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득세 연말정산 파동은 많은 시사점을 던져준다. 더 많은 복지, 더 많은 세금을 위해서는 납세자들의 동의와 지지 획득이 필수적이며, 이를 위해서는 정교하고 치밀한 전략의 설정과 로드맵의 구축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이 그 시사점 중 하나다.
대한민국은 건국 이래 '낮은 조세부담&저복지' 기조를 유지해왔다. 세금이 낮은 대신 당연히 복지의 수준도 낮았다. 그래도 시민들은 그럭저럭 살았다. 일부는 잘 살았다. 일자리가 넘쳐나고 소득도 빠르게 증가했으며 부동산 등의 자산도 천정부지로 가격이 치솟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일자리, 소득, 자산가치라는 삼요소가 지속적으로 우상향하는 한 복지의 필요는 적다. '낮은 조세부담&저복지'기조가 큰 문제 없이 돌아갈 수 있다는 말이다. 1997년 외환위기를 기점으로 이런 식의 선순환 모델은 파산했다. 좋은 일자리는 찾기 힘들고, 정년은 꿈이며, 일자리와 소득 양극화는 극심하고, 부동산 등의 자산가치는 하락하지 않으면 다행이다. '낮은 조세부담&저복지' 기조를 지탱하는 일자리, 소득, 자산가치의 삼두마차가 휘청거리는 지금 더 많은 세금과 더 많은 복지에 대한 본격적 논의는 불가피하다. 그렇지 않으면 사회통합과 지속이 의심되는 상황을 맞게 될 것이다.
하지만 소득세 연말정산 파동으로 입증됐듯이 증세와 복지에 관한 접근은 매우 정교하고 섬세하며 지혜로워야 한다. 일단 증세 관련해서는 다음과 같은 원칙에 입각하는 것이 어떨까 싶다.
1. 증세 이전 혹은 증세와 동시에 시장생태계 복원을 통한 복지수요의 최소화를 추진해야 한다.
복지국가의 주요한 개념적 징표 가운데 하나는 조세제도와 사회제도를 통한 '구매력 이전 정책' 혹은 '자원 및 가치의 재분배 정책'이다. 복지국가가 이러한 정책을 추진하는 이유는 무엇보다 자원 및 가치의 1차적 분배를 책임지고 있는 시장기구가 사회 구성원들이 인간다운 생활을 할 수 있는 만큼의 후생을 적절히 공급하는데 실패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 바꾸어 말하면 시장기구가 정상적으로 작동하고 시장생태계가 그 건강성을 회복한다면 국가의 개입을 통한 '가치 및 자원이 재분배', 즉 복지의 필요가 현저히 줄어든다는 뜻이다.
대한민국의 구석구석을 들여다보면 병들고 망가진 시장생태계가 일으키는 폐해가 이루 말할 수 없이 심대함을 알 수 있다. 기실 한국사회가 직면한 최대의 현안이라 할 양극화(자산양극화, 대기업과 중소기업간의 양극화, 정규직과 비정규직 간의 양극화, 제조업과 서비스업 간의 양극화 등)는 이 시장생태계의 파괴에서 기인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황폐해진 시장생태계를 관통하는 열쇳말은 특권과 반칙이다.
천문학적인 불로소득을 전유하면서 수다한 사회ㆍ경제적 문제를 일으키는 대토지 소유자들, 국가로부터 무한대의 특혜를 누리면서도 기본적 납세의무마저 해태하는 재벌총수들, 중소기업에 대한 지속적인 수탈을 자행해 중소기업의 정상적인 성장을 방해하고 이를 통해 양질의 일자리 창출기회를 박탈할 뿐 아니라 내수까지 위축시키는 재벌집단들, 출신 대학을 기준으로 고정불변의 사회적 신분을 정하고 이를 통해 과점적 지대(地代)를 수취하는 학벌지상주의자들과 그 추종자들이 시장생태계 교란의 주범이고 먹이사슬의 최상위에 위치한 포식자들이며 특권과 반칙의 달인들이다. 정치인, 관료, 주류언론, 검찰 등은 이들의 든든한 파트너이다.
이들이 전유하고 있는 특권과 반칙을 혁파해야 하며, 이들이 교란시키고 있는 시장생태계를 복원해야 한다. 그래야만 시장의 1차적 분배 기능이 정상화되고 복지수요가 현저히 줄어든다. 예를 들어 보유세 정상화, 토지공공임대제 등을 통해 부동산 문제를 해결하면 토지불로소득의 사유화로 인해 발생하는 문제들(자산양극화, 빈부격차 심화, 국가재정의 낭비와 왜곡, 산업구조의 후진화, 노사갈등의 격화, 고지가 등으로 인한 국가경쟁력의 약화 등)이 대거 해소될 뿐 아니라, 어지간한 구매력이 있는 사람들은 시장에서 주택을 구매하기가 용이해지기 때문에 굳이 임대주택을 요구하지 않게 되어 주거복지를 위한 유효한 정책수단이라 할 공공임대주택 수요가 크게 줄어든다.
또한 중소기업을 수탈하는 재벌집단을 단호히 징치해 공정한 거래가 가능하도록 제도를 구축한다면 소기업→중기업→중견기업→대기업으로의 성장이 지금보다 한결 용이해질 것이고, 이를 통한 양질의 일자리 창출 및 내수진작이 가능해질 것이다. 이는 실업급여 등에 대한 예산 지출을 상당히 경감시킬 것이다.
이처럼 시장기능의 회복 및 시장생태계의 복원은 시장임금을 높이는데 그치지 않고 복지수요를 줄이는 이중의 역할을 수행한다. 복지국가 건설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시장기능의 회복 및 시장생태계의 복원이 필요하다. 민주주의의 심화 및 확장, 실질적 법치주의의 확립이 시장생태계의 복원을 가능케 할 것이며, 강하고 유능하고 정의로운 국가가 이의 실행을 담보할 수 있을 것이다.
2. 불로소득부터 먼저 증세하자
시장생태계가 복원되면 복지수요는 크게 줄어들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증세의 필요성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증세는 필요하다. 다만 증세에도 우선순위가 있다. 불로소득부터 먼저 증세하는 것이 옳은 순서다. 증세를 함에 있어 무엇보다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각종 조세특혜 제도의 대대적인 개혁, 공평과세, 조세정의의 원칙이다. 즉 각종 조세 특혜를 누리고 탈세를 자행하면서도 아무 일 없이 건재한 무리들을 그냥 두고는 성실하게 세금을 납부하는 납세자들에게 증세를 설득할 길이 없다. 불로소득에 먼저 증세하고 근로소득에 대해 나중에 증세하는 것도 조세정의 차원에서 보면 지극히 정당한 조치이다. 이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을 것이다.
재벌 및 부자들에 대한 각종 감세 정책 철회 ⇒ 예산 낭비를 줄이고 탈세(특히 재벌총수 일가가 저지르는 각종 탈세)를 방지하며 각종 비과세 감면제도를 전면 개혁 ⇒ 금융종합소득에 대한 과세 개혁, 상장주식 양도차익에 대한 과세 도입, 부동산에서 발생하는 불로소득에 대한 증세 등 불로소득에 대한 대대적인 증세 추진 ⇒ 소득세 및 법인세, 부가가치세 등에 대한 증세 추진 |
대략 저런 순서의 조세개혁과 증세라면 납세자들의 극렬한 저항을 야기하지 않을 것이다. 정의롭고 합리적이며 점진적인 조세개혁이고 증세이기 때문이다. 명백한 것은 세금을 가렴주구로 인식하는 납세자들의 생각을 근본적으로 바꾸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 책임은 정당과 지식인과 언론에게 있다.
<출처 : 2014년 2월 4일자 허핑턴포스트(http://goo.gl/OmyZ15)>
이 태 경 / 토지정의시민연대 사무처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