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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은 왜 ‘독립적 사고’를 못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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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은 왜 ‘독립적 사고’를 못하나

익명 (미확인) | 화, 2017/06/27- 13:07

한국에 살면서 의아한 점이 하나 있다. 서울에는 훌륭한 고등교육을 받고 하버드와 예일, 스탠포드 등에서 유학한 사람들과 함께 기계공학부터 공공정책, 외교 등에서 뛰어난 지식과 식견을 갖춘 사람들이 차고 넘친다.

그럼에도 한국은 국제이슈에 관해 자국만의 비전과 시각을 제시할 능력이 없어 보인다. 한국 인재들은 북한 및 동아시아 이슈에서 훨씬 뛰어난 통찰력을 갖고 있으면서도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의 마이클 그린, 프린스턴 대학의 존 이켄베리 등 미국 전문가가 쓴 글을 해석하고 받아들이는데 온 힘을 쏟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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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싱크탱크 중 하나인 CSIS에서의 발언은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외신’이라는 외피를 쓰고, 국내에 들어와 국내 정치와 외교 정책에 큰 영향력을 발휘한다. 사진은 CSIS에서 열린 북한인권 관련 세미나 장면.

지금 미국 정부가 어떤 정책도 제시할 능력이 못 된다는 단순한 이유 때문에라도 이 문제는 어느 때보다 심각하다. 대통령직을 떼돈 버는 수단으로 인식하는 억만장자 무리와 이들의 충성스런 부하, 국익보다 금융자본을 위해 일하는 전문 공무원과 정치인 사이에서 미국은 정국 마비를 겪고 있다.

다시 말해, 지금 미국은 일본과 중국, 북한 상황 변화에 대해 유의미한 대응은 고사하고 자국을 위한 장기계획조차 구상하지 못하는 실정이다.

아베 정권의 권위주의 확대를 미화하고, B급 영화에 나온 김정은의 희화화된 이미지를 내보내며, 기회가 있을 때마다 중국의 추격에 대해 어두운 암시를 던지는 게 현재 미국 정책의 기조다. 여기에는 미국의 제도 쇠락을 결코 인정하지 않으려는 현실 부정이 깔려 있다.

외국에 의존하는 한국의 지식인들

한국의 대통령은 전세계 어느 정부보다 확실한 정당성을 갖추고 있다. 게다가 한국은 독립적 정책 구상 및 동아시아 미래 제안을 위한 전문성과 노하우도 보유하고 있다.

그런데도 이런 장점을 활용하지 않고 미국과 일본에 의존해 방향을 찾으려 한다면, 오히려 망망대해에서 길을 잃을 것이다.    

경제와 거버넌스, 안보 및 외교에서 미국보다 새로운 해결책을 제시하고 이니셔티브를 추진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 한국은 서구, 그 중에서도 미국에 그렇게 의존하는 걸까?

중국과의 관계개선도 마찬가지다. 한국에는 중국어를 할 줄 알고 중국 정치 및 경제를 심오하게 이해하며 고등교육까지 받은 인재가 훨씬 더 많다. 고립주의를 신봉하며 철저하게 반-지성적인 트럼프 정부가 워싱턴에 자리를 잡고 앉은 만큼, 이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할 쪽은 미국이 아니라 한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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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지식집단의 대미종속은 대다수가 미국 유학파라는 사실과 관련이 있다. 미국 유학을 했다는 것은 문제될 게 없지만, 더 큰 문제는 이들이 미국의 지식을 국내로 수입하는 오파상에 그칠 뿐, 한국인으로서 한국 문제에 대해 전혀 독립적으로 사고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지금 상황은 결코 그렇지 않다. 한국 대학의 소장파 교수들을 보면, 오로지 SSCI 저널에 논문을 기고해야만 평가 받는 가혹한 시스템에서 살아 남기 위해선 잘못된 가정 속에 수립된 미국의 외교정책을 받아들여야만 한다고 깨달은 것 같다.

스스로도 핵확산방지조약을 지키지 않으면서 북한의 위협만 강조하는 미국의 모순은 미국 학자들의 논문에서 결코 언급되지 않지만, 그럼에도 한국 교수들은 이들의 논문을 인용해야 한다.

북한을 핵 보유국으로 보고 행동하면서도 북한을 핵 보유국으로 인정할 수는 없다는 미국의 말도 안 되는 주장도 받아들여야 한다.   

미사일과 항공기에 대한 강박에서 벗어나 기후변화를 비롯한 지구적 위협에 대해 논의하도록 새로운 장을 열어줄 혁신적이고 창의적인 안보 정책을 만들어낼 여지는 충분히 있다.

중국이나 중앙아시아, 동남아시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에 대해서는 한국이 미국보다 훨씬 실질적인 정보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아주 혁신적이고 파격적인 이론을 구축할 능력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이유에서인지 한국은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있다. 서글픈 수동성이 한국의 정책 입안을 지배하는 형국이다.

식민지 문화의 사고 습관

물론 별다른 능력 없이도 높은 자리로 올라온 소위 ‘전문가’라는 사람 소수가 미디어와 정책을 장악한 상황은 한국만의 문제가 아니라, 이데올로기 체계가 쇠퇴하고 지적 탐구 대신 물질적 소비를 우선시하는 전지구가 겪게 된 현상이다.

그래도 이 문제는 한국에서 특히 심각하다. 

필리핀을 살펴보자. 한국보다 소득과 교육 수준이 훨씬 낮은데도 미국을 상대로 솔직하게 자기 주장을 한다.

수빅만 해군기지를 폐쇄했고, 대통령이 중국을 국빈 방문했을 때에는 미국 정책에 대해 공개적으로 불평도 했다. 미성숙한 행동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미국과 필리핀의 관계가 끝나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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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테르테 필리핀 대통령과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좌충우돌은 필연적으로 둘 사이의 설전으로 이어지곤 한다. 그렇다고 해서 필리핀과 미국의 관계가 파탄나는 건 아니다. 모두 국익을 위해 철저히 계산된 발언을 하는 것이다.

한국이 자신의 입장을 분명히 내세우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로 오랜 식민지배의 영향을 꼽을 수 있다.

당시 겉으로는 ‘문화통치’를 내세우며 유화정책을 펼쳤던 일본은 이면에서 무서운 탄압을 멈추지 않았다. 부드러운 가죽장갑 안에 쇠주먹을 감춘 일본 식민당국의 지시에 따라 한국의 지식인과 공무원은 우선순위와 생각을 조정해야 했다.

이와 비슷하게 미국의 문화와 지시를 과도하게 존중하는 자세가 한국인의 마음 속에 남아 있다. 그래서인지 한국은 미국 지식계급의 심각한 쇠락과 정치문화의 대대적 후퇴를 비판적으로 바라보지 못한다.

미국 교육제도에 대해서도 확실히 이런 선입견이 형성되어 있다. 한국에서는 프랑스나 독일, 일본, 네덜란드, 이탈리아, 스페인 등지에서 석박사 과정을 마친 사람이 상대적으로 적다. 심지어 영국도 찾아보기 힘들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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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알고 있는 자유롭고 공정한 나라, 그런 ‘천조국’은 더 이상 없다. 그런데도 한국인들, 특히 한국의 지식인들은 여전히 그들만의 환상 속에서 미국을 추종하고 있다. 이 그림은 이 글의 필자인 페스트라이쉬 교수와 김기도가 함께 디자인한 것이다. 

그런데 뛰어난 고등교육을 받은 한국의 지식계급이 입장을 명확히 밝히지 못하고 미국의 터무니 없는 요구를 따르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기울이는 이유를 식민시대 사고방식의 탓으로만 돌리기에는 부족함이 있다.

다른 원인으로는 (강대국을 섬기는) ‘사대의 예’ 관행이 있다. 이는 과거 한국과 중국의 관계로 거슬러 올라간다.

조선왕조는 사신을 중국에 보내 중국 황제에게 공물을 바쳤다. 유교의 예에 의거해 중국의 천자만이 천제를 지낼 수 있었기 때문에 조선의 왕은 자국 영토에서조차 천제를 지낼 수 없었다.

분단국가의 사고 습관

또 다른 문화적 원인이 있다. 두 개의 정치∙이데올로기 체제로 나뉘어진 분단 국가라는 현실이다.

서울 도심을 별 생각 없이 걸을 때에는 북한의 존재가 느껴지지 않는다. 북한에 관한 언론 보도는 많지 않고, 대화 중 북한 이야기를 꺼내는 사람은 별로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한은 한국의 문화에 분명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 말로 꺼내지 않고 눈에 보이지도 않지만, 북한은 다른 방식으로 ‘한국스러움’을 만들어 내며 다수의 한국인을 지배하고 있다.

어디에서든 보이지 않는 영향력을 행사하며, 한국의 문화구조를 미묘하게 뒤틀고 한국인의 사고를 은밀하게 왜곡시킨다. 한국이 부자연스러운 분단국가로 남고 북한의 존재를 계속 부인하는 한, 이런 왜곡 또한 지속될 것이다.  

북한의 존재를 집단적으로 부인해도 분단의 비극이 한국에게 엄청난 정신적∙심리적 부담을 준다는 사실은 피할 수 없다.

뭐가 잘못됐는지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지만, 무언가 잘못됐다는 사실만은 분명하다. 분단이 한국이란 국가의 핵심을 구성하기 때문에 한국민은 한국의 교육과 경제력, 오랜 문화적 전통을 하나로 모아 온전히 활용하는데 어려움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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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단은 한국인의 사유를 제약하는 가장 근원적인 요소이다. 한국의 좌우가 사회경제적 입장이 아니라, 북한에 대한 태도로 결정난다는 점을 보더라도, 한국인의 사유에서 분단이 얼마나 큰 영향력을 발휘하는지 알 수 있다.

60~70대 한국인들은 한국의 급격한 경제적 성장을 최고 업적이자 자부심으로 꼽는다. 이들의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조선은 현실과 동떨어지고 독재적인 양반 계급의 지배를 받으며 추상적 유교 철학에만 집착했다. 이들은 근대화에 실패했고, 결국 나라는 구제불능의 수준으로 뒤처졌다.

다행히 이후 비전과 의지를 갖춘 유능한 지도자들이 나와서 서구 기술과 노하우를 한국에 도입했다. 이들은 국민의 힘을 한데 모아 1960~70년대 한국의 현대화와 산업화를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이 내러티브는 한국 고유의 문화가 가진 뛰어남을 완전히 무시할 뿐 아니라, 박정희 전 대통령을 비롯한 정치인을 쓸데없이 슈퍼맨급 영웅으로 미화시킨다.

중요한 건 이런 주장이 식민시대 정당화를 위해 사용했던 논리와 동일한 흐름을 가진다는 점이다. 주체와 연도 등 세부 내용만 약간 고친 정도다.

1930~40년대 한국의 ‘현대화를 돕기 위해’ 일본이 개입한 것처럼, 1960~70년대 한국의 ‘현대화를 돕기 위해’ 박정희 등이 나섰다고 말하고 있다. 잘못된 역사관을 고치지 않고 국가 발전을 위해 기울였던 17~18세기의 수많은 노력을 한국 역사에서 삭제한 채 한국인과 외국인에게 내보이는 것이다.        

문화 전통을 완성하지 못하고 공백으로 남겨두었기 때문에 서구문화를 비이성적 수준으로 미화하고 개발과 외교, 안보뿐 아니라 도시계획과 설계에서까지 자체적인 아이디어를 내는 게 힘들어졌다.

그 결과, 서울대와 연세대, 고려대 등을 졸업한 고학력 지식인들은 한국에 대해 자신보다 잘 알지 못하고 유능하지도 않은 미국 정책입안가의 잘못된 가정을 기반으로 신문기사를 쓰고 외교 및 안보 정책을 제안한다. 

제국 운영 경험이 없는 ‘좁은 세계관’

마지막으로, 19세기 식민주의의 진정한 본성을 파악하고 이것이 지금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주는지 고찰해야 한다.

강대국이 되고자 하는 한국의 야망은 19세기 국가 건설에 사용됐던 제국주의적 모델에 뿌리를 두고 있다. 산업 경제력과 자연자원을 통해 나라를 발전시킨다는 원리는 1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열강들의 치열한 경쟁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이런 제국주의적 역학관계가 현재 세계 곳곳에서 증가 추세에 있는 갈등과 어떻게 연관되는지에 대한 논의가 현대 한국에서는 금기시되고 있다.

한국이 뛰어넘고 싶어하는 미국과 영국, 프랑스, 독일, 일본 등의 선진국은 20세기 복잡한 제국주의 체제를 완성한 바로 그 국가들이다. 미국의 경우 1차 세계대전 전까지는 제국주의 야욕을 자제한 편이었지만, 지금은 그 반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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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주의는 비판받아 마땅하지만, 제국을 운영했던 경험은 그들에게 세계적 관점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코스모폴리탄적인 시각을 갖도록 했다. 제국주의의 일방적 피해자였던 한국에게는 그런 제국 경영의 경험이 없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세계 속에서 자신을 보는 세계시민적 관점이 부재하다.

식민지를 보유해야 하는 제국주의는 지난 150년간 프랑스나 일본 등의 정치 및 경제에 심대한 영향을 끼쳤다.

국익에 영향을 주는 식민 영토가 해외의 먼 곳까지 퍼져 있었기 때문에 이들은 자국 문화의 가치를 해외에 널리 알리고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해 복잡한 관료제를 구축했다.

이들 열강은 자국의 예술과 문화, 철학, 거버넌스, 역사가 가지는 우월성을 찬양하는 문헌으로 학문적 토대를 구축했다. 식민지 시민을 교육하기 위해 필요한 절차였다.

한국은 이런 식민화의 피해국이었다. 해외에 자국 문화를 적극적으로 소개하는 노하우를 구축할 시간도 없었다.

한국의 위대함에 대해 다른 문화권의 마음을 사로잡을 만한 매력적인 신화를 만들어 내지도 못했다. 물론, 다른 국가와 달리 자국의 문화를 번드르르하게 소개하지 않는 소박함이 한국의 강점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런 제국주의적 전통이 없기 때문에 한국은 불리한 입장에 있다.

일본과 프랑스, 독일은 지난 140년간 끊임없는 편집과 보완을 통해 외국인을 위한 자국어 교재를 개발했고, 해외에서 자국의 ‘팬’을 키워내기 위해 장기적 계획도 수립했다. 문화를 통한 정치에 통달한 셈이다.

한국은 1990년대 와서야 문화를 본격적으로 해외에 홍보하기 시작했는데, 아직까지도 내실이 부족함을 알 수 있다.      

자기 운명을 스스로 설계하지 못하는 한국인들

앞선 세 가지 요소는 한국이 국제관계에서 자국 문화와 지정학적 입지에 기반한 고유의 입장을 제시하지 못하도록 막는다.

일본과 미국 정계에서 자신의 이익만 지키려는 소수 군벌과 억만장자들이 의사결정 과정에서 전문가 집단을 배제하고 혼란을 이어가고 있다는 점에서 이 문제는 더욱 심각해진다. 한국은 이 중대한 문제를 진중하고 신속하게 해결해야 한다.

한국이 안보 및 외교에서 고유의 역사∙문화 인식을 바탕으로 자국의 관점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한국어는 단 한 마디도 모르면서 자칭 ‘한국 전문가’라 주장하는 워싱턴의 학자 및 정치인이 강요하는 내러티브에 효과적으로 맞설 수 있다.

비극적 상황만 빼고 보면, 정말 한 편의 코미디가 아닌가.

시민들의 의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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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 우리는 지난해에 환경오염과 기후변화에 의해 발생한 혹독했던 더위를 잊고 살아 가고 있는 듯하다. 한국은 일인당 탄소배출량과 플라스틱 및 비닐을 세계적으로 제일 많이 배출하는 국가군으로 알려져 있다. 당연히 강력한 환경보호 정책과 포장과 보관 방식에 일대 혁명을 요구하고 있는 셈이다. 그럼에도 현안이 되어버린 미세먼지 절감이라는 현안 정책 외에는 한국 정부의 별다른 정책이 들려오고 있질 않다. 오히려 우리나라는 장바구니를 들고 다니는 필자가 별종으로 보이는 사회이다. 아래의 글은 물론 미국의 환경운동가 시각에서 작성된 기사이지만, 삼면이 바다에 둘러 쌓여있는 한반도의 장래에도 기후변화가 얼마나 심각하게 영향을 미칠 것인지를 예시적으로 잘 경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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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에 발행된 IPCC의 특별 보고서는 0.5도의 추가적인 온난화만으로도 재앙적인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고 경고하였다.

2018년의 여름은 격렬했다. 치명적인 산불, 이어지는 가뭄, 숱한 생명을 앗아간 홍수와 기록적인 더위까지, 과학자들은 각각의 날씨를 기후변화와 연결하는 일에 있어서 극도로 주의하는 편이지만, 인류의 소비활동으로 인한 세계적인 온도상승의 격렬함, 이러한 추세가 반복될 공산, 그리고 지속기간은 다 같이 심화되고 있다.

세계적으로 봤을 때, 이 추세대로라면 2018년은 사상 4번째로 더웠던 해가 될 것이다. 2015년, 2016년 그리고 2017년만이 2018년보다 더웠다. 파리 기후협약은 온도 상승을 섭씨 1.5에서 2도 아래로 유지하려는 목표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인류가 대수롭지 않게 기후변화에 접근한다면, 세기말이 될 무렵 우리가 지금보다 섭씨 4도나 더 뜨거운 지구를 향해 질주하고 있을 확률은 93퍼센트에 이른다. 이는 잠재적으로 재앙에 가까운 수준의 온난화이다.

 

경고와 심판

이미 1992년, 세계 각자의 과학자 1,700명이 섬칫한 “인류에 대한 경고문”을 발표하였다. 이 악명 높은 서신은, 자연을 파괴하는 활동들의 고삐를 붙잡지 않는다면 인류가 자연과의 “충돌 경로”에 돌입할 것이라고 발표하였다.

이러한 종말적 의견을 무시하는 것은 쉬울지 모르겠으나, 그런 태도는 심판의 시간이 가까워진 이때 정치적 행동을 이끌어내는 데에는 전혀 도움이 될 수 없다. 2017년에는 184개국의 과학자 15,000 명이 갱신된 버전의(그리고 더 암울해진) 1992년 헌장에 공동으로 서명하였다.

최신 버전의 제목은 “인류에 대한 세계 과학자들의 경고: 두 번째 공지문”이었다. 이 버전은 원본에서 제기되었던 환경적인 어려움들이 (담수원의 고갈, 어족자원 남획, 생물다양성의 급격한 악화, 유지 불가 수준의 인구증가) 해결되지 않았음을 그리고 해당 문제들이 “훨씬 더 악화되고 있음”을 주장하였다.

 “특히 걱정되는 것은 화석연료를 태우는 데에서 나오는 [온실가스], 삼림벌채, 그리고 농업 생산, 특히 육류 소비를 위한 축산 등으로 인해 대두되고 있는 잠재적 재앙 수준의 기후 변화와 현재 우리가 가는 궤적이 일치하고 있다는 것” 이라고 보고서는 이야기하고 있다.

또한 저자들은 “우리는 대량 멸종을 불러 일으켰다. 이는 5억 4천만년 새에 6번 정도 일어난 일이며, 현재의 많은 생물들은 이번 세기 안에 전멸당하거나 멸종위기에 몰릴 것이다.”고 주장했다.

과학자들은 “곧 있으면 실패의 궤적에서 벗어나기엔 너무 늦을 것이며, 시간은 무심하게 흘러가고 있다.”고도 강조하였다.

최근에는 지난 11월 23일 트럼프 대통령의 행정부가 1,600페이지 길이의 제4차 국가 기후 평가서를 내 놓았다. 이 보고서는 13개의 연방 기구들에 의해 편찬되며, 4년 마다 발행된다. 이 보고서는 특히나 더 잦은 가뭄, 홍수, 산불, 극단으로 치닫는 날씨, 수확량 감소, 병원균을 운반하는 곤충, 그리고 해수면 상승을 포함한 암울한 그림을 그리고 있다. 모든 시나리오들 중 하나라도 일어난다면, 이번 세기가 끝나기 전에 미국의 GDP는 10분의 1 수준으로 줄어들 수도 있다.

우리가 지난 여름에 본 것을 생각해보자. 인류가 힘을 모아 행동하지 않는다면 그보다 더욱 심한 미래만이 기다리고 있다. 혼란한 기후 속의 미래는 어떤 모습일지 한 번 보도록 하자.

 

 1. 멸종

2018년 이스트 앵글리아 대학교, 제임스 쿡 대학교, 세계 야생동물 보호기금은 공동연구를 진행했다. 해당 연구는 세계 야생동물 보호기금이 지정한 35개의 “우선 지점”에 서식하는 80,000여 종에 이르는 식물, 조류, 포유류, 파충류 그리고 양서류에 대해 기후 변화가 끼치는 영향에 대하여 분석하였다. 기후 변화가 제지 없이 진행된다면 지구에서 가장 다양한 종들이 살고 있는 아마존에서는 양서류와 식물의 70%, 그리고 조류, 포유류 그리고 파충류의 60% 이상이 자취를 감출 수 있다.

연구에서 제시된 가장 걱정스러운 예상 지점은 중앙아프리카와 남아프리카에 걸쳐있는 Miombo 삼림지대로 해당 장소는 기후 변화에 취약한 “우선 지점”들 중 하나이다. 만약 지구의 온도가 섭씨 4.5도 오른다고 했을 때, 연구자들은 양서류의 90%와 식물, 조류, 포유류 그리고 파충류의 80%가 사라질 것이라고 보았다.

이렇게 다양한 생물들이 믿기 힘든 손실을 겪으면 인간에게도 그 영향이 미친다. 저자들은 “이는 단순히 어떤 종이 어떤 장소에서 사라지는 것이 아닌, 수십억의 사람들에게 필수적인 기능을 제공하는 생태계 시스템의 중대한 변화에 대한 이야기” 라고 경고했다.

 

 2. 식량안보 불안과 영양 결핍

기후 변화가 실제로 생육기간을 늘려주면서 추운 지방에 도움이 될 수 있는 반면에 아프리카, 남아프리카, 인도 그리고 유럽의 열대와 아열대 지방들은 상당히 많은 경작지를 잃을 수 있다. 해안에 인접한 국가들에게는 해수면의 상승으로 인해 경작지와 음용수에 염해를 입는 것 또한 문제이다.

세계 인구의 3분의 2에 열량을 공급하는 주 작물인 밀, 쌀, 옥수수, 대두는 온도와 강수량, 대기중 이산화탄소 농도 등에 매우 민감하다. 2017년의 전면적인 연구에 따르면, 온도가 섭씨 1도씩 올라갈 때 마다 밀의 수확량은 6%, 쌀은 3.2%, 옥수수는 7.4%, 그리고 대두는 3.1%씩 줄어드는 것으로 나타났다.

더불어서 최근의 기사에 따르면, 2050년경 존재할 것으로 예상된 이산화탄소량은 쌀이나 밀 같은 주 작물의 영양가를 떨어뜨릴 것이다. 이는 1억 7,500만 명에게 아연 부족을(불균형 성장, 불균형 면역체계, 생식불능 등을 포함, 여러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일으킬 수 있으며, 또한 1억 2,200만 명이 단백질 부족을 겪을 수 있다 (부종, 간 세포 지방축적, 어린 아이들의 근육손실, 성장발달저해 등을 유발할 수 있음). 추가적으로 연구자들은 10억 명의 여성과 어린이들이 일일 권장 철 섭취량의 대부분을 손실할 수 있다고 보았고, 이는 빈혈과 여타 질병들에 노출될 위험성을 증가시킨다.

 

 3. 해안 도시들과 섬 국가들에 작별을 고하라

열을 가두는 온실가스를 줄이지 않는다면 해수면이 2100년까지 약 3피트 가량 상승할 것이라고 과학자들은 예상하였다. 이는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간 협의체(IPCC)의 5차 평가 보고서에 등장한 내용이다.

해수면 상승은 높은 파도와 강력한 폭풍을 유발할 수 있으며, 연안지역에 거주하는 수 많은 사람들에게 엄청난 피해를 입힐 수 있다. 올해 NOAA가 발간한 보고서에 따르면, 해수면이 3피트 상승하는 시나리오 하에서 마이애미의 일부, 뉴욕 그리고 샌프란시스코가 2100년 경에는 완전히 수면 아래로 잠길 것이라고 예상되었다.

모든 나라가 지구 온난화로 인해 해수면 아래로 가라앉을 수도 있다. 특히 남태평양에 33개의 환초와 암초로 이루어진 국가인 크리바티는 첫번째 중의 하나일 것으로 예상된다.

수면 아래로 잠기는 건 크리바티 뿐만은 아니다. 2016년 이후, 태평양에 위치한 섬들 중 적어도 8개 정도가 이미 사라졌고, 지난 4월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21세기 중반이 되면 대부분의 환초에서는 살 수 없는 곳이 될 것이다.

 

 4. 사회적 갈등과 집단 이주

2017년, 뉴욕 매거진의 부 편집장인 데이빗 월러스-웰스는 “주거가 불가능한 지구”라는 제목의 충격적이고 널리 읽힌 에세이를 집필했다. 에세이의 거의 대부분은 최악의 기후 시나리오에 대한 내용이었는데, 그는 홍수로 인해 줄어드는 자원과 늘어나는 집단 이주로 인해 “이 나라의 사회적 갈등이 두 배 이상 늘어날 수도 있다”고 주장하였다.

해당 기사의 과학적 근거에 대해서는 열띤 토론이 벌어지고 있으나, 세계 은행은 2018년 3월에 발표한 보고서에서 물 부족, 수확량 감소, 해수면 상승이 2050년까지 1억 4,300만명을 현 주거지에서 쫓아낼 것이라고 결론내렸다. 해당 보고서는 늘어나는 세계 인구의 55%가 거주하는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남아시아 그리고 라틴 아메리카에 집중하였다. 놀랍지 않은 이야기지만, 가장 가난하고 기후에 취약한 지역들이 가장 큰 타격을 입을 것이다.

 

 5. 치명적인 더위

2017년의 한 분석에 따르면, 오늘날 세계 인구의 30% 가량은 연간 20일 이상 치명적인 수준의 습도와 더위에 시달린다. 현재의 추세대로 온실가스 배출이 계속된다고 했을 때, 연구자들은 세계 인구의 74%가 치명적인 더위를 20일 이상 견뎌야 할 것이라고 보았다.

 “환경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지금껏 너무나 무모했고, 그로 인해 미래를 위한 좋은 선택지들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해당 연구의 저자인 하와이 대학교 마노아 캠퍼스의 카밀로 모라가 내셔널 지오 그래픽과 인터뷰한 내용이다.  “혹서에 관해 우리에게 남은 선택지는 최악과 차악 뿐입니다. 세계의 많은 사람들은 혹서라는 대가를 치르고 있습니다” 그는 이렇게 덧붙였다.

 

 6. 급증하는 산불

지난 11월 Butte county에서 150,000ac가 넘는 대지를 태운 캠프 화재는 85명 이상의 사망자를 내며 캘리포니아의 역사상 가장 파괴적이고 치명적인 화재로 기록되었다. 6월에 시작되어 북부 캘리포니아의 대지 300,000ac 가량을 전소시킨 멘도시노 산불은 캘리포니아의 현대사에서 가장 큰 규모의 화재였다. 두 번째로 컸던 화재는 2017년의 토마스 화재였고, 이 역시 산타 바바라와 벤츄라 카운티의 대지 281,000ac에 피해를 주었다.

하지만 주 정부가 지난 8월 발간한 제 4차 캘리포니아 기후변화 평가보고서에 따르면, 캘리포니아의 화재피해는 더 커지기만 할 것으로 보인다. 보고서에 따르면, 온실가스가 계속해서 늘어났을 때, 25,000ac 이상에 피해를 입히는 대형 화재의 숫자는 현 세기가 끝나기 전까지 50% 이상 늘어날 것이며, 산불에 의해 피해를 입는 면적 또한 연 평균 77%씩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참여 과학자 모임은 자신들의 블로그 포스트에서 “봄과 여름의 높은 기온과 눈이 빠르게 녹는 현상으로 인해 토양이 더 오랫동안 말라있게 되며, 이는 가뭄과 산불 시즌을 더 늘리게 되고, 이러한 현상은 특히 미국 서부에서 두드러질 것이다”고 설명하였다.

“이렇게 덥고 건조한 상태는, 낙뢰나 인간의 오류로 발생한 산불을 더욱 격렬하고 오래가게 만든다.”

 

 7. 태풍과 허리케인: 더 자주, 더 격렬해진다.

현재로선 기후의 변화가 2017년의 주요 허리케인들(파비, 어마, 마리아, 오필리아)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는지 불확실하다. 하지만 우리는 따뜻한 해수 위의 습도 높은 공기는 태풍과  허리케인의 연료가 됨을 알고 있다.

 “대기중의 모든 요소들은 현재가 그 어느때 보다 따뜻하다는 사실 그 자체로 영향을 받고 있습니다.” CNN의 수석 기상학자인 브랜든 밀러의 발언이다. “대기 중에 더 많은 수증기가 차 있고, 해수는 더 따뜻한 상태입니다. 이 모든 점들의 영향은 결국 한 방향만을 향하고 그건 더 최악으로 치 달리고 있습니다. 폭풍들이 더 급증할 것이고, 폭풍들이 지닌 강수량도 늘어나겠죠.”

이번 6월, NOAA는 “온실 온난화가 앞으로 다가오는 허리케인들을 더욱 격렬하게 만들고 강수량 또한 현재의 허리케인들보다 많아지리라 보는 게 타당하다”고 결론지었다.

 

 8. 녹아버린 북극과 영구 동토층

극지방은 나머지 지방들에 비해 두 배의 속도로 따뜻해지고 있으며, 얼음과 눈이 덮고 있는 지역의 넓이가 점점 줄어들면서 “해류, 대기 순환, 어업 특히 기온에 커다란 변화를 줄 것이다. 이는 온도를 내려주는 표면의 얼음이 더 이상 없기 때문”이라고 캠브릿지 대학 극지방 해양 물리학 그룹의 수장 피터 와담스가 퍼블릭 라디오 인터내셔널과의 인터뷰에서 밝혔다. “이로 인한 영향이 있을 것입니다. 예를 들면, 그린란드의 기류에 영향을 주고, 이로 인해 그린란드의 빙상이 녹는 속도를 증가시킬 것입니다.”

이 뿐만 아니라, 얼어붙은 극지방의 토양(영구동토층이라고도 불린다)이 녹으면서 메탄가스가 방출되고, 메탄가스는 이산화탄소보다도 훨씬 더 강력한 온실가스이다. 영구동토층은 1.8조 톤의 탄소를 품고 있는데, 이는 지구 전체의 대기에 머무르고 있는 양의 두 배에 이른다. 와담스는 영구동토층이 “한 번에 급속하게” 녹지 않을까 하는 점이 우려된다고 설명했다. 그렇게 된다면, “한 차례의 거대한 파동을 타고 터져 나오는 메탄의 양, 그리고 그 양이면 0.6도 정도의 탐지 가능한 기후 변화가 일어난다. 이는 세계 기후에 커다란 악재가 될 수 밖에 없다.”

 

 9. 병원균 전파

불안하게도 영구동토층은 병원균으로 가득차 있으며, 영구동토층이 녹는다면 한 차례 얼었던 박테리아와 바이러스들이 풀려날 수 있다, 이는 아틀랜틱 지가 보도한 내용이다. 2016년 시베리아 지방에서 탄저병이 확산되면서 12세 소년이 사망하고 수십명이 병원에 입원했다. 2,000마리 이상의 사슴들이 감염되었다. 해당 지역에선 75년 동안 탄저병이 발병한 사례가 없었다. 이유는? NPR의 보도에 따르면, 과학자들은 장기간의 혹서가 수십 년 전 탄저병에 감염된 채로 죽은 사슴의 시체를 녹였을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다.

얼어 붙어있는 병원균들이 인류를 몰살할 수도 있다는 걱정에 너무 겁먹을 필요는 없는 반면 (아직은 그럴 필요가 없다), 지구가 따뜻해지면서 진드기와 모기, 여타 병원균을 운반하는 생명체들의 지질학적 활동범위 또한 넓혀놓은 것 또한 사실이다.

 “이제 텍사스 남부에서도 뎅기열이 발병하고 있습니다” 미주리 대학교의 미생물 병리학 교수이자 가축 병리생물학부 학과장인 조지 C 스튜어트 교수가 사이언티픽 아메리칸에 이야기 한 내용이다. “기온이 올라가면서 말라리아가 발병하는 고도와 위도가 올라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콜레라의 전파자인 Vibrio cholarae는 높은 온도에서 더욱 잘 분열합니다.”

 

 10. 죽어가는 산호들

세계에서 가장 큰 이산화탄소 흡수계인 바다는 기후 변화의 예봉을 받아낸다 .하지만 바다가 더 많은 이산화탄소를 흡수할수록 (일일 220만 톤에 이른다), 물은 더욱 더 산성화된다. 이는 모든 해양생명들을 위험에 빠뜨리며, 여기에는 산호초 생태계도 포함된다, 수천 종의 생물들이 산호초에 의지하고 살아가며, 세계에서 약 10억 명의 사람들이 산호초에 의지하여 가족을 부양하고 소득을 얻어가며 살아가고 있다. 사이언스 지에 따르면, “연구자들은 산성화의 수준이 높아질수록, 대부분의 산호초들은 세기가 끝날 때까지 차츰차츰 용해되어 갈 것이라고 예측한다.”

이러한 기후 예측들은 최악의 시나리오들이다, 하지만 점점 따뜻해져 가는 이 행성에는 더 많은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네이쳐 클라이밋 체인지 저널에서 최근에 발행한 보고서는 “인류의 건강, 수자원, 식량, 경제, 인프라스트럭쳐, 그리고 안보가 온난화, 혹서, 강수, 가뭄, 홍수, 화재, 폭풍, 해수면 상승 그리고 지표면과 해양 화학 등의 기후적 위험요소들에 의해 영향을 받고 있다는 467 갈래의 증거”를 담고 있다.

 

0.5도가 만들어내는 차이

19세기 이후로, 지구의 기온은 섭씨 1도 상승했다. 10월에 발간된 IPCC의 주요 특별 보고서에서는 0.5도만 더 온난화가 진행되면 재앙이 시작될 것이라고 경고한다. “아주 조금의 온난화라도 의미가 있으며, 특히나 섭씨 1.5도혹은 그 이상의 상승은 생태계의 부분적 손실처럼 되돌릴 수 없거나 장기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위험성과 연결되어 있다.” IPCC 워킹그룹2의 공동 의장인 한스-오토 푀르트너의 말이다.

 “섭씨 2도보단 1.5도에서 지구 온난화를 통제할 때, 지속 가능하고 공정한 사회를 유지하며 상생하기가 더 쉽다.” 고 그는 덧붙였다.

트럼프 대통령이 자신의 행정부가 발간한 보고서를 믿지 않는다는 말을 하면서, 지속 가능하고 깨끗한 사회는 이제 먼 꿈처럼 멀어지게 되었다.

 

Lorraine Chow

She is a freelance writer for EcoWatch

월, 2019/01/28- 1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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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무엇이 근대이고 어째서 개벽인가

꼬장꼬장하지 않을 수 없겠습니다. 꼬치꼬치 따져야 할 대목이 적지 않습니다. 지난 글의 마지막 부분에서 더욱 혼란스러워지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근대론과 개벽론이 서걱서걱 착종되어 있습니다. 근대는 무엇이고 왜 개벽인가 흐릿하고 희뿌옇습니다.

‘New’와 ‘Modern’은 다릅니다. 새로운, 이라는 형용사와 역사적 개념으로서의 근대는 엄격하게 분별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새 시대가 곧 근대는 아닙니다. 앙시앙 레짐에서 탈피한다고 하여 아무데나 ‘근대’를 갖다 붙일 수는 없습니다. 그런 식이라면 ‘근대’라고 수식할 수 있는 시대가 너무나도 많아집니다. 자칫 ‘근대 이후’(Post-Modern)조차 ‘근대’(New)가 됩니다. 사실상 역사적 개념으로서의 기능과 역할을 상실하고 마는 것입니다. 아무리 ‘작’(作)이 중요한다 한들, 그간의 숱한 ‘술’(述)을 죄다 기각시켜버릴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그렇게 가볍게 퉁-치기에는 근대에 대한 치열하고 치밀한 논의들이 너무나도 많이 축적되어 있습니다.

저는 근대의 숨은 주어가 자본주의 세계체제라는 백낙청 선생의 견해에 동의하는 편입니다. 다만 그 주창자 월러스틴처럼 14-15세기 지중해까지 거슬러 오르는 것에는 회의적입니다. 여전히 아시아가 주도하는 유라시아형 세계체제가 작동할 무렵이었습니다. 19세기 이후에나 일어나는 동/서 역전을 지나치게 먼 시기까지 소급 적용하고 있습니다. 또 이은선 선생님의 지적처럼 조선을 ‘조숙한 근대국가’라고 말할 수 있다고 봅니다. 미야지마 히로시의 ‘유교적 근대’에도 수긍하는 쪽입니다. 글로벌 히스토리, 세계사 다시 쓰기는 우리가 생각하는 근대성의 많은 특징이 송나라에 기원을 두고 있음을 밝히고 있기 때문입니다. 송 이후의 원, 즉 몽골세계제국의 유라시아 네트워크를 통하여 그 근대성의 씨앗들이 동서남북으로 확산되었던 것입니다. 가장 가까운 고려와 조선은 그 영향 또한 일찍 받았음이 자연스럽습니다. 조선이 과거제로 운영되는 고도의 합리적 관료제 국가를 일찍이 이룬 까닭입니다. 그 다기한 복수의 (초기) 근대성이 19세기 이후 서구적 근대성으로 획일화되듯 보였다가 목하 서구/비서구를 가르지 않는, 신대륙/구대륙을 나누지 않는 지구적 근대성으로 합류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지구적 근대(후기 근대?)의 발현에 지난 200년 주눅 들었던 비서구의 다양한 가치들이 재기하고 재활하는 대반전의 형세입니다. 대체로 김상준 선생의 역작 <맹자의 땀, 성왕의 피>에서 그려내었던 중층근대성 이론에 가까운 축입니다.

역사적 시간은 축적되는 것이지, 물리적 시간처럼 차원 변경이 여의치 않습니다. 하여 ‘중국적 성인질서의 탈피’가 곧 근대라는 발상에 동의하기 힘듭니다. 그러하면 동학이 탄생했던 1860년이라는 시점의 유별남과 각별함이 도리어 탈색되고 맙니다. 탈중국은 이미 부차적인 무렵이었습니다. 아편전쟁 이래 중국은 벌써 을로 전락했던 시점입니다. 동학 창도와 베이징조약 체결이 같은 해라는 점은 여러모로 상징적입니다. 당시 중국은 영국과 프랑스에만 굴복한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의 연해주, 한반도보다 훨씬 넓은 강역을 러시아에 통째로 넘겨준 해가 바로 1860년입니다. 비단 영토 상실로 그치지만도 않았습니다. 제국의 중심, 자금성이 함락되고 원명원은 불에 타는 수모마저 겼었습니다. 그로써 조선은 졸지에 낯선 동방정교회 제국과 국경을 접하게 되는 전례 없는 시대로 휘말려 들어갑니다. (돌아보면 남/북 분단의 먼 기원입니다.)

즉 서세동점의 갑질에 중국조차 대응할 역량이 없음을 확인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조선 또한 스스로 떨쳐 일어서야 했던 것입니다. 탈중국은 어디까지나 방편일 뿐이며, 서구에 대한 대응이야말로 시급한 시대과제였습니다. 그래서 명명 또한 ‘東學’이었던 것입니다. 명명백백 서학에 대한 응수였습니다. 서세의 약진에 대한 주체적이고 자각적인 반응의 소산이었습니다. 비단 황해 건너 중국만도 아닙니다. 1853년 동해 지나 일본에도 시커먼 페리 함대(흑선)가 당도했습니다. 1857년 저 멀리 남쪽 인도양에서는 세포이항쟁이 진압되고 무굴제국이 몰락했습니다. 지중해는 또 어떻습니까. 크림전쟁으로 오스만제국의 핵분열이 시작된 것도 1853년입니다. 대청제국, 무굴제국, 페르시아(사파비드)제국, 오스만제국 등 포스트-몽골 시대를 주름잡던 유라시아 제국들이 공히 쇠락해가던 무렵입니다. 유라시아의 서쪽 모퉁이, 서구 국가들이 집단적으로 굴기하던 대분기(Great Divergence)의 시세입니다. 산업혁명 이래 자본주의(물질개벽)의 힘이 동서남북 도처에서 새로운 시대를 열어젖히고 있던 것입니다. 서구의 내부에서조차 ‘악마의 맷돌’을 수습하려는 <공산당 선언>(1848)이 나왔을 만큼 그 기세는 파상적이었습니다. 즉 1860년이면 이미 중화세계보다는 지구적 맥락이 더 중요해졌다고 보아야 합니다. 세계체제로 편입되어가는 대전환기의 벽두에 ‘다시 개벽’이라는 일성(一聲)이 터져 나왔다는 점이야말로 동학의 알파요 오메가입니다.

다나카 쇼조

그 절치부심 속에서 유학은 부채가 아니라 자산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침몰하지 않고 튕기어 되오를 수 있는 저력에 유학국가 500년의 경험이 축적되어 있었다고 여깁니다. 이걸 사뿐히 소거시킨 얼치기와 양아치들이 개화파 아니었던가요? ‘중국적 성인질서의 탈피’를 곧 ‘근대’라고 규정한다면 개화파들이야말로 그 과제를 철두철미 철저하게 수행하려고 했던 것 아닐지요? 후쿠자와 유기치가 표방한 “탈아입구”(脫亞入歐)야말로 탈중화세계를 표방하는 사상의 정수, 캐치프레이즈 아니었습니까? 일본이 그토록 맹렬하게 문명개화=서구화로 질주할 수 있었던 까닭도 유학적 세계관의 중력과 장력이 부족해서라고 여깁니다. 약육강식과 무한경쟁으로 작동하는 무도한 ‘금수의 세계’에 재빨리 적응할 수 있었던 것도 유교국가의 경험이 일천해서라고 봅니다. 그 마주 편에서 메이지유신의 그늘을 직시하고 자본주의 근대문명의 심층을 응시했던 다나카 쇼조를 일본의 ‘개벽파’로 칭하는 데는 조금의 이의도 없습니다. ‘다시 개벽’은 어디까지나 ‘서구의 충격’ 이후의 외침이고 깨침이기 때문입니다.

반면 유학국가의 유산이 역력했던 중국과 조선과 월남은 모두 ‘저항’했습니다. 저항의 결과로 공히 사회주의로의 경로에 친화적이었습니다. 고로 동학과 유학을 신/구(新舊)로 무 자르듯 나눌 수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고-금(古今)으로 끈끈하게 연결되었다고 여깁니다. 유학이 무르익고 농익어서 비상한 시국에 동학으로 터져 나온 것입니다. 묵은 것과 낡은 것은 다릅니다. 곪은 것과 삭은 것 또한 다릅니다. 옛 것과 새 것의 분단체제야말로 개화파가 획책했던 몹쓸 습성의 잔재입니다. 제가 유학과 단절된 동학보다는, 유학의 급진적 민주화/민중화로서 동학을 접근하는 까닭입니다. 개화와 개벽이 날카롭게 분기하는 지점도 바로 여기에 있지 않을까요. 개화파가 전통을 내팽겨 치고 편승과 추수로 시종했다면, 개벽파는 전통을 승화시켜 저항과 극복의 원동력으로 삼았던 것입니다. 전자가 나를 버리고 남을 따랐다면, 후자는 나도 바꾸고 남도 바꾸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자본주의 세계체제 이후에 대한 단서까지도 내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른 백년을 예비하고 새로운 백년을 태비하는 마르지 않는 영감의 샘이 되어줍니다. 오늘날 우리가 ‘또 다시 개벽’을 논하는 까닭 또한 민주화 이후의 ‘타는 목마름’을 해갈할 수 있는 시원한 물줄기를 애타게 찾고 있기 때문입니다.

 

2. 개화기인가 개벽기인가

‘뭔가 답답한 대한민국의 현실’이라 하셨습니다. ‘뭔가 막혀있는 지금의 상황’이라고도 하셨습니다. 갑갑하고 답답한 그 무엇인가를 잘 헤아리고 해명하는 것이 선결과제 같습니다. ‘서구중심주의 탈피’만으로는 다소 부족해 보입니다. 이미 서구는 지방화, 국지화되고 있습니다. 독일어와 프랑스어의 위상 저하가 괜한 일이 아닐 것입니다. 커녕 거의 모든 인문학과 사회과학에서 주구장창 읊조렸던 상투적 클리셰야말로 서구중심주의 비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민족문학론, 제3세계론, 종속이론, 탈식민주의론 등등 진부하다 못해 지겨운 감마저 없지 않습니다. 저는 ‘개벽’이라는 소중한 개념을 고작 서구중심주의 탈피라는 별반 새로울 것도 없는 화두에 헐값으로 넘겨주고 싶지 않습니다.

개벽은 목하 한국은 물론이요 전 인류에게 임박한 ‘6번째 대멸종’을 돌파할 수 있는 파상력(破狀力)을 담지하고 있습니다. 저는 그 동안의 근대 논의와는 다른 차원에서 오늘날의 세계는 19세기에 만들어졌다는 점에 수긍합니다. 단지 산업혁명을 통하여 유럽과 아시아 간 대분기가 일어났다는 차원에 그치지 않습니다. 산업혁명의 심층은 지상(地上)과 지하(地下)를 결합시킨 데 있습니다. 땅 아래 묻혀 있던 석탄과 석유를 마구 퍼다 썼습니다. 지하자원을 본격적으로 활용하면서 지상자원에만 의존하던 기존의 인류문명을 바꾸어버린 것입니다. 인류는 이제 대기에는 이산화탄소를 배출시키고, 대지에는 질소를 누적시킴으로써 대양의 구성 비율까지 바꾸어내었습니다. 2019년의 대기와 대지와 대양은 오롯이 인간이 만든 것입니다. 46억년 지구사에서 전례가 없는 일입니다. 고작 200년 사이의 변화입니다. 인간이 하늘과 땅과 바다를 변화시키고 동식물의 진화까지 좌지우지하게 된 것입니다. 1945년 이후 제3세계의 거의 모든 국가들이 근대화(산업화+민주화)로 내달리면서 이 지구적 변화의 속도는 더욱 가팔라졌습니다. 대기와 대지와 대양의 지구적 운동이 천상(天上)의 기후를 형성합니다. 그 기후가 극적으로 변하고 있다는 비상경보등이 울려 퍼진지도 이미 오래입니다.

제가 보건대 산업화를 추동했던 개화우파는 물론이요, 민주화를 추진했던 개화좌파도 이 임박한 지구적 위기에 대한 근본인식과 근본대책이 없습니다. 시대정신이 결여되어 있는 것입니다. 고작 다음 선거의 승리를 위하여 경기부양에 안달할 뿐입니다. 그래서 저는 답답하고 갑갑한 것입니다. 1987년 이후 돌림노래가 30년이 넘도록 반복되고 있는 현실이 안타깝습니다. 즉 민주화세력 또한 이미 기득권입니다. 정체되고 적체되어 있습니다. 제가 스무 살 새내기 때 집권했던 세력이 마흔 살 대학교수가 되어서 재집권한 것이 ‘진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한 성찰이 부재하니 ‘20년 집권론’이라는 허튼 소리를 내뱉는 것입니다. 한 세대도 모자라 반세기를 허비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선생님이 다른 자리에서 적확하게 꼬집으셨던 것처럼 현 정부는 촛불혁명의 수혜자일 뿐입니다. 어부지리였습니다. 그런데도 제 분수를 모릅니다. 도무지 ‘구시대의 막내’라는 자각이 없습니다. 척사파의 꼿꼿한 심성과 개화파의 식상한 발상이 기묘하게 뒤섞여 있습니다. 하자센터의 어느 발랄한 10대 친구의 말을 빌자면, ‘죽 써서 개 준 꼴’입니다.

숲의 원리를 도시 건설에 활용한 _포레스트 시티_ 조감도

갈수록 아득해지고 있는 촛불혁명의 출로가 ‘다시 개벽’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정신을 개벽하야 물질을 개벽하자’고 문장의 순서를 바꾼 것은 단순히 정신주의, 백년 전 루쉰이 그토록 신랄하게 비꼬았던 아Q식 정신 승리법이 아닙니다. 물질개벽의 진보가 특이점을 돌파했기 때문입니다. 더 이상 정신과 물질을 가를 수 없는 경지에 이르렀습니다. 사물인터넷, 사람과 사물이 불일불이(不一不二)의 수준으로 연결되고 있습니다. ‘생산’혁명과 ‘생각’혁명이 결합되어 만물이 활물되는 제4차 산업혁명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자연으로 돌아가자는 20세기 후반의 생태주의로 족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자연(Nature)과 문화(Culture) 또한 이미 불가분입니다. 글로벌리스트(개화파 2.0)의 파상공세에 펀더맨털리스트(척사파 2.0)적 대응만으로는 역부족입니다. 앞으로 30년, 귀농은커녕 더더욱 많은 인류가 도시에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21세기 중반 인류의 7할이 도시에 살게 됩니다. 물질과 정신이 고도로 연결된 스마트시티가 살림살이의 주요한 형태가 될 것입니다. 그럴수록 마음가짐과 마음다짐이 실시간으로 전 지구적으로 온 생명적으로 파동을 일으키고 파장을 미치게 됩니다. 시시각각 마음을 잘 써야 지구와 우주가 잘 돌아갑니다. 고작 4, 5년마다 투표를 통하여 겨우 한 나라의 일반의지를 확인하는 19세기형 민주주의로는 어림도 없는 신시대가 도래하는 것입니다. 기왕의 (개화적)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모두가 이미 수명을 다했습니다. 정권교체에나 연연할 뿐 문명전환에는 깜깜하고 캄캄합니다. 개벽정치의 창조, 개벽경제의 창안, 개벽문화의 창달이 시급합니다.

다시 왜 개벽사를 써야하는가로 돌아갑니다. 다른 미래는 다른 서사의 창출에서 비롯하기 때문입니다. 술(述)이 아니라 작(作)이 필요합니다. 선도하고 있는 쪽은 오히려 개화우파 같습니다. 지난해 실학론의 허상을 통렬하게 비판하는 기획특집을 선보인 곳이 <중앙일보>였습니다. “리셋 코리아” 프로젝트의 일환이었다고 봅니다. 그쪽에서는 ‘제3의 개항’이라는 말도 즐겨 씁니다. ‘또 다시 개화’라고 고쳐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 ‘더더욱 개화’는 남을 넘어 북까지 아우릅니다. 북조선을 ‘친미적 개화국가’로 전변시키려 듭니다. 일본으로 미국으로 기울었던 20세기를 21세기에도 반복하고 복제하고자 합니다.

실제로 현재 ‘근대문화유산’ 하면 대체로 일제의 흔적이 남아있는 곳인 경우가 많습니다. 개화사로 근대사를 썼기에 부지불식간 일본의 영향이 두드러집니다. 요사이 떠들썩했던 목포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비단 목포뿐이겠습니까. 군산도 부산도 인천도 개항과 개화의 유산만 부각되어 있습니다. 1876년 강화도조약, 개항을 시발로 삼는 ‘개화기’라는 시대구분 탓입니다. 서둘러 1860년 동학 창건으로부터 시작하는 ‘개벽기’라는 시대인식을 바로 세워야하겠습니다. 개벽의 흥망성쇠를 개화의 물결과 견줌으로써 우리의 근대사 또한 한층 풍요롭고 더욱 온전하게 복원될 수 있을 것입니다.

3.1운동의 중심지였던 천도교중앙대교당

자각적인 개벽보다 외래적인 개화를 더 중시하는 도착은 비단 문화유산 기념에 한정되지 않습니다. 개화우파의 고질병만도 아닙니다. 3.1운동 100주년을 맞이하는 개화좌파의 역사인식에도 깊숙이 투영되어 있습니다. 지난 몇 달 대통령 직속 정책기획위원회에서 주도하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100주년 기념 상하이 국제학술회의 조직을 거들었습니다. VIP가 ‘민주공화국’에 대한 애정과 애착이 남다르셔서 3.1운동(과 5.4운동)을 전후한 동아시아의 민주와 공화 담론을 복기해보자는 얘기가 오고갔습니다. 제가 우선으로 추천한 분이 원광대 정혜정 교수와 <모시는 사람들>의 박길수 대표입니다. 동학의 후신인 천도교의 독창적인 정치사상이 어떻게 한국의 독자적인 공화담론으로 진화해갔는지를 중국에서 발표할 수 있는 기회를 드리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별반 논의도 못한 채 묻혀버렸습니다. 기획회의에 모였던 다른 선생님들이 영 뜨악하고 뚱한 눈치였습니다. 3.1운동이 ‘제2의 동학운동’, ‘다시 개벽 운동’이라는 감이 좀체 없습니다. 결국 다른 분이 섭외되었습니다. 그 분의 책은 진즉에 읽어보았습니다. 서구의 공화담론이 일본의 번역을 통하여 유통되는 과정과 신해혁명이 한국에 미친 영향에 더 주의를 기울이고 있습니다. 전형적인 개화(좌)파의 발상인 것입니다. 안보다는 밖을 살피는데 더 능합니다. 이래서는 ‘2019년을 개벽파 재건의 원년으로 삼자’는 제안이 무색해질 지경입니다. 더욱 배포를 다지고 치고 나아가야 하겠습니다. 흩어진 개벽파를 세력화하고, 투박한 개벽론을 세련화하고, 소심한 개벽학을 세계화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먼저 3.1운동 100년의 의미를 되짚는 담론을 선도적으로 개진했으면 좋겠습니다. ‘개벽기’의 실상 복원에 누구보다 앞장서서 연구해 오신 분이 조성환 선생님이라고 생각합니다. 득의와 발군의 3.1혁명론이 기대됩니다. 선창을 요청 드립니다. 제가 후창을 잇겠습니다. 그리하여 기어이 3월이면 삼천리금수강산, ‘또 다시 개벽’의 떼창이 방방곳곳 울려 퍼지면 좋겠습니다.

금, 2019/02/01- 1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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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림픽의 영웅 너마저 ‘미투’를 외치고 있다. 그녀가 올림픽 스타이기 때문에 더 놀라는 것이 싫지만 스타마저도 당한다면 나머지는 오죽하랴라는 생각을 끌어내 주었다는 점에서 그 용기가 더 값지게 다가온다. 그녀가 스타의 신화와 눈부심으로 가려진 장막을 젖히고 민낯을 보여준 용기에 더 부끄럽다. 무대 전면만 보고 환호해 온 어른으로서 하루 이틀도 아닌 장기간의 ‘폭력’을 방치해 왔다는 공범 같은 느낌이 든다.

‘미투’와 ‘갑질’의 사례가 봇물 터지듯이 등장한다. ‘미투’를 외치는 비명은 ‘갑질’을 폭로하는 저항의 용기와 일맥상통한다. 한 끗발만 더 유리한 고지에 있어도 상대에게 무제한의 권력을 휘두르는 ‘갑질’은 ‘신분에서 계약’으로 이행했다는 근대사회의 논리가 허구인가라는 의심이 들 정도이다. 왜 ‘미투’와 ‘갑질’을 함께 다루는 지 의아할지 모른다. ‘미투’의 문제를 성 대결의 특수성으로 잘 못 보지나 않을까 하는 노파심에서 ‘갑질’과 함께 다룬다. 그것은 사회발전의 지체가 응어리지고 곪아터져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건이 오랜 동안 잠복되어 왔던 사건들이다. 수면아래 잠자던 또는 ‘침묵의 카르텔’ 속에 봉인된 불편한 진실을 마주하게 만들어 준 작은 영웅들을 지켜주는 것은 우리의 책임이다.

내 아이를 위한 보호막을 일류학교 졸업장과 ‘갑질’할 수 있는 지위 획득이라고 생각하고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고 가르쳐 왔다. 모든 사회문제에 눈을 감고 질주하라고 부추겨 온 어른으로서 젊은이들이 도처에서 마주치는 ‘갑질’의 폭력을 눈을 감고 외면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갑을’관계는 모든 거래에서 작동하기 때문에 설사 특정 상황에서는 갑이라고 해도 언제든 을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갑질은 누군가만 당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당할 수 있다는 점에서 ‘사회적’이며 ‘사회문제’이다. ‘미투’와 ‘갑질’의 문제가 소송으로 귀결되고 있지만 해결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연대’와 사회적 합의 그리고 공론의 구성이 필요하다. 법정에서의 사실의 다툼은 가치 판단을 해체시켜 버리기 때문이다.

더 많은 폭로와 ‘함께’를 외치는 힘이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피해자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일단 확인 시켜주는 의미도 있고 무엇보다 피해자에게 용기를 주기 때문이다. 사막을 혼자 걷는 것과 누구라도 함께 걷는 것을 비교해 보면 ‘함께’가 주는 위안의 깊이를 헤아릴 수 있을 것이다.

생각하면 예견된 일이었다. 경제발전을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유보해도 좋다는 사회적 묵인 결과이기 때문이다. 경제발전을 위해 권위주의 정권을 용인해야 한다는 담론이 오랫동안 정설로 자리 잡았다. 담론이 공론은 아니다. 냉전 속에 ‘열전’을 치르면서 ‘사회’ 또는 사회적이라는 단어를 금기로 만들었다. 1960년대부터 이어진 경제성장 중심의 담론은 정치발전의 과제를 미루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심지어 민주정권 통치 기간에도 정치 발전의 성패는 경제발전에 의해 재단되는 것을 수용하는 분위기다. 정치발전은 경제발전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언제라도 양보하는 것이 당연한 것으로 만드는 담론이 무비판적으로 수용되고 있다.

정치발전의 토대가 없는 상황에서 정치발전은 이익집단의 무한 경쟁, 정치적 대표성의 이름으로 다당제에 대한 예찬 등으로 이해되는 중이다. 민주화가 표현의 자유, 사유재산권의 신성불가침, 시장의 자유로 해석되고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 정책 결정의 공공성 구성에 대해서는 아직도 갈 길이 멀다. 정당 이름이 변화무쌍 하여 정당의 정체성과 당명을 일치 시키는 것도 어렵다. 당원자격이 주어지는 방식, 당원과 선출직과의 관계 등 모든 것이 불투명하다. 이런 차원에서 정당 투표를 강화하려는 주장이 정치적 올바름인 양 제시되고 있다.

정치발전이 장기적인 집합적 저항을 통해 틀을 갖추어가는 반면 사회 발전의 과제는 ‘ 전통의 미화라는 가면으로 위장 되어 수면에 드러나지도 않았다. 법인의 성격을 띠는 회사가 주인 노예의 관계의 관행을 이어가고 있다는 것은 충격적이다. 학교에서는 근대적 가치를 가르치고 헌법에서도 기본인권을 보장하고 있지만 사회관계는 봉건제 이전의 노예제적 성격을 지닌다. 이 불균형 속에 발랄한 21세기의 미래 세대가 갇혀 있다. 그들의 단말마적인 외침을 외면한다면 미래는 없다. 사회발전을 기초로 정치 발전과 경제발전이 이루어지는 서구 근대사와는 반대로 선 경제 발전 정치발전 그리고 장기간 유보된 사회발전이라는 기형적 구조 속에서 터진 아우성이 바로 ‘미투’와 ‘갑질’의 폭로로 드러나고 있다.

이 폭로는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우리가 외면하는 가운데 이 외침은 지속적이었고 그 울림은 새로운 규범을 지구촌 차원에서 만들어 낸지 오래다. 1992년 1월 8일부터 시작된 수요 집회가 이제 26년을 넘겼다. 한주도 거르지 않고 일본대사관 앞에서 이어진 전시 성폭력 가해자에 대한 사죄요구는 국경을 넘었고 지구촌의 규범을 만들어 내었다. 전시 성폭력 문제가 국제 형사 재판소에서 반인권적 전쟁 범죄로 규정된 것이 2000년이다. 2000년 10월 유엔 안전보장 이사회가 결의안 1325를 채택하였다. 성폭력 피해자인 여성이 평화프로세스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결의안을 채택하면서 지구촌은 21세기를 맞아하였다. 성폭력피해자가 입을 열지 못하게 만드는 지구촌의 침묵의 카르텔을 깬 것은 ‘살아남은’ 할머니 들이었다. 이 기간 동안 할머니들은 소녀가 되어 갔다. 할머니가 ‘소녀상’으로 바뀌면서 성폭력 피해의 불편한 진실을 마주하기 싫은 입장에서는 소녀상을 치울 수 있는 물건으로 보았고 소녀상을 세운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그것은 물건이 아니라 기억해야할 역사였다. 어느 해 기록적인 한파가 찾아온 날 일본 대사관 앞에 있는 소녀상 근처를 지나가게 되었다. 영하 수십 도의 날씨에 일본 대사관 앞에서 소녀상을 철거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 천막을 치고 새우잠을 자고 있는 젊은이들을 보았다. 시대의 과제를 그 때 그 때 해결하지 못하고 미뤄온 어른으로서의 부끄러움이 앞섰다. 그 생생한 기억 속에 떨리는 듯한 미투의 외침이 겹쳐 들려온다.

3.1운동 100주년을 맞이하여 일제 강점기를 다룬 영화 그리고 드라마가 등장하고 있다. 지난 100년의 반성의 끝자락에서 폭로된 ‘미투’와 갑질은 100년 동안 미뤄온 사회발전의 지체된 과제를 이행하라는 준엄한 명령이다. 이 명령을 외면하고 4차 산업의 화려한 어휘로 도피한다면 정말 우리에게 지속가능한 미래는 없다.

화, 2019/02/05- 1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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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라는 용어에 대하여

설 연휴 잘 보내셨는지 궁금합니다. 지난번 편지에서도 많은 문제제기를 해 주셨습니다. 덕분에 쓸 내용이 많아졌습니다. 하지만 논의의 범위가 방대해서 제 생각을 다 쓸 수 있을지 걱정이 되기도 합니다.

먼저 저는 ‘한국사상사’라는 제한된 문맥에서 ‘근대’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더 구체적으로는 ‘개벽’이라는 자생어를 설명하기 위해서 ‘근대’라는 번역어를 빌려오고 있습니다. 그래서 책 제목도 ‘세계 근대’나 ‘동아시아 근대’가 아닌 ‘한국 근대’라고 한 것이고요. 부제를 “개화에서 개벽으로”라고 했던 것은 종래에 개화 중심으로 근대를 생각했던 관점에서 개벽 중심으로 근대를 생각해 보자는 취지였습니다. 바로 이 점이 다른 분들과의 차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른 분들은 ‘중국’이나 ‘세계’와 같은 거시적인 관점에서 ‘근대’ 개념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근대의 대상도 사상이나 철학보다는 ‘체제’(관료제)나 ‘시스템’(자본주의)과 같은 제도적 측면에 주목하고 있고요. 반면에 저는 19세기 말~20세기 초의 한국사상사를 서술하는 범주로서 ‘근대’라는 개념을 빌려오고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종래의 실학담론을 비판적으로 검토하였고, 동학이라는 새로운 ‘학’에 주목하였던 것입니다.

실학담론 자체의 옳고 그름에 대한 논의는 차치하고라도, 적어도 실학담론을 주창한 1930년대의 조선학운동가들은 “전통으로부터 근대(=지금과 ‘가까운’ 새로운 시대)를 열고자 한 사상가들”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점에서 개벽파와 문제의식이 비슷하다고 할 수 있고요. 다만 양자의 차이가 있다면 조선학운동가들이 유학이라는 틀을 유지한 채로, 즉 유학 안에서 새로운 시대를 찾고자 했다면, 개벽파는 말 그대로 유학을 개벽해서, 유학과는 다른 ‘학’을 창조해서 새로운 시대를 열고자 했다는 점입니다. 똑같이 유학을 사상자원으로 활용하고는 있지만 개벽파의 경우에는 ‘학’ 자체가 달라진 것입니다. 그래서 이 시기를 조선유학 500년이 끝나는 하나의 사상적 전환점으로 볼 수 있고, 그것을 저는 ‘근대’라는 말로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제한된 범위에서 ‘근대’라는 개념을 쓰고 있기 때문에 선생님처럼 동아시아사나 세계사와 같은 거시적 시각에서 ‘근대’를 논하는 분들에게는 혼란스럽고 납득이 가지 않을 것입니다. 그럼 왜 굳이 그런 혼란스런 ‘근대’ 개념을 고집하는가?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는 ‘개벽’의 사상적 획기성을 설명하기 위해서입니다. 제일 좋은 방법은 ‘근대’라는 용어의 도움을 받지 않고 곧바로 ‘개벽’으로 들어가면 되는데, 우리에게 ‘개벽’은 낯설고 ‘근대’는 익숙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익숙한 용어로 낯선 용어를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일종의 방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개벽에 담긴 사상적 획기성으로 말하면 사실 ‘근대’라는 말로도 부족하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근대’는 고대나 중세와 같은 단계적 시대구분론에서 나온 개념인데 반해, 개벽은 ‘개벽 전’과 ‘개벽 후’로 양분될 뿐이기 때문입니다. 마치 그리스도교에서는 예수 이전과 이후로 나누듯이 말입니다. 그래서 저는 한국사상사는 크게 동학 이전과 동학 이후로 양분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기준이 사상의 ‘작’입니다. 개화파는 중국으로부터의 탈피는 했을지언정 여전히 ‘술’의 관행을 반복하고 있었습니다.

선생님께서 “1876년 강화도조약, 개항을 시발로 삼는 ‘개화기’라는 시대구분”을 탓하시면서 “1860년 동학 창건으로부터 시작하는 ‘개벽기’라는 시대인식을 바로 세워야겠다”고 설파하신 것도 비슷한 맥락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말하는 동학에서 시작되는 한국사상의 ‘근대기’는 선생님이 말씀하시는 ‘개벽기’와 상응합니다.

이와 같이 ‘한국’ 근대의 기점을 동학으로 잡는 것은 저의 개인적인 한국사상사 서술 방식에 지나지 않습니다. 결코 이 구분이 다른 나라나 인류 문명 전체에 적용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이것과는 다른 한국사상사 서술방식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고요.

예를 들어 최제우뿐만 아니라 동시대의 최한기도 근대를 준비한 사상가라고 생각합니다. 전통적인 ‘기’ 개념을 중심으로 서양의 천문학과 정치체제 등을 수용하여 ‘기학’이라는 새로운 학문을 만들었으니까요. 그리고 최한기 기학의 선구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는 홍대용도, 『의산문답』을 보면, 서양의 천문학을 받아들이면서 전통적인 유불도 삼교와 성인의 권위에 회의적인 시선을 보내고 있습니다. 최한기처럼 새로운 학문체계를 수립한 것은 아니지만, 그런 시도를 하고 있는 흔적이 뚜렷합니다. 이 두 사람만 보아도 확실히 조선후기는 뭔가 새로운 사상의 바람이 불고 있었던 것은 분명합니다.

다만 아직 저의 역량이 부족해서 이런 사상가들을 본격적으로 논의에 포함시키고 있지 못하고 있을 뿐입니다. 기학과 동학이 동시대에 나왔다는 사실은 결코 우연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언젠가 김태창선생님께서 “앞으로 한국철학의 과제는 기학과 동학을 융합‧접목시켜 새로운 ‘학’을 만드는 일이다”고 하셨다고 들었는데, 탁견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작업이야말로 21세기 한국에 필요한 새로운 ‘개벽학’이 아닐까 싶습니다.

제가 ‘근대’라는 용어를 고집하는 두 번째 이유는 실천적인 관심 때문입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한국인들은 ‘근대’라는 정신적 트라우마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그 이유는, 첫 번째 편지에서 소개한 중국인 학자의 표현을 빌리면, “서구 근대의 독을 가장 많이 먹은 나라 중의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에는 ‘근대화’되지 못해서 ‘식민지’ 지배를 당했다는 역사적 사실도 크게 작용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전통을 부정하면서 서구를 추종하고, 한편으로는 일본을 도덕적으로 미워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일본의 근대화를 평가하는 상반된 태도를 취하고 있습니다.

중국철학 연구자들 사이에서 “노자는 노자로 해석해야 한다”는 말이 있듯이 “근대는 근대로 치유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즉 근대로 상처받은 영혼을 근대로 치유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제가 동학을 비롯한 개벽파를 ‘자생적 근대’나 ‘토착적 근대’로 규정하는 이유입니다. 식민지 경험으로 인해 비어 있는 ‘전통’과 ‘현대’의 사이를 ‘개벽’으로 채우고 싶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전통(유학중심)-근대(개벽중심)-현대(서학중심)”의 구도로 한국사상사를 나름대로 균형있게 서술하고 싶습니다. 최근에 이러한 저의 문제의식(‘치유로서의 개벽근대’)에 공감해 준 서평이 하나 나왔는데, 원광대학교 원불교학과 박사과정에 재학중인 박지영(인전) 교무님이 쓰신 「근대의 재발견으로 개벽종교를 치유하다」(『개벽종교』 80호)입니다. 저보다도 제 마음을 더 잘 알고 계신 것 같았습니다.

마지막으로 저는 ‘개벽사상’과 종래의 ‘탈식민주의론’은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종래의 탈식민주의론은 또 하나의 ‘술(述)’에 지나지 않습니다. 다른 사상을 빌려다가 거기에 기대어서 자신이 처한 사상적 곤경을 해결하려 하기 때문입니다. 마치 선생님이 맑시즘 역시 개화좌파에 불과했다고 비판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런 식으로는 서구중심주의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또 다른 중심주의에 갇히거나 그냥 공부로 끝날 뿐입니다.

반면에 개벽은 자기 눈으로 세상을 보고자 했습니다. 최근에 유상용선생님이 “개벽은 나로부터 세계를 보는 눈을 여는 것”이라고 했는데, 탁월한 정의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편협한 국수주의나 민족주의에 빠진 것도 아닙니다. 유학과 서학을 시야에 넣으면서 ‘한울’이라고 하는 세계주의를 지향했습니다. 이런 사상은 개벽 이전에도, 그리고 해방 이후에도, 한국사상계에서 찾아보기 어렵습니다(홍대용이나 최한기는 예외라고 하고). 물론 개벽이 사상적으로 완벽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유학과 동학의 관계

유학과 동학의 관계는 저로서는 언제나 논란의 중심에 있는 문제입니다. 지금까지 동학은 거의 대부분 유학의 연장선상에서 이해되어 왔습니다. 확실히 동학을 창시한 최제우는 유학자였고, 이 점은 증산교의 교조로 알려져 있는 강증산이나 대종교를 창시한 홍암 나철, 그리고 원불교를 이론화한 정산 송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강증산은 동학을 평가하면서 “유학을 버리지 못해서 실패했다”고 하였고, 실제로 동학 통문(通文)에는 ‘도유(道儒)’라는 표현도 보이고 있습니다. 아마 전봉준과 같은 동학접주의 대부분이 서당 훈장 출신이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정부의 탄압도 피하려는 목적도 있었겠고요.

그런 점에서는 분명 선생님이 지적하신대로, 동학과 개벽파는 유학이나 불교와 같은 전통사상의 자산 위에 서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이 만든 ‘학’을 ‘개신유학’이나 ‘급진유학’ 또는 ‘민중불교’라고 하지 않고, ‘동학’이나 ‘증산교’ 또는 ‘원불교’라고 새로운 이름을 붙였던 이유는 ‘학’의 내용이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즉 전통을 자산으로 삼고는 있지만, 그 전통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학’을 만든 것입니다. 최제우가 ‘다시 개벽’을 주창하거나 강증산이 ‘묵은 하늘’을 뜯어고치자고 한 것은 이런 측면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새로운 ‘학’이 나오게 된 이유는 종래의 유학적 세계관으로는 더 이상 시대적 전환기에 대처할 수 없다는 위기감과 절박감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점들이 제가 동학을 말할 때 유학과의 연속성보다는 단절성을 강조하는 이유입니다.

무엇보다도 유학 경전을 버리고 독자적인 경전을 만든 이상 이미 유학이라고 부를 수는 없습니다. 유학을 유학이게 하는 가장 결정적인 조건은 『시서(詩書)』라는 경전을 신봉하는 것인데 – 마치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성경』을 신봉하듯이요 – 동학교도들은 『시서』나 『논맹』이 아닌 『동경대전』과 『용담유사』를 경전으로 받들었습니다. 물론 교양으로는 유교경전도 공부했을 수 있습니다만, 농민들이 사서삼경이나 성리학 문헌을 공부한 경우는 드물었다고 생각됩니다. 전봉준과 같이 유학자의 신분에서 동학에 입도한 경우라면 당연히 유교경전은 기본소양이었겠지만요 -.

그래서 이들에게 ‘유학’이라는 아이덴티티를 부여하기는 어렵습니다. 천도교인인 모시는사람들의 박길수대표님에게 “당신은 유학자입니까?”라고 물어보면 아마 “아니다”라고 대답하실 겁니다. 그냥 “천도교인이다”고 대답할 것입니다. 원불교 성직자도 마찬가지고요(물론 그렇다고 해서 유학을 배척하거나 부정하는 것도 아닙니다만), 그런데 ‘개신유학’이나 ‘급진유학’이라고 규정해 버리면 여전히 유학자라는 타이틀을 붙여주고 있는 느낌이 듭니다. 마치 주자학이나 양명학을 신유학이라고 하듯이요. 그래서 제가 이 표현에 위화감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런데 증산교가 선도(仙道)를 개벽하고, 원불교가 불교를 개벽한 것처럼, 동학이 유학을 개벽한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고 생각합니다. 대표적인 것이 “향벽설위에서 향아설위로의 전환”입니다. 유교에서 중시하는 제사를 인정하고 있으니까요. 그런데 문제는 어떤 의미에서는 제사를 거부하는 것보다 더 큰 불경죄를 범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벽’으로 상징되는 성인이나 조상보다 ‘나’를 더 존귀한 존재로 설정하고 있으니까요. 동학이 당시의 유학자들에게 ‘사교’로 지목당하고 최제우나 최시형이 처형당한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였습니다. 유학에서 가장 중시하는 명분(名分), 즉 예적(禮的) 질서를 무너뜨렸으니까요.

그래서 제 생각에는 동학은 ‘개신유학’이라고 하기보다는 ‘개벽유학’이라고 하면 어떨까 싶습니다. 원불교를 ‘개벽불교’라고 부를 수 있듯이요. 요즘에 저는 원불교를 ‘동학불교’라고 소개하기도 합니다. ‘개벽/동학’과 ‘불교’를 다 알아야 이해될 수 있는 사상체계라는 뜻입니다. 마찬가지로 동학도 개벽과 유학을 다 알아야 이해할 수 있는 사상체계라는 뜻에서 ‘개벽유학’이라고 부를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개신’이나 ‘급진’은 하나의 독립된 사상체계를 뜻하는 말은 아닙니다. ‘새롭거나 과격하다는 수식어에 불과합니다. 반면에 ‘개벽’은 하나의 역사적인 사상조류를 가리킵니다. 그래서 ‘개벽유학’은 ‘개벽’이라는 사상과 ‘유학’이라는 사상의 합성어를 의미합니다. 마치 원불교를 창시한 소태산이 한편으로는 최제우를 개벽의 선지자로 존경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불법을 주체로 한다고 말하였듯이 말입니다. 아일랜드의 젊은 한국학자인 캐빈 콜리는 정약용의 사상체계를 ‘개신유학’이라고 하지 않고 ‘기독유학’(그리스도교+유교)이라고 규정하였는데, 이것도 비슷한 예라고 생각합니다.

‘개신유학’이라고 하면 사상적 아이덴티티가 ‘유학’ 하나로 한정되지만, ‘개벽유학’ 또는 ‘기독유학’이라고 하면 사상적 아이덴티티가 두 개로 늘어납니다. 이 중에서 ‘유학’을 강조하면 유학과의 연속성이 강조되고, ‘개벽’이나 ‘기독(교)’을 강조하면 유학과의 단절성이 강조됩니다(물론 정약용의 사상은 유학적 요소가 그리스도교적 요소보다는 훨씬 크다고 생각합니다만-). 저는 동학에는 두 측면이 다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강조점의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지금까지 동학이 유학의 연속선상에서 논의된 측면이 강했다면, 저는 단절성을 강조해서 균형을 잡으려는 것이고요.

아울러 어떤 A라는 사상을 만들기 위해서 B라는 사상자원을 활용했다고 해서, 새로 만들어진 A라는 사상을 반드시 B라는 사상 계열로 분류해야 하는 필연성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사상자원으로만 활용할 뿐, 내용 자체는 전혀 다른 사상체계를 만들 수 있으니까요.

 

동학과 서학의 문제

제 생각에 동학은 단지 서학의 도전에 대한 대응일뿐만 아니라 전통적 세계관의 붕괴에 대한 대응이기도 하였습니다. 최제우는 『동경대전』에서 “인의예지는 성인의 가르침이지만 수심정기는 내가 새롭게 정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서학뿐만 아니라 분명히 유학도 의식하고 있습니다. 동학이 유학도 아니고 서학도 아닌 제3의 길을 갔다고 평가받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그래서 동학의 ‘동’에는 ‘서’에 대한 ‘동’뿐만 아니라 ‘중국’에 대한 ‘동’의 의미도 담겨있습니다. 이러한 ‘용례’는 일찍이 신라시대의 최치원에게서 시작되고 있습니다. 최영성교수님의 선행연구에 의하면, 최치원은 신라는 ‘동국(東國)’이고 중국은 ‘서국(西國)’이라고 하면서, 신라인을 ‘동인(東人)’이라고 하고, 한반도를 ‘동방(東方)’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이후에 고려시대든 조선시대든, 한반도에 사는 지식인들이 자신들을 지칭할 때에는 ‘동방’이라는 말을 썼습니다. 동인, 동국, 동방은 모두 서세동점이 시작되기 이전의 개념들입니다. 그래서 저는 ‘동학’은 ‘동양학’이 아니라 ‘한국학’의 다른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한 가지 덧붙이면, 어떤 분들은 동학은 서학, 즉 천주교의 영향으로 탄생했다고들 말합니다. 『동경대전』에 나오는 ‘천주’나 ‘상제’ 개념을 예로 들면서요. 주로 그리스도교신학을 연구하시는 분들의 주장이라고 생각되는데, 제가 생각하기에는 동학은 서학의 ‘자극’을 받아서 탄생했다고 할 수는 있어도, 사상적 ‘영향’을 받았다고 하기에는 좀 무리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한자로는 ‘상제’나 ‘천주’라고 쓰고 있지만 한글로는 ‘하늘님’이라고 표기하고 있는데, 이 ‘하늘님’은 전통적인 한국인의 하늘신앙을 대변하는 말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상제나 천주는 그것을 한자로 표현하기 위해서 빌린 말이고요. 그래서 오히려 천주교의 신관이 이런 토착적인 하늘신앙의 영향을 받았다고 보아야 하고, 동학도 마찬가지로 그런 토착적 신관 위에서 성립한 신종교라고 생각됩니다. 물론 이 과정에서 서학의 자극을 받았을 수는 있는데, 사상적 영향을 받았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오히려 다산 정약용이 서학적 신관을 수용했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으로 부족하지만 ‘근대’와 ‘유학’의 문제에 대해 제 나름대로 답변을 정리해 보았습니다. 제기하신 문제의 취지에 어느 정도 부합되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아마 여전히 납득이 안 되는 부분이 많으리라 생각합니다.

 

개벽학의 모색

 마지막 부분에 제시해 주신 “술이 아닌 작의 필요성,” “개벽기에 대한 시대인식,” “밖보다는 안을 살펴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공감합니다. 저는 이것이 바로 ‘개벽문화’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작’은 이 시대가 필요로 하는 개벽문화와 개벽학을 만드는 일이라고 보고요. 지난주부터 페이스북에 『개벽일지』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개벽에 대해서 남에게 들은 이야기나 자신이 생각한 단상 등을 글로 남겨두고 있는데, 이것이 죽을 때까지 쌓이면 개벽학의 얼개가 대충 짜여질지 모르겠습니다.

“개벽기에 대한 시대인식”은 삼일운동의 사상적 성격을 이해하는데 있어서도 대단히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흔히 ‘삼일운동’하면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를 떠올리기 십상인데, 이것 역시 개화의 시선으로만 사태를 바라보는데 익숙해져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삼일독립선언서」의 사상적 내용들을 분석해 보면, 개척정신(“자가의 신운명 개척”), 도덕주의와 시대전환 의식(“위력의 시대가 가고 도의의 시대가 온다”) 등이 두드러지는데, 이러한 요소들이야말로 개벽사상의 특징이었습니다. 개화파들은 쓸 수 없는 문장입니다. 이 개벽정신이 바로 삼일운동의 내적인 원동력이었다고 생각합니다(윌슨의 민족자결주의가 외적인 요인이었다고 한다면요).

그러나 제가 생각하기에 삼일운동이 오늘날 우리에게 주는 가장 큰 메시지는 ‘독립정신’이라고 생각합니다. 정치적 독립은 물론이고 사상적 독립까지 아우르는 ‘독립’ 말입니다. 지금은 정치적으로 독립한 상황이지만 사상적 독립은 여전히 과제로 남아 있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사상적 독립은 자기 눈으로 세상을 보는 태도를 말합니다. 이것이 개벽의 자세입니다. 삼일운동에서 만개했는데, 아쉽게도 해방 이후로 상실되고 말았습니다. 우리 세대는 이런 전철을 밟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서 젊은이들이 깨어있어야 하겠지요.

선생님과 하자센터의 김현아 선생님이 기획해 주신 ‘개벽학당’이 벌써부터 기대됩니다. 저로서는 10대 후반의 젊은이들과 함께 한국사상과 개벽정신을 얘기할 수 있는 첫 번째 자리이자 시험의 무대입니다. 아울러 원광대학에서도 박맹수총장님이 중심이 되어 개벽의 일꾼들이 많이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신라시대에 화랑들이 사회를 이끌어 갔듯이, 한국사회도 개벽의 일꾼들이 진취적이고 창조적으로 바꾸어 나갔으면 좋겠습니다.

개벽이 이처럼 하나의 사회 운동이 되기 위해서는 ‘개벽학’이라는 체계적인 ‘학’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선언문」으로는 아무래도 지속가능성이 떨어지고 단발적으로 끝나기 쉽습니다. 주자학이 동아시아를 700년 이상 이끌어 갔듯이, 그에 상응할만한 개벽학이 요청되고 있는 시대입니다. 이것이 선생님께서 제기하신 ‘민주화’의 다음 단계로 나아가는 첫 걸음이라고 생각합니다. 굳이 이름을 붙인다면 ‘개벽화’라고 할 수 있을까요?

금, 2019/02/08- 1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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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식을 가진 부모라면 상상조차 끔찍한 일이 바로 아이를 잃는 일일 것이다. 만약 그런 일이 닥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한국에 사는 우리는 유난히도 많은 젊은이들의 죽음을 목도했다. 그 곁에서 가슴 치며 오열하는 부모들의 모습도 먹먹하게 지켜봐야 했다. 그만한 크기의 아픔을 겪은 이들이 어떻게 살아갈 수 있는지는 가늠조차 되지 않는다. 어느 표현대로 그저 ‘빈껍데기’의 삶일지도 모른다.

그 슬픔을 딛고 자식의 죽음 속에서 다른 젊은이들의 그림자까지 읽어내는 일은 쉽지 않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죽음을 개인적 차원에서 닫아두기로 마음먹는다면 더 이상 괴로울 일은 적다. 그 죽음에서 사회적 의미를 읽어내는 일은 감당하기 버거운 일이다. 개인적으로는 쉽사리 구해지지 않는 답과 늘 싸워서 버텨내야 한다. 이유를 물어도 모르쇠로 일관하는 이들, 그건 네 탓이라며 폭언과 저주까지 서슴지 않은 이들과도 맞닥뜨려야 한다. 삼성 직업병 사건이 그랬고, 세월호 참사도 그랬다.

태안화력발전소에서 작업 도중 숨진 김용균 씨의 어머니 김미숙 씨(49)는 어렵게 그 길을 택한 듯하다. 신분이 노출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공개적으로 나서서 당당하게 발언하고 인터뷰한다. 어머니는 <오마이뉴스> 인터뷰에서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을 묻자 눈물을 흘리면서 말했다. “너는 갔지만 엄마는 네가 원했던 그 뜻을 찾아 살 거야.” 바로 아들이 생전에 손팻말을 들고 문재인 대통령을 만나자며 밝혔던 뜻이다. 비정규직을 없애는 일이고, 아들 또래의 청년들이 참혹한 환경에서 부당한 처우를 받으며 또 목숨을 잃지 않는 일이다. 그 자신 역시 비정규직 노동자이기도 하다.

어머니는 아직도 하나뿐인 아들의 장례를 치르지 못했다.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 재발 방지 대책 수립과 비정규직 직접 고용이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대통령이 직접 해결해주길 바라는 마음에서 차가운 아들 용균이를 끌어안고 눈물을 삼키며” 아들이 숨진 지 44일째 태안에서 서울로 올라왔다. 지난 1월27일에는 49재를 지냈다. 도중에 어머니는 또 울음을 터뜨렸다. 그 옆에 삼성전자에서 일하다 뇌종양을 얻은 한혜경 씨의 어머니 김시녀 씨가 앉아 가만히 손을 잡고 함께 울었다.

사진: 국민일보

 

■ “연쇄 살인범과 뭐가 다를까요”

태안화력발전소에서는 김용균 씨를 포함해 지난 10년간 12명의 노동자가 작업 중 사망했다. 지난해 12월11일 용균 씨가 숨지기 직전까지 3주 동안 한국에서는 하루 2명씩 최소 50명이 산업재해로 사망했다. 해마다 1000명가량이 일터에서 사고로 목숨을 잃는다. 최근 5년간(2012~2016) 노동자 10만 명당 치명적 산업재해 수에서 한국은 2위인 멕시코(8.5명)를 제치고 11.35명으로 1위를 기록했다.

지난 5년간 5개 발전사에서 발생한 안전사고 346건 가운데 97%가 하청노동자 업무에서 발생했다. 조선·철강·자동차 등 51개 원청사에서 노동자 1만 명당 숨진 사내하청 노동자 수는 원청보다 8배가 높았다는 실태조사도 있었다. 멀게 갈 것도 없이 불과 1년 전에 지하철 구의역에서 스크린도어를 수리하던 열아홉 살 비정규직 청년이 숨을 거둬 온 국민의 안타까움을 자아냈다.

용균씨도 김군과 마찬가지로 먹지도 못한 컵라면을 남겼다. 그의 유품인 탄가루가 어지럽게 묻은 물티슈와 수첩을 바라보면서 많은 이들의 가슴이 먹먹했다. 금방이라도 풋내 나는 웃음을 터뜨릴 것만 같은 앳된 얼굴의 청년이었다. 미세한 석탄가루가 수없이 날려 미끄러운 그 공간은 잡을 난간조차 마땅치 않았다고 했다. 앞이 잘 보이지도 않는 어두침침한 공간에서 물웅덩이와 턱과 장애물을 피해 육중한 컨베이어벨트 사이로 수시로 머리를 디밀어야 했다는 사실은 할 말을 잊게 만들었다. 사망한 지 4시간이나 지나 발견된 용균 씨를 구하러 갔을 때는 그가 떨어뜨린 휴대전화의 희미한 불빛이 간신히 그의 위치를 알려줬다고 했다.

용균 씨가 사망하자 업체에서는 “용균이가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했다”며 뒤집어씌우기부터 했다. 그러나 용균 씨는 긴 죽음의 터널에서 그저 발을 헛디뎠을 뿐이었다.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이 죽었으나 바뀌는 것은 없었던 탓이다. 구의역 사고 이후에도 위험 작업에 대한 하도급을 금지하고 사업주의 안전보건 조처 의무와 처벌을 강화하는 산업안전보건법 개정안이 논의됐지만 흐지부지됐다.

용균 씨의 죽음 이후, 이번에는 조금 달랐다. 산업안전보건법이 28년 만에 개정됐다. 법이 통과되는 순간 어머니는 국회 본회의장 방청석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아들을 잃은 뒤 눈물 마를 날이 없었는데 그날 처음으로 엷은 미소를 지었다. 어머니는 그 법 통과를 위해 연말 내내 국회에 있었다.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의원들을 만나 법안 처리를 호소했다. 자유한국당 의원들의 반대로 법안 처리가 지연되자 사흘 동안 국회에서 꼬박 논의 과정을 지켜봤다. “왜 이렇게 뭉그적거리냐”고 호통도 쳤다. “누가 이 법을 가로막는지” 똑똑히 봐야 한다고 생각했다. 법이 통과되고서야 어머니는 태안에 다시 와서 아들 사진 앞에 서서 말했다. “28년간 늘어진 법인데, 아직 많이 부족하지만 용균이 너로 인해 다른 사람들을 살릴 수 있게 됐다고…. 그래서 엄마가 너한테 조금은 할 말이 생겼다고. 용균이 네가 좋은 일을 했다고.”

용균 씨가 피켓을 든 사진을 남기지 않았다면 어머니는 좀 더 용기를 내기 어려웠을 것이다. 얼마나 힘들었으면, 얼마나 거기서 헤어 나오고 싶었으면 저 피켓을 들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에는 용균 씨 잘못이라는 말에 ‘정말 그런가’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이 사진이 일어설 수 있는 원동력이 됐다.

어머니는 사고 현장을 둘러보면서 큰 충격을 받았다. 꼭 옛날 탄광 같았는데, 탄광은 무너져야 사고가 나지만 그곳은 들어가면 금방 사고가 날 것처럼 보였다. 그동안 10명이 넘게 죽었는데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은 걸 보면 “서부발전소 최고 관리자는 연쇄 살인범과 뭐가 다를까”라는 생각도 들었다. 용균 씨의 죽음으로 9~10호기는 멈췄지만 여전히 1~8호기에서 용균 씨의 동료들이 똑같이 일하고 있다는 사실도 알았다. 그 친구들도 죽을 것만 같아서 그 친구들을 살려야만 용균이한테 조금이라도 얼굴을 들고 죄를 씻을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

비정규직에게도 법은 있었고 안전규정은 있었지만 적용되는 건 없었다. 용균 씨가 소속된 하청업체 한국발전기술은 지난해에만 28차례에 걸쳐 안전설비 개선을 요구했다고 한다. 원청인 한국서부발전은 3억 원이 든다며 거부했다. “그냥 인간으로 안 보는 거죠. 그냥 일회용이고 물건인거죠.” 어머니는 말한다. “사람들은 왜 정규직을 원하는지 모르는 것 같습니다. 비정규직은 인간 취급을 안 합니다. 노예 취급 받고 삽니다. 그래서 생명이 위태로워도 회사를 그만두지 않는 한 일하라고 하면 해야만 합니다. 모두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회사(일자리)를 구하는 것도 정말 어렵다는 것을. 그래서 모두들 회사를 나가지 않는 한 일해야 된다고 용균이 동료들은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 “너는 살아야 한다”

사고가 나고 사흘 만에 용균씨의 어머니는 현장조사 공개브리핑에 나와 “저는 우리나라를 저주합니다”라고 말했다. 일하던 현장을 가보니 놀고먹는 한이 있어도 보내지 말아야 할 곳이었다. 비상시 운전을 정지할 수 있는 안전줄이 있었지만 홀로 근무하던 용균씨를 위해 당겨줄 사람이 없었다. 당겼다 하더라도 평소 느슨하게 늘어져 있어 반응속도가 느렸기에 제대로 작동했을지도 의문이었다. 용균 씨가 숨지고 난 뒤 안전줄은 팽팽하게 고쳐져 있었다. 통탄할 노릇이었다.

어머니는 원청회사를 향해 “너희들은 인간쓰레기”라고 소리치기도 했다. 분노했다. “사람이라면 그렇게 열악하고 험악한 곳에서 일 시킬 수 없어. 최소한의 인간성만큼은 지킬 수 있게 해야 했잖아. 할 수만 있다면 니들도 내 아들처럼, 똑같이 일하고 컨베이어 속에 갈가리 찢어 죽이고 싶어. 그래야 부모의, 감당키 어려운 고통에 갇혀 살아야 하는 것을 느낄 테니까.”

어머니는 “열심히 일하라”고 얘기했던 게 후회된다고 했다. 구의역 사고 때 숨진 김군의 어머니도 마찬가지로 “책임감 있게 키운 게 미칠 듯이 후회된다”고 했었던 적이 있었다. 그저 시킨 대로 열심히 일했을 뿐인데 이 꽃다운 나이의 젊은이들에게 돌아오는 건 죽음뿐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어머니는 “화가 나 짐승처럼” 울었다. “서민은 아이를 낳아도 돈 있는 사람들의 노예로 살다가 언제 죽을지도 모른다. 사고가 나도 책임지지도 않는 이런 나라에서는 아이를 낳지 말았어야 한다”고 자책하기도 했다.

어머니는 분노에 그치지 않았다. 아들의 동료들을 만날 때마다 끌어안고 “너는 살아야 한다”고 말했다. 대전지방노동청을 찾아가 1~8호기의 작업도 전면 중지해달라고 호소했다. 빈소에서 어머니는 세월호 가족협의회 사람들을 만났다. 산업체 현장실습 중 목숨을 잃었던 특성화고생 고 이민호 군의 아버지도 만났다. 어머니는 말했다. “같은 아픔을 가진 분들이라 가슴에 와 닿았다. 자식을 잃고 어떻게 살아갈까 막막했는데 이분들을 만나 살아야 할 목표가 생겼다. 대통령을 만나 아들의 소망을 전하고 억울한 누명 벗겨주고 목숨을 앗아가는 외주화를 막기 위해 싸우고 싶다.”

어머니는 400일이 넘게 서울 목동 열병합발전소에서 굴뚝 농성을 벌이던 파인텍 노동자들도 찾았다. 좌절하던 노동자들은 어머니에게서 희망을 발견했다고 했다. 나중에 굴뚝을 내려온 그들은 “우리 싸움의 돌파구는 김용균 동지가 그렇게 되고 나서 어머니가 완강하게 버텨주셔서, 사회적 공감대가 형성되면서 열릴 수 있었던 것 같다”며 “노동자를 바라보는 시민들의 관심이 많아졌다”고 말했다. 어머니는 ‘비정규직 없는 세상’을 외치며 청와대 앞에서 기습시위를 했던 김수억 금속노조 기아차 비정규직지회장의 구속영장 발부를 앞두고 김 지회장의 선처를 바라는 탄원서를 법원에 제출하기도 했다.

어머니는 말한다. “하루에 6~7명, 1년에 2000명가량이 안전장치만 갖추어진다면 죽지 않아도 될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누가 이렇게 만들어 놓은 줄 아십니까? 자본가들과 일부 정치가들이 정규직과 비정규직을 만들어 비정규직들을 입과 귀를 먹게 하고 손과 발을 꽁꽁 묶어놓고 아무런 대항도 못 하도록 해서 결국 죽음으로 몰아넣고 있습니다. 우리는 절대로 용납하면 안 됩니다. 용서해서도 안 됩니다. 우리가 나서서 싸워서 우리의 권리를 찾아야 합니다.”

 

■ 아들에게 전해 줄 반지

“신기해 가지고요. 작년에 3호기에서 사고가 났을 땐 기사가 조금 뜨고 지나갔는데 이번엔 이렇게 많이 떠서….” 용균씨의 동료는 <한겨레>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용균씨 사고 이후 고용노동부 등은 태안화력발전소에 대한 특별감독을 벌여 1000건이 넘는 법 위반 사항을 적발했다. 발전소에 과징금 6억7000만원을 부과하고 태안화력발전소와 하청업체 책임자를 형사 입건할 방침이라고도 했다.

그러나 아직 부족한 점이 많다. 산업안전보건법은 통과됐지만 정작 용균씨와 같은 일을 하는 사람들은 대상이 아니다. 하청을 주지 못하도록 하는 위험 업종에 발전사의 컨베이어벨트 점검 노동자는 빠져 있다. 책임자 처벌도 상한선은 있지만 하한선은 없다. 정규직 전환 역시 갈 길이 멀다. 정부는 갑작스럽게 정규직 전환이 진행되면 전까지 민영화됐던 영역들의 회사에서 소송을 당할 수도 있다고 보고 신중한 입장이다. 설 전에 장례식을 치르고 싶다는 어머니의 소원은 현재까지로는 이루기 쉽지 않아 보인다.

어머니는 “내가 사는 날까지 싸우고 이겨낼 테니 부당한 나라를 반듯하게 세우기 위해 힘을 모아달라”고 말한다. “지금까지는 집과 회사밖에 모르는 평범한 시민이었지만 이제는 아니다”라며 “구의역 사고 이후 작업 환경이 나아지고 관련자들이 처벌받은 것처럼 내가 싸워서 이루고 싶은 것들이 많다”고 말한다.

용균 씨가 숨지고 나서 찾은 그의 기숙사 방문 앞에는 생전에 갖고 싶어 했던 ‘반지의 제왕’ 반지가 택배로 배달돼 있었다. 영화 <반지의 제왕>을 좋아했던 용균 씨가 그 반지를 사 달라고 했던 것이 기억나 어머니는 또 마음이 아팠다. “하루만이라도 더 살았다면 그 반지 끼워봤을 텐데… 죽은 아니 손가락에 끼워주면 아이는 알까요? 좋아할까요? 가슴이 미어집니다.” ‘반지의 제왕’ 반지를 사 주진 못했지만 어머니는 적어도 용균 씨에게 반지만큼이나 좋아했을 값진 선물을 이 세상에 남기려고 한다.

아들 전태일이 죽은 뒤 노동자의 어머니가 돼 노동운동에 헌신한 이소선 여사가 그랬다. 딸 황유미 씨가 죽은 뒤 11년이 걸려서야 기어이 삼성의 사죄와 책임 인정을 받아낸 아버지 황상기 씨가 그랬다.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 세월호 참사 유족들도 아직 고통 속에서 더 이상의 거대한 사회적 비극이 탄생하는 것을 막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김용균 씨의 어머니 김미숙 씨도 용균 씨의 동료와 친구들이 더 이상 같은 비극을 겪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으로 길고 힘든 여정이 기다리는 벌판 위에 섰다.

어머니는 <시사IN> 인터뷰에서 두렵거나 그만두고 싶지 않느냐는 질문에 이렇게 말했다. “저는 가진 걸 다 잃었잖아요. 애 하나가 전부였는데, 그걸 잃었으니 두려울 것 없습니다. 앞으로 무엇을 한들 기쁘지도 않을 겁니다. 저를 위해 산다는 것보다 이 사람들, 한 사람이라도 더 살려야 되겠기에 나섰습니다.”

 

■ 참고자료

[시사IN]“아들이 남긴 숙제는 죽음의 고리 끊는 것”

[이투데이] 끝나지 않은 엄마의 싸움…故김용균 어머니 “책임자 처벌해야 장례 치를 것”

[경향신문] 고 김용균씨 어머니 “아들에게 조금은 할말이 생겼다···그런데 이렇게 끝날까 두렵다”

[경향신문] 전태일과 김용균

[오마이뉴스]”그토록 원하던 반지가 왔는데… 죽은 아들에게 어떻게 전해주죠?”

[오마이뉴스]”잡아도 소용없는 안전줄… 화가 나 짐승처럼 울었다”

[노컷뉴스]故김용균씨 어머니 “마지막 CCTV보니…얼마나 무서웠을까”

[노컷뉴스]故김용균 어머니 “문재인 대통령 만나서 꼭 듣고 싶은 말은..”

[한겨레] 2명 중 1명이 또 다른 ‘김용균’…“사고 현장 무서워서 못간다”

[한겨레] 최근 3주새 50명 사망…‘김용균’은 우리 사회 도처에 있다

[한겨레] 사지즉전

[서울신문] “저는 우리나라를 저주합니다” 태안화력 고 김용균씨 어머니의 절규

[민중의 소리] “왜 이렇게 뭉그적거립니까” 국회서 울려 퍼진 고 김용균 씨 어머니의 절규

[민중의 소리] 김용균법 국회 통과 지켜본 어머니 “용균이에게 떳떳해진 것 같다”

월, 2019/02/11- 1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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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신문사의 최우성 연구원은 지난 1월 9일자 기사를 통해 미국에서 일고 있는 자본주의 구하기 운동은 소개하면서 보수적 인사들마저 독점기업을 해체하고 기업에 대한 강력한 규제의 도입을 요구하고 있다고 소개하고 있다. 이들 역시 미국식 자본주의가 막장에 이르고 있음을 스스로 선언하고 있는 셈이다. 이번 장에서는 자본의 탐욕에 의해 왜곡되고 자기조정 기능이 실패한 기존의 시장경제에 대한 보완 또는 교체의 가능성으로 사회적 경제와 시민경제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흔히 ‘사회적 경제’와 ‘시민경제’가 동의반복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역사적 뿌리와 배경 그리고 시장경제를 바라보는 관점에서 섬세하지만 매우 중요한 차이를 지니고 있다. 연구 경험이 부족한 탓에 아래에 세가지 참조 서적을 소개하면서 필자의 견해를 더하고자 한다.

우선 전남대학교 지역개발연구소에서 2016년 발간한 연구 저서 ‘사회적 경제와 지역혁신’은 실천적인 다양한 내용을 제공하고 있다. 본 저서에 의하면 사회적 경제가 태동된 배경으로 저성장의 시대로 진입하면서 만성적인 구조조정에 따른 일자리 감소, 시장 경제의 활력둔화, 생산의 고비용, 산업의 불균등과 소득의 양극화에 따른 불평등의 고착화에 따라 사회적 체질과 구조의 변화를 열거한다. 시장의 실패 또는 폭력에 대한 대응으로 양적 성장에서 질적인 성장을 추구하고 지역단위에서 인력, 자원, 환경을 지속가능한 형태로 전환하는 패러다임의 전환과 모색이 필요하다고 판단하며, 사회적 경제의 활성화를 통하여 기존의 시장실패와 복지국가의 정책을 보완하면서 사회적 유대로 가치를 실현할 가능성을 열고자 하는 모든 활동과 조직들을 사회적 경제의 영역으로 포괄한다고 정의한다.

그러나 19세기 유럽에서 시작되어 1990년 대를 거치면서 한국에서도 활성화된 사회적 경제 영역은 국가와 시장의 실패를 보완하고 극복하기 위한 대안적 실천으로 시작하였지만, 현재의 모습은 역설적으로 국가의 제도와 시장이라는 매개에 의존해서 지탱되고 있으며, 개념과 용어에 있어서도 사회적 기업 공동체 지역기업 자활 비영리부문 협동조합 등이 정확한 인식과 내부 정리가 없이 혼재되면서, 이에 대한 종합적인 접근과 국가단위 복지정책의 일환이나 시장경제의 잔여적 영역을 넘어서는 통섭적 논의가 필요하고 그간의 성과에 대한 성찰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상기 저서는 밝히고 있다.

동시에 사회적 경제의 기반과 뿌리는 지역사회이며 지역단위에서 활동과 조직의 주체를 세우고 지역의 여건과 상황에 연계하여 지속적인 가능성을 증진시키기 위해서는 지역사회의 혁신과 이를 돕기 위한 생태계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 핵심 현안으로 등장하고 있다고 설명하면서. 생태계의 법칙으로 모든 것은 상호 연관되어 있고, 에너지 법칙에 의한 흐름과 방향에 따라 변화하고 있으며, 도법자연 道法自然이라는 고전의 가르침처럼 자연스러운 것이 최선의 정책 임을 재확인하면서, 모든 것은 공을 들인 만큼 성취가 이루어 진다는 4가지 법칙을 기술하고 있다.

주어진 조건 및 상황에 상응하면서 생태적 환경에 따라 생성하고 진화하는 과정에 대해서도 3 단계로 나누어 첫째로 정부와 기업의 도움과 주도하에 양적인 성장을 하는 단계와 두 번째로 공공부문과 시장영역과 사회적 경제가 서로 공존하고 협력하며 진화하는 단계를 지나, 마지막으로 변화적 확산단계를 구상한다. 마지막 단계의 모습은 궁극적으로 호혜와 협력 그리고 연대를 특징으로 하는 사회적 경제가 독자적으로 존재하고 시장경제 영역에 대해서 우위적 위상을 갖추는 것으로 그리고 있다. 상기 일련의 과정을 성공적으로 이루기 위해서는 리더쉽을 포함한 인적 조직, 전략 재무 지식 사회적 네트워크 등 다양한 자원들의 결합, 그리고 정책과 제도가 뒷받침되어야 하며, 무엇보다도 해당조직이 지향하는 가치에 대한 참여자들의 공유와 열정 그리고 끊임없는 자기학습과 재교육이 핵심적 바탕을 이루어야 할 것으로 보고 있다.

구체적 자료분석을 통하여 2007년 사회적 기업 육성법이 제정된 이래 양적으로는 상당한 성장을 보여 2015년 기준하여 누적인증 기업숫자가 1,600여 개가 넘어서고 고용 인원도 33,500 여명에 이르고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성장은 재무수요의 80% 이상을 정부의 지원에 의해서 이루진 반면에 사회적 경제 단위로서 기업의 취지와 목표 그리고 사회적 가치라는 측면에서는 낮은 효율과 지향하는 목표에 대한 명확한 인식 부족을 드러내고, 조직의 지속성을 스스로 담보할 수익성을 실현해 내지 못한 것으로 분석되었다. 한마디로 정부재정이 끊어지면 대부분의 인증된 사회적 기업은 활동을 지속할 가치와 목표를 스스로 설정하지 못했고, 독자적으로 유지할 수 있는 재무적 자원과 사업적 모델을 갖추지 못한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역시 2012년 협동조합기본법이 입법되면서 일만 개 이상 폭발적으로 늘어난 협동조합에 대해서도 구체적 실태에 대한 별도의 조사와 분석은 없었으나, 조직의 재무적 성패에 대한 공동적 공유와 분담이라는 긍정적인 측면에도 불구하고 사회적 기업과 마찬가지로 전반적 상황은 매우 어려운 것으로 추정되면서, 현재 시점 한국에서 사회적 경제가 지닌 미래 가능성을 되짚어 반성하는 일이 중요하게 되었다..

또 하나 주목할 만한 참고 서적은 문재인정부가 출범하면서 사회적 가치를 중점으로 추구하겠다고 선언한 맥락에 발맞추어 2018년 초 박명규 교수 등 학계를 대표하는 15 분의 지식인들이 역량을 힘껏 모아 발간한 ‘사회적 가치와 사회혁신, 부제 – 지속가능한 상생공동체를 위하여” 라는 저서로서, 전남대의 상기 보고서가 제기한 문제점에 대한 응답적 성격을 띠면서, 경제적 성과와 사회적 가치를 함께 융합하여 평가하고자 노력을 경주하면서, 원주와 홍성이라는 지역의 구체적 사례 분석을 통하여 이를 사회혁신 수준으로 유도하기 위한 다양한 이론과 제안들을 소개하고 있다.

이 책은 국제적으로 제기되고 있는 현존의 많은 이론들을 종합적으로 소개하면서 사회적 가치의 핵심 내용으로 안전과 일자리, 역능성(empowering)과 혁신, 공공성과 신뢰자본, 상생과 지속가능성 등을 구체적으로 제시 분석하고, 실행적 영역으로 사회적 경제의 활성화, 이를 지원하기 위한 공공 구매와 공공 서비스, 기업들의 사회적 책임과 사회적 공헌(CSR & CSV), 지속적인 사회혁신 추구 등 열거하며, 실현할 주체로서 협동조합과 사회적 기업, 정부와 지자체 및 공공기관, 기업과 노조 및 공익 재단, 학교와 종교 및 시민단체 등을 총망라하고, 사회적 가치를 철학적 개념으로 재구성하면서 이를 실현하기 위해 협력과 혁신과 책임과 금융을 제도화할 것을 제안하고 있다.

특히 관심을 끄는 항목은 시장 정부 비영리 3개 부문의 융합적 실패를 극복하는 대안으로 기업에게 경제적 성과와 더불어 사회적 가치와 역할을 부여하고(참조: 제3섹터경제론 9장. 기업에 대하여) 이의 성과를 시장적 원리로써 평가하고자 하는 제안이다. 현재 기업사회에서 성취한 이해관계자 관리와 환경 및 사회에 대한 책임(ESG, Environmental, Social & Governance)을 고려하는 사회책임투자(SRI, Social Responsible Investment)의 비중이 자본시장 30%를 차지할 만큼 성장한 실례를 바탕으로 사회적 편익과 비용을 역으로 다시 시장의 가격기구에 편입시켜 반영하고 평가하자는 ‘사회적 가치측정 – 화폐가치 환산을 중심으로’ 라는 제안이다. 제안의 특징은 ‘사회문제를 시장이 해결할 수 없다’는 고정관념을 극복하기 위해서 사회적 가치를 시장의 가격기구에 편입시키고 화폐라는 정량적 평가로 환산함으로써 해소할 수 있다는 착안에 있다.

한마디로 사회성과를 회계학적 개념으로 접근하여, 그 동안 주로 산출 결과에만 의존해 왔던 방식을 벗어나 환경(E) 사회(S) 가버넌스(G) 등 다양한 영향의 일련 과정을 사회적 편익과 비용을 수치로 환산하여 가격기구로 내재화하자는 것이다. 다양한 사례를 제시하면서도 이러한 노력은 아직 초보적 단계임을 인정하고 있지만, 복지와 사회적 영역을 평가하는데 새로운 기준을 제시하였다는 것에 매우 큰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그러나 일반 시장에서 직접 보상되지 않은 사회적 가치와 성과에 대해 과연 공정무역, 윤리적 소비와 금융상품 및 투자의 기준 등을 통하여 충분하게 대체적 보상이 실현되고 지속적 조건의 기반이 형성될 것이냐 하는 기본적인 질문에 아직은 분명한 대답을 주지 못하고 있다.

위에 언급한 수많은 노력과 대안적 제안에도 불구하고 세계적 규모로 전개되는 현실에서는 점점 양극화와 갈등이 심화되고 있다는 데 심각한 당면의 문제가 있다. 2017년 기준으로 26명의 초거대超巨大 부자들의 재산이 지구상 인구의 절반인 35억 명의 재산보다 많다는 사실과 더불어, 한국사회도 소득격차가 날로 커져 상위 10%의 종합소득이 전체의 50 %에 육박하면서, 하위 10% 소득의 30 배에 이른다는 보도가 있었다. 더구나 미국발 불황과 세계적 규모의 경제위기가 다시 눈앞에 다가오고 있다고 전문가들은 경고를 보내고 있다.

자연스레 치열한 현장의 노력과 이를 지원하는 이론적 지침을 배경으로 점차 확산되고 있다는 사회적 경제의 대세적 흐름이, 세계적 규모이던 한국이라는 단위국가이던, 과연 유의미하게 작동하고 있는지에 대해 심각한 회의를 가지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더욱이 우리에게 롤 모델로 제시되고 있던 유럽대륙조차 심각한 내홍을 겪으면서 미래의 좌표를 상실해 가고 있는 듯 보여진다. 인류 역사가 제2차 대전 이후 다시 예측할 수 없는 혼돈의 국면으로 진입하고 있는 형국이다.

필자는 지난 수세기 동안 물적 기반의 주류를 형성해온 기존의 자본제적 탐욕과 시장의 맹신적 자기조정 기능을 바꾸어내지 않은 한, 위에 언급한 사회적 경제 방식의 보완적이고 점진적 변화만으로는 현재 상황을 전환시키기에는 절대적으로 역부족이라고 판단한다. ‘악마의 맷돌’로 표현되는 탐욕적인 자본주의 시스템이 끊임없이 재생해 내는 구축 기반을 바꾸어 내기 위해서는 이를 추동하는 흐름을 차단하거나 이와 결연하고 훌쩍 뛰는 새로운 변혁적 동력의 발굴이 요구되는 상황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새로운 변혁, 동학에서 이야기하는 개벽 세상에 대한 모습을 이야기하는 저서로 이태리 시민경제학을 대표하는 볼로냐 대학의 스테파노 자미니 교수와 룸사 가톨릭 국립대학 루이지노 브루니 교수의 공저 ‘Economia Civile, 21세기 시민경제학의 탄생’라는 책이 2015년 한국어로 번역 소개되었다. 특히 브루니 교수는 2016년 한국을 두 번이나 방문하여 ‘모두를 위한 경제 EoC(Economy of Communion 공동체 경제학)’라는 주제로 명강연을 선사하여 시민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킨 인물이기도 하다.

그런데 브루노 교수를 인터넷에서 검색하면서 그의 경제강연 EoC를 모두 공유경제 Commons Economy라고 오역하여 사용하고 있어 깜짝 놀랐다. 그의 주제가 ‘우버’나 ‘에어비엔비’와 같은 인터넷과 SNS 환경을 이용한 사업수익 모델을 이야기하는 것일까? 결코 아니다. 그가 주장하는 EoC는 사회속에서 관계적 호혜을 중심으로 공동선을 이루자는 경제적 활동을 의미하는 바, 흔히 사용하는 공유경제라는 단어와 반드시 구별하여 ‘공동체 경제’ 또는 ‘시민경제’라고 번역하여 사용해야 한다. 공유경제라는 언어를 사용하여 사적인 이익을 추구하는 플랫홈 e-business사업 모델이 마치 미래의 희망과 만병통치약으로 착각하는 오염과 폐해가 우리사회 안에 심각함을 체험한다.

개념적인 혼란을 피하기 위해 우선적으로 시장경제와 시민경제의 정의와 성격을 분명히 하고자 한다. 한마디로 시장경제는 타자를 경쟁 또는 수단으로 받아들이는 타산적(합리적) 개인個人에 기초하는 반면에, 시민경제는 시민사회에서 형성되는 관계성과 상호성의 결합으로서 인간人間에 기초한다. 시장 경제는 공리주의를 기초하여 효율과 성과를 중시하면서 사람을 이해적 대상으로 삼는 반면에, 시민경제는 효율과 규칙과 사회를 상호성이라는 매개를 통하여 인간적 삶에 대한 내용과 가치를 우선적 기준으로 삼는다.

놀랍게도 세계적 불황에 접어드는 2007년에 강원대 이병천 교수가 이미 참여사회연구소에서 발간하는 간행물 속에 필자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시민경제를 상세히 언급하고 있었다. 약간의 보완을 통해서 이교수의 글을 압축하여 아래에 소개한다.

경제적 공동체의 살림살이가 제대로 꾸려지지 않으면 이는 단지 경제 문제로만 끝나지 않고, 선한 시민(good citizen)의 정치공동체마저 유지, 발전되기 어렵다. “경제는 사회구성의 토대” (마르크스)라거나,“항산(恒産)이 있어야 항심(恒心)을 가질 수 있다” (맹자)는 말은 이런 맥락에서 지극히 타당한 명언이 아닐 수 없다. 지금까지 공화주의는 현대 시장 사회에서 공동체로서 경제적 살림살이를 새롭게 꾸리는 문제, 또는 시장사회를 시민적인 경제 공동체로 전환시키는 중대한 문제에 대해 소홀히 해 왔음이 분명하다. 우리는 경제적 토대, 또는 항산의 문제라는 공간 안에서 새로운 대안 이야기를 풀어내야 한다. 중략

공공적, 시민적 행복이라는 개념을 경제학에 도입한 시민경제론의 구상은 대표적으로 루이지노 브루니와 스테파노 자마그니의 연구에서 찾아 볼 수 있다. 브루니와 자마그니는 근대 이탈리아 시민 인본주의 전통 속에서 시민경제의 사상이 발전했다는 것과 이 사상이 이후 부당하게 이기심과 효율성에 기초한 호모 에코노미쿠스 시장주의 경제학에 의해 대체되었음을 밝히고 있다. 이들의 연구에 의하면, 이탈리아 계몽의 경제사상을 대표하는 롬바르드 경제학파, 특히 나폴리 학파가 경제를 가정사로 묶어 놓았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생각을 넘어서, 근대 상업사회와 마주하면서 그것이 지속가능하려면 시민적 덕성과 가치에 기반을 두어야 한다는 사고로 발전시켰으며, 이를 대표하는 안토니오 제노베시(A.Genovesi) 같은 인물은《시민경제학에 대한 강의》(Lezioni di economia civile, 1765)라는 저서를 남겼다(실제로 아담 스미스의 국부론보다 10여 년을 앞선 인류 최초의 경제학 전문저술이다).

이들의 연구가 단지 사상사적 복원에 그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브루니와 자마그니 시민경제론의 핵심은 효용(utility)이 아니라 관계속의 행복(eudaimonia)을 인간의 주된 욕구와 동기로 삼는 것이다. 인간은 관계적 존재로서 행복은 타자와의 관계와 ‘관계재’(relational goods)에 의존한다.

브루니와 자마그니의 시민경제론이 순수하게 관계성의 가치와 공적 행복만을 주장하고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관계성으로서 상호성의 행동은 타산적인, 조건적인 헌신 및 협력 행동과 결합된다. 따라서 시민경제 체제에서 상호성은 등가물의 교환에 기초하는 시장(효율성), 그리고 재분배(공평성, 정의)를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이들과 함께 가는 공적 행복과 자유의 원리인 것이다. 그러면서 시장적 인간형과 시장 사회를 넘어설 수 있는 관계성의 기초 원리로 자리매김 된다.

브루니와 자마그니가 제시하는 행복 경제학으로서 시민경제론은 신공화주의 경제론과 차이가 있긴 하나, 시장사회 저편을 지향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궤를 같이하고 있다. 진화 게임 이론적 정치경제학에서 제시하는 강한 상호성 모델에서는 협력의 목표 가치에서 인간 욕구의 문제가 빠져 있다는 점을 지적해야 한다. 소비 생활, 금융적 이득의 가치와 노동 생활의 가치가 충돌할 경우 그 조절 원리는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신공화주의 경제학은 불분명하다. 시민경제론은 이에 대해 노동 생활을 우선하는 분명한 답변을 갖고 있었다. 신공화주의 경제학의 경우는 시장 사회에서 끝없이 치닫는 소유와 소비 경쟁, 지위재 (positional goods )의 획득을 위한 경쟁에서 빠져 나올 수 있는 논리가 잘 보이지 않는다. 이들은 효율성, 공정성, 민주성의 가치 기준을 제시하고 있지만,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이 점에서 행복을 중심으로 다루는 시민경제학의 고유한 의의가 존재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시장자본주의 사회 속의 이윤 추구와 경쟁, 시장적 인간형 속에서 어떻게 ‘시민적 행복 경제’가 성장, 발전할 수 있을 지가 문제다. 부분 영역으로서 시장사회를 보완하는 역할이라면 몰라도, 어떻게 행복의 가치를 우위에 두는 지배적 협력 행동이, 그리하여 하나의 독자적 경제 구성이 출현, 발전할 수 있을까. 흥미롭게도 시민경제학의 저자들 또한 진화 게임 경제학처럼 협력 행동과 공동체의 진화에 대해 관심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백지 위에서 게임을 할 수는 없다. 시장사회는 부단히 공동체적 협력 행동을 구축하는 효과를 낳는다(crowding out effect). 무임 승차를 비롯하여 집단 행동의 조정 실패 문제, 효율성의 확보 문제를 위시하여 시민경제학에서는 아직 이런 난문들에 대해 대답을 주고 있지 않다. 시민경제학에서 상호성의 개념은 다분히 ‘상호적 이타주의’(reciprocal altruism)에 가까운 것으로 보이는데, 이런 행동에 기반한 경제가 하나의 지속가능한 질서로서 성공적으로 작동할 수 있는 조정 규율에 대한 고민이 미약하다고 생각된다.

시민경제에 대한 이병천 교수의 요약소개와 비판의 글에 감사 드린다. 수도원을 중심으로 중세 가톨릭에서 실천해온 공동체적 이웃사랑과 르네상스 시대에 부활한 인본주의가 한데 결합하여 18세기에 태동하였던 시민경제론은, 안타깝게도 영국이 산업혁명을 일으킨 이래 공리주의로 무장한 시장경제학이 주류를 이루면서 한동안 역사의 뒤안길에 잊혀졌다가, 자본주의가 한계를 보이는 현재의 위기국면에서 다시 관심을 끌기 시작한다. 그러나 이교수가 지적하였듯이 시민경제론에는 자본제가 전일적으로 강력하게 작동하는 현시대의 흐름 속에서 자신이 주장하는 원칙과 내용을 성공적으로 부활시킬 통로와 로드맵이 구체적으로 보이지 않는 약점을 지니고 있다.

이를 보완하고자 제3섹터 경제론을 시작하면서 서론에서 언급하였듯이 시장경제론과 시민경제론을 융합시키려는 과정에서 정부의 선택적 양수 기능을 제안한다. 자본제하에서 형성된 심각한 문제들의 보완 장치로서 미약하게나마 형성되고 있는 사회적 경제 영역을 시장경제의 논리와 흐름에서 분리하고 차단시키면서 철저하게 시민경제론의 원칙에 입각한 운용이 뿌리를 내리고 재생적 조건을 갖추기 위해서는 시장경제 영역에서 형성된 물적 기반과 자원을 사회적 경제영역으로 강제로 이동시킬 펌프와 자본의 탐욕을 걸러내고 시민경제의 원칙을 역방향으로만 흘러보내는 삼투막이라는 두 가지 수단이 긴히 필요하다.

상기의 펌프와 삼투막은 단지 시장경제 영역에서 시민(사회적)경제 영역으로 물적 자원만을 이동시키는 것이 아니라, 역으로 시민경제에서 형성되는 상호성의 원칙, 즉 사회적 관계 속에서 자발적 호혜와 증여적 관행과 인간적 가치를 우선하는 규범을 시장경제 영역으로 침투시키면서 영향을 확산시켜야 한다. 양수와 삼투라는 강제적 정책 수단을 통하여 시장이 갖는 합리적 효율과 시민사회가 갖추어야 할 규범과 질서 그리고 인간중심의 가치 철학을 관계적 상호성이라는 매개를 통하여 점차적으로 융합하는 미래경제의 모습을 추구해야 하며, 이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정치구조, 조세제도, 산업의 물적 기반, 혁신의 일상화, 협력과 공유의 제도화, 교육과 문화에 있어서 역량강화, 금융 시스템의 근본적 변화 등 다층적 분야에서 획기적 조치가 요구된다. 문제는 누가 어떻게 진행 할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

되풀이 하자면, 시장경제는 타자를 수단으로 받아들이는 탐욕적인 개인에 기초하는 반면에 시민경제는 상호성과 사회성의 결합으로서 인간에 기초한다. 여기서 인간은 관계적 존재이다. 관계적 존재라는 의미는 인간은 타자와의 관계 자체라는 말이다. 더구나 타자의 핵심을 이루는 지구라는 물리적 조건의 환경 오염과 기후 변화 그리고 자원의 한계 등으로 인하여 세계는 더 이상 자기증식적이고 소모적인 자본주의적 경제운용를 지속할 수 없게 되었다. 이제 인류는 지속적 생존여부라는 심대한 과제에 직면해 있는 것이다.

현재의 상황은 개별적 탐욕과 성장중심의 사회경제적 흐름에서 사회적 관계와 상호성에 기초한 역량개발과 자기실현적 사회로 전환하는 동시에, 무제한적 생산중심 사회에서 탈피하여 지속이 가능한 공유와 배분중심 사회로 이동해야 할 개벽 세상을 요구하기에 이르렀으며, 이를 실현하기 위하여는 반드시 정치의 우선성을 작동시킬 변혁적 주체로서 시민정부라는 권력구조가 실현되어야 한다. 이 주제는 다음 기회에 다루어 보고자 한다.

목, 2019/02/14- 1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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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인류세와 개벽세

옳거니! 무릎을 쳤습니다. 가히 “개벽에 담긴 사상적 획기성으로 말하면 ‘근대’라는 말로도 부족”합니다. 턱없이 모자랄 뿐만 아니라 공연한 오해를 사고 시비에 휩싸이기 쉽습니다. 동네북으로 전락한 ‘근대’에 견주자면 ‘개벽’은 싱싱하고 생생하며 팔팔하고 푸르른 개념입니다. 번뜩번뜩한 영감을 제기하고 팔딱팔딱한 활력을 제공합니다. 고로 한국사상사가 “개벽 전과 개벽 후로 양분된다.”는 말씀에 전적으로 공감합니다. 부디 그렇게 정공법으로 밀고 나아가시면 좋겠습니다. 서구에서 고안된 고대-중세-근대의 작위적 시대구분에 연연할 것 없이, 개벽을 전후하여 사상의 획기를 긋는 편이 한층 그 실상에도 부합한다고 봅니다. ‘코끼리는 생각하지마’, 레이코프의 프레임 이론을 참조해도 좋겠습니다. ‘근대’는 슬쩍 지워버리고 ‘개벽’을 슬그머니 전면에 띄우는 편이 전략적으로도 이롭습니다. 게다가 “유학과 서학을 시야에 넣으면서 세계주의 지향”을 보인 “독자적인 경전”을 산출했음은 이미 동학의 창도가 한국사를 넘어선 세계사적 사건임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동서문명의 회통과 신문명 창조라는 21세기의 과제가 이미 ‘다시 개벽’의 외침과 깨침에 내장되어 있던 것입니다. ‘근대’와 씨름하며 진을 빼기보다는 사뿐하고 산뜻하게 개벽으로 쾌속질주할 것을 권장합니다.

옳다구나! 맞장구를 쳤습니다. “주자학이 동아시아를 700년 이상 이끌어 갔듯이, 그에 상응할 만한 개벽학이 요청되는 시대”라는 발상에 전폭적으로 지지합니다. 민주화 다음 단계로 “개벽화”를 제시한 것 또한 탁견이 아닐 수 없습니다. 비로소 촛불 이후의 희뿌연 안개가 걷히고 1987년 이후의 출로가 희미하게 보이는 듯합니다. 산업화는 개화의 전반전이요, 민주화는 개화의 후반전일 따름이었습니다. 게임오버, 구시대의 막이 진즉에 내린 것입니다. 박근혜 정권은 산업화 세력의 앵콜이요, 문재인 정권은 민주화 세대의 커튼콜이었습니다. 하기에 저로서는 개발파와 개혁파의 저 아웅다웅이 신물이 나도록 지겹습니다. 개화우파와 개화좌파의 ‘적대적 공존’이 진물이 날만큼 지긋지긋합니다. 서둘러 패러다임을 전환하고 프레임을 바꾸어야 하겠습니다.

교토대학의 “인류는 우주사회를 만들 것인가” 심포지움 포스터

단 주자학은 비단 동아시아에서만 천년 가까이 주도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송학의 서천’, 성리학이 서아시아부터 서유럽까지 계몽주의의 충격을 주었습니다. 일파만파 유라시아와 아메리카의 근대 형성에 중추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그래서 혹자는 중국과 조선과 월남을 일컬어 ‘잃어버린 근대성들’이라고 표현했을 것입니다. 근대로 치자면 동아시아가 원조이고 서유럽이 후발주자였습니다. 서세동점에 앞서 동세서진이 자리하는 것입니다. 다만 19세기 동서간의 대역전, 대분기가 일어난 것은 어디까지나 물질개벽의 소산입니다. 이 시점부터 지상 위에 살아가는 인간의 역사에 지하자원을 포함한 지질학의 역사가 포개지기 때문입니다. 동서를 망라하는 인류세의 개창이라 하겠습니다. 하야 개벽파 선언과 개벽학 수립은 인류세를 개벽세로 반전시키는 지구적인 대업이자 우주적인 과제가 됩니다. 동서양은 물론이요 동반구와 서반구의 만인과 만물이 천심과 일심으로 합작하지 아니하면 일을 그르칩니다.

지난 백년처럼 개화세가 지속되어서는 한 세기 후를 장담키도 어렵습니다. 개벽세가 만세를 누리기 위해서는 백년대계부터 곧추세워야 합니다. 근간은 역시 학문이고 교육입니다. ‘SKY 캐슬’ 입시 교육만 병폐이고 적폐인 것이 아닙니다. 공교육도 사교육도 개화학이 독점하고 있습니다. 학교도 학원도 개화학이 득세합니다. 그래서 근대의 캐슬 안에 갇히어 있는 것입니다. SKY 대학이라 해서 별반 다를 것도 없습니다. 커녕 그 대학들이야말로 개화학의 아성이고 보루라고 하겠습니다. “大學”다움을 잃어버린 지 이미 오래입니다. 대학의 첫 구절 ‘수신제가치국평천하’가 무색한 공간입니다. 수신도 하지 않고, 평천하도 연마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학교와 학원 사이 ‘개벽학당’이라는 새 길을 내기로 작당한 까닭입니다. 몸과 마음을 다스리는 수양학부터 태평천하의 노하우까지 전수받는 경세학까지 장착한 군자와 보살을 대거 양성해야 하겠습니다. ‘나라사람’ 국민(國民=개화우파)과 ‘도시사람’ 시민(市民=개화좌파)을 지나 ‘하늘사람’ 천민(天民=개벽파)으로, 자신을 구원하고 지구를 구제하는 개벽세의 주체들을 키워나갑시다. 그 정도는 되어야 2019년을 ‘개벽화’의 원년으로 기억하고 기록할 수 있을 것입니다.

 

2. <개벽학의 권장>

불교대학과의 간담회

일본에 다녀왔습니다. ‘개벽대학’을 표방하는 ‘개벽총장’ 박맹수 선생님과 제가 속한 동북아연구소의 염승준 소장 등과 동행했습니다. 리츠메이칸과 도시샤 등 교토에 자리한 여러 대학 관계자들을 두루 만났습니다. 불교대학의 다나카 총장과는 구면입니다. 작년 여름 처음 뵙고 서로 호감을 품었습니다. ‘인도의 개벽파’ 타고르가 세운 국제대학 비슈바바라티에서 공부한 분입니다. 산스크리트어와 벵갈어에 능합니다. 유라시아의 북방과 남방에서 유장하게 펼쳐졌던 불교 네트워크에도 해밝습니다. 자연스레 저의 천일여행에도 깊은 관심을 표하셨습니다. 동아시아는 물론이요 남아시아와 북아시아도 익숙하시니 척하면 척, 말이 잘 통한 것입니다. ‘방랑자’(放浪者)의 일본어 발음이 ‘호로샤’이지요. 그 분은 저를 ‘호로샤’라고 부릅니다. 어느새 집에서도 별명이 되었습니다.

이번 만남의 화두는 단연 AI(인공지능)와 로봇이었습니다. 이미 인구감소에 진입한 일본에서는 로봇의 상용화가 가파르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육체노동과 정신노동에서 점점 인공(人工)이 인간(人間)을 대체해 갑니다. 시급하게 새로운 세계관과 인간관 및 가치관이 필요한 때라고 역설하셨습니다. 불교를 포함한 기성의 세계종교가 어떠한 역할을 수행해야 할지를 숙고하고 계셨습니다. 저 또한 깊이 공감하는 주제입니다. 올해 제가 구입한 책 목록을 보노라면 자연과학 분야가 월등히 많습니다. 따지고 보면 최근의 관심사도 아닙니다. 견문을 시작했던 첫 해, 2015년 여름부터 싹을 틔웠습니다. 선생님도 흥미롭게 읽으셨다는 두아라와의 인터뷰가 이루어진 곳이 8월의 싱가포르였습니다. “탈세속화와 재영성화”라는 화두를 얻은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바로 그 인터뷰를 마친 날 구글(Google)과 마이크로소프트(MS)에서 근무하고 있는 분들과 저녁 식사를 했습니다. 당시의 주된 화제가 바로 AI였습니다. 인공지능과 가상현실(VR)이 펼쳐갈 미래에 대해 뜨거운 토론을 이어갔습니다. 문외한인 저로서는 긴가민가 솔깃하면서도 갸웃 했던 기억이 납니다. 실감하기까지에는 그리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이듬해 3월, 델리의 네루대학에 머물 무렵이었습니다. 알파고가 이세돌을 연파하는 기사가 인도의 TV와 신문의 톱뉴스를 장식했습니다. 근대적 인간, ‘이성적 인간’의 근간이 허물어지는 세기적 사건이었습니다. 개화세의 티핑포인트요, 개벽세의 터닝포인트라 할 만합니다. 하기에 요즘 저는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고전적 화두에 응답하기 위해서라도 철학이나 인문학 책을 읽기보다는 과학 책에서 훨씬 더 많은 영감을 얻는 편입니다.

그 변화의 최첨단에 서 있는 대학은 역시나 일본의 최고명문이자 세계적인 연구중심대학인 교토대학이었습니다. 현 총장의 전공이 흥미롭습니다. ‘자연인류학’이더군요. 인간과 자연을 분리하지 않습니다. 인간이라는 종의 특성을 자연적 지평에서 지구적 수준에서 탐구합니다. ‘지구인간권과학’(地球人間圈科學)이라는 독특한 학술영역도 등장했습니다. 20세기의 신학자 테야르 드 샤르댕이 <인간현상>에서 직관적으로 설파했던 내용을 21세기에는 과학자들이 데이터와 테크놀로지로 연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주의 빅뱅부터 그 빅뱅을 연구하는 ‘생각하는 생명’의 탄생에 이르기까지 장구한 지구사의 지평에서 인간을 탐구합니다. 신학과 과학이 아름답게 합류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지구적 인간’ 앞에서 ‘역사적 인간’은 가뭇없이 초라합니다. 제가 사회학에서 역사학으로 전향했던 이유가 200년 남짓한 ‘근대’라는 허약한 토대 위에 서 있는 사회과학이 마땅치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고작 일천년, 겨우 이천년의 역사학 자체도 안목이 짧고 시야가 좁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인간의 역사를 지구라는 혹성에 살아가는 생명의 역사로 간주하는 빅히스토리(Big History) 정도는 되어야 읽어볼 의욕이 솟습니다.

교토대학의 “호모 사피엔스의 미래” 심포지움 포스터

지구사의 시야에서 인간을 숙고하기에 현재의 민주주의 또한 형편없는 제도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7년 만에 귀국해서 보니 혹자가 저를 ‘반(反)민주주의의 선지자’라고 비판하는 학술논문을 썼더군요. 절반은 맞고 절반은 틀린 진단이라고 생각합니다.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반(半)민주주의자’이겠죠. 현재를 점유하고 있는 일국의 인간들만 대변하는 민주주의가 지구를 망치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인간 이외의 다른 생명체의 ‘주권’을 전혀 반영하지 않는 근대적인 정치제도가 인류의 대멸종을 앞당기고 있다고 우려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인간의 조건과 운명을 생명적 차원에서 지질학적 역사에서 숙고하는 것이야말로 ‘정신개벽’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여 ‘정신개벽’ 이후의 제도가 기성의 시장이나 국가에 안주할 수는 없다 하겠습니다. 시장과 국가의 기저에 자리하고 있는 심층적 현실까지 가닿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 심층적 현실은 자본주의니 사회주의니 하는 체제나 이념으로 접근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닙니다. 자유민주주의나 사회민주주의의 지평을 넘어서는 그야말로 “개벽적 개안”이 필요한 대목입니다. 그래서 저는 종종 “심층 민주주의”(Deep Democracy)라는 표현도 사용합니다. 그 심층 민주주의에서 ‘공공영역’은 인간과 인간 사이만 가리키지 않습니다. 사람과 사물, 만물 사이의 공공영역을 창출해야 하는 것입니다. “포스트휴먼적 공공공간”이라고 세련되게 표현할 수도 있겠습니다. 이 세계에는 이미 생물과 미생물과 무생물뿐 아니라 인간이 만든 인공물까지 공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생물과 미생물과 무생물과 인공물까지 만물이 활물(活物)로 연결되는 울트라 하이퍼 네트워크 시대가 개막하고 있습니다. 이들을 공히 ‘행위자’로서 모시고 ‘주권자’로서 섬기는 새로운 민주주의가 절실하고 절박한 것입니다. 천도교 식으로 말하면 경물-경인-경천에 바탕하여 사물을 대의하는 의원과 인간을 대변하는 의원과 하늘을 대리하는 의원으로, 삼원제 민주주의가 필요한 셈입니다.

이처럼 만물의 공공영역을 창출하고 만물의 주권을 대의하는 민주주의를 일구어가는 배움이 “개벽학”이라고 생각합니다. 응당 일국학일 수도 없으며 인문학에 그쳐서도 아니 됩니다. 개벽학은 필히 지구학이자 미래학이어야 합니다. 원불교 식으로 말하자면 “과학과 도학이 병진”해야 합니다. 올 들어 익산에는 “개벽학 연구회”가 출범했습니다. 서울에서는 <개벽+>라는 신생 매체의 창간을 도모하는 준비위원회도 꾸려졌습니다. 저 또한 선생님과 함께 양쪽 모두에 한 발씩 걸치고는 있지만, 내심으로는 썩 만족스럽지 못합니다. 아니 불만족스럽고 부족하다고 여깁니다. 대개 철학자, 사학자, 신학자 등 인문학 전공자에 한정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는 ‘인문병신체’의 냉소를 극복하기 쉽지 않을 것이라 전망합니다. 정신개벽은 물질개벽의 반대말이 아닐 것입니다. 물질개벽과 정신개벽은 상호진화해야 합니다. 물질개벽의 최첨단을 연구하는 분들과의 협업과 합작이 없다면 ‘개벽학’의 앞날 또한 그리 밝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3월부터 시작하는 개벽학당에서 <동경대전>과 <한살림선언>은 물론이요 인류세와 AI 관련 문헌까지 함께 읽으려고 작심한 까닭입니다. 기왕 원불교사상연구원이 ‘개벽학 연구회’를 발심했다면, 카이스트 문술미래전략연구원 같은 곳과의 공동연구 등의 파격적 실험을 감행해 보면 좋겠습니다. 사물인터넷(Internet of Things)과 경물사상(敬物思想)을 함께 공부하고, 정신개벽(精神開闢)과 포스트휴먼(Post-Human)을 동시에 토론합시다. 개벽과 개화가 공진화해야만이 비로소 또 다시 개벽, 개벽 2.0도 완수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3. 문명개화에서 신문명개벽으로

교토대학 오구라 기조 교수와 함께

선생님과도 연분이 깊은 오구라 기조 선생도 뵈었습니다. 촛불혁명 이후 부상하고 있는 한국의 ‘다시 개벽’의 흐름을 전달했습니다. 저는 일본에서도 그러한 움직임이 있을까 궁금했습니다. 메이지유신 150주년을 기하여 일본의 새로운 방향 전환을 모색하는 사상과 세력이 없을까 쫑긋했습니다. 반응은 무척 회의적이고 부정적이더군요. 중국의 부상과 결부되어 미국 의존도가 더욱 심해지고 있다고 합니다. 반면으로 일본의 전성기를 구가했던 19세기말과 20세기 초에 대한 동경이 점차 짙어지는 모양입니다. 비유컨대 ‘다시 개화’의 향수병에 젖어들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금 일본이 재빨리 서세동점의 물결에 올라타 동아시아의 천하대란을 야기했던 지난 150년의 역사가 끝물에 이르렀음을 확인합니다. 실제로 제가 2-30대 때 즐겨 읽었던 <아사히신문>도 <세카이>도 언젠가 부터는 전혀 찾지를 않게 되었습니다. 후쿠자와 유기치의 <문명론의 개략>이나 <학문의 권장> 이래 문명개화 노선에서 그리 달라진바 없기 때문입니다. 그가 선창했던 학문이 바로 서학이요 개화학이었습니다. 개화학은 이제 한국에서도 일본에서도 공히 식상하고 진부합니다.

“새로운 역사는 이제부터”, 목하 21세기 동아시아의 변화를 추동하는 진원지는 한반도입니다. 천하대란을 태평천하로 반전시키는 이행의 허브 또한 우리가 터한 바로 이곳입니다. 지난 40년 중국의 개혁개방이 세계체제를 격변시켰다면, 앞으로 40년은 북조선의 개혁개방이 그 못지않은 파장을 일으킬 것입니다. 한반도의 북쪽과 동북3성과 동몽골과 동시베리아가 물질개벽의 최전선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일본과 한국과 중국의 20세기형 ‘근대화’ 노선을 복제해서는 천만만만 아니될 것입니다. 한국의 역할이 바로 여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문명개화에서 신문명개벽으로의 대반전을 우리가 앞장서야 합니다. 개화학에서 개벽학으로의 대전환을 우리부터 솔선수범해야 합니다. 생명(生命)을 곧 혁명(革命)이자 천명(天命)으로 삼는 신문명을 창조하고 개창합시다.

21세기의 개벽학은 19세기 동학의 환생이자 부활일 것입니다. 19세기 서학의 독주에 동학은 좌초했습니다. 20세기 식민지의 궁여지책으로 동학은 신종교의 모습으로 변장했습니다. 천도교, 원불교, 대종교, 증산교 등 개벽종교의 형태로 식민기를 근근이 버텨낸 것입니다. 마침내 포스트-웨스트, 포스트-아메리카, 포스트-모던, 포스트-트루스, 포스트-휴먼 시대가 열리면서 동학의 가치가 만개할 수 있는 신시대, 뉴노멀의 국면에 진입했습니다. 19세기의 동학과 21세기의 개벽학을 잇는 연결고리에 자리한 사건이 바로 1919년의 3.1혁명이라고 생각합니다. 동학의 후생이 3.1혁명이요, 개벽학의 전생이 또 3.1혁명입니다. 하기에 말씀하신 것처럼 기미독립선언서는 결코 “개화파는 쓸 수 없는 문장”이었던 것입니다. 개벽사상의 특징과 특장이 기미년 만세운동의 구석구석마다 뚝뚝 묻어납니다. 진정 개벽의 눈으로 다시 읽어야 3.1운동의 진수를 맛볼 수 있고 진면목을 파악할 수 있습니다.

마침 저의 다음 서신이 3월 1일에 발행될 예정입니다. 한참 글을 쓰게 될 2월 25일부터 28일까지는 하노이에 있을 예정입니다. 곧 북미정상회담이 열린다고 합니다. 바야흐로 동학혁명 좌초 이래 ‘장기 20세기’가 저물어간다는 예감으로 저릿합니다. 마침내 ‘역사적 21세기’가 개막하는 듯한 실감으로 짜릿합니다. 새로운 역사, “다른 백년, 다시 개벽”도 이제부터입니다. 하노이에서 3.1혁명을 깊이 묵상하고 재음미하는 글로 인사드리겠습니다.

금, 2019/02/15- 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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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미국 대학가의 “짱”을 꼽으라면 2017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하게 되는 록 가수 밥 딜런이나 남미의 혁명가 체 게바라를 들 수 있다. 이들과 함께 대학가에서 비슷한 인기를 누린 대중문화의 아이콘이 있었다. 바로 애니메이션의 주인공 ‘스파이더 맨’이다. ‘스파이더 맨’이 타고, 오르고, 뛰어 내린 마천루는 뉴욕 맨해탄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그가 뛰고, 오르내리던 맨해탄에 오늘날의 스카이라인이 형성되는데 약 120여년 정도 걸렸다.

19세기 뉴욕시는 격자형 가로망을 창조하며, 상수와 하수시설, 공원을 조성하며 기반시설 정비 행정을 펼쳤다. 하지만 마스터 플랜 없이 추진하는 도시계획으로 인해 혼란이 발생하자, 진보적 사상가들의 노력으로 더러운 주거조건을 방지할 수 있는 획기적인 임차인 주택법(1901)이 제정되었다. 더 나아가 ‘1916 조닝’을 제정해서 ‘뉴욕 스타일’ 또는 ‘웨딩 케이크’ 형태라는 고유명사로 불리우는 맨해탄 초고층 건축 형태를 주형해 냈다. ‘1916조닝’은 뉴욕에서 탄생하여, 미국의 각 도시에 영향을 미쳤을 뿐만 아니라 해외에도 전파되었다. 한국에도 일제식민지시기 1934년 ‘조선시가지 계획령’속에 등장하여 오늘날 까지 한국 도시계획 규제제도의 근간을 이루는 인연을 갖고있다. 뉴욕시 초고층 건축의 진화를 이룬 ‘1916 조닝’은 계속 발전하여 21세기 각국의 글로벌 도시형성에 영향을 미칠 것인가? 아니면 20세기의 유물로 기억될 것인가?

 

트리뷴 빌딩 vs 화신백화점

2018년 8월 뉴욕 맨해탄의 초고층 건축 신호탄을 쏘아 올린 기원지를 답사하기 위해서 시청역 주변 답사에 나섰다. 브로드웨이가 시청공원과 만나면서 두 갈래로 나뉘는데, 그 접점에1899년 시청사를 마주보고 세워진 391피트 30층 높이의 ‘파크 로우’ 빌딩이 서 있었다. ‘파크 로우’ 빌딩은 빅토리안 양식을 추구했지만, 외장은 고전주의 양식이었다. ‘파크 로우’빌딩은 건물 중간 중간에 수평성이 강조된 장식적인 띠와 발코니가 있어 이채로웠다. 마천루가 하늘높이 치솟으려는 수직성을 저지하려는 건축가의 의도가 읽혀졌다.

시청 앞에서 시야에 들어오는 맨해탄의 이미지는 주변에 건축가 ‘프랭크 게리’가 설계한 파도치는 은빛 마천루인 포스트 모더니즘 스타일의 ‘8 스프루스 스트리트’빌딩이 보이고 100년 이상 된 ‘울 월쓰’ (Woolworth Building,1913) 빌딩이 브로드웨이를 경계로 서있는 등 초고층 현대식 건물과 오래된 건축물이 시청공원을 둘러싸면서 품위와  세련미를 동시에 풍기는 퓨전 거리풍경이었다.

뉴욕 맨해탄의 스카이 라인 1세대는 1876-1900년 기간 중에 로우어 맨해탄 에서 시작했다. 1876년 완공된 둥근 지붕을 씌운  260피트 높이의 트리뷴 빌딩은 조적식 구조물로써 10층 높이의 최초의 상업용 건물이었는데, 엘리베이터를 설치한 혁신적인 건물이었다. 뉴욕 초고층 건물의 진화에 중요한 역할을 한 엘리베이터는 1937년 서울에도 수입되어 지금은 철거돼 사라진 종로 화신백화점에 승객용 승강기로 설치되었다. 서울의 고층건물과 뉴욕 맨해탄의 고층 건물에 엘리베이터가 설치된 싯점이 거의 60여년의 시차가 있지만, 오늘날 서울의 모습은 뉴욕 맨해탄과 큰 차이를 느낄 수 없을 정도로 현대적인 초고층건물이 많이 세워져 있어 선진기술 습득의 모범생임을 실감케 한다.

20세기 들어와 향상된 건설구조기술과 엘리베이터의 효율성으로 초고층 건물이  폭팔적으로 증가하면서 오늘날 맨해탄의 스카이 라인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이 시기는 인류사에서 마천루라는 개념을 정립하고 생산하고 전파하는 역동적인 시기로 기록된다.

 

1916년 조닝 조례 vs 조선시가지 계획령

(왼)플랫 아이론 빌딩, (오)울 월쓰 빌딩

20세기 전환기에 맨해탄은 이미 초고층 건물의 본거지라는 명성을 얻었다. 11층 높이의 타워빌딩(1889), 20층 높이의 플랫아이론(Flatiron,1902)건물이 세워지고, 전례 없는 높이의 792 피트의  네오 고딕 양식인 ‘울월쓰 빌딩’이 세워졌다. 하지만 초고층 건물내 채광과 환기의 확보가 커다란 과제였다. 이를 보장하기위해 전면 도로 폭으로부터의 사선제한이라는 장치가 1916년 뉴욕 조닝 조례에 채택되었다. 1916년 뉴욕의 조닝 코드는 현대적인 도시계획제도의 등장이라는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이 제도는 가로에 도달할 수 있는 일조량을 확보하기 위해 건축선 후퇴(셋빽)를 규정했고,  대지면적에 대한 비율로 타워를 제한해 자연스럽게 장래 세워질 건물의 형태가 결정되도록 하였다. 1916년 뉴욕 조닝은 맨해탄 초고층 건물의 형태와 스카이라인을 만들어 낸 아버지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1916년 뉴욕의 조닝은 미국  도시들 뿐만 아니라 세계 각국에도 전파되어 독일을 포함해 일본에는 1919년 도시계획법, 한국에는 일제 식민지 시기 1934년 ‘조선시가지 계획령’에 채택되어 발전해와 오늘날 한국 도시계획제도의 중요한 근간이 되고 있다. 하지만 ‘조선시가지 계획령’속에 채택된 지역제는 최저수준의 위생확보에 국한하였기 때문에 뉴욕의 1916년 조닝 만큼의 완성도를 갖추지 몼한 식민지하의 도시계획이라는 한계를 갖고 있다.

1916년 조닝의 엄격한 제약하에서 세워진 대표적인 건축물이 아르데코 양식의 크라이슬러(1930)와 엠파이어 스테이트(1931)빌딩이다. 바야흐로, 20세기 도시문명을 선도하는 맨해탄에 초고층 건물의 시대가 왔음을 선포하였다.

 

뉴욕의 21세기: 허드슨 야드 vs 세운상가

세운상가

뉴욕 ‘1916 조닝’은 파리,런던,보스톤,시카고와 같은 유럽과 미국의 도시들에서 사용하던 고도한계와는 완전히 다른 독창적인 것으로, 개별 건물과 스카이라인을 3차원 형태로 만들어, 웅장한 형태의 오늘날의 맨해탄을 만들었다.

21세기 들어와 뉴욕시는 새로운 성장의 파고에 금융 혜택과 인센티브 조닝을 적용해 ‘허드슨 야드’ 같은 미개발된 맨해탄 지역이 혁신의 에너지를 흡수케 해 하룻 밤만 자고 나면 천지가 개벽하는 감동을 일으키고 있다.  한국 최초의 주상복합 건물이면서 한때 서울의 대표적인 전자상가였던  세운상가도 뉴욕의  ‘허드슨 야드’ 모델을 적용하여  21세기형 복합 초고층 건물로 다시 솟구쳐 ‘스파이더 맨’이 타고, 오르는 감동을 시민들에게 선사하는 큰 그림을 그려볼 수는 없을까?

 

조재성

21세기 글로벌도시연구센타 대표/원광대 명예교수

토, 2019/02/16- 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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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현재 정치구조와 실상은 완벽한 실패작이다

첫째 현존 정치지형은 부패하고 무능하고 악질적인 이명박근혜 시대에 형성된 구질서의 산물이다.

둘째 여의도 국회는 촛불시민혁명이 요구하는 잘못된 과거를 청산하고 새로운 시대를 열어갈 미래전향적인 제도를 도입하는 입법은 고사하고, 서민들의 고달픈 삶을 위한 민생법안들을 외면하면서 친사업적(business friendly)이라는 핑계로 인터넷은행법과 규제프리존법 등 게걸스런 기득권을 강화하는 악법만을 양산하고 있다. 구질서 태생 집단이라는 한계에서 오는 예견된 사항이었다.

셋째 시민사회의 요구와 현실을 제대로 반영하자는 비례성 강화의 선거법 개정 요구에 대해 집권 여당인 민주당을 포함하여 자신들의 밥그릇과 이해타산만을 따지는 수구적 입장을 견지하면서 거부의 입장을 노출하고 있다. 시민들의 요구는 안중에도 없고 제도 정치가 당신들이 밥먹고 사는 천박한 직업현장으로 전락하였다. 문재인 정권이 1700만 시민이 모인 광장의 민주주의로 탄생한 사실을 2년 만에 기억에서 지워버렸다.

한가지만 더 추가하자면, 정치가 생물이고 변하는 현실 상황에 응동하는 주도적 유기체로 작동하려면 끊임없이 새로운 인물과 프로그램이 도입되는 신진대사가 활발히 이루어 져야 하는데, 현재의 주요 정당 구조는 외부 환경과 차단되어 스스로를 질식시키고 퇴화가 진행 중이다. 당연한 귀결로써 어렵고 힘든 시민들의 현실적 상황을 반영하고 이를 개선할 투쟁의 통로로서 정치기능이 마비된 상태이다.

6월 민주화운동 이후 30년간 실패한 경험을 통하여 우리사회가 안고 있는 수많은 현안과 문제를 해결하는 주도성과 우선성이 제도정치의 영역에 있었다는 점을 확인하면서, 위에 언급한 정치제도와 현황은 또다시 촛불혁명의 실패를 예고하는 매우 심각한 내용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더구나 많은 전문가들이 경고하듯이 2년 뒤에 다가오는 미국대선을 기점으로 세계적 규모의 불황 그리고 뒤늦게 찾아오는 세기적 격변이 다가오고 있다는 예측까지 감안한다면, 이를 대비해야 할 한국정치의 개혁이라는 주제는 단순히 선거법 개정과 개헌수준이 아닌 새로운 차원의 접근과 구상을 논의해야 할 수준에 이르렀다.

그간 시민사회에서 활발히 요구하여 왔듯이, 정치에 투입할 선량을 선출하는 절차인 선거법과 국가운영의 지침이 되는 헌법 사항의 개선작업에 더하여, 이제 정치가 지향해야 하는 공동체 윤리를 담아내면서 우리 시대를 고백하고 다가오는 시대를 준비하는 선언적 플랫홈 마련하고, 이를 실현하는 개혁 작업에 시민들이 직접 참여해야 한다. 그야말로 어느 시인이 노래하였듯이 ‘사회계약법을 다시 써야’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예건데 제 2의 마그나카르타 같은 시대선언적 헌장을 만들어 가는 과정에 루소가 이야기하였듯이 공민으로서 모든 시민들이 참여하고 합의하여 일반의지가 관철되는 과정이 요구된다.

돌이켜 보면 지난 120여 년 한국의 근현대사는 서세동점과 현재까지 지속되고 있는 서양의 패권주의에 대응하여 민중 또는 시민들이 민족역사를 지켜오고 삶의 터전을 이룩해온 기록이다. 오로지 일신의 영달을 위하여 때로는 매관매직의 수단으로 쓰러져 가는 봉건 왕조을 방편 삼았고 때로는 근세사의 흐름이라는 핑계로 매국적인 친일행각을 일삼았고 때로는 민족의 장래를 망각하고 전일적 패권세력과 탐욕적 세계화에 편승해온 자기편애적 기득권 집단들에 온몸으로 저항하면서 새로운 장을 펼쳐온 과정이기도 하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에서 기득권 세력은 항상 억압의 기제로서 공권력을 동원하는 국가기구를 방편으로 삼아 왔고 이에 민초들은 삶의 터전에 기반한 역동적인 변혁운동으로 대항하여 왔다. 다행히 419 혁명과 6월 민주화 운동 그리고 근래의 촛불혁명을 통하여 국가의 성격이 시민들과 대립항에서 시민들에 기초한 시민들을 위한 공생의 기반이라는 가능성으로 바뀌어 왔다.

한마디로 국가기구와 시민사회의 관계를 억압적인 제로섬에서 탈구시켜 서로가 보완하고 필요로 하는 원-원 게임으로 전환하는 계기를 쟁취해 온 과정이다. 이런 흐름 속에서 근대사의 피해자인 한국사회의 경로는 우리가 교육 과정에서 모범이라고 배워온 가해자로서 서구의 역사적 과정과는 다를 수 밖에 없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서구에서 형성되어온 민주주의의 형식논리적이고 절차적 보편성을 한국사회가 겪어온 체험적 맥락에서 다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필자의 직관적 견해를 단순하게 표현해 보자면 근대사의 식민 지배자로서 서구사회는 한국헌법 전문에도 기술하여 있듯이 개인(자유)>민주(절차)>공화(내용)의 선차적 자유민주공화국이라는 질서체계로 구성되어 있는 반면에, 천지인 합일의 오랜 전승 속에 동양사회는 인간(천명)=예의(관계)=상생(환경)이라는 터전 중심의 통섭적 맥락으로 이루어져 왔다고 본다.

앞서 나간 서구의 방식을 그대로 모방하고 복사하는 것보다는 상기에 언급한 역사적 체험으로서 양자간의 상호적 융합을 통하여 한국정치가 향후 전개 과정에서 형식적 절차 및 정합적 과정 그리고 실질적 내용을 공히 확보할 수 있지 않을까 상상해 보면서, 한국정치가 추구해야 할 미래의 모습으로 민본 민생 민락의 삼민적 지향을 되풀이하여 적어 본다. 전장前章에서 언급하였듯이 서구 민주주의가 개인에 기반하여 키워온 시장경제가 아니라, 상생에 기초하여 미래에 만들어갈 시민경제가 한국사회가 추구하여 나갈 대표적인 예시이다.

한편 경희대 김상준 교수가 지난 120년의 근대사를 30년 간격의 ‘악순환의 고리’라고 성찰적으로 지적하였듯이, 87년 민주화대투쟁 이후 지난 30 년간의 내용을 반성해보면 민중 또는 시민운동은 폭발적 고양기를 통해 기득권이 지배해온 국가의 성격에 변화를 이룬 후에는 불행하게도 공히 대중적 기반을 상실하면서 영향력이 현저히 축소되어 왔고 이에 비례하여 민초들을 억압하는 기제들이 새로운 형태로 등장하면서 특혜와 기득권의 기반을 다양하게 재구축하여 왔다.

시대정합적 약속인 최저임금인상과 소득주도성장이라는 공약을 방기한 채 이재용 석방과 조양호 면책이 진행되는 것을 보면, 촛불혁명 이후에도 비슷한 실패의 경로를 밟을 것이라는 예감이다. 조루한 포스트민주주의의 전형적인 양상이다. 특히 탈법 불법 비법을 저지르며, 합의된 공권력과 법적 질서를 우롱해온 삼성의 이씨 가문과 이재용에게 면죄부를 주는 것은 촛불혁명의 역사적 의미를 무화 시키는 것에 다름없다. 이재용 구속과 처벌은 촛불혁명의 완성이다.

이러한 부정적 회귀 현상의 배경에는 수탈적이며 특혜적인 기득권 체계와 기반이 흔들리지 않고 강고하게 유지되어 온 반면에, 고점에 이른 이후에는 개혁을 요구하는 시민들의 동원정치가 지속성을 유지하기 어렵다는 점, 각자가 처한 사회적 현실과 경제적 입지에 따른 다양한 이해와 갈등의 노출로 조정이 어려운 현실, 특히 산업 내 노동자들과 현실세계 속 시민과의 단절 상황, 현실에 대한 정보와 이해가 부족한 상태에서 직관과 즉흥에 의해서 이루어진 운동의 한계, 금융과 산업의 세계화라는 거대한 흐름 속에서 단위 국가로서 정부역할의 축소, 반공논리에 편승하여 지난 70년간 물적 기반이 강력해진 거대 교회집단들의 수구적 우익성향 그리고 끊임없는 역사적 공간과 국외적 지형의 변동 등을 열거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정치, 변혁적 구상과 과감한 도전이 요구된다

여기서 우리는 ‘악순환의 고리’를 차단하기 위하여 중요한 그리고 선택적인 질문에 봉착하게 된다 현재로는 절망적인 한국정치의 새로운 정립을 위하여 그래도 전통적인 대의적 제도라는 방식으로 전업적인 정치인이 주도하는 정당의 역량을 강화하는 것에 주력할 것인지, 지난 120여 년의 세월이 민중과 시민에 의해 주도되어 왔다는 역사적 사실에 기반하여 열린 공간에서 시민들이 직접 참여하고 결정하고 감독하는 직접 민주제를 강력하게 도입할 것이지, 이와 관련하여 제도정치와 시민정치가 대립적으로 길항할 것이지 아니면 상보적으로 융합할 가능성이 있는 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미래 구상의 출발점은,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현실이 최근에 수많은 사건들을 통해 명확히 확인되었듯이 정치판과 행정기구가 거대한 재벌을 중심으로 한 자본그룹에 전적으로 포획되었고, 이들을 주군으로 모시는 관비官匪와 법비法匪들에 의해 완벽하게 오염되었다는, 사실을 인지하는 것에 있다.

이렇듯 부패하고 고착된 현실을 격파하고 새로운 질서를 형성하기 위해서는, 복잡계 이론에서 제시하듯이, 끊임없이 외부적 보충이 가능한 고에너지의 정치적 활력이 요구되지만 현존의 폐쇄적 정치 구조와 오염된 인적 구성으로는 불가능해 보인다. 현존 주류 정치세력들은 심하게 표현하자면 적폐대상들과 방조범 수준이다.

심각하게 훼손된 기존 제도정치와 정당구조의 개선에 대한 구체적 방안에 대해서는 해당 분야의 전문가들이 감당해야 할 역할로 전가한다. 다만 이미 구축된 제도정치를 해체하고 폐허 위에서 새로운 정치구도를 설계하고 도입하는 것은 엄청난 위험과 희생이 따른다는 점에서, 기존의 기반을 토대로 활용하되 새로움을 더하고 급진적 변화를 추구하는 방향이 보다 현실적이라고 판단한다.

현시기 시민여론의 환경이 on-off의 결합으로 활발히 진행되고 있듯이 정치행위를 직업으로 정치인이라는 이름 속에 가두는 칸막이를 제거하고 시민사회와 제도정치가 안팎에서 일상적으로 만나고 충돌하고 상호적 융합이 가능한 절차적 접근을 제안한다. 촛불혁명을 공유한 대한민국 시민들은 과거처럼 억눌리고 조작되고 수동적인 군중이 아니라, 경험을 통하여 자각하고 참여와 토론을 통하여 문제의 핵심을 깨뚫고 헌법적 주권자임을 선언하는 공민으로 인터넷 공간 등을 통해 조직되고 있는 행위주체이다. 임혁백 교수의 표현을 빌리자면 헤테라키 민주주의가 진행 중이며, 이는 퇴행하고 오염된 기존의 제도정치를 시민들이 직접 견제와 대안제시를 통하여 살려내는 활력적 방안이기도 하다.

현재 다층 다기적인 산업사회의 분화와 이에 따라 형성되는 사회적 계층적 연령적 유동성으로 인해 시민 각자가 취하는 입장과 이해 관계가 복잡해지고 분절화되면서 과거처럼 정권이 주도하는 노사정 또는 경노사위이라는 이름의 단순한 코포라티즘 방식만으로는 갈등적 현안을 심층적으로 해결해 갈 수 없다. 일부 제한적 집단들의 자기합리에 갇혀 있는 과거형의 되풀이 일뿐이다.

따라서 추가적으로 모든 시민들이 다양다층적인 방식으로 일상적인 참여가 가능한 직접 민주제를 도입을 검토해야 할 시점이다. 상황과 사안과 조건에 따라 직업정치인들에 대한 감시, 다양한 공간의 참여, 공론화, 시민의회, 민회적인 광장정치, 시민발안, 국민투표 그리고 상설적인 시민부 또는 직업대표제 기구까지 다층적이며 포괄적인 검토와 구상이 요구된다.

두 번째는 말 펀치와 할리우드 액션으로 포장된 야합적인 극장식 정치가 아니라 현실을 분명히 직시하여 문제를 파악하고 갈등을 조직하고 절차적 투쟁을 전개하는 역동의 정치가 이루어져야 한다. 버니 샌더스의 표현에 따르면 0.1%와 99.9%의 경계선을 분명히 해야 한다. 초超거대 부자와 월가의 탐욕을 거부하는 미국시민을 조직하는 것이 샌더스가 추구하는 진보정치의 근거지이자 목표이듯이, 이를 한국식으로 재구성하자면 0.1%의 자산가 계급과 이들과 이해를 같이하면서 공생하는 10%에 대한 대립항으로 90%의 소외된 시민들을 조직하기 위하여 진보 정치가 작동되어야 한다.

한마디로 인간의 존엄과 해방이라는 정언명제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강력한 정치투쟁이 이루어져야 하고 이 과정에서 획득한 사회적 법적 강제를 통하여 현재의 극심한 불균형 불평등의 수탈적 물적 기반을 모두를 위한 상생적 기반으로 재구성해 가는 것을 촛불 이후 진보적 정치의 임무로 삼아야 한다.

이에 새로운 정치가 지향해야 할 사회경제적 내용에 대해 저명한 정치학자 상탈 무페(Chantal Mouffe)의 제안을 다음과 같이 소개한다 – 1. 물적 기반과 서비스 생산을 위한 과학기술과 경영 능력의 진전에 따라 임금 노동자들에 대한 확대적인 재분배와 이에 결합된 노동시간의 괄목한 만한 감소, 2 순수한 시장경제 대신에 다원주의적 경제를 위해 공적 영역과 사적 경제 모두와 상호작용하는 비영리적 공동체 활동의 대대적인 발전을 위한 노력, 3. 여타의 소득, 연령, 성별, 사회적 지위와 상관없이 최저소득을 보장함으로써 인간의 존엄을 유지할 것, 모든 경우의 기본소득은 기존의 사회안전망에 보완적으로(대체적인 것이 아닌) 제공될 것 – 인간사랑刊 이행飜譯 ‘민주주의의 역설’ P190-191. 참으로 한획, 한글자도 뺄 것이 없는 주옥 같은 조언이다.

세 번째, 미래를 준비하는 개혁작업이 시급함에도 불구하고 아무것도 해내는 못하는 무능한 정치현실을 타결하기 위해서는 고에너지로 충전되는 정치활력과 급변하는 상황에 대한 신속한 응동성을 제도적으로 부여해야만 한다. 현재같이 국회의 입법과정이 모든 것을 정체시키는 현상을 타개하기 위한 신속처리 방식의 도입이 불가피한 것으로 보인다. 예건데 무능한 의회구조(dead-locking)에 대해 대통령과 국민에게 해산할 권한을 부여하고, 동시에 막강한 권력을 지닌 대통령에 대해서도 국회의 탄핵소추권뿐만 아니라 시민에게 직접 탄핵결정권을 부여하여야 한다. 이것이 시민주권주의의 원칙에 합당한 것이다. 이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스위스에서 오랫동안 실시해온 적극적인 시민발의와 국민투표 제도를 연구하여 한국사회에 맞도록 조정하여 적용하는 것을 논의해야 한다.

이에 대하여 정치적 혼란을 염려하는 집단은 스스로 기득권이라고 자백하는 셈이다. 앞에서도 언급하였듯이 지난 120여 년의 근대사 역정에서 오늘처럼 대한민국을 자랑스럽게 우뚝 세운 주역은 바로 민초들이고 시민군들 이었다.

한국사회 미래에 대한 희망의 싹은, 이해관계에 얽혀 시대에 무감한 정치그룹이나 이해타산과 기회포착에 능한 공무원 집단과 시대에 영합하는 아류적 지식인 그룹 그리고 자기편애에 빠진 재벌가문의 후세들이 아니라, 각자의 현장에서 묵묵히 일해오는 시민사회라는 바탕 위에서 제주의 강정 해군기지를 둘러싸고 전개한 주민들의 평화를 위한 투쟁과 삼척지역의 공해 발전소 건설기획에 대항해온 환경보호의 기록들 그리고 백해무익한 사드의 배치를 반대하며 오늘도 투쟁하는 성주군민들 모습과 위대한 싸움을 주도해온 고故김용균의 어머니 김미숙씨에게 발견할 수 있다. 변혁에 따른 수구적 저항과 일시적 혼란을 두려워해서는 아무 것도 이룰 수 없다.

모든 주권은 국민에게서 나온다는 헌법의 정신과 선언대로 제도정치 내에서 핵심 현안이 고착될 때마다, 국회 위에 대통령 위에, 시민들이 주권자로서 신속히 개입하는 정치트랙을 만들어 가야 하는 것이다. 일부 정치학자들은 시민의 직접 개입이 가져올 수 있는 비결정성을 걱정하지만, 우리가 정말 기피해야 하는 것은 온갖 이유로 기존의 잘못과 관행을 정당화하고 미래를 향한 개혁의 발목을 잡는 수구적 꼼수이다. 오늘 우리가 지켜보고 있는 여의도의 모습이기도 하다.

네 번째는 3차 산업혁명을 넘어서 4차 산업으로 이행하는 문턱에 서있는 현재의 다기화되고 분절적으로 유동하는 사회경제적 현실 조건을 소선거구제라는 양당중심의 정치 구조로는 결코 담아낼 수 없다. 마땅히 다층다양한 시민들의 복합적인 요구를 투명한 거울처럼 반영하도록 적극적인 연동형 비례제를 반드시 도입해야만 한다.

선도적인 시민사회 그룹에서 오랫동안 요구해온 사안이기도 하지만 필히 정치개혁의 시발점이자 최소조건이라고 말할 수 있다. 만약에 이명박근혜를 탄생시킨 준범죄집단 자유한국당과 과거를 망각하고 자폐성 자만에 갇혀 있는 민주당이 이를 거부하거나 온갖 구실로 지연시킨다면 이는 역사적 죄업을 짓는 일이다.

기어코 소수의견을 존중하고 다양한 시민집단들의 이해를 제도권으로 수렴해 낼 수 있는 연동형 비례제를 상기의 주요 정당들이 자신들만의 이해관계에 갇혀 끝내 좌절시킨다면, 다가오는 총선에서 이들을 징치하고 거대한 변화를 만들기 위해 한국사회의 미래를 걱정하고 진보적 사회를 준비하는 모든 정당과 정치인들 그리고 시민사회는 분연히 일어나 강고한 연대로 대응하여야 한다. 상생과 개혁의 길목을 막아서는 소선거구의 악폐를 격파하는 유일한 통로는 함께 모여 힘을 합치는 일이다.

마치 87년 민주화대투쟁 당시 ‘대통령을 우리 손으로’라는 슬로건을 내세웠듯이, 2016/7년 촛불광장에서 ‘이게 나라냐’라고 한 목소리로 외쳤듯이, 상황에 합당하고 시민들이 환호할 수 있는 정치적 구호를 만들어 내야 하며, 함께해야 할 정당들은 과거의 구원舊怨을 떨쳐내면서 소아적 타산을 넘어 대국적인 입장에서 연합전선을 펼쳐 나가야 한다. 역사적 소명을 향해 헌신할 수 있는 시민에 의한 정치와 시민의 정부를 반드시 구성해 내야 한다.

정치와 제도는 시민을 위해서 작동해야 한다. 세계적 흐름 속에서 직접민주제 도입을 위해 투쟁하는 유럽인들의 생생한 목소리를 다음과 같이 전달하면서 이제 글을 맺고자 한다. “모두에 의한 모두를 위한 모두가 참여하는 정치를 위해, 보다 많은 권력을 시민이 직접 행사하는, 언제 어느 곳에서라도 더 나은 미래를 위해 작동하는 정치를 만들자”.

화, 2019/02/19- 1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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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7호 대법정이 통일신학의 강연장이 되다

1991년 11월 1일 오후 2시 서초동 서울지방법원 대법정 417호실에서는 70을 바라보는 노령의 여신학자 박순경 교수에 대한 국가보안법 위반사건 1심 재판이 열렸다. 100여명의 방청객이 법정을 가득 메운 가운데 재판장 정호영 부장판사가 개정을 선언하자 희끗희끗한 머리를 뒤로 빗어 넘기고 구치소 수감자들의 겨울용 회색 한복을 단정하게 차려 입은 박순경 교수가 여교도관의 부축을 받으며 법정으로 들어왔다. 왼쪽 가슴에는 수인번호 ‘72’를 새긴 명찰을 달고, 까만 털실양말을 장갑으로 끼고 있었다. 여기저기 가벼운 탄식소리와 함께 방청석이 잠시 술렁거렸다. 박 교수는 방청석의 낯익은 얼굴들에게 잠시 고개를 돌려 눈인사를 나누고 교도관에 이끌려 피고인석에 앉았다. 검사석에는 조영수 검사가, 변호인석에는 홍성우, 한승헌, 강철선, 백승헌 등 변호인단이 이미 나와 앉아 있었다.

재판장의 인정신문으로 재판이 시작되었다. 이름, 직업, 주소를 묻는 간단한 확인이 끝나자 피고인의 모두진술 시간이 주어졌다. 박순경 교수는 구치소에서 공들여 작성한 장문의 모두진술서를 낭랑한 목소리로 읽어 내려갔다. 1시간 반에 걸친 모두진술에 이어 검사 심문, 변호인 반대심문, 판사 심문 순으로 재판이 진행되었다.

박 교수의 국가보안법 위반사건에 대한 검찰의 공소사실은 크게 2가지로 압축되었다. 첫째는 1990년 3월부터 정부가 불허하는 범민족대회 예비회의에 참여하는 등 범민족대회추진본부(이하 범추본)에 간부로 참여하여 활동하였고, 이후 1991년 1월 문익환 목사 등과 함께 이적단체인 범민련 남측본부 준비위를 결성하여 부위원장으로 활동하였고, 둘째 1991년 7월 일본 동경 재일 한국YMCA에서 개최된 ‘제2차 조국의 평화통일과 기독교선교에 관한 기독자 동경회의’에 참석하여 ⌜기독교와 민족통일의 전망⌟이라는 주제 강연을 통해 북한의 주체사상에 적극 동조하고 찬양하였다는 것이다.

모두진술에서 박 교수는 검찰의 공소사실에 대해 하나하나 반박해 나갔다. 박 교수는 검찰이 현직 교수이며 신학자인 자신을 구속한 사유가 동경강연에 초점이 있었다고 보고 두 번째 공소 사실에 집중하였다. 반론의 요점을 요약하면 우선 자신의 동경 강연은 주체사상에 대한 신학적 재해석 시도이고, 내용상으로도 결코 ‘찬양’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 강연에서 보인 주체사상에 대한 재해석 시도는 오히려 주체사상을 상대화시키고 따라서 그에 대한 비판가능성을 열어놓은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범민족대회와 범민련준비위 참여에 대해서는 자신의 활동내용을 검찰이 부정확한 자료에 근거하여 부당하게 확대해석한 점을 지적하였다.

박 교수의 모두진술은 250~260매에 달하는 장문으로 읽는 데만 2시간 반 이상이 걸리는 것이었지만 백승헌 변호사의 조언에 따라 요약해서 낭독했다. 그런데도 1시간 30분 정도가 소요되었다. 그 중에서도 동경 강연에 대한 신학적 변증은 거의 학술논문 수준으로 대법정을 신학강연장으로 바꿔놓은 듯했다. 그것은 박순경 교수가 의도한 것이기도 했다.

이 날 재판은 5시간쯤 진행되었고, 재판장이 11월 8일 2차 공판을 선언하면서 폐정했다. 이 날 재판은 일반 언론에 크게 주목받지는 않았지만 한겨레신문에 죄수복을 입은 박순경 교수의 사진과 함께 보도되어 민주진영 안팎에 큰 감동을 던져 주었다.

11월 8일 결심공판에서 검사는 박 교수에게 징역 3년 자격정지 3년을 구형했다. 변호인 변론에서 변호인들은 박순경 교수가 ‘학문의 외길을 걸어온’ 학자로서 민족사의 정의를 대변하는 ‘예언자적 사명’을 수행했다고 주장하면서 박 교수에 대한 국가보안법 적용이 부당하다는 점을 강력하게 변론했다.

마지막으로 최후진술에 나선 박 교수는 모두진술에서 밝힌 통일신학과 통일운동의 정당성에 대해서 다시 한번 역설하였다. 아울러 연약한 몸으로 겪는 철창 속의 고통을 호소하면서도 그 고통 속에서 ‘나는 홀로가 아니고’, ‘내 목숨이 내 것이 아니라’는 깨달음을 얻었다는 고백을 함으로써 방청객의 심금을 울렸다.

1991년 11월 22일 선고공판에서 박순경 교수는 징역 1년6월, 자격정지 1년6월,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고, 그날 저녁 9시경 서울구치소에서 구속 된지 106일 만에 석방되었다.

이 재판과 수형생활을 겪으면서 박순경 교수는 8.15 해방과 분단 이후 수많은 애국지사들이 걸어온 고난과 희생의 길에 동참하고 민족통일운동의 역사에 뚜렷한 족적을 남기는 인물이 됐다. 그리고 박순경 교수가 법정에서 제기한 신학적 과제는 이후 통일신학 뿐만 아니라 통일운동 전반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예견되었던 박순경 교수의 구속 – 범민족대회와 동경회의

박순경 교수는 1991년 8월 9일 국가보안법 위반 피의자로 서울지방경찰청 옥인동 대공분실로 소환되어 조사받고 8월 12일 구속영장이 떨어져 종로경찰서 유치장에 수감되었다. 경찰 조사 3주 만인 8월 29일 검찰로 송치되어 조사를 받고 서울구치소에 수감되었다. 그리고 약 한 달간의 검찰 조사 끝에 9월 27일 기소되었고, 11월 1일 첫 재판이 열린 것이다.

사실상 박 교수의 구속은 연초부터 어느 정도 예견되었었다.

1991년 1월 23일 향린교회에서 계훈제, 이창복, 김희택, 김희선 등 60여명이 참석하여 ‘범민련 남측본부 준비위원회 결성대회’를 개최, 준비위원장에 문익환 목사, 부위원장에 계훈제, 윤영규, 박순경, 권종대, 김종식 등 5명을 선임하고, 홍근수 목사, 이창복 등 12명의 준비위원을 임명했다. 이 회의 직후에 정부당국은 이창복 집행위원장, 김희택 사무처장, 권형택 사무차장 등 실행간부들을 전격적으로 구속하고, 범민련준비위를 이적단체로 규정하여 일체의 활동을 불법화하였다. 문익환 위원장은 감옥에서 나온지 얼마 되지 않아 구속은 면했지만 부위원장, 준비위원과 더불어 일거수일투족 감시대상이 되었다. 준비위 부위원장 박순경 교수, 준비위원홍근수 목사, 김쾌상, 한충목 등은 결국 나중에 구속되었다.

이 회의는 1989년 1월 21일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이하 전민련) 창립 총회 결의에 의해 추진된 범민족대회 운동의 연장선상에 있었다.

전민련은 연세대에서 열린 창립총회에서 3월 1일 남북 대표 각 10인씩 참여하는 ‘범민족대회 개최를 위한 예비회담’을 판문점에서 가질 것을 제안했다. 이 제안을 북한 조국평화통일위원회(이하 조평통)이 수락하여 전민련은 3월 1일 계훈제 박형규 상임고문과 박순경 학계대표 오충일 대표단장, 이재오 조국통일위원장 등 28명의 대표단을 판문점으로 파견했다. 그러나 이 예비회담은 경찰이 대표단을 고양군 벽제검문소에서 전원 연행함으로써 무산되었다. 그해 7월 북측이 이듬해 90년 8월 15일 판문점에서 범민족대회를 열 것을 다시 제안했다.

1990년 8월 15일 판문점 범민족대회도 남한 당국의 저지로 남측대표의 참가가 좌절되었고, 북측과 해외대표만으로 판문점 북측구역에서 열렸다. 이 대회에 방북 중이던 소설가 황석영 씨가 참가하긴 했으나 남측대표로서 공식성이 없었기 때문에 사실상 반쪽 대회가 된 것이다. 그러나 북한 중앙방송에서 이 대회에서 ‘조국통일범민족연합(이하 범민련)’ 결성이 이루어졌다고 발표했다. 이 소식을 접한 범추본 남측본부는 격론 끝에 이 결정을 수용하기로 하고, 그러나 그 결정사항을 보완하기 위해 다시 베를린에서 남,북, 해외 범추본 대표들의 3자회담을 가질 것을 제안했다. 그리고 남측 대표로 조용술 목사, 이해학 목사, 조성우 평화연구소 대표를 파견했다. 1990년 11월 19일 베를린 시청에서 열린 베를린 3자회담에서는 “1995년을 통일 원년으로”라는 목표 하에 이를 추진할 민간차원의 상설적 통일운동체로서 범민련을 결성할 것과 남북 각각 범민련 지역본부를 건설할 것에 대해 최종 합의하였다. 베를린 3자회담 남측대표 3인은 11월 30일 귀국하자마자 김포공항에서 체포되어 구속되었다. 정부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베를린에서 합의한 범민련 결성은 예정대로 추진되었고, 이듬해 1월 23일의 향린교회 회의는 이 합의를 구체화하기 위한 것이었던 것이다.

박순경 교수는 범추본 고문과 전민련 조국통일위원회 위원 자격으로 90년 범민족대회 예비회의에 남측대표로 참석하려고 판문점으로 가다가 재야인사 27명과 함께 파주경찰서로 연행된 바 있었고, 이후에도 범추본 공동본부장, 범민련 남측본부 부위원장 등을 역임하며 꾸준히 통일운동을 이어갔다. 그래서 1989년 문익환 목사의 방북이후 공안정국으로 돌아선 노태우 정부가 90-91년 전민련과 범민련 간부들을 대대적으로 구속할 당시에 이미 박순경 교수는 저들의 구속 대상에 올라 있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게다가 박순경 교수는 91년 8월 15일 서울에서 열기로 한 제2차 범민족대회에 남측본부 부위원장으로서 참가할 의사를 굽히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와 별도로 정부당국으로 하여금 박순경 교수의 구속을 결정하게 한 결정적 계기가 있었으니 바로 구속 한달 전 7월 8일에 동경에서 있었던 제2차 기독자 동경회의에서의 박순경 교수의 발언이었다.

 

금단을 깨고 통일신학의 지평을 넓히다

동경회의는 조승혁 목사와 박순경 교수 등 남측 인사 30여명과 미국 LA에서 활동하는 홍동근 목사 등 해외 인사 30여명, 북한 조선기독교연맹 서기장 고기준 등 북측인사 4명 등 60여명이 모여 평화통일과 기독교 선교에 관해 논의하는 기독자들의 모임이었다. 여기에서 박순경 교수는 2일째 회의에서 ⌜기독교와 민족통일의 전망⌟이라는 제목의 주제강연을 했다.

이 발표에서 그는 한국의 서양 기독교 선교의 유산을 물려 받는 반공기독교가 반통일세력으로 기능하는 것을 통렬하게 비판하고, 이것을 극복하는 것이 민족해방, 민족통일의 길임을 주장했다. 그리고 북한의 주체사상에서 주장하는 인간개조론, 수령론 등도 민족복음화의 관점에서 재조명할 필요가 있다고 하는 등 기존에 금단의 영역으로 여겨져왔던 북한의 주체사상에 대한 신학적 견해를 본격적으로 제시했다. 이것은 남한의 신학자로는 처음으로 공식석상에서 ‘기독교사상과 주체사상의 대화 필요성’을 밝힌 것으로 교계 안팎에 큰 파문을 일으켰다.

박 교수는 이 강연의 동기에 대해서 1991년 12월 28일자 한겨레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주체사상을 언급한 것은 기독교 선교의 물꼬를 트기 위해 선교신학적 접근을 시도해 신학이 주체사상에 파고들지 않으면 기독교신앙과 선교가 북한에 뿌리내릴 수 없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주체사상 부분에 대해서도 검찰의 ‘주체사상 찬양’ 주장은 어불성설이고, “수령은 유한하므로 역사에서 퇴진하게 될 상대적 존재이며, 영생하는 집단의 주체, 즉 비어 있는 자리는 인간수령 이상의 신적인 자리, 하나님의 자리라고 강연에서 주장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 강연은 본인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당시 동경회의에 함께 참석했던 보수적인 반공목사들과 공안당국에게는 박순경 교수가 ‘주체사상을 찬양했다’고 받아들여졌다. 실제로 동경회의에 참석한 목사 중 15-6명이 검찰에서 박 교수에게 불리한 증언을 했고, 그 중 몇 명은 박순경이 주체사상·수령찬양자라고 증언했다고 한다.

박 교수의 강연은 결국 박 교수의 구속을 부르는 계기가 되었지만 어째든 금단의 영역을 깨고 통일신학의 지평을 넓혔고, 이후 통일논의를 활성화시키는 계기를 만들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당시 가톨릭신학대학 교수로서 신학생들과 함께 주체사상을 연구한 적이 있는 함세웅 신부는 박순경 교수의 강연을 읽은 소회를 이렇게 피력했다.

저는 박 교수님의 동경 강연내용을 읽으면서 많은 것을 생각했습니다. 우리는 이분을 통해 절망과 좌절의 늪에서부터 해방될 수 있는 새로운 계기를 얻은 것입니다. 참으로 큰 문제점을 안고 있는 한국교회 현실 속에서 신선한 시각을 지닌 이러한 신학자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그 자체가 희망입니다. 또한 이렇게 예리한, 그리고 용기있는 여성이 현존한다는 사실은 여성을 통해 교회와 사회의 개혁이 가능하다는 여성해방적, 전인적 구원의 미래전망을 제시한 것이라 생각되었습니다.(1991년 10월 24일 ‘박순경 교수 석방을 위한 기도회와 촉구대회’에서 함세웅 신부의 강연)

 

필생의 과제를 세우다 – 기독교와 민족과 공산주의의 대화

박순경은 1923년 여주에서 한학자 박용선 선생과 어머니 조원 사이에서 4남5녀 9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당시 박순경의 부친은 선비로 인품은 학자이지만 생활 능력이 없었으며, 둘째 오라버니가 집안 살림을 지탱하게 했다. 박순경은 부모를 따라 서울, 인천 등지로 이사하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겨우 입에 풀칠하는 생활형편 때문에 학교에 갈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다가, 10살이 넘어서야 겨우 인천에서 성냥공장에 다니면서 무료야학에서 공부하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학원에 어머니가 데려다 주면, 순경은 엎드려 잠만 잤다. 1935년 경 12살 무렵에 원주로 이사 가서야 비로소 간이학원 (초등학교 과정) 4학년에 입학했고, 반에서 1등을 하면서 아버지의 친구인 한학자 학원장이 순경을 4학년으로 월반시켰다. 그리고 봉산국민학교에 5학년으로 편입학하였다.

졸업하고, 상명실천 전수과 2년을 거쳐 1933년 세브란스고등간호학교에 입학했다. 이 학교 3학년 때 박순경은 친구 김옥선과 함께 1944년 좌파 민족운동가들을 만났다. 이 때 몽양 여운형 선생의 연설을 듣고 큰 감명을 받고, 용기를 내서 친구와 함께 혜화동 몽양의 집에 직접 찾아가 만나기도 했다. 당시 친구 김옥선의 오빠가 공산당 계열 독립운동가였는데, 그 오빠가 앓아 누워 있다는 소식을 듣고 신의주까지 가서 약병을 전하고 오기도 했다.

1945년 8.15 해방이 되자 간호학교 시절에 만난 민족운동가들의 영향으로 박순경은 여운형의 건국준비위원회(건준)과 인민공화국(인공)을 지지하였고, 해방공간에서는 여운형과 김규식의 좌우합작운동을 지지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항일독립의식과 함께 공산주의 운동이 깊이 의식 속에 남게 되었다. 이것은 당시에 어린 나이로 기독교와 민족과 공산주의와의 대화라는 필생의 과제를 세우는 계기가 되었다.

1945년 봄 간호학교를 졸업하고 간호사로 근무하던 시간 사이에 서울역에서 안국동까지 걸어서 한글학당에 다녔다. 그런데 해방 직후에 어머니와 아머지가 몇 달 사이에 작고하니, 박순경은 인생무상과 허무감에 빠졌다. 그래도 공부해야겠다는 열망을 가지고 우선 한글학원을 택하였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충격에다 끼니를 제대로 채우지 못하고, 무리하게 공부하던 박순경은 결국 허무감과 늑막염으로 쓰러졌다. 마산의 둘째 오빠 집에서 요양 중 병석에서 성경의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는 구절을 묵상하다가 불현듯 하나님의 실존을 깨닫고 허무의식을 극복하고, 신학공부를 해야겠다 결심하게 된다.

1946년 둘째 오빠의 도움으로 서울 감리교신학교 전수과에 입학했는데, 3년제 본과와 통합되어 1948년 졸업했다. 감리교신학교에 다닐 때에는 어느 정당에서 여론조사를 한다고 해서 박순경은 여운형계를 지지한다고 손을 들었다가, 하나님 동산에 붉은 마귀가 들어왔다고 학교에서 쫓겨날 뻔 한 일도 있었다. 다행히 교수 한 분과 몇 명의 학생이 옹호해줘서 간신히 퇴학을 면했다. 1948년 봄 당시의 학제에 따라 박순경은 편입시험을 보고 서울대 철학과 2학년에 들어갔다. 대학에 들어가서도 신학에 몰두하였다. 스위스 신학자 칼 바르트에 심취하여 감신대 동기생들인 허혁, 이영빈과 칼 바르트 저작을 번역하기도 했다.

1950년 한국전쟁은 박순경에게 민족 수난의 역사 현장을 생생하게 목격하는 기회가 되었다. 6.25 발발 당시에는 서울에 남아 있다가 연합군이 서울에 진주하여 비로소 거리에 나왔다가 서울대 병원 뒤에 켜켜이 쌓여 있는 시체들을 보았다. 거리에 나뒹구는 시체들과 피난민들의 처참한 모습들을 보면서 박순경도 1.4후퇴 때 부산으로 피난을 갔다. 1951년 피난처 부산에서 서울대를 졸업하고 4년 정도 성신여고와 정신여고에서 영어와 독일어 교사로 봉직하였다. 그러나 박순경은 신학 공부의 꿈과 젊은 시절 세웠던 결심을 실현하기 위해 1955년 말 교사생활을 접고 미국 유학 길에 오른다.

1956년 초 에모리대학에서 오로지 공부에만 몰두하여 1958년 학사학위를 받았다. 그리고 드류대학 박사과정에 전액 장학생으로 선발되었지만 1년간 뉴욕 유니온신학교 에큐메니칼 프로그램을 수료했다. 1960년부터 드류대학 대학원에서 조직신학을 전공하고, 1966년에 철학 박사학위(Ph. D)를 받았다. 여성으로서 조직신학을 전공한 한국 최초의 여성박사였다. 드류대학 시절 유니온신학교에 유학 중이었던 박형규 목사와 서광선 목사를 만났고, 이들의 도움으로 박순경은 1966년 귀국하여 이화여대 기독교학과에서 조직신학과 역사신학을 가르치는 교수가 되었다. 이후 박순경은 이화대학에서 1988년 정년퇴임할 때까지 봉직하였으며, 1988-90년 까지 대전 목원대학 대학원 초빙교수로 재직하던 중 통일운동으로 1991년 구속되었다. 목원대학은 박순경을 즉각 해임하였다.

 

칼 바르트와 작별하고 한국신학으로 전환하다

1972년 박정희 정권이 7.4남북공동성명을 발표하자 박순경은 ‘아이쿠! 내가 민족통일문제를 진작 취급했어야 했는데 내가 지금까지 못했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8.15 해방과 좌우이념대결이 극한으로 치달았던 3년간의 해방공간, 그리고 6.25전쟁 당시 서울 시내에 나뒹굴던 시체들과 피난민의 참상이 머리를 스쳐가면서 ‘잠에서 깨어나듯이’ 이제까지 숙제로 남겨뒀던 민족통일의 문제를 본격적으로 공부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마침 좋은 기회가 왔다. 이화대학에서 1974년부터 2년간 안식년 연구교수로 유럽에 갈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1974년 박순경은 민족문제 연구에 앞서 ‘기독교와 공산주의의 만남’이라는 과제를 세우고 이념문제를 정리하기로 했다. 우선 칼 바르트의 고장 바젤 대학을 찾았다. 그 다음 마르크스주의를 연구하기 위해 튀빙겐대학으로 갔다. 거기에서 초기 마르크스-엥겔스 저작을 비롯해 많은 책들을 읽고 그들의 사상을 탐구했다. 그리고 베를린 자유대학에서 마르크스 사상과 연관된 역사철학을 공부했다. 칼 바르트 신학을 비롯해서 그 계통의 1960년대 신좌파 운동의 대변자 헬무트 골비처를 새롭게 발견하기도 했다.

이 2년간의 유럽에서의 공부 과정에서 박순경은 일찍부터 직관적으로 생각해왔던 ‘기독교와 공산주의의 만남’ 가능성을 재삼 확인했고, 그래서 이후 “기독교와 마르크스주의는 쌍둥이다”라는 이야기를 자주 했다. 이 유럽 유학과정에서 박순경은 서양신학에서 한국 신학에로의 전환이라는 결정적 계기를 맞았다. 1975년 독일 동아시아 선교부가 주최한 ‘독일-한국 세미나’에서 강연하면서 박순경은 한국 신학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리고 우리 민족의 근현대사를 배경으로 민족분단과 통일문제를 한국 신학의 주제로 발표했다.

1975년 바젤에서 박순경은 바젤에서 유학 중이던 변선환 교수와 함께 칼 바르트 무덤에 찾아가 큰 절을 올리고, “이제는 끝입니다”라고 인사를 고한 사실이 한 때 여러 사람의 입에 오르내렸다. 박순경은 단지 (옛 스승에 대한) 고별인사일 뿐이라고 확대 해석하지 말기를 거듭 강조한다. 그러나 어쨌든 서양신학 에서 한민족의 신학, 한국 신학으로 전환할 것을 결심한 장면이라고 할 수 있다.

1976년 귀국해서 이화대학으로 복귀한 후 박순경은 한편으로 민족문제를 규명하기 위해 신채호, 박은식 등 민족사가들의 저작을 탐독하면서 한국 근현대사연구에 몰두하는 한편 교회와 신학자들의 모임에서 통일문제 강연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반공기독교를 비판하고 민족통일의 과제를 제시하는 통일신학의 글들도 연이어 발표했다. 귀국 후에 박순경은 남미 해방신학에 대해서도 적극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관여하였다. 그래서 1981년부터 제3세계 에큐메니칼 신학자협의회(EATWOT) 한국연락책임자를 맡고, EATWOT에서 발행하는 『Voices』라는 잡지의 편집위원을 역임하기도 한다. 한편으로 아직 불모지나 다름없는 여성신학을 개척하는 역할도 담당하여 1980년에는 한국여신학자협의회의 창립회장으로 선출되어 오랫동안 활동하였다.

 

강단의 신학자에서 통일운동가로 – 6월항쟁과 조성만 열사

1972년 7.4 남북공동성명이 박순경을 서양신학에서 한국신학에로의 전환의 계기였다면 1987년 6월 항쟁을 계기로 박순경은 민주주의 투쟁과 통일운동을 정치신학•통일신학의 주제로 설정 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강화하게 하였다.

1987년 박종철, 이한열 열사가 죽고, 6월민주항쟁이 활화산처럼 터지면서 조국과 민족을 위해 나름 열심히 살아왔다고 생각했던 박순경도 내가 민족사의 현장에서 과연 무엇을 했는가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다. 그래서 6월항쟁 기간 동안에 이대 제자들이 학교 광장에서 스크럼을 짜고 이대 정문 앞을 지나 신촌로터리로 향하면 박순경도 남몰래 그 뒤를 따라 시위대열에 합류하여 거리를 쏘다니곤 했다. 최루탄도 맞고, 거리의 군중들과 함께 경찰에 쫓겨 다니기도 했다. 언젠가는 전투경찰들이 이대 캠퍼스 안까지 들어와 학생들이 끌려가는 장면을 목격한 박순경은 쫓아가 울고 소리치며 연행을 막은 적도 있었으며 수배당한 학생을 자신의 집에 숨겨주기도 하였다. 연세대에서 이한열 열사가 장례식이 있던 날은 감옥에서 막 나와서 장례위원장을 맡은 문익환 목사가 장례식에서 열사들의 이름을 목 놓아 부르고 시청 앞까지 행진해 갈 때는 박순경도 신촌로터리부터 내내 눈물을 흘리며 그 뒤를 따라 갔다.

88년 이대 교수 은퇴를 며칠 앞둔 시점에 박순경의 영혼을 뒤흔든 충격적인 사건이 있었다. 5월 15일 명동성당 문화관 옥상에서 서울대생 조성만 열사가 남북공동올림픽 개최를 요구하는 유서를 남기고 투신자살한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5월 18일 이화대학 대강당, 은퇴를 앞둔 박순경의 마지막 채플 설교는 조성만 열사 이야기를 하면서 설교자가 흐느껴 우는 바람에 학생들도 따라 울고 여기저기서 훌쩍거리며 우는 소리가 들렸다. 은퇴설교의 일부분이다.

모든 피조물의 진통을 우리는 분단된 민족사회에서 체험하며, 더 구체화시키자면 5.18 피눈물 나는 광주사건에서 , 또한 명동성당 교육관 4층에서부터 투신 살신(殺身)한 조성만군의 기막히는 사건에서 체험한다. 이 밖의 많은 사건들이 새로운 통일된 민족사회의 탄생을 외치는 소리들이다

은퇴 무렵에 이대 출신 여학생 한 사람이 찾아와 평화연구소 고문으로 참여해 주십사는 조성우 소장의 말을 전하고 간다. 그 여학생도 자기 학교 교수 중에 통일문제에 너무나 열심인 분이 있다는 걸 우연히 알고 조성우 소장에게 소개했고, 조성우 소장도 너무나 뜻밖이고 놀라와 바로 그 여학생을 박순경에게 보낸 것이다. 당시까지만 해도 통일신학자, 조직신학자로서 학계에서는 이름을 날리던 박순경이지만 통일운동 진영에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았었다. 박순경은 조성우의 제안을 기꺼이 수락했고, 조성우는 박순경을 자신이 관여하고 있던 전민련 통일위원회 위원, 범민족대회 예비회담 학계대표 등으로 추천했다. 이 때를 계기로 박순경은 통일운동 일선에 적극 나서게 되었다.

 

민족을 위해 기도하는 통일신학자, 박순경

감옥에서 나온지 1년쯤 지난 1992년 11월 12일, 박순경은 그동안 걸어온 고난의 체험과 통일신학의 논문들을 한울출판사에서 두 권의 책으로 펴내고 출판기념회를 가졌다. 『통일신학의 고통과 승리』와 『통일신학의 여정』이 그것이다. 이 출판기념회 소식을 듣고 옥중에 있던 문익환 목사가 무려 7차례에 걸쳐 연속해서 편지를 보내 축하와 함께 박순경의 노고를 치하했다. 아울러 박순경의 통일신학이 화해의 신학으로 발전하기를 바란다는 충고도 아끼지 않았다. 그러면서 책을 읽고 난 감동을 문 목사는 이렇게 표현했다.

민족문제, 통일문제를 심도 있게 본격적으로 다룬 신학이 울창한 한 그루 상수리 나무로 자란 것을 보면서, 축하를 받아야 할 것은 한국교회라는 생각이 듭니다. 어느새 한국교회도 이만큼 자랐다는 것, 이만큼 깊어졌다는 게 그리도 자랑스럽군요.

박순경을 만나본 사람은 누구나 그 곱고 단아한 모습에 감탄하면서, 저런 사람이 어떻게 그 험난한 학문의 길을, 그리고 투옥까지 겪는 통일운동의 길을 걸었을까 의아하게 생각한다. 그러다가 그 고운 자태 속에 숨어 있는 뜨거운 열정과 강인한 기백을 발견하면서 놀라곤 한다. 1962년 미국에서 박순경을 만난 박형규 목사에게도 그런 인상이 강력했던 것 같다. 1991년 8월 “박순경 교수 석방을 위한 기도회‘에서 ’내가 아는 박순경‘이라는 연설에서 박 목사는 이렇게 얘기한다.

박순경 박사 방에 가서 커피도 한 잔 대접 받고 빵도 얻어 먹었는데… 놀랐습니다. 도대체 이 사람이 여잔가, 남잔가? 얼굴은 분명히 여잔데. 그분의 사는 방식은 남자로 하여금 굴복하게 만드는 그런 삶이었습니다. 그것은 무슨 의미냐 하면, 보통 하나님에게 사로잡힌 사람이라고 하면 우리는 남자를 상상하는데, 예컨대 예레미야, 이사야, 엘리야 같은 사람을 상상하는데, 내가 박순경 박사를 딱 보고는 ‘아! 여자도 하나님에게 사로잡히는 경우가 있구나’하고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박순경이 8순이 될 때까지도 설악산, 지리산, 관악산을 등산하고, 그 과정에서 5차례나 뼈가 부러지는 부상을 당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1971년 이대 기독교학과에 입학하면서 박순경을 만나 지금까지 스승으로, 어머니로 모시고 살고 있는 한신대 신학과 김애영 교수의 회고담이다.

내가 한신대 대학원에 다니던 1978년 가을 어느 날 연락이 오기를 당신이 이대 동료교수등과 내설악을 등반하던 중 마등령 정상에서 오른쪽 다리 골절을 당해 앰블런스로 이대병원에 이송되어왔는데, 내일 수술을 해야 하니 와 줄 수 없겠느냐는 것이었다. 나는 그날로 짐을 싸들고 병원에서 선생님을 간호하기 시작했다. 퇴원 후에도 선생님 댁에서 몇개월를 간병했는데, 그 때 선생님과 밤새도록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그동안 제가 막연하게 느끼던 삶에 대한 회의와 방황을 모두 털어버리고, 일생을 바쳐 정말 해보고 싶은 일을 단번에 찾아낼 수 있었다.

(원초 박순경 박사 팔순기념문집 『과거를 되살려내는 사람들과 더불어』, 2003, ㈜사계절출판사)

범민련 사건으로 감옥을 살고 나온 이후에도 박순경 교수의 통일운동 행보는 쉬지 않고 이어졌다. 1994년부터 6년간 자주평화통일민족회의 상임공동의장을 역임하였고, 이후에도 통일연대 명예대표, 6.15공동선언실천 남측위원회 상임고문 등을 지냈다. 2009년 6월에는 (사)통일맞이에서 수여하는 ‘늦봄 통일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박순경 교수는 올해 만 95세로 방배동 자택에서 박 교수의 저 구속사건이 계기가 되어 1991년 이래로 제자 한신대 신학과 김애영 교수와 함께 살고 있다. 2014년 11월 박순경 교수는 92세의 나이로 710페이지에 달하는 『삼위일체 하나님과 시간 제1권 구약편』를 탈고하고 출판기념회를 열어 주위를 놀라게 했다. 그러나 호사다마(好事多魔)인지 그 해 12월 빙판에서 낙상하여 척추압박골절로 오랫동안 고생하였다. 지금까지 잘 걷지 못한다. 또 2015년에는 대상포진이 발병하여 지금도 그 후유증으로 고생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순경 교수는 굴하지 않고 집필계획대로 제2권 신약편의 총서론을 쓰고 있는 중이다. 제3권 성령편은 제자 김애영 교수의 몫으로 남겨두었는데, 박 교수는 자신이 살아 있는 동안에 그 계획들이 다 이루어지기를 고대한다. 박순경 교수는 지금도 민족 자주 평화 통일을 위해 노심초사하며 쉼 없이 기도하고 있다.

 

공동선, 2018년 1-2월호 138호에 게재된 글입니다(필자는 공동게재에 동의함).

수, 2019/02/20- 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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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구 근대철학은 데카르트에서 출발하여 자아의 주체성과 진리의 절대성, 즉 자아와 이성의 실체성(여기서 실체라함은 타자와 독립된 존재로서 단일한 속성을 지니며 고정불변의 동일성을 유지하고 있는 존재로 대표적인 예로 플라톤의 이데아, 중세의 신, 근대의 자아 및 현대의 표상성을 들을 수있습니다)을 추구하였는데 그 근거는 자아는 이성적 존재이므로 이성과 과학에 의해 불변의 진리를 찾아낼 수 있다고 보았으며 이는 뉴튼의 근대물리학 성과를 철학적으로 반영한 것이라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자아와 진리의 실체성을 증명하지 못하게 되자 칸트에 이르러서 선험적 주체와 선험적 종합판단이라는 개념을 동원하여 진리를 주관화하면서 데카르트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했으나 근대의 한계, 즉 자아와 이성의 실체성을 근본적으로 벗어나지는 못했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는 플라톤도 인정하였듯이 자신이 제시한 실체 개념은 근원적으로 사유의 산물, 즉 관념이지 결코 현실적 실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여 근대의 자아와 이성은 중세의 신에 대한 인간의 지배와 복종 프레임을 벗어나기위해 초월적인 신을 우주밖으로 축출해버린 후 인간만의 자연에 대한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한 방법으로 이성적 존재인 자아를 실체로 인정하려했던 근대의 기획은 실패로 돌아가 버리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세계를 단순하고 명료하게 해석해주는 실체론의 허구성을 버리지 못하고 현대를 맞이하게 됩니다.

결국 근대는 이성을 지닌 인간만이 감성으로 이루어진 자연을 지배할 수있다고 보았으며 이를 정당화하기위해 이성과 자아를 절대적인 실체로 간주하였으나 그러한 이성은 인간만이 지닌 실체도 아니며 또한 이성(분별지의 한계는 괴델의 불완정성 정리에 의해 확인되었습니다)의 한계로 인해 다시 신을 보증인으로 호출해야하는 한계 나아가 칸트의 이율배반에서 보듯이 이성으로는 절대로 진리를 찾을 수 없다는 사실을 현대에 이르러서야 직접 몸으로 체감하게 됩니다.

이러한 이성의 한계를 파악한 니체는 신은 죽었다라며 과감히 실체론을 해체하기 시작하였는데 그와 더불어 맑스는 기존 관념론에서 유물론으로, 프로이트는 주체의 의식을 무의식의 산물에 불과 한 것으로 보며 근대의 주체와 진리의 실체성을 폐기하기 시작합니다.

니체는 서구철학의 뿌리인 플라톤의 정적이고 점적인 시간관을 영원회귀의 동적이고 선적인 시간관으로 전환시키면서 고정불변의 존재라는 것은 단지 인간이 만든 허상에 불과하며 모든 것은 영속적으로 변화, 생성하기에 고정불변인 실체는 이미 죽었으며 따라서 대표적 실체인 신 역시 죽었다고 선포하였습니다.

이는 이미 플라톤이 이데아를 인간의 사유에 의해 만든 허구의 관념이라는 것을 다시 확인한 것이라 할 것입니다.

이후 현대에 들어서서 포스트모더니즘이 태동하여 니체를 계승한 푸코와 들레즈 그리고 데리다가 근대를 완전히 해체하게 되는데 이와는 별개로 하이데거와 화이트 헤드는 근대의 존재론을 바닥부터 의심하는 새로운 존재론을 적극적으로 제시하여 왔습니다.

한편 근대철학 입문서인 ‘철학과 굴뚝청소부’에서는 근대철학을 주체와 대상의 인식 그리고 진리라는 3가지 기준을 가지고 근대의 특징인 주체철학과 과학주의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주체와 인식과 진리라는 삼각점을 이어가면서 근대철학을 도식적으로 설명하다보니 서구 근대철학을 ‘인식론’의 측면에서만 파악하고 비판하는데 그쳤으며 서구의 ‘존재론’인 실체론을 근원적으로 비판, 해체하지 못한 아쉬움이 남게됩니다. 즉 고대로부터 내려오는 서구의 존재론인 실체론을 현대과학의 존재론에 입각하여 비판하다보면 서구 근대철학의 한계와 모순이 적나라하게 드러남에도 불구하고 인식론적 관점에서만 비판하다보니 현대철학의 정수와 흐름을 존재론적으로 이해시키기가 다소 어렵지 않았나 생각하게 됩니다.

하여 필자는 근대물리학이 제시한 존재론인 실체론과 현대물리학이 제시하는 존재론인 비실체론(생성론,사건론,과정론,관계론)을 비교, 분석하는 차원에서 현대철학을 설명해야 현대철학의 흐름, 즉 포스트모더니즘과 과정철학을 이해하기 쉬울 것이라 생각합니다.

한편 포스트모더니즘을 설명해보자면 푸코나 들레즈 및 데리다는 실체를 동일자라고 똑같이 호칭하고 있는데 다만 동일자에게 포섭되지 않거나 배제되어버린 ‘다름’을 푸코는 ‘타자’ 들레즈는 ‘차이’ 그리고 데리다는 ‘차연’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이들은 또한 동일자, 즉 실체를 해체하고 ‘다름’의 고유성과 등가성을 드러내고자 하는데 그 근거는 현대물리학은 고정불변의 실체를 부정하고 모든 존재는 시공간상 사건들의 인과적 과정이라는 과정론을 존재론으로 확인하였기 때문에 이를 그대로 철학에 도입한 것이 아닌가하고 생각하게됩니다.

한편 동일자를 해체하는 방식으로 푸코는 동일자와 타자 사이를 가르는 경계를 없애자고 주장함으로써 비실체론 중에서 ‘관계론’의 측면을 부각시키고 있으며 들레즈는 기존의 차이가 없는 동일성 개념을 해체하고 동일성의 의미를 차이의 반복을 의미하는 것으로 바꾸자고 주장합니다. 이는 ‘차이가 없는 동일성’을 ‘차이가 있는 동일성’으로 대체함으로써 기존의 차이가 없는 동일성 즉 실체를 해체하고자 하는 것인데 이는 비실체론 중에서 ‘과정론’의 측면을 부각시킨 관점이라 할 것입니다.

들레즈는 동일성이라는 개념을 폐기하지 않고 굳이 유지한 이유를 지식담론의 생산적 효과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있는데 이는 푸코도 평생 동일성을 해체하는데 전력을 다하였으나 말년에 이르러 해체해야 할 지식담론이 오히려 개체가 사회화되는데 반드시 요구되는 필요악이기에 그나마 지식담론 즉 동일성을 유지할 수 밖에 없다라는 태도로 변경한 것과 동일한 입장이라 할 것입니다.

그러나 필자는 해체를 완수하기 위해서는 ‘동일성’ 개념을 완전히 폐기해 버리고 ‘연속성’ 개념으로 대체하여야 할 것으로 생각하는데 그 이유는 현대물리학에서는 존재는 시공간 사건들의 인과적 연속체이기에 들레즈가 언급한 차이의 반복이라는 의미를 정확히 담아내는 개념으로서는 동일성보다 연속성이 훨씬 정합적이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 예로써 지금의 내 몸은 태어나서 현재까지 차이의 반복 즉 현재의 몸은 태어날 때와 동일한 몸이 아닌 차이들이 연속된 몸이기에 동일성이 아닌 연속적 존재라는 개념이 더 실재와 부합한다고 생각하며 이러한 연속성 개념은 생성과 연기의 일종인 윤회를 설명함에 있어서도 유용하다 할 것입니다.

한편 데리다는 서구문명을 실체와 비실체의 이분법적 세계관으로 이루어진 불평등의 계서적 문명으로 보았기에 아예 동일성 개념을 폐기함으로써 실체를 해체하고자 시도하였습니다.

그는 사건과 사물은 모두 차연(차이의 연기라는 의미로 들레즈의 차이의 반복과 같은 개념)으로 이루어져 있기에 동일자 즉 실체란 인간이 만든 허상으로 실재 세계에는 있을 수 없으므로 소위 동일자인 텍스트를 직접 해체하여 동일자 뒤에 숨겨진 타자들의 진정한 차이 즉 타자들의 고유한 목소리를 세상에 등가적으로 드러내어 정상과 비정상, 이성과 비이성, 동일자와 타자로 가르는 서구의 이분법적 세계관을 과감히 폐기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이런 태도는 비실체론의 ‘사건론’의 측면을 부각시킨 관점이라 할 것이며 푸코나 들레즈와 달리 동일성의 유용성(개체를 사회화시키고 질서를 유지시키는 효과성으로서의 유용성)마저 인정하지 않고 철저하게 실체를 해체하는 것으로 일관하고 있습니다.

결국 현대철학은 크게 생성론의 과정철학과 해체의 포스트모더니즘과 대별되고 있으나 포스트모더니즘은 오로지 해체만 언급하였기에 새로운 비실체론적 존재론을 재구성하지 못하는 한계를 보이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 들레즈는 자신이 새로운 존재론을 제시하는 태도가 자신이 해체하고자하는 동일성을 재부활시키는 작업일지도 모르기에 이를 거부한다고 밝히고는 있습니다.

그러나 위에서 잠깐 언급했듯이 존재를 ‘동일성의 실체’가 아니라 ‘연속적인 과정’으로 존재론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하게된다면 우리는 세계를 전혀 새롭게 해석할 수있다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아니될 것입니다(구체적으로 어떻게 변화하는지에 대해서는 차후 불교의 연기와 중도를 설명할 기회에 다시 설명드리겠습니다).

 

결론적으로 포스트모더니즘은 동일성, 즉 실체를 해체만하는 입장이기에 대안으로 현대물리학의 존재론에 입각하여 비실체론적인 존재론, 즉 연속성의 생성론, 과정론의 존재론을 재구성하지 못했다는 아쉬움을 남기고 있습니다만 다행스럽게도 화이트헤드의 과정철학은 과정론의 존재론을 받아들여 현대과학에 부합하는 철학으로 새롭게 자리매김하고 있습니다.

‘자본은 고정불변의 동일자(실체)가 아니며 노동 또한 항상 타자가 아니다. 하여 자본과 노동의 경계를 없애 버리자.‘

목, 2019/02/21- 1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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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의 성찰과 개벽의 귀환

 <개벽론>과 <근대론>을 구분해야 한다는 선생님의 말씀에 고개가 끄덕여졌습니다. 자칫 잘못하면 본말이 전도되고 ‘달’이 아닌 ‘손가락’에 집착할 수 있으니까요. 박맹수 교수님께서도 한국 근대의 탄생이 나올 때 개화에서 개벽으로를 제목으로 잡아야 한다고 충고해 주셨습니다. ‘근대’는 진부한 주제라고 하면서요. 아마 같은 역사학자라서 비슷한 생각을 하시는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다만 막상 책이 나오고 난 뒤에 일부 독자들이 “근대라는 개념에 대해 다시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후기를 써주셔서, 학계와는 달리 일반 시민들 사이에서는 ‘근대’가 반드시 진부한 주제만은 아닌 것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근대’ 개념에 대한 재인식과 더불어 ‘개벽’이라는 말도 사회적으로 서서히 확산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비록 더디기는 하지만 신비적인 이미지도 조금씩 걷히고 있는 것 같고요. 그래서 지적하신 대로 꼭 ‘근대’라는 번역어에 기대지 않고 곧바로 ‘개벽’으로 들어갈 수 있는 분위기도 형성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마 이렇게 된 데에는 선생님의 “다른 백년, 다시 개벽”이라는 캐치프레이즈가 많은 공헌을 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유라시아 견문이라는 ‘실증’을 통해서 나온 결론이 ‘개벽’이어서 종래와 같은 거부감 없이 쉽게 받아들여질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미래학으로서의 개벽학

“개벽학은 미래학이요 지구학이고 동서학의 회통과 신문명의 창조”라는 말씀에 개벽학의 핵심이 담겨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까지의 한국학은 ‘미래학’이라기보다는 ‘해석학’이라고 말하는 편이 더 정확할지 모릅니다. 기존에 있는 것들을 소개하고 해설하는 데 주력해 왔으니까요. 그것도 바깥에서 빌려오는 것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미래’는, 적어도 학문적으로는, 항상 바깥으로부터 주어지는 것이었습니다. 한국 문제에 대한 해결책이나 처방을 외국의 유명한 학자에게 구하려는 태도도 이러한 학문풍토의 일환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마 지난 이천년 가까운 세월 동안 우리의 DNA에 각인되어 온 관습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이에 반해 19세기의 ‘개벽’은 우리 스스로가 미래를 개척하겠다는 일종의 태도전환이었습니다. 그래서 역사상 처음으로 독자적인 경전도 만들어 본 것이고요. 그리고 이러한 개척정신은 「삼일독립선언서」의 첫머리에 “자가의 신운명을 개척한다”는 말로 이어졌습니다. 그래서 제가 생각하는 개벽학의 첫걸음은 100여 년 전의 미래지향적이고 주체적인 태도를 ‘다시 회복’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달리 말하면, 우리가 우리의 미래의 주인이라고 하는 ‘주인의식’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바로 이런 마음가짐, 이런 의식이 개벽학의 출발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구학으로서의 개벽학

‘지구학’은 전통적 개념으로 말하면 ‘천지학’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이것은 우리가 지난 2천년 동안 가지고 있었던 우주론을 지난 2백여 년 동안 상실한 것입니다. 한문고전을 보면 거의 모든 우주론이 원기(元氣)에서 시작해서 천지가 형성되고, 거기에서 음양과 오행이 분화되고, 여기에서 다시 인간과 만물이 생성되는 순서로 서술되고 있습니다. 절대로 인간이 먼저 나오는 법은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전통시대 학문은 기본적으로 ‘지구학’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천지학에서는 “만물이 하나”라고 하는 네트워크적 세계관을 견지하고 있습니다. 모든 존재가 따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유기적으로 이어져 있다고 보는 세계관입니다. 그래서 요즘과 같이 인터넷이나 디지털로 만물이 연결되는 시대의 세계관과 더 잘 부합됩니다. ‘한울’이나 ‘한살림’이라는 말에는 이러한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개벽학은 이런 천지학적인 우주론, ‘한울학’적인 세계관을 회복하는 데에서 시작합니다. ‘근대인’, ‘개화인’에서 ‘지구인’, ‘개벽인’으로 전환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동학의 세계사상사적 의미

“<동서 문명의 회통과 신문명의 창조>라는 21세기의 과제가 이미 (동학의) ‘다시 개벽’의 외침과 깨침에 내장되어 있다”는 선생님의 지적은, 윤노빈 식으로 말하면 “동학의 세계사상적 의미”를 정확히 짚어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요즘 사람들은 아무도 동학을 이렇게 평가하지 않습니다. ‘실패한 혁명’이나 ‘일제에 대한 저항’ 정도로 생각하는 사람이 대부분이니까요.

몇 년 전에 어느 학술대회에서 동학에 대해 발표하시는 선배 학자의 토론을 맡은 적이 있었습니다. 그 선생님의 발표에 대한 저의 생각을 말씀드렸더니, “선생님은 동학을 너무 과대평가하고 계시는 것은 아닌가요?”라는 물으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반대로 “선생님은 동학을 너무 과소평가하고 계시는 것은 아닌지요?”라고 반문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때나 지금이나 저는 대부분의 학자들이 여전히 동학을 과소평가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해 지나치게 비하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자기 안에 있는 소중한 것을 못 보고 외국의 사례찾기에 급급합니다. 눈이 바깥으로만 향해 있으니까요. 물론 지나친 국수주의나 민족주의도 경계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타자가 배제되니까요. 모두가 양극단입니다. 동학은 우리 것이라서 수준이 떨어지는 것도 아니고 우리 것이라서 좋은 것도 아닙니다. 선생님이 말씀하신대로 동서학을 회통시켜 새로운 문명을 창조하려고 했기 때문에 세계사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아마 신생철학(1974)의 저자인 윤노빈 선생님도 이 점을 말하고 싶어서 「동학의 세계사상적 의미」를 썼을 것입니다.

 

회통과 창조의 정신

동학의 특징이라고 하신 ‘회통’과 ‘창조’는 개벽학의 기본태도라고 생각합니다. 회통은 중화주의와 같은 중심주의나 제국주의와 같은 패권주의에서는 나오기 어려운 발상입니다. 항상 자기가 중심이 되고 타자는 주변으로 밀려나기 마련이니까요. 일종의 ‘본말’ 관계입니다.

반면에 회통은 본말을 설정하지 않은 상태에서 모든 것을 아우르려 하는 ‘포함’의 태도입니다. 최치원이 ‘포함삼교’(包含三敎)라고 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이것은 타자를 맹목적으로 쫒아가는 ‘축물’(逐物)과는 다릅니다. 장자나 율곡 식으로 말하면 자기를 비우고 타자를 받아들이는 ‘허심응물’(虛心應物)에 가깝습니다.

창조는 이러한 비움과 회통의 태도에서 가능합니다. 어느 하나의 틀에 사로잡혀 있는 축물의 상태에서는 모방과 추종밖에 나오지 않습니다. 바로 여기에 ‘근대의 캐슬’과 ‘개화의 아성’으로부터의 탈출이 요구됩니다. ‘근대’라는 정신적 식민지상태, 영혼의 중독상태에서 벗어나지 않고서는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개벽은 이러한 영혼의 해방을 도와주는 일종의 ‘역사적 도우미’라고 생각합니다. 오랜 중화주의에서 벗어나는 과정에서 개벽이 탄생했듯이, 지금의 근대주의로부터 탈출하기 위해서는 개벽의 경험을 참고해야 합니다.

  

개벽교육과 교육개벽

선생님이 <개벽학당>을 구상하신 것도 이러한 작업의 일환이라고 생각합니다. 잊혀진 개벽사를 복원시켜 다가올 개벽사를 개척할 ‘개벽의 일꾼’을 양성하기 위한 교육 프로그램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일종의 ‘개벽교육’이자 ‘교육개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비슷한 취지로 저희 원불교사상연구원에서도 오는 3월부터 은덕문화원에서 매달 <개벽포럼>을 개최할 예정입니다. 한 달에 한 명씩 각 분야에서 한국사회를 개벽하기 위해 실천하신 분들을 모셔다가 말씀을 듣고 대화를 나누는 자리입니다.

도법스님의 <생명평화와 개벽>을 비롯해서, 원불교대학원대학교 김경일 총장님의 <원불교와 개벽>, ‘다른 백년’ 이래경 이사장님의 <경제와 개벽>, 연찬문화연구소 이남곡 소장님의 <『논어』와 개벽>, 『역주 용비어천가』의 저자 박창희 선생님의 <세종과 개벽>, 한살림운동을 하신 이병철 선생님의 <살림과 개벽>, 인도에서 오신 원현장 교무님의 <동서융합과 개벽>, 하자센터와 로드스꼴라 김현아‧황지은 선생님의 <교육과 개벽>, ‘토착적 근대론’을 제창하신 기타지마 기신 교수님의 <종교와 개벽>, 그리고 선생님의 <유라시아와 개벽>으로 진행될 예정입니다.

제가 ‘개벽학’을 구상해 보겠다고 마음먹으면서 부딪힌 가장 큰 벽이 ‘실천’ 경험의 부족입니다. 개벽학은 화이트헤드의 과정과 실재와 같이 엄밀한 형이상학체계이기보다는, 실학과 같이 현실에 밀착된 일종의 실천학인데, 그러기 위해서는 현장경험이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실제로 현장에서 실천하면서 이론적인 고민도 해 오신 분들의 말씀을 많이 듣고 배우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과거의 개벽사를 복원하는 것은 문헌공부나 현장답사만으로도 충분하지만, 미래의 개벽학은 실천 경험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자칫 공허해질 수 있으니까요. 그런 의미에서 이번 <개벽포럼>은 저의 부족한 부분을 보완하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기회라고 생각합니다.

 

개벽이라는 역사적 경험

한국은 하나의 철학이다

제가 생각하기에 일본과 한국의 가장 큰 차이는 근대기에 ‘개벽’ 경험의 유무에 있습니다. 여기에서 ‘개벽’은 아래로부터 자발적으로 그리고 자생적으로 새로운 사상을 만들고, 그것에 입각해서 전국적인 사회운동을 전개한 역사적 경험을 말합니다. 한국은 동학개벽에서 삼일개벽을 거쳐 최근의 촛불개벽에 이르기까지 역사의 중요한 분수령에서 개벽의 경험을 해왔습니다. 반면에 일본은 이런 경험이 부재합니다. 아마도 이것이 오늘날 일본이 처한 사상적 곤경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개화가 저물어 가는 시기에 새로운 돌파구가 안 보이는 거지요. 150년간 개화의 틀에만 의존해 왔기 때문에요.

개화를 못해 식민지를 당했지만 개벽이 일어났던 한국과, 개화가 빨라서 산업화에는 앞섰지만 개벽의 경험이 없었던 일본. 이것이 두 나라의 근대기의 명암입니다. 오구라 기조 교수님은 한국은 하나의 철학이다에서 “일본에서 도덕은 진부하고 한국에서 도덕은 풋풋하다”고 하셨는데, 이 말을 빌리면 “일본의 근대는 진부하고 한국의 개벽은 풋풋하다”고 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일본인이 본 동학

다나카 쇼조

작년 8월 22일자 《아사히신문》에 “메이지유신 150주년” 특집기사로 <근대 일본의 빛과 그림자>라는 기사가 실렸습니다. 여기에서 ‘그림자’는 일본 근대화 과정의 어두움을 말합니다. 150년이 지나서 비로소 일본 근대를 성찰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 기사에서 “동학은 문명적”이라고 절찬한 일본 최초의 환경운동가 다나카 쇼조(1841~1913)를 ‘또 하나의 근대’를 지향한 사상가로 평가했습니다. 일본이 선택한 제국적 근대, 침략적 근대가 아닌 생명적 근대, 평화적 근대를 추구했다는 것이지요.

박맹수교수와 죠마루 요이치 기자(한일시민동학시행)

이 기사를 쓴 죠마루 요이치(上丸洋一) 기자는 작년 10월에 <한일시민동학기행>에 참가하기 위해 한국에 왔습니다. 이 기행은 나카츠카 아키라 교수님과 박맹수 교수님이 10년 넘게 진행해온 동학답사입니다. 이때 죠마루 기자는 다른 일본시민들과 함께 태안, 공주, 천안 등지의 동학전적지를 둘러보았습니다. 나카츠카 아키라 교수님은 90이 가까운 연세임에도 불구하고 언제나처럼 한국인들에게 정식으로 ‘사죄’하는 것을 잊지 않으셨습니다. 그 후 죠마루 기자는 이때의 기행을 기사화해서 올해 1월에 5회에 걸쳐 《아사히신문》에 연재했습니다.

이 연재에서 동학을 ‘독자적 근대’를 추구했다고 소개했습니다. 다나카 쇼조를 (서구 근대와는 다른) ‘또 하나의 근대’를 추구한 사상가라고 평가한 것과 일맥상통합니다. 그런데 동학에 비하면 다나카 쇼조는 너무나 외롭습니다. 조직이나 공동체가 있었던 게 아니니까요. 마을 주민들과 함께 정부에 맞서 싸우다가 쓸쓸하게 홀로 돌아가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개벽의 차이입니다. 다나카 쇼조도 동학적으로 말하면 분명 개벽을 추구한 사상가이자 운동가임에 틀림없지만 그를 도와줄 개벽의 동지들이 없었습니다.

 

개벽학 센터의 꿈

마지막 부분에서 한국학과 관련해서 중요한 지적을 해주셨습니다. “도학과 과학의 병진”이라는 문제제기입니다. 이것이야말로 21세기 한국학으로서의 개벽학의 최대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동학과 원불교의 개벽학이 도학에 초점을 맞추었다면, 홍대용과 최한기의 기학은 과학을 중시하고 있습니다. 이 양자를 회통시키고 융합시키는 철학적 작업이 필요합니다. 실학과 개벽학이 만나야 합니다. ‘개벽실학’이라고 해도 좋을지 모릅니다.

그리고 이 개벽실학을 모델로 해서 21세기 개벽학을 만들어 가야 합니다. 과학은 최신과학의 성과를 반영하고, 도학도 최근의 수양 프로그램을 반영해서 말입니다. 저는 이런 실험적 작업을 하는 ‘개벽학 센터’가 하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도학과 철학과 과학이 어우러진 개벽학을 디자인하는 작업실 같은 곳 말입니다. 이곳에서 개벽사상을 담은 새로운 민주주의이론도 구상할 수 있을 수 있겠지요. 해원(解冤)의 수양과 경물(敬物)의 윤리와 신명(神明)의 도덕을 겸비한 ‘개벽민주주의.’

 

개벽의 역할분담

유상용선생님과 송지용연구원

마지막으로 유상용 선생님의 ‘제도개벽론’을 소개하는 것으로 이번 답신을 마치고자 합니다. 지난 수요일 아침에 공동체운동을 하시는 유상용 선생님이 원광대학교에 오셨습니다. 수덕호에 한가운데에 자리잡은 봉황각 커피숍에서 종교문제연구소의 김재익 연구원, 원불교사상연구원의 황명희 연구원, 송지용 연구원과 함께 2시간 가까이 개벽에 관한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특히 인상적이었던 내용은 유상용 선생님의 제도개벽론이었는데, 골자는 물질개벽과 정신개벽뿐만 아니라 양자를 잇는 제도개벽도 필요하다는 것이었습니다.

듣고 보니 우리는 모두 제도나 시스템의 영향 하에 살고 있습니다. 교육 커리큘럼에 따라 정신이 개벽되기도 하고 세뇌되기도 합니다. 개벽학당이 필요한 이유도 여기에 있고요. 개벽파가 주로 도덕개벽과 정신개벽에 치중했다면, 개화파는 제도개벽과 물질개벽에 중점을 두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산업화가 물질개벽을 강조했다면 민주화는 제도개벽을 강조했습니다. 1987년에 민주화투쟁으로 얻은 직선제가 그러한 예라고 생각합니다.

정신개벽 서울선언

정치나 시민운동을 하는 분들은 주로 제도개벽에, 종교나 철학을 하는 분들은 주로 정신개벽에, 과학이나 상업을 하는 분들은 주로 물질개벽에 종사하고 있습니다. 각각 자기 역할이 있고 서로 보완해 줍니다. 중요한 것은 어느 분야에 있든 개벽의 마인드를 잃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즉 ‘무엇’을 개벽하느냐보다는 개벽을 ‘한다’는 의식이 중요한 거죠. 그리고 이렇게 ‘하는’ 사람들은 쉽게 좌절하지도 않고 자만하지도 않습니다. 반면에 ‘무엇’에 초점을 맞추면, 그 ‘무엇’을 얻은 순간 개벽이 멈추게 됩니다. 반대로 얻지 못하면 지쳐서 개벽을 포기하게 되고요. 공자는 “배우는데 일정한 스승을 두지 않았다”(學無常師)고 했는데, 이런 식으로 말하면 “개벽에 일정한 대상을 두지 않는다”(開闢無常)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럼 하노이에서 보내시는 「삼일개벽선언」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금, 2019/02/22- 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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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 

다가올 미래 사회에서는 대부분의 반복적인 육체노동이 로봇으로 일상적인 관리업무가 AI 등으로 대체될 것으로 전망되면서, 기본소득의 현실적 시행 여부가 매우 중요한 주제로 떠오르기 시작한다. 때마침 미국 캘리포니아의 조그만 도시에서 조만간 월 500 달러를 지급하는 실험이 이루어 지는 시점에서, 아래 칼럼의 필자는 매우 비판적인 시각에서 기본소득으로 미래에 발생할 문제를 정확히 제기하고 있다. 기본소득이 만능적인 해결책이라 믿으면서 삶의 구체적 내용을 무시하고 기존 복지제도를 단순화하여 행정 편의성만 높이며 자본주의의 병폐를 감추고 자기조정에 실패한 시장에 응급조치와 같은 수준으로 소비를 진작하는 기능으로 전락할 위험을 날카롭게 지적한다. 그녀는 기본소득이라는 주제를 생활재의 구매/소비 수단이라는 기능을 넘어서 비인간적 자본주의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고 공동체적 규범 및 인간의 존엄과 자기실현의 가능성을 드높이는 가능성과 역할로 접근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상기 관점의 선상에서 복지로서 사회안전망이 부실한 한국사회 역시 기본소득이라는 주제가 새로운 기회이자 매우 중요한 도전으로 다가오고 있다.


기본소득은 점점 기술주도적으로 변해가는 사회에 대한 해결책으로서 자주 회자되고 있다. 이는 코르테즈(AOC)부터 보수주의 집단의 씽크탱크인 카토 연구소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제안하는 정책이다.

이러한 아이디어에 따르면 기본소득은 점점 사라져가는 직업들을 대체하고 미국인들이 받을 고통과 충격을 완화해 줄 것이다. 매달 모든 미국인들에게 정해진 만큼의 돈을 주는 것으로 보통 액수는 500달러에서 1,000 달러 선으로 제시되며 이런 수준에서 수혜자들이 원하는 대로 쓸 수 있다.

현대사회는 기술계나 시민사회의 지도자들이 잘 알고 있는 대로 자율운전 우버, 더욱 스마트화 되어가는 유통망과 저장관리 기술, 그리고 AI가 생성하고 전달하는 뉴스 기사의 시대에 들어서기 직전이다. 작업장들의 노조 결성률에 목을 매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발을 구르며 일자리를 요구하는 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현재 일자리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 중 많은 사람들은 예측 가능한 미래에 현재의 일자리를 잃게 될 것이다.

리차드 브랜슨(영국 버진그룹 회장), 엘론 머스크(테슬라 회장), 그리고 마크 주커버그 (폐북 회장) 등이 기술이 모든 산업을 대체하는 현실에 대한 해답으로서 기본소득을 지목했다. “그린 뉴딜”의 한 갈래가 되는 것과 더불어 캘리포니아 주 조그만 스톡튼 시는 거주민 100명에게 한 달 500달러를 주는 실험을 2월에 시작한다.

1972년 기본 소득이 인기를 얻기 시작할 때, 논의되던 금액이 1000 달러였음은 일단 접어두자. 인플레이션과 지난 45년간 대규모로 상승한 생활비를 고려할 때, 현재 의논되는 한달 500 달러를 지급하는 방안은 우선 말도 되지 않아 보았다.

그리고 모두에게 돈을 주어 소비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의견 자체에 대한 지적은 거의 없다. 말할 필요조차 없지만 이 점은 분명히 해야 한다. 자본주의 경제체제 하에선 모두가 돈을 써야 한다.

해결해야 할 더 중요한 문제는 전통적 직업 구조의 소멸은 우리의 시간과 역할에 대한 재평가를 필요로 한다는 점이다. 노동과 여가를 번갈아 선택할 수 있는 사람이 점점 적어지는 이 때, 사회가 가치 있게 생각하고 의미 있게 시간을 보낼 수 있는 방법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우리는 이러한 활동들을 어떻게 인식하는가? 시간에 대한 보상은 어떻게 되는가? 이러한 질문들에 대답한다면 비로소 미래의 소득에 관한 질문은 제자리를 찾게 될 것이다.

“미국 시민이 지니는 가장 큰 중요성은 이제 더 이상 시민으로서의 중요성이 아닌, 소비자로서의 중요성이다, 소비가 새로운 필수품이 되고 있다.” 이는 플린트 저널의 편집부가 1924년에 주창한 내용이다. 이러한 직설적인 의견은 충동적 감성으로 살아가는 우리의 사회 사이로 너무나 깊게 스며들었고, 깊은 사고나 표현 없이 받아들여지고 있다.

기본소득이 할 일이란 결국 우리 사회의 소비를 지속시키는 것뿐이다. 그것이 핵심적인 문제라고 받아 들이는 것은 현대의 엄청난 부자들이 지키고자 하는 것을 지지하는 것이다. 초자본주의는 너무나 많은 부를 사회의 아랫 단계에서부터 빨아들였다. 이로 인해 사람들에게 계속 돈을 주는 것이 마치 경제 체제가 계속해서 화석연료를 태우며 불완전 연소나마 계속할 수 있도록 하는 방법처럼 보인다. 이 불안한 상태는 점점 더 불투명해지는 미래로 향할 뿐이다.

자본주의는 실패하고 있으며 그에 맞서는 전략이란 모두에게 소비할 돈을 주는 것이다. 물론 브랜슨 이나 주커버그 같은 거부들이 돈 이야기의 대가로서 그런 말을 대놓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진보 좌파와 보수 우파들까지 나서 자신들의 영달을 위해 사회에 새로운 “전략”을 파는 역할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물론 그들은 자세한 정보들을 최대한 줄였다.

폴 라이언이나 마르코 루비오 같은 공화당 우파 정치인사들은 다른 사회복지 프로그램들을 하나의 “유연기금” 이나 “유니버설 크레딧”으로 통합하면 정부의 지출도 줄이는 동시에 시민들에게 자금에 대한 통제권 또한 줄 수 있다고 주장한다. 베스트셀러 작가인자 스타인 찰스 머레이 또한 기본소득에 대한 같은 아이디어를 가지고 있다.

이는 국민건강보험, 식품구입권, 그리고 주거 보조금에 의존하여(혹은 수십 가지에 이르는 사회복지 프로그램에 의존하여) 사는 사람들이 한 달에 500 달러 또는 1,000달러로 가족은 고사하고 개인의 건강보험과 의식주도 해결 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기 전까진 괜찮은 이야기처럼 들린다.

마크 주커버그 같은 이들은 다른 사회복지 프로그램들에 더해서 기본소득을 도입하는 것을 추천하며, 그러한 정책이 창의성과 혁신을 조성할 것이라고 제안한다. 보호구역에 거주하며 정부로부터 보조금을 받는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몇 년째 기본적인 의식주 해결에 필요한 자금의 부족을 겪고 있다. 유가가 갤런당 12달러에 이르고 우유 1리터가 16달러에 이르는 상황에선 그 이유를 찾는 것이 어렵지 않을 것이다.

언론계의 많은 인사들 그리고 미디어 지형의 여러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이들이 하는 일은 하버드대의 경제학자 제프리 마이런에 따르면,  “그들은 단순히 어감이 좋기 때문에 [기본소득을] 주창하는 것이다. 그들은 내용과 상관없이 그저 구호를 외칠 뿐이다.”

실리콘 밸리의 영웅들부터 워싱턴 정가, 그리고 신 진보세력에 이르기까지 기본소득에 대한 숱한 제안들이나 구호 속에서 사라진 것은 무너져가는 시스템을 유지하기 위해 사람들이 돈을 쓰게 만들어야 한다고 솔직한 이야기, 딱 한 가지를 하는 것 외에 종합적인 계획을 찾아볼 수가 없다.

우파들부터 그린 뉴딜에 이르기까지 많은 이들은 기본소득과 더불어 무엇을 제안하는 것인지 놀라우리만치 애매모호한 태도를 취하고 있다는 것이 마이런의 의견이다. 그의 말에 따르면, 기본소득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때 마다 자세한 사항들의 이야기가 함께 나와야 사람들이 기본소득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 정확히 알 수 있다. 모든 사회복지의 기본소득화는 다른 사회복지 프로그램을 보충하는 것과는 굉장히 다른 이야기이며, 두 이야기 역시 일괄적인 계획, 예를 들어 제프 베조스(아마존 회장)부터 고속도로 고가도로 밑에 사는 노숙자까지 돈을 받는 계획과는 많이 다른 이야기이다.

기본소득의 세부사항에 대한 관한 논의의 부재는 싱클레어 루이스의 예지적인 책인 “It Can’t Happen Here” 와 불길하리 만치 비슷하다. 1935년에 발간된 이 책은 미국이 급격하게 파시즘에 경도되는 이야기를 그린다. 이야기의 주인공인 베르젤리어 스윈드립은 트럼프를 연상케 하는 대통령 후보로써 모든 미국인이 매년 5,000달러를 받을 것이라는 공약을 내세운다. 주인공이 집권에 성공한 뒤 지지자들 중 대부분은 노동캠프로 옮겨졌고, 그들은 매년 5000달러를 받는 날이 과연 올까 궁금해 하다가 그리고는 모두 죽고 만다는 이야기이다.

힐러리 클린턴은 2016년 대선 캠페인 당시 기본소득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기 직전까지 갔지만, 다른 똑똑한 사람들이 그리했듯 계산을 해 보고 나서 “도저히 수치를 맞출 수가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수 많은 미국인들에게 기본소득을 어떻게 지급할 것이냐는 문제는 분명 기본소득의 지지자들이 마주하게 되는 커다란 장애물임이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게 쉽다는 사람들도 있지만 지금껏 우리 정부가 자금을 제공하기로 한 대형 정책 중 쉽게 해결된 일이 있었던가?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은 일괄적 기본소득에 대한 질문은 앞으로 다가올 십 년 혹은 이십 년 안에 중요한 논의가 될 것이라고 이야기한 바 있다. “컴퓨터가 하기에 어려운 일이며 굉장히 힘든 일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후대를 가르치는 교사들을 박봉으로 부려먹고 있습니다,” 그는 Wired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 했다. “우리가 어떤 가치를 중시해야 하는지를 재검토하고, 우리 모두가 얼마를 지불할 지 합의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앞으로 나눠야 할 대화입니다.”

데이빗 그레이버는 가치의 재점검에 대한 필요성을 헛소리 직업이라는 그의 새 저서에서 드러냈다. 책에서 그는 우리 사회에서 가장 존중 받아야 하는 사람들이 가장 박봉에 시달리고 있으며, 반면에 의미 없거나 “헛소리”같은 일들을 하는 이들이 가장 높은 연봉과 함께 위신을 누린다는 점을 고려한다. 그레이버는 이러한 “헛소리” 직업들에 대한 필요성을 없애는 장치로서 기본소득을 추천하였다.

사회의 윤리기준이 무너져 버린 것이 가장 핵심적인 원인인 문제에 돈을 퍼붓는다고 해서 무너진 윤리기준이 다시 돌아오는 일은 거의 없다.

기본소득을 거꾸로 돌아가 버린 사회의 가치관을 되돌리는데 쓰는 것은 결국 사회를 자본주의의 늪으로 더 파고들게 만들 뿐이다, 병적이고 돈에 좌우되는 자본주의라는 시스템은 아직 사람들의 계속되는 참여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누군가는 기본소득만이 필요한 것이 아닌, 전면적인 개혁이 필요하다고 주장할 것이다. 사람들이 결국 적응하여 살아야만 하는 시스템은 그들이 없는 돈마저 쓰게 만들고 있고, 그로 인해 사람들은 생존과 번창을 위해 필요한 것들을 스스로 마련할 수 없게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한 술 더 떠서, 마이런은 미국에서 기본소득을 포괄적이고, 의미있고, 실용성 있게 만다는 방법을 만들 “가능성은 없고”, “우리는 절대 그 일을 제대로 해낼 수 없다”고 말했다. 그는 “기본소득은 일을 복잡하게 만들 것이다. 기본소득을 도입하면 [다른 사회복지와] 복잡하게 얽힐 것이며, 정부 지출을 늘릴 것이라”고도 이야기했다.

마이런의 관점에서 볼 때, “사회의 모든 에너지는 정부 지출을 줄이는 데에 동원되어야 한다.” 이러한 주장은 전통적인 리버테리언적 사상과 일치하는 동시에 많은 미국인들이 동의하지 않는 것이기도 하다. 이 진술의 가치는 바로 지도자와 풀뿌리 활동가들이 함께 고려해야 할 문제들의 방향성을 제시한다는 데에 있다. 바로 우리의 생존에 필요한 것들을 재정립하는 것이다. 소규모 농업과 소상공업, 어업과 수렵, 그리고 우리가 사는 현대 사회 아래에서 인간의 기본적 생존 본능을 만족시키는 것조차 불가능하게 만든 자본주의 체제의 환경적 결과들까지 미국에는 가공되지 않은 우유와 흡입기까지 망라하는 거대한 규모의 암시장이 있으며, 기본소득이 이런 문제를 해결해주진 않을 것이다.

어떻게든 자급자족이 가능한 사람들은 감당할 수 없는 규제와 벌금의 대상이 되고 있고 그렇게 않은 사람들은 흐르는 물조차 마실 수 없고 공기조차 마음껏 마실 수 없는 오염된 지역에서 살고 있다. 인류가 수천 년간 스스로를 유지해 온 방식으로는 이제 그 사람들의 삶을 유지할 수 없다.

사람들은 돈을 필요로 하고 있다. 현재의 규칙들이 분명 어떤 종류의 탐욕을 견제할 순 있지만, 법과 제도가 사람들을 자본주의 체제 안에 가두고 돈이나 “직업” 없이는 살 수 없도록 만들었는가에 대한 면밀하고 완전한 현실 직시 또한 우리 사회의 현재 상태를 볼 때 분명 필요한 일이다.

그렇다면 답은 기본소득뿐 만이 아니다. 답은 사람들을 전통적인 삶의 방식으로 돌아갈 수 있게 하는 것이고, 그럴 수 없다면 사람들의 삶을 고되지 않게라도 해주는 것이다.

당신이 가난하건 부자건 간에 이런 아이디어들은 터무니없어 보일 수 있다. 하지만 현실을 보면 기술은 점점 대기업들이 직업을 없애가기 쉽도록 만들고 있으며, 돈의 수레바퀴를 계속해서 돌게 하느냐에 대한 우려는 실제로 점점 커져가고 있다.

모든 것은 우리 개개인과 공동체의 일원으로서의 우리 모두에게 달렸다. 우리는 어떻게 다음 발걸음을 내딛을 것인가? 모두에게 일괄적인 기본소득을 지급할 것인가? 기본적인 삶의 방식으로 돌아가고, 그게 가능하도록 모든 규칙들을 재정립할 것인가? 혹은 두 방식을 조금씩 병행하거나, 혹은 전혀 다른 무언가를 만들어 낼 것인가?

선택은 우리의 몫이며, 그리고 선택은 기본소득이 요즈음의 인기 슬로건이 된 지금 너무나도 중요해졌다.

 

Valerie Vande Panne

독립 미디어 협회의 프로젝트인 “지역 평화 경제”의 집필자이자 수석 특파원

그녀는 독립 언론인이며, 보스턴 글로브 선데이 매거진, 컬럼비아 저널리즘 리뷰, 가디언, 폴리티코, 그리고 많은 언론출판물에 기고한다.

토, 2019/02/23- 1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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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과 학계, 정치권에서는 지난해 10월부터 3.1절 100주년 기념행사와 관련해 연일 부각시켰다. 같은 해 9월 개최되었던 제3차 남북정상회담에서 두 정상이 남북공동행사와 관련한 합의를 해내었기 때문이다.

이후 정부는 3·1운동 100주년 기념 남북 공동행사를 위해 그해 12월부터 몇 차례에 걸쳐 장소와 규모 등이 담긴 계획안을 북측에 건넨 것으로 알려졌다.

그 주 내용으로는 기념 음악회 및 축하공연 개최, 안중근 의사 유해 발굴, 남북 주요 역사유적지 상호 방문, 남북 공동 학술회의 및 특별전시회 등을 남북 공동행사로 치뤘으면 하는 그런 내용이었고, 2주 정도 남은 지금의 이 상황에서는 이 가운데 일부만, 혹은 축소, 그것도 아니라면 아예 일정변경이나 공동행사의 불발까지 예상해야 되는 그런 의미의 공식발표가 지난 2월 14일에 있었다.

“3·1절이 약 2주 남았지만, 우리측의 제안에 대해 아직 북측의 구체적인 답이 온 게 없다”며 사실상 3·1절 100주년 기념 남북공동행사를 규모 있게 치르기는 쉽지 않은 상황이라고 공식 밝힌 것이 그것이다.

‘사실상’의 무산발표회견이었다. 그런데도 정부는 중간 중간 브리핑을 통해서 “현재 정부 입장에서는 실현 가능하고 내실 있게 할 수 있는 방안을 협의 중”이라고 설명하는 등 분위기 띄우기에 열을 올렸다. 결과적으로 이렇게 거짓위장 브리핑이 되어버렸는데도 말이다.

하지만, 조금만 생각해보면 통일부가 이런 공식발표를 하지 않았더라도 이는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그런 상황이었다. 그 결정적 요인에 다름 아닌, 대한민국정부의 공식태도문제가 있었기 때문이다(물론 북측의 태도문제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이 문제는 북측의 문제이니 이 글에서는 생략하기로 한다).

왜 그렇게 바라봐야만 하는가? 3.1운동은 우리역사에 있어 꼭 통합적인 남북의 공통인식이 필요한 그런 역사의 큰 물줄기이다. 공산주의독립운동을 했건, 임시정부 중심의 독립운동을 했건 3.1운동을 빼놓고서는 일제독립 운동사를 얘기할 수 없어서 그렇다. 그런 의미를 갖는 역사가 100주년을 맞이했으니, 이 얼마나 ‘엄청난 의미’의 상징성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그러니 제3차 남북정상회담에서 두 정상이 공동행사를 치를 데 대한 합의를 했고, 그렇다면 우리정부로서는 그 의미와 합의정신에 걸맞게 100주년을 공동으로 치를 데 대한 필요충분조건을 만들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했어야만 했다.

그것도 우리정부의 일방적인 노력과 구상만이 아니라, 즉 우리정부의 독자적인 100주년 기념행사가 아니었기에 상대가 있는 그런 공동행사로 100주년을 치르려고 했다면 그 상대방인 북쪽의 3.1절에 대한 역사적 인식, 역사적 사건으로서의 3.1절에 대한 그들의 평가, 북의 항일역사 중에서 차지하는 3.1만세운동의 역사적 위상 등등을 면밀히 따져 그들의 역사학자와 충분히 협의하고, 상의하며 북의 의중을 제대로 파악했어야만 했다.

그런데도 그러한 노력은 없이(노력이 있었다면 미흡했다는 말이고), 즉 북과 합의된 남북공동 행사중심의 기획안은 전혀 보이지 않고, 우리정부의 일방적인 기획안과 그것을 중심으로 하는 공동행사, 그것도 이벤트 중심의 행사로 북을 움직이려 했다면 이는 정말 북을 제대로 이해하려고 했는지, 했다면 그렇게밖에 이해할 수밖에 없었든지에 대한 궁금증만 증폭되기에 충분하다.

그것은 3.1절 100주년이라는 그 역사적 사실과 당위의 중요성과 함께, 남북의 두 정상이 합의한 만큼, 그 행사를 위한 필요충분조건이 뭔지, 그것을 찾아내고, 그 과정에서 역사적 사실에 대한 토론이 필요하면 토론하고, 북과 남이 3.1절에 대한 이해가 달랐다면 서로 치열한 토론과 그 인식에 대한 공통성과 차이성을 토대로 행사를 기획하고 ‘미완의 숙제’는 이후 남북의 학술교류 및 역사학자 교류 사업을 통해 지속적인 남북교류협력 사업으로 승화시켜 나갔어야 했다.

그렇게 그 과정과 정확히 비례하여 공동행사가 준비되어졌었어만 했으나, 그렇지 않은 결과가 2월 14일 통일부의 발표였고, 더 나아가 남북공동행사를 우리정부가 주도해서 준비해야지 하는 그런 생각이 너무 앞서서 일방적으로 이런, 저런 행사 하자 그렇게 접근했다면 절대로 남북공동행사는 이뤄질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필자가 보는 남북 공동행사의 필요충분조건은 분명하다.

우선은, 남북 공동행사(기획안)의 그 삼빡함보다는 3.1절에 대한 역사적 인식을 같이 할 데 대한 노력이 부족하지 않냐싶다.

이유는 생각만 해도 금방 알 수 있다. 남은 임시정부 중심의 독립운동 항일해방운동사를, 북은 김일성중심의 항일무장투쟁세력의 항일해방운동사를 각각 그 역사적 사실로 인식·이해하고 있으니 3.1절에 대한 역사적, 민족적 위상이 전혀 다르게 위치지어 질 수밖에 없고, 그렇다면 이 인식의 간격을 어떻게 메꿀지에 대한 작업이 선행되어졌어야만 했던 것이다.

둘째는, 첫 번째 인식의 연장선에서 나오는 문제의식으로 위의 그러한 문제의식이 그 타당성을 갖고 있다고 한다면 이번 3.1절 공동행사는 북이 지난 2월에 발표한 <전체 조선민족에 보내는 호소문>에서 담겨진 그 4항 “4. 전민족적 합의에 기초한 평화적인 통일방안을 마련하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진지한 노력을 기울여나가자!”였는데, 이에 대한 화답으로 3.1절 기념 공동행사를 남북해외가 함께 할 수 있음을 상상하고, “가칭) 3.1절 100주년 기념 전민족인 단합과 단결을 내올 데 대한 남북해외 공동행사”와 같은 그런 전민족대회를 기획해낼 수 있어야만 했고, 그 결과도 “가)3.1절 100주년 기념 남북해외 공동호소문”과 같은 것이 발표될 수 있어야만 했다.

어디 그뿐이었겠는가? 남북이 각각 3.1운동에 대한 역사적 위상을 달리 설정하고 있는 만큼, 그 역사적 인식의 통합과 통일을 위한 “가칭)남북역사학자대회”와 같은 그런 것을 열어 통합된 3.1운동에 대한 역사적 위상확립을 해내었어야만 했던 것이다.

그 셋째는, 정부와 관료들의 태도 및 자세문제를 짚어내지 않을 수 없다. 그 중심에 과연 통일부를 비롯한 관련부처와 기관, 여당에서 3.1절 기념 남북 공동행사를 실제 이뤄내겠다는 의지가 제대로 있었냐 하는 그런 문제에 우린 좀 천착해야만 한다.

이유는 3.1절 100주년 기념 남북공동행사가 부처 차원이거나, 또는 민간차원의 그 정도의 그런 합의사항 정도가 아니라 두 국가의 두 정상이 만나 합의한 최고위급 합의사항이다. 그렇다면 그 합의에 따라 각급의 집행단위는 이를 이악스럽게 달라붙여 실현시켜내기 위해 최선을 다했어야만 했던 것이다. 과연 대한민국 정부와 여당이 그러했는가? 묻지 않을 수 없고, 대답은 그렇지 않다 이다. 왜냐하면 (그 과정에 참여하지 않았으니 속속들이 알 수는 없으나) 결과가 그렇게 말해주고 있어서 그렇다.

해서 얻는 교훈 또한 명확하다.

남북공동행사의 ‘사실상’무산은 남북의 두 최고지도자가 합의했음에도 불구하고 무산될 수 있다는 것이고, 이는 앞으로 우리 민족이 함께하고, 하나 되고, 통일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상징하고 있다.(부차적으로는 관료들의 태도와 자세변화 없이는 남북이 제아무리 좋은 의미에서 합의해내더라도 참으로 어려운 이행과정을 거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반면 교사한다.)

어떻게? 서로 차이를 인정하지 않고 서로 고집만 부린다면 정말 통합되고 통일된다는 그런 의미에서의 ‘하나 되는’과정이 정말 어려울 수밖에 없음을 각인시켜 주고, 단일민족이라는 그 ‘준엄한’ 역사성외에 지금은 체제, 역사이해, 삶의 형태, 사고방식, 생활방식 …. 등등 모든 분야에서 차이가 있는, 그래서 이 차이를 인정하지 않고서는 단 1m도 전진하기 쉽지 않음을 안내해주고 있어서 그렇다.

다시 말해 그러한 사실적 인식을 바탕 하지 않으면 하나 된다는 의미에서의 통합과 통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며, 그렇기에 비록 두 정상이 합의했더라도, 또 남북이 조약과 협정, 선언 등으로 합의하고 약속해내었더라도 열 백번 더해 반복해서 일어날 수밖에 없지 않는가? 그런 말이다.

이렇듯 ‘지나칠 수 없는’ 공동행사의 무산이고, 그런 만큼 여기서 얻어야 할 교훈은 너무나도 깊고 큰 것이어야 한다.

비록 두 정상이 합의했더라도(역설적으로 두 정상이 합의했음에도 불구하고) 지켜질 수 없다는 것에서 정말 우리는 하나부터 열까지 북을 진정성 있게 이해하고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그렇게 통 크게 하나 되는 연방연합의식과 민족대단결 의식을 가지지 않는다면 정말 분단극복과 하나 된 남북통일을 상상하기란 쉽지 않겠구나 하는 그런 생각이 뼈 속까지 각인되어져야만 한다.

특히, 정부와 관료는 정말 진정 함께한다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심각하게 깨닫고, 심각한 교훈을 그렇게 찾았으면 한다. 민간도 절대 예외이지 않다.

 

통일뉴스, 2019년 2월 15일에 게재된 글입니다(필자와 협의하여 일부 수정 후 본지에 실린 것임).

월, 2019/02/25- 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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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국내에서 베네수엘라 뉴스가 급격하게 전파를 타기 시작한 것은 몇몇 야당의 인사들이 이른바 ‘퍼주기 정책’이라는 포플리즘으로 심각한 경제위기를 맞은 국가로 베네수엘라를 거론하면서부터이다. 그리고 베네수엘라는 문재인 정부의 소득주도 성장을 비판하기 위한 그럴듯한 ‘사례’로 인용되었다. 서방의 단편적인 외신을 통해 베네수엘라 소식을 접하는 국내 언론들은 출처를 알 수 없는 자극적인 사진과 짤막한 번역 기사들로 작금의 베네수엘라 사태를 마치 예견된 ‘불행’인 듯 전하고 있다. 급기야 한 나라의 ‘두 대통령’이라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지고 있는 가운데 스스로 대통령이라고 선언한 베네수엘라 야당의 과이도 의원은 서방 국가들의 앞을 다투는 조력에 힘입어 어느새 베네수엘라의 또 다른 대통령이 되었다.

베네수엘라 임시 대통령 과이도

지난 2018년 5월 베네수엘라에서는 야당의 요구로 조기 대선이 치러졌다. 이 선거에서 마두로 대통령은 68%에 가까운 득표를 얻으며 재선에 성공했고, 불과 약 두 달 전 두 번째 임기를 시작한 상태였다. 야당이 요구한 조기 대선이었음에도 정작 그들은 권력을 둘러싼 내부 분열로 인해 대선 단일 후보를 내지 못한 채 선거를 치르는가 하면 일부 야당은 선거 보이콧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야당의 자기 분열적 행동들은 이후로도 끊이지 않았고, 최근 야당 과이도 의원의 ‘셀프임명’은 그를 베네수엘라의 또 다른 대통령으로 등극시키는 괴력을 발휘한 바 있다.

베네수엘라 사태를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은 두 가지 정도 상식적인 기준 위에 입각해 있어야 한다. 첫째, 과이도 의원의 셀프 대통령 선언은 명백한 헌정 유린이라는 사실이다. 대통령 선거를 치르고 7개월이 흐른 뒤 결과를 불복하고 스스로 대통령으로 임명한 행위는 과연 무엇으로 설명되어야 하는가. 지난해 치러진 대통령 선거는 부정선거였다는 것이 과이도의 주장이다. 그러나 2018년 10월과 12월에 치러진 지방 총선거에서 여당은 거의 압승에 가까운 승리를 했다. 베네수엘라 국민들이 현 정부를 여전히 지지하고 있다는 반증으로 보기에 충분히 설득력 있는 선거결과이다. 그럼에도 현재 야당은 지난 대통령 선거를 부정선거로 몰아감으로써 베네수엘라의 정치적 위기를 스스로 극대화하며 마치 이를 국민적 저항에 따른 위기로 조장하고 이를 언론을 통해 증폭시키고 있다. 비유하자면 마치 소수의 태극기 부대가 대한민국 정치 현실의 전부인 것처럼 말이다.

둘째, 과이도의 ‘광장선언’ 직후 이 같은 희극적인 대관식을 승인한 미국은 물론 대통령 재선거를 요구하는 유럽의 ‘오만’한 행동은 내정간섭이라는 점이다. 마치 아직도 라틴아메리카의 국가들이 유럽의 식민지라도 되는 듯 착각하고 있는 모양이다. 베네수엘라 사태를 이해하는 데 필요로 하는 것은 모든 국가는 동등한 주권을 가지며 국민들의 자기 결정권은 보장되어야 한다는 아주 기본적인 상식이면 충분하다. 어느 나라의 국민들도 한 가지 정치 의견만이 있을 수 없고, 따라서 집권 정부를 지지할 수도 있고, 규탄할 수도 있다. 민주주의 선거라는 것은 그래서 언제나 51대 49가 아니던가.

최근 프랑스 마크롱 정부에 항의하는 노란 조끼 시위를 보고 그 누구도 대통령 선거를 다시 치르라고 엄포를 놓지 않는다. 스페인의 카탈루냐 독립을 두고 혼란스러운 정국을 맞이하고 높은 청년 실업률이 심각한 사회문제가 되고 있음에도 스스로 총리라고 임명하는 정치인은 없다. 국제사회가 공유하는 상식이 그러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같은 상식은 소위 서방의 몇몇 강대국들에만 적용되는 것인가 하는 의심이 들 정도이다. 베네수엘라는 엄연히 주권 국가이며 베네수엘라 국민들의 선택은 존중되어야 한다. 그들의 권리이기도 하지만 국제사회의 의무이기도 하다.

그뿐만 아니라 현재 한 국가의 경제위기가 내정간섭의 당연한 명분일 수는 없다. 지난 몇 년간 차근차근 진행된 미국의 경제봉쇄와 금융제재는 현재 베네수엘라 경제위기를 더욱 심화시키고 있다는 사실은 거론되지 않는다. 식료품과 물자, 의약품 등과 같은 기본적인 물품들조차 수입할 수 없도록 다각도로 제재를 가하고 있는 미국을 비판하는 목소리도 찾아볼 수 없다.

심지어 얼마 전 유엔 안보리를 통해 베네수엘라 내정간섭을 공식화하고자 했던 미국의 계획이 끝내 실패로 돌아가자, 이제 미국과 그 우방들은 베네수엘라의 인권과 경제위기로 고통을 받는 국민들을 위한 미국의 이른바 인도적 지원 구호 물품을 받으라고 압박하고 있다. 베네수엘라와 콜롬비아 국경 지역인 타치라주의 쿠쿠타 지역에 도착해 있는 구호 물품이다. 현재 콜롬비아 영토 내 과이도를 비롯한 야당 정치인들은 이를 핑계로 베네수엘라 정부의 불허에도 불구하고 무력으로라도 국경을 넘겠다는 으름장을 놓으며 폭력시위를 조장하고 있다. 최근 몇 년간 베네수엘라에서 폭력시위를 조장한 혐의로 수배 중인 몇몇 인사들이 현재 대치 중인 국경지대에서 목격되는가 하면 방탄 차량으로 외신기자와 민간인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돌진하여 부상자를 ‘고의로’ 내는 등 구호를 명분으로 한 폭력적인 행동으로 위기를 증폭시키고 있다.

콜롬비아 국경에 있는 구호 물품은 이제 인도주의적 지원도 거부하는 폐쇄적이고 독재적인 정부라는 가공된 이미지를 만들기 위한 구실이 되어 버렸다. 여기에 ‘셀프 대통령’으로 더 유명해진 젊은 야당 정치인 과이도는 손수 구호 물품을 받겠다며 콜롬비아 국경으로 이동하였고, 이반 두께 대통령의 의전까지 받은 모양이다. 베네수엘라를 진정으로 걱정하는 야당이라면 외세 개입을 촉구하는 대신 현 여당 정부와 대화와 협상에 임하는 것이 올바른 선택일 것이다. 그리고 정작 과이도를 위시한 야당이 베네수엘라 국민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는다면 굳이 외세 개입을 촉구하는 극우적인 행태를 보이겠는가라는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역사적으로 다수 국민들의 지지를 받지 못하는 특정 세력이 정권을 찬탈하는 방식은 외세 개입을 통한 쿠데타였다. 1970-80년대 라틴아메리카의 단편적인 역사만을 보더라도 사례는 차고 넘친다. 현재 베네수엘라 야당이 미국과 콜롬비아의 지원은 물론 적극적인 공조로 베네수엘라 위기를 증폭시키는 이유가 무엇인지 주목해야 하는 대목이다.

상황이 이러함에도 이미 베네수엘라 사태는 원인과 결과가 뒤바뀌어져 있어 사태의 본질이 무엇인지조차 혼란스러워 보이는 형국이다. 야당의 요구대로 조기 대선을 실시하여 재선에 성공한 마두로 대통령은 자국민의 인권과 권리를 박탈하는 포악한 독재자가 되어있으며, 과이도는 이 같은 정부에 당당히 맞서는 ‘의로운’ 정치인이 되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얼마 전 국회에서 최근 베네수엘라 소요사태로 발생한 사상자들은 희생이 아닌 미래를 위한 “투자”라고 거침없이 말하는 그의 레토릭과 인식수준이 오히려 공포스러울 뿐이다.

매해 수백 명의 NGO를 비롯한 사회활동가들이 암살되는 등 인권유린의 심각한 사회적 문제를 안고 있는 콜롬비아의 이반 두께 대통령은 미국의 베네수엘라 개입을 공공연히 지지하고 있으며 필요할 경우 콜롬비아를 통한 군사개입도 불사할 것으로 보인다. 현재 베네수엘라 국경에서 감지되는 위기는 심상치 않다. 무력으로라도 구호 물품을 전달하겠다는 미국의 의지는 과연 고통받는 베네수엘라 국민을 위한 것인가, 아니면 베네수엘라 내정간섭을 넘어 군사개입을 위한 명분 쌓기의 일부인가.

잘 알려진 바와 같이 베네수엘라는 석유뿐만 아니라, 금을 비롯한 다양한 광물 매장량을 자랑하는 세계적 자원 보유국이다. 라틴아메리카와 미국의 지난 역사적 관계를 잠깐만 살펴보더라도 미국의 관심은 베네수엘라 국민의 인권이나 평화가 아님을 알 수 있다. 라틴아메리카에서 미국은 자신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수많은 민주정권을 전복시키고 독재정권을 수립하는데 거침이 없었다. 현재 베네수엘라에 대한 미국의 집요한 관심이 새삼스럽지 않은 이유이다. 현재 마두로 정부는 서방 외신과 야당의 주장과는 달리 독재정권이 아닌 것은 분명해 보인다. 전통적으로 자신들의 이해를 대변하는 라틴아메리카의 군부 독재정권을 언제나 물심양면으로 지원해 온 미국이 아니던가. 과거와 다른 점이 있다면 베네수엘라 국민들의 저항이 만만치 않다는 사실이다.

 

정이나

전 부산외국어대학교 중남미지역원 연구교수
현 쿠바 아바나 대학
정책연구소 이음 연구위원

월, 2019/02/25- 1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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