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일, 3월 6, 2017 - 09:54
사람이 먼저이고 백성(百姓)이 먼저다!
“나즉하고 그윽하게 부르는 소리 있어
나아가 보니, 아, 나아가 보니-
아렴풋이 나는 지난날의 회상(回想)같이
떨리는 뵈지 않는 꽃의 입김만이
그의 향기로운 자랑 앞에 자즈러지노라!
아, 찔림없이 아픈 나의 가슴!”
(변영로의 ‘봄비’ 중에서)
아, 찔림없이 아픈 가슴들
지난겨울 내내 때론 혹독하고 때론 푸근한 날씨 속에서 대한민국의 풀뿌리 민생들은 참으로 어수선하고 심난한 세월을 보내야 했다. 꽁꽁 얼어 영원히 가망이 없을 것 같던 동토(凍土)에도 어느새 은빛 실 같은 봄비가 내렸다. 복수초 꽃을 비롯 매실꽃 살구꽃 벚꽃들의 개화소식이 들려온다. 뜰 앞의 개나리와 목련도 피어나려는지 꽃망울들을 틔우기 시작하였다.
아, 대자연의 이치는 이렇듯 틀림이 없이 지켜지는데, 사람 사는 이 세상은 왜 도무지 변할 줄을 모르는가. 많이 가진 자, 크고 높은 자들의 행태를 보면 이게 사람사는 세상인지, 이게 나라인지 정말이지 헷갈린다. 재임기간 4년 내내 민생은 나 몰라라 해 온 박근혜의 치매성 언행, 최순실 일가의 몰염치, 탈법적인 행동거지(行動擧止), 떳떳하지 못한 부(富)를 대 물려 호사하는 이재용, 신동빈 류의 부유층들의 비상식적인 횡포와 적폐, 그에 부화뇌동하는 낙하산 줄타기 명수 김종, 황교안 등 관료들의 뻔뻔함, 그리고 수준 낮고 저열한 서석구, 김평우 같은 차마 마주 대하기 조차 부끄러운 변호사 양반들!
우리 사회 다른 한켠엔, 마냥 쫄아들기만 하는 저소득층, 폐지줍기마저 힘들어져 고통 받는 노친네들, 고용절벽에 가로 막혀 직장도 결혼도 희망도 포기한 채 길거리를 헤매는 젊은이들, 쌀값 과일 채소 값 축산물 값 농사짓는 품목마다 폭락하여 자포자기하는 농업인들, 애지중지 키워오던 닭과 소, 돼지를 미필적 방역실패로 수천만 마리나 생매장해야 한 축산인들, 시도 때도 없이 줄어드는 매출액 감소로 파리만 날리는 중소 상공업들과 재래시장 상인들이 99%이다. 한 때는 이 나라의 주춧돌 중산층들이 시나브로 아주 많이 가진 1% 부유층들의 노예로 전락하도록 재촉 받고 있다. 이 엄청난 사회양극화와 부의 불평등 현상 앞에서 목 놓아 통곡하는 은빛 실 같은 봄비만이 하염없이 내린다. 아, 찔림없이 아픈 풀뿌리 민생들의 가슴!
사람이 먼저이고 백성이 먼저이다
일찍이 시성(詩聖) 괴테는 “국민 위에 국가가 있다. 그러나 그 국가 위에는 인간(사람)이 있다!”라고 갈파한 바 있다. 대한민국 헌법 제1조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사람이 먼저이고 백성이 첫째임을 누가 모르랴. 권력을 쥔 자, 부를 거머쥔 자, 그러려고 지금 사방팔방 뛰어다니는 예비 권력자들, 그와 결탁한 정상배들의 눈에는 민초들이 무엇을 먹고 어떻게 사는지, 그들의 염원이 무엇이며 무엇을 원하는 지에는 아예 관심이 없거나 모자란다. 아니, 전혀 알려고도 하지 않는 무리들이 우리 사회의 상층 기득권의 주류세력을 형성하고 있다.
일찍이 “백성은 나라의 근본(民惟拜本)이며 먹는 일은 백성들의 하늘(食爲民天)”이라 했거늘, 우리나라에서만 식・주・의(食・住・依)의 순서가 아니라 의・식・주(衣・食・住) 관념이 고착화되어 사람문제와 먹거리 문제가 소외되고 있다. 食의 근본은 씨앗(種子)이며 그것을 자라게 하는 이는 농민(農民)이다.
그런데 보라. 우리나라만큼 토종씨앗이 천대받아 사라져가고 그 빈자리에 외래 유전자조작 GMO 식품이 판치는 나라가 세계에 또 어디 있는가. 식품의 7할 가까이가 제초제 농약을 잔뜩 바른 외래 곡식이다. 그리고 또 보라. 우리나라만큼 농민생산자가 천대받고 폄훼당하는 나라가 또 어디 있는가. 그 보복 그 재앙은 장차 우리 민생에 고스란히 돌아올 운명인가. 국회에서는 바야흐로 지금 농민이 가지고 있는 50여 퍼센트의 논밭마저 빼앗아 갈 궁리(헌법 121조의 경자유전 원칙 폐지)를 획책하고 있다. 땅 부자 토건업자 기득권 세력의 재산 늘리기와 난개발 촉진이 숨은 의도이다. 대저 농사(먹거리)란 하늘(天)이 낳고 땅(地)이 기르며 사람(人)이 자라게 한다했는데 이제 정치지도자들과 기득권 세력들이 농업을 이 땅에서 축출하고 환경생태계를 짓밟으려 한다.
어떻게 하면 사람과 환경생태계를 먼저 생각하는 정치지도자, 학생을 먼저 생각하는 학교 경영자, 회사원 제1주의 대기업주, 사병 제1주의의 국가를 제자리에 올바로 세워 놓을 수 있을까. 사람과 민생을 외면하고 돈(이윤)과 권력만을 으뜸으로 삼는 나라는 결국 망하고 만다는 것이 동서고금의 진리이다. 기업도 학교도 국가도 쓰러지고 만다. 사람이 먼저이고 백성이 먼저임을 잊어서는 아니되는 소이이다.
좀비들이 판치는 세상
최근 우리나라를 온통 뒤흔들며 풀뿌리 민생들을 잠 못 이루게 하는 박근혜-최순실의 국정농단 사태에 임하여 국회 청문회와 사법당국에 불려 나온, 한다하는 사람들의 언행을 보면서 그리고 명색이 이 나라의 총수라 하는 박근혜 대통령의 행태를 보면서 모두들 어안이 벙벙하다. 딱 한 마디, “사람이 아니구나.” 이다.
그들의 본성이 사람다움(人性)을 제대로 갖추었는지 의문스러워 진다. 더욱이 지위가 높을수록, 학력이 화려할수록 그리고 예쁜 사람일수록 이 같은 의문을 더 키워준다. 그들은 불리할 때마다 거짓말을 해대고 기억이 안난다는 변명을 한다. 너무나 가소롭다. 돈(이윤)과 권력의 유착이 지배하는 신자유주의 천민자본주의가 우리 사회 특히 상층부에 그동안 너무 많은 좀비들을 배출한 듯하다. 이명박근혜 치하에선 너무 노골화되고 있다. 심장에서 뜨거운 피를 더 이상 생산해 내지 못하는 사람 모양을 갖춘 사람 같지 않은 사람을 흔히 좀비라고 부른다. 영혼이 없고 양심도 없는 좀비들이 판치는 세상이 지금 대한민국의 민낯이다.
세월호에 수장한 304명의 애꿎은 생령들 부모 형제들이 단식하며 애통해 울부짖는 앞에서 일당 2만원씩 받고 보란 듯 짜장면, 피자 파티를 즐기는 사람들이나, 그들을 돈으로 매수해 그 짓을 사주한 사람들이나, 그리고 자식 잃은 학부형들의 읍소를 외면하고 냉랭하게 지나치는 우리나라 최고의 고귀한 분, 모두 “사람”이 아닌 좀비처럼 보이는 것은 나만의 착시현상일까.
일본 대사관 앞 위안부 소녀상 앞에서 철거를 막기 위해 울부짖는 할머니들에게 삿대질 하는 오마니 연합인지 아바이 연합인지 하는 사람들, 일당을 받고 서울역 앞과 서울광장에서 국기인 태극기를 휘날리며 탄핵 반대를 외치는 박사모 선남선녀들, 자유총연맹이든가 고엽제 전우회원들인지, 6-70대의 노친네들의 하는 짓거리들을 지켜보면서 성스러운 3.1절 국경일 날 집집마다 태극기를 게양할지 말지를 고민하게 했다. 전경련 등 부유층 세력과 결탁한 좀비들의 배경에는 언제나 암우한 권력자와 무위무능한 정부, 그리고 천민자본주의 (corporatocracy)의 병폐가 작동하고 있다.
이쯤해서 우리는 인간(사람)의 조건과 인간(사람)의 자격에 대하여 물어보지 않을 수 없다.
사람다움으로 돌아가자!
“사람이 사람이면
다 사람이냐?
사람이 사람다워야
사람이 사람이지!”
(차재석 선생으로부터 전수, 1956)
이 동요조 경구는 필자가 고2 때 열 명의 친구들과 함께 한 얼」이라는 이름의 동아리를 만들어 내적 충실과 선행을 모토로 과외활동을 하면서 찾아뵌 목포 문예인협회 회장이셨던 고 차재석 선생님(극작가 고 차범석 선생의 맏형)한테서 전수 받았다. 당시 모임이 있을 때는 물론, 그후로도 노춘(老春)이 된 지금까지도 즐겨 암송하면서 그 뜻을 헤아려 그때마다 행동지침으로 삼아왔다. 대학생이 되고 교수가 되어 학장 총장이 되었어도 심지어 장관이 돼서도, 위 노랫말에 일곱 번 반복 등장하는 “사람”이라는 단어 대신에 그때그때 달라진 직책 명칭이었던 교수, 총장, 장관이란 단어로 대입해 혼자 읊조리곤 하였다.
어떻게 하는 것이 ‘사람다운 것’인가, 어떻게 사는 것이 ‘사람다운 삶인가,’ 노상 이 의문과 다짐을 동호인들끼리의 모임에서 토론도 해보고 남모르게 홀로 고민을 하였다. 이 과정에서 맹자님의 가르침이 언제나 회자되었다. 가라사대 사람의 본성에는 네 가지 마음씨(四端之心)가 있는데 측은지심, 수오지심, 사양지심 그리고 시비지심이다. 이는 조선조 5백년을 관통해온 우리 사회의 중심사상이며 기본 수신(修身) 철학이었다.
첫째, 남의 불행과 고통을 차마 그대로 보아 넘기지 못하는 마음, 또는 차마 남에게 잔인하게 대하지 못하는 마음(惻隱之心, 측은지심)이 없으면 사람이라 할 수 없다. 그리고 자기의 잘못을 부끄럽게 여기고 남의 옳지 않음을 미워하는 마음(羞惡之心, 수오지심)이 없으면 사람이라 할 수 없다. 또 양보하고 사양하는 마음(辭讓之心, 사양지심)이 없으면 사람이라 할 수 없다. 끝으로 옳고 그름을 가려내려는 시비의 마음(是非之心, 시비지심)이 없으면 사람이라 할 수 없다. 이 각각은 차례로 仁(어짐)과 義(의로움), 禮(예를 지킴), 智(지혜로움)에 기반한 마음씨이다. 이 네 가지 마음씨는 인륜의 기본이며 필수적이라는 것이 맹자의 가르침이었고 조선조 사회의 지배계급 사대부들의 수련지침이었다.
어렸을 적부터 해방이후 어수선했던 시절 “소련이라 속지말고 미국이라 믿지 마라. 일본은 일어선다. 조선아 조심하라.”는 동요를 제창하고 다니던 학동들이 어른이 되어가는 고교시절에 이르러서는 “사람이 사람이면 다 사람이냐? 사람이 사람다워야 사람이 사람이지!”를 노래했다. 그러다가 참을 수 없을 만큼 아주 못된 교장선생을 만나서는 “교장이 교장이면 다 교장이냐? 교장이 교장다워야 교장이 교장이지.” 라고 매일 제창함으로써 그 악덕 교장선생님을 물러나게 하였다.
요즘엔 대한민국 남녀노소가 매주 말이면 이게 나라냐며 광화문 광장에 모여 대통령 타령을 흰소리로 외치고 있다. “대통령이 대통령이면 다 대통령이냐? 대통령이 대통령다워야 대통령이 대통령이지.”
새삼 인문학이니 인문주의니 마치 새로운 학문이나 되는 듯 떠들어 대는 세상이지만, 인문주의의 본질은 일찌기 사단지심(四端之心)에서 가르친 인본주의 즉 휴머니즘이 아니던가. 인간 개개 생명의 존엄성을 존중하는데서 부터 휴머니즘이 시작한다. 사람이 사람다워야 사람이 사람이라는 가르침은 그래서 영원불멸하다. 우리 모두 자기가 하는 말과 행동에 영혼이 살아있고 양심이 살아 있어야 한다. 학문과 과학, 정치, 사회, 교육, 문화, 예술 활동 모든 분야에서 “사람다움”을 되찾아가야 할 때이다. 사람이 먼저이고 백성이 먼저다!
(이 글은 전국농민회가 발행하는 한국농정신문 3월 6일자 “농사직썰”란에 실릴 예정입니다: 필자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