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발전소 정치기사 모니터링팀에서 프레시안에 <정치 기사 뒤집어보기>를 연재합니다.

<정치 기사 뒤집어보기>는 정치기사 모니터링 팀원들의 문제의식을 시민들과 공유하며, 앞으로 한국 정치 보도를 어떻게 보아야 할 지에 대해 정치기사 모니터링 팀의 의견을 제시하는 연재글입니다.

아래 글은 전형우 팀원님이 작성해주신 <정쟁만 일삼는 ‘갈등유발자들’?> 입니다. 프레시안에 게시된 글에서 수정된 내용이 있어 공유합니다.

<정치 기사 뒤집어보기>는 앞으로 매주 화요일, 목요일 총 11회에 걸쳐 게시되오니, 관심 갖고 읽어주시길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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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쟁만 일삼는 ‘갈등유발자들’?

전형우 정치발전소 실행위원 [email protected]

정쟁과 갈등은 나쁜 것일까

“민생국감서 정쟁국감으로 변질 – 포털·노동개혁 등 이념논쟁 가열”(국민일보 9월 10일자)
“증인채택·정쟁에다 마음도 ‘콩밭’…1차 국감 ‘낙제점’”(YTN 9월 22일자)
“굵직한 ‘한방’ 없이 부실ㆍ정쟁으로 얼룩진 전반기 국감”(헤럴드경제 9월 23일자)
국정감사를 다룬 기사들의 제목을 살펴보면 국회를 불필요한 갈등을 일삼는 곳으로 보는 시각이 나타난다. 국회의원이 정부와 기업의 비리를 조사하는 과정을 정쟁으로 묘사한다. 국감뿐만 아니라 사회가 나아갈 방향을 둘러싼 중요한 논의가 이뤄질 때마다 이러한 시각은 계속된다.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는 “노동개혁이 정쟁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될 것”이라 말했다. 정부와 여당, 많은 언론이 갈등을 사라져야 할 것으로 바라본다. 출처 : 연합뉴스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는 “노동개혁이 정쟁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될 것”이라 말했다. 정부와 여당, 많은 언론이 갈등을 사라져야 할 것으로 바라본다. 출처 : 연합뉴스

“노동개혁은 정쟁이나 흥정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가 9월 15일 최고위원회의에서 한 말이다. 노동개혁 법안의 국회 제출을 앞두고 야당이 법안 통과를 반대할 것을 우려해서다. 여기에는 정부가 추진하는 것은 국가 경제의 미래를 위한 개혁이고, 이에 반대하는 야당과 노조는 정쟁과 갈등을 일으키는 대상으로 보는 시각이 담겨있다. 다수의 언론 또한 김무성 대표의 시각과 다르지 않게 정치를 바라본다.

“野, 노동 개혁도 ‘다른 이슈 끼워넣기’로 훼방 놓으려 하나”(조선일보 8월 1일자) “’노동 개혁’ 받아들인 한국노총, 이제 국회가 和答해야”(조선일보 9월 15일자) “한국노총, 노사정 대타협 진통 끝 최종 승인…금속노련 위원장 분신 시도로 한때 파행”(조선일보 9월 14일자)
제목들에서 대타협과 통합의 주체인 정부 여당과 ‘갈등유발자’ 야당, 노조의 대립이 선명하게 나타난다. 정부와 보수 언론은 갈등의 대립점에 민생을 위치시킨다. 정치인들이 민생과 경제 살리기에는 안중에도 없고 각자 정치적 이익을 앞세워 갈등을 불러온다는 식이다.

정치학자 샤츠슈나이더의 은 정치가 갈등을 어떻게 다루어야하는지에 대해 설명한다.

정치학자 샤츠슈나이더의 <절반의 인민주권>은 정치가 갈등을 어떻게 다루어야하는지에 대해 설명한다.

국회에서 벌어지는 여야의 ‘정쟁’은 ‘전쟁’에 비유될 만큼 심각한 문제일까. 또한 국회의 정쟁과 갈등이 국민에게는 무의미한 일일까. 국회의원의 역할은 국회 안에서 자신을 지지하는 이들을 위해 대신 싸워주는 일이기도 하다. 갈등을 부정적으로 인식하는 시각은 정당과 의회, 민주주의 자체에 대한 훼손으로 연결되기도 한다. 현대민주주의는 다양한 사적 이익들의 갈등을 인정하는 것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박상훈 정치발전소 학교장은 그의 저서 <정당의 발견>에서 정당(party)의 어원은 부분을 뜻하는 ‘part’에서 왔다고 말한다. 국가의 전체 이익만을 말하던 근대 이전의 시대에서 시민들의 다양성과 부분적 이익을 인정하면서 정당과 민주주의가 정착되었다는 것이다. 근대 이전에는 사적 이익을 위해 무리를 짓는 일에 대해 ‘붕당, 파당’등의 이름을 붙여 불온하고 나쁜 것으로 취급했다.

시민이 스스로의 이익을 당당히 요구하고 조직화된 정당을 통해 경쟁하는 제도가 현대의 민주주의라고 할 수 있다. 다양한 사익이 정치제도 안에서 경쟁하여 궁극적으로는 공익에 가닿을 수 있다는 믿음, 다원주의에 대한 믿음이 정당정치를 만들었다. 정치학자 샤츠슈나이더는 저서 <절반의 인민주권>에서 갈등은 없앨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정치의 관건은 갈등의 제거가 아니라 갈등의 완화와 조절이라는 것이다. ‘정치기사 모니터링팀’이 읽은 샤츠슈나이더의 <절반의 인민주권>을 통해 언론이 갈등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알아보려 한다. 샤츠슈나이더의 이 책은 정당론의 고전이지만, 한국의 언론에 대입해도 잘 맞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가장 중요한 갈등을 다뤄야
각자가 발을 딛고 선 환경과 이익이 다르기 때문에 갈등은 사라지지 않는다. 샤츠슈나이더는 정당의 역할이 여러 가지 갈등에 우선순위를 부여해서 가장 중요한 갈등을 가지고 싸우는 일이라고 보았다. 언론의 역할 또한 가장 중요한 갈등을 선택하고 공론장으로 가져와서 시민사회가 나아가야할 방향을 정하도록 돕는데 있다. 언론은 갈등을 불필요한 것으로 보지 않고 어떤 갈등이 사회적으로 가장 중요한지 고민해야할 필요가 있다.

언론 내부에서도 변화는 일어나고 있다. 머니투데이가 만든 정치전문 매체 ‘the300’은 기존의 정치기사들과는 달리 국회에서 일어나는 갈등을 인정하고 어떤 갈등인지 자세히 다룬다. 개별 국회의원의 특징에 대한 소개와 상임위에서 논의되는 정책과 법안을 설명하는 보도가 주를 이룬다. 최근에는 국정감사를 ‘부실국감’, ‘정쟁국감’으로 표현한 다른 언론들과 달리 국감이 어떤 성과를 얻었는지 보여주었다. (“[국감 중간결산]이래도 불량국감? 국감 성과 ’10선’” 링크 : http://the300.mt.co.kr/newsView.html?no=2015092316477686049) 이를 통해 the300은 독자에게 정치혐오를 불러일으키기보다 정치의 역할을 보여주려고 노력한다. 다만 쏟아지는 법안과 정책을 커버하려고 하다 보니 독자입장에서는 어떤 것이 가장 중요한 갈등인지 명확하게 보이지 않는 점이 조금 아쉽다. ‘대중의 권력을 사소한 문제들에 사용함으로써 이를 낭비하는 일’을 막는 것이 민주주의 정치에서 중요하다는 샤츠슈나이더의 말을 되짚어 볼 만하다. 생계가 바빠서 모든 사안에 대해 전문가가 될 수 없는 시민들에게 어떤 이슈가 꼭 알아야 하는지 짚어주는 언론의 역할도 더 녹여낼 필요가 있어 보인다.

‘the300’이 국회의 갈등에 대해 자세히, 긍정적으로 다루는 실험을 하고 있다면 JTBC 뉴스룸은 시민에게 어떤 갈등이 가장 중요한 것인지 선택하고 집중하는데 힘을 쏟고 있다. 기존의 언론은 그 날에 일어난 이슈를 종합적으로 다루려고 노력했다. 방송 뉴스 또한 1분30초의 짧은 리포트를 통해 다양한 사건을 담았다. JTBC 뉴스룸은 이러한 통념을 깨고 한 리포트에 3~4분의 긴 시간을 투입하고, 하나의 주제에 여러 개의 리포트로 다루기 시작했다. JTBC 뉴스의 이러한 실험은 갈등에 우선순위를 부여해 시민에게 중요한 정보를 차등적으로 제공하는 언론의 좋은 예라고 할 수 있다. <절반의 인민주권>에 따르면 중요한 갈등을 중심으로 사회적 토론이 이루어져야 서로 이익이 다른 세력도 타협의 여지가 있고, 오히려 사회적 적대감이 줄어드는 결과를 가져온다.

갈등에 대한 부정은 정치에 대한 부정
샤츠슈나이더의 관점으로 볼 때 언론들이 보이는 갈등에 대한 부정적 태도는 현실적이지도 않으며, 현상 유지에 도움을 주는 편향성을 가지고 있다. 의회 안에서 마땅히 토론하고 때로는 격한 논쟁을 통해 다뤄야 할 사안에 대해 언론이 마치 불필요한 싸움을 하는 식으로 보도한다면, 이득을 보는 쪽은 한 방향으로 정책을 밀고나가려 하는 정부와 민주적인 통제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기업이다. 피해를 보는 것은 역할이 커진 국가와 기업의 이익에 밀려난 노동자, 서민의 이익일 경우가 많다.

갈등 자체를 부정적으로 보는 언론의 시각이 정치와 민주주의를 축소시키는 결과를 가져오기도 한다.
“‘계파’ 밥그릇 싸움에… 야당, 야단났다”(국민일보 9월 14일자) “새정연, 국감 팽개치고 ‘공천권’ 싸움에만 매달릴텐가”(동아일보 9월 14일자) “기업 구조조정·사업재편도 ‘국회 눈치’ 봐야하는 나라”(한국경제 9월 9일자)
이러한 기사들 속에는 공익을 위해 개혁하는 정부와 국가 경제를 살리는 기업이 등장하고, 그 반대편에는 자기 밥그릇 때문에 싸우면서 긁어 부스럼 만드는 국회와 노조가 있다. 샤츠슈나이더는 ‘가장 강력한 특수이익은 사적인 해결을 원한다’고 말했다. 기업은 정치권의 통제와 언론의 감시에서 벗어나기를 원하므로 자신들과 관련된 문제를 사회적 이슈가 아니라 회사 내부의 일로 축소시키려고 한다. 노동자들의 파업에 연대하는 시민을 외부세력으로 몰거나, 국정감사에 기업인을 소환하는 것을 권력남용이라고 비판하는 것도 이러한 시각의 연장선에 있다.
“노사합의 됐는데…외부세력 7000명 몰려 시위”(조선일보 2011년 7월 10일자-한진중공업 희망버스 관련 기사)
“‘망신 주고, 팔 비틀고, 민원하고’···국회권력에 신음하는 기업”(매일경제 9월 9일자)

하지만 대기업이 사회에 미치는 영향이 크고 사회적 자원의 투입을 받는다는 점에서 아무런 통제 없이 내버려둘 수는 없다. 기업의 잘못으로 인한 피해는 시민들에게 직접 돌아오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다수의 주요 언론이 기업의 입장에 이입하여 갈등을 부정적으로 묘사하고 민주적 절차를 통해 뽑은 의회를 혐오의 눈으로 바라보는 것은 언론 본연의 역할과 거리가 있어 보인다. 샤츠슈나이더는 <절반의 인민주권>의 결론에서 ‘갈등의 사회화’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갈등의 사적인 해결을 원하는 강자들에 맞서서 돈이나 권력이 없어 사적 해결이 불가능한 이들을 위해 갈등이 사회적으로 확장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예컨대 삼성이나 롯데의 경영권 승계 문제의 경우, 언론은 이를 기업가나 주주만의 문제로 축소시키는 것이 아니라 정치권과 여론의 견제를 받을 수 있도록 갈등을 사회화해야 한다. 이 갈등이 사회적으로 큰 영향을 미치는 이상 갈등을 사회적 이슈로 확장시키고 어떤 방향으로 흘러가는지 자세하게 보도할 필요가 있다.

갈등을 바라보는 시각을 통해 좋은 기사와 나쁜 기사를 구별할 수 있다.

갈등을 바라보는 시각을 통해 좋은 기사와 나쁜 기사를 구별할 수 있다.

 

좋은 정치기사가 갈등을 완화시킬 것
이 글의 첫 부분에서 언급했던 노동개혁을 조금 다른 시각으로 본 기사도 있다. “임금피크제 놓고 충돌하는 까닭”(시사IN 411호)
– 링크 http://www.sisainlive.com/news/articleView.html?idxno=23965)
이 기사는 노사와 여야가 왜 갈등해야만 하는지 자세하게 분석한다. 이 기사에는 자신의 이익만 추구하는 ‘갈등유발자들’은 나오지 않는다. 고령화로 흔들리는 한국의 노동시장과 임금체계 하에서 임금피크제라는 대응책이 나왔고, 그에 따른 기업과 노동자 각각의 입장을 서술한다. 또한 정부가 임금피크제를 관철시키기 위해 이끌어온 과정을 설명하면서 정책이 만들어지는 방식에 대해 독자에게 알려준다.

갈등을 부정적으로 보고 비난하는데 그치는 기사는 독자에게 정치에 대한 혐오와 분노, 피로감과 무관심을 가져다준다. 반면 갈등이 왜 일어났고 어떤 과정을 거쳐 시민에게 영향을 미치는지 잘 분석한 기사는 독자 스스로 판단하고 더욱 관심을 가지게 만든다. 상충되는 이익을 가진 사람들이 서로가 왜 그렇게 행동하는지 이해하게 하고 타협의 여지를 넓힌다. 좋지 않은 정치기사는 갈등이 사라져야할 것처럼 서술하지만 실제로는 사회적 갈등이 더욱 심화되도록 부추긴다. 좋은 정치기사란 갈등이 현실 속에서 사라질 수 없음을 인정하지만, 갈등에 우선순위를 부여하고 사회화함으로써 갈등을 관리하고 완화하는데 도움이 되는 기사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