국장님의 인터뷰도 소개했지만 추가로 해주실 이야기 부탁드립니다.

답:제가 17살 무렵에 백기완 선생님의 강연을 들은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백 선생님께서 “박정희는 독립군을 잡는 일본군 장교였고 남로당에 가입해 활동하다 발각되자 동지들을 팔아먹고 자기만 살아남은 나쁜 놈”이라고 일갈하셨어요. 당시는 대통령에 대해 조금만 불만을 이야기해도 바로 잡혀가던 유신시절인데 그렇게 당당히 말씀하시는 모습을 보고 제 심장이 크게 뛰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이번에 김산이 거쳐 갔던 해방구 하이펑 등을 답사하며, 17살 때 느꼈던 그 벅찬 감정을 다시 느낄 수 있었습니다. 심장이 두근거리는 그 벅찬 감정이었습니다.

문:전태일 열사 분신 항거 50년이 되는 해입니다. 누구보다도 감회가 남다를 것 같습니다.

답:평화시장의 현장 노동자로서 열악한 노동환경에서 우연히 청계피복노조를 알게 되어 그저 각종 투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된 것뿐인데 이렇게까지 역사의 기록으로까지 남았네요. 그동안 두 어깨에 무거운 짐을 메고 있는 듯한 기분이었습니다. 50년이 되었으니 이제는 그 뭔지 모를 짐을 조금은 내려놓은 듯 싶습니다. 또한 청계피복노조 투쟁 과정 이외에 이한열 열사 사건 때가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기동대 버스 안에다 가둬두고 최루탄을 터트려 머리에 최루탄 파편이 박혀서 눈도 뜰 수 없고 움직이지도 못하고 숨도 제대로 쉴 수 없었습니다. 그런지경인데 죽을 정도로 맞고, 기절하고, 깨어나면 또 맞고 또 맞고 기절하고 또 맞고 또 맞고 했던 기억들입니다. 다시는 이런 역사가 되풀이되지 않고, 노동이 존중되고 모두가 평등한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신광용 회원의 인터뷰는 여느 회원의 인터뷰보다 어려웠다. 코로나19로 원격으로 진행할 수밖에 없기도 했지만 자신의 이야기를 좀처럼 드러내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실제로 몇 번 만나본 경험으로 술 좋아하고 등산 좋아하고 뜻 맞는 지인들과 어울리고 나서서 일하기를 좋아하던 그였는데 말이다. 이 지면에 그의 진면목을 담을 수 없는 것은 오로지 나의 능력 부족에 더해 그의 묵직함 때문일 것이다. 허리조차 제대로 펼 수 없는 다락방 같은 작업장에서 열악한 노동자였던 그는 현재 외국인 노동자 수백 명이 있는 회사의 관리자가 되었다. 혹자는 개천에서 용났다거나 자수성가했다면서 추켜세웠을 것이고 나 같은 사람처럼 프롤레타리아가 부르주아가 되었다고 어딘가 그의 약점을 찾아 찔러 보는 장난기 섞인 이야기도 많이 들었을 것이다. 그런 사람들에게 신광용 회원은 체 게바라의 시 한편으로 자신의 생각을 대신한다.


 

먼 저편
– 미래의 착취자가 될지도 모를 동지들에게

체 게바라

지금까지
나는 나의 동지들 때문에 눈물을 흘렸지
결코 적들 때문에 눈물을 흘리지는 않았다
오늘 다시 이 총대를 적시며 흐르는 눈물은
어쩌면 내가 동지들을 위해 흘리는 마지막
눈물이 될지도 모른다

우리는 그 멀고 험한 길을 함께 걸어왔고
또 앞으로도 함께 걸어갈 것을 맹세했었다
하지만
그 맹세가 하나둘씩 무너져갈 때마다
나는 치밀어 오르는 배신감보다도
차라리 가슴 저미는 슬픔을 느꼈다
누군들 힘겹고 고단하지 않았겠는가
누군들 별빛 같은 그리움이 없었겠는가

그것을
우리 어찌 세월 탓으로만 돌릴 수 있겠는가
비록 그대들이 떠나 어느 자리에 있든
이 하나만은 꼭 약속해다오
그대들이 한때 신처럼 경배했던 민중들에게
한줌도 안 되는 독재와 제국주의 착취자처럼
거꾸로 칼끝을 겨누는 일만은 없게 해다오
그대들 스스로를 비참하게는 하지 말아다오
나는 어떠한 고통도 참고 견딜 수 있지만
그 슬픔만큼은 참을 수가 없구나

동지들이 떠나버린 이 빈 산은 너무 넓구나
밤하늘의 별들은 여전히 저렇게 반짝이고
나무들도 여전히 저렇게 제 자리에 있는데
동지들이 떠나버린 이 산은 너무 적막하구나

먼 저편에서 별빛이 나를 부른다

수, 2020/08/26- 0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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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

상반기 연구소 교원연수 <‘일제잔재’의 사례와 수업 활용> 실시

• 임무성 상임교육위원

초·중·고 현직 교원을 대상으로 하는 직무연수가 8.10~12일 사이에 민족문제연구소 강의장에서 비대면 온라인 강의로 진행되었다. 연구소는 2019년부터 경기도의 “친일문화잔재” 조사연구용역을 수행하며 방대한 보고서를 발간하였을 뿐 아니라 이를 기초로 하여 지역사회연구소·식민지역사박물관의 교사용 학습 부교재 <우리 지역 일제잔재를 찾아라>를 출간하였다.
이번 연수는 교육현장에서 이런 결과물을 활용하고 역사의식의 제고에 이바지하고자 하는 선생님들의 바람이 반영된 프로그램이었다. 역사 등 사회과 과목을 주로 가르치는 선생님들이 참여하여 일제잔재와 친일문제를 이론과 실제 양 측면에서 접근 분석하고 효과적인 교수법 수립에 도움을 주고자 기획된 것이다. 내용은 1강 일제잔재란 무엇인가?(조재곤서강대 교수), 2강 경기지역 일제잔재의 현황과 수업 활용(신대광 모락중학교 교사), 3강 서울 지역의 일제잔재-기념물(이순우 민족문제연구소 책임연구원) 4강 오욕의 역사, 금단의 땅 용산(현지 답사, 이순우), 5강 친일 관련 사료 검색과 디지털 아카이브 활용법(장신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6강 박물관 유물과 자료로 본 친일의 역사(김승은 식민지역사박물관
학예실장)이었다.
실습, 답사, 관람, 토론 등의 다양한 방법으로 현장 연수를 운영할 계획이었으나, 코로나 방역단계가 4단계로 격상되어 모두 온라인 비대면 원격 강의로 진행하였다. 특히 용산지역 답사는 현장을 동영상으로 담아와 보여주고, 박물관 관람은 자료이미지를 설명하는 것으로 했지만 아쉬움이 남았다. 방학중이라 3일간 15시간으로 이뤄진 강행군 강의였지만, 참가 선생님들은 3일 내내 엄청난 열의를 쏟아내며 호응해주었다. 선생님들의 반응은 “더 많은 동료 교사들이 함께하면 좋겠다”며, 연구소의 연수 프로그램이 “전국 모든 학교에 알려져”, “많은 이들이 참여하여 현장에서 적용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나타냈다. “일재잔재에 대한 전반적 이해를 하게 되었고 새로운 접근방법을 알게 되어 좋았다”며 “늘 많은 생각을 던져주는 시간이 아깝지 않은 연수”라는 반응을 접하며 굴절된 역사를 바로세우는데 함께할 수 있는 더욱 알찬 프로그램으로 교사들뿐만 아니라 시민들에게도 가까이 다가서길 기대해본다.

금, 2021/08/27- 0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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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

 

내일을여는역사재단,
‘항일독립운동의 발자취를 찾아서’의 주제로 서울시자유시민대학 강좌 개최

 

 

내일을여는역사재단이 서울시자유시민대학의 민간연계시민대학 캠퍼스로 선정되어 9월 8일(화)부
터 시민대학 강좌를 개최했다. 무장독립전쟁 100주년이 되는 2020년을 기념하여 연구소·식민지역사박
물관 후원회원과 일반시민들을 대상으로 ‘항일독립운동의 발자취를 찾아서’의 주제로 진행한다.
10월 15일까지 매주 화·목 오후 7시, 5주간에 걸쳐 항일의병, 독립전쟁, 1920~30년대의 대중운동·문화운동·학생운동·민족운동과 의열투쟁,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무장투쟁 등 일제 강점기 항일운동 전반을 두루 살펴보는 강좌에 근현대사기념관의 심철기 학예실장을 비롯하여 여러 대학·연구소의 전문연구자들이 강사로 나선다. 강의 장소는 식민지역사박물관 교육장이다. 강의 종료 후 10월 17일(토)에 독립기념관 답사가 예정되어 있지만, 코로나19 상황으로 진행이 불투명하다.
원래의 계획은 현장에서 대면으로 이루어지는 강좌였지만, 코로나19 방역단계가 격상되면서 모든 일정이 비대면 온라인강좌(줌)로 진행된다. 이로 인해 오히려 지방에 계시는 후원회원들도 참여할 수 있어 참석인원이 60명에 이를 정도로 성황을 이루고 있다.
이번 강좌는 불굴의 의지로 숱한 고난과 역경을 이겨내며 빼앗긴 주권을 되찾으려 항일투쟁의 최전선에 섰던 이들의 삶을 추적하고, 그들이 지난한 투쟁과정 속에서 궁극의 목표로 설정했던 참된 삶이 무엇인지, 민족공동체 속에서의 자기희생이 지니는 가치는 무엇인지를 다시 한번 되새겨보는 자리가 되었으면 한다.

• 임무성 상임교육위원

목, 2020/09/24- 2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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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사진과 수필로 바라보는 민병래의 시선

인터뷰 방학진 기획실장

아들과 함께 찍은 민병래 회원

 

우리가 흔하게 쓰는 말 중에는 ‘틈새시장’, ‘틈새라면’, ‘틈새를 엿보다’ 등이 있다.
‘틈새’라는 말은 물체와 물체 사이의 물리적으로 좁은 공간을 의미하기도 하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보이지 않는 감정이나 생각의 거리를 뜻하기도 한다. 따지고 보면 지금도 상상할 수 없는 속도로 확장하고 있는 우주의 너무나도 작은 일부인 지구에 잠시 스쳐 지나가는 존재일 뿐인 인간에게는 틈새라는 말도
과분해 보인다. 하지만 동학 교주 최시형의 이천식천(以天食天) 즉, 인간이나 인간이 먹는 음식조차도 모두 한울 즉 본질적 존재라고 하였으니 틈새는 그저 고래 싸움에 낀 새우나 겨우 들어갈 좁은 공간이 아닌 또 다른 차원의 새로운 공간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지금까지 나는 틈새시장, 틈새라면이 아닌 ‘틈새 역사’도 가능하지 않을까라는 주장을 하고 싶어서 이와 같이 말머리를 꺼내 보았다.
‘틈새 역사’. 이번 달에는 우리 시대의 틈과 틈 사이에 무수히 존재하는 사건 그리고 사람의 이야기를 담
고 싶어하는 민병래 회원을 만나 보았다.

<오마이뉴스> 2020년 9월 12일자에 게재된 ‘사수만보’ 제37화 캡쳐 사진

 

현재 민병래 회원은 오마이뉴스에 ‘민병래의 사수만보’를 연재하고 있다. 사수만보 1화 ‘결혼과 육아로 경력단절… 배우 주인영, 다시 무대에 서다’로 시작해 사수만보에 등장하는 이는 소수 정당대표, 대장장이, 초짜 무당, 독거노인, 여자 격투기 선수, 자수성가한 호텔리어, 병역 거부자, 장돌뱅이, 노동운동가, 민주화운동 유가족, 교회 개혁운동가, 미투 고발인, 친환경 먹거리 운동가, 노숙인 지원가 등 그야말로 다양한 우리들의 틈새들이다.

“오마이뉴스에 2019년 봄부터 격주로 ‘사수만보’ 연재를 시작해 현재 37회에 이르고 있습니다. ‘사수만보(寫隨萬譜)’는 ‘사진과 수필로 쓰는 만인보’라는 뜻입니다. 우리 시대 민초들의 이야기를 우리 시대 풍경화를 그리듯이 써나가고 있습니다. 잘 나가는 사람, 빛나는 사람보다는 우리 주변에서 성실하게 자기 인생 이야기를 그려가는 사람들이 저의 주인공들입니다.
제가 이 집필을 구상하게 된 계기는 2016년 촛불광장에서였습니다. 촛불혁명은 이름없는 민초들이 이룬 것 아닐까요? 그 거대한 물결을 보면서 다시 한 번 역사의 힘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생업에도 충실해야 하지만 저도 우리 사회에 뭔가 조금이라고 기여하고자 하는 마음에서 시작하였습니다. 만인보 즉 만 명의 이야기를 써가야 하니 제가 몇 살까지 살아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민병래 회원 자신도 우리 주변에서 얼마든지 볼 수 있는 민초요 틈새인데 특히 이번 코로나 19로 직격탄을 맞은 직업에 종사하고 있다.
“저는 현수막공장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1999년에 창업해서 지금에 이르고 있으니 약 20년이 넘었네요. (https://blog.naver.com/hwangso3775) 회사 이름은 ‘황소와 나비’입니다. 처음 상호를 들으면 고깃집이냐고 묻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렇게 작명한 까닭은 ‘황소’처럼 우직하게 ‘나비’처럼 자유롭게 가자는 뜻이었습니다. 코로나가 휩쓸고 있는 상황에서 저희도 예외는 아닙니다. 행사들이 취소되거나 축소되어 여러 가지로 매출에 영향이 많은 상태입니다. 작년에 비해 절반도 안 되는 상황입니다. 다들 힘든 상황이니 꿋꿋하게 버텨갈 뿐입니다.”
‘황소와 나비’. 조선시대 민화의 주요 소재인 호랑이와 까치 그림인 호작도(虎鵲圖)가 연상되는 동시에 어딘가 도가적 여유가 느껴진다. 걷는 곳마다 깊은 발자국을 남기는 황소와 날아다닌 궤적조차 남기지 않는 나비. 어쩌면 인간의 삶과 죽음도 황소의 나비의 그것과 닮았다.
여하튼 민병래 회원은 황소처럼 삶의 무게를 감당하면서도 나비의 이상을 간직하고 싶어한다.
그러한 이상은 언제부터 꿈꾸었을까.
“저는 성균관대 80학번입니다. 1980년에 대학에 들어가 그 시대 많은 청춘들처럼 혁명적 세례를 듬뿍 받으며 대학 시절을 보냈습니다. 당시 성대 학생운동은 고양기였고 저도 그 흐름에 미력이나마 보태고자 했습니다. 지금은 성대 민주동문회 회원인데 현재 민주동문회는 장학사업을 충실히 하고 있습니다.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고초를 겪은 동문들에 대한 지원, 그리고 현재 성대 재학생들 중에서 선배들의 뜻을 이어받고 있는 후배들에게 해마다 장학금을 전달하고 있습니다. 성대민주동문회의 자랑스런 사업입니다.”
“민족성대 자랑찬 심산의 아들딸이여…” 독립투사 심산 김창숙 선생이 등장하는 〈민족성대 진군가〉는 많은 대학생들이 부러워했다. 게다가 도포 자락 휘날리는 형상의 김창숙 선생 동상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현재 성균관대에는 심산관이라는 건물 이름이 호암관으로 바뀐 지 오래다. 독립투사의 자리를 재벌 총수에게 내준 격이다. 그런 의미에서 성대민주동문회의 활발한 활동을 기대하는 바가 크다.
민병래 회원의 우직함은 현재의 직업에 20년 넘게 종사해오고 있는 모습에서뿐만 아니라 (사)푸른사람들 활동에서도 드러난다. 1994년 창립된 (사)푸른사람들은 ‘푸른시민연대’로 널리 알려진 동대문 지역의 대표적인 풀뿌리 시민단체이다.
“시민단체인 푸른사람들은 서울 동대문구에서 활동하는 시민단체입니다. 한글을 모르시는 어르신들에게 글을 깨우쳐주는 사업을 25년 넘게 하고 있습니다. 결혼 이주민이나 외국인 연수생들이 많이 들어오면서 이들을 대상으로 역시 한글교실과 다문화도서관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 단체의 이사로서 창립 무렵부터 함께 해오고 있습니다.”
나(인터뷰어)의 어머니도 6.25 전쟁통에 미처 못다 배운 한글을 푸른시민연대를 다니시며 완전히 익히셨으니 민병래 회원에게 따로 감사할 일이 생겼다.

 

2018년 6월 문화공간 갤러리에서 열린 ‘사진, 마포를 품다’에서 작품 해설중인 민병래 회원

 

민병래 회원은 푸른사람들 외에도 사진모임 ‘포피엔스’의 회원이다. 이 모임은 이재갑 사진작가와 함께 다큐멘터리 사진 작업을 추구하는 단체로 2017년 ‘마포, 한강을 품다’ 전시회에 민병래 회원도 참여했다. 본래 계획은 서울을 기록하는 차원에서 서울의 25개 모든 구를 돌면서 각 구마다 하나의 주제를 선정해 작업할 계획이었지만 마포구 다음 작업에서 멈춘 상태라고 한다. 이재갑 작가는 군함도 등 일제강제동원 문제뿐 아니라 베트남전쟁, 외국인 노동자 문제 등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묵직한 주제에 천착하는 훌륭한 작가이다. 제대로 된 스승을 만난 셈이다.
2010년 연구소 후원회원이 되면서 인연을 맺은 민병래 회원은 2012년 신흥무관학교 옛터 답사에도 참가했다.

 

2012년 연구소 주최 ‘신흥무관학교 옛터 답사’ 때 아들과 함께 기념촬영

 

“신흥무관학교 옛터 답사는 당시 중1이었던 아들과 함께 했던 여행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더욱 좋았고 행복했습니다. 답사하면서 끝도 없는 옥수수밭에서 표지석 하나 제대로 없는 터를 찾아가는 것이 쉽지 않았습니다. 그 시절, 조국을 떠나 머나먼 천리만리 길, 말도 통하지 않고 지도도 없던 길을 용감히 나서 독립군 기지를 찾아갔던 그 기개와 열정에 머리 숙여지는 답사였습니다.

끝으로 연구소 후원회원님들에게 드리는 당부 말씀을 부탁했다.
“올해 가슴 아픈 일이 많았습니다. 지소미아에 대한 정부 태도나 정의기억연대에 대한 검찰의 수사, 백선엽이 현충원에 묻힌 일 등. 가야 할 길,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은 것 같습니다. 민족문제연구소가 여전히 떠맡아야 할 과제가 적지 않다는 생각입니다. 현 정부에 대한 실망감도 없는 것은 아니지만 정부만 쳐다보고 있을 수만 없기에 우리 회원들이 해야 할 일을 의연하게 해나가야 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 코로나19 위기를 잘 극복해 나가야겠습니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니 이 글을 읽으신 분들은 반드시 ‘사수만보’를 읽어보시라. 어쩌면 그 안에 우리들 아니 나를 바라보는 어떤 사람의 따뜻한 시선을 마주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 따뜻한 시선을 통한 만 명의 이야기가 꼭 완성되어 우리들의 가슴 한켠을 뜨겁게 달구길 기대해 본다.

목, 2020/09/24- 2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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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

사월혁명 60주년 기념 특별전 <잔인한 사월, 위대한 혁명> 개막

 

 

사월혁명 60주년 기념 특별전 〈잔인한 사월, 위대한 혁명〉이 9월 25일 개막하였다. 올해는 역사적인 사월혁명이 일어난 지 60주년 되는 해이다. 이번 전시는 예기치 않았던 코로나-19 상황으로 근현대사기념관이 장기적으로 휴관하여 오랜기간 미루어졌지만 민주혁명의 서막을 알리는 1960년 4월을 기억하기 위하여 가을의 시작과 함께 전시를 개막하였다.
근현대사기념관이 주최하고 민족문제연구소가 주관하는 이번 특별전은 모두 4부로 구성되어 있다. 전시는 4월혁명이 일어나기 전 이승만정부의 독재와 부정부패, 4월혁명의 진행과정, 5·16군사쿠데타로 인한 혁명의 좌절, 그리고 문화예술인들이 민중의 힘으로 독재권력을 무너뜨린 4월혁명을 어떠한 창작활동으로 승화시켰는지 보여주고 있다.
제1부 〈우상의 시대-‘국부’가 된 독재자〉에서는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밀어붙여 1948년 초대대통령으로 선출된 이승만과 자유당 독재정권이 권력을 남용하고 부정부패를 일삼으며 어떻게 이승만을 ‘국부’로 우상화 하였는지 보여준다. 당시 이승만 우상화의 도구가 된 〈대한뉴스〉 영상들과 다양한 사료들은 독재정권을 노골화한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제2부 〈구호로 보는 사월혁명〉은 “학원에 자유를 달라”고 외치던 2·28대구학생의거와 “3·15선거는 불법이다” “정부통령선거 다시 하라”고 외치던 1차 마산의거를 지나 “이승만 정부는 물러가라” 등의 정권타도 구호와 함께 4월혁명의 반독재투쟁을 보여준다. 그리고 4월혁명 이후 “한미경제협정 결사반대”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 만나자 판문점에서” 등 사회변혁 운동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를 연표의 시대순에 따라 보여주고 있다. 또한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소장하고 있는 4월혁명 당시의 현장감 있는 모습을 담은 사진들도 함께 만나 볼 수 있다.
제3부 〈사월 그날, 이후〉에서는 1960년 4월 19일 ‘피의 화요일’이 26일 이승만의 하야로 ‘승리의 화요일’로 바뀐 이후 민중들의 혁명정신을 되살리려 한 변혁의 의지를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7·29총선으로 집권한 민주당이 4월혁명의 이념을 제대로 구현하지 못하자 대두한 혁명세력의 저항과 변혁운동 등이 5·16군사쿠데타 세력의 철저한 탄압으로 ‘미완의 혁명’이 되는 과정을 확인할 수 있다. 유물로는 4월혁명 이후 만들어진 많은 단체들이 어떠한 목소리를 내려하였는지 보여주는 격문이 실물자료로 전시되어 있다.
마지막으로 제4부 〈문학과 예술로 보는 4·19〉에서는 4월혁명이 문학과 예술에 어떠한 역사의식을 불어넣어 주었는지 볼 수 있는 공간이다. 4월혁명이 미완으로 끝나고 혁명정신이 퇴색하는 상황에서 자기반성과 사회에 대한 비판의식을 조지훈, 김수영, 신동엽 등 시인의 노래를 통해 함께 생각할 수 있다. 또한 영화와 대중가요에서 4월혁명 전후 어떠한 변화가 나타났는지를 당시의 음반과 출판물 등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특히 북한에서 남한의 4월혁명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었는지 볼 수 있는 북한자료들도 전시되어 있다.
이번 특별전시는 근현대사기념관 2층 기획전시실에서 11월 15일까지 사전예약을 통해 관람할 수 있으며 VR전시로도 제작 중이어서 10월 말부터 근현대사기념관과 민족문제연구소 홈페이지에서도 만나볼 수 있다. 〈잔인한 사월, 위대한 혁명〉 특별전을 통해 60년 전 앞선 세대가 피흘리며 쟁취하고자 했던 자유, 민주, 평등의 가치가 무엇인지 마음속에 새겨보는 뜻깊은시간이 되기를 바란다.

• 홍정희 근현대사기념관 학예연구원

수, 2020/11/11- 0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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