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월 30일, 4월의 마지막에 회원님과 함께 서대문에 다녀왔습니다. 첫 번째 프로그램이라서 그런지 아주 많은 분들이 오신 건 아니었지만 환경부정의, 역사, 문화에 관심이 깊은 회원님들이 참여해 주셨습니다.  그날 우리의 발걸음을 인도해 주신 분은 도시문화해설가이시고 환경정의의 오랜 회원이신 윤경하 선생님이셨어요. 

  
(출발)서울역사박물관 앞 – 경희궁과 서대문 – 창덕여중 성벽 흔적 – 경교장 – 월암동 바위 – 홍난파 가옥 – 딜쿠샤 – 사직터널과 독립문 – 서대문형무소역사관 – 옥바라지 골목(구본장에서 주민과의 만남과 대화)
성벽의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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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대문 성벽의 옛 터, 현재 창덕여자중학교의 외벽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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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벽의 일부만 남아 있는 모습

이화여고 서문(西門)에서 오른쪽으로 나와서 농협중앙회와 이화외고 사이 골목길로 들어가면 담장 너머 공간이 나오는데, 이곳에서 보면 창덕여중 담장이 다시 나타납니다. 담장에는 ‘서대문 성벽의 옛터’라는 안내문이 붙어있는데요, 일제의 도시계획에 따라 성벽은 헐리고 성벽의 축대만 남았다는 내용이 기록돼 있습니다. 네모 반듯한 성돌로 보아 숙종 때 쌓은 성곽으로 추정된다고 하네요. 창덕여중 자리는 개화기에 프랑스 공사관이 있었던 곳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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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에 관심이 많은 이하윤 어린이도 열심히 듣습니다

경교장
버스정류장 이름으로만 들어왔던 경교장은 강북삼성병원 입구 쪽에 위치해 있었습니다. 경교장은 일제 강점기에 지어진 일본식 주택인데요, 일제 강점기의 금광업자 최창학의 별장이자 1945년 11월 4일부터 1949년까지 김구 선생님의 사저이자 공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청사였습니다. 실제로 1, 2층 걸쳐 전시를 하고 있었는데 김구 선생님의 잠자리는작은 편이었고 다다미 방으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김구 선생님은 그곳에서 총상을 입고 스러져 가셨는데 총알이 창문을 뚫고 지나간 흔적으로 아직도 볼 수가 있어서 마음이 저절로 숙연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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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알이 지나간 자리를 볼 수 있는 창문

월암동 바위
다음으로 간 곳은 월암동 글씨가 쓰여 있는 바위를 보러 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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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 월암동 바위 글씨 (오른쪽) 현재 공사 현장 때문에 글씨를 볼 수 없다

송월동은 1914년 송정동과 월암동이 합쳐져서 생긴 이름입니다. 월암동은 보름달처럼 생겨 월령바위, 달바위라 불렸다고 합니다. 이 글씨는 교남뉴타운 재개발 현장에 방치되어 있는 상황이라서 그곳에 찾아 가 본다고 해도 미세먼지가 가득할 뿐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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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난파 가옥

 

딜쿠샤로 가기 전, 홍난파 가옥은 반드시 지나치게 되어 있는데요. 이 집을 보고 있노라면 시간이 멈춘 듯 하고 홀린 듯 집안으로 들어설 것 같은 아름다움을 간직 한 곳이었어요. 여는 시간이 주로 주중 낮시간대다 보니 일을 하고 계시다면 휴가를 내서라도 언제 한 번 꼭 들려보세요^^

이상향, 행복한 마음의 ‘딜쿠샤’
딜쿠샤

딜쿠샤의 옛 모습과 현재 모습

딜쿠샤는 힌두어로 ‘이상향’, ‘행복한 마음’이라는 뜻을 지녔대요. 지금도 DILKUSHA 1923이라는 표지석(돌판)을 볼 수 있어요. 서울시 종로구 사직로2길 17에 위치한 딜쿠샤는 일제 강점기에 지어진 것으로써, 지상 2층, 지하 1층 규모의 서양식 주택이에요. 바깥벽은 붉은 벽돌 쌓기로 마감되어 있고, 창들은 아치형, 지붕은 박공 지붕으로 현재 슬레이트가 덮여 있습니다. 건립연도와 건축양식, 벽돌 사용 방법 등 당대의 건축양식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어 건축사적 가치가 높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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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집은 3.1운동을 전세계에 알린 금광엔지니어 겸 UPI 통신사 특파원인 알버트 테일러가 1923년에 집을 짓고 1942년 일본에 의해 강제 추방될 때까지 살던 곳인데요, 전쟁 피난민들이 살기도 했으며 저속득층이 강제로 점거하여 사용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사실 이 곳을 방문하면 눈앞에 펼쳐지는 광활한 땅은 이미 아파트가 광범위하게 세워질 준비를 하고 있고, 바로 앞 건물은 며칠 전에 완공이 된 꽤 가격이 나가보이는 집이 있어요. 어쩌면 이곳을 강제 점거하여 살던 분들 덕분에 이 소중한 역사적인 건물이 살아 남을 수 있지 않나..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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딜쿠샤 앞에 위치한 조선 권율 장군이 심은 것으로 알려진 420년 된 은행나무

너무 걸어다녀서 너무 힘든 나머지 앉아버렸어요. 참여하신 분들께도 앉으라고 권유했지만 앉지 않으시고… 그저 다들 당분이 필요했는지 하나 둘씩 과자를 꺼내 서로 나누어 먹으면서 딜쿠샤가 가지는 의미에 대해 함께 대화하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역사의 현장, 서대문형무소역사관
이 곳을 가기 전 독립문을 지나치게 되었는데요, 현재 있는 독립문은 실제로 있었던 자리에서 철거되었다가 다시 세워졌는데 개발광풍의 현장이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간 곳은 일제시대 때의 역사를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는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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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른쪽 사진을 보면 한 나무는 살아 있지만 그 옆에 있는 나무는 죽어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죽어 있는 그 나무는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사형수의 시신을 옮겨간 곳이었다고 하는데, 나무들도 그런 기운을 느끼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1907년에 무악재 아래에 감옥을 짓기 시작해서 1908년 12월에 서대문형무소를 개소, 당시의 이름은 경성감옥이었습니다. 3.1운동의 상징인 유관순 열사도 이 곳에서 혹독한 고문을 받고 옥사, 수많은 독립투사들의 가슴 아픈 근현대사를 겪으며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공간입니다. 이 서대문형무소는 1967년에 서울구치소로 이름을 바꾸었다가 1987년에는 서울구치소가 경기도 의왕시로 이전하면서 그 자리에 아파트를 건설하려다 시민들의 반대로 그 계획은 백지화가 되었다고 하네요. 1998년, 과거의 아픔과 역사를 교훈 삼고자 서대문형무소역사관으로 개관하였습니다.
하지만 온전히 보전해야 할 건물과 망루, 담장은 그 일부만 남아 있는 상태입니다.
옥바라지 골목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른 김구 어머니 곽낙원 여사는 옥바라지 골목에서 삯바느질을 하며 하루에 한두 끼 사식을 넣으며 생활했던 이 곳, 옥바라지 골목은 군부독재정권 시절 민주화인사의 가족들이 머물며 옥바라지를 했던 곳이었습니다.
이 곳은 소설가 박완서가 자란 곳으로도 잘 알려져 있는데요 박완서는 고된 셋방살이를 하면서 서울의 복닥복닥한 생활에 적응해 나갔고 박완서의 자전적 성장 소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를 썼습니다.

이 옥바라지 골목은 1930년대 집장사들이 지은 소규모 한옥 구조를 그대로 보존하다가 2000년대 초반 재개발이 추진돼, 지난 2016년 1월부터 철거가 시작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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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바라지 골목 철거 전과 후

안타깝게도, 문학과 역사적 가치가 충분히 있는 이 곳은 현재 최은아씨와 구본장여관 이길자 사장님만이 남아 힘겹게 싸우고 있는 중입니다. 그래도 반가운 것은 이 두분 뿐만 아니라 많은 이들이 중요한 곳이 사라진다는 점, 그 곳에 살고 있던 사람들이 쫓겨 나가야 한다는 점 때문에 함께 싸우고 계시다니 그나마 다행이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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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이 최은아씨, 오른쪽이 이길자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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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바라지 골목에서 마지막까지 남아 투쟁하고 계신 두 분과의 대화시간

 

우리는 구본장여관에서 옥바라지 골목의 상황, 왜 다른 사람들은 떠나야만 했는지, 그리고 현재 이 곳 뿐만 아니라 피해를 입고 자신이 평생 살아왔던 곳을 떠나야만 하는 여러 경우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이 곳에서 사시거나 여관을 운영하면서 살던 분들 중 이제는 헌집 주면 새집으로 보답할게..라는 이 말에 속았다며 뒤늦게 후회하시는 분들이 계시다는 말을 들으니 더욱 안타까움을 자아내었습니다. 두 분은 참으로 의연해 보이셨어요. 오히려 그 동안 이러한 사실을 잘 몰랐다는 점과 큰 힘이 되어 드리지 못한다는 점 때문에 이 곳에 계시던 분들은 가슴을 쥐었어요. 하지만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연대활동을 하는 사람들이 움직일 때 한 번이라도 더 움직이고, 또 이러한 사실을 외부로 알리는 것이 중요하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약 10km 정도 걸으면서 우리가 미처 알지 못했던 곳곳을 돌아다니면서 부정의하게 생태계나 사람이 다치는 경우를 너무 많이 접하면서 이러한 것에 더욱 관심을 두고 이슈가 있을 때마다 공론화 하고 대안을 만들어가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되었어요.

이미 두 집 말고는 다른 곳이 부서셔 내렸지만 이 곳이 문화적, 역사적, 그리고 인간적으로 다시 도시재생지역으로 살아나기를 바라봅니다. 그리고 힘 없는 이들이 공권력과 자본 앞에 눈물 짓는 일들은 시민들이 함께 막아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것은 저 사람 문제가 아닌 내 문제이고 우리의 문제이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