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탐사저널리즘센터/뉴스타파는 시청자와 독자 여러분이 보다 객관적인 시선으로 뉴스타파 콘텐츠를 접하고 평가하실 수 있도록 자문위원 옴부즈맨 논평 코너를 신설했습니다. 옴부즈맨 논평은 독립적인 시각으로 뉴스타파 뉴스와 프로그램을 감시하고, 비판적 조언을 할 제도적 장치가 될 것입니다. 뉴스타파 제작진은 3만 5천여 회원들의 후원으로 제작되는 뉴스타파가 이미 우리 사회의 공적 자산이 됐음을 인식하고 옴부즈맨 논평을 오로지 공공의 이익을 위한 콘텐츠 취재, 제작의 길잡이로 삼겠습니다. 옴부즈맨 논평은 한국탐사저널리즘/뉴스타파의 외부 자문위원 가운데 15분이 담당합니다. 이번 첫 논평은 원용진 교수(서강대 커뮤니케이션학부)가 대표 집필하셨고 이범수 동아대학교 교수, 최경진 대구 카톨릭대학 교수, 안주식 한국프로듀서연합회장이 참여하셨습니다. 옴부즈맨 논평은 매달 한 차례 뉴스타파 홈페이지에 게재됩니다. |
뉴스는 기본적으로 시간 족속이다. 시간에 맞춰 지면이나 화면에 얼굴을 내밀어야 존재 가치가 산다. 남보다 좀 빨리 내밀면 속보나 특종이라는 명예까지 얻으니 시간을 염색체처럼 껴안고 사는 존재랄 수 밖에. 뉴스의 길이 또한 시간 관련성 요소다. 중한 소식일수록 길게, 덜 중할수록 짧게 다룬다. 중한 것은 시간을 두고 며칠 씩 다루기도 한다. 뉴스 수용자들은 그 길이나 시간 반복을 보고 사건의 중함을 알게 되니 시간은 뉴스의 ‘가오’이기도 하다. 뉴스는 그 때 그 때 적절성(timeliness)으로 그 가치를 평가받기도 한다. 혹은 반대로 적절한 때에 해야 할 뉴스를 포기하기도 하면서 시간을 비켜가고, 전혀 적절하지 않은 소식을 실어 시간을 때우기도 한다. 이렇게 말하나 저렇게 말하나 뉴스에서 시간 개념을 떼낼 수 없다. 뉴스의 미장센에 시계가 등장하거나 디지털 시간 숫자가 떡하니 버티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뉴스타파>가 뉴스 만드는 곳인바 시간과 무관할 수가 없다. 다양한 방식으로 시간과 관계를 맺고 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뉴스타파>가 맺는 시간과의 관계성은 다소 이질적이란 점이다. 기존 뉴스와는 달리 특정 시간을 맞추는 작업을 하지 않는다. 뉴스 길이도 뉴스방송의 표준과 거리가 있다. <뉴스타파> 홈페이지에 오른 뉴스의 길이는 들쑥날쑥 제 멋 대로다. 스스로 뉴스가 현 상황과 얼마나 적절성을 갖고 있는 지를 설명하는 장면에 이르면 <뉴스타파>는 시간놀이의 화신과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그 때 그 때 필요한 것을 전할 뿐 아니라 필요한지 몰랐던 사안을 지금 이 때 반드시 알아야 한다며 무지를 깨며 얼굴을 내민다. <뉴스타파>는 지금까지 뉴스 일반이 시간과 맺어온 관계를 역행하는 역관계로 살아가고 있는 셈이다. 온 사회가 거꾸로 돌고 있음을 안타까워하며 탄생한 <뉴스타파>가 그렇게 거꾸로 가는 시간적 삶을 사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더 많은 시간 혁명을
지난 10월 한달 동안의 <뉴스타파> 제작 프로그램을 평하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이다. 평을 열면서 시간을 앞에 내세운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그 첫째는 시간에 대한 고민이 더 있으면 어떨까 하는 기대 탓이다. 시간을 거슬러가고 기존 시간 관행을 역행하고 있긴 하지만 그것만으로 충분히 창의적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관행을 거스르는 역관행 조차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모르는 바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지금 정도의 역관행을 <뉴스타파>의 창의성이라 이름붙이고 싶진 않다. <뉴스타파>도 그를 간파하고 있었다. <타파스>를 통해 자신들의 역관행과도 차이나는 리듬을 구사하고 스피드도 새롭게 조율하고 있었다. <김진혁의 5 Minutes> 와 함께 <뉴스타파>가 독창적인 시간성을 가져보겠다는 취지의 징후로 읽어보려 한다. 이제 문제는 그 고민을 프로그램 전체로 어떻게 이전시켜 볼 것인가 하는 점이다. 이는 예전엔 심각하게 고려해볼 필요가 없는 고민 의제였다. 주요 방송사 저널리즘의 신뢰위기와 동시에 찾아온 디지털 시대에 부각된 의제다. 이는 한국 저널리즘 모두가 동시에 맞닥뜨린 운명적 사건이다. 누구든 저널리즘의 미래가 위기라고 진정으로 생각하는 쪽에서 풀어야 할 숙명적 과제다. 키작은 <뉴스타파>에 그 짐이 간다고 투덜거릴 일은 아니다. 시간과 관련된 실험성.
시간을 앞세운 두 번째 이유는 <뉴스타파> 조직과의 관련성 탓이다. <뉴스타파>는 다양한 배경을 가진 기자와 PD가 모여 형성된 조직이다. 뉴스룸 구성의 이상형에 대한 언설은 없다. 뉴스룸이 과거와는 다른 로직을 가져야 하고, 새롭게 실험하며 조직 관행을 떨쳐야 한다는 정도가 답이 될 뿐이다. 새로운 뉴스 시간 형식을 가져야 하듯이 조직 또한 늘 새롭게 진화되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뉴스타파>는 조직과 관련한 한 장점과 단점을 모두 갖추고 있다. 이질적이어서 서로 부딪치며 새로운 조직문화를 만들 수 있다는 장점이 있는 반면 그 부딪침이 잦을 수 있고 그로 인해 조직 피로감이 생길 우려가 있는 단점도 있다. <뉴스타파>가 닮고자 하는 뉴스 조직인 <ProPublica>는 조직 내 각 부서가 비교적 시간적 균질성을 가진다는 특성이 있다. 약간씩의 차이가 있지만 보도 방식에 있어 어느 한 영역에 크게 쏠림이 없다는 특성을 갖는다. 데이터 부서는 심층보도 부서에 비해 포스팅의 숫자는 적지만 꾸준하다는 점에서는 눈여겨 볼만하다. 애초 조직이 다양한 시도를 꾀했지만 시간이 흐름에 따라 시들해진 <뉴스타파>와는 차이가 있다. 가장 잘 하는 중심성이 필요하긴 하겠지만 그 중심성이 타 영역을 압도하여 배제하는 효과를 내서는 안 된다. 그런 점에서 조직이 시간적 지속성을 유지하며 다양한 실험을 존중해주는 습속을 유지할 필요가 있다. 조직의 시간적 꾸준함.
시간 이야기를 한 세번째 이유. <뉴스타파>는 전통적 저널리즘 분류에 따르면 정치, 경제 영역에 대한 심층 보도가 많다. 지난 10월 한 달치 보도에서도 그런 경향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정치, 경제 영역에서 생긴 문제가 시간이 흐르면 정치인들이 목놓아 이야기하는 민생의 문제로 바뀌게 된다. 추상의 영역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구체의 영역으로 다가 가는 것이다. 추상에서 구체로 즉 정치, 경제에서 민생의 문제로 말이다. 10월의 뉴스에서 추상의 문제를 시간의 흐름에 따라 재구성하면서 구체로 넘어온 보도 하나가 눈에 띄었다. 10월 8일 정재원 기자가 보도한 “다위과 골리앗 싸움에 구경꾼 정부” 편이 그것이다. 실제 상권에서 발생한 변동을 시간의 흐름을 따라가며 그래픽으로 일목요연하게 정리해냈다. 제목에 나와 있듯이 정치 영역에서 태만을 다그치는 보도이지만 그로 인해 구체적 결과가 어떻게 드러났는지를 가감 없이 잘 보여주고 있다. 심층성이란 공시적으로 구조적 모순을 깊이 파는 것임과 동시에 통시적으로 구조적 모순이 가져온 일상에서의 폐해를 보여주는 방식이라 생각한다. 공시적 심층성에 통시적 심층성이 보태지면서 이른바 ‘양겹 심층보도’로 전환된 것으로 짐작한다. 심층성에 시간성 보태기.
시간의 타파
뉴스도 롱테일 효과를 누릴 수 있을까. 지금같이 검색을 통해 뉴스를 택하고, 관련 사건이 있을 때 마다 지난 뉴스를 꺼내 되씹는 인터넷 시대엔 뉴스의 장수(longevity)가 가능해진다. 뉴스의 생명력이 무한해질 수도 있다는 말이다. 다시 보는 뉴스가 아니라 뉴스는 언제나 새로운 것, 즉 진짜 News가 된다. 앞의 사건들을 잊지 않고 그에 지속적으로 생명력을 불어넣는 후속 뉴스를 제공하는 <뉴스타파>가 롱테일 법칙의 최대 수혜자가 될 것임을 의심치 않는다. 2차 간첩 사건을 푸는 열쇠로 1차 간첩 사건의 뉴스가 활약하고, 임금피크제 홍보가 프로파간다였음을 폭로하러 앞선 뉴스가 레퍼런스로 붙는 한 판 뉴스쇼를 <뉴스타파>가 벌이고 있다. 10월의 프로그램들은 롱테일 법칙의 모범을 재연하는 듯 보였다. 분절적으로만 대하던 뉴스를 한 달 치로 묶음을 해 대하니 더욱 그래 보였다. <뉴스타파>의 끄트머리의 말, 타파는 곧 해체를 의미한다. 타파와 해체는 파괴를 의미하진 않는다. 부수고 다시 짓는 이중적 작업이다. 새롭게 등장하는 뉴스의 플랫폼들은 뉴스가 전과는 다르게 시간을 다루며, 전혀 새로운 시간을 살아갈 것을 요청한다. <뉴스타파>가 그 퍼포먼스의 주인공, 정명이길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