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다른백년은 세명대 저널리즘스쿨 단비뉴스팀과 함께 ‘사랑하지 않는 대한민국’을 주제로 6편에 걸쳐 우리 주변의 삶을 들여다본다. 장시간 노동자, 청년 실업자, 경쟁에 시달리는 직장인, 노인, 청소년들이 그들이다. 노인은 말동무를 찾아 매일같이 탑골공원에 간다. 취업 못한 청년은 안전한 직장을 가질 때까지 스스로 고립된다. 하루 10시간 이상 일하는 직장인은 연인을 만날 시간조차 없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사랑받고, 사랑하고 싶지만 치열한 경쟁 속에 사는 현대인에게 사랑은 사치다. 각자도생 사회에서 가족, 친구, 직장 동료 누구에게도 고민을 털어놓지 못한다. 당신은 사랑하고 계십니까. <프롤로그> 1. “들어줘서 고마워” 2. 한국인의 밥상 <청년 실업자> 1. “사랑도 유예가 되나요?” 2. “연애도 사치일 뿐” 3. |
공무원 학원이 몰려있는 노량진에서 진지하게 연애하는 얘들은 별로 없는 것 같아요. 물론 있겠죠. 걔 중에는 진지하다고 생각하면서 만나겠지만, ‘인스턴트러브’라고 하잖아요. 그런 거죠. 육체적 사랑이라고만 말하기는 힘들고, 정신적으로도 시험 때까지만 서로 도와주자는 거죠. 서로 심적으로 의지가 되잖아요. 그 외로운 감정을 사랑이라고 판단했던 것 같아요. 진짜 사랑일 수도 있지만 외로워서 만난다는 쪽이 더 맞는 것 같아요.
위태로운 외줄 타기 연애
노량진에 온 건 2008년 겨울 무렵이에요. 23살 때였죠. 한창 연애 많이 할 나이잖아요. 20대 얼마나 혈기왕성한 남자·여자들이에요. 같은 공간에서 공부하는데 눈이 안 돌아간다는 건 거짓말이죠. 아무래도 이성에 의지하는 게 서로에게도 좋다고 생각했고요. 들어온 지 4~5달이 지나고 여자친구를 만났어요. 같은 직렬 시험을 준비하는 동갑내기였죠. 같은 학원에 다녔는데 그 친구가 계속 내 옆에 앉더라고요. 저도 고정석처럼 그 자리에 쭉 앉았죠. 언제부턴가 얼굴을 익히고, 또 사탕이나 과자를 하나씩 건네면서 고맙다고 이야기를 트고, 그러다 연애를 시작한 거죠.
그런데 노량진에서 하는 연애라는 게 참 쉽지가 않았어요. 돈도 돈인데 시간 여유, 마음의 여유가 없는 게 컸죠. 시험 석 달 전부터 강의가 빡세게 들어갔으니까요. 일주일 내내 쉬는 날 없이 강의가 있었어요. 보통 새벽 4시쯤에 일어나서 학원에 자리를 맡으러 가요. 학원이 4~5시에 열면 앞자리를 맡고 와서 바로 자고, 6시쯤 일어나서 아침을 먹죠. 고시뷔페에서 먹어요. 학원이 9시에 시작하니까 7시 반이나 8시에 가서 영어 단어를 외우거나 간단한 내용을 복습했어요. 수업이 오후 1시에 끝난단 말이에요. 또 고시식당가서 점심을 먹고, 거의 세끼를 다 고시뷔페에서 먹어요. 전 보통 한 달짜리 월권을 끊어서 먹었어요. 여자친구는 가끔 고시뷔페에서 10장 단위로 파는 쿠폰을 끊어서 같이 먹거나 그랬죠. 걔는 ‘공부방’이라는 원룸 비슷한 구조로 된 곳에 살았는데, 집에서 보내준 반찬으로 끼니를 때우곤 했어요. 밥 먹고 오후 2시부터는 독서실에 갔어요. 이용료가 한 달에 12~13만 원 돈 하거든요. 거기서 저녁 6시까지 공부하고, 또 고시뷔페 가서 저녁을 먹고. 다시 또 독서실 가고. 그렇게 살았어요.
시험이 석 달 넘게 남았을 때는 조금 여유가 있었는데 그래도 일단 원래 스케줄에 맞추려고 노력했어요. 대신 주말은 쉬면서 여자친구랑 돌아다녔던 거죠. 대학생 때에 비하면 데이트다운 데이트를 못 했어요. 진짜 노량진에서만 돌아다녔던 것 같아요. 그쪽이 그래도 놀 거리가 가득하고, 또 사육신공원이 있어서 거기 가거나 카페에 가거나 그랬어요. 사실 공부를 하는 건지 연애를 하는 건지 기준이 모호했죠. 종일 같이만 있는 거지 그렇다고 즐거운 연애도 아니고요. 독서실을 가든 학원을 가든 하루 종일 같이는 있잖아요. 그런데 그게 연애다운 연애는 아니잖아요. 마음이 불편하니까 어디 멀리 가질 못하죠.
그때 주변에 아는 사람들 보면 거의 다 연애를 했어요. 생각보다 노량진에서 연애하는 비율이 낮지는 않더라고요. 처음 지방에서 올라온 얘들은 외로우니까 많이 하거든요. 연애 기간이 오래 못 갈 뿐이죠. 시험 끝나고 둘 중 한 명이 합격하면 헤어지는 게 대부분이에요. 두 사람 다 합격하면 좋지만 한 명은 합격하고 다른 한 명은 못하고 그런 경우가 많으니까요. 그럼 거의 헤어지더라고요. 특히나 남자가 합격을 못 하면 헤어지는 거죠. 자존심이라고 해야 하나요. 그래서 합격 후에 대해서는 서로가 함부로 얘기할 수 없는 거예요. 단언을 못 하니까요. 시험 끝나고 난 뒤의 상황이 정말 불안하거든요. 합격 결과를 예측할 수 없잖아요. 그래서 ‘우리 계속 만나자’ 그렇게 확언을 못 하는 거예요. 불안 불안하게 만나는 거죠. 진짜 사랑하더라도 앞으로 미래를 모르는데 어떻게 서로에게 확신을 주고 그러겠어요. 그러다 보니 오래 못 가는 것 같아요.
인사요? 괜히 얽히고 싶지 않아요
군대를 제대하고 다시 돌아온 노량진은 그전과 별반 다르지 않았어요. 학원 커리큘럼도 그대로였고요. 그런데 이제는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당장 연애해야겠다는 생각보다 돈을 벌어야 한다는 생각이 크더라고요. 막 연애하고 싶다는 생각이 오히려 안 들어요. 빨리 돈 벌어서 취업한 얘들처럼 안정을 찾은 다음에 연애해야죠. 그때랑 비교하면 인식이 많이 바뀐 것 같아요. 지금 노량진 분위기가 그래요. 연애할 바에는 차라리 빨리 자리를 잡자는 식이죠.
화장실을 공용으로 쓰는 고시원에 살았어요. 참 답답하더라고요. 그래서 독서실을 다녔죠. 고시원이 잠만 자는 공간인데 한 달에 30만 원이면 아깝잖아요. 아까운데도 답답하니까 나와서 독서실을 끊고 공부한 거죠. 밥은 아침, 점심, 저녁 다 혼자 먹었어요. 노량진에서는 혼자 밥 먹는 게 워낙 당연한 거죠. 연애하지 않는 이상 혼자가 쉽다고 해야 하나.
물론 밥 먹는 짧은 시간만이라도 옆에서 얘기를 나눌 상대가 있으면 좋겠죠. 항상 시험 생각만 하진 않으니까요. 노량진에 왜 밥터디, 출첵스터디, 생활스터디 같은 말도 안 되는 모임이 많겠어요? 외로우니까 그러는 거죠. 그런데 솔직히 그게 무슨 효율이 있겠어요. 그런 식으로라도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싶은 거죠. 처음에는 같이 밥 먹으면서 공부하는 얘들이 결국에 친해져서 술 마시고 놀고 그러더라고요.
순수한 공부 모임도 마찬가지예요. ‘으샤으샤’ 하면서 오래갈 사이처럼 친하게 지내던 사람들이 시험 끝나면 하나둘씩 스터디에서 빠져나가죠. 공부 목적으로 만들었으니까 시험에 떨어져도 모임을 계속하는 게 맞잖아요. 그런데 서로 붙었는지 떨어졌는지 물어보기도 뭐하고, 그냥 별 이유 없이 모임이 해체되는 거죠. 그 후로 관계가 끊어지는 건 당연하고요. 쭉 이어질 수 없는 단편적 관계인거죠.
그래서 전 밥 먹을 때나 어떤 때나 아는 얼굴을 만나도 인사 안 해요. 괜히 얽히기 싫어요. 이 사람이랑 친해져 버리면 나중에 또 어떻게든 약속을 잡아서 밥 먹을 일이 생길 거고, 내 생활 리듬을 깨는 일이 생길 거예요. 또 무슨 대화를 하더라도 내가 공부를 해야 하는 시간인데 이 사람이 고민이 있다면 들어줘야 하잖아요. 내 흐름이 깨져버리잖아요. 남자든 여자든 먼저 인사하면 받아줄 용의는 있어도 내가 먼저 인사하면서까지 적극적으로 관계를 맺고 싶다는 생각은 없어요. 이 사람이랑 인간관계를 맺으면 어떤 식으로든 내 생활에 영향을 미치니까요.
죄인이 된 취준생들
학원에서 사람 사귀지 말라고 공공연하게 얘기해요. 원장이나 강사가 “서울에서 무슨 사람 만날 생각하지 마라” “연애할 생각하지 마라” 이런 말을 자주 얘기해요. “굳이 몰려다니지 마라” “괜히 주변 얘들 분위기 깨지 마라” 이렇게 얘기를 한다니까요. 그렇게 이미 강사들이 종용하는데 어떻게 마음이 떳떳하게 연애를 하고 그러겠어요. 우린 여기에 시험 합격하기 위해 온 건데 여자친구 만나는 것도 부모님께 죄스러운 거잖아요. 나 자신한테도 마음이 편하진 않고요.
한번은 같이 시험 준비하는 고등학교 친구가 학원 근처 카페에서 여자친구랑 커피를 마시고 있었는데, 원장을 만났다는 거예요. 인사를 했고, “어어 반갑다” 이렇게 하고 넘어갔데요. 그런데 다음날 강의 시작하는데 원장이 버럭버럭 화를 내면서 어떻게 부모님이 보내주신 돈으로 공부하면서 커피숍에서 연애질이나 할 수 있느냐고 공개적으로 얘기했다는 거예요. 그만큼 우리는 죄인인 거죠. 행동에 제약이 생겨 버리는 거죠. 그런 동네에요. 그게 우리를 얼마나 분발하게 하는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우리를 바라보는 어른들의 인식 아닐까요. “너희는 이 정도 공부는 해야 한다.” 주변의 모든 어른이 우리를 그렇게 바라보고, 우리 스스로도 서로를 그렇게 바라보니까 더 연애하기에 마음이 불편하고 그런 거죠.
이성 간에는 아예 서로 아는 척하지 말라고 해요. 재밌는 게 뭐냐면 원장이 학원생활이든 뭐든 힘든 게 있으면 자기한테 연락하라고 번호를 알려줬어요. 여자애들이 문자를 많이 보낸 데요. 그런데 그중 절반 이상의 고민이 ‘옆자리 남자가 아침에 음료수를 사준다’ ‘과자를 준다’ ‘사탕을 준다’ 이런 것들 좀 못하게 해 달라. 이거래요. 신기하지 않아요? 오히려 좋은 게 아니라 싫다는 거죠. 한창 연애가 좋아야 할 나이에 싫어지는 거죠. 독한 마음이라고 하면 칭찬해줘야겠지만 서글퍼 보이는 면도 없지 않아요. 좋게 보면 치열하게 고군분투하는 모습일 수도 있는데 어떻게 보면 그렇게까지 해야 할까 싶기도 하고요.
하루 수업을 빠진 적이 있어요. 매일 옆에 앉는 여자애가 있었는데 얘한테 책을 빌려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했어요. 학원에 아는 사람이 얘밖에 없으니까 캔커피를 하나 사주면서 책을 하루만 빌리자고 했죠. “알겠다”면서 다음 주에 책을 가져다준다더니 그다음 날부터 다른 자리에 앉더라고요. 매몰차게 까인 거죠. 나는 진짜 책을 빌렸어야만 했는데 걔한테는 제가 작업 걸려고 보였을 수도 있죠.
인간관계, 합격하고 리셋하기
노량진에 있으니까 친구들한테도 연락을 잘 안 하게 되더라고요. 친구 안 만난 지가 몇 달 됐죠. 각자 취업 준비하는 입장이라 시간 맞추기가 쉽지 않아요. 마음이 진짜 조급한 시기잖아요. 나이는 찼고, 주변 친구 중에 남자애들은 절반 정도 취업했고, 여자애들도 거의 취업했고. 그러다 보니까 금전적인 문제보다 내가 게네들보다 뒤떨어져 있다는 자격지심이나 경쟁심 때문에 더 연락을 못 하게 되는 거예요. 같은 대학 나오고 같이 공부했던 얘들인데 지금 이만큼 나보다 1~2년을 앞서간 거죠. 나는 그만큼 뒤처진 거니까 마음이 급해지는 거예요. 꼭 친구 문제만이 아니라 모든 인간관계가 “아, 나 이거 시험 끝나면 전부 다시 해야겠다”이런 거예요. 연락하고 싶다가도 “내가 지금 뭐하는 거야” “연락해서 뭐해” 이런 마음도 커지고요. 내가 좀 같은 선상에 올라갔을 때 만나고 싶다는 생각이 크죠.
그런데 군대 맞후임이랑은 한 달에 2~3번 정도 만났어요. 고맙게도 노량진에 자주 찾아와줬죠. 와서 밥도 사주고, 후임 아버지가 영화제작사 높은 자리에 계셔서 영화 표를 하나씩 공짜로 주기도 하고. 그런 데서 많이 위안을 얻었던 것 같아요. 나랑 비교 상대가 안 되는 얘들 있잖아요. 대학 동기들은 괜히 만나면 움츠러드는 게 있는데 이런 얘들은 나랑 고민을 나누진 않으니까 편한 얘기를 하고 그렇게 스트레스를 풀었던 것 같아요. 같이 공부하던 고등학교 친구들을 만나면 서로 “아 XX 죽겠다” 딱 그 얘기에요. 정부 욕하고, 사회 구조 욕하고, 매일매일 힘들다는 얘기만 하죠. 그런데 후임들은 군대 말고는 공감대가 없는 얘들이잖아요.
소설책 대신 수험서
공부하면서 좋아하는 거, 하고 싶은 거 다 뒤로 미뤄놨어요. 그 좋아하던 영화도, 극장 안 간 지가 되게 오래됐으니까요. 작년에 <위플레쉬>인가 딱 그거 하나 봤던 거 같아요. 영화를 제대로 즐기려면 극장에 가야 하는데 정말 미치게 영화 좋아하는 사람 아니면 혼자 극장에 가기란 쉽지 않죠. 시간적 여유가 없어서 친구랑 약속 잡기도 쉽지 않고 나갈 여건도 안 되니까 다운로드 받아서 혼자 보는 편이에요. 읽고 싶은 소설책도 마찬가지죠. 시간이 없으니까 보질 못해요. 책 읽는다고 자위하면서 수험서를 보죠. 어찌 보면 당연한 거긴 한데…. 그러고 보니 이번에 투표도 못 했네요. 사전 투표할 생각도 못 했어요. 사실 시험이 얼마 남지 않았을 때여서 조금 귀찮기도 했죠.
마음의 여유가 있었다면 지금처럼 팍팍하게 살지는 않았겠죠. 하루 한 시간이라도 내서 친구도 만나고 그러지 않았을까요. 그렇다고 큰 차이는 없었을 거 같아요. 취업이 어렵든 쉽든 일단 원하는 곳에 들어가고 나서 양식 있는 삶을 살지 않았을까요. 또 그만큼 지금보다 더 높은 자리를 노렸을 것 같아요. 자기계발에 좀 더 투자도 하고요. 지금은 어느 곳 하나 합격하기 쉽지 않으니까 낮은 데 낮은 데를 찾다 보니 9급 공무원까지 온 거죠.
요즘은 빨리 뭐라도 하고 싶으니까 더 안달이 나 있어요. 그만큼 빨리 지치는 거 같고요. 고등학생 때는 부모님이 “법대, 법대” 하셨으니까 판검사가 되고 싶었는데 막상 법대 들어와서 공부해보니깐 법만큼 안 맞는 학문이 없더라고요. 안 맞는 공부 하려니까 이렇게 질질 끌고 있고요. 한 대학 강사가 이런 얘기를 한 적이 있어요. 우리나라는 학과에 따라 직업을 찾는 비율이 60%를 넘는다면서, 과를 정한 순간 이미 진로가 정해진 거라고요. 저도 그 60%에서 벗어나지 못 한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