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차인 울려온 ‘현대판 노예문서’ 강제 못한다 |
등록 : 2013.12.12 20:10 수정 : 2013.12.12 21:48
공정거래위원회가 ‘제소전 화해조서’를 강제로 요구할 수 없도록 함에 따라 상가 세입자들이 부당하게 쫓겨나는 사례가 줄어들 것으로 기대된다. 상가임대차보호법의 모순으로 한순간에 모든 것을 잃고 쫓겨나게 된 서울 강남구 신사동 가로수길 ‘리쌍건물’의 임차인 허윤수(오른쪽 둘째)씨가 지난 6월10일 오후 헌법재판소 정문 앞에서 법개정 요구와 항의의 뜻으로 지지자들과 함께 곱창을 굽고 있다. 류우종 기자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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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판 노예문서: 제소전 화해조서
1년 임대차 계약 만료뒤 무조건 점포 비우게 해와
공정위, 역·터미널·공항 내 상가 불공정 약관 시정
충북 청원의 한 대형마트에서 식당을 운영하던 ㄱ씨(39)는 최근 재계약 불가 통보를 받았다. ㄱ씨는 4년 전 집을 팔고 대출도 받아 보증금·권리금 등 2억여원을 마련해 장사를 시작했는데, 권리금도 못 받은 채 빚만 떠안고 쫓겨나게 됐지만 대형마트를 상대로 아무런 법적 조처도 취하지 못하고 있다. 임대차계약 당시 대형마트가 요구한 ‘제소전 화해조서’를 제출했기 때문이다.
‘제소전 화해’는 건물 주인(임대인)과 세입자(임차인) 사이에 분쟁이 생겼을 때 소송으로 가지 않고 조서 내용대로 화해하는 제도로, 법원의 확정판결과 같은 효력을 갖는다. 통상 계약이 끝나면 건물주의 요구대로 세입자가 점포를 무조건 비워줘야 한다는 의무조항을 담고 있어 ‘현대판 노예문서’로 불린다.
앞으로는 건물 주인이 이처럼 우월적 지위를 이용해 세입자의 정당한 권리를 제한하는 제소전 화해조서를 강제로 요구할 수 없게 된다. 공정거래위원회는 전국 16개 철도·고속버스터미널·공항 내 상가의 임대차계약서에서 건물 주인이 우월한 지위를 이용해 세입자의 권리를 침해하거나 제한한 14개 불공정 약관 조항에 대해 시정하도록 했다고 12일 발표했다. 약관 시정 대상은 서울메트로, 서울·대전·대구·광주 도시철도공사, 부산교통공사, 한국철도공사, 코레일유통, 인천국제공항공사, 한국공항공사, 서울고속버스터미널, 부산종합터미널, 대전고속버스터미널, 금호터미널, 동양고속, 한진 등이다.
공정위 조사 결과, 서울도시철도공사 등 9개 사업자는 계약체결 시 제소전 화해조서 제출을 의무적으로 강요하고, 이를 거부하면 계약을 해지하도록 정하거나 계약과 관련된 일체의 소송 제기를 금지한 불공정 약관을 운용했다. 공정위는 제소전 화해조서를 강요할 수 없도록 하고, 이 요구를 거부했다는 이유로 계약을 해지할 수 없도록 했다. 법무법인 세광의 오영중 변호사는 “제소전 화해조서에는 통상 1년 단위의 임대차 계약이 끝나면 세입자가 계약 종료일에 무조건 건물을 비우고 나가도록 되어 있어, 최장 5년까지 세입자의 계약갱신권을 보장한 상가임대차보호법을 사실상 무력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한다. 세입자로서는 소송을 통한 권리구제를 원천봉쇄하는 독소조항인 것을 알면서도 건물 주인의 요구에 응할 수밖에 없는 ‘갑을관계’의 대표적 사례”라고 지적했다.
민주당과 참여연대·민주노총·민변 등 사회단체, 전국을살리기비상대책위원회 등으로 구성된 ‘롯데횡포공동대책위’도 지난 9일 국회에서 롯데그룹과 간담회를 열어 ‘제소전 화해각서’ 금지를 포함한 갑을상생계약서 체결 등을 요구한 바 있다.
공정위는 또 건물 보전이나 개량에 들어가는 ‘필요비’와 ‘유익비’의 상환청구권과 부속물매수청구권을 포기하도록 강제한 약관 조항도 시정하도록 했다. 또 최고(독촉) 절차 없이 계약을 해지할 수 있도록 정하거나, 불분명한 사유로 계약을 해지할 수 있도록 한 부당한 계약해지 조항도 시정하도록 했다. 이와 함께 임대차 계약과 관련한 소송 제기 때 건물 주인 소재지의 법원을 관할법원으로 정한 조항, 계약 조항의 해석을 임대인의 결정에 따르도록 한 조항, 임대보증금과 임대료를 자동으로 증액하는 조항을 모두 시정하도록 했다.
공정위의 이유태 약관심사과장은 “시정조처의 직접 대상이 아닌 경우에도 동일한 내용의 불공정 약관은 약관법상 모두 무효”라고 이번 조처의 의미를 강조했다. 하지만 법조계에서는 사실상 강요에 의해 제소전 화해조서를 받고도 형식적으로는 합의에 의해 받은 것처럼 꾸미는 것을 원천봉쇄하려면 민사소송법을 개정해 ‘제소전 화해’제도 자체를 폐지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곽정수 선임기자 [email protec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