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문제연구소 2015-09-25 22:06:47



강제동원, 망각의 현장을 가다
일제 강제동원 현장을 조사하고
피해자의 인권회복을 위해 활동해온 사람들의 이야기

[프로젝트 소개]

"강제노동 피해를 비롯한
'역사의 전모'를 밝힐 것"

올 봄, 강제동원과 관련한 일본 전범기업 시설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는 것을 막기 위한 피해자와 시민단체의 노력들은 절반의 성공을 거뒀습니다. 등재를 막지는 못했지만, 유네스코는 등재 조건으로 강제노동 피해를 비롯한 '역사의 전모'를 밝힐 것을 요구했습니다.

일본이 유네스코의 재정을 부담하는 비중, 일본 정부가 십 수 년 전부터 치밀하게 준비했다는 점, 아베 정부가 외교력을 집중적으로 쏟아 부은 점, 일본정부가 강제동원 가해 사실을 공식적으로 명기한 적이 없었다는 점 등을 고려하면 일본으로서는 매우 불만족스러운 결과였습니다.

본정부가 '강제노동'이라는 단어를 온갖 해괴한 논리를 갖다 대며 부정하려 하지만, 마치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려는 모습으로만 비칠 뿐입니다. 오히려 이번 일은 일본 정부와 전범기업의 '강제노동' 문제가 국제적으로 부각되는 결과로 이어졌습니다.

저희는 유네스코 21개 회원국에게 일본 산업시설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적극적으로 홍보했습니다. 독일의 회의장 인근에서 열린 강제노동 전시회를 살펴본 회원국 관계자들은 "한국의 피해자와 시민단체가 왜 문제제기 하는지를 알게 되었다"고 평가했습니다.

"한국이 왜 문제제기
하는지 알게 되었다"

일본정부의 치밀한 준비에 비하면 강제동원 피해자를 비롯하여 한국과 일본의 시민단체가 너무 늦게 대응한 것이었지만 내용은 결코 부실하지 않았습니다. 이미 20여 년 전부터 피해자와 함께 한일시민들이 일본 각지에서 강제노동 실태를 조사하고 피해 구제 활동을 해온 경험과 역사가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피해자들의 증언을 기록하고, 관공서, 절, 기업 등의 문서고를 뒤지며, 폐허가 된 현장과 이름 없는 한국인의 무덤을 찾아 위령시설을 세우고, 유해를 발굴하는 한편, 일본 사법부를 상대로 소송을 벌여 피해자의 권리를 되찾기 위해 오랜 기간 노력해 왔습니다. 이 모든 것이 정부나 기업의 지원 없이 자신의 호주머니를 털어서 지속해온 것입니다.

"정부나 기업 지원 없이
호주머니 털어서 밝힌
강제노동 실태"

'일본산업시설'의 세계유산 등재 문제는 일단 정리가 되었지만 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계속되고 있습니다.

과연 일본정부가 유네스코의 권고에 따라 강제동원 피해 사실을 제대로 기록할 것인가? 아베정권은 또 무엇을 감추고, 무엇을 노리고 있는가? 오늘도 한국과 일본에서 관계자들의 고민과 회의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민족문제연구소는 이러한 피해자와 시민들의 '이야기들'을 수집하고 보전하고 교육하는 방법을 고민해왔습니다. 또한 진실과 정의, 평화와 인권을 위한 국제적인 연대 활동을 지속해 왔습니다. 이제는 그 활동을 좀 더 체계적으로 발전시켜 '기억의 전승과 연대의 허브' 역할을 할 '식민지역사박물관'(가)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과거를 기억하는 것은 현재를 살아가는 모든 이들이 똑같이 나눠 갖는 책임' 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 프로젝트는 일본 등 각지의 징용. 징병 강제동원 현장에서 활동하며 밝혀 온 성과와 현지에서 활동하고 있는 시민들의 이야기 를 전하기 위해 준비되었습니다.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이야기뿐만 아니라 역사의 진실을 쫓아 수십 년간 노력해 온 사람들 역시,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될 소중한 역사입니다.

그 '이야기들'이 사라지지 않고 오랫동안 사람들의 입을 통해 전승되고 기억되길 바랍니다.

[뉴스펀딩]1화. 세계유산 '군함도' 지옥섬의 조선인을 기억하라



[뉴스펀딩]2화. 바다에 갇힌 조선인의 영혼을 기억하라

한가위가 돌아왔습니다. 모든 가족들이 모여 먼저 저 세상으로 가신 이들을 추모하고 그 분들이 잠들어 계신 곳으로 성묘를 갈 것입니다.

그러나 명절이 찾아오면 가족이 더욱 그립거나 성묘를 가고 싶어도 찾아갈 묘소가 없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북녘에 고향을 둔 사람들과 외국인 노동자들이 먼저 생각납니다.

"한편 지금까지
한 번도 성묘를
할 수 없었던 분들도 있습니다"

강제동원 희생자의 유족이 바로 그들입니다. 강제동원 희생자의 유족들 가운데 고인의 유해를 받기는커녕 자신의 가족이 언제, 어디서 어떻게 돌아가셨는지조차 알지 못하는 분들도 많습니다.

일본군으로 끌려가 전쟁터에서 돌아가시거나 강제노동 끝에 희생된 분들의 대부분은 유해조차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온가족이 모여 차례를 지내고 성묘를 가는 명절이 돌아올 때마다 유족들은 억울하게 죽어 지금도 구천을 떠돌고 있을 자신의 가족이 더욱 그리울 것이고, 그 슬픔은 더욱 깊기만 할 것입니다.


▲ 조세이 탄광의 환기구 ⓒ 민족문제연구소



▲ 조세이 탄광의 환기구 ⓒ 민족문제연구소


2014년 3월 일본 야마구치(山口) 현 우베(宇部) 시 조세이(長生) 탄광 옛터.

아무도 찾는 사람 없는 쓸쓸한 바닷가에 파도만이 무심하게 밀려오고 있습니다. 바다 한 가운데에 불쑥 튀어나온 두 개의 콘크리트 기둥이 지나는 이들의 호기심을 자극합니다.

아무런 설명이 없다면 그냥 지나치기 쉬운 여느 바닷가 풍경이지만 이곳은 강제동원의 슬픈 역사가 깃들어 있는 비극의 현장입니다.

이 두 개의 기둥은 피야(pier)라고 불리는 해저탄광의 배기구입니다. 조세이 탄광은 1914년부터 석탄을 생산하기 시작한 해저탄광으로 전성기에는 탄광 안팎에서 약 1천 명이 일을 했고, 연간 약 16만 톤의 석탄을 캤다고 합니다.

"이 곳 조세이탄광은
조선 사람들이 많아
'조선탄광'이라 불렸습니다"

조선 사람들이 많았던 이유는 이 해저탄광이 무척 위험한 곳이었기 때문입니다.

해저탄광의 갱도의 경우 지표면과의 거리를 100m 이상 두어야 했지만 조세이 탄광은 25-30m에 불과했기 때문에 갱도를 뚫으면 뚫을수록 무너질 위험이 높은 곳이었습니다. 위험하다는 소문 때문에 일본인들은 이곳에서 일하기를 꺼렸고 그 대신 조선 사람들이 동원된 것입니다.

증언에 따르면 그때 갱도 위 바다를 지나는 배의 엔진 소리가 들릴 정도로 위험한 곳이었습니다. 조선에서 동원되어 온 사람들은 울타리가 쳐진 함바(집단합숙소)에서 자유롭게 다닐 수도 없었고 구타에 시달리며 강제노동을 당했습니다.



▲ 아버지의 위패를 들고 있는 전석호 할아버지 ⓒ 민족문제연구소


"1942년 2월 3일 아침,
사고가 일어났습니다"

당시 이곳 소학교 5학년에 다니던 전석호 할아버지가 당시의 기억을 생생하게 들려주셨습니다. 할아버지는 조세이 탄광에서 일하는 아버지와 함께 온 가족이 이곳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학교에 있는데 아침에 선생님이 아버지가 조세이 탄광에서 일하는 사람은 집으로 돌아가라고 해서 갔어. 가는 길에 봤더니 피야에서 물이 뿜어져 나오는 거야. 고래등에서 물이 나오는 것처럼 물을 뿜고 있었어. 탄광 입구에 갔더니 사람들이 아이고! 아이고! 하면서 울고 있는 거야."

전석호 할아버지의 부친 전성도(창씨명 마쓰모토 세이도)씨가 12시간 교대노동을 위해 바다 밑 탄광으로 들어간 뒤의 일입니다.

그 날 탄광으로 가는 아버지에게 보낸 인사가 마지막이 될 줄이야. 꿈에도 생각을 못했던 일입니다. 우리말과 일본말을 섞어가며 당시를 회상하는 할아버지 눈에 눈물이 맺힙니다.

갱도가 무너지고 나서 사흘 동안 피야에서는 물기둥과 거품이 솟아올랐습니다. 자신의 가족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던 사람들이 바닷가에서 사흘 밤낮을 애타게 울부짖었지만 회사는 탄광을 폐쇄해 버렸습니다. 갱도에 차오르는 물살을 뚫고 살아서 돌아온 사람은 단 두 명뿐.

183명의 노동자들이 차가운 바다에 그대로 잠들었습니다. 조선인 136명, 일본인 47명이 사고로부터 73년이 지난 지금까지 그 바다 밑에 갇혀 있는 것입니다.

사고가 나기 며칠 전부터 물이 샌다는 노동자들의 보고가 있었지만 회사는 이를 무시하고 노동을 강요했습니다. 노동자들은 두려움에 떨며 그 날 해저탄광으로 걸어들어간 것입니다. 유족들의 항의를 두려워 한 회사는 인근 절에 부탁하여 급하게 위패를 만들고 사고를 무마하려 했습니다.


▲ 희생자 위패 ⓒ 민족문제연구소

보상금을 받았다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전석호 할아버지의 가족은 보상금도 받지 못하고 사택에서도 쫓겨나 친구네 집 마구간에서 살아야 했습니다. 하루아침에 아버지를 잃고 마구간에서 살게 된 식민지 조선의 소년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할아버지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합니다. 일본이 패망한 후 회사는 문을 닫았고 조선 사람들이 탄광 마을을 떠나면서 희생자들의 억울한 영혼만이 바다 속에 남겨졌습니다.

"사고로부터 40년이 지난
1982년"

마을 주민들이 사고를 기리기 위해 '순난자(殉難者)의 비'를 세웠습니다. 그러나 그 비석에는 "영원히 잠들라, 평온히 잠들라, 탄광의 남자들이여"라는 말과 비를 세운 사람들 13명의 이름만이 새겨져 있을 뿐이었습니다.

가장 중요한 희생자에 대한 언급은 단 한 마디도 없었습니다. 조선 사람 136명이 이곳에 잠들어 있다는 사실도, 왜 이들이 식민지 조선에서 바다 건너 이곳까지 와서 일을 해야 했는지도, 위험한 바다 밑에서 가혹한 노동에 시달렸다는 사실에 대해서도 감추고 있었습니다.

순난자라는 말은 국가의 재난으로 순직한 이를 일컫는 말입니다. 이 경우 국가의 재난은 바로 전쟁을 말하며, 순직이라는 것은 자발적으로 목숨을 바쳤다는 뜻이니 이곳에 세워진 순난자의 비는 조세이 탄광 사고의 희생을 왜곡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역사의 진실을 밝히고자 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1991년 이 지역에서 재일조선인 지문날인 거부운동을 지원해 온 시민들이 중심이 되어 "조세탄광 수몰사고를 역사에 새기는 모임"을 만들어 순난자의 비가 감추려 하는 진실을 밝히기 위한 운동을 시작했습니다.

"모임에서는
다음의 세 가지 목표를
세웠습니다"

첫째, 일본의 사죄와 희생자 전원의 이름을 새긴 추도비 건립.
둘째, 사고의 진상을 밝혀 역사에 남기기 위한 증언·자료집 발행.
셋째, 사고가 난 조세이 탄광을 알려주는 피야의 보존입니다.

1970년대부터 조세이 탄광의 비극을 밝히기 위해 애써 온 야마구치 다케노부 전 대표가 중심이 되어 한국의 유족들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집단도항명부'의 이름과 희생자들의 창씨명을 대조하여 한국 유족이 살고 있다고 추정할 수 있는 호적상의 주소로 편지를 보냈습니다. 

이렇게 찾게 된 유족들이 모여 1992년 한국유족회가 만들어졌습니다. 모임은 1992년부터 지금까지 매년 한국의 유족들을 모시고 추도회를 열고 있습니다. 역사의 진실을 밝히기 위한 일본 시민들의 노력이 계속되고 있는 것입니다.

모임에는 또 하나의 과제가 남아있었습니다. 희생자의 이름을 기억하지도 않으며 역사인식도 결여된 '순난자의 비'를 대신할 제대로 된 추도비를 세우는 것입니다.

우베시의 협력을 얻어 추도비를 세우고자 했지만 강제동원 된 조선인들이 희생되었다고 분명하게 밝힌 추도비의 비문을 시 당국이 거부하여 결국은 시민들의 힘만으로 2013년 추도비를 세웠습니다. 추도비에는 희생된 조선 사람들 136명의 이름이 한 명, 한 명씩 모두 새겨져 있습니다.



▲ 시민들의 힘으로 만든 조세이 탄광 희생자 추도비. ⓒ 민족문제연구소


▲ 희생자들의 이름이 모두 새겨져 있다. ⓒ 민족문제연구소

추도비 뒤에 서 있는 안내판에는 식민지 조선에서 강제로 연행되어 강제노동에 시달리다 죽어간 아버지를 그리는 유족들의 마음을 담은 절절한 추도시가 적혀 있습니다.


바로 그 옆에는 과거의 역사를 마주하고 진실을 밝혀 평화로운 미래를 만들어 가고자 하는 일본 시민들의 진정한 마음이 담겨진 추모의 글이 희생자들의 넋을 위로하고 있습니다.



▲ 유족들의 추도시 ⓒ 민족문제연구소


▲ 조세이 탄광 수몰사고를 역사에 새기는 모임의 추도문 ⓒ 민족문제연구소

지금 일본 전국에서는 강제연행 추모비를 철거하라는 우익들의 공격이 날로 거세지고 있습니다. 역사의 진실을 밝히고자 수십 년 동안 분투를 거듭해 온 이 분들의 운동의 결실을 지켜내야 할 책임이 우리들에게도 있습니다.        


▲ 아버지가 잠들어 있는 바다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전석호 할아버지 ⓒ 민족문제연구소


전석호 할아버지가 바다 가운데 쓸쓸하게 서 있는 피야를 한참동안 말없이 바라보고 있습니다. 불편한 몸에도 바다를 향해 두 번 절을 올립니다. 술을 따르고 꽃 한 송이를 바다에 던지며 아버지를 부릅니다.

소학교 5학년 10살 소년은 이제는 여든 셋의 노인이 되었습니다. 소년 전석호가 아버지를 부르는 소리에 쓸쓸히 밀려오는 파도가 대답합니다. 아버지의 목소리가 파도 소리에 실려 들려오는 듯합니다.


"아버지! 내년에도 또 올게요."

글 | 김영환(민족문제연구소 대외협력팀장)