캠핑카 안에서 거리 청소년들의 미래와 만나다
한빛청소년대안센터 캠핑카 이동상담 현장 이야기
한빛청소년대안센터 이동상담 캠핑카
땅거미가 짙게 깔린 저녁, 희미한 가로등이 드문드문 서있는 서울 송파구 문정공원에 유난히 밟은 빛이 시선을 잡아끈다. 가까이 다가서니 아담한 크기의 캠핑카 주위로 교복을 입은 아이들의 움직임이 분주하다. 몇몇은 익숙한 듯 라면 물을 끓이고, 또 몇몇은 달뜬 표정으로 재잘거리는 모습이 마치 캠핑이라도 나온 것 같다. 아이들 곁에 노란색 조끼를 입은 어른들이 없었다면 도심 속 캠핑장이라고 단단히 오해했을지도 모른다.
캠핑카의 정체는 한빛청소년대안센터가 운영하는 청소년 이동상담소다. 낯선 어른과의 대화에 거부감을 느끼는 아이들을 위해 호기심을 자극하는 캠핑카 안에서 상담을 진행하고 있다. 수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어둑한 밤이 되면 어김없이 캠핑카를 몰고 거리 청소년들의 아지트로 찾아간다.
차 한 대가 무슨 역할을 할까 싶지만, 영화나 드라마에서나 보던 캠핑카를 직접 마주한 아이들은 눈빛을 반짝이며 조금씩 거리를 좁혀온다. 듬성듬성 설치된 야외 테이블에서 알록달록 팔찌를 만들며 자연스레 고민을 털어놓기도 하고, 아늑한 캠핑카 안에서 라면으로 허기를 달래며 속 깊은 이야기를 꺼내기도 한다. 집 대신 밤거리를 헤매는 청소년들에게 캠핑카는 얼어붙은 몸과 마음을 녹일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 되어주고 있다.
아이들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마을 어른들
캠핑카 이동상담소가 아무리 제 역할을 잘해내고 있어도 물리적인 한계는 여전히 고민거리다. 일주일에 몇 번 한정된 장소를 찾아가는 정도로는 거리의 아이들을 모두 보듬기 어렵다. 그래서 시작한 것이 바로 지역민을 대상으로 청소년 상담사를 양성하는 사업이다. 캠핑카는 물론이고, 캠핑카가 진입하지 못하는 마을 깊숙한 곳에서도 일상적으로 아이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주는 어른들을 늘려나가기 위해서다.
한 아이를 키우려면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말처럼 아이들의 곁을 지켜주는 어른들. 노란색 조끼를 입은, 한빛청소년대안센터 캠핑카 이동상담소의 상담자원봉사자들이다.
김연주(33세) 씨는 우연히 퇴근길에 캠핑카 이동상담 현장을 목격한 후 올해 초부터 상담자원봉사자로 매주 수요일 이곳 문정공원에서 거리 청소년들을 만나고 있다.
학교 상담교사가 돼서 아이들과 더 가까운 곳에서 더 많은 도움을 주고 싶다는 김연주 봉사자
“주로 진로 이야기를 많이 해요. 어느 정도 친해지면 이성친구 고민도 털어놓고요. 그런데 아무래도 처음엔 친구들과 무리지어 상담을 진행하는 경우가 많다 보니 속 깊은 이야기를 꺼내기가 쉽지 않은 것 같아요. 하루는 고2 여학생 3명이 찾아왔는데 일상적인 대화만 하고 헤어졌어요. 그런데 며칠 후 그중 한 명에게 카톡 메시지가 온 거예요. 그때는 친구들이 있어서 솔직하게 말하지 못했다며 도와달라고 하더군요. 밤새 대화를 나눈 후에 이제 길이 보이는 것 같다고, 희망이 생겼다고 말하는데 정말 감동을 많이 받았어요. 그때 이후로 다짐했죠. 지금 당장은 이 친구에게 도움이 되지 못할 수도 있지만, 정말 힘든 순간에 의지할 수 있는 어른이 되어주자고 말이에요.”
김연주 씨는 올해 8월 직장에 사표를 던졌다. 현재 대학원 진학을 준비하며 새로운 미래를 그리고 있는 중이다. 청년실업이 심각한 요즘 이런 과감한 결단을 내린 데는 캠핑카 상담자원봉사 활동이 적지 않은 역할을 했다.
“대학원에서 사무실장으로 일했어요. 안정적인 직장이죠.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어릴 적 꿈이 계속 저를 괴롭히더라고요. 중학교 2학년 때 많이 힘들었거든요. 늘 가출과 자살을 생각했던 것 같아요. 어른이 되면 나처럼 마음이 아픈 아이들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겠다고 마음먹었는데, 경제적인 문제도 있고 해서 차일피일 미뤄왔죠. 그러다 2년 전에 용기를 내서 심리상담을 공부하고 작년에 청소년 상담사 자격을 땄어요.
그 즈음 캠핑카 이동상담소를 알게 된 거예요. 처음엔 잘할 수 있을까 걱정이 많았는데, 아이들을 만날수록 깊은 확신이 생기더라고요. 학교 상담교사가 돼서 아이들과 더 가까운 곳에서 더 많은 도움을 주고 싶다는 새로운 목표도 생겼고요. 앞으로 공부도 열심히 하고 현장 경험도 성실히 쌓아서 더 많은 청소년들에게 힘이 되어주고 싶어요.”
문제 청소년? 어른들 무관심이 가장 큰 원인
오형근 씨는 캠핑카를 찾는 아이들에게 진로 상담 전문가로 통한다. 올해 서른이라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다양한 직업 경험을 가지고 있어서다.
학창시절 10년간 육상선수로 활동한 그는 공부에 뜻이 없어 고등학교 졸업과 동시에 직업군인이 됐다. 4년3개월 만에 전역하고 일 년 정도 막노동 생활을 했다. 이후 군인 경력을 살려 대기업 보안회사에 들어갔고, 얼마 후 다른 회사로 옮겨 제조 업무를 맡았다. 직장생활이 지겨워질 즈음 장사를 시작했다가 7개월 만에 정리하고 다시 보안회사에 입사했다. 이후 1년6개월 정도 보호관찰소에서 청소년 보호관찰 보조업무를 했고, 현재 법원 공무원으로 재직 중이다. 대부분의 직업군을 두루 경험한 셈이다.
마음 둘 곳이 없어 거리를 방황하는 아이들을 직접 찾아가서 말을 걸어주고 싶다는 오형근 봉사자
“요즘 청소년들에게 나중에 어떤 일을 하고 싶으냐고 물어보면 대개 모르겠다고 말해요. 몇몇은 무조건 돈을 많이 벌고 싶다고 하고요. 자신의 미래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본 아이들이 거의 없더라고요. 그런 친구들에게 도움을 주고 싶어서 상담봉사를 시작하게 됐어요. 또래에 비해 다양한 업종에서 일한 경험이 아이들에게 현실적인 조언이 될 수도 있고, 또 저처럼 꿈이 없어서 먼 길을 돌아오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도 있고요. 최근에 상담한 아이도 하고 싶은 것이 없어서 고민이 많았는데 다행히 이야기를 나누면서 큰 방향을 찾아가더라고요. 저로 인해 미래에 대한 꿈이 생기는 아이들을 보면 정말 기분이 좋고 큰 보람을 느끼죠.”
꿈이 생긴 건 비단 아이들만이 아니다. 캠핑카 상담봉사를 통해 거리 청소년들의 미래를 설계해주면서 오형근 씨에게도 새로운 계획이 생겼다. 청소년들의 경우 재판을 받기 전에 가정환경과 친구관계 등 주변 상황을 조사하는 과정을 거치게 되는데, 이를 담당하는 공무원직에 다시 도전하기로 한 것이다. 그는 요즘 낮에는 법원에서 일하고, 밤에는 사회복지학 공부와 거리 상담으로 연일 강행군이다. 집에 들어가자마자 지쳐 쓰러질 때도 종종 있지만, 요즘처럼 마음이 가득 채워진 때도 없는 것 같다.
“아이들이 거리로 나오는 이유는 하나에요. 관심을 가져주는 어른이 없어서죠. 보호관찰소 때도 그렇고 지금도 법원에 있으면서 범죄에 연루된 청소년들을 접하게 되는데, 어릴 때부터 혼자 방치된 경우가 많더라고요. 캠핑카 이동상담 활동이 꼭 필요한 건 그래서예요. 마음 둘 곳이 없어 거리를 방황하는 아이들을 직접 찾아가서 말을 걸어주고 함께 놀아주며 관심을 가져주는 활동이 많지 않으니까요. 더는 어른들의 잘못으로 아이들이 어긋난 길을 걷지 않도록 거리의 청소년들에게 따뜻한 관심을 가져줬으면 좋겠어요.”
숨요 변화사업국 사업배분팀│전서영
아이들 스스로 성장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꿈꾸는 다음세대' 영역을 담당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