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문제연구소 2016-08-23 17:48:24




[캠페인]
역사 독립군 임종국


Project by 조호진 (기자, 시인)

About you
친일과 친독재로 양지만을 쫓았던 변신의 귀재, 반민족행위에 대한 일체의 반성 없이 생을 마친 미당 서정주를 기리는 <중앙일보>의 '미당문학상' 제정에 반대하며 1인 시위를 했던 시인. 민족문제연구소 회원이자 <오마이뉴스> 특임기자.

Project story

친일문제 연구의 선구자 임종국 선생(1929~1989)을 기리는 조형물 건립을 추진한다. 이를 위해 이 시대의 독립군(추진위원) 4389명을 모신다. 추진위원 숫자는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친일파 숫자다. 한 명의 추진위원이 한 명의 친일파를 청산하자는 의미다.

Funding plan

후원금은 임종국 선생 조형물 제작 등의 건립비용으로 사용된다. 조형물은 '평화의 소녀상'을 만든 김서경·김운성 작가가 제작한다. 조형물 건립 장소는 친일청산의 마지막 투혼을 불살랐던 충남 천안이며 건립 시기는 선생의 27주기인 11월 12일에 맞출 계획이다.

Details

선생의 삶은 가난과 외로움 그리고, 투병으로 점철됐다. 병든 몸을 이끌고 대학 도서관과 공공도서관의 방대한 자료를 뒤지며 육필로 눌러쓴 선생의 친일 인명 카드 1만 2천 장은 친일반민족행위자들을 역사의 심판대에 세운 <친일인명사전>의 씨알이 되었다. 친일청산을 위해 목숨을 바친 역사 독립군 임종국 선생 앞에서 이 시대의 독립군인 우리들은 이렇게 각성하며 다짐한다.


"1만 2천 장의

친일 인명 카드

<친일인명사전>


"우리들은 선생님처럼 살진 못하지만 선생님의 삶을 기억할 수 있고, 친일청산의 뜨거운 가슴을 나눌 수 있으며, 선생님을 기리는 추진위원 4389명의 일원이 될 순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선생님의 유업을 잇는 역사 독립군이 되려고 합니다. 이 나라는 친일파의 나라가 아니라 독립군의 나라, 민족혼이 살아 숨 쉬는 아름다운 강산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친일파의 후손이 장관이 되고, 재벌 회장이 되고, 대학 총장이 되고, 언론사 사주가 되어 나라와 민족을 망치는 이 지경의 나라를 바로 세우기 위해선 정의와 진실을 바로 세우려는 역사 독립군이 필요합니다. 마음은 다정다감하고 민족정신은 불처럼 뜨거운 역사 독립군들이 모이고 모여서 마침내 친일청산의 장강으로 도도히 흐를 수 있도록 용기를 북돋워 주십시오."


"혼이 없는 사람이 시체이듯이

혼이 없는 민족은

죽은 민족이다


"역사는 꾸며서도 과장해서도 안 되며 진실만을 밝혀서 혼의 양식으로 삼아야 한다." (임종국 선생님의 말씀)


[역사독립군 임종국] 2화 부친의 친일 행적까지 기록한 임종국


[역사독립군 임종국] 1화 펜으로 싸운 항일 레지스탕스 임종국




"서울대의 이어령

고려대의 임종국



조선농민사(朝鮮農民社) 사장이였던 아버지(임문호)와 교사 출신인 어머니(김태강) 사이에서 태어난 임종국(1929~1989)은 수재들이 다녔던 경성사범학교(해방 후 '서울대 사범대'로 바뀜)와 고려대 정치외교학과에서 공부했다. 소설가 조정래 선생의 증언처럼 그 실력대로 살았으면 판사가 되고 교수가 되면서 입신양명을 누렸을 것이다.



누이동생 임경화(71) 여사는 "오빠가 출세의 길이 아닌 험난한 인생길을 선택한 것은 불의를 보고 참지 못하는 체질 때문"이라고 말했다. 선생도 부모의 기대에 부응하려고 했었다. 500페이지가 넘는 <민법총론>이란 책을 송두리째 외울 정도로 고시공부에 몰두했지만 시대에 좌절하고 건강까지 악화되면서 판검사의 꿈은 수포로 돌아갔다. 선생의 당시 심경이다.


"한 많은 피난살이 속에서 그런 울분(이승만의 독재와 부정부패에 대한)과 충격도 낡은 앨범처럼 퇴색해 가고 땃벌떼(이승만 정부가 국회를 해산시키기 위해 동원한 정치깡패집단)다, 정치파동이다 휴전회담이다로 어수선한 세월이 흘렀다. 폐허에서 하루의 삶에 쫓기던 나는 판사 검사가 돼서 떵떵거리고 살아야겠다는 엉뚱한 꿈에 사로잡혔다."


▲ 임경화 여사의 대학졸업식(가운데 학사모)에 참석한 임종국 선생(왼쪽에서 세 번째) ⓒ민족문제연구소


"오빠가 그 좋은 머리대로 살았으면

부와 명예를 누렸을 거예요!


막내 여동생 임경화 여사를 지난 8월 3일 만나 정의의 펜을 꺾지 않은 재야사학자 임종국과 인간 임종국의 이야기를 들었다.

"소설가 조정래 선생이 '서울대의 이어령, 고려대의 임종국'이라고 말할 정도로 오빠의 머리가 우수했다는데."


"오빠는 뛰어난 수재였어요. 둘째 오빠(임종철.전 서울대 경제학과 교수)와 셋째 오빠(임종한.서울대 철학과 졸업)도 공부를 잘했지만 오빠를 따라가진 못했어요. 오빠의 결혼식 주례였던 조용만(전 고려대 교수) 선생님의 말씀이 '(전체 수석으로 서울대에 합격한) 종철이 머리가 좋긴 하지만 종국이를 따라갈 수 없다'라고 할 정도로 수재였어요.



"시인이자

문학평론가였던 임종국


선생은 다재다능한 예술가였다. 해방 직후인 1947년 18세에 서울 음악 전문학원 첼로과에 입학했다. 그리고 한 방송국 주최 클래식 기타 경연대회에 출전해 2등에 입상하는 등 음악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지만 판검사가 되기를 바라는 부모의 반대에 부딪쳐 꿈을 접어야 했다.

1956년 27세에 시인 <이상 전집>(3권)을 발간하면서 문단과 학계에 주목을 받으며 문학평론가가 되고, 1959년 <문화예술> 지를 통해 시인으로 등단하면서 문학가가 될 수 있었지만 그 길로 가지 못했다. 박정희의 한일회담에 분노한 데다 친일문인의 행적을 발견한 때문이다.


▲ 천안 요산재 시절의 임종국 선생. 밤농사를 지으며 생계를 이으려고 했으나 실패했다 ⓒ민족문제연구소


"일본 학자들을

감동시킨 재야사학자


"오빠에 대한 추억을 이야기해주세요."


"천안 '요산재'(樂山齋)에서 오빠와 6년 정도 같이 살았어요. 오빠랑 같이 살면서 많은 아픔이 있었지만 아름다운 추억도 있었어요. 그건 오빠가 들려준 음악이었어요. 달빛이 그득한 밤, 올케(이연순)와 저는 방에 누워 있고 오빠는 마루에서 베토벤의 월광 소나타와 아람브라의 궁전, 금지된 장난을 들려주셨어요. 첼로로는 '빈사의 백조'를 연주하셨는데, 영국의 발레리나 마코트 폰테인이 발레로 표현한, 죽어가는 백조의 모습을 머릿속에 떠올리며 연주할 정도로 오빠는 감성이 풍부하셨어요."


1980년 생계 곤란에 처한 선생은 농사를 지으며 연구하려고 서울 생활을 접었다. 천안시 삼룡동 흑성산 산기슭으로 이사해 외딴집을 직접 짓고는 집 이름을 요산재라고 붙였다. 그곳은 버스도 다니지 않는 데다 전기도 들어오지 않고 우편배달도 되지 않는 산중이었다. 의도와 달리 농사는 생계에 큰 도움이 되지 않았지만 친일파와 일제 침략 연구에 몰두하기엔 적당했다.


"다섯 평 좁은 방 사과 궤짝에서

밤 새우며 <일제 침략사> 등 집필


선생께서는 산속 누옥에서 사과 궤짝을 엎어놓고 하루에 10시간씩 어떤 때는 며칠씩 밤을 새우며 <일제 침략사> 등을 집필했다. 1981년 요산재를 찾아온 와세다대학 '오오무라 마쓰오 교수'는 선생을 보면서 "무서운 신념을 가진 이가 여기 있구나!"라고 감탄했다.
오오무라 교수는 선생의 <친일문학론>을 일본에 알린 한국문학 전공자로 사실적이고도 실증적인 방식으로 역사를 기술한 선생의 실력에 놀랐다.


선생의 연구는 오오무라 교수뿐 아니라 와세다 대학에서 일본 근대사를 강의하는 미야타 세츠코 교수 등 일본의 양심적인 학자들에게 인정받았다. 그리고 그들은 조선을 침략했던 일본의 학자로서 반성의 뜻을 표시하면서 선생의 동지가 되었다.


선생의 연구는 비록 다섯 평 좁은 방 사과 궤짝에서 진행됐지만 일제 침략과 친일파를 연구하는 일본과 한국의 학자들에게 기폭제가 됐다.


▲ 임종국 선생의 결혼식 주례는 고려대 스승 조용만 교수가 섰다 ⓒ민족문제연구소


"오빠는 쌀이 떨어지는 것보다

원고지 떨어지는 것을

더 두려워했어요


"선생께서는 가난에 시달렸다고 했습니다."


"오빠가 고려대학교 다닐 때 유일한 외출복이 담뱃불에 구멍 난 바바리와 바지였는데 바지가 오래돼 얇아지면서 추위에 덜덜 떨었어요. 마침 꾸어준 돈을 받은 게 있어서 양복을 해드렸어요. 오빠에게 가장 잘한 게 있다면 옷을 해드린 것, 오빠 곁에서 도와드린 것, 마음의 동무가 되어 이야기 들어준 것이에요. 오오무라 교수님에게 보내는 편지 심부름도 제 몫이었어요.


가장 가슴 아픈 일은 올케가 조카(수연)를 낳았을 때였어요. 올케가 결혼반지를 빼주면서 전당포에 맡겨 쌀을 팔아달라고 했어요. 결혼반지를 그대로 두라 하고 쌀을 구해다 주었어요. 올케는 속이 깊었어요. 오빠가 속상해할까 봐 쌀이 떨어졌다고 말하지 못하고 제게 부탁한 거예요. 저와 올케는 시누이보다는 친구 같은 사이예요. (이연순 여사의 칠순이 9월 3일이라면서 초대했다. 남편을 민족의 제단에 바친 이 여사의 칠순잔치에 꼭 참석할 생각이다.)


오빠는 돈 만원도 꾸지 못해요. 그래서 올케가 꾸러 다녔는데 제가 국립 보훈원에 취직하면서 오빠 집에 갈 때마다 돈을 다 털어주었어요. 올케에게 돈이 필요하면 돈을 꾸러 다니지 말고 연락해라, 소액환으로 보내주겠다고 했어요. 오빠는 저를 속상하게 했어요. 쌀이 떨어질까 봐, 올케와 조카들이 굶을까 봐 노심초사했는데 오빠는 굶는 것보다 원고지가 떨어져 글을 쓰지 못하는 것을 더 두려워했어요."


"부친의 친일행적까지 기록한

<친일문학론>은 고발장 아닌

성찰을 촉구한 진실의 기록


"아버지는 최린(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3·1독립선언에 참여했다가 친일파로 돌아선 뒤 천도교 최고 지도자가 된 인물)의 수제자였는데 천도교가 친일로 돌아서면서 당수였던 아버지도 친일 노선을 따라가야 했어요.


아버지가 친일한 게 사실이지만 독립운동 자금을 댄 것도 사실이에요. 아버지는 겉으론 친일을 했지만 속으론 나라 찾는 일을 하는 이중생활을 하셨어요. 아버지는 오빠에게 반발하기보다는 역사의 죄를 지었으니 책임도 져야 한다고 말씀하셨어요."


<친일문학론>은 친일파를 규탄하려고 만든 고발장이 아니다. 친일역사에 대한 자기반성과 성찰을 촉구한 진실의 기록이다. 부친과 스승의 친일행적까지 그대로 기록한 것이 이를 증명한다. 일제 당시 신간회 활동과 동아일보 기자생활 그리고, 천도교 당수와 조선농민사 사장을 지낸 임문호는 내선일체를 강조하는 시국강연 등을 했다가 아들에 의해 <친일문학론>에 기록됐다. 자신의 친일행적을 책에 싣는 문제로 아들이 고민하자 임문호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빠지면 그 책은 죽은 책이다. 사실 그대로 써라. 그것이 네가 할 일이다. 나머지는 나의 몫이다. 책임질 일을 했으면 책임을 져야 한다. 대신 한 가지만 부탁하자. 섣불리 평가하지 말고 역사적 사실만 정확하게 기록해라."


"주례를 서준 조용만 교수의 친일행적도 <친일문학론>에 포함시켰습니다. 인간적 관계가 끊어질 일인데도 두 분의 관계가 좋았다고 들었습니다."


"조용만 선생님은 오빠에게 친일행적을 시인하면서 부끄럽다고 고백하셨어요. 많은 친일파들이 반발하고 따졌지만 조 선생님은 잘못을 시인하면서 오빠를 아껴주셨어요. 선생님께서는 역사 앞에선 잘못을 했지만 역사의 대의를 수긍한 점에선 훌륭하다고 생각해요.


오빠는 성격이 불같지만 역사를 기록할 때는 감정을 노출하지 않고 차분하게 대응하셨어요. 친일파와 분노하며 싸우는 것보다 더 무서운 방법 즉, 역사의 기록으로 심판하는 방법을 택하셨어요. 오빠는 데모도 하지 않으면서 사람들을 데모하게 만든 사람이에요."


▲ 요산재 시절의 임종국 선생은 외롭고 쓸쓸했다. ⓒ민족문제연구소


"가난한 오빠의 부탁

"연구비가 필요하니

나 좀 도와다오"


"오빠에게 연구비를 대주었다고 들었습니다."


"1984년이었어요. 오빠가 '연구비가 필요하니 나 좀 도와다오'라고 하셔서 400만 원을 드렸더니 그 돈을 가지고 서울에 자취방을 얻어 국립도서관에서 6개월간 자료를 찾았어요. 혼자서 감당하기 어렵기 때문에 휴학 중이었던 중학교 2학년 둘째 조카(연택)를 데리고 갔는데 올케는 요산재에서 기르는 돼지와 닭 등의 가축을 키워야 했기에 제가 반찬을 챙겨 올라갔어요.


이게 무슨 고생이냐며 반찬을 내놓으면 오빠는 웃기만 했어요. 자취방 같은 곳에서 신문지를 깔고 밥을 드시고, 먼지에 쌓인 자료를 뒤지느라 오빠 건강이 더 나빠졌어요. 자료 수집을 하지 않았다면 오빠는 몇 년을 더 살았을 거예요. 그런데도 오빠는 옳은 일이면 어떤 대가를 치르고서라도 해내는 집요한 성격에다 굶어 죽어도 타협하지 못하는 외곬 성격이었어요."


"말년의 오빠에 대해 들려주세요."


"오빠의 병세가 심해지면서 산 아래인 천안시 구성동으로 거처를 옮겼어요. 찾아가 보면 산소통에 의지해 숨을 쉬었는데 호흡 곤란이 심해지면서 얼굴이 퉁퉁 부었어요.

그런 오빠를 살리기 위해 올케가 산속으로 약초를 캐러 다녔어요. 돈이 있으면 장어를 고아드렸고 돈이 없으면 약초를 캐서 보신을 해주었어요. 오빠가 몇 년이라도 더 살 수 있었던 것은 올케의 지극정성 때문이었어요."


"나라 망친

이성계, 이완용, 이승만

정신 안 차리면

핵무기에 다 죽을 것"


"선생께서는 한반도가 핵무기 실험장이 되면 민족이 다 죽을 수 있다고 경고하셨습니다."


"요산재에 살 때였어요. 천안 시내를 다녀오신 오빠가 '이 놈의 백성은 먹고, 마시고, 놀고, 즐기는 것에 미쳐 있다. 작은 도시에 여관이 몇 개고, 노래방이 몇 개고, 술집이 몇 개인 줄 모르겠다!'면서 개탄스러워하셨어요.


그러면서 '일본 사람들은 책을 읽는데 한국 사람들은 책을 읽으면 큰일 나는 줄 안다. 책을 읽지 않고, 생각하지 않으면 개돼지가 된다. 정신 안 차리면 한반도가 핵무기 시험장이 될 수 있다. 일제 시절에는 차례차례 죽었지만 핵무기가 터지면 한민족 모두가 죽을 수 있다. 정신 똑바로 차리지 않으면 나라도 민족도 망한다. 정신을 차려야 한다!'며 안타까워하셨어요."


▲ 임종국 선생이 사랑했던 막내여동생 임경화 여사 ⓒ이아림


"이 백성이 먹고 마시고

놀고 즐기는 것에 미쳐 있다!


"역사에 대한 말씀도 남기셨지요."


"한민족은 원래 인심이 넉넉한 민족이었는데 일제에 의해 이 지경이 됐다면서 나라와 민족을 망친 인물로 이성계, 이완용, 이승만을 꼽았어요. 우리 민족이 위화도 회군을 하지 않고 그대로 요동정벌에 나섰다면 대륙의 기질을 가진 우리 민족은 웅대한 민족이 됐을 것인데 이성계가 반역하는 바람에 당파 싸움이나 하는 좀스러운 민족으로 변질되었다고 비판했어요.


친일파 이완용은 가렴주구로 번 재산을 지키기 위해 나라를 팔아먹고, 이승만은 독립운동 세력을 말살하고 친일파들이 순식간에 친미파로 둔갑해 득세하면서 나라와 민족이 어떻게 되든 나만 잘살면 된다는 망국의 풍조가 만연해졌다고 탄식하셨어요."


"친일파들이 득세하면서

나만 잘살면 된다는

망국의 풍조가 만연


"친일연구자 오빠의 삶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오빠는 자신과 가족을 돌보기보다 민족과 역사를 위해 사셨는데 힘들 때는 그렇게 살지 말았으면 했는데 돌이켜보면 오빠의 삶이 옳았어요. 오빠는 누군가 했어야 할 친일청산이라고 말씀하시면서 그 일을 내가해야 한다면서 목숨까지 바쳐가며 그 일을 하셨어요.


그런 오빠가 자랑스러워요. 오빠의 바람처럼 민족정기가 새로 태어났으면 좋겠어요.


"누군가 했어야 할 친일청산

목숨까지 바쳐가며

그 일을 해낸 오빠


7년 전, NHK와 인터뷰했는데 일본인 PD가 살기 힘들었을 텐데 어떻게 살았냐고 묻기에 '가난하게 살았지만 정신적으론 풍부하게 살았다. 지게에 나무를 지고 눈길을 내려오면서도 머릿속에선 차이콥스키의 협주곡이 들리고, 입으로는 구르몽의 시를 읊었다.


견디기 힘들었던 것은 물질의 빈곤이 아니라 정신과 영혼의 빈곤!'이라고 말해주었어요. 그 시절, 올케와 저는 힘들긴 했지만 자부심이 있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