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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조약은 강제로 체결된 불법조약이다! – 헤이그 특사 위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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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조약은 강제로 체결된 불법조약이다! – 헤이그 특사 위임장

익명 (미확인) | 금, 2017/07/28- 1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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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호에 소개할 자료는 1907년 4월 20일 고종이 헤이그 특사에게 준 위임장이라고 알려진 문서이다.
1905년 11월 17일, 대한제국은 일제의 강압으로 체결된 ‘을사조약’으로 실질적인 주권을 잃게 되었다. ‘을사조약’ 체결 소식이 전해지자 전국에서는 의병들이 들불처럼 일어났으며, 나라의 자주 독립을 호소하며 자결하거나 친일 매국노의 처단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거세졌다.
고종은 1907년 6월 15일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제2차 만국평화회의가 개최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국권회복의 염원을 국제사회에 호소하고자 회의 참가를 요청하였다. 또한 프랑스・벨기에 주재공사 민영찬에게 이 문제를 협의하라는 훈령을 내렸고, 러일전쟁 이후 불어학교 교사로 활동하던 마르텔을 비밀리에 베이징에 파견하여 베이징 주재 러시아 공사를 만나 만국평화회의에 대한제국 대표를 초청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결국 네덜란드로부터 초청장을 받은 대한제국은 12번째 초청국으로 만국평화회의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일본은 만국평화회의에 외교권을 상실한 국가가 회의에 참가한 전례가 없다는 이유로 한국 참가를 반대했다. 러시아는 러일전쟁 이후에도 한국 독립에 대한 국제사회의 승인을 얻어내 한국에 대한 영향력을 유지하고자 대한제국을 만국평화회의에 초청하려고 하였으나 결국 일본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한다는 방침을 정하고 대한제국을 초청하는 것을 포기했다.
한편 1905년 9월 고종의 밀사인 이용익이 러시아로 건너가 국내와 비밀접촉을 하면서 만국평화회의를 준비하고 있었다. 국내에서는 상동청년회와 연결되어 이동녕, 이시영, 안창호, 김구 등이 이준과 이상설을 특사로 보내기로 의견을 모아 고종에게 특사 파견을 요청하였다. 이를 받아들여 고종은 이상설, 이준, 이위종 세 명의 특사를 헤이그 평화회의에 파견하였다.

이때 고종이 특사에게 위임장을 전해준 것으로 알려졌는데, 미국 뉴욕에서 발행된 <The Independent> 1907년 8월 22일자(주간, 제3064호), 「A Plea for Korea(By Prince Ye We
Chong)」에 이위종이 쓴 호소문과 그가 소지하고 있던 신임장의 사본 및 번역문이 게재되어 있다. 여기에는 “1907년 4월 20일 한양 경성 경운궁에서 친히 서명하고 옥새를 찍노라”고 적혀 있다. 연구소가 소장한 ‘위임장’은 ????The Independent????에 소개된 것을 해방 이후 복제한 것으로 추정된다.
1907년 6월 25일 헤이그에 도착한 세 특사는 6월 27일자로 서명된 각국 대표에게 보내는 탄원서를 지니고 활동을 개시했다. 이들은 중재재판을 취급하는 만국평화회의 제1분과위원회를 찾아가 한국문제를 다루어 줄 것을 요청하고, 일본을 제외한 40여 개 참가국에게 탄원서를 배포하였으며 영국·미국·프랑스·독일의 대표위원을 만나 한국 독립을 지원해 줄 것을 강력히 호소하였다.
그러나 당시는 일본이 제국주의 열강으로부터 한국에 대한 지배권을 승인 받은 상태였기 때문에 어느 나라도 일본의 반대를 무릅쓰고 한국의 독립을 지원하려 하지 않았다. 일본의 집요한 방해공작과 열강의 냉담한 반응으로 한국독립을 위한 외교활동은 당시 국제관계를 볼 때 성공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결국 특사의 희망과는 달리 만국평화회의는 한국을 철저히 외면했다.
일본은 헤이그특사 파견을 ‘을사조약’ 위반행위로 몰아 7월 22일 고종을 강제 퇴위시켰다. 이준 특사는 현지에서 순국하고 이상설·이위종 두 특사는 망명했다. 그들은 끝내 고국에 돌아오지 못했다.

대한제국특파위원 전 의정부 참찬 이상설, 전 평리원 검사 이준,
전 주러시아공사관 참서관 이위종 위임장

대황제가 칙서를 내리는바 우리나라의 자주독립은 세계 여러 나라가 공인한 것으로 짐이 지난번 여러 나라와 조약을 맺고자 하여 서로 우방으로서 긴밀함을 갖은즉, 이제 세계 여러 나라가 평화를 위하여 한 자리에 모이기에 응당 참석함이 마땅한 것인데 1905년 11월 18일 일본이 우리나라에 대하여 국가 간의 법을 어기고 도리에 어긋난 협박으로 우리의 외교권을 빼앗아 우방과의 외교를 단절케 하였다. 또한 일본의 모욕적인 침략은 이르지 않은 곳이 없을 뿐더러 그 침략의 의도는 인도자의 도리에도 어긋나는 것이다. 짐의 생각이 이에 미치니 참으로 가슴 아픔을 느끼는 바이다. 이에 여기 종2품 전 의정부 참찬 이상설, 전 평리원 검사 이준, 전 주러시아공사관 참서관 이위종을 특파하여 네덜란드 헤이그 평화회의에 가서 본국의 모든 실정을 온 세계에 알리고 우리의 외교권을 다시 찾아 여러 우방과의 외교관계를 원만하게 하도록 바라노라. 짐이 생각건대 특사들의 성품이 충실하고 강직하여 이번 일을 수행하는 데 가장 적임자인 줄 안다.
대한 광무 11년 4월 20일 한양 경성 경운궁에서 친히 서명하고 옥새를 찍노라.

대황제 수결 황제어새

 

∷ 강동민 자료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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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일 종족주의’론자들의 역사부정과 진실, 정의의 문제

조시현 연구위원


이 글은 2019년 9월 25일 민족문제연구소와 일본군‘위안부’연구회가 공동 주최한 <<반일종족주의> 긴급진단 ­‘역사부정’을 논박한다> 토론회에서 발표한 토론문을 약간 수정한 것이다.


 

1. <반일 종족주의>에는 역사도 없고 인간에 대한 존중도 없다

이영훈 등이 낸 <반일 종족주의>라는 책은 주류적 역사해석에 대한 도발, 상식의 해체, 단언적 서술 등을 통해 명쾌하고 매력적이라는 인상과 느낌을 주는데 어느 정도 성공한 모양이다.
현재 한국의 정치지형 속에서 일정한 지지를 얻고 있는 것처럼 보이니 말이다. 그러나 이들의 주장 대부분은 그들이 약속한 실증이 아니라 불합리한 추론(non sequitur)과 논리적 비약으로 점철되어 있다. 겉으로는 전문서적으로 보일지 몰라도 학술적 뒷받침이 없는 ‘가짜’ 학문에 불과하다. 결국 대중을 겨냥한 또 하나의 역사를 부정하는 선동에 그치고 있다.
좀 더 구체적으로 그들의 주장 가운데 상당 부분은 강제동원과 전시 성노예로서의 ‘위안부’의 부정에 할애되어 있다. 이들은 피해자의 증언을 모두 거짓말로 등치시키고 예외에 속할 일부 사례를 들어 전체의 것으로 일반화하는 오류 등을 범하고 있다. 또한 구술이 역사에서 차지하는 중요성은 물론 피해자의 관점과 그들의 인권에 대한 어떠한 고려도 없다. 이 책은 피해자들에게 가해진 범죄를 역사적으로 규명하고 알려야 함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은폐하고 용인하는 반역사적 시도라고 할 수 있다.
더욱이 이들의 주장은 “선진국”이라는 가치를 설정한 것 말고는 다른 모든 가치들을 부정하는 반윤리적 성격을 가진다. 이는 침략전쟁의 죄과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으려는 일본정부의 태도와 맞닿아 있다. 이러한 책임의 부정은 법과 정의에 기반을 두고 발전하여온 문명 자체를 부정하려는 시도라고도 할 수 있다. 또한 강제동원에 관한 진실을 두고 “조총련계 학자들”이 만들어낸 것이라고 태연히 말하고 있는 것을 보면 이들은 공산주의와의 대결이 낳은 “빨갱이” 망령과 냉전적 사고에 여전히 사로잡혀있는 것으로 보인다. 자신들과 다른 주장을 하는 사람들을 절멸의 대상인 적으로 설정하면서 역사전쟁을 운운하고 있다.
역사란 마치 각자의 진영 속에서 진실이라곤 끼어들 틈이 없는 오직 이기기 위한 전략과 전술의 플레이라는 인식과 잘못된 지난날이 반복되건 말건 상관없다는 식의 태도를 보여주는 것 같아 섬뜩하기까지 하다. 이들이 구성하는 역사는 한마디로 데리다가 말하듯 “우리와 더이상 같이 있지 않은 사람들이나 앞으로 올 사람들에 대한 존중이 없는 역사”라고 할 것이다(Specters of Marx(마르크스의 유령들), xviii).

2. <반일 종족주의>는 식민지 범죄에 대한 은폐이자 역사범죄이다

<반일 종족주의> 저자들의 무리한 주장의 기반이 어딘지도 주목된다. 이들의 주장은 특히 2012년에 나온 강제동원에 관한 대법원 판결을 뒤집으려고 했던 사법적폐 세력의 주장과 판박이다. 대법원은 최종적으로 2018년 10월 30일 전원합의체 판결을 통하여 일본의 가해기업인 신일본제철에 대해 피해자들에게 손해배상으로서 위자료를 지급할 것을 명하였다. 일제의 식민지배의 불법성을 인정하고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인권에 손을 들어주었던 것이다. 일본정부는 즉각 이 판결에 반발하였고 한일 간의 갈등이 계속 되고 있다.
이러한 가운데 <반일 종족주의>란 책이 나왔고 대법원의 판단과는 동떨어진 주장이 이어지고 있다. 이들의 주장은 대법원 판결이 청구권협정에 위배된 것이라며 판결을 무력화하려는 일본정부의 주장과 닮아있다. 그런 까닭에 이 책의 저자들이야말로 “친일 종족주의자”라는 비난도 나오고 있다. 이 책은 기득권을 지켜보고자 하는 세력의 매니페스토(manifesto)임과 동시에 피해자들의 삶에 공감하지 못하는 자신들의 슬픈 인생에서 나온 피해자들에 대한 혐오와 증오 발언에 지나지 않는 것 같다.
<반일 종족주의>란 책을 학문이나 표현의 자유라는 이름으로 정당화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이러한 역사부정 문제에 대하여 전 세계적인 대응노력이 주목된다. 유대인에게 자행된 홀로코스트나 나치범죄는 물론이고 아르메니아 학살과 같은 제노사이드나 반인도적 범죄를 정당화하려는 온갖 시도에 맞서 세계 곳곳에서 형사입법과 처벌이 이루어지고 있다. 식민지배 시기 동안 있었던 학살, 수탈 등 식민지범죄에 대한 관심과 탈식민주의 요구는 오래 전에 있었던 일이라고 해도 오히려 커가고 있다. 한국에서도 각종 과거사정리 작업이 진행되고 있지만 한계도 많이 보이고 있다.
대일 과거사문제 역시 단박에 청산되거나 정리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특히 인권침해에 대하여 국제법상 전쟁범죄와 인도에 반한 죄가 적용되어 단죄한 적은 없었다. 이러한 중대한 범죄자가 처벌되지 않는 이른바 불처벌(impunity) 문제에 대한 고민과 불처벌의 현실 속에서 확산되는 역사부정의 움직임에 대한 대응 방안도 진지하게 논의되어야 할 것이다.

3. <반일 종족주의>에는 민족이 없다

이 책의 저자들은 한국사회의 이른바 주류적 역사서술과 피해자운동을 “반일 종족주의”라고 싸잡아 비난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은 “반일 종족주의”가 무슨 말인지 정의조차 하지 않는다. 이들에 따르면 이 말은 물질주의와 거짓말을 토템으로 하는 샤머니즘에 사로잡힌 “한국인의 정신문화”를 표현하는 것이라고 한다(20-21쪽). 이 샤머니즘의 집단이 바로 종족이며 이웃을 악의 종족으로 감각한다고 한다.
‘종족’(tribe 또는 ethnic group)이란 말을 현재와 “지난 60년간의 정신사”에 대한 설명을 위해 쓰고 있는 모양이지만 하나의 분석개념으로서 갖추어야할 기초적인 엄밀함은 보이지 않는다.
이러한 이름붙이기를 통하여 분석 단위로서 ‘민족’이란 개념을 비하하는 의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이들이 구체적으로 이러한 호명의 근거로 들고 있는 것 역시 민족이란 집단 현상을 도외시한 원자론적 서사와 감상의 나열이 그치고 있다.
이렇게 민족주의와 종족주의의 차이를 말하지도 못하는 반일 종족주의론자들은 일제 강점이전의 조선이 갖는 국가성과 근대지향을 부정하려는 기획을 드러낸다. 국가 또는 민족이라는 양가적 의미를 가지는 ‘네이션(nation)’으로서 조선을 부정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은 조선과 현대 한국의 네이션을 종족으로 대체하는 반역사적 태도를 통해 그들이 비판하고자 하는 주류적 역사인식을 뒤틀고 있다. 하지만 이 땅에도 서구에서 만들어진 보편적인 범주로서 네이션은 현실로서 있었고 이 개념은 오늘날까지도 민족과 국가를 형성하며 부단하게 펼쳐지고 있으며 현실을 파악하기 위해 유용하다고 할 수 있다.
이들이 실증의 근거로 제시하는 문서나 수치들은 바로 식민지배의 정당화라는 틀 속에서 작성된 것이라는 사료비판도 없다. 결국 이들은 문서작성자의 세계관에 동조한 나머지 일제의 식민지배는 나쁘지는 않았다는 이미지를 만들어내고 있다. 이들이야말로 곧 일제의 통치를 미화하려했던 식민사관의 후예라고 할 만하다.

4. <반일 종족주의>에는 일제의 제국주의/식민주의에 대한 비판도 없다

이 책은 또한 제국주의 또는 식민주의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과 비판이 없이 마치 강제동원과 ‘위안부’의 역사를 신화인양 부정하는데 골몰하고 있다. 한나 아렌트는 <전체주의의 기원> 이라는 책에서 범게르만주의와 범슬라브주의를 비판하며 인종주의와 결부된 “종족적 민족주의”를 말한 바 있다. 이들이 한국사회를 비판하며 제시한 종족주의라는 말은 오히려 제국주의 일본의 민족주의 비판에 걸맞다. 반일 종족주의를 말하기에 앞서 일제의 파시즘에 대한 비판이 선행되어야 한다.
이 책은 일제에 의한 “주권강탈”(42쪽)을 말하긴 한다. 그러나 식민지 통치시스템이 무엇이었는지는 말하지 않는다. 일제는 조선을 ‘병합’하여 일본의 일부, 즉 자기나라로 만들었지만 식민지로 통치하였다는 모순은 해명되지 않는다. 일제의 통치가 잘된 일이었다는 인상을 독자들에게 심어주기에 바쁘다. 명색은 한일병합이라고 떠들었지만 현실은 식민지배를 상징하는 총독에 의한 통치였다는 점, 조선총독은


역사란 마치 각자의 진영 속에서 진실이라곤 끼어들 틈이 없는 오직 이기기 위한 전략과 전술의 플레이
라는 인식과 잘못된 지난날이 반복되건 말건 상관없다는 식의 태도를 보여주는 것 같아 섬칫하기까지 하
다. 이들이 구성하는 역사는 한마디로 데리다가 말하듯 “우리와 더 이상 같이 있지 않은 사람들이나 앞
으로 올 사람들에 대한 존중이 없는 역사”라고 할 것이다


 

천황 이외에 어떠한 법적 통제를 받지 않았고 군대에 의해서만 지배체제가 유지될 수 있었다는 점, 식민지 조선에 실시한 법이라는 것은 천황제 아래 삼권을 가진 총독의 의사에 좌우되는 전제적인 것이었고, 그 마저도 일본 내지의 법과 별개의 이원적 체계로서 관료체제를 통제하지도 못했으며 오로지 식민통치의 편의를 위한 것으로 주민의 의사가 반영되지 않은 채 종주국의 이익에 철저하게 봉사하는 법이었다는 점, 일제의 식민지배에 법이 어떤 역할을 했다고 하기보다는 법은 통치술의 하나에 불과했다는 점, 이러한 법 현실은 언제나 정의의 공백을 낳았고 오늘날까지 정의를 갈구하는 피해자들의 외침으로 현재화되고 있다는 점, 병합은 결국 영토의 통합 즉 일제의 영토 확장이었지 국민간의 통합이나 EU식 지역통합이 아니라 원천적으로 조직적인 민족차별을 낳고 끝내 죽음의 강제동원으로 주민들을 내몰았다는 점, 병합과 식민통치 방식 사이의 모순은 결국 민족자결의 요구로 분출할 수밖에 없다는 점 등에 대한 어떠한 이해도 보이지 않는다. 이들의 논리대로라면 ‘해방’이라는 것은 민족과는 무관한 일이 되고 ‘독립전쟁’은 아무런 의미가 없으며 국권회복을 말할 여지가 없이 1948년에 건국했다는 스토리와 연결된다. 이는 바로 한일국교정상화 과정에서 보여주고 지금도 일본의 우익이 견지하고 있는 역사관, 즉 일제의 패전으로 한국이 분리독립하게 되었다는 역사서술의 한국판이다.

5. 청구권문제와 강제동원문제는 끝난 게 아니다

한일 청구권문제와 관련하여 주익종은 특히 “애당초 한국 측이 청구할 게 별로 없었”다와 “한일협정으로 일체의 청구권이 완전히 정리되었”다를 “팩트”라고 주장한다(115쪽). 그가 얘기하는 팩트라는 것이 사실 또는 진실의 의미라고 한다면 이 주장들은 다 사실이 아니다. 먼저 “별로” 없었는지 있었는지는 어떤 판단 기준이 없이는 말할 수 없는 명제이다. 별로였는지는 어떤 일이 있었느냐 없었느냐의 사실 여부 또는 진위문제가 아닌 판단과 의견의 문제이다. 진실은 청구할 것이 여러 가지 있었다는 것, 별로 없었는지 여부에 대해 정확한 산정을 거친 끝에 3억불 해당의 무상공여가 된 것도 아니라는 점, 그 가운데 ‘위안부’문제는 한일회담에서 거론조차 안 되었고 따라서 “별로”인지 알 수도 없다는 점이라고 생각된다.
더욱이 “완전히” 끝난 것인지 여부 문제는 협정의 해석에 따라 판단되어야 하는 규범적 요소를 내포하고 있으므로 ‘끝났다’는 것도 팩트만의 문제라고는 할 수 없다. 완전히 끝났는지에 대하여 여전히 한일 정부가 입장 대립을 보이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대립이 어떻게 풀려갈지 지켜봐야 아는 문제이다. 현재진행형의 얘기를 끝났다고 말하는 것이 과연 누구의 이익을 위해 봉사하는 것인지 잘 따져볼 문제다.
현재 판결을 받긴 하였지만 위자료를 받지 못하고 있는 강제동원 피해자들과 관련한 이들의 입장도 주목된다. 청구권협정을 체결하는 과정에서 또한 청구권협정에 대한 합의의사록이 언급하고 있는 ‘대일청구요강 8개 항목’에서 “피징용자의 미수금과 보상금”이 언급되긴 하였다. 그러나 과연 이들이 누구인지, 어떤 일을 당했는지, 보상금에 불법행위로 인한 손해배상금이 포함되는지 여부 등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정해진 바가 없이 두 나라사이에 협정이 체결되었다.
따라서 피해자들은 협정이 맺어진 이후에도 자신들의 권리를 계속 주장해야하는 처지가 되었고 이들의 노력은 2018년의 대법원 판결로 귀결되었다.
이러한 점들이야말로 강제동원문제에 관한 주요한 사실들이라고 할 수 있다. ‘완전히 끝났다’는 것은 어느 한 쪽의 협정 규정에 대한 해석이고 규범적 주장이지 단순한 팩트 문제가 아니다. 이러한 해석에 상대방도 동의하거나 양쪽이 따라야하는 유권적인 해석이 나와야 정리될 문제인 것이다. ‘끝났다’는 논리는 피해자들에게 윽박지르며 가만히 있을 것을 강요하는 셈이다. 이 문제가 끝난 것으로 결론을 내려야한다는 주익종(또는 아베 식의)의 강박관념은 그로 하여금 “징용 노무자의 정신적 피해는 당초부터 청구하지 않기로 한 것”(126쪽)이라는 주장으로 이끈다.
그가 무엇으로 이 주장을 뒷받침하고 있는지는 책에는 나타나 있지 않다. 만의 하나 그의 주장대로 청구하지 않은 것이 사실이라 하여도 법적으로는 그러한 사실에서 권리의 포기라는 결론을 내릴 수는 없다. 권리를 포기한다면 명확하게 포기한다는 의사표시가 있어야 한다. 국제법에는 외국에 대하여 자국민을 보호하기 위한 외교적 보호제도가 있다. 이는 국가의 권리로서 이를 포기한다는 것은 국가이기를 포기한 것과 마찬가지이다.
징용노무자의 피해배상을 요구하지 않았다면 이는 당시 정부가 그 권리를 행사하지 않았을 따름이고 나중의 정부가 피해자의 요구를 받아들여 얼마든지 대응할 수 있다. 일본이 가해책임을 인정하도록 만드는 것은 피해자 개인을 떠나 어떤 국가와 어떤 세계에서 살 것인가 하는 문제로 모두에게 달려있다.

6. 식민배상문제도 남아있다

주익종은 또 “국제법, 국제관계에 식민지배 피해에 대한 배상 같은 건 없었습니다. 한국이 배상 받으려고 해도 그렇게 할 수 없었습니다”(126쪽)라고 주장한다. 바꿔 말해 식민배상은 없었다, 즉 사실에 관한 서술을 하며 현실론을 전개하고 있다. 쉽게 쓰려다 보니 배상의 선례가 없었다고 말하는 것 같지만 선례가 없었다고 하여 그에 관한 “국제법”이 없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법이 있냐, 없냐의 문제는 사실문제 같아 보이지만 규범적 판단을 내포한 문제이기도 하다. 선례가 없었다고 법이 없다고 할 수는 없다. 해야 할 일은 선례를 만들어 법을 확인하는 일이다. 대법원의 판결은 이러한 맥락에서 규범 차원에서 해야 하는 일을 실천한 사례로 이해할 수 있다.
또한 이 책의 필자들이 일제하에서 재산권이 보장되었음의 근거로 드는 것이 조선민사령이다. 이는 일본의 민법을 총독의 명령에 의해 조선에 빌려 썼던 것인데 여기에서도 현재 한국의 민법처럼 불법행위에 대한 손해배상을 인정하였음이 팩트이다. 이러한 손해배상문제를 다루는 것이 “식민지배 피해에 대한 배상”을 하는 출발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배상문제를 다룰 법적 여지는 식민체제하에서도 있었던 것이지만 실현될 수 없었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또한 일본의 패전이후 1951년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에서건 1965년 한일협정에서건 식민지배하에서의 배상문제가 다루어지지 않았다는 사실만 가지고 “그렇게 할 수 없었”으니 지금도 할 수 없다는 논리가 서는 것은 아니다.2 그럴 수 없었다는 것은 거꾸로 식민배상문제가 처리되지 않았다는 반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또한 청구권협정이 재산문제를 해결한 “최선의 합의”라고 주장하면서 이를 통해 일본과의 과거사가 청산되었고 이게 “글로벌 스탠더드”라고 결론을 내리고 있다(127쪽). 그러나 오늘날 세계적인 조류는 오히려 식민지배와 식민지범죄에 대한 사죄와 배상을 인정하는 것이다.
한국과 일본 말고도 이탈리아와 리비아, 영국과 케냐 및 인도, 네덜란드와 인도네시아, 독일과 나미비아, 프랑스와 알제리, 스페인과 멕시코, 카리브해 국가들과 구 종주국들 사이에 식민 지배 아래 발생한 각종 반인도적 범죄에 대한 사죄와 배상요구가 이루어지고 있으며 일부 성과도 나오고 있다. 특히 2019년 3월 26일에는 유럽연합 차원에서 유럽의회는 “유럽의 식민주의에 의해 아프리카에서 자행된, 과거는 물론 지금도 계속되는 부정의와 인도에 반한 범죄의 역사를 유럽연합 기관들과 회원국들이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기념할 것”을 촉구하는 결의를 통과 시키기도 했다. 청구권협정의 진실은 협정으로 전쟁배상도 식민배상도 한 것이 아니라는 데에있다.


2 116쪽의 표에서는 대일 강화조약 제14조의 내용을 (a) 일본인 재산몰수와 연합국의 추가배상 협상에 관한 권리와 (b) 연합국과 그 국민의 청구권 포기로 요약하고 있는데 제14조에서 가장 중요한 내용을 빠뜨리고 있다. 즉 제14조는 첫머리에 “일본이 연합국에게 전쟁 중에 일본에 의해 야기된 손해와 고통에 대하여 배상금(reparations)을 지불하여야 한다는 것을 승인한다”고 하여 명확하게 일본의 전쟁배상 책임원칙을 확인하고 있다. 청구권협정에는 이와 유사한 어떤 표현도 쓰여 있지 않고 따라서 배상의 성격을 갖는다고 할 수 없다.


 

 

식민지하의 범죄와 불법행위에 대한 배상은 언급도 되지 않았다. 대법원 판결로 초점이된 강제동원문제는 이러한 세계사적 흐름 속에서 해결되어야할 것이다.

 

 


국제법에는 외국에 대하여 자국민을 보호하기 위한 외교적 보호제도가 있다. 이는 국가의 권리로서 이
를 포기한다는 것은 국가이기를 포기한 것과 마찬가지이다. 징용노무자의 피해배상을 요구하지 않았다면 이는 당시 정부가 그 권리를 행사하지 않았을 따름이고 나중의 정부가 피해자의 요구를 받아들여 얼마든지 대응할 수 있다. 일본이 가해책임을 인정하도록 만드는 것은 피해자 개인을 떠나 어떤 국가와 어떤 세계에서 살 것인가 하는 문제로 모두에게 달려있다.


 

7. 맺으며

<반일 종족주의>라는 책은 강제동원과 ‘위안부’문제와 같이 오늘의 행동을 결정짓는 데에 있어서 여러 복합적인 요소들에 대한 종합적인 판단이 필요한 사안에 대하여 무엇이 팩트인가로 이슈를 단순화하면서 사실과 법의 문제를 뒤섞어놓고 그릇된 의견과 행동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아주 현실참여적인 책이기도 하다. 더욱이 이들은 한국의 최고 법원인 대법원의 판결에 대하여 또 다른 최종심급 역할을 자임한다. 판례에 대한 비판을 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 아니다. 그들의 단정적이고 교조적인 주장에는 그들이 생각하는 법원리가 들어가 있으므로 그러한 법이해가 올바른지 검증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사태가 여기까지 온 이유 가운데 하나는 과거사와 법 또는 정의와의 관계에 대한 성찰이 부족하기 때문은 아닌지 묻게 된다. 법의 문제는 법이 어느 사건이나 시기에 작용했어야 하지만 그러지 못하고 배제되기도 했다는 점에서 팩트의 문제이기도 하다. 이런 의미에서 법도 역사속에서 같이 흐르며 힘의 관계에서 자유롭지 않다. 어느 행위를 합법이라거나 불법으로 생각했다는 것도 팩트이다. 과거에 어떤 판단을 했다면 그것은 법적 의미를 가지는 팩트이지만 그렇다고 현재의 필요에 따른 법적 판단을 배제하는 것은 아니다.
데리다의 말을 다시 빌리면 언제나 이미 현재화될 가능성을 가진 법 또는 정의라는 유령은 과거에서 현재를 거쳐 미래를 향해 배회하고 있다. 과거의 법을 화석처럼 현재의 법과 단절된것으로 사유하지 않는 가운데 한일회담에서 그리고 청구권협정의 문구에서 배제된 이들의 희망을 쓰는 역사 서술을 기대해본다. (<월간 순국> 2020년 3월호)

화, 2020/05/26- 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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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

신흥무관학교기념사업회 주최 한국광복군 창설 80주년 기념

강화 드라이브스루 답사

연구소가 사무국을 맡고 있는 신흥무관학교기념사업회가 주최하고, 연구소와 서울시의 후원으로 9월 26일(토), 10월 24일(토), 25일(일) 총 세 차례의 ‘한국광복군 창설 80주년 기념답사’를 강화도에서 진행했다. 이번 답사는 올해 코로나19로 인해 답사 장소와 일정이 몇 차례 변경된 끝에 드라이브스루 답사라는 방식으로 실시하게 되었다. 당초 올해 신흥무관학교기념사업회의 답사는 한국광복군 창설 80주년을 맞아 정미의병(강화), 신흥무관학교(안동), 조선의용대(밀양)를 차례로 살펴보며 한국광복군의 원류를 되돌아보고자 했는데 코로나19로 강화도에서만 답사를 진행하게 되어 아쉬운 마음이 컸다.
드라이브스루 답사는 참석자 각자가 자기 차를 타고 답사지로 이동하며 진행했다. 방역 수칙에 따라 참가자 전원이 항상 마스크를 썼고 각 차량에는 3명 이상 타지 않도록 제한을 뒀으며, 식사도 흩어져 도시락을 먹었다. 3차례의 답사에는 총 67명(1차 17명, 2차 18명, 3차 32명)의 참가자와 스태프 3명(방학진 기획실장, 신다희 총무 부팀장, 김무성 회원사업 부팀장)이 참여했다. 답사 안내는 1차 답사에 황평우 한국문화유산정책연구소 소장이, 2차 답사에 한정우 산마을고등학교 선생님이, 3차에 방학진 기획실장이 맡아주었다.

 


답사는 강화 만남의 광장에 집결하는 것으로 시작해서 통제영학당 옛터에서 성공회 강화성당, 합일초, 강화중앙교회를 차례대로 보고, 마지막으로 연미정으로 이동하며 진행되었다.
첫 답사지인 통제영학당은 대한제국에서 세운 최초의 근대식 해군사관학교이다. 이동 중 보수 공사 중인 진해루 외벽에 그려진 강화의 역사를 표현한 그림 앞에서 강화의 지리와 역사에 대해 듣고, 강화도에서 벌어진 수차례의 민간인 학살에 대한 이야기도 나누었다. 2009년 해군참모총장이 세운 표지석 외엔 아무것도 없는 공터인 통제영학당 옛 터에서 대한민국 국군의 뿌리가 어디인지 생각해 볼 수 있었다.
성공회 강화성당으로 이동하여 성당 앞 공원에서 답사단은 흩어져 도시락으로 점심 식사를 했다. 식사 후에 구한말에 상대적으로 늦게 들어온 성공회와 감리교회가 강화도 민중들에게 다가가기 위해 기울인 노력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한옥 성당인 성공회 강화성당은 이런 답사가 아니더라도 한번쯤 볼 만한 건축물이다. 합일초등학교에서 백범 김구의 친필을 보며 백범 김구가 청년 시절 강화도에서 잠시 머물렀던 사연을 듣고 근처 강화중앙교회로 이동했다.
강화중앙교회(잠두교회)는 강화 최초 교회로 잠두의숙(훗날 합일초등학교)을 설립했다. 성공회와 감리교 등 기독교로 인해 근대교육을 받은 강화의 민중들은 3·1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된다. 민중교육에 힘썼던 초기 기독교를 보며, 변질된 현재의 한국 기독교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었다.
3차 답사에서는 김구 선생이 1900년 강화도에서 숨어 지내는 동안 서당을 열어 강화 아이들을 가르쳤던 고택 대명헌에 방문해 이 집의 운영자인 최성숙 님의 배려로 관람했다. 연미정으로 이동하기 전에 한국광복군 설립 80주년의 의미, 내년 신흥무관한교 설립 110주년에 대해 설명하며, 국군의 날과 의병의 날 등 기념일을 변경해야 하는 필요성에 대해 이야기했다. 마지막 답사지인 연미정에 오른 답사단은 바로 눈앞에 보이는 북한 땅을 보며 저렇게 가까운 곳에 가지 못하는 분단 현실과, 남북 간의 교류가 정체되고 있는 상황에 대한 안타까움을 느꼈다.
마치 나들이하듯 참여한 답사단은 강화도 지역 역사에 대한 설명을 들으며 무척이나 만족스러워했다. 코로나19로 인해 적은 인원수로 최대한 대면 접촉을 줄이려고 노력한 답사였는데, 참가자들이 적극적인 자세로 임해주었고, 반응도 뜨거웠다. 참가자들의 뜨거운 반응을 보며 코로나19라는 어려운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드라이브스루 방식의 소규모 답사를 앞으로 계속준비하고자 한다.

• 기획실 회원사업 부팀장 김무성

수, 2020/12/02- 2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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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 비망록 58]

친일파 인사 35명이 요리집 식도원(食道園)에 급히 모인 까닭은?
표석 하나로 남은 이봉창 의사의 효창동 집터

이순우 책임연구원

『매일신보』 1936년 1월 1일자에 수록된 조선식 요리점 식도원(食道園)의 근하신년광고이다.

 

청계천의 광통교(廣通橋)를 남쪽으로 건너자마자 곧장 나타나는 한성은행(漢城銀行, 나중의 조흥은행)
을 끼고 두 번째 가게 옆으로 감아돌면 남대문로 쪽으로 출입구를 낸 식도원(食道園, 남대문로 1가 16번지 및 삼각동 78번지 일대)이라는 유명한 조선식 요리점이 그 안쪽에 자리하고 있었다. 이곳은 기생요리집의 대명사인 명월관(明月館)의 주인이던 안순환(安淳煥, 1871~1942)이 1920년 11월에 식도상회(食道商會)와 더불어 설립하였으며, 궁중식(宮中式) 조선요리와 함께 일본식 및 서양식 요리를 곁들여 제공하는 한편 신식교육을 받은 젊은 신랑신부의 결혼식도 곧잘 벌어지는 공간이기도 했다.

이른바 ‘불경사건’의 범인이 조선인이라는 사실에 경악한 친일파 인사 35명이 식도원 요리점에 급히 모
여 충성 결의를 하고 있는 장면이 수록된 『매일신보』 1932년 1월 10일자의 보도내용이다.

 

그런데 1932년 정초가 되어 9일째가 되던 날에 이곳 식도원에 35명이나 되는 서울 장안의 난다 긴다 하는 친일파 인사들이 근심 어린 낯빛으로 줄줄이 모여들었다. 참석자 가운데 도지사 출신의 신석린(申錫麟)을 좌장으로 삼아 머리를 맞대고 수군거림이 잠시 이어지더니 이들은 다음과 같은 회합의 결의문을 채택하였다.

하나, 총리대신, 척무대신, 궁내대신 및 동상중(東上中)의 총독(總督)에게 봉위(奉慰)의 전보(電報)를 타전(打電)함.
하나, 7명의 위원을 선정하여 총독부, 군사령부를 방문, 봉위의 뜻을 표함.
하나, 3일간은 일체 도락적 연회(道樂的 宴會)에 출석치 않음.
하나, 재성(在城) 신문잡지에 근신(謹愼)의 뜻을 표하고 동포(同胞)에게 근신의 지(旨)를 종용(慫慂)함.
하나, 전보 발신명은 좌(左)의 7명으로 함. 위원(委員) 한상룡(韓相龍), 박영철(朴榮喆), 신석린(申錫麟), 조성근(趙性根), 김명준(金明濬), 민대식(閔大植), 박승직(朴承稷).

 

곧이어 이들은 이러한 결의에 따라 다음과 같은 내용의 봉위전문(奉慰電文)을 즉각 타전하였다.

 

작일(昨日) 돌발(突發)한 불경사건(不敬事件)에 대하여는 오직 공구불이(恐懼不已)이오며 충성(忠誠)으로써 근신(謹愼)의 의(意)를 표(表)하옵나이다. 경성조선인유지(京城朝鮮人有志).

 

이들이 이러한 위문전문을 서둘러 발송한 것은 바로 전날 일본 도쿄에서 발생한 사쿠라다몬사건(櫻田門事件) 때문이었다. 그 당시 내무성(內務省)의 발표에 따르면, 해마다 신년행사로 벌어지는 육군시관병식(陸軍始觀兵式)에 나갔다가 돌아오는 일본 천황의 노부(鹵簿, 의장행렬)가 경시청(警視廳) 앞을 닿으려 할 찰나에 누군가 이를 향해 수류탄을 던졌고, 그 범인으로 조선 경성 출신의 이봉창(李奉昌, 1901~1932)이 현장에서 즉시 체포되어 취조중이었던 것이다.
이들이 안절부절 못한 것은 이러한 ‘불경사건’의 범인이 바로 조선인이었다는 사실 그 자체에서 비롯된 일이었다. 중추원 참의이자 조선생명보험 사장이던 한상룡(韓相龍)과 같은 이는 이소식을 듣자마자 지체 없이 이러한 소감을 피력한 바 있었다.

불경사건은 공구(恐懼)의 염(念)을 금치 못하는 바요, 특히 범인(犯人)이 조선 사람이라 함을 들을 시에 더욱 황공무지(惶恐無地)외다. 따라서 우리 조선 사람으로는 일층 더 근신(謹愼)하여야 하겠다는 외에는 무어라 말씀하여야 좋을지를 모르는 바외다.

 

이러한 장면은 마치 1909년 이토 히로부미가 안중근 의사의 저격으로 숨졌을 때 얼빠진 친일단체와 몇몇 친일인사들이 사죄단(謝罪團)을 꾸려 일본까지 건너갔듯이 그 일을 고스란히 빼다 박아놓은 것이나 다를 바 없었다. 더구나 꼴불견에 가까운 이러한 광경은 비단 식민지 조선에서만 벌어진 것이 아니었다.

 

마루야마 회장이 이끄는 상애회(相愛會) 회원 400명이 도쿄황거 이중교 앞에서 늘어서서 궁성요배와 함께 눈물을 흘리며 충성 맹세를 하는 광경이 수록된 『경성일보』 1932년 1월12일자의 보도내용이다.

 

<경성일보> 1932년 1월 12일자를 살펴보면, 황거(皇居) 앞 이중교(二重橋)를 배경으로 두 줄로 늘어선 사람들의 모습이 포착된 보도사진 한 장이 수록되어 있다. 알고 보니 이들의 정체는 도쿄 지역에 거주하는 상애회원(相愛會員) 4백 명이었다.
잘 알려진 바대로 상애회는 1921년 12월에 도쿄 지역 조선인 노동자의 상호부조단체인 노동상구회(勞動相救會)를 개편하면서 탄생하였고, 친일주구로 악명이 높은 이기동(李起東, 1885~1952)과 박춘금(朴春琴, 1891~1973) 같은 이가 이 조직의 중심인물이었다. 그 이후 1928년 4월에 재단법인으로 전환하면서 조선총독부 경무국장 출신(1922.6.17~1924.9.12 재임)의 마루야마 츠루키치(丸山鶴吉, 1883~1956)가 이사장에 취임하였고, 특히 박춘금은 그의 전폭적인 후원에 힘입어 1932년 3월 조선인으로 최초이자 유일하게 대의사(代議士, 중의원 의원)에 당선되기도 했다.
그런데 이 사진에 붙어 있는 설명문에는 “눈물을 흘리며 충성을 맹세하다”는 구절이 들어있다. 그러니까 이들은 대불경사건이 조선인의 손에 의해 행해졌다는 사실이 그저 송구스러워 사건 바로 다음날 이른 아침부터 궁전 앞에 모여 요배(遙拜)를 하고 ‘천황폐하만세’를 삼창(三唱)하면서 절절한 충성 맹세의 장면을 연출했던 것이다. 이 자리에서 행렬 앞에 나선 마루야마 회장은 “금후에는 국가를 위해 내선융화(內鮮融和)에 노력할 것을 맹세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훈시를 덧붙였다.
전날의 거사를 벌인 이봉창 의사는 본적(本籍)을 ‘경성부 금정(錦町, 지금의 효창동) 118번지’에 두었으나 원래 출생지는 통칭 ‘당현(堂峴, 당고개)’으로 불렀던 ‘경성부 원정(元町, 지금의 원효로) 2정목(지번은 미상)’이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아버지 이진구(李鎭球)와 어머니 밀양손씨(密陽孫氏) 사이에 둘째아들로 태어났으며, 형제로는 위로 이범태(李範泰)와 아래로 이점동(李点童) 외에 이복동생인 이봉준(李奉俊), 이봉운(李奉雲), 이종태(李鍾台), 이덕희(李德熙, 누이)가 있었다.

 

『황성신문』 1905년 10월 3일자에는 ‘용산 당현(堂峴, 당고개)에 사는 이진구(李鎭球)’가 낸 문권분실광고가 수록되어 있는데, 이 사람이 바로 이봉창 의사의 부친이다. 어린 시절에는 아버지의 재력 덕분에 풍요한 생활을 하였으나 이내 가세가 기울어 생계가 어려운 처지를 겪었다고 전해진다.(왼쪽) 『매일신보』 1932년 1월 1일자에 수록된 이봉창 의거에 관한 일본 내무성 발표 내용이다.(오른쪽)

 

1932년 9월 30일에 대심원에서 사형을 언도한 사실과 이봉창 의사의 인물사진을 함께 수록한 『부산일보』 1932년 10월 1일자의 보도내용이다.

 

사건 당시 총독부 경무국에서 조사 발표한 인적사항 관련항목에 “부모는 일찍 사망하고 ……운운”하는 대목이 있으나 이는 정확한 설명은 아닌 듯하다. 이봉창 의사 본인이 진술한 ‘제5회 신문조서(1932년 2월 9일 작성)’에는 부친은 1930년에, 모친은 1927년에 각각 사망한 것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해방 이후에 나온 여러 신문의 탐방기사에 이봉창 의사의 어머지 주씨[朱氏, 본명은 주간란(朱干蘭)]라는 분이 생존한 것으로 기술되어 있는데, 이 사람은 아버지 이진규의 첫째 소실(小室)이고 정봉희(鄭鳳姬)라는 이름의 다른 소실이 한 명 더 있었던 것으로 확인된다.
이봉창 의사에 대한 예심판사 의견서(1932년 6월 30일 작성)와 판결문(대심원, 1932년 9월30일) 등에 기술된 내용에 따르면, “용산(龍山)의 자산가(資産家) 이진구의 차남으로 태어나 유년시절에는 편안한 생활을 보냈으나 …… 아버지의 병세와 사업차질로 인하여 이내 가세가 기울고 마침내 생계조차 어려워지기에 이르렀다”고 기술되어 있다. 이에 따라 소년 시절 이봉창은 사립문창학교(私立文昌學校)를 나오자마자 일본인 가게에서 고용살이를 하였고 1919년 8월에는 용산역(龍山驛)의 시용부(試庸夫)로 들어가 역부(驛夫)와 전철수(轉轍手)를 거쳐 연결수(連結手)로 일하였으나 빈곤상태를 떨쳐버리지는 못하였다.
그러다가 1924년 4월에 이르러 조선인 차별대우에 대한 싫증과 신병(身病)을 이유로 용산역에서 근무하는 일을 그만 두기에 이른다. 그 이후 철도에 종사하던 후지하타(藤幡)라는 일본인이 내지(內地, 일본)로 돌아가던 차에 조선인 식모를 데려가고 싶다는 얘기가 있어서 이를 계기로 자신의 조카 이은임(李銀任, 형 이범태의 딸)과 함께 1925년 11월에 처음으로 일본 땅을 밟았다.
이때 이봉창 의사는 우선 오사카 지역에서 직장을 구하였고 키노시타 쇼조(木下昌藏)라는 일본식 이름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 후 차별대우에 대한 반발과 건강상의 이유로 몇 차례 취직과 사직을 반복하였고, 특히 1928년 11월에 교토에서 거행된 천황 즉위식을 참관하러 갔다가 한글로 표기된 편지를 갖고 있었다는 이유로 검속에 걸려 부당하게 경찰서 유치장에서 9일간이나 구류되는 경험을 하였는데, 이때 반일감정이 더욱 고조된 것으로 알려진다.
이러한 탓인지는 몰라도 심지어 1929년 2월 이후 2년가량은 아예 일본인 행세를 하면서 비누상회, 해산물 도매상점, 가방상점 등에 일자리를 전전한 적도 있었다. 그리하여 1년 쯤 도쿄에서 활동하던 시기를 거쳐 다시 오사카로 돌아오자마자 이내 1930년 12월에 취업 목적으로 중국 상하이로 건너가는 선택을 하기에 이른다.
이곳에서 일자리를 알아보던 와중에 ‘백정선(白貞善)’으로 통용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국무위원 김구(金九)와 만나 여러 차례 접촉과 교유를 하던 끝에 천황폭살에 관한 결심 피력과 거사 모의가 성사되었고, 1931년 12월에 한인애국단(韓人愛國團)에 가입하고 수류탄을 전달 받아 코베항을 통해 다시 일본으로 잠입하였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1932년 1월 8일의 거사가 결행되었고, 폭탄의 위력이 약해 뜻을 이루지 못한 이봉창 의사는 사건 현장에서 체포되어 그해 9월 30일 대심원(大審院)에서 사형이 선고되자마자 10일 후에 이치가야형무소(市ケ谷刑務所)에서 순국하였다.
이로부터 14년의 세월이 흐른 다음, 광복 이듬해에 이르러 김구 선생의 뜻에 따라 이봉창(李奉昌), 윤봉길(尹奉吉), 백정기(白貞基) 등 삼의사(三義士)의 유해봉환이 추진되면서 마침내 1946년 6월 15일에 각각 최석봉(崔錫鳳, 한독당 경남지부장), 윤남의(尹南儀, 윤봉길 의사 동생), 이강훈(李康勳, 상하이 육삼정 의거 동지) 등 세 사람의 가슴에 안겨 이들 유해는 특급열차 조선해방자호(朝鮮解放者號)를 통해 서울역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이내 수송동에 있는 태고사(太古寺, 지금의 조계사)로 운구되어 그곳에 안치되었다.
그리고 20여 일이 지난 그해 7월 6일에는 삼의사의 국민장(國民葬)이 거행되어 이들 유해는 옛 효창원 묘터에 나란히 안장되었다.
『동아일보』 1946년 7월 7일자에 수록된 「조국 광복에 바친 세 혈제(血祭)! 조기(弔旗) 아래 전시민이 애도」 제하의 기사에는 삼의사 장의행렬을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여기에 묘사되어 있듯이 이봉창 의사가 살던 집(1917년에서 1925년 사이에 거주)이 바로 장의행렬과는 불과 100여 미터 남짓밖에 떨어지지 않았던 ‘금정(錦町, 효창동) 118번지’였으므로 그 누구보다도 남다른 감회를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경성부일필매지형명세도』 (1929)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 이봉창 집터인 ‘금정(錦町, 효창동) 118번지’의 위치이다. 왼쪽 위에 보이는 199번지 구역은 옛 만리창 지역이고, 오른쪽 옆에 보이는 126번지 구역은 지금의 금양초등학교 자리이다.

 

이날의 장례를 조사하고자 맑게 개인 아침부터 수만 시민이 시내 태고사(太古寺)에 운집하였고 국민장의행렬은 상오 10시 3열사 봉장위원회의 지도를 받아 엄숙한 주악리에 효창원으로 향하였다.
…… 이리하여 행렬은 수만 시민의 봉배와 눈물어린 감회 속에 안국정 사거리를 종로로 남대문 앞을 지나 경성역을 거쳐 연병정으로 행하였다. 더욱이 동지의 유골을 받들은 김구(金九) 총리의 얼굴에는 새로운 감회가 깊이 우러나오는 듯 용산서 앞을 지나금정(錦町)에 이르니 이곳이 곧 고 이봉창(李奉昌) 의사의 출생지다. 연고 깊은 이곳 장지인 효창원에 도착한 것은 하오 0시 40분이었다.

 

『동아일보』 1932년 9월 11일자에 이봉창 의사가 살던 집이라고 소개된 ‘금정 128번지’ 및 ‘금정 118번지’의 모습이다. 전체 가옥의 구조는 확인할 수 없으나, 그나마 이렇게라도 이봉창 의사의 흔적을 확인할 수 있는 소중한 사진자료인 셈이다.

 

옛 집터가 있던 구역 일대가 재개발되면서 새로 들어선 ‘효창파크 KCC스위첸 아파트’ 안에 설치된 ‘이봉창 집터’의 표석(2018년 7월 제작) 모습이다.

 

효창공원 백범 김구기념관 초입에 설치되어 있는 이봉창 의사 동상(1995년 11월 6일 제막)의 모습이다.

 

하지만 아쉬운 것은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옛 집터 자리는 그대로 보존되지 못하고 효창 제4구역 재개발 과정에서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는 사실이다. 그나마 지금은 ‘효창파크 KCC스위첸’(2018년 9월 입주 개시) 102동 후면의 지하주차장 입구 옆쪽에 서울시에서 새로 설치한 표석 하나가 간신히 남아 있는 상태이다. 듣자 하니 이 자리와 가까운 지점에 ‘이봉창 기념관’의 건립이 추진되고 있다는 얘기가 나온 것이 이미 여러 해가 되었으나, 무심하게도 그 결과물에 대해서는 아직 아무런 소식이 들리지 않고 있다.
이봉창 의사의 행적에 관한 자료를 훑어보다 보니, 한 가지 흥미로운 대목이 있었던 것이 기억나서 여기에 마지막으로 그 내용을 덧붙여 보려고 한다. 거사 이후 취조과정에서 작성된 ‘제5회 신문조서(1932년 2월 9일 작성)’를 보면, 이봉창 의사가 용산역을 그만 둔 뒤 “용산 금정에 있는 관제묘(關帝廟)의 보존을 위해 봉사하거나 청년회를 조직하여 하수 청소와 야경에 종사하는 등 약간의 공공사업에 봉사했다”는 내용이 서술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확인해 본즉 실제로 <매일신보> 1924년 4월 24일자에 수록된 「관성묘(關聖廟) 철폐에 대하여 부근 주민 분개」 제하의 기사가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남아 있는 것이 눈에 띈다. 부내 관수동(觀水洞)에 있는 불교화광교원(佛敎和光敎園)에서는 대정 11년(1922년) 8월에 용산 금정에 있는 관성제묘(關聖帝廟)의 대지 70여 평의 불하를 얻어가지고 그곳에 학교를 짓고자 요사이에 와서 묘당을 헐려고 한즉 그 부근 일대의 주민이 백여 명은 떼를 지어 일어나서 묘당을 헐지 못하게 하고 지난 23일에는 용산경찰서 고등계에 모두 모여서 진정을 하였다더라.
그러니까 이봉창 의사 역시 본인 스스로의 진술대로 관우 사당의 철폐를 반대하는 행렬에 함께 서 있었던 것이 사실로 보인다. 하지만 동네 주민들의 희망과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았던 것인지 여기에 거론된 관성묘의 흔적은 더 이상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다. 혹여 이 관성묘가 지금껏 잘 보존이 되었더라면 이봉창 의사의 흔적을 되새길 수 있는 참으로 마침맞은 공간이 되었을 테지만, 그러한 결과로 이어지지 못한 것은 못내 아쉬울 따름이다.

화, 2020/05/26- 2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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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원회원 마당]

<한국소설, 정치를 통매하다> 감상문

김유 광동지부장

 

이 책은 그야말로 눈에서 비늘이 떨어지는 책이다. 책을 읽으면서 새삼 지나간 시절의 열정들이 떠올랐다. 그리고 지식인의 책무에 대해 다시 한 번 내가 할 일이 무엇인가를 일깨워 준다. 독서의 목적이 그 책을 읽는 독자들로 하여금 시대 상황을 바르게 인식하게 하고, 그 시대에 맞추어 무엇을 어떻게 하는 것이 바르고 옳은 일인지 생각하게 한다는 것은 글 쓰는 작자의 목적이라면 이 책은 대단히 성공한 책이다.“
에라, 늘그막에 객기 한번쯤 부려 보고자 추려 본 것들이 이 평론집이 되었다”고 하지만 이것은 “객기”가 아니다, “정론집”이다. 책은 정치를 질타하는 장용학의 소설들로부터 시작한다. 그리고 우리 문학에 커다란 획을 그은 대가들의 작품들을 소개한다. 그러나 잊지 않고 손석춘 씨 등 새로운 작가의 소개도 빠지지 않는다. 최인훈의 <광장>과 <회색인>, <총독의 소리>, <주석의 소리>를 이야기하는가 하면 그와의 개인적 친분도 에세이처럼 잔잔하게 풀어놓는다. 그가 좀 더 살아서 6·25 때 납북되었
던 이광수와 반민특위의 김상덕 위원장과 아마도(?) 같은 차 안에서 만나 이야기를 했었다면 어떤 얘기가 오갔을까?
남정현 작가를 언급할 때는 식민지의 정의와 함께 그의 대표작 <분지>와 <허허 선생> 연작을 빼놓지 않는다. 남정현의 반외세 의식과 민족의식의 각성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강한 존재로 우리 자신의 운명까지도 한 손에 잡고 흔들어 왔던 미국, 그리고 그 우산 밑에서 기생하여 맘껏 달리는 출세지향주의자들을 같이 풍자한다. 과연 우리에게는 민족이 우선인가, 아니면 이념이 우선인가… 그러면서도 선생의 산문집 <엄마, 아 우리 엄마>를 보면서 웃다가 흘리는 눈물이 우리를 숙연하게 한다. 실록적 요소가 강한 이병주의 소설 <그해 5월>은 소설을 쓴 작가의 변으로 “허상이 정립되지 않도록 후세의 사가들을 위해 구체적인 기록을 정리해 볼 작정”이라는 뜻을 분명히 하였다. 그리고 일본군 하급장교라는 말을 빈번하게 사용한다. 일본육군사관학교를 나온 사람이 안중근의 나라, 김구의 나라를 접수하였던 것이다. 그
리고 7·4공동성명을 맞이하여서는 남북이 같이하는 분단을 고착시키는 쇼라고 단정을 한다. 거
기에는 북한도 같은 쇼를 할 필요성이 있었을 것이다. 이 소설 즉, <그해 5월>을 임헌영 씨는 평론가적인 안목으로 풀어 쓰는데 “독재란 한 나라에 애국자는 한 사람밖에 없도록 만드는 공포 분위기에 다름아니다”라는 금언으로도 이 책은 훌륭하다. 씨는 역사와 민족이라는 화두를 평생지고 살아오면서 이 소설을 분석함에 있어 70년대 문학인 사건이나 1979년 시국사건으로 구속 수감되었던 기억이 더욱 새로웠을 것이다. 조정래의 <아리랑>은 바로 그 역사와 민족, 그리고 역사와 개인의 운명이 어떻게 얽히고설
키며 내려왔었는지를 우리에게 보여준다. 구한말부터 해방이 될 때까지 50년의 민족사를 기록한 것이다. 여기서 그는 독립군의 역사와 친일파 형성의 유래를 보여준다 그리고 불란서 비시정권의 치하에서 어떻게 대독협력의 민족반역자들이 생겼는지 열광, 인종(忍從) 및 사욕의 세 가지를 든다. 이 세 가지 유형으로 친일파의 발생을 추적한다. 역사와 운명의 변증법, 세월은 흐르고 역사는 기록된다. 그리고 개개의 인간에게 소설은 그에 걸맞는 삶의 궤적을 마련해 주는 것이다.
나는 요즈음 만주의 독립투사 양세봉 장군을 읽고 있는데 책에서 말하는 그의 삶이란 오로지 항일무장투쟁 하나로만 귀결되는 결말에서는 소설보다는 학술논문에 가까운 성격들임에 한층 외로움을 느낀다. 앞으로 나올 문학작품에 거는 기대가 남다른 것도 이 때문이라고도 하겠다. 선생의 이 책을 읽고 나서는 바로 한국에 연락하여 조정래의 아리랑 한 질(12권)을 다 주문하도록 하였다.
문학은 인간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로 개인의 내면적 질서를 잡아주고 사회적 통합을 이루게했다. 마르지 않는 문학의 역사 그것은 독자들에게 규범을 보여주며 현재의 상황을 이야기하며, 삶이 아무리 어렵고 힘들더라도 그것을 헤쳐 나가는 희망의 원리를 보여준다. 곧 문학이 이루는 변혁은 아주 작은 것이라도 타락한 시대에 타락한 방법이 아닌 올바른 삶을 바탕으로 고상한 싸움을 하는 것임을 이 책 곧 “한국소설, 정치를 통매하다”는 말하고 있는 것이다.

화, 2021/03/02- 2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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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월 광복회가 국회의원 후보자 대상으로 국립묘지법 개정 설문조사를 실시하여여야 국회의원 90명이 법 개정에 찬성한데 이어 ㈔운암김성숙선생기념사업회(회장 민성진)는 5월 24일과 6월 13일 각
각 서울과 대전현충원에서 ‘친일과 항일의 현장 현충원 역사 바로 세우기’ 행사를 항일독립선열선양단체연합과 연구소 후원으로 진행했다. 이번 행사에는 서울과 대전현충원이 속해 있는 서울 동작구와 대전 유성구의 이수진, 김병기, 조승래 의원이 직접 참석해 국립묘지법 개정을 약속했다.
국민여론 역시 친일파 이장에 긍정적이다. 연구소는 〈친일인명사전〉 발간 10주년을 맞아 2019년 11월 1일부터 4일까지 여론조사 전문기관인 한국리서치에 의뢰해 친일청산 문제 전반에 대한 여론조사를 실시했다. 그 당시 조사결과도 10명 중 7명(74.4%)이 이장을 해야 한다는 의견을 냈다.(반대는 17.5%) 6월 2일 오마이뉴스가 여론조사기관 리얼미터에 의뢰해 실시한 조사 결과에서도 ‘이장해야 한다’는 응답이 54.0%로 절반을 넘었다.(이장 반대 32.3%)

화, 2020/06/23- 1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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