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문제연구소 2016-02-19 18:54:31




임헌영의 세계문학기행
<
격변기 문호들을 찾아 떠나다>

전세계 문학 현장을 25년 누빈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 소장의 새 연재 매주 만나는 세계 문학의 절정 “자유, 평화, 인도주의”



문학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오래된 질문을 <한겨레21>이 다시 묻는다. 야차 같은 정권의 그늘 아래 한반도 남쪽 민주주의는 갈수록 창백해지고 있다. 농민은 병실에 누워 있고, 노동자는 붉은 띠 두르고 하늘에 오른다. ‘이생망’(이번 생은 망했다)이라는 말이 넘쳐난다.


그런데도 문학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세상살이의 태반은 말글살이다. 사람들은 비정한 비언어의 세계에서 언어로 소통하고 언어로 환호하며 언어로 절규한다. 언어 없는 인간세를 상상할 수 없듯이, 언어의 힘을 불신하는 문학은 존재할 수 없다. 문학이 ‘겨울공화국’의 혹한을 견디고 봄날을 꿈꾸며 삶의 근육을 다지는 데 조금이라도 이바지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 문학비평가 임헌영(75·사진)의 세계문학기행 연재를 이번호부터 싣는 까닭이다.


연재는 일본의 두 형제 이야기로 시작해, 유일한 한국인 이미륵에서 마침표를 찍을 참이다. 전쟁과 역사, 민중의 저항, 침략과 제국주의 반대를 열쇳말 삼아 세계문학의 ‘절정’이 차례로 소개된다. 작품의 현장을 두루 돌아본 저자의 안내에 따라 독자들 또한 시대를 읽고 자신을 해석하며 타인과 공존하는 길을 찾을 수 있기를 기대한다. 연재는 매주 이어진다. _편집자

[연재] 1화 일본의 윤동주 일본의 톨스토이


[연재] 2화 춘원 이광수의 양부 일본의 괴벨스


조선의 모든 신문을 총독부 기관지로 만들었던 언론인 도쿠토미 소호


평화주의 작가 도쿠토미 로카가 등을 돌린 형 소호(1863~1957)는 진보적인 민권운동가였으나 청일전쟁 뒤 맺어진 시모노세키조약의 좌절을 보고 파시스트로 표변했다. 일본이 랴오둥반도와 대만, 펑후제도를 차지하는 등 엄청난 야욕을 챙기려던 이 조약에 러시아·프랑스·독일이 강력히 항의, 결국 일본은 랴오둥반도를 포기했다. 강대국 앞에서 소호는 약소국의 설움보다는 힘을 길러야 침략할 수 있다는 파시즘을 택했다.



일본의 4가지 불경죄 중 한 사람


‘일본의 괴벨스’ 도쿠토미 소호(왼쪽 위)와 그의 양자를 수락한 춘원 이광수. 위키피디아, 한겨레




그는 조선 초대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와 한때 막역했다. 공식 직함은 <경성일보> 감독이었지만, 조선 강제병탄 직후 모든 신문을 통폐합해 총독부 기관지로 만든 기획 입안자였다. 일본 <고쿠민신문> 사장이었기에 연간 2~4회 정도 조선에 들렀지만 총독의 은밀한 고문 격이었다.

일본이 여러 정보기관을 내각 직속 정보국으로 일원화한 건 1940년 12월6일. 정보국 제5부 제3과가 문학, 미술, 음악, 문예, 문화단체를 맡았다. 일본문학보국회(1942년 5월26일)와 대일본언론보국회의 초대 회장을 맡은 건 소호였고, 조선문인보국회(1943년 4월17일) 회장은 춘원 이광수였다. 대동아문학자대회도 여기서 집행했다(사쿠라모토 도미오, <일본문학보국회-대동아전쟁하의 문학자들>, 도쿄 아오기서점, 1995).


제2차 세계대전 중 일본에는 4가지 불경죄가 있었는데, 왕실과 도조 히데키, 군부 그리고 소호였다니 그 위력을 알 만하다.


김성수의 후원으로 두 번째 일본 유학에서 일시 귀국한 이광수는 심우섭(심훈의 맏형, <친일인명사전> 등재)의 소개로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에 ‘대구에서’(1916년 9월20~23일)라는 서간체 기행문을 연재했다. 명백히 친일의 수렁에 발을 담근 첫 작품이다.


대구에 도착해보니 온통 ‘대죄’를 범한 ‘강도 사건’이 화제였다. 어떻게 하면 그들을 순치시켜 조선을 평안하게 만들까를 총독부에 건의한 것이 이 기행문이다.


그 ‘범인들’이란 “1910년대의 대표적인 국내 혁명단체였던 대한광복회 회원”이었다. 그들은 “비밀·폭동·암살·명령을 행동강령으로 삼고 군자금을 조달하여 국내의 혁명 기지를 확보하는 한편 만주의 독립군 기지에서 혁명군을 양성함으로써 적시에 폭동으로 독립을 쟁취할 계획”이었다. 대구에서 부호들의 집을 습격하려던 김진우, 김진만, 정운일, 최병규는 7~8년의 옥고를 치렀고, 다 독립유공자로 추서된 인물들이다(<독립유공자 공훈록> 제7권). 그들이 표적 삼은 이 지역의 이름난 세 부호 정재학, 이장우, 서우순 중 앞의 둘은 <친일인명사전>에 올라 있다.


춘원과 해방 직전까지 깊은 정 쌓아


당대의 천재라는 이광수는 그들을 도쿄에서 2~3년만 교육받게 하면 허황된 꿈(독립)에서 깨어날 것이라고 썼다. 이는 유학으로 독립운동가가 된 분들과, 진리 탐구의 학문에 대한 모독으로 친일파는 다 똑똑했다는 논리의 원조 격이다.


이 글은 약발 좋게 식민지 조선 언론의 현지 사령탑이었던 <경성일보>(일어판 총독부 기관지) 사장 아베 미츠이에(소호와 같은 규슈 출신으로 친구이자 그의 심복)를 감동시켰다. 이후 <매일신보>는 이광수의 대변지인 양 그의 글이 줄줄이 실렸는데, <동경잡신>(1916)에서 권장할 만한 책 7권을 소개하면서 <소호문선>(蘇峰文選, 민유샤, 1915)을 추천했다.


조선 병탄 직후 소호는 <경성일보>에 실린 ‘조선 통치의 요의’(1910년 10월)에서 조선이 식민지가 된 불가피성, 언론 통제의 당위성, 조선인의 약점 등을 열거해, 무단통치만이 해결책이라고 단언했다. 다른 여러 글에서 그는 식민지 발전론과 일선동조론 등 친일파들이 할 모범답안을 미리 제시해주었다(정일성, <일본 군국주의의 괴벨스 도쿠토미 소호>, 지식산업사, 2005).


춘원은 소호가 일본 최고의 언론인으로 20년간 웅장하고 막힘이 없으며 굳세고 튼튼한 문장으로 일본 문화에 다대한 공헌을 했다고 찬양했다.


터놓고 충의를 보였기에 ‘괴벨스’의 회답도 빨랐다. 소설 <무정> 연재가 끝나자(1917년 6월14일) <매일신보>는 바로 총독부 통치 5년 기념 민정 시찰기를 춘원에게 맡겼다. 그 시찰기인 ‘5도 답파 여행’(1917)에서 “조선인 기자로는 처음이라 하여 회사나 총독부로부터도 각지 관헌에 통첩을 보내, 가는 곳마다 실로 면목이 없을 정도의 성대한 환영”을 받은지라 이광수는 “반도의 싹트는 삼림이 날로 성하듯이 신시대의 새 생명은 시시로 성장한다”라고 총독 통치를 충심으로 찬양했겠다.



▲ 도쿠토미 형제의 옛집과 붓·벼루. 임헌영 제공


“내 아들이 되어 문장보국으로 나아가게”


충남과 전남·북을 돌던 이광수는 아베와 함께 소호의 도착(1917년 8월)에 맞춰 부산 부두로 환영 나가 ‘괴벨스’와의 첫 만남이 이뤄졌다. 이후 둘은 8·15까지 깊은 정과 연을 쌓았는데, 소호가 춘원에게 아들이 되어달라고 한 건 1936년이었다.


“자네도 내 아들이 되어주게. 내 조선의 아들이 되어주게. 일본과 조선은 하나가 되지 않으면 안 되네. 크게 되어주게. 알겠나”라면서, “자네는 일생을 문장으로 나아가게. 문장보국 말일세”라고도 당부했다.


춘원이 이에 감읍한 것은 1940년 2월12일, 가야마 미쓰로(香山光郞)라는 창씨개명을 경성부 호적계에 신고한 뒤였다. 소호에게 보낸 편지에서 가야마는 이렇게 썼다.


“‘내 자식이 되어다오’라는 선생의 말씀을 들은 지 5년의 세월이 지난 오늘에야 비로소 선생의 간곡한 부탁을 따르게 되었습니다. (중략) 이제부터 조선의 올바른 민족운동은 황민화의 한길만이 있을 뿐입니다. 다행히 옛 역사와 문화, 그리고 혈액의 교류는 인식상이든 정치상이든 두 민족의 동일국민화를 자연 복귀로 생각게 하여 실로 홀가분한 느낌마저 듭니다.”(정일성, 앞의 책, 81~82쪽. 재인용. 이 편지는 단국대 김원모 교수가 고서점에서 입수)


소호 같은 인간에게 패배는 없어서 끝까지 무조건 항복을 거부하며, 천황에게 비상대권을 넘기자고 획책했으나 좌절당했다. 그는 A급 전범 용의자였으나 고령이라 제외됐다. 아베 같은 정치인은 이래서 재생됐다.


임헌영 문학비평가·민족문제연구소 소장

<2016-02-16> 한겨레21 제1099호

☞기사원문: 춘원 이광수의 양부 일본의 괴벨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