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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악구 류현선 님의 공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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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6/13 03:19
관악구 류현선 님의 공약
작성자: admin
고등학교 살리기를 통한 관악경제 활성화
어르신들의 평생을 책임지는 복지 추진
한반도 평화실현은 관악구에서 시작

이 글은 AI 가 수집 요약한 글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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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야기는 영화 <암살>의 '가상의 서사'가 아니라, 바로 지금 이 순간에도 이어지는 '현실의 역사'입니다.

 

밀양에 연대하는 이들은 잘 아실 것입니다만, 단장면 용회마을위 주민투쟁을 이끌어오신 구미현 어머님이 계십니다.

그 분을 아는 이들은 한결같이 그분의 헌신적인 활동과 반듯하고 온화한 인품에 존경하는마음을 갖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분에게는 무언가 그 세대 어르신들과는 조금 다른 이지적이고 또한 단아한 기품이 느껴집니다.

 

최근, 영화 <암살>이 1천만 관객을 동원하며 흥행몰이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구미현 어머님의 조부이신 일우 구영필 선생(1891~1926)이 영화 <암살>의 밑그림이 되는 '의열단'의 실질적인 주도자이자 배후였으며, 친가와 외가 전원이 만주로 이주하여 전 재산을 처분하여 독립운동기지건설에 바쳤으며, 끝내 김좌진과 신민부가 만주 영고탑 지역에서 벌인 횡포에 맞서다 끝내 암살되셨다는 사실은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그 후로 일우 선생의 일가는 제 과오를 감추고자하는 김좌진 신민부 세력에 의해 '일제 밀정'이라는 끔찍한 모욕을 뒤집어쓰고 90년이 지난 지금까지 독립유공자 서훈조차 받지 못했습니다.

 

구미현 어머님의 부친 구수만 선생은 광주학생의거로부터 시작하여 오랜 시간동안 지하활동을 하셨고, 거듭된 구속과 끔찍한 고문 끝에 육신이 거의 망가져 불우한 여생을 보내야 했습니다.

 

구미현 사모님은 노년에 이르러서야 겨우 삶의 안정을 되찾았으나, 집 바로 뒷산을 지나가는 초고압 송전탑 건설에 맞서는 '밀양송전탑' 투쟁에 참여하여 끔찍한 국가폭력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이제, 90년을 기다려온 역사적 진실이 조금씩 세상 앞에 드러나고 있습니다.

 

이 가슴아프고도 놀라운 이야기를 널리 알려주세요.

 

<한겨레21>이 광복절 특집으로 구미현 사모님 3대의 비극과 고통을 정면으로 다루었습니다.

 

http://h21.hani.co.kr/arti/cover/cover_general/40087.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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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 2015/08/11- 2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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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르신의 얼굴에 미소를 그리다 

- 홀로 사는 어르신 생계비 지원사업-


 

지난 2000년을 기점으로 우리나라는 고령화사회에 진입했다. 현재 8명 중 1명이 고령인구로 내년에는 총인구의 14%에 다다를 전망이다. 특히 베이비붐 세대의 고령인구 진입과 의학의 발달로 인한 기대수명의 증가는 본격적인 고령사회를 시사한다. 따라서 질병, 빈곤, 고독, 무직 등 고령층을 위한 복지를 간과할 수 없다. 실제로 기초연금과 노령연금, 그리고 장기요양보험이 시행 중이지만, 생활비로 턱없이 부족하고 대개는 중복이 불가하다.


아름다운재단의 홀로 사는 어르신 생계비 지원사업은 그래서 특별하다. 경제적 여건이 어렵거나 복지의 사각지대에 존재하는 100명의 어르신에게 3년 동안 매달 10만 원을 지원해서 삶을 응원한다. 그 실무를 주관하는 한국재가노인복지협회는 오늘도 어르신들의 안정적인 일상을 위해 각고의 노력을 기울인다.


 

10만 원과 복지의 상관관계


노인복지의 증진을 위해 정성을 다하는 한국재가노인복지협회. 그 공로를 인정받아 2012년 대통령상도 수상한 한국재가노인복지협회는 올해도 홀로 사는 어르신 생계비 지원사업에 집중한다. 2008년 이래 3년 주기로 3, 9년 동안 사업을 수행하는 내내 그 실효성은 극명했다. 한국재가노인협회의 전반적인 업무를 총괄하는 최광필 부장이 산증인이다.


생계비 지원사업을 9년간 지켜봤습니다. 10만 원은 충분한 금액이 아니지만, 저소득층 어르신들의 생계에 밀접한 영향을 미칩니다. 따라서 10만 원의 지속적인 지원은 어르신들에게 삶의 기반으로 작용합니다.”



어르신들께 10만 원은 결코 사소하지 않다. 기초적인 물질의 공급은 최소한의 정서적인 안정을 수반하기 마련인 법. 복지, 즉 행복한 삶의 기초인 셈이다. 따라서 지원사업의 담당자인 한국재가노인복지협회 오은영 대리는 대상 선정부터 사례 관리까지 한층 더 철저할 수밖에 없다. 100인의 어르신만 선별하기 때문에 그녀는 행여나 지원금이 남용되지 않도록 점검한다.


대상자 모집 시 전국적으로 16개 동사무소와 800여 지회에서 저소득 어르신의 사례를 수집하고요. 심사위원회를 통해 주거 형태, 소득 수준, 건강 상태 등을 기준으로 배점을 매겨서 우선순위를 책정하는데요. 안타깝게 후순위로 선정되지 못한 어르신은 예비 대상자로 순번에 따라 대기해요.”



한국재가노인복지협회는 대상 선정 후 해당 어르신이 거주하는 지역사회 내 사례관리기관으로 매달 15일 생계비를 지급한다. 아울러 각각의 사례관기기관을 통해 어르신들이 생계비를 투명하게 지원받고, 적절하게 적용하도록 담당 사회복지사를 격려한다. 사이사이 지원이 종결된 어르신이 존재하면 신속히 차후 예비 대상자도 매치한다. 무엇보다 최광필 부장은 사례관리기관이 작성한 분기별 보고서와 어르신 사례관리지를 중요하게 확인한다.


가장 중요한 부분은 어르신들의 삶의 질 개선입니다. 따라서 지원 후 분기별 보고서나 사례관리지를 통해 어르신들의 긍정적인 변화를 중점적으로 체크하는데요. 상투적인 내용이나 의례적인 사진 자료는 지양하고 있습니다.”


 

생계비라는 이름의 희망


홀로 사는 어르신 생계비 지원사업에 대한 어르신들의 만족도는 상당한 편이다. 어르신들은 생계비를 주거비, 의료비, 식비로 주로 지출한다. 한국재가노인복지협회는 중앙에서 업무를 관장하다 보니 현장을 방문하기가 여의치 않지만, 그런 만큼 서면과 전화를 통해 사례관리의 전반과 특징을 고도로 집중해서 통찰한다. 오은영 대리는 사례관리가 고무적일 때 특히 보람을 느낀다.


어르신들 사례마다 인상이 깊어요. 약국의 진통제 대신 병원에서 진료를 받는다는 분, 도시락 지원만 받다가 직접 장보고 요리한다는 분, 손자한테 천 원이라도 용돈 줘서 뿌듯하다는 분, 그래서 생계비 입금일만 기다린다는 분, 고마워서 사례관리사진에 특별히 미소짓는 얼굴을 담겠다는 분, 감사해서 사례관리지에 메모나 카드를 통해 메시지를 남겨주는 분……. 총체적으로 어르신들의 생활에 변화가 일어나고 있죠.”


어르신들의 희소식이 들리면 최광필 부장과 오은영 대리는 행복하다. 물론 어르신들은 연로한 탓에 더러 사고도 발생한다. 사실 생계비 지원의 종결 사유 1위는 사망이다. 그뿐 아니라 어르신들은 갑자기 건강이 악화되거나 거동의 불편을 겪기도 한다. 설상가상으로 치매도 발병한다. 예비 대상자를 연결하지만, 기다리는 사이 사망하거나 투병하는 어르신도 허다하다. 최광필 부장과 오은영 대리는 안타까운 면면을 호소한다.


생계비 지원이 100인 이상으로 확장되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지원 시기가 3년 이상으로 배가되면 어르신들이 지역사회 내에서 보다 안정적으로 생활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올해처럼 생계비 지원이 마무리되는 3년차에는 분기별 보고서에 전국적으로 비슷한 내용이 추가돼요. 종결에 의한 불안감과 상실감이 느껴진다, 지속적인 지원이나 대체할 방안이 필요하다 등등. 아무래도 지원이 중단되면 예전의 삶으로 되돌아갈 수밖에 없어요.”


여러모로 어르신 생계비 지원의 확대를 간구하는 목소리. 그렇다면 본질적으로 노인문제에 대한 호응과 관심이 시급하다. 실제로 여느 복지에 비해 노인복지는 상대적으로 지원이 부족한 실정이다. 그래서 그들은 홀로 사는 어르신 생계비 지원사업나눔에 대한 감사를 빠뜨리지 않는다. 아울러 오은영 대리는 올해 지원사업을 매듭짓기까지 기부자 앞에서 최선을 다짐한다.


세월이 흐를수록 어르신들은 쇠약해지는데요. 그 상황과 환경 속에서 어르신들을 위한 나눔은 희망으로 승화하는 것 같아요. 따라서 후원금이 더욱 적재적소에 지원될 수 있도록 저희의 기능과 역할에 충실하게 매진하겠습니다.”








 고인돌 변화사업국 변화사업팀권연재

  아름다운재단에서 배분사업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월, 2016/06/20- 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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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래일신여학교 재학 당시 차별적인 식민 교육에 항거해 동맹 휴학을 주도하는가 하면 항일여성운동의 전국적인 통일기관인 ‘근우회’에서 활동하며 개혁적인 여성해방과 민족해방의 길을 모색했던 박차정. 서울지역 11개 여학교를 비밀리에 조직해 1930년 1월 대규모 학생시위를 주도한 박차정은 이 사건의 배후로 지목돼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른다.

이후 중국으로 망명한 박차정은 1930년 의열단에 합류했고, 이를 이끌던 독립운동의 거두 김원봉과 결혼해 사랑과 혁명의 길을 함께 걷는다. 1935년, 의열단 등 좌우 독립운동단체 5개를 통합한 조선민족혁명당이 창당하자 박차정은 남경조선부녀회를 결성해 조선 여성들이 총단결하여 민족독립과 여성해방을 쟁취할 것을 독려한다. 이는 박차정이 오랫동안 추구해온 이념이었다.

우리 조선 부녀를 현재 봉건적 노예제도 하에
속박하고 있는 것도 일본 제국주의이고
또 우리를 민족적으로 박해하고 있는 것도 일본제국주의이다.
우리들이 일본제국주의를 타도하지 않는다면
우리 부녀는 봉건제도의 속박 식민지적 박해로부터 해방되지 못한다.

-남경조선부녀회 선언문 中-

1938년 조선의용대 창설 후 부녀복무단 단장으로 활약하며 항일투쟁의 선봉에 선 박차정은 1939년 2월, 곤륜산 전투에서 총상을 입고 그 후유증으로 1944년 34살의 젊은 나이로 생을 마감한다.

자주독립과 민주혁명을 이룬 통일조국이라는 박차정의 못다 이룬 꿈은, 그러나 김원봉 또한 보지 못했다. 연합국의 힘으로 해방된 조국은 미군정의 주도권 하에 있었고 소용돌이치는 해방정국 안에서 독립운동가 김원봉은 친일경찰 노덕술에 체포돼 참을 수 없는 수모를 당한다. 역사의 모순이 빚어낸 참상이었다.

분단과 이념의 대립 속에서 지워진 역사. 박차정은 사후 50년이 지난 1995년에서야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 받았고, 김원봉은 광복 70주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남과 북 그 어느 곳에서도 독립운동가로 살았던 삶을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금, 2016/01/08- 18: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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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타파는 해방 이후 최초로 친일후손들의 거주지를 추적했다. 사는 지역과 주택 형태를 파악한다는 것은 그 사람의 신분의 상태를 온전히 반영하는 것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 재력이 있는지 가늠해볼 수 있는 척도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지난 8개월 동안의 거주지 추적 결과를 공개한다.

1. 친일 후손 거주지 475곳 확인

뉴스타파는 지난 8개월 동안, 친일파 후손 202명이 국가를 상대로 낸 소송자료와 판결문, 그리고 친일재산조사위가 국가귀속한 친일 재산의 지번을 하나하나 확인해 친일 후손들의 소유 거주지 475곳을 확인했다. 지역별로 보면 서울과 경기도가 각각 300곳, 100곳으로 전체 84%가 수도권에 주택을 소유하고 있었다.

2. 강남 3구 거주 비율 절반 가까운 43%

서울의 거주지 300곳으로 한정해 살펴보면 강남구와 서초구, 송파구 등 이른바 강남3구의 비율이 130건으로 43.3%에 이른다. 절반 가까이가 강남 3구에 주택을 소유하고 있었다. 압도적인 비율이다.

주거형태로 보면 단독주택의 경우 한남동, 이촌동, 성북동, 평창동 등 전통적인 부촌에 많이 거주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서울 강남 3구와 경기도 분당지역에서 아파트를 소유한 사람은 144명으로 집계됐다. 친일파 후손들의 주거형태도 시간에 흐름에 따라 사대문 안 전통의 ‘강북’에서 신흥 부의 상징인 ‘강남’지역으로 이동하는 것으로 분석된다.

이밖에 뉴스타파의 확인결과 23명의 친일파 후손들이 상가와 임대주택을 소유한 임대사업자인 것으로 나타났다. 일부 상가 건물의 경우 선대로부터 상속이나 증여를 통해 부의 대물림이 이뤄지고 있었다.

3. 친일파 재산 여의도 150배인 4억3천만㎡ 추정, 어디로 갔을까?

친일파가 축적했던 토지는 1억3천만 평 그러니까 4억3천만㎡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된다. 현재 서울시 면적의 2/3 규모이고, 여의도 면적의 150배에 해당한다. 그렇다면 이들 토지는 이후 제대로 국가에 귀속됐을까?

4. 친일파 재산 중 0.3%만 국가귀속 후 매각된 것으로 확인

해방 후 60년 지난 2006년부터 친일반민족행위자재산조사위가 조사를 시작했다. 당시 조사위의 대상 토지는 5천 필지, 2,181만 ㎡였다. 친일재산 추정치 4억3천만㎡의 5% 수준이었다. 그리고 이 가운데 친일재산으로 결정 확정해 국가로 귀속한 토지는 1,300만㎡에 불과했다. 그리고 독립운동가 후손을 위해 쓰겠다며 매각된 것은 고작 135만 ㎡였다. 결국, 4억3천만㎡로 추정되는 친일 재산 가운데 0.3% 만이 매각 처리된 것이다. 해방 후 70년 동안 친일 청산을 제대로 진행하지 못한 결과로 읽힌다.

보다 자세한 내용은 취재 동영상과 <친일과 망각> 특별 웹페이지를 보시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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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2015/08/12- 2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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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정부 27년 간의 역사를 온전히 떠안은 여성, 정정화. 가흥에서는 엄항섭 일가와 이동녕 선생을 모셨으며 남경에서는 백범의 어머니 곽낙원 여사와 그의 아들을 돌봤다.

1940년, 중경에 정착한 임시정부는 다시 항일 투쟁의 중심에 섰고 정정화는 한국애국부인회 등 여성단체에서 활약하며 중국에서 나고 중국에서 자란 아이들을 위해 선생님으로도 활동한다.

모국의 산과 들, 모국의 냄새 모국의 마음을
얘기로만 듣고 자라난 아이들이었다

나는 틈만 나면 독립된 그들의 조국에 대해
내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을 얘기해주었다

어쩌면 그것은 내가 나에게 들려주는
내 나라의 이야기였는지도 모른다.

– 수당 정정화 <장강일기> 중에서 –

독립자금을 모으기 위해 압록강을 여섯 번 건넌 그녀는 불굴의 정신으로 조국의 독립을 이끈 독립운동가였다.

토, 2015/12/19- 15: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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